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돌리노 -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현경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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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우돌리노, 사람 이름이다. 예전에 어떤 짓을 당했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에선 한 성인聖人의 이름이기도 하고 이 소설의 눈부신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다. 근데, 이름이 하필이면 '바우'로 시작하기 때문에 한국인의 경우 이 인간을 생각할 때 기운찬 돌대가리 천하장사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 천만의 말씀. 일단 언어에 관한 천재적인 재능이 있어 어느 종족 속에서도 한두 달만 같이 지내면 마치 모국어인 양 자연스럽게 대화가 가능하고, 예상 외로 평화를 사랑하는 인류 가운데 한 명이며, 무엇보다 여태까지 내가 읽은 모든 책 가운데서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거짓말장이다. 난 선의의 거짓말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거짓은 '더러운 거짓말'이라고 알며 평생을 살아왔는데 이제 조금은 생각을 바꾸어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대단하지? 평생 품고 있던 신념을 바꾸게 만든 책이라니. 원래 그런겨. 책의 힘이란 것이. 하긴 여태 살아온 걸 뒤돌아보면 사소한 거짓말도 하기 싫어 솔직하게 얘기해 얻어 터진 경우가 부지기수이긴 하다.

 두 권 850여 쪽의 장편소설. 근데 읽다보면, 나처럼 저녁때 술만 마시지 않으면 이틀이면 독파할 수 있다. 난 나흘 걸렸다. 그놈의 술 때문에. 아직 본격적인 여름도 안 됐는데 어이하여 벌써부터 개고기 전골이 그리도 맛나단 말인가.

 바우돌리노로 말할 거 같으면 장화 닮은 이탈리아 반도 저 위쪽으로 알프스 가까이 있는 노바라(이 도시 이름은 아직도 '노바라'다) 부근에서 나고 자랐다. 깡촌 시골구석에서도 바우는 천부적인 재능인 언어에 눈을 떠 라틴어, 독일어 등을 누구한테 배운 것도 아니면서 읽고 쓸 줄 알았다. 이거 대단한 거. 무대가 12세기 말 13세기 초. 당시에도 물론 종이가 있었으나 워낙 비싸 양피지를 사용했으며 거기다가 고려에서 세계최초로 1234년에 '상정고금예문'을 금속활자를 이용해 찍어내기 전이어서 누군가가 깃펜에 잉크를 묻혀 필사를 했던 걸 읽어볼 수 있었다는 건데 노바라, 아직까지도 시골구석인 그 동네 사는 평민의 아들이 글을 익혔다는 거, 기적 비슷한 일이었다.

 근데 참, 인간이란. 글을 익혀 읽고 쓰기 시작하자 인간본성 가운데 하나인 '구라 만들기'를 시작한다. 이 작업은 모든 인간들이 할 수 있으나 수다한 사람은 관심이 없거나 시도하지 않는 반면, 오직 유전자 사슬에 거짓말을 만들어내는데 흥미가 있어서 심지어는 목숨을 걸고라도 거짓말을 진짜처럼 꾸며내는 종족들이 간혹 나타나 죽기살기로 마치 진실인 것처럼 거짓말을 만들어 내는 참경에 이른다. 이런 인간들의 가장 앞쪽에서 광배를 두르고 우뚝 선 자, 바우돌리노.

 인류 역사를 보면 힘 있는 자의 집에 객식구로 얹혀살며 뻔한 거짓말을 함부로 노래로 지어 부르다 혀가 잘리고 눈이 뽑힌 인간이 어디 한둘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가 다 거짓말인줄 아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오늘도 애먼 PC 자판만 열라 두르리고 있는 청춘들이 어디 하나 둘인가 말이지. 이거 누가 시켜서 하는 짓이 아니다. 다 그 염병할 유전자사슬 DNA라고 불리는 두 줄의 나선 구조에 의해 결정될 뿐. 유명한 두 줄의 나선구조가 명령하는대로 따라할 수밖에 없는 걸 우리는 뭐라 불러? 예, 맞습니다. 본능이라고 한답니다. 유전자를 배열하는 레시피에 의한 것.

 그리하여 바우돌리노 역시 아주 능숙한 솜씨로 거짓말을 지어내는데, 문제는 바우의 거짓말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가, 아니, 모든 경우가 만인의 행복을 위하여 작용하...... 아 참, 뭐라 써야 해, "작용한다"라고 쓸까? 아니면 "작용하지 않는다"라고 쓸까.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작용을 하건 하지 않건 간에 더욱 중요한 것이 있으니, 바로 바우 스스로가 자신이 만든 구라를 진실로 인식한다는 점. 평생 충성을 다하고 의부로 모신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황제를 만나게 된 것 역시 노바라 근방의 한 숲에서 황제를 몰라보고 구라를 친 덕분이다. 이렇게 거짓말의 위대함을 차츰 알아가는 바우돌리노. 그의 좌충우돌 모험담. 파란만장하고 파노라마스러운 환상적 모험. 그 속에서도 유감없이 펼쳐지는 바우의 찬란한 거짓말, 거짓말, 그리고 또 거짓말. 동시에 진실이며 어느 것보다도 더 진실이며, 결코 변경할 수 없는 진실이자 진리. 진리를 찾아 떠나는 모험.

 여기까지.

 책 내용에 관해선 한 마디도 안 했지? 그럼 성공했네.

 의심하지 말고 한 번 읽어보셔. 재미나다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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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세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0
빅토르 펠레빈 지음, 박혜경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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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 술주정뱅이 보리스 옐친 초대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이 모스크바 모처에 주둔하던 군대의 탱크 꼭대기에 올라가 극보수에 의하여 저질러진 쿠데타를 저지하자고 호소하던 한국방송공사의 화면을. 이 책은 그 언저리 몇년 모스크바를 무대로 했다. 또 한 장면. 알량한 음식물을 구매하기 위해 하루 온종일 1 킬로미터가 넘는 줄을 서야했던 당시 모스크바 시민들. 소비에트 연방 시절에 지은 높은 건물의 처마에선 몇 미터에 달하는 고드름이 떨어져 보도를 걸어가는 시민의 어깨를 관통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던, 한 때는 위대했고 얼마쯤 더 지나면 다시 위대해질 예정이지만 지금은 결코 그렇지 못한 모스크바의 우울한 초상.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처마 밑의 고드름이 다 녹아버리듯 모스크바 곳곳에 우뚝 서있는 자동판매기에 동전만 집어넣으면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펩시콜라가 기계 밑에 투명 플라스틱으로 덮혀있는 배출구로 떨어지는 자본주의가 동토로 비유하는 사회주의 경제의 중심지에도 푸른 싹을 돋아내기 시작했다. 펩시콜라. 길거리를 걷다가 우연하게 주웠다는 핑계, 사실은 으슥한 골목길을 홀로 걷던 아가씨의 핸드백을 날치기해 돈이 생기거나, 양철 깡통 속에 담겨있던 부모님의 손때묻은 동전을 얘기하지도 않고 그냥 들고 나왔거나, 아니면 이蝨같이 쓸모없이 늙어버린 노파의 이마빡을 도끼로 내리쳐 죽이고 침대밑 낡디 낡은 가죽 가방에서 훔쳤거나, 어쨌든지 돈만 있으면 언제나 어디서나 아무렇지도 않게 펩시콜라를 마실 수 있었던 세대. 대마초, 헤로인 또는 코카인을 흡입하느라 코 점막이 거덜이 난 인간들이 앱솔루트 보드카에 펩시콜라를 타 마시며 더러운 욕설, 피즈테츠, 라 하던 세대. 이들을 작가 팔라빈은 'P세대'라고 불렀다.

 갑작스럽게 주어진 자본주의 시대를 맞아 변혁기엔 언제나 그랬듯이 더러운 방법을 썼거나 권력에 기댔거나, 권력에 기대 더러운 방법을 썼거나 하여간 졸지에 큰 부자가 된 인간들이 속출하듯, 마야콥스키와 파스테르나크의 시 역시 재빨리 자본주의의 찬란한 시, 광고 카피로 변신하던 시기. 시대를 살아보니 세기말의 러시아를 주물딱거리던 모든 일 또는 음모 역시 광고 카피 안에 이미 다 들어있었다는 놀라운 발견.

 그.러.나.

 이리 훌륭한 텍스트, 이색적이고 말 그대로 시대가 뒤집어지는 변혁기 모습을 왜 나는 그리도 힘들게 읽었을까. 정작 내가 집요하게 기억하고 있던 것은 작가 팔라빈이 이 책을 바치는 헌사.

 "중산층의 영전에 바친다."

 러시아의 중산층은 자본주의의 범위없는boundaryless 침공, 가치의 혼돈, 나름대로 이어지던 질서의 붕괴 등으로 인해 이미 다 죽었다는 얘기. 그들의 묘비 앞에 <P세대>를 올려 놓은 것.

 헌사가 써 있는 페이지에서 한 장을 넘기면 캐나다의 저음 가수 레너드 코언이 노래한 'Democracy'의 가사가 다섯 줄 나온다.

 "당신도 알잖아요, 난 감상적이예요.

 이 나라를 사랑하지만 이런 광경은 견딜 수 없군요.

 난 좌도 우도 아니예요.

 오늘 밤은 그냥 집에서,

 저 희망 없는 작은 화면 속에서 길을 잃겠어요."

 직접 한 번 들어보실려? 난 코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더구나 이 노래는 음악적으로도 '완전 불감응'의 대표적 노트인데 가사 하나 때문에 인용한 거 같다. 하여간 즐감하시라.

 

 

https://youtu.be/vHI9BTpGk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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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동아일보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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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미로운 요소와 사회적 여러 문제, 개인의 자존감에 관한 굵직한 주제를 품고 있지만 읽기엔 좀 불편한 책. 신뢰할 만한 부커 상을 수상한 작품. 내가 읽기에 불편하다는 것일 뿐 사소하고 얇은 이 독후감만 읽고 일독을 포기하지 않으시기 바람.

 1994년 4월,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함으로써 아라파트헤이트를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과거로 흘려보낸 남아프리카 공화국. 하지만 여전히 국부國富의 대부분은 네덜란드나 영국계 백인이 틀어쥐고 있던 상황. 이름하여 아프리카너. 정서상 유럽과 긴밀한 유대감을 갖고 있던/있는 이들은 정치적 측면 말고는 각계 각층의 최고 지도부를 몽땅 점령하고 있었다. 그중에 한 인물, 데이비드 루리. 쉰 두 살. 매주 화요일 오후 아주 괜찮은 여인으로부터 정기적으로 섹스를 사는 것으로 적절하게 삶이란 톱니바퀴에 윤활유를 공급하던 잘 생긴 외모의 커뮤니케이션 학과 교수.

 어느 날 퇴근하다가 평소에 잘 다니지 않았던 길로 접어든 그는(문제는 언제나 하던대로 하지 않았을 때 발생한다는 동서고금의 진리를 외면한 이 지성인이) 앞에서 마치 열두 살 먹은 계집아이의 것같은 엉덩이를 옴찔옴찔 움직이며 가고 있던 같은 과 학생 멜라니를 만나 점심 한 그릇 사주고, 어때 집에 들러 커피 한 잔 마실까? 뻔한 수작 끝에, 안돼요, 안돼요를 립 서비스로 생각하면서 약간, 정말 약간의 저항을 가볍게 물리치고, 독자, 그중에서도 남자 독자의 입장에선 바람직하진 않지만 적어도 강제적이었다고는 볼 수 없는 방법, 즉 적극적으로 합의하지는 않았으나 두 사람 다 모든 일에 관해 무한책임을 져야 하는 성인이란 측면으로 관찰할 때는 그나마 불법적이지 않았다는 의견을 낼 수 있을 정도의 방법으로, 한 번 했다. 그때 딱 한 번으로 그쳐야 했으나 그게 마음 먹은대로 되는 일이 본래부터 아니라서 몇번에 걸쳐 관계를 끌고 갈 수밖에 없었다. 원래 그런 거다. 아시는 분은 아실겨.

 다 커서 이미 성인이 된 여성이 자신의 몸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전적으로 본인 책임 아래 있지만 이제 그놈의 우라질 법적 성인의 테두리에 갓 전입한 여성이 쉰 두 살의 교수와 관계 했다는 건 사실 아름답지는 않을 텐데, 내 생각에 더 큰 문제는 교수가 댓가로 출석과 성적에 관해 부당하게 높은 평가를 했다는 거. 거기다가 멜라니는 이미 남자친구가 있었고 골치 아프게 남친이 그들의 관계를 알고 있어서 학생도 아닌 것이 자기 수업에 들어와 깽판 비슷하게 문제를 일으킨다는 점. 그 후 멜라니 본인의 의지라고는 전혀 읽히지 않지만(아무리 법적 성인이라도 아직도 열 두 살짜리 계집아이의 엉덩이를 갖고 있는 풋내나는 아가씨란 점을 감안하면 분명히 아니겠지만) 어쨌든 주위의 충동에 의해 한 것인지 아니면 본인의 의지인지 하여간에 멜라니는 데이비드 루리 교수를 지위를 이용한 성희롱 또는 성폭행으로 학교 윤리위원회에 제소해버렸다.

 데이비드 루리. 끝났다.

 무대가 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인종분리정책이 사라지자 그간 백인의 억압에 의하여 아슬아슬하게 지켜지던 사회질서가 한 방에 무너져버려, 그동안의 질서 속에서 살던 백인의 입장에선 무시무시한 무법천지로 돌변했다고 여기는 반면, 흑인의 입장에선 비록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범죄가 만연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자신들의 모든 행위를 속박하던 규정에서 벗어나 역사상 최초의 자유를 즐기고 있었던 거다. 아울러 남아프리카 지역 내에서의 사고방식, 행동규범이랄까 행동양식이랄까를 포함한 생존을 위한 거의 모든 사고방식 역시 송두리째 변화하고 있던 시점. 데이비드는 심신의 안돈을 위하여 시골에 정착해 사는 딸 루시의 집으로 잠시 거처를 옮긴다.

 남아프리카에서 목장을 경영하며 땅에 맨발을 딛고 살고 싶어하는 루시. 그녀가 겪고 있고 앞으로 겪어야 할 아프리카의 새로운 파도 또는 충격이 무엇이고, 그걸 극복해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 곳곳에 터질 준비가 되어 있는 지뢰가 묻힌 땅. 반드시 지뢰지역을 맨발로 건너야하는 숙명. 그게 데이비드와 루시 부녀가 걸어야할 길이라고? 당신과 내가 걸어야할 길이기도 하다. 정신차려! 까딱하다간 끝장이야. 물론 아무리 정신을 차리더라도 별 소용이 없긴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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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4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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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르한 파묵의 책은 나로 하여금('하여금'이 조사인지 부사인지 끝내 떠오르지 않아 결국 사전 찾아봤다. 부사란다. 그럼 떼어 써야지) 망설임 없이 고르게 만든다. 그렇다고 책방에서 '오르한 파묵'을 검색해 아득바득 찾아 읽는 수준은 아니고 이리저리 서핑하다가 눈에 띄면 아무 생각없이 장바구니에 넣는다는 말씀. 지난 1월 책 살 때 세 편의 파묵을 구입했던 것. 그 가운데 마지막 책이 오늘 독후감 쓰는 <새로운 인생>. 역시 이난아의 번역. 이 정도의 오탈자면 그냥 불평하지 않고 읽어준다. 근데 <고요한 집>에선 왜 그랬어!

 <검은 책>과 <내 이름은 빨강> 사이에 썼다는데, <검은 책>은 다음 분기에나 읽을 예정이라서 모르겠고, 하여튼 흥미로운 작품이다. 바로 뒷작품 <내 이름...>하고도 완전히 다른 감각.

 대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읽는 책은 그전과 완전히 다른 경우가 많다. 나부터도 열아홉 살 시절에 소위 "금서"란 딱지, 그게 얼마나 매력이 있었는지.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이런 것부터 시작해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 <자주 고름 입에 물고 옥색 치마 휘날리며> 또 뭐가 있더라, 아 그새 다 잊었네, 까치, 돌베개, 한길사 등에서 찍은 책들. 거기다 며칠 전 얘기했던 <농무> <한국의 아이> <저문 강에 삽을 씻고> 같은 시집(전부 다 '창작과비평'에서 나온 거다. 당시 창비란, 백낙청이란 참!). 주관식 세대이긴 했지만 정규교육에선 전혀 생각도 못했던 글편들을 읽고는, 이전 12년의 교과과정이 관념을 얼마나 한정시켰는지 단박에 알아차리면서, 동시에 과거엔 틀림없이 모범생이었던 몇몇 동무들은 자신의 앞날을 여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실천적 운동으로 투신하게 만들었다. 물론 나중엔 피라미드 회사의 더블 다이아몬드가 돼 만날 골프만 치러 다니기도 하고, 실업자도 되고, 국회의원도 되고, 아직 국회의원 후보 공천 한 번도 못받은 인간도 되고, 대학에서 선생도 하고, 대기업 임원도 되고, 회사 다니다 하나도 명예스럽지 못한 명예퇴직도 하고, 닭도 튀기면서 나하고 별로 다른 인생을 살지 않지만 하여간 그런 동무들은 한 시절, 자신의 인생에 말 그대로 완전한 전환점을 이루었는데 대부분 첫 출발은 책 한 권으로 시작했던 거다. 비록 충격을 받았을지언정 자신의 인생까진 바꾸지 않았던 평범한 모든 나에게도 책들이 던져 주었던 충격은 가히 작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쉽게 말하여 여태까지 감고 있었다는 것도 모른 눈이 떠지는 느낌.

 <새로운 인생>에 바로 그런 한 권의 책. 여태까지 잘 먹고 살던 인생을 한 방에 걷어차고 새로운 인생을 만들게 하는 딱 한 권의 책을 읽은 이들. 그 젊은이들이 어떻게 인생을 바꾸는지를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기억하시지?)메타포, 아주 큰 메타포를 이용해 그려나가고 있다. 우연히 아름다운 여학생(문학의 유구한 헛점. 여주인공은 언제나는 아니지만 대체로 예쁘고 똑똑해야 한다는 조건을 파묵 역시 따르고 있는 거디다) '자난'을 알게 된 우리의 주인공 오스만. 1970년대와 80년대 초반까지 한국의 여대생들이 그랬듯 책 몇 권을 가슴에 끼고 다니던 자난은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빼 마시기 위해 책을 테이블에 놓게 되는데 순간 오스만이 책의 제목을 보면서 그날 오후 학교 옆의 중고책 노점상에서 같은 책을 사 읽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책 한 권을 읽은 다음 눈알에 뺑그르르 돌아버린 오스만. 그는 길고 긴 버스 여행을 떠난다. 무대가 몇년대더라? 지금 당장 기억나지는 않는데, 하여간 제대로 질서 혹은 현대화가 되지 않았던 터키 전역을 밤새고, 밤새며 또 밤새워 달린다. 이때쯤 소설은 터키판 로드 무비도 전환. 근데 아무리 옛날이라도 참 교통사고 많이 난다. 교통사고. 오스만, 참으로 신기하지, 자신은 언제나 별로 다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구조하기도 하다가, 구조하면서 이미 죽은 어떤 사내의 품 속에서 두툼한 지갑을 빼내 돈을 쓰며 또다시 로드 무비를 이어가며(물론 안 그랬다간 소설이 단박에 끝나버리기 때문에) 사고가 날 때마다 자신의 인생이 바뀌고 있다는 걸 알아채는데, 스토리는 여기까지만.

 여자 주인공 자난의 이야기? 안 하겠음.

 세상, 별 거 없다. 인류가 만든 거의 모든 탈출기는 주인공이 다시 원래 생활로 돌아오는 회귀의 순간 끝난다. 아니면 회귀 후의 회고와 에필로그로 끝나던지. 영화 <빠삐용> 보셨잖아.

 파묵의 모국이며 이 책의 무대가 되는 터키. 이슬람 국가라서 색다른 종교적 외피는 서비스로 책 전체에 깔려있는데, 새로운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도 혹시 이슬람 적 문제제기 아녔어? 읽어보시고 판단하는데 언제나처럼 당신이 내릴 판단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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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룬과 이야기 바다 문학동네 청소년 14
살만 루시디 지음, 김석희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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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이의 책은 <한밤의 아이들>과 <악마의 시> 두 편을 읽었을 뿐이다. <한밤의 아이들>은 처음부터 감탄을 거듭하며 읽었고, <악마의 시>는 막 읽고나선 뭐 별로, 이렇게 생각이 들다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자꾸 생각나게 하는 소설이었다. 당시 <악마의 시>는 읽자마자 독후감을 써놔서 아마 그리 좋다는 얘긴 하지 않았을 거 같다. (확인 중....20분 흐름) 내 말 맞다. 그랬다(아직도 <악마의 시>를 그렇게 걸작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독후감 쓴 때만큼 후진 작품으로도 여기진 않는다. 그냥 읽어보실 분은 읽어보고 아닌 분은 아니고, 그러나 읽어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은 수준으로). 하여간 문제적 작품 <악마..>를 실제로 읽는 수고는 하지 않고 아래것들이 결재올린 보고서에 훑어보고나서 완벽한 신성모독이라 결정을 내린 당시 이란 회교 민주주의 공화국의 정교 최고 지도자 호메이니 선생 왈, "세상의 모든 형제들이여, 지독한 신성모독을 저지를 루슈디를 처단하라고 명하니 이는 신의 뜻을 내 입으로 전하는 것이노라". 이후 9년 동안 세상의 모처에 틀어박혀 살던 중 아이를 위한 동화 비슷한 우화소설을 하나 썼으니 오늘 얘기하는 <하룬과 이야기 바다>.

 당연히 하룬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모험담. 그의 아버지 라시드 칼리파는 알파벳 도시의 독보적인 이야기꾼. 근데 어느날 당대 최고의 설레발장이 라시드의 입이 꽉 다물리고 만다. 얘기할 거리가 몽땅 떨어졌다. 여기까지는 당연한 것. 그런데 진짜 큰 문제는 얘기를 들려줘 댓가로 먹고 사는 인간인데, 이야기거리조차 말라버려 더 이상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거. 아, 이쯤이면 눈치를 채야하지 않겠는가 말씀이야. 라시드는 작가 루슈디 스스로를 조금쯤 일컫는구나.

 그럴 수 있는데 라시드의 말문을 꽉 다물게 한 인간이 바로 친아들 하룬이라는 사실. 어느날 하룬의 어머니 소라야 여사께서 사무원으로 일하는 이웃집 놈팽이 생굽타 선생하고 눈이 맞아 남편, 아들을 버리고 내빼버린 겁니다. 생굽타는 '허풍대왕'이라는 별호를 즐기고 있던 하룬의 아버지 라시드 알기를 맨날 '사실도 아닌 이야기를 맨날 해봐야 그게 무슨 소용인데?'라고 우습게 알고 있었는데, 그 별볼 일 없는 작자가 다른 여자도 아니고 엄마를 데리고 날라버린 것이 거 참 묘해서 아버지한테 정말로 이렇게 물어봤던 거.

 "아버님. 사실도 아닌 얘기를 맨날 떠들고 다니는데 그게 국민생활에 무슨 도움을 주겠나이까. 세 가지만 알려주시면 황감하겠나이다."

 라시드, 이제 세상에 하나 남은 아들 하룬으로부터 이따위 얘길 듣고 입이 꽉 닫혀버린 거다.

 그 후 라시드 선생이 떠벌리고 다니는 이야기의 원천 '이야기 바다'를 향하는 버스를 우연히 얻어타게 되고 그리하여 드디어 이야기 바다에서 '이야기' 폐색증에 걸릴 위험천만의 상황에 맞게 되는데, 동화의 형식을 띠고 있음을 감안하면 당연히 해피 엔드로 끝나야 하는데 말씀이야.

 (모험의 내용은 함구! 한 번 얘기하면 끝장을 봐야할 거 같다)

 완전 살만 루슈디라는 이름 하나 보고 읽은 책. 원래 내가 동화책도 즐겨 읽기는 한다. 근데 다 읽고 잠깐 생각해보니(내 인생에 곰곰히 생각했다고 말하고 썼던 건 전부 구라다. 겪어보니 곰곰히 생각해보나, 밤새워 고민해보나, 잠깐 생각해보나 결론은 다 비슷했다. 오히려 잠깐 생각해보는 게 훨씬 더 경제적이었다) 동화라고 하기엔 좀 무겁고, 소설이라고 하긴 숨어있는 내용이 문제고, 하다가, 에라, 소설이라고 하자, 결론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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