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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렐리앵 1 ㅣ 창비세계문학 92
루이 아라공 지음, 이규현 옮김 / 창비 / 2023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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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아라공이라고 하면 앙드레 브르통, 필리프 수포와 더불어 프랑스의 쉬르 레알리즘, 즉 초현실주의의 대표선수로 활약하다가 공산주의자로 변신하면서 초현실주의나 다다이즘과 결별한 시인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 책을 다 읽고 연표를 보니까 참 굴곡이 많은 삶을 살다가 간 작자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탄생부터 우여곡절이었다. 1897년 10월 3일에 태어났는데 11월 3일 날짜의 세례증명서를 발급받았고, 이는 일반인들에게 출생증명서와 같은 효력을 지니는 문서로 활용되지만 특별하게 이 아이의 세례증명서에는 부모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훗날 아라공 자신의 진술에 의하면 어머니는 마르그리뜨 투카스로 스물네 살이었으며 아버지는 1840년생, 그러니까 엄마보다 서른세 살이 더 많은 루이 앙드리외였단다. 제3공화국 시절의 대표적 공안검사로 1871년 리옹 코뮌 가담자들을 유혈 진압하는 등의 공을 세우는 등 잘 나가다가 1928년 선거에 지는 바람에 은퇴할 때까지 여러 번 하원의원을 지냈다고 한다. 사생아였지만 엄마가 아빠네 집의 하녀 같은 통속적인 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다. 나름대로 아빠도 어린 정부와 아이한테 정성을 쏟았지만 신분도 있고 사회적 눈치도 있고, 제도도 있고 뭐 복잡한 사정 때문에 호적에 올리지는 못한 거 같다. 아라공은 엄마를 누나로, 외할머니를 엄마로, 아빠를 대부로 알고 살았다는데 뭐 이런 거 안다고 배부른 거 아니니까 그만 하자.
<오렐리앵>은 오랜만에 창비 세계문학 시리즈로 나와 책방에서 표지를 보자마자 반가워서 도서관에 구입 신청을 해 읽은 책이다. 1권이 서문 포함해 415쪽, 2권이 작가연보 포함 474쪽, 합해서 889쪽에 이르는 장편 연애소설이다. 연애소설이 뭐라고? 몇 번을 말했듯이 결국 연인이 갈라서야 끝장을 보는 이별소설. 그리하여 책 좀 읽은 독자들은 연애소설의 플롯을 대강 눈치챌 수 있는데, 아라공은 마치 오노레 드 발자크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결국 그거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이별해야 하는 운명의 주인공 오렐리앵과, 덩치 크고 잘 생기고 돈 많은 오렐리앵을 사랑하면서도 엉뚱하게 못생기고 땅딸막하고 돈도 없는 어린 시인한테만 같은 침대를 허락한 후 사랑하지 않는 외팔이 남편에게 돌아가는 베레니스를 둘러싼 1920년대 초반 파리의 다양 다종한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어리광쟁이들을 겁나게 섬세하고 상세하고 세밀하고 그래서 짜증날 정도로 섬세하게, 상세하게, 세밀하게 그렸다. 1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한 루이 아라공이 이 책을 쓴 시기가 2차 세계대전에까지 참전했다가 1940년 초여름에 프랑스 비시 정권이 독일에게 항복하는 바람에 소집 해제가 된 직후였다. 괴뢰 정부가 항복한 거지, 내가 항복한 거냐? 라고 주장하면서 아내 엘자와 함께 “지적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한다는데, 지적intellectual 레지스탕스가 뭐야? 아라공은 <오렐리앵>의 에필로그에서, <오엘리앵>은 프랑스가 해방된 1944년에 발간했으며(에필로그는 원래 붙어 있지 않은 것을 발간 직전에 프랑스 공산당이 레지스탕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로 결의한 이후에 써서 첨가한 것인데), 이 에필로그에서 사회변혁은 무장폭력에 의하여 가능하다고 주인공의 입을 빌어 웅변하고 있건만, 도대체 “지적 레지스탕스”가 뭐냔 말이지. 뭐 그건 그거고, 다시 책 이야기를 하자면, 이 책 두 권을 내가 희망도서 신청을 했기 때문에, 안 읽으면 시민 혈세로 구입한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한 글자도 빼지 않고 다 읽었지, 내가 내 돈 주고 산 거라면 얼마 읽지 않아 방바닥에 휙 던져버렸거나, 헌책방에 내다 팔아 빵 사먹었을 거 같다. 빵 아니고 쐬주라고? 두 권 팔면 완전 새 거니까 한 5천원 안 주나? 집 앞 홈플러스 가서 쐬주 5천원어치, 세 병 사와 앉은 자리에서 꼴랑 다 마셔버리면, 죽는다, 죽어. 나도 죽기는 싫어서 빵 사먹었을 거 같다.
1921년말, 우리의 오렐리앵 뢰르띠유아가 여주인공 베레니스를 처음 본다. 보자마자 처음 들었던 생각이, 못 생겼군, 이었다. 옷감에 일가견이 있는 청년 백수이자 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이며 예비역 중위인 오렐리앵이라면 전혀 감안해보지도 않았을 옷감으로 지은 드레스 위에 윤기 없고 지저분한 머리칼이 부스스한 베레니스에게 오직 하나 고상한 것은 동방의 공주를 연상시키는 “베레니스”라는 이름 하나였다. 오렐리앵에 관하여 말씀드리자면, 1911년에 장교로 입대를 해서 3년 복무 끝에 제대 요건을 갖춘 1914년 여름, 하필이면 큰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별의 별 전투에 다 참전하다가 동방군의 일원으로 테살로니키에 갔다가 총알이나 파편에 맞는 대신 말라리아에 걸려 프랑스로 복귀해 결국 제대에 성공한 인물이다. 무려 8년 동안 장교로 복무한 결과 제대로 사랑을 해보지도 않은 건 당연하고, 심성마저 성실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도움을 받지 못해 전사하는 데도 실패한, 서른두 살의 다 큰 아이였다. 온전히 자기 자신을 존중하지도 못하고 어른으로 생각할 수도 없었는데, 이건 다 전쟁을 극복하지 못해서 생활의 리듬을 되찾는데 실패했기 때문인 것처럼 보였다. 외모는 출중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고 한참 뒤에야 깨닫는 듯한 둔한 머리로 살아가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백수.
사이가 아주 나빴지만 끝까지 헤어지지는 않은 돈 깨나 있는 부모가 어느 날 날을 잡아 한꺼번에 사고로 세상을 접는 바람에 시집간 누나 아르망딘 드브레스뜨는 아버지가 운영하고 있던 공장을 물려받고, 오렐리앵 뢰르띠유아는 유능한 소작인들이 경작하고 있는 생주네의 토지를 차지한다. 이렇게 해서 오렐리앵은 파리 생루이 섬의 방 두 개짜리 아파트와 5마력을 내는 작은 승용차, 3천 프랑의 연금을 확보하고, 남은 인생을 오직 이 연금의 범위 안에서 소비하며 끝내 백수의 위신을 지킬 것임을 굳게 맹세한다. 밤이면 밤마다 요즘말로 클럽에 가서 술 마시고, 춤추고, 젊은 시인, 기자, 화가 얼치기들과 쓸데없는 잡담으로 소일하는데 전력을 다 한다. 오렐리앵 뢰르띠유아의 허랑방탕이 얼마나 지겹게, 유치하게, 눈꼴 시게 계속되는지 나는 막 미칠 거 같았다. 아오, 평균보다 큰 키, 미간이 이어질 정도로 두껍고 검은 눈썹에 큰 이목구비와 근사한 콧수염이면 다냐고. 나는 이렇게 노동할 필요 없는 돈지랄 전공자들”만” 나오는 소설을 정말 싫어하거든.
이이의 군대 친구 가운데 군의관 보조였던 에드몽 바르뱅딴이 있다. 사기꾼이고 바람둥이. 그 시절 (쁘띠)부르주아들이 다 그랬듯이 혼외정사 전문가라서, 제대 후 택시업계와 부동산 업계의 거물 께넬 씨의 정부 까를로따를 께넬 씨가 쓰는 침대 위에서 만나다가 결국 께넬 씨의 딸 블량셰뜨도 자빠뜨려 께넬 영감의 사위 신분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인물이다. 전쟁 중에 께넬 씨가 죽자 에드몽은 대박이 나버렸다. 택시는 물론이고 부동산에 이어 각종 사업을 이어받아 진짜 부르주아 계급으로 티고 올라갔다. 그래도 알량하긴 하지만 고정수입이 있는 오렐리앵과의 유대는 끊어버리지 않았다. 에드몽의 고향이 남쪽 R시. 여기 그의 사촌이 있어 두 주 정도를 기약하고 파리를 방문했고, 당시에 여성 고객 혼자라면 호텔에서 받아주지도 않던 시절이라 사촌 베레니스는 에드몽의 집에서 머물렀으며, 이렇게 해서 자연스레 오렐리앵의 눈에 베레니스가 들어왔지만 첫 눈에 든 생각이 “못 생겼다.” 였다는 것.
그런데 그건 처음에 그랬다는 말이고, 작품을 읽어나가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오렐리앵이 베레니스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고, 좋은 감정은 어, 이거 사랑이야? 라는 생각도 들다가,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사랑을 하고 있다고 오해하는 남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손목 한 번 잡아봤으면, 으로 진행하게 되며 모든 것이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은 그에게는 베레니스의 손목이나 허리가 아니라, 오렐리앵의 집에 들른 베레니스가 실수해서 깨뜨린 데스마스크, “센 강에서 자살해 시체 공시소에 있던 여인의 얼굴을 석회로 뜬 데스마스크”를 보상하기 위하여 멀쩡하게 살아있는 베레디스의 데스마스크를 얻게 되며, 척 보니까 덜 떨어졌지만 입만 까진 화가가 그린 베레디스의 초상화를, 연금 3천 프랑의 수입밖에 안 되는 주제에 한 방에 5천 프랑을 주고 구입하는 등, 단박에 베레디스한테 훅, 가버리게 된다. 그래, 그게 사랑이지. 이때부터 오렐리앵은 미치기 시작한다. 아마 첫사랑인 듯. 다들 해보셨지, 첫사랑? 2권에 가서 베레디스가 오렐리앵을 떠난 후에, 20년이 흐른 다음에도 완전히 정리가 되지 않은 흉터로 남은 상태를 루이 아라공이 잘 표현하고 있는 바, 딱 그거 하나가 이 책을 읽고 얻을 수 있는 거라고 하면, 내가 너무 야박할 듯. 하여간 뭐 그렇다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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