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이 모조리 사라진다면
리처드 파워스 지음, 이수현 옮김, 해도연 감수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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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명 깊게 읽은 책 가운데 한 권이 리처드 파워스의 <오버 스토리>다. 시간이 좀 흘러 디테일한 스토리는 생각나지 않지만 미국 캘리포니아 솔러스의 숲을 파괴하지 말라는 시위 참여자들에 관한 이야기로, 예수가 지구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아메리카에서 자라던 오래된 나무들, 진정한 지구의 주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사람들의 투쟁을 각 등장인물들의 굴곡진 삶과 함께 뭉클하게 그린 작품이라고 기억한다. 이어서 읽은 작품이 <갈라테아 2.2>. 컴퓨터 프로그래머와 데이터 프로세서로 일 한 경력이 있는 리처드 파워스답게 거대한 고등과학 연구소를 배경으로 기계에 감정을 주입하려는 학자 등 인공지능, AI를 통해 기계에 신경망을 형성, 감정을 가진 기계를 만드는 내용이다. <갈라테아 2.2>는 읽으면서 무수하게 쏟아지는 컴퓨터 관련 전문용어가 넘기 힘든 진입 장벽 역할을 해서 그렇지 그것만 극복하면 누구에게나 추천할 만한 참 괜찮은 소설이다.


​  <새들이 모조리 사라진다면: 이하 “새들이”라고 씀>이 내겐 세 번째 읽는 리처드 파워스이며, 이것으로 우리나라에 번역 소개한 파워스의 작품은 다 읽는다. 책의 주인공 화자 ‘나’, 시어도어 번은 ‘미친개’로 통하던 한 사기꾼의 아들이자, 오수 정화조 청소부로 인생의 첫걸음을 내딛어 열네 살부터 알코올에 의존하는 시절을 시작했다. 잡다하고 작은 범죄와 공부라는 평행세계의 삶을 살던 시어도어, ‘시오’라고 불리던 ‘나’는 고등학교 졸업 무렵에 주정뱅이 견습생이었는데, 미친개와 이혼하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온 엄마네 회사에서 지원하는 장학금을 얻어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이후 술을 딱 끊어버리고 학업에 정진해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 대학에서 박사를 마치고, 지금은 우주생물학 전공의 태뉴어가 되었으니 이 정도면 아무리 기회의 나라 미국이라 해도 개천에서 용 났다고 해서 어색하지 않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개천에서 날아오른 미국 용은 용이 된 후에 절대 고개를 돌려 자기가 솟구친 개울을 쳐다보지 않는다. 시애틀에서 만난 작지만 행성 같은 여인 얼리사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다가 아들 울새, 로빈을 키워 아홉 살이 됐다. 불행하게도 공장식 사육을 반대하고 동물권을 주장하던 아내/엄마 얼리사는 2년 전에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도로에 불쑥 나타난 주머니쥐를 피하기 위해 핸들을 급히 꺾는 바람에 사고가 나 현장에서 즉사해버렸다. 남편 시오와 아들 로빈은 얼리사와의 추억과 상실감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시오는 로빈을 데리고 미친개 할아버지 대신 외갓집을 찾아 외조부모, 외삼촌과 이모 내외와 명절을 지내고는 했다. 절대 개천을 쳐다보지 않는다니까.

  아홉 살의 로빈은 학교에서 문제아로 낙인이 찍힌 아이다. 제이든이 유일한 친구였는데 로빈이 엄마 이야기를 꺼냈고 제이든이 교통사고 이야기를 했으며, 이를 모욕으로 느낀 로빈이 금속 보온병을 집어 제이든의 얼굴을 후려쳐 광대뼈 골절의 부상을 입혔다. 이게 처음도 아니다. 주로 로빈이 괴롭힘을 당하는 입장이었지만, 로빈은 자기 관심 사항이 아닌 것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반면, 집중하고 있는 일을 방해받거나 자신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해를 입으면 극도의 히스테리를 나타내는 증세가 있다. 네 명의 전문의가 진단을 했고, 이 가운데 두 명은 아스퍼거, 다른 두 명은 각기 강박장애와 ADHD 의견을 냈다. 로빈의 최대 관심사는 모든 생명 있는 것을 없애지 않는 것이다. 자연히 (아홉 살짜리가)채식주의자이며, 극도의 환경 보호자이며, 생명 종의 멸종을 위해 인류가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분히 엄마 얼리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넓은 의미에서 북미대륙의 숲을 보존하기 위해 지상 50미터 상공 위에 텐트를 치고 시위를 벌이는 <오버 스토리> 인물들과 유사점을 보인다.

  빠질 수 없는 등장인물이 오래 전 얼리사의 연인이기도 했던 심리학자 마틴 커리어. “디코디드 뉴로피드백”이란 시스템을 탐구하고 있는 학자로 기능성 자기공명 영상 장치인 fMRA에 AI를 연결하여 두뇌를 스캔하고 있었다. 이때 피실험자에게 공포, 놀라움, 비탄, 황홀 같은 이미지를 연상하게 하여 사람마다 특징적인 뇌의 움직임을 읽은 AI가 개인마다 독특한 감정 상태를 파악한다. <새들이>에서 이런 작업을 처음 만난 독자는 조금 낯설 수 있으나 이 아이디어는 <갈라테아 2.2>에서 기계에게 좋은 감정을 주입하기 위하여 하루 몇 시간씩 모차르트를 반복적으로 들려주는 괴짜 박사의 행적과 비슷하다. 설마 커리어 박사가 진행중인 “디코디드 뉴로피드백”이 정말로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 이건 작가 리처드 파워스가 화자 ‘나’ 시오의 입을 통해 말하듯 일찍이 SF 소설 2천 권을 독파한 내공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가상의 장치이리라. 이 장치를 통해 마틴 커리어 박사는 이미 죽어 몇 년이 지난 엄마의 뇌 스캔을 AI가 해석한 정서, 감정을 그대로 로빈이 습득하게 하여 상당한 시간 보통 사람들 속에서 잘 조화되어 지내기도 한다.


​  시각은 시어도어 번 선생의 가족으로 국한하면 싱글파? 아니, 홀아범 시오가 아스퍼거, 강박장애, ADHD 가운데 하나일 로빈과 생활 또는 생존하는 힘겨운 삶을 그린 작품이라 볼 수 있다.

  로빈은 어려서부터 잠을 잘 자지 못하고, 한 계절에 몇 번씩 야뇨 증세를 보여 침대를 적셨으며, 소음에 매우 민감하고, 세탁기 위에는 반드시 원숭이 인형이 있어야 하는 등 다양한 것에 집착하는 성향을 보였다. ‘나’를 뺀 사람들은 한 번에 이해하기 힘든 발음으로 이야기하여, 작품 속에 로빈의 대사는 따옴표가 아니라 작은 따옴표를 사용해야 할 정도였다. 합성섬유가 닿으면 끔찍한 습진이 발병하고, 수시로 발작적 비명을 질러대는 등 사회성이 결여되어 동급생들의 잔인한 험담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야기한 것과 같이 생물종의 항상성에 대단한 관심이 있어 모든 죽어가는 것에 지독한 히스테리를 보여 후반부에 아빠 시오가 운전 중에 다람쥐를 로드 킬 하자마자 마틴 커리아 박사가 상당히 괜찮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치유를 다시 원위치 시켜 버리는 첫 번째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학교에 적응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아서, 로빈은 시오에게 홈 스쿨링을 하겠다고 요구하고, 그대로 된다.

  홈 스쿨링을 하기 전에 작품 속에서 로빈이 얼마나 적응하지 못하는지를 독자에게 이해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작품은 아빠가 아들을 데리고, 십 년 전에 시오와 얼리사가 탐조 여행을 왔던 스모키 산맥에 야영을 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천문학자 아빠는 하늘에 빈틈없이 10의 29 제곱 만큼 달려 있는 별을 올려다보며 지능을 가진 외계 생물이 살고 있는 행성이 은하계에 얼마나 많은지, 이런 은하계가 또한 얼마나 많은지, 이야기하며, 드바우 행성과 팔라샤 행성, 펠라고스 행성 등 아빠가 지은 지능생물이 존재하는 별들에 관한 상상으로 아름다운 추억을 만든다. 이렇게 가상의 행성을 꾸며내는 일은 책의 전편을 통해 로빈의 심리를 달래거나, 좋은 쪽으로 고양시키거나 할 때마다 수시로 등장한다. 그러다 결국 학교를 자퇴한 이후에 우주생물학 교수 시어도어 번 선생은 커리큘럼을 교육청에 제출하고 직접 아들을 교육시키며, 로빈의 의사결정을 실행할 수 있게 배경을 만들어주는 등 헌신을 하느라 종신교수 직을 취소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로빈에 대하여 한 마디. 일찍이 엄마 얼리사는 죽기 전에 남편 시오한테 로빈이 나이는 어리지만 속에 완전한 성인이 들어 있는 것 같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한다. 작품 속에서 작가가 등장인물을 통해 이 비슷한 언급을 하면, 그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십중팔구다. 마치 소설 속 예언자나 무당의 말이 언제나 들어맞는 것처럼. 파워스의 원작이 그런지, 번역을 하면서 역자 이수현이 아동이 쓰는 말을 사용하지 않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로빈은 행동이나 말이 절대 아홉 살, 열 살짜리가 아니다. 몇 단계의 과정을 거친 제대로 익은 성인만이 생각하고, 제안하고, 발언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을 쉽게 해치워버린다. 본문에도 여러 차례 나오는 것처럼 로빈의 성향을 가진 아이들 가운데 소수는 특정 부분의 천재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 그걸 무슨 “스펙트럼”이라 하는 모양인데, 로빈 역시 이 범주에 든다고 여길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너무 자주 그러면, 좀 징그럽다.


​  이렇게 사람 사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책을 읽는 내내 아빠 시오가 불쌍했다. 물론 미국식 규범에 따른 창작이어서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오직 아들 로빈. 아이를 위한 인생. 실제와 달리 선거에 불복한 대통령이 3개월 후에 다시 시행한 대선을 통해 재선에 성공한 후, 자신을 비롯한 모든 천문학자, 외계생물학자들의 꿈이었던 프로젝트 예산이 거부당하는 불행이 닥치는 와중에도, 자신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란 행성이 아니라 아내 얼리사, 아들 로빈이라는 각기 다른 행성에서 살고 있었음을 확인해야 하는 외로움의 발견. 그렇게 살지 말아라, 말아라. 너를 위해 살기도 해라. 책을 읽는 내내 끊임없이 시오에게 속삭였지만 그는 이미 죽은 얼리사, 그리고 로빈을 끝내 놓지 못한다. 홀아범 시오가 불쌍했다. 미국식 가족주의의 끝장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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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3-09-28 0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버 스토리의 첫 세 쪽을 못 넘겨서 멋진 표지의 책은 그냥 묵혀두고 있어요. ˝새들이˝는 제목으로는 카슨과 비슷한 분위기려나 싶었는데 줄거리 소개를 보니 각오를 하고 읽어야겠군요. 아이의 고생담은 겁이 납니다. 대신 ˝갈라테아2.2˝에 흥미가 동해서 장바구니에 넣었습니다. 리뷰 잘 읽었습니다. 명절 잘 보내세요. ^^

Falstaff 2023-09-28 07:51   좋아요 2 | URL
유부만두님, 갈라테이아 2.2, 진입장벽이 무지무지해요! 전 그것 때문에 별점 하나 깎았다니까요. 이 책은 파워스 작품 치고는 좀 간결한 편이라고 합니다. 걍 팍 읽어버리세요.
명절 잘 쇠세요. 살 찌지 않을 정도만... ㅎㅎㅎ

망고 2023-09-28 08: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버스토리 좋게 읽어서 이 책도 궁금했는데 자세한 리뷰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3-09-28 08:25   좋아요 2 | URL
좋은 마음으로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책 재미있습니다. 도서관에 틀림없이 있을 터이니 읽어보시면 좋겠군요.

coolcat329 2023-09-28 16: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버 스토리>를 너무 감명 깊게 읽었기에 이 책을 나오자마자 도서관에 신청해서 읽었는데 열 장 정도 읽다 말았어요. 처음부터 무거운 분위기 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집중이 잘 안되더라구요. 폴스타프님 리뷰읽으니 역시 그렇군요. 이 작가에게 저는 조금 존경심도 가지고 있어서 이 책 다시 도전해 보렵니다.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3-09-28 17:56   좋아요 1 | URL
ㅎㅎㅎ 읽으면 읽을수록 잘 읽힙니다. 걍 달려보세요. 나름대로 재미도 있고요.
날이 좋습니다. 책보다 시절을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오랜만에 낮술에 취해 지금 바야흐로 유토피아랍니다. ^^
명절 잘 쇠세요!

coolcat329 2023-09-29 06:55   좋아요 1 | URL
폴스타프님도 즐거운 명절 되세요!
 
글자를 옮기는 사람 제안들 37
다와다 요코 지음, 유라주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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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읽은 <지구에 아로새겨진>이 인상 깊어 곧바로 도서관 상호대차 신청한 책. 받고 보니 본문이 75쪽에 불과해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 <지구에 아로새겨진>과는 완전히 다르다. 짧은 작품이라고 해서 쉽게 읽히리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절제된 감정의 건조한 비유로 쓰였다. 주인공 화자 ‘나’의 심리, 처한 상황 같은 것을, 예를 들어 우리도 흔하게 말하듯이 “마치 ~한 것 같았어” 할 때의 상황과 인물을, “마치~ 같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런 일이 생기고 그런 사람이 등장한 것처럼, 생각 속 인물이 화자의 앞에 나타나 함께 행위하고, 대화하고, 간섭해 독자를 혼동시킨다.

  작가는 전에 얘기했듯 1960년 일본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 러시아 문학과를 졸업한다. 79년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독일에 다녀온 일이 인상 깊어, 1982년 독일로 이주했다. 이후 독일에서 시인, 소설가로 활약하며 함부르크 대학과 취리히 대학에서 각각 독문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는데, 모국어를 떠난 작가의 숙명이 <지구에 아로새겨진>에 잘 드러나 있다. 이이는 독일어와 일본어로 작품활동을 했으며 간혹 두 개의 언어로 같은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리하여 당연히 다와다는 한 국가의 작품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행위, 즉 번역에 대하여 깊이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글자를 (다른 글자로) 옮기는 사람, 즉 역자의 행위가 어떤 의미인지 자신의 의견을 펴 보이는 작품이 바로 이 <글자를 옮기는 사람>이다.

  작품 속 화자 ‘나’는 안네 두덴 Anne Duden의 작품 <알파벳의 상처>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겠다고 자진해서 잡지사에 제안한 역자이다. 친구의 형제 자매인 내과의사가 별장 용으로 구입해 놓고 정작 자신은 별로 가서 쉬지도 않은 카나리아 제도 무리Muri 섬의 언덕배기 2층 주택에 혼자 머물고 있다. ‘나’는 절대로 관광객이 아니며 오직 번역을 하기 위한 노역의 장소로 카나리아 제도를 택했다는 것을 수시로 확인하고, 섬 주민한테도 알리고 있다.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지역의 주민들은 그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오는 현금으로 지역 경제의 상당한 부분을 충당하면서도 관광객에 대한 나쁜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이 보통이라 그런 감정을 피하려고 한 점도 부인하지 못할 듯하다. 해수욕은 물론 수영이라는 운동을 별로 즐기지 않는 ‘나’는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집이라고 해도,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에 불만이 없다. 바다와 집 사이에는 예전에 교도소로 쓰이던 바나나 농장이 한 줄로 심은 선인장을 경계로 저편에 들어서 있다.

  안네 두덴이 쓴 <알파벳의 상처>는 “<성 게오르크 전설>의 그림을 보며 떠올린 단상을 글로 쓴 8쪽 분량의 소설”이라고 역자 유라주의 해설에 쓰여 있다. 기사 게오르크가 리비아를 지나다가 공주가 용의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긴 창으로 찔러 용을 죽이고 대신 온 백성을 그리스도교로 귀의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후에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를 받아 참수를 당해 성인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작품은 이렇게 시작한다. 따옴표도 없이.


​  “에서, 약, 구십 퍼센트, 희생자의, 거의 다, 항상, 땅바닥에서, 누운 사람, 으로서, 죽을 힘을 다해 들어 올린다, 미리, 구경거리로 삼아져, 이다, 공격 무기, 또는, 그 끝, 목에 찔린 채, 또는….” (11쪽)


​  다행히 며칠 전에 <지구에 아로새겨진>을 읽어보아, 이런 표현이 전작의 주인공 Hiruko가 스칸디나비아 반도 어떤 나라의 언어도 아니면서 누구나 들어서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언어를 사용할 때, 완전한 문장이 아니라 필요한 단어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것과 매우 유사한 것을 발견한다. 다만 이 작품의 경우 위에 인용한 것들은 극단적인 단어나 구절로 되어 있어서 그저 독일어로 쓴 문장을 단어나 짧은 구절마다 적절한 다른 언어로 바꾸어 놓은 것이긴 하지만. 역자라는 사람은 위 인용한 단어와 구절을 자신의 머리 속에서 적절하고 타당하게, 해당 언어의 습관에 맞추어 재배열하는 직업인을 말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다는데 애로가 있다.

  도무지 번역의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원래 ‘나’의 습관이 만날 해야지, 해야지 마음은 먹지만 일이 지지부지, 흐지부지 시간만 죽이다가 마감 하루를 앞두고 벼락같이 해치우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유달리 고전을 면치 못한다. 그게 마음 속으로 걱정만 하는 수준이 아니다.

  난데없이 햇빛 알러지가 생겨 오른팔 손목부터 팔꿈치 부근까지 시큰거리고 가려워지고, 저 아래 바나나 농장을 생각하면 가려움의 정도가 참을 수 없을 지경에까지 이른다. 그래서 벅벅 긁다 보면 왼손 손톱 아래가 포도주 색깔이 되기도 한다. 바나나 농장의 경계선 또한 점점 ‘나’가 묶고 있는 집 가까이 치고 올라오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정말로 그런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경계선 역할을 하는 선인장이 몇 그루나 되나 세어 보기도 하지만 언제나 다 세는 데는 실패하고 만다.

  ‘나’는 엄연히 관광객이 아니라 일을 하기 위해 섬에 들어온 생활인으로 몇몇 지역 주민들과 교류를 하기도 한다. 아무리 섬에 왔어도 먹어야 사니까 식품가게와 생선가게 주인하고는 나쁘지 않은 관계를 맺어 두는 편이 좋고, 번역을 다 마치면 만년필로 쓴 원고를 보내야 하니까 우체국 직원과 특히 좋게 지내야 옳다. 그러다가 한 명 이상한 사람을 만나는 바람에 독자를 잠깐 혼돈에 싸이게 만들기도 한다.

  갑자기 “작가”가 나타난다. 나는 처음에 이 작가라는 사람 역시 카나리아 제도에 휴양차 또는 작업차 방문해 머물고 있는 다른 객체라고 생각해 아무 생각없이 그저 따라 읽었다. 근데 뭔가 조금 이상했다. 그러다가 이 작가라는 사람의 정체가 바로 ‘나’가 번역해야 하는 여덟 쪽짜리 단편소설 <알파벳의 상처>를 쓴 안네 두덴이었다. ‘나’는 작가와 함께 섬의 이곳 저곳, 섬에서 가장 높은 곳, 화산섬의 분화구에까지 오르기도 하고, 작가는 화산이 분출한 자국인 칼데라까지 직접 내려가 보기도 한다. 난 이 장면을 작가와 역자의 교감 정도로만 생각했지만, 역자는 이 만남을 “번역가와 작가가 마주하는 과정”이라고 하며, “번역가가 ‘작가의 등 뒤에 숨어서 작업하는 직업임을 상징한다”고 딱 박아 놓았다.


​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 불만이 있었다. 딱 그 부분을 해설에서도 인용하고 있다.


​  “어쩌면 번역은 전혀 다른 것일지도 몰랐다. 이를테면 변신 같은, 단어가 변신하고 이야기가 변신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뀐다. 그리고 마치 처음부터 그런 모습인 양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늘어선다.” (23쪽)


​  이에 역자 유라주가 해석을 하기를,

  “번역은 원본이 다른 언어로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원본이 변신하는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번역문은 원본과 전혀 다른 새롭게 태어난 글이고 그 이질성만으로 충분히 원본과 다른 가치가 있다.” (92쪽)


​  맞는 말이다. 그러나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원본이 변신하는 움직임인 것은 확실하지만, 역자는 해당 언어의 전문가이며 동시에 번역 언어의 전문가이기도 하니까,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고로 원본과 유사하게 변신해야 하는 책무가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번역이 제2의 탄생이니 제2의 창작이니 주장하는 것을 십분 이해한다고 해도 그렇다. 물론 역자 나름대로 고충이 있겠지.

  나는 최대치로 여기까지 양해할 수 있다. 만일 셰익스피어가 작곡가라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셰익스피어 역자 신정옥을 연주자로 비유하는 것까지. 셰익스피어가 중세 영어로 쓴 오리지널 악보를 작곡했다면, 여러 명의 배우, 악기가 등장하니 합주곡이나 교향곡이라고 치고, 악보를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 청중에게 들려주는 지휘자가 역자 신정옥의 몫이라는 정도. 당연히 이 때도 연주자, 지휘자는 셰익스피어의 원본 악보를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의 해석이어야 한다.

  다와다 요코는, 역자가 저 대서양의 카나리아 제도, 이 중에서도 작은 섬의 하나인 무리 섬에서, <알파벳의 상처>를 번역해 최종적으로 항공우편으로 보내려 할 때, 정말로 성 게오르크가 세 번이나 나타나 우편 발송을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장면도 연출했다. 번역에 손을 못 대고 있을 당시엔 엉뚱하게도 애인이라고 주장하는 게오르크가 독일에서 도착할 거라는 연락을 받기도 하고. 이런 스트레스 속에서의 번역작업. 쉬운 게 아니다.

  그런데 말이지, 다와다 요코 선생, 세상에 남의 돈 받기 쉬운 거 있으면 번역 말고 나한테 하나만 가르쳐주면 안 되시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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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3-09-26 07: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번역가의 책을 읽은 직후라 다와다 요코의 이야기가 더 의미심장하게 읽힙니다. 안톤 허 번역가가 이 이야기 속에 등장했더라면 한판 큰 논쟁이 벌어졌겠지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3-09-26 07:06   좋아요 1 | URL
옙. 저도 게시하신 글 잘 읽었습니다. ^^
이 책은, 사시라고 까지는 말 못하겠고요, 기회가 닿으면 읽어보셔도 좋을 겁니다.

수이 2023-09-26 08: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번역까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언어에 사로잡혀본 이들이라면 다와다 요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체감상 좀 더 쉽게 다가올 거 같긴 해요. 저도 이 책은 읽지 않았는데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봐야겠어요. 다와다 요코는 읽기 편한 작가는 아니지만 이런 식의 글쓰기를 하는 이들이 한국에는 누가 있더라 하고 홀로 물어본 적도 있어요.

Falstaff 2023-09-26 16:20   좋아요 0 | URL
모국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작가들의 이야기는 사실 드물지 않긴 합니다만 읽을 때마다 마음이 짠한 건 어쩔 수 없더라고요. 도서관 이용하신다니 탁월한 선택입니다. 저도 이이의 다른 작품을 희망도서 신청을 해서 찾으러 오라네요. 연휴 끝나는 날에 가보려 합니다. 매력적인 작가더군요.

반유행열반인 2023-09-26 0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코 다와다 요코 선생께서 아직 전화 안 주셨나요? 도로 팔백작님이 되셨네요... 닉네임처럼 사람 처지도 요렇게 저렇게 쉽게 바뀌면 좋겠네요ㅋㅋ쉬운 게 어딨겠어...

Falstaff 2023-09-26 16:22   좋아요 1 | URL
아이고, 연락 오면 어련히 알려드릴까봐.... ㅋㅋㅋㅋ
골드문트가 매력적이긴 하지만 너무 젊은 캐릭터라서 다시 원복했습니다. 흑흑흑... 전 꼰대예요, 꼰대.

반유행열반인 2023-09-26 16:54   좋아요 1 | URL
그냥 네이버 알라딘 통틀어 꼰백작님으로 해드릴까요? ㅋㅋㅋㅋ골드에서 따서 각각 골 드(드미트리도 되니까) 금벼락 맞으시라고 칭해드렸는데 팔백작은 앞에 영어 씨 하나만 붙이면 존칭이 아니라 싸우자 주정뱅이! 느낌이네요 ㅋㅋㅋㅋ 그냥 어이 주정뱅이, 할까요? ㅋㅋㅋㅋ (기껏 묻고 아무려나 지맘대로 할 듯)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10
재닛 윈터슨 지음, 김은정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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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넷 윈터슨이라면 문학동네에서 찍은 <무게>를 읽고, 작품이 아니라 하도 널럴하게 편집을 한 출판사가 미워서 정나미 뚝,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근데 이번에 <무게>를 쓴 “재닛” 윈터슨의, 민음사가 이젠 종간/절판한 시리즈 모던 클래식 10번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이하 “오렌지”로 씀>를 읽고 나서, 아 이 사람이 <무게>와 <예술과 거짓말>을 쓴 바로 그이구나, 하고 무릎을 쳤다. 심지어 <예술과 거짓말>은 독자들의 평이 좋긴 하지만 어째 혹,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아 여태 책방 보관함에만 몇 년째 묵히고 있다. 뭐든지 첫인상이 중요하다니까 그래.

  <오렌지>는 윈터슨의 데뷔작품으로 1985년 영국 문학계의 최우수 신인상 격인 휘트브레드 상을 받았다. 픽션이니까 반드시 작품과 같지는 않겠지만 작가가 작품에 실명 등장하는데 지넷 젤리다, 라는 이름이다. 윈터슨은 이이가 결혼해 시댁 성을 따른 것이겠거니 했으나, 열여섯 살 때,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자신이 레즈비언인 것을 커밍 아웃하여, 책의 앞날개에 의하면 한 소녀를 사랑하게 된 것을 양부모에게 들키는 바람에 스스로 집을 나왔거나 쫓겨났다. 둘 다 그럴듯하다. 근데 왜 ‘양부모’냐고?

  지넷 윈터슨은 1959년 8월 맨체스터생이다. 낳자마자 버려져 보호소에 있다가 5개월 만인 1960년 1월에 독실한 성령강림교회 신자인 콘스탄스와 존 윌리엄 윈터슨 부부에게 입양되어 위에서 말했듯 열여섯 살까지 자란다. 그러니 책 속에서 ‘젤리다’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은 픽션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겠다. 내가 지금 말은 ‘독실하다’ 라고 하지만, 책을 읽어보면 전형적인 교조적 목사에 의하여 세뇌당한 신자, 개신교니까 성도聖徒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그런 부류다. 설마 성령강림회라는 교파가 그리 하겠는가? 하필이면 해당 교파에 속한 몇 목사들이 1960년대와 70년대 임에도 불구하고 지옥의 고통과 악마와 사탄에 의한 인격 지배, 마법사와 마녀 등등 19세기도 아니고 18세기에도 야만스럽다고 여겼을 무지막지하게 덜 떨어진 미신적 숭배의식을 지넷의 (특히) 어머니에게 주입시켰으며, 이에 몰두한 양어머니가 지넷에게도 애초에 <제인 에어>의 제인처럼 선교학교를 졸업한 후에 여성 선교사가 되는 방향으로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었을 것이다.  실제로 작품 속에서 목사와 지넷의 양어머니는 지넷과 다른 소녀에게 근엄한 엑소시즘 의식을 행하기도 한다. 세상에 엑소시즘이 어딨니? 그리스도교를 빙자한 주술일 뿐이고, 우리는 이런 주술을 동종의식, 엑소시즘 치료를 동종요법이라 칭한다. 자세한 것은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의 역작 <황금가지> 참조하시라.


  책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의 순서대로 모두 8부로 되어 있다. 이런 차례를 가지게 된 것은 양부모 가운데 아버지는 레슬링을 TV로 보기 좋아했고, 어머니는 레슬링을 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나이든 어머니가 정말 레슬링을 했겠는가? 성격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딱 두 가지로 구분해서 오직 친구 아니면 적으로 상대를 했다는 말이지. 친구는 하느님과 키우는 강아지, 마지 이모 그리고 <제인 에어>를 쓴 샬롯 브론테, 민달팽이 퇴치용 알약, 그리고 주인공이자 화자 ‘나’이며, 쳐부셔야 할 적은 다양한 모습을 한 사탄, 옆집 인간들, 여러가지 형태의 섹스와 민달팽이다. 민달팽이? 그냥 생긴 게 징그러워서. 하여간 어머니는 적들이 판치는 세상을 상대로 벌이는 태그매치에 끌어들이기 위해 나를 입양해 그리스도의 딸로 키우는 거 같다. 어머니의 기독교관은 굳이 비교하지 않겠지만 철저하게 구약성서적이다. 즉, 온화한 부활절의 양sheep을 찾는 대신 예언자들과 함께 최전방으로 참전하여, 신의 저주와 파괴가 구체화되지 않으면 울화가 치밀어 버글버글 거품을 물기 일보직전까지 갔다. 이런 어머니가 화자 ‘나’에 관한 꿈이 있었으니, 아이를 얻고, 훈련하고, 단련한 뒤에 신에게 바치는 거였다. 전도하는 아이, 주님의 종. 그리하여 구약성서적이라니까 야훼의 은총을 받아 날을 잡아 별을 따라갔고, 별은 고아원 위에 멈춰 섰고, 구유에 누인 머리숱이 너무도 짙은 아이를 발견하여 집에 데려와, “이 세상은 온통 죄악으로 가득하단다, 네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단다.”라고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며 뇌 속에 거듭, 거듭 새겨 자신이 원하는 아이를 만들었다니까, 어뗘? 하느님이 세상을 만든 ‘창세기’와 비슷해?

  어머니가 적들의 세상으로 진입하는 관문인 학교에 ‘나’를 보내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정부당국은 될 수 있는 대로 취학을 뒤로 미루는 어머니에게 드디어 최고장 비슷한 서신을 보냈다. 이제 지넷을 입학시키지 않으면 재판을 받아야 할 처지에 놓은 어머니는 눈물을 머금고 ‘나’를 학교에 입학시킬 수밖에 없게 됐고, ‘나’는 드디어 세상이 열려 본격적으로 집과 교회의 밖으로 나가게 된다. 그리하여 이 부part의 제목이 출애굽기. 구약성서에는 기記 마다 거의 빠짐없이 다 쳐죽이는 장면이 활발하게 나오지만 출애굽기의 모세만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애굽인들의 씨알까지 싸잡아 죽이는 일도 거의 없다. 그러니 모세도 아니고 하다못해 아론도 아닌 일개 어린 아이 ‘나’가 세상으로 나가는 일이 쉬울 수가 없을 터. 그래도 ‘나’를 도와줄 친구가 한 명 생긴다. 엘시 노리스라는 이름의 여자. 1차 세계대전에서 구급차를 운전하기도 했던, 이가 모두 빠져 호물호물한 잇몸으로 음식물을 대강 오물거리다가 꿀떡 삼켜버리고 마는 엘시는 시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하여, 살면서 우여곡절을 많이 겪은 윌리엄 블레이크를 들먹이면서, 세상은 괴짜들에게 아무도 귀를 기울여주지 않는 법이라고 충고한다. 왜냐하면, 어려서부터 끊임없이 교조적 기독교에 물들어 학교에서도 계속해 지옥과 악마를 언급하는 ‘나’가 시간이 조금 지나자 교사와 학생 모두가 ‘나’를 피하는 상황에까지 몰리게 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출애굽 시기에는 낮엔 구름 기둥이, 밤엔 불기둥이 이들을 인도해주었지만, ‘나’는 온통 혼란스럽게 만들 뿐인 견디기 어려운 안게 속을 헤매야 했다. 집과 학교가 서로 다른 가치와 윤리를 요구하니 말이지.

  엘시 노리스는 작품 속 교회에 속하는 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나’에게 애정을 갖고 진심을 다하는 인물이다. 저 뒤편으로 가면 작품이 끝나기 전에 생을 다 하고, 마지막 가는 길의 장례의식을 ‘나’가 바라다 주지만 그때는 이미 ‘나’의 동성연애가 발각 나, 사기꾼 급 교조주의 관점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핀치 목사가 시켜, 사탄에 의하여 저질러진 동성애를 고백하고, 반성하고, 회개하여 다시는 비슷한 생각도 행동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도 또다시 비슷한 일을 저질러 집과 교회에서 추방당한 뒤라서 교회의 누구도 자신을 아는 체하지 않는다. 심지어 어머니까지. “저 애는 내 딸이 아니예요.”

  3부 레위기에서 사춘기를 맞기 시작한 ‘나’는 핀치 목사의 개소리를 듣게 된다.

  완전함이란 흠이 없는 것으로, 우리가 간절히 바라야 하는 것으로 타락하기 전 남자의 지위가 그것이며, 오직 천국에서만 실현할 수 있는 경지라고.

  ‘나’가 보기에 남자는 그저 남자. 아무 의미도 없이 무해하게 존재하는 생명체일 뿐이다. 이때부터 ‘나’에게 동성에의 특성이 발현됐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본격적으로 자신 스스로가 알게 되는 것은 4부인 민수기 부터이다. 민수기에 들어와서 ‘나’는 두 가지 특별한 발견을 하게 된다. 어려서 부터 어머니가 잠들기 전에 읽어주었던 소설 <제인 에어>를 정식으로 꼼꼼하게 읽어본 것. 선교학교를 졸업하게 독실하게 믿음의 길로 접어든 제인이 성자 존이 아니라 로체스터에게 돌아간 것에 ‘나’는 심각한 충격을 받는다. 이 충격을 얼마 전에 카드 새것 한 벌을 찾기 위하여 집안 구석을 뒤지던 중에 우연히 서명이 된 자신의 입양서류를 발견했을 때와 같은 정도의 충격이었다. 입양서류가 ‘나’의 출생의 비밀에 관한 것이라면, 제인이 로체스터를 선택한 것은 ‘나’가 만일 선교학교를 졸업하더라도 교회가 아니라 사랑을 선택할 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그게 더 바람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사람들과 시내에 나갔고, 생선가게를 들렀는데, 우연히 가게 뒤편에 가보니까 생선을 손질하는 여자가 있었다. 옆집 고양이처럼 사랑스러운 회색 눈동자를 가진 멜라나. 멜라나에게 호감을 느낀 ‘나’는 멜라나를 “전도”하기에 이르러 함께 교회에 가기도 하지만,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이들을 깊은 관심과 우려의 눈길로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둘 만 몰랐다.


  작품의 주인공 ‘나’와 같이 작가 지넷 윈터슨도 이리하여 16세 때 집에서 쫓겨나, 처음 일자리를 갖는 곳이 장례업체였다. 장례식에 참여한 문상객들을 대상으로 아이스크림을 팔다가 업체의 일을 도와주기 시작한 것이지만. 이후 간호 조무사로 정신병원에 정직원으로 취직하는 한편, 애클링톤 앤 로젠데일 대학을 거쳐 옥스포드에서 영문학을 전공한다. 나중에 <오렌지>를 써 작가로 데뷔하고, 몇 년 후 <오렌지>가 드라마 영화로 제작되는 바람에 명성과 현금을 솔찮게 지니게 되지만, <오렌지>에서 ‘나’는 작가 데뷔 전에 양어머니를 찾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냥 세월이 흐른 것이다. ‘나’를 쫓아낸 어머니도 나이를 먹었지만 여전히 교조적 기독교도로 있다. 다만 어머니가 의지했던 교회 목사들과 부속 단체들이 난감한 처지에 빠져버렸을 뿐. 세상이 다 그렇지. 사는 건 어떻게 해서든지 그렇게 행복하게 가지 않는 법이거든.

  재미있게 읽었다. 이제 그동안 미루어왔던 <예술과 거짓말>도 앞 순서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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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9-22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화요일, 다와다 요코 <글자를 옮기는 사람>
목요일, 리처드 파워스 <새들이 모조리 사라진다면>
금요일, 유이우 <내가 정말이라면>

자목련 2023-09-22 09: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와다 요코의 <글자를 옮기는 사람> 궁금하네요.

Falstaff 2023-09-22 10:59   좋아요 0 | URL
옙. 재미있었습니다. 도서관에 또 다와다의 다른 책 희망도서 신청했습니다. ㅎㅎ

coolcat329 2023-09-22 15: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내용이군요. 각 챕터가 성경인 점이 특이하네요. 읽으면서 저 양부모때문에 혈압이 오를 거 같습니다.

Falstaff 2023-09-22 17:01   좋아요 1 | URL
양아버지는 레슬링을 보는 걸로 만족하는 부류라서 주인공 ‘나‘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 널리고 널린 아버지란 종족들처럼요. ㅋㅋㅋㅋ
하여튼 재미있습니다. 중고장터에서 살 수 있습니다. 도서관을 이용하시면 훨씬 좋고요. 쿨캣님도 즐기시면 저도 기쁘겠습니다. ^^
 
금색 큐큐클래식 6
미시마 유키오 지음, 정수윤 옮김 / 큐큐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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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예항 읽은 걸로 땡 쳤어야 하는데 시간 아깝게 다 읽었다. 미시마 유키오 하는 짓이 다 그렇듯 탐미주의를 빙자한 사드와 드 라클로 흉내내기. 극적 여혐. 현란한 단어의 남발. 돈 주고 산 분들 복장 좀 터질 듯. 명작을 못 알아보는 내 눈이 삐었을 지도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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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3-09-21 1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 골백작님 덕에 오후의 예항
갖춰놨는데 (이상하게 백작님이 우웩 하는 책만 관심이 감) 이 책은 착하게 안 사겠습니다ㅋㅋㅋㅋ

Falstaff 2023-09-22 08:35   좋아요 0 | URL
옙. 이 책 거르시는 편이 좋습니닷! ㅎㅎ

유부만두 2023-09-21 2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금’이 그 ‘금’이 아니네요? 한글 제목만 보고 golden color 생각했어요. 금각사 떠올리고요.

Falstaff 2023-09-22 08:37   좋아요 0 | URL
禁色 색을 금하다. 색을 끊다. 뭐 이런 뜻입지요.
이때 색은 사랑, 연애 아니고요 ㅋㅋㅋ 색을 밝히다, 색을 탐하다, 할 때의 색, 그러니까 허리하학적인 건데, 하여튼 신중하게 선택하시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3-09-22 08:38   좋아요 1 | URL
그걸 왜 끊는대요 끊는 거 좋아하니 자기 내장도 끊고 막 그러지....

잠자냥 2023-09-21 2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복장 걱정을 늘 해주시는 골드문트!

Falstaff 2023-09-22 08:38   좋아요 0 | URL
아, 이 책 사셨지요? 그럼 읽으셔야지요. 돈 아까운 것이 복장 문제보다 더 큽니다!!

잠자냥 2023-09-22 08:46   좋아요 1 | URL
네 ㅋㅋㅋㅋㅋ 아놔 그래도 읽어야죠 샀으니. ㅋㅋㅋㅋ
 
지구에 아로새겨진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7
다와다 요코 지음, 정수윤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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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창세 신화에 이자나미 여신과 이자나기 남신이 나온다. 이자나미는 아자나기의 동생이자 아내로 두 신은 하늘에서 창을 바다에 꽂아 휘휘 저어 육지가 솟아올라 일본 열도를 만든다. 지상에 내려온 신은 궁궐을 만들고 혼인, 즉 동침을 해 넓은 국토와 일본에 특별히 많은 여러 신god을 만든다/낳는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불의 신을 낳다가 이자나미는 생식기에 치명적인 화상을 입어 끔찍한 고통 속에서 구토를 하고 방뇨, 방분을 하면서 죽음에 이른다. 창조의 여신이 죽어가며 쏟아냈던 구토와 방분, 방뇨 속에서 진흙, 물, 곡물(토기에 농사지은 곡물을 요리한 것을 의미)의 신이 탄생한다. 이후 죽은 아내이자 누이와의 복잡한 갈등과 대결 같은 것이 있지만 생략하기로 한다. (두산백과 참조했음.)

  다와다 요코가 책에서 이야기하는 창세신화는 조금 다르다. 여러가지 버전이 있는지, 아니면 소설가의 픽션인지는 모르겠다. 이자나미와 이자나기가 일본 열도를 만들고 궁궐을 지은 다음에 동침해 맏이를 낳은 것이 딸 히루코 여신이다. 그러나 애초에 여신 이자나미가 먼저 이자나기한테 동침하자고 옆구리 쿡쿡 찌른 벌로 히루코蛭子(거머리) 여신은 신들의 기대치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허약체로 태어나 살이 마치 거머리 같은 수준이라서 맏이임에도 불구하고 축복을 받기는커녕 갈대로 만든 배에 실려 바다로 떠내려 보냈다. 다들 금방 죽었을 거라고 짐작하지만, 그걸 누가 알아?

  히루코 여신보다 한참 나이 어린 동생 가운데 스사노오라는 이름의 신이 태어났다. 무시무시하고 거친 청년으로 자라 여기저기서 폭력을 써 누나(거봐라, 바다에서 안 죽었다)를 힘들게 하더니, 말의 가죽을 벗겨 그걸 뒤집어쓴 채 피륙 짜는 젊은 여자를 위협하다가 와중에 베틀의 뾰죽한 부분으로 여자의 음부를 찔러 죽게 했다. 이 히루코와 스사노오는 작품 속에서 Hiruko와 Susanoo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Hiruko는 모르겠고, Susanoo의 나이는 상당해서, 십대 후반 기껏해야 이십대 초반의 에스키모 청년 나누크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식당 주인의 할아버지와 동업을 하다가(할아버지의 비슷한 또래라는 말씀), 한 야성적인 여자 카르멘을 쫓아 남프랑스 아를에 정착했는데 오랜 세월이 흘러도 놀랍게도 거의 늙지 않은 외모를 가지고 있다.

  젊은 모습의 나이든 Susanoo를 이해하기 위하여 일본의 전래 동화 하나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우라시마 타로라는 잘 생기고 가난하고 마음씨 고운 청년이 지나가다 보니까 아이들이 거북 한 마리를 잡아서 몹시 괴롭히고 있었다. 타로는 거북이 너무 불쌍해서 아이들을 혼내 쫓은 다음에 거북을 바다로 돌려보냈다. 며칠 후 바닷가를 거닐던 타로 앞에 거북이가 나타나 내 등에 타시오, 좋은 구경 한 번 해봅시다. 하는지라 그렇게 했더니 용궁에 도착했고, 수염이 허연 용왕 대신 공주가 나타나서 온갖 부귀영화를 다 선물해주었다. 이렇게 며칠을 보내고 이제 이별의 장면. 공주는 보석함을 기념 선물로 주더니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이게 가당한 이야기인가? 집에 돌아온 타로는 당연히 보석함을 열었고, 순간 보석함에서 피어나온 연기가 타로의 기도를 타고 폐로 들어가, 용궁의 열흘은 지상의 칠십 년이라, 단박에 일흔 살을 더 먹어버려 장가도 들지 못한 꼬부랑 할아범이 되고 만다. 용궁의 공주, 원래 이런 족속들이 하는 짓이 다 그렇다. 애초에 안 줬으면 될 거 아니냐는 말이지. 사람의 특징이 호기심인데, 누가 그걸 안 열어보고 배겨?


​  다와다 요코는 1960년생으로 와세다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탄 추억이 워낙 강했던지 1982년에 독일에 정착해 함부르크 대학 대학원에서 독문학을 공부하고, 이후 취리히 대학에서 독문학 박사를 취득했다. 독일 국적을 취득했다고 들었는데, 이중국적인지 일본 국적을 버리고 독일인으로 살고 있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작가가 모국어를 버리고 언어체계가 완전히 다른 나라에 가서 살며, 이국의 문자로 작가 활동을 시작하고, 상당한 정도의 성취를 얻는 일은, 우리가 밀란 쿤데라나 아고타 크리스토프 같은 몇 몇 특별한 천재들의 이름에 익숙해서 그렇지 이게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위의 두 작가는 그래도 어순이 비슷한 지역에서 서유럽으로 넘어간 경우인 반면, 다와다 요코는 완전히 문장 구조가 다른 동아시아에서 자란 다음에 낯선 문장체계로 진입해 더욱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독일어로 작품을 발표할 경우에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사용하는 빈도가 잦았다고 하는데, 이방의 언어로 글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로 활동하는 사람이 얼마나 자기 모국어에 대한 향수가 절절했을까? 이 책에서도 Hiruko는 덴마크를 포함한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들의 조금씩 다른 언어를 나름대로 편집해서 반도국들의 문장에 합당하지 않지만 이들 모든 나라 사람들과 충분할 정도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나름의 언어를 만들어 사용한다. 그러나 자신의 모(국)어를 사용하면 당연히 더욱 적절한 소통이 가능할 터인데 Hiruko에게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책의 후반에 같은 언어를 쓰는 Susanoo와 만나기 전에는.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는, 그러나 듣기만 할 뿐 한 마디도 할 의사가 없는 Susanoo에게 기총소사 같은 대화의 폭포를 쏟아낼 때에 자연스럽게 (이미 잊은 줄 알았던) “인연”같은 단어가 자신도 의도하지 못한 사이에 흘러나오는 것을 발견한다. Susanoo가 왜 한 마디도 모국어를 하지 않느냐고? 그가 말을 하는 것은 위에서 이야기한 옛이야기 가운데 공주가 준 보석함을 여는 행위와 같은 것이라서 그동안 유지한 젊음을 한 순간에 잃어버려 늙어 쪼그라든 노인으로 변할 위험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이런 것들을 합하여, 이 책의 주제는 독일, 유럽에서 자기의 말을 사용하지 못하는 작가의 초상, 모어에 대한 그리움, 그것을 찾아 떠나는 오딧세이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  책은 “Hiruko 삼부작” 가운데 첫 권이다. 2권은 은행나무 에세 시리즈의 12번으로 2023년 8월에 출간했고, 3권의 제목은 <태양제도太陽諸島>인데, 태양제도는 일장기와 섬나라, 즉 일본을 가리키는 거 같으며, 2022년 출간이라 했으니 지금 번역 중이지 않을까 싶다. 즉 1권만 보면 미완성 작품이란 뜻이지만, 여느 삼부작이 거의 그렇듯이 <지구에 아로새겨진> 역시 독립적으로 읽어도 좋다.

  디스토피아 적인 미래. 세상의 원자력 발전소가 차례차례 고장이 나서 물고기 개체수가 절대적으로 줄어들고, 온난화 역시 가속화된 지 오래, 그린란드에 사는 에스키모들도 사냥과 물고기 낚시 대신 빙하가 녹아 드러난 대지 위에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책에서는 계속 ‘이누이트’ 대신 ‘에스키모’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 말은 “눈 신발 끈을 묶는 사람”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란다. 반면에 다와다가 직접 소식을 듣고 심한 충격을 받았듯이, 세계 각지에 있는 원자력 발전소가 차례차례 심각한 고장을 일으켜 다량의 방사능 물질이 바다로 유입되는 바람에 바다 생물 개체수가 극적으로 줄어든 것도 에스키모들이 사냥을 하지 못하게 된 중요한 이유이다.

  세상은 변하는 법이라 그린란드는 오랜 식민지 시대를 마감하고 덴마크에서 독립을 쟁취했으나 여전히 포스트 식민주의라는 관계로 종속되어 있다. 덴마크는 세상이 다 알아주는 정치적 청결성과 비폭결성을 유지하고 있는 작은 나라로 비오는 수도 코펜하겐이 첫 무대다. 집에서 TV “사라진 조국”에 관한 토크 쇼를 보던 중요 등장인물 크누트는 화면에서 전혀 다른 인종의 여자를 발견하고, 그가 신기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단한 흥미를 느낀다. 그도 그럴 것이 크누트기 언어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방송국에 전화를 해서 여자를 만나 조금씩 가까워진다. 이 여자가 주인공 Hiruko. 중국 대륙과 폴리네시아 사이에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열도 출신으로, 열도가 침몰하기 전에 유럽으로 공부하러 왔다가 이젠 갈 곳이 없어진 인종이다. 다와다 요코는 열도 침몰을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빗댔다고 한다.

  Hiruko는 오덴세의 메르헨 센터에서 동화를 구현하는 일을 하고 있어서 역시 언어에 상당한 관심이 있다. 더군다가 자신의 모(국)어, 나라가 없어졌으니 그냥 모어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자신도 모르게) 애타고 찾고 있었다. 크누트가 내일 사라진 나라의 언어를 연구할 수 있는 연구 과제로 적당한 마을인 룩셈부르크의 고대 로마 도시 트리어에서 열리는 우마미 페스티벌에 갈 예정이며, 페스티벌의 초점은 Tenzo전좌典座, 불교 선원에서 식사, 의복, 방석, 이부자리를 담당하는 직책을 가리키는 이름을 가진 열도 사람이 일본 음식의 국물을 내는데 중요한 방식인 ‘다시’ 다시마, 가다랑어, 멸치 등을 적절하게 혼합한 첨가물에 관하여 강의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이에 혹한 Hiruko는 자신의 모어를 사용하는 사람과의 자연스러운 대화를 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득히 안고, 기꺼이 크누트와 함께 자신의 언어를 향해 대 항해를 시작한다.

  재미있는 책이다. 이런 작품이 늘 그렇듯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많은 우연이 작가가 사용하는 언어를 국어로 하는 나라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얽히게 구성을 해, 약간 억지스러운 대목이 눈에 띄긴 하지만 이 정도도 이해하지 못할 독자는 없을 것이다. 읽는 내내 작가 다와다 요코가 조금 짠했다. 이국의 땅에서 얼마나 모국어에 대한 향수가 절절했으면 이런 작품을 썼을까? 하긴 작가더러 유럽까지 가서 살라고 옆구리 쿡쿡 쑤신 사람은 없을 것이니 다 작가의 팔자소관이긴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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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3-09-21 0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자의 “야간열차”를 예전에 읽었는데 그 책에서도 이국의 땅과 언어를 살아가는 쓸쓸함을 읽었어요. 그런데 “지구에”는 설화를 쓴다니 그 향수가 더 진하게 드러나겠군요. 서늘한 아침에 어울리는 리뷰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3-09-21 16:02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저는 이 책 읽으면서 베를린 사는 우리나라 작가 배수아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리고... 오에 겐자부로 소설 보면 오에의 처남이자 영화감독이 쉰 살 때 연애해서 아이까지 출산한 애인이 베를린에서 살았던 것도.... 하나 더, 얼마 전에 본 영화 <타르>에서 베를린 필의 수석지휘자 타르가 사랑하기 시작한 러시아 출신 첼리스트 올가한테 반해 올가 사는 집에 쫓아가다가 사고나는 장면.
세 씬 다 이국의 언어를 쓰면서 베를린 빈집에 사는 예술가(지망생) 이였습니다. 낡고 지저분한 무법의 폐허에 사는 사람들 말입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