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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서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1
잭 케루악 지음, 김재성 옮김 / 민음사 / 2023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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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를 얼마나 개운하게 읽었는지. 이 작품을 읽은 분은 내가 지금 “개운하게”라는 부사를 쓴 것을 의아해할 지도 모른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본격적인 세계의 공장으로 우뚝 선 은혜와 기회의 나라 미국에서 돈 없고 일 할 의욕도 없고 직업도 없는 껄렁한 청춘들이 미국 전역을, 넓기는 또 얼마나 넓어, 그 큰 땅을 히치하이크와 차량 절도와 술과 마리화나와 가능하면 코카인도 좋고, 가리지 않은 상대와의 하룻밤 또는 며칠 밤과 함께 종횡무진 펼쳐가는 이야기. 작가 잭 케루악은 프랑스계 캐나다 이민자 가정에서 1922년에 태어나 미식축구 특기생으로 명문 콜롬비아 대학에 진학한다. 그러나 감독하고 마음이 맞지 않아 조금 방황하다가 해군에 입대했지만 몇 달 되지 않아 불명예 제대한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만 중퇴해버리고 또다시 해군에 복귀하는 등 파란만장한 청춘시절을 보낸다. 부모 속이 얼마나 터졌을까? 이때 시인 앨런 긴즈버그, 소설가 윌리엄 버로스, 닐 캐시디 등과 교류하면서 다양한 사건에 휘말리는 한편, 두 번의 결혼이 실패로 돌아간다. 물론 이 시기에 친구들과 함께 미국 전역을 싸돌아다니며 잡다한 말썽에 엮인 일을 원고지에 써 내려간 것이 나중에 잭 케루악을 스타덤에 올려놓은 <길 위에서>이기는 하다.
세상의 태양은 위대하게 타오르지만 그만큼 짙은 그늘 속에서 아무런 전망도 없는 청춘들이 대책 없이 찰나의 만족을 위하여 서슴없이 몸을 던지는 <길 위에서>, 독자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코드가 있을 터인데 코드가 맞기만 하면 틀림없이 대박일 책이었고, 다행히 나 하고는 더할 나위 없는 궁합이라 한 방에 반해버려 <다르마 행려>를 선택하는 데는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었다. 다르마. 선불교를 창시한 달마. 행려, 하니까 좀 고급스러워 보이지만, 행려병자, 하면 쉬운 이야기로 ‘거지’ 혹은 ‘빌어먹는 인간’이다. 근데 앞에 달마를 붙이면 ‘선 수행을 하며 밥을 얻어 탁발하는 수도승’을 말한다. 동부 매사추세츠에서 캘리포니아로 넘어온 잭 캐루악의 분신 레이 스미스는 캘리포니아 숲 속에서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빠지며 불교 경전을 공부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런 것들만 나열하면 소위 ‘비트 문학’의 선구자 잭 케루악이 아니라서 역시 다양한 청춘들의 난장판이 들어 있는 건 물론이다.
그리고 오늘 <빅 서>의 마지막 장을 덮어, 이제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한 모든 잭 케루악은 다 읽게 된다. 알코올 의존증이 있던 아버지가 케루악이 스물세 살 때 위암으로 죽은 이후 어머니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39세 때 캘리포니아 빅 서, 남부 플로리다 등으로 옮겨 다니다가 다시 동부로 와서 어머니와 함께 세인트 피터스버그에 정착해 살기도 한다. 여기서 ‘빅 서’가 나온다. 서른아홉 살 때 잠깐 머물렀던 캘리포니아 태평양에 인접한 샌타루시아 산맥 서쪽 해안. 이 동네에서 잭 케루악은 마지막 비트, 비트닉의 왕이지만 이미 늙은 비트족 생활을 잠깐 시현하고 8년 후, 결국 알코올성 간경변으로 인한 내출혈, 알기 쉽게 검은 피를 토하며 마흔일곱의 짧은 생에 마침표를 찍는다.
잭 케루악 본인이 거의 틀림없을 잭 들루오즈는 알코올 의존증 중간 이상의 단계에 접어들어 당장 손을 써야지 안 그러면 끝이라고 판단했다. 지난 3년간 술에 찌든 절망의 길을 걸어와 이제는 육체적, 정신적, 형이상학적 절망의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마침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친구 로렌조 몬샌토가 빅 서에 있는 자신의 별장을 삼 주 동안 빌려주겠다고 제안을 해, 숲 속 오두막에서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 잠자고, 장작 패고, 물 긷고, 글도 쓰며 지내겠다고 작정했다. 그리하여 잭은 롱아일랜드의 어머니 집에서 3박4일 간 기차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지만 실제는 언제나 예상이나 의지와 같지는 않은 법. 몬샌토가 일하는 시티 라이츠 서점에 들러 별장의 열쇠를 받아 곧바로 시외버스에 타야 했으나 때마침 토요일 밤의 대목이기도 하고, 샌프란시스코에는 널린 것이 왕년의 동무들이기도 해서, 잭은 “비트닉의 왕” 자격으로 여기저기 전화를 해 숱한 가난한 공신들을 초청, 이틀동안 크게 술잔치를 벌인다. 오후 늦게 잠에서 깨 정신을 차려 이틀간 쓸 식량을 사 륙색을 짊어지고 버스를 타 몬테레이에 도착, 다시 택시를 타고 별장 초입의 레이턴 케니언 다리에 내린 시간이 새벽 두 시.
잭은 마음을 다잡는다. 방탕은 그만. 이제 세상을 조용히 바라보고 어쩌면 즐기기도 해야 할 때야. 먼저 숲 속에서 다음은 세상 틈에서. 술도 마약도 그만, 비트닉이며 술꾼들이며 마약쟁이들과의 흥청망청 파티도 그만. 전부 다 그만. 그는 바람소리, 나무 소리, 파도 소리 같은 온갖 자연의 소리를 노트에 옮겨 적어 길고 긴 시 <바다>로 남긴다. 그러나 고요하고 정제된 협곡에서의 생활도 나흘째부터 슬슬 싫증이 나기 시작한다. 이 골짜기는 지금부터 10세기 동안을 거슬러 올라가도, 나무와 바위는 변했을지언정 근본적으로 똑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잭은 3주만에 미쳐버렸다. 협곡처럼 편안한 곳에서, 편한 상태에서 어떻게 미쳐버릴 수 있었을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신호가 있었다. 평생 나 자신을 기만해왔을 뿐 나는 병든 광대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독한 깨달음이 엄습한 것이 첫 번째 신호이며, 어울리지 않게 짐승들 먹으라고 음식을 내놓은 것이 두 번째였으며, 어머니 다음으로 의지해왔던 고양이 타이크가 죽었다는 편지를 엄마한테 받은 일이 마지막 세 번째 신호였다.
잭 들루오즈는 그리하여 빅 서에서 나와 이제는 어떤 승용차도 히치하이크에 응하지 않는 도로변을 따라 걸어, 걸어,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다가 그게 터져 피를 흘려가며 마치 부상당한 병사의 몰골로 변해갔을 때, 작은 트럭의 남자에 의하여 구조되어 몬테레이 버스역까지 갈 수 있었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다시 비트닉 왕의 많고 많은 신하들이 경배하는 술병 속으로 투신해버린다. 잭의 친구들, 잭 케루악이 젊은 시절에 어울렸던 친구들을 생각하면 된다. 당연히 가난하고 그럭저럭 아무 일이나 해서 먹고 살고, 잡히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으면 살인이 아닌 한에서 웬만한 범죄를 저질러버렸다가 발각이 나 교도소 구경도 좀 하던 친구들, 그리고 그들의 애인을 연상하면 된다. <길 위에서>와 <달마 부랑자들: 다르마 행려>를 비롯해 열 편의 장편소설을 써서 주머니가 가볍지 않은 잭 들루오즈가 거의 모든 술값을 대는 두주불사의 파티. 이 속에서 잭은 급격하게 무.너.진.다.
나는 알코올 의존증 환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설은 읽기 힘들다. 나 스스로 약한 수준의 알코올 의존증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주 이야기했듯이 알코올 의존자들이 가장 원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술을 끊었으면, 그만 마셨으면 하는 일이다. 근데 그게 안 되는 비극. 잭 들루오즈도 술로 인한 인간의 황폐를 더 지속할 수 없어 빅 서로 들어갔으나, 3주만에 나오자마자 곧바로 다시 술통으로 자진 입수해버린다. 알코올 의존자에게 술을 줄이는 건 없다고 한다. 끊으면 끊는 것이고, 마시면 마시는 것일 뿐. 일주일에 8일, 1년에 소주 4백 병 이상을 마시던 나도 올해 8월 어느날, 줄이면 줄이는 것이지 끊지 못한다는 건 뭔가, 싶어서 술을 줄이고 있다. 이제 1주일에 두 번 정도 마시고, 안 마시는 날엔 탁상 캘린더에 붉은 글씨로 NAD No Alcohol Day라고 써 놓는다. 한가위 연휴 때 열흘 동안은 예외로 하고 아직까지 마음먹은 대로 지키고 있다. 아주 죽을 맛이다. 덕분에 체중은 5킬로그램 더 빠졌지만 술에 대한 갈증은 체중계 눈금과 관계없이 지독하고 강렬하고, 맵다. 이런 독한 갈증을 알기에 말콤 로우리의 <화산 아래서>, 한스 팔라다의 <술꾼>, 요제프 로트의 <거룩한 술꾼의 전설> 같이 작가 본인이 독한 중급 이상의 의존증, 중독에 시달리는 작품은 읽기가 괴롭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술을 마시는 일, 마신 후의 블랙 아웃. 잠든 상태의 괴로움과 잠이 깬 다음 손가락 마디 하나 움직이지 못하겠는 숙취. 이러다가 죽는가 보다, 또는, 죽은 상태가 이렇겠구나, 하는 암담함. 어디선가 입은 찰과상이나 부딪힌 흔적. 그러면서도, 뻔하게 알면서도 계속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중급 이상의 의존자들. 그것을 숨기지 않고 백일하에 쓰는 일도 그렇거니와, 그걸 읽는 또다른 술꾼의 가슴도 멘다. 메고 또 멘다. 너무도 공감할 수 있는 고역이라서. 그리하여 잭 케루악, 한 시절 미국의 소설판을 들었다 놓은 이 비트의 왕은 이 작품을 끝으로 결국 압도적으로 술에 얻어터져 간이 산산이 망가진 채 뿜어져 나오는 검정색 피를 한 말 이상 쏟으며, 간경변 환자가 그렇듯이 간 혼수가 오기 바로 전까지 말짱한 정신으로, 복수가 팽팽하게 차올라 북통처럼 치솟은 배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죽어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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