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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를 옮기는 사람 ㅣ 제안들 37
다와다 요코 지음, 유라주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21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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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읽은 <지구에 아로새겨진>이 인상 깊어 곧바로 도서관 상호대차 신청한 책. 받고 보니 본문이 75쪽에 불과해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 <지구에 아로새겨진>과는 완전히 다르다. 짧은 작품이라고 해서 쉽게 읽히리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절제된 감정의 건조한 비유로 쓰였다. 주인공 화자 ‘나’의 심리, 처한 상황 같은 것을, 예를 들어 우리도 흔하게 말하듯이 “마치 ~한 것 같았어” 할 때의 상황과 인물을, “마치~ 같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런 일이 생기고 그런 사람이 등장한 것처럼, 생각 속 인물이 화자의 앞에 나타나 함께 행위하고, 대화하고, 간섭해 독자를 혼동시킨다.
작가는 전에 얘기했듯 1960년 일본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 러시아 문학과를 졸업한다. 79년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독일에 다녀온 일이 인상 깊어, 1982년 독일로 이주했다. 이후 독일에서 시인, 소설가로 활약하며 함부르크 대학과 취리히 대학에서 각각 독문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는데, 모국어를 떠난 작가의 숙명이 <지구에 아로새겨진>에 잘 드러나 있다. 이이는 독일어와 일본어로 작품활동을 했으며 간혹 두 개의 언어로 같은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리하여 당연히 다와다는 한 국가의 작품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행위, 즉 번역에 대하여 깊이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글자를 (다른 글자로) 옮기는 사람, 즉 역자의 행위가 어떤 의미인지 자신의 의견을 펴 보이는 작품이 바로 이 <글자를 옮기는 사람>이다.
작품 속 화자 ‘나’는 안네 두덴 Anne Duden의 작품 <알파벳의 상처>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겠다고 자진해서 잡지사에 제안한 역자이다. 친구의 형제 자매인 내과의사가 별장 용으로 구입해 놓고 정작 자신은 별로 가서 쉬지도 않은 카나리아 제도 무리Muri 섬의 언덕배기 2층 주택에 혼자 머물고 있다. ‘나’는 절대로 관광객이 아니며 오직 번역을 하기 위한 노역의 장소로 카나리아 제도를 택했다는 것을 수시로 확인하고, 섬 주민한테도 알리고 있다.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지역의 주민들은 그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오는 현금으로 지역 경제의 상당한 부분을 충당하면서도 관광객에 대한 나쁜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이 보통이라 그런 감정을 피하려고 한 점도 부인하지 못할 듯하다. 해수욕은 물론 수영이라는 운동을 별로 즐기지 않는 ‘나’는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집이라고 해도,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에 불만이 없다. 바다와 집 사이에는 예전에 교도소로 쓰이던 바나나 농장이 한 줄로 심은 선인장을 경계로 저편에 들어서 있다.
안네 두덴이 쓴 <알파벳의 상처>는 “<성 게오르크 전설>의 그림을 보며 떠올린 단상을 글로 쓴 8쪽 분량의 소설”이라고 역자 유라주의 해설에 쓰여 있다. 기사 게오르크가 리비아를 지나다가 공주가 용의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긴 창으로 찔러 용을 죽이고 대신 온 백성을 그리스도교로 귀의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후에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를 받아 참수를 당해 성인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작품은 이렇게 시작한다. 따옴표도 없이.
“에서, 약, 구십 퍼센트, 희생자의, 거의 다, 항상, 땅바닥에서, 누운 사람, 으로서, 죽을 힘을 다해 들어 올린다, 미리, 구경거리로 삼아져, 이다, 공격 무기, 또는, 그 끝, 목에 찔린 채, 또는….” (11쪽)
다행히 며칠 전에 <지구에 아로새겨진>을 읽어보아, 이런 표현이 전작의 주인공 Hiruko가 스칸디나비아 반도 어떤 나라의 언어도 아니면서 누구나 들어서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언어를 사용할 때, 완전한 문장이 아니라 필요한 단어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것과 매우 유사한 것을 발견한다. 다만 이 작품의 경우 위에 인용한 것들은 극단적인 단어나 구절로 되어 있어서 그저 독일어로 쓴 문장을 단어나 짧은 구절마다 적절한 다른 언어로 바꾸어 놓은 것이긴 하지만. 역자라는 사람은 위 인용한 단어와 구절을 자신의 머리 속에서 적절하고 타당하게, 해당 언어의 습관에 맞추어 재배열하는 직업인을 말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다는데 애로가 있다.
도무지 번역의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원래 ‘나’의 습관이 만날 해야지, 해야지 마음은 먹지만 일이 지지부지, 흐지부지 시간만 죽이다가 마감 하루를 앞두고 벼락같이 해치우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유달리 고전을 면치 못한다. 그게 마음 속으로 걱정만 하는 수준이 아니다.
난데없이 햇빛 알러지가 생겨 오른팔 손목부터 팔꿈치 부근까지 시큰거리고 가려워지고, 저 아래 바나나 농장을 생각하면 가려움의 정도가 참을 수 없을 지경에까지 이른다. 그래서 벅벅 긁다 보면 왼손 손톱 아래가 포도주 색깔이 되기도 한다. 바나나 농장의 경계선 또한 점점 ‘나’가 묶고 있는 집 가까이 치고 올라오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정말로 그런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경계선 역할을 하는 선인장이 몇 그루나 되나 세어 보기도 하지만 언제나 다 세는 데는 실패하고 만다.
‘나’는 엄연히 관광객이 아니라 일을 하기 위해 섬에 들어온 생활인으로 몇몇 지역 주민들과 교류를 하기도 한다. 아무리 섬에 왔어도 먹어야 사니까 식품가게와 생선가게 주인하고는 나쁘지 않은 관계를 맺어 두는 편이 좋고, 번역을 다 마치면 만년필로 쓴 원고를 보내야 하니까 우체국 직원과 특히 좋게 지내야 옳다. 그러다가 한 명 이상한 사람을 만나는 바람에 독자를 잠깐 혼돈에 싸이게 만들기도 한다.
갑자기 “작가”가 나타난다. 나는 처음에 이 작가라는 사람 역시 카나리아 제도에 휴양차 또는 작업차 방문해 머물고 있는 다른 객체라고 생각해 아무 생각없이 그저 따라 읽었다. 근데 뭔가 조금 이상했다. 그러다가 이 작가라는 사람의 정체가 바로 ‘나’가 번역해야 하는 여덟 쪽짜리 단편소설 <알파벳의 상처>를 쓴 안네 두덴이었다. ‘나’는 작가와 함께 섬의 이곳 저곳, 섬에서 가장 높은 곳, 화산섬의 분화구에까지 오르기도 하고, 작가는 화산이 분출한 자국인 칼데라까지 직접 내려가 보기도 한다. 난 이 장면을 작가와 역자의 교감 정도로만 생각했지만, 역자는 이 만남을 “번역가와 작가가 마주하는 과정”이라고 하며, “번역가가 ‘작가의 등 뒤에 숨어서 작업하는 직업임을 상징한다”고 딱 박아 놓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 불만이 있었다. 딱 그 부분을 해설에서도 인용하고 있다.
“어쩌면 번역은 전혀 다른 것일지도 몰랐다. 이를테면 변신 같은, 단어가 변신하고 이야기가 변신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뀐다. 그리고 마치 처음부터 그런 모습인 양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늘어선다.” (23쪽)
이에 역자 유라주가 해석을 하기를,
“번역은 원본이 다른 언어로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원본이 변신하는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번역문은 원본과 전혀 다른 새롭게 태어난 글이고 그 이질성만으로 충분히 원본과 다른 가치가 있다.” (92쪽)
맞는 말이다. 그러나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원본이 변신하는 움직임인 것은 확실하지만, 역자는 해당 언어의 전문가이며 동시에 번역 언어의 전문가이기도 하니까,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고로 원본과 유사하게 변신해야 하는 책무가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번역이 제2의 탄생이니 제2의 창작이니 주장하는 것을 십분 이해한다고 해도 그렇다. 물론 역자 나름대로 고충이 있겠지.
나는 최대치로 여기까지 양해할 수 있다. 만일 셰익스피어가 작곡가라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셰익스피어 역자 신정옥을 연주자로 비유하는 것까지. 셰익스피어가 중세 영어로 쓴 오리지널 악보를 작곡했다면, 여러 명의 배우, 악기가 등장하니 합주곡이나 교향곡이라고 치고, 악보를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 청중에게 들려주는 지휘자가 역자 신정옥의 몫이라는 정도. 당연히 이 때도 연주자, 지휘자는 셰익스피어의 원본 악보를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의 해석이어야 한다.
다와다 요코는, 역자가 저 대서양의 카나리아 제도, 이 중에서도 작은 섬의 하나인 무리 섬에서, <알파벳의 상처>를 번역해 최종적으로 항공우편으로 보내려 할 때, 정말로 성 게오르크가 세 번이나 나타나 우편 발송을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장면도 연출했다. 번역에 손을 못 대고 있을 당시엔 엉뚱하게도 애인이라고 주장하는 게오르크가 독일에서 도착할 거라는 연락을 받기도 하고. 이런 스트레스 속에서의 번역작업. 쉬운 게 아니다.
그런데 말이지, 다와다 요코 선생, 세상에 남의 돈 받기 쉬운 거 있으면 번역 말고 나한테 하나만 가르쳐주면 안 되시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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