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꼭두각시
윌리엄 트레버 지음, 김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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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3년, 잉글랜드 도싯 지방 우드컴엔 우드컴 파크라는 대 저택이 있어서 삶의 활기를 만끽하는 반면, 아일랜드 킬네이 주택은 무덤처럼 고요하다며 작품은 시작한다. 두 집안이 무슨 관계인지 보자.

  160여년 전이면 1820년대에 17세 영국인 소녀 애나 우드컴이 아일랜드 남자 윌리엄 퀸턴과 결혼해 아일랜드로 떠났다. 코크 주 로크에서 멀지 않고 페르모이에서도 멀지 않은 킬네이 저택에서 살면서 킬네이 최초의 과수원을 조성하는 등 열심히 살다가 그만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만일 여주인이 살았다면 마흔 살 정도 됐을 무렵에 아일랜드에 세계적으로 이름난 대기근이 들고 만다. 당시 아일랜드 인구 8백만 가운데 2백만 명이 굶어 죽었다고 기록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아일랜드 붉은 머리카락의 백인들이 대규모로 미국으로 가는 배를 탔다. 그때 퀸턴 가는 코크 주에 막대한 토지를 가진 대지주로 이름이 높았으며 여주인이 아낌없이 소작인들을 돌보아 덕망을 곳곳에서 칭송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다가 대기근이 들자 이미 나이 든 퀸턴 씨 눈에 저택 저 너머 언덕에 죽은 아내의 혼령이 마치 저 어진 고다이바 부인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더니 세상의 땅은 농사를 직접 짓는 사람들의 것이니 골고루 나누어 주라고 산 남편에게 당부를 했다. 퀸턴 씨는 죽은 아내의 말을 따라 진짜로 땅의 대부분을 소작인들에게 주어버렸다.

  두 세대가 지난 후에 영국의 한 육군대령이 페르모이에 주둔했다. 이때 대령의 맏딸이 퀸턴가의 남자와 결혼해 아일랜드에 살면서 아들 윌리와 딸 제럴딘과 데르드러를 낳았고, 작은 딸은 영국인 보조 사제와 결혼해 딸 메리앤을 낳았다. 작은 딸이 결혼할 때 우드컴 집안은 결혼선물로 신랑에게 우드컴 마을의 종신교구 사제직을 맡겼다. 퀸턴이란 성姓은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에 뿌리를 둔 성인 퀴엔틴(타란티노?)에서 유래했지만 아무도 이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하도 오래된 일이라서. 이 책은 육군대령이자 우드컴 가문 중에서 낮은 우드컴 가족이라 저택의 정원을 산책하더라도 집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집의 두 자매가 낳은 아이들, 윌리와 메리앤의 이야기이다. 슬픈 사랑의 이야기. 윌리엄 트레버가 늘 그렇듯이.


  이 책을 읽기 위하여 독자는 1910년대 아일랜드 독립 과정을 대강 알아둘 필요가 있다. 1910년에 영국 정치판의 중요한 논쟁 가운데 하나가 아일랜드 자치법안 문제였다. 이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아일랜드에서는 친영(자치)파인 얼스터 연합주의자와 아일랜드 민족주의자(완전독립파) 간에 살벌한 폭력행위가 벌어졌고 깜짝 놀란 조지 5세는 법안 연기를 결정했다. 이러다가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아일랜드 남자들은 승전을 하면 독립을 보장할 것으로 믿고 영국군으로 입대해 목숨을 바쳤다. 하지만 자치 또는 독립이 얼른 일어나지 않아 아일랜드에서는 1916년에 사실상 독립운동을 개막하는 부활절 폭동이 일어났다. 이때 장면을 다룬 문학작품이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쓴 <켈트의 꿈>이다. 폭동 이후에 아일랜드에서는 마이클 콜린스를 주축으로 하는 자치파와 미국 태생의 민족주의자로 완전한 독립을 주장한 에이먼 데벌레라 파로 나뉘어 콜린스는 길을 가다가 총격을 받아 죽기도 한다. 이와 별개로 ‘블랙 앤드 텐즈’라고 불리는 영국의 아일랜드 왕립 경찰대도 스파이를 처단한다는 이유로 한 마을을 잔인하게 초토화시키기도 했다. 코크Cork 주는 독립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분쟁지역 가운데 하나로 ‘불타는 코크’로 불릴 정도였다. 그리하여 윌리 퀸턴의 가족 역시 블랙 앤드 텐즈에 의한 테러/학살의 표적이 된다. 전쟁이 끝난 후 아버지의 제분소에 도일이라는 남자를 복귀시켰는데, 누군가가 마이클 롤린스가 퀸턴 가를 방문했다는 이야기를 전했고, 도일은 나무에 목이 매달린 채 혀가 잘린 시신으로 발견된다. 이어서 퀸턴 씨의 저택이 화염에 휩싸였으며, 집안에 있던 가족들이 흉탄을 맞는다.

  윌리의 이야기에서 처음 나오는 장면은 개인교사인 킬개리프 신부가 윌리에게 라틴어를 가르치는 모습이다. 서른 살이 넘지 않았으나 윌리가 아는 가장 품위 있는 사람인 킬래리프 신부는 지금은 시카고에서 가톨릭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과의 일 때문에 성직을 박탈당했어도 여전히 로만 칼라를 달고 다닌다. 흔히들 성직박탈과 관련해서 그렇게 말하지만 더 총명한 사람들이라면 그건 과장된 이야기일 것이라 일축해버리고 만다. 나중엔 어떤 일 때문이었는지 밝혀지는데 그건 비밀로 해두자. 성직 박탈 신부는 가진 돈이 없어 숙박비 대신 윌리에게 가정교사를 하고 젖소를 돌본다. 결혼 때문에 집을 떠난 하녀 자리를 새로 채운 총명하고 충직한 새 하녀 조세핀은 아름다운 모습과 달리 하녀다운 거친 손을 가지고 있었다. 바람과 달리 조세핀은 집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제분소 직원으로 다리를 절어 전쟁에 나가지 못한 조니 레이시와 결혼하고자 일을 계속할 수 없다고 마님께 아뢴다. 그러나 몇 년 후 조니 레이시는 브라이디 스위니라는 아가씨와 결혼한다. 인생이 그렇지 뭐. 멀지 않은 곳엔 두 고모가 늙은 하녀 필로미나와 함께 산다. 큰 고모는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전장에 나간 남편이 전사하는 바람에 거의 처녀 수준이고, 작은 고모는 말 그대로 처녀다. 제분소의 데렌지 씨는 아일랜드에 별로 없는 신교도라 작은 고모에게 청혼할 수 있어도 스스로를 사회적으로 부족한 사람으로 여겨 엄두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둘이 서로 은근히 좋아하는 건 물론이다. 결코 이루어지지 않지만. 엄마는 저 위에서 우드컴 집안 이야기할 때 페르모이에 주둔한 영국대령의 큰딸이다. 여기까지 소개한 등장인물은, 영국의 아일랜드 왕립 경찰대에 의한 학살에서 죽지 않고 살아난 사람들이다. 킬갤리프 신부는 가슴에 총알을 맞아 죽었는 줄 알았다가 겨우 살아났고, 두 고모는 여행을 떠나자마자 학살 사건이 벌어지는 바람에 목숨을 건졌다.

  죽은 사람은, 아버지 퀸턴 씨. 일곱 살 누이 제럴딘과 여섯 살 데르드러, 요리사 플린 부인, 정원사 오닐 씨, 그의 아들 선하고 신중한 팀 패디, 작은 고모가 키우는 개 여러 마리, 그리고 시커멓게 화장 당한 퀸턴 가문의 저택. 며칠 전에 윌리는 아버지와 마차를 타고 시내에 장보러 나간 적이 있다. 이때 펍에 들러 가벼운 요기를 했고, 아버지는 영국군 러드킨 중사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가 리버풀에 있는 청과물 가게를 물려 받았다고, 제대한 다음에 그곳으로 가서 가게를 운영할, “마음에 드는” (아버지 나이로 볼 때)청년이라 했다. 러드킨 중사는 새로 복귀한 제분소 직원 도일과 함께 전쟁터에서 싸웠던 인물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기억하시지? 이산하의 시집 제목, 《악의 평범성》. 악은 보통의,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날의 쇼크로 알코올 중독에 접어든 어머니는 “러드킨 중사? 학살을 자행한 장본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손님들에게 농산물을 파는 모습이 상상이 되니? 악마가 사람이 된 거야.” 혹시 엄마가 직접 리버풀의 청과물 가게를 들어봤을까? 어머니는 계속 되뇌인다. “어째서 그는 저격당하지 않는 거야?” 어머니는 남편을 잃었으니 그렇다 치는데, 트레버 선생도 러드킨이 학살의 가장 중요한 배후라고 생각한다.


  인도를 영원한 식민지로 두고 싶어하는 영국 정부에 의하여 인도로 파견 나간 대령의 딸은 영국의 또다른 식민지인 아일랜드 코크에서 도무지 폐허가 된 퀸턴 저택을 재건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연상할 수밖에 없는 그 밤의 악몽 때문에 아예 킬네이에 살 수도 없어서 반은 폐허가 된 패트릭 스트리트로 옮겨, 윌리는 머시에 스트리트 시범학교에 다니고, 엄마는 쏟아지는 편지를 열어보지도 않고, 누구의 방문도 거절하면서 어둑한 방안에 앉아 아침부터 위스키를 마시기 시작했다. “어째서 그는 저격당하지도 않는 거야?” 이젠 이런 말도 없이. 윌리의 외조부모는 여느 부모와 마찬가지로 맏딸을 한없이 사랑했지만 아일랜드 맏딸한테 들르겠다는 편지를 맏따님은 깨끗하게 거절한다. 부모가 보낸 편지를 열어보지도 않았으니 당연히 회신도 없다. 걱정이 된 부모는 우드컴 파크 인근에서 종신 교구 사제의 아내로 있는 작은 딸에게 편지를 해, 너라도 언니를 찾아가 위로를 해주라고 요구하고, 자매 우애가 좋은 동생은 기꺼이 자신의 딸 메리앤을 데리고 아일랜드를 방문한다. 윌리는 시범학교에서 스스로 걸어나와 이제 기숙학교에 들어간 상태의 여름방학.

  메리앤. 이 사랑스런 아가씨에 관해서는 책의 맨 앞에 짧게 소개를 해놓았다.

  “우드컴 마을의 종신 교구 사제 부부의 하나뿐인 아이는 퀸턴가의 사촌과 사랑에 빠져 킬네아로 와서 사는 세 번째 영국 여성”이라고. 그러면 책은 윌리 퀸턴과 메리앤 우드컴의 애잔하고, 길고, 쓸쓸하고, 오래도록 고통스러운 사랑 이야기가 될 것임을, 우리 윌리엄 트레버 팬들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단 하나를 말할 뿐이다. 당신의 짐작이 맞다고. 나는 여기서 머뭇거린다. 스포일러를 만들지 않으려면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 그러면 이젠 독후감도 끝내야 한다. 어쩔 수 없다. 하고 싶은 말을 언제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다만 한 마디만 하자.

  빌 영감, 문제는 배추장수 러드킨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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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12-13 06: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포일러 ㅋ 폴스타프님이 이렇게 역사를 정리해주시니 이 책을 이해하기 더 쉬워진거 같습니다~!! 트레버의 장편들은 영국과의 갈등을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것 같습니다.


아일랜드에도 배추가 있나요? ㅋ

Falstaff 2023-12-13 07:01   좋아요 1 | URL
러드킨은 아일랜드가 아니라 잉글랜드 리버풀 축구장 옆에 있는 배추가게 쥔이 됩니다. 장사는 겁나게 잘 됐지만 끝이 안 좋았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ㅋㅋㅋㅋ
트레버 자신이 아일랜드 태생의 잉글랜드인인 거 같습니다만 정확한 건 아닙니다. 눈치로 보아하니 그렇다는 말씀.

페넬로페 2023-12-13 10: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은 배경이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복수의 끝은 허무하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지만 그래도 윌리의 입장에서는 러드킨이 문제가 아니었나 생각했습니다. ㅠㅠ

Falstaff 2023-12-13 16:23   좋아요 1 | URL
윌리야 몇 년 동안이나 엄마한테 귀에 못이 박힐 지경으로 넋두리를 들었으니 그렇다 쳐도, 작가는 그래도 악의 근본을 밝히려 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 아쉬움이었습니다.
 
블랙 박스
아모스 오즈 지음, 곽영미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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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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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늦여름에 헌책방에서 사서 이제야 읽었다. 그새 민음사 세계문학시리즈에서 히브리어 직역본인 것처럼 보이는 새 번역이 나왔다. 영문학을 전공한 역자 곽영미의 우리말이 좋아서, 중역 읽으며 이런 얘기 처음 해보는데, 1도 불만 없다. 번역하는 데 너무 공을 들여서 이만한 책도 별로 없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사 놓긴 해도 아모스 오즈는 얼른 손이 가지 않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이다. 그런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래서 오즈를 안 읽은 건 아니고, 올 4월부터 10월말까지 나 다니는 도서관에서 무슨 캠페인을 해 도서관 책 위주로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캠페인이 없었다고 해도 워낙 오즈 이 양반하고 합이 맞지 않아 얼른 읽었을 것이라는 보장은 못하겠지만. 여태 여섯 권의 오즈를 읽었으니 이번이 일곱 번째. 딱 한 권 <유다>가 제대로 마음에 꽂혔을 뿐이다. <유다>에서는 숨어있는 주인공 쉐알티엘 아브라바넬을 통해 오즈는 아랍-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공존 및 연합을 주장한다. 아모스 오즈의 이런 반전의식은 이미 1978년에 이스라엘 신문에 기고했고, 덕분에 그는 세상에서 가장 호전적인 나라가 되어버린 이스라엘 국민들로부터 배신자라는 영광스러운 호칭을 얻은 바 있다. 이 책은 1986년에 발표하긴 했지만 시대적 배경이 1976년이다. 작가와 작중 주인공 알렉산드르 A. 기드온 박사는 흔히 6일전쟁이라 불리는 1967년 3차 중동전쟁, 대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의 6일 전쟁에 참전한 바 있다. 오즈는 전쟁을 경험하고 시나이반도에서의 아랍-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 없는 평화와 연합을 주장한 반면, 작중 주인공 알렉산드르는 당시 자기 편이 이집트 시민들에게 가한 참혹한 학살의 장면을 트라우마처럼 간직하고 있다. 수십명의 이집트 시민들이 숨어 있는 지하실을 열고 수류탄 세 발을 까서 던져 넣고 뚜껑을 닫는 일, 폭발음이 세 번 들리면 뚜껑을 열고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을 향해 탄창이 다 빌 때까지 기총소사를 가하면 피와, 장액과 내장과 살점이 붙은 뼈조각과 뇌수가 군복은 물론이고 사격하는 군인들의 얼굴에까지 날아 튀는 장면. 작품에선 열여덟 살 정도의 청년 보아즈 브란드슈테터가 팔레스타인과의 평화를 바라는 인물로 등장한다. 평화주의자, 이스라엘 산 히피의 자격으로.

  반감을 갖지 않고 이 책 <블랙박스>를 읽기 위해서는 작품의 배경이 1976년이었으며, 세상에서 가장 폐쇄적인 종교인 유대교의 나라 이스라엘에서 벌어진 이야기라는 걸 처음부터 끝까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성들도 병역의 의무를 갖는다. 물론 입대했다고 해서 여군이 진짜 전선에 배치되는 일은 많지 않다고 한다. 실전에 투입을 해보니까, 여성 전사가 한 명 죽으면 남자 병사들이 죽을 때보다 남자들이 더 광분을 해서 쓸데없이 무모한 일을 벌이기 때문에. 근데 그건 요즘 이야기고 70년대는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남자하고 같이 병역의무를 다 하지만 70년대 중반까지 여성은 남성의 “소유”였다. 진짜 서류로 너는 내 것, 이라고 써서 인감도장 찍지는 않았지만 관습적으로 여성과 자식들은 모두 남성, 아버지의 완전한 관리를 받아야 하는 “구약의 시대”에 머물고 있었다는 점. 지금은 여성의 병역 덕으로 이스라엘의 여성인권이 세계에서 알아준다고 하지만 그땐 하여튼 그랬다.


  볼로댜 구돈스키 선생은 우크라이나에 살 때부터 큰 부자로 성공한 인물이었다. 그가 이스라엘로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정신이 좀 혼미해졌는지 우크라이나 출신 유대인들을 위한 재단 같은 것을 만들어 거액, 자신의 재산 거의 전부를 쏟아 넣으려 하자, 변호사 만프레트 차크하임이 구돈스키의 아들 알렉산드르 A. 기드온과 뜻을 같이 해 구돈스키를 정신병원/요양원에 집어넣고 전 재산을 유증 받는다. 덩치 큰 호색한이자 백만장자인 구돈스키의 장자 알렉 기드온이 소대장으로 있었을 때 여군 소대원 가운데 일라나가 있어, 유일하게 소대장의 냉정하고, 매몰차고, 으스대고, 비아냥거리기 좋아하고, 이를 다 합해 잘난 척하는 아니꼬운 모습에 반해 노골적으로 알렉을 유혹하여 알렉의 동정을 수거했다. 얼마 있다가 알렉은 일라나를 아버지에게 소개했고, 아버지 구돈스키 씨는 거두절미하고 석달 후에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선언해버렸다. 정작 구돈스키 자신은 새 여자를 만나 유럽으로 여행중이라 아들 결혼식에 참석하지도 않았지만.

  어쨌거나 결혼하면 행복할 줄 알았지? 행복했다. 얼마간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작품 속에서 눈에 띄는 것은 성적 취향의 변화가 가장 큰 불행의 원인이었다. 어디서 들었거나 봤는지, 이들은 남자 둘에 여자 하나가 한 침상에서 섹스를 벌이는 이른바 쓰리 썸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정말로 다른 남자 한 명을 데려오지는 않았지만 침대에서 마치 다른 남자가 한 명 더 있는 것처럼, 처음엔 연기였겠지만 하여간 그렇게 하니까 엑스터시의 질과 양이 비교도 하지 못하게 극렬한지라, 더욱 더, 나중엔 진짜로 세 명이 하는 것처럼 성적 환타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 결혼하기 전 미래의 아내 말고는 여자 경험이 없는 알렉. 반면에 그 방면엔 남부럽지 않은 경험을 지닌 일라나. 알렉은 부부의 침상에서 부부간의 은밀한 환타지를 점점 실제 생활처럼 믿게 됐고, 아내의 부정을 의심하는 단계로 접어들어 하루는 가차없이 폭행을 가했으며,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는 걸 막아선 꼬맹이 아들 보아즈의 머리통마저 몇 번이나 벽에 찧는 우발적 만행을 저질러버렸고, 아마도 그런 짓을 한 자신의 실수를 영원히 지울 수 없다는 것이 더욱 모멸적이어서, 그럴 정도로 오만한 인물이라, 혹시 아내가 자신을 용서해줄 수 있을 망정 자기가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건 너무도 분명하여 곧바로 이혼소송을 진행하기에 이른다.

  소송 당시 친자 판별을 위한 혈액검사를 부부 공히 거부하여, 보아즈가 자신의 친자가 아님을, 그리하여 양육의 의무도 없으며 양육비 지불의 의무는 당연히 없을뿐더러, 배우자의 부정이 이혼의 주요 사유로 치환되어 위자료 한 푼 지불하지 않고 소송을 끝내 버렸다. 일라나와 보아즈는 언니/이모가 있는 키부츠로 들어가 6개월 살다가, 일라나 혼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서점에서 일하다 키 작은 남자 미카엘 (미셸 앙리) 솜모를 만나 재혼해 딸 마들렌 이파트를 출산했다. 전남편의 아들 보아즈는 열세 살이 될 때까지 5년 더 키부츠에서 이모가족과 살다가 아빠를 닮아 엄청난 큰 키를 한 채 예루살렘의 엄마 부부와 합친다. 작품을 시작할 시점에 보아즈의 나이 열다섯 살. 중3 정도의 소년으로 혈관 속에 뜨거운 니트로 글리세린이 흐르고 있으며 신체 사이즈와 완력이 또래는 물론이고 어른들과 견주어도 절대 밀리지 않았다. 벌써 전과기록과 보호관찰 기록을 갖고 있을 정도.

  이 아이가 또 사고를 쳤다. 가난한 미셸은 현직 경찰인 형이 있어서 보아즈의 전과기록이나 보호관찰 기록은 삭제해줄 수 있으나 피해자(부모)와 합의금을 준비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하여간 겉으로 보면 양부와 엄마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궁리, 궁리, 궁리하다가 참담하지만 결코 하고 싶지 않았던 최후, 최후 가운데서도 최후의 방법으로 보아즈의 친부, 일라나의 전 남편 미드웨스트 대학 정치학과 알렉산드르 A. 기드온 교수한테 편지를 보내 도움을 청하면서 작품은 시작한다. 알렉은 변호사에게 전화를 했고, 보아즈가 다니는 학교의 교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아 제적 처리를 훈방으로 해결을 했으며, 합의금 조로 2천 달러의 수표를 보내 일을 종결하려고 한다.

  알렉의 전화를 통한 일 처리, 그리고 수표를 보내는 것으로 모든 일은 끝내야 했다. 그러나 일라나의 두 번째 편지와 이어지는 미셸의 편지부터 독자는 이 부부들이 알렉에게 접근하는 것에 수상한 시선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일은 독자가 짐작한대로 미셸에 의한 사기극으로 진행되는 것 같고, 결국 그것이 사기인지 아닌지는 밝혀지지 않지만 적어도 사기에 준하는 정도의 바람직하지 않으리라는 점은 눈치 챌 수 있다. 그럼에도 부자 알렉은 이들 부부에게 활수하게 돈을 베풀고, 보아즈에 대하여도 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생활할 정도로 지원을 해준다. 역시 부자 아빠를 두는 것이 좋다! 부부는 점점 의기투합해, 나중엔 알렉의 변호사까지 끌어들여 무한정 돈을 뽑아내려 하지만, 기어이 일라나는 이렇게 편지를 쓰고야 만다.

  “그(이혼) 후론 한 마디도 없었어요. 7년 내내. 그런데 지금 왜 당신은 내 새로운 삶의 창가로 유령처럼 돌아왔나요? 당신의 사냥터로 가버려요. 흑백으로 된 우주선을 타고 서리 내리는 추운 별로 가요.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요. 꿈에서라도 돌아오지 마요. 내 몸의 욕정에도. 벽토와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에도. 목판화와 고깔 달린 옷에서도 떠나요. 왜 눈에 갇힌 황야를 건너지 않고 처음의 오두막 문을 두드려 빛과 온기를 청하나요?”

  한 번 끝을 냈으면 그게 진짜 끝이 되는 것이 좋다. <블랙박스> 경우엔 친아들 보아즈는 몰라도.

  재미있게 읽었다. 아모스 오즈 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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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너비 스토리
앤 타일러 지음, 장영희 옮김 / 프레스21 / 2001년 5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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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앤 타일러는 퓰리처 상을 받은 <종이시계> 한 편 읽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생각이 바뀌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책방에서 앤 타일러가 쓴 <바너비 스토리>를 보고 주저없이 고른 이유는 <종이시계>에서 주인공 매기의 절친 세레나 남편의 장례식 장면에 나오는 대사가 콱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세레나는 남편이 살아 있을 때, 아직 건강할 때 조깅이라도 하라고 바가지 벅벅 긁었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날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더니 피리릭 병이 들어 중환자실에서 형편없는 몰골로 짧지 않은 시간동안 누워 있었던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고 세레나가 죽어가는 남편 맥스에게 악을, 악을 쓰기를,

  “멋진 빨강색 운동복을 입고 뛰다가 갑자기 죽는 거하고, 온몸에 주삿바늘과 튜브를 잔뜩 꽂은 채 병상에서 죽는 거하고 뭐가 더 좋니?”

  이때가 작년 초. 망치로 머리통을 맞은 것처럼 띵, 했다. 나도 취미라고는 음악 듣기와 책 읽기. 몸 꼼지락거리는 건 호환 마마만큼 싫어해 바야흐로 비만, 뚱보 대열의 앞자리를 깔고 앉은 거였다. 앞자리에 서있는 것도 아니고 거기서도 움직이기 싫어 깔고 앉아 있었다니까 글쎄. 그리하여 나도 운동이란 것 좀 해보자, 라고 깊이 각성했다. 각성을 했지만 움직이지는 않았다.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이 하긴 해야 하는데 첫 발 떼기가 그렇게 어려웠다니까. 그러다가 4월 초가 되고 아무 생각없이 체중계에 올라보니 여태까지 최고 기록이었고, 몇 달 있으면 죽으려나? 싶었다가 다시 퍽, 떠오르기를 “암만해도 멋진 운동복을 입고 뛰다가 심장마비로 죽는 게 온몸에 튜브와 주삿바늘을 꼽고 있다가 죽는 거보단 낫지?”

  그래서 식목일, 4월 5일부터 근처에 있는 작은 대학 캠퍼스를, 아직 해 뜨려면 시간이 많이 남은 어두운 새벽에, 뛰지는 못하고, 걷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 3킬로미터. 집에서 학교까지 왕복 2km. 합해서 5km. 5km도 걷고 나면 육수가 얼마나 빠지는지. 이후 장소를 대학에서 센강으로 바꾸어 9km, 10km, 13km, 15km 이렇게 추워질 때까지. 시속 4.7km에서 시속 6.7km로. 그리하여 올해 1월 1일 몸무게가 최고점 대비 13킬로그램 빠졌다. 여전히 일주일에 8일 술 마셔도 당뇨는 원래 정상이었고,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술 때문에 간 수치는 좋지 않았다. 체중을 8월 초까지 계속 유지했다가, 아무리 봐도 술이 너무 과했다. 스스로 판단하기에 약한 알코올 의존증에서 가운데 중, 중증 알코올 의존으로 넘어가는 거 같았다. 그리하여 일단 반 이하로 줄여보자. 술 줄이는 것이 악을 쓰고 운동하는 거보다 더 힘들다, 8월 초부터 독하게 술을 덜 마셨더니 오늘 아침 공복 체중이 5kg 더 줄었다. 그러면 18kg 이상을 감량한 거다. 이젠 웬만큼 걸어서는 땀도 안 난다. 충분히 시간을 들여 완만하게 줄여서 요요 같은 건 겪어보지 않았다. 이게 다 앤 타일러 덕분이다.

  물론 안 좋은 점도 있다. 어떻게 다 좋을 수 있나 사람 사는 일이. 체중이 주니 술이 약해진다. 많이 못 마신다. 아무래도 힘이 좀 빠진 거 같다. 작아서 못 입던 옷이 이젠 포대자루가 됐다. 다음 달에 조카 결혼하는데 양복도 한 벌 사야겠다. 얼굴 예뻐졌다고 마누라 감시 눈초리가 매워졌다. 이것도 앤 타일러 덕분이다.

  뚱보 여러분. 저도 뚱보였습니다. 독하게 마음먹고 살 빼 보셔요. 사는 게 조금은 덜 불행해집니다.


  바너비. 화자 ‘나’다.

  나는 용역회사 “척척 심부름 센터”의 직원이다. 노인, 장애인 같이 거동이 불편한 사람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는 회사다. 벌써 10년이 넘었다. 작품을 시작할 때는 3주일 모자란 서른 살. 그러나 결혼을 해서 처가의 방을 빌어 살았고, 딸 오팔을 낳았고, 이혼을 했고, 그럼에도 처가집에서 나가지 않고 견디다가 애인이 생긴 후에야 지하 셋방에 살기 시작했으나 애인과 헤어졌고, 전처와 딸은 내가 사는 볼티모어에서 필라델피아로 이사 가서 변호사 남편/새아빠와 함께 좋은 집에서 살고, 나는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고물차를 몰고 가 오팔과 함께 쇼핑을 하거나 조지 판스워스라고 하는 개하고 산책을 한 다음 점심을 먹고 집에 데려다 주고 다시 온다. 용역회사에서 머리보다 몸을 쓰는 일을 한다고 원래 빈민가 출신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볼티모어에서 상당한 재산가, 구태여 말하자면 준재벌 정도의 부르주아 가문 출신으로 아직 졸업하지 못한 대학에서 졸업장만 따면 아이비 리그 출신인 형처럼 아버지가 위원장으로 있는 재단에 들어가 펜대를 잡으며 안락하게 살 수 있으나 단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거다.

  대개 이런 부류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듯이, 10대 시절 나의 혈관엔 유별나게 다량의 니트로 글리세린 농도가 짙어서 담배는 피우지 않았어도 마리화나는 좀 했으며, 술을 즐기지는 않았지만 남의 집 창문을 열고 몰래 들어가 남의 물건을 슬쩍하는 일이 잦았다. 친구들은 주로 술과 야한 비디오 테이프에 집착했으나 나는 개인적인 것에 관심이 있어서 낯선 가족들의 어릴 때부터 찍은 사진이라든지 가슴에 다는 로켓 속의 작은 초상화 같은 거를 구경하는 데 홀딱 빠졌었다. 그리고 한 번은 상아로 만든 중국제 작은 조각품. 남녀가 교합하고 있는 무지 야한 조각이었는데 그건 그만 주머니에 넣고 내 침대 시트 밑에 보관하다가 결국 부서뜨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집주인이 어렵게 구한 예술품, 이라고 주장하는 걸로 가격도 만만치 않게 나가는 거였다.

  비행 전문 청소년들은 결국 도가 지나쳐 이들을 체포하기 위해 방범 헬리콥터와 경찰차 몇 대가 뜨는 소동이 벌어졌고, 내가 이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 지붕에서 나무로 건너 뛰다가, 아직 마리화나 약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 그만 나무 줄기를 따라 주르륵 미끄러지면서 이목을 끄는 사이, 함께 일을 저지른 친구들은 도망할 수 있었고, 나의 단독범행으로 걸려 큰일 날 뻔 한 것을 지역 유지였던 아버지의 뒷배경과 엄마의 이웃과의 사교술 덕에 범죄기록만 남기고 집에 돌아올 수 있었으나, 당시 합의금 8,700 달러는 서른 살이 넘도록 어머니가 툭하면 입에 올리는 족쇄가 됐고, 일종의 특수 교정학교에 들어가야 했으며,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취직할 곳이 없어서 결국 다시 아버지의 소개로 철물점 점원으로 들어갔지만 하루는 키 작은 아주머니 손님이 요구대로 합판을 톱질해 잘라주다가 그게 규정위반이라서 그 자리에서 해고당했는데, 손님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회사가 바로 척척 심부름 센터라서 바로 다음 날부터 근무를 시작했으며, 하다가 보니 이게 적성에 딱 맞는 일이었다.

  인생에 암울했던 어떤 해의 마지막날, 12월의 마지막 토요일이었다. 하필 똥차가 또 말썽을 부려 필라델피아 행 기차를 기다리다가 잘 차려 입은 남자를 보게 되고, 그가 한 여자한테 접근하는 것도 보고, 남자는 딸에게 급히 전해야 하는 딸의 여권을 필라델피아 역 대합실까지 대신 가져다 줄 사람을 고른다는 것도, 직접 가지 않는 이유는 아내가 파킨슨 병이라 오래 혼자 둘 수 없기 때문인 것도 알게 되었으며, 금발의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기꺼이 그러겠노라고 해서, 그녀의 뒤를 바짝 쫓게 되었다. 필라델피아 역에 내려 보니까 정말로 딸과 만나 서류를 전해주었는데 눈에 확 띄었다.

  매주 토요일에 필라델피아에 혼자 살고 있는 엄마한테 들른다는 걸 알게 된 나는 다음 주에는 좀 깨끗한 옷을 입고 같은 시간에 역에 나가 드디어 그녀, 소피아 메이나드, 은행 대출계에서 근무하는 여성의 옆자리에 앉는 데 성공하고, 그녀가 커피를 사올 때 스웨터에 엎지르게 하는 데, 결론적으로 성공하여 말을 트고 가까워진다.

  그리고 나의 직업에서 만나는 많은 노인 여성들, 노인 남성, 심인성 광장공포증인 30대 여성 등등. 또 중요한 것 하나 더. 엄마의 손에 들린 나의 족쇄 8,700달러. 전처 나탈리. 딸 오팔.

  한 때는 구제불능의 문제아 청소년이었지만 지금은 지역 노인들이 가장 신뢰하는 젊은이인 나, 바너비 게이틀린. 노인들은 망설이지 않고 내게 집의 열쇠를 맡기고, 다락방을 청소시키고, 안 쓰는 가구를 지하실에 보관하게 하는데, 지하실 문을 열어 두었다가 고객들의 전재산을 훔쳐가도 그걸 누가 알겠느냐고. 그러나 세상은 험하다. 그리고 개중엔 따뜻하기도 하다. 이 문제아 출신 젊은이의 사랑과 천사와 늙음과 가족과 이것들을 다 합쳐서 사는 이야기. 전형적 미국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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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3-12-11 07: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에밀 졸라도 중년을 넘긴 다음 다이어트를 하더니 새 사랑을 만나 늦둥이들을 만들었대요. 외모의 변화와 회춘의 효과가 있었겠지요? ㅎㅎ

Falstaff 2023-12-11 07:30   좋아요 1 | URL
ㅋㅋㅋ 안 알려드립니다. 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12-11 11:46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23-12-11 0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11 17: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윗 DAVID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지음, 송옥 옮김 / 동인(이성모)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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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6월, 책도 안 읽으면서 책 욕심은 많아 기웃거리다가 발견한 책. 다른 작가도 아니고 D. H. 로렌스가 쓴 희곡이라니, 딱 그거 하나 보고 얼른 골랐던 책. 이제 책 사고 1년 반 만에 읽었다.

  로렌스는 <어머니와 아들>, <무지개>, 그리고 <채털리 부인의 사랑> 등으로 거의 평생을 외설시비에 휘말렸던 작가. 나는 책을 사면서 이이가 정말 구약성서에 나오는 근엄한 다윗왕을 연극으로 만들었을 지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고 그랬을 것이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근데 책의 첫 장을 열고,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 사울, 선지자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된 사울이 기껏 아말렉과의 싸움에 이기고 왕을 잡아왔으나 팔자가 찌그러지는 장면이 나오는 걸 보고, 아차, 괜히 샀다, 후회했다.

  생전 처음 구약성서를 읽어본 것도 벌써 5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잊히지 않는 것이 몇 개 있다. 파밀리아 사그라다 성당, 쾰른 대성당, 노트르담 성당, 로마 대성당, 옛 성 소피아 성당 등등. 나는 이런 휘황찬란하고 요란뻑적지근한 성당은 야훼나 예수의 뜻과 관계없이 허파에 바람이 잔뜩 든 후세의 교황, 추기경, 대주교, 큰 목사 등 종교인들이 자기들 어깨에 힘주기 위해, 민중들은 태중에서 죽지 않은 것을 후회할 정도로 배고픔과 추위와 전쟁의 잔혹함에 떨고 있음에도 눈꺼풀 하나 깜박하지 않고 그들을 무임으로 징용해서 세운 사치품일 것이라 생각했다. 근데 아니었다는 거. 다른 잡신한테 가오가 망가지고 싶지 않았던 질투의 하느님 야훼가 솔로몬이 만든 최초의 성전부터 그렇게 만들기를 바랐다는 거. 음. 그랬구나. 그리하여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황소 2만2천 마리, 양 12만 마리를 공물로 태우게 해 야훼께서는 구름 위에서 그 미세먼지를 흠향했던 것이로구나. 그때 나는 잽싸게 계산했었지. 황소 2만2천 마리. 황소의 코끝부터 꼬랑지 끝까지 2미터라 잡고 한 줄로 늘어 세우면 44킬로미터, 화곡동에서 천호동까지 가겠구나. 양 12만 마리도 한 마리를 1미터라 잡아 한 줄로 늘어 세우면 120킬로미터, 서울시청에서 원주시청까지 가고도 10킬로미터를 더 가겠구나. 그렇게 해주기를 바랐던 존재가 밤하늘의 도심을 빼곡하게 점령한 붉은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을 창조한 야훼의 정체구나. 나도 어려서 외조부모 따라 감리교회에 열나 다닌 적 있지만, 종교는 명백하게 아편임이 밝혀지고는 멀리했다가, 구약성서를 읽은 다음엔, 기독교인들이여 미안하다, 기피하게 됐다. 당신들의 종교생활을 존중하지만 나더러 믿으란 얘긴 더 이상 말라. 대신 기꺼이 지옥의 불 맛을 볼 터이니.

  그런데 위에 쓴 건 전적으로 내 생각, 즉 기독교를 믿지 않는 불신자, 선하지 않은 사마리아 종자들의 생각이고 선한 예루살렘의 후예들은 구절구절 읽으며 아멘을 외치지 않을 수 없게 가슴에 콕콕 사무치는 모양이다. 이렇게.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는 (아멘!)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왔고 사람들을 전멸하였으나 (우우…)

  다만 백성이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느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왔나이다 하는지라 (우우….. 우우….. 너 잘났다, 우우…..)


  기독교인들은 다 아시겠지만 우매한 비기독교인들 들으시라 한 마디 설명을 첨언하자면, 야훼가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사실이라기보다 내가 추리하기를, 사울을 왕에 올려준 사무엘이 보기에, 사울이 자신을 좀 냉대하는지라) 아말렉 족과 싸워 생명이 붙어 있는 모든 것을 죽이라고 명령해, 사울이 전군을 이끌고 가서 싹 도륙을 냈지만 말이 그렇지 어떻게 몽땅 살육을 할 수 있나, 아말렉의 왕 아각과 아말렉 땅에서 가장 좋은 소와 양을 전리품으로 가져왔다. 야훼가 지시한대로 아말렉의 모든 생명, 어린이, 여인, 노인, 장애인을 망라한 모든 인간과 종을 불문한 모든 가축을 다 찔러 죽이지 않고, 그들의 왕을 포로로 데려왔으며 산 생명체를 전리품, 그것도 야훼에게 공물로 쓸 목적으로 가져왔음에도, 아니 그랬기 때문에 사울을 왕위에서 끌어내려야 마땅한 죄라는 뜻이다.

  근데 사무엘이 왜 사울한테 삐졌느냐 하면, 당시는 신권시대라서 제사장 사무엘이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는데, 백성들이 자신들의 왕을 뽑아달라고 해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이거 불신자의 말이다. 교인들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아 주시기 바란다.) 사울을 왕으로 뽑아주었으나, 하루는 급하게 제사를 지내야 하건만 사무엘이 보이지 않아서 그냥 사울이 제사를 지내 버렸기 때문이다. 즉 왕이 신권까지 행사한 것이 못마땅했다는 거. 물론 성서에서는 야훼의 말씀으로 등장한다. 아멘.

  근데 결론은 언제나 잘못을 세 가지 해야 나는 법. 동양이나 서양이나 삼세번의 규칙이 있으니까. 마지막 세 번째는 전투를 잇달아 치루면서 전황이 불리해지자 심신이 쇠약해진 사울이 전투의 승리를 점술가에게 물어보는 행위였다. 이렇게 삼진 아웃을 당하는 사울은 아들 요나단과 함께 전사하고, 두번째 왕으로 등극하는 이가 오늘의 주인공 다윗이다.

  그러니까 세 가지 다 사울의 잘못은 야훼가 이렇게 하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무조건 복종하지 않고 인간 주제에 머리를 굴린 죄다.


  하여간 극에서는 사울이 했지만 성서에선 사무엘이 포로로 잡아온 아말렉의 왕 아각과 소, 양을 즉결처분하고 사울한테 영원히 아듀를 고한 다음 궁을 떠나 간 곳이 베들레헴. 이곳엔 양을 치는 이새라는 원로가 산다. 사무엘은 이새에게 말해 이새의 아들을 몽땅 불러놓고 면접을 보는데, 역시 선지자라서 척하면 척, 한눈에 척 심중의 왕의 재목을 알아본다. 근데 없는 거다. 아들이 이게 다요, 하고 물으니 막내가 양을 몰고 집에 오는 중이란다. 크고 건장하고 씩씩하고 잘생긴 장남은 원래 구약성서에서는 인기가 없는 게 보통이라 이 집에서도 장자 엘리압은 예선탈락하고 영웅은 나중에 등장한다는 연극법 5조 2항에 의거하여 아들 가운데 제일 마지막에 나타나는 다윗이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당한다.

  그리하여 한 판 잘 때려먹은 다윗네 집. 이 소문이 흘러흘러 사울의 귀에 들어가서 다윗은 길갈에 있는 사울의 성에 들어가 블레셋과의 전쟁에도 참가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블레셋의 최고 장수가 바로 골리앗. 9척의 키에 봉황의 눈, 익은 대추 빛 얼굴, 허리까지 내려오는 아름다운 수염이 가히 관운장인데, 블레셋 군의 절대적 지지를 받아 장수 싸움, 1대1 맞짱을 떠서 승패를 정하자고 연일 시위가 대단했던 것.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면전을 하면 이기겠지만 유대군 가운데 누구도 골리앗을 이기지 못할 거 같아서 1대1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진영에 틀어박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때, 혜성같이 등장한 목동이 다윗이다. 사울의 칼과 갑옷과 방패를 착용시키지만 도무지 갑갑해서 움직이지 못하겠다고 다 벗어버리고 (이미 야훼의 눈 밖에 난 사울의 기구를 쓰지 않고) 그냥 양치기 복장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더니 돌팔매 한 방으로 자빠뜨려 버리고 득달같이 뛰어가 골리앗의 가슴을 발로 밟고 골리앗의 칼을 들어 골리앗의 목을 쳐버린다. 원래 유대인이 계산에 밝으며 이익도모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다윗도 예외가 아니라 골리앗의 대가리와 칼과 방패, 갑옷은 몽땅 아버지 이새네 집으로 보내고 자신은 사울의 맏딸 메랍의 약혼자가 된다. 물론 결혼하지 못한다. 구약에서 결혼이 어디 쉽게 되나.

  이 일 이후에 다윗의 명성은 날이 갈수록 높아만 가고 상대적으로 사울의 권위는 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자기가 느끼기에 날로 사그라지는 것 같아 점점 위기의식에 빠지는 것도 모자라 피해의식까지 생긴다. 그리하여 위험한 전투엔 어김없이 다윗을 보내고, 그때마다 어김없이 이기고 돌아오니 사울이 보기에 참 난감하기도 했겠지. 그러다가 결국 메랍은 다른 장수에게 시집 보내버리고 다윗은 메랍의 동생 미갈과 결혼시킨다. 하지만 이미 사울과 다윗의 관계는 거의 완벽하게 빠그러진 상태. 다윗은 바보가 아니라 끊임없이 충성을 맹세했건만 정치란 게 어디 그래? 사울의 질투가 돌이킬 수 없는 단계에 이르자 다윗은 도망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도망갔다. 아내 미갈은? 사울이 다른 남자한테 새로 시집 보낸다. 극은 여기까지. 사울이 범한 마지막 불순종도 나오지 않는다.

  당신이 기독교인이면 읽어보시라. 아니면, 읽든지 말든지 뭐 알아서들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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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12-08 0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앤 타일러, <바너비 스토리>
화요일. 아모스 오즈, <블랙박스>
수요일. 윌리엄 트레버, <운명의 꼭두각시>
목요일. 조광화, 《조광화 희곡집》
금요일. 줄리언 반스, 《레몬 테이블》

유부만두 2023-12-08 07: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세랑 소설에 등장하는 “거인” 문무왕도 “돌로 깎은 얼굴에 봉황 눈”이에요. 이런게 바로 골리앗상이군요.
성서의 인물도 다시 쓰고 재해석 혹은 우려먹기 좋은 소재네요. 그런데 이 극의 다윗은 좀 얄밉기도 합니다.

Falstaff 2023-12-08 07:35   좋아요 0 | URL
세상에 얄밉지 않은 영웅이 있습니까. 다 그런 것이지요. 세라비. ㅋㅋㅋ
제가 쓴 건 삼국지 관우를 염두에 두었었답니다. ^^

stella.K 2023-12-08 1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윗도 여인을 차지하기 위해 남편을 최전선으로 보내 죽게 만들잖아요. 못됐죠. 저도 첨에 성경 읽고 무척 혼란스러웠습니다. 어렵기도 하고. 마음에 수양이 될 만한 말씀의 없고.
아고, 근데 폴님 당췌 그런 말씀은 마셔요. 뭐 폴님이 싫으셔서 하나님을 믿지 않으시겠다면 할 수 없지만 우리가 다리 몽댕이가 부러져도 아파 죽느니 마니 하는데 지옥은 그에 몇 천배라는데 감당하시겠습니까? 저는 그저 폴님 행복하시기만을 바랄뿐이구만요. ㅋ

중학교 때 채털리 읽고 어찌나 화끈거리던지. 그래도 지나고 보면 문장은 참 아름다웠던 것 같습니다. 문학성도 있고. 이 책 저는 읽어보고 싶은데 가격이 싸진 않군요. 나중에 혹시 중고샵에 나오면 그때ᆢㅋ

Falstaff 2023-12-08 15:55   좋아요 2 | URL
사람이 다 그렇지요 뭐. 사울이 자기한테 한 그대로 하는 것이지요. ㅎㅎㅎ 말이 그렇다는 거지 지옥이 어디 있습니까. 죽으면 끝이지. 글쎄 전 유물론자라니까요.
채털리를 중학생이 만나면 조금 그랬기도 하겠습니다. 전 중딩인가 고딩 때 실비아 크리스텔 나오는 영화로 봐서 읽지는 않았습니다 근데 나중에 읽어보니까 정말 잘 쓰지 않았나요? 펭귄으로 읽으면 서문을 도리스 레싱이 썼답니다!

다락방 2023-12-08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팔자가 찌그러지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3-12-08 15:55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 흔히들 팔자를 어려운 말로 쓰기 좋아하지요, 운명이라고.
 
고슴도치
줄리안 반즈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0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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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이전 체코슬로바키아와 국경을 접한 구 공산주의 국가가 배경이다. 소설을 읽어보면 딱 여기까지인데 알라딘의 작품소개엔 불가리아와 마지막 독재자 토도르 지프코프가 작품의 모델이라고 한다. 작중 주인공, 실각한 마지막 공산주의 독재자 이름은 75세의 스토요 페르카노프. 89년 동구 혁명 후 법과대학 교수를 하다가 검찰총장 직에 지원해 자리에 오르고 전직 대통령 재판 담당 검사로 활약하는 인물에게는 페테르 솔린스키라는 이름을 주었다. 이렇게 해서 <고슴도치>는 법정 드라마가 되고, 동구혁명 후 재판에 넘겨진 앙시앵 레짐(공산주의 일인 독재체제)의 변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도 된다. 작품 속에서도 나오지만 실제 근현대 동구의 국가 수반을 지낸 사람 가운데 재판에 회부되어 선고를 받은 사람은 불가리아의 토도르 지프코프가 유일하다.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는 모스크바로 도망쳐 칠레 대사관에 몸을 숨겼고, 헝가리 공산당 총서기 카다르 야노슈는 77세의 나이로 충격을 받아 자연사했으며, 구스타프 후사크 체코 공산당 지도자는 암에 걸려 신부에게 종부성사를 받고 곧 죽었다. 폴란드의 대통령 보이체흐 야루젤스키는 자본주의를 신뢰한다고 변절했고, 끝까지 투쟁을 포기하지 않은 루마니아의 니콜라예 차우세스쿠는 1989년 크리스마스에 전국에 생방송되는 가운데 아내 옐레나와 함께 각각 총탄 160발씩 맞고(위키피디아) 눈을 부릅뜬 채 죽었다. 지독하게도 많이 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누굴까? 역자 신재실의 해설을 읽어보면 고슴도치는 자신의 방어에 털을 곤두세우는 동시에 고슴도치 글러브를 끼고 상대를 공격한다고 하면서 방어하는 전 대통령 테르카노프와 검찰총장 솔린스키 두 명 다 고슴도치이며, 이들의 대결을 TV 생중계로 지켜보는 학생 네 명이 검사측 관객, 한 학생의 할머니가 앙시앵 레짐을 응원하는 관객 역할을 한다고 썼다. 학생과 할머니에 관해서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고슴도치의 가시-털 또는 털-가시는 공격할 때보다 아무래도 수비할 때 진가를 발휘하는 법, 곰곰이 생각해봐도 주인공은 검사가 아니라 피고인 스토요 페르카노프로 보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싶다.


  12월. 6층 창문 가까이엔 흰 페인트로 반원이 그려져 있었고 높은 도수의 안경을 쓴 양복 차림 노인이 흰 선을 밟은 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대천사 미가엘 성당 앞. 군주제 시절부터 군중집회 장소로 널리 쓰이던 곳. 오후 여섯 시에 메탈루르그 단지에 사는 여섯 명의 여성이 선두에 섰다. 이들은 두꺼운 사라사 드레스 위에 주머니 깊숙이 부엌 도구를 질러 넣은 앞치마를 두르고 보온을 위해 두터운 스웨터를 입었는데, 골목골목에서 빠져나온 여성들은 어느새 수천명에 육박했고, 남자들처럼 구호를 외치는 대신 스튜 냄비를 국자로 때리며 고고학 박물관 앞 광장을 지나 노인이 내려다보고 있는 건물인 구 국가안전부를 에워싸더니 그곳도 그냥 지나쳐 최근까지 공산당 본부였던 우아한 신고전주의 풍 대통령궁을 거쳐 국회건물 앞에 집결해 한 시간 동안 침묵 속에 서 있다가 여덟 시에 해산했다.

  벌써 십년 가까이 외채가 늘어나 이젠 전 국민의 2년 연봉에 해당하는 수준에 육박했고, 공산주의 국가들 모두 비슷한 경제 위기를 맞아 예전처럼 같은 사상을 가진 나라들을 배려해줄 수 없는 처지에 빠졌다. 대부 격인 소비에트 연방마저 소비에트 루블화가 아닌 미국 달러화로 소련산 정유를 팔겠다고 선언해버린 상태. 도로에서 버스가 사라졌고, 상점엔 식료품을 찾을 수 없으며, 국가를 지탱하던 군인들조차 보급품을 지급받을 수 없었다. 건물 6층에서 시위대를 바라보던 일흔다섯 살의 전직 대통령 스토요 페르카노프는, 내가 집권했을 때는 다들 먹고 살았어, 이제 우리 민족과 국가에 남은 것이라고는 한 가지 전망밖에 없어, 진정한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과학적인 길 말이지, 이렇게 결론을 냈다. 그는 절도, 국고횡령, 부패, 투기, 통화위반, 부당이득, 시므온 포포프 살해공모, 고문 공범, 인종학살 미수 공범 등으로 기소되어 재판 중이다.

  이 재판의 담당검사인 페테르 솔린스키는 암 투병중인 아버지가 페르카노프와 함께 파시스트와의 격렬한 싸움을 벌인 동지였으나 숙청당해 농촌으로 보내져 만년을 보내고 있다. 검찰총장에 오른 후, 정부로부터 더 넓고 방도 많은 아파트로 이사할 것을 권고 받았지만 전 정부인사의 대규모 특권 남용으로 기소하면서 신정부에 의해 눈에 띄는 특혜를 받는 것이 부담스러워 제안을 거절했다. 대단한 투쟁경력을 지닌 할아버지를 둔 아내 마리아는 이게 큰 불만이다. 딸이 다 커서, 방도 더 필요한 걸 남편도 알면서. 아내는 그리고 할아버지를 닮아 조금은 앙시앵 레짐 편이고, 타협에 능하지 않다.

  여기에 중요한 인물 한 명. 육군 중위였다가 스스로도 겁이 날 정도로 고속 승진을 해 지금은 고도비만의 육군 중장이자 애국 보안사의 우두머리로 있는 게오르기 가닌. 중위였을 때도 비만이었던 가닌은 주도州都 슬리벤에서 소규모 데모가 벌어졌을 때 소심한 경비병 소대장으로 현장에 있었다. 시위대에 특이하게도 공산당 소년단의 붉은 보닛으로 머리를 치장한 일단의 ‘데빈스키 특공대’가 들이닥치더니 “우리, 충성스런 학생, 노동자, 그리고 농부들은 정부를 지지한다”라는 현수막을 펼치고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당 만세, 정부 만세, 모든 영광은 스토요 페트카노프에게!”

  이어서 외치기를:

  “물가상승 감사한다. 식량부족 감사한다. 빵 아닌 이데올로기를 달라. 비밀경찰 강화하라. 스토요 페트카노프를 공경하라. 총알 감사한다. 순국 감사한다. 우리는 비밀경찰 출동을 원한다.”

  이후 가죽코트를 입은 낯선 남자가 가닌에게 와서 낮은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시위대의 머리 위로 총을 발사하고, 그래도 흩어지지 않으면 그들의 발에 발사하라고. 소심한 가닌은 이 명령이 공산당수로부터 하달되었다는 점, 어떤 얼간이가 조준을 낮게 해서 처음부터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 그리고 병사들에게 총알이 별로 없다는 거였다. 가닌은 혼자 데빈스키 특공대를 이끄는 청년에게 걸어가 일단 해산을 명령한다. 청년이 몇 명이나 죽일 셈이냐고 묻자 그는 “솔직히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우리에게는 충분한 총알이 없다. 탄환부족이다.”라고 까놓고 대답한다.

  우두머리 학생은 웃음을 터뜨렸고, 갑자기 가닌을 껴안더니 양 볼에 키스를 날려 가닌 역시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게 스웨덴 TV에 고스란히 찍혀 전 세계로 송출되었으며 데빈스키 특공대는 새로운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군인에게 더 많은 실탄을 주라.”

  이후 벨벳 혁명이 일어나고 한 소심한 중위에 불과했던 남자의 아내는 하도 빨리 진급하는 남편 군복에 새 계급장을 바느질해 달아주느라 고생이 여간 자심하지 않았다.


  스토요 페트카노프는 35년간 장기 집권을 한 노회, 노련, 똑부러지는 독재자였다. 자신이 한 모든 일은 법적으로 완벽한 일이 되도록 만들었으며, 조금이라도 기억될 만한 서류에 단 한 번의 서명도 남기지 않았다. 정말? 아니다, 딱 한 번의 예외가 있었다. 국가 정보부에서 비밀리에 개발한 급성 심장병을 초래하게 하는 약물 개발. 그것 또는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정부나 대통령에 반대 또는 해가 되는 행위를 하는 사람을 제거하라는 서류에 SP, 라고 쓴 것. 이 서류를 발견한 사람이 바로 가닌이다. SP가 진짜 스토요 페트카노프일까? 자신이 서명한 서류 때문에 부하들이 알아서 대통령의 친딸이자 장관을 제거했을까? 그녀가 재즈 광에, 미국에서 햄버거를 비행기로 수입해 입에 달고 다니는 등 자본주의 물에 푹 적셔졌다는 이유로? 이 책이 지금 품절이지만 헌책으로 살 수 있으니 직접 확인하시라.

  그리하여 페트카노프 전 대통령은 유죄 판결을 받고 30년의 국내 유형에 처해진다. 실제로는 불가리아의 마지막 공산주의 대통령 지프코프는 1996년에야 마지막 재판을 통해 면소, 소를 면한다는 판결을 받았으며 1998년에 폐렴으로 죽었다. 무척 재미있다. 줄리언 반스, 정말 잘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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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2-07 1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포함해서 열린책들에서 나왔던 반스 책이 더 찐이긴 합니다....(라고 느낌)
그 이후 타 출판사에서 나온 반스 책들은 뭐랄까 좀 싱겁...

Falstaff 2023-12-07 16:28   좋아요 1 | URL
옙. 열린책들에서 낸 반스의 초기 작품 쪽, 아마 신재실 선생하고 계약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작가들이 전기와 후기 작품이 다른 경우가 있으니까 뭐 그럴 수 있다 싶습니다.

yamoo 2023-12-09 1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있지요...ㅋㅋ 열린책들에서 하드커버로 나왔던 반스의 초기작들...팩 표지도 좋고 번역도 괜찮아 소장중입니다..ㅎㅎ 이때 신재실 님이 주로 번역을 하셨는데...저도 이 고슴도치가 가장 좋았더랬습니다. 역시 별5개.. 근데 개인적으론 별4개 정도가 적당했던 느낌이에요..ㅎㅎ

당시 나왔던 반스의 책..
10 1/2 세계역사, 태양을 바라보며,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 플로베르의 앵무새, 메트로랜드, 내 말좀 들어와, 고슴도치. 사랑 그리고, 레몬테이블

Falstaff 2023-12-09 16:2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신재실 선생 반스를 적극적으로 소개했습니다. 우리말 솜씨도 상당해서 번역 작품이라도 진짜 재미나게 읽고 있답니다. 이제 소개할 책 두 권 남았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