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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의 날의 거장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71
레오 페루츠 지음, 신동화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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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트 페루츠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살다가 서고트족 왕가에 의하여 무어족이 축출당할 때 한꺼번에 쫓겨난 유대인을 일컫는 세파르딤 유대인(리온 포이히트방거 작 <톨레도의 유대여인>, 살만 루슈디 작 <2년 8개월 28일 밤> 참조) 집안으로 18세기 초∙중엽부터 보헤미아 근방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성공한 섬유 사업가였다니까 부르주아 집안이라고 봐도 괜찮을 듯하다. 집에서는 보헤미아어가 아닌 독일어를 사용했다니, 자신들을 오스트리아인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종교생활에 별로 관심이 없는 유대인이 항용 그러했듯이.
공부하고 담을 쌓은 페루츠는 부자 아빠 덕에 프라하에서 최고로 좋고 비싼 학교를 다녔으나 제국 및 왕립 독일 문법학교 등에서 장렬하게 퇴학을 당해 마투라, 프랑스 식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바칼로레아를 통과하지 못했다. 흠. 인간적이어서 좋군. 이후 가족이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사해, 아버지는 여전히 직물사업을 하면서 페루츠는 에르저조크 라이너 김나지움, 지금의 지그문트 프로이트 김나지움에 다녔지만 역시 졸업하는 데 실패해 몇 년간 아빠 회사에 다니기도 했다. 그렇다고 젊은이가 놀 수는 없어 군대에 자원 입대했고, 일정 복무기간을 마치면 시험을 거쳐 예비역 장교가 될 수 있었는데 여기서도 또 떨어져 그냥 사병으로 의가사제대를 하고 만다.
1906년에 비엔나 대학 철학부에 입학했지만 앞에서 얘기한대로 입학자격 시험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청강생 신분이었다. 음. 점점 더 인간적이군. 좋아, 좋아. 수학과 경제학을 이수하고 비엔나 공과대학으로 옮겨 확률, 통계, 보험수학과 경제학을 공부해, 계리사 자격증을 땄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하여튼 보험회사에서의 계리 업무가 소설가로 이름을 내기 전 그의 공식 직업이었다. 이때 일한 곳이 트리에스테에 있는 게네랄리 그룹으로, 페루츠의 1년 후배, 카프카가 일했던 바로 그 회사이다. 페루츠는 보험수학을 통해 수학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던지 이후 괄목상대할 진척을 보여 역시 수학자이자 소설가인 로베르트 무질과 수학에 관한 심도 깊은 교통도 있었다. 음. 고목에 꽃도 피는군. 레오폴트 페루츠는 자기 소설을 발표하면서 대수방정식으로 유명한 레오 뭐시기의 이름을 가져와 레오폴트 대신 ‘레오’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심판의 날의 거장>은 1923년 작품으로 그의 전성기 시절에 출간했다. 나는 몇 년 전에 <스웨덴 기사>를 재미있게 읽어, 페루츠의 신간이 나왔다는 출판사 알림을 받자마자 곧바로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 읽었다. 역시 레오 페루츠.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1920년대 중후반에서 30년대 중반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레오 페루츠는 아뿔싸, 히틀러가 집권하고, 1938년에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해버리자 팔레스타인으로 가버리면서 유럽, 당시 시각으로 보면 세계의 문화권에서 사라져버린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오스트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왔다 갔다 하면서 작품활동을 하지만 이미 명성은 사라진 후였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다 20세기 말부터 다시 레오 페루츠가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21세기 들어 우리도 그의 작품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읽게 된 것.
<심판의 날의 거장>은 <스웨덴 기사>처럼 환상소설이다. 환상문학이라고 해서 요즘 유행하는 ‘판타지 소설’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1923년식. 그러니까 역자 신동호의 해설 속 주장처럼 추리, 서스펜스, 공포, 범죄, 스릴러 적인 요소를 충분히 담고 있는 고전적 의미에서 환상소설이다. 한편 오히려 라틴 아메리카에서 유행했던 붐 문학적 재미를 느낄 수 있는데, 붐문학보다 추리와 공포, 스릴러 측면이 강해 격조 있는 대중문학으로 읽어도 무방할 듯하다.
이 작품을 환상문학으로 규정하는 이유는 제목 “심판의 날의 거장”이 누구이며 왜 그렇게 불리게 되었는지를 밝히는 과정, 그를 심판의 날의 거장이 되게 만든 아주 오래된 일에서 시작한다. 피에로 디 코시모의 제자로 1520년경 피렌체의 유명한 거장. 화가. 조반시모네 키기. 이 사람은 성모 칠고(7苦) 세라핌 수도회의 수도원에서 다른 그림은 그리지 않고 죽을 때까지 오로지 ‘심판의 날’만 그린 인물이다. 추리와 스릴러적 요소를 많이 품고 있는 작품에서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아쉬운데, 그러나 이야기는 1909년 가을, 9월 26일부터 시작한다.
작품의 화자 ‘나’이자 주인공인 고트프리트 아달베르트 폰 요슈 운트 클레텐펠트 남작, 간단히 요슈 남작은 이날 왕립극장의 대배우 오이겐 비쇼프 저택의 피아노삼중주 연주회 멤버로, 비록 비쇼프의 처남 펠릭스의 대타이기는 하지만,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주인공이면 80퍼센트는 감수성 예민하거나 착한 사람이고, 20퍼센트는 천하의 악당이다. 그러면 ‘나’ 요슈 남작은 어떨까? 러일전쟁에 출전한 러시아 장교 출신의 엔지니어, 막강한 추리력을 가진 발데마르 졸그루프가 급하게 귀족 클럽에 가서 요슈 남작의 인물됨을 알아본 결과, 문예애호가도, 유미주의자도 아니고, 사람들이 이이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면 존경심과 증오가 뒤얽힌 독특한 어조로 말하며, 몇몇 스캔들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 하면서, 단적으로 ‘훌륭한 악당’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1인칭 소설에서 주인공 ‘나’가 하는 말과 행동을 그대로 믿지 말라는 의미도 될 수 있다.
요슈 남작은 전에 ‘디나’라는 이름의 아가씨와 연애를 했다. 아주 애틋하게. 결혼을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죽음이 둘을 갈라놓을 때까지 서로 사랑하겠다는 어리석은 맹세 정도는 한 상태였고, 딱 이때 요슈 남작에게 왕국은 약 1년에 걸쳐 해외에서 해야 할 업무를 주었다. 어쩔 수 없이 외국으로 가 1년을 소모한 요슈 남작. 몰랐을 거다. 마음을 다해 사랑하던 여인은 갑자기 텅 빈 상태, 몰아닥친 외로움을 견디기 위하여 다른 남자를 만났고 급속도로 새로운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급기야 결혼까지 해버렸던 것을. 다 그런 거다. 디나는 무죄다. 남자 군대 간 사이 고무신 거꾸로 신는 여자는 전부 무죄다. 그러나 요슈 남작은 아직도 디나를 사랑한다. 깊이 깊이. 그리하여 디나한테 3초 이상 눈길을 주는 모든 남자에게 참으로 애처로운 질투를 느끼고 있다. 이 디나가 9월 26일 오이겐 비쇼프 살롱에서 피아노 삼중주에서 피아노를 연주했으며, 저택의 주인이자 왕립극장의 히어로이지만 하필이면 전 재산을 맡긴 베르크슈타인 은행이 파산하는 바람에 곧 동반 파산할 운명인 오이겐 비쇼프의 아내 디나 비쇼프이다. 베르크슈타인 은행의 파산은 오늘 아침 신문이 벌써 보도를 해버렸으니 이 집구석 분위기가 어떻겠는가? 그래도 다행이랄까, 오이겐은 아직 모르는 눈치다.
훌륭한 악당 요슈 남작은 이날 (본인의 표현에 의하면) 의도하지 않은 실수 두 개를 저지른다. 둘 다 나이든 대배우 오이겐 비쇼프에 대해서 저질렀다. 두 번 다 말로 그랬다. 하나는 지나가듯이 오이겐에게 “불쌍한 자 같으니. 아껴서 모은 몇 푼을 잃었나보군.”이라 해서 디나를 기겁하게 했으며, 아직 은행 파산을 알지 못하는 것이 분명한 당사자 비쇼프한테, 두 번째로 “오늘 신문을 읽었습니까?”라고 물어보아 처남 펠릭스가 열을 팍팍 받게 만들었다.
지금부터 주목.
연주가 끝나고 이런저런 대화 끝에 오이겐 비쇼프가 한 젊은 해군 장교의 이야기 하나를 시작한다.
이 장교는 독특한 자기 집안 일을 해결하고자 몇 달 휴가를 내고 귀가했다. 화가이자 아카데미 학생이며 탁월한 재능을 가진 남동생이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이유도 없고 유서도 남기지 않은 채 자살해버리고 말았다. 형은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빈에 있는 동생의 하숙에 가서 동생과 완전히 같은 동선을 따라 행동하기 시작했다. 두 달이 지난 후 어느 날 밤에 오페라를 보러 가기로 하고 11시에 저녁 식사로 차가운 음식을 가져다 달라고 하녀한테 이야기를 했다. 15분 후에 식사 전에 블랙커피를 문 앞 테이블에 가져다 놓은 하녀가 얼마 후 다시 가보니 커피에 손을 대지 않은 채 여태 테이블 위에서 식어 있었다. 이때 방 안에서 극적인 비명소리가 들려 화들짝 놀란 하녀는 급하게 내려가 주인을 불러 문을 부수고 들어갔고, 젊은 장교는 30초 전에 창문에서 뛰어내려 역시 자살해버리고 말았다. 책상에는 아직 불붙은 담배만 타고 있었으며, 유서 같이 남긴 글 한 장 찾을 수 없었다. 오직 한 단어, 연필 심이 부러질 정도로 힘들게 휘갈긴 “끔찍해”만 흐트러져 있고.
저택에 모인 사람들은, 집주인 오이겐 비쇼프와 그의 아내 디나 비쇼프, 처남 펠릭스, 첼로를 연주한 의사, 훗날 자기가 연구한 세균에 감염되어 죽을 운명인 병리학자 고르스키 박사, 러시아 장교 출신 엔지니어 발데마르 졸그루프, 그리고 화자 ‘나’ 요슈 남작은, 얼마 후 공연할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왕>의 타이틀 롤을 연기할 오이겐에게 장면을 한 번 보여달라고 부탁한다. 처음엔 고사하던 오이겐은 고르스키 박사가 셰익스피어 대사를 줄줄 읊으니까 은근히 시샘을 했든지 그렇게 하겠다고, 연극을 시작하기 전에 배역을 연구하고 대사를 외우는 금단의 장소인 별채로 가서, 의상을 갈아 입을 줄 알았더니, 에그머니, 조금 후 두 발의 총성이 들렸고, 한 발은 벽에 박혔으며, 다른 한 발은 오이겐 비쇼프의 관자놀이를 관통해버렸다. 오이겐 비쇼프마저 유서도 없이, 유언 한 마디 없이 그냥 자살해버린 것.
디나와 펠릭스는 단박에 요슈 남작을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하며 증거로 요슈 남작만 쓰는 영국제 담배 파이프를 내미는데, 요슈 남작은 절대로 그것을 오이겐에게 주지 않았다.
여기에 혜성같이 등장한 우리의 엔지니어 발데마르 졸그루프. 그가 과연 이 의문의 죽음을 해결할까? 재미있으니 직접 읽어보시라. 진짜 재미난 부분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고, 심지어 소개하지도 않았다. 소개했나? 해놓고 모른 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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