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양식집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2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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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에 겐자부로의 마지막 소설이라는 거 하나 가지고도 도쿄의 종잇값이 하늘을 찔렀을 듯하다. 일본 문학사상 두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고별 작품. 굉장하지? 근데 이 책, 나왔다는 거 알았을 때, 뭐라고 마음먹었느냐 하면, 절대 돈 내고 사지는 않겠다, 대신 도서관에 있으면 얼른 빌려 읽겠다. 그래서 빌려 읽었다. 왜냐고? 지금은 손절했지만 한 시절 좋아했던 작가가 있다. 필립 로스. 오에의 <만년양식집>에도 찬조출연해서 오에가 세계적으로 위대한 작가라고 상찬하기도 하는데, 그의 마지막 작품인 <유령 퇴장>은 분명하게, 아니, 아니, 세상에 분명한 게 어디 있어, 그냥 내가 생각하기로, <유령 퇴장>은 뱀의 다리, 사족이었다. 나는 <유령 퇴장>의 독후감에 “이런 책은 돈 받고 팔면 안 되지. 오히려 책 찍어 놓고, 문학 공부하는 후학들이 책을 읽어준다면 대가로 몇 푼 씩 쥐어주어야 할 것 같았다… 이 책은 노작가가 후학들에게, 자기 죽은 다음에 자기 말 하지 말아달라고 하는 유언 또는 당부의 글이다.”라고 주접을 떤 바 있다. 로스가 고집/아집/자만이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자신의 원고를 다 폐기하라고 유언했을까? 천만의 말씀. 그건 다 옛 이야기고, 지금은 판권이 출판사한테 넘어가서 작가가 불사르고 싶어도 어림없을 걸?

  오에 겐자부로, 이 고집장이 영감은 다행스럽게 독자들에게 구차한 당부는 하지 않는다. 그런데 오에도 작품 속의 장면들이 자기 주위의 친분 있는 사람한테 신세진 바가 매우 커서 이젠 사건의 당사자들과는 불가능하고 적어도 그들의 가족, 후손들과 화해를 해야 할, 또는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던 것 같다. 누군가 하면, 작품 속에 적어도 한 번 이상 나와 자살을 했거나, 사고사 했거나, 살인을 당한 후 자살로 위장해 버려진 당사자들의 애인과 아들. 아내 차카시의 오라버니이자 일본의 유명 영화감독인 하나와 고로. 이 양반은 여러 작품 속에서 영화 감독으로 출연해 5층이던가 3층 옥상에서 몸을 던져 상체가 납작하게 펴진 채 죽는다. 요즘에 “극단적인 선택”이라고 하는 죽음의 형태이다. 하나와 감독이 쉰 살 먹었을 때 유럽, 구체적으로 베를린에 사는 일본 아가씨와 연애를 했고, 아가씨가 산달이 되자 도쿄에 있던 간호사 동생 치카시한테 해산하는 걸 도와달라고 구조 요청을 해 도와준 일이 있다. 다른 한 명은 기 형兄이라 불리는 열 살 가량 손 위 선배로, 오에의 작품 속에 두 가지 형태로 죽음을 맞는다. 하나는 텐쿠보 저수지에 죽은 채 떠 있는 것을 겐자부로의 여동생 아사가 기 형의 아내 오셋짱과 배를 타고 들어가 기 형이 조성한 저수지 내 큰노송나무 섬에 안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 형이 항문에 이물질을 꽂은 채 목을 매달아 죽은 것으로 연출했다.

  이제 세월이 흘러 당시 20대였던 하나와 감독의 연인 베를린 아가씨는 40대의 시마우라 간호사가 되어 베를린에서 한국인 사업가의 간호를 위해 출장을 와 몇 주 간의 빈 시간을 사용하는 터이고, 기 형의 아들은 살고 있던 로스앤젤레스에서 후쿠시마 원전 폭발의 취재와 자원봉사를 위해 일본에 온 김에 아버지의 죽음에 관하여 자세하게 알고 싶어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오에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애인과 아버지의 죽음이 변주된 것을 절대 기쁘게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기 형의 아들 기 주니어는 아버지가 마치 오에에 의하여 시신훼손을 당한 듯한 불쾌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런 감정은 일찌감치 풀리지만 그건 전적으로 기 주니어가 사람이 좋아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나 같으면, 가뜩이나 어려서 돌아가는 바람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을 터, 그런 분께 항문에 뭘 꽂은 채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느니 하는 인간을 곱게 볼 수도 없는 건 물론이고, 쉽게, 그렇게 빨리/쉽게 이해하려고/이해해주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을 거 같다.


​  오에 겐자부로 입장에서는 위에 소개한 두 사람과의 화해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에만큼 자기 가족사를 소설에다 까발린 작가가 있으면 두 명만 대보시라. 만엔 원년의 민란에 참여했던 전력을 가진 증조부부터 시작해서, 시코쿠 숲을 조성한 할아버지, 중국에서 사업을 하다가 붉은 가죽 가방 하나를 갖고 귀국했고 이후 홍수가 난 밤 홀로 조각배를 타고 고향을 떠나다 익사한 아버지, 시코쿠 지역의 전래 이야기를 온전하게 전해준 할머니와 현명한 어머니, 여동생 아사, 그리고 만일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과연 오에 겐자부로(작중 ‘조코 코기토’)가 소설가로 성공할 만큼 작품의 스토리를 구성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모멘트를 가져다 준 아들 히카리(작품 중 ‘아카리’), 틀림없이 애증을 여러 차례 겪었을 아내 차카시, 부모와 발달장애 오빠 사이에서 터무니없이 일찍 철이 들어야 했던 딸 마키까지 직계가족들. 세월이 흘러 뇌 헤르니아로 죽어가는 걸 번히 보면서 그냥 죽도록 내버려둘까, 싶기도 했던 아들 아카리부터 시작해 모든 가족 구성원이, 물론 생활을 위해서이긴 했겠지만, 소설을 써서 가족을 부양하는 아버지 조코 코기토의 압제 하에 살았다. 조코는 이들의 부양을 위해 적어도 이름이 나서 원고청탁이 이어지고 비싼 원고료와 인세를 받을 수 있기 전까지는 안 써지는 소설을 쓰기 위하여 최악의 조건에서 최상의 작업환경을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자신의 작업을 위해 가족들이 슬슬 아버지의 눈치를 보는 것이 당연시하게 됐고, 나머지 식구들의 불만은 점점 코기토의 행동을 ‘압제’로 인식하기 시작했지만, 식구들 모두 아는 것을 당연히 아버지 코기토 혼자만 몰랐을 것.

  이제 나이 들어 어느 새 70대 후반이 된 오에 겐자부로, 조코 코기토는, 책을 읽으며 분위기 상, 자신의 숨이 넘어가기 전에 가족과 적절한 소통을 통해 화해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게 전제조건인데, 걸음걸음 언제 죽음이 작가에게 들이닥칠 지 모르는 와중에 더 늦기 전에 자신의 작품 속 먹이가 되어 온 가족들과 화해를, 더 크게 말하자면 자신이 함부로 사용했던 문학적 초상권 남용에 대하여 사죄하고 용서받기를 원했던 건 아닐까. 그러다가 판이 커지니 기 형과 하나와 감독까지 등장하게 된 것이고.

  이런 이야기를 어디서 시작할까, 평소에 기회를 찾고 있던 오에에게, 그리고 일본 전체에 심각한 위기가 닥친다.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에 지진이 나고, 거대 쓰나미가 덮쳐 수천 명의 인명사고가 난다. 오에는 쓰나미로 인한 인명사고보다 원전 폭발에 더 초점을 맞춘다. 한 순간에 처리하지 않은 세슘 오염수가 후쿠시마 땅에 쏟아져 사방 30킬로미터까지 접근 금지 조치가 내려졌던 일. 이미 체르노빌과 스리마일 섬에서의 피폭상황을 알고 있던 차에 범 일본적인 반핵운동이 일어난다. 애초부터 반핵운동의 선두에 섰던 오에 겐자부로, 조토 코기토는 노구를 이끌고 반핵, 반 원전 시위에 적극 가담하게 되는데, 그건 조금 나중의 일이고, 지진과 피폭, 세슘 오염된 비가 내리는 대기 등에 관한 코기토와 아카리의 걱정이 작품의 처음과 나중에 등장한다. 아마 <익사>에서 나온 거 같은데, 코기토가 정말로 봤다고 생각하는 또다른 나, 또다른 코기토. 그게 조각배를 타고 떠나는 아버지의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봤다고 믿는 진짜 코기토는, 저 아이가 아버지를 보살필 거야, 여긴 채 아버지를 가게 두고 집으로 돌아섰듯이, 아카리에게는 또다른 자아 ‘아구이’가 있어서, 세슘 피폭 때문에 하늘에서 캥거루 만한 크기의 아구이가 떨어질 것이며 아구이를 도와줄 수 있는 건 자신 뿐이라고 확신한다. 이렇게 작품은 시작한다.

  그리하여 시작과 끝은 반핵, 반원전으로 원자력 없는 세상, 나는 죽어 사라질 것이지만, 우리는 죽지 않을 거라고 매듭을 짓고 있다. 위에서 말한 화해, 용서(콧대 높고 악마처럼 거만한 오에가 결코 용서를 구하지는 않았겠지만)를 통하여 생명의 연속성을 이어가자는 주제라고 생각할 수 있다.


​  <만년양식집>은 조토 코기토의 걱정스러운 집안 사람들만 나누어 볼 생각으로 만든 소책자로 시작한다. 골치 아픈 집구석. 코기토는 한정없이 예민하고 알코올 의존증 전력이 있는 가장, 엄마는 오빠가 자살을 감행해 성공했을 정도의 우울증 가족력이 있으며, 아들은 뇌 헤르니아로 인한 발달장애로 누군가가 수발을 들지 않으면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한 예민한 감각의 중년 남자, 사십대 중후반이 된 딸 마키 역시 가족 구성원답게 우울증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아버지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한편 아버지가 쓴 작품의 먹이감이 되는 평생을 살아오면서 하고 싶은 말도 권위적인 아버지한테 하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 이제 (작품 속에서) 폭발시킨 듯하다. 여기에 고모 아사까지 포함해서, 차카시-아사-마키 세 명의 여성이 한 팀이 되어 그동안 앙가슴에 쌓이고 쌓인 맺힌 말과, 적어도 하지 못했던 말을 코기토 앞에서 신랄하게 퍼붓는다. 이 대화를 엮어 <만년양식집 플러스 알파>라는, 코기토를 포함한 네 명이 쓰고, 네 명이 읽는 가정판 잡지를 만드는데, 만들면 만들었지, 그걸 왜 출간을 하느냐, 하는 문제는 별개라는 말씀. 작가가, 그것도 그리도 자부심, 자만심 강한 오에 겐자부로가 조토 코기토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작품과 등장인물, 차용했던 가족사가 이랬느니, 저랬느니, 뭐하러 이런 말까지 해서 크고 잘 생긴 뱀을 여러 개의 다리가 달린 지네로 만드느냐는 거다. 차라리 오에가 마지막 작품을 포기했더라면 그게 더 좋지 않았을까? 에잇, 나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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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00자평] 읽는 인간
    from 의미가 없다는 걸 확인하는 의미 2023-10-24 11:40 
    읽는다는 것이 이렇게까지 진지하고 치열하고 아름다울 일인가. (물론 그렇다) 오에와 사이드의 우정이 기억에 남는데, 내 읽기에 깊은 영향을 주는 친구 덕분에 읽었다. 오로지 읽고 쓰며 참 행복하게 산 듯한 일본 아저씨. 읽는 데 도가 튼 독서가들에게 추천. <스토너> 주인공의 일본현실버전.
 
 
잠자냥 2023-10-17 06: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최근 읽은 비비언 고닉 에세이에서 필립 로스를 대차게 까고 있더군요… 늙으면 이런 뱀다리 같은 작품을 남기고 싶어지는가 봅니다. 필립 로스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오에의 뱀다리는 읽을 것 같습니다. ㅋㅋㅋ

Falstaff 2023-10-17 06:59   좋아요 3 | URL
저도 뱀다리일 줄 뻔히 알았는데, 그놈의 정 때문에 눈에 보이자마자 득달같이 읽었습니다. ㅋㅋㅋㅋ 사랑보다 더 드런 게 정이라잖아요.

공쟝쟝 2023-10-24 0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퐐님!! ㅋㅋ 이 책 읽으셨어요?!! 저 방금 막 오에의 <읽는 인간>을 다 읽은 바, 가장 최근의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을 읽어보고 싶어져서, 이거 검색하자 마자 글봐서 넘 반가워요!!! 퐐님처럼 오에 겐자부로를 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저는 1. 일본 문학 및 일본의 근현대사에 지식이 전혀 없습니다. 오에가 누군지도 이번 이 책 읽으면서 알게 됨 (관심사: 차라리 푸코를 학문에 적용한 에드워드 사이드… 그 오리엔탈리즘의 그 사이드 맞슴돠). 2. <읽는 인간>을 읽으면서는 이 작가가 노벨상을 받은 것과는 별개로 참으로 서양 문학을 사랑하는 구나… 하는 생각 + 3. 사이드와의 깊은 우정을 눈여겨 보게 되었는 데요…. 암튼 요새는 일본 지성계가 궁금해요 (계보 그릴까 말까 고민중 ㅋㅋㅋ 더 읽어가다보면 그릴 듯)

“자기 가족사를 다 까발린”에 일단 한번 피식웃고요. 번역에 박유하에서 두번 갸웃(물음표 생기는 거 일단 괄호쳐두기)하고.

사족에 대한 변호를… 오에 할아버지가 셀프로 한 부분이 있어서… 가져옵니다!! 퐐님의 독후 활동에 미심쩍음이 풀리시길 바라며… ㅎㅎ

“(219)제가 소설쓰기를 그만두려고 했던 건, 제 소설이 점차 역사와 현실을 등지고, 말하자면 자기류의 신비주의에 빠져드는 게 변변치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화와 제국주의>는 그런 저의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해준 책입니다. (중략) (235) 이것이 제가 ’후기스타일‘로 살고 있는, 지금 현재의 실제 상황입니다. 이는 그야 말로 노년의 궁벽한 경계에서 제가 제 몸으로 자각하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제가 뭔가 ’후기작품‘을 하나더 만들어보자는 의지를 상실한 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는 건 아니지만, 어찌 됐든 한 번 더 힘을 내 도전하고자 하는 마음. 이걸 제 안에 끄집어 내는 데, 에드워드 사이드의 생애와 그의 모든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첨언하자면 사이드의 ‘후기 스타일’은 “(213) 말년의 양식, 후기 스타일이란 생애 후반에 죽음이 멀지 않은 예술가가 지금껏 해온 작업이나 그 시대의 관습과는 전혀 다른, 기묘하기까지 한 작풍과 삶의 방식으로 마지막까지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표현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하기엔 특이한 노인이 위험하고 기괴한 행동을 저지른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리고 저는 저야말로 바로 그 노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습니다”

소설가의 노년에 친교를 이어오던 사이드(그는 지식인의 역할은 특권을 향하지 않고 권력을 비판하는 움직임이라고 했죠)가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친구의 마지막 작업을 돌이키는 과정에서 ‘후기 스타일’이라는 주제를 공부하며 내가 더 해야할일이있지 않을까 고심하던 와중에 ‘동일본 대지진’을 겪은 듯해요. 특히 원전에 대해서 매우 걱정하고 있으신듯 한데… 상황에 대한 일말의 반성이 없이 원자력을 옹호하는 일본의 기득권과 사회에게 이건 아니라는 이야기를 소설로 쓴 것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로 그런 문단이 있었는 데 ㅜㅜ 못찾겠음…

그런데 퐐님말대로 가족사와 우정사를 까발리는 ㅋㅋㅋ 것이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이 소설도 ㅋㅋㅋ 사이드 아니면 안썼을 소설…이긴 하겠네요. 여하튼.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에 대해 궁금해져서 책을 한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퐐님의 오에에 대한 애정을 잘 읽었고 ㅋㅋ 구매하면 땡스투 하겠습니다!

Falstaff 2023-10-24 06:11   좋아요 1 | URL
쟝쟝님, 오랜만입니다. 반가워요!
오에가 스스로 ˝역사와 현실에 등지고˝ 했다는 것이 좀 웃게 하네요. 뭐 그럴 수 있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작가에 따라서 적극적으로 역사, 현실에 채무를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아닌 작가도 있을 터이지만, 오에가 생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조금은 아쉽게 생각할 수도 있긴 하겠습니다.
쟝쟝님이 동일본지진과 원전사고에 초점을 맞추어 책을 읽으시면 실망할 수도 있겠습니다. 오에는 다 아는 것과 같이 김지하 석방탄원 같은 인권문제에 평생 관심이 있었으나 그걸 자신의 픽션에는 어필하지 않았을 뿐인데, 그래서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을 꼽을 경우 늘 명단에 오르는 작가인데, 뭐 새삼스레... 하여튼 책에서는 당시 일본에서 크게 유행했던 원전 스톱을 위한 규탄대회에 몇 번 참석한 것이 전부입니다.
오에는 순진한 작가이지요. 원전 스톱보다 좋은 것도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운동이 있으면 반운동이 있는 법. 그는 반운동의 최소화를 위한 대안은 전혀 제시하지 못합니다. 원자력이 아니면 화석원료나 재생에너지를 사용해야 합니다만, 탄소배출과 효용성이 크게 문제가 되고, 그리하여 인류는 밤의 조명과, 막대한 생산의 포기에 따른 편리함을 과감하게 포기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인류가 지금보다 훨씬 긴박한 위기상태에 닥치면 그때 생각해볼 수 있을 겁니다. 하긴 작가가 순진하지 않으면 누가 순진하겠습니까. 본문에도 쓰려고 했지만 이런 건 여차하면 감정상 기분나쁨을 유발할 수 있어서 자제했습니다.
참고로 일본이야말로 현재 가장 유용한 재생에너지인 태양광에 극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국토환경을 지닌 나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달에 한반도의 몇 배에 달하는 거대한 태양광 발전소를 짓고 그걸 레이저 화해서 일본으로 쏘아 전기를 공급한다는 대단한 프로젝트를 심각하게 연구한 적이 있습니다. 그 정도 에너지면 ˝전 세계에˝ 공급하고도 남는 양이거든요. 제가 삼십 년 넘게 태양광은 아니고 태양광과 밀접한 업계에서 밥 빌어먹고 살아서 좀 안답니다.

오에는 자기 그릇 안에서 가장 유용하고도 훌륭한 글을 쓰다 간 행복한 사람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른 독후감에서 썼다시피 일본 작가들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ㅎㅎㅎ

공쟝쟝 2023-10-24 09:53   좋아요 1 | URL
전 세계를 다 돌아 다녀도 책 읽는 방구석 만한 곳이 없다듯, 서재 떠나고 보니 퐐님을 포함 재야의 읽기 고수들로 부터 배운 게 정말 너무 많다는 사실 배울 건 더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 허둥지둥 다시 돌아왔습니다. 독기 좀 빼고 겸손을 더 탑재해야할 텐데요… 그래도 책 읽다보면 올라오는 짜증스러움은ㅋㅋㅋ 어쩔 수 없나봐요. 이를 테면 일본안의 최고 지성인 축에 들 수 있을 것 같은 오에의 이야기도 저는 좀 불편했거든요. 와, 이사람은 진짜 서구의 문화를 사랑하네? 이건 탈아입구론이랑 뭐가 연관되어 있는 거 아닌가?…노벨상은 이래야 받는 건가 ㅋㅋㅋ 의심병 ㅋㅋㅋ

그런데 퐐님의 댓글의 마지막 문단을 보니 갖고 있던 미심쩍음이 다풀렸어요. 그건 요즘 제가 가진 질문이기도 한데요. 글을 쓰는 특히 (소설가)작가라는 종족에게서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극도의 개인주의에 대해서 생각을 고쳐먹었거든요. 작가는 그렇구나!

순진하다… 자기 그릇 안에서 읽고 썼다… 그리고 행복했다… 라는 퐐님의 평가가 너무 맘에 들어요. <읽는 인간>을 읽으면서 느낀 건 그런 오에의 면모였던 것 같습니다. 평생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 속에서 살아간 사람인 것 같고, 그것들을 더 잘 사랑하려고 노력한 사람 같아요.

하필 저는 탈식민주의 책과 이 책을 함께 읽고 있어가지고…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들, 그것을 쓰는 데 고심했을 작가의 어떤 재현의 윤리(하위 주체는 말할 수 없다고 하죠.)에 대해서도 어떤 생각의 긴장감을 놓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읽었거등요. 다만 나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타자(히카리)를 사랑하려 했다는 것…만큼은 조금 알 것도 같았요. 한 개인을 놓고 보면, 음. 그는 행복했을 것 같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읽어야했던 거라는 생각이듭니다.

그나 저나 이 책의 내용... 말년의 사이드를 통해서ㅋㅋㅋ 평생 온건한 본인의 기질을 광기의 비판정신으로 무장했을 줄 알았더니 실망이네요!!! <읽는 인간>에는 그렇게 쓰고 싶다고 하셔 놓고ㅋㅋㅋ

여하튼 퐐님이 걔중 사랑한 작가라는 사실을 유념하여 (이웃님들의 최애는 못참죠!) 머지 않은 날에 오에 겐자부로 소설 읽어보겠습니다. 한 두권 추천해 주시면 안까먹고 읽도록 하겠습니다!! ㅋㅋ

Falstaff 2023-10-24 16:17   좋아요 1 | URL
오에는 <개인적인 체험>과 <만엔 원년의 풋볼> 이 두 권 읽으면 전체적인 틀을 잡으실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게 마음에 드시면 다른 작품은 저절로 읽게 되지 않을까 하네요.
제 의견을 좋게 생각해주셔서 고맙습니다. ㅎㅎ
 
선택적 친화력 을유세계문학전집 127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장희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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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한테 책 받지 않고는 도무지 5별을 때릴 수 없을 "낡고 꼬질꼬질한" 괴테. 데우스 엑스 마키나, 좋다 이거야. 근데 유부남 꼬드긴 여자가 거의 예수 수준의 성녀라는 환상은 어디서 나온 거야? 괴테 님 명성 때문에 별 하나 보태줬다! 엣다, 드슈, 하고. 내가 이래서 책 무료로 받지 않는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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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3-10-16 08: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꼬드김 당한 유부남이 무죄가 되려면 상대는 성녀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 순진한 중년 유부남이 탈선할 정도라면 요망한 불여시가 맞을까요?
근데 작가인 괴테 선생에게 “바깥의 여자”는 모두 성스럽고 사랑스러운 상대 아닐까 싶네요. 비록 손녀딸 뻘이라도. (에구 숭해라)

Falstaff 2023-10-16 09:25   좋아요 0 | URL
결론이 꼬드긴 거고요, 언제나 그렇듯이 숙명적인 사랑 ㅋㅋㅋㅋ 입지요.
오히려 제가 보기에 바람난, 적어도 자신한테 애정, 마음, 관심이 떠나버린 남편을 둔 아내 샤를로테가 여성 예수요,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요, 공자님 우편에 앉은 사람이더라고요.

Falstaff 2023-10-16 09: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나는 왜 괴테를 싫어할까? 괜히 유명하고 널리 존경받는 작가를 깎아내리고 싶어하는 아마추어의 유치한 허풍일 수도 있겠다. 근데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는 좋아하는데? 그렇다고 막 떠들고 다니는 걸? 젊은 시절에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도 싫고, 노년에 완성한 <파우스트>는 더 싫다. 내가 읽어본 추밀고문관 님의 작품 가운데 어떻게 하나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는지, 나도 안타깝다니까.

잠자냥 2023-10-16 09:50   좋아요 1 | URL
저도 추밀고문관님을 ㅋㅋㅋㅋㅋ 싫어합니다. 그래서 이 댓글이 너무 좋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속시원해!!!!!!!)

잠자냥 2023-10-16 09:55   좋아요 1 | URL
솔직히 제목도 싫어요. 친화력 수업시대 편력시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ㅜㅜ 추밀고문관님이라....

Falstaff 2023-10-16 10:05   좋아요 2 | URL
이 책은 ˝친화력˝을 가장한 콩가루 이야기랍니다. 일종의 스왑 미수사건 ㅋㅋㅋㅋ

다락방 2023-10-16 1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다른 출판사 책으로 2014년에 읽었는데요 두 분의 대화를 보고 뭐라고 썼나 가보니 저 별 다섯 줬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10-16 10:58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굴욕? ㅋㅋㅋㅋㅋㅋ
아니 뭐 좋을 수도 있죠? 근데 뭐가 좋았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3-10-16 11:09   좋아요 0 | URL
엄청 재미지게 읽은듯 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3-10-16 11:09   좋아요 3 | URL
그때 썼던 백자평 가져올게요. 잠자냥 님 웃지마.

<잘못하면 막장 드라마가 되었을지도 모를 내용이 괴테의 문장을 만나니 확 달라진다. 꼭꼭 씹어먹고 싶은, 육즙이 진하게 배인 고품질의 소고기 같아졌달까.>

웃지마요.

잠자냥 2023-10-16 11:11   좋아요 0 | URL
소고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3-10-16 11:27   좋아요 0 | URL
웃지 말라굿!!!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3-10-16 12:28   좋아요 1 | URL
윽, 대통령해장국 집에 가서 해장국에 낮술 한 잔 찌그리고 온 사이에 이런 재미난 일이.. ㅋㅋㅋㅋ

얄라알라 2023-10-18 0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백자평에 육즙과 소고기!^^

˝선택적 친화력˝이란 제목은 꼭 진화생물학 교과서에나 나올법한 문구네요!

Falstaff 2023-10-18 06:20   좋아요 0 | URL
ㅎㅎㅎ 괴테다운 제목입지요.
 
잃어버린 발자취 창비세계문학 89
알레호 카르펜티에르 지음, 황수현 옮김 / 창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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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기 전에 알레호 까르뻰띠에르의 가계를 알고 넘어가는 것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카르펜티에르는 1904년에 스위스 로잔에서, 프랑스 출신 건축가인 아버지와 러시아 출신 언어 교사이자 음악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해, 곧바로 쿠바로 이민을 떠났다. 쿠바의 아바나에서 청소년 시절까지 보내는데, 그리하여 카르펜티에르는 에스파냐 어를 모국어로 사용할 수 있었으며, 능숙하게는 아니지만 새롭게 배우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유리한 상태로 프랑스어와 가까이 지낼 수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한편으로 제도 교육과 별개로 가정 내에서 아버지로부터 문학 수업을 받고, 어머니한테 음악을 배웠는데 일곱 살에 쇼팽의 전주곡을 연주할 정도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건축가 아버지와 음악가 어머니가 이혼을 하고, 카르펜티에르는 마차도 독재정권에 대항하여 반정부 활동을 하다 구속 수감되지만 1928년에 프랑스의 초현실주의자의 도움으로 이후 11년 동안 파리에서 체류한다. 스물네 살부터 서른다섯 살까지 파리에서 체류하며 앙드레 브르통 등과 교류했다 하니, 프랑스어도 에스파냐어 만큼이나 구사했을 것이다. 쿠바로 돌아온 카르펜티에르는 37세에 결혼을 하고, 2년 기약으로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로 떠났으나 그곳에서 대자연의 위용에 마음을 뺏겨 14년을 거주하면서 문학동네에서 번역 출간한 <이 세상의 왕국>과 이 책 <잃어버린 발자취>를 쓴다. 카스트로가 쿠바 혁명을 성공하고 귀국, 이후 눈부신 활동을 하다 1980년 파리에서 숟가락 놓는데, 책을 이해하는 데는 도움을 주지 않으니 이후 행적은 생략한다.

  여기까지 카르펜티에르의 바이오그래피 가운데 <잃어버린 발자취>와 관계가 있는 것을 고르라면, ① 에스파냐어∙프랑스어∙영어, 그리고 독일어를 자유자재로 또는 약간의 어려움은 있지만 의사소통 정도는 충분히 가능한 수준으로 구사하는 것, ② 주인공 화자 ‘나’의 직업이 클래식 음악 작곡가로 현재 칸타타 <사슬에서 풀린 프로메테우스>를 작곡하다 중단한 채 영화와 라디오 음악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는 것, ③ 아내 루스와는 영어로, 애인 무슈와는 프랑스어로, 새로운 현지인 애인 로사리오하고는 에스파냐어로 소통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④ 세상의 최대 도시 뉴욕에 살다가 콜롬비아 동부(정도로 보이는) 지역으로 원시 악기를 발굴하기 위해 떠난 여행 중 진정한 사랑 로사리오와 만나고 아델란따도가 만든 원시공동체 산따 모니까 데 로스 베나도스를 이상향으로 생각하게 되는 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큰 허들로 등장한 것은, 나도 한 평생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살았다고 자부했으나, 여전히 제대로 악보를 읽을 줄도 모르고, 체계적으로 음악을 향유하는 딜레탕트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아마추어 입장에서, 곳곳에 숨어있는 (극)음악적 비교, 굳이 발견하지 못해도 그냥 넘어갈 수는 있으나, 알아채고 해당 단어/구절이 왜 나왔는지 알면 몇 배나 즐길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주인공이 작곡가이고 여전히 미완성 작품 <사슬에서 풀린 프로메테우스>를 완성하려 하니 음악 관련 서사는 결코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집 센 출판사 창비가 이 책을 출간하고 벌써 21개월이 지났음에도 여태까지 읽으려 생각하지 않은 것은, 카르펜티에르의 <이 세상의 왕국>을 안 읽은 것과 같은 이유인데, 라틴 아메리카 밀림과 늪지대 자연의 웅장함과 위대성, 야만 속의 인간성을 강조하는 작품일 것이라는 편견 때문이었다. 웬만하면 이런 선입견을 갖지 않을 터인데, 이 책은 특히, 표지 그림이 H.G.웰스의 <모로 박사의 섬>에서도 표지로 썼던 앙리 루소의 그림, <뱀을 부리는 주술사>인 데다가 <모로 박사…>의 밀림 속 엽기적 실험실이 저절로 떠올랐던 때문은 아닌가 싶다. 영화 <닥터 모로의 DNA>에 나온 그로테스크한 노인 말론 브란도가 불쑥 나타날 거 같은 그림 말이지.

  선입견 또는 예상은 틀렸다. 만일 <모로 박사…>류나 에벌린 워의 <한 줌의 먼지>같은 대책 없는 아마존 탐험, 호세 에우스타시오 리베라의 <소용돌이> 처럼 대평원의 풍광, 장마리 드 로블레스가 쓴 <호랑이가 제 세상인 나라>에서 보는 감칠맛 나는 재미를 기대했다면, 조금은 비슷할 수 있겠으나, 꽝이다. 이 책은 그렇게 쉽지 않다. 만만하게 여기고 들어갔다가 나처럼 코피 터지기 십상이리라.

  먼저 문장이 길다. 만연체를 구사하는 작가들한테 공통점은 한 사물이나 현상 또는 기분을 묘사하는데 상당히 구체적이다. 게다가 가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현학적 지식을 동원하여 묘사하고자 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구체적으로 알려주려고 한다. 문제는 독자가 작가 수준이 아니라는 데 있을 뿐. 알레호 카르펜티에르는 묘사를 위하여 그리스 신화, 뒤로 가면 다이아몬드 채굴군을 그리스인으로 설정하여 적극적으로 그리스 신화를 인용하기에 이르기도 하고, 말한 바 있는 넘쳐 흐르는 음악 기호들과 음색, 오페라의 장면과 무대, 악기별 성격 같은 것을 난사한다. 그래도 내게는 다행이었던 것이 저 플라톤에서 시작하는 서양 철학의 인용이나 구사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이런 문장이 몇 개나 모여야 한 문단을 만들 수 있을까? 문단 하나가 다섯 페이지 정도 지속되는 건 다반사고, 대화를 따옴표에 묶은 다음에 줄 바꾸기도 하지 않고 같은 문단에 그대로 사용한다. 따라서 대화가 지속되는 일은 없다. 책을 선택하기 전에 인터넷 책방의 미리보기 기능을 사용하여 본문이 어떻게 생겼는지 미리 구경부터 하시고 견딜 수 있으면 구입하거나 빌려 읽으면 좋을 듯하다. 하지만 시간을 충분히 잡고 카르펜티에르의 아름다운 문장을 감상하는데 초점을 맞출 목적이면 머뭇거리지 않아도 좋다. 화려하고 현학적이고 탐미적인 문장과 이것들의 집합인 문단, 이것들이 다 아울러 작품이 독자를 몰입하게 만들 것이니.


  루스는 주인공 화자 ‘나’의 아내이며 연극배우다. 루스 앞에 이제 실험극을 막 마친 젊은 작가와 극단이 등장해 <남북전쟁>이란 비극의 초연을 할 것이니 좀 도와달라고 해서, 기껏해야 스무 날 정도면 끝나지 않겠나 하는 마음에 기꺼이 그러겠다고 허락을 했다. 그러나 웬걸.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공전의 히트를 쳐 무려 4년 7개월에 걸친 1,500회 공연을 하게 됐고, 얼떨결에 맺은 무한 연장공연 계약 때문에 루스의 넓고 넓은 연극 세계를 향해 열린 전망이 오히려 콱, 닫혀버리게 됐다. 아무리 유명 배우라 하더라도 서른 살부터 5년간 매일, 주말과 주일에는 심지어 하루 두 차례에 걸쳐 같은 대사를 해야 하는 고역이 되고 말았다. 이제 루스에게 <남북전쟁>은 연극을 통한 도피의 문이긴커녕 악마의 섬이 되고 만 거였다. 국민연극이 된 <남북전쟁>은 이번 공연이 끝나면 그길로 건너편 서부 해안으로 순회공연에 나서 ‘나’는 11개월 만에 집에서 혼자 지내야 한다. 이 생각을 하니 엄청난 고독감이 엄습한다고 엄살을 피운 후에, 오늘, 6월 4일 회사에서 3주일간 휴가를 내고 내 곁에 두고 싶은 오직 한 사람, 아내 루스의 행적을 쫓고 있다.

  그러다 길거리에서 대학에 속한 악기박물관에서 큐레이터로 있는 사람을 2년만에 우연히 만나 그의 사무실에 함께 가고, 대륙의 가장 원시적인 원주민들이 사냥하기 전에 성공을 기원하며 진흙으로 구워 만든 악기로 새의 노래를 흉내내는 곡조를 녹음한 레코드를 듣는다. 평소 ‘나’가 주장해온 음악의 기원은, “기본 리듬은 짐승의 걸음걸이나 새들의 지저귐을 모방하고자 하는 열망”이라고 주장해온 이른바 “모방→마법→리듬”의 독특한 과정이었다. 큐레이터는 이를 주장할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 원시 악기를 발견하는 작업을 거론하면서 ‘나’의 동의 하에 즉각 대학 총장을 만나 ‘나’를 세계 유일의 아메리카 원주민 악기 전문가이자 학교에 아직은 부족한 사례를 찾아내기에 적합한 수집가로 소개하고, 성질 급한 총장이 그 자리에서 내일 당장 라틴 아메리카 오지로 떠나 아직 발견하지 못한 원시 악기를 몇 점 구해오라고 부탁한다. 넉넉한 출장비와 더불어. ‘나’는 무슨 원시악기에 대한 강력한 유혹이 있는 건 아니지만 마침 3주간 휴가를 받아 그 기간 동안 끝낼 수 있어 마땅한 거절의 구실을 찾지 못해 수락한다. 2년 전에 루스가 공연 때문에 집을 비운 여러 날 중 어떤 날에 처음 만나 돈독한 몸의 정을 쌓은 여자친구 무슈가, 나도 같이 가고 싶어, 하는 바람에 이제 무슈 역시 탐험길에 오르게 되고.

  성질 급한 총장이 그랬다고 당장 내일 출발할 수는 없어서, 6월 7일애 무슈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숲속의 도시에 도착한다. 8일엔 오페라하우스에서 도니제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관람하던 중 무슈가 까탈을 부려 도중에 그냥 나온다. 호텔에 들어 무슈가 잠든 다음에 악기점에 들러 원주민 악기를 찾아보려 서성이던 중에 갑자기 총소리가 나더니, 에그머니, 이 나라에 혁명이 일어난 거였다. 20세기 중반의 시대적 측면에서 라틴 아메리카 진보, 보수의 대립은 종교전쟁과 같은 수준이어서 아무도 말리지 못하는 상황이라 예정에 없던 곳에서 며칠을 더 보낸 후, 6월 10일 협괘열차로 밀림 탐험을 위한 베이스캠프라고 할 수 있는 마음에 드는 마을 로스 알또스에 도착한다. 2부 까지의 내용이다.

  3부에는 서인도 제도의 척추부분, 분화구의 가장자리, 오지 중의 오지이지만 새롭게 개척을 하고 교회를 짓고 있는 밀림 속 원주민 마을과 비교하면 엄청난 크기의 개화된 마을 산따 모니까 데 로스 베나도스에 도착한다. 가는 도중 원주민 여인 로사리오를 구조하고 (또는 원주민 입장에선 그냥 만나고) 못된 짓만 하던 무슈가 말라리아에 걸려 끙끙 앓는 사이에 서로 사랑해 만리장성을 쌓게 되고, 결국 무슈가 도중에서 베이스캠프로 떠나자 ‘나’와 로사리오, 마을의 개척자 아델란따도, 고집장이 신부 뻬드로 그리스인 다이아몬드 사냥꾼 야네스 등과 함께 도착한 꿈의 마을, 산따 모니까 데 로스 베나도스. 며칠 후 휴가기간 3주가 벌써 지난다. ‘나’는 어처구니없이 이 오지에서 로사리오의 사랑에 힘입은 것인지 거의 포기한 칸타타 <사슬에서 풀린 프로메테우스>의 중요한 테마를 작곡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도시에서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지 마을에 정착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한 줌의 먼지>에서도 그랬듯이 현대인이 어디 마음대로 아마존 오지에 머물 수 있나? 하루는 하늘에 헬리콥터가 맴맴 돌더니 마을에 내려 그를 데리고 현대 도시로 데려간다. ‘나’는 문화 발견을 위해 용감하게 오지로 투신했다가 원주민에 의하여 포로로 잡혀 있는 신세로 알려져, 유명 신문사에서 구출해오는 사람에게 거금의 현상금을 걸었다는 것. 이렇게 3부와 4부를 지난다.

  4부는 다시 뉴욕으로 보이는 대도시. ‘나’는 ‘나’의 아이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임신한 루즈와 이혼하고 얼른 아마존 오지로 가 로사리오와 평생 살고 싶다. 그러나 그게 쉽나. 하여튼 뉴욕에서의 장면인 5부.

  마지막 6부는 다시 아마존. 어떻게 되는 지는 당연히 안 알려줌.


  인상깊은 작품이다. 이 책에 별점을 준다면, 당연히 다섯 개 만점을 주어야 마땅하지만, 작품 때문이 아니라, 카르펜티에르의 현란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충분히 즐기지 못한 독자, 내가 부족한 관계로 부득이 하나 뺄 수밖에 없다. 내 문학적 소양이, 아니, 아니다. 내 주제에 무슨 문학적 소양 운운. 그저 독자로서 내 소양이 조금만 더 높았더라면 기꺼이 별 다섯을 주었을 텐데, 나도 그 점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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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10-13 05: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화요일, 오에 겐자부로 <만년양식집>
목요일, 미시마 유키오 <금색>
금요일, 줄리언 반스 <사랑, 그리고>

그레이스 2023-10-13 09:25   좋아요 2 | URL
오에 겐자부로 기다리겠습니다~

Falstaff 2023-10-13 16:36   좋아요 1 | URL
읏.... 별점이 박하게 나갈 거 같은데요. ^^;;

yamoo 2023-10-13 0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듣보잡이면 창비...창비군요!

근데, 이 작품은 매우 지루하고 재미없을 듯합니다. 클래식 음악의 전문적 기술이라...ㅎㅎ 아무리 별5개라도 저는 패쑤해야 할듯한데...친절하게도 문학적 소양의 부족함으로 별 하나를 뺀다는 문장으로 인해 더욱 확신이 듭니다. 저는 읽으면 안된다는 사실을요!!ㅎㅎㅎ

Falstaff 2023-10-13 16:37   좋아요 0 | URL
듣보잡 아니여요. 지루하긴 합니다만 재미있습니다. 다만 다섯 페이지에 걸친 한 문단을 집중해 읽으려면 좀 피곤하더군요. 시간도 많이 걸립니다. ㅎㅎㅎ

yamoo 2023-10-13 17:10   좋아요 0 | URL
제겐 듣보잡이여요~~~^^;;

그레이스 2023-10-13 09: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집센 창비‘부터 ‘만들 것이니‘까지 문단때문에 읽고 싶어졌습니다.^^
그 만찬 즐겨보고 싶은데,,, 능력이 될지 모르겠네요^^

Falstaff 2023-10-13 16:39   좋아요 0 | URL
아이고 그레이스 님은 거뜬하실 겁니다. 한 번 도전해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stella.K 2023-10-13 1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문학적 소양은 부족하지만 제목을 이리 쓰시니 왠지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문장을 좀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라. ㅋ 친절한 조언 감사합니다.^^

Falstaff 2023-10-13 16:39   좋아요 1 | URL
문장이 중요한 분들은 당연히 한 판 붙어보셔야지요. ㅎㅎㅎㅎㅎ
 
보고 싶은 오빠 창비시선 396
김언희 지음 / 창비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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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언니가 그 김언희인 줄 알았으면 내가 이 김언희를 샀을지 안 샀을지 지금도 모르겠어. ˝눈사람처럼 귀여운 물방울의 목소리로 쓴 시˝를 말이야. 이상해, 속으로는 따라 읽겠는데 도무지 공감은 못 하겠더라고. 이거 내 책임 아니지? 그렇다고 해 줘. 괜히 폼 잡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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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아닌 사람 대산세계문학총서 172
샤오홍 지음, 이현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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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편의 단편소설을 모은 선집. 샤오쥔과 공동출판한 《고난의 여정》, 샤오홍의 단독 소설산문집 《다리》, 단편소설집 《소마차 위에서》와 《광야의 외침》 이렇게 네 권에 실린 소설 전편을 실었다고 한다. 이이의 작품은 연극으로 공연하기 위해 후에틴신이 각색해 희곡으로 만든 <생사장>만 읽어보았다. <생사장>은 지주와 소작인, 소작인도 소작인 나름이지 관리직 소작인과 비참한 생활을 해야 하는 노예급 소작인, 괴뢰정부 만주국을 세운 일본군과 앞잡이 등을 등장시킨 시대극이자 참혹극이었다.

  샤오홍은 1911년 헤이룽장성에서 유지 가문의 맏딸로 태어났다. 헤이룽장성. 우리말로 읽는 대로 발음하면 흑룡강성. 겨울이 되어 바람이 불었다 하면 바가지 만한 돌덩이가 날아와 말 머리를 때려 피가 철철 흐른다는 북간도 이야기를 외할머니한테 들었다. 맏이로 나왔지만 딸이란 이유로 냉대를 받으며 산 작가는 먼 친척을 따라 베이징에 가 중학교를 졸업했으나 가족이 압력을 넣어 스무 살에 시골로 이사한 집에서 지내며 농촌생활을 경험한다. 이때 고난 속에서 허덕이던 농민의 생활상을 목도한 것이 샤오홍의 작가 생활에 중요한 자산이 되어 <생사장>은 물론 《가족이 아닌 사람: 이하 “가족이”》의 몇 작품에서 절절한 장면으로 등장한다.

  《가족이》에 실린 열아홉 편을 구태여 주제별로 구분을 하자면 특히 동북 지역의 농촌을 배경으로 ①지주에 의하여 심각하게 수탈을 당해 거의 노예수준의 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폭력에 노출된 농민, ② 대 일본 전투에 참가한 군인이나 이들의 가족 및 탈영병, ③ 대일 투쟁이나 혁명을 위해 집을 건사하지 않고 떠나는 극빈자 출신 지식인 또는 의식화한 청년, 그리고 샤오홍 자신이 그리 했듯이 ④ 일본에 살려고 갔거나 다니러 가 적응도 하지 못해 외로운 시간을 보내는 젊은 여성 이야기 정도로 구분할 수 있다.

  샤오홍을 읽으면서 얼마 되지 않아 머리에 번쩍 떠오르는 우리나라 작가가 있었으니, 강경애. 자칭 우리나라 국보였던 양주동과 열애를 나누었고 샤오홍보다 두 살 언니인 강경애의 십팔번은 아무래도 적나라한 가난의 참혹상이라고 할 터인데, 부모가 정해준 남자의 아들을 낳았지만 가난에 찌들어 입양을 보내야 했던 샤오홍 역시 강경애와 어깨를 견줄 정도로 가난을 묘사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1930년대의 조선과 중국 동북지역의 삶이 그리 많이 다르지 않았나 보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입에 풀칠이나 한다고 가솔을 이끌고 간도 행을 나선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 중남부, 서부 지역의 농민들한테도 동북으로 가면 땅이 기름져 먹고 살 만하다는 소문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끝없이 지주에 수탈을 당했던 건 조선이건, 중국 동남부와 서부 지역이건 간에 다 거기가 거기였으며, 동북부라고 별 다를 게 있었겠는가. 이주 중국인 가운데서도 김동인 <감자>의 복녀가 틀림없이 있었다는 데 만 원 건다.

  《가족이》 속의 작품을 읽어보면, 1930년대의 샤오홍이 공산주의자였거나, 아니면 적어도 공산주의자 동맹 또는 모임의 멤버였을 거란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강경애를 읽을 때와 같이. 시절이 아직 대장정 중이었거나 막 끝났을 때이다. 정치적 확신이나 배경이 없이 이런 작품을 쓰다가 재수없게 국민당 정부에 발각이라도 나면 일신 상 큰 위험을 감수해야 했을 때였다. 강경애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카프에 가입하지 않은 채 프로 문학에 헌신했지만, 샤오홍은 데뷔작 <아이를 버리다>를 발표하던 1933년에 공산당원 문인들의 조직인 “별극단”에 가입한다. 그래서 1942년, 결핵으로 숨을 거둘 서른한 해의 짧은 생, 십 년이 채 되지 못하는 문인 생활 내내 아직 유보 상태인 봉건적 사회의 계급 상황에 천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샤오홍을 읽은 솔직한 감상은, 이이가 재수없게 1960년대 중반까지 살았다면, 나이 쉰다섯, 이제 중국의 중견작가로 터를 잡고 연륜이나 경험으로 보아 가장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할 시기에, 청소년 근위대/홍위병에게 머리 끄덩이를 잡혀 조리돌림을 당했을 거 같았다는 거. 하여간 중국의 인텔리겐치아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문화혁명을 피해갔던 사람들이 행운아다.

  책은 재미있다. 작품의 주제야 위에서 이야기한 바이지만, 문학작품을 주제만 알고 넘어갈 수 있나, 교과서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주제를 품은 스토리가 조금 낡았지만 하나하나 다 재미있다. 이 가운데 표제작 <가족이 아닌 사람>을 그중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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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3-10-12 08: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올리신 글을 읽으면 자연스레 감자랑 소금이 떠올라요. 강경애 단편집을 다시 읽어볼까 마음도 들고요.

잠자냥 2023-10-12 11:27   좋아요 0 | URL
제 생각엔... 강경애보다는 샤오홍이 좀 더 잘 쓰는 거 같아요. ㅋㅋㅋㅋㅋ

Falstaff 2023-10-12 15:49   좋아요 0 | URL
감자랑 소금. ㅎㅎㅎㅎ
재치 만땅이셔요.

잠자냥 2023-10-12 11: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앞에 몇 편만 읽고 참 잘쓴다.. 생각하고 일단 덮었는데 마저 다 읽어야겠습니다.
<가족이 아닌 사람> 저도 인상 깊었어요.

Falstaff 2023-10-12 15:50   좋아요 0 | URL
저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참혹한 가난의 광경은 읽고 싶지 않아지더라고요.
혹시 크누트 함순 때문 아닌가 몰라요. 웬수 같은 함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