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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 이순신 ㅣ 범우희곡선 40
김지하 지음 / 종합출판범우 / 2014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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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여 년 전 교양과목 국어작문을 수강했다. 과제 가운데 하나가 “총장에게 보내는 서한문”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불행했던 우리나라 현대사는 생떼 같은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몸에 시너thinner를 뿌리고 구호를 외치다가 스스로 휴대용 라이터에 불을 붙여 온몸으로 아스팔트를 뒹굴며 생을 마감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1970년대 초반 베트남 승려들의 분신에서 비롯한 것이 분명한 것처럼 보인 이런 극한의 자살 시위는 나로 하여금 심각한 회의를 갖게 했다. 때마침 모교에서도 도서관 옥상에서 구호를 외치고 유인물을 살포한 후 시멘트 바닥을 향해 장렬하게 몸을 날렸으나(그렇게 들었으나) 기가 막힌 순간에 학교에 상주하는 사복 형사 또는 무명의 백골단원이 그녀의 발목을 나꿔채는 바람에 명을 보존한 일이 있었다. 민주 투쟁을 하는 건 시대를 잘못 만난 젊은이로서 하나의 의무인 건 맞다. 그것을 위하여 법, 기존의 악법을 위반하는 것도 맞다. 악법을 올바로 고치려면 반드시 악법을 반대하는 투쟁을 하고, 대신 그 법에 의해 처벌을 받아야 한다. 희생 없이는 어떠한 법도 바로잡을 수 없으니까. 이 과정에 잘못된 법률에 의하여 죽음을 맞는 것과 투쟁의 방법으로 하필이면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것은 다르다. 그건 완전히 잘못된 죽음의 방법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들과 다른 생각은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시대였다. 나는 찌그러졌다.
그리하여 교양필수 국어작문 시간에 몇 년 후 국무총리가 될 총장에게 당부의 편지를 썼다. 당시 모교 화장실에는 좌변기 이전 시대라서 쪼그려 앉는 수세식 변기가 있었는데, 앉은 상태에서 눈 높이에 가로 손잡이를 달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피가 끓는 청년 학생들이 눈 앞의 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쓰면 혹시 순풍순풍 매화타령을 하는 쾌변의 카타르시스를 만날 수 있겠으며, 해탈의 순간에 모든 스트레스가 함께 빠져나가 최근 도서관 옥상에서 있었던 현대판 ‘타잔 놀이’ 같은 아찔한 일이 더 이상 생기지 않을 것 같다고. 하필 장난기에서 그리 했을 것이 분명한, 유명하지는 않지만 소설가였던 강사께서 내 서한문을 뽑아 낭독을 했고, 계단식 강의실엔 홍소가 터져버렸으나, 나는 입대해버리고 말았다. 뭐 그때는 그랬다. 비겁한 남자새끼들은 회피의 방법으로 군대에 가버리고, 여자애들은 시집을 가거나 약혼을 해버리고.
세월은 흘러 제대를 하고 실연을 당하고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다시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직장을 위해 소도시로 옮기고 아이 하나를 둔 1991년. 조국에선 여전히 젊은이들이 시너를 뒤집어쓴 채 줄줄이 죽어 나갔다. 이때 많고 많은 신문 가운데 하필이면 조선일보에 김지하의 칼럼이 올라왔다.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이미 예전의 친구들과 완벽하게 격리된 나는 세상물정 모르고 ‘조선일보’의 칼럼임에도 열광했다. 역시 김지하. 그러지 않겠는가? 십 년 전에 내가 생각했던 것을 다른 사람도 아닌, 무려 김지하가 웅변을 해 마지않았으니.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이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자는 건 좋은데 발언의 톤이 시원하기는 시원하지만, 논조가 필요한 것보다 과격하다는 거였다. 20여년 전 5적을 향해 일갈했듯이. 아니나 다를까, 노태우 정부와 당시 여권은 이를 반대파 공격의 강력한 무기로 활용했고, 진보 진영에서는 김지하를 변절자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김지하는 이후 기행의 시기로 접어들고 10년이 지난 2001년에 죽음의 굿판에 관해 유감을 표하기도 했으나 2022년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진보 진영과의 화해는커녕 변절자의 낙인도 지우지 못했다.
변절자. 물론 김지하가 박근혜를 지지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변절자?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자기 진영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변절, 배신이라 말하는 자체가 아집 그리고 천상천하 유아독존 아닐까? 사상의 자유와 선택의 자유도 인정하지 않는 게 소위 진보?
김지하. 미당 이후에 어쨌거나 지하만큼 영욕의 대상이 된 문인은 없을 듯하다. 오늘 소개하는 《구리 이순신》에는 1970년 작품인 <나뽈레옹 꼬냑>과 표제작 <구리 이순신>, 1974년 작 <금관의 예수>가 들어 있다. 1970년은 지하가 그의 대표작인 담시 <오적>을 발표해서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된 해. 당시 청년, 지식인들은 벌써 권력을 쥐고 10년차에 이른 박정희 독재정권의 정치적 폭력과 경제적 약자 수탈에 항거할 수밖에 없었다. 부르주아의 축재는 세상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이 그러했듯이 저임금 대량생산을 통한 이익의 극대화를 시작했으며, 이와 관련한 공무원, 군인, 기업가들은 서로 부패의 고리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독야청청? 돈 안되는 일이었다. 이 당시 진보 진영은 적어도 의식意識적으로는 행복했을 지 모른다. 무조건 권력을 쥔 자, 부유한 자를 공격하기만 하면 정당했으니까. 책은 벌써 반백 년 전 이야기들이다. 지금 이 책을 읽는 독자는, 그때는 이랬었구나, 하는 심정으로 읽어야지, 50여년 전에 했던 김지하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고, 그리 해서도 안 될 것이다.
첫번째 작품 <나뽈레옹 꼬냑>은 에네시가 맛있느냐, 르미 마르탱이 맛있느냐 하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에 양주라는 단어조차 귀했던 시절, 삼학소주가 진로와 함께 시장점유율을 다투던 시절에 서울의 절두산 인근에서 오빠가 운전하는 자가용 차를 타고 가던 정인숙이라는 아들 하나 딸린 젊은 여성이 의문의 총에 맞아 현장에서 죽고, 오빠는 허벅지에 관통상을 당한 사건이 일어난다. 물론 작중에서는 정인숙이라는 본명 대신 강변에서 총을 맞았으니 강변숙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당시 국무총리를 했던 정일권이 정인숙이 키우는 아들의 친부라는 의혹(네이버 지식백과를 베낀 것. 내 의견 아님. 관계자분들은 고소하지 마실 것)은 여전히 미궁에 빠진 채라는 건 다 아실 터이고, 작중 강변숙의 남자는 그저 ‘고위 관리’ 당시 부자나 관료들을 대표하는 똥배 나온 대머리에 카이저 “수염”이 나고 거만하기 이를 데 없는 남자인데, 극은 이 수염 남자의 집에서 여사님의 대학 동창들이 모여 수다를 떠는 단막극이다.
베트남 파병 육군장교의 아내 통뼈, 공무원 아내 시엄마, 회사 사장의 아내 오만평이 수염의 아내 마마의 응접실에 앉아 서로 못 잡아먹어서 독살 맞은 말의 칼로 서로의 멱을 따려는 가운데 마마가 “나뽈레옹 곤냐꾸” 한 병과 코냑 잔을 들고 온갖 거드름을 피우며 등장한다. 이들은 남편의 안전과 다음 번 승진 발탁, 관급 계약의 성사를 마마에게 청탁하러 온 것이고, 나중엔 방송사 PD의 아내 선녀가 바람난 남편이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가판대에서 산 신문 한 장을 갖고 늦게 도착한다. 친구들 앞에서 온갖 폼을 잡는 마마가 신문을 펴보더니 강변숙 살해사건에 수염 씨가 깊이 관여되어 있어 관직 박탈이 거의 확정적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이 순간 친구들이 돌변해 마마에게, 화무십일홍이니, 권불십년이니, 위대한 나뽈레옹 곤냐꾸가 되어버렸다느니 비웃으며 자리를 뜬다는 내용이다.
두번째 작품이자 표제작인 <구리 이순신>은 세번째 1974년 작 <금관의 예수>와 매우 유사하다. <금관의 예수>를 자기표절 작품 또는 <구리 이순신>의 확장 각색 작품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구리 이순신은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말하며, 금관의 예수는 부자가 만들어준 금관을 쓴 시멘트 예수상이다.
세상은 갈수록 험해 가난하고 가여운 사람, 엿장수는 처자식 돌보느라 아무리 일을 해도 호구지책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내일이 오늘보다 좋아지리라는 아무런 보장도 없다. 이를 슬퍼하는 거지 시인은 이순신 동상 아래에서 세상을 탄하다가 쪼그리고 잠을 청한다. 엿장수는 구리로 만든 이순신 장군의 몸통은 그만두더라도 집고 있는 칼이나마 훔쳐 팔아 마누라한테 목도리라도 하나 사주고 싶어한다. 그리하여 칼에 손을 대는 순간, 이순신 동상이 엿장수에게, 세상이 이 지경인데 자신은 구리 틀에 갇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제발 구리 감옥을 벗겨달라고 부탁한다. 이 어려운 시기를 바라만 볼 수 없다고.
마찬가지로 사창가에 살고 있는 문둥이와 거지에게 자신이 쓰고 있는 왕관을 벗겨 세상에서 소외된 가장 가여운 인간, 문둥이와 거지들이 사이좋게 나누어 가지라고 말하고, 시멘트 감옥 안에 갇혀 도탄에 빠진 하느님의 자식들을 내버려두고 있는 처지를 한탄하는, 금관의 예수 이야기다.
김지하라고 하면 문, 사, 철, 시, 서, 화, 무(춤)에 능하다고 하는 인물이다. 1970년에 발표한 <오적>에서 볼 수 있듯이 김지하의 다방면에 걸친 탁월함 중의 하나가 놀이판이자 담시譚詩다. 그리하여 <구리 이순신>에서는 엿장수가 한 판 사설을 늘어놓고, <금관의 예수>에선 문둥이와 거지가 듀엣으로 사설을 풀어내는데, 이게 김지하의 희곡, 마당극의 진수라고 봐야 할 것이다.
<나뽈레옹 꼬냑>과 <구리 이순신>은 1971년 5월에, 축제 때 아닐까 싶은데, 공연을 준비했다가 대학 군사훈련 반대 시위로 휴교조치가 내려 무산되었다고 해설에 쓰여 있다. 만일 이때 공연을 했다면 최초, 아니면 상당한 초기의 현대식 마당극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다시 말하는데, 50년 전 작품이다. 그때의 시각과 지금 시각이 같을 수도 없고 같은 것도 바람직하지 않을 터, 독자들은 스스로의 필터를 갖고 읽어 마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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