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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7
알랭 로브그리예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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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로브그리예의 작품으로는 대단히 의외다. 마치 허를 찔리는 듯한 느낌. 영화에도 관심을 가져 여러 시나리오 작품을 써서 황금사자상 같은 것도 받았으며 영화 연출도 몇 편 한 바와 같이 로브그리예 표 소설이라기 보다 영화를 위한 밑그림 같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정말 영화로 만들었다면 첫 장면, 남자인 듯도 하고 여자인 듯도 한 진Djinn이 등장하는 장면부터 관객을 팍 몰입시키는 효과를 기대할 만하겠다. 7장 마지막에 딱 한 번 나오는 베드 씬도 (영화라면) 적절한 분량에다가, 열린 결말이라서 엔딩 크레딧이 죽 올라갈 때까지 관객은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차마 일어나지도 못하고, 이 영화를 좋다고 해야 하나, 후지다고 해야 하나, 재밌다고 해야 하나, 재미없다고 해야 하나, 고민하게 만드는 대단히 기분 좋은 심통도 부릴 수 있겠다. 물론 연출하는 감독에 따라서.
로브그리예 작품을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그의 작품으로는 낯설다. 책을 다 읽고 작가 연보를 보니 이렇게 쓰여 있다.
“1980년부터 1987년까지 브뤼셀자유대학교의 문학사회학 연구센터 소장직을 맡을 것이다. 멕시코 순회강연을 다닌다.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교수 이본 레너드의 요청으로 쓴 책 『면접Le Rendezvours』을 1981년에 출간한다. 프랑스어에 숙달하고자 하는 미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 목적에서 집필한 소설인데, 이야기의 얼개가 문법의 활용과 정교하게 맞물려 전개되도록 고안한 텍스트다. 같은 해 미뉘 출판사에서 나온 『진Djinn』은 그 텍스트에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보강하여 새로 펴낸 소설이다.”
역자 성귀수는 위 인용에서 첫 문장을 미래 시재를, 다음 문장부터 현재 시재를 사용한다. 미국 대학생의 불어 향상을 위한 한 학기용 교과서라서 1장부터 8장까지 장이 올라갈수록 난이도도 따라서 올라간다는데, 본문에서도 단순과거 시재니 복합과거 시재니 시재 이야기가 몇 번 나와서 혹시 역자가 미래 시재와 현재 시재를 혼용해 쓰는 장난을 쳤을까? 잠깐 생각했다가, 아니겠지, 타이포겠지, 이렇게 여기기로 했다. 아, 이거 시비 거는 거 아니다. 작품이 프랑스어 교재의 난이도에 따라 쓰여졌다니까 혹시 해서 나도 장난삼아 해본 말이다.
미국인 학생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프랑스 소설 한 편 읽기도 쉽지 않은데, 그것도 다른 작가도 아니고 골치 아픈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한 알랭 로브그리예가 쓴 텍스트를 읽는 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혈압 올라가는 일이건만 그가 보통 쓰는 식으로, 소위 누보-로망 작품으로 교과서를 만들었다면 그걸 제대로 읽고, 읽을 수 있다고 쳐도 감상할 수 있었을까. 이를 어엿비 여긴 작가는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게 썼을 지도 모른다. 근데 이이가 살아 있어야 물어보지? 거참.
알랭 로브그리예의 작품은 대단히, 대.단.히. 건조하다. 사물이나 상태를 미분적으로 쪼개 지면에 옮기는 행위를 즐긴다. 이 작품 1장 두번째 문단은 이렇다.
“내부는 온통 조용하다. 좀더 바짝 귀를 기울이자, 꽤 가까운 곳에서 맑은 소음 하나가 규칙적으로 탐지된다. 제대로 잠그지 않은 수도꼭지로 물이 새면서 통이나 대야 또는 바닥에 고인 웅덩이에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내가 아는 알랭 로브그리예라면, 이렇게 썼을 지도 모른다.
“가로 20미터 세로 50미터, 높이 7미터 60센티미터의 텅 빈 창고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청각에 보다 더 주위를 기울이자 두시 반 방향 약 5.3미터 정도 거리에 있는 지상 60센티미터 높이에 설치된, 반의 반은 흑갈색 녹이 슨 크롬 도금 수도꼭지의 물이 새면서 수도 앞에 놓인 가림막 때문에 창고 입구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통이나 대야 아니면 그냥 바닥에 고인 물 웅덩이에 분당 35회가량 빈도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니면 식물에 물을 주는 물 조리개일 수도 있다.”
원래 문장을 왜 로브그리예가 허용하지 못하느냐 하면, 수도꼭지에서 물이 어디로 떨어지는 지 모를 수 없다. 그냥 한 번 휙 쳐다보면 될 것을. 아마 저 장면 자체가 나오지 않았을 거 같다. 안 봤으니까. 근데 저렇게 썼으니 어찌 예외적인 작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이이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기가 질리는 건, 내가 다시 쓴 문장보다 백 배는 세밀한 걸 잠깐도 아니고 무려 2백 페이지에 육박하거나 그걸 넘어가는 분량 내내 읽고 있다고 가정해보시라. 아주 기가 넘어간다. 아니라고? 그럼 당신은 누보-로망하고 연분이 무지하게 잘 맞거나 안 읽어본 거다. 나는 특히 로브그리예와 사로트를 읽을 때마다 그렇게 돼지머리고기에 소주 한 병이 생각난다. 맨정신이 힘들어서.
내가 처음 읽은 누보 로망 작품이 나탈리 사로트가 쓴 <황금열매>였는데, 그냥 읽었다는 말이지 무슨 감명이나 감동, 감화 이딴 의미 아니다. 말 그대로 문자, 글씨 모음을 읽었을 뿐. 이어서 두 번째가 로브그리예. 세번째 나이 든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미셸 뷔토르 등등.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소감은 대동소이하게 “문자를 읽었음”에서 그리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실제로 로브그리예와 비슷한 시기를 살다 간 쥘리앙 그리크는 특히 로브그리예를 예로 들면서 누보-로망의 과도한 미분적 세계관과 묘사방법을 크게 비판했는데, 아이고, 그걸 읽고 얼마나 기분이 좋든지.
그러면 <진>은 로브그리예의 이색적 작품이며 누보-로망과 조금의 거리가 있으니 더 즐겼느냐고? 즐긴 건 맞지만 암만해도 아쉽다. 로브그리예를 읽을 때는 아주 엷은 지옥의 맛을 보는 재미로 이이를 선택해 돈 내고 일부러 고역을 견디는 소프트 코어 식 피학적 재미인 것을, 그걸 쏙 빼앗긴 느낌이다. 누보-로망이 웃기는 것이, 읽을 때 어렵고 읽고 나서도 머릿속에 남은 거 없어서, 나한테 돈 빌려가서 안 갚은 놈 있으면 재미있으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데, 위에서 내가 <진>의 한 단락을 다시 써 본 것처럼, 내 주위에 글 좀 쓴다, 하는 동무들은 한 명도 빼지 않고 다들 한 번씩 누보-로망 식 미분적 문장해체를 시도해본다는 말이지.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매력”이지. 이거 말고 어울리는 말이 또 뭐가 있겠어? 아, 몰라, 몰라, 몰라. 요즘 문청들한테도 누보-로망이 연구 대상인지는.
<진>은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화자 ‘나’부터 골이 좀 아프다. ‘나’는 시몽 르쾨르라는 이름의 남자의 수수한 아파트 방을 열고 진입한다. 책상 위에는 더블 스페이스로 타자한 99쪽 분량의 소설을 발견한다. 소설을 읽어가면서 든 생각은 프랑스어를 가르치기 위한 교과서 가운데 하나를 읽는 기분이다. 미국 대학의 학기당 8주에 대충 들어맞게끔 여덟 장chapter으로 구성한 작품.
‘나’는 저자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다. 키이우 출신의 전기기술자 보리스 쾨리스멘이라는 프랑스 여권이 나왔지만 틀림없이 외국에서 만든 조악한 위조 여권이다. 게다가 이름이 우크라이나 사람으로 볼 수도 없다. 몇 달 전부터 파시가street에서 프랑스 현대문학을 가르쳤는데 이땐 또 로빈 쾨르시모스, 일명 시몽 르쾨르라고 되어 있다. 이 오리무중의 사내가 귀신처럼 사라지면서 남겨둔 유일한 것. 그게 99쪽의 소설 한 편이다. <진>의 본문 1장부터 8장까지로 구성한.
내용? 프롤로그, 에필로그 빼면 겨우 백쪽 분량인데 내용까지 다 일러드리면 정작 진짜 책 읽을 땐 뭘 읽으시려고. 그냥 시간의 다차원 공간 이야기라고 해두자. 충분히 즐길 만한. 전혀 어렵지 않은 로브그리예. 그의 누보-로망에 질리신 분들도 가볍게 도전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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