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일로
나탈리 사로트 지음, 이광호.최성연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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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탈리 사로트는 누보로망 계열의 소설가인줄 알았다가 검색 중에 희곡 작품이 눈에 들어와 얼른 읽어봤다. 뭐 그렇다고 사로트의 소설을 많이 읽어본 것도 아니다. 꼴랑 두 편 읽었다. <황금열매>와 <어린 시절>. 아마 사로트에 관심이 조금 있는 분들 가운데 이 독후감을 읽는 분 역시, 사로트의 희곡이라고? 약간의 의아심과 궁금증과 호기심이 솟는 것을 숨기기 힘들 듯하다. 사로트의 누보로망 작품은 읽기 어렵다. 내용이 난해해서도 아니고 현학적 철학의 철갑옷을 입고 있어서도 아니다. 한 장면을 미분하듯이 세밀하게 쪼개 그걸 낱개로 묘사하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시트르의 바닷가>를 쓴 쥘리앙 그라크가, 특별한 주장도 없으면서 한 물체나 형태를 과하게 세밀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누보로망이 쇠퇴하게 될 것이라고 했듯이, 아니 독자가 저절로 그라크가 한 이야기가 맞는 말이기를 바라게 되는 현상과 비슷한 방법으로, 읽기 어렵다. 하여간 나는 그랬다. 로브그리예보다 더 힘들었다. (며칠 후에 로브그리예를 읽게 될 지는 지금은 전혀 몰랐다. 그때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이 작품은 1985년 5월 말에 뉴욕 연극클럽에 의하여 세계 초연되었다. 사로트가 1900년생. 이때 나이 85세. 프랑스어 공연은 다음해인 1986년에 파리 롱푸앙 극장에서, 우리나라 초연은 2023년 제주도 세이레아트센터에서 극단 사자자리가 공연했다. 등장인물이 남자 1과 남자 2로 되어 있지만 우리나라 공연에선 여자 1과 여자2가 등장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활발한 창작생활을 하다가 1999년, 망백의 나이로 세상을 접기까지 이 러시아 유대인 출신 여성 극작가는 20세기의 온갖 전쟁과 사건과 문명의 발달과 인종의 교류와 사상의 전도를 겪으면서도 전 생애를 걸고 개인의 마음 속 움직임, 동향, 기울어짐, 지향 같은 것을 천착했다. 이이의 소설은 쉽지 않지만 직접 극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시청각을 통해서, 우리나라 공연에서는 부분적으로 관객의 극 참여를 통해 극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관객이 짐작한 것을 분명한 문장으로 설명하기는 곤란했을 수 있겠지만.


  이야기는 간단하다. 극도 단막극이다. 절친한 친구 사이인 남자1과 남자2. 남자1은 결혼해서 아이도 하나 낳고 사회적, 가정적으로 성공적이고 안정적으로 살고 있다. 남자2는 결혼 여부는 나오지 않지만 미혼인 것처럼 보이고 문학에 종사하거나 상당히 관심이 있으며 일반적 시선에 의하면 남자1보다 잘 나가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남자2는 남자1을 예전처럼 가까이 지내려 하지 않는다. 언제나 남자1이 남자2에게 전화를 하고, 만나서 이야기하고, 술도 한 잔 하고,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고 계획을 상의하기도 했는데 남자1 입장에선 영문도 없이 남자2가 전화를 받아도 시큰둥하기 시작했던 거다. 남자2는 전화를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 이런 사람 많잖은가. 그런 인간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남자1은 차츰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감지하고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다. 혹시 남자2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 아니면 오해라도 하고 있는 거 아냐, 이거?

  그래서 남자1은 남자2를 만나 솔직하게 물어본다.

  “너는 내가 이런 얘기하게 될 거라는 거 알고 있었을 거야. 왜냐면 우린 요즘 예전 같지 않아. 아무래도 뭔가 있는 게 느껴져. 그게 뭔지 머리를 쥐어짜고 쥐어짜도 적어도 내 기억 속에는 없거든. 너는 뭔가 변했어. 저번에 전화했을 때 네가 나를 완전 생판 모르는 사람처럼 대해서 나 정말 상처받았어,”

  남자2도 대답한다.

  “나는 안 그랬을 거 같아? 난 여전히 너를 좋아하는데, 넌 내가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란 생각은 안 드니? 아냐, 아냐. 말하고 싶지 않아. 그렇게까지 나쁜 일은 아니야. 관둬.”

  남자1은 남자2가 자기를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것에 상처를 받았다. 반면에 남자2는 자신보다 모든 면에서 성공하고 있는 남자1에게 상처받은 일이 있다고 확신한다. 그런데 자기가 받았다고 하는 상처를 드러내는 일이 그렇게 자랑스럽지도 않고 내세우고 싶지도 않고 심지어 굳이 말로 하기도 싫다. 하지만 이 극은 애초부터 무언극이 아닌 걸.


  “좋아… 음… 사실 전에… 네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데 그게… 그러니까 내가 그때 약간 자랑을 했나, 아니… 그건 잘 모르겠고… 원가 소소하게 해낸 일이 있어서… 아, 물론 되게 웃기는 일이지만 암튼 그런 일이 있었을 때, 네가 이러더라구. ‘대~단하다…’”


  남자2가 비록 사회적 성공은 거두지 못했을지라도 자잘한 성공은 언제나 거둘 수 있어서 아마 자랑 비슷하게 했던 모양이다. 그러자 잘 나가는 남자1이 절친 남자2를 향해, “대단하다, 야!” 감탄을 터뜨려주지 않고 “대~~단하다.”라고 말해서 이걸 들은 남자2는 아무리 생각하고, 궁리하고, 고민하고, 술 석 잔을 마시면서 다시, 생각하고, 궁리하고, 고민해봐도 역시 칭찬이 아니라 비꼬는 것일 뿐이라고 결론을 냈던 거다. 남자1 입장에서 보면 자기가 이룬 작은 성공이야말로 비웃어도 마땅할 사소한 것이라고 아예 마음 속으로 확정했기 때문에.

  남자1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 비슷하게 행동을 하거나 말한 기억도 없거니와, 스스로도 자신이 잘 나가는 걸 알고 있어서 평소에 쓸데없는 구설수에 휩쓸리기 싫어 이 비슷한 말도, 행동도 특별하게 주의하고 있어 그렇게 했을 리가 없다. 틀림없이 자신은 격려나 축하의 의미로 이야기한 것을 쪼잔한 남자2가 그렇게 들은 것이 분명하다. 물론 이렇게 직접 대놓고는 이야기하지 않지만 희곡을 읽거나 극을 관람하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알아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자기 고집을 꺽지 않는 남자1과 남자2. 이들은 드디어 길거리에 서서 여보시오 지나가는 사람들아, 소리쳐 진짜로 지나가는 남자3과 여자1을 불러 세운다.

  우리나라 공연에서는 남자3과 여자1 대신 관객 두 명을 진짜로 무작위로 뽑아 무대에 올려서 남자1, 남자2가 (제주도는 여자 많은 섬이라 젠더를 바꾸어 여자1, 여자2로 공연) 이들에게 누구 말이 맞는가 시비를 가려달라고 부탁하건만, 세상에서 남의 일에 끼어들기 가장 싫어하는 프랑스 사람들이라, 아 몰라, 몰라, 빈말로 넘겨버리고 자리를 뜬다.

  이후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남자1은 또 자기 나름대로 남자2에게 수틀렸던 점을 끄집어낸다. 다섯 명이 등산 갔는데 남자2가 풍경이 근사하다며 얼른 하산해서 뜨끈한 닭백숙에 쐬주 한 잔 걸치고 싶어하는 일행 네 명을 그렇게 추운 날씨에 한참이나 기다리게 했던 일이다. 등산이라고 해도 우리나라 등산을 생각하면 안 된다. 알프스 얼음 능선을 건너는 일이라 다섯 명이 전부 자일로 몸을 연결해 일렬 행진해야 하는 전문가 코스라서 한 명이라도 낙오를 하면 전원이 꼼짝하지 못한다.


  남자1과 남자2, 둘 다 쪼잔하다. 뭐 세상이 다 그런 것이란 주장, 쉬운 얘기로 사소한 것에 목숨 거는 게 사람 사는 일이란 걸 나탈리 사로트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아쉽게도 나는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스타일이 달라 내 경우만 주장하고 싶지 않지만, 나 같으면 벌써, 너 좀 만나자, 해놓고 곧바로 물어볼 거 같다.

  “내 귀엔 ‘대~단하다’ 할 때 발음이 날 우습게 보는 것 같이 들렸는데 맞아? 천만의 말씀, 아니라고? 알았어. 하여간 그렇게 들렸으니까 그건 네 잘못이다. 그러니까 술 사라.”

  이렇게 끝냈을 거 같고, 알프스에서 네 명을 기다리게 만들면서 경치 구경을 하는 남자2한테는

  “염병하지 마시고 얼른 내려가자 4대 1, 다수결이다 새꺄.”

  했을 거 같은데, 참 그걸 여태 가슴 속에 넣고 끙끙 앓는 프랑스 사람들, 짠하다, 짠해.

  내가 읽기에 나탈리 사로트는 읽기가 곤혹스럽지만 그래도 소설이 좋았다…… 정말?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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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 블랑카의 회고록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4
테레사 데 라 파라 지음, 엄지영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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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레사 데 라 파라. 1889~1936. 독일 베를린 주재 베네수엘라 외교관의 딸로 파리에서 태어나 마흔 여섯 살까지 살다가 마드리드에서 죽은 베네수엘라의 대표적 소설가. 1924년 작 <이피게네이아>와 1929년 작 <마마 블랑카의 회고록>을 대표작으로 꼽는다고 한다. 20세기 말까지 세상에서 아름다운 여성이 가장 많이 사는 나라가 베네수엘라라고 했다. 당시에 베네수엘라 지사로 파견을 나간 대학 1년 선배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 이후로는 연락이 끊겨버렸지만. 당연히 지금은 지사도 다 철수해버렸다. 사실상 깡패들이 통치할 만큼 치안이 불안하고 석유 저장량 세계 1위임에도 정작 주요소에 휘발유 구경을 할 수 없는 나라에 지사를 유지할 수 없겠지. 이게 지금의 베네수엘라지만 한 시절엔 세상의 모든 돈이 다 그 나라로 쏠렸던 적이 있다. 미국에서 셰일 석유를 개발한 다음부터 곡소리가 나서 탈이지만.


  이 책은 머리말이 스무 페이지나 된다. 겉으로 주장하는 것은 작가 데 라 파라가 마마 블랑카를 어떻게 알게 됐으며, 그 할매가 어떤 성격이었고 자신과 얼마나 친한 사이였는지, 마마 블랑카가 쓴 회고록을 자신이 넘겨 받은 내력과 아무도 보여주지 말라고 했던 회고록을 출판하게 된 사연 등을 적은 내용이지만, 만원 내기해도 좋다, 이 머리말도 픽션의 일부이다.

  ‘마마 블랑카’의 원래 이름은 놀랍게도 블랑카 니에베스. 우리말로 ‘백설공주’라는 뜻이다. 반대말은 네그라 니에베스. 흑설공주. 아재 개그로 백설공주는 백만명이 설설 기는 공포의 주둥아리를 말한다. 마마 블랑카는 소녀 시절부터 백인임에도 가무잡잡한 피부에 까만 다리, 다리보다 훨씬 새까만 팔뚝을 가지고 있었는데 왜 그런고 하면, 햇빛이 작살인 피에드라 아술 농장에서 사방을 둘러봐도 지평선이 까마득한 벌판 한 가운데 자리한 천연의 자연 속에서 하도 뛰놀아 그렇게 됐었다. 원래 이름은 백설공주이건만 맏손자가 할머니를 마마 블랑카라고 부르는 바람에 그게 굳어져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마마 블랑카라고 하기 시작했다. 사람 자체가 이름처럼 흰 머리카락과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넉넉한 인품을 지녀서 아무 부담 없이 그렇게들 불렀을 터. 내가, 여기서 말하는 ‘나’는 작가 테레사 데 라 파라를 말하는데, 열두 살이 채 되기 전에 마마 블랑카를 처음 만났고 그때 할머니는 일흔 살이었다. 60년의 터울에다 1920년대 말, 증조할머니 뻘이었다. 만난 장소는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처럼 보인다.

  이때는 PC도 없고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라 아이들이란 아이들은 모두 밖에 나가서 놀았다. 물론 ‘모두’는 아니다 극히 소수의 아이들은 집에서 전래동화나 위인전기전집이나 이모가 보다 던진 선데이 서울을 읽었을 테니. 조금 있으면 열두 살이 될 테레사도 동네에서 놀다가 평소엔 눈에 그리 들어오지 않았던 낡고 조용한 집이 있어서 그냥 한 번 들러보고 싶은 마음에 대문을 살짝 밀어봤더니 스르르 열리는 바람에 고개를 빼쭉 들이밀었다. 분수가 약하게 뿜어져 나오는 마당을 지나 열린 창문을 통해 흰 가운을 입은 할머니가 있어서, 초콜릿이 찬 잔에 스펀지케이크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아 점심식사를 하고 있던 것처럼 보였다.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기척을 느낀 할머니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발견했고 이어서 다정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이렇게.


  “아, 아주 좋아. 잘했어! 허락도 받지 않고 방으로 불쑥 들어오는 고양이나 새처럼 남의 삶을 살펴보다니! 그렇다고 도망가지 말고 이름이 뭔지 말해줘. 예쁘고 호기심 많은 아가씨!”


  물론 정말로 이렇게 길게 말하지는 않았을 거 같다. 그저 웃으면서 이름을 묻고 집 안으로 들어오라고 권했을 정도 아니었겠나. 하지만 작품을 발표한 시기를 감안하면 이처럼 수식어를 많이 포함한 문장을 사용하는 것이 그리 어색하지 않을 수 있겠다. 아니면 테레사 데 라 파라의 문장이 그렇거나. 그럴 수 있다. 이런 문장이 책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니 데 라 파라의 독특한 문체라고 봐도 될 듯하다.

  이렇듯 마마 블랑카는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해도 활달함을 잃지 않는 성격이어서 사소하면서도 즐거운 일을 좋아했다. 낡은 피아노를 치는 것도. 나중에 나는 할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우는데 할머니가 몰두해서 피아노를 연주할 때는 완전히 집중을 하기도 했다.

  한 번은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치고 있었다. 이때 시인이나 생쥐처럼 가난한 할머니에게 오래 갚지 못한 빚을 갚기 위해 채무자가 들른 적이 있다. 하녀가 들어와서 조그만 목소리로 사실을 알렸고 할머니는 째려보며 나 피아노 치면 누구를 막론하고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지? 타박을 놨다. 보다 못한 하녀가 다시 한번 들어와 채무자가 돈을 갚으러 왔다고 조금 더 큰소리로 일렀고, 할머니는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오라고 해.”라고 단칼에 물리쳐버렸다. 채무자는 빚 갚는 걸 포기한 채 그길로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으며 할머니도 그걸 알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나. 하여간 음악에 관한 거 말고는 세상에 좋은 사람이었다.

  집은 오래되어 낡고 초라했지만 청결한 느낌과 향긋한 냄새가 사방에 감돌았으며, 사탕수수 농장, 사탕수수 제분소, 커피 가공회사가 있는 곳에서 낳고 자라 야생 동식물에 관해 통달을 한 수준이었다. 나와의 우정을 향해 인용한 것도 바이올렛, 데이지, 아네모네 등의 현란한 꽃에 관한 수식이었다. 당연히 데 라 파라의 화려한 수식이 짧지 않게 첨부되어 있다.

  원래는 있는 집 따님으로 있는 집 아들과 결혼해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남편과 사별 후 증권투자를 했다가 완전히 가산을 탕진해서 속세를 떠난 사람처럼 혼자 가난하고 외롭게 살고 있다. 부자는 망해도 3년 간다고 그래도 하녀는 한 명 있다. 뭐 그런 것이지. 시인이나 생쥐처럼 가난해도 하녀는 한 명 있어야 하는 거. 하여튼 가산을 말아 자신 다음엔 복권을 사기 시작했고, 함께 살자는 아들들의 권유를 모두 거절했다. 아들들은 모른다. 잘 배운 부르주아 가문 출신의 며느리들이 별로 배운 것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시어머니를 내심 수치스럽게 여긴다는 것을. 그러나 마마 블랑카는 여전히 이웃에게 친절하고 활발하고 명랑하게, 화려한 말 솜씨를 구사하며 즐거운 남은 생을 소비하고 있었다.

  어느 날. 드디어 마마 블랑카의 부고가 도착했다. 나는 얼른 상가에 도착해 할머니가 직접 쓴 회고록을 손에 넣는다. 할머니가 자식, 손주들을 위해 쓴 자서전이라 그들에게 넘기려 했으나 암만 생각해도 자손들은 한 번 휙휙 넘겨보고는 그만일 거 같아서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고 내게 준 것이다. 원고는 자기 기억의 초상화라고, 자신의 기억과 함께 오래 간직해달라는 부탁과 더불어.

  그러나 데 라 파라는 할머니의 당부와 달리 마마 블랑카가 쓴 회고록을 자신의 수정과 문법적 보완을 거쳐 출간하려 한다. 그것이 인생이지. 죽은 자는 아무런 권한이 없는 거다. 아예 남기지 말았어야지, 마마 블랑카.


  이렇게 회고록은 시작한다. 광활한 벌판 위의 피에드라 아술 농장. 아버지와 어머니와 7개월부터 일곱 살까지 한 번도 농장의 울타리를 넘어가본 적이 없는 여섯 자매. 아이들의 화려한 이름들. 아우로라, 비올레타, 블랑카 니에베스, 에스트레야, 로살린다, 아우라 플로르. 트리니다드에서 자매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러 온 잉글랜드 계 물라토 여인 에벌린과 세 명의 보모. 식사시중 담당 하녀 알타그라시아와 아이들 잠자리를 맡은 하녀 헤수시타. 주방을 책임지는 요리사 칸델라리아.

  아버지는 끊임없이 아들을 갖기 원하고 아들이 태어나면 자신의 이름인 후안 마누엘라라는 이름을 주기로 했건만, 15~16개월에 한 번씩 세 달에 달하는 여행을 떠나 딸 하나를 품에 안고 돌아온 아내는 결코 아들을 생산하지 않은 가정. 이 야생의 벌판에서 야생으로 살던 여섯 자매들의 유소년 시절. 그리고 자매들의 교육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도시 카라카스로 옮긴 이야기까지. 일흔을 훨씬 넘긴 노인 마마 블랑카가 기억하는 저 어린 시절의 벌판과 자연과 농장과 짐승들과 사람들 이야기. 그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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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1-02 1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혹시 전생에 사람이 아닌
도서관과 책이라는 건물과 사물?
매번 감탄하며
힘에 벅차지만 열심히 따라 가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Falstaff 2024-01-02 16:14   좋아요 1 | URL
그냥 할 거는 책 읽는 거밖에 없는 백수라니까요. ㅎㅎㅎㅎ
페넬로페 님도 올해..... 아, 저는 추상명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복 대신에 말입죠, 그저 연초에 로또 한 방 콱, 맞으시기 바랍니다. ^^
 
실종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6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재황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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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츠 카프카가 시도한 첫 장편소설. 열심히 쓰다가 죽음이 임박하자, 엄숙한 문학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싶지 않았던 카프카는 자신이 쓴 모든 원고를 불살라 버리라고 절친이자 편집자인 막스 브로트에게 유언한다.

  질문. 카프카가 진짜로 자기가 쓴 작품이 싹 잊혀지기 바랐을까? 그랬다면 왜 하필이면 출판사 편집인 친구한테 유언을 했을까? 문학에 관심이 없는 형제, 자매, 옆집 아저씨, 배추 장수 기타 등등 5만원짜리 지폐 서너 장만 옆구리 찔러주면 20세기 초반의 가난한 시절엔 난로에다 불이라도 땠을 거 아닌가벼? 뭐 그렇다는 거지 내가 뭘 알고 우기는 건 아니다. 그랬겠지, 그랬겠지.

  미완성 장편소설 세 편 가운데 <성>과 <소송>은 읽었고, 어떻게 <아메리카> 또는 <실종자>엔 손이 가지 않아 다음에 읽지, 다음에 읽지, 차일피일하다가 문학동네 세계문학 시리즈로 나온 김에 읽었다. 이게 우연히 2024년에 처음 올리는 독후감일걸? 하여간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간략하게 요약을 해보자면, <성>과 <소송>은 같은 미완성 작품이라고 해도 중간에 툭 끊어졌다니까 그런가보다 하는 거지 하나의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싶었다. 반면에 <실종자>는 분량과 관계없이, 원고지는 제법 채웠지만, 스토리가 여전히 펼쳐지고 있는 전개의 단계에서 갑자기 막이 내려가는 바람에 거참, 점잖은 체면에 막말 할 수도 없고, 하여간에 내가 여태 읽기를 미룬 것이 이유가 있다, 이렇게 주장해도 별 탈이 없어 보였다.

  장편소설 읽다가 만 거 같은 미완성 작품 읽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후지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다. 작품 자체가 별로인 것들을 출판사가 미쳤다고 발간을 하겠느냐고. 최근에 읽은 미완성 작품이 구 체코슬로바키아 작가 야로슬라프 하셰크가 쓴 <훌륭한 병사 슈베이크>이고, 지금도 아쉬움이 남는 미완성 장편이 토마스 만의 희극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이요, 가장 아쉬운 미완성은 고 최명희의 대하소설 <혼불>이다. 이들 작품이 다 좋다. 슈베르트의 D.759 교향곡이 <미완성>임에도 여전히 절찬리에 연주하는 것도 좋아서 그런 거지 다른 이유는 없는 것과 같다.


  열일곱 살 먹은 독일 청년 카를 로스만은 35세 먹은 하녀 요하나 브루머의 꾐에 넘어가 그만 동정을 갈취당하고 만다. 진짜로 이런 일 있다. 내가 안 본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도 만화가게에서 여주인 김*선씨가 고등학생을 하나 어떻게 한다며? 아휴, 이거 얘기해야 하나? 많고 많은 처 이모부 가운데 좀 예쁘장하게 생긴 막내 처 이모부가 중학생일 때 진짜로 만화가게 아줌마한테 당해서 딱지를 뗐단다. 이런 식으로 (1920년대 나이로 보면) 중년의 요하나에게 동정을 바친 카를 로스만에게 돌아온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요하나의 임신 통보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카를의 아빠 로스만 씨는 이미 낳은 아이 야코프의 양육비 부담과 추문을 피하기 위해 부자의 연을 끊고 함부르크를 거쳐 미국으로 쫓아버려, 이민선의 3등칸을 타고 뉴욕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카프카의 전매특허가 나왔다. 아버지에 의한 추방. 정확하게 말하면 아들 추방. K는 국가로부터, 측량사는 성주한테 추방당해 결코 이들을 만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카를 역시 다시는 아버지를 볼 수 없는 것.

  그건 그럴 수 있지. 전작이 있으니 놀랄 일은 아니다. 정작 내가 놀랐던 장면은, 17세 아기 아빠 카를이 뉴욕 자유의 여신상을 보더니 여신이 횃불이 아닌 칼을 들고 있다고 보는 장면이었다. 어, 이게 뭐야? 설마 카프카가 자유의 여신상을 몰라서 횃불이 아니고 칼을 들고 우뚝 서 있다고 본 건가? 이거 무슨 메타포나 상징이나 하여간 꿍꿍이가 있는 거 아냐? 싶었다. 아, 씨. 프란츠 카프카, 이 양반이 또 작품 시작하자마자 사람 뇌 흔들리게 만들고 말았다. 도무지 연결이 되지 않는 거였다. 자유와 칼. 무력이 없으면 자유를 유지, 보존할 수 없다는 뜻일까? 잠깐 공산주의도 했던 카프카가 그리 생각했으리라고 보는 건 좀 무리일 텐데. 좋다. 나중에, 언젠가 힌트가 나오겠지. 그러나 책을 덮을 때까지 이 문제를 해결할 힌트는 보이지 않았다. 혹은 발견할 수 없었다. 여간해서 잘 읽지 않는 해설을 보니, 카를이 승선한 배가 여신상 아래를 지나가면 여신이 들고 있는 것이 횃불인지 칼인지 모를 것이고, 그게 카를의 눈에 칼의 손잡이처럼 보였다는 거다. 아이고, 거 참. 세상에 머리 좋은 사람들 많다. 그럴 듯하지 않나? 한스 홀바인이 그린 <대사들>을 보면 그림 아래쪽에 극도로 찌그러진 시계가 그려져 있다. 이게 계단참에 걸린 작품이라는데 계단을 올라오면서 그림을 볼 사람을 위해 부러 그렇게 그렸다는 거다. 그림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째 자유의 여신상 아래를 지나가는 배는 생각하지 못했나 그래. 만일 역자 이재황의 생각이 맞다면(맞는 거 같다) 천재는 아니더라도 영재 정도는 될 거 같다.


  이제 뉴욕에 왔으니까, 알렉산드르 바리코의 <노베첸토>에서 보듯이 (반드시 한 명은)누군가가 육지다, 미국이다, 신세계다, 외쳤을 것이고 사람들이 한 편으로 우그르르 모였을 것이고, 드디어 자유의 여신상이 나타났을 것이고 그 아래로 지나갔을 것이니 배 안은 시끌벅적 짐 챙기고, 잃어버린 거 없나 뒤적거리고, 순식간에 남의 물건을 슬쩍 하는 종자들도 있을 것이고, 서로 상륙하더라도 연락은 하고 지나자, 명함교환도 하고 그랬을 터, 젊었다기보다 아직 어린 카를 역시 아빠의 낡은 여행가방을 들고 갑판에 나갔다가 그만 아이고, 객실에 우산을 두고 왔네, 이런 이유로 명함을 받은 프리츠 부터바움 씨한테 가방을 맡긴 채 다시 선복에 있는 3등 객실로 내려가 길을 잃고 만다. 프리츠 부터바움 씨는 이 한 장면에 등장하고 사라진다. 이제 독자는 카를 로스만의 성격을 이해할 차례. 오지랖이 대단한 친구다. 길을 잃고 돌아다니다가 당시엔 석탄을 땐 증기선이니 석탄을 보일러에 넣은 화부火夫의 방을 두드려 그의 방에 들어간다. 이 인간이 좀 불평불만자라서 화실보다는 회계과에서 노닥거리는 시간이 많을 정도라 루마니아인 일등기관사 슈발 씨가 해고해버릴 예정이다. 사실과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화부의 말만 듣고 열받은 카를은 화부와 함께 회계주임에게 갔다가 그곳에서 선장, 회계주임, 상원의원 야코프 씨를 만나 입에 침을 튄다. 카를에게 이름을 묻는 대나무를 들고 있던 야코프 씨. 알고보니 그는 오래 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간 외삼촌 에드바르트 야코프였던 거다. 야코프, 유대인 아닌가? 하여간 뭐. 그리하여 이것으로 화부, 선장, 회계주임, 기관사는 영원히 사라진다.

  야코프 씨의 집 7층에 살게 된 카를. 1층부터 6층까지는 야코프의 사무실인 건물이다. 카를이 말만 하면 거의 다 들어주는 야코프 외삼촌. 말 한 마디에 그랜드 피아노까지 들여왔을 정도. 카를은 새벽 다섯 시 반에 승마학교를 가서 상류사회 필수코스를 익히고, 일곱 시부터는 경영전문대학의 교수한테 영어 교습을 받아 몇 달 만에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한다. 야코프는 유럽에 없는 업종인 일종의 중개운송업을 하는데, 대규모 구매, 저장, 운송, 판매를 하나로 통괄하는 사업으로 미국 각지에 업체를 두는 거대 회사의 회장이다. 30년 전엔 항만 구역의 조그만 점포 하나로 시작을 했지만. 야코프 씨에겐 키 크고 뚱뚱한 친구 두 명이 있었으니 그린 씨와 폴런더 씨. 이들과 만나 내밀한 사업 이야기를 하다가 폴런더 씨가 자기 집에 들러 하루이틀 자고 가라고 권하는 것을 야코프 씨는 반대하고 카를은 그럼에도 좋다고, 꼭 가고 싶다고 해서 하루 밤을 보내기로 하는 일이 벌어진다.

  여기서 또다시 카프카. 유럽에선 아버지에게 추방당해 미국으로 왔으니, 이제 미국에서도 아버지 비슷한 인간에게 한 번 더 추방을 당해야 할 것. 자기 의견이 무시당한 것에 완전히 기분이 잡친 야코프 씨는 그린 씨를 통해 앞으로 자기 앞에 나타나지 말라는 말을 카를에게 전한다. 완전 빈털터리로 내쫓기는 카를. 가장 싼 여인숙의 공동숙소에서 밤을 보낸 카를 앞에 엔지니어를 자칭하는 두 건달이 등장하니 하나는 아일랜드 출신 로빈슨이요, 다른 하나는 프랑스 출신 들라마르슈이다. 이들은 야코프 씨가 장만해준 카를의 옷이 취직하는데 방해가 될 뿐이라고 입을 털어 카를의 옷을 팔아 50센트를 건네준 뒤 직장을 찾아 먼 길을 걸어가면서 그나마 남아 있는 카를의 돈을 뜯기 시작한다. 감을 잡은 카를도 당하고만 있을 바보가 아니라 그들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옥시덴털 호텔의 엘리베이터 보이로 취직한다.

  호텔에서 자신을 위하여 최대의 편의를 보아주는 주방장의 도움으로 좀 편히 있나 싶었으나 사건이 생겨 해고당하고, 기어이 다시 로빈슨과 들라마르슈의 손아귀로 넘어가 들라마르슈의 하인으로 일하면서 이야기는 갑자기 뚝 끊겨버리고, 그만이다.

  그래서 아쉽다는 것이다. 원고지 분량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정리가 된 상태에서 끝나야지 이건 정말 중도무이라 독자가 당황할 수밖에 없는 거다. 한 번 더 읽어보면 독자가 알아서 정리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더 읽어볼 정성도 없어서 말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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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1-01 08: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실종자는 안읽어봤네요
카프카는 두꺼운 책으로 소송, 심판, 성 등은 읽었어요.
이참에 다시 들춰볼까? 하고 생각합니다
카프카 평전 읽으며, 다행이다. 했던 장면을 아! 폴스타프님 이야기를 읽으며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2024년 첫 리뷰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4-01-01 13:31   좋아요 1 | URL
댓글이 늦었습니다. 아이들이 와서 떡국 끓여 한 잔 씩 따라주는 술에 취해서 ㅎㅎㅎ 연초잖아요.
별 거 없는데 늘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새해 건강하세요. ^^

레삭매냐 2024-01-01 1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카프카 형님의 절친 막스 브로트가
없었다면 후대의 독서가들은 카프
카 형님과 결코 만나볼 수 없었을까
요? 고것이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책 자체가...
무언가 미완의 완성을 향해 나가는
우리네 닝겡들의 인생과 비슷하다
는 점에서, 새해의 첫 리뷰로 적절
하지 않았나 추정해 봅니다.

Falstaff 2024-01-01 20:33   좋아요 1 | URL
막스 브로트 아니었어도 출판사에서 이왕 자기들 손에 들어온 원고를 불살랐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도 승 법정이 자기 죽은 다음에 책 더 찍지 말라고 했지만 죽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됐던 적 있잖습니까. ㅎㅎㅎ 자본주의에서는 돈이 신입니다, 신.
 
사랑
산도르 마라이 지음, 임왕준 옮김 / 솔출판사 / 2003년 6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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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읽는 마라이 산도르. 헝가리 사람이라 주민등록증에 ‘마라이 산도르’라고 쓰여 있다. ‘산도르 마라이’는 이의 유럽식 표기이다. 이 책이 여섯 번째 읽는 마라이의 책이다. 여태 읽었던 작품하고 결이 다르다. 읽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 독후감을 쓰려고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거 같다. 결이 다르다는 건 모험가, 작가, 시인, 소설가를 사칭한 당대의 사기꾼, 쟈코모 지롤라모 카사노바를 주인공으로 했다는 것부터 그랬다. 카사노바는 돈 지오반니와 다르게 적어도 여인을 꼬드길 때만큼은 진정으로 사랑을 했다느니 하는 헛소리들을 하건만, 천만의 말씀이다. 늙고 젊음을 따지지 않고, 부자와 빈민을 구별하지 않고, 기회가 닫기만 하면 공평하게 치마끈을 푼 날 사기꾼으로 강도, 강간, 매춘 알선 등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저지른 악당 범죄자일 뿐이다. 당대 동유럽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잘 교육받은 마라이가 이를 알고도 주인공으로 삼았다.

  작품은 자코모가 16개월 동안 베니스 주교의 감옥에 갇혀 있다가 파계한 난봉꾼 수도사 발비와 함께 탈옥에 성공해 볼자노의 세르 여관에 도착하면서 시작한다. 볼자노에 와서야 이곳 성에 프랑스 루이 왕과 추기경의 친척인 파름므 백작이 프란체스카 백작부인과 함께 기거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72세의 파름므 백작. 5년 전 로마 근방에 있는 백작의 또다른 성에서 당시 열다섯 살의 프란체스카는 백작의 아름다운 약혼녀였지만 쟈코모와 은근한 사랑의 군불을 때우고 있기도 했다. 내가 알고 있는 카사노바와는 다르게 마라이의 주장이 맞다고 가정한다면 쟈코모가 일생일대의 진정한 사랑과 자유의 갈림길에서 자유를 선택하기 위해 사랑을 버린 한 페이지가 된다. 물론 순순히 사랑을 저버린 건 아니고 18세기 중엽답게 약혼녀와 쟈코모의 사이를 의심한 67세 파름므 백작과의 결투에서 30년 이상 젊은 육체에도 불구하고 백작의 칼이 심장 바로 위를 찌르고 난 다음이었다. 어둠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새벽, 창문을 통해 윗옷을 벗어버린 두 남자의 결투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려다보던 프란체스카의 속내는 어땠을까? 어떻기는 뭐. 벌써 난봉꾼의 유혹에 관해서는 고향 베니스를 넘어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스페인, 영국, 모스크바까지 떠르르하게 소문이 난 30대 초반의 남자한테 푹 빠져 있었겠지.

  쟈코모가 염병할 놈인 것이, 아무리 버르장머리 없는 유럽 백인 남자들이라 하더라도 자기보다 서른 살도 더 먹은 늙은이와의 결투는 정중하게 사양을 해야 하는 법이다. 명색이 이름 앞에 신사紳士라고 타이틀을 달고 싶으면. 그런데도 쟈코모는 웃통을 훌떡 까고 노인한테 칼질을 했다가 얄짤없이 칼에 찔려버렸으니 그것 참, 잘됐다고 할 수도 없고. 그리고 함부로 귀족하고 칼부림하는 게 아니다. 귀족이 왜 귀족의 자리에 올랐는지 알아야 한다. 그들은 원래부터 싸움꾼 집안이다. 끊임없는 전쟁 속에서 귀족의 아들은 무조건 군대에 가야 했으며, 살아남기 위하여 어릴 때부터 악착같이 체력과 승마, 검술을 갈고 닦았다. 늙었다고 해도 언제 전장에 나가야 할 지 모르는 귀족들이 겉으로 보기에 만날 파티에 무도회와 연애질로 도끼 자루가 썩어 나가는 지도 모를 것 같지만 보통의 인간과 칼로 붙었다 하면 그거 하나 해치우는 건 일도 아닐지 모른다.


  하여간 유일하게 단도 한 자루만 가지고 볼자노의 세르 여관에 짐을 푼 쟈코모 카사노바. 근데 그곳 성에 거주하는 파름므 백작과 백작부인. 5년 전 연애사건과 결투. 소설에 총이 하나 등장하면 반드시 총구에서 총알 한 발 정도는 발사되어야 한다는 게 소설작법 7장 5절이다. 그러면 희대의 사기꾼이자 협잡, 강도, 살인범 카사노바가 단도 한 자루를 가지고 등장했으면 그걸 누군가의 가슴팍이나 등짝에 꽂아 넣어야 이 작품의 끝장을 보겠구나, 이렇게 기대를 해야 하는 거 아냐? 아무튼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기대도 하고, 그거야 뭐 뻔한 일이지, 장담했었다. 어떻게 될까? 내가 안 알려드리지. 분명한 건 이 삼각관계, 트라이앵글이 한 번 더 울리게 된다는 것. 원래 쟈코모의 계획은 세르 여관에서 베니스에 살고 있는 선량한 양아버지 브라가댕에게 편지를 보내 돈을 보내 달라고 해서, 편지가 가는데 이틀, 오는데 이틀, 여유일 하루, 이렇게 닷새가 되는 날 볼자노를 떠나 뮌헨으로 가려던 거였다. 양아버지 이름을 팔아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망슈한테 돈을 빌어 호화로운 옷과 장식품을 사고, 도시의 유지들하고 노름을 하다 거의 돈이 떨어질 때쯤이었다. 시끌벅적한 마차가 여관 앞에 도착하고, 이젠 통풍과 노환으로 몇 주가 지나면 숟가락 놓을 것 같은 파름므 백작이 쟈코모를 보기 위해 친히 2층 계단을 올라 그의 방문을 열고, 천하의 카사노바에게 일생일대의 거래를 제안한다.

  여기서 잠깐. 파름므 백작이 예순일곱 살 때 열다섯 살의 프란체스카와 약혼을 했다고 놀라거나 비난하지 말자. 18세기 일이다. 그때 카사노바도 서른 서너 살이니까 이십 년 정도 차이지만 서로 사랑했다. 같은 시기에 우리나라 영조 임금도 만 65세의 나이로 만 14세의 계비를 맞아들이니 이이가 바로 정순왕후다. (18세기는 모르겠고) 17세기까지도 유럽에서 여성의 적정 혼인 나이가 12세였다. 의심스러우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판 <데카메론> 읽어 보시라. 나도 아마 그거 읽고 알았을 거다.

  하여간, 오늘 낼 하는 백작이 원하는 건, 사랑하는 프란체스카의 품에서 프란체스카가 돌보는 침상에 누워 숨을 넘기고 싶다는 거다. 자신은 이제 스무 살이 된 아내를 사랑하건만, 아내는 천하의 바람둥이 잡놈을 사랑하는 형국. 이젠 그 잡놈을 때려 죽이거나 찔러 죽일 힘도 없는 백작은 그에게 생각도 하지 못할 만큼의 거액과, 탈옥범인 것과는 상관없이 유럽 어디든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신원보증 및 여행허가서, 독일, 프랑스, 스페인, 영국, 러시아까지 각 도시마다 당당한 세력자들에게 한 자리를 부탁하는 청원서를 주는 대가로, 오늘 밤에 벌어질 가면무도회에 참석해 프란체스카를 유혹, 하룻밤을 보내고 대신 아내의 마음 속에 있는 쟈코모에 대한 연모의 마음을 완벽하게 청소해달라는 거다. 백작은 이 장면에서 길고 긴, 무려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장광설을 쏟아낸다. 가장 비슷한 문장을 들라면 누구를 거론할 수 있을까? 맞다, 알베르 코엔의 <주군의 여인>에 나오는 쏠랄의 장광설. 어찌 읽으면 쓸개 빠진 사내새끼가 어떻게 이런 부탁을 하고 있을까, 한심할 수도 있는 것까지 비슷하다. 그러나 어쩔꼬. 이미 늙어 저승이 팔짱을 끼려는 순간인데 아직까지도 총질이나 칼질 또는 청부살인 같은 죄업을 쌓기는 좀 그렇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백작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가장 원만한 방법을 선택했을 터. 이렇게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예스런 문장으로 줄줄이 이어가는 장광설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만 하면 된다.

  이 책에선 세 번 정도 장광설이 등장한다. 백작의 것은 이 가운데 두 번째. 첫번째는 세르 여관의 복도에서 벌어진다. 두번째, 세번째 장광설도 모두 세르 여관에서의 일이다. 쟈코모가 여관에 든 이후 연극무대처럼 장소가 한 번도 변하지 않는다. 쟈코모가 있는 가운데 등장인물만 수시로 바뀔 뿐. 쟈코모 카사노바가 볼자노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볼자노의 모든 사람들이 난리가 난다. 역시 사기꾼, 범죄자, 매춘 알선자의 이름이 아닌 바람둥이, 유혹자로서의 카사노바. 이미 전 유럽에 바람둥이의 명성을 휘날린 쟈코모가 작은 도시에 떴으니, 여자들은 카사노바가 도대체 어떤 인물이고, 어떻게 생겼고, 얼마나 잘 생겼는지 도무지 오금이 시큰거려 가만히 있지 못하겠는 거다. 여관 주인은 열여섯 살 먹은 하녀 테레자를 쟈코모 전담 하녀로 지정했고, 아직 처녀이기는 하지만 여관업종에 종사한지 꽤 되는지라 인간의 연애사에 벌어지는 현상들에 관해서 이미 통달한 바, 보통의 여자들만큼 그에 관해 관심이 없다. 물론 쟈코모는 테레자를 유혹했고, 실패하는 것 같았으나 놀라운 혀와 목소리로 결국은 성공했지만 자빠뜨리지는 않았는데, 테레자는 이웃 여자들을 위하여 열쇠구멍을 통해 쟈코모 카사노바의 생김생김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리하여 빼곡하게 모여 쟈코모를 완상하던 중 갑자기 문을 벌컥 열어젖힌 쟈코모. 문 저편에 앉아 있다가 뒤로 발랑 나자빠진 여자들의 무리를 보더니 드디어 첫번째 장광설을 쏟아 놓는다. 절대 미남이 아닌, 짐승 중의 짐승, 사내 가운데 사내이자 마초 가운데 마초인 카사노바가.

  두번째 장광설은 이야기했고, 세번째 장광설은 당연히 트라이앵글의 마지막 한 축인 프란체스카. 그녀가 세르 여관에 도착해 마지막 장광설을 쏟아낸다. 즉, 결론이다. 그걸 내가 이야기하는 걸 보신 적 있으셔? 이번에도 직접 확인을 하셔야 할 듯. 저 위에서 말한 소설작법 7장 5절을 기억하시고.




이것으로 2023년 삽질은 끝났습니다. 누추한 서재의 보잘것없는 독후감을 읽어주신 서재 친구, 나그네, 검색꾼들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내년에 좋은 일 많이 생기고, 연애도 성공하시고, 특히 건강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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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12-29 05: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월 삽질 일정:
첫째 주
1일. 프란츠 카프카, <실종자>
2일. 테레사 데 라 파라, <마마 블랑카의 회고록>
3일. 나탈리 사로트, <아무것도 아닌 일로>
4일. 쥴퓌 리바넬리, <어부와 아들>
5일. 하인리히 뵐, 《하얀 개》
둘째 주
8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프닌> ***
9일. 발터 하젠클라버, <발터 하젠클라버의 아들>
10일.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
11일. 전예진, 《어느 날 거위가》
12일. 루이스 어드리크, <정육점 주인들의 노래클럽> ***
세째 주
15일. 고영민, 《공손한 손》
16일. 랜퍼드 윌슨, 《탤리 가의 빈집(외)》
17일. 장웨이, 《어신魚神을 찾아서》
18일. 오노레 드 발자크, <사기꾼> ***
19일. 알랭 로브그리예, <진>
네째 주
22일. 허규, 《다시라기/광대가》
23일.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납치일기>
24일. 비톨트 곰브로비치, 《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 / 결혼식 / 오페레타》
25일. 찬쉐, <황니가黃泥街>
26일. 존 스타인벡, <통조림공장 골목> ***
월말
29일. 아다니아 쉬블리, <사소한 일>
30일. 오에 겐자부로,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
31일. 강은교, 《벽 속의 편지》

( *** : 주목할 만한 작품)

stella.K 2023-12-29 09:59   좋아요 1 | URL
아니 팔님은 책을 어떻게 읽으시는 건가요? 솔직히 궁금했습니다. 그래도 실례가 될까봐 차마 여쭙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아예 한 달치를 끊어버리시니 여쭙지 않을 수가 없네요. 책을 어떻게 읽으시는지 그 비법 좀 전수해 주시죠. 저는 책 한 권을 너무 오래 읽어 고민입니다.ㅠ
글구 왜 올해의 책 안하십니까? 기대했는데 실망입니다.
암튼 올 한 해 좋은 책들과 함께하셔서 뿌듯하지 않으셨나 생각합니다. 내년에도 좋은 책들과 함께 희망찬 새해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coolcat329 2023-12-29 12:17   좋아요 1 | URL
정말 넘사벽이세요. 사기꾼 도서관에서 빌려왔는데 안 읽고 그대로 반납하게 생겼습니다.
폴스타프님 덕분에 2023년에도 많이 배웠습니다. 새해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Falstaff 2023-12-29 18:00   좋아요 1 | URL
stella.K 님 / 백수잖아요. ㅎㅎㅎ 할 일이라고는 마누라 좋아하는 김치콩나물국 끓여 대령하고 도서관에 출근해서 오후 세시에 퇴근하는 거 하납니다. 술을 줄이니까 밤에 독후감 쓸 시간이 나더군요. 이후에 책을 더 많이 읽게 되었습니다. 올해의 책은 이제 그만하려 합니다. 작년부터 안 했어요. 내년에도 늘 건강하셔요!

coolcat님 / 사기꾼 재미난데요. 역자 해설을 읽고 눈이 휘둥그레 해졌답니다. 아하, 그렇구나! 확 깨더라고요. 뭔지는 안 알려드림. ㅋㅋㅋ

아침에혹은저녁에☔ 2023-12-29 06: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 해 동안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내년에도 기대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건강하시고요!
올해의 책은 없나요?

Falstaff 2023-12-29 06:48   좋아요 0 | URL
아침저녁 님도 늘 건강하세요.
올해의 책... 안 하기로 했습니다. 작년에도 안 했답니다. ㅎㅎ

반유행열반인 2023-12-29 08: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고 나면 알고 보니 팔백작님 세일즈에 넘어갔더라는… 책이 한 둘이 아니네요 ㅎㅎ내년에도 건강하게 재미난책 많이 읽으시길 빕니다!!!

Falstaff 2023-12-29 16:14   좋아요 1 | URL
아휴, 제 말 믿지 마세요.믿고 싶으시면 절반만.... ㅎㅎㅎ
내년엔 아프지만 마세요!!!

자목련 2023-12-29 1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많은 목록 가운데 제가 읽은 책은 겨우 2권, 제목만 아는 책도 몇 권 없어요.ㅎ

Falstaff 2023-12-29 16:15   좋아요 0 | URL
대신 우리 문학을 좋아하시잖아요! ㅎㅎㅎ
 
배반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0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황가한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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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섬 북쪽에 오밀조밀하게 모인 군도 잔지바르 술탄령에서 1948년에 출생했다. 잔지바르는 1963년에 술탄이 통치하는 군주국으로 독립하였으나 불과 한 달 만에 혁명이 일어나 이슬람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박해했다. 아버지가 예멘에서 이민 온 비즈니스 맨, 아마 인도와 아프리카 무역상의 대리인 아니었나 싶은데, 구르나 집안도 이슬람 문화권이라서 1968년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영국에 도착한 구르나는 기독교 문명과 백인 사회의 백안시와 은근한 차별을 견디며 1982년 서른네 살 이 되는 해에 켄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83년부터는 켄트 대학의 영문학, 탈식민주의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재직하다 2017년에 퇴임하고, 2021년에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아직까지 영국 켄터베리에서 살고 있다. <낙원>이 부커상 최종심까지 올라갔고, <바닷가에서>가 역시 부커상 예심에 올랐지만 결국 부커 재단은 구르나를 외면했다. 글쎄 내 말이 맞다니까. 부커 상이 노벨 상보다 윗길이라니까. 부커 상을 타는 게 노밸 상보다 더 어렵다고.

  2021년에 스웨덴 한림원이 압둘라자크 구르나를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하자 문학동네는 잽싸게 영국의 블룸스베리 출판사와 계약을 해서 우리나라 유명 영어 역자 네 명에게 번역을 맡겨 2022년에 <낙원>, <바닷가에서>, <그후의 삶> 그리고 <배반>을 출간한다. 독자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그리 많이 팔린 것 같지는 않다. 이후에 이 사람 책이 더 나오지 않는 걸 보면. 나도 2022년에 책 좀 읽는 독자들이 상찬을 하시는 걸 보고 한 권 사둔 것이 <배반>이었다. 이제서야 읽었다. 올해 도서관에 무슨 캠페인이 있어서 줄창 도서관 책만 읽다가 캠페인이 끝나서 말입지. 올해에도 구르나를 읽고 좋다는 분이 많지만 아무래도 작년 같지는 않다. 한 숨 돌린 다음에 새롭게 당시의 문제작, 문제작가를 읽는 일도 괜찮다.


  1899년. 영국인 청년 마틴 피어스는 이집트에 체류하면서 아비시니아, 지금의 에티오피아에 관심이 많았다.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의 미남 피어스는 역사학자에 가까운 아마추어였으며 약간은 언어학자 스타일이기도 해서 다른 영국인과 달리 아랍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그는 아덴을 출발해 소말리아로 가고자 해서, 마침 우간다로 떠나는 영국인들과 합세해 출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젠트리 세 명, 연국인 하인, 백인 사냥꾼과 다수의 흑인 길잡이와 짐꾼을 동반한 캐러밴은 피어스의 일정과 관계없이 눈에 보이는 짐승이란 짐승은 몽땅 사냥하고,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먹으면서 행진하는 바람에 이들의 주변엔 피냄새와 고기 타는 냄새, 가죽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뭐든 죽이는 일을 혐오하는 피어스는 케냐 남부까지 와서 그들과 헤어지기로 결심했다. 백인이 아니더라도 타지 사람이 아프리카 황야를 혼자 걸어가는 건 아예 목숨을 내놓고 하는 일이라 젠트리는 소말리족 안내인 세 명을 그에게 붙여주고 함께 여행을 하게 했다. 안내인들과는 따로 약속을 해 모종의 장소에서 만나기로 하고. 그렇지 않아도 아프리카에서 배반과 잔혹의 대명사인 소말리족 안내인들이 피어스를 따라가면 자신들이 받을 보수가 적어질 거라는 걸 알고 자기들끼리 불평을 할 때 조심해야 했는데 그는 그걸 무시한 것이 잘못이었다. 며칠 동안 황야를 걷다가 안내인들은 갑자기 피어스를 덮쳐 권총을 빼앗아 총구를 머리통에 대고 그의 모든 소지품과 주머니에 든 돈을 몽땅 가져가버렸다. 자기들끼리 피어스를 죽여버리자, 내버려 두면 황야를 걷다가 저절로 죽을 거니 우리가 죽일 필요 없다, 이렇게 말다툼을 해가면서.

  며칠 혹은 몇 주가 지나 피어스는 정말로 갈증과 기갈에 의하여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상태가 되어 케냐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몸바이에서 제법 떨어진 소도시의 이슬람 마을 골목에 쓰러져 있었다. 이 소도시의 이슬람 신자들이 사는 동네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사람은 하사날리였다. 주로 곡물이나 버터 같은 식료품을 취급하는 상점 주인으로 키가 작고 포동포동한 체구의 이 남자는 몸에서 도무지 동글동글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천성적으로 걱정이 많은 소심한 스타일인데 2년 전에 사랑하는 아내가 이 소도시에 온 다음부터 가장 일찍 일어나 곧바로 어두운 골목길을 일부러 돌고 돌아 모스크의 첨탑(미너렛) 꼭대기에 올라가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얼른 일어나 기도하라고 외치는 ‘무에진’이었다. 비록 아이도 없고 앞으로도 낳지 못하겠지만 남은 평생 서로 아낌없이 사랑하면서 살 아내 말라카와의 결혼생활이 잘 되게 해주고, 생과부가 된 누이 레하나의 슬픔이 끝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알라는 유일한 하느님이시며 무함마드는 가장 위대한 예언자시니라!” 외치기만 해도 괜찮다고 이맘이 말을 했건만 굳이 모스크 계단의 먼지와 모래도 깔끔하게 쓸었다.

  때는 1899년. 아직 전 세계적으로 유령, 사탄, 악마, 도깨비, 귀신들이 창궐했던 때라 하사날리가 아직 어둠에 휩싸인 골목을 잔뜩 겁에 질려 걸어가고 있다가 저 앞에서 뭔가 검은 것이 잔뜩 웅크리고 있어서 음산한 음기를 발산하고 있는 것처럼 소름이 좍 끼치면서 등골이 삐죽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이크, 악마가 틀림없구나. 사색이 된 하시날리는 무서움에 오금이 얼어붙는 것을 무릅쓰고 그쪽이 모스크로 가는 길이라서 조심조심 접근해보니 글쎄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 거였다. 사람이 이런 참혹한 상태로 떨어졌으니 일단 살리고 보자는 생각에 아직 열지 않은 카페 문 앞에서 주인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점원 두 명을 데려와 반죽음이 된 유랑인을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치료사 마마케 자이투니와 도시에 한 명 밖에 없는 돌팔이 접골사 우두둑 씨를 불러오라고 해서 보여주었다. 마마케 자이투니가 유랑인의 옷을 가위로 잘라내니 피부가 하얀 유럽인이었고, 할례를 받지 않았으며, 아픈 곳은 없지만 지치고 심한 탈수현상이 있는 것으로 진단해 따뜻한 꿀물을 먹이라고 처방했다. 어깨에 심한 멍이 들어 골절 또는 탈구가 아닐까 싶었던 것도 우두둑 씨가 몇 번 만져보니 그냥 어디에 부딪힌 거란다. 그리하여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황야를 횡단해 거의 죽은 상태로 소도시에 도착한 마틴 피어스에게 꿀물을 먹여 다시 소생시킨 사람이 하사날리의 불쌍한 누나 레하나였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는 레하나에게 당연히 부자들한테 청혼이 많이 들어왔었다. 당시가 19세기. 이슬람에서는 처를 네 명까지 둘 수 있다. 이제 부자가 된 이슬람 놈팽이들이 처가 한 명 또는 두 명 있어도 젊고 아름다운 처녀를 얻을 욕심에 레하나에게 청혼을 한 것이고 그땐 또 그게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레하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 만일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 있었다면 어떻게 될 지 몰랐겠지만 이제 법적으로 헤라나의 보호자는 소심한 남동생인 하시날리여서 두 번이나 청혼을 물릴 수 있었다. 하시날리는 누나의 거절에 마음이 많이 상해 앞으로 누나에게 청혼할 남자가 나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경고했고, 정말로 남자들은 레하나를 경원하기 시작했다. 기껏 한 명 나타난 구혼자는 환갑이 넘은 늙은이의 네 번째 자리였다. 당연히 거절했지만. 슬슬 포기 모드에 들어간 레하나에게 하시날리는 인도-아프리카 무역상의 아프리카 대리인으로 인도 구자라트 출신의 독실한 이슬람 신자이며 인도에서 아버지 자카리야 씨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주장하는 아자드를 집에 초대하여 점심을 같이 먹었다. 이때 레하나와 안면을 트고, 연모하는 마음이 생기고, 적절한 타이밍에 청혼을 받아, 이를 수락, 결혼에 이른다. 그렇게 조금 살다가 이제 큰 액수의 교역이 발생해 직접 인도에 가서 수금을 해야 하는 사정이 생긴 아자드. 당연히 여자는 남자 하는 일에 왈가왈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시라 했건만, 아자드는 그 길로 집구석을 내빼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책에서는 “군수郡守”라고 번역을 한 영국인 시장 프레더릭 터너 씨는 영국인이 아프리카인에게 구조되어 아프리카인의 집에 있다는 말을 듣고 아주 위압적인 태도로 그를 사택으로 옮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소도시에 영국인이라고는 이 두 명 밖에 없어서. 시를 좋아하고 랭보부터 예이츠 등등을 암송하는 걸 즐기는 터너 씨는 나중에 영국의 대학에서 영문학 강사를 할 정도의 인텔리이지만 식민지에서는 기꺼이 현지 유색인을 얼마든지 무시하고, 모멸할 수 있었다. 그는 하시날리 집에서 피어스의 물건을 훔친 것으로 판단해 다음 날 그의 집을 찾아가 큰소리 뻥뻥 치면서 내놓으라고 위협서린 말을 쏟아 내기도 했다. 손바닥에 말채찍을 탁탁 두드려가면서. 이 말을 들은 피어스는 훗날 날을 잡아 하시날리 집에 직접 찾아가 자기를 구해준 것에 고마움을 표시했다. 유창한 아랍어로. 외국인이 예상외로 자기 말을 쓰면 기분이 좋아지는 건 인지상정. 하시날리는 그를 점심식사에 초대했으며, 이 초대는 갈수록 빈도가 잦아졌는데, 이 와중에 생과부 레하나와 눈이 맞아 급기야 피어스-레하나 커플은 대도시 몸바사로 사랑의 도피를 해버린다.


  이후 무대는 1950년대부터 63년의 잔지바르 섬. 이 섬의 사랑 이야기가 어떻게 피어스-레하나와 얽히게 되는지 차마 말할 수 없다. 작품을 읽어가면서 이를 풀어내는 것이 독자의 큰 즐거움이 될 것임을 알면서 그걸 가르쳐드릴 수 없다 책은 모두 3부로 되어 있고 위에 쓴 건 1부 요약이다.

  2부와 3부는 1부와 비교해서 재미있다. 1부가 불만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내가 1부를 좀 지겨워하면서 읽었다. 없어도 되는 에피소드가 마치 중요한 일인 것처럼 연속적으로 나와서 그랬을까? 작품은 사랑 이야기다. 간혹 여성주의 적이기도, 탈식민주의 적이기도 하다. 스토리는 여기서 한 발만 더 나가도 스포일러가 분명할 거 같아 말을 아끼게 된다. 이해해주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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