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네온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13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이수영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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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하다보니 또 오츠의 책을 읽었다. 가히 그로테스크의 여왕. 이 책도 엽기 여왕의 명성에 걸맞게 참 다양한 방면으로 피가 튀는 ‘엽기 넘실’이 만땅이다. 젊어서는 예뻤고 지금은 곱게 늙은 할머니가 어째 이리 입담이 험한 지 하여간 나는 조이스 캐럴 오츠의 책을 즐거운 마음으로 읽은 적이 없다.

  이 책은 아내한테 도서관 희망도서 신청을 좀 해달라고 졸라서 읽을 수 있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이면 캐럴 오츠의 책을 읽고 싶었을까? 첫 번째는 출판사 은행나무의 세계문학 에세 시리즈가 읽을 만한 책들을 잘 골라 출간하는 것 같은 믿음이 있어서 시리즈를 싹 읽어보자는 욕심이었으며, 두 번째로 다른 건 몰라도 조이스 캐럴 오츠가 이야기를 꾸밀 때 독자를 한 손아귀에 콱 움켜 쥐는 장악력이 대단하여 읽는 맛이 솔찮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엔 이이의 대표작으로 <좀비>를 치는 모양이지만 그건 모르겠고, 또다른 독자들은 <카시지>를 꼽기도 하는 것 같은데, 하여간 나는 이이의 작품을 그리 많이 읽어보지는 않았다는 전제로 말씀드리자면, <카시지> 이후에 오츠를 더 읽을 이유를 잊어버렸다. 오츠의 세계관이 나의 것하고 너무 차이가 나서. 그럼에도 이이의 작품이 시중에 나오면 한 구석이 자꾸 궁금해지는 거. 하긴, 이게 오츠, 대중문학 거장의 힘이리라. 이이가 장편소설 50편, 단편소설 천 편을 썼다는 거다. 그럼 밥은 언제 먹어? 잠은 언제 자고? 먹지도 못해, 자지도 못해서 빼빼 마른 거 아냐, 이거?


  모두 아홉 편의 중단편을 실은 모음집. 몽땅 엽기다. 가히 그로테스크의 여왕의 손길.

  조이스 캐럴 오츠는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고 참으로 다양한 괴물을 등장시킨다. 남자 괴물이 대다수이긴 하지만 여자 괴물도 있기는 있다.

  다른 독자는 모르겠고, 내 경우에는, 오츠의 책은 읽을 때는 재미있어서 금방 스토리에 함몰해 빠져들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이이가 쓴 이야기가 어떤 내용이었는지, 상당히 헷갈리다가,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읽기는 읽었는데 도무지 기억이 안 나는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이이의 작품이 후져서 그렇다는 게 아니라, 하필이면 나 같은 무지렁이 독자가 자기와 합이 맞지 않는다고 우두둑 우기는 것을 당신이 믿어준다면 그렇다는 뜻이다. 이이는 재미는 있지만 나하고 합이 맞지 않는다.


  뉴저지 주의 스톤리지 시 교외 시골에서 30년간 살아온 중년의 애비게일은 뭔가 불편한 게 있었다. 그리하여 수 개월 동안 치료를 받아온 병원에서 모종의 검사를 받고 나름대로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다가 3월 어느 날 드디어 “음성” 판정이 나와 남편을 위해 촛불과 와인을 곁들인 저녁 식사를 준비할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매일 지나가는 노스리지 도로이건만 오늘은 집을 불과 1킬로미터 정도 남겨두고 “우회하시오!” 라고 쓰인 푯말이 세워져 있었다. 에비게일은 표지를 무시하고 그냥 직진해버릴까, 겨우 1킬로만 가면 되는데, 하고 잠깐 고민하다가 좁은 우회도로로 접어들었고, 3월이지만 미국 뉴저지 날씨로는 여전히 “맹렬한 겨울”이라서 운전해 가던 차의 앞바퀴가 배수로에 박혀버렸고, 앞창이 날아들어 이마를 친 듯 코피가 흘렀다. 차가 기울어 빠져나가기도 힘들었으며 뒷자리에 아무렇게 던져 놓은 핸드백도 바닥 구석으로 밀려 갔는지 찾을 수 없었다. 휴대폰 역시 핸드백에 들어 있었다. 억지로 기어나온 에비게일은 시골 좁은 길로 다니는 차량을 한 대도 발견할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전화 한 통만 빌리고자 한 5백 미터 앞에 보이는 가정집으로 한겨울에 신발 한 짝만 신은 채 걸어서 도착했다.

  벨을 눌러도 집안에서 아무 반응이 없어 부엌문 쪽으로 간 에비게일은 열쇠를 숨겨놓을 만한 곳을 찾아 그쪽으로 집안에 들어간다. 이 장면을 읽는 독자는 누구라도 에비게일한테, 들어가지 마, 들어가지 마, 이렇게 기원하게 되리라. 독자가 무엇을 원하든지 절대 그대로는 하지 않는 주인공답게 에비게일은 집안으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샤워를 하고, 옷을 잠옷으로 갈아 입은 채 부부침실에 들어 침대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버린다. 시간이 지나, 드디어 집의 주인인 것 같은 흰머리의 나이든 남자가 방에 들어와, 마치 남편처럼 오늘 그가 사업상 만난 사람과 일 이야기를 하면서 우울하지만 상냥하게 에비게일을 달래는 거였다. 당장 집안에서 빠져나가겠다는 강박 증세가 생긴 에비게일은 수심에 잠긴 정도를 넘어 절망에 가까운 지경까지 이른 듯이 보이는 남자, 감금자를, 어떻게 했을까? 단편소설은 스토리를 이야기하기가 이렇게 힘들다. 한 마디만 더 하면 내용을 싹 다 말해주는 꼴이라서.


  위의 이야기가 첫 번째로 실린 <우회하시오>라는 단편이다. 이것처럼 책 속의 작품들은 늘 해왔던 일상 속에 도사리고 있는 재앙을 오츠 특유의 방식으로 뽑아내는 데 초점을 둔다.

  제일 괜찮게 읽은 작품은 평범한 여성이 남자를 사랑하거나, 관계를 맺은 과정을 그린 듯하지만 사실 창이나 간판에 네온을 장식한 곳, 즉 술집을 드나드는 버릇이 있는 젊은 여성의 알코올 의존에 더 집중한 중편이자 표제 작품인 <밤, 네온>이었다. 조이스 캐럴 오츠는 내가 읽은 작가의 전작과 마찬가지로 작품을 조금 더 쉽게 쓰려고 그랬는지 하여튼 등장하는 거의 모든 남자를 괴물이거나, 색정광이거나, 변태, 폭력성향을 소지한 위험 인물로 만들었다. 그거야 뭐 작가 마음이니까 독자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 근데 너무 자주 써먹는 거 아냐? 꼭 괴물 같은 것(들)이 등장해야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거야?

  이젠 오츠는 그만 읽으려 하지만, 이런 다짐은 언제나 쉽게 깨진다. 경험상 그렇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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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1-28 06: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또 읽으신다에 1표. ㅋㅋㅋㅋ 저는 이건 넘기려고 했는데….. 으음.

Falstaff 2023-11-28 06:09   좋아요 0 | URL
저도 자신은 없어요. ㅎㅎㅎ

은하수 2023-11-28 07: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무서워서 못 읽어요
몇 작품 읽었다 트라우마가... 허거걱...
전 그래서 그런거 쏙뺀 <멀베이니 가족>이 좋더라구요. 오히려 이 작품이 오츠의 작품 아닌듯한..^^

Falstaff 2023-11-28 16:32   좋아요 0 | URL
저도 그거 때문에 이제 오츠 그만 읽으려는 겁니다. 흑흑흑....

moonnight 2024-07-20 15: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츠 무섭고 불편한데 안 읽을 수는 없어요ㅠㅠ

Falstaff 2024-07-20 16:02   좋아요 1 | URL
그게 오츠 같습니다. 안 읽는다, 해놓고 다시 찾게 만드는 거. ㅎㅎㅎ
 
세레나데 대산세계문학총서 185
쥴퓌 리바넬리 지음, 오진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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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들어보는 작가인데 검색해보니 <세레나데>를 포함해 모두 네 권이 번역되어 시장에 나왔다. 이중에 <살모사의 눈부심>은 벌써 출간한지 20년이 넘어 절판됐다. 그러나 다니는 도서관의 보존실에 한 권 있다. 기분 좋다. 읽어야지. 나머지 세 권은 전부 2022년과 23년 출간. 그러니 리바넬리는 우리나라에서 사실 이제 시작이다. <세레나데>를 읽어본 소감은 대박. 앞으로 이이의 작품은 완독해볼까 싶은 마음이 든다.

  쥴퓌 리바넬리는 1946년 튀르키예의 콘야에서, 나중에 튀르키예 대법원장까지 오르는 검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따라 아나톨리아 반도 구석구석을 다니며 다양한 민속 문화를 섭취했는데, 이는 후에 리바넬리가 음악가로도 성공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앙카라에서 조부모와 함께 살며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이때부터 습작을 하다가 작품 속에서도 간략하게 소개하는 세계적인 1968년 운동에 충격을 받는다. 이때 그리 크지 않은 진보서적을 파는 책방을 경영하면서 어울리게 된 진보 성향의 지식인 그룹으로부터 깊게 영향을 받았다. 1971년에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리바넬리는 71년 한 해 동안 두 번 체포, 구금되었으나 아버지의 뒷배가 좋아서 그랬는지 풀려났고, 72년에 또다시 수배가 되자 여권을 위조해 독일로 도피했다. 74년에 사면 복권 조치로 76년에 귀국했지만 정국이 불안정해지자 이후 11년 동안 스톡홀름, 파리, 아테네, 뉴욕 등을 전전하며 엘리아 카잔, 아서 밀러, 제임스 볼드윈, 피터 유스티노프 등의 극문화 관련자, 현대음악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룬 그리스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등과 교류하며, 본격적으로 OST를 포함한 다양한 분야의 음악을 만들고, 소설도 쓰기 시작했다. 다시 튀르키예로 돌아온 쥴퓌 리바넬리는 소설창작을 위해 음악을 중단하는 한편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국회의원에 당선하기에 이른다. 금세 환멸을 느껴 때려 치우기는 했지만. (위키피디아 참조했음)

  리바넬리의 이런 경력은 그의 작품에도 고스란히 나타나서 개인적, 철학적 주제로는 여성, 가족, 자유, 사랑, 자기중심적 사고, 과거에 대한 향수, 소통 부재, 분노라고 할 수 있으며, 사회적 측면에서 종교, 정치, 권력, 죽음, 관습, 전쟁, 학살, 퇴보 사회, 예술 등을 주제로 한다. (옮긴이 해설 참조했음) <세레나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인종, 종교, 피부색, 젠더, 핸디캡, 지위, 국가/국적, 생각에 따른 차별에 반대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드러진 것은 국가의식에 대한 반대. 튀르키예의 역사에 어둡지만 아는 대로 이야기해보면, 그들의 조상은 흑해 북쪽 타타르의 한 부족으로 페르시아가 쇠잔해지자 아나톨리아 반도에 정착해 위대한 오스만 제국을 건설하고 동로마제국을 무너뜨린다. 이후 오스만 제국은 인근의 여러 국가와 민족, 종교를 수입한 다문화 국가로 성장한다. 20세기 들어 유럽열강에 비해 열등한 위치에 머무르게 되자 튀르키예는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극단의 민족주의 국가로 변질되며, 20세기 후반에는 유연성 있던 종교마저 점점 극단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물론 이 배후에는 민주화되지 못한 정치 시스템과, 부정부패, 계속되는 쿠데타, 심각한 경제 불안 같은 요소가 있고, 이런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경향을 더욱 부채질한 것은 물론이다. 쥴퓌 리바넬리는 책 속에서 끊임없이 피할 수 없는 권력의 폭력성, 결코 깨끗할 수 없는 권력의 속성을 거론하고 있다. 가능하다면 심지어 국가라는 단위마저 부정하고 싶어한다. 제임스 조이스가 쓴 위대한 소설작품 <율리시즈>에서 이런 문장이 나온다.

  “국가는 나를 위해 죽어달라.”

  이게 내가 <율리시즈>를 읽고 여태 기억하는 유일한 문장이다. 가장 싫어하는 건 바람둥이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한 연설, “국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생각하지 말고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생각하라.” 이게 뭐가 달라. “나라의 발전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닫는 것하고.

  하여간 쥴피 리바넬리는 이런 정치적 측면에서 가장 왼쪽에 선 좌파 진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출신이 부르주아라서 그런지 경제적 좌파, 경제적 진보라고 하기는 쉽지 않지만.


  화자 마야 두란. 1964년 1월 21일생. 무직. 5월의 어느 아침에 이스탄불에서 프랑크푸르트로 가서 보스턴행 여객기로 환승해 비즈니스석의 안락한 좌석에 앉아 화이트포트와인 한 잔 곁들인 기내식 서비스 후에 노트북을 꺼내 글을 쓴다. 물론 전에 다 써 둔 원고라 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복사-붙이는 작업이 훨씬 많기는 하지만. 이스탄불 대학의 계약직 대외협력과 공무원이었다가 불미스러운 일로 해고 직전에 사직서를 냈다. 열네 살의 아들을 키우는 홀어미. 전남편 아흐메트는 큰 키에 적갈색 머리카락과 근육질 몸매를 지닌 매우 빼어난 미남으로 외모 하나 보고 결혼했다가 요지부동의 우유부단을 여성스런 섬세함을 지닌 건장한 남자라고 오해했다는 걸 크게 후회하며 8년 전 이혼서류에 인감도장 찍었다. 아흐메트는 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위자료는커녕 자기 성姓을 물려받은 아들 케렘의 양육비도 한 푼 보태주지 않아 엄마인 마야가 집세와 교육비를 위해 악착같이 업무에 매달렸지만 그만 잘리고 만 것.

  서른일곱 살의 매력적인 여성. 당연히 애인도 있다. 타륵. 애인이라기보다 요새 말로 보이프렌드. 이혼을 경험한 마야는 자유로운 사람으로 구속이나 관계에 얽매어 상처받고 싶지 않아 절대 결혼할 마음도 없다. 이건 마야 말고 여러 여성과 애인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타륵도 마찬가지. 자산관리인이라는 명함을 가지고 다니는 타륵은 그리 잘 생기지 않았지만 구르는 재주가 있어서 극단의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21세기 초의 튀르키예에서 마야의 전 재산을 잘 굴려 재산을 수십배로 불리는 수단을 부려주는, 그야말로 천사 같은 존재로 변신한다. 어느 작품이든 선한 일을 하려면 자주 큰 돈이 들어야 하는 법, <세레나데>에서는 타륵이 재물을 가져다주는 램프의 지니 역할을 할 예정이다.

  작품 초입에 비행기 안에서 마야는 자신 속에 자기 말고 세 명의 여인 아이셰, 나디아, 마리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각기 이슬람, 유대교, 천주교를 믿는 여성들이다. 국적은 튀르키예, 독일, 아르메니아. 아이셰는 이슬람을 믿는 튀르키예 인이지만 조국이 사지로 몰고도 구해주기를 포기해 자신을 뺀 부모 형제 친척 모두 물에 빠져 자살을 하든가 총살을 당해 죽은 마야의 외할머니. 마리는 천주교를 믿는 아르메니아 인이었으나 터키의 강제이주 정책에 의하여 어른들은 모두 추방당하고 자신은 친절한 무슬림 가정의 보호를 받다가 고아원으로 들어간 뒤 개종 이슬람인으로 살아온 친할머니.

  그리고 나디아. 유대계 독일인으로 전쟁 전에 뮌헨 대학의 부교수였던 막시밀리안 바그너와 사랑을 맺어 혼인을 한다. 유대 여인을 아내로 둔 남편은 자신을 아는 사람이 없는 하이델베르그 대학으로 옮겨갔으나, 유대인 검거 선풍이 불자 망명을 시도하다가 독불 국경선에서 아내 나디아가 체포되어 수용소에 수감된다. 혼자 튀르키예의 이스탄불 대학으로 옮겨온 바그너 교수는 아내를 구출하기 위하여 튀르키예에서 온갖 방법을 다 써 기어이 다하우 수용소에서 나디아를 빼내는 데 성공한다. 나디아는 부모의 고향인 루미나이로 추방되어, 막시밀리안 바그너가 그곳으로 큰 돈을 보내 흑해를 관통해 튀르키예 이스탄불에 오는 팔레스타인 행 여객선에 탐승한다. 그러나 나디아의 여행은 비극으로 끝나고 만다. 이로부터 59년이 흘러 하버드 법과대학 정교수 막시밀리안 바그너는 이스탄불대학 대외협력과 마야 두란의 마중을 받고 튀르키예 땅을 다시 밟는다. 그의 손엔 비싼 독일제 골동품 바이올린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저 오랜 세월. 당시 젊은 막스는 자신의 모든 생을 바쳐 사랑할 여인 나디아가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를 듣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고 그를 위하여 소품을 한 곡 작곡하니 <나디아를 위한 세레나데>. 59년이 흐른 2001년 2월 24일. 그 겨울에 가장 혹독하게 추웠던 날. 흑해 쉴레 해변에 선 바그너 교수는 바이올린을 꺼내 <나디아를 위한 세레나데>를 연주하다가, 중간에 멈추고, 다시 처음부터 연주하다, 또 중간에 멈추기를 계속한다. 여든일곱 살의 키 크고 마르고 늙은 교수는 세레나데의 후반부를 기억하지 못하는 거였다. 그의 몸은 빠른 속도로 얼어버리고 기어이 얼굴과 입술이 보랏빛으로 새카맣게 타버린 저체온 증상으로 사경을 헤맨다.


  도대체 막시밀리안 바그너 교수와 나디아는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마야의 친할머니와 외할머니, 마리와 아이셰는? 큰 이야기라서 하잘것없는 독후감에 다 담을 수도 없을 뿐더러, 내 남루한 글자로 그토록 무거운 이야기를 옮기는 것 역시 외람된 일이라, 그건 독자께서 직접 읽어보시기 바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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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11-27 08: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꺅~~~630쪽!!!
끝까지 써주시지 읽다 만 느낌이네요. 신나게 읽고 있었는데 뚝... ㅠㅠ
새로운 작가를 자꾸 발굴,소개하는 대산세계문학총서 멋지네요.
저도 좋아하는 시리즈입니다^^

Falstaff 2023-11-27 16:29   좋아요 0 | URL
아휴, 제 짧은 문장으로 이야기를 더 늘일 수 없었습니다. ^^;;

yamoo 2023-11-27 1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또 별5!!!
이것두 찜~~ 합니다!
아, 근데 630쪽이면 ㅎㄷㄷ 하네요..^^;;

Falstaff 2023-11-27 16:30   좋아요 0 | URL
페이지는 금방 넘어갑니다. 그만큼 재미나거든요. ㅎㅎㅎ
이 책은 강추, itself 입니다. ^^

coolcat329 2023-12-03 14: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 적립금이 7500원 쌓여서 뭘 살까 고민하다 폴스타프님이 강추하시는 630쪽 이 책을 사기로 결심했습니다. 사실 요즘 거의 책을 못 읽고 있지만 적립금은 또 아깝잖아요. ㅠㅠ
감사합니다.

Falstaff 2023-12-03 21:33   좋아요 1 | URL
에효, 조카 결혼식 갔다가 지금 와서 댓글이 늦었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이 책, 재미납니다. 천천히 읽으셔요. 새털 같이 많은 나날들입니다. ^^

그레이스 2023-12-06 0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발굴자!
폴스타프님의 값진 리뷰네요!
작가 저장하고 갑니다.

Falstaff 2023-12-06 16:25   좋아요 1 | URL
이 책 재미있습니다. 리바넬리의 다른 책 <어부와 아들> 읽었는데요, 내년 1월 감상문 등록할 겁니다, 이 책보다 한참 못하더라고요. 다른 작품도 더 읽어봐야겠습니다.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0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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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초판이 2020년, 1년 후에 문학과지성사의 대산세계문학총서 169번으로 키로가의 소설집 《오렌지주를 증류하는 사람들》을 낸다. 나는 작년 1월에 대산세계문학총서를 먼저 읽었다. 스물두 달이 지나 개가실에서 책구경을 하다 또 ‘키로가’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고, 《오렌지주를 증류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서슴없이 대출해 읽었다. 《오렌지주를 증류하는 사람들》이 재미는 있지만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아서, 그저 참 꾸준하게, 일관되게, 변함없이 어쩌면 그렇게 사람 죽는 이야기만 하는지, 징글징글한 인상만 남아 있어 산뜻한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건 아니다.

  게다가 열람실에 올라가 정말로 책을 읽어보니까 누가 키로가 아니랄까봐 또 열심히 사람과 짐승들이 죽어 자빠진다. 별 이상한 생명체가 베개 속에 숨어들어 베개를 베고 자는 사람의 뒤통수에 아주 가느다란 구멍을 뚫고 밤새도록 피를 쪽쪽 빨아먹는 이야기도 나온다. 처음에는 아주 적은 양의 피를 빨다가 이제 체구가 좀 커지면 나중엔 벌컥벌컥 마셔버리는 수준으로 성장해 베개의 주인은 하릴없이 빈혈에 시달리다 스르륵 죽어버릴 때까지 흡혈의 축제가 이어진다는 이야기. 재미있겠지? 허무맹랑한 스토리지만 그래도 재미있다. 여름에 읽었으면 더 좋을 뻔했다. 이번 여름같이 죽자 하고 지지고 볶은 무더위라면 더 좋았을 뻔. 그러나 아뿔싸. 이 이야기는 이미 《오렌지주를 증류하는 사람들》에서 벌써 읽어본 내용이다.

  백치로 태어난 네 형제가 부엌에서 하녀가 닭의 모가지를 식칼로 뎅겅 자르는 광경을 감명 깊게 지켜보는 일이 있었다. 그런가 보다 했다. 부모가 총명하고 어여쁜 막내딸만 데리고 시내 쇼핑을 가고, 하녀는 월차 휴가를 받아 옆동네에 들어온 서커스 구경을 간다는 핑계로 대낮에 온천장 모텔에 가서 3만원짜리 대실 빌린 날, 부모가 집에 오다가 통장네가 불러 세워 분리수거하는 요일 좀 지키라고 타박을 하는 걸 댓거리도 못하고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있는 동안 다섯 살 먹은 막내 딸 혼자 집에 들어왔는데, 담벼락에 붙어 해바라기를 하던 4인의 백치 오라버니들이 난데없이 막냇동생 머리채를 휘어잡아 질질 부엌으로 끌고 들어가 찬장에서 식칼을 꺼내더니, 더 듣고 싶으셔? 아이고, 이것도 벌써 읽어본 이야기다.


  오라시오, 영어식으로 하면 햄릿의 베프, 혹은 마이애미 과학수사대 반장 호레이쇼인 오라시오 키로가가 비록 미친 사람들, 광기에 휩싸인 열정에 그만 기가 넘어가버린 인간, 물을 무서워한다는 공수병이라고도 일컫는 광견병을 널리 퍼뜨리는 미친개와 미친개한테 물린 사람, 사랑에 빠져 허덕허덕 된장인지 (점잖게 쓰자) 청국장인지 모르는 (영어로 해야 맛인 단어가 있으니) crazy love 상태의 남녀, 마약, 이래 봐야 지금 수준으로는 우습기까지 한 모르핀 중독 같은 것에 집중한다. 그러니까 당신이나 나 같은 보통 인간들이 등장해 지지고 볶는 이야기는 하나도 없고, 없어도 진짜로 없고, 전부 좀 이상한 인간이나 동물, 심지어 다리 여섯 개 달린 곤충 같은 것이 나와서 죽고, 죽이고, 자살하고, 뜯어먹고, 빠져 죽고, 총 맞아 죽고, 치마를 훌떡 걷어 허여멀건 허벅지에 주사를 쿡쿡 찔러 대다가 마약에 쩔어서 죽고, 독한 사랑을 앓는다. 우리 같은 보통의 인간들은 사랑은 권태나 관성으로 끝나지만, 이 책에 나오는 연인들은 뭐? 그렇다, 광기로 자신과 상대를 미치게 만든다.

  이런 그로테스크한 것들을 모아모아, 키로가는 그래도 참 절묘한 방식으로 나름대로 재미있게 스토리를 꾸려 열여덟 편의 작품으로 책 한 권을 만들었다. 그래 점수를 준다면 넷 정도는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지만, 내 경우엔 22개월 전에 읽은 책에서 같은 작품을 여러 편 읽어서 작지 않게 실망한 터라 별 하나를 더 뺄 수밖에 없다.


  근데, 작품보다 더 재미있고 기구하고 그로테스크한 건 작가 오라시오 키로가의 살아온 내력이란 말씀이지. 내가 살을 좀 붙여 오렌지술 독후감에다 써놨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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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11-24 06: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쥴퓌 리바넬리, <세레나데>
화요일. 조이스 캐럴 오츠, 《밤, 네온》
목요일.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메데야와 그녀의 아이들>
금요일.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별의 시간>

stella.K 2023-11-24 1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맞아요. 마이애미 과학수시대 호레이쇼. 정말 멋있었죠. 지금은 많이 늙었겠죠? ㅋ
저는 어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검색해 봤는데 참회록도 있더군요. 고백록과 참회록을 같은 거로 봐야하는지 다르게 봐야하는지 헷갈리더군요. 목차 보면 좀 다른 것도 같고. 암튼 그런 책이 있어요.
별 세개라서 그런가 했는데 네 개같은 세 개군요. 관심이 가네요.^^

Falstaff 2023-11-24 19:01   좋아요 1 | URL
CSI 반장들은 다 괜찮았는데 저도 그중에 호레이쇼가 제일 좋았습니다.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라서 그중 인간 같았거든요. ㅎㅎㅎ
아우구스티누스 읽으시려고요? 오호... 전 아마 서너번 시도했던 거 같습니다만 결국 읽지 못했고 앞으로도 읽을 생각이 없습니다. 이 책 괜찮습니다. 문둥이네 이 책과 문지네 오렌지술 가운데 한 권만 읽으시면 될 거 같아요. ^^

꼬마요정 2023-11-24 22: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저 이 책 너무 힘들게 읽었어요. 마이애미의 호레이쇼 진짜 좋았어요. 그래서 신혼여행을 마이애미로 갈까도 했더랬죠. 근데 그 땐 하와이 파이브 오가 이겨서 하와이로 갔다는… 근데 이 책이랑 이런 밝은 얘기는 어울리지 않는군요 ㅋㅋ
남미 작가 책은 다 그런가 했다니까요.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은 그나마 괜찮았는데요ㅜㅜ

Falstaff 2023-11-25 05:15   좋아요 1 | URL
남미작가들 당연히 다 이렇지는 않습니다.
키로가는 훌륭한 단편작가가 되기 위해서 숭배해야 할 거장으로 포, 모파상, 키플링, 체호프를 꼽았고, 이들을 신처럼 모시라고 말했습니다. 한쪽으로 쏠린 것도 같고 뭐 그렇잖아요. ^^

꼬마요정 2023-11-25 09:05   좋아요 2 | URL
힘든데 다 읽었어요. 키로가는 훌륭한 이야기꾼인데 그 내용이 좀 아팠다고나 할까요. 자꾸 벌레가 사람을 갉아먹거나 하는 등 날것이 자꾸 훅훅 들어오니까 힘들었거든요. 남미 날씨가 그런가 싶기도 하고… (하긴 러시아는 추워서 힘들기도 하네요.) 여튼 세상은 넓고 훌륭한 작가들은 많군요. ㅎㅎㅎ
 
월요일은 토요일에 시작된다 스트루가츠키 형제 걸작선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희원 옮김 / 현대문학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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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여간 이 스트루가츠키 형제들의 발상은 별나다. 2016년에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을 읽고 단박에 팬이 되어 이후 <노변의 피크닉>, <신이 되기는 어렵다>, <죽은 등산가의 호텔>에 이어 이제 다섯 번째로 <월요일은 토요일에 시작된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이 형제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외계 생명체의 지구 방문인데, 내가 가장 흥미롭게 읽은 것은 <노변의 피크닉>으로 지구에 왔다 간 외계인들이 그냥 버리고 떠난 것들, 마치 지구 행성으로 소풍을 나왔다가 먹다 버린 김밥 쌌던 알루미늄 포일처럼 그냥 함부로 방치하고 떠난 쓰레기에 접근하는 지구인의 모습이었다. 물론 직접 외계인이 나와 눈사태를 일으켜 산장에 모인 사람들을 고립시킨 채 지구를 떠나는 <죽은 등산가의 호텔>도 근사했지만, 비행기에서 떨어트린 코카콜라 병을 주워 생긴 모습과 용도를 몰라 갖은 상상력을 발휘했던 <부시맨>이 바로 지구인의 모습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 훨씬 흥미로웠다.

  봉급쟁이한테는 끔찍한 말이 될 <월요일은 토요일에 시작된다>는 내가 읽어본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외계 생명체와 관련이 없다. 한 명(단위가 좀 문제다 외계인을 세는 단위를 ‘명’으로 해야 하나 ‘마리’로 해야 하나?)의 외계 생명체도 등장하지 않고, 그들의 영향권에 있지도 않으며, 어떤 형태로도 통신 및 접촉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직 사람들 이야기. 그러나 당연히 우리 같은 장삼이사 보통 사람들은 아니지. 글쓴이들이 당대의 문제아 스트루가츠키 형제들임에야 뭐. 이 책의 부제sub title가 “젊은 과학자를 위한 동화”다. 덧붙이기를, 여기서 말하는 ‘젊은 과학자’는 “호기심이 많고 과학적 활동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을 일컫는다, 즉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은 모든 사람들이 읽어도 무난하다는 뜻이다. “동화”라니까. 여기서 주의할 것은, 많고 많은 동화 가운데 주로 소비에트 연방의 동화를 가져왔다는 거. 아무리 러시아-소련이 유럽 국가이고 서구 특히 불독佛獨과 문화적으로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고 해도 물론 안데르센이나 그림 또는 프랑스 동화가 안 나오는 건 아니지만 압도적인 빈도로 얼어붙은 동토의 전래동화가 많이 나와서 아무래도 그쪽 방면에 취약한 우리가 자연스레 읽기엔 조금, 많이는 아니고 조금, 거추장스럽다. 이제 작품 속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레닌그라드의 젊은 컴퓨터 프로그래머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프리발로프는 때묻지 않은 자연의 풍광을 즐기기 위하여 경차 모닝을 렌트해 북쪽으로 향한다. 목적지는 솔로베츠. 실제 지명이다. 아르한겔스크에 있는 지역으로 스웨덴 영향권하고 맞닿아 있다. 이 작품이 1964년에 출간했으니 소련 시절이다. 이때만 해도 도로망이 좋지 않았는지 사샤(알렉산드르의 애칭)는 자갈 수준을 넘어 거의 바위 수준에 육박하는 돌길을 운전하느라고 녹초가 되어 있었는데, 사냥꾼 차림의 남자 두 명이 히치하이크를 하는 지라, 요즘엔 어림도 없지만 그때까지 만해도 차를 몰고 가다가 걷는 사람을 보면 태워주는 것이 인정이라 고물차에 태웠다. 한 명은 솔로베츠 토박이인 매부리코 로만이고, 다른 하나는 무르만스크 출신의 턱수염 볼로댜. 놀랍게도 이런 시골에서 만난 두 사람이 다 석사학위 소지자다. 당연히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알았다. 사샤는 자기 직업이 프로그래머인 것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것 참, 이 둘이 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지금 프로그래머의 도움이 급하게 필요하다는 거다. 인간의 행복을 위한 연구를 하는 중에 후에 컴퓨터라고 불릴 ‘전자계산기’의 디버그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을 구하며, 조건은, ① 먼저 인간이 된 프로그래머일 것, ② 자원할 것, ③ 기숙사에 사는 데 동의할 것, ④ 월급 120루블을 수락할 것이란다. 근데, 로만과 볼로댜가 사샤를 두고 하는 이야기가 가관이다.

  “저 친구 공간이동 시켜 버릴까?”

  “네가 무슨 소파sofa라도 되는 줄 알아?”

  공간이동? 어디서 들은 이야기지? 그렇다 벽난로에 플루 가루를 뿌리고 펑, 가루가 터질 때 연기 안으로 쑥 들어가면 단박에 런던 킹스크로스 역의 9와 4분의 3 승강장 앞으로 갈 수 있는 거, 기억하시지? 바로 그 공간이동을 이야기하는 중이다. 사샤가 연구소에 입소하겠다 아니다 라는 말도 하지 않았건만 이들은 무턱대고 “니이차보 연구소” 산하 박물관인 “닭다리 오두막”에 사샤의 숙소를 정해버렸다. 그곳으로 순간이동을 시키자, 아니다 하고 있는 거다. 

  모든 독자는 알고 있다. 사샤가 니이차보 연구소에 들어가지 않으면 소설이 안 되는 것을. 그래서 결국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지 알 도리가 없는 할머니 나이나 키예브나가 관리하는 닭다리 오두막에서 첫날 밤을 지내게 된다. 이튿날 할머니에게 도착한 전보를 우연히 보게 된 사샤.

  “전보 #206. 수신자 시민 고리니치 나이나 키예브나. 귀하에 통보합니다. 오늘. 7월 27일 자정에 당해 연례국가비행소집. 첫 회합. 장소는 민둥산. 복장은 정장. 기계교통수단 사용. 자비로 충당. 서명.”

  이쯤 되면 알 만한 독자는 눈치챈다. 자정의 민둥산. 장소는 구 러시아, 현 소비에트 연방. 번쩍 떠오르는 거 읎으셔? 모데스트 무소륵스키 작곡 “민둥산의 하룻밤”. 러시아 지역에서 특정일 자정의 민둥산 하면 악마 축일의 밤을 연상시킨다. 아마 <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서도 나올 거다. 그럼 나이나 키예브나 할머니의 정체는? 뭐긴, 마녀지.

  그러면? 마녀로 추정되는 연령 미상의 노파가 박물관을 관리하면 도대체 연구소를 무엇을 하는 곳인지 궁금해진다.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4차원에도 틀림없이 구멍이 있을 것이어서 그곳을 통해 생물학적 전파를 연결하는 일을 한다. 예컨대 주머니에 5코페이카 동전이 있어 그걸 주고 풍선껌을 사서 씹어 소비를 했지만 다시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까 똑같은 5코페이카 동전이 있는 현상. 어제는 초록 앵무새의 깃털이 있었던 바로 그 자리에 오늘은 앵무새의 시체가 있어서 벽난로에 던져 화장을 시켰고, (하루가 지난 후) 오늘은 똑같은 장소인 저울대에 초록 앵무새가 살아 있다가 점점 시들시들해지고, (하루가 또 지난) 오늘은 저울대에 앉은 앵무새가 조잘조잘 떠들고 있는 현상.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걱정하지 마시라, 책의 마지막 부분에 가면 다 나온다.

  만일 18세기에 몽테스키외 선생이, 심정지로 사망 판정을 받은 사람이 45분 후에 다시 소생했다는 보고를 받으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모르기는 해도 몽테스키외 선생은 반계몽주의로 급격하게 선회했을 것이며 유물론을 포기하고 신비주의로 돌아섰을 것이다. 과학은 가끔가다가 이런 짓도 한다.


  그럼 니이차보 연구소는 어떻게 구성이 될까? 다른 모든 연구소와 마찬가지로 경비, 총무, 회계, 인사 등의 관리부서도 있고 중요한 연구부서로는 마법과학과 마술과학 팀이 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마법과 마술은 무대 위에서 펼치는 순간 눈속임이나 자잘한 손기술이 아니다. 여태까지 밝혀지지 않은 국가적 기밀사안으로, 바야흐로 냉전의 클라이맥스를 향하고 있는 1960년대 상황에서 선제적으로 스푸트니크 호를 쏘아 올려 우주와의 교신을 시작한 소비에트 연방은, 시간적 공간인 4차원의 개발에도 박차를 가해 막강한 적수인 미합중국을 다방면으로 압도하고자 하는 야심을 품고 설립한 연구소다(양심상 밝히는데, 구라다. 내 생각에 그렇다는 말이다).

  이런 연구소에서 벌어지는 일을 기록하자니 당연히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이곳에서 벌어지는 “난리법석”을 소제목으로 해서 첫 번째 이야기 “소파를 둘러싼 난리법석”, 두 번째 이야기 “난리법석 중의 난리법석”, 세 번째 이야기 “온갖 난리법석”으로 구도를 짜 재미난 상상력을 풀어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마법과 마술을 위한 과학적 난리법석에 참여하는 우당당탕 연구원들. 이렇게 재미난 연구를 하는 월 120루블짜리 봉급쟁이들이니까 기꺼이 월요일은 토요일부터 시작해서 일 주일이 월,월,월,화,수,목,금요일이라는 거 아냐?

  하여간 아르카디와 보리스 스트루가츠키 형제들, 참 골 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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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11-23 1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드뎌 별 5개 떴네요~~
바로 이 책 찝합니다. 실로 오랜만에 올라온 별5개!!
믿고 보는 뽈님의 별5개 작품!!ㅎㅎ

Falstaff 2023-11-23 18:28   좋아요 1 | URL
넵. 5별입니다. 전적으로 ˝재미˝ 하나 보고 다섯 개 줬습니다!
ㅎㅎㅎㅎ 뭐니뭐니 해도 역시 소설은 재미가 있어야.....
 
애나 크리스티
유진 오닐 지음, 이형식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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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유진 오닐. 오닐의 책은, 일부러 검색을 해보지는 않지만 눈에 띄기만 하면 내용과 관계없이 얼른 사고 본다. 이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번엔 사두고 너무 오래 묵혔다가 읽는다. 도서관을 이용하니 사 둔 책은 언제라도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지 얼른 읽게 되지 않았다.


  스웨덴 이민자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영화 <스타 탄생>에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함께 출연한 저음의 가수와 우연히 이름이 같다. 하지만 오닐의 크리스는 뱃사람. 일년에 집에 있는 날이 며칠 안 되는 천생 뱃꾼인 줄 알았는데 사실 바다를 증오한다. 아내가 죽을 때도 바다에 있었고, 바다 일을 버리지 못하여 하나 있는 딸 애나를 보살피지 못한다. 그리하여 미국의 사촌에게 보내 바다와 떨어진 곳에서 땅을 밟고 살고, 농사를 짓는 남자를 만나 안정된 삶을 살기를 바랐다. 지금은 뉴욕을 포함한 동부 해안과 오대호를 돌며 석탄 바지선 선장을 하고 있다.

  막이 오르면 뉴욕 부두 근처의 술집 ‘자니 더 프리스트’. 아직 등장하지 않은 크리스한테 술집 주소로 편지가 와 있다. 늘 이곳으로 편지가 오면, 물론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단골 크리스가 뉴욕에 들를 때마다 편지를 전해주고는 했다. 이번엔 여자 글씨의 편지 한 장. 크리스는 오십 줄의 사내. 애나를 친척집에 보낸 것도 십오 년 전. 설마 홀아비가 여태 혼자 살고 있다고 믿지는 않겠지? 바지선은 대개 살림을 살 수 있게 개조한 것이 보통이다. 지금은 나이 들어 퇴물이 된 논다니 마티와 함께 살고 있다. 전작이 있는 크리스가 술집에 들어와 쾌활하게 위스키를 몇 잔 마신 다음 편지를 받는다. 독자들이 예상할 수 있게 딸 애나한테 온 편지다. 곧 뉴욕에 도착한다는. 이어서 동거하고 있는 마티도 등장해 함께 술을 마시다가 잠깐 크리스가 퇴장하는 틈을 타 주인공 애나가 등장한다.

  애나. 친척집에 들어가서 (애나의 말에 의하면) 노예처럼 시키는 일을 죽도록 하다가, 열여섯 살 됐을 때 거구의 힘센 셋째 아들한테 겁탈을 당한 후 도망을 나와 베이비시터로 있었다. 이 보모란 직업이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씨가 아는 애나의 마지막 모습. 보모라고 별 다른 것이 없어서 혹독한 대우를 견디지 못한 애나는 다시 집을 나와 매춘업소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몇 년. 병이 들어 입원해 치료를 받은 후 완행 열차를 타고 아버지한테 의지하려고 뉴욕에 도착한 것.

  마티는 한 눈에 알아본다. 애나의 지금 처지를. 상황 파악을 잘 하고 천성적으로 마음이 아름다운 마티. 세상에 원수질 일은 없는 것이 좋다는 신조의 마티는 조용히 크리스를 불러 이야기한다.

  “잘 들어! 나는 바지선으로 가서 짐을 싸서 날라 버릴 거야. 저 안에 그녀가 있어. 당신 딸 애나 말이야. 방금 와서 당신을 기다려. 잘 돌봐 줘, 알았지? 아팠대. 자, 안녕! (뒷방으로 가서 애나에게) 잘 있어, 아가씨. 나 가야 돼. 또 봐.”

  마티가 세월과 집구석과 부모를 잘못 만나서 그렇지 이만한 천사가 또 어디 있을까? 천사는 이렇게 1막에 잠깐 나오고 사라진다.


  2막부터 드라마는 시작한다.

  열흘 후 매사추세츠 프로빈스타운 항구에 정박 중인 바지선이다. 마티는 정말로 그날로 짐을 싸서 사라졌고 대신 애나가 아버지와 함께 산다. 이 날은 안개가 자욱해 코 앞의 사물도 식별하기 힘든다. 부녀 사이에 말다툼이 생긴다. 아버지는 딸이 농장에서 건실한 남자를 만나 살기를 바라고, 딸은 남자란 남자는 다 겪어본 베테랑이나 된 것처럼 남자라면 넌더리가 나고 특히 아버지한테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친척집 셋째 아들에게 당한 능욕의 기억 때문에 농촌은 아예 머리에 떠올리기도 싫다.

  이때 바다에서 들리는 사람의 목소리. 어제의 폭풍우에 난파당한 선원들이 조각배를 타고 탈출해 노를 저어 온 것. 이 가운데 웃통을 벗어 던진 채 더러운 작업복만 걸친 아일랜드 남자 버크. 어깨가 떡 벌어지고 180센티미터가 넘는 건장한 사나이로 얼굴은 강하고, 거칠고, 대담하고 반항적으로 잘 생긴 사내. 잠을 못 자 핏발 선 짙은 색 눈이 애나를 바라보는데 팔뚝의 핏줄이 푸른 실처럼 울퉁불퉁하다.

  화물선의 화부였으며 생긴 모습대로 다혈질이라 거침없이 싸움을 걸고, 진짜로 싸움을 하고, 싸웠다 하면 무슨 수를 쓰든 상대를 때려눕히는 사내. 버크가 등장하는 순간 관객과 독자는 애나와의 연애가 생길 것임을 짐작한다. 둘은, 특히 남자에 학을 뗀 애나는 버크의 사랑에 코웃음 치며, 아버지 크리스 역시 버크가 육지 남자가 아닌 뱃놈인 것을 심하게 마땅히 생각 못한다.

  3막에 들어서면 갈등이 심해져 버크는 애나에게 청혼을 하려 하고, 아버지 크리스는 주머니 속에 칼을 넣고 담판을 지으려 도사리며, 애나는 자신이 정말로 버크를 사랑하는지 아닌지 확정하지 못한다.


  당연히 나는 결말을 이야기하지 않을 것.

  석탄 바지선에서 벌어지는 치정극 하나가 생각난다. 지아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3부작 가운데 <외투>. <외투>에서는 젊은 아내 죠르제타와 부정을 저지른 청년 루이지를 늙은 남편 미셸이 단매에 때려 죽이지만 <애나 크리스티>에서 딱 벌어지기는 했으나 작은 체구의 크리스 선장이 거구에 단단한 몸을 가진 천하장사 마징가 같은 버크와 좋은 상대가 될 수 있을까?

  그러나 안심하시라. 유진 오닐 치고 '그나마' 순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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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3-11-21 0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뽀빠이와 마징가의 대결인가요. 기운 센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 주제가 흥얼거리면서 책 사러 가요.

역자 이름이 낯익어서 보니 펭귄 프루스트 역자와 동명이인이군요. (그 역자일 리는 없죠 당연히)

유부만두 2023-11-21 08:44   좋아요 1 | URL
겸사겸사 도밍고의 루이지 이중창 보고왔어요. (20살로 우기는 50이던대요) 외투 언급 감사합니다.

Falstaff 2023-11-21 15:40   좋아요 0 | URL
뽀빠이와 마징가가 대결 직전까지 가는군요. 근데 게임이 안 될 겁니다. 마징가는 무쇠 팔, 무쇠 주먹인데 사람의 팔과 주먹이 무슨 수로 버티겠습니까. ㅎㅎㅎㅎ
옙. 프루스트 이형식 선생이 좀 더 선배일 겁니다. 불어 역자 가운데 제가 좋아하는 1인입니다. ^^

와우, 유튜브 보셨어요? 진짜 드라마틱 오페라입니다. 푸치니 다운 엽기 막장 불륜 치정 드라마요.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