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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마더스
도리스 레싱 지음, 강수정 옮김 / 예담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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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도리스 레싱 깨나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한 구석이 찜찜한 것을 숨기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하필이면 처음 읽은 레싱이 <다섯째 아이>였다. 아이고, 세상에나. 내 독서생활에서 <다섯째 아이>만큼 읽으며 제발 해피엔드로 끝나라, 제발 해피엔드로 끝나라, 이렇게 굿을 했던 적도 없다. 시간이 흐르고 나의 라이브러리도 그만큼 두터워졌지만 레싱은 여전히 한 발자국 건너 ‘음산하게’ 웃으며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풀잎은 노래한다> 《런던 스케치》, <황금 노트북> 등등. 다양한 소재를 다양한 시각으로 관찰하는 매운 눈매와 필체는 알겠는데 하여간 불편한 작가. 계속 그랬다, 나한테는. 중편 모음집 《그랜드마더스》를 읽기 전까지.
《그랜드마더스》. 2003년 작품. 레싱의 나이 여든네 살 때였다.
오매, 도리스 할매 작품 가운데 가장 내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하나 같이 이렇게 예쁘고, 수다스럽고, 기발하고, 진보적이며 감탄스럽기까지 한 책을 썼을까? 그런데 번역본 내고 7년밖에 안 됐는데 왜 출판사 예담은 벌써 이 책을 절판시켰을까? 정답은, 예담이 2017년 12월 말로, 망한 거 같다. 출판 회사를 위해서, 도리스 레싱을 위해서, 독자를 위해서 안타까운 일이다. 이 책 역시 개가실에서 어슬렁거리다 우연히 눈에 띄어 읽었다. 이것으로 도리스 레싱의 번역 단행본은 다 읽은 셈이다.
내가 《그랜드마더스》를 입에 침이 튀도록 재미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과연 젊은 시절에, 지금보다 절반 밖에 나이 들지 않은 시절에 읽었더라도 지금처럼 공감하면서, 그것도 절절하게 재미있다고 할 수 있었을지는 자신하지 못하겠다. 여든이 넘은 작가가 딱 그만큼의 세월을 묵혀 쓴 작품을 읽기 위하여 손가락으로 찍은 장맛을 구별할 줄 아는 독자의 시간도 필요했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네 편의 중편소설을 실은 책. 노년에 이른 두 할머니가 아직 중년에까지 미치지 못한 두 남성과 벌인 일종의 스와핑이자, 일종의 근친관계를 담은 표제작품 <그랜드마더스>, 계급의 벽과 삶/생활이라는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이주 흑인의 안간힘을 그린 <빅토리아와 스테이브니 가家>, 권력과 지도자 선택을 생각해보게 만드는 <그것의 이유> 그리고 가슴 속 먹줄로 남은 사랑과 실제로의 삶을 조망한 <러브 차일드>. 어느 한 작품 만만하거나 가볍거나 행복하지 않다. 앞에서 내가 아무리 이 책을 재미있다고 했어도 도리스 레싱은 도리스 레싱이다. 이이는 네 작품을 통해 무엇보다 진짜 삶, 우리가 지금 들들 볶고 있고, 살아내는 열기에 푹푹 찌고 있으며, 때론 지글지글 태워 버리기도 하는 불행의 가마솥이 어떠한 포기와 상실과 좌절을 지불하고 마련한 것인지 반 발짝 딱 떨어져 그려내고 있다.
이 가운데 표제작 <그랜드마더스>.
벡스터 만bay. 바다를 바라보고 양쪽으로 작은 곶을 혀처럼 내민 것도 모자라 정면 방향에는 군데군데 암초가 솟아 거의 언제나 바다가 얌전한 상태로 있는 낙원. 이곳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벡스터즈라는 옥호의 레스토랑이 있고 오늘도 언제나처럼 예순 즈음의 두 여자와 중년 이전 나이의 두 남자, 그리고 여자아이 둘이 산보를 겸해서 찾아온다. 여섯 명 다 금발인 걸 보면 가족이겠지? 누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그게 맞다. 할머니-아버지-딸. 로잔느(로즈)-톰-앨리스 그리고 릴(릴리안)-이안-셜리. 레스토랑의 웨이트리스 테레사는 얼마 전에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마치고 진학을 한 해 미루었다. 대학은 잉글랜드에서 다니려고 마음먹었는데, 꼭 대학을 가야 하는 것인지, 그냥 고향인 이곳에서 사는 것도 괜찮은 건 아닌지 막하 고민중이다. 가여운 테레사는 애초에 톰을 (짝)사랑하다가 이안으로 바꾸었고, 지금 다시 톰을 (짝)사랑하고 있어서. 사실 톰과 이안은 벡스터 지역에서 가장 잘 생긴 남자들이다. 그러나 이 가족 뒤쪽 테이블에 앉아 이편을 계속 바라보고 있는 농부 청년 데렉. 이이는 테레사를 연모하고 있어 틈만 나면 레스토랑에 들러 차 한 잔 마시며 바라보기만 한다. 테레사도 호감을 느끼지만 정말 원하는 건 이 가족들의 구성원이 되는 일. 그러나 결국 테레사는 농부와 결혼해 이곳에 머물기로 결심하게 될 것이다.
이 가족의 며느리 가운데 한 명인 메리가 급한 걸음으로 한 손에 편지 뭉치를 들고 언덕을 올라온다. 편지를 남편 톰 앞에 내려놓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선 메리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조금 후 메리는 두 아이의 손을 끌고 데리고 가면서 말한다. 목소리가 약간 크거나 떨렸을 수도 있다.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거예요. 당신들은 두 번 다시 아이들을 보지 못할 거예요.”
메리가 뒤로 돌아서고 멀어지자 이안이 로즈에게 이야기한다.
“일이 이렇게 된 건 전부 당신 잘못이야.”
당찬 성격의 로즈는 분노로 단단해진 웃음을 날리며 이렇게 받아친다.
“내 잘못이라고? 그렇겠지. 나 말고 누구겠어?”
이안의 아내 한나도 이런 내용을 다 알고 있지만 차마 죄인들의 얼굴을 마주할 수 없어 언덕을 올라오지 않았다. 메리와 함께 벌인 사업의 사무실에서 의구심과 초라함과 수치심이 차올라 부글거리고만 있을 뿐. 이게 대체 무슨 사달일까? 중편 <그랜드마더스>는 바로 그 내력을 이야기하고 있다.
저 반세기 전, 릴리안과 로잔느는 학교 다니면서 만났다. 잠깐의 탐색을 끝내고 서로 관계를 맺으면 누구도 자신들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될 것임을 즉각적으로 알게 되면서 곧장 절친이 된다. 이들은 오직 둘만 같이 행동하며, 공부하고, 말썽도 부리고, 운동도 해서 ‘친 자매 같다’, ‘쌍둥이 같다.’라는 말을 수도 없이 자주 듣는다. 우연히 금발머리와 푸른 눈까지 같아서. 릴은 모든 운동신경이 뛰어나 수영 챔피언으로 유럽과 해외까지 유명해졌고, 로즈는 학교 연극에서 비중있는 배역을 맡아 외향적이고 활달하며 생기넘치고 떠들썩한 성격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나란히 운동과 연극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당시만 해도 일찍 결혼하는 것이 유행이라서 로즈는 학구파에 시인 기질의 헤럴드 스트루더스와, 릴은 스포츠용품과 의류매장을 여러 개 가지고 있는 동네 재벌 테오 웨스턴과 짝이 되어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합동 결혼식을 하고, 벡스터즈가 있는 바깥쪽 곶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길 하나를 두고 마주보는 이웃으로 정착했다.
결혼을 했지만 어디까지나 가장 중요한 관계는 릴과 로즈 사이에 있다. 나머지 남편과 아들들은 보조원이거나 들러리이거나 깍두기였다.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문제가 되지 않고, 릴의 남편 테오는 체인점 관리와 구매처 방문으로 숱하게 출장을 다니며 외간 여자들과 염문을 만드느라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시인 기질이 충만한 해리(해럴드)는 계속해서 내상을 입고 있었다. 아내는 몰랐지만. 그러다 해리가 메리에게 말한다. 멀리 있는 대학에서 자기한테 교수자리를 권한다고. 메리는 자연스럽게 주말부부를 언급하고, 해리는 함께 이사할 것을 바랐다. 부부는 해리가 그곳에서 치명적으로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면 그때까지만 결혼생활을 유지하자고 합의했고, 몇 년 후 정말로 해리에게 젊은 아가씨가 생겨 이혼을 했으며, 늘 출장과 바람피우기와 전속력 운전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테오도 자동차 사고로 죽는 바람에 주체 못하는 현금을 릴에게 남겨 놓은 채 두 명 다 과부가 된다.
아들들 역시 엄마들처럼 절친으로 자랐다. 톰은 어려서부터 의젓했고 이안은 섬세하고 예민하며 까다로운 아이로 컸다. 두 아이들은 자주 같은 집에서 잠을 자고는 했다. 아버지가 갑자기 죽어버려 상처를 입은 이안은 톰의 집에서 밤 늦은 시간에 울고 있었고, 메리가 이 시간에 잠에서 깨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이안을 발견했으며, 늘 그랬듯이 그의 머리통을 감싸며 위로해주었다. 해리의 방에 뉘고 그를 도닥이며 잠들었다. 늘 그렇게 해왔으니까. 그러나 아침이 오자 이안의 눈 속에는 갈망과 고통과 허기가 가득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며칠 후, 이안은 다시 톰의 집에서 잤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잠을 잘 때쯤 톰의 집에 와서 해리의 방으로 들어갔으며 한밤중에 어둠을 더듬어 이안이로즈리의 방에 들어왔다. 그리고는 로즈의 옆에 눕더니 폭풍우 속의 구명띠인 양 로즈에게 매달렸다. 이렇게 사랑은 시작했다. 비슷하지 않은 과정을 거쳐 톰과 릴의 사랑도 시작했다. 자연스럽지 않다고? 그래도 사랑은 사랑이다. 이들의 사랑은 깊었고, 오래 갔고, 슬펐으나 나이 든 여성들의 지혜는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방법으로 그러나 고통스럽게 칼 같이 끝을 맺었다. 다만 세상엔 완벽한 건 없는 법. 결코 열지 않았던 서랍 속에 이안과 로즈 사이의 또는 톰과 릴 사이에 소통했던 편지 꾸러미가 남아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혹은 알았지만 처분할 수 없는 미련이 남았든지.
이들의 사랑을 엽기라고, 비행이라고, 추문이라고, 비윤리적이라고 흉을 보고 싶으면 흉을 보라. 세상의 모든 사랑은 사랑일 뿐. 나는 이들의 사랑을, 적절한 시기에 큰 용기로 적절하게 맺어버린 사랑이 거슬리지 않았으니.
도리스 레싱. 문장도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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