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 어른거리는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12
다와다 요코 지음, 정수윤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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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다와다 요코. 이이의 삼부작 가운데 <지구에 아로새겨진>에 이은 두 번째 작품. 일본에서 정규 교육과정을 다 마친 후 독일 유학 후 정착, 이국의 말과 모국어 두 개의 언어로 창작생활을 하는 극히 일부의 작가 가운데 한 명이니 당연히 문자와 언어에 관하여 대단한 숙고를 할 수밖에 없을 터. 전작 <지구에 아로새겨진>에서 모어(母語: 일본어)를 잃어버린 주인공 Hiruko는 덴마크 오텐세에서 살며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이라면 알아들을 수 있는 일종의 공용어 '판스카'를 개발해 사용하면서, 모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람을 찾기 위하여 독일의 트리어로 향하고 다시 프랑스 남부 아를까지 내려간다. 드디어 만난 같은 모어를 가진 사람 Susanoo(우리말로 '수사노오' 비슷하게 읽자), 하지만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청년의 외모를 가지고 있는 Susanoo는 언어를 잃어버린 것으로 보여 Hiruko와 친구들은 Susanoo가 아니라 Hiruko를 위해 그의 실어증 치료를 목적으로 코펜하겐의 대형병원의 실어증 전문의 베르마 박사에게 보낸다. 여기서 2부는 시작한다.

  <지구에 아로새겨진>에서 주인공 Hiruko는 일본 창세신화의 여신과 남신, 이자나미와 이자나기가 낳은 맏딸로, 날 때부터 신체 허약하여 부모에게 조금도 귀여움을 받지 못해 추방당해버린 히루코(蛭子: 거머리)라는 이름을 얻는다. 그래도 창세신의 맏이라 그런지 작품의 2부 <별에 어른거리는>을 시작하자마자 충실한 친구들이 주위에 모이는 바, 코펜하겐에 사는 언어학 전공 대학원생 크누트, (이하는 독일 트리어 거주자) 유학중인 인도인이자 남성이지만 여성으로 성 전환을 결심하고 은근히 크누트를 연모하는 눈치인 아카슈, 그린란드 출신 에스키모로 덴마크 유학중에 어학연수가 끝나자마자 여행을 떠나 트리어에서 자리를 잡고 일본인 행세를 하며 스시 요리사를 하던 나누크, 마르크스 박물관 학예사이며 나누크를 사랑하는 노라, 이렇게 네 명의 친구가 Hiroko가 원하는 바를 들어주기 위해 조건 없이 Susanoo를 돕기로 했고, 즉 치료행위를 Susanoo가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상태에서 그를 크누트가 대학원에서 같은 강의를 한 번 들었을 뿐인 성질 더러운 베르마 박사에게 보낸 것도 모자라, 함께 지낸 시간이 그토록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Susanoo하고도 애틋한 우정이 솟구쳤는지 독일 남서쪽, 거의 프랑스 국경에 붙어 있는 트리어에서 모두, 그러니까 아카슈, 나누크, 노라가 멀고 먼 길을 히치하이크를 하거나 바이크의 뒷자리에 타고 가서 페리로 갈아타는 우여곡절을 거쳐 코펜하겐 병원에 집합시켰다.


  전작을 읽으면서 내가 끙끙거리다가 좋다, 수용하자, 했던 것이 이제는 지도에서 지워졌을 지도 모르는 열도, 즉 일본이 수면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는 가정은 뭐 그럴 수 있다고 해도, 몇 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젊은 모습을 지니고 있는 Susanoo였다. 공상 소설이라고 생각하기로 했기 때문에.

  <별에 어른거리는>도 전작과 마찬가지로 각 섹션마다 한 명의 화자를 등장시켜 그의 서술로 진행하는데 처음 발언을 하는 화자는 Susanoo가 치료를 받을 병원의 식당에서 설거지 전담 직원 '문문'이다. 문문은 정확하게는 나오지 않지만 일종의 자폐증을 앓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비슷한 증상이 있는 아가씨 비타와 함께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숙소에서 지낸다. 그래서 문문은 보통사람과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사물을 관찰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닦을 접시를 보면서도 접시를 '납작해진 인간의 영혼'이라고 생각한다. 문문이 하루는 접시를 닦고 있는데 접시 하나에 쓰여 있는 글자를 보고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손에서 놓쳐 깨뜨리고 만다. 접시에 형이 아를에서 오늘 온다고 쓰여 있어서. 나한테 형이 있었나? 당연히 형은 아를에서 도착한 Susanoo다. 문문은 Susanoo를 실어증 전문 의사인 베르마 박사 실험실에서 만나는데, 박사가 Susanoo와 의사 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언어인 프랑스어를 Susanoo가 문문에게(문문한테만) 말하자 전혀 모르는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무슨 내용인지는 알아듣겠는 거다. 그러더니 Susanoo가 문문더러 츠쿠요미, 달의 신이라고 불렀다. 달의 신? 그러면 문문의 형이라고 일컫는 Susanoo는 정체가 도대체 뭐야? 달의 신의 형이면 하여튼 달보다 조금은 더 높은 직위에 있는 다른 신일 터. 혹시 태양의 신? 그건 모르겠다. 하기는 뭐, 그 정도 되어야 수 십 년이 흘렀음에도 조금도 변하지 않고 젊음을 지니고 있을 수 있겠지. 좋다. 이걸로 의혹은 해소됐다고 치자.

  다음 문제는 전편과 마찬가지로 가장 중요한 논의 역시 언어와 민족, 사라진 나라의 언어를 유지하는 것이 과연 타당하고 필요한 일인가, 같은 것이지만 차례로 문문, 베르마, 나누크, 노라, 아카슈, 닐센 부인(크누트의 엄마, 나누크의 후원자, 베르마의 애인), 크누트, Hiruko, Susanoo, 문문, 이렇게 아홉 명의 열 번에 걸친 이야기들이 재미는 있지만 산만하다. 와다다다닥 읽어 나가는 데는 전혀 어색하거나 애매모호하거나 이해불가인 것은 하나도 없이 남의 사생활을 엿볼 때 노상 그렇듯이 그저 재미있고, 흥미롭고, 조금은 자극적이고 심지어 감칠맛도 나지만, 작가가 지금 이 자리에 왜 이런 장면을 삽입했을까, 이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3장 "나누크는 말한다"의 경우엔 히치하이크로 덴마크까지 가는 도중의 이해하기 힘든 여로가 나중에 어처구니없는 또는 경끼할 만큼 서프라이즈를 쏟아 부을 때는 허탈하기까지 했다. 전편에서는 작가가 Hiruko로 체화하여 이국의 땅에서 자기 말을 잃어버린 이방인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풀어나갔지만, 아쉽게 2부에 와서, 물론 아마추어 독자의 일천한 감상이란 전제에서, 동력을 잃어버린 느낌이다.


  2부에 이어 대미를 장식할 3부 <태양제도太陽諸島>가 이미 출간되었다고 한다. 2부는 Susanoo가 치료를 받고 있는 실험실에 닐센 부인을 제외한 출연진 전부 등장하여 이들 가운데 Susanoo와 Hiruko의 친구들이 이미 침몰해 없어졌을지도 모르고 지도상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Hiruko의 고향을 찾아 길을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이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지원을 받아 케이프타운에서 배를 내려 간디 해운의 도움으로 배를 갈아타고 인도까지 가서 다시 한 번 배를 옮겨 타 동쪽으로, 동쪽으로 가기로 하는 것으로 2부를 마감하여, 여전히 Hiruko와 이젠 Susanoo까지 보태 이들의 오딧세이아는 계속된다. 그런데, 3부까지 다 읽기엔 2부가 만족스럽지 못해서 끝까지 다 읽어야 할지, 그만 두어도 좋을지 이게 영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말씀. 돈 주고 살 거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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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1-02 07: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즐거리 읽다 보니……. 보관함에서도 살며시 삭제.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3-11-02 07:16   좋아요 2 | URL
좋은 선택하신 겁니다.

yamoo 2023-11-02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으면서 드럽게 재미없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요..ㅎㅎ 이런 책을 완독하고 리뷰를 쓰신 뽈님! 대단하십니다요~~~ㅎㅎ

Falstaff 2023-11-02 16:52   좋아요 0 | URL
아구, 취한다. ㅋㅋㅋ 은퇴하니까 이거 하나 좋아요. 하루 스물네 시간이 다 내 맘대로인 거. ㅋㅋㅋㅋㅋ 대단하긴요 뭐. 남아도는 게 시간이니 그러는 것이지요. ㅋㅋㅋ

그레이스 2023-11-02 1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 ... ^^ 넘 옛날스타일 ㅎㅎ

Falstaff 2023-11-02 16:53   좋아요 1 | URL
아이 그럼요. 억지로 쿨한 척, 아닌 척하는 게 쉽지 않아서 그냥 생긴대로 살기로 했습니다. 천생 꼰대입지요. ㅋㅋㅋㅋ
 
메데야와 그녀의 아이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5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최종술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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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빨리 읽을 수 없는 책. 단어 하나하나가 하 섬세해서 글결을 즐기느라 걸음을 빨리 하지 못한다.
다만. 예전 비채 출판사의 <소네치카>에 소네치카, 메데야와, 스페이드의 여왕 이렇게 실려 있던 걸 역자 별로 쪼개 두 권으로 팔아먹는다는 거. 문둥이가 그렇지 뭐. 부자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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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11-04 2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읽으셨군요. 저도 얼마전 소네치카랑 스페이드의 여왕 읽었어요. 저도 도서관에서 세 이야기가 묶여 있는 책 보고 헐...이렇게 다시 나눠서 팔다니! 했네요.
<메데야... >글이 섬세하군요. 울리츠카야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네요.

Falstaff 2023-11-05 06:37   좋아요 1 | URL
예. 재미있더군요.
섬세.... 단어를 좀 수정해야겠습니다. 섬세하기 보다, 조근조근 합니다. ^^
 
프랭키스슈타인
지넷 윈터슨 지음, 아밀 옮김 / 민음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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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달 만에 다시 지넷 윈터슨을 읽었다. 그만큼 이이의 데뷔작품인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를 재미있게 읽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 <프랭키스슈타인>에서도 윈터슨은, 물론 역자 김지현의 역할도 컸겠지만, 특유의 재치있고 자신있고 매력적인 문장을 과시한다. 제목 <프랭키스슈타인>을 발음하면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듯이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변주한 작품. 어린 시절부터 하도 많은 아동잡지와 만화책과 영화와 하다못해 상품광고를 통해 널리 알려지는 바람에 오히려 훨씬 나이가 들어 원작을 읽게 만드는 <프랑켄슈타인>. 나도 50대 중반에야 겨우 읽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생명의 창조와 연속성에 관한 담론으로 당당하게 명작의 반열에 올라야 마땅한 작품이, 단지 이마에 나사못이 박힌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괴물로만 알려질 수 있다니. 책을 읽은 후에 비로소 <프랑켄슈타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더니 참으로 다양한 국적의 작가들이 이 작품을 변용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프랭키스슈타인>은 두 이야기로 나뉜다. 원작자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쓰게 되는 1816년 우기의 스위스 레만호수부터 노년의 메리 셸리가 바이런의 딸 에이더 러브레이스 백작부인 가의 파티장에 참석해 에이더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까지 하나의 줄기고, 메리 셸리의 작품을 현대적 시각으로 변주한 왕립학회 회원이자 대학교수 빅터 스타인(빅토르 프랑켄슈타인 박사), 의사이자 웰컴 트레이드 소속인 라이 셸리(메리 셸리) 박사, AI를 장착한 리얼 돌 대량 생산자 론 로드(바이런 경), 국제 기술박람회 로봇공학 분야 안내 담당자이자 검은 피부의 미인 클레어(메리 셸리의 이복동생이자 바이런의 정부 클레어 클레어몬트), 잡지 "배니티 페어"의 기자 폴리 D(바이런의 주치의 폴리도리) 등이 등장하여 인간의 뇌를 스캔해 컴퓨터에 저장해 영생을 준비하는 다른 하나의 줄기로 구성된다.

  여기에 작가 지넷 윈터슨의 성정체성이 포함된다. 자전적 작품 <오렌지만이...>에서 스스로 밝혔듯이 윈터슨은 애초부터 레즈비언이다. 이 작품에서는 여성으로 삶을 시작했지만 젠더와 상관없는 존재로 살고자 유방 절제를 한 세미 트랜스젠더로 살고 있다. 즉 거의 화자 급인 라이 셸러는 스스로 원한 여성의 생식기를 가지고 있는 남성 외모의 존재로 살면서, 작품에선 남성 빅터 스타인 교수하고만 잠자리를 한다. 계속해서 테스토스테론 주사를 투여해야 하지만 여전히 여성적 성감을 유지하며, 외모 때문에 남성 화장실을 사용하다가 술에 취한 거한에게 강간을 당하고는 2차 가해에 대한 우려 때문에 경찰에 신고조차 못하고 어둠 속에서 눈물을 흘리는 캐릭터. 라이 셸리의 '라이'는 그래서 라이언의 줄임말이 아니라 '메리'를 변형한 것.

  메리가 살면서 시인 남편 셸리와 야반도주해 이탈리아로 날아가 결혼을 하고, 아이 셋을 잃는 참척을 당하는 와중에도 셸리는 여전히 바람을 피우며, 이복 동생 클레어는 남편의 친구 바이런 경의 딸을 출산한다. 바이런 경은 아이를 수녀원에 맡겨 버려 죽게 하는 등, 19세기 초반의 극심했던 가부장제, 남성중심주의를 비판하는 페미니즘적 시각을 곳곳에서 보여주기도 한다.


  첫번째 이야기 줄기는 <프랑켄슈타인>이 탄생하게 된 배경부터 시작한다. 1816년 여름, 스위스 레만 호수 근처의 저택 두 채에 세를 든 영국인들. 웅장한 디오다티 저택에는 당대 최고의 시인인 바이런 경과 그의 주치의 폴리도리, 메리 셸리의 이복동생 클레어 클레어몬트가 사용하고, 비탈을 따라 아래쪽 작고 매력적인 저택엔 셸리 부부가 세를 들었다. 남자들은 두 명의 여성을 공유하는 악마 숭배자이자 색정광 무리라는 소문이 나서 조금 떨어진 호텔 테라스에서 망원경을 든 숙박인들이 저택을 훔쳐보는 일도 잦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들끼리 재미있게 지내던 무리에게 드디어 자그마한 불운이 덮쳤으니 내리 7일 동안 무심한 듯 비가 내려 집안에서 꼼짝 못하고 지내야 했던 것.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바이런 무리가 포도주를 마셔가며 어떻게 권태를 이겨낼 수 있을까 논의를 하다가 충동적으로 초자연적인 이야기를 주제로 소설을 써보자고 제안을 했다. 의사 폴리도리는 귀신과 뱀파이어 가운데 고민을 하다가 뱀파이어 이야기를 쓰기로 작정을 했고, 메리 셸리는 죽은 개구리 뒷다리에 전극을 연결하고 전기를 주입하면 부르르 경련하는 것에 착안해 죽은 생명체에 전기 충격을 주면 되살릴 수 있다는 이론, 갈바니즘을 떠올린다. 메리 셸리는 갈바니즘과 관계없이 어떤 수단을 통해 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 시체의 영혼까지 돌아올 수 있을까, 궁금해하다가 여러 시신들의 조각을 이어 붙여 괴물을 창조한 빅토르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을 쓰기에 이른다.

  두번째 이야기는 라이 셸리와 빅터 스타인 박사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트랜스젠더 라이 셸리는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열린 기술박람회에 스타인 교수의 초청으로 참석을 했다가, 도착 첫날 첫번째 방문지에서 AI를 장착한 리얼돌, 작품 속에서는 XX-봇 공장을 고향 웨일스에 짓는 게 꿈인 청년 론 로드를 그의 부스에서 만난다. 이 론 로드는 직업이 직업인 만큼 우리 인체에서 장딴지, 허벅지, 날개죽지, 어깨죽지 말고 '지'자로 끝나는 두 단어를 매우매우 자연스럽게, 자주 사용하는 바람에, 하긴 그 단어가 비속어도 아니고 엄연히 널리 사용하기를 권장하는 표준어이기는 하지만 독자로 하여금 실소를 하게 만들기도 하는데, 다른 내용도 아니고 사람의 두뇌, 또는 영혼을 스캔해서 AI화 해 컴퓨터에 저장하는 이야기에, 나는 이미 식상을 했던 터. 물론 지넷 윈터슨의 필력이 여태 읽은 비슷한 내용의 작품들과 분명하게 차별이 되고 이야기도 더욱 풍부하더라도 독자인 내가 그렇다는데 이걸 어쩌겠는가. 물론 중병에 걸린 부자들이 심정지 상태이나 아직 뇌는 살아 있는 법적 사망 상태에서 급속 냉동해 시신을 보존했다가 먼 미래에 치료방법을 개발한 후에 해동해 생명을 이어가는 것도 포함하지만, 미안하다, 나는 영생에 "전혀" 관심이 없고, 윤회를 믿지 않으며, 영혼이란 건 그저 뇌 안에서 벌어지는 화학작용에 불과하다고 확신하는 데다가 심지어 그렇게 오래 살고 싶지도 않은 인간이라 별로 흥미가 돋지 않았다.


  그러나 작품은 꽤 재미있다. 이 독후감을 읽고 괜히 <프랭키스슈타인>의 일독을 머뭇거릴 필요는 없다. <프랭키스슈타인>이 재수가 없어 나 같은 독자를 만난 것일 뿐이니 이 독후감을 읽는 분들께서는 각자 알아서 판단하시기 바란다. 뭐 사는 게 다 그런 거다. 결국 책임은 당신이 지는 거. 이쯤에서 나는 ㅋㅋㅋ 웃고 싶어진다. 먼저 읽은 자의 여유로움이란.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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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10-31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는 읽어보고 싶습니다. 훗. 저는 영생에 관심있는 자..

Falstaff 2023-10-31 10:14   좋아요 0 | URL
앗, 그러십니까! 읽어보셔야지요. 되게 재미있게 읽을 것 같습니다!
 
불쌍한 캐럴라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5
위니프리드 홀트비 지음, 정주연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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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일하게 번역해 출간한 홀트비 작품. 위키피디아 검색해보니 이이의 대표작은 영화로도 만든 <사우스 라이딩>이라고 한다. 1898년에 영국 요크셔주 이스트라이딩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나 작가, 저널리스트로 이름을 낸 페미니스트다. 농부라고 해도 좀 큰 농부였던 듯, 아내, 위니프리드의 어머니는 이스트라이딩의 여성 의원을 지내고, 작가는 가정교사한테 교육을 받은 다음 옥스퍼드 서머빌 칼리지를 다녔다. 육군 여성 지원단에 지원해 프랑스에 갔다가 전쟁이 끝나고 영국에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연애와 저널리스트 활동으로 이름을 날린다. 페미니스트 단체 “식스 포인트 그룹” 일원으로 여성 인권운동에 참여하고, 남아프리카 흑인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다가 아깝게도 1935년 서른일곱의 젊은 나이에 삶을 접었다.

  장편소설 <불쌍한 캐럴라인>의 주인공 캐럴라인의 아버지 역시 요크셔 주 이스트라이딩의 농부 출신이며, 재종 그러니까 6촌 형제 로버트는 아직도 이스트라이딩의 마싱턴에서 밧줄 판매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설정했다. 캐럴라인의 7촌 조카쯤 되는 또다른 주인공 엘리너 데 라 루는 또한 홀트비가 상당한 관심을 쏟았던 남아프리카의 네덜란드 이민과 영국 여인 사이의 혼혈로 대학을 졸업할 무렵 홀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죽은 후에 영국으로 돌아온 것으로 했다. 자신이 지원을 아까지 않았던 지역에서 돌아온 인물이니 매사 깔끔하고, 야물딱지고, 똑똑하며, 정의롭고, 현대적인 여성상으로 등장한다. 아쉽게도 그런데, 딱 거기까지. 위니프리드 홀트비가 페미니스트였다고는 하지만 1931년, 서른세 살 때 출간한 <불쌍한 캐럴라인>은 결코 페미니즘 문학으로 볼 수도 없고, 봐도 안 된다. 요즘에 “페미니즘”을 업기만 하면 책 판매에 도움이 되는지 유독 페미니즘 혹은 페미니스트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토마스 하디의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도 글쎄 페미니즘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유명인사도 있더라니까!), 이 작품의 결말은 오히려 안티 페미니즘과 유사할 지경이다. 캐럴라인 말고 거의 주인공 급인 엘리너의 결말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캐럴라인과 엘리너를 짐작할 수 있는 좋은 글들이 많아, 이 양반들은 생략하고 조금 짓궂기는 하지만 다른 방법으로 스토리를 전개해보자.


  헤링데일 백작의 후손인 헤링데일 경(백작의 맏아들의 맏아들의 맏아들….은 아니라는 뜻)과 외가쪽으로 재종, 그러니까 7촌 조카 정도의 족보를 가지고 있는 배질 레지널드 앤서니 세인트데니스, 꽃처럼 아름다운 용모와 귀여운 행실의 사랑스런 아이가 있었다. 아버지는 앙리 4세 때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밤의 학살 후 박해를 피해 영불 해협을 건넌 위그노 가문 출신의 시골 목사, 어머니는 헤링데일 백작’부인’의 후손으로, 목사의 뻔한 월급으로는 감당하기 쉽지 않은 너무 큰 목사관을 유지하느라 등골이 빠져 버렸다. 그리하여 오직 하나 외동아들의 학비 대기에도 퍽퍽해, 이 꼴을 보지 못한 헤링데일 경이 흔쾌히, 라기 보다 자기 가문의 가오가 있어서 먼 조카 배질 군의 이튼 칼리지와 옥스퍼드의 학비를 원조하기로 정했다. 배질 군은 이튼 칼리지에 다니면서, 거기가 돈만 있으면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어서, 영국 각지의 난다긴다 하는 집안의 아이들만 빼곡한 가운데 배질이라는 뱁새가 학교 친구들의 행실, 차림, 언행, 발음 등 잉글랜드 고위계급 특유의 악마 같은 거만을 배우느라 가랑이가 찢어졌다. 그리하여 가진 건 쥐뿔도 없는 것이 보는 눈은 어느 새 정수리 꼭대기까지 올라간 상태에서 옥스퍼드에 들어갔다. 이후 배질은 본격적으로 상류사회의 일원으로 까불기 위해 신용카드를 무작정 긁어버렸고, 부자 중의 부자인 헤링데일 경이 보기에도 등록금을 몇 배나 초과한 카드 청구서를 받아 들고는 급기야 배질을 호출해, 배질한테 은근히 수치스러운 약속을 해야 계속해서 등록금을 지원하겠다고 경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배질도 꼴에 사내라고 이를 거절한 후 시골의 목사관으로 돌아와 빈둥빈둥 거리다 드디어 1914년 여름의 1차 세계대전을 맞는다.

  이때 배질은 참전으로 자리가 빈 노 귀족 판데일 경의 개인비서로 인생의 전기를 맞는 듯했으나 1916년에 사관후보생이 되어 옥스퍼드 베일리얼 칼리지에 복귀해 졸업장을 따고(아마 딴 거 같다) 소위로 임관, 프랑스 전선에 배치된다. 1918년에 팔꿈치가 박살이 난 채 칼턴 하우스의 한 병원에 입원해 이후 2년 간 수술실과 요양소를 전전하다가 적절한 연금과 함께 제대를 했고, 가뜩이나 이튼-옥스퍼드 물을 조금도 뺄 의향이 없는 배질은 이제 좀 뻣뻣한 팔꿈치를 핑계로 조금이라도 어려운 일은 하지 않으려 했다. 1923년에 마지막으로 헤링데일 경을 만나 경의 조언에 따라 이민을 가기로 결심을 해서, 기껏 간다는 곳이 몬테카를로. 이곳에서 병원 동기 윙 스트레턴과 카지노의 룰렛 총무일을 하며 길고 긴 청춘을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뭐 팔자가 상팔잔 걸 어떡해, 그지?


  이때 나타난 여자가 글로리아 칼미에. 본명은 글래디스 아이린 메이블 윌콕스라고 주장하지만 전혀 중요하지 않다. 아버지는 영국 피터버러에서 변호사의 사무원으로 일해, 정상적인 교육을 받았으나 열여섯 때 연애사건 때문에 고등학교에서 퇴학을 맞고 인생이 변하기 시작한다. 영국에서 좀 놀다가 보드빌 제작자와 특정한 계약 없이 미국으로 가서, 어리고 혼자 몸인 여자애가 이국 땅 미국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우여곡절을 겪은 다음 점잖은 아마추어 연주단과 함께 유럽으로 돌아왔다. 파리에서 리옹 실크 상인의 나이 들어가는 아들, 점잖지만 무능한 가스통 칼미에를 만나 결혼을 하자마자 세계대전이 발발, 남편이 징집당해 전선에 도착한지 6주 만에 전사해버리고 만다. 닭 한 마리 못 죽일 착하고 작은 남자는 그러나 글로리아에게 상당한 재산을 법적으로 상속해주게 됐으니, 과부가 된 글로리아 팔자를 안 됐다고 해야 하나, 대박이라고 해야 하나. 글로리아는 몬테카를로 도박장에 등장해 하루에 많은/일정한 돈을 칩으로 바꾸어 돈이 떨어질 때까지 조금씩 써가며 칵테일을 홀짝 거리는 재미로 날짜를 죽이고 있다가, “꽃처럼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세계에서 게으름에 관한 한 저 유명한 오블로모프와 유일하게 비교할 수 있는 챔피언 배질 세인트데니스를 만나 결혼해버린다.

  이후 무려 5년간 유럽을 돌아다니며 도박과 투자를 해서 그럭저럭 살아가다가 런던에 도착해 메이더 베일의 작은 아파트에 들어가 산다. 이때에 이르러 겨우 배질은 이튼의 거품이 빠지기 시작한다(고 분명이 쓰여 있으나 꼭 그렇지는 않은 거 같다). 벌써 세월은 1928년 8월. 글로리아가 재산이 있다고는 하나 그동안 쓴 게 얼만데. 배질에게 일자리를 찾으라고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안 그러면 결국 배질은 미소와 뱃살밖에 없는 클럽의 죽돌이가 될 거라고 악담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하루, 배질 코 앞에 신문 “주간 국교도”를 내밀고 독자 캐럴라인 덴턴스미스 양이 투고한 기사를 보여준다. 캐럴라인이 생각해낸 가칭의 회사 “크리스천 키네마”. 양키 영화에 황폐화해가는 영국시민과 청소년을 구제하기 위하여 백퍼센트 순수한 영국영화 만을 제작하는 회사를 제안한다. 이에 글로리아는 배질이야말로 이 가칭의 영화사 대표를 맡을 최고의 적임자이니, 목사의 아들, 위대한 복음주의 귀족, 옥스퍼드 출신, 퇴역군인, 노블레스 오블리주, 행복한 결혼생활 중, 예술을 아는 사람 등등 어디 한 구석 모자란 것이 없다는 의견. 만일 “크리스천 키네마”를 창립해 회장으로 앉기만 한다면 틀림없이 수 천명은 있을 캐럴라인 같은 사람이 돈을 어딘가에 투자할 곳을 찾다가 선택할 것이 분명하다는 것. 주로 갑갑한 하숙집에 사는 독신녀와 과부들로 죽기 전에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게 소원인 사람들이 쌔고 쌨다는 걸 강조한다. 캐럴라인 덴턴스미스. 안 봐도 비디오인 것이, 그 여자가 여태 내놓은 아이디어 중에서 남들 관심을 끈 건 하나도 없을 것이라서 그걸 우리가 해주면 자기 생각이 실현되는 걸 보고 얼마나 흥분을 할지 생각만 해도 무지하게 웃기는 일이란다.

  어려서부터 공연과 극장을 굴러다니던 글로리아가 이런 말을 하며 몇 명을 배질에게 소개한다. 부부가 엑스레뱅에서 만났던 퀘이커 교도로 회사법 전문가인 거턴, 영화에 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는 캐나다인 존슨. 처음엔 이렇게 배질, 거턴, 존슨, 그리고 캐럴라인, 네 명이 의기투합해 회장, 이사회 임원, 이사회 간사가 되어 회사를 설립하고, 이어서 아들을 위해 이튼 졸업생 배질의 추천서를 받을 목적으로 유대인 조지프 이즌바움이 가세하고, 유성영화 시대의 총아가 될 신기술 토나퍼펙타를 장착한 기술자 휴 매커피가 가세하여 이름만 번듯한 재단법인 “크리스찬 키네마 유한책임회사”를 창설하게 되는데, 척 보면 삼천리라고, 이거 사기극 맞지? 누구 하나 신세 조져야 끝나는 거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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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10-30 09: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휴머니스트에서도 세계문학이 나오는가 봅니다. 세계문학집 열풍이네요..ㅎㅎ
근데 이 책을 제외하고 대부분 책 표지가 끝네주게 좋네요..^^ 놀라운 점은 몇 작가를 빼놓고는 완전 듣보잡 작가들이 대부분이라 매우 놀랍네요..ㅎㅎ

이런 책을 잘도 발굴하시는 뽈님은 문학 덕후 중 최고일 겁니다...^^

Falstaff 2023-10-30 16:54   좋아요 1 | URL
넵. 흥미로운 책도 (당연히) 섞여 있습니다. 고르는 거야 뭐... ㅋㅋㅋ 클릭하는 사람 마음이지요. 복불복입니다. 인생이 그렇듯이요.
아휴, 전 문학 덕후, 축에도 끼지 못합니다.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고요. ㅋㅋㅋㅋㅋㅋ
 
나의 즐거운 육아 일기 위픽
오한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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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 우리 문학계의 문제아들의 모임 “후장사실주의”의 일원인 오한기의 단편소설. 출판사 위즈덤하우스가 오한기에게 청탁을 해서 단편소설 한 편을 받아, 단편 딱 하나로 책을 엮어, 그러니까 본문 페이지는 68 쪽이나 되긴 하지만 손바닥 만한 페이지에 편집이 가능한 한 최소의 글자 수로 채워 한 권의 책을 만들었으니 세상의 나무들에 대하여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불손한 방식으로 책을 만들어, 정가 1만3천 원을 때려버렸다. 내가 정말, 정말로 심심하면 글자 수가 몇 개나 되며, 그래서 한 글자 당 얼마의 정가를 매겼는지 세 보고 싶지만 내일이 한가위인데 그런 짓을 하느니 곧 들이닥칠 아이들, 며느리, 손주들 보기 창피하지 않게 청소기나 돌리는 편이 좋겠다. 근데 걔들은 올 필요 없다니까 왜 자꾸 오겠다고 그려? 여행이나 가지.


  오한기가 1985년생이다. 서른여덟 살. <나의 즐거운 육아 일기>에 나오는 ‘나’의 가족 이야기 가운데 비교적 믿을 만한 서술을 근거로 말하자면, ‘나’는 비트코인에 투자해 평생 먹고 살 정도의 재산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다가 FTX가 파산하는 바람에 쪽박을 찼고, 가명이겠지만 아내 진진은 남편의 코인만 믿고 다니던 직장에서 팀장한테 “짜식아, 그만 두면 될 거 아냐!” 호기롭게 사표를 던졌으나 결혼을 잘못했다는 거의 분명한 사실을 깨달아 경주에 있는 한국수력원자력에 경력직 사원으로 입사해 졸지에 주말부부가 되어 버렸다. 부부 사이에 유치원 다니는, 물론 가명일 것이 분명한 아이 주동主動이가 있었으니 ‘나’의 하루 일과는 주동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는 것으로 시작하며, 일주일의 마지막 일정은 이사온지 얼마 안 되는 고덕동에서 KTX 종착역인 서울역까지 주동이를 태우고 가서 진진을 싣고 오는 도중에 괜찮은 식당에 들러 저녁 한 끼를 먹는 것으로 끝난다. 물론 주말부부가 주말 밤에 정기적으로 뭘 하는 지는 어차피 다 아는 처지에 그냥 생략하기로 하자.

  근데 오한기는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 이름을 왜 하필이면 주동이라고 했을까? 아버지인 ‘나’처럼 빌빌대지 말고 세상을 주동적으로 살아보라고 그랬다고 책에 쓰여 있다. 나같으면 죽어도 아이에게 “주동”이란 발음을 아무리 가명이라도 주지 않을 거 같다. <수호지>의 양산박 호걸 가운데 ‘주동’이란 멋진 수염을 지닌 영웅이 있다. 이이가 정의의 사자라, 절친 뇌행이 죄를 지어 유배를 가는데 호송하는 일을 맡았다. 뇌행이 가난한 노모를 모신 터라 친구를 도망하게 하고 자신이 그 죄를 받아 창주라는 곳으로 귀양을 갔다. 창주 시장이 주동의 됨됨이와 인품을 흠모해 아들의 교육을 맡겨 주동과 아이가 매우, 아주아주 사이가 좋아 보기에 마땅했다. 이때 양산박의 도적떼들이 주동을 영입하고자 해서 도적떼의 책사 오용선생이 꾀를 내어 쌍도끼 이규를 보내 설득을 하였으나 관신關神 비슷한 주동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오용 선생은 미리 이럴 것임을 알고 이규에게 비밀리에 지시를 했던 바, 이규는 창주 시장의 아들을 유괴하여 배를 가르고 간을 꺼내 참기름 소금을 찍어 먹는다. 시신은 빨래줄에 널어 놓고. 아이를 잃어버려 창망 간에 아이를 찾는 주동이 이 장면을 보고 이규를 죽이려 했으나, 때마침 등장한 친구 뇌행이 주동을 설득해 함께 양산박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니 어찌 ‘주동’을 가명일지언정 아이의 이름으로 쓸 수 있겠는가. 중국의 식인 풍습은, 일반 서민이 사람 고기를 먹을 경우엔 고기를 다져 만두소 같은 것으로 만들어 익혀 먹고, 상류층은 고기는 쳐다보지도 않고 주로 간이나 심장을 날 것으로 소금 찍어 먹었다. (‘주동’과 식인 일화는 이문열 역 <수호지> 내용을 기억해서 썼음. 조금 착오가 있을 수도 있음)


  잡기가 길어진 건, 이 책이 말이 좋아 한 권이지 단편 한 편에 대한 독후감이라 쓸 게 별로 없기도 해서인데, 본론을 이어가자면, 서른다섯 살의 팔팔한 청춘, 아니다, 청춘 까지는 아니고 젊은 작가가 어째 쓰는 방식이 환갑은 지난 것 같다. 독자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자신, 어차피 1인칭 화자 ‘나’를 채용하였으니 ‘자신’이라고 여겨도 그리 어색하지 않긴 하지만, 하여튼 자신을 둘러싼 일상과 소설 쓰기를 시니컬하고 이제 거의 다 산 것처럼 적고 있다. 마치 농담을 하는 것처럼.

  아내 진진은 신라의 고도 경주까지 내려가 직장을 다니고 있는 반면에 ‘나’는 꼴에 전업작가라고 집에서 빌빌거리는 처지라 아르바이트를 하나 얻어 “괴담창작”을 하는 기상천외한 일을 시작하게 된 터에, 곧 출간되어 나올 단행본 <산책하기 좋은 날> 속지에 작가의 친필 서명을 첨부할 것이라고, 출판사로부터 속지 5백장이 도착한다. ‘나’는 공사다망해서 도무지 5백장에다 서명을 할 시간이 없어서 시급 1만2천원을 주고 사인 알바를 급하게 구하게 된다(이 책 <나의 즐거운 육아일기>의 속지에 작가 서명이 들어 있다). 그래서 나타난 인간이 sb.

  sb. 작가가 누군가? 오한기다. 오한기는 sb를 service boy라고 주장하지만 설마, 후장사실주의를 주창하는 문단의 문제아가 sb를 service boy라고 주장하는 것이 말이 돼? 나는 욕설 ‘씨b’ 아니겠느냐,에 한 표. 이 sb가 비록 시간제 알바지만 명문대 졸업에 삼성전자를 다니다 자유로운 영혼을 찾아 때려치우고 알바를 전전하고 있단다. 정말로 sb한테 일을 시켜보니 ‘나’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작업의 포인트를 찍어 ‘나’에게 막대한 도움을 주기 시작해, 이제는 작업은 ‘나’가 하고 해놓은 작업이 어떤 정도의 성취를 이루는지 sb에게 먼저 보여야 할 판이 된다. 척하면 척이지? 그렇다. Sb는 서서히 ‘나’의 모든 작업을 장악하는 것을 초월해 주동과 진진에게도 ‘나’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나한테는 이 책이 두 번째 오한기로 전에 작품집 《의인법》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에 실린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엄청 순화된 오한기다. 그래서 읽기가 좋기는 한데, 이번엔 혹시 과하게 냉소적이지 않나? 물론 작가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쓴 것 같기는 하고, 냉소적인 작품이라도 얼마든지 명작이 될 수 있다는 것에도 동의한다. 책을 만드는 위즈덤하우스의 ‘위픽’ 시리즈 기획에는 절대 찬성할 수 없지만 작품은 재미있게 읽었다. 저번에도 말했듯이 세상은 오한기 같은 문제아들의 반란을 통해서 발전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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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10-27 05:2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위니프리드 홀트비 <불쌍한 캐럴라인>
화요일, 지넷 윈터슨 <프랭키스슈타인>
목요일, 다와다 요코 <별에 어른거리는>
금요일, 김언희 《보고 싶은 오빠》

독서괭 2023-10-27 0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헐… 단편 하나에 13000원이요?? 재밌다고 해도 빌려보고 말지.. 너무하네요ㅡㅡ;;

Falstaff 2023-10-27 20:17   좋아요 0 | URL
심하지요? 그죠? 에휴....

stella.K 2023-10-27 0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일 한가위 아닌디요. 혹시 지난 추석 무렵에 읽으셨나요?
근데 이 책 정말 좀 거시기하네요. 출판사 불경기인건 알겠는데 손바닥 책 요즘 7,8천원 하는 거 같던데 이렇게 때려버리면 누가 살까 싶네요. 혹시 중고샵에 나오면ᆢ 그래도 전 안 볼거 같습니다. 후장이고 전자이고 지간에 재미가 있어야죠. 저는 폴님의 공신력을 신뢰합니다. ㅎㅎ

Falstaff 2023-10-27 20:20   좋아요 2 | URL
달력 보니까 이게 한달 전에 쓴 거네요. 좀 자주 올려야겠습니다. -_-;;
이 책은 저도 안타깝지만 비추. 본문에 원래 들어 있었는데.... 편집 생각하면 별 하나 더 뺀다, 하는 게 제 마음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벽돌 애자인 모양입니다. 흑흑...

꼬마요정 2023-10-28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위픽 시리즈는 위즈덤하우스인가 신청하면 메일로 단편들이 와요. 물론 이주일인가 있으면 비공개로 돌리는데 그 전에 읽을 만한 것들 읽어요. 솔직히 만 원 넘게 주고 사기는 너무 비싸요ㅜㅜ 위픽 시리즈 여러 편 묶어서 내 주면 몰라도… 흑흑
아, 세레나데 샀습니다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3-10-28 16:22   좋아요 1 | URL
메일로 단편 ˝들˝이 온다고요? 그거 놀랄 노잡니다!
근데 종이 책으로 보면 이야기하신 대로 이건 상도의가 아니지 않나 해요.
요새 참 너무들 합니다. 식당에 납품하는 업소용 소주 한 병이 1,700원입니다. 그걸 5천원도 받고, 7천원도 받고...
세레나데는 분명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

꼬마요정 2023-10-28 21:51   좋아요 1 | URL
메일함을 보니 한 달에 한 편씩 오는 것 같네요. 신청 기간이 지났나 모르겠는데, 저는 제법 괜찮더라구요. 1년 기획인 것 같은데 이제 1년이 다 되어가서 좀 서운해지려고 하네요.
세레나데 기대됩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