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셀의 한 가족 제안들 29
샹탈 아케르만 저자, 이혜인 역자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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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에 태어난 범띠 여사님 샹탈 아케르만은 소설가가 아니라 평생을 유명한 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 뉴욕시립대학 영화과 교수로 지냈다. 47년간 40편 이상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다. ‘남겼다’라고 쓰는 것은 아케르만이 가지고 있다가 스르르 없어진 필름도 상당 수 있다는 의미다. 보관하는 방법이 필름 원본을 둥근 양철통에 담아 창고에 쌓아두는 것이었던 시절이라 자기 공간이 없는 유명하지 않은 감독한테 이런 일은 그리 드물지 않았으리라. 문학작품으로 분류할 수 있는 두 권의 책을 출판했으며 이 가운데 첫째가 1998년, 48세의 아케르만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쓴 중편소설 <브뤼셀의 한 가족>이다. 몇 년 후 <어머니가 웃는다> 한 권 더 내고, 아케르만의 홈페이지에 가면 시나리오집 두 권을 찾아볼 수 있다.

  워낙 유명한 영화감독이라고 하나, 나는 이이의 영화를 한 편도 본 기억도 없고, 영화에 그리 깊은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샹탈 아케르만’ 대신 ‘아커만’이라는 프랑스 감독이 있는데 이 책을 읽기 바로 직전까지도 아커만이 (이름으로 짐작해) 유대인이고 남성인 줄 알았다. 샹탈 아케르만의 일생은 거의 대부분이 영화감독 커리어로 되어 있어서 작가 아케르만에 관해서는 구할 수 있는 정보조차 없다. 처음으로 영화를 만들고 30년이 지나야 소설을 쓴 아케르만은 감독 생활 내내 감독은 글을 쓸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다.

  유명 영화감독이라 필모그래피야 엄청나겠지만 이 가운데 1975년에 제작한 <잔 딜만, 코메르스가 23번지, 1080 브뤼셀>이라는 작품의 정보가 책 뒤편에 실린 “작가 연보”와 위키피디아가 서로 다르다. 책에서 “당시(1975년) 일간지 『르 몽드』는 이 영화를 ‘영화 역사상 최초의 여성 명작 영화’라 평했다.”라고 쓴 반면, 위키피디아는 영화잡지 “『시각과 음향』은 2022년 ‘가장 위대한 영화’ 비평가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한 최초의 여성”이라 했다. 아케르만은 특이한 페미니즘을 표현한 감독이라 하는데 문장에 신경을 써야할 것 같다. “역사상 최초의 여성 명작 영화”와 “1위를 차지한 최초의 여성”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 아닌가 말이지.


  샹탈 아케르만은 폴란드계 유대인 부모의 맏딸로 태어났다. 나치 치하의 아버지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고, 어머니는 외조부모와 함께 아우슈비츠에 끌려갔으며, 1942년에 외조부모는 수용소의 흰 연기의 형태로 굴뚝을 통해 하늘로 올라갔다. 어머니는 놀랍게도 그곳에서 끝까지 생존했다. 자매들과 함께. 삶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고, 트라우마가 워낙 크면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평소 말도 별로 없고 소극적이던 어머니는 그래도 오래 살다 간다. 아케르만은 평소 어머니와 특히 가까웠으며, 유대인 공동체 일원 답게 자매, 이모 등의 친척, 이웃 유대인들로 이루어진 커뮤니티를 멀리 하지 않은 듯하다.

  <브뤼셀의 한 가족>을 아케르만의 자전적 이야기가 많이 포함된 작품으로 보면, 그렇다고들 하기도 하고, 화자 ‘나’를 아케르만의 어머니로 볼 수 있다. 죽음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 어머니. 그러나 이미 부모와 남편을 떠나보낸 경험이 있는 나이든 여성. 두 번째 수술을 앞에 두고 조금은 심란한 마음을 추슬러야 하는. 큰 딸은 파리의 메닐 몽탕 가의 아파트에서 독신으로, 아이도 없이 혼자 살고, 작은 딸은 남미의 해변도시에서 남편, 두 아들로 이루어진 가족의 엄마로 바쁜 삶을 살고 있다. ‘메닐 몽탕에 결혼도 하지 않고 애도 낳지 않고 사는 딸’이 맏이, 눈치로 보아 샹탈 아케르만이고, 남미의 두 아이의 엄마가 남미가 아닌 미국에 사는 둘째딸 실비안 아케르만 같다.

  오늘 독후감에 허튼 소리가 많은 건, 길지 않은 중편소설 한 편만 달랑 실린 책이기도 하고, 스토리도 거의 없는 작품이라 할 말이 별로 없어서 그렇다. 미리 사실을 고해야 하는데 이제야 밝히는 건 아주 약한 사기수법이기도 하지만 이해해주시라.

  화자 ‘나’는 유대인. 부모가 1942년에 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했고, 자신만 살아남았다. 자매들은 팔레스타인으로 갔거나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갔거나 하여간 멀리 산다. ‘나’는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해야 하는데, 메닐 몽탕에 사는 딸이 기차를 타고 와서 나를 병원까지 데려다 줄 것이다. 그 아이는 남편이 산, 벤츠는 아니고 아우디지만 운전을 잘 하지 못하는 남편이 그래도 사고 한 번 내지 않고 몰고 다니던 남편의 차를, 남편이 죽은 다음에 자기가 파리로 가져갔다. ‘나’나 메닐 몽탕에 사는 딸이나 운전면허는 있지만 운전을 해본 적이 (메닐 몽탕에 사는 딸)거의 없거나 (‘나’)없다. 메닐 몽탕에 사는 딸은 그래서 기사를 고용해 타고 다니다가, 기사가 큰 사고를 내서 차는 파리의 사고차량 보관소에 아직 폐차 처리를 거치지 않은 상태로 놓여 있다고 들었다. 메닐 몽탕에 사는 딸은 책이 끝날 때 즈음해서 기차 1등실을 타고 오는 대신 친구가 파리에서 브뤼셀까지 자기 차에 태워 데려다 주고 자신은 다시 차를 운전해 파리로 돌아갔다.


  ‘나’의 두번째 수술. 두번째 수술이라는 말이 독자에 전해주는 두번째 수술의 위험성. 여차하면 자신의 생명이 끝날 수도 있다는 의미는 ‘나’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만감이 교차하겠지. 그러나 ‘나’는 여기서 죽음을 떠올린다. 역자 이혜인이 해설을 통해 ‘2인칭의 죽음’이라 이야기하는 남편의 죽음. 뇌졸중으로 한 번 쓰러져 입이 돌아간 남편. 이 책 <브뤼셀의 한 가족>을 출판한 해가 1998년. 2년 전에 아케르만은 아버지를 여윈다. 책 속 ‘나’의 남편이. 남편은 몸이 회복되는 것처럼 보이다가 점점 쇠해져 이젠 역시 늙은 ‘나’가 간호하기에 힘이 벅차다고, 메닐 몽탕에 사는 딸이 판단해 남편을 요양병원에 보냈지만, 그곳에 가 볼 때마다 ‘나’의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데려온다. 그걸 알고 메닐 몽탕에 사는 딸이 득달같이 쫓아와, 엄마도 같이 죽고 싶은 거냐고, 야단을 치더니 다시 요양병원으로 데려가는 걸 ‘나’는 막을 수 없었다. 남편을 돌보다 옆구리 뼈에 이상이 생겨서. 요양병원의 건강한 간호사가 마음에 든다. 남편을 번쩍 들어 자세를 바꾸어 준다. 그러나 남편은 다시 입이 돌아가는 것을 시작으로 천천히 죽는다. 메닐 몽탕에서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은 딸이 오고, 남미에서 결혼도 했고 아들도 둘 키우는 딸도 남편과 아들들을 데리고 날아왔고, 멀고 가까운 곳에 사는 친척들도 왔으며, 브뤼셀에 거주하는 유대 커뮤니티 사람들도 빠짐없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빠짐없이 찾아와 조문했다. 팔레스타인 사는 자매 하나 빼고.

  이제 독자는 ‘나’가 1인칭, 즉 ‘나’의 죽음이 ‘나’에게 그리 중요한 것 같지 않다. 오히려 2인칭인 남편의 죽음, 그리고 ‘나’와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연상하는 것. 더 나아가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다중의 죽음, 그게 수용소에서 가스에 질식해 죽은 유대인 연대의 인물들일 수도 있고, 크고 작은 전쟁에서 의미없이 총알받이나 대포밥이 된 청년일 수도 있고, 와중에 떨어진 폭탄이 터져 죽은 여성, 노인, 아동일 수도 있지만 결코 유대인의 무기에 죽은 팔레스타인 거류민일 수는 없는 사람들의 죽음으로 확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다시 ‘나’가 수술을 위해 입원해야 하는 시기. 이번에도 메닐 몽탕에서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낳지 않은 채 혼자 사는 딸과 남미에서 결혼도 하고 아들도 둘을 낳아 키우는 딸이 가족을 다 데리고 ‘나’를 보러, 응원하러, 완쾌를 빌어주려고 왔다.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를 한다. 많은 이야기. 개중엔 진실이 아닌 것도 있고, 진실이긴 하지만 ‘나’가 아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도 있고, 사실이 아닌 것도 있고, 사실이 아니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고, 처음부터 거짓말인 것이 확실하긴 해도 좋은 의미로 하는 거짓말도 있다. 이렇게 2인칭 또는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혹시 죽음, ‘나’의 2인칭과 가까운 사람들이 벌써 경험한 죽음으로 이끌지도 모를 수술 바로 전에 ‘나’를 위안하기 위해 모여 있다.

  이게 다다. 내 취향에 잘 들어맞는다. 별점 다섯을 줄 정도로. 그러나 주의하실 필요가 있으니, 진심으로 말해서 당신한테는 아닐 수 있다. 그럴 위험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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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6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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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칠리아 람페두사의 11대 영주이자 12대 팔마 공작Duke인, 주세페 토마시는 시칠리아 팔레르모에서 1896년에 태어났다. 이 정도면 정말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거다. 좋았겠다. 하지만 귀족도 마냥 다 행복할 수는 없는 거라서, 집안 식구들은 귀족 값을 하느라 소위 예절과 법도를 내세워 부모자식 간에 살뜰한 애정을 표하지 않았다. 냉랭한 가족 사이에서 자란 주세페 토마시는 어린 시절부터 말이 없고, 고독하고, 수줍음이 많고, 조금은 대인기피적 성격을 지녔다. 혼자 뭐 했느냐고? 물론 극소수의 친구는 있었지만 대부분 책을 읽고 사색에 빠진 소년이었단다.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것보다 사물과 같이 있는 편을 좋아했던 소년은 죽기 3년 전인 1954년에 깨어있는 16시간 가운데 열 시간은 혼자 보냈다고 썼을 정도. 이 지독한 외골수 대인기피증 환자가 유일하게 쓴 소설이 <표범>이다.

  1896년생이니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엔 18세. 당시 기준으로 전쟁하기 딱 좋은 나이다. 19세이던 1915년에 드디어 징집당해 포병 사병으로 있다가, 거 별일이다, 영주의 직계 자손이자 현 공작의 외아들이 사병으로 뽑혀 간 게 말이 돼? 하여간 포병 사병이었다가 1917년에 장교 교육을 받은 다음에야 중위 계급장을 달고 카포레토 전투에 투입되었다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포로로 잡힌다. 빈 근교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토마시는 전쟁 막바지에 그곳에서 탈출, 걸어서, 즉 알프스를 두 발로 넘어 돌아왔다고 한다. 좀 궁금하다. 정말로 (물론 해협 또는 나폴리에서는 배를 이용했겠지만) 반도의 장화끝이나 나폴리까지 사람을 꺼리는 성격의 귀공자가 걸어서 갔을까? 아니면 국경만 넘어 엄마한테 전보를 쳐 기차를 탔을까? 뭐 중요한 건 아니다.

  유일한 소설작품 <표범>과 연결할 수 있는 작가의 바이오는, 여름에는 몇 달간 엄마의 소유였던 시골 팔라초에서 지냈다는 것. 팔라초. 영주의 영지 안에 있는 저택을 말하는데, palazzo를 굳이 우리말로 하자면 궁전이나 전당 정도. 대략 규모를 말하자면 팔라초 건물의 길이가 2백 미터 또는 그 이상이라니 궁전이라고 해도 그리 틀리지 않은 규모이다. 작품에서는 살리나의 영주 파브리초 코르베라가 식솔들과 조카 탄크레디를 데리고 여름을 보내려 돈나푸가타 팔라초에 가서 가을까지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 제일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주세페 토마시가 19세기에 태어났으니 이미 귀족의 시대, 즉 지주-소작인으로 대표하는 토지 매개 부르주아의 시대는 종막을 고하고 있어서 앞 문단에서 거론한 소설 속 사실상의 주인공 살리나 영주 역시 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걸 알고, 그것을 수용하며 지낸다. 가문의 재산도 이미 많이 사라졌고, 사라진 재산은 새시대에 맞는 두뇌가 팽팽 돌아가는 신진 사업가의 재산으로 귀속이 되던 시기에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던 보잘것없는 신분의 신흥부자와 혼인을 통한 친척의 연을 맺기도 한다. 주인공 살리나 영주의 모델이 작가의 증조부였다고. 증조부를 거쳐 조부, 부친 그리고 자기 대에 와서는 거의 모든 재산이 사라진 상태였는데도, 여전히 팔레르모의 팔라초는 토마시가 소유하고 있었다니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는 게 사실은 사실인 모양이다.

  몇 가지가 더 있지만 독후감이 너무 길어진다.


  1860년 5월. 첫 장면은 팔레르모에 있는 살리나 가문의 저택이다. 이 당시 시칠리아는 부르봉 왕조 치하에 있었다. 사실 시칠리아 사람들은 자신을 이탈리아 국민이라기보다 시칠리아인이라는 생각이 더 강했다. 그러나 시칠리아는 말 그대로 지리적인 여건 때문에 이 나라한테 터지고 저 나라한테 치이며 자기들 생각으로는 2천년 동안 식민지로 지내왔던 터이다. 이건 작중 살리나 영주 돈 파브리초의 대사를 읽고 새로이 알게 된 내용이다. 그리하여 돈 파브리초한테 더 중요한 것은 시칠리아를 누가 다스리는지가 아니라 어떤 형태의 경제구조인가 하는 점이었다. 시대는 리소르지멘토Resorgimento 즉 가리발디에 의한 이탈리아 통일 운동이 한참일 때였다. 이미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 정치, 경제적으로 밀려오고 있다는 것을 체감한 돈 파브리초는 자신이 속한 계급이 몰락하고 가문의 재산도 사라지고 있는 것을 바라만 볼 뿐 대응책을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이였다.

  키가 매우 크고 힘도 장사이지만 결코 비만하지 않은 돈 파브리초. 어려서부터 배운 귀족의 범절을 지키기 위하여 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대신, 식사를 하며 포크나 숟가락을 가볍게 구부려버리는 습관이 있어 팔레르모의 은식기 세공업자는 돈 좀 만졌다고 한다. 고인이 된 어머니 카롤리나 영주부인은 올리브색 피부와 금발머리를 한 독일인으로 아들에게 자부심과 지성을 물려주었고, 아버지는 기꺼이 경솔함과 호색가의 기질을 넘겨주었다. 근데 시절이 19세기 중엽. 대 귀족 돈 파브리초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아내 마리아 스텔라는 침대 위에서 남편의 품에 안기기 전에 반드시 십자성호를 그어 김을 빼놓는 것으로 시작해, 어느덧 절정에 올라 까무룩 한 고비 넘어갈 찰나가 되면 이렇게 콧소리를 냈다고 한다.

  “예수 마리아!”

  잘 하다가도 저절로 죽겠지? 근데 이게 다가 아니고, 결혼을 해 아이 일곱을 낳았는데, 남편 돈 파브리초는 아직 아내 마리아 스텔라의 배꼽도 한 번 못 봤다는 거다. 돈 파브리초는 한탄한다, 이게 말이 되느냐고. 근데 그걸 왜 독자한테 물어봐? 자기부터 반성을 해야지. 마리아 샤워할 때 등 한 번 밀어줘 봤어? 에휴, 말을 말자.

  반면에 팔레르모에 있는 미모의 비싼 매춘부 마리안니나는 정말로 엑스터시에 도달했는지 그냥 고객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그랬는지 한 고비를 넘어갈 순간 “오, 나의 영주님!” 이렇게 소리쳤다니 이 아니 색다르겠냐고. 기분도 좋고 말이지. 다시 말하는데 19세기 중엽의 대 귀족 입장에서. 키 크고 힘 좋은 남자의 솥뚜껑만한 손이 완력을 쓸 때와 포크와 숟가락을 휘어버릴 때만 유용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여인을 애무할 때는 더 섬세했는데, 이 순간 말고도 천체망원경으로 밤하늘을 탐색하며 렌즈를 조절할 때는 더더욱 세밀했다. 영주는 날 때부터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타고나, 이것을 천문학 연구에 사용했다. 영주의 천문학은 당시 부르봉 왕가의 시칠리아 총독은 물론이고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영토로 하고 1860년 현재 프란체스코 2세가 다스리는 양시칠리아 왕국의 자랑일 정도였다. 평생 화성과 목성 사이의 소행성 두 개를 발견해 각 살리나와 즈벨토라고 명명했는데 딸과 키우는 개 이름이었다나. 그러니까 살면서 손끝에 물 한 방울, 흙 한 번 묻히지 않고 소작인들이 바치는 소작료로만 가지고 하고 싶은 일 빠짐없이 다 하고 온갖 사치를 향유하는 전형적 봉건 농촌 부르주아였다는 말씀.

  이 영주한테 탄크레디라는 이름의 조카가 있다. 활발하고 다른 계급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는 화통한 성격의 잘생긴 청년. 영주는 자기 장남, 극도로 우울해 보이는 수척한 얼굴의 프란체스코 파올로 공작보다 평소 사랑했던 누나의 아들인 탄크레디를 더 좋아했다. 누나는 이웃한 영지의 영주와 결혼했다. 그러나 거대한 재산을 단숨에 말아먹은 매형은 저택 한 채만 달랑 남기고 죽어 탄크레디 혼자만 달랑 남아, 영주가 후견인으로 조카를 말 그대로 부족함 없이 키웠다. 그러나 피는 속이지 못한다고 별로 건전하지 못한 청년들과 어울리며 도박을 즐기고 바람직하지 않은 여자들과 어울리는 것도 영주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조카를 향한 애정이 조금이라도 준 건 아니다.

  어느 날 탄크레디가 외삼촌을 찾아와 말한다. 이제 떠나겠다고. 가리발디의 붉은 셔츠단에 들어가 왕조를 무너뜨리는 데 힘을 쏟기로 맹세했단다. 탄크레디는 왕정주의자. 근데 부르봉 왕조를 무너뜨리겠다고? 그렇다. 대신 샤르데냐 왕국을 위해 싸우겠다는데, 복잡한 이탈리아 통일운동사에서 아마 훗날 통일의 기반 역할을 할 것으로 기억한다. 잘생긴 탄크레디는 사실 알고보면 기회주의자일 수도 있다. 정치적인 면도 그렇고, 연애관계도 마치 영주의 둘째 딸 콘체타와 결혼할 듯하다가 정작 진짜 결혼은 신흥부르주아로 등장하는 옛 시절의 천민이자 난데없이 남작의 후계를 자칭하는 돈 세다라의 아름다운 외동딸 안젤리카와 해서 훗날 장인의 재산을 다 거머쥐어 아빠가 잃어버린 팔코네리 가의 재산을 충당한다.

  그러나 소설은 특정 등장인물의 성쇠나 인생을 보여주는 것에 있지 않고, 작가 자신의 계급인 대 귀족의 몰락 과정을 그 쓸쓸함을 차분하게 소묘한다. 따라서 진정한 주인공은 살리나의 영주 파브리초 코르베라나 탄크레디 팔코네리가 아니라 귀족 계급 자체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망할 계급이 당연히 망하는 장면이다. 마지막 진정한 귀족이 쓴, 그것도 잘 쓴 소설이라 마치 독자 자신도 작가를 따라 스스로 마지막 귀족이 된 듯, 이 계급이 서서히 망가지는 장면을 읽으면서 속으로 허전하기도 하고, 마찬가지 말이지만, 쓸쓸하기도 할 터이나, 독자여, 특히 당신이 진보의 분자라면 현혹되지 마시라. 망가질 계급이 당연히 망가진 일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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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1-17 06: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독후감:
월요일. 샹탈 아케르만, <브뤼셀의 한 가족>
화요일. 레오 페루츠, 《밤에 돌다리 밑에서》
목요일. 힐러리 맨틀, <울프홀>
금요일. 폴 린치, <예언자의 노래>
 
시체들을 끌어내라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3
힐러리 맨틀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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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힐러리 메리 톰슨은 1952년 잉글랜드 더비셔에서 가톨릭을 믿는 아일랜드계 톰슨 부부의 딸-아들-아들의 맏이로 태어났다. 그러면 나같이 순진한 독자들이 생각하기로, 톰슨 양이 맨틀 군과 결혼해서 힐러리 맨틀이 됐구나, 이럴 텐데, 더 재미있는 내력이 있어서 소개한다. 힐러리 점점 자라 칠 세 되었을 때, 엄마 마거릿이 자기 애인 잭 맨틀 씨를 집으로 불러들였다. 하숙생으로 들어와 애인이 된 것이 아니고, 애인더러 자기 집으로 와서 살라고 한 것. 왜 그랬을까? 가톨릭이 이혼을 허락하지 않아서? 자세한 건 모르겠고, 마거릿은 애인 잭 선생을 자기 침실에 들게 하고, 남편 헨리한테 다른 방에서 자라고 주문했다. 이렇게 4년을 살다가 (이쯤 되면 아빠도 보살이다, 보살!) 동네에 소문이 파다하게 나니까 더는 남우세스러워 계속 살지 못했는지 이사를 결심했는데, 당연히 엄마와 잭 맨틀 씨, 그리고 세 아이가 함께 체셔의 로밀리로 옮겨갔고 더비셔 옛집엔 아빠 홀로 남았다. 이게 힐러리 생전에 마지막으로 목격한 아빠의 모습이었단다. 이후 잭 맨틀은 아이들의 비공식 계부가 된다. 비공식? 역시 여전히 이혼하지 않은 상태였나? 그건 모르겠다. 힐러리 메리 톰슨은 자연스럽게 힐러리 맨틀로 성을 갈았다.

  이후 런던 정경대와 셰필드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지질학자 제럴드 맥어윈과 결혼해 보츠와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9년간 살다 다시 돌아와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특기할 만한 것으로 토머스 크롬웰과 헨리 8세 시대를 조망한 역사극 삼부작 <울프 홀>, <시체들을 끌어내라> 그리고 <거울과 빛> 모두 부커 상 최종심까지 올라가 이 가운데 <울프 홀>과 <시체들을 끌어내라>가 2009년과 2012년에 상을 받아 상금으로 각 5만 파운드씩 10만 파운드를 벌었다.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앞의 두 작품을 세계문학 시리즈로 출간을 했고, 이 소식을 듣자마자 동시에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했는데 두번째 작품이 먼저 도착하는 바람에 <시체들을 끌어내라>를 먼저 읽게 됐다. 이 책을 거진 다 읽어가는 도중 1부 <울프 홀>이 들어왔다고 연락이 올 건 뭐람. 이런. 하긴 뭐, 인생이 다 그렇지.

  2022년에 뇌졸중 합병증으로 생을 접었으니 이이의 나이 70. 마거릿 대처 살해 같은 평소 발언/창작 등을 보면 한 편으로는 젊은 시절의 청년공산주의연맹 회원인 것도, 20대 초반의 정신병력도 이해가 간다. 가톨릭 교도로 나고 자란 힐러리의 고민 가운데 하나는 왜 신부와 수녀가 친절한 사람들이 아닌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도 있다고. 당연한 것을 몰랐다. 사제 그룹은 제1 그룹이었거든. 십자군 전쟁 이후부터 말이지. 하여간 힐러리 메리 맨틀은 종교와도 확 금을 그어버렸다. 여기, 넘어오지 마! 죽을 때 그래서 무서웠을까? 이 사람의 일생이 웬만한 소설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하다. 스물일곱 살 때 폐경을 맞아 출산을 경험하지 못한 것은 말도 꺼내지 않았다. 출산하지 “않은” 것과 “못한” 것은 심각하게 다른 이야기이다.


  <시체들을 끌어내라>는 헨리 8세 시절 가운데 종교개혁을 감행, 성공회를 국교로 해 로마 교황청하고 완전히 등을 댄 시절. 그러니까 캐서린과 공주 메리가 왕비-공주 자리에서 쫓겨나 유배당하고 있던 시절, 1535년부터 “내 목은 가느니까 힘들지 않을 거다.” 영화 <천일의 앤>에서 앤 불린이 망나니에게 이리 말하고 어여쁜 얼굴과 금발 머리카락을 신체에서 툭, 분리시킨 1536년 봄까지의 일을 당시 내무부장관으로 헨리8세를 위하여 종교개혁과 캐서린과의 이혼, 그리고 앤 불린을 처형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토마스 크롬웰의 시각으로 시절을 조망한 작품이다. 그러니 3부작의 1부 격인 <울프 홀>을 먼저 읽지 못한 게 안타깝지 않을 수 없었다. 1부에서는 앤 불린의 처형보다 훨씬 의미있는 잉글랜드의 종교개혁과 캐서린 왕비와의 혼인무효 소송을 다루었을 테니. 3부에선 드디어 1540년, 토끼를 잡았으니 사냥개를 삶아라! 토사구팽, 볼 일 다 본 헨리8세가 크롬웰의 목 역시 뎅겅 자르겠지.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크롬웰을 죽인 건 실수였어, 내 잘못이었어. 우는 시늉 한 번 하고. 그냥 내 짐작이다. 얼른 <울프 홀>을 읽으면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을 것.

  1535년 9월. 첫 장면은 광활한 잉글랜드 벌판에서 매와 ‘그레이스 크롬웰’과 ‘앤 크롬웰’이라고 이름 지은 사냥개를 데리고 왕과 내무장관 토마스 크롬웰이 사냥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왕은 토머스 모어의 참수형에 서명을 하고, 그의 목이 런던교에 걸렸다는 보고를 들은 다음 화이트홀을 떠나 울프 홀에 도착해 서부 잉글랜드의 주들을 광범위하게 아우르는 순행을 시작했다. 훗날 세계사에 기록될 격변에도 불구하고 튜더왕조는 50년간 전쟁 없는 평화를 누리고 있는 중이었다. 없기는 왜 없었겠어? 그냥 말을 그렇게 하는 것이지. 스페인 왕가 출신이며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이모이기도 한 캐서린 왕비와의 혼인을 무효선언 했으니 잉글랜드가 태평성대 반 세기를 외치고 있더라도 이제는 로마 교황청은 물론이고 루터파에 의하여 종교개혁이 이루어진 몇몇 작은 공국을 제외한 강대국들, 스페인, 프랑스, 신성로마제국과 팽팽한 긴장의 끈을 유지하는 것도 벅찬 시기이기도 했다. 만일 스페인-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가 연합을 해 그들의 배와 대포가 영불해협을 건너기라도 한다면 잉글랜드는 괴멸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긴장감이 가장 강력한 내무장관 토마스 크롬웰을 고민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건 바깥 사정.

  국내 사정은 점입가경이다. 천생 여우인 앤 불린이 헨리 튜더를 꼬드겨 정실부인을 내치게 만들고 그 자리를 꿰찬 건 지난 일이라 그렇다 쳐도, 앤이 혼전임신한 엘리자베스 하나만 떨구고는 이후에 회임할 때마다 태를 떨구기만 한다. 헨리가 캐서린하고 20년을 살고도 혼인무효 또는 이혼을 결정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들을 낳지 못해서라고 주장한다. 앤 불린은 이 기미를 재빨리 알아차리고 사냥을 떠난 왕을 수행할 때 헨리의 팔뚝을 톡 건드리더니, 숲 속에서, 나 잡아봐라, 하고는 쪼르르 더 깊은 숲으로 도망갔던 것. 큰 키의 거구이며 힘도 장사인 헨리는 어 이거 봐라, 싶어 냅다 달려가 앤을 한 손에 잡았는데 포동포동하지만 골격이 작은 앤은 그만 풀숲에 폴싹 쓰러졌고, 그래서 우연인지 고의인지 하여간 헨리 왕이 쓰러진 앤의 위를 덮친 형국이었는데 거 참 신기하지, 그때부터 앤의 몸엔 있을 게 없어지고 조금씩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던 거다. 그리고 뭐라 떠들어대기 시작했냐 하면 내 배 속엔 헨리의 아들이 자라고 있다! 이러니 서둘러 혼인을 하지 않을 수 없기도 했겠지. 앤의 호언장담대로 아들이 태어나면 이미 16세 사생아 해리 리치먼드 공작이 있기는 하지만 정실 후계 아들을 두고 싶은 욕심이 하늘을 찌르는 왕인데 말이지. 그래서 잽싸게 토머스 모어의 목을 쳐가며 앤을 왕비로 만들어주었건만 태 속에서 나온 건 삼신할미가 스윽, 칼집 낸 자국밖에 없는 엘리자베스였으니 헨리의 실망이야 뭐.

  천성이 경박한 앤은 정식 왕비가 된 후에 남편 헨리한테 바락바락 기어오르기도 한 모양이다. 성질이 급하지만 날 때부터 신사로 교육받은 헨리. 그럼에도 화딱지가 하늘을 찌르는 건 숨기지 못했다. 자기가 왕인데, 무오류의 존재인데 비천한 출신의 왕비가 바가지를 긁으니 속이 좋을 리가 있나? 그래 가끔 격노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이럴 때마다 앤이 국면의 개선을 위해 내세운 무기가, 헨리, 내가 왕자를 배서 예민해졌나 봐. 홍홍홍. 그럼 이때부터 몇 달간 왕과 궁정은 기대를 크게 갖기 시작하고, 임신한 왕비와 동침하는 건 잉글랜드 궁중예법에 어긋나는 일이라 헨리8세는 다른 무수리들을 찾아 별의 별 성적 취향을 만족시키면서도, 아들, 아들, 제발 떡두꺼비 같은 아들 하나만 뽑아라, 벙글벙글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지만, 아뿔싸, 그때마다 정말 유산인지, 아니면 애초에 임신이 허위 주장이었던지 어느 한날 앤의 치마는 선혈로 적셔지고 앤은 꼬챙이처럼 말라간다.

  아무리 미모의 얼굴과 체형을 가졌다고 하지만 결혼생활에 아내의 미모가 갖는 효용기간은 의외로 짧다. 헨리 8세도 마찬가지였다. 천성이 경박하고, 거만하고, 사치스럽고, 하고 싶은 건 몽땅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앤 불린의 경우엔 효용기간이 더욱 짧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권력에 대한 욕심이란. 캐서린 전 왕비가 빨리 죽었으면 호시탐탐 모종의 기회를 노리는 것도 모자라, 몸이 쇠약해진 캐서린이 언제 죽을지 궁금증이 넘쳐 내무장관한테 직접 가서 보고 얼마나 더 있어야 진짜로 죽을지 나한테 얘기 좀 해주셔, 명령 비슷하게 부탁하기도 한다. 이걸 바보도 아닌 왕이 모를 수 있을까? 여기에 하나를 보태 또 임신을 했다, 그러고 또다시 유산을 했다면서 증거로 피투성이 무슨 작은 형체의 것을 왕의 시종한테 보여주기까지 하니, 이것도 한두 번이지, 16세기답게 일종의 미신으로 포장한 의심이 왕의 마음과 뇌를 부식시킨다. 앤이 시종들과 놀아나는 거 아냐? 저게 진짜 왕의 정자로 만들어진 거야? 정말로 이렇게 믿었다는 게 아니라, 이제 앤 불린과의 사이에 염증이 난 헨리의 심정을 알아챈 대신들이, 주로 크롬웰이 악역을 담당해, 크롬웰과 그 일당들이 이런 스토리를 만들어 간다.

  왕비 앤과 젊은 시종들. 이들은 순전히 농담으로 프랑스 궁정에서 일한 전력이 있는 앤 불린의 성적 방종, 처녀 시절 헨리 퍼스와의 연애 같은 것으로 앤 불린은 결혼 당시 처녀가 아니었으며, 심지어 엘리자베스의 진짜 아빠도 헨리가 아닐지 모른다는 것에서부터, 젊은 귀족 출신 왕실의 시종 가운데 평소 크롬웰한테 불손하기 짝이 없던 프랜시스 웨스턴, 브래러턴 등과 농담을 하면서 왕이 죽으면 너하고 재혼할 지도 모르지, 감히 왕의 죽음을 입에 올리는 반역을 도모하기도 하는 거다. 적어도 이 말을 입에 올린 건 사실이라 실제로 웨스턴과 브래러턴이 앤의 침대에 올랐는지는 다음으로 하고, 농담 한 마디에 불쌍한 두 청춘은 목이 달아나게 생겼던 거다. 하나 더. 앤의 친동생 로치퍼드 경 조지. 앤이 프랑스에 오래 있어서 낯이 익지 않은 로치퍼드 경 조지는 다 성장해 누나 앤을 보고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미인이라서 더욱 끌려 육체적으로도 가까워진다. 어려서부터 함께 자랐다면 어림도 없었겠지만 남매의 정이 없어 그럴 수 있었다. 이건 심하게 비위가 틀어진 한 여인, 바로 로치퍼드 경의 아내이자 앤의 올케인 로치퍼드 여사의 주장이다. 이 여사님이 앤의 시녀 가운데 한 명이라 크롬웰에게 쪼르르 달려가 거짓인지 아닌지 하여간 고자질을 하기를 둘이 키스를 했는데, 그게 보통 키스가 아니라 텅 슬라이딩 키스여, 텅 슬라이딩. 프랑스 식! 앤이 헨리하고 잘 때도 프랑스 식으로 한 거 알아?

  왕은 노골적으로 시모어 가문의 딸이자 앤 왕비의 시녀로 일하고 있는 제인 시모어에게 꽂혀 있는 중이었다. 앤과 달리 전혀 곁을 주지 않는 여인. “예쁠 것 없고 아무렇지도 않은 사철 발벗은” 이미지. 화려하고 사치스럽고 거만하고 그래서 천해 보이기 쉬운 앤에게 질려 이제 정반대의 모습에 혹 빨려들어간 상태. 왕은 화이트홀의 자기 방, 큰 책상에 앉아 직접 왕비 앤 불린의 반역죄에 대한 기소장을 구술해 쓰게 하고, 서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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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5-01-16 07: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울프홀 샀는데 전체3부작 훑어주시고 2부 내용 정리해주셔서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힐러리 맨틀의 개인사 또한 평범하지 않네요. 친아버지는 왜 저런 수모를 당하고도 같이 살았는지...엄마도 웃기고 이해가 안가지만 폴스타프님 항상 하시는 말대로 뭐 그게 인생이지요. ㅎㅎ

Falstaff 2025-01-16 16:33   좋아요 0 | URL
울프홀 보다 이 책이 조금, 많이는 아니고요 조금 더 재미 있더라고요. ^^
힐러리의 개인사는 다분히 프랑스 적인데 말입죠. ㅋㅋㅋㅋ 뭐 인생입죠. ㅋㅋ

페넬로페 2025-01-16 08: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3부작으로 구성된 작품을 쓴 작가가 많은데, 읽는다 하면서도 실행이 잘 안됩니다 ㅠㅠ
와우, 이 작가의 성장시절도 만만치 않네요.
기회되면 순서대로 읽어봐야겠어요.
역사적 내용이라 흥미롭습니다^^

Falstaff 2025-01-16 16:36   좋아요 1 | URL
잉글랜드. 저 멀고 먼 섬나라에서 있었던 미신 시대의 이야기들, 재미 있지만 우리나라 중종 때 김개시나 숙종 시절의 장희빈 만하려고요. ^^

stella.K 2025-01-16 1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진짜..! 근데 알고 보면 상상이상 기절초풍으로 사는 사람도 많더군요. 근데 스물입곱에 폐경이라니 어쩌다 그랬을까요? 그럼 몸이 평생 안 좋았겠어요. 그래도 70을 살았다면 나름 오래 살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이 사람 책 저도 읽어 보려고 하는데 역시 재밌을 것 같아요.

Falstaff 2025-01-16 16:41   좋아요 1 | URL
저는 아직도 불임 부부에게, 그게(불임이) 아이가 없는 게 너희들한테 축복이라고 멘트를 날린 공고등어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답니다.
이 양반의 종교개혁을 비롯한 헨리 8세 시대의 이야기... 그냥 재미있지만 별로 재미는 없는 걸로... 그래도 이게 늑대궁전보다는 낫더라고요. ㅎㅎ

2025-01-16 2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1-17 0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1-17 07: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함수의 값 : 잎이와 EP 사이 - 백승연 희곡 반올림 42
백승연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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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승연은)1964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에서 생화학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즈음해서 처음 써 본 희곡이 덜컥 연세춘추 오화섭 문학상에 당선되는 바람에 그때부터 글 동네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방송국, 영화판, 신문사, 잡지사, 인터넷 서점을 기웃거리며 잡다한 글쓰기를 계속하다 본격적으로 문학에 입문한 지는 얼마 안 됐다.”라고 하는데, 이게 언제 업데이트한 정보인지 모르겠다. 환갑이 넘은 작가이니 지금 기준으로 말하면 “꽤 됐다.”라고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2005년 '마로니에 전국 여성 백일장'에서 아동문학 부문 장원을 한 적이 있다. 책방에 작품을 검색해보면 단행본 두 권, 공저 한 권이 뜬다. 청소년과 아동문학에 전념하는 거 같다.

  과학을 전공한 사람이 졸업을 앞두고 한 번 써본 희곡을 투고했는데 이게 학보사 주최이긴 하지만 문학상을 받았으면, 그거 참, 고민했겠다. 비록 학창시절 내내 문과대학을 기웃거리며 보냈다고 해도 졸업 후 직업 선택 같은 것에 영향을 끼칠 수 있었을 거 같다. 속내야 모르겠지만 이이는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야 과학 공부를 열심히 했다니까 사회의 첫발은 문학이 아니었을 듯. 그래도 언젠가는, 하면서 계속 꿈을 키웠겠지. 그러다가 2007년에 동화 <한눈팔기 대장, 지우>를 출간하고, 청소년용 단편소설 <잎이와 EP 사이>를 출판사에 투고했다가, 출판사로부터 장편이나 본격적인 단편으로 다시 써보라고 권유를 받았다 한다.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흘러 어느새 2018년이 되었을 때야 백승연은 그걸 희곡으로 만든 <함수의 값: 잎이와 EP 사이>를 세상에 보였으니 세월도 무심하지 극작가는 어느새 54세가 되었구나. 또 6년의 세월이 더 흐른 다음에 한 독자의 눈에 띄어 읽혔다.


  책가게의 작가소개 끝 무렵에 “요즘은 희곡과 돌, 나무, 새 그리고 또다시 수학에 눈을 반짝이며 지내고 있다.”라고 했다. 중학교에 올라가면, 요즘엔 초등학교에서도 가르치는 모양이지만, 방정식이 나오고 미지수 x, y, z가 새로이 등장하는데, 이 알파벳들이 그동안 끝도 없이 고생시키던 덧셈과 뺄셈, 곱셈의 지루함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은혜로운 혜택인지 모르는 아이들은 수학적으로 날 샌 거다. 그때부터 수학은 실질적인 삶과 영영 이별을 하고 누가누가 더 머리가 좋은 지 단기필마의 검법을 다루기 시작한다. 나이 쉰이 넘어 다시 수학이라는 두뇌경연의 무대에 뛰어들다니 놀랍기도 하다. 작가가 취미로 수학을 하는지 무슨 사연이 있어 본격적으로 수학을 공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유럽에는 취미생활로 수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꽤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간이 저 17세기 프랑스 사람 피에르 드 페르마.

  책의 제목으로 “함수의 값”을 선택했다. 그렇다고 극 중에 수학 강의가 등장하는 건 아니고, 함수가 수학의 정밀함이라는 이상세계를 설명하는 데 가장 수월하다고 여긴 듯하다. 주인공인 고등학생 윤이수가 이 수학의 이상세계, 오직 딱 하나, 순정한 한 점, 딱 한 곳 말고는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뒤로 돌아갈 수도 없는 절대 절명의 벼랑 끝 속에 살고 있다. 수학 말고는 다른 것엔 조금의 관심도 없는 아이. 당연히 이수의 지난 시간 속에 여러 일이 있어서 지금의 이수가 생겼을 것이고, 작품은 그것을 쫓는다. 네 살 무렵 이수가 아닌 은표라는 이름이었을 때, 자기가 만든 레고 블록 성 속에 자그마한 초록 인형을 한 인격체 삼아, 이름을 ‘잎이’라고 했다. 은표의 어린 시절에 아주 드물게 친절했던 놀이교구선생은 ‘잎이’를 알파벳으로 EP라고 하자고 한 적이 있어서 함수의 값이 잎이와 EP 사이가 되었을까? 하여간 그렇다. 혼자 레고 블록 성 속의 잎이와 놀던 때, 옆방에서는 엄마와 아빠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면서 지금 당장 도장 찍고 나가! 돌이킬 수 없는 부부싸움을 하고 있었다. 이로부터 몇 년이 지나고 엄마는 나이는 좀 들었지만 돈은 무지하게 많은 남자와 얽혀 재혼을 했고, 은표도 새로이 윤이수가 되었으며, 수학특기생으로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최고 명문의 자립형사립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이 자사고의 여학생 기숙사에서 만난 룸메이트 강서인. 이 아이는 시골에서 기차 타고 올라온 이른바 ‘사배자.’ 이게 무슨 말인지 몰라 검색해보니 “사회적 배려 대상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등록금 비싸기로 악명이 높고, 그렇다고 돈만 많아서 들어갈 수도 없는 자사고이지만 나름대로 사회에 어필하기 위해 소수 학생을 사배자 전형으로 뽑기도 하는 모양이다. 서인이 이 줄을 타고 입학했으니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온갖 학원을 섭렵하고, 중학교 들어가기 전에 수학의 정석과 성문종합영어를 뗀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게 됐으니 이게 경쟁이 되겠어? 입학하기 전에 기숙사 입소할 때부터 잔뜩 주눅이 든 상태인데, 같은 방 아이는 오직 수학만 풀고 있으니 점입가경이었겠지. 이 자사고라는 곳이, 나는 말로만 들어봤는데, 어마어마한 모양이다. 학생들 본인이나 극을 달리는 엄마들의 치마바람. 나는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아 모르지만 <스카이 캐슬>이란 거 있었다고? 이 속에도 당연히 소외자들이 있을 터, 이들이 바로 이수와 서인이다.

  이수는 그렇다고 치고, 시골에서는 동네 신동이었지만 자사고에 들어와보니 이건 애초에 어디다 대 볼 수도 없이 처지는 수준. 그러나 가족은 물론이고 친척과 동네 희망의 상징인 서인은 이 속에서 어떻게 해서라도 비집고 생존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렇게 갈등이 생기기 시작하고, 갈등은 애초에 처음부터 둘의 관계가 시작할 때부터 존재했으니 피할 수도 없었을 것. 세상 모든 일이 시작부터 문제를 가지고 있는 법이라 퇴로를 확보하는 게 삶의 지혜이겠지만 아직 미숙한 청소년이니 기대할 수 없겠지. 그리하여 사건이 터진다.


  무대는 앞에 말한 사건 이전과 이후로 구분한다. 쉽게 이야기하면, 무대를 둘로 나누어 한편은 과거, 한편은 현재. 과거와 현재를 통과하는 곳에 교복 상의가 있어서 과거를 갈 때는 재킷을 입고, 현재로 올 때는 벗어 흰 티셔츠 차림이 된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자유로이 다니는 인물 ‘잎이.’ 잎이는 주인공 이수의 페르소나로 생각하면 된다.

  희곡을 읽을 때 흥미를 돋우는 것은, 독자마다 다 자기만의 무대를 만들 수 있다는 점. 나도 마찬가지다. 실제 무대에서는 왼편과 오른편으로 나눌 수 있겠지만 머리 속에서는 내 마음대로다. 1층과 2층으로 나눌 수도 있고, 해변과 바닷속으로 가를 수도 있고, 지구별과 트리팔마도어 행성으로 구별할 수도 있다. 나름대로 열심히 연상해가며 작품을 읽고 있는데, 난데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거 분량이 현재보다 과하게 많은 거 아냐? 만약 진짜 무대에 올려 무대를 반으로 나누면 한쪽에 앉은 관객들은 목 좀 아프겠는 걸?

  그럴 수밖에. 많은 문제들이, 주로 심각하면 심각할수록 더 그런 거 같은데, 과거 속에 숨겨져 있으니 현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옛 일을 추적하는 장면이 더 많겠지. 내가 만약 진짜 무대의 연출자라면 어떻게 처리할까? 조명 색깔을 바꾸어 형광등이면 현재, 백열등이면 과거, 뭐 이런 식도 괜찮을 거 같고, 극작가 지문대로 교복 재킷을 입으면 과거, 흰 티셔츠면 현재, 이것만 가지고도 좋을 거 같다. 그럼 과거와 현재 어느 경우라도 무대 전체를 사용할 수 있으니까. 이런 식으로 나만의 무대 꾸미기. 그럴 듯하지 않으셔? 그럴 듯하면, 당신도 한 번 해보지 않으시겠나? 다만 오직 대학입학과 좋은 직장, 고수익 또는 고 연봉을 위한 스펙 쌓는 모습을, 그것도 젊디젊은 청소년들이 그러는 꼴을 보는 게,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하여간 나는 안타깝고, 불쌍하고, 그 학생들의 어미 아비들이 역겹고 그랬다. 그냥 살라고 하면 안 되나? 내가 내 새끼들한테 이 자사고 학생들의 부모처럼 해주지 못해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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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의 날의 거장 열린책들 세계문학 271
레오 페루츠 지음, 신동화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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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오폴트 페루츠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살다가 서고트족 왕가에 의하여 무어족이 축출당할 때 한꺼번에 쫓겨난 유대인을 일컫는 세파르딤 유대인(리온 포이히트방거 작 <톨레도의 유대여인>, 살만 루슈디 작 <2년 8개월 28일 밤> 참조) 집안으로 18세기 초∙중엽부터 보헤미아 근방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성공한 섬유 사업가였다니까 부르주아 집안이라고 봐도 괜찮을 듯하다. 집에서는 보헤미아어가 아닌 독일어를 사용했다니, 자신들을 오스트리아인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종교생활에 별로 관심이 없는 유대인이 항용 그러했듯이.

  공부하고 담을 쌓은 페루츠는 부자 아빠 덕에 프라하에서 최고로 좋고 비싼 학교를 다녔으나 제국 및 왕립 독일 문법학교 등에서 장렬하게 퇴학을 당해 마투라, 프랑스 식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바칼로레아를 통과하지 못했다. 흠. 인간적이어서 좋군. 이후 가족이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사해, 아버지는 여전히 직물사업을 하면서 페루츠는 에르저조크 라이너 김나지움, 지금의 지그문트 프로이트 김나지움에 다녔지만 역시 졸업하는 데 실패해 몇 년간 아빠 회사에 다니기도 했다. 그렇다고 젊은이가 놀 수는 없어 군대에 자원 입대했고, 일정 복무기간을 마치면 시험을 거쳐 예비역 장교가 될 수 있었는데 여기서도 또 떨어져 그냥 사병으로 의가사제대를 하고 만다.

  1906년에 비엔나 대학 철학부에 입학했지만 앞에서 얘기한대로 입학자격 시험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청강생 신분이었다. 음. 점점 더 인간적이군. 좋아, 좋아. 수학과 경제학을 이수하고 비엔나 공과대학으로 옮겨 확률, 통계, 보험수학과 경제학을 공부해, 계리사 자격증을 땄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하여튼 보험회사에서의 계리 업무가 소설가로 이름을 내기 전 그의 공식 직업이었다. 이때 일한 곳이 트리에스테에 있는 게네랄리 그룹으로, 페루츠의 1년 후배, 카프카가 일했던 바로 그 회사이다. 페루츠는 보험수학을 통해 수학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던지 이후 괄목상대할 진척을 보여 역시 수학자이자 소설가인 로베르트 무질과 수학에 관한 심도 깊은 교통도 있었다. 음. 고목에 꽃도 피는군. 레오폴트 페루츠는 자기 소설을 발표하면서 대수방정식으로 유명한 레오 뭐시기의 이름을 가져와 레오폴트 대신 ‘레오’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심판의 날의 거장>은 1923년 작품으로 그의 전성기 시절에 출간했다. 나는 몇 년 전에 <스웨덴 기사>를 재미있게 읽어, 페루츠의 신간이 나왔다는 출판사 알림을 받자마자 곧바로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 읽었다. 역시 레오 페루츠.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1920년대 중후반에서 30년대 중반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레오 페루츠는 아뿔싸, 히틀러가 집권하고, 1938년에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해버리자 팔레스타인으로 가버리면서 유럽, 당시 시각으로 보면 세계의 문화권에서 사라져버린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오스트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왔다 갔다 하면서 작품활동을 하지만 이미 명성은 사라진 후였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다 20세기 말부터 다시 레오 페루츠가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21세기 들어 우리도 그의 작품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읽게 된 것.


  <심판의 날의 거장>은 <스웨덴 기사>처럼 환상소설이다. 환상문학이라고 해서 요즘 유행하는 ‘판타지 소설’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1923년식. 그러니까 역자 신동호의 해설 속 주장처럼 추리, 서스펜스, 공포, 범죄, 스릴러 적인 요소를 충분히 담고 있는 고전적 의미에서 환상소설이다. 한편 오히려 라틴 아메리카에서 유행했던 붐 문학적 재미를 느낄 수 있는데, 붐문학보다 추리와 공포, 스릴러 측면이 강해 격조 있는 대중문학으로 읽어도 무방할 듯하다.

  이 작품을 환상문학으로 규정하는 이유는 제목 “심판의 날의 거장”이 누구이며 왜 그렇게 불리게 되었는지를 밝히는 과정, 그를 심판의 날의 거장이 되게 만든 아주 오래된 일에서 시작한다. 피에로 디 코시모의 제자로 1520년경 피렌체의 유명한 거장. 화가. 조반시모네 키기. 이 사람은 성모 칠고(7苦) 세라핌 수도회의 수도원에서 다른 그림은 그리지 않고 죽을 때까지 오로지 ‘심판의 날’만 그린 인물이다. 추리와 스릴러적 요소를 많이 품고 있는 작품에서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아쉬운데, 그러나 이야기는 1909년 가을, 9월 26일부터 시작한다.

  작품의 화자 ‘나’이자 주인공인 고트프리트 아달베르트 폰 요슈 운트 클레텐펠트 남작, 간단히 요슈 남작은 이날 왕립극장의 대배우 오이겐 비쇼프 저택의 피아노삼중주 연주회 멤버로, 비록 비쇼프의 처남 펠릭스의 대타이기는 하지만,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주인공이면 80퍼센트는 감수성 예민하거나 착한 사람이고, 20퍼센트는 천하의 악당이다. 그러면 ‘나’ 요슈 남작은 어떨까? 러일전쟁에 출전한 러시아 장교 출신의 엔지니어, 막강한 추리력을 가진 발데마르 졸그루프가 급하게 귀족 클럽에 가서 요슈 남작의 인물됨을 알아본 결과, 문예애호가도, 유미주의자도 아니고, 사람들이 이이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면 존경심과 증오가 뒤얽힌 독특한 어조로 말하며, 몇몇 스캔들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 하면서, 단적으로 ‘훌륭한 악당’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1인칭 소설에서 주인공 ‘나’가 하는 말과 행동을 그대로 믿지 말라는 의미도 될 수 있다.


  요슈 남작은 전에 ‘디나’라는 이름의 아가씨와 연애를 했다. 아주 애틋하게. 결혼을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죽음이 둘을 갈라놓을 때까지 서로 사랑하겠다는 어리석은 맹세 정도는 한 상태였고, 딱 이때 요슈 남작에게 왕국은 약 1년에 걸쳐 해외에서 해야 할 업무를 주었다. 어쩔 수 없이 외국으로 가 1년을 소모한 요슈 남작. 몰랐을 거다. 마음을 다해 사랑하던 여인은 갑자기 텅 빈 상태, 몰아닥친 외로움을 견디기 위하여 다른 남자를 만났고 급속도로 새로운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급기야 결혼까지 해버렸던 것을. 다 그런 거다. 디나는 무죄다. 남자 군대 간 사이 고무신 거꾸로 신는 여자는 전부 무죄다. 그러나 요슈 남작은 아직도 디나를 사랑한다. 깊이 깊이. 그리하여 디나한테 3초 이상 눈길을 주는 모든 남자에게 참으로 애처로운 질투를 느끼고 있다. 이 디나가 9월 26일 오이겐 비쇼프 살롱에서 피아노 삼중주에서 피아노를 연주했으며, 저택의 주인이자 왕립극장의 히어로이지만 하필이면 전 재산을 맡긴 베르크슈타인 은행이 파산하는 바람에 곧 동반 파산할 운명인 오이겐 비쇼프의 아내 디나 비쇼프이다. 베르크슈타인 은행의 파산은 오늘 아침 신문이 벌써 보도를 해버렸으니 이 집구석 분위기가 어떻겠는가? 그래도 다행이랄까, 오이겐은 아직 모르는 눈치다.

  훌륭한 악당 요슈 남작은 이날 (본인의 표현에 의하면) 의도하지 않은 실수 두 개를 저지른다. 둘 다 나이든 대배우 오이겐 비쇼프에 대해서 저질렀다. 두 번 다 말로 그랬다. 하나는 지나가듯이 오이겐에게 “불쌍한 자 같으니. 아껴서 모은 몇 푼을 잃었나보군.”이라 해서 디나를 기겁하게 했으며, 아직 은행 파산을 알지 못하는 것이 분명한 당사자 비쇼프한테, 두 번째로 “오늘 신문을 읽었습니까?”라고 물어보아 처남 펠릭스가 열을 팍팍 받게 만들었다.


  지금부터 주목.

  연주가 끝나고 이런저런 대화 끝에 오이겐 비쇼프가 한 젊은 해군 장교의 이야기 하나를 시작한다.

  이 장교는 독특한 자기 집안 일을 해결하고자 몇 달 휴가를 내고 귀가했다. 화가이자 아카데미 학생이며 탁월한 재능을 가진 남동생이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이유도 없고 유서도 남기지 않은 채 자살해버리고 말았다. 형은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빈에 있는 동생의 하숙에 가서 동생과 완전히 같은 동선을 따라 행동하기 시작했다. 두 달이 지난 후 어느 날 밤에 오페라를 보러 가기로 하고 11시에 저녁 식사로 차가운 음식을 가져다 달라고 하녀한테 이야기를 했다. 15분 후에 식사 전에 블랙커피를 문 앞 테이블에 가져다 놓은 하녀가 얼마 후 다시 가보니 커피에 손을 대지 않은 채 여태 테이블 위에서 식어 있었다. 이때 방 안에서 극적인 비명소리가 들려 화들짝 놀란 하녀는 급하게 내려가 주인을 불러 문을 부수고 들어갔고, 젊은 장교는 30초 전에 창문에서 뛰어내려 역시 자살해버리고 말았다. 책상에는 아직 불붙은 담배만 타고 있었으며, 유서 같이 남긴 글 한 장 찾을 수 없었다. 오직 한 단어, 연필 심이 부러질 정도로 힘들게 휘갈긴 “끔찍해”만 흐트러져 있고.

  저택에 모인 사람들은, 집주인 오이겐 비쇼프와 그의 아내 디나 비쇼프, 처남 펠릭스, 첼로를 연주한 의사, 훗날 자기가 연구한 세균에 감염되어 죽을 운명인 병리학자 고르스키 박사, 러시아 장교 출신 엔지니어 발데마르 졸그루프, 그리고 화자 ‘나’ 요슈 남작은, 얼마 후 공연할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왕>의 타이틀 롤을 연기할 오이겐에게 장면을 한 번 보여달라고 부탁한다. 처음엔 고사하던 오이겐은 고르스키 박사가 셰익스피어 대사를 줄줄 읊으니까 은근히 시샘을 했든지 그렇게 하겠다고, 연극을 시작하기 전에 배역을 연구하고 대사를 외우는 금단의 장소인 별채로 가서, 의상을 갈아 입을 줄 알았더니, 에그머니, 조금 후 두 발의 총성이 들렸고, 한 발은 벽에 박혔으며, 다른 한 발은 오이겐 비쇼프의 관자놀이를 관통해버렸다. 오이겐 비쇼프마저 유서도 없이, 유언 한 마디 없이 그냥 자살해버린 것.

  디나와 펠릭스는 단박에 요슈 남작을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하며 증거로 요슈 남작만 쓰는 영국제 담배 파이프를 내미는데, 요슈 남작은 절대로 그것을 오이겐에게 주지 않았다.

  여기에 혜성같이 등장한 우리의 엔지니어 발데마르 졸그루프. 그가 과연 이 의문의 죽음을 해결할까? 재미있으니 직접 읽어보시라. 진짜 재미난 부분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고, 심지어 소개하지도 않았다. 소개했나? 해놓고 모른 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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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2025-01-13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참! 궁금하긴 합니다. ㅎㅎ

Falstaff 2025-01-13 18:40   좋아요 0 | URL
재미있는 책입니다. 읽어보시면 좋겠군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