오렐리앵 1 창비세계문학 92
루이 아라공 지음, 이규현 옮김 / 창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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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 아라공이라고 하면 앙드레 브르통, 필리프 수포와 더불어 프랑스의 쉬르 레알리즘, 즉 초현실주의의 대표선수로 활약하다가 공산주의자로 변신하면서 초현실주의나 다다이즘과 결별한 시인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 책을 다 읽고 연표를 보니까 참 굴곡이 많은 삶을 살다가 간 작자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탄생부터 우여곡절이었다. 1897년 10월 3일에 태어났는데 11월 3일 날짜의 세례증명서를 발급받았고, 이는 일반인들에게 출생증명서와 같은 효력을 지니는 문서로 활용되지만 특별하게 이 아이의 세례증명서에는 부모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훗날 아라공 자신의 진술에 의하면 어머니는 마르그리뜨 투카스로 스물네 살이었으며 아버지는 1840년생, 그러니까 엄마보다 서른세 살이 더 많은 루이 앙드리외였단다. 제3공화국 시절의 대표적 공안검사로 1871년 리옹 코뮌 가담자들을 유혈 진압하는 등의 공을 세우는 등 잘 나가다가 1928년 선거에 지는 바람에 은퇴할 때까지 여러 번 하원의원을 지냈다고 한다. 사생아였지만 엄마가 아빠네 집의 하녀 같은 통속적인 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다. 나름대로 아빠도 어린 정부와 아이한테 정성을 쏟았지만 신분도 있고 사회적 눈치도 있고, 제도도 있고 뭐 복잡한 사정 때문에 호적에 올리지는 못한 거 같다. 아라공은 엄마를 누나로, 외할머니를 엄마로, 아빠를 대부로 알고 살았다는데 뭐 이런 거 안다고 배부른 거 아니니까 그만 하자.


  <오렐리앵>은 오랜만에 창비 세계문학 시리즈로 나와 책방에서 표지를 보자마자 반가워서 도서관에 구입 신청을 해 읽은 책이다. 1권이 서문 포함해 415쪽, 2권이 작가연보 포함 474쪽, 합해서 889쪽에 이르는 장편 연애소설이다. 연애소설이 뭐라고? 몇 번을 말했듯이 결국 연인이 갈라서야 끝장을 보는 이별소설. 그리하여 책 좀 읽은 독자들은 연애소설의 플롯을 대강 눈치챌 수 있는데, 아라공은 마치 오노레 드 발자크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결국 그거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이별해야 하는 운명의 주인공 오렐리앵과, 덩치 크고 잘 생기고 돈 많은 오렐리앵을 사랑하면서도 엉뚱하게 못생기고 땅딸막하고 돈도 없는 어린 시인한테만 같은 침대를 허락한 후 사랑하지 않는 외팔이 남편에게 돌아가는 베레니스를 둘러싼 1920년대 초반 파리의 다양 다종한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어리광쟁이들을 겁나게 섬세하고 상세하고 세밀하고 그래서 짜증날 정도로 섬세하게, 상세하게, 세밀하게 그렸다. 1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한 루이 아라공이 이 책을 쓴 시기가 2차 세계대전에까지 참전했다가 1940년 초여름에 프랑스 비시 정권이 독일에게 항복하는 바람에 소집 해제가 된 직후였다. 괴뢰 정부가 항복한 거지, 내가 항복한 거냐? 라고 주장하면서 아내 엘자와 함께 “지적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한다는데, 지적intellectual 레지스탕스가 뭐야? 아라공은 <오렐리앵>의 에필로그에서, <오엘리앵>은 프랑스가 해방된 1944년에 발간했으며(에필로그는 원래 붙어 있지 않은 것을 발간 직전에 프랑스 공산당이 레지스탕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로 결의한 이후에 써서 첨가한 것인데), 이 에필로그에서 사회변혁은 무장폭력에 의하여 가능하다고 주인공의 입을 빌어 웅변하고 있건만, 도대체 “지적 레지스탕스”가 뭐냔 말이지. 뭐 그건 그거고, 다시 책 이야기를 하자면, 이 책 두 권을 내가 희망도서 신청을 했기 때문에, 안 읽으면 시민 혈세로 구입한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한 글자도 빼지 않고 다 읽었지, 내가 내 돈 주고 산 거라면 얼마 읽지 않아 방바닥에 휙 던져버렸거나, 헌책방에 내다 팔아 빵 사먹었을 거 같다. 빵 아니고 쐬주라고? 두 권 팔면 완전 새 거니까 한 5천원 안 주나? 집 앞 홈플러스 가서 쐬주 5천원어치, 세 병 사와 앉은 자리에서 꼴랑 다 마셔버리면, 죽는다, 죽어. 나도 죽기는 싫어서 빵 사먹었을 거 같다.

  1921년말, 우리의 오렐리앵 뢰르띠유아가 여주인공 베레니스를 처음 본다. 보자마자 처음 들었던 생각이, 못 생겼군, 이었다. 옷감에 일가견이 있는 청년 백수이자 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이며 예비역 중위인 오렐리앵이라면 전혀 감안해보지도 않았을 옷감으로 지은 드레스 위에 윤기 없고 지저분한 머리칼이 부스스한 베레니스에게 오직 하나 고상한 것은 동방의 공주를 연상시키는 “베레니스”라는 이름 하나였다. 오렐리앵에 관하여 말씀드리자면, 1911년에 장교로 입대를 해서 3년 복무 끝에 제대 요건을 갖춘 1914년 여름, 하필이면 큰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별의 별 전투에 다 참전하다가 동방군의 일원으로 테살로니키에 갔다가 총알이나 파편에 맞는 대신 말라리아에 걸려 프랑스로 복귀해 결국 제대에 성공한 인물이다. 무려 8년 동안 장교로 복무한 결과 제대로 사랑을 해보지도 않은 건 당연하고, 심성마저 성실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도움을 받지 못해 전사하는 데도 실패한, 서른두 살의 다 큰 아이였다. 온전히 자기 자신을 존중하지도 못하고 어른으로 생각할 수도 없었는데, 이건 다 전쟁을 극복하지 못해서 생활의 리듬을 되찾는데 실패했기 때문인 것처럼 보였다. 외모는 출중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고 한참 뒤에야 깨닫는 듯한 둔한 머리로 살아가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백수.

  사이가 아주 나빴지만 끝까지 헤어지지는 않은 돈 깨나 있는 부모가 어느 날 날을 잡아 한꺼번에 사고로 세상을 접는 바람에 시집간 누나 아르망딘 드브레스뜨는 아버지가 운영하고 있던 공장을 물려받고, 오렐리앵 뢰르띠유아는 유능한 소작인들이 경작하고 있는 생주네의 토지를 차지한다. 이렇게 해서 오렐리앵은 파리 생루이 섬의 방 두 개짜리 아파트와 5마력을 내는 작은 승용차, 3천 프랑의 연금을 확보하고, 남은 인생을 오직 이 연금의 범위 안에서 소비하며 끝내 백수의 위신을 지킬 것임을 굳게 맹세한다. 밤이면 밤마다 요즘말로 클럽에 가서 술 마시고, 춤추고, 젊은 시인, 기자, 화가 얼치기들과 쓸데없는 잡담으로 소일하는데 전력을 다 한다. 오렐리앵 뢰르띠유아의 허랑방탕이 얼마나 지겹게, 유치하게, 눈꼴 시게 계속되는지 나는 막 미칠 거 같았다. 아오, 평균보다 큰 키, 미간이 이어질 정도로 두껍고 검은 눈썹에 큰 이목구비와 근사한 콧수염이면 다냐고. 나는 이렇게 노동할 필요 없는 돈지랄 전공자들”만” 나오는 소설을 정말 싫어하거든.

  이이의 군대 친구 가운데 군의관 보조였던 에드몽 바르뱅딴이 있다. 사기꾼이고 바람둥이. 그 시절 (쁘띠)부르주아들이 다 그랬듯이 혼외정사 전문가라서, 제대 후 택시업계와 부동산 업계의 거물 께넬 씨의 정부 까를로따를 께넬 씨가 쓰는 침대 위에서 만나다가 결국 께넬 씨의 딸 블량셰뜨도 자빠뜨려 께넬 영감의 사위 신분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인물이다. 전쟁 중에 께넬 씨가 죽자 에드몽은 대박이 나버렸다. 택시는 물론이고 부동산에 이어 각종 사업을 이어받아 진짜 부르주아 계급으로 티고 올라갔다. 그래도 알량하긴 하지만 고정수입이 있는 오렐리앵과의 유대는 끊어버리지 않았다. 에드몽의 고향이 남쪽 R시. 여기 그의 사촌이 있어 두 주 정도를 기약하고 파리를 방문했고, 당시에 여성 고객 혼자라면 호텔에서 받아주지도 않던 시절이라 사촌 베레니스는 에드몽의 집에서 머물렀으며, 이렇게 해서 자연스레 오렐리앵의 눈에 베레니스가 들어왔지만 첫 눈에 든 생각이 “못 생겼다.” 였다는 것.

  그런데 그건 처음에 그랬다는 말이고, 작품을 읽어나가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오렐리앵이 베레니스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고, 좋은 감정은 어, 이거 사랑이야? 라는 생각도 들다가,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사랑을 하고 있다고 오해하는 남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손목 한 번 잡아봤으면, 으로 진행하게 되며 모든 것이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은 그에게는 베레니스의 손목이나 허리가 아니라, 오렐리앵의 집에 들른 베레니스가 실수해서 깨뜨린 데스마스크, “센 강에서 자살해 시체 공시소에 있던 여인의 얼굴을 석회로 뜬 데스마스크”를 보상하기 위하여 멀쩡하게 살아있는 베레디스의 데스마스크를 얻게 되며, 척 보니까 덜 떨어졌지만 입만 까진 화가가 그린 베레디스의 초상화를, 연금 3천 프랑의 수입밖에 안 되는 주제에 한 방에 5천 프랑을 주고 구입하는 등, 단박에 베레디스한테 훅, 가버리게 된다. 그래, 그게 사랑이지. 이때부터 오렐리앵은 미치기 시작한다. 아마 첫사랑인 듯. 다들 해보셨지, 첫사랑? 2권에 가서 베레디스가 오렐리앵을 떠난 후에, 20년이 흐른 다음에도 완전히 정리가 되지 않은 흉터로 남은 상태를 루이 아라공이 잘 표현하고 있는 바, 딱 그거 하나가 이 책을 읽고 얻을 수 있는 거라고 하면, 내가 너무 야박할 듯. 하여간 뭐 그렇다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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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8-18 06:5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예정 삽질 :
화요일,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 5>
목요일, 세르게이 도블라토프 <우리들의>
금요일, 마르그리뜨 뒤라스 <평온한 삶>

잠자냥 2023-08-18 09:05   좋아요 2 | URL
삽 좀 제공해드리고 싶습니다만. ㅋㅋㅋㅋㅋ

Falstaff 2023-08-18 10:27   좋아요 1 | URL
그냥 주시면 됩니다. 얼른 받겠습니다. ㅋㅋㅋ

stella.K 2023-08-18 1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캬~ 국민의 혈세를 생각해서 끝까지 읽으시는 그 성실함 존경합니다. 저도 요즘 저에겐 재미드럽게 없는 옥타비어 버틀러의 소설을 읽고있는데 옛날 같으면 던져버렸을텐데 문트님 생각해서 그냥 끝까지 읽어보려고요. 제가 그동안 하도 불성실하게 읽어서요.ㅋ
책이 오렌지색이고 예쁘게 생겼는데 말입죠. 음ᆢ

Falstaff 2023-08-18 15:57   좋아요 1 | URL
ㅋㅋㅋ 보통이지요 뭘.
그건 그거고.... 버틀러, 재미 읎나요? 다음 번 읽으려고 골라놨는데 생각해봐야겠군요.
고맙습니다!
 
마라 / 사드 박준용 번역 희곡선
페터 바이스 지음, 박준용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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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여태 페터 바이스가 유대계 독일인, 동독, 즉 독일 민주공화국 사람인 줄 알았다. 그의 작품은 <저항의 미학>, <소송: 새로운 소송>, 그리고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이렇게 셋을 읽었는데도. 어디쯤에서 기억이 헝클어졌거나 없는 사실을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을 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다. 뭐든지 확신하면 안 되는 거.

  <마라/사드>의 원래 제목은 <사드 후작의 연출로 샤랑통 수용소의 연극단에 의해 상연된 장 폴 마라의 박해와 살해>로 페터 바이스가 브레히트한테 자극을 받아 쓴 작품이며, 세계 극작계에 페터 바이스라는 이름을 각인시킨 대표작이라고, 책의 뒷 해설이 아니라 네이버 지식백과에 나와 있다.

  나는 항상 이 작품의 주인공인 마라하고 당통을 헷갈리는데, 혁명 당시 같은 산악파로 거대한 체구의 당통이 비교적 온건한 정책을 주장한 반면, 오랜 도피생활로 얻은 피부병 때문에 늘 빌빌거리면서 목욕요법에 기대야 했던 마라가 강경파였던 걸로 알고 있는 바, 이게 수시로 마라가 당통인지, 당통이 마란지 왔다갔다 한다는 말씀(화가 다비드의 그림 제목이 <마라의 죽음>인지 <당통의 죽음>인지 헷갈리는 게 핵심이다). 둘이 피 터지게 다투는 와중에 매사 너무 진지했던 먹물 로베스피에르가 집권을 하다 곧바로 기요틴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유명한 공포정치의 막이 내리는 거의 동시에, 소령 부오나파르테 나폴레옹이 나타나,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중국인이 번다고, 황제의 관까지 직접 쓰는 일이 벌어지게 만든 것이 프랑스 혁명이지 아마? 물론 말은 이렇게 한다고 내가 프랑스 혁명을 우습게 아는 건 절대로, 절대로 아니다. 말을 조금 재미있게 하자는 것이었지, 인권과 평등을 주창한 혁명 정신을 어떻게 폄하하겠는가?

  마라와 당통, 로베스피에르가 활약하던 1790년대 초반에도 사회주의 사상이 있었을까 궁금하다. 이 책 <마라/사드>를 읽어보면 특히 마라의 생각으로 분명하게 사회주의 사상이 드러난다. 원시적인 사상은 있었겠지만 작중 마라의 주장이, 공산주의자인 극작가 페터 바이스의 생각인지 아니면 바이스가 마라의 저작이나 남긴 기록을 검토하여 발췌해 사용한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뭐 아무려면 어떤가. 독자야 읽으면 그뿐인 것을. 극 중에서 마라는 완벽한 혁명가로, 혁명을 통해 세상을 바꾸어 버리려고 하는 반면에, 사드는 원래 그의 성향대로 허무주의자 또는 허망ist, 현실과 이의 개선을 근본부터 우습게 여기는 인간이다.

  마라와 사드가 만난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드 역시 혁명 후에 국민회의 대표도 하고 법관으로 잠깐 활동한 전력이 있으니까. 지금 독후감을 쓰기 위해 역자 해설을 슬쩍 뒤져보니까, 직접 만난 적은 없었다고 한다.

  하여튼 작품은 긴 원래 제목에서 보듯이, 중죄인이나 정신이상자를 모아 놓은 샤랑통 수용소에서 본인이 극작가이기도 했던 사드가 희곡을 쓰고,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이 연극단을 만들어, 사드가 직접 연출을 해 공연을 한다는 내용이다. 다만 사드의 극작품 말고, 연극을 공연한 광경을 다시 재현한 희곡이라서, 정신병원 원장 콜미에가 연극에 개입해 특정 내용은 무대에 올리면 안 될 것이라고 참견하기도 하고, 이에 사드는 모른 척 픽, 헛웃음을 흘리기도 한다. 연극은 1808년에 막이 올랐다고 설정이 되어 있어서 진짜로 마라가 샤를로테 코르데의 칼에 맞아 죽고 15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이다.

  내용이야 다들 아실 터이니 구체적인 건 생략하기로 한다. 마라를 세 번 찾아간 코르데가 드디어 목욕중인 그를 만나서 다비드의 그림처럼 칼로 폭, 가슴을 찔러 죽인 사건을 다루었다. 그러나 바이스의 진짜 목적은 마라의 혁명 정신과 사드의 허무주의를 비교하는 것이었을 터이다. 여기에서 하나 의문이 들었으니 조금 인용해보자. 본문 75쪽이다.


​  우리는 배부른 지배 계급을 뒤집어엎어

  그들의 무기를 빼앗고

  많은 자들을 내몰았소.

  이제 그들의 자리에 대신 들어앉은 것은

  우리와 함께 횃불과 깃발을 들었던 자들이지만

  옛날이 좋았다고 믿고 있소.

  이제 모든 게 밝혀졌소.

  우리가 혁명을 위해 흘린 피를

  장사꾼과 상점 주인들이 챙긴 것이오.

  부르주아 계급

  그들은 새 지배자가 되었고

  우리는 다시

  그 발밑에 놓였을 뿐

  아무것도 얻은 게 없소.


​  말은 똑바로 하자. 혁명으로 인민/시민이 얻은 것을 장사꾼과 상점주인으로 대표하는 부르주아들이 가지고 간 것이 맞나? 혁명의 와중에 기회를 얻어 새롭게 장사꾼과 상점주인이 되고, 이 가운데 절호의 찬스를 제대로 살린 몇 명이 새로운 부르주아 계급으로 편입된 것이 아니고? 물론 마라의 주장도 틀리지 않았을 것이지만, 내 생각도 그리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에드몽 당테스가 저 절해고도 외로운 섬 위의 끔찍한 감옥에서 죽어가는 빵 동료 한 명을 잘 만나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된 것처럼 말이지. 아니면 저 조지아 촌놈 아오시프 주가시빌리가 존경해마지않는 선배님 레닌이 죽자 한 방에 권력을 쥐고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부르주아 중의 부르주아 스탈린이 된 것 마냥? 뭐 그런 거다.

  프랑스 역사에서도 마찬가지. 프랑스의 진골 귀족은 샤를마뉴 대제 시절에 동네 양아치였다가 대제와 함께 전쟁터에 나가 큰 공을 세운 건달들이었다. 이 사람들을 맨입으로 보낼 수 없으니 대제가 땅을 떼 주고 귀족 칭호를 준 것이 시작이다. 그러다가 앙리 4세 시절에 한 번 크게 회오리가 쳐서, 샤를마뉴 대제 시절의 귀족들 가운데 태반의 가문이 멸족을 당했지만 새롭게 앙리 4세를 도운 논두렁 건달들이 다시 땅을 얻어 귀족 작위를 얻고, 이들이 진짜 귀족 행세를 한다. 세월이 흘러 부오나파르테 황제가 전투에서 이길 때마다 말로만 그냥 백작이니 남작이니 해서 또 대량으로 귀족 부르주아가 생긴 거하고, 뭐가 다른 디? 그렇게 역사의 변곡마다 귀족 또는 부르주아 계급이 새롭게 갈리는 것이 이상혀? 진짜로 그려?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그렇게 어려운 근본 원인이 거의 누구나 속으로는 귀족, 부르주아를 하고 싶어 하면서도 그걸 타도하자고 주장하는 거라는 우습고도 명백한 사실을, ahime, 나도 모른 척하고 싶다.


​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내 생각이 맞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상대는 세계적인 지성을 갖고 있다고 내가 믿는 페터 바이스다. 그의 역작 <저항의 미학>을 읽어보면 얼마나 대단한 지식인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마당에 내가 함부로 바이스의 의견에 대고 뭐라 깝죽댈 수 있냐 말입니다. 그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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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작가선 3
서정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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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인. 이름만 소리내 읽어도 참. 옛 생각 나는 작가다. 학창시절 이 양반의 단편 속에 푹 빠져 산 적이 있다. 당연히 단편집 《강》. 그리고 십여 년 후 민음사에서 낸 세 권짜리 장편소설 <달궁>. <달궁>은 한 서너 번 읽은 거 같다. 하도 애정이 깊어져서 그랬던 것이 분명한데, 한 권은 넘어진 소주 병에서 흘러나온 알코올과 돼지고기 김치찌개 국물에 푹 적셔졌고, 그걸 아무 생각 없이 양지바른 베란다에 널어놓았더니 너무 바싹 말라 책 한 가운데가 쩍 갈라졌다.
  이이는 글도 무척 오래 쓴다. 오랜만에 읽는 중단편집이다. 마지막 작품 <뜬봉샘>이 2017년 발표한 것이니 이이의 나이 여든한 살이었다. 30년대 생 작가 거의 대부분이 이젠 여유작작한 은퇴생활을 하던지, 돈 좀 손에 쥔 이들은 자기 이름을 댄 문학관을 짓고 사숙을 받던지, 아니면 집구석이나 양로원 또는 요양원에서 영원의 쉼을 기다리던지 하는 것에 비하면 노익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서정인은 1962년에 『사상계』에 <후송>을 발표해 등단했다. 이 책 《귤》에서도 제일 앞에 실은 작품이다. 도대체 뭐 하나 정상적인 절차와 이유로 진행되는 법이 없었던 전후 우리나라 사회의 어긋난 톱니바퀴를 다룬 병영문학이다. 한 시절을 풍미한 수준을 넘어 신춘문예에서 크게 유행을 했던 장르가 병영 소설이었는데, 서정인의 것이 다른 작가들과 다른 건, 주인공이 사병이 아니라 장교라는 점이다. 장교라고 하더라도 도무지 뜻대로 되는 일이 없던 것은 사병과 마찬가지인 것이 첫째요, 주인공 성 중위의 병증이 이비인후과 질환인 심한 이명이라 그것이 얼마나 크게 들리는지, 얼마나 자주 들리는지, 어떤 음높이로 공명을 하는지 당시 의학 장비로는 도무지 측정할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 둘째 걸림돌이었다. 하여간 성 중위가 후송을 가기는 가는데, 서울이 아니고 저 멀고 먼 부산에 있는 육군병원으로 가게 되며, 야전 병원에서 상급 야전병원, 상급에서 차 상급 병원을 거쳐 육군병원으로 갈 때마다 짜증나게 똑 같은 거부 혹은 곤란함을 받아야 했다.
  당시엔 다 그랬다. 나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이, 동회, 요즘말로 주민센터에 가서 주민등록 등본 한 장 떼러 가는 길에도, 할아버지는 내게 백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주시면서(작은 돈 아니다. 서울에서 괜찮은 집 한 채에 백만원 할 당시였다) 창구에 있는 주민등록 담당 공무원에게,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게 건네라고 이야기를 하시고는 했다. 당시엔 청사진으로 복사를 하던 60년대 후반이었는데, 그러지 않으면 그깟 주민등록 한 장 떼는데 하루는 기본이고 이틀, 사흘, 심하면 나흘, 닷새도 걸렸다. 책에 실린 <어느 날>의 경우가 이와 비슷하다. 1974년 작품인데도 직장인 김해동은 전셋집을 얻기 위해 은행에서 ‘생활안정기금’을 융자받아야 해서 본인의 주민등록 초본을 발부 받아야 했고, 이를 위하여 전입신고를 해야 했지만, 초등학생이었던 내 경우엔 이미 수차례 경험을 해본 “급행료”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그저 정해진 경로를 따라 전출신고, 전입신고와 이에 부속하는 각종 관련인, 예를 들어 통반장의 확인 인장 같은 것들을 꼬박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복잡다단한 우리나라 행정절차에서 의례 그랬듯이 김해동 선생이 아무리 신경써서 서류를 챙겼다 하더라도 꼭 한두 개씩은 빠진 것이 있는지라, 동회 전입관련 공무원은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한 사나흘 후에 다시 한 번 와 보슈.” 오라는 것도 아니고 와 보라는 거다. 될지 안 될지는 본인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때 가서도 빠진 서류나 인감 같은 것을 또 발견하면 다시 일 주일 정도 있다가, 왜 일 주일 씩인가 하면, 일단 관에 접수시킨 서류는 이미 공문서이니 신청자 개인이 관의 문서를 가져가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관공서에서 관공서로 우편을 보내 저짝 관공서에 접수를 시키고, 저짝 관공서에서 처리를 한 후, 이짝 관공서로 보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읽는 것만 가지고도 열이 뿔뿔 날 것이란 점은 이해를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잘 살았다. 적어도 행복지수라는 것이 있으면 지금보다는 높았을 듯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렇게 가진 거 없이 매사 불편하게 살면서도 시집, 장가 들어 딸 아들 관계없이 생기는 대로 낳고 살지 않았는가 말이지.
  이렇게 초기 서정인은 현실 속 삶의 이야기, 즉 리얼리즘 적 시각으로 무장한 인텔리겐치아 화법으로 눈에 보이는 족족, 물론 큰 이야기, 큰 비리나 잘못 같은 건 말고, 현상에 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이게 내가 서른 살까지 알았던 서정인이다. 즉 단편집 《강》을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역과 직장 생활 덕택에 오랜 세월 책과 가까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지런하지 않은 나는 그냥 그렇게 살았다. 세월을 죽였고, 알코올 속으로 숨었고, 좀 더 시간이 지나 결혼을 하고 아예 소도시로 박혀버렸다. 산 좋고 물 좋은 작은 도시의 작은 책방에서 눈에 띄었던 책이 저 위에서 말한 <달궁>이었다.
  <달궁>에서 나는 완전히 다른 서정인을 발견했다.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럴 정도로 크게 변모할 수 있었는지 깜짝 놀랄 수밖에. 현실 비판적 리얼리스트 고뇌형 먹물이 이젠 상당히 앞선 포스트 모더니스트가 되어 있었던 거였다. 물론 서울대 불문과 출신 두 명의 모더니스트 최수철의 <고래뱃속에서>와 이인성의 <낯선 시간 속으로>가 이미 책방 서가에 꽂혀 있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서정인이 <달궁> 같은 것을 쓸 줄은 몰랐었다. 물론 불문과 두 사람하고 영문과 서정인이 같지는 않다. 그냥 쇼크 먹었다, 하는 걸 이야기하려 했는데 좀 오버한 거 같다. 양해하시라. 아마추어 뻘짓이 다 그렇지 뭐.
  다시 이 책 《귤》으로 돌아와 보면, 서정인의 대표작을 골라 실은 것 같은데, 물론 대표 단편집 《강》의 타이틀 작품을 실을 수 없으니 그건 제외하고, 1977년에 발표한 <춘분> 다음에 실린 것이 1991년 발표작인 <해바라기>였다. 그러니 이 책을 기준으로 보면 서정인이 언제 모더니즘으로 바뀌었는지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다는 말씀. 처음에는 1978년부터 1990년까지, 유신 말기와 미친 공화국의 말도 안 되는 독재 시절에 이이가 침묵했을 수도 있다는 허무맹랑한 생각까지 했다니까! 작가가 작품을 쓰지 않는 것도 이게 쉬운 일이 아니거늘, 혹시 저 남산이나 남영동, 아니면 이문동에 한 번 다녀온 거 아닐까 싶기도 했었으니, 그 시절을 어떻게 살아냈는지 몰라.
  1991년 작품인 <해바라기>는 광주 옆의 나주 시청 점거 사건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체포영장이나 비슷한 종이 쪼가리 하나 없이 모처에 감금되어 몇 날 며칠을 물먹고, 전기 먹고, 두드려 맞은 기록이다. 내용이야 우울해 마지않고 절망적이며, 시대의 아픔이 새록새록하건만, 서정인은 이 모든 과정을 남도 사투리를 써가며, 사투리를 세상에 이렇게 백퍼센트 알뜰한 맛소금처럼 아낌없이 뿌려대며, 전라도 것 아니면 흉내도 내기 어려운, 하지만 경기지역을 뺀 강원, 충청, 경상, 제주, 각 지방마다 똑 같은 주장들을 하고 있기는 해도, 하여간 어렵고 어려웠던 시기의 우울한 이야기를 애써서 스스럼없이 써내려 갔다.

  그래도 내가 제일 공감하면서 읽은 작품을 고르라면 표제작인 <귤>이었다. 주인공 인우는 오래 전 고향을 떠나올 때 하도 집구석이 곤궁하여 자기 한 몸만 대처로 나갈 수 없어 당숙 아저씨한테 장리빚으로 쌀 열 섬을 얻어 일단 부모와 누나한테 배나 곯지 말라고 했었는데, 장리 빚이면 연 50% 이자가 붙나? 빚을 썼으면 얼른 갚아야 하건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아 5년이 지나 돈이 좀 생겨 이제 고향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인우는 오자마자 백화수복을 한 병 사 들고, 제일 먼저 뺀찌로 이마빡을 쥐어 뜯어도 피 한 방울 흐를 것 같지 않은 당숙에게 찾아가 여차저차 했으니 5년이면 갚아야 할 쌀 섬이 일흔다섯 섬이지만 3부만 쳐서 서른일곱 섬만 받으라고 제의를 한다. 그동안 인우의 부모는 다 돌아가고, 인우는 부모 운명은커녕 탈상치례로 하지 못해 죄가 많은데, 당숙은, 그 빚은 절름발이 이발사에게 시집을 간 누나가 다 갚았으니 일 없다고 한다. 인우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부모 돌아간 거야 어쩔 수 없으나, 절름발이 이발사가 돈을 벌면 얼마나 번다고 처자식 먹여 살리고, 처가에서 빚진 쌀 섬까지 모두 갚았다고 생각하니 그래도 1970년대의 사나이라고 속이 무너지지 않았겠느냐는 말이지. 이런 상태에서 당숙의 둘째 아들, 동네에선 망나니라 소문이 났지만 그래도 재종 형제들하고는 은근한 정이 없지 않았던 동석과 작은 읍내에서 우연히 만났고, 그러나 당숙네와 관계한 서운함은 기어이 주먹다짐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는데, 더 이상 말을 보태는 것은 과해도 너무 과한 스포일러라서, 안 알려줌.


  재미있다. “재미있다”는 말로 부족하다. 좋은 책이다. 한 시절을 풍미했던 장인의 빼어난 작품들만 골라 한 권을 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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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8-15 1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름만 아는 작가의 책 이야기 즐겁게 읽었습니다.

Falstaff 2023-08-15 10:40   좋아요 1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빛의 영역 마르코폴로의 도서관
쓰시마 유코 지음, 서지은 옮김 / 마르코폴로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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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시마 유코라고 하면 8년 전이었던 2015년 이이의 장편 소설 <불의 산>을 참 재미있게, 흥미롭게 읽은 것이 워낙 기억에 남은 작가다. 그리하여 단박에 다른 작품 <웃는 늑대>까지 내달렸지만 아쉽게도 전작보다는 감흥이 덜 해 이후 좀 뜸했던 작가다. 그저 <불의 산>의 강렬한 느낌만 간직한 채 세월은 흘렀다. 올해 이이가 신인시절에 쓴 연작 장편 <빛의 영역>을 번역 출간했다는 소식을 우연히 들었다가, 동네 도서관 개가실에 들렀더니 신규 구입 도서 테이블에 놓여 있기에 주저하지 않고 빌려 읽었다.

  이이의 생부가 본명, 쓰시마 슈지, 유코가 첫 돌을 지나자마자 유곽의 호스티스와 함께 동반자살에 성공한 <인간실격>의 저자 다자이 오사무라는 건 세상이 다 아는 것이니 살을 붙여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터. 돌 때 죽은 아버지라는 건 사실 아무 의미도 없다. 쓰시마 유코가 평생 다자이 오사무라는 작자에 대한 뒷이야기를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 말고는. 그래 홀어멈이 된 엄마하고 둘이서 열심히 살다가 유코 역시 작가가 되어 서른두 살 때 연작소설 <빛의 영역>을 발표해 노마문예 신인상을 받는다. 새삼스레 쓰시마 유코의 살아온 행복하지 않은 내력을 소개하기가 좀 거시기하지만, 이이의 작품과 비교하기 위하여 중요한 것만 간추려보면, 스물다섯 살이던 1972년에 결혼을 하고, 딸을 출산하지만 곧바로 이혼을 한다. 그래서 미운 다섯 살의 딸 하나를 키우며 이혼에 성공해 홀어멈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작품이 오늘 독후감을 쓰는 <빛의 영역>이고, 쓰시마 엄마의 경우, 여덟 살에 다운 증후군에 죽는 가족에 관한 이야기가 <웃는 늑대>다. <빛의 영역>은 1979년, <웃는 늑대>는 2000년에 일본에서 문학상을 받는다. 어차피 집구석에서 작가가 한 명 나오면 그 집안은 거덜이 나는 거니까.


  책 뒤편엔 일본인 카와무라 미나토의 해설이 붙어 있다. 같은 글에서 카와무라는 해설을 “빛, 소리, 꿈” 이렇게 세 가지 측면에서 관찰하고 서술한다. 길어봐야 2백쪽도 되지 않는 작은 소설이지만 명색이 훗날 일본을 대표할 작가 가운데 한 명이 될 인물이 신인상을 받은 연작소설이라서 이런 거창한 제목의 해설을 쓰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거 참, 꿈보다 해몽이다. 작품에서 쓰시마가 빛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소리에 관해서는 생각보다 덜 묘사하고, 꿈은 현대 소설가치고는 과하게 많이 등장시킨다. 과장 좀 하자면 꿈 꾸는, 꿈 속 장면이 한 열 페이지 될까 싶다. 이런 거 말고 해설의 핀트를 1970년대 중후반의 일본에서 아이 딸린 홀어멈이 꿋꿋하게 홀로 서는 과정, 즉 페미니즘 적으로 접근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물론 이 책이 투쟁적 페미니즘 작품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도 세계적으로 여성 인권이 향상되지 않은 최악의 나라 가운데 하나로 “매년” 지목되는 일본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나’는 남편 후지노와 이혼하려 한다. 시작은 후지노에게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낳은 김에 혼인신고도 했으나, 변변한 직업도 없이 연극 영화 판에 빌빌거리며, 새로 생긴 처자식이 나름대로 부담이 되는 철부지 남편. 반면에 ‘나’는 TV 방송국의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커리어 우먼으로 남편한테 크다고는 할 수 없어도 적어도 적지 않은 돈을 사업자금이나 성공을 위한 종잣돈으로 대주고 돈을 날려 먹는 걸 손 하나 까닥하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아이 키우는 것도 시간 많은 남편이 가끔 유아원에 데려가는 것 정도만 도와주었을 뿐이다. 이렇게 지극 정성으로 남편을 위해 보필을 할지언정 부부간 의견차이가 생기면 가끔, 아주 가끔 귀싸대기를 얻어터지기도 한다. 이런 와중에 하루는 남편 후지노가 정색을 하고 ‘나’와 진지한 대화를 해보자 하더니, 이제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리셋해서 처음부터 다시 살고 싶다고 주접을 떨더니 이혼을 전제로 별거에 들어간다. 이혼을 하더라도 후지노는 아이를 부양할 형편도 안 되고, ‘나’가 양육권을 가지게 되더라도 육아비용과 향후 교육비도 보태줄 처지가 아니며, 결혼 생활 도중에 ‘나’에게 얻어 쓴 적지 않은 돈도 갚지 못하겠노라고 선언하고, ‘나’는 묵묵부답, 그저 그런 줄 안다. ‘나’는 1940년대 생이며 1970년대 중반의 일본에서 여성은 당연히 찍 소리 하지 못해야 했던 거니까.

  ‘나’가 방송국 다니면서 억대 연봉, 일본이니까 천만 엔 이상의 연봉을 받는 능력자라고 해도, ‘나’는 후지노를 향해, 거 참 드런 새끼, 이혼하자고 해서 고맙다, 하면서 새 남자를 찾거나 여러 남자를 찾는 대신, 아직은 이혼하지 않은 법적 남편 후지노와 함께 채광이 좋은 셋방을 얻으러 도쿄 시내를 뒤지고 다녔다. 속으로는 이혼해서 따로 사느니 어떻게 어영부영 새롭게 리셋한 삶을 살고 싶다는 후지노 마음이 변해 그냥 이대로 살 수 있을지 궁리하면서. 문제는 후지노한테 자금이 많이 들어가 ‘나’의 수중에 돈이 별로 없다는 것. 이 와중에 4층짜리 건물의 4층. 원래 주거용 건물은 아니지만 집주인 가족이 오랜 세월 살았던 4층이 주머니 사정에 딱 맞게 월세로 나와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거야말로 빛의 영역, 사방팔방 그렇게 채광이 좋을 수 없었던 것.


  이렇게 해서 딸 하나 달린 홀어멈이 홀로서기를 시작한다. 어처구니없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은 생각한 것처럼 되지 않는다. “조정”을 위한 가정법원의 호출에 남편 후지노는 참석할 의도가 없어 달이 가고 해도 간다. 그러다가 결국 후지노는 조정 없이 이혼 서류에 인감도장을 찍어 ‘나’에게 건네줘 처음엔 다시 함께 살기를 바라다가 나중엔 빨리 좀 정리가 되었으면 싶었던 이혼이 성립되자, 주인공 모녀는 채광이 찬란했던 건물의 4층 방을 나와, 거리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다른 셋방으로 가면서 작품은 끝을 낸다.

  짧은 소설. 시간 죽일 목적으로 좋은 작품. 1970년대 중반. 지금 시각으로 보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었던 시절의 어중간한 소재와 수위.




* "홀어멈"은 공선옥이 작품에서 평이하게 자주 쓰던 표준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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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8-11 05:38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예정 :
화요일, 서정인 <귤>
목요일, 페터 바이스 <마라/사드>
금요일, 루이 아라공 <오렐리앵>

바람돌이 2023-08-11 0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자이 오사무에게 딸이 있었군요. 내 인생에 하나도 준게 없는 아버지가 나를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만들어버리고 죽어버렸다는거..... 에고 참....저는 처음 듣는 작가인데 생각보다출간된 책이 많네요. 골드문트님 말하신 불의 산은 절판인데 도서관에 있으려나.

Falstaff 2023-08-11 11:35   좋아요 1 | URL
ㅎㅎㅎ 넵. 하여간 다자이, 그렇게 죽지나 말던지, 장가를 들지 말던지, 그렇더라도 아이를 낳지 말던지, 하지 말입니다.
<불의 산>은 아마 도서관에 있을 거예요.

stella.K 2023-08-11 1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자이 오사무가 아버지라는 건 저도 첨 알았네요.
제목이 근사해서 기대했는데 전 웬지 안 읽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긱이...ㅋ

Falstaff 2023-08-11 11:35   좋아요 0 | URL
뭐 굳이 읽으실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ㅎㅎ

2023-08-11 1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11 16: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지막 이야기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0
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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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엄 트레버 콕스는 1928년 아일랜드 코크 카운티에서 태어나 2016년에 잉글랜드 데번 카운티에서 생을 마감했다. 물이 좋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일랜드 작가 중에 글 좋은 사람이 많다. 번쩍 떠오르는 사람이 당연히 제임스 조이스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이 다음에 거론되는 작가가 윌리엄 트레버와 존 벤빌을 꼽는데, 약간은 책 판매를 위하여 트레버와 벤빌의 이름을 “후까시”한 것 같은 기분은 든다. 이 중에서 윌리엄 트레버는, 확실한 건 아니고 전에 어디서 들은 것 같다는 전제로 말해서,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루시 골트 이야기>에서 주인공 루시의 아버지 에버라드 골트 씨처럼 아일랜드로 이주한 잉글랜드인의 후손, 아닌가? 하여간 스물여섯 살에 아일랜드를 떠나 잉글랜드에 정착한 것으로 보아 크게 다른 것도 아닌 것 같은데, 혹시 그렇다면 아일랜드 사람들이 무척이나 경멸하는 잉글랜드 인을 자기네 대표적 작가로 추앙하고 있는 것도 같고 뭐 그렇다.

  트레버의 호적을 가지고 이렇게 왈가왈부하는 것은, 전적으로 내가 트레버를 읽은 감상으로 말씀드리는 것으로, 작품의 무대가 아일랜드 또는 농촌 지역일 때와, 런던 등 대도시일 때, 거의 완전히 상반된 느낌을 받았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이다. 아일랜드와 (지역을 불문하고) 농촌을 무대로 한 작품은, 트레버 특유의 감상성, 부끄러움, 심상함, 창백, 감수성, 고딕적 반작용을 품은 소극적 태도 같은 것이 절묘한 긴장으로 빠지게 하는 반면, 대도시가 무대일 경우에는 좀 덜 어울리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문장이야 죽여주지만 그의 장기가 아스팔트 위에서 불꽃을 튀지는 않는 거 같다.

  《마지막 이야기들》은 2016년에 숨을 거둔 후, 미발표 작품을 모아 바이킹 출판사에서 2018년에 출간한 책을 번역한 것이다. 윌리엄 트레버의 연표를 보면서 궁리해봤더니, 그의 창작은 2008년 또는 2009년 정도에 마감을 한 듯 보인다. 여든 살까지 픽션을 쓴 거니까 대단한 노익장이었다. 《마지막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궁금했던 것도 이 점이었다. 이 책이 “미발표” 작품을 모은 것이라 하더라도, 2009년 이후, 그의 만년에 쓴 작품을 모은 것인지, 아니면 평생 작가가 책으로 내놓지 않았던 것을 모은 것인지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았다. 나는 후자가 아닐까 싶었다. 물론 증거는 없다. 그냥 작품(들)을 읽어보니까 그런 생각이 든다, 하는 것일 뿐.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이 책에 수록된 작품의 무대가 참 다양하기 때문이었다. 아일랜드도 있는 것 같았고, 런던도 있고, 농촌지역도 있다. 그래서 책 한 권, 열 편의 단편소설을 읽으며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래, 내 스타일이야, 하면서 영탄한 작품도 있으며, 뭐 트레버치고는 별론데, 한 작품도 있었다. 즉, 내 취향에 따라 얘기해서, 공감의 정도가 들쭉날쭉했다는 거.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태자면, 플롯(들)이 재미있었다. 첫번째 이야기 <피아노 선생님의 제자>를 읽으면서 깜짝 놀랐던 점. 피아노 선생님 미스 나이팅게일한테 천재 제자 한 명을 교습하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생긴다. 선생의 입장에서 얼마나 감격적이고, 흥분유발의 원천이 되며, 정성을 모아 집중하게 만들겠는가 한 번 생각해보시라. 피아노 선생님이 아니라 일반 과외 선생이라도 비슷할 듯하니까 독자들의 청춘시절 아르바이트 경험을 떠올려도 나쁘지 않을 터. 그러나 이 소년이 브람스를 치고, 쇼팽을 배우고 또는 연주하고 돌아간 다음에는, 미스 나이팅게일의 돌아가신 아버지가 쇼콜라티여서 수집한 아기자기한 각종 그릇 같은 것들, 예컨데 백조 도자기, 예쁜 냄비의 뚜껑(뚜껑만! 차라리 냄비 한 세트 몽땅이면 더 좋았을 것을), 고리가 말썽이어서 빼놓은 귀걸이 같은 것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거였다. 그럼 독자 입장에서 미스 나이팅게일 선생님하고 소년 사이에 모종의 갈등이 생겨서 진짜는 아니더라도 뭔가가 치고 박는 일이 벌어질 거라는 기대감, 이럴 때면 빠지지 않고 나타나는 현상인 긴장의 레벨이 팍팍 상승하게 만들어놓고는, 그냥 그렇게 끝나버리는 거다. 오, 놀라운 뒤처리 스킬.

  이런 작품이 연달아 몇 개 나온다.

  그러다가 뒤로 가면 <겨울의 목가> 나오는데, 스물두 살에 대학을 졸업하고 노느니 시골 목장에서 열두 살, 몇 달 뒤에 열세 살이 되는 소녀의 개인교사나 하자, 싶은 청년 앤서니가 등장한다. 앤서니는 조금 조숙한 열세 살짜리 메리 벨라와 좋은 추억을 만들고 얼마 안 되어 떠난다. 메리 벨라를 우리나라 소녀들과 평행 비교하면 중1. 조숙하지 않더라도 잘 생기고 말 잘하고 유머 있는 청년에게 얼마든지 빠질 수 있는 사춘기 초입이니 이 시기의 경험이 메리 벨라에게도 좋은 추억으로 남았던 것은 물론이다. 앤서니는 이후 니콜라라는 참한 아가씨와 결혼을 하고, 딸 둘 낳고 행복하며 편안한 가정을 꾸려 나갔다. 메리 벨라는 엄마가 60세가 되는 생일날 갑자기 숨을 거두고, 이에 낙심한 아버지 역시 얼마 있지 않아 말을 달리다가 낙상을 해 줄초상이 나는 바람에 농장을 상속받아 가업을 잇기 위하여 직접 경영을 하게 된다.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지도 제작자가 된 앤서니는 출장을 자주 다녔고, 하루는 자신이 예전에 아르바이트를 한 농장 부근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으며, 바로 그 농장을 찾아가 아직 홀로 사는 메리 벨라와 오랜만에 상봉한다. 둘은 세월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새록새록 연모의 정이 새로워지기 시작하면서 당연히 앤서니의 가정생활에도 파도가 치기 시작한다.

  나는 이쯤에서 마치 미스 나이팅게일과 피아노 천재 소년처럼 서로 번히 알고 있는 감정의 요동을 뒤로 하고 슬쩍 작품을 매조지했으면 참 좋겠다, 하고 생각했고, 점점 희망하게 됐고, 제발 그래라, 그래라, 응원까지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윌리엄 트레버는 기어이 스토리를 화다닥 복잡하게 흩어버리고 만다. 물론 독자가 이걸 참견할 수는 없다. 나도 책의 앞쪽에서 몇 작품의 인상적인 마무리를 읽지 않았다면 조금도 결말에 대한 희망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라서 그랬을 뿐이다. 내 생각대로 마무리를 하지 않아도 트레버는 충분히 트레버답게, 단편의 왕좌에서 빛나는 만년필을 달리고 있기는 하지만 내가 아쉽다는데 뭐? 어떤 기분인지 아실 듯.

  하여튼 이런 느낌의 단편 열 작품이 실렸다. 좋은 건 좋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아, 위에서 소개한 <겨울의 목가>도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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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3-08-10 08: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열 편 모두가 각자의 매력이 있었던 것 같아요. 말씀처럼 감탄할 정도의 단편도 있고 오랜 여운을 안겨주는 단편도 있고, 이건 뭐지 싶은 것도 있고요.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계획대로(?) 리뷰를 써주셔서 감사하고요^^

‘물이 좋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 부분에서 많이 웃었습니다!

Falstaff 2023-08-10 09:35   좋아요 2 | URL
ㅎㅎㅎ 자목련 님께선 마음이 고우셔서 작품이 이끄는 대로 작품에 푹 빠져 감상하시는 분이잖습니까. 제가 굉장히 부러워하는 성향이십니다. 늘 작품을 즐기시는 것 같아서 좋습니다. ^^ 생활도 그렇게 하실 거 같아요. ㅎㅎ

페넬로페 2023-08-10 09: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부분이 궁금했어요.
10편의 단편의 출간연도가 없어서요.
제 리뷰 제목에 노작가가 말년에 썼다고 했는데 그게 틀릴 수도 있군요.
출판사가 자세히 적지 않아 조금 그랬어요.

Falstaff 2023-08-10 09:37   좋아요 2 | URL
요즘엔 단편집에 출간연도가 적혀 있는 경우를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게 아쉬워요. 중요한 정보일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전에 읽었던 단편집은 언제, 어느 잡지에 발표한 것이라고, 아니면 언제 썼지만 미발표 작이라고 일러주고는 했는데요. ^^

우끼 2023-08-10 16:38   좋아요 2 | URL
오.. 출간연도도 중요한 정보인데요

바람돌이 2023-08-10 17: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 저 지금 이 책 읽고 있어요. 저는 도시편도 쫄깃쫄깃하게 읽고 있습니다. 지금 반쯤 읽었는데 아 저는 언제나 트레브 단편의 그 마지막 문장들이 다 너무 좋습니다. ^^

Falstaff 2023-08-10 21:11   좋아요 2 | URL
다 쫄깃하게 읽으신다니 다행이고 좋은 일입니다. ㅎㅎㅎ 장편도 좋지만 단편은 왕이라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