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과 에블린 민음사 모던 클래식 57
잉고 슐체 지음, 노선정 옮김 / 민음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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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이 어떻게 빛나는지>를 쓴 작가인줄 알고 기쁜 마음으로 책을 선택해 읽다가, 문득 정신 차려 책장을 올려다보니 <그것이……>를 쓴 사람은 토마스 브루시히, 잉고 슐체가 썼고 내가 읽어본 장편은 <새로운 인생>. 즉, 완전 착각. <아담과 에블린>은 <새로운 인생>을 쓴 3년 후 발표한 작품으로 이 부분에서 “전작과 마찬가지로”라는 구절이 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헷갈리게 했던 바와 같이, “<그것이……>와 아주 비슷하게” 동서 독일의 1989년 통일 시기에 동독 인민들의 선택을 둘러싼 갈등을 두 주인공, 아담과 에블린, 아담은 다들 아실 것이고 ‘에블린’은 ‘이브’를 연상시키는 독일 이름이라고 하니, 저 예전에 ‘말씀’이 있어서 지구상 제일 먼저 만들어진 남자와 여자를 은유하는 두 남녀 주인공을 등장시켜, 통독 과정 당시 일반 동쪽 독일 인민들의 난감한 의식을 재미나게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난감한 의식이라 함은 에블린으로 대표하는 많은 동독 시민들은 서구를 동경하다가 드디어 탈동脫東에 성공한 사람을 대표하고, 아담은 굳이 체제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을 꼭 바꿔야할 이유를 알지 못하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해 그냥 동쪽에 머물고 싶으나 사랑하는 에블린이 꼭 동쪽에서 살아야하다니 차마 그녀와 떨어질 수 없어 어영부영 서쪽에 살게 된 인물을 대표한다. 그래서 어쨌거나 동쪽에서 낳고 자라고, 그 정도면 잘 체제에 적응하여 어렵지 않게 살았던 인간들이 처음으로 자본주의 가치관과 체제로 탈출하게 되어 아담과 이브, 즉 아담과 에블린으로 불리울 수 있게 되는 것.
 나는, 내가 꼭 남자라서가 아니라 아담의 입장에서 책을 읽었는데(어쩌다 그렇게 됐다. 아마 나 말고도 많은 분들이 이 책은 저절로 아담의 시각에서 읽었을 거라고 믿는다), 동쪽 독일에서 아담의 직업은 여성의류 재봉사. 일단 외국어로 표기해야 더 좋게 들린다는 몽매한 21세기 대한민국 언어의 흐름을 좇아 얘기하자면 여성 의류 디자이너로, 자신이 (주로 중년의 돈 많은) 여인들의 세련된 옷을 디자인해서 지어준 다음에 자신의 ‘작품’을 입힌 채로 사진 한 방을 찍어 보관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으며, 뭐 상황이 피할 수 없게 진전될 경우엔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작품을 몸에 걸친 여인들로부터 직접 만든 작품을 홀딱 벗게 만드는 신공을 가지고 있는 30대 초반의 남자. 어느 날 릴리라는 이름의 나이 들고 포동포동한 중년 여인에게 자신이 지은 옷을 입히면서 옷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산지 이틀밖에 되지 않는 실크 브래지어를 벗어 맨몸에 작품을 걸치게 한 다음, 원래 계획은 비록 그렇지 않았지만 자기도 모르는 새 자신의 손가락들이 작품의 아래, 즉 곧바로 맞닿게 되어 있는 릴리의 피부 위를 적극적으로 탐사하기 시작했으며, 기대와는 달리 그리하여 벌어졌을 파노라마는 과감하게 생략한 채, 다음 장면으로 포동포동한 릴리는 욕실에서 비누거품 잔뜩 뒤집어 쓴 욕조 속에, 아담은 벌거벗은 채로 작업실에 서있는 순간, 동거인 에블린이 난데없이 그들의 동거가옥에 쳐들어오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에블린은 스물 한 살의 똑똑한 여성. 그러나 아쉽게도 동쪽 독일이 요구하는 체제와 법률에 대한 순종을 가지고 있지 않아 자기가 원하는 전공을 선택하지 못한 대학생이 되었다가, 엉뚱하고 흥미 없는 전공을 공부하느니 차라리 다니지 않음만 못하다는 현명한 결론을 내린 것까진 좋았지만 지능지수 높은 아가씨가 기껏해야 슈퍼마켓 계산원을 하고 있었으니 평소 자기가 사는 꼴에 지극히 만족하지 못했던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인데, 어느 날 불쑥 자기 꼴이 너무 한심스러워 한 바탕 벌컥 성을 내며 그것도 직장이라고 아 썅, 낼부터 안 나올 테니까 그런 줄 알아라, 대성일갈한 다음 내연남의 위안이라도 받을까싶어 벌컥 현관문을 열어 젖혔더니, 욕실 문을 훤하게 열어놓은 피둥피둥한 아줌마가 비누거품을 뒤집어 쓴 채 욕조에 앉아 있고 내연남은 벌거벗은 채로 장롱 옆에 숨어 있더란 말이다. 아이고, 내 더 이상 이놈의 공산당 치하에선 살 수가 없다, 명확한 결론을 내리고 그길로 짐을 싸서 사촌이라 일컫는 나이많은 서독 남자 미하엘을 따라 헝가리 인민공화국의 수도 부다페스트를 거쳐 친구네 집으로 내빼버리고 만다.
 비록 육체가 원하고 본능이 원해 나이 많고 피둥피둥한 아줌마의 몸을 탐냈을지언정 죽으나 사나 에블린을 사랑해마지않는 아담은 그길로 만든지 28년이 넘은 똥차를 끌고 이들을 찾아 나서면서, 많은 사람들은 만나고 드디어 아담이 원하지 않았던 서독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망명해버리고 마는데, 하이고.
 문제는 동쪽이냐 서쪽이냐, 하는 선택과 그에 따른 실행 또는 모험담이 이 책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 비록 동쪽의 많은 인민들이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투쟁하고 구호를 외쳤지만 동쪽은 동쪽 나름대로의 미덕이 있었던 것이고, 그 안에서 안분하던 인물이 아무 대책 없이 서쪽으로 넘어와서 겪을 수밖에 없는 혼돈과 부적응, 뭐든지 과잉으로 공급되는 자본주의적 질서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그건 날 때부터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살던 이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일 수도 있고 뭐 그런데, 예를 들면, 자본주의 세계로 이주하기로 결심하자마자 생긴 스물한 살 에블린의 태내에 막 생긴 생명이 과연 아담의 아이인지, 아니면 사촌이라고 주장하던 미하엘의 아이인지 도무지 알 수도 없으면서 그냥 아담과 계속 살기로 해버리고, 그리하여 지속시키기로 한 생활 역시 그리 행복해보이지 않는 건 물론이며, 동독에선 유명한 의상 디자이너일지라도 서쪽으로 넘어오니 시민 대다수가 간편한 기성복만 사 입기 때문에 주어진 일거리라고는 자신의 작품을 만들 수 없는 옷 수선, 그것도 파트타임 말고는 구할 수도 없는 비극.
 아, 오늘 내가 말이 너무 많다. 차라리 원문을 그대로 다 배껴 쓸 걸 그랬나? 반성한다.
 근데 이런 비극성을 잉고 슐체는, 그의 첫 작품 <새로운 인생>은 순전히 잉고 슐체란 이름이 근사해서 사 읽었는데, 이 책은 작가의 이름하고는 관계없이, 그는 이 작품을 산뜻한 희극으로 묘사하고 있는 점이 지극히 마음에 들었다. 비장하지 않은 비극. 숨어있는 웃음의 코드로 오히려 강화되는 비극성. 여기서 말하는 비극성은 뭐 킹 리어나 데스데모나 혹은 오필리어의 비극이 아니고 굳이 비교하자면 경쾌한 비극인데, 이걸 경쾌한 비극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게 하는 거 역시 작가 잉고 슐체의 독특하게 발랄한 시선이 굳건하게 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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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 - 2010 제34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청춘 3부작
김혜나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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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민음사가 주관하는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오늘의 작가상’이 어떤 상인가. 한수산의 <부초>, 박영한의 <머나먼 쏭바강>,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최승호의 <대설주의보>, 조성기의 <라하트 하헤렙>, 강석경의 <숲속의 방> 등, 가히 당해 연도 빛나던 작품들을 골라 어제도 아니고 바로 오늘의 작가라고 계관을 씌워주던 상이다. 물론 나 소싯적에 그랬다는 말. 요새는 넘겨듣기론 민음사에서 낸 책만 아니라 모든 출판사에서 나온 모든 책을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는데 그것도 민음사의 돌아간 사주 박맹호 선생 아니면 힘들었을 결정이었겠다.
 하여간 그런 상을 받았다고 하니 요샌 오늘의 작가상 수준이 얼마나 되나 싶기도 하고 (내가 이렇게 써놓고 다시 읽어봐도 참 건방지기 짝이 없는 말이긴 하지만 하여간) 오랜만에 듣는 상, 그동안 밥상, 술상, 찻상, 개근상밖에 받아본 적 없어 오늘의 작가상이란 이름도 새삼 멋있기도 해서 한 번 골라 읽어봤다. 물론 이왕 상 탄지 7년이나 된 책을, 우라질 도서정가제 때문에 비싼 책값 다 내고 읽기 뭐해서 중고책 골라 읽어봤다.
 220쪽 조금 넘는데, 분량이 짧기도 하지만 어쨌든 반나절이면 다 읽는다. 소감? 이거 읽은 독자들은 딱 두 패로 나뉘겠다. 찬반양론이 있을 수밖에 없는 문제작. 나? 당연히 찬성 쪽. 이 책 <제리>만 보고 말한다면 이런 작가의 등장을 두 손 들어 환영하는 입장. 왜? 어떤 소설보다 더 야한 베드 씬 장면이 등장해서. 이건 물론 농담이다. 소설을 읽을 때 느끼는 감정이 낯설고, (낯설어서)불편하고, (낯설고 불편해서)급기야 불쾌한 단계를 넘어, 양쪽 관자놀이 상단 10cm(‘십센찌’라고 굳이 발음할 필요는 없고) 부근에 악마의 뿔이 돋을 만할 때에 이르면, 스물아홉 살배기 작가 김혜나가 하고 싶었던 말은, 여태까지 모든 낯설고, 불편하고, 불쾌하기까지 하며 심지어 도발적인 모든 표현을 통해 인간, 그중에서도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고 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젊은이들의 고독과 소외와 그리움을 넘는 갈망이란 걸 깨닫게 된다. 너를 향한 갈망. 또는 우리를 향한, 너와 내가 우리가 되고 싶은 갈망. 어떻게 이걸 소설행위로 표현해야 할까. 김혜나는 섹스로 이 이야기를 풀어냈으며 그래서 지독한 수준의 성애묘사가 바로 그 자리에 필요했었으리라. 작중 주인공 ‘나’가 거의 언제나 그랬듯이 섹스가 나에게 준 건 까마득한 벼랑위에 선 듯한 오르가즘이 아니라 언제나 참고 견뎌야 하는 고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 모를 관계의 유지 및 새로운 관계의 생성을 위해 섹스는 언제나 필요했던 것이었다.
 21세, 22세, 많아봤자 25세 가량의 젊은 여성들. 인천 소재 2년제 대학의 야간부에 다니는 아가씨들은 부모한테 용돈을 받고, 모자라면 아르바이트를 해서 벌충을 해가며 남자 도우미를 불러 노래바, 노래방의 ‘방’을 ‘바Bar’로 바꾼 결과 유흥음식점으로 바뀌어버린 노래바에서 질탕하게 때려 노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이런 철딱서니 없는 젊은 것들을 봤나, 하는 것이 처음에 든 솔직한 감정. 외롭다, 힘들다, 난 패배자다, 하는 그들의 정서를 정말로 한심하고, 우울하고, 세상모르고, 어이없게 받아드리는 기성세대, 즉 내 마음 속의 것들이 마지막 장을 넘길 때 진정으로 마음 짠하고, 속상하고, 공감해서 내게 기대 마음껏 눈물을 쏟을 수 있게 어깨를 빌려주고 싶게 되는 과정이 이 책을 읽는 일이다.
 워낙 짧은 소설이라 이 정도의 스토리 및 책 읽은 소감이면 충분하리라 믿는다. 더 이상은 아무리 궁리해도 나쁜 영향을 줄 수도 있겠다. 김혜나의 책들을 검색해보면 극과 극의 평이 달리는데, 하나 정도 더 읽어볼 예정. 일단 이 책은 내 마음에 딱 들었으며, 그리하여 아직 민음사에서 매년 주는 ‘오늘의 작가상’에 대한 신뢰도 연장되었음을 널리 고한다. (어쭈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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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 밀레니엄 (문학동네) 2
스티그 라르손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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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이 소설에 그리 어울리지 않는 거 같아서 스웨덴 말 “Flickan som lekte med elden”을 구글 번역기에 돌려봤더니 “화재로 놀고 있던 소녀”란다.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어 다시 스웨덴어→영어로 해보니까 “The girl who was playing with the fire". 뭐 하여간 그렇다는 말이다.
 라르손 본인이 기자 출신의 작가라, 이 책, 밀레니엄 시리즈의 두 번째 이야기는 ‘밀레니엄’이란 월간지의 선하고 독한 기자 미카엘 블롬크비스트가 겪는 스릴러 범죄에 대한 소설인데, 재미난 것이, 이 작자가 세계에서 세금을 제일 많이 내야하는 스웨덴에서 열라 기자생활을 해도 별 볼일이 없을 거 같으니, 나중에 늙어서 좀 여유롭게 살아볼까 싶어 40대 후반 들어 이 범죄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거다. 하지만 세상살이가 어디 한 가지 마음먹은 대로 되는 거 있나? 모두 열편의 시리즈를 구상하고 열라 써나가고 있던 도중, 나이 50에 이르러, 세 편의 원고를 출판사에 넘긴 채, 정작 책이 나와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에 등극해 자신의 통장에 숨 막힐 듯한 현금이 쌓이는 건 구경도 하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세상 하직하고 만다. 노후 대비하려다 아주 일찍 세상 떴다. 그게 인생이다.
 하여간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 가운데 첫 번째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을 읽어보고,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잘 쓴 대중소설’이라 시리즈를 몽땅 독파하리라 마음먹어 읽어보게 됐다.
 전작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에서 고생을 죽도록 했던 150센티미터, 가냘픈 체격의 아가씨 리스베트 살란데르는 고생 끝에 잭팟 또는 로또가 터져 죽어 호적이 없어진 악인의 돈 30억 크로나, 우리나라 돈으로 4,200 억 원을 아무 거리낌 없이 삥칠(삥치다: 은어, 속어. 나쁜 꾀로 금품을 얻거나 만만한 인간을 협박해 금품을 빼앗다) 수 있어서 졸지에 백만장자로 등극한 다음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돈 많으니 행복하겠다, 싶지? 천만의 말씀. 여태까지 내내 거렁뱅이로 살아와 정작 돈이 넘치게 많아도 폼 나게 쓸 줄을 모른다. 부유하고 가방끈 긴 인간들과 어울리는 대화도 할 줄 모르고, 마음에 드는 펜타하우스 한 채 사려고 해도 복덕방 늙은이는 쳐다보지도 않아 결국 해외 대리인을 통할 수밖에 없는걸. 근데 이런 거 가지고는 소설을 쓸 수 없다. 더구나 완벽한 대중소설임에야. 그리하여 작가 라르손이 머리를 짜내 이 가냘픈 아가씨를 둘러싼 범국가적 범죄행위를 하나 장만하니, 살란데르 아가씨의 지문이 묻은 권총으로 세 명의 대갈통이 박살나버리고 만다. 어릴 적부터 문제아의 최상급으로 등록되어 있던 아가씨의 지문은 당연히 정부당국에 의해 보관되어 있었고, 화려한 전력이 뒷받침되어 살란데르는 단박에 제 1의 용의자로 등극하고 만다. 그.러.나. 살란데르 아가씨는 엄마하고 살던 자신의 아파트는 친구한테 줘버리고 가명으로 위에서 말한 200평짜리 펜타하우스에 입주해 살고 있으니 그걸 어떻게 찾아.
 여기까지 스토리는 책 소개에 다 나온다.
 이런 소개는 정말 밉상. 특히 범죄소설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내용을 조금이라도 보여주는 건 진짜 바람직하지 않다.
 전작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에서 자주 보였던 엽기 변태와 학대 및 고문 같은 씬은 이 책에선 나오지 않고, 조금 순화된 느낌이 들지만 그래도 매그넘 총을 인간의 대가리를 향해 쏘고, 총알을 맞은 인간 대가리의 모습을 묘사가 등장하는 정도. 전기톱을 이용해 사체를 분리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움직임 같은 것이 제일 지독한 묘사인데, 전작하고 비교하면 애교 수준이다.
 이 시리즈의 책을 읽은 노벨문학상 수상자 바르가스 요사는 “난 일말의 부끄럼 없이 말한다. 환상적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되게 웃기다. 부끄럼 없이 말하다니. 그냥 환상적이라고 하면 어디 덧나? 이게 뭔 말씀이냐 하면, 노벨상 수상자가 대중 소설을 읽고 환상적이란 소감을 달면 그게, 기본적으로는, 부끄러운 행위라는 거다. 대중 소설을 읽는 일이 부끄러운 일이야? 그렇게 생각한다면 말리지는 않겠는데, 제발 하나만 부탁하자. 웃긴 얘기는 가려서 하라고.
 백문이 불여일견. 무척 재밌는 책. 시간 죽이기 위한 최고, 최선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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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09-12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사서 읽으셨군요.
이 시리즈 2쇄부터는 반양장으로 나온다고 해서
그때를 노려보는 중입니다.
인테넷으로 사도 만 7천원이라 좀 비싸더군요.
하긴 반양장이라고 해도 가격 차이 별로 안 나겠지만
여의치 않으면 중고샵 판매 때까지 기다려 보든가.ㅋ

Falstaff 2017-09-12 14:57   좋아요 0 | URL
반양장이라도 얘기하신대로 그리 차이나지 않을 겁니다. 한 만5천원 하겠군요.
하여간 그노무 우라질 도서정가제 때문에 여러가지로 코피나는 21세깁니다. ㅠㅠ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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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작가이긴 하지만 오히려 바로 유명세 때문에 정작 읽어보기를 차일피일하게 된 소설가. 이런 기분 아시지? 3년 전에 <장미의 이름>을 읽고 무릎을 탁, 쳤다. 차일피일은 괜히 했네. 얼른 읽어볼 것을. 그러면서 한 구석으론, 책을 번역한 이윤기 선생이, ①내가 알기론 이태리 말을 한국말로 옮겨 책을 낼 만큼의 이태리어 실력을 갖고 있지 않은데다가, ②번역하는 분이 한국말로 글을 과하게 잘 쓰는 사람일 경우 오히려 원본을 손상시키는 위험을 잘 알고 있어서 이윤기 번역서를 피하다보니 두 번째로 읽은 책이 <푸코의 진자>가 아닌 이태리어→한국어, 즉 직역과 동시에 적어도 진지한 번역인 것처럼 읽힌 <바우돌리노>가 됐으며, 세 번째 역시 직역(인줄 알았는데 암만해도 아닌 것 같음), 그리고 (다 읽고 조심스레 결론을 내려보니)공을 많이 들여 번역작업에 임한 것이 틀림없는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이 됐다. <푸코의 진자>를 다음에 읽으려고 하는데 그건 전적으로 <로아나....>의 주석에 <푸코의 진자>와 겹치는 부분을 상세하게 콕 집어놔서 혹시 두 작품 사이에 뭔 관계가 있나 싶어서이지만, 솔직히 이윤기 번역이란 게 좀 맘에 걸린다. 아울러 그동안 외국 시의 번역은 반역이란 투철한 인식 아래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외국 번역시집 한 권은 꼭 읽어보려 한다. 누구냐 하면, 랭보. 에코가 진짜 시인이라고 은근히 강조했기 때문에. 아시다시피 난 책 속에 나오는 또 다른 책에 관심이 무지 많아서. 또 있다. 에드몽 로스탕이 쓴 <시라노>. 동명의 오페라가 원작의 거의 모든 걸 다 포함하고 있어서 마치 읽어본 듯한데 <로아나....>의 뒷부분이 온통 시라노와 로잔느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가 깔려 있어 마음 고쳐먹고 한 번 읽어보려 한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에밀리오 살가리가 쓴 <산도칸-몸프라쳄의 호랑이들>도. 이건 화자 ‘나’ 잠바티스타 보도니, 애칭으로 얌보의 유년시절에 감동을 받아 평생에 걸쳐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소개한다. 위스망스의 소설 하나가 더 있었는데 검색해보니 절판이다.
 문제는 돈 많은 고서적상 얌보가 술, 담배, 여자, 과다한 독서에 따른 운동부족(누구 하나를 콕, 집어서 얘기하는 거 같다)에 따른 고혈압으로 하루 날을 잡아 까무러친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물론 뒷목 부여잡고 어어… 하면서 자빠지는 모습이 나오는 게 아니라, 이미 까무러쳤는데 병원에서 서서히 회복하는 광경, 완전한 오리무중에 빠져 갈 길을 알지 못하는 상태와 매우 비슷한 환경. 저 멀리서 어딘가, 그리고 누군가가 내게 얘기를 하고 난 대답을 하고, 1998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지단이 골을 넣은 프랑스가 브라질에 3대 0으로 이겨 우승했다는 건 알고 있으나, 자신이 낼 모래 환갑인 노년의 남자고, 동갑내기 심리학자 마누라 파올라와의 사이에 결혼한 두 딸, 세 손자들이 있다는 기억은 완벽하게 소거된 상태로 깨어난다.
 거 재밌겠다. 눈 떠보니 처음 보는 여자가 내 아내라고 주장하면서 내 몸의 여기저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주물럭거린단 말이지. 진짜 내 눈 앞의 다 늙어버린 여자가 30년 넘게 같이 산 아내란 말인가? 그렇기는커녕 난 결혼 생활이란 것이, 여자하고 함께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무슨 기분인지도 전혀 모르는데? 안 물어볼 수가 없었겠지. “난 괜찮은 사람이었소?” 여자는 싱긋 웃고 말한다. “대체적으로 괜찮았어요. 유혹에 약한 걸 빼면.” 아내라고 주장하는 여자 뒤로는 젊은 주부 두 명이 세 아이를 데리고 서 있다. 자식과 손자들이라는데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자식이라면 자라면서 속도 썩히고 그랬을 테니까 기억하기 싫을 수도 있겠지만 설마 손자 손녀들을 내가 알아보지 못할까. 근데 기억나지 않는다. 퇴원 후 집에 돌아가서 쉬고 있는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이면서 가장 친한, 친하다고 주장하는 남자가 왔는데도 전혀 누군지 모르겠다. 그가 눈을 찡긋하며 짓궂은 농담을 해도. “어여쁜 시빌라한테 전화해봤어?” 뭐라고? 시빌라? 그게 누구?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데 이 경우엔 심각하다. 여자 이름이라서. 아내가 말했었다. 유혹에는 약했다고.
 “아, 미안, 미안. 자네 고서적상점 아가씨야. 정말로 아름다운 아가씨라서 남자라면 누구라도 다 한 번 쯤 마음속에서 간음하게 만들 정도지. 흔히 자네한테 지금처럼 놀리고 그랬네.”
 아, 미치겠다. 그걸 어떻게 믿어. 가게에서 하루 종일 둘이 같이 있었다면, 거기다가 내가 천성적으로 유혹에 약했다면 과연 그리 어여쁜 아가씨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었을 수 있었을까? 게다가 몸이 조금 좋아진 거 같아 광장 한 바퀴 산책을 하는데 약간 나이든 티가 나는 젊은 여인 반나가 와서 얌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얌보, 얌보.”하면서 “나는 너에게 두고두고 아주 멋진 추억으로 남을 거야” 하는걸 보면 분명 이건 보통 사이가 아닌데 전혀 기억나지 않는 거다.
 사태가 심각함을 제대로 알아챈 심리학자이자 현명한 아내. 원래부터 얌보는 대학진학 이전까지 그가 주로 살던 솔라라(지역이자 저택을 지칭하는 고유명사) 시절의 기억을 싹 지우고 살던 터. 비록 아주 촌이지만 공기도 좋고 얌보의 기억회복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거 같아서 그곳에서 몇 달을 보내라고 거의 강권을 하다시피 한다.
 나, 지금 독후감 쓰면서 굉장히 중요한 얘기한 거다. 주인공이 원래부터 청소년 시절까지의 기억을 지우고 살았다는 거. 그럼 혈압이 터져 자빠진 다음에 후유증으로 모든 기억을 소거하기 전에도 생애 일부분에 관해선 회로가 망가져 있었다는 중요한 설정.
 하여간 솔라라로 주거를 옮긴 얌보. 그는 그곳에서 열 살 가량 위인 청지기의 딸 아말리아의 보살핌을 받으며 몇 달을 지내면서 1930년대와 1940년대 초반, 그의 유년기와 소년기 시절, 또한 이탈리아 현대사의 질곡기桎梏期 한 가운데를 관통하던 시기에 있던 일을, 그의 할아버지가 수집해놓은 온갖 책, 잡지, 신문, 우표, 과자 깡통 등을 통해 하나하나 알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드디어 <로아나 여왕의 놀라운 불꽃>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이 대목에서 “안 알려줌!”이 나와야 하지만 오늘은 예외적으로 알려드리겠다. 만화책 제목.
 당연히 이렇게 쉽게 알려드리는 이유는, 그래봤자 <로아나....>가 만화책 제목이라는 걸 백번 얘기해도 절대 이 책의 프레임 비슷한 건 생각도 못할 것이기 때문. 소설의 절반 이상은 얌보 또는 에코의 소년시대에 읽은 책과 잡지, 만화책 같은 것들에 할애하고 있다. 근데 그걸 글쎄, 거의 다 사진을 찍어 삽화 비슷하게 보여준다는 말씀. 하여간 별의 별 것이 다 있다. 파시스트, 물론 ‘두체’라고 칭했던 무솔리니와 그 일당들을 찬양하는 노래 가사까지 다 나오니까 할 말 없다. 이미 노년에 접어든 작가가(이 소설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 한다) 자신의 유소년 시절을 회상하면서 쓴 일종의 성장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고, 다 늙어 죽음의 침상에 누워 그땐 그랬고, 그때는 또 그랬지, 순간순간을 짚어가는 삽화소설일 수도 있고(삽화소설이라고 하는 게 더 비슷하겠다), 자신의 인생에서 한 순간, 우연히 조국의 불행한 현대사와 맞부딪힌 시절에 겪을 수밖에 없던 허구의 개인사를 보태 소설로 만들었을 수도 있겠다.
 한 번 읽어보시라 권해드릴까? 글쎄.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중에서도 천수를 다 하고 돌아간 작가들의 경우에, 참 아쉽게도 마지막 작품은 전작들과 굳이 비교하면 눈썹을 휘날리는 경우가 그리 없기 때문에, 내가 읽기엔 참 좋았으나, 하여간 신중을 기해 선택하시란 사족을 달아야 나중에 핀잔을 덜 먹겠다 싶어서 말씀이야.

 읽으면서 제일 골 때리는 장면이, 아내라고 주장하는 여자하고 같이 자야하는 첫날 밤 침상 위에서 슬쩍 손을 대니까, 아내가 하시는 말씀이, “처음 날 알기 시작한 남자하고는 그걸 할 수 없어요.”라는 취지로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아니라, 며칠 후 드디어 사랑의 행위를 마친 다음에 역시 아내가 하시는 말씀. “원 세상에, 살다보니 별일이 다 있네. 예순 살 먹은 남편의 동정을 빼앗다니.” 아,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 이게 진짜 유머 아냐? 여기에 남편께서 아내에게 화답하시는 말씀. “아예 안 하느니 늦게라도 하는 게 나은 법이죠.” 같은 장면에서 더 재미난 건, 일을 다 마친 후에 얌보 선생께서 하시는 말씀. “이제 사람들이 왜 그걸 밝히는지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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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7-09-11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세욱 님, 번역이 정확한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번역에 공들인 것은 알 수 있죠.
이 ‘로아나‘의 경우, 역주에 영문판이랑, 어디 다른 걸 참고했다고 자잘하게 나오더라구요.
그 수고를 알게 되니, 괜히 트집잡고 싶었던 마음이 ‘완전 무장 해제‘ 됐었습니다.

님의 리뷰로 다시 보게 되니, 완전 반가운 마음에~^^

Falstaff 2017-09-11 13:24   좋아요 0 | URL
예. 하여간 꼼꼼하게 시간 무척 많이 들여 공들여서 번역한 티가 나더라고요.
저도 정확한 번역 여부에 관해서는 깡통입니다만 ^^;

잠자냥 2017-09-11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위스망스의 소설은 <거꾸로> 인가요? 전 미셸 우엘벡 <복종> 읽다가 위스망스 <거꾸로> 읽어봐야 겠구나 하고 검색해봤더니 절판이더라고요. 다행히 알라딘 중고에서 싼 가격에 거의 새 책을 구했습니다!

Falstaff 2017-09-11 13:25   좋아요 0 | URL
지금은 중고책도 별로 없더라고요. 다시 한 번 뒤져봐야겠습니다. ㅠㅠ
 
랩소디 인 베를린
구효서 지음 / 뿔(웅진)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문학웹진 뿔》에 연재했던 걸 다시 검토, 수정해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책의 뒷날개에 작가가 쓴 ‘연재를 종료하며’란 짧은 글을 소개한다. 작가 소감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써있다.
 “피부로 느꼈던 물리적 장벽은 없어졌습니다만, 우리를 더 크게 가두려는 전지구적 화폐의 움직임은 마침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미래의 불행한 디아스포라로 불러 올지도 모릅니다.”
 이 문장에서 몇 개만 추려보자.
 1) 물리적 장벽은 없어졌다 : 20세기의 대부분을 지역적으로 가로막았던 이데올로기의 장벽을 말하는 거 아닐까. 이제 그것이 없어져 대한민국 국민이 합법적으로 갈 수 없는 곳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말고는 (거의) 없다.
 2) 우리를 더 크게 가두려는 전지구적 화폐 : 이미 상당한 힘으로 지구상 거의 모든 지역을 점령해버린 신자유주의 또는 신자본주의를 말함.
 3) 미래의 디아스포라로 불러 올지도 모른다 : 전지구적 화폐, 즉 신자본주의는 앞으로 많은 지구인들을 자신의 고향 또는 조국의 품을 떠나 세계로 방랑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렇게 읽는 것이 가능한가? 가능할 거 같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나온다. 디아스포라.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 한 대가로 집과 고향과 조국을 잃고 2천여 년 간 세계를 방랑하며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유지해온 유대인들을 디아스포라라고 일컫는데, 작가, 그것도 이미 문단에서 나름대로 자리를 확보한 중견작가가 자신의 작품에서 디아스포라 운운해버려 평론가들 역시 그것에 초점을 과하게 맞추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근데, 정말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이 있다면 (죽지 않으면 인간의 죄를 대신하지 못할 운명이었던)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리게 원인을 제공한 유대인을 정말 미워해서 누천년 동안 세상을 헤매게 만들었을까? 일단 이 논의는 여기까지. 종교 얘기는 술맛 안 나게 하고, 오늘 난 넙치회에 소주를 마실 예정이니까.

 구효서는 나도 매우 독특한 작가, 그리고 믿을 수 있는 소설가로 분류해놓았다. 유명작가에게 이런 말을 하다니 무도하다고? 천만에. 아무리 훌륭한 작가도 결국 나 하나를 위해 평생 소설을 쓰다가 죽는 숙명을 띠고 사는 인간이니 이렇게 얘기해도 별 무리는 없을 거 같다. 그의 책을 참 오랜만에 읽었다. 역시 구효서.
 기본적으로 이 <랩소디 인 베를린>은 재일 한국인(또는 조선인) 3세이자 세계적 작곡가, 그리고 윤이상 선생에게 누가 될까봐 매우 조심해 글을 썼다고 고백한 한국 이름 김상호, 일본 이름 야마가와 겐타로, 독일 이름 토마스 김이 독일에서 자살을 하면서,
 “아, 이것은 모질지 못한 짓일까 모진 짓일까. 내가 늘 찾던, 내가 평생 가닿고자 했던 곳이 하나코였다는 사실을 못내 고백하는 것.”
 이란 짧은 유서를 전해 받은, 일본의 부락민이며 축(畜: 도축업) 가문 출신의 하나코란 67세의 작은 몸피의 약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노인이 마지막으로 만나고 40년이 지난 다음 겐타로의 자살의 동기를 밝히기 위해 독일에 도착해서 궁금증을 해결하고 떠나는 것까지를 그리고 있다.
 겐타로 또는 김상호라는 인물은, 일본 태생으로 한국어(또는 조선어)를 거의 알지도 못하지만 일본에서 조선인으로 차별을 받으며 살았고, 독일 유학중에, 임진왜란(1592~1598년)의 와중에 왜군에 의하여 포로로 잡혀 어찌어찌 독일로 흘러든 조선인의 후예 가운데 하나, 요한 힌터마이어가 18세기 중엽, 독일의 이름난 (아니면 매우 유능하지만 저평가된) 작곡가가 됐다가 교회법재판의 와중에 독일을 떠나 다시 조선으로 돌아간 사건에 대단한 흥미를 느껴 자료를 수집하던 중, 그에 관한 필사본이 있는 평양에 방문해 <토카타와 푸가 Toccata und Fuge : 책에선 이후 “TNF”로 요약>을 베껴오고 이후 자신의 작품 연주회를 위해 서울을 방문했다가 모진 고문 끝에 간첩혐의를 뒤집어 써 17년간 옥살이를 한 다음에 다시 독일로 돌아가 20년을 더 살다가 결국 자살 한 것으로 정리된다.
 그러니 <TNF>의 주인공 힌터마이어나 겐타로나 자신이 주인이 아닌 객지에서 삶을 이어간 인물들이니 그냥 이방인들이라고 칭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근데 굳이 작가나 평론가들이 이들을 코리안 디아스포라, 라고 선언하는 건, 여기에 20세기 중반, 전체주의에 의하여 저질러진 유대인 학살에 관한 이야기 또는 잡지 기사가 중요하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1944년 5월부터 9월까지 작센하우젠에 수용되었던 유대인 가족의 진술에 의하면, 진술인의 아버지이자 트럼펫 주자였던 ‘그’는 ‘뱀’이란 별호로 불렸던 수용소악대 악대장으로부터 예비대원으로 오디션을 받던 중 텔레만의 D장조 협주곡을 좋아해 즐겨 연주한다는 이유로, 더러운 유대인이 정통 독일 혈통의 대 음악가를 좋아한다는 것 때문에 오디션 중에 (인격적, 육체적으로)잔인하고 비참한 고문을 당했으며, 수용소악대 전 대원들 역시 수시로 습관적이고 악랄한 모멸과 학대를 당하다가, 어느 날 ‘선발’되어 학살을 당했다고 하는데, 그때 진술인의 나이가 10살 이었단다. 세월이 흘러 책에선 진술인(피학살자 '그'의 아들)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 인물과, ‘뱀’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인물까지 등장하여, 겐타로의 행적을 추적하는데 도움도 되고 괜히 돌아갈 길이 되기도 해서, 나치, 즉 ①전체주의 혹은 지독한 독재에 의하여 학살을 당한 유대인과, ②일본 내에서 외국인, 특히 조선인이란 것 때문에, 더러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타서 대지진이 발생해 많은 일본인이 죽었으니 학살당해 마땅한 민족으로의 조선인, ③전체주의 혹은 독재 정권의 유지를 위해 조국에 의하여 죄없이 고문을 당하고 17년간 옥살이까지 해야 했던 겐타로의 공통점을 독자로 하여금 떠올리게 한다. 그리하여 구효서 본인과 평론가들, 서평을 쓰는 독자들까지 디아스포라, 코리안 디아스포라, 라고 일컬으며 그것이 어느 정도 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굳이 누천년을 이방의 땅에서 헤매고 다닌 유대인과 같은 단어를 쓰기엔, 조금, 아주 조금, 주인공이 일본 여성이니 그녀를 위해 일본말로 하면, ‘조또’ 무리다.
 오늘 특별히 책의 내용을 막 쏟아내고 있다. 그건 첫째가 오늘 일이 빨리 끝나서 특별히 할 일이 없는데다가, 두 번째론, 이게 중요한 건데, 이런 얘기 숱하게 해봤자, 정말 중요하고 재미난 건, 위의 세 가지 사건 또는 기록과 잡지기사가 어떻게 서로 유기적으로 짜여 있는가 하는 것이고, 그것들을 성공적으로 엮기 위해 등장하는 인물들이 어떤 성격과 말씨와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이건 하나도 얘기하지 않았다는 거.

 굳이 사족을 달자면, 구효서가 음악에 이리 조예가 깊은 줄 몰랐다. 전문적으로 음악에 관한 담론은 등장하지 않지만, 생각과 달리 이 책 정도의 묘사도 대단한 애호가 아니면 묘사하기 정말 힘들겠다고 내내 중얼거리곤 했는데, 역시 작가후기에 직접 포지티브 오르간에 바람을 넣어본 것이 책을 쓰는데 도움이 됐다고 얘기한다. 근데 옥의티를 바늘 끝으로 콕 집자면, 18세기 중반의 연주 장면이 적어도 19세기 후반과 흡사하다는데 있다. 모차르트 이전 시대에 청중이 정말로 연주에 열광했을까? 낭만주의 대작 교향곡을 연주할 때의 흥분과 감동 같은 묘사는 조금 그랬는데, 백미는 다음 구절.
 “대미의 감격이 그에게서 잠깐 현실감을 앗아간 듯했다. 수석 주자에 대한 소개와 격려도 잊은 채, 그는 청중을 향해…… ” (450쪽)
 연주를 마치고 청중이 미친 듯이 갈채를 하고 휘파람을 불고, 발을 구르면, 느지막이 지휘자가 뒤로 돌아 청중에게 인사한 다음 수석 바이올리니스트, 악장에게 손짓해 노고가 많았음을 위로 또는 칭찬하고, 그래도 갈채가 쏟아지면 차례로 다른 수석들을 지목해서 박수를 받게 하는 걸 얘기하는데, 그게 18세기부터 내려오는 전통이었을까? 모차르트가 세상에 막 나왔을 땐데. 하지만 앞에서 얘기했듯 이런 티는 책 전체에 비해 너무 작아서 바늘 끝이 아니라면 집어낼 수도 없다. 재미있는 책. 구효서는 믿어도 된다는 것이 내 평소 생각이었고 이번에도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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