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테코어 민음사 모던 클래식 59
요나스 하센 케미리 지음, 홍재웅 옮김 / 민음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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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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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요나스 하센 케미리는 1978년 12월 27일에 스톡홀름에서 튀니지 출신 아버지와 스웨덴 어머니에서 태어났다. 2003년에 영어제목 <One Eye Red>로 데뷔한 이래 올해까지 여덟 편의 장편과 일곱 편의 희곡을 발표했다. 이외에도 다수의 에세이와 단편소설도 목록에 있다. 독후감 쓰는 입장에서는 매우 바람직하게, 젊은 세대 답게 바이오그라피 찾기 힘들다.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되어 있는 이이의 작품은 모두 민음사 모던 클래식 시리즈 59번 이 작품하고, 72번 <나는 형제들에게 전화를 거네> 두 권이 있다. 모던 클래식 시리즈에서 드물게 두 권 다 팔고 있다. 아직 품절이나 절판이 아닌 것을 보니 그렇게 인기가 있었던 건 아닌 모양이다. 광고를 덜 했거나.


  프랑스 통치하의 알제리에 모우사라는 이름의 친불파親佛派가 있었는데, 이 양반이 천하의 카사노바였다. 20세기 중반에 여러나라에서 국제적인 생활을 하며 염문도 국제적으로 뿌렸던 건 물론이거니와 호화롭고 비싼 잠옷을 입고 잠을 자는 극히 드문 알제리인이었다고 주장한다. 당시에도 물부족 국가였던 알제리에서 약품을 써서 물을 정화하는 직업으로 현금을 갈퀴로 긁을 수준이었으며, 넘치는 자금으로 사탕공장과 주크박스 가게에 투자도 했다. 모우사 씨는 모나코에서 열린 교향악 콘서트에서 만난 여성을 만나 아들 압바스를 생산하였으나 미국 마이애미비치의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모델 출신 정실 부인과 살았다. 즉 압바스가 모우사 선생의 사생아이자 혼외자라는 것. 이외에도 알제리인 모우사 씨가 워낙 국제적인 사람으로 압바스가 주머니에 아버지의 사진을 넣고 다니는 걸 보면, 가운데 모우사 선생이 있고 왼쪽으론 폴 뉴먼이, 오른쪽엔 엘비스 프레슬리가 서 있는 거였다. 꼬마 압바스는 그렇게 구라를 치고 다녔으며, 함께 튀니지 젠두바 시의 고아원에 입소한 원생들은 압바스의 입에서 나오는 건 숨소리 빼고 전부 거짓말이란 걸 뻔히 알면서도 얼마나 맛있고 진지하고 실감나게 이야기를 하는지 한 번이라도 더 들어볼 생각으로 모른 척, 그런 척, 믿는 척을 해주었다는 거 아닌가.

  나중에 압바스가 자신의 평생 절친한 친구가 되는 고아원생 카디르에게 실토한 바에 의하면 사실은 아버지 옆에서 사진을 찍은 사람이 폴 뉴먼과 엘비스 프레슬리가 아니라 알제리의 프랑스 총독을 지낸 모리스 샬과 폴 들루브리에였단다. 아버지의 실체는 ‘아르키’라 불리는 적국의 협력자인데 튀니지 접경지역의 산마을에 갔다가 하이파 아가씨를 만나 압바스를 임신하게 하고 결혼도 약속했지만 끝내 사기극으로 끝나고 하이파 아가씨마저 가족들에게 버림을 받았다. 그래도 산 사람을 어찌 죽이랴. 어떻게 해서라도 압바스를 낳고 키우던 하이파는 여전히 모우사 씨처럼 프랑스를 찬양했다. 하지만 1962년에 에비앙 협정 이후 알제리의 국내 권력투쟁이 일어나 국민 1만5천 명을 죽이고 민족해방전선이 정권을 장악한다. 워낙 많은 인재를 도륙내는 바람에 실제로 일을 시킬 사람이 없어 친불파 대부분을 그대로 요직에 꽂아 놓았지만 소위 시범 케이스 몇 명은 처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모우사씨가 걸려들어 기어이 해외 망명을 할 수밖에 없었고, 어머니 하이파는 여전히 친 프랑스 발언을 서슴지 않는지라 동네 사람들은 밤마다 하이파 네 집 앞에서 성토대회를 하다가 급기야 불을 싸질러 집도 홀랑 타버리고, 엄마도 목숨을 잃어버렸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아무도 혼자 남은 압바스를 돌보지 않았고 유일하게 가난한 이웃 농부 라시드 씨가 압바스를 데리고 젠두바 시로 가서 고아원에 집어넣었다는 것.

  근데 이건 믿어도 되는 거야? 일단 믿고 계속 읽어보자. 프랑스 폭격기의 폭격을 맞아 동네가 쑥대밭이 되고 엄마도 죽어 민족해방 유공자 자녀 자격이라고 고아원 입소 서류에 쓰어 있지만서도.


  1969년에 군복무를 마친 압바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잘 해서 고아원 원장 셰리파 어머니는 튀니스에서 법률을 공부할 수 있게 지원을 해주었으나 불과 1년 후에 정치적 이유 때문에 주머니가 탈탈 털려 다시 젠두바로 돌아왔다. 이때 그리스의 사진작가 파파나스타소포울로우 크리스토발란티, 라는 길고 긴 이름의 사진 예술가가 젠두바에 등장해 압바스를 모델로 기용한다. 하루는 이름 복잡한 사진 예술가가 압바스의 포즈를 고쳐주느라 손을 바지 지퍼에 대고 조금 끄르려는 동작을 취했고, 압바스는 불결한 행위를 하려는 것으로 오해해 가타부타 않고 두드려 패고 도망쳤는데, 이때 함께 스튜디오에 갔었던 절친 카디르의 손에는 위대한 사진작가 필립 할스만의 사진첩이 들려 있었던 거였다. 압바스는 할스만의 사진집에 집중하더니, 드디어 자신의 삶의 과제를 발견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튀니지 출신의 사진작가가 되는 것. 이를 위하여 압바스와 카디르는 1972년에 튀니지의 타바르카로 이주한다. 카디르도? 그럼. 그의 야망은 자기 손으로 호텔을 하나 지어 경영하는 거였으니까.

  아직 유럽 관광객이 쏟아져 들어오기 전의 해변도시 타바르카에서 압바스는 사진관 보조 일자리로 들어가 중원의 숨은 사진 고수 아크라프 선생에게 인화기술의 기초부터 차근차근 익히기 시작하고 카디르는 호텔에서 접시를 닦으며 빈 시간에 포커 게임을 해 돈을 모으기 시작한다. 당시의 아랍은 유럽인들에게 도발이나 바이러스, 투쟁, 테러를 연상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선하고 피해 입은 민족으로 인식되어 이들은 가끔 밤이면 유럽 관광객들과 어울려 해변파티나 대마초, 디스코 난장판 등 젊은 시절을 만끽할 수 있었다. 압바스도 잘 생겼으나 카디르가 미남이었거든. 가을이 되자 압바스는 드디어 첫 카메라로 금속재질의 소형 코닥 인스터매틱을 구입해 타바르카에 관한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고, 자신을 사진 예술가로 소개하기 시작한다. 머리통엔 중고시장에서 산 검은 베레모를 쓰고 다니면서.

  근데 압바스가 하필이면 타바르카의 댜큐멘터리 사진에 국한하느냐고? 압바스가 이래봬도 어릴 적부터 똑똑해서 대학물도 먹어봤다. 해외를 뜨지 않는 이유는 딱 한 가지. 언어였다. 해당 국가의 언어에 유창하지 않으면 성공하기가 결코 수월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압바스는 식민모국이었던 프랑스 말은 원래 잘 하고, 타바르카에서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러시아어를 독학해 차근차근 대단한 수준에 오른다. 언어야말로 다른 사람들의 영혼이 살고 있는, 또는 휴식하고 있는 곳으로 들어가기 위해 잠긴 문을 여는 마스터키라는 걸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서.

  이렇게 살기를 4년. 드디어 운명 같은 1976년 늦여름이 오고, 뮌헨 올림픽의 검은 9월단을 필두로 테러 단체들은 세상을 공포로 몰아넣었건만 압바스는 타바르카 해변에서 스웨덴 출신의 스튜어디스를 만나 생전 처음으로 진정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페르닐라 베리만. 베리만. 산에서 온 사람이란 뜻. 자기 이름 압바스 케미리 할 때의 케미리도 크루미리에 있는 산에서 온 사람이란 뜻. 암만 생각해도 천생연분이다. 하지만 절친 카디르가 보기엔 매력 없는 화장에다가 있는 듯 없는 듯한 가슴, 눈에 거슬리는 들창코, 연약하고 가늘며 기다랗기만 한 체구와 무려 180츠를 넘어 압바스보다도 많이 큰 키까지, 그것 참 이해가 가지 않는 상대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압바스는 진정으로 사랑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더니 이제부터 비행기 여행, 이주, 사랑, 결혼, 갈등, 어쩌지 못하는 세 명의 혼혈아들, 끝없는 오해,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손쓸 수 없는 비극적인 침묵 같은 진퇴양난이 시작하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죽으나 사나 나의 페르닐라, 꿈에도 소원은 페르닐라, 염불을 하고 다니는 걸 보니. 이때부터 압바스의 생활은 사진현상실과 페르닐라와의 서신연락 말고는 없었으며, 지역신문에 자기 사진을 제공하기 시작해 이름을 알려 고관대작 집안의 결혼식, 고급 미용실의 미용 전후 사진을 찍는 사진사 같은 것으로 쉼없이 고용되면서 경력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스웨덴에서 초청장이 오는 즉시 압바스는 절친 카디르가 포커 게임을 해서 따고 열심히 접시를 닦아 번 돈을 몽땅 빌려 스웨덴으로 날아가더니, 이제야 작가 요나스 하센 케미리가 하고 싶었던 스웨덴 내의 이민자들의 소외나 차별 같은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문제는 스웨덴에서의 이야기를 진행하자마자 작품이 급격하게 지루해진다는 거. 진짜 여기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이후엔 한 얘기 또 하고, 했던 얘기 한 번 더 한다. 당시엔 흥미 만점이었을 지 모르지만 이젠 하도 많이 들어 속도감있게 진행하지 않는 이런 류의 이야기는 저자는 물론이고 역자한테도 미안한 말씀이지만 읽어 내기가 쉽지 않았다. 스칸디나비아 반도 내에서의 네오 나치즘에 관심있는 분들은 읽어 보시면 좋겠다. 북아프리카의 독립에 관심있는 분들은 이 작품 말고도 뒤져보면 쌔고 쌨으니 한 번 더 잘 찾아보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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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 바라보며
줄리안 반즈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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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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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이면 소설, 음악이면 음악, 미술이면 미술, 심지어 음식이면 음식까지 사통팔달 도무지 막히는 데 없이 무제한의 오지랖적 박학다식을 과시하는 키 큰 지식인 줄리언 반스가, 이번엔 몇 달만 있으면 백 세가 되는 잉글랜드 유대인 진 서전트 Jean Serjeant 할머니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식료품 가게 주인의 딸로 1922년에 태어난 진은 순진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 하는 이야기는 주저없이 내용 그대로를 흡수하고, 세상에 많은 질문거리를 가지고 있지만 남들은 어리석은 질문으로 여긴다는 걸 조금씩 알게 되면서 성장하는 소녀였다. 아무리 백 년 전이라도 변변한 학교교육도 받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전통적인 유대교육을 받은 것도 아닌, 당시의 안정된 보통 집의 보통 소녀로 자랐다.

  진의 인생에는 대강 네 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첫 번째가 레슬리 아저씨. 삼촌인지 당숙인지 정도의 친척으로 콧수염을 길렀던 사랑스런 악당이라고 기억한다. 그를 “오징어 먹물 같은 품행”이라고 지칭하는데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 작품에선 진의 앞을 못 보게 하고 그 틈을 타 자신은 내 빼는 품행이라는 뜻? 아직도 모르겠다. 진이 일곱 살 때 크리스마스 선물로 레슬리 아저씨는 히아신스 구근을 신문지에 싸서 선물로 주며 빛이 들어가면 싹이 나지 않을 터이니 절대 들여다보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서 아주 조금 포장을 열고 한쪽 눈으로 구근을 보여주었는데 정말 작게 싹이 나고 있었다. 일곱 살 소녀가 다음 늦봄까지 댓 달 동안 눈에 번히 보이는 신문지 뭉치 속 싹이 돋고 있는 히아신스를 몰래 들여다보지 않을 수 있겠느냐 말이지. 진은 당연히 전지불을 들고 수시로 종이 뭉치를 열어 빛을 비쳐보았지만 싹은 여전히 크리스마스 때 처음 본 딱 그 모습대로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있는 거였다. 봄이 돼도 마찬가지. 그래서 신문지 뭉치를 펼쳐 보았더니 히아신스 구근은 없고, 여태 싹이라고 알고 있던 건 흰색의 플라스틱 골프 티일 뿐이었다.

  그래도 진은 멋있고 귀여운 악당 레슬리와 “녹색의 천국”이라 불렀던 골프장에 가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그가 부리는 마술도 보았으며, 푸는데 앞으로 9십년 이상을 들여야 할 수수께끼도 생긴다. 이런 수수께끼들:

  ① 영국에 사는 유대인들은 왜 골프를 좋아하지 않지?

  ② 무솔리니는 종이가 어느 방향으로 접힐지 어떻게 알았을까?

  ③ 천국이 진짜 굴뚝 위에 있을까?

  ④ 어째서 밍크는 유별나게 생명력이 강할까?

  그리고 훗날 영국공군에 의하여 목록에 보태질 다른 하나의 수수께끼

  ⑤ 찰스 린드버그가 대서양 횡단 비행을 할 때 다섯 개의 샌드위치를 가지고 가서 한 개 반을 먹고 나머지는 아직도 샌드위치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을 거 같은데 그런 박물관이 정말로 있고, 거기에 가면 린드버그가 먹고 남긴 샌드위치를 볼 수 있을까?

  담배를 피우면서 필터 끝까지 하얀 재만 남길 동안 재가 담배에서 떨어지지 않게 피우는 묘기의 비밀은 먼 훗날 레슬리 아저씨의 영면의 침상에서 역시 노년에 접어든 질에게 가르쳐준다. 담배에 바늘 하나를 꽂으면 재가 떨어지지 않는단다. 그럼에도 보는 사람이 더 믿을 수 있도록 적절하게 연기를 해주어야 하지. 2차 세계대전이 날 것 같으니까 미국으로 가 징집당하지 않았으며,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떳떳하지 못한, 그렇다고 사기치는 건 아닌 사업을 하다가 목소리가 큰 여성 주인이 운영하는 하숙집에서 생을 마감하는 독신자. 혼자 몸이면서도 하나밖에 없는 조카 진에게 한 푼도 남겨주지 못한 말만 그럴듯한 허풍선이.


  두 번째 남자는 책을 열자마자, 1941년 6월의 어둡고 조용한 밤에 프랑스 북부 상공에 침투하여 전투비행을 하고 있던 영국공군 조종사 토머스 프로서. 독일 폭격기와의 전투 없이 회항을 하다가 수평선 너머에서 태양이 솟는 광경, 장엄함에 넋을 놓고 있던 청년. 그러다가 바다에 함정 한 척이 운항하는 것을 발견, 급강하해 수색을 해보니 상선이어서 다시 고도를 높아는 동안 또다시 나타난 황금색 태양. 그는 이날 생전 처음 두 번의 일출을 보게 됐고, 이 화려하고 장엄하며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일출을 결코 잊지 못한다. 작품의 제목 <태양을 바라보며>도 이 장면에서 따온 듯.

  전쟁중인 시절, 영국 정부는 서전트 씨 댁에 전보를 통해 “군인숙사제공명령서”를 보낸다. 군인 한 명을 다음 명령이 있을 때까지 재워주고 먹여주라는 명령이다. 이때 집에 들어온 사람이 토미 프로서. 영국공군 제복을 입은 조그맣고 호리호리한 사람. 훗날 다시 비행명령에 의하여 출격했다가 행방불명, 사망한 것으로 짐작된다는 의견을 받게 되는 사람. 그는 비행중 적과 교전하지 않는 상태에서 이상 비행이 관측되어 비행부적격에 이은 비행금지 판정을 받아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토미는 자신이 본 가장 아름다운 것을 진에게 이야기해주었으니 그것이 바로 1941년 6월 새벽에 있었던 일출의 태양.

  전쟁과 비행중 추락에 대한 공포 때문인지 인생을 돌아보게 된 토미는 얼마 후, 진과 세번째 남자 마이클이 데이트를 시작하고, 결혼을 생각하는 단계에 이르자 조언을 해주기를, 한 번 불에 데어봐야 해. 그래야 두 번 데지 않도록 노력하게 되거든. 토미와 진은 비겁과 용기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용감한 것은 늘 달라지는 법이라고. 겁에 질려 있으면서도 겁에 질린 그것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용기라며.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몇 달 전에 읽은 커트 보니것의 단편소설 <신문배달 소년의 명예>가 떠올랐다. 어려서부터 자신을 괴롭히던 악당과 지독하게 무서움을 타는 커다란 덩치의 사나운 개가 달려들며 짖어대는 대도 아들을 대신해 자전거를 타고 하루도 빠짐없이 신문을 배달해주던 아버지는 결코 비겁한 사람이 아니라 용기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내용. 토미 프로서가 이런 의미에서 용기가 있던 조종사였는지는 끝내 모르지만 그는 대서양 한 복판에서 사라지고 만다.

  전시 등화관제 업무를 맡은 경찰관 마이클 커티스. 첫 방문과 두 번째 방문은 등화관제를 핑계로, 세번째는 지나가는 길이라고 둘러대며 진과 연애를 시작한다. 스무 살이 된 진은 나이만 그렇다는 것이지 남녀가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하면 서로가 서로를 만지고 싶게 되는지, 키스를 하고 싶게 되는지, 더 나가서 어떻게 성적 결합을 하게 되는지 도무지 이해가 없는 숙맥이었다. 오죽했으면 옆집에 사는 바레트 부인이 이제 자신은 더 이상 볼 일이 없을 것 같다면서 “젊은 부부를 위한 조언집”이란 책을 주었을 정도다. 이 책에는 부부생활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이 당연히 1930년대 양식에 입각해 가능한 한 가장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가사, 요리, 빨래, 옷 짓는 법은 물론이고 침대에서의 과정과 기교까지. 진은 다른 모든 처녀들과 마찬가지로 특히 성생활에 깊은 관심을 갖고 탐독을 했지만 하는 이야기들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순진 또는 멍청했고, 심지어 웃음만 나고 설렘 같은 건 1도 없었으며, 수치로 설명하고 있는 남성의 생식기의 길이에 경악을 할 뿐이었다. 당연히 마이크도 진과 데이트를 하면서 손을 맞잡는 거 말고는 여간해 진도를 뺄 수 없었다. 몸을 만져보기는커녕 키스 한 번도 제대로 못했지만 결코 성급해하지 않는 마이크. 청혼을 하고 승낙을 받은 후, 마이크는 진의 처녀성에 관해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런던의 여의사 닥터 헤들리에게 보내 여성에게 필요한 검사를 시킨다. 검사는 무슨 검사. 섹스할 때 여성의 몸에 삽입하는 고무 재질의 피임기구를 사용법을 배우게 하려는 거다. 의사는 아직 어떤 물질도 왕래한 적 없는 진의 몸을 질경을 삽입해 조사한 후 페서리의 사용에 적당한 구조라고 단정한다. 이후 삽입 연습과정은 생략.

  마이크는 뭐 그냥 잡놈이다. 아니면 40년대 보통 남자들이 다 그랬든지. 이때도 콘돔은 널리 알려졌음에도 비싸고, 사용할 때마다 아프고, 간혹 출혈도 나는 페서리를 아내한테 사용하라고 하는 건, 지금과 비교해 무지하게 두꺼워 성감을 제대로 느끼기 힘든 콘돔을 사용하기 싫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잘 하기나 하면. 진은 마이크와 지지고 볶으면서 20년의 세월을 산다. 그리고 어처구니없이 20년 만에 임신을 한다. 자기 몸에 네번째 남자 그레고리가 든 순간, 이제 절대로 마이크와 함께 살지 못하겠음을, 자기 힘으로 자신과 자신의 아이가 설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결심하면서 임신 일곱달일 때 서류작업 없이 집을 나온다. 출산을 하고 그레고리를 혼자 키우면서 힘든 세월을 보낸다. 마이크 역시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살다가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하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진에게 유증해, 이제 나이든 진은 자기가 만든 세계 7대 불가사의와 그랜드 캐니언을 찾아다닌다.

  또 세월이 흘러, 백 살을 몇 달 앞둔 시점에, 진은 쉰아홉 살이 된 독신 그레고리와 함께 두 번의 태양을 바라보며 작품은 막을 내린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하지 않은 한 세월도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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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 블루스 창비시선 149
신현림 지음 / 창비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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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현림의 시는 SNS 여기저기서 볼 기회가 많아 시집을 읽은 줄 알았다. 근데 아니었다. 이런 시인이 꽤 있다. 소설은 이런 경우 없는데 시는 짧아서 그런지 검색만 하면 시 전편을 통째로 읽을 수 있다. 물론 SNS에 아무 생각없이 시 전문을 올리는 일은 매우 조심할 일이다. 시인들이 마음이 좋아서 그렇지 분명히 그이들의 지적 재산권을 침해하는 행위다. 나도 통째로 올리는 편으로 그럴 때마다 한 구석에선 찜찜한 마음을 숨길 수 없다. 그나마 시인이 사용한 띄어쓰기, 구두점과 기호, 철자법, 단어 같은 것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옮기려고 애쓰는 편이다. 근데, 신현림한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동안 건성으로 노작勞作을 읽었는지 여태 남자인 줄 알았지 뭐야.

  이 시집의 표지 하단을 보면 “창비”가 아니라 “창작과비평사”에서 1996년에 초판을 찍은 책이다. 그러면 시는 1994년에 나온 시인의 첫 시집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 이후인 1994~96년까지 쓴 시 위주로 실었을 것이다. 간혹 하여간 마음에 차지 않아 첫 시집에 싣지 않은 습작시대와 데뷔시대의 작품도 몇 편은 있었을 것이다. 아니겠지만 예를 들어 이런 시.



  슬픔의 독을 품고 가라



  빈민가 담벼락 같은 가슴을 뚫고 겨울이 온다

  슬픔은 미친 종처럼 울고 슬픔은 끝없이 날으는 연

  저 환장한 연을 잡았으면

  내가 너 대신 아팠으면 너를 안고 날으는 갈매기였으면

  아우야, 추운 너를 안고 어머니가 금강산을 날으셨구나

  애인아, 그리운 너를 안고 나는 바닷속을 달렸더구나


  마음으로라도 날고 뛰지 않으면 살 수 없던 날들

  열린 차창처럼 비명을 지르고 싶던 날들

  불탄 아현동 사람들이 무덤으로 던져진 어제

  저녁이 오기도 전에 식탁의 빵들은 부패했다

  장송곡보다 무거운 원피스를 입고 너는 꿈 속 강변을 헤매고

  버림받은 자들이 부르는 유행가가 싸락눈으로 날린다


  의지대로 되는 일이 없다

  우리는 토실토실한 쓰레기나 불리며 살고

  작별의 꽃을 던지며 사나니

  술잔은 자꾸 죽음을 향해 기울어지더라


  기나긴 밤마다

  아무 위로 없이 남겨진 나의 너여

  더이상 탄식의 나팔을 불지 마라

  현세가 지옥인 때는 슬픔의 독을 품고 가라

  무자비한 세상, 지옥의 슬픔을 월경하기 위하여   (전문)



  이 시를 이 시집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창비시선’ 149번의 첫번째 시로는 어울린다. 근데 내가 읽었던 포스트 모더니스트 신현림하고는 시풍이 좀 다르다. 이 시는 1994년 겨울에 있었던 아현동 가스 폭발 사건 다음 날 쓴 거 같다. 워낙 큰 폭발이었고, 내가 살던 지방도시에서도 하필이면 비슷한 시기에 LPG 가스 저장소 폭발 사건이 있어서 기억하고 있었다. 첫 연에 난데없이 어머니가 금강산으로 “날으셨구나” 해서 잠시 헷갈렸다. 시인의 어머니가 평안북도 분이라 금강산이 툭, 튀어나왔나 싶었다. 난데없기는 난데없다. 그래 처음엔 통일을 염원하는 시인가보다, 생각하기도 했다. 시가 어렵지 않다. 그래도 시인한테 하나만 묻고 싶다. 마지막 행에 “지옥의 슬픔을 월경하기 위하여”에서 “월경”을 한자어로 쓰면 月經인가, 越境인가? 月經이라면 지옥의 슬픔을 탄생시키지 않기 위하여, 슬픔을 몸 밖으로 쏟아내기 위하여, 라는 뜻일 터이고, 越境이라면 지옥의 슬픔의 경계를 넘어가기 위하여,라는 뜻일 터이기 때문이다. 좋다. 내가 시인이면 이렇게 답하겠다. 독자가 알아서 생각하라고. 그렇지? 어떤 의미가 됐든 죽은 자의 명복을 비는 거 같긴 하지만 궁금한 건 궁금한 거니까. 나는 경계를 넘는다는 越境에 한 표, 만원 건다.


  참혹한 시들이 많다. 물론 이 시집을 냈을 때 신현림은 겨우 35세. 그러나 본인은 세상을 다 살아서 세상을 다 아는 것 같을 때. 그리하여 고통스럽고, 그의 말대로 실제로 눈물도 많았고, 정처 없고, 고독하고, 사랑으로 갈증하고, 심지어 신경정신과 신세도 지고 그랬던 모양이다. 이후 세월은 능률능률 흘러서 어느덧 27년이 흘러 시인은 62세가 됐다. 자기가 젊은 시절에 쓴 시를 읽는 나이든 시인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이 시를 읽어보자.



  비 오는 밤



  나는 구정물이오


  발버둥칠 수도 없이 도무지

  알 수도 없이 뒤퉁대며 어른이 되었소

  밤마다 비 오는 방에선

  책과 이불과 외투가 흐느끼오

  모든 흐느낌은 욕된 기억의 하혈을 하고

  조금씩 미치게 숨막히게 하오


  사랑의 벽은 일렁이오 벽 속에 하얀 여인들이

  유령처럼 뜨거운 춤을 추고 뜨거운 병을 흘리오

  나약한 에고이스트의 병

  정서불안 욕구불만인 자의 습관된 병

  신경쇠약 강박편집 허기 우울


  온갖 정신병증후군은 비 오는 방에서 출산되오

  조심하오 이 방면에 나는 전과자 통달한 전문가

  당신도 중독되기 전에 깨어 있으오 여우 있으오

  고통의 정열로 사막을 밀쳐내는 태양숲과

  푸른 말을 찾으오 어쨌든,   (전문)



  시인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청춘시절을 보냈을까? <나의 이십대>에서 말하기를, “나는 의지박약증 환자였고 지지리도 못난 울보였다 / 나와 식구들은 야당정치가 아버지 운명의 새끼줄에 끌려 다닌 / 궤짝 안의 고달픈 사과였다”고 하면서 자신의 청춘시절을 고백한다.

  만 19세였던 1980년 재수. 삼수, 사수. 그동안 아버지는 국회의원 낙선하고 신현림은 인터넷 책방 “응24”의 작가정보에 의하면 모 미대 디자인과에서 수학하고, 4수만에(3수 이후엔 퉁 쳐서 그냥 ‘장수’라고 하는데) 아주대 국문과에 입학한다. 그동안 나름대로 고독하고, 힘들고, 미칠 것 같은 청춘의 병을 앓았겠지. 그래서 입학하자마자 시작해 4년 동안 신경정신과 신세도 지면서 천주교에 귀의하기도 했겠지. 훗날 국회의원을 한 번 하고 마는 아버지는 양 김씨가 주동이 되지만 후보 단일화에 실패해 결국 노태우를 대통령에 당선시킨 민추협 활동을 했고(누군지는 안 알려줌), 연애도 두 번 하고, 시대가 원하니까 아버지와 아들과 딸이 모두 거리에 나가 이한열 죽음에 항의도 한다. 이후 늦깎이지만 대학 졸업하고, 아버지 역시 1988년에 13대 국회의원에 당선을 했다. 시인이 만 29세면 몇 년이야? 1990년. 드디어 『현대시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한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 모르겠지만 같은 해에 대전 엑스포 홍보부에 입사도 한다. 오 시인이여, 고소하지 마시라, 혹시 국회의원 아버지 빽으로 들어간 거 아냐? 그땐 그게 흠도 아니었다. 물론 아니겠지. 믿으면서 살자. 그리고 만 30세, 드디어 독립을 하는데, 어머니가 주신 천만원을 들고 나간 거다(좋았겠다. 부럽다, 씨). 다시 말하거니와, 시인이 겪은 고통과 고독과 사랑의 아픔과 문학적 어려움과 가족과 사람사이의 갈등은 충분히 존중하건만, 시인과 같은 시대를 산 사람 가운데 그리 유별난 건 아니……지 않나? 이미 활자로 찍힌 것은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도 신현림의 시집을 처음 읽으며 위안이 되는 것은, 이이가 시집을 마무리하면서 따듯한 위안이 되는 전망을 갖는 시를 마련했다는 거였다.



  따뜻한 다리를 꿈꾸며



  꽃상여 같은 가슴 뒤흔들고

  오래 함께 있어야 할 사람들이 사라진다

  언제 무엇이 산산조각난 시계가 될지 모른다

  겨울나무만큼 여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해가 기울 때처럼

  발 아래 땅이 허물어지는 기분을 어찌 견뎌야 할지

  삐걱거리는 다리마다 문마다

  저승으로부터 울려오는 오열이 흐른다

  죽음보다 뼈아픈 슬픔을 이기려는 울음소리가


  창밖 강물이 깃발처럼 굽이친다

  사라진 자들이

  희망의 호롱불을 켜라 한다

  사람과 사람이 손을 잡듯

  삶을 이어주고 만나게 하는

  부드러운 다리를 만들라 한다

  따스해서 끊어지지 않는 다리

  헤어져도 헤어지지 않는 다리를


  뭐든 다시 시작돼야 한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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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lgial 2023-12-25 0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랬던 사람인데,
아주 희한하게 바뀌었습니다.
절대 사서 보시지 마시고, 혹 서점이나 도서관에 있거든
21년에 나온 <울컥, 대한민국>을 훑어 보십시오. 태극기 부대가 되어 있습니다. 뭐 지구는 돌고 사람은 더 확확 변하니까 많이 아쉽지도 않습니다.

Falstaff 2023-12-25 08:51   좋아요 1 | URL
전혀 놀라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야당 출신 국회의원이라고 유독 강조했으나 이 시집이 나오기 전에 5공 이후 가장 수구정당이었던 자유민주연합, 김종필의 수하로 들어갑니다. 심지어 5공 핵심이었던 김복동도 뜻을 같이했던 정당입니다.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이이 가족들 역시 입으로만 진보였던 것이지요.
아예 아빠, 집구석 이야기를 하덜 말든지 말입니다. ㅋㅋㅋㅋㅋ

dalgial 2023-12-25 08: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랬군요! 아 그랬었군요

반유행열반인 2023-12-25 1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사는 집 딸래미가 내적 고뇌는 빼애액!!! 하게 되는 개인사 ㅋㅋ그래서 제가 왠만하면 작가 연보는 안 봐요..그래도 시는 몰라도 소설은 좀 읽어보면 어떻게 자랐나 대충 견적 잡힘 ㅋㅋㅋ

Falstaff 2023-12-25 20:06   좋아요 1 | URL
아오, 저도 나이 서른에 엄마가 천만원 줘서 독립했다는 거 읽고 괜히 심술이 빡!
ㅋㅋㅋㅋ 아직도 이런 얘기 들으면 심통난다는 말입지요. ㅋㅋㅋㅋ 저도 인간 되려면 멀었습니다. ㅋㅋㅋㅋㅋㅋ

stella.K 2023-12-26 15: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이 비슷한 이름의 남성 시인이 있었는 말입죠. 그래서 참 헷갈리게 생겼네 했습니다. 팔님도 그분하고 헷갈리는 거 아니셨나요? 아주 오래 전 모처에서 그분 특강을 들었는데 자그만한 분이 강의는 잘한다 싶은데 전 그때나 이때나 시하고는 담을 쌓고 지내니...
이 양반 시집 보낼 돈 받아서 독립하겠다는거 아니없나요? 지금은 그게 너무나 자연스러운데 30년 전만해도ᆢ

Falstaff 2023-12-26 18:21   좋아요 1 | URL
앗, 신경림 선생이요? 아이고, 그 양반은 제가 존경하는 경지까지 오른 분이고, 으, 그런데 정말 그분 때문에 남자로 생각했는지 모르겠네요.
국회의원 따님 시집 보낼 자금이 아무리 1991년이라도 천만 원 밖에 안 된다고요? 한 다섯 배 더 쓰세요. 가능하면 열 배도 좋고요. ㅎㅎㅎㅎ

stella.K 2023-12-26 19:51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그런가요? 30년전 천만원이면
혼자 살 집 전세거리쯤은 되는 줄 알고 있는데...ㅋㅋㅋ

맞아요. 신경림. 전 꼭 헷갈리더라구요.^^
 
꿈 연극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지음, 조성관.홍재범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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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구한 출생부터 유년시절을 겪은 한 생애가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래도 당시 많고 많은 빈민들하고 비교하면 부잣집 서자라 웁살라 대학물까지 먹었으니 그만하면 됐다 싶기도 한 (극)작가. 스트린드베리, 하면 단연 희곡에서 두각을 나타내지만 나는 연금술과 악마주의가 물씬 담겨있는 짧은 세기말 작품 <지옥>을 읽었다. 지금은 <지옥>을 그냥 세기말적 작품이라고만 기억하는데, 그때 쓴 독후감을 읽어보니까 “연금술과 악마주의에서 기어이 탈출을 모색”한다고 썼다. 왜 이렇게 생각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다시 읽어볼 생각은 없다.


  <꿈 연극>에 관해서는 독후감을 길게 쓰고 싶은 생각이 없다. 나하고는 맞지 않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전문가가 들으면 코웃음을 치겠지만 하여튼 나는 읽으면서 단테 알리기에리를 떠올렸다. 읽는 내내. 진지하지 못한 독자인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작가 목록 가운데 단테가 있다는 건 뭐 아시는 분은 아실 터.

  단테가 베르길리우스나 베아트리체의 안내를 받아 저 세상 구경한 걸 적었듯이,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가 쓴 <꿈 연극>의 주인공(격인) 딸, 실제로는 우주 최고의 신 안드라의 딸 아그네스가 지구의 각양각층 사람들의 안내를 받으면서 구경도 하고, 변호사와는 실제로 결혼해 아이까지 낳아 키우면서 느끼고 알게 된 것을 쓴 작품이다.

  당연히 하나 또는 몇 개의 사건에 초점을 맞춰 스토리를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제목처럼 그냥 꿈 속을 거니듯이 단편斷片을 나열한 것처럼 받아들였다. 당연히 전문가는 작품 속에 들어 있(다)는 극예술의 획기적 전환 같은 것을 알아채고 감탄을 할 수 있겠지만 어쩌랴, 내가 그런 거 흉내 냈다간 가랑이가 산산이 찢어질 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하여튼 그렇다. 주제는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어야 한다.”는 것만 슬쩍 흘리고 오늘의 짧은 독후감은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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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12-22 06: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신현림, 《세기말 블루스》
화요일. 줄리언 반스, <태양을 바라보며>
수요일. 요나스 하센 케미리, <몬테코어>
목요일. 압둘라자크 구르나, <배반>
금요일. 산도르 마라이, <사랑>
 
무서운 아이들 서문문고 124
장 콕토 지음 / 서문당 / 198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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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부터 장 콕토는 안 읽기로 했었다. 그러다가 도서관에서 그가 쓴 희곡 <지옥의 기계>를 빌려 읽고 난 후, 그간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었구나, 깨닫고 구입한 책이 콕토의 소설 대표작 <무서운 아이들>이다. 나도 소싯적에 Enfants Terribles, 하면 괜히 멋있는 거 같으면서, 폼도 좀 나고 그랬던 적이 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누구나 다 그런 시절을 겪고 사는 거다. 쪽팔려 하지 말자. 우리나라에서 흔히 말하는 앙팡 테리블 역시 이 작품의 제목에서 시작한 거다. 

  1889년생인 장 콕토는 아홉 살 때 아버지가 자살해버렸으나 집안이 워낙 유복하여 좋은 교육받고 잘 성장했다. 아무리 똑똑해도 자기가 하기 싫으면 안 하는 게 정상이라서 콕토는 바칼로레아에 연속 세 번 미역국을 마시는 바람에 자의반타의반 대학 진학을 포기, 하고 싶었던 글쓰기에 매진한다. 서른 살 때 <육체의 악마>를 쓴 레몽 라디게와 연애를 시작하지만 4년 후인 1923년 라디게의 죽음으로 허탈상태에 빠진 콕토는 아편에 탐닉한다. 몇 년 간 모르핀 의존상태로 살다가 대오각성,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작업에 집중하고자 오진 마음을 먹고 불과 17일만에 작품 하나를 썼으니 오늘 소개하는 <무서운 아이들>이다. ‘무서운 아이들’이라고 하면 심하게 말썽을 부리거나 조숙한 청소년을 일컫는다. 작품에서는 주인공 폴과 제라르, 그리고 중요한 조연인 다르즐로가 열네 살, 콕토의 의견을 그래도 옮기면 “무서운 개고기들”이었을 때 시작해서 제라르가 장가들고 얼마 안 되어 끝나니까 하이틴 시절을 그렸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1920년대엔 결혼을 빨리 했고, 제라르는 하나 있는 삼촌이 오늘 낼 하는 바람에 숨 넘어가기 전에 후딱 결혼을 해치워버렸으니까.


  전에 장 콕토를 안 읽겠다고 했던 것은 그의 짧은 희곡작품 몇 개, 그것도 원본이 아니라 극화하기 위해 대본화 한 것 몇 편을 읽고 난 후, 아니올시다, 허투루 결론 냈던 거였다. <무서운 아이들>의 역자 고 오현우는 책의 서문 격인 ‘해설’에서 “그의 본령은 어디까지나 시(詩)이며, 항상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한 젊은 넋을 가진 시인이었다. 그는 자기의 시를 여러가지 양식으로 표현하려고 했으므로 그가 손대지 않은 예술 양식이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콕토는 자신의 모든 작품을 소설시, 평론시, 연극시, 영화시, 데상시라고” 했단다. ‘데상시’에서 데상은 dessin, drawing, 소묘를 말하는 것으로 콕토가 전문가는 아니었을지언정 아마추어로는 상당한 수준의 대상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렸다….는데 나 같으면 명함에서 이 항목은 지우고 살겠네.

  희곡에서 대사를 시, 즉 운문이나 운문의 기분이 들게 쓰는 것은 하루, 이틀, 한두 번 보는 게 아니지만 ‘소설시’라면 그거 참, <예브게니 오네긴>, <휘페리온>, <푸른 꽃> 같은 걸 읽어봤지만 하나 같이 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래서 해설을 읽는 동안 <무서운 아이들> 이후에 또다시 콕토하고 멀어지는 건 아닌지 조금 걱정하기도 했다. 그래도 역자가 우리말에 맞게 의도적으로 작가의 시적 표현을 산문으로 바꾸었는지 오히려 콕토의 제 맛을 알려면 소설을 읽어보는 게 좋지 않겠느냐, 하는 엉뚱한 생각까지 들었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이 책의 초판 발행일이 1974년 7월 5일. 역자 고 오현우가 51세 때였다. 이후 개정판이 나온 것이 2000년이고, 우리나라 관습상 특히 번역서의 경우 개정판은 책값 올리기 위해 편의상 판을 내는 것이므로 이 책에서도 우리말의 단어 선택이나 표현법이 나 중학교 다닐 때하고 거의 비슷해서, 좋았을 거 같지? 그렇지는 않고 어느새 낯설기까지 했다. 역자가 1923년생으로 2009년에 향년 86세로 세상 하직했다. 비록 이 책의 인터넷 구입가가 4천5백원밖에 안 하지만, 웬만하면 두 배의 책갑(이래봤자 판매가 9천원)을 내고 창비세계문학전집 48번 <앙팡 떼리블>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렇다고 지금 이 책과 번역이 나쁘다는 뜻은 1도 없다. “콕토의 제 맛을 알려면 소설을 읽어보는” 운운했을 정도로 (프랑스어 원문은 전혀 모르지만 어쨌든) 우리말 문장은 좋다. 다만 우리나라 작품도 그렇지만 특히 번역작품은 세대가 바뀌면 판도 바뀌어야 한다는 전제로 말했을 뿐이다. 예스러운 번역을 견딜 수 있다면 당연히 서문문고 124번인 이 책도 좋은 선택일 것이다. 무엇보다, 한 푼이라도 싸다.

  나는 보기 드문 작품이 서문문고에서 간혹 볼 수 있어 문고를 통째로 검색하다가 사르트르,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와 더불어 눈에 띄어 골랐었다.


  콩도르셰 고급 중학교 옆의 암스테르담 거리 72의 2호, 시테 몽티에에서 작품은 시작한다. 시테cite는 집단주택지를 뜻한다. 그러니까 우리식으로 하자면 몽티에 단지 정도. 시테의 주인공들은 단연 콩도르셰의 2학년 개고기들이었다. 한반도에서도 중2 무서워서 김정은이 남침을 못 한다잖은가. 3학년으로 진급하면 암스테르담 교사校舍를 떠나 고마르텡 거리의 3학년 교사로 옮겨가고, 암스테르담 아이들을 우습게 아는 오만을 떨겠지만 눈이 펄펄 내리는 시테 몽티에의 오후 네시 15분, 그레브 광장을 내려다보는 조금 높은 계단에는 곱슬머리에 상처입은 무르팍, 호주머니 속에 아홉 날 달린 나이프가 든 학교 짱 다르즐로가 내려보는 가운데 대대적으로 눈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장 콕토가 동성애 성향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같은 중2 개고기 가운데 폴이라는 아이가 있어, 다르즐로를 향해 막연하면서도 강렬하고 고칠 길 없는 괴로움과 성sex도 목적도 따르지 않는 순결한 욕망에 차, 언제나 그를 동경해 마지 않았다. 폴도 다르즐로를 위하여 망토를 휘날리며 영웅같이 눈싸움의 한 복판으로 쳐들어갔으나, 아뿔싸, 제대로 싸움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맹렬한 속도로 날아온 큼지막한 눈덩이를 주둥이에 맞아 앞니가 얼얼해지고 입술이 터져 피가 낭자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얼굴 부분에 미세혈관이 워낙 촘촘하게 배열해 있어서 상처의 깊이보다 훨씬 많이 피가 흐르기는 한다. 하지만 문제는 피를 보더니 중2의 제왕인 다르즐로가 흥분을 했나, 갑자기 폴을 향해 돌진, 단단하게 뭉친 주먹 만한 눈덩이를 던져 가슴팍에 퍽, 명중을 시켜, 불쌍한 폴은 그대로 까무러치고 말았다.

  이들 가운데 제라르라는 개고기도 있어서 폴이 다르즐로를 동경하는 바로 그 이유로 폴을 동경했던 터라, 폴을 보살펴주고, 파수를 보아주고, 보호하고 다르즐로의 눈초리에 몸을 태우지 않도록 막아주고자 스스로 노예가 될 정도였다. 제라르는 까무러친 폴과 이 무도한 무리들을 혼자 힘으로는 어쩔 수 없어 냅다 학교로 뛰어가 훈육주임 선생과 수위를 대동해 치열한 눈싸움을 단박에 그만두게 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 5수밖에 없음에도 폴을 택시에 태워 아픈 엄마와 열여섯 살 먹은 누이 엘리자베스가 사는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는 속으론 상냥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못말리는 표독스런 말씨를 거침없이 구사하는 엘리자베스한테 택시비도 받지 못하고 쫓겨나고 만다.

  폴네 집으로 말하자면, 남매가 어렸을 때 아빠가 집안에 있는 거의 모든 현금과 현금대체 가능 자산을 몽땅 싸들고 나가서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엄마보다 조금, 겨우 조금 더 예쁜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 한 3년 정도 간혹 얼굴만 내밀며 살다가 간경화가 생기자 아빠의 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빠를 내버렸으며, 세상에 갈 곳 하나 없는 아빠는 집으로 기어 들어와 엄마 곁에서 죽어버렸고, 덕분에 엄마도 피폐해져 중병을 앓기 시작했다. 남매는 엄마한테 파리한 얼굴을, 아빠로부터는 무절제와 멋과 지독한 변덕을 물려받았으니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근데 이해가 안 가는 건, 부모와 남매의 주치의가 이 가족들을 넘칠 만큼은 아니더라도 재정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는 점. 하여간 엄마는 좀 있다가 죽고, 남매는 엄마 죽기 전부터 둘이서 한 방을 쓰며 아주 방종하게 살고 있다. 오현우 번역에서는 그렇다고 근친상간 코드는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이 텍스트를 거론할 때 많은 이들이 빠뜨리지 않는 포인트가 남매간의 관계이기는 하다. 하여간 그렇다.

  엄마가 죽고 남매와 제라르가 합세해 비슷한 생활을 계속하면서 얼마간 시간이 흘러 엘리자베스가 마네킹 걸로 취직을 한다. 여기서 만난 아가트라는 아가씨도 이들과 합류한다. 그리고 한 명 더.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는 미국계 유대인 미카엘. 엘리자베스와 미카엘은 결혼을 하고, 스포츠카를 몰고 다닌다는 얘기를 읽었을 때부터 딱 들었던 예상과 조금도 어김없이 미카엘은 결혼 며칠만에 크게 교통사고를 내 현장에서 즉사하고, 혼인신고서 한 장 덕분에 엘리자베스는 한 방에 큰 부자가 되어 버린다.

  아무리 무서운 아이들이라도 엄연히 계급이 존재하는 법. 여태까지는 다 그냥 그런 젊은이들끼리 잘 살았지만 한 방에 엘리자베스가 최고, 다음이 폴, 그리고 조금 부자 삼촌을 둔 제라르, 제일 하층 계급은 아가트. 이렇게 구분이 지어진다. 물론 내놓고는 아니고, 제일 높은 계급인 엘리자베스 마음 속에. 유일하게 같은 팀원들을 구별하고 차별할 수 있는 인물이 엘리자베스니까. 다른 말로 하면 이제 조용했던 수면에 퐁당, 파류상이 생긴 것. 이때 또다시 등장한 악령 같은 인물 한 명. 그게 누구인지, 왜 악마 같은 지 등등은 직접 읽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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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3-12-21 08: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독자를 책으로 확 끌어들이게 하는 문장들! 이미 읽어서 다행이다_ 생각했습니다요.

Falstaff 2023-12-21 15:31   좋아요 0 | URL
아, 읽으셨군요. 책의 내용이 우리가 늘 알고 있던 앙팡 테리블과는 다른 것에 좀 놀랐습니다. ㅎㅎ

stella.K 2023-12-21 1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장 콕토 옛날 프랑스 배운 줄 알고 있는데 말입죠.
희곡시, 영화시는 뭔지 모르겠습니다요. 그냥 배우들이 일상어가 아닌 시처럼 대사를 읊조리는 걸까요? 소설시도 그렇고.
암튼 함 읽어보고 싶네요. 친절한 설명과 안내도 감사함다.^^

Falstaff 2023-12-21 15:32   좋아요 1 | URL
ㅎㅎㅎ 영화에 깊이 관여를 했습니다. 워낙 여러 방면의 예술행위에 걸쳐 있다보니까... 출연도 했는지 그건 모르겠네요.
희곡시, 영화시, 소설시... 저도 스텔라 님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크게 기대하지 마시고 그저 싼맛에 읽어보시면 괜찮을 듯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