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여기 있으리 햇빛 속에 그리고 그늘 속에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지음, 배수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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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티안 크라흐트는 2020년에 세 권을 읽고 4년만이다. 이래서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된 크라흐트 네 권을 모두 읽었다. 1966년 스위스 베른에서 출생해 스위스, 독일, 미국의 각급학교를 다녔고 최종적으로 뉴욕의 사립 예술대학인 사라 로렌스 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세계 각국을 누비고 다니며 온갖 것을 경험했는데, 세계 각국이란 동남아, 서아시아, 아프리카 등을 망라한다. 부럽지? 그럼 당신도 부잣집 아이로 태어날 걸 그랬지? 크라흐트의 아버지 크리스티안 시니어는 스위스의 잘 나가는 출판사 수석 대표였다. 주니어는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영락없이 양아치였는데 이제 나이 들어 수염도 좀 기르니까 제법 교양 넘치는 얌생이 유럽인처럼 보인다. 2021년까지 모두 여섯 편의 소설 가운데 두 편은 아직 번역하지 않았다. 그것도 나오기만 하면 읽어보겠지만 어째 소식이 없다. 문학과지성사와 크라흐트 대리인 간의 계약을 끝난 거 같다. 새 출판사가 얼른 찍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 여기 있으리 햇빛 속에 그리고 그늘 속에: 이후 “여기 있으리”라고 씀. 염병한다고 제목을 이렇게 길게 쓰고 자빠졌는지 원 참.>은 대체역사소설. 만일 어떻게 했더라면, 만일 어떻게 안 했더라면, 으로 시작하는 역사소설인데, 대표적인 것이 최인훈의 <태풍>과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 대개 “어떻게 안했더라면”이다. 만일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하지 않아 태평양전쟁이 터지지 않았다면, 그래서 조선이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인데 내선일체 사업을 워낙 고도로 치밀하게 진행해 조선 사람들이 죄다 자기도 일본사람인 줄 알고 있다면? 뭐 이런 식의 이야기.

  <여기 있으리>의 전제사항은 1917년의 레닌이다. 같은 해 2월(구력 기준. 서기력으로는 3월) 혁명이 일어나고 마음이 바빠진 레닌은 제정을 무너뜨린 뒤에 들어선 러시아 공화국을 얼른 접수하기 위하여 망명중이던 스위스 취리히에서 사실은 열차를 전세내 타고 갔지만 스테판 츠바이크마저 잘못 알고 있던 ‘봉인열차’를 타고 독일을 관통해 덴마크에 가서, 거기서 배를 타고 스웨덴으로 건너가, 다시 열차로 스웨덴 관통, 핀란드 관통, 완전히 초토화된 러시아도 관통해 모스크바까지 달려 가야 했건만, 작품에서는 레닌이 그냥 스위스에 머물렀으며, 레닌의 직업이 프로 혁명가인만큼 소비에트 혁명을 엉뚱하게 스위스에서 일으켜 수십 년간의 전쟁을 치룬 후 마침내 취리히와 바젤, 뉴베른에서 소비에트 SSR, 스위스소비에트공화국을 건설했다는 전제다.

  당시 러시아는 원인 불명의 대형, 초대형 폭발사고가 나는 바람에 중앙 시베리아의 쿤구스카에서 민스크에 이르는 드넓은 지역이 몽땅 바이러스에 오염되고 말았다. 이래서 끝없는 툰드라 평원과 우랄 산맥의 비옥한 밀 곡창지대가 영원히 사람이 살지 못하는 죽음의 땅으로 바뀌어 러시아 제국은 유독한 먼지와 죽음을 부르는 검은 재만 횡행하는 거대한 황무지가 되고 말았다.

  웃긴 건, 영국, 독일의 부르주아들이 바로 아랫동네인 스위스 빨갱이들이 자기 나라에도 공산주의 바이러스를 옮길까봐 덜덜 떨다가 그냥 동맹국이 되어 버린 것. 독일은 여전히 반유대주의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영국도, 사실은 전 유럽이 조금 차이는 있지만 반유대적이기는 했는데, 하여간 똘똘 뭉쳐 소비에트 스위스와 전쟁을 벌이기 시작한지 백년에서 조금 모자란 96년. 그러니까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은 단 한 번도 평화의 공기가 어떤 맛인지 경험해보지 못했으며, 전쟁으로 인한 무기의 발달을 뺀 문화적 발전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심지어 글자 문화도 대화 문화로 급속도로 바뀌었다. 그래서 주인공 ‘나’처럼 글자를 쓸 줄 알고, 직접 메모까지 해가며 사는 인간은 구경하기도 힘들다.

  영국하고 독일이 동맹을 맺었다는 건 말했고, 그러면 SSR과 동맹을 맺은 나라들은? 오렌지색 군복을 입은 공포의 대상 힌두스탄과 놀랍게도 저 동쪽에서 진군해 지금 뉴민스크에 주둔하고 있는 한국. 대오스트레일리아도 있다. 하여간 2차 백년전쟁은 여전히 진행중이며 전세계가 공산주의 국가가 되든지, 아니면 소비에트 씨를 말려야 끝날 예정이다. SSR 인민들은 이 전쟁이 삶의 의미이자 목적이며 자신들은 전쟁을 이어가기 위해 태어난 것이라고 어린 시절부터 말끔하게 세뇌가 되었다. 전쟁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지구에서 계절의 구분, 사철의 변화(비슷한 말인가?), 밀물과 썰물, 해수면의 파도, 달의 주기적 변형 같은 것도 사라져버려, 동양의 힌두스탄인들은 지금을 칼리 유가, 악마 칼리의 시대라고 부른다.

  근데 스위스소비에트공화국은 인구가 영국과 독일보다 적다. 적어도 많이 적다. 그런데 무슨 전쟁? 그리하여 SSR은 아프리카에서 똘똘한 인간들을 데려와 계급과 관계없이 병사로 육성했다. 아니, 병사로 육성한 다음 스위스로 데려왔다. 화자 ‘나’도 말라위 출신이다. SSR, 소비에트에서 인종차별이라는 건 없다. ‘나’는 SSR 군대, 그중에서도 뉴베른의 스위스 5군단 당 지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쉬운 얘기로 베른의 새로운 지명 뉴베른에서 제일 높은 고위급 당원이다. 군단장도 ‘나’가 작성한 보고서, 그것도 아니고 그냥 전화 한 통이면 목이 달아날 수 있다. 왜 전화 한 통이냐 하면, 문자언어가 급격하게 소멸하고 구술언어 중심의 사회라서 그렇다. 아직 영국과 독일은 책과 문학에서 수준 높은 문화를 소유하고 있어 SSR을 저급인류, 시골뜨기 문맹자라고 선전하고 있다. 지나간 소비에트에서 문학은 사실상 죽은 상태였으니까 단박에 이해가 된다.

  ‘나’ 스위스령 잘츠부르크 혁명위원회에게 브라친스키 대령이라 불리는 폴란드 유대인을 체포해달라고 전보가 왔다. 브라친스키가 운영하는 점포에 가보니 유리창이 깨져 있고 벽에 붉은 글씨, 찍어서 냄새를 맡고 돼지 피라는 걸 알았는데 그걸로 큼지막하게 “죽어라, 유대인!”이라 쓰여 있다. 그리고 브라친스키는 사라졌다. 놀랍지?


  ‘나’는 큰 꿈을 키우고 있다. 독일이 8년 동안 점령하고 있던 뉴베른. 철저하게 파괴괸 이곳에 극장을 세울 것이고, 소비에트 위원회 건물을 웅장하게 지을 것이며, 공장과 국립은행도 문을 열 것이다. 붉은 칠 위에 하얀 십자가를 그린 미사일을 만들어 영독귀축을 무너뜨리기 전까지 바젤에서 밀라노까지 일곱 시간에 주파할 수 있는 지하 철도를 개설한 것이다. 알프스를 관통하는. 그러니까 SSR은 다른 건 몰라도 정밀기계와 땅굴 파는 거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왜 난데없이 땅굴 이야기를 하느냐고? 이유가 있지. 뉴바젤에서 대령이라 불리는 브라친스키가 바로 이 알프스 지하 요새로 들어갔기 때문에. 나도 여태 몰랐는데 정말로 스위스에는 알프스 지하 요새가 있다고 한다. 19세기 말부터 요새를 만들기 시작해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평화시기가 오자 방치하다시피 했다가 나치 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맹렬하게 파고 또 파기 시작했단다. 히틀러 성격으로 봐서 중립국이라고 사정을 봐주리라 여기는 건 지독하게 순진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런데 사실은 스위스 지형이 북한하고 비슷해서 그곳에 쳐들어가 완전한 승리를 얻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스위스는 알프스에 땅굴을 파고 또 파서 대외적으로 스위스 사람인들의 저항정신을 과시하는 상징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난공불락이 아니고 아예 공격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요새. 이 속에 브라친스키와 적지 않은 사람들이 들어가 생활하고 있었다. 소비에트 SSR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이. 소비에트의 노예가 되고자 하지 않는 사람들.

  요새 안에서 브라친스키는 뉴바젤의 당 지도원 동지 ‘나’에게 항변한다.

  “반혁명이니, 반공산주의니, 이단이니, 그런 건 전부 애들 말장난에 불과하니까. 당신을 스스로를 재교육할 필요가 있어요. 알고 계시나요? 당신은 스위스의 노예라고요. 노예로 태어나 노예로 훈련받고 노예로 만들어진 거죠.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답니다. 당신의 어린 시절은 한 편의 위조입니다. 세계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타르망귄이 고망귄을 지배한다’입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타르망귄이 고망귄을 지배한다’는 말은 “털 없는 흰 원숭이가 털 없는 검은 원숭이를 지배한다는 뜻이다. 여전히 ‘나’처럼 피부색이 검은 인간은 노예라는 말. 소비에트에서는 소수의 엘리트가 모든 인민을 지배한다는 것이겠지. 결국, 세상에 바뀐 건 하나도 없다는 것도 되고.

  나는 그러나 작품의 반 밖에, 반 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결국 브라친스키도 허망하고 허망하도다 하는 것을.

  크리스티안 크라흐트는 흥미롭다. 과작은 아니지만 소설 말고 다른 글을 많이 쓴다. 그래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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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날아가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6
랠프 엘리슨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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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랠프 왈도 엘리슨은 1913년 3.1절날 오클라호마 시티에서 태어났는데, 아빠 루이스 앨프리드 엘리슨이 당시 흑인답지 않게 소설 읽기를 즐겨하는 바람에 당시 유명 소설가 랠프 왈도 에머슨의 이름을 따 둘째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 아버지는 랠프가 세 살 때 사고로 죽고, 1920년대 들어 인디애나주로 이사한 앨리슨 가족은 20년대 흑인 가정답게 고생깨나 했으며, 랠프 엘리슨 역시 버스 차장, 구두닦이, 호텔 보이, 치과 보조원 같은 일을 섭렵하면서도 열공, 닥공을 감행해 “미국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작가가 되었고, 조각가이자 음악가이자 문학 교수로서도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다.”(역자 해설)

  1936년에 뉴욕으로 옮긴 20대의 엘리슨은 긴 세월동안 복잡한 관계를 맺은 리처드 라이트와 인연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데, 그쪽으로 가도 괜찮은 밥벌이를 할 정도의 실력이었던 음악, 조각과 조금, 많이는 아니고 조금 멀어지기 시작한다. 리처드 라이트가 누군가. 미국 흑인 문학의 1세대 가운데 한 명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듯. <미국의 아들>에서처럼 라이트의 작품은 폭력도 한 방법이라며 흑인의 저항성을 중요한 흑인 문학적 요소로 생각한다. 반면에 엘리슨은 저항보다는 백인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폭력이나 차별을 그대로, 물론 문학적 시각으로 보여주려 한다. 이런 방법상 문제로 라이트하고 관계가 복잡해진다는 뜻이다. 정치적으로 라이트는 공산주의에 적극적이어서 공산당에 입당했고, 엘리슨은 입당해서 당 내 일을 하기도 했지만 조용한 편이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소비에트가 아프리칸 미국인을 배신했다고 판단해 이에 대한 반발로 엘리슨은 미국 문학사에 이름을 남기게 할 <보이지 않는 인간>을 썼다고 한다. <보이지 않는 인간>은 민음사 세계문학 시리즈의 190번과 191번으로 짧지 않은 품절기간 동안 그걸 읽어보려고 동네 헌책방을 기웃거렸던 것이 기억난다. 그 작품이 미국 공산주의, 라기 보다는 미국 노동조합에 들어가 열성적으로 일하며 인정받지만 결국 드러나지 않는 차별을 발견하는 흑인 이야기이다. 요즘 자주 사용하는 말 “투명인간 취급” 당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1941년 진주만 공습으로 참전을 결정한 미국의 군대에 지원한 랠프 엘리슨.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흑인도 전투에 참가했다는 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입대한 흑인병사한테 미국과 미군은 총기를 지급하는 걸 꺼려했다, 라는 증거가 많다. 주로 태평양 전쟁에 배치된 흑인 병사들은 일본군과 직접 싸우는 것보다 보급품 하역 같은 힘을 쓰는 일에 많이 투입되었다. 랠프 엘리슨 역시 신체검사 결과 1A 급을 받아 당연히 징집될 줄 알았는데 전쟁터가 아닌 미국 상선에 입대해 국제화물과 승객관리 일만 잠깐 하다 왔다. 여전히 미국은, 버스 안에서 덩치 우람하고 알통이 울퉁불퉁한 젊은 백인 남자가 서 있는데 재수없고 기분 나쁘게 임신한 흑인 여자가 좌석에 앉아 있다는 이유로 겁나게 두드려 패던 시기였다. 이러니 보이지 않는 인간이 어디 한 둘이었겠어? <보이지 않는 인간>을 출간한 1952년에도 미국은 이하동문이었다.


  <보이지 않는 인간>은 1953년에 전미 도서상과 전미 신문제작자 협회가 주는 러스웜 상을 받았으며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최고의 상징”의 자격으로 시카고 디펜더 상을 받는 큰 영예를 얻었다. 이게 랠프 엘리슨한테 크고 큰 부담으로 작용할 줄은 아무도 몰랐겠지. 리처드 라이트나 제임스 볼드윈처럼 투쟁적이지 않고 문학 자체에 중점을 둔 엘리슨한테는 소설작업이 차별적인 세상에 대항하는 무기가 아니라 성취해야 할 지향점이었기 때문에 전작 <보이지 않는 인간>을 능가하지 못하는 작품이라면 차마 발표하기를 꺼려했던 결벽증 비슷한 증세였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이후에 장편소설 한 편도 완성하지 못한 채 죽는다. 책 뒤의 작가 연표를 보면 1999년에 “존 F. 캘러헌이 랠프 엘리슨의 두 번째 장편소설 『준틴스(Juneteenth)』를 편집하여 출간했다.”라고 나오는 바, 결국 엘리슨의 미완성 유고, 쓰던 중에 죽어서 미완성이 아니라, 쓰다가 만 작품을 편집해서 출간했다는 말이다.


  이 소설집 《집으로 날아가다》도 초판 출간이 1996년이다. 이 책도 “유고 단편집”이라고 표현했는데, 1940년대부터 50년대까지 잡지에 발표했던 것도 있고, 쓰기는 했지만 발표하지 않고 책상 서랍에 꿍쳐 두었던 것을 새로 실은 것도 있다. 당연히 어디다 싣지 않고 보관만 했던 것은 잡지 발표작보다, 기분상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덜 좋다. 딱 한 편 빼고. 맨 앞에 실린 <광장의 파티>. 이 단편은 화자 ‘나’가 백인 소년이다. 찬 겨울비가 내리는 밤, 한 무리의 남자들이 에드 삼촌의 집에 오더니 광장에서 파티가 열린다고 소리쳤고, 삼촌은 나더러 함께 가서 보자고 불러 소슬소슬한 비를 맞으며 광장까지 뛰어 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광장에 가서 보니까, 보잘것없는 모닥불 앞에 검둥이 청년이 웃옷을 벗은 채 불을 쬐고 있었으며, 청년을 둘러싼 백인 남자들이 욕설과 악담을 퍼부었다. 이때 멀지 않은 곳에서 크게 바람이 불어 전신주가 부러지면서 전선이 끊겨 바닥에 닿았고, 젖은 땅을 따라 고압의 전류가 운이 좋지 않은 백인 여성의 발을 타고 전신을 관통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 흥분한 사람들은 흑인 청년한테 휘발유를 쏟아 붓고 그냥 불을 붙여버렸다. 다중의 백인들이 흑인 한 명을 불태워 죽이는 현장. 이것을 광장에서 벌이는 파티라고 한 거다. 평소 같으면 백인과 흑인이 거의 같은 수로 시간을 보내는 평화로운 광장. 그러나 이런 미친 테러를 규탄하거나 막고자 하는 흑인은 이 시간에 광장에서는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머지 작품들도 좋다. 위에서 말한 “덜 좋았다” 하는 것은 랠프 엘리슨 치고 좀 덜 좋았다는 뜻이지 품질이 처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거의 같은 주제로 쓴 단편 열넷을 재미있게 읽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수없이 얘기한 바와 같이 뭐? 맞다. 꽃노래도 삼세번. 그런데 비슷한 열네 작품을 한꺼번에, 앉은 자리에서 읽어보시라. 엉덩이 배기는 건 다음 문제고 눈알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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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4-12-24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이지 않는 인간은 읽었어요. 그런데 내용이 가물가물해서 찾아보았더니 읽은지 거의 10년이 되어가더라고요. 10년 마다 읽은 책을 다시 읽을 수도 없고 참...
랄프 왈도 에머슨을 따라서 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오늘 알았네요.

Falstaff 2024-12-24 16:24   좋아요 0 | URL
다시 읽을 책을 다시 읽는 일.... ㅎㅎㅎ 그거 굉장히 어려운 일이더라고요. 그냥 제껴버리는 것도 좋은 선택일 거 같습니다.
연말입니다. 언제나 처럼 늘 행복하세요!

케이 2024-12-26 1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이지 않는 인간> 은 대학 시절 읽었는데 번역이 최악이기로 유명한 책으로 읽어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저에겐 참으로 재미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너무 백인 남성 위주의 영미 문학에 절여진 까닭인지 일단 주제와 전개가 너무 어색하여 책장이 쉽게 넘어가지 않았어요. 겨우 겨우 끝까지 읽긴 했지만 다신 못 읽겠단 생각을 했어요. 안 읽겠단 얘기를 참 길게도 했습니다 ㅋㅋ
20대까진 전쟁영화 좋아해서 많이 봤는데, 이긴 전쟁에는 백인 잘생남들 위주로 출연시키고 진 전쟁인 베트남전에는 흑인이 많이 나오네?? 라는 생각 종종 했는데 실제로 2차 때는 흑인이 전면전에 나서지 못했던 것이었네요.
저희 부모님 두분이 다 전라도 출신이시라 지역 차별을 바로 옆에서 많이 보고 느꼈는데, 인종 차별은 훨씬 더 심하겠지요.
가장 비겁한 게 절대 바꾸지 못하는 것에 대해 차별하는 것이란 생각 요즘 자주 합니다.
즐거운 연말 되세요!

Falstaff 2024-12-26 16:20   좋아요 1 | URL
앗, 이긴 전쟁에선 백잘생남! 그걸 몰랐습니다. 노먼 메일러가 쓴 <나자와 사자>에서 아마 전투원 가운데 흑인이 없던가 극히 드물던가 그랬을 겁니다. 메일러는 작가 이전에 기자였으니까 그대로 쓸 수 있지 않았을까 싶더라고요.
<보이지 않는 인간>이 예전에 번역본이 나왔었군요. 그 책이 품절이라 오래 기다렸다가 읽는 바람에 커진 기대 때문에 ㅎㅎㅎ 그래도 좋은 작품이라고 기억하는 데요.
전라도 가족이시군요.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은 아직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아 매우 아쉽습니다. 주위에 자기 정체성을 숨기는 전라도 출신 분을 많이 봤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낌새가 보이면 걍 확 치받아 버리세요!!!
 
필로우맨 암실문고
마틴 맥도나 지음, 서민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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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년 개띠 아저씨 마틴 맥도나. 아일랜드 부모가 영국에서 낳았으면 아일랜드계 영국인일까? 책 앞갈피에는 영국 런던에서 자랐다고 하고, 위키피디아는 유소년 시절 대부분을 아일랜드 골웨이에서 보냈다고 하고, 하여간 지금은 이스트 런던에서 유명한 배우인 피비 윌러-브리지와 연애하며 골수백이 채식주의자로 살고 있단다. 요즘엔 채식한다 그러면 오히려 좀 있어 보인다. 그래! 고기 좀 먹지 마시라. 고기 값 떨어지면 나나 열심히 먹게. 그건 그거고, 이 마틴 맥도나, 이력이 대단하다. 연극이면 연극, 영화면 영화 쪽으로 말 그대로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동안 미국 아카데미상 한 번, 영국 아카데미상 여섯 번, 골든 글로브상 두 번, 최고의 연극관련 상이라는 로런스 올리비에상을 세 번 휩쓸었다. 이 정도면 가히 천재급이다. 남들은 평생 박 터지게 해봤자 평생 한 번 받기도 힘든 상을 가을 아침에 호박 떨어진 거 줍듯 하니 세상 참 불공평하지? 원래 그런 거다. 이런 인간이 또 생기기도 괜찮게 생겼거든. 참 재수없어, 그지?


  <필로우맨>은 맥도나의 숱한 대표작(천재잖아, 천재) 가운데 하나로 2004년 로런스 올리비에 상 최우수 신작 연극상을 받았고, 뉴욕 브로드웨이에서는 2005년 토니상 최우수 연극상 최종후보까지 올랐다가 미역국 먹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7년에 친애하는 대일고등학교 후배 최민식이 주인공 소설가 카투리안 역을 맡아 초연을 한 이후 꾸준히 계속 무대에 올리는 “인기” 작품이란다. 계속 공연하는 인기 작품이라면 당연히 불멸의 명작이거나 자극적이거나, 둘 가운데 하나인데, <필로우맨>은, 극작가가 천재라잖아 천재, 강렬을 넘어 충격적인 우화와 잔혹극을, 행위가 아니라 순전히 말로만 관객에게 잔혹한 우화를 실감하게 만든다. 내가 이 작품에 대해 차마 뛰어나다는 말을 하지 않는 이유는, 아무리 막장까지 가는 극단의 공포적 파시스트 국가의 가장 악랄한 공권력을 가진 경찰 취조실이라 해도 그렇지, 아이고, 등장인물들이 입에 붙이고 사는 욕설이 너무도 극단적이기 때문이다.

  역자 서민아 역시 맥도나하고 같은 70년 개띠로 덕성여대에서 경영학과 복수전공으로 영문학을 전공하고 연세대 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수료한 점잖은 분이 정말 지저분한 욕설을 우리말로 바꾸느라 고생 깨나 했음 직하다. 어느 수준인가 한 구절 정도 소개할까 싶어 정말로 책갈피를 여니 도무지 옮길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남녀 생식기를 일컫는 비칭이 표준어 수준으로 등장한다는 말만 보태자.


  앞에서 말한대로 무대는 겉으로 보면 평범한 경찰서 취조실. 그러나 이 미지의 폭력적인 파시스트 국가의 경찰은 취조하다가 고문 정도는 기본 상식으로 당연히 하는 것이고, 죄의 경중, 형사들의 기분 여하에 따라 그냥 간단하게 권총으로 관자놀이를 쏘아 즉결처분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최악의 장소이다. 이곳에 소설가 카투리안이 잡혀 들어왔다. 그의 형 마이클도 함께 딸려와서 옆방에 있는 상태.

  소설 쓰는 것도 죄라고? 이 나라에서는 그렇다. 어떤 소설을 쓰느냐가 문제인데, 파시스트 국가라면 반정부적이거나 사회비판 또는 저항 문학, 하여간 정치적이겠거니 연상하기 십상이겠지만, 맥도나 자신이 아일랜드 출신으로 1993년 IRA의 워링턴 폭탄테러에 의하여 목숨을 잃은 비극을 우화로 한 블랙 코미디를 만든 적도 있기는 해도, 그런 건 아니고, 카투리안이 마치 19세기 초의 야코프와 빌헬름 그림 형제 같이 그로테스크하고 전혀 교훈적이 아닌 이야기를 지어냈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이 카투리안의 소설에 큰 영향을 받아 전혀 교훈적이 아닌 행위를 그대로 흉내내는 일까지 생겨서, 면도날을 속에 집어넣은 사과를 한 소녀에게 억지로 먹여 기어이 죽게 만들었다. 이 엽기적 살인을 진짜로 저지른 인간이 누구냐 하면, 소설가 카투리안의 친형 마이클. 연극은 영화와 달리 한 두 장소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하니까 친형을 범인으로 설정해 한 가족의 이야기까지 다룰 수 있게 했다고 봐도 무방할 터이다.

  형사들이 생각하기에, 소설가라는 작자가 작품을 써서 독자가 그걸 읽고 행위하게 만들었다는 거다. 하지만 소설가는 천성으로 받은 일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도 없는 팔자. 다른 사람들이 자기가 소설에 쓴 대로 행위 하는 걸 바라지도 않고, 권하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카투리안 역시 아무한테도 “나가서 아이들을 죽여!”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형사가 보기에는 카투리안이 “나가서 아이들을 죽여!”라고 분명하게 메시지를 던지지는 않았지만 “암시”를 한 것처럼 읽힌다고 주장한다. 이런 소설도 있다:


  옛날 옛적에 물살이 센 강변 옆에 마을 이야기. 몸집이 작은 맨발의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다른 아이들이 따돌렸다. 눈에 띄면 가난하고 작고 꾀죄죄한 아이를 때리고, 욕하고 놀려대도 천성이 밝은 아이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워낙 밝고 착해서. 아이는 언젠가 누군가가 자기의 따듯한 마음씨를 알아주고 보상까지 해줄 것이라 여기며 살았다. 날이 어둑해질 무렵 아이 앞에 새까만 망토의 마부가 끄는 마차가 나타났다. 검은 두건을 쓴 마부가 무서워 아이는 벌벌 떨었지만 저녁으로 먹으려던 샌드위치를 꺼내 마부에게 먹겠느냐는 뜻으로 흔들어 보였다. 마부가 마차에서 내려 아이의 샌드위치를 나누어 먹었고, 아이의 가난하고 힘든 집안 이야기까지 다 들었다. 마부는 이렇게 속삭였다. “너는 가득이나 부족한 네 몫의 절반을 이 늙고 지친 나그네에게 주었으니, 나도 너한테 무언가를 주고 싶구나. 오늘은 네가 그 가치를 알지 못하겠지만, 언젠가 나이가 들면 아마도 진정한 가치를 깨닫고 내게 감사하게 될 거다.” 그리고는 날이 시퍼런 서양 낫을 휘둘러 오른발 발가락 다섯 개를 단번에 잘라버렸다. 그러고나서 아직도 꼬물거리는 발가락을 주워 쥐떼를 향해 던지고는 소년과 쥐떼와 강과, 어두워가는 하멜린 마을을 뒤로 하고 떠났다.


  이제 아시겠지? 저 앞에서 야코프와 빌헬름 그림 형제를 이야기한 이유를. 몇 년 후 이 나그네가 멋진 피리 하나 들고 하멜린 마을에 나타났을 때, 발가락이 없어 다리를 저는 바람에 피리부는 사나이를 따라가지 못한 예전 맨발의 아이 하나만 살아남을 예정이다. 이렇듯 엽기 그로테스크한 잔혹동화를 주특기로 하는 소설가가 카투리안이다. 이런 엽기성을 알고 보면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성장하면서 학습한 것이라는 점도 엽기적. 부모한테는 아들 둘이 있었는데 큰 아이가 정신이 좀 흐린 마이클, 작은 아이가 똑똑한 카투리안. 부모는 마이클을 좁은 방에 가둬 두고 7년 동안 온갖 방법으로 고문했다. 이제 다 자라 힘이 세진 카투리안은 이것을 견디지 못하고 하루 날을 잡아 베개로 아버지의 얼굴을 지긋이, 꾸욱, 오래 눌러 죽인다. 이어서 같은 베개로 엄마의 얼굴도 지긋이, 꾸욱, 오래 눌러 죽인다. 뭘로? 베개로. 그래서 필로우맨이냐고?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필로우맨이라는 베개로만 만들어진 한 남자가 있었다. 머리는 원형 베개. 단초로 만든 두 눈과 웃는 커다란 입. 웃느라 벌린 입에 난 이도 작고 하연 베개로, 온몸이 다 푹신푹신한 베개로 만들어졌다. 이 필로우맨이 말한다. 마이클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세상을 사는 거 자체가 고통이야. 그걸 겪다가, 겪다가, 겪고 난 다음에 결국 죽는 것보다 지금 깔끔하게 죽어버리는 것이 낫지 않겠니?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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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2-23 1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천재는 부러워할 것이 못 되죠. 적당히 착하고 저당히 속물인 우리네 범인이 좋아요. ㅋㅋ
와, 근데 이 사람되게 독특할 것 같아요.
역자도 애로가 많았겠지만 최민식 씨 이 작품 소화하느라 애 좀 먹었겠네요. 애를 먹으면 먹을수록 관객은 더 열광하게 되어있잖아요. 근데 저는 범인이라 필로우맨은 그닥...ㅋ

Falstaff 2024-12-23 16:22   좋아요 1 | URL
아휴, 저도 부럽지 않습니다. ㅎㅎㅎ 저 보세요. 얼마나 팔자 좋습니까? 이렇게 사는 게 장땡입니다.
이거, 문제작입니다. 말이 하도 거칠어서 별4 준 것이지, 한 달 전에 읽고나서 북적북적 앱엔 별5 주었던 작품입니다요. 아, 북플에도 별5로 되어 있을 걸요? 기회가 되면 읽어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

케이 2024-12-26 12: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저는 이거 디게 서정적인 내용인 줄 ㅋㅋㅋㅋㅋ
심한 욕 나오는 거 별로 선호하지 않는데, 읽을지 말지 고민 좀 해봐야겠어요!

Falstaff 2024-12-26 16:12   좋아요 0 | URL
그림 형제라니까요, 엽기 그로테스크. ㅎㅎㅎ 그래도 재미있습니다.
이 작품이 요즘 대세인 모양이더라고요.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4
이반 부닌 지음, 최진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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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은 1870년 러시아 보로네시에서 오랜 귀족이자 광대한 영지를 가진 영주 가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워낙 집안이 휘황찬란해서 소개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라 아예 시작도 하지 않는 편이 현명할 듯하다. 다만 이반의 아버지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부닌으로 말하자면, 이반은 훗날 부친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매우 강인한 인물이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성질이 급하고 도박에 중독되어 있었으며, 충동적이지만 관대하고, 연극적일 정도로 웅변적인, 완전히 비논리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크림전쟁에 참전하기 전까진 와인 맛도 몰랐는데, 전쟁이 끝나 돌아온 다음엔 알코올 중독까지는 아니었으나 전형적인 과음자가 됐다고. 왜 아버지 이야기를 길게 하느냐 하면 중단편 소설 일곱 편을 실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에서 작가의 유소년 경험이 가장 많이 들어있음 직한 중편 <수호돌>에 이런 성격의 형제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표제작인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는 유일하게 작품의 주인공이 러시아 사람이 아니라 미국인이다. 부자가 되기 위하여 평생 죽도록 일을 해서 기어코 백만장자가 된 이름을 밝히지 않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는 이제 돈은 벌만큼 벌었으니 아내와 딸을 동반해 2년 기한으로 유럽을 여행하기로 결정, 초호화 여객선 아틀란티스 호에 탑승해 유럽땅, 이탈리아의 카타리 섬, 가장 호화로운 호텔의 디럭스 스위트룸에 여장을 푼다. 그러나 세계최고의 휴양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공허와 숙명의 페이소스.

  다른 작품은 러시아 귀족, 부르주아, 장교들이 주인공이며 다분히 19세기적 운명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이 책의 광고글을 보면 투르게네프와 톨스토이의 명맥을 잇는 20세기 러시아 작가라고 주장하는 것이 얼른 이해가 간다. 다만 한 작품 <수호돌>의 사실상 주인공은 나탈리야라는 이름의 집안 하녀이자 화자의 아버지의 젖누이, 유모의 딸이다. 제일 길기도 하니, <수호돌>의 스토리를 간단하게 이야기해보자.


  수호돌은 무슨 돌멩이가 아니다. 작품 속 지명. 화자 ‘나’는 루네보에 살고 있는데, 아버지가 이미 오래 전에 수호돌을 떠나 할머니, 그러니까 아버지의 엄마 올가 키릴로브나 소유의 영지가 있는 루네보로 이사해 할머니가 세상 뜨자마자 영지를 홀랑 잡아 잡순 거였다.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아버지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불평을 한 적이 있다. “한 명. 흐루쇼프 집안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 남았어. 수호돌이 아닌 이곳에.” 이 단 한 명이 화자 ‘나’. 죽어가는 아버지는 그 마당에서도 딱 한 명 남은 (흐루쇼프의 이름을 유지할 수 있는) 남자 후손이 수호돌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한탄한 거다. 아버지 주장에 따르면, 수호돌은 저주받은 좋은 곳이라고. 좋지만 저주받았다고.

  사실상의 주인공 나탈리야는 결혼하지 않았다. 19세기 귀족 가문의 하녀이긴 하지만 흐루쇼프의 둘째 아들이자 ‘나’의 아버지인 아르카디 니콜라예비치와 젖누이 사이라서 자신을 ‘어엿한 규수’인 줄 알았던 것이 나탈리야에게는 큰 비극이 싹틀 수 있는 오해였다. 이이는 훗날 ‘나’의 어린시절에 루네보 집으로 와서 8년동안 함께 살아 ‘나’와는 정이 돈독했다. 하지만 당연히 수호돌로 돌아가야 한다는 일종의 집착을 보이고 있었으며, 8년이 지난 후에 정말로 수호돌에서 나탈리야가 필요하다고 부르자 생각하고 말 것 없이 이제는 늙은 몸을 끌고 돌아갔다.

  수호돌이 나탈리야네한테 잘 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나탈리야의 아버지(하녀의 아버지라서 ‘아비’라고 표현한다)는 농장 일을 하다가 실수, 잘못을 한 적이 있었고, ‘나’의 할아버지는 화가 나서 죗값을 묻는다며 강제로 입대시켜 불귀의 객으로 만들었다. 어미는 유모 역할이 끝난 다음에 집안의 가금을 돌보는 일을 했다가 하루는 심한 우박이 내려 새끼 칠면조 몇 백마리가 순식간에 죽는 걸 보고 기겁을 하다 그 자리에서 심장이 터져 죽고 말았다. 얼마나 주인인 흐루쇼프 사람들이 거칠었으면.

  그러나 나탈리야는 수호돌의 주인들만큼 선하고 소박한 사람들은 전 우주에 없었고, 그들보다 더 불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 역시 없었다고 말한다. 아무래도 정신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듯. 할아버지 표트리 키릴리치는 미쳤다. 자신의 혼외자이며 ‘나’의 아버지와 가장 친해서 의형제까지 맺기도 했으며, 나탈리야의 사촌오빠인 게르바시카한테 살해당해 죽었다. 카라마조프? 3천루블 때문에? 그건 아니고, 게르바시카도 결국 흐루쇼프 집안의 혈관을 흐르는 기질이 있었지 않을까 싶다. 할아버지의 딸, 토냐 고모는 장교 보이트케비치와 사랑하다가 애정전선에 먹구름이 끼자 미쳐버렸다. 아들들도 성격이 참 별나서 (이반 부닌의 친아버지처럼) 크림 전쟁에 지원해 참전하고 돌아온 다음부터 서로 격정적으로 다투기를 즐겨 저녁 식사를 할 때, 언제 싸움이 붙을 지 몰라서 각자의 무릎 위에 채찍을 올려둔 채로 밥을 먹었단다. 맛이 가지 않았다면 형제끼리 매일 이 정도로 살벌할 수 있을까?

  이런 집구석에 무슨 애착이 있어서 나탈리야는 곧 죽어도 수호돌에서 부르면 쪼르르 달려가느냐는 말이지. 나탈리야의 죄는 하녀 주제에 주인집 큰아들 표트르 페트로비치를 연모한 것. 작은 아들의 젖누이라서 자신도 번듯한 신붓감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나탈리야는, 군대에서 제대해 집에 돌아온 표트르에게 연정을 품는 것 역시 마땅한 일인 것 같았다. 그리하여 하루는 할아버지와 표트르가 자주 목욕을 하는 목욕탕에 제대할 때 가져온 아름다운 은도금 테를 두른 거울을 두고 나왔고, 주인들이 사용한 목욕탕을 청소하러 온 나탈리야가 거울을 발견해 표트르에 대한 애정의 증거로 숨긴 것 때문에 사달이 났다. 표트르는 흐루쇼프 집안의 맏아들답게 양털 깎는 가위로 나탈리야의 머리털을 밀어버리고, 누더기를 입혀 옆동네도 아니고 마차를 타고 하루 종일 가야하는 소러시아,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역 소시키 마을로 보내버렸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 밑에 수염이 거뭇하지만 작고 예쁜 몸매에 얼굴도 예쁘장한 클라브디야 마르코브나 아가씨와 혼인을 해버렸다. 종족이 다른 소러시아의 작은 지주 또는 관리인 집에서 몇 년을 보내고 다시 수호돌로 돌아온 나탈리야한테 좋은 팔자가 찾아오기를 바랄 수는 없는 법. 이이는 안주인의 수발을 들다가 임시로 들어온 거구의 하인에게 한 달 동안 성폭행을 당하고, 임신을 하고, 사고로 아이를 잃은 후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다. 자신의 팔자를 완전히 구겨놓은 주인 표트르 페트로비치 흐루쇼프를 향한 정을 포기하지 못한 채. 물론 이제 연정에서 앞의 말 연戀이 빠지고 오리온 초코파이 미운 정情만 남았지만.

  몇 번의 화재와 세월로 인한 쇠락 때문에 이젠 거의 폐허가 된 수호돌. 저택이었던 초가집을 보며 옛 시절을 회상하는 중편이 <수호돌>이다.


  책은 전반적으로, 좋지만 재미는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와 <수호돌>을 제외하고는 모두 귀족 출신의 부르주아나 장교들이 사랑 때문에 죽니사니 하는 건데, 사색적인, 달리 말해 분위기 잡는 애수의 언어 말고는 별로 볼 것 없다. 아, 오해하지 마시라. 내가 읽기에 그랬다는 것이지 러시아 사람 가운데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먹은 작가의 품질을 논하는 건 아니다. <아르셰니예프의 인생>을 흥미롭게 읽어서 초장부터 기대가 너무 커 그랬던 것도 같다.

  193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혁명 당시 반혁명파의 일원으로 서유럽으로 망명. 잘했다. 안 그랬으면 노벨상은 다음으로 하고 레닌은 그만 두고라도 스탈린이 내비뒀겠어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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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12-20 0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독후감:
월요일. 마틴 맥도나, <필로우맨>
화요일. 랠프 앨리슨, 《집으로 날아가다》
수요일.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나 여기 있으리 햇빛 속에 그리고 그늘 속에>
목요일. 보리스 사빈코프, <창백한 말>
금요일. 구레이, <날개 달린 두약>

coolcat329 2024-12-20 09: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제목이 좋아서 샀는데 기대 안하고 읽어야겠네요.
<아르셰니예프...> 보다 먼저 읽어야겠습니다.

Falstaff 2024-12-20 09:49   좋아요 1 | URL
넵. 이 책 먼저 읽으셔요. 좋은 선택입니다. ^^
 
미나리아재비 창비시선 506
박경희 지음 / 창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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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생 범띠 여사님 박경희는 참 살뜰하게 자기 프로필을 숨긴다. 충남 보령에서 출생해서 자란 박경희는, 전적으로 그가 낸 시집을 유추해 보면, 광부였다가 농부로 전업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남동생이 하나 있는 것 같다. 대천 해수욕장을 끼고 있는 보령시는 얼핏 어업과 농업을 업으로 하는 반농반어 주민들로 구성될 것 같지만, 상당히 많은 매장량을 보유한 탄광도 보령시의 남동쪽 지역에 있다. 성주산이라고 하는 해발은 별로 높지 않지만 정상까지 오르다가 여차하면 땅이 이마를 칠 정도의 급경사로 악명을 떨치는 산도 있고, 이 산 서쪽 초입 계곡 가기 전엔 석탄 박물관이 있다. 이미 고인이 된 박경희의 부친이 광부에서 소작농부로 전업한 것도 이해가 된다. 석탄의 소비량이 80년대 들어 확 줄어들었으니까.

  보령에서 자라 대학은, 나는 이승우가 졸업한 이 학교가 이날 이때까지 서울 4.19탑 근처 수유동에 있는 줄 알았는데 그새 경기도 수원 찍고 병점 아래 오산으로 이사 간 한신대 문창과를 졸업했으니 이때는 보령을 벗어나 생활했으리라 여긴다. 졸업한 이후에 어쨌건 고향에 돌아가 오래 살고 있는 것 같으며, 70년대 초반 출생답게 이이를 보는 할머니들이 드물지 않게 신랑감을 소개해주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아직 혼인은 하지 않은 거 같다. 젊은 시절에 비구니가 되려 산에 올라 절에도 들어가보고, 고기가 먹고 싶어 혼자 산문을 빠져나와 읍내까지 가려다 너무 멀어 다시 돌아가본 적도 있는, 머리 긴 비구니였던 적도 있거나 여직 머리 긴 비구니로 산다… 시집 《미나리아재비》를 보면서 이러지 않았나 싶었던 거다. 그저 넘겨짚어본 거니까 절대 믿지 마시라.

  이 책이 창비시선 506호. 505호가 지난 번에 소개한 권선희의 《푸른 바다 검게 울던 물의 말》. 권선희는 동해 바닷가 구룡포, 박경희는 서해 바닷가를 낀 도시 보령의 농촌. 둘이 좀 친한 듯하다. 권선희의 시집에 실린, 잠수 중에 사고 나 죽을 뻔한 인공호흡 받은 할머니가 이 시집 《미나리아재비》에서도 나오는 걸 보니. 비슷한 성향의 시인끼리 친하게 지내는 건 좋은 일이다. 두 시집도 비슷하다. 구룡포 사람들과 보령 농부들이 사는 모습을 스케치하고, 가끔 덧칠도 하고, 거기에 자기 마음도 가져다 붙이며 살아가는 모습을 진짜 날 것보다 더 날 것처럼 보이게 하는 시. 근데 박경희는 권선희에 비하면 시에 자주 자기 가족들의 모습도 등장한다.



  꿈자리



  잠자리를 서쪽에 두던 엄니가 꿈이 시끄럽다고 동쪽으로 돌렸다


  마루에 앉아 머윗대 껍질을 벗기면서

  저승 갔으면 그쪽 세상에서 잘 살 일이지 이승은 왜 들락거리느냐고

  보이지도 않는 분 타박이다

  살았을 적에 그리 모질게 마음고생시키더니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이승 문턱을 넘느냐고 사발째 욕을 퍼붓는데

  옆에 있던 내가 슬금슬금 자리를 비키니

  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제집만 들락거렸다

  이승 일에 저승 사람이 끼면 될 일도 안 된다고

  소금 한줌 뿌렸다   (전문 p.18)



  박경희의 시는 읽기 편하다. 마지막 줄, “소금 한 줌 뿌렸다” 읽기를 마치자마자 여태까지 위에서 읽은 시가 한 방에 깔끔하게 정리가 된다. 꿈에 죽은 배우자가 나오면? 나오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이가 내 몸에 손을 대면 나쁜 꿈이란다. 나는 꿈에 돌아간 부모 안 나오시는 게 그렇게 좋다. 시의 엄마처럼 한 번 갔으면 그곳에서 잘 사는 게 장땡이다. 괜히 여기저기 신경쓰지 말고. 나도 죽으면 아이들 꿈엔 얼씬거리지도 말아야지.

  《미나리아재비》에는 <미나리아재비>라는 시가 들어 있지 않다. 그럼 왜 미나리아재비라고 제목을 달았느냐고? <더없이 깊고 짙은 여름>이라는 시에 이런 대목이 있어서.


  어둠을 짚고 가는 별이 까마득해서 솟을대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돌멩이를 던졌다

  돌멩이 맞은 별이 까딱거리다가 뒤꼍 조릿대 숲으로 떨어졌다

  달려가보니 집 앞 개울가

  미나리아재비 앞에 앉은 별이 반짝거렸다  (3연 p.50~51)


  윽. 까마득한 별에 돌팔매질을 했더니 그게 똑 떨어져 미나리아재비 앞에 떨어져 반짝였다고? 그렇다. 별, 별 무슨 별? 정답은 반딧불이.


  반딧불이는 서둘러 간 발자국을 비추고

  그림자 따라간 달빛은 돌아오지 않았다

  내 건너 은행나무만 스러져가는 별을 쓰다듬었다  (부분. 같은 시 4연 p.51)


  예쁘장한 서정시. 이 책에는 주로 삶의 곤고함을 다룬 시, 생활시가 많은데, 역시 이웃들, 이젠 젊은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 환갑이 넘은 강씨 아저씨가 “마파람에 돼지 불알 놀 듯 하는” 동네 막내로 등장하니 보령 농촌도 심각하다. 시골 부동산에 관심있는 분은 조심하시라. 언제까지 땅값이 치솟을 줄 아시나? 진짜로 가 보면 귀신 나올 듯한 빈집이 널리고 널렸다.

  그래도 박경희는 이런 촌에서 시를 쓰고 산다.



  읎는 소리



  농약 비료 안 뿌리고 똥거름으로 밭농사를 지으면 월급을 주고

  땅이 더 거름질수록 해 월급, 달 월급, 별 월급을 준다면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까?


  어림도 읎는 소리


  써레질 끝난 논바닥을 환하게 바라보는 농부의 눈동자 속 소금쟁이와 개구리 울음소리가 출렁이고

  땅 한평에 먹고살 수 있을 정도의 상추, 가지, 고추, 쑥갓, 토마토, 오이를 심어 이웃과 나눠 먹을 수 있다면

  서로를 귀하게 여긴 밥상 위에

  살구꽃잎이 먼저 든다면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까?


  어림 반푼어치도 읎는 소리


  온 세상 귀퉁이를 반딧불로 비춘다면, 반짝이는 숨죽임에 바람의 춤을 춘다면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까?


  쓰잘데기읎는 소리


  곰팡이 핀 벽,

  바랜 3월 농사 달력에 삐뚤빼뚤 쓴 글자가 밭두둑처럼 길다


  구신 씻나락 까묵는 소리 고만허고 나와서 밭에 돼지똥거름이나 뿌리라고!   (전문 p.20~21)



  보통 글자체로 쓴 1, 3, 5, 7연은 다분히 시인이 하는 말이고, 굵은 이탤리체의 2, 4, 6, 8연은 보령 농촌에서 농협 빚에 쪼들리며 직접 농사를 짓는 농부나 시인의 부모 정도의 사람들이 댓거리로 하는 말처럼 읽힌다. 시인도 고향에서, 농사짓는 농촌에서 살기가 만만하지는 않을 거 같다. 시골 출신 74년생 범띠, 집에서 떠나 대학이라고 졸업시켰더니 집에 돌아와 (시집 읽어 짐작하는 바대로만 하면) 돈벌이도 안 하고, 시집도 안 가고, 농사일도 변변하지 않고, 절에 들어가 중질도 제대로 못할 거 같으면서, 조잘조잘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만 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 같다. 뭐 사는 게 다 그렇지만.

  나는 시인이 시와 시집을 구룡포에서 낳든, 보령시 농촌에서 낳든, 동네 사람들 사는 모습을 스케치한 것보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걸 훨씬 더 좋아한다. 이 시집도 마찬가지다. “절에 들어가 중질도 제대로 못”했을 거 같다는 추측도 이런 시에서 나왔다.



  폐사지를 걷다가



  오래전 비구니가 되겠다며 법당에 앉아 합장했다 깜박이는 전등이 부처님 말씀인 것처럼 머리 조아리다가 법당을 내려왔다 울리지 않는 범종이 귓가에 울렸고 스님 목탁 소리에 으스름달이 떠올랐다


  눈빛이 흔들리는 물빛이라,

  흔들리고 싶은 대로 흔들려야 한다는 말에

  절 마당 구석에 앉아 훌쩍이다가 문득,


  빈 절간을 지키는 개 반달이의 느린 걸음이고 싶어졌고 슬쩍 날아와 털신의 털을 뽑아 가는 박새 부리이고 싶어졌고 무너진 축대를 간신히 붙잡고 있는 목련나무를 스쳐 가는 바람이고 싶어졌고 극락전 앞 뒹구는 매미 허물이고 싶어졌다 바랜 단청 흐린 색으로 머물다 지워지고 싶었고 문살 나간 창호지 구멍이고 싶었고 그늘도 없는 폐사지에 머물다 간 구름이고 싶었다 요사체에서 병든 사내가 밟은 절 마당이고 싶었고 승복 말리는 빨랫줄이고 싶었다 그렇게 여러달 서성이는 발자국으로


  머리가 긴 비구니가 되어 그늘 많은

  도시로 돌아왔다   (전문.P.26~27)



  아무래도 옆집 할머니, 뒷집 할아버지 고생한 이야기보다, 공장에 다니다가 기계에 끼어 아내와 두 아이를 두고 숨 넘긴 동생의 직장 선배 이야기보다, 시인이 자기 자신을 말하는 것에 훨씬 공감한다. 모두 4부로 되어 있는 시집에서 자신에 대한 시는 1부에 몰려 있다. 물론 다른 재미있는 시도 많고, 박경희의 이 시집을 소개하는 많은 신문, 인터넷 자료 역시 위에 내가 올린 시를 인용한 건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읽은 시집에서는 내가 공감하는 시가 제일 좋은 법이다.


  이 시집 《미나리아재비》에서 각종 매체에 가장 많이 소개된 시를 첨부하며 오늘 독후감을 끝낸다.



  오소



  나가 구십 하고도 거시기 두살인가 세살인가 헌디도 까막눈 아녀, 젓가락을 요로코롬 놔도 뭔 자인지 모른당께, 그냥 작대기여 헌디, 할멈이 서울에 있는 병원에 수술받는다고 병달이 놈 손 잡고 올라갔잖여, 병달이가 무신 일 있으믄 편지 쓰라고 봉투에다가 주소는 적어두고 갔는디, 나가 글씨가 뭔지 오치게 알어, 기냥 알았어, 라고만 혔지, 그때는 산 넘어가야 전화가 있을랑 말랑 혔어 암만,

  어찌어찌 보름이 지났는디 이 할멈이 오지를 않는겨, 저짝에서 소쩍새가 쏘찌럭 소쩌 소쩌 여러날 우는디 환장허겄데, 혼자 사는 노인네들은 어찌 사나 몰러, 그나저나 수술받다 죽었으믄 연락이라도 홀 텐디 꿩 궈 먹은 소식이더라고,

  병달이가 써준 봉투 생각이 나서 종이 꺼내놓고 뭐라 쓰야겄는디, 뭐라 쓰야 헐지 몰라서 고민허다가 에라 모르겄다, 허고는 소 다섯마리 그려 보냈당께, 근디 할멈이 용케 알아보고 열흘 만에 왔더만, 나가 글씨보단 그림에 소질이 있는 걸 그때 알았당께   (전문 p.23)



  제목 “오소”는 五少: 휘파람을 부는 방법의 하나, 또는 嗷訴: 무리를 지어 호소함이 아니라, 소 다섯 마리, 5소. 할아버지가 수술받은 할머니한테 수술 잘 받았으면 “오소”했다는 말이다. 난 원래부터 형광등 기가 좀 있고, 별 생각 없이 읽었다가, 별 뻘짓을 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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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4-12-19 14: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나리아재비 앞에 앉은 별이 반짝거렸다‘
저는 미나리아재비 작고 노란 꽃잎을 떨어진 별이라고 했나보다 생각했더니 아니네요.

falstaff님도 시집 읽으시면서 시인을 상상하시는 걸 좋아하시나봐요. 저도 그런데 ^^

Falstaff 2024-12-19 14:54   좋아요 0 | URL
시인을 대강이라도 아는 것이 시 읽는 데 도움이 되더라고요. 사실 문학이란 게 사람 사는 일 아니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