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사막 펭귄클래식 124
프랑수아 모리아크 지음, 최율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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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음으로 해서, 펭귄 클래식 코리아에서 발간한 모리아크는 (친애하는 서재 동무님 잠자냥 님 말마따나)올 클리어. 모리아크, 정말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딱 내 취향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아시고 싶은 분은 모리아크 한 번 읽어보시면 된다. 아, 이딴 거 좋아하는 인종이구먼! 맞습니다.
 이거 괜히 가방에 넣어 회사 통근버스에서 들춰본 것이 사달이 났던 거다. 당최 손을 뗄 수가 있어야지. 회사 가서도 저 멀리 창고 뒤편 나만 아는 비상피난처에 짱박혀 점심도 안 먹고 오후 세시까지 한 방에 다 읽고 퀭한 눈으로 매점 가서 사발면 하나 사 먹었다. (회사)식당 아줌마한테 김치 좀 달라고 하니까 들은 척도 안 한다. 염병, 평소에 잘 해준 거 다 필요 없다.
 이 책 읽고 독후감 쓰면서 지금 쓰는 것처럼 경박 또는 잘해봐야 경쾌하게 쓰면 안 되는데, 어찌하랴 천성이 그런 걸. 조금 양해하시압.
 우리한테도 그렇고 유럽 사람들한테도 마찬가지로 의사란 직업이 일반 서민한텐 존경받는 직업이지만 귀족(양반), 천석꾼 부르주아들은 뭐 별로 눈에 차지 않았던 신분. 그리하여 돈 많은 바스크 가문의 따님 뤼시께서 지참금 넉넉하게 갖고 마지못해 의학박사 쿠레주 씨와 혼인한 건 분명히 낙혼落婚이라서 돈만 많지 교양이라곤 참 귀하디귀한 것이라 그저 할 줄 아는 것이 남편으로 하여금 뤼시 여사한테 정나미 떨어지게 만드는 거하고 시어머니 쿠레주 부인 사이에 고부갈등 일으키는 거였다. 물론 그게 주 전공은 아니지만 어쩌랴, 워낙 어려서부터 오냐오냐 해가며 키워 도무지 혓바닥과 입술에 필터장치를 달 생각도 안 하고 여태 산 걸, 이제 와서 고쳐? 무슨, 새삼스럽게.
 동네에 남편의 환자 가운데 어여쁜 마리아 크로스라고 아주 어여쁜 과부가 있는데 그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었다. 마리아가 과부가 되어 혼자 살기 힘들어 빅토르 라루셀이란 돈 많은 남자의 빈집을 얻어 월세 안 주고 살다가 점차 생활비도 받아쓰고 차도 한 대 그냥 얻어 타고(그것도 새 차!) 이러다보니 정부 비슷한 처지로 떨어졌는데, 보르도 촌구석에선 무지하게 큰 스캔들이라 뤼시 여사가 보기엔 정말 꼴불견이었다. 그래 뤼시 여사께서 뇌막염으로 어린 아이가 죽은 것을 알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거야말로 하느님께서 내리신 정의의 심판이지요.”
 문제는 혼인의 순결을 지키려고 갖은 고생을 다 하고 있는 쿠레주 박사께서 마리아를 흠모, 아니, 아직 본격적인 단계에 도달하지 않았을 뿐이지 서로 사랑하고 있는 사이라 착각하고 있는 중이란 거. 쿠레주 박사는 일생일대의 첫사랑, 진정한 순결을 바쳐 마리아를 사랑하고 있는 거디었던 거디었다.
 그렇다고 쿠레주 박사를 옹호하는 건 아닌데, 왜냐하면 쿠레주 박사댁이야말로, 비록 말로 하지 않는 가족애가 각자의 마음에 충만할망정, 서로가 서로에 대한 의사소통은 구성원 모두가 스스로 거의 완벽하게 차단한 상태, 저 먼 먼 사막의 모래땅처럼 삭막하기 그지없는 상황으로 만든 1차 책임은 불행하게도 하여간 가장이 지어야 마땅하니까. 다시 말하는데 쿠레주 박사는 (마치 나처럼) 깨끗한 영혼과 도덕의식, 일탈을 하고 싶어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상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고 주어진 길을 꼼꼼하고도 정확하게 걸어가며 늙어가는 사람이다.
 문제가 쿠레주 박사한테만 있는 건 당연히 아니라서, 이이의 외아들 레몽 쿠레주가 19세에 이른 어느 날 전차를 타고 한 여덟아홉 살 더 많아 보이는 여자한테 필이 꽂힌 것이다. 누구냐고? 말하면 입 아프지, 바로 마리아 크로스. 나이 많은 남자의 정부로 살고 있는 과부 마리아는 날마다 죽은 아들의 묘를 찾는다는 핑계로 오후 6시 전차를 타는 걸 습관들였고 당연히 그건 묘하게 끌리는 청춘 레몽을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이해 가시지?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거나 그런 거 말고, 그냥 안 보면 좀 허전하고, 남자를 아주 모르는 여인도 아니고, 지금 스캔들도 있는데 또 사고를 치기는 거시기하고, 얌전하게 집에만 있자니 몸에서 열불이 나 외출을 하긴 해야겠는데 아무데나 다닐 수도 없는 거. 그래 오지게 비 오는 어느 날 레몽을 집안으로 끌어들이긴 했겠다! 충동이 막 뻗칠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좀 마음이 있어 집으로 불러들이긴 했지만 암만해도 이건 좀 과한지라 그냥 보내버리고 마는데, 이 사건이 어린 레몽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마리아로부터 받은 수치와 모멸은 그를 완전한 성인으로 성숙시키는 계기가 되어 잘생긴 레몽은 그때부터 아가씨, 유부녀, 어린 소녀 등등 모든 여성을 노리는 헌터, 돈 후안이 돼버리고 마는 거다.
 지금 글을 줄줄이 써내려가니 그냥 재미있는 연애 이야기라고 짐작하실 수 있겠다. 천만에. 여태까지 쓴 글은 위에서 밝혔듯 천성이 고급하지 못한 잡것이 최고 수준의 심리소설이자 성장소설에 대해 자기 마음대로 막 쓴 것일 뿐이다. 진짜로 읽어보면, 이걸 뭐라 해야 하나, 좋다, 프랑스적 에스프리가 은은한 가운데 제목처럼 인간 사이의 사랑과 관계가 알고 보면 사막처럼 황량한 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는 것이 눈에 훤하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 아니고 기타 참 사람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저 옛 시절의 한 컷, 누구나 가지고 있는, 당신도 있고 나도 있고, 내 마누라한테도 분명히 있는 저 먼 먼 시절의 흑백 사진 한 장, 심장 속 깊숙이 감추어놓았던 것, 아 썅, 이런 거 슬쩍 한 번 꺼내보게 만든다.
 독후감 더 길게 쓰는 것보다 내게 맞는 책 한 권 읽은 기념으로 소주 한 병을 비우는 것이 더 진정한 감상이라고 굳게 믿어 지금부터 술 마시러, 나는 간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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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10-25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김치 이야기에서 빵 터졌습니다. 모리악은 국내에서 그다지 많이 읽히지 않는 것 같은데 참 안타깝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프랑스적 에스프리가 은은한, 누구나 갖고 있을 법한 흑백사진 한 장‘ 같은 그 느낌이 일품인데 말입니다. ㅎㅎ 아니 그런데 이 아침부터 술을 드십니까?!

Falstaff 2017-10-25 10:53   좋아요 1 | URL
ㅎㅎㅎ
목요일 아래한글로 써놓고 저장했던 겁니다. 아직 안 올린 거 몇개 더 있고요, 차근차근, 하루에 하나씩, 토,일요일은 쉬고 뭐 그렇게 ^^;
맞아요, 모리악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별로 없단 말입죠. 내년엔 다른 출판사로 이 양반 책을 훑어봐야겠어요.
 
강철 폭풍 속에서 뿌리와이파리 알알이 4
에른스트 윙거 지음, 노선정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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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독후감을 쓴 베르타 폰 주트너의 <무기를 내려놓으라>는 오스트리아 인의 입장에서 오스트리아-이탈리아 전쟁부터 프러시아-프랑스 전쟁, 즉 보불전쟁까지 전쟁의 참상을 민간인 여자의 눈으로, 그러나 가문 대대로 장군을 배출한 백작 집안 19세기 여인의 시선으로 그려놓았었다. 폰 주트너는 전쟁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젊은이들의 생생한 모습을 한 감상적感傷的인 여인이 끔찍한 장면이 나올 때마다, 당대엔 여성의 미덕으로 가르치기도 했던, 졸도까지 해가며 전쟁 자체를 반대하기 위해 세계만방에 당장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웅변한 반면, 에른스트 윙어는 스스로가 독일제국의 군인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자신이 스스로 겪은 전쟁을 최대한 객관적인 모습으로 전하고 있다. 책을 읽기 전에, 윙거가 용감한 독일 군인이었을 뿐이란 것을 충분히 감안해야 한다. 사병으로 참전하다가 첫 휴가를 나와 아버지의 권요로 사관 교육을 받고 소위, 즉 장교로 전쟁을 끝까지 치룬 말 그대로 뼈 속까지 군인이다. 윙거에게 우군은 독일군이고 적군은 주로 영국군인데 프랑스군, 스코틀랜드군, 인도군, 심지어 뉴질랜드 군인까지 아우른다. 윙거는 애초부터 폰 주트너 여사와 달리 전쟁이 옳은지 부당한지, 정의로운지 불의로 가득 찬 짓인지는 관심이 없다. 오직 군인으로 참전했으니 자신에게 주어진 군인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할 뿐이다. 이건 주트너의 <무기를…>에서도 주인공 마르타 알트하우스의 진지하고 정의롭고 진심으로 전쟁에 반대하는 군인 남편 프리드리히 폰 틸링 남작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군인으로서 전쟁에 찬성을 하건 반대를 하건, 옳건 그르건 간에 일단 참전을 하면 자신의 본분을 다해 조건 없이 임무에 충실하는 것이 명예로운 일이라는 것. 근데, 어쨌든, 윙거는 명예니 뭐니 따지지 않고 오직 군인으로서 자신의 직분에 충실할 뿐이다.
 그리하여, 이 작품을 굳이 분류하자면, 경험담, 즉 에세이라고 할 수 있는 바, 처음부터 끝까지 전쟁에서 벌어지는 살인과 죽음, 고통과 비명, 휴식과 훈장 등으로 도배가 된 책을 다 읽은 것은 ① 돈 주고 산 것이 아까워서, ② 1차 세계대전의 특징인 전장의 변화가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어서, 즉 초기 참호전塹壕戰 중기 이후 무기의 발달로 인한 기계전으로 본격적인 대량 살상전에 흥미를 느껴서, ③ 인류 최초의 독가스전(난 독일만 가스를 사용한 줄 알았더니 이 책 읽어보니까 영국이 이 방면으로는 선구자였네, 윙거가 독일군이라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에 관해 좀 알고 싶어서, ④ 전쟁 중 기계와 포탄보다 더 인명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 즉 싸우는 걸 보다 못한 지구가 에라 이 염병할 놈들, 하며 선물해준 천형이 궁금해서 등등이었다. 전쟁은 어떤 경우가 있어도 지구상에서 허용되면 안 된다. 위 ②번 사항에서 보면 서로 얼굴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대량 살상이 가능하고, 심지어 한 도시를 완전한 폐허로 만드는 것도 벌써 100년 전부터 가능했다. 이제는 100년 전 도시보다 수천 배는 더 커진 도시와 인구를 단 한 번, 손가락 하나로 버튼을 누름으로써 가능하게 된 시대이며, 일단 폐허 상태가 되면 영구히 복원 불가능한 환경으로 지구는 진화했다. 아, 이건 제일 나중에 얘기할 건데 너무 미리 썼다.
 하여간 윙거는 자신이 경험했던 프랑스와 네덜란드 전장에서 무참하게 벌어진 참상을 전하는데 형용사를 굉장하다고 할 정도로 생략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정확한 인용은 아니지만 이런 식. “상사의 머리는 육체와 분리됐고, 로돌프 상병의 창자가 몸 밖으로 튀어나왔다.” 딱 보이는 만큼만 서술한다. 스스로 무수하게 총에 관통당하고, 포탄 파편이 박혔으며, 유산탄알을 몸속에 간직하고 있는 윙거는 놀랄 정도로 무덤덤하게 그냥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한다. 자신이 하는 이야기를 읽고 전장을 상상하며 전쟁의 끔찍함을 체험하는 건 그리하여 전적으로 독자들의 몫으로 남는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혹시 별점이 있으면 10점 만점에 10점을 주겠지만, 이 책, 그리고 폰 주트너 여사의 <무리를 내려놓으라>를 훌륭한 문학작품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면 왜 만점을 받는가. 그건 오직 하나. 앞으로 지구상에서 전쟁은 결코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절대 명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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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시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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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쿠 “久方の雲井の空の子規”를 “멀리 구름 걸린 하늘의 두견새”라고 번역하다니! 책의 표지에 굵지 않은 나무 두 그루 서있고, 가지에 두견이 앉았는데, 바로 그 옆, “久方の雲井の空の子規”가 종從으로 쓰여 있다. 한자 사이의 일본어가 전부 조사 “の”라 그냥 한시 읽듯 그림이 그려지지만 정작 그걸 한글로 바꿔보라면 어찌 역자 송태욱처럼 “멀리 구름 걸린 하늘의 두견새”라 했을 수 있을까. 이쯤 돼야 외국 시를 번역하는 거다. 그래도 (독자가) 가능하면 원문을 그대로 감상하는 편이 더 바람직하겠지만. 일본이 외국문학을 수입하면서 벌써 100년 전에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하며 번역에 공을 들였는지 이 책에서 조금 나온다. 대학생, 졸업생, 대단한 실력의 영어교사 등이 모여 한 문장, “Pity's akin to love.”를 어떤 일본어로 바꿔야할 것인가를 두고 난상토론이 벌어지는 장면(127쪽). 주인공과 가장 친한 친구 요지로란 인물 왈, “가엾다는 것은 반했다는 것이니라.” 하지만 곧바로 다음과 같은 지청구를 듣는다. “안 돼, 안 돼, 졸렬하기 짝이 없군.” 109년 전의 일본 문과대학에서는 이런 사소한 문장 하나를 두고 올바른 번역을 위해 토론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태까지 쓴 건 이 책의 옆가지.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소개한 맛보기다.

 책은 20세기 초, 후쿠오카 촌 동네에서 도쿄로 유학을 떠나는 소천삼사랑, ‘오가와 산시로’를 태운 열차 안 풍경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열차 안에서 얼굴이 가무잡잡한 유부녀를 알게 되고, 여인의 부탁(당시가 20세기 초, 여자 혼자 여관을 잡는 건 좀 무모한 일이었던 모양이다)으로 중간 기점에서 여관을 잡아주다가 엉겁결에 목욕도 하고, 그러다가 거의 벗은 여인이 “때밀어줄까요?” 독특하고 바람직한 일본 특유의 목욕 문화적 친절에 기겁을 해서 (덜렁거리며)뛰어 나오고, 어쩔 수 없이 한 방에 묵을 수밖에 없게 되고, 밤새 툇마루에 앉아 있기엔 모기가 하도 극성이라 엉금엉금 그녀가 모로 누어있는 모기장 안으로 기어들어가서는 이불을 톡톡 두르려 도드라지게 하여 여자와 자기 사이에 마치 전쟁의 진지인 것처럼 금을 긋고는 여자의 몸엔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잠만 쿨쿨 자버리는 남자. 이거 참 죽일 놈이다. 넌 그렇다 치고 옆에서 밤새 잠 한 숨 못자며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인의 앙가슴을 도대체 어찌할 거나. 하여간 그리하여 다음 날, 다시 무대는 기차역. 두 남녀, 좀 서먹서먹했겠지? 여자가 남자의 도움을 받아 하룻밤을 잘 잤으니 먼저 인사하길, “여러가지로 귀찮게 해드려서… 그럼 안녕히 가세요.” 산시로의 습관적인 대꾸, “안녕히 가세요.” 근데 여자는 산시로의 얼굴을 계속 가만히 바라고보 있다가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얘기했다.
 “당신은 참 배짱이 없는 분이로군요.”
 책은 15쪽부터 시작해 335쪽까지 이어지는데 이 대사는 24쪽, 딱 열 번째 줄에서 등장한다. 이 한마디로 나쓰메 소세키는 산시로의 성격을 콱, 규정해버리고 만다. 여자가 말하는 ‘배짱’이란 것이 뭘까? 한 번 보면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질 여인과 한 방, 같은 모기장 안에 자면서 손가락 한 번 까닥하지 않는 거? 일단 그렇다고 봐야한다. 여인의 남편은 오래 전에 고향을 떠나 히로시마에서 군함을 만들다가, 러일전쟁을 맞아 여순(뤼순)에서 돈을 벌었고 지금은 대련(따롄)에 있으니 그거 참, 여자가 애초에 산시로한테 있는 줄 뻔히 알고 좀 달라는 걸, 그걸 안 주었으니 배짱이 없단 비아냥은 정말로 받아 마땅한 거 아냐? 물론 농담이다.
 당시 나이 스물 서넛의 산시로. 배짱 없는 산시로가 후쿠오카를 떠나 당시 일본인 시각에선 험하기 짝이 없어 눈 감으면 코 베갈 도쿄에 도착/정착하여 숱한 배짱 있는, 그리고 배짱 없는 인간 속에서 보낸 대략 1년을 그리고 있다. 여전히 성실하기는 하지만 농촌 청년의 시각을 버리지 못하는 산시로 앞에, 도시적인 뻔뻔스러움과 특별한 친화력, 가벼운 지식으로 무장한 요지로가 등장하고, 물리학을 공부하는 동향 선배이며 국내외에 성가를 높이고 있는 노노미야 씨와 그의 여동생 요시코를 알게 되고, 요시코를 통해 또 대단한 매력을 지니고 있으며, 도쿄대의 연못 근처에서 한 번 본적이 있는 미네코와 친해진다. 여기에 일찍이 도쿄에 오는 3등 열차에서 만난 적이 있는 대단한 실력의 히로타 선생이 중요한 역할을 하며, 후반엔 산시로가 마음에 둔 여자 미네코를 모델로 초상화를 그린 하라구치 화백까지.
 소세키 작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이 여기서도 어김없이 나오니, 바로 노동하지 않고 공부하거나 예술만 하는 돈 있는 집안의 젊은이들. 딱 둘만 꼽으면 산시로와 요지로. 요지로는 관계의 지속, 심화를 위하여 친한 친구 산시로에게 30엔을 빌려 절대로 갚을 마음이 없다. 왜냐하면 요지로 생각으로는 자기가 돈을 갚게 되면 오히려 둘 사이가 서먹서먹해질 것이란 우려가 있어서. 대책 없이 요지로에게 30엔을 꿔준 산시로는 하숙비를 내지 못하게 되는 곤란을 피하기 위해 미네코로부터 30엔을 빈다. 배짱 있는 요지로는 산시로에게 꾼 돈을 그냥 꿀꺽하고 마는데, 시골 출신의 배짱 없는 산시로는 홀어머니에게 부탁해 시골 수준으로 말하자면 근 1년 양식에 해당하는 30엔을 받아 기어이 미네코에게 돈을 갚으려고 한다.
 여기까지 얘기하고 마는 건, 더 이상 조잘대는 주둥이를 건사하지 않으면 책의 내용을 송두리째 일러드리게 되기 때문. 얼핏 보면 참으로 대책 없는 인생을 사는 요지로의 어디로 뛸지 모르는 개구리 식 뜀박질이 아슬아슬하고, 산시로의 사는 방법이 답답해 가슴이 컥 막히기도 하지만, 사이에 그 둘을 절충해줄 아무런 쿠션도 소설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참으로 소세키다운 작품. 디테일한 성격 묘사와 인물들 간 서로 부딪는 사소한 감정의 파동을 섬세하게 찾아낸다. 소소한 재미가 참 그럴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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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3 1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23 1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 민음의 시 101
김경후 지음 / 민음사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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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딱 보고, 남잔 줄 알았다. 시집 읽는 내내 그랬다가 후반부 가서 혹시 여자 아냐? 싶어 책 맨 뒤에 작가 약력 보니까 이화여자대학 독문과 나왔다. 그 학교가 남자한텐 학생 자격을 주지 않고(여태!), 찌질하게 그걸 남녀불평등이라고 고소한 남자가 있었는데 법원은 학교의 판단이 적법하다고 인정했으니까 틀림없이 김경후는 여자일 것이라고 결론 냈다. 이 책, <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가 김경후의 처녀시집. ‘처녀시집’이라고 해서 김경후 시집의 처녀막이 찢어졌다고 주장하는 시인 김영승의 발상은, 영어로 말해서 그로테스크하다. 하, 그로테스크, 이 단어가 책을 읽는 내내 입 안에서 뱅뱅 돌긴 하는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 거다. Grotesque. 그러다가 시집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시가 실려 있어서 무릎을 탁, 칠 수밖에.



그로테스크한 동화


염산비 검게 내리는 하늘
관들이 떠다닌다
가끔 흔들리는 뚜껑 떨어지고
썩은 나무관은
오래된 시체를 놓쳐버린다
쏟아지는 살과 얼굴을
꼬챙이에 꽂는 아이들
숲에선 그 살로 밀주 담그고
술 마신 사람들의 휘파람 소리
뱀을 불러모은다
따뜻한 눈과 입 속을 파고드는 뱀
위와 대장을 꽉 물어
항문 밖으로 끌어낸다
구불대는 내장은 아직 취해 있다
껍질만 남은 사람 속으로
어느새 모여든 나방들
잔뜩 알 낳고 낄낄거린다
새로 태어나는 나방은
죽은 사람의 피부를 가지고 있다
오래지 않아
하얀 주름 구더기가
거죽과 내장 나방 뒤덮는다
이즈음 걸죽해지는 시체
강으로 흘러간다
어린 소녀들 강가에서
까마귀 알을 품거나 관을 짜고 있다  (전문. 90~91쪽)


 어떠셔? 읽을 만한가? 시집에 실려 있는 많은 시가 그로테스크하다. 그래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적응하기 어렵다는 건 전적으로 내 취향이고 기호이고 하여간 그런데, 이 시집에 관해서 좀 더 힌트를 드리자면, 위 전문을 써놓은 <그로테스크한 동화>는 그나마 독자가 이해하기 쉬운 시라는 거. 시집에 나오는 모든 시가 그렇듯, 이 시도 내려쓰기 할 때 앞에 적어도 한 칸 띄어쓰는 일반적 관습을 무시하고 있다. 그게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독자의 권한으로 분명한 오독誤讀을 하자면, 한 줄 한 줄을 각기 새로 시작하지 않고 시인이 속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들과 연속한 걸, 다만 문자로 쓴 것이다, 라고 오해해주기 바라서 원고지의 첫 칸부터 채워나간 것은 아닌가싶다.
 김경후의 시가 전부 이리 그로테스크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며칠 전 기형도를 이야기하면서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感傷의 암호’가 싫다는 취지로 이야기한 적이 있다. 불행하게도 김경후의 처녀시집에서도 이런 경향은 나타난다.



해 들지 않는 놀이터


난 이곳에서 태어났다
모래알갱이를 씹어먹고 모래무덤을 덮고
살았다 녹슨 철봉 냄새가 나는 입
끊어진 그네줄 같은 팔다리
아무도 이곳에 놀러 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겨울
사람들이 찾아와 봄을 보여주겠다며
앞에 빌딩을 짓기 시작했다
그들이 다녀간 겨울 내내
난 얼어붙은 모래밭을 걸어다녔지만
내 발자국은 없었다 
(후략)


 예로 든 <해 들지 않는 놀이터>가 가장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암호가 많은 작품이라 고른 것이 아니라, 책을 읽기 시작한 다음에 처음으로 눈에 뜨인 그래도 평이한 시라서 옮긴 것일 뿐이다.
 여기에 보탤 것은, 언어의 불통 혹은 역류에 대한 것이다. 별 볼 일 없는 독후감이 길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예시는 하지 않겠지만 말이 특정한 행위나 생각이나 현상, 또는 감정에 관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있다면 지극한 개인적 입장에서만, 지구인 가운데 글을 쓴 오직 한 명 또는 극소수만 뜻을 알아챌 난수표. 이것이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이 더해진다는 것. 그래서 “구멍을 뚫고 네 잠 속에서 나와버렸다 이제 그곳에 담배꽁초가 던져지고 네 몽정의 전 과정은 생방송 뉴스로 진행된다” (<잠> 9쪽)고 노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여간 이해하기 어렵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도 그로테스크해서) 읽기 짜증나고 간혹 혐오감까지 나게 만드는데, 이왕 그러려면 내가 좋아하는 영화 <델리카트슨 사람들>같이 좀 경쾌하기라도 하지, 참 감상하기에 난감하게 만든다. 그간 시하고 너무 오래 떨어져 살아서 그런지 적응하기 쉽지 않다. 이건 전적으로 시인 김경후 탓이 아니라 내 탓이다. 김경후와 그의 애독자에게 미안하다. 난 이 시집을 누구에게도 권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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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도칸 - 몸프라쳄의 호랑이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47
에밀리오 살가리 지음, 유향란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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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고르는 방법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가, 재미있게 읽은 책 속의 등장인물이 재미있게 읽은 책을 선택하는 거다. 이 책 역시 움베르토 에코의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에서 주인공 얌보가 열광을 했던 책이라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고른 것이다. 이 책 <산도칸 - 몸프라쳄의 호랑이 : 이하 “산도칸”>이 에코의 그 책을 읽고 선택한 마지막 작품이다. 속이 다 후련하다. 어찌됐건 이제 <로아나…>로부터 해방이니까.
 근데 이 책은 선택하는 데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로아나…>에는 늙은 얌보가 등장해 젊은 얌보도 아닌 어린 얌보를 회상하는 장면이 아주 길게 나오고, 그때 어린 얌보가 열광했던 책이 바로 <산도칸>이었던 거다. 어린 얌보가 자기만의 공간인 다락방에서 말레이시아 해를 무대로 무도한 해적질을 일삼은 가공의 폭력범 산도칸의 모험과 싸움과 전쟁과 사랑을 흉내 냈던 것을, 거의 50년 이상이 흘러 늙은 얌보가 회상하는 장면이었다.
 열린책들 세계문학전집에 <산도칸>이 있다는 건 벌써부터 알았던 터이며, 여러 경로로 그건 인생살이 오래 산 인간들은 별로 읽을 만하지 않다는 얘기도 벌써부터 들어왔기에 일찍이 목록에서 제외시켜온 책이었던 걸, 잠깐 미쳤었나봐, 잊었던 거였지 뭔가. 살다보면, 책 좀 읽다보면 이런 일도 생긴다. 본문만 418 쪽. 굳은 마음으로 딱 절반 209쪽까지 읽고 도저히 더 이상 읽어줄 수 없어 그냥 때려치웠다. 뭐 이딴 책을 내고 그래, 라고 출판사 열린책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열린책들의 세계문학 시리즈는 장르를 불문하고 재미있을 거 같다하면, 말을 조금 바꿔 할 경우, 좀 팔릴 거 같다하면 별 생각 없이 시리즈에 포함시키는데 이게 가끔 대단한 매력이 되기도 하고 <산도칸>처럼 똥 밟기도 하고 그런 거니까. 다 그런 거지 뭐.
 책 속의 주인공 산도칸. 영국 군대에 의하여 부모 형제가 학살당해 가상의 나라를 뺐기고 피신한 그는 회교도의 미덕인 복수를 하기 위해 용감무쌍한 해적이 된 인물. 당연히 큰 키에 잘 생기고 피부색 조금 까무잡잡하고 용기 있고 힘 무지 세고, 돌격형 인물, 즉 앞 뒤 생각 안 하는 단순무식형 인간으로 더할 나위 없이 친한 친구, 포르투갈 사람 야네스의 현명하고, 유머있고, 재치까지 있으며 좌우 상황판단 빠른 조언이 아니었다면 죽어도 벌써 백여 번은 죽었어야 하는 주인공이다. 작가 에밀리오 살가리가 이탈리아 사람이어서 당연히 이탈리아 언어로 책을 썼기 때문에 규격적이고 엄격한 영국인 장군 삼촌 아래서 자란 ‘라부안의 진주’라고 불리는 여주인공 마리안나는 엄마가 이탈리아, 아버지가 영국인인데 조실부모하여 삼촌에 의탁, 말레이시아까지 흘러든다. 이야기책에 나오는 사랑은 흔히 초상화 한 번 보고 맛이 가게 반하는 거 등등 아주 우습게 사랑에 빠지는데 여기서도 진짜로 묘사를 했듯이 단도 하나 가지고 말레이 범을 때려잡는 우리의 영웅 산도칸은 라부안의 진주라 불리는 여성이 매우 아름답고 노랑대가리에 파란 눈알을 하고 있다는 말만 듣는 것으로 여자를 좋아할까 말까 심각하게 궁리하고 급기야 수십 명의 부하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모험을 하면서까지 기어이 여자를 만나, 마리아나 눈앞에서 <수호전>에 나오는 송나라 무송武松처럼 범을 때려죽임을 계기로 사랑을 얻고 만다. 아주 전형적인 소년 소설의 주인공들 아니냐.
 무수한 사상자를 낸 전투에서 오직 하나 살아남는 거, 산도칸을 포위한 수십 명의 영국 정규군을 유유히 따돌리고 탈출에 성공하는 건 말 그대로 껌이고, 무시무시한 태풍을 뚫고 항해하는 그런 이야기, 도저히 읽어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반 까지만 읽고 진도를 더 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기로 했고, 딱 반 지점에 와서 책 덮었다.
 당신의 정신이 초등학교 고학년 수준이면 정말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신중하게 생각하여 선택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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