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진 항아리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지음, 아돌프 멘첼 그림, 진일상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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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폰 클라이스트는 창비세계문학시리즈 14번, <미하엘 콜하스>를 처음 읽은 18세기 태생의 19세기 작가로 알고 있다. 16세기 독일 작센 지방의 말장수인 미하엘 콜하스가 작센 지역의 지주 귀족계급인 융커로부터 착취와 폭력을 당해 소송을 하지만 오히려 파국으로 치닫아 봉기를 일으키는 인물이다. 민중봉기 이야기는 우리나라에도 홍명희나 황석영 등 좋은 작가들이 있어 상대적으로 분량이 적은 노벨라 급의 <미하엘 콜하스>를 읽은 나는, 한 마디로 “내 취향하고 맞지 않다.” 평가절하해버리고 만 적이 있다. 그러나 유럽인들에게 미하엘 콜하스, 하면 민중봉기의 대표적, 상징적 인물이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는 1777년 폴란드 국경에 인접한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데르에서 태어났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나 차범근이 활약한 축구단을 보유한 유럽 항공운항의 허브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하고 다른 도시다. 성姓 앞에 폰von이 붙어 있으니 귀족 끄트머리는 되는데, 공, 후, 백, 자, 남작 같은 건 모르겠고 하여간 아들이 태어나면 거의 의무적으로 군인으로 복무했었나보다. 유럽 귀족 자제의 군입대는 그냥 하는 게 아니라 15세 또는 더 어린 나이에 사관학교에 입학해 장교의 자질을 키우면서 시작한다. 폰 클라이스트도 1792년 15세에 포트담 근위대에 들어가 프랑스 혁명의 자유와 평등, 인권 같은 불온한 사상의 동북진을 막기 위해 전선에 선다. 이후 1799년까지 7년 복무하고 예비역 대위 신분으로 제대한 후 꼴값을 떨기 시작한다.

  1800년에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입학하고, 빌헬미네 폰 쳉게라는 아가씨와 약혼을 하는데, 편지를 통해, 정작 자신은 결국 프랑스혁명 정신인 인간의 회복을 위해 제대를 했건만, 남성과 여성, 국가의 시민과 아내의 역할 같은 고리타분한 주제로 약혼녀를 교육시키려 든다. 거참 신기한 귀족일세. 쳉게 아가씨도 나름대로 집에서 잘 교육받았건만 이런 수모를 고스란히 받고 있을까, 설마. 그리하여 약혼 2년 만에 아가씨는 약혼을 파투 놓았고, “인생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공직이나 교수 자리를 마다한 폰 클라이스트 선생께서는 곧장 실업자라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꼴 좋다.

  이후 그는 드라마 작가, 단편소설 작가, 저널리스트로 활약하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대에는 하나도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이런 실패와 좌절은 결국 그토록 애타게 찾던 우라질 “인생의 목표”를 손에서 놓게 만들어 1811년 폰 클라이스트 나리께서는 베를린 근교 반제 호수에서 불치병을 앓던 유부녀 헨리에테 포겔 여사와 손잡고 퐁당 빠져 한 많은 서른네 살의 젊은 나이에 숟가락을 놓고 만다. 근데 알고 보니까, 이 동반자살이 불륜을 감당하지 못한 염문이(라도 됐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아니라, 삶의 희망을 놓은 거의 생면부지의 유부녀를 죽인 것 비슷한 정황이어서, 죽은 다음에도 한동안 욕을 바가지로 먹은 거 같다. 역자 해설을 보면 그렇다. 어떻게 보면 참 세기말적인 짧은 삶을 살다 간 귀한 집 철딱서니 없는 도련님 같기도 하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삶과 중편소설 <미하엘 콜하스>를 알면, 이 희곡 <깨어진 항아리>가 거의 슬랩스틱 수준의 코미디라는 것에 놀랄 것이다. 이 작품을 1811년에 발표했으니 벌써 2백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리하여 <깨어진 항아리>를 시작하자마자 21세기의 발랑 까진 독자는 누가 항아리 또는 주전자나 손잡이가 달린 단지der Klug를 깼는지 단박에 알면서 느긋하게 즐길 수 있지만, 사실 2백년 전의 독자/관객도 그건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하는 게 솔직한 생각이다.

  큰 줄거리는 이미 말을 한 거다. 항아리가 깨졌고, 극은 항아리를 깬 작자가 누구인지 밝히는 스토리라는 것을. 18010년대에 항아리가 서민 재산에서 어떤 정도의 가치를 지녔는지는 모르겠지만 작품 속 항아리의 주인 마르테 룰 부인은 깬 작자가 자기 딸의 약혼자 루프레히트일지라도 기어이 누군지 밝혀 배상을 받고자 마을 판사에게 소송을 했다. 근데 한 밤중에 루프레히트가 과부 마르테 룰 여사의 외동딸 이브와 데이트를 하긴 했으나, 지극히 건전한 데이트였고, 당시 미풍양속으로도 충분히 납득이 갈 이른 밤에 헤어졌음에도, 하여간 루프레히트인지 레브레이트인지 둘 가운데 한 명이 범인임이 틀림없으니 판사 아담 선생께서 쇤네의 억울함을 밝혀달라고 요구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내용이 그렇다는 것이고, 막이 올라가면 마을 판사 아담이 다리에 붕대를 친친 감고 앉아 있는데 머리통과 얼굴이 참 볼만하다. 아담의 말을 전부 믿는다면, 오늘 아침에 잠에서 깨 아침 성가를 웅얼거리며 침대에서 기어 나올 때,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 발을 어긋나게 했단다. 엇갈린 다리 때문에 급기야 균형을 잃고 물에 빠진 듯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엊저녁에 젖은 걸 말리려고 화덕 받침목에 널어놓은 바지를 붙잡았지만 당연히 휙 미끄러져 화덕 모서리에 새긴 숫염소 장식에 걸려 찢어지고, 자신도 이마를 화덕 위로 향한 채 거꾸로 처박혀 숫염소가 코를 내밀고 있는 모서리에 부딪혔단다. 그리하여 얼굴의 옆댕이가 마치 덩치 큰 놈이 격분해서 휘두른 주먹에 맞은 것처럼 피투성이가 됐다고.

  희극의 초반에 다리에 붕대를 감고 얼굴이 엉망이 된 마을 판사가 등장하면 이건 뭔가가 있는 거다. 게다가 반대편 머리통에도 혹이 불쑥 튀어나왔으며, 당시 서민들은 생각하지도 못할 어마어마한 가격의 가발 역시 난데없이 사라져 버린 거였다. 가발에 대해 물어보니까, 밤새 고양이가 가발 안에다가 새끼를 낳았다나. 뭐 그럴 수 있지. 새벽같이 판사를 찾아온 법원 서기이자 조연인 리히트도 그런 줄 안다. 리히트가 주인공 아담에게 말하기를, 각 고을의 재판을 검열하기 위하여 법률 고문관 발터 선생이 전국을 순회하고 있어서 위트레흐트에서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전한다. 갑자기 난리가 난 거다.

  다리도 아프고, 얼굴도 엉망이 된 데다가 고양이까지 가발에다 새끼를 낳아버려 당연히 하루 이틀, 아니면 적어도 한 주일 동안 마을에서 재판을 열지 않을 것이지만, 하필이면 뇌물 같은 거 모르고, 향응도 모르는 청렴한 발터 고문관이 온다 하니, 어찌 재판을 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하여 법정이 열리고, 위에서 말한 마르테 룰 부인이 깨진 항아리를 들고 법정에 출두하여 자기의 억울함을 토로하면서 항아리를 깬 진짜 범인을 찾아달라고 솔로몬 아담, 말이 그렇다는 건데 솔로몬 같은 지혜를 지닌 판사 아담에게 하소연을 하는 것이렸다.


  사건의 한 가운데 있는 인물이 이브. 마르테 룰 여사의 외동딸이자 항아리를 깬 유력 피의자인 루프레흐트의 약혼녀. 진짜 범인을 실제로 본 유일한 목격자이지만 그가 누구인지 밝히기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증인이다. 이브는 사실 연인과 범인 사이에서 참 난감한 처지에 몰려 있다. 이 난감한 처지가 무엇인지는 독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으나, 난감한 짓이 어디까지 진행한 것인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19세기 초에 쓴 작품이다. 괜히 야한 생각 마시라. 다만 하나, 미하엘 콜하스처럼 진실을 밝혀달라고 깡다구 있게 법정에 요청할 용기를 갖지 못한 아가씨라면 범인은 나름대로 사회적인 권세를 등에 업은 인물이리라는 것은 독자들은 쉽게 알 수 있다. 그걸(독자도 알고 있다는 걸) 극작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도 알고 있다. 그리하여 모든 독자, 관객, 그리고 고문관 발터와 서기 리히트를 필두로 한 출연진의 초점은 어떻게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느냐, 범인은 어떤 처벌을 받을 것인가, 하는 데 집중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이후 희극엔 최고의 악인이 등장한다. 이 작품도 예외가 아니고, 잘 알려진 모든 희극과 마찬가지로 나름대로 귀여운 악당이다. 재미있다. 그러나 책값이 오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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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2-20 09: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값 눌러보고 왔는데, 더 오른 거 같네요?! -_- 전자책을 노려야겠습니다.
그나저나 폴스타프 님, 지만지 책은 알라딘은 할인 1도 안 해주잖아요? 예스24는 5%(전에는 그러더니 이 책 확인해보니 0%네요) 암튼 교보는 10%해주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만지 책 사실 땐 교보로....

Falstaff 2023-12-20 16:31   좋아요 1 | URL
맞아요, 맞아요. 잠자냥님이 전에 콕 얘기하신 거 기억하고 있습니다.
ㅎㅎㅎ 그래도 지만지 드라마는 이젠 절대 내돈내산 안 하는 걸로 결정했습니다.
도서관에 신청하면 한 달 늦지만 팍팍 사주는 걸요.
연금 나올 때까지 무조건 개겨야 합니다. ㅋㅋㅋㅋㅋ
 
사일러스 마너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조지 엘리엇 지음, 한애경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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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북쪽, 북쪽이라고 스코틀랜드와 접경지역까지 가는 건 아니고 얼핏 맨체스터 정도 북쪽의 공업도시에 주로 직조공들이 많이 모여 살던 랜턴야드라는 동네가 있었다. 이곳의 한 젊은 직조공 사일러스 마너는 다른 직조공들과 마찬가지로 어린 나이에 공장에 들어와 착실하게 기술을 익히면서 활발하게 육체적, 정신적 활동을 하고 있었다. 주로 (교회churches가 아닌) 예배당(chapel)을 중심으로 작은 은둔의 세계에서 높이 평가를 받았으며 절친 윌리엄 데인과 친밀한 우정을 바탕으로 풍성한 삶을 이루어 사람들은 이들을 (골리앗의 목을 벤)다윗과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 같은 친구사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윌리엄은 신앙심이 깊지 않은 교인에게 지나치게 엄격하고, 자기 시각에 도취하는 바람에 스스로를 스승보다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사일러스는 이것조차 윌리엄이 완벽한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봤다. 윌리엄은 개종을 할 무렵에 꿈을 꾼 적이 있다. 꿈속에서 성서는 성서인데 아무 글씨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성경에 저절로 검정 글씨가 솟아올랐으니 “하느님께서 불러 택하셨다는 사실을 확인하라.” 그러니까 진복자는 아니라는 얘기 맞지? 안 보고 믿는 자가 진복자인데 윌리엄 데인은 글자로 솟아오른 것을 보고 개종을 했으니까. 아니면 말고.

  사일러스는 젊은 하녀와 약혼을 했다. 그리고 돈이 충분히 모일 때까지 기다리며 일요일마다 데이트를 즐겼는데, 가끔 윌리엄을 불러 동행한 적이 있다. 이 당시 사일러스가 기도 중에 갑자기 경직발작이 일어났고, 보나마나 뇌전증이지만, 당시 유럽의 많은 우둔한 기독교인들처럼 이 예배당의 신자들 역시 이를 “선택된 형제에게 내리는 특별한 소명”이라고 해석했다. 다만 한 명, 윌리엄 데인 만이 사일러스에게 이 현상이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이 아닌 사탄의 방문”이라고 대못을 박으며 “마음 속으로 저주받을 만한 일을 숨기고 있지는 않은지” 숙고해보라 권고한다. 그렇다고 사일러스는 아무 원한을 품지 않았으나 친구의 의심이 괴로웠는데, 신기하지, 이 시기부터 약혼녀 사라의 태도가 이상하게 왔다 갔다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예배당의 늙은 집사가 오늘 내일 해서 젊은 신도인 사일러스와 윌리엄도 야간에 몇 시간씩 간병을 해주었다. 환자를 돌보다가 잠깐 잠이 들었고, 잠이 깼을 때는 집사가 이미 요단강을 건너 갔으며, 집사의 돈주머니가 없어져서 찾아봤더니 윌리엄 데인에 의하여 사일러스 방 옷장 뒤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는 사일러스 마너. 예배당은 빅토르 위고의 <파리 노트르담>처럼 제비를 뽑아 유무죄를 가리기로 결정을 했지만, 마너는 결국 유죄 제비를 뽑아 훔친 돈을 변상하고 교인자격을 박탈당한다. 선고의 자리에서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 앞뒤를 알아차린 마너.

  “윌리엄 데인. 바로 자네가 돈을 훔쳤지. 내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고 음모를 꾸민 거야. 그런 일을 꾸몄는데도 아마 자넨 잘 살아가겠지. 이 세상을 공정하게 지배하는 의로운 하느님 따윈 없고, 무고한 사람에게 불리한 증언이나 하는 거짓 하느님만 있으니까.”

  윌리엄은 이렇게 반박한다.

  “이 말이 사탄의 음성인지 아닌지는 형제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자넬 위해 그저 기도만 하겠네, 사일러스.”

  사라는 목사와 새 집사를 통해 곧바로 파혼을 통보하고 한 달도 되지 않아 윌리엄 데인과 결혼했으며, 사일러스 마너는 도시를 떠나, 남쪽으로 향한다.


  살기 좋은 영국 Merry England라고 불리는 비옥한 평원의 중앙. 숲이 울창한 아늑한 분지. 세상 소식이 들리지 않는 곳에 래블로라고 하는 마을이 있고, 마을 근처의 멋진 덤불 사이의 오두막을 빌어 여전히 직조 일을 하는 사일러스 마너. 창백한 얼굴에 툭 튀어나온 커다란 갈색 눈은 어려서부터 가는 실을 가까이에서 자세히 내려다보는 일을 오래 해 피할 수 없는 지독한 근시였는데, 이것이 농촌 사람들이 보기엔 악마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마너가 이사 오고 15년이 지났지만 그는 옷감을 짠 것을 고객에게 가져다 주고 재료를 받아오는 일 말고는 일체의 왕래가 없이 한결 같은 외톨이로 지냈다. 그러지 않아도 선하지만 시골 특유의 폐쇄적인 성향을 지닌 래블로 사람들은 마너에게 뭔가 신비하고 특이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시각에는 어린 시절에 어머니로부터 배운 약초와 약초의 조제법으로 구두쟁이의 아내 샐리 오츠의 심한 심장병과 수종에 큰 도움을 준 이후에 더해졌다. 그것을 보고 들은 래블로 주민들은 의사 킴블 선생에게 직접 가려면 돈이 많이 드니, 자잘한 환자들이 돈을 조금 들고 마너를 방문하기 시작했으나 그는 화를 내며 이들을 쫓아내 버려 외톨이 직조공을 향한 동정심마저 반감으로 돌아서 버렸다. 그래도 마너가 갑자기 “눈이 죽은 사람처럼 굳어 있고 몸을 흔들어도 사지는 뻣뻣하고 손은 무쇠로 만든 듯 가방을 움켜쥐고 있어서, 죽었나,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정상으로 돌아와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새가 자기 둥지를 들락거리듯 그 사람의 영혼이 몸에서 벗어났다가 들락거리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신앙적 신비로움은 여전했다.

  게다가 이웃 교구 타알리에 있던 유일한 늙은 직조공이 숨을 거둔 이후 직조 기술 덕분에 그나마 환대받는 주민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마너는 과거를 돌이켜 생각하기 정말 싫고 이웃이 되어야 할 낯선 사람들에게 사랑과 우애를 느낄 만한 일도 없다고 단정하여 스스로 고립된 일상을 살 뿐이었다. 그러다가 첫 고객인 오스굿 부인은 직조의 대가로 21실링짜리 금화 다섯 개를 받은 것이 마너의 나머지 삶이 변하게 되는 전환점이었다.

  마너의 삶은 일 말고 아무것도 없었다. 간혹 주민들이 아는 척이라도 하기 위해 집을 방문하면 여간해 집안으로 들이지도 않을 뿐더러 만일 들였다 하더라도 왜 이 손님이 얼른 가버리지 않는지 악마를 연상시키는 튀어나온 눈알을 뒤룩뒤룩 굴릴 뿐이니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이웃이라도 쉽게 정을 붙일 수 없었다. 그래서 마너는 일하고, 일하고 또 일했다. 그렇게 벌어들인 금화와 은화는 쓸 일조차 없었다. 15년 동안이나 래블로에서 살면서 남자라면 그래도 가끔 들러 친목을 다지며 맥주라도 한 잔 기울이는 주점 레인보에도 한 번 가본 적 없는 마너는 그저 철제 통에다 금화와 은화를 보관할 뿐이었다. 세월이 흘러가며 돈이 많아지자 여느 일반 농가가 다 그렇듯이 마루 바닥을 한 장 뜯어내고 땅을 파내 빈 자리에 통을 묻고 생기는 대로 금은화를 보관했다. 더 세월이 가서 이젠 철제 통도 작아 다 담지 못하자 가죽 주머니 두 개를 장만해 그것이 그득해질 때까지 모으고 또 모았다. 그럴수록 마너의 몸은 더 쪼그라들고 시력은 형편없이 악화되었으며 이제 주민들은 마흔도 되지 않은 마너에게 ‘마너 영감’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그만큼 그는 더욱 쇠약해져갔다.

  그래도 마너에게 새로운 습관이 생겨 그것을 보람과 만족으로 알았다. 낮에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저녁 때 밥을 먹고 어두워지면, 그는 마루바닥을 들춰 흙을 걷어낸 다음 가죽 자루 두 개를 꺼내 금은화를 쏟는다. 그리고 만면에 가는 웃음을 지으며 얼마나 많은 금화와 은화가 있는지, 세기 시작한다. 한 줄로 쌓아 놓은 것이 몇 줄이나 되는지. 돈이 많아지면서 마너의 얼굴엔 그로테스크한 만족의 기미가 엿보였다. 마치 굴 속에 금은보화와 마법의 반지를 보관하고 있던 외로운 큰 뱀이나 땅굴을 파고 금광에서 채취한 황금덩이 속에서 만족한 웃음을 짓는 독한 얼굴의 난쟁이들처럼.

  15년간 마너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해코지하는 사람도 없었고, 아무 생각없이 집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도 없었고, 밥 한 번 같이 먹는 사람도 없었다. 너무도 오랜 세월 동안 그에겐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밤, 새롭게 일감을 받았건만 일에 필요한 꼰 실을 사오지 않았다는 걸 알고, 여태 한 번도 그래본 적이 없었는데, 문을 그냥 열어 둔 채로 밤마을을 가버렸다. 마너가 일을 보고 돌아온다. 집에서 불과 백 야드 떨어진 곳에 도착했을 때, 마을 최고의 유지이자 최대 지주인 캐스 가문의 둘째 아들이자 천하의 방탕아 던스턴 캐스가, 모은 돈이 무척 많을 거란 소문이 난 마너의 빈집에 들어와 마루 바닥을 조사하더니 금세, 여기가 아니면 어디겠어 뻔한 노릇이지, 한 짝을 들어낸 다음 가죽 주머니 두 개를 찾아냈고, 이내 그것을 들춰 매고는 유유히 사라지고 있었다. 278파운드 18펜스. 마지막으로 세어봤을 때였다. 웬만한 농지의 1년 소작료가 백 파운드였던 시절. 이렇게 마너는 새까맣게 모르지만 마너와 캐스 가문은 연결이 되고 있었던 거다.

  이후 이야기는 당시 소설 장르의 끊이지 않는 탐구생활, 출생의 비밀로 접어들고, 얼키고설킨 젊은 날의 방황과, 거짓과, 사랑과, 신앙과, 당연히 “선한” 하느님의 역사까지 19세기 소설의 정점이자 영국 소설사의 가장 위대한 별이라고 칭송받는 조지 엘리엇의 필담은 독자로 하여금 쉼없이 손가락에 침을 묻히게 한다. 다만 아쉬운 건 19세기 작가인 반면 나는 21세기 독자라는 점, 이거 딱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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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타야 단편집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타티야나 톨스타야 지음, 이수연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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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비에트 연방에도 “백만장자”가 있었다. 타티야나 톨스타야의 할아버지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가 그랬다. 1917년에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생하자 혁명에 반대하여 조국을 떠난 귀족의 후예 톨스토이 선생은 놀랍게도 6년 후에 러시아로 돌아가 대단한 특권 계층 대접을 받아 세간에서 “백만장자 작가”라고 했던 거다. 물론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백작과 넓은 의미에서 같은 가문이긴 하지만 이젠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인기도 없고 지명도도 없는 과학소설SF 작가한테 레닌과 스탈린이 무슨 이유로 그렇게 대접을 했을까? 하여튼 알렉세이 톨스토이의 손녀딸이 타티야나 톨스타야다. 1951년에 레닌그라드에서 출생해 유복하게 자라 좋은 교육을 받은 톨스타야는 1987년 단편소설 <황금 댓돌 위에 앉아>로 데뷔를 했지만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우리가 아는 많은 러시아 여성 작가들, 빅토리아 토카레바,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류드밀라 페트루셉스카야 같은 이들처럼 망치와 낫의 붉은 기가 내려가는 대신 러시아 삼색기가 모스크바 크렘린에 게양된 1989년 이후였다.

  소비에트 시절에선 여성 작가들이 여성의 독특한 세계를 문자로 만드는데 애로사항이 있었던 거 같다.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하면 뭘 하겠느냐만, 당시 좌파 세계, 진보 세력을 진두지휘했던 소비에트는 엉뚱하게 인민들의 사상마저 통제하려는 가장 골통 우파적이라 할 수 있는 파시즘적 통치를 하는 바람에 여성들이 촉각을 세울 수밖에 없는 이슈들, 예컨대 섹스, “임신, 출산, 육아, 임신중단, 이혼, 경력, 매춘, 강간, 동성애”(역자해설 인용) 같은 것들을 거의 언급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여성 인권이 출발하는 시점에는 당연히 그간 여성들이 피해를 입었던 사회 전반의 병리현상을 다루어 문제제기를 해야 할 터인데 그걸 발언하지 못하게 하니 러시아 문학판은 마초들의 권력형 유희장 비슷하게 변질되었다. 그리하여 앞에서 언급한 작가들도 거의 다 소설가, 극작가라는 문학 종사자라기보다 언론인, 평론가 같은 비문학 글에 집중하고 있다가, 드디어 러시아라는 동토에 봄바람이 불자마자 원고지를 펼치고 여태 자신들이 참아 왔던 문제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진짜 한 번 읽어 보시라, 유럽이나 동아시아 여성작가와는 또 다른 매우 참신, 독특한 소재와 필체와 스토리를 만날 수 있을 터이니. 남자 작가들은? 그들은 소비에트 시절에 자기 원고를 해외에 빼돌려 그곳에서 출간을 하고 유배를 당하든지 (이민이라는 방식을 통해) 조국과 모국어에서 추방당했다.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할 말은 해야 하는 것, 그게 작가의 숙명이란다.


  《톨스타야 단편집》은 “톨스타야의 대표 단편집 《오케르빌 강》에 수록된 단편들 중에서 네 편을 실었다.” 역자 해설 115쪽에 의하면 지만지가 이런 야만스런 짓을 했다, 이거다. 이왕 번역을 하고 책을 출간하려면 한 권을 통째로 해야지 거기에서 달랑 네 편만, 그것도 표제작품도 빼 버리고 책을 내다니, 오랜만에 백수가 큰 맘 먹고 저지른 내돈내산인데 어찌 속이 편할 수 있겠느냐! 짜증 제대로네. 별 두 개 주려다가, 작품이 괜찮아서 참고 참았다.

  이 책에서는 앞 문단에서 이야기한 여성들이 제기하는 사회 병리적 현상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대신 역사상 거의 처음으로 자본주의 속에서 살게 된 러시아와 러시아 시민, 사회를 독특한 시각으로 보는 매력이 있다. 제일 앞에 실린 <밤>은 정신지체가 있는 뇌성마비(인 것처럼 보이는 장애)를 가져 엄마의 보호 없이는 생활할 수 없는 소년의 불행을, <백지>는 외과수술을 통해 “자존심”과 더불어 세상 사는 데 가장 쓸모없는 “양심” 조직을 절개하고, 수술이 끝나자마자 안면 싹 바꾸는 현대인의 모습을, <새와의 만남>은 소년 페차가 본 어른 세계의 비열함과 슬픔을, <매머드 사냥>은 남자 한 명 잘 만나 팔자 고쳐보려는 젊은 여성의 허상을 그리고 있다. 네 편 다 재미있다. 그러나 해설을 빼고 겨우 112쪽. 이제 본격적으로 읽을 만하면 뚝, 책은 끝난다. 원, 참. 그래도 한 2백쪽 가까이 가줘야 아마존 밀림이 살아 남는 거 아니냐고.

  단편들이라 내용 소개를 더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래저래 독후감 빨리 쓸 수 있어서 좋긴 하지만 영 찜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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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3-12-18 0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만지 번역서 중엔 발췌번역이 꽤 있더라고요. 한 번 속은(?) 경험이 있어서 지만지는 책 정보를 잘 살피고 있어요.

Falstaff 2023-12-18 08:35   좋아요 1 | URL
옙. 그나마 다행인 것이 발췌본은 표지에 발췌라고 써 놓았더라고요. 저도 그건 절대 안 읽습니다.

은하수 2023-12-18 0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마음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래서 전 단편집이 영... 맘에 안찰때가 많아요^^

Falstaff 2023-12-18 08:39   좋아요 0 | URL
아효, 중요 작품을 쏙 빼고 번역한 이유가 있을까요?
이거 말고도 패트릭 화이트가 쓴 빼어난 단편집 <불타버린 사람들>도 중요한 작품을 빼고 번역본을 냈답니다. 그때 화이트가 갑자기 노벨문학상을 받는 바람에 범우사에서 속도전을 하느라고 외국서적 해적판으로 번역해 냈기 때문이었는데, 지만지는 그것도 아니고 거 참 아쉽습니다.

stella.K 2023-12-18 1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만지는 <톨스타야 단편집>을 완역하라! 완역하라!

이러면 지만지가 좀 볼까요? 욕 먹을 짓이네요.ㅉ 언쩐지 톨스토이를 연상시킨다 했더니 과연 그렇군요.

Falstaff 2023-12-18 16:50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지만지, 간혹 숨어있는 명작을 출간해서 그렇지, 하는 짓은 욕 먹어 마땅하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습니다. ㅎㅎㅎㅎ
 
레몬 테이블
줄리언 반스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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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한 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작품집. 열 번째 읽는 줄리언 반스의 책이며 작가의 단편소설은 처음 감상하는 기회다. 사실 오늘의 독후감은 딱 한 줄이면 다 끝난다. 이렇게.


  “단편까지 재미나게 잘 쓰면 반칙 아냐?”


  내가 단편소설엔 좀 까다롭다. 근데 이 책에 실린 것들, 물론 전부 다 그랬다는 건 아니고, 대부분 어떻게 내 마음에 그리 딱 맞아 떨어지는지 참. 첫 작품부터 그랬다. <이발의 어제와 오늘>.

  이사간 동네에서 처음 이발소를 간 날. 혼자 가서 어떻게 깎아달라고 해야 하는지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믿지 못하는 엄마가 기어이 남자들만의 세상인 이발소까지 따라와서, “머리 끝은 약간 치고 뒤하고 옆은 짧게요.” 주문을 하고, 이발이 끝나 이발사가 “아주머니, 한 번 살펴보시죠.”라면서 작업이 끝났음을 통지하니 재까닥 “아주 멋지네요.”라고 응수했으나, 정작 이발소 문을 나서자마자 아들을 멍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턱 깎인 불쌍한 양 같네.”라고 투덜거리는 장면. 이렇게 시작한다. 그레고리는 이후부터 이발소를 혼자 다니며 벌써 긴 바지를 입는데도 “유년단원이지?”라고 묻는 덜 떨어진 이발사에게 “아닌데요.” “벌써 소년단원인가?” “아닙니다.” “십자군인가? 십자군은 아주 좋은 조직이야. 한 번 고려해봐.” 이 따위 말을 듣기도 하는 사이에 배꼽 아래 털이 나기 시작했고, 이발 중에는 할례를 하지 않으려면 사라센과 싸워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야 하니 끝까지 오줌을 참아가면서 어느 새 어른이 됐다. 

  이젠 이발이 끝나고 거울을 보며 “젠장, 이 꼴이 뭐야.”라고 직접 불만을 하게 됐지만 날 선 면도칼을 쥐고 있는 이발사 앞에서 결코 불평하지는 않았다. 가르마를 어느 쪽으로 타겠느냐 하는 질문엔 “그저 올 백으로 넘겨주세요.” 해 놓고는 마치 소년시절의 이발사에게 복수를 하듯이 머리를 홱 움직인 다음 이발 가운에서 손을 빼 손가락 빗으로 휙휙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심술도 이젠 그레고리 마음대로다. 어느새 그레고리는 이발사가 동성연애자가 아닌가 의심하기도 하지만 묻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이야기하기를 결혼 생활 27년차로 아이들이 둘인데 하나는 다 커서 독립했고, 딸은 아직 집에 있단다. 음. 내 엉덩이를 탐하지는 않겠군. 그러나 이발사는 오히려 그레고리더러 “손님은 결혼할 타입이 아닌 것 같네요.”라고 물어보는 것이 오히려 그레고리를 동성애자로 의심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레고리도 그동안 제법 인생을 알아, 나이든 이발사한테 한 수 가르치기를 “결혼은 겁쟁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모험이지요.” 오냐, 많이 컸다, 많이 컸어.

  세월은 흘러흘러, 그레고리는 머리 깎으러 가기 전에 메니큐어 세트를 갖고 욕실에 들어가 손톱 가위로 수북한 긴 눈썹을 손질하고, 귓구멍에서 솟아오른 불필요한 털에도 가위질을 하고, 의기소침한 기분으로 코를 밀어 올린 다음 콧구멍을 조사하지만 특별히 긴 콧털은 없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 화장용 수건 끄트머리를 적셔 귀 뒷부분을 문질러 닦고, 연골질의 귓바퀴 홈을 썰매 타듯 누비고, 밀랍 같은 귓구멍을 마지막으로 쑤신 후에야 외출복을 입는다. 이젠 이발사한테 가지 않는다. 대신 뭐라? 헤어 스타일리스트? 오후 세 시에 스타일리스트 켈리와 예약을 해 놓고 찾아간 곳이 바넷 헤어. 의자에 앉으면 일단 뒤로 자빠뜨려 놓고 머리를 감긴다. (난 여태 한 번도 당해보지 못한 풍경이다.) 차가운 손의 살찐 여자가 “너무 뜨거우세요?” “휴가 중이세요?” “컨디셔너 해드릴까요?” 이렇게 묻는 것도 몇 년 경험해보니 전혀 이상하지 않다. 작가가 고전음악에 일가견이 있는 반스라서 헤어숍의 스피커엔 류트와 비올의 연주가 흘러나오고(다울랜드 아니겄어?) 드디어 등장한 예약 스타일리스트 켈리는 틀림없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나이를 먹어도 신경이 쓰이긴 마찬가지인데, 자신의 아랫배와 허벅지 높은 곳, 그러니까 치골 부근, 또는 엉덩이를 그레고리의 어깨와 상박부에 약 오르기 적당한 시간차로 슬쩍 마찰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켈리는 스물일곱 살. 그레고리의 맏딸은 스물다섯. 그리고 딸이 하나 더 있다. 겁쟁이 그레고리가 했던 유일한 모험인 결혼도 벌써 28년을 무난하게 끌어왔다. 그는 벌써 40년 동안이나 머리 손질이 끝난 다음에 한결같이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을 안다. “아주 멋집니다.” “훨씬 깔끔하네요.” 또는 “끝내주네요.” 또는 “고맙습니다.” 오늘도 그레고리는 그렇게 대답할 것이다.

  작가가 누구? 줄리언 반스. 단편이라고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서, 기가 막힌 소스를 조금, 아주 조금 뿌리는데, 그게 뭔가 하면, 야한 스냅. 이게 조금만 길어지면 외설스러워질 수도 있고, 기분좋게 끈적일 수도 있고, 독자의 맥동만 쓸데없이 높일 수도 있건만, 이 셰프, 반스는 독자는 상상도 하지 못한 장소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은 시간에 그러니까 난데없이 찰싹, 가비야운 손바닥으로 독자의 마빡을 토닥이고 지나간다. 정말 순간에 한 방 당한 듯한 느낌. 이 작품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고 작품마다 곳곳에 도사린 귀여운 장난 또는 딴죽. 거참.


  열 하나의 단편소설이 전부 노인들의 사랑, 섹스, 피폐, 추억(이라는 황량함), 실패한 도전, 그리고 죽음 또는 죽음의 기다림 같은 것이다. 이미 주인공들은 시대가 요구하는 소명을 더 이상 실천할 능력도 되지 않고, 시대가 바라지도 않으며, 그럴 것이라고 추측해 나름대로 행동해 봤자 후배들에게 폐만 끼칠 뿐이다. 《레몬 테이블》에는 <레몬 테이블>이란 제목의 단편이 나오지 않는다. 처음 알았는데, 레몬은 서양에서 죽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럼 레몬 테이블은 죽음의 식탁, 죽음의 진열, 더 좋게 이야기하면 죽음에 가까운 노인들의 모음집이란 의미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작품집 《레몬 테이블》은 이런 문장을 읽으며 책을 덮는다.


  “나는 문간에 서서, 레몬을 큰 소리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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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12-15 06: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타티야나 톨스타야, 《톨스타야 단편집》
화요일. 조지 엘리엇, <사일러스 마너>
수요일.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깨어진 항아리>
목요일. 장 콕토, <무서운 아이들>
금요일. 아우구스트 스트랜드베리이, <꿈 연극>

잠자냥 2023-12-15 09:59   좋아요 0 | URL
금요일 전에 <꿈 연극> 읽어둬야겠는데요!

yamoo 2023-12-15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몬 테이블도 재밌었습니다. 이때 나온 반스의 책 중 <메트로폴리탄>이 가장 그저 그랬습니다. 이거 빼놓고 모두 좋았다능!ㅎㅎ

Falstaff 2023-12-15 16:24   좋아요 0 | URL
야무 님도 반스 되게 좋아하셔요, 그죠? ㅎㅎㅎ 반갑습니다.

stella.K 2023-12-15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절판이네요. 도대체 이 책이 언제 나와서 절판이된건지. ㅠ 한권 인쇄소에 부탁할 수도 없고. ㅉ

Falstaff 2023-12-15 16:24   좋아요 0 | URL
저도 알라딘 헌책방에서 샀어요. 파는 곳이 있을 걸요?

잠자냥 2023-12-15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보다는 젊었을 때(?) 읽었는데 지금 읽으면 더 진하게 다가올 것도 같습니다. ㅎㅎ
단편도 참 잘 쓰죠 이 양반...ㅎㅎ

Falstaff 2023-12-15 16:25   좋아요 0 | URL
옙. 좀 묵은 시절에 읽는 편이 더 좋을 거 같습니다.
 
조광화 희곡집 - 됴화만발.황구도.미친키스.철안붓다
조광화 지음 / 푸른북스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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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됴화만발>, <황구도>, <미친키스>, <철안붓다> 이렇게 네 작품을 실은 모음집.


  첫 작품의 제목을 왜 됴화, 라고 했을까? 복숭아꽃 도화桃花를 20세기 초까지 ‘됴화’라고 쓰고 읽었다.  2578년에 출발해서 2078년에 불시착한 타임머신(시낭) 가마우지 호를 수선해 탑승한 예비역 소령 이언호는 기계가 5백년 마다 에러를 발생시킨다는 걸 모르고 도착한 곳이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4년 전인 1578년 충청도 예산현 대지동면, 당시 말로 “됴한드르”에 비상착륙하기에 이른다. 복거일의 장편소설 <역사 속의 나그네> 장면이다. 작가는 작품 속 16세기 조선의 언어와 문자를 19세기 식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표기에서 가장 눈에 띄는 방법이 바로 구개음화가 아직 안 된 자음과 복모음의 사용이다. 물론 ‘도화’를 ‘됴화’로 쓸 때에는 구개음화는 필요 없지만 말이 그렇다는 얘기다.

  그러나 <됴화만발>은 극을 보지 않고 오직 희곡으로만 읽는 평면 작품으로는 도무지 이해불가의 진퇴양난이었다. 라면과 떡볶이를 좋아하는 소녀를 납치해 산골짜기로 끌고 간 악당을 지하에서 난데없이 등장한 케이라는 남자가 신묘한 칼부림으로 제거하더니 어처구니없게 소녀한테 책을 한 권 던져주면서 읽어달라고 한다. 책의 제목이 바로 <됴화만발>. 책은 영생불사의 약을 구하라고 밀명을 내린 황제의 이야기, 3천 명의 동남동녀를 요구하는가 싶더니 난데없이 뇌성벽력이 치고, 번개를 이용해 죽은 사람의 찢어진 몸을 이어 붙여 괴물 인간을 만드는 이야기, 흡혈을 하며 영생을 누리는 귀족 같은 걸 상기시키는 등, 수십 년 간 평면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나로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 불가한 오리무중의 칼싸움, 진짜로 연극을 구경한다면 눈호강이 틀림없을 화려무비한 검술, 무술, 무용을 구경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다가 마지막엔 제목처럼 천장에서 복숭아 꽃이 화르륵 비산하면서 막이 내려갈 듯하지만, 복숭아 꽃을 어디서 구해? 그냥 막이 떨어지고 만다.

  근데, 이게 뭐야? 뭘 주장하는 거야? 2003년에 초안을 썼으나 2011년에야 남산예술센터에서 초연을 했고, “사카구치 안고의 단편소설 <벚꽃 만발한 나무 아래에서>가 원작이지만 이를 모티브로 재창작한 대본은 조광화의 창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본인의 색깔과 스타일로 완전히 새롭게” 바꾸었다고 한다. 일본 극단이 사카구치의 작품을 공연했을 때 꽃잎이 극장에 가득 날려 제일 앞자리에서 구경하던 조광화의 무릎에 두껍게 쌓이던 것이 충격이었다는데, 글쎄, 내가 읽어보니까, 드라마의 스토리는 그저 영생불사의 영약을 찾아 나서고, 여기에 드라큘라와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든 괴물 이야기를 섞어 놓은 위에 근사한 칼부림 씬을 올려놓은 것(뿐)이던데. 전 『객석』의 기자이자 <됴화만발>의 드라마터지인 김주연은 “<됴화만발>이 무대 위에 검객 이야기를 펼쳐 놓은 것은 스타일리시한 무대 양식을 보여주기 위한 것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주제를 보다 선명하게 보여주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면 희곡/연극의 주제가 무얼까? 김주연 가라사대 ‘죽음’과 ‘고독’이란다.

  연극을 보면서 죽음과 고독을 연상할 수 있겠지. 인정한다. 그러나 골 아프게 이런 무협지를 보면서 굳이 죽음이나 고독 운운할 필요는 없을 거 같다. 그냥 한 시간 좀 넘는 시간 눈알이 뱅뱅 도는 칼싸움 구경이나 한 판 때리고 일어나 극장의 현관을 나오면서, 거 참 시원하게 잘 들 싸우더만, 한 마디로 깨끗하게 마음을 비운 다음 술집 또는 모텔로 발길을 돌리는 것이 혹시 장땡 아닐까?


  <황구도>는 개 이야기다. 황구黃狗, 우리말로 ‘똥개’다. 잡종견. 요즘 말로 믹스견. 이 똥개의 이름은 아담. 캐시하고 거칠이는 암수 스피츠 순종들이다. 아담과 캐시의 주인은 장정. 은희, 준희, 재희, 영희 등의 애인이다. 장정은 마당에서 집의 경비를 담당하는 똥개 아담과 서로 신뢰하고 믿으며 사랑하기로 맹세한 바 있다. 캐시는 집안에서 사는 애완용 암컷 스피츠. 집에 놀러 온 은희가 장정의 방에서 옷을 벗으면서, “쟤가 보고 있어서 도무지 기분이 안 나.” 투정을 하고, 잔뜩 독이 오른 장정은 얼른 캐시를 마당으로 내보내는데, 아뿔싸, 캐시가 신의 뜻을 받들어 발정을 시작했던 찰나였다. 게다가 평소 연모하고 있던 아담이 하늘을 향해 코를 킁킁거리더니 캐시한테 사랑을 고백한다. 그리하여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캐시가 슬쩍 엉덩이를 내밀어 만리장성을 쌓으려는 순간, 득달같이 등장한 주인 장정이 갖은 욕을 해대면서 아담을 쫓아버린다. 이 빌어먹을 똥개! 저 육시헐 똥개가 우리 스피츠를!

  며칠 후, 다른 애인 준희가 수컷 스피츠 순종 거칠이를 데리고 와 캐시와 선을 보이는데, 아무리 개들이라고 해도 한 번 한 사랑의 맹세를 그리 쉽게 버릴 거 같지 않지? 하지만 오산. 도무지 달아오르는 몸의 갈증을 어찌하지 못하는 캐시는 아담이 보고 있는 앞에서 그만 거칠이를 받아들이고 만다. 이렇게 해서 처음 새끼를 낳은 캐시. 그러나 개 같은 주인은 은희, 준희에 이어 숱한 희 자매를 침대에 끌어들이며 한편으로 캐시의 자식들을 비싼 값을 받고 팔아버린다. 캐시는 쉬지 않고 임신을 하고. 열 받아 집을 나간 아담은 진정한 사랑을 찾아 개의 한 생을 온통 떠돌아다니다 결국 이젠 늙어 꼬부라진 몸으로 역시 늙어 꼬부라진 캐시를 찾아 옛집으로 돌아온다. 뭐 이런 사랑과 맹세의 이야기.


  <미친키스>는 한 남매의 남녀관계 이야기. 오빠는 도청과 몰카 전문 사설 탐정. 동생은 사랑에 실패하고 취업에도 실패해 일본인 현지처도 하고, 많은 돈을 받고 교수의 세컨드도 하는 막장 집안. 오빠 장정은 신희라는 아가씨에게 집착하다가 걷어 차인 후 열라 스토킹 중. 신희의 지도교수는 장정의 동생 은정의 고객이면서 신희와도 관계를 맺기 시작하며, 남편 인호의 뒷조사를 장정에게 의뢰한 교수의 아내 영애는 또 장정과 뼈와 살이 타는 시간을 갖는다. 한 마디로 어떻게 이런 커플을 골랐는지 참으로 가관이다. 정말로 드라마를 봤더라면 무대 의상이 별로 필요할 거 같지 않을 정도의 만수산 드렁칡 같은 관계, 관계, 그리고 관계. 섹스와 돈의 난장판.

  조광화는 20대 후반에 이 드라마를 썼다는데 지금 다시 공연하기 위해 작품을 들여다보니 이젠 지도교수 인호의 마음으로 자라났다고 말한다. 사랑과 욕정 때문에 결혼을 했지만 이젠 식어버려 다른 여성을 찾는 중년의 남자가. 혹시 자신도 그러고 싶은 거 아냐? 어쨌거나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란다.


  <철안붓다>는 1999년 성수대교 북단에서 초연을 했다는데, “성수대교 북단”이란 극장/극단이 있는지 아니면 진짜 성수대교 북단의 야외에서 공연을 했는지는 내가 무식해서 모르겠다. 석존, 부처가 열반하고 3천 년이 지난 25세기 중반이 무대다.

  지금 미래 관련해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쏟는 것은 단연 AI. 그러나 조광화는 유전자 변형, 유전자 조작으로 눈을 돌렸다. 하긴 초연이 있던 1999년, 20세기 끝 무렵에 AI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기도 했다. 25세기엔 거의 모든 인간이 유전자 조작에 의해 태어난 생명체이고 진짜 인간끼리 수정을 통해 세상 구경을 한 순종은 거의 없다. 극에 등장하는 순종 인간도 오직 세 명. 닥터와 닥터의 아들 시원, 그리고 희은. 닥터는 시원과 희은을 통해 순종 인간의 번식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불모, 칼리 신장, 나찰 등 동물 키메라들, 야찰, 전사, 여귀 같은 괴물들은 인간을 도륙해 고기를 먹으려 하니 어찌 한 판 싸움이 없을 수 있을까? 키메라 가운데 코끼리 형상을 한 상후라는 키메라 하나만 키메라를 창조한 순종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닥터는 전생수라는 생명체를 창조한다. 전생수. 지난 생이 아니라 전생轉生, 서로 몸을 바꿔 다시 사는 일을 가능하게 해주는 수獸, 큰 자궁을 갖고 있는 짐승이다. 자궁 속에 두 생명체를 넣으면 영혼인지, 뇌파인지 하여간 알 수 없는 뭔가가 서로 바뀌게 되는 것.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부처가 죽은 후 3천 년이 지난 기념인지 하여간 죽은 다음의 세상인지 뭔지 아리송한 세계가 있어서 붓다도 나오고, 힌두교의 최고 (여)신인 비슈누, 죽음의 신인 칼리 같은 형이상학적 인물도 나오고, 순종 인간 시원은 이름 그대로 순종 인간으로 죽음을 맞지만 전신을 한 악당 안회의 몸으로 새로운 인류의 시원이 되기도 하는 등, 이 연극을 굳이 내가 한 마디로 한다면, 만화지, 만화.

  만화라고 해서, 내가 나쁜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니다. 조광화가 극에서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이 내가 극에서 보고 싶어 하는 것과 다를 뿐이다. 작가는 무대에서 자신만의 스타일, 즉 조광화 표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그게 하필이면 나하고 코드가 맞지 않아 내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폭력과 섹스와 벗기기가 만발한 작품이 되었을 뿐이지, 진짜 무대는 연일 만석을 기록했을 지도 모른다. 그만큼 독특하게 대중적이란 말도 된다. 다만 나는 당신한테 권할 생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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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3-12-14 15: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친키스> 연극 예매했다가 내용이 힘들 것 같아 취소한 기억이 있어요. 조광화 작품은 <젊은 베르테의 슬픔>만 본 것 같은데... <모래시계>도 조광화 였던가... 점점 시대에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

Falstaff 2023-12-14 18:26   좋아요 1 | URL
아휴.... 이 양반은 잘 모르겠어요. 하여간 저하고는 정말 맞지 않는 극작가입니다.
꽤 유명한 양반 같더라고요. 희곡 전문 출판사 지만지드라마에서는 단행본이 많이 나옵니다.
뭔 얘기를 하고 있는 지는 알 거 같은데..... 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