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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캐럴라인 ㅣ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5
위니프리드 홀트비 지음, 정주연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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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번역해 출간한 홀트비 작품. 위키피디아 검색해보니 이이의 대표작은 영화로도 만든 <사우스 라이딩>이라고 한다. 1898년에 영국 요크셔주 이스트라이딩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나 작가, 저널리스트로 이름을 낸 페미니스트다. 농부라고 해도 좀 큰 농부였던 듯, 아내, 위니프리드의 어머니는 이스트라이딩의 여성 의원을 지내고, 작가는 가정교사한테 교육을 받은 다음 옥스퍼드 서머빌 칼리지를 다녔다. 육군 여성 지원단에 지원해 프랑스에 갔다가 전쟁이 끝나고 영국에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연애와 저널리스트 활동으로 이름을 날린다. 페미니스트 단체 “식스 포인트 그룹” 일원으로 여성 인권운동에 참여하고, 남아프리카 흑인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다가 아깝게도 1935년 서른일곱의 젊은 나이에 삶을 접었다.
장편소설 <불쌍한 캐럴라인>의 주인공 캐럴라인의 아버지 역시 요크셔 주 이스트라이딩의 농부 출신이며, 재종 그러니까 6촌 형제 로버트는 아직도 이스트라이딩의 마싱턴에서 밧줄 판매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설정했다. 캐럴라인의 7촌 조카쯤 되는 또다른 주인공 엘리너 데 라 루는 또한 홀트비가 상당한 관심을 쏟았던 남아프리카의 네덜란드 이민과 영국 여인 사이의 혼혈로 대학을 졸업할 무렵 홀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죽은 후에 영국으로 돌아온 것으로 했다. 자신이 지원을 아까지 않았던 지역에서 돌아온 인물이니 매사 깔끔하고, 야물딱지고, 똑똑하며, 정의롭고, 현대적인 여성상으로 등장한다. 아쉽게도 그런데, 딱 거기까지. 위니프리드 홀트비가 페미니스트였다고는 하지만 1931년, 서른세 살 때 출간한 <불쌍한 캐럴라인>은 결코 페미니즘 문학으로 볼 수도 없고, 봐도 안 된다. 요즘에 “페미니즘”을 업기만 하면 책 판매에 도움이 되는지 유독 페미니즘 혹은 페미니스트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토마스 하디의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도 글쎄 페미니즘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유명인사도 있더라니까!), 이 작품의 결말은 오히려 안티 페미니즘과 유사할 지경이다. 캐럴라인 말고 거의 주인공 급인 엘리너의 결말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캐럴라인과 엘리너를 짐작할 수 있는 좋은 글들이 많아, 이 양반들은 생략하고 조금 짓궂기는 하지만 다른 방법으로 스토리를 전개해보자.
헤링데일 백작의 후손인 헤링데일 경(백작의 맏아들의 맏아들의 맏아들….은 아니라는 뜻)과 외가쪽으로 재종, 그러니까 7촌 조카 정도의 족보를 가지고 있는 배질 레지널드 앤서니 세인트데니스, 꽃처럼 아름다운 용모와 귀여운 행실의 사랑스런 아이가 있었다. 아버지는 앙리 4세 때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밤의 학살 후 박해를 피해 영불 해협을 건넌 위그노 가문 출신의 시골 목사, 어머니는 헤링데일 백작’부인’의 후손으로, 목사의 뻔한 월급으로는 감당하기 쉽지 않은 너무 큰 목사관을 유지하느라 등골이 빠져 버렸다. 그리하여 오직 하나 외동아들의 학비 대기에도 퍽퍽해, 이 꼴을 보지 못한 헤링데일 경이 흔쾌히, 라기 보다 자기 가문의 가오가 있어서 먼 조카 배질 군의 이튼 칼리지와 옥스퍼드의 학비를 원조하기로 정했다. 배질 군은 이튼 칼리지에 다니면서, 거기가 돈만 있으면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어서, 영국 각지의 난다긴다 하는 집안의 아이들만 빼곡한 가운데 배질이라는 뱁새가 학교 친구들의 행실, 차림, 언행, 발음 등 잉글랜드 고위계급 특유의 악마 같은 거만을 배우느라 가랑이가 찢어졌다. 그리하여 가진 건 쥐뿔도 없는 것이 보는 눈은 어느 새 정수리 꼭대기까지 올라간 상태에서 옥스퍼드에 들어갔다. 이후 배질은 본격적으로 상류사회의 일원으로 까불기 위해 신용카드를 무작정 긁어버렸고, 부자 중의 부자인 헤링데일 경이 보기에도 등록금을 몇 배나 초과한 카드 청구서를 받아 들고는 급기야 배질을 호출해, 배질한테 은근히 수치스러운 약속을 해야 계속해서 등록금을 지원하겠다고 경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배질도 꼴에 사내라고 이를 거절한 후 시골의 목사관으로 돌아와 빈둥빈둥 거리다 드디어 1914년 여름의 1차 세계대전을 맞는다.
이때 배질은 참전으로 자리가 빈 노 귀족 판데일 경의 개인비서로 인생의 전기를 맞는 듯했으나 1916년에 사관후보생이 되어 옥스퍼드 베일리얼 칼리지에 복귀해 졸업장을 따고(아마 딴 거 같다) 소위로 임관, 프랑스 전선에 배치된다. 1918년에 팔꿈치가 박살이 난 채 칼턴 하우스의 한 병원에 입원해 이후 2년 간 수술실과 요양소를 전전하다가 적절한 연금과 함께 제대를 했고, 가뜩이나 이튼-옥스퍼드 물을 조금도 뺄 의향이 없는 배질은 이제 좀 뻣뻣한 팔꿈치를 핑계로 조금이라도 어려운 일은 하지 않으려 했다. 1923년에 마지막으로 헤링데일 경을 만나 경의 조언에 따라 이민을 가기로 결심을 해서, 기껏 간다는 곳이 몬테카를로. 이곳에서 병원 동기 윙 스트레턴과 카지노의 룰렛 총무일을 하며 길고 긴 청춘을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뭐 팔자가 상팔잔 걸 어떡해, 그지?
이때 나타난 여자가 글로리아 칼미에. 본명은 글래디스 아이린 메이블 윌콕스라고 주장하지만 전혀 중요하지 않다. 아버지는 영국 피터버러에서 변호사의 사무원으로 일해, 정상적인 교육을 받았으나 열여섯 때 연애사건 때문에 고등학교에서 퇴학을 맞고 인생이 변하기 시작한다. 영국에서 좀 놀다가 보드빌 제작자와 특정한 계약 없이 미국으로 가서, 어리고 혼자 몸인 여자애가 이국 땅 미국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우여곡절을 겪은 다음 점잖은 아마추어 연주단과 함께 유럽으로 돌아왔다. 파리에서 리옹 실크 상인의 나이 들어가는 아들, 점잖지만 무능한 가스통 칼미에를 만나 결혼을 하자마자 세계대전이 발발, 남편이 징집당해 전선에 도착한지 6주 만에 전사해버리고 만다. 닭 한 마리 못 죽일 착하고 작은 남자는 그러나 글로리아에게 상당한 재산을 법적으로 상속해주게 됐으니, 과부가 된 글로리아 팔자를 안 됐다고 해야 하나, 대박이라고 해야 하나. 글로리아는 몬테카를로 도박장에 등장해 하루에 많은/일정한 돈을 칩으로 바꾸어 돈이 떨어질 때까지 조금씩 써가며 칵테일을 홀짝 거리는 재미로 날짜를 죽이고 있다가, “꽃처럼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세계에서 게으름에 관한 한 저 유명한 오블로모프와 유일하게 비교할 수 있는 챔피언 배질 세인트데니스를 만나 결혼해버린다.
이후 무려 5년간 유럽을 돌아다니며 도박과 투자를 해서 그럭저럭 살아가다가 런던에 도착해 메이더 베일의 작은 아파트에 들어가 산다. 이때에 이르러 겨우 배질은 이튼의 거품이 빠지기 시작한다(고 분명이 쓰여 있으나 꼭 그렇지는 않은 거 같다). 벌써 세월은 1928년 8월. 글로리아가 재산이 있다고는 하나 그동안 쓴 게 얼만데. 배질에게 일자리를 찾으라고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안 그러면 결국 배질은 미소와 뱃살밖에 없는 클럽의 죽돌이가 될 거라고 악담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하루, 배질 코 앞에 신문 “주간 국교도”를 내밀고 독자 캐럴라인 덴턴스미스 양이 투고한 기사를 보여준다. 캐럴라인이 생각해낸 가칭의 회사 “크리스천 키네마”. 양키 영화에 황폐화해가는 영국시민과 청소년을 구제하기 위하여 백퍼센트 순수한 영국영화 만을 제작하는 회사를 제안한다. 이에 글로리아는 배질이야말로 이 가칭의 영화사 대표를 맡을 최고의 적임자이니, 목사의 아들, 위대한 복음주의 귀족, 옥스퍼드 출신, 퇴역군인, 노블레스 오블리주, 행복한 결혼생활 중, 예술을 아는 사람 등등 어디 한 구석 모자란 것이 없다는 의견. 만일 “크리스천 키네마”를 창립해 회장으로 앉기만 한다면 틀림없이 수 천명은 있을 캐럴라인 같은 사람이 돈을 어딘가에 투자할 곳을 찾다가 선택할 것이 분명하다는 것. 주로 갑갑한 하숙집에 사는 독신녀와 과부들로 죽기 전에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게 소원인 사람들이 쌔고 쌨다는 걸 강조한다. 캐럴라인 덴턴스미스. 안 봐도 비디오인 것이, 그 여자가 여태 내놓은 아이디어 중에서 남들 관심을 끈 건 하나도 없을 것이라서 그걸 우리가 해주면 자기 생각이 실현되는 걸 보고 얼마나 흥분을 할지 생각만 해도 무지하게 웃기는 일이란다.
어려서부터 공연과 극장을 굴러다니던 글로리아가 이런 말을 하며 몇 명을 배질에게 소개한다. 부부가 엑스레뱅에서 만났던 퀘이커 교도로 회사법 전문가인 거턴, 영화에 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는 캐나다인 존슨. 처음엔 이렇게 배질, 거턴, 존슨, 그리고 캐럴라인, 네 명이 의기투합해 회장, 이사회 임원, 이사회 간사가 되어 회사를 설립하고, 이어서 아들을 위해 이튼 졸업생 배질의 추천서를 받을 목적으로 유대인 조지프 이즌바움이 가세하고, 유성영화 시대의 총아가 될 신기술 토나퍼펙타를 장착한 기술자 휴 매커피가 가세하여 이름만 번듯한 재단법인 “크리스찬 키네마 유한책임회사”를 창설하게 되는데, 척 보면 삼천리라고, 이거 사기극 맞지? 누구 하나 신세 조져야 끝나는 거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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