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노 열린책들 세계문학 27
에드몽 로스탕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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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드라마는 읽지 않으려고 했다. 프랑코 알파노가 작곡한 오페라 <베르주라크의 시라노 Cyrano de Bergerac>가 충분히 재미있었고 그 정도의 대본이라면 더 이상 재미있는 극작이 거의 가능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근데 역시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을 읽으면서 마지막 1/4 부분은 온통 <시라노>에 대한 이야기로 도배를 해놓아 이건 분명히 내가 모르는 뭔가가 원작 안에 있다, 라고 판단했다. 그래 정말로 읽어보니 그랬다. 있었다.
 오페라 대본을 쓴 앙리 캐Henri Cain는 확실히 원작의 핵심 부분을 정확하게 포착, 축약하여 대본을 만들었으나, 무대에서 관현악 음악을 배경으로 노래해야 하는 전달 상 시간의 한계로 인해 디테일을 몽땅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뭐 <시라노>만 그런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오페라 대본이 마찬가지기는 하다. 근데, 오페라를 충분히 만족하며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본의 원본인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을 읽어보니, 아니다, 그건 아니었다. 이 작품은 반드시 원본도 읽어봐야 한다고 주장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고, 움베르토 에코가 자신의 작품 <로아나…>에서 쉴 새 없이 <시라노>를 언급할 만큼의 울림이 있었다.
 일단 스토리 먼저 소개.
 가스코뉴 지방 출신의 카데(귀족의 장자가 아닌 아들이 병졸부터 하급사관까지의 계급으로 복무하던 병사)들로 된 군대의 기사 시라노. 하늘은 시라노에게 튼튼한 육체와 민첩한 반사 신경, 둘을 합해서 선천적 결투와 싸움의 능력을 허여했다. 동시에 놀라운 시적 재주와 그 비슷한 예술적 정열까지 몽땅 주었으나, 공평하게도 어마어마한 코를 얼굴의 한 가운데다 배치함으로써 지독하게 못생겼다는 평판을 얻게 했다. 원래 저 희랍시대부터 신들이 하는 짓거리가 다 그랬듯이. 그래서 시라노 하는 일이란 무턱대고 정의파, 용맹과감, 우스운 시적 찬가 등인데 무대가 17세기 초반이라 이런 과한 낭만적 시도는 숱하게 적들을 만들어놓고 만다. 이 기운 센 천하장사, 부르고뉴 성곽에서 (과장이 있겠지만) 무려 백 명을 단기필마로 거꾸러뜨리고 마는 검술의 신공을 자랑할 정도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수준.
 아무리 못생겨도 한 여인을 사랑하지 말라는 법은 없어서 동네 최고의 미녀이자 사촌동생인 록산을 사랑하는데, 하늘이 선물한 시적 능력을 총동원해 근사하고 근사한 연애편지를 써서 사랑을 고백할 찰나, 아, 록산이 먼저 자신의 짝사랑을 고백하며, 금발의 돌대가리 미남 크리스티앙이 시라노의 부대로 전입했으니 잘 봐달라고 하는 거다. 자신이 못생겼음을 잘 알고 있는 시라노는 표정 하나 드러내지 않고, 알았다고 잘 봐주겠다고 약속을 해버린다. 크리스티앙에게 연애편지를 써서 보내달라는 록산의 부탁을 전하자, 생기기만 잘 생겼지 싸움도 못하고 시적 재주도 없는 크리스티앙이 기겁을 하자 시라노는 기꺼이 자신이 쓴 연애편지를 건네주고, 앞으로 크리스티앙의 외모와 자신의 문학적 소양으로 록산을 대하기로 결정을 한다. 물론 록산은 전부 크리스티앙의 재능으로 오해하고.
 그리하여 어느 달 없이 깜깜한 밤, 록산의 발코니에 걸쳐놓은 사다리 아래서 크리스티앙의 목소리를 흉내 낸 시라노가 열정적인 사랑의 고백을 하고, 이에 감격한 록산이 껌벅 넘어갔으나, 정작 사다리를 타고 올라 키스로 불태우는 인간은 크리스티앙. 사다리 아래서 그 꼴을 봐야했을 시라노의 복장은 어땠을까. 쓰라린 심정이야 말로 해서 뭐할까.
 

 이 장면, 유튜브에 있어서 따왔다. 비록 늙었지만 프라치도 도밍고. 발성에 대한 호오는 별개로 하고 하여간 노래 하나는 심금을 울린다. 즐감!

https://youtu.be/FayZ63koKJ8


 그러다 이들은 진짜 전쟁에 나가야 했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하는 시라노에게 록산이 하는 말이라니.
 “오! 그를 당신에게 맡길게요! 그 무엇도 그의 목숨을 위험에 처하게 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 줘요!”, “애써 보겠소… 하지만 약속할 수는 없소.”, “그가 신중하게 행동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해 줘요!”, “그러도록 노력하겠소. 하지만…”, “약속해 줘요, 그 끔찍한 포위전에서도 그를 추위에 떨게 하지 않겠다고!”, “최선을 다하겠소. 하지만…”, “결코 날 배신하게 놔두지 않겠다고!”, “물론 그러겠소! 하지만…”, “나에게 자주 편지를 쓰게 하겠다고!”, “아, 그건 분명히 약속하겠소!”
 시라노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참호 안에서 열라 연애편지를 크리스티앙의 이름으로 써서 새벽마다 포위하고 있는 스페인 병사들을 뚫고 록산에게 보낸다. 굶주림에 처한 병사들 앞에, 스페인 장교의 기사도 정신을 이용하며 과감하게 식량을 가득 실은 마차를 타고 도착한 록산. 크리스티앙의 이름으로 시라노가 보낸 편지에 감동하여 여기까지 온 거다. 그리고 크리스티앙한테 당신이 보낸 편지가 자신의 심장을 녹여 이런 무모한 짓을 하게끔 만들었다고 고백한다. “록산, 사랑하는 록산느. 만일 내가 잘생기지 않았더라도 사랑했을 거요?”, “그럼 얘기하면 뭐해요. 당근이지요. 당신의 마음을 담는 그릇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모르시는 거예요?”, “다시 묻겠는데 내 외모가 노트르담의 콰지모도 같이 생겼어도 날 사랑했을 거냐고.”, “아 그렇다니까 남자가 왜 자꾸 물어보고 그래요, 내 사랑! 날 감동시킨 당신의 편지들이 내 몸과 마음을 다 녹여버렸다니까.” 크리스티앙의 옆구리로 슬쩍 다가온 시라노가 마지막 편지를 그의 호주머니에 질러 넣는 것을 록산은 보지 못했고, 그녀가 진심으로 사랑한 것은 자신의 외모가 아닌 시라노의 시적 재능이란 걸 확실하게 이해한 크리스티앙은 갑자기 핑, 돌아 때마침 시작한 적들의 공세에 무모하게 돌격 앞으로, 숨을 거두고 만다.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마지막 편지. 눈물과 크리스티앙의 피가 물든 편지. 그것이 하도 아름답고 심금을 울려 록산을 편지를 가슴에 넣은 채 수녀원에서 무려 15년 동안 크리스티앙만 생각하며 상을 치룬다.
 일주일에 한 번 씩 들러 친구로서 록산을 위로해온 시라노. 어느 날, 적들에게 통나무로 뒤통수를 얻어맞아 거의 죽게 된 상태로 수녀원을 방문해 록산과 이야기를 하던 중, 록산이 크리스티앙의 마지막 편지를 건네주고 읽어보라 하는데, 날은 어느새 어둑어둑하다가 드디어 글자 한 자 읽지 못할 상태. 그러나 시라노는 편지를 줄줄 읽어 내려가고, 드디어, 15년 만에 록산은 편지를 진짜로 쓴 사람이 크리스티앙이 아니라 시라노였음을 알아채지만 이미 그는 록산의 앞에서 죽어간다.
 재밌겠지. 그래서 영화 <시라노 연애 조작단>이 생기는 거다. 생기기만 멀쩡하지 재주라곤 하나도 없는 크리스티앙 같은 이들을 도와 연애를 하게끔 조작하는 직업이 바로 ‘시라노 연애 조작단’. 하여간 말들은 참 잘 만들어.
 오늘 스토리를 다 소개한다고? 암. 드라마는 스토리를 알고 작품을 읽어야 제 맛. <햄릿>과 <리어 왕> 스토리 다 알고 책 읽어야 더 재밌는 거. 맞지? 그래야 자신이 알고 있는 바로 그 순간을 어떤 대사로, 어떤 모습으로 표현을 했구나! 깜짝 놀라는 것이다. 이 책도 그렇다. 위에서 대충 이야기한 내용을 참 재미나게 생긴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은 어떻게 표현했을까. 다른 건 모르겠고 하나만 말한다. 정말 죽여줘.

 

 


 작가 에드몽 로스탕의 재미난 외모. 보여드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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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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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은 아래와 같은 첫 문단으로 시작한다.


 “시체가 발견된 것은 5월의 마지막 일요일이었다. 비둘깃빛 가운을 부대자루처럼 뒤집어쓴 성가대원들이 직사광선 내리쬐는 교회 뒤뜰에 줄지어 앉아 2부 예배 때 부를 찬송을 연습하는 시간, 지난 밤 처음 만난 연인들이 숙취 때문에 지끈거리는 관자놀이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뜨겁고 어색한 두 번째 섹스를 나누는 시간, 조기축구회 유니폼을 입은 이기적인 가장들이 넓적다리와 정강이 근육을 조였다 풀었다 하면서 중학교 운동장을 달리는 시간이었다.”


 <오늘의 거짓말>, <달콤한 나의 도시>에 이어 세 번째로 읽은 정이현. 앞의 두 권을 읽으면 소설이 시체를 발견한 장면만 빼면, 위와 같이 시작하는 것이 낯설지 않다. 2부 예배를 앞둔 교회 성가대가 찬송가 연습을 하는 것이 일요일 몇 시나 되나? 아, 나의 이 지겨운 버릇. 이거 검색해봤더니 교회마다 다르다. 하느님 말씀이 사업 번창하는 교회의 주일 2부 예배는 대강 9시나 9시 30분이고, 상가 2층 빌려 개업한 개척교회 같은 데선 11시. 지난 밤 처음 만난 연인, 어제 밤에 처음 만났는데 벌써 연인? 아니겠지, 원 나잇 스탠딩 파트너라고 하는 편이 솔직하겠다. 어찌됐던 숙취에 시달리는 심신을 한 번 더 불사르기로 작정하는 시간이라니 9시 정도도 좀 늦겠는데 늦봄 5월의 햇살이 아침 아홉시에 벌써 직사광선으로 내리쬘까? 직사광선이라 할 정도로 내리쬐려면 11시는 돼야하는 거 아냐? 조기축구회 유니폼을 입은 “이기적인 가장(새끼)들”이 운동장 둘러서서 스트레칭을 하는 시간이면, 9시도 늦을 거 같고. 도대체 몇 시야, 그놈의 2부 예배 시간이. 외할머니 손잡고 마지막으로 감리교 교회 가본 것이 벌써 반세기가 넘어 도무지 모르겠다.
 독후감 초장부터 왜 이리 초를 치냐 하면, 첫 문장으로 보시라. “시체가 발견된 것은 5월의 마지막 일요일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소설은 서초동 서래마을 쯤으로 보이는 동네의 70평이 넘는 비까번쩍한 복층 빌라에서 바이올린 국가대표를 꿈꾸는 꿈나무의 실종사건을 다루고 있어, 내용과 관계없이 일단 추리소설의 외형을 쓰기로 작정을 한 작가는, 나처럼 발랑 까진 독자는 애초부터 사건을 추리할 수도 있는 상황이 나오면 전심을 다해 다음 사건과의 연계성을 궁리한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특히 추리소설의 경우 주요 사항에 관해서는 안 썼으면 모를까 일단 말을 했으면, 적어도 시간 단위까지 정확하게 알려주고 독자와 대결duel해야 공평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힌트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책이 끝난 다음에 독자가 아하, 그렇구나, 그랬구나, 몰랐네! 무릎을 탁, 치면 훌륭한 추리소설의 관을 쓰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소설 안에선 추리소설의 단골 등장인물인 사설탐정 문영광 또는 제임스 문까지 등장시킴에도 불구하고, 가족 간의 소외와 고독을 다룬 심리소설이 분명하지만 이왕 추리소설의 외피를 입히려고 했으면 마땅하게 그랬어야지, 하는 것이 첫 번째 불만.
 두 번째 불만은 작가의 전작 <나의 아름다운 도시>에서도 말했다시피, 기성세대의 남성에 대한 깊고 깊은 미움이 이 책 시작하자마자 등장하는 것이 싫었다. 일요일 새벽같이 나가, 비둘깃빛의 부대자루를 입고 1차 예배에 이어 2차 예배의 찬송도 부르고, (요즘은 교회에서 밥도 준다며?) 하루 종일 하느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건 괜찮고, 일주일 내내 늦은 퇴근, 아니면 자영업 사장질 등 고단한 경제활동을 하다가 건강을 위해 (자기가 좋아하는 운동이 됐건, 영원무궁토록 처자식 먹여 살리기 위한 건강 유지의 방법이 됐건) 조기 축구회 나가 허벅지 근육 운동하는 것들은 졸지에 “이기적인 가장”으로 만드는 거다. 생각 좀 해보시라. 다 늙어 짜글짜글한 주름이 좍 깔리고 정수리 머리숱이 다 빠진 중늙은이들이 진짜 기쁨에 벅차, 아이 좋아, 아이 좋아 하면서 땀 뻘뻘 흐르는 대머리로 헤딩해가며 일요일마다 중학교 운동장을 기어 다니겠는지(다 늙어 이젠 젊은 시절에 비하면 뛰는 게 아니라 기어 다니는 수준). 정이현이 어떤 가정환경에서 성장했는지는 모르지만 진심으로 바라노니 스스로 소설에서 묘사하는 가정 비슷한 경험은 해본 적이 없기를 바란다. 물론 악역을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 누구에게 역할을 시켜야 할까를 떠올리면 가족 구성원에서 돈 벌어오고, 나이도 제일 많아 일단 서열 상 제일 꼭대기에 있으며, 그만큼 (똥 같은) 권위도 있는 줄 착각하는 아버지가 제일 만만하겠지. 근데 그것도 한 두 번이지 매번 그러니까 꼭 아버지한테 큰 원한 있는 여자인 것처럼 보인다는 말씀. 그리고 좀 더 성장한 소설가가 되려면 어렵더라도 생각을 좀 바꿔야지 이게 뭡니까, 만날 똑같은 사람한테 똑같은 배역을 주고 말이야. 이 소설에서도 아버지 김상호는 성질 더럽고, 성격 급하고, 돈만 많이 벌어올 뿐 가족 성원에 관한 조금의 관심도 없고, 돈도 분명히 범죄 비슷한 부정한 방법으로 만들어 오는 것으로 상정해 놨다. 아버지가 없었으면 애초에 이 작품이 추리소설의 외형을 띨 수 없었을 것.
 첫 문단을 읽고 나도 당연히 추리소설인줄 알았다. 솔직히 말해선 추리소설을 가장한 작가 특유의 발칙한 이야기를 기대했다. 그녀의 전작을 미리 읽어봤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이지 내가 잘났단 얘기 절대 아님. 그래서 촉각을 바짝 세우고 (추리소설일 수도 있으니)처음부터 2부 예배시간, 술 취한 연인(이라고 할 수도 없는 그냥 헤픈 남녀)이 아침에 잠에서 깨 모텔비 아까워 한 번 더 하는 시간, 조기축구회원들이 스트레칭 할 시간 등을 유심히 계산했던 터. (이렇게 소설책 읽는 내가 나도 싫다) 그러나 이 작품은 위에서 얘기했듯이 분명히 심리소설이다. 아버지 김상호, 큰딸 김은성, 아들 김혜성. 소설에 출현하지는 않지만 큰딸과 아들의 친엄마 강미숙, 새엄마 진옥영. 이복동생 김유지. 감잡히시지? 강미숙이 딸 김은성을 임신한 상태에서 애 아빠 김상호와 결혼한 다음 은성을 낳고 은성이 혼자 적적할까봐, 라는 유일한 이유로 아들 혜성을 또 낳은 후에 이혼했다. 아이들 대가리 다 큰 다음 아버지는 다시 이복누이동생 김유지를 임신한 진옥영과 재혼했다. 친엄마는 이혼 후 곧바로 재혼해버리는 바람에 애들은 외할머니와 이모할머니 아래서 크다가, (엄마는 또다시 이혼하고) 외할머니 돌아가신 다음에 은성은 친엄마하고 살고 혜성은 아버지와 새엄마하고 살기로 결정한다. 그러다 친엄마가 다시 삼혼을 해 이제 은성은 학교 앞에 원룸을 얻어 혼자 산다. 결혼 후 곧바로 새엄마가 낳은 유지가, 열 살이란 최연소로 바이올린 영재 프로그램에 합격한 상태에서 책은 시작한다.
 악역을 맡은 김상호는 당연히 가정 내에서 폭군으로 군림하지만 다행스럽게 폭력을 행사하는 우악스런 악당은 아니다. 대한민국 부촌 가운데 한 곳인 서래마을에 살면서 딸아이에게 대학교수, 대학원생으로부터 두 종류의 바이올린 레슨을 시키면서도 아내의 충동적인 구매욕까지 충족시키며 동시에 큰딸의 난데없는 액수의 용돈요구까지 몽땅 들어줄 수 있는 수입을 올리는 자랑스런 아버지. 그러나 거기서 끝. 넘쳐나는 돈이 어디서 나오는지 가족 구성원 가운데 아는 사람은 없다. 독자는? 당연히 알게 된다.
 진옥영은 차분하면서도 강인한 여성으로 화교출신 한국인. 김상호와 결혼을 통해 한국인이 됐다. 가끔 친정이 있는 대전에 다녀온다면서 엉뚱하게 타이베이로 날아가 대만국립대학에 다닐 때 사귄 첫사랑 왕밍과의 밀회를 하는 비밀을 품고 산다.
 큰딸 김은성. 대책 없는 여자. 술과 남자 없으면 세상사는 재미를 알지 못하는 족속. 술김에 친구들에게 돈 많은 집 막내딸, 자기 이복누이를 납치해 몸값으로 3억쯤 뜯어내자고 제의한 적이 있다는 걸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못하는 철딱서니 실종된 헤픈 아가씨.
 아들 김혜성. 유명대학의 의과대학에 합격하고 1학년 1학기 다니다가 학기말 시험 시작할 때부터 학교만 끊어버린 채(현대과학이 준 선물 포토샵으로 등록금 액수는 팍 부풀려 아버지한테 청구하는 건 잊지 않고) 만 스무 살에 이른 청춘. 의예과에서 미등록으로 제적당했을지도 모른다는 거, 거의 중독 수준으로 차량 연쇄방화를 즐기는 취미를 갖고 있다는 건 가족들은 물론 애인 다희도 모른다.
 막내딸 김유지. 열 살 먹은 꼬맹이가 바이올린도 기막히게 연주하고, 학교에서 비록 따를 당하지만 소위 왕따가 아니라 스스로 따를 자처하는 독립군. 비록 대단히 작은 울타리지만 자기 나름대로 세상과 소통하며 그들과 공통의 즐거움을 나눌 줄 안다는 거, 하다못해 엄마도 모른다.
 이렇게 가족 구성원은 아무도 자기의 비밀을 털어놓지 못하고 각자의 네모난 방, 주먹처럼 생긴 심장 속에서 살고, 생각하고, 확장하고, 비비적거린다. 깊고 깊은 속엔 서로가 서로를 아끼는 애정이 충만하지만 그딴 걸 내놓는 방법도 모르고 그렇게 하려고도 하지 않는, 마주하기만 하면 서걱거리는 모래알 상태. 난데없이 어느 날 발생한 비극적 사건을 통해 가족들은 비로소 봇물처럼 터진 가족애와 사랑을 확인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을 수 없는 비극.
 에이, 뭘 이리 길게 말하나. 가족 간의 소외와 고독을 그리고 있다는 얘기다.
 근데 이런 얘기면 정이현이 즐겨 사용하는 전래의 방법을 썼어야지. 추리소설의 형식을 새로이 시도한 것은 좋았는데 딱 거기까지만 좋았다. 작가는 책의 마지막 ‘작가의 말’을 통해 “진심을 다해 썼고, 세상에 내놓는다. 그것이 전부다.” 라고 했다. 이거 역시 당연한 얘기. 진심을 다해 쓰지 않는 작가가 있어? 세 명만 꼽아보시라. 누가 있나. 다 진심을 다해 쓰는 거다. 그게 소설가의 숙명이니까. 문제는 쥐뿔도 모르는 독자가, 아 이 저자는 진심을 다해 글을 썼구나, 하고 알아줄지 아닐지에 달려있는 것이다.
 전적으로 내 생각을 얘기하자면, 맞지 않는 옷을 입었다. 책 뒤표지에, 누군지 짐작하시지? 한심한 표절녀의 추천사 비슷한 게 씌어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다른 방식, 정이현이 즐겨 사용하는 도시적 감상으로 작품을 썼다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을. 이젠 됐다. 정이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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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10-17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저도 언급하신 첫 문장 지금 이 포스팅을 통해 읽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아침 예배 시간이랑... 모텔에서 연인(?은 개뿔.무슨 연인이러면서 생각)들이 두 번째 응응 할 때랑. 조기 축구 시간이랑 이상하다 안 맞는데??? ㅋㅋㅋ 일단 섹스는 아무때나 할 수 있다 칩시다. 그런데 성가대 노래 부를 때 시간이랑 조기 축구(진짜 아침 일찍 하던데요??) 시간은 영 안 맞아요. 안 맞아. 암튼 그렇고- 한심한 표절녀 ㅋㅋㅋㅋㅋ 문학동네에서 나온 책인가 하고 찾아보니 역시 그렇군요. ㅋㅋㅋㅋ

Falstaff 2017-10-17 10:46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아무래도 이상하죠? 뭐 어쩔 수 없습니다. 정이현은 이 책을 ˝진심을 다 해˝서 썼다니까요.
 
무기를 내려놓으라! 뿌리와이파리 알알이 1
베르타 폰 주트너 지음, 정지인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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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어떤 조건도 없이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이며, 역사상 추악하지 않았던 전쟁이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인간이다. 이 주장은 내 생이 끝날 때까지 절대 굽히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또는 인류 대부분의 집단이 만일 내게 비겁자라고 비난한다면 기꺼이 비겁자가 되겠다. 이러한 전쟁 반대의 신념은 결코 특정 종교집단의 의식에 의하여 굳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면서 겪었던 경험을 통해 차곡차곡 만들어진 (만일 내게 그런 것이 있다면) 영혼의 명령이다. 결코 전쟁의 편에 서지 말라는.
 트럼프와 김정은은 연일 살육과 전쟁 가능성에 대하여 거의 끝까지 간 수준의 언어폭력을 구사하고, 몇 십 년에 걸친 북한의 전쟁 위협에 만성이 된 남쪽 시민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마치 일상인 듯 차분한 생활을 이어간다. 전쟁은 누가 일으키는가. 왕과 귀족의 이익을 위하여 다수의 인민의 생명을 걸고, 간혹 국가나 민족 하여간 한 집단의 명예와 자존심을 위해. 전쟁을 위해 왕과 귀족 및 부르주아 최상 계급은 전쟁을 찬미하고 상대국에 대한 증오를 극대화하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집단 최면을 건다. 그리하여 국민의 거의 대다수가 전쟁에 동의하게 만들며 자신이 악의 무리를 징계하기 위해, 적어도 내 민족과 나라의 자존심을 위해 목숨을 칼끝에 걸고 진격해 나간다. 기억하시라. 전쟁을 발발한 왕과 귀족, 부르주아 누구도 자신의 생명을 내놓지 않는다. 그들은 저 멀리 언덕 위에서 눈부신 백마의 등 위에 앉아 벌판에서 벌어지는 잔인한 살육의 현장을 감상할 뿐이다. 왕을 비롯한 집단의 최고 우두머리 역시 전쟁을 원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원하지 않았다고 반드시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왕을 둘러싼 귀족집단과 군부가, 역사상 거의 언제나 그랬듯이, 왕으로 하여금 개전 명령서에 도장을 찍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그리하여, 권력이 국민에서부터 나온다고 헌법에 명시한 대한민국은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확률이 대단히 낮다. 마찬가지로 거의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 역시 스스로 개전을 선언하기가 매우 힘들 것이다. 헌법을 통해 권력은 의회에서 나온다고 선언한 미합중국은 대한민국보다 전쟁을 벌이기가 상대적으로 편리하고, 헌법과 전혀 상관없이 권력이 주어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선 최고 권력자와 군부가 뜻을 합치기만 하면 그까짓 전쟁을 벌이는 것은 일도 아니다. 지금 전쟁을 시도하기가 상대적으로 편리한 두 나라가 대한민국의 영토 안에서 적어도 수백만 명의 대한민국 국민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려고 하고 있다는 걸 모두가 인식하고 있으면 좋겠다. 최하 수백만 명의 머리 위에 다모클레스의 칼이 대롱거리고 있다는 것을.
 박정희의 유지를 이어받은 1야당은 이에 맞서 핵개발 등 대등한 군비확대를 주장하고 있고, 대통령과 여당은 트럼프의 발언에 거의 무조건 적인 찬성의 의도를 보여주기만 한다. 직설적으로 얘기하자면 아무 대책 없이 바라만 보고 있(기만 한 거 같)다. 정부와 국회에서의 전쟁을 억제하기 위한 적극적 논의는 물 건너간 것처럼 보인다. 민간기구 역시 전쟁 반대의 목소리를 뚜렷하게 내기 힘겨워한다. 아니면 적어도 열린 매스컴을 통해서는 알 수가 없다. 우리 땅에서, 세계 전쟁사 상 가장 강력한 무기로, 천만 이상의 우리 국민에게 사형을 집행하려는, 집행 할 수도 있는 순간임을 모든 국민은 진정으로 알아야 한다. 왜 전쟁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그들이 진심으로 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정권 유지. 우리도 경험해보지 않았는가. 저 1970년대, 대한민국은 언제나 북의 남침 위협을 지극히 과장되게 강조하면서 권력을 공고히 해나갔다. 마찬가지로 2010년대 북한 역시 미국의 침략을 과장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하고 싶은 것인데, 아니면 과문한 내 눈엔 그렇게 보이는데, 권력 유지가 가능하다는 확증을 갖게 해주는 것이 그렇게 어려울까? 북한 인민들의 입장에서도 모든 인민의 불행을 확약하는 전쟁 대신 김씨 일가의 권력이 계속 유지되는 것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독재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독재가 전쟁 그리고 집단 개죽음, 이어지는 회복 불가능의 퇴보보다 낫다는 말이다.
 다시 강조. 지금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 머리 위에, 어제 갓 태어나 아직 눈도 뜨지 못한 내일의 희망들 위에도, 다모클레스의 커다란 칼은 대롱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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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0-16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모두 전쟁반대는 영혼의 명령이자, 양심의 명령 일 겁니다. 전작권도 없는 우리나라.. 한반도에서 또다시 대리전쟁이 일어나서는 결코 안됩니다.

Falstaff 2017-10-16 11:12   좋아요 0 | URL
많고 많던 NGO들도 전쟁 반대를 이야기하는 건 내키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더 우려스러운 거고요.
 
레헨따 1 창비세계문학 56
레오뽈도 알라스 끌라린 지음, 권미선 옮김 / 창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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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권 1,300쪽에 이르는 장편소설. 요새 창비 미운 짓 참 많이 하는데 책 읽으면서 얘들을 피해갈 수 없는 것이 딜레마. 어떤 미운 짓? 자기들만 잘난 줄 아는 거. 걔들 수준에 맞추느라 어려운 말로 하자면 천상천하 유아독존. 아, 이것도 한문으로 써줘야 알겠구나. 天上天下唯我獨尊. 할 말은 없다. 나도 청춘시절에 백낙청 존나 존경했으니 누굴 가지고 뭐라 하겠어.
 안 읽으면 되지 왜 피해갈 수 없느냐? 내가 거의 최상급으로 존경하는 소설 가운데, 최상급도 그냥 최상급이 아니라 최상급 중의 최상급으로 어떤 작품이 있느냐 하면,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쓴 <돈키호테>. 이 영광에 빛나는 스페인 문학을 생각해보면, 문학도 역시 국력이 뒷받침해야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법이라, 1588년 무적함대가 영국해군에게 쌍코피 터진 다음 뒷방 늙은이 신세로 떨어지는가 싶다가 이게 18세기, 19세기로 접어들면 완전히 세계사 혹은 세계문학사의 페이지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프랑스, 영국, 독일의 19세기 문학은 꾸준히 읽을 수 있었던 반면 문학사의 뒤페이지에서 몇 줄 끼적인 스페인, 이탈리아, 그러니까 가톨릭이 백성을 지배하는 지역에서 나온 성과물에는 한국의 독자들이 접촉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근데 우리의 천상천하유아독존 창비가 19세기 스페인 소설 <레헨따>를 발간해준 거다. 이러니 책 좀 읽는다 싶은 한국인이 어떻게 창비를 피해갈 수 있느냐고. 작가 이름 쓴 거 좀 보시라. 레오뽈도 끌라린의 <레헨따>. 아주 잘난 척이 줄줄 흐른다, 흘러. 외국어 표기법은 개나 물어가라 이거다. 하지만 눈에 힘주고 좀 자세히 살펴보면 여기나 거기나 다 그게 그거다. ‘뿌에르또리꼬’에서 191X년에 발간된 신문이라는 각주가 나오기도 하는 걸 보면 창비도 좀 창피해하겠지? 책이 나온 시점이 1884년. 작가가 죽은 해가 1901년. 근데 191X년에 발간하기 시작한 ‘뿌에르또리꼬’ 신문을 등장인물이 읽을 수 있어? 어이, 창비. 너도 잘 좀 하세요.
 이 작품이 스페인 최초의 자연주의 소설이라 한다. 최초가 1884년. 좀 늦기는 하다. 프랑스에서 최고의 자연주의 소설인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이 나온 해가 1877년. 프랑스 최초의 자연주의 작품으로 뭘 꼽는지는 모르겠다. 작가 끌라린이 마음 단단히 먹고 1880년대 스페인의 정치, 종교, 사회, 사상 등을 제대로 비틀어 놓은 책. 스페인 북서쪽에 ‘베뚜스따’라고 하는 가상도시가 있어, 이제 다 늙어 큰 자리를 맡고 싶지 않은 신부(priest)에게 주교 자리를 줬더니 주교는 일상적 임무를 책임질 총대리신부를 임명하는 조건에서 수락, 그 자리에 페르민 신부를 앉혀 자신의 거의 모든 권한을 부여하고 자기는 뒷방으로 스스로 물러난다. 주교가 아무한테나 총대리 자리를 준 게 아니어서 당연히 총명한 페르민 신부는 베뚜스따의 정신적 어버이로 군림하는데, 성직자들도 인간인지라 주임신부 등을 비롯한 많은 사제들, 그들과 친한 베뚜스따 귀족과 유지들, 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페르민 신부의 어머니에 의해 거렁뱅이 알콜 중독자가 된 상인, 심지어 무신론자 등이 똘똘 뭉쳐 페르민의 사제복을 벗기기 위해 호시탐탐 모의를 거듭한다.
 그래서 책을 넘기면 제일 먼저 등장하는 씬이, 총대리신부 페르민이 도시에서 제일 높은 첨탑에 올라 망원경을 눈에 대고 자기 영역을 둘러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눈에 보이는 모든 지역에서 사는 인간들이 몽땅, 이제 서른이 좀 넘은 자신의 아들딸들이라는 걸 확인하는 게 그렇게 좋을 수 없다. 뭐 대강 이해는 하겠다, 그 기분. 이런 광경 어디서 보셨지? 맞습니다, <라이언 킹>. 이 무파사의 아들 심바, 즉 페르민 신부, 소설을 자연주의로 만드는 결정적 역할을 하는 인물인데, 만장하신 여러분, 가톨릭 신부는 고자eunuch가 아니란 건 다 아시리라 믿습니다. 우리의 주인공이자 가톨릭 사제인 페르민 신부가 한 여인을 사랑하게 돼버리고 만다. 어떻게? 당연히 플라토닉 사랑. 정말? 글쎄. 그걸 내가 왜 가르쳐드려야 하지? 돈 들여 1,300쪽을 읽은 게 아깝잖아? 좋다, 이건 말씀드리지. 그 여인 도냐 아나로 말씀드리자면, 당시에 인간취급도 받지 못하던 자유주의자 귀족이 이탈리아 출신 하녀와 결혼해서 낳은 딸로, 낳자마자 엄마 죽고, 아버지는 사상 때문에 해외도피. 영국에서 교육받은 가정교사의 냉정하기 짝이 없고 매사가 무지막지하게 가혹한 훈육 속에서 살다가 정신적 외상이 대단한 청소년기에 이르렀다. 영국 유학을 했으나 천박한 성격의 미혼 가정교사 입장에서 이탈리아 하녀 출신(혹시 하녀 또는 무희舞姬였을지 어떻게 알아?)이 생산한 아나를 학대함으로서 가학성 쾌감으로 자지러졌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죽자 다시 베뚜스따 대표 속물인 두 고모들과 같이 살다가 열일곱 살에 마흔이 넘은 판사한테 시집간 유부녀, 도나 아나. 남편인 판사는 사형선고 내리는데 정나미가 똑 떨어져 아무런 핑계를 대고 조기 은퇴하여 사냥, 발명, 시낭송, 연극 등을 즐기며 사는데 암만해도 아랫도리가 좀 부실한 듯, 도냐 아나의 은근한 손길을 역시 은근하게 피하는데 골몰, 전념한다. 어려서 얻은 정신의 외상으로 신경이 극도로 예민한 도냐 아나에게 접근하는 남자가 한 명 더 있다. 돈 알바로. 베뚜스따가 낳은 돈 후안 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한 번 찍어서 자빠뜨리지 못한 여인이 없는 인간. 키 크고, 잘 생기고, 거기다가 돈도 많은 우라질 놈.
 좋아, 좋아. 이왕 말한 거, 다 얘기한다. 도냐 아나를 둘러싼 두 미혼 남자. 돈 알바로와 페르민 신부 사이의 야릇한 삼각관계가 책의 굵직한 줄거리다. 거기에 자기 마빡에 뿔 돋는지도 모르는 전직 판사 빅토르.
 그래서 스토리는 치정극이 되느냐고? 아닐 걸? 아, 그래. 치정극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치정극에 가톨릭 사제를 끼워 넣은 것이 19세기에 얼마나 깡다구가 세야 할 수 있었는지는 책만 읽어봐도 알 정도. 세상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도 모르는 스페인의 한 주도州都 베뚜스따에서 벌어지는 성과 속의 난장판. 한 순간 팔팔 끓어올랐다가 금방 냉랭하게 식어버리는 시민들의 온갖 모습. 여기에 도냐 아나의 왔다 갔다 하는 정신상태, 즉, 변덕. 성이냐 속이냐의 갈림길에서 갈 길을 찾지 못하는 마마보이의 고뇌. 온갖 잡놈잡년의 굿판. 성도 개판이고 속도 개판이어서 베뚜스따, 아니 19세기 스페인 전체가 개판임을 노골적으로 비아냥댄 레오뽈도 알라스 끌라린. 이거 쓰고 으슥한 밤길 가다 뒤통수 한 방 안 얻어 터졌는지는 밝혀진 바 없다.
 뭐 그렇다고 읽어보시라는 뜻은 아니고. 재미없단 게 아니라 너무 길어 욕먹을까 겁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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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10-13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비의 제멋대로 표기법은 정말 답이 없습니다.

성속을 아우르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쓰또리가
아주 땡기네요. 다만, 1,300쪽이나 된다고 하니
쫌 고민이네요.
나중에 헌책방에 등장하게 되면 땡길까요?

유럽 중앙무대에서 뒷방늙은이 신세가 된 시절
의 에스파냐 이야기와 어쩌면 그렇게 21세기
헬조선의 들끓는 모습과 그렇게 유사한지 모르겠습니다.

Falstaff 2017-10-13 12:39   좋아요 1 | URL
옙.
(창비 잘난 척하는 건 별개로 하고요, ^^)
스또리는 재미난데, 너무 세밀한 것까지 다 글로 설명하려니 (쓴 사람은 어떠했겠습니까만 그건 다 지 팔자고) 읽는 독자 아주 까무러칩니다. 헌책방에 나와도 심각하게 생각해보심이.... 진짜진짜 그렇게 되면 안 되겠지만, 인생 살면서 혹시 교도소 갈 일 있으면 거기서나 어떻게 한 번 ^^;

sprenown 2017-10-13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1,300페이지짜리 책을 읽습니까? 눈이 정상인지 궁금하네요..제 독서속도로는 한달이상 걸리는 책인데..ㅋㅋ.. 노안이 와서 2~3페이지만 봐도 눈이 침침하고, 가물가물.. 인공눈물 한방울 떨어 뜨려야 하는데.

Falstaff 2017-10-14 05:21   좋아요 0 | URL
ㅎㅎㅎ 눈은 편안하지 않습니다.
너무 늦게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죄를 받은 것이지요.
거의 국내 최초 원본 직역, 초역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11권 4,800 쪽에 육박합니다. 노안이 심각해지기 전에 한 번 도전해보세요. sprenown 님한테도 완역을 읽기 위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민음사 번역을 기다리기엔 시간이 모자를지도 모릅니다.
댓글 쓰고보니 잘난 척 한 거 같아서 면목이 없습니다. ^^;

sprenown 2017-10-13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포기하겠습니다. 그러다, 잃어버린 눈을 찾아야 할 지경이네요!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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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독후감 쓰는 일은 이거, 보통이 아니다. '요절한 천재'라고까지 불리는 시인의 시집을 읽고 보통의 사람이 느끼는 감정을 적는 거, 이게 독후감이다. 미리 밝히거니와 전적으로 한 개인의 느낌이지 결코 '서평'이 아니라는 점. 나는 애당초 시를 평할 수 있는 안목하고 거리가 멀다. 기형도와 기형도의 팬에게 미리 사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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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형도. 이름은 무지 많이 들어봤지만 정작 읽어본 시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도 한 때) 가난한 학생시절엔 문학지 사서 볼 여유 같은 건 생각도 해보지 못했고, 기씨가 이미 죽은 다음 첫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 나왔을 때는 문학, 문학? 시·소설을 칭하는 문학 따위 잡스런 글을 읽어볼 시간이라곤 없이 대한민국 경제발전에 이바지하느라 (만일 회사 상사, 동료, 후배들과 술 마시는 것도 업무의 일환이라고 가정한다면) 여념이 없을 때였으니. 근데 왜 갑자기 기형도? 지난여름에 읽은 몇 권의 여성주의 소설 작품에서 유난히 기형도를 언급하는 거였다. 도대체 기형도의 시가 어떻기에 기형도, 기형도 하는 것인지 궁금해마지 않을 수 없을 정도. 꼭 읽고 말 것이다, 라고 작정하던 차, 때마침 눈에 띄어 날름 사서 읽었다. 어제 아침에 읽고 있는데 연휴라 집에 놀러온 큰 아이가, “어, 아버님도 기형도 읽으십니까? 전 <기형도 전집>을 가지고 있습니다만.”이라고 사뢰는지라, “너는 어떤 전차로 이 책을 읽게 되었느냐?”라고 물으니 “불민한 제가 뭘 알겠습니까만 이미 갈라선 전 애인이 문예창작과 졸업생이지 않습니까. 그 여인이 좋아하기에 무턱대고 사 읽었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 이 기형도란 시인이 여성들이 좋아하는 시를 쓰는구나, 지레짐작을 하고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근데 첫 작품 <안개>는 곧잘 읽히더니, 페이지를 넘길수록 이거 봐라, 도저히 (물론 일종의 성 차별적 언급이라 분류할 수 있겠지만) 여성들이 좋아할 만한 시들이 아닌데, 싶은 거였다. 뭐랄까. 난 모르겠다. 원고지에 추상화를 그려놓은 듯한 시들. 이거 한 번 보시라.


 “친구여, 그해 가을 내내 나는 적막과 함께 살았다. 그때 내가 데리고 있던 헛된 믿음들과 그뒤에서 부르던 작은 충격들을 지금도 나는 기억하고 있네. 나는 그때 왜 그것을 몰랐을까. 희망도 아니었고 죽음도 아니었어야 할 그 어둡고 가벼웠던 종교들을 나는 왜 그토록 무서워했을까. 목마른 내 발자국마다 검은 포도알들은 목적도 없이 떨어지고 그때마다 고개를 들면 어느 틈엔가 낯선 풀잎의 자손들이 날아와 벌판 가득 흰 연기를 피워올리는 것을 나는 한참이나 바라보곤 했네.” <포도밭 묘지 1> 부분


 두 번째 문장의 ‘그뒤에서’는 정말 그렇게 쓰여 있다. ‘그 뒤에서’라고 해야겠지만 혹시 시의 목적을 위한 표현일지 몰라 그대로 옮겼다. 그건 그거고, 이 시가 주장하는 것이 뭘까? 제목부터 좀 아리딸딸. 포도밭이면 포도밭이고 묘지면 묘지지 ‘포도밭 묘지’가 뭘까? 포도밭이 몽땅 죽어 또는 포도밭을 몽땅 갈아엎어 묘지로 만들었을까? 아니면 포도 농사가 폭삭 망해서, 또는 포도 수확을 다 해버려서 빈 밭이 마치 묘지 같았을까? 이 시가 2부에 실려 있다. 1부를 읽는 도중 내내 도대체 뭘 주장하는 거야,를 연발하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큰 아이 빈둥거리는 침대로 달려가 (아파트에서 달릴만한 공간이 없으니 사실 이건 구라다), “네 엑스 애인 가라사대 도대체 기형도의 시의 어디가 그리 좋다고 하더냐? 나는 기형도란 인물이 유명한 건 서른 전에 생을 마감한 시인이기 때문이란 것이 유일한 이유라고 생각한다.”라고 물어볼 수밖에 없었고, 아이는 “제가 뭘 알겠습니까. 저도 조금 읽다가 때려 치웠습니다.”는 답이 돌아왔다.
 난 이 시집을 읽으며 엉뚱하게도 박인환이 생각났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어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는 시 말이다. 그러나, 박인환의 시는 평이하게 외로움이나 그 비슷한 이미지를 노래하고 있어 독자로 하여금 주장하는 바를 이해하기 쉽게 하지만 기형도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자신만 알고 있고 품고 있는 모종의 이미지를 온갖 수사법을 동원해 나열해 놓고 있다. <비가 2 ― 붉은 달>에 자신 스스로 고백하길, “나의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망토 속에서 / 폭풍주의보는 삐라처럼 날리고” 있는 거다. 폭풍주의보. 모든 수사법을 동원하여 끝없이 삐라처럼, 암호처럼 나열하고 있는 추상과 감상의 망토를. 그리고 불행하게 나는 암호 해독기를 장만하지 못했다.
 표제작 <입 속의 검은 잎>을 볼까?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2연을 통째로 옮겼는데, 그래야 표제작 <입 속의 검은 잎>조차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망토 속에 은밀히 포장해 놓은 포도송이라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 거 같아서다.
 그리하여 제발 부탁하노니, 누구 시 잘 아시는 분계시면, 기형도의 시는 어떠어떠해서 좋은 시란 걸, 좀 가르쳐주십사, 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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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0-12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가 어렵죠.. 은유도 많고, 시인의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도 필요할 것 같네요.. 시중에 유수의 문학평론가들이 ‘기형도론‘을 쓴 걸로 알고 있습니다. 참고해 보시는게 어떨지요? ‘그 일‘은 아마 80년 광주를 말하는 것 같고, 입속의 검은 잎은 그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혀를 의미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정확한 기억인지 모르겠습니다.

Falstaff 2017-10-12 11:27   좋아요 1 | URL
할 말은 많은데, 하기 싫네요.
광주와 방 안의 먼지와 검은 잎.
은유는 언제나 아름다운 게 아니고 가끔가다가는 끔찍하게 비겁하기도 하잖아요.
차라리,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꿔버리는 김수영이 더 솔직해 좋습니다.

2017-10-12 1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12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12 1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12 1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