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테, 바이마르에 오다 창비세계문학 55
토마스 만 지음, 임홍배 옮김 / 창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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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정고문관의 미망인 샤를로테 케스트너, 결혼 전의 성은 부프, 하노버 거주, 1753년 1월 11일 베츨라어에서 태어남, 63세.
 이 할머니가 누구냐 하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나오는 여주인공 샤를로트. 알베르트와 약혼 중, 그 새에 베르테르가 쳐들어오더니 할머니 처녀시절의 가슴에 살짝 불을 붙이고(키스 한 번 했나 안 했나) 남의 약혼녀를 사랑하는 처지를 비관해 성탄 전야에 머리통에다 권총을 발사한 얘기. 다들 아시잖아. 실제로 스물 세 살의 요한 볼프강 아마데우스 괴테가 잠깐 사랑했던 여인. 거기다가 유부녀를 흠모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 자살한 자기 친구의 경우를 빌려 쓴 소설이 21세기 들어와서도 전 지구적으로 중학교 입학하자마자 어서어서 연애하다 죽어버리라고 장려하는 의미에서 소위 청소년 추천도서들 가운데 제일 앞줄에 세워놓는 불후의 명작이 되고 만 바로 그 작품의 실제 모델 ‘샤를로트 케스트너’란 말씀. 뭐라? 맨 윗줄엔 ‘샤를로테’라고 써 있다고? 아시잖아, 창비식 외국어 표기법이란 거.
 괴테가 <젊은…>은 발표하고 어느새 (빠르기도 하지) 44년이란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진짜로 63세의 샤를로테는 67세 괴테가 추밀고문관으로 재직하고 있는 바이마르를 방문해 그를 만난 일이 있고, 토마스 만은 그 사건을 콕 집어서 본문만 537쪽에 달하는 장편소설을 써내려갔던 것이다. 이름하여, Lotte in Weimar <바이마르의 로테>. 20세기 중반에 재일 한국인 청년이 괴테의 짧은 소설에 나오는 여주인공한테 홀랑 반해서, 베르테르처럼 자살을 기도하는 대신에 자신이 창업한 회사의 간판을 여주인공의 이름으로 짓고 아직도 일본과 한국에서 빵빵한 재벌기업으로 이름을 날리니 바로 “롯데”인 거, 다들 아시리라. 그는 샤를로트 대신 당대 한국최고 아름다운 아가씨와의 중혼重婚을 감행해버리고 만다. 괴테와 <젊은…>을 좋아하는 남자는, 특별히 그가 무지하게 돈이 많으면, 그럴 수 있다고? 난 이 방면엔 별로 흥미 없다. 당연 관심도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렇게 동서를 통틀어 유명짜한 인물이 바이마르, 당시 인구 6천 명밖에 안 되는 시골 촌 동네에 떴으니 그야말로 진짜 구경거리가 난 거다. 바이마르, 하면 생각나는 것이 바이마르 공화국, 바이마르 헌법 등등. 그러나 그건 작가 토마스 만은 경험해봤지만 작 중 괴테가 추밀고문관으로 재직하고 있던 시점으로부터 1세기가 더 흘러야 등장하는 사건. 이거 중요한 거다. 작가는 100년 후의 독일,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3국동맹의 맹주로 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말레이반도까지의 아시아를 제패할 줄 알았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3국 연합 더하기 영국의 거의 모든 식민지 군대 더하기 치명적으로 미국 군대까지 몽땅 몰려드는 판에 쌍코피가 나고 만다. 그래 생긴 것이 바이마르 헌법과 바이마르 공화국. 독일로는 다행이다 싶은 것이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서진西進을 막기 위해 유럽의 모든 나라와 미국까지 독일이 다시 무장을 하는 걸 내버려둔다는 거. 1차 대전 이후 (특히 국경을 맞댄 프랑스 군대로부터) 심한 모욕을 당해왔던 독일은 히틀러와 나치가 권력을 틀어쥐고 다시 한 번 어지러운 유럽에 ‘질서’와 ‘율법’을 확립하기 위해 지독한 독재 권력을 만든 다음 엉뚱하게도 유대인 박멸 작업에 들어가려는 것처럼 보이는 시점. 이거 중요한 일이다. 작가는 앞으로 어떤 정치 경제적 변화가 독일 땅을 지배할지 알고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노스트라다무스 찜 쪄 먹을 희대의 예언자 하나 정도 만드는 건 일도 아니라는 사실.
 이 시점에서 토마스 만이 100년 전 바이마르를 그린 소설. 독일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만년과 최전성기를 보내고 있던 장소. 이미 추밀고문관 괴테의 위명은 전 독일, 독일을 넘어 유럽 전역에 성가를 떨치고 있어서 심지어 바이마르를 점령한 나폴레옹으로부터 레종 도뇌르 훈장까지 받기에 이르렀다. 월드컵 우승하면 참가한 선수들 다 받는 훈장이고, 더구나 전시 나폴레옹 시대엔 개나 소나 다 받긴 했지만 프랑스 최고 훈장을 서훈 받는다는 건 따지고 말고가 없는 영광스러운 일. 그런 환경에 겨우 6천 명밖에 안 되는 도시엔 괴테 한 권 없는 집이 없었고, <파우스트> 1부에 나오는 구절 하나쯤 외지 못하는 시민 또한 없었으리라. 이럴 때 젊은 괴테가 쓴 공전의 베스트셀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실제 주인공 또는 실제 모델인 샤를로트가 도착했으니 사건은 사건이었던 것. 샤를로트가 1816년 9월 22일 아침나절에 바이마르에 도착하여, 1699년에 개업해서 2017년 현재까지 영업을 하고 있는 “엘레판트 호텔”에 체크 인 하면서 일은 벌어진다. 숙박부에 이렇게 서명했던 것.
 “궁정고문관의 미망인 샤를로테 케스트너, 결혼 전의 성은 부프, 하노버 거주, 1753년 1월 11일 베츨라어에서 태어남,”
 어깨너머 숙박부를 넘겨보던 수석 웨이터 마거, 이 남자는 로테가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파우스트> 구절을 인용해가며 로테를 접대하던 인물로, ‘샤를로테 케스트너, 결혼 전 성은 부프’를 읽자마자 좌불안석, 와들와들 떨기도 하고, 안색이 창백해지다가 불그스름해지기도 하고, 눈알의 홍채가 반응을 했다가 안 했다가 하기도 하고, 네 번에 걸쳐 로테로 하여금 자신이 <젊은…>의 그 샤를로테임을 확인하고야 마는 거다. 적어도 시민들의 문화적 방면에서 바이마르는 괴테의 도시 혹은 괴테 자신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로테가 떴다는 말, 다시 한 번 강조. 아침에 도착했으니 늙은 몸이 얼마나 피곤했을까. 일단 침대에 누워 한두 시간 잠을 자려고 해도 갑자기 자리를 바꿔서 그런지 자는 둥 만 둥하다. 하여간 조금 있다가 침대에서 일어나 창밖을 보니, 9월 22일에 창밖을 보라, 창밖을 보라해서 아무리 창밖을 봐도 흰 눈이 내릴 일은 없고, 대신 호텔 앞에 사람들이 빽빽하게 서 있는 것. 바로 로테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이라도 한 번 해보려고 시민들이 다 모인 거다. 당시는 19세기 초. TV도 없었고 인터넷은 물론 신문, 라디오도 없어 <젊은…>의 실제 주인공 또는 실제 모델을 한 번 보는 것이 세월이 지난 다음 얼마나 유세를 할 수 있는 일인지 지금 사람들은 상상도 못한다. 아무렴.
 침대에서 일어나 네 명을 ‘접견’. 맨 처음으로 영국인 아마추어 화가 아가씨가 초상화를 그리겠다고 우겨대는 걸 거절할 수 없어서. 두 번째로 괴테의 비서 리머 박사, 세 번째는 이름만 대도 다 아실 쇼펜하우어의 여동생 아델레 양, 네 번째로 괴테의 친아들 아우구스트. 바이마르에 도착해 네 명, 수석 웨이터 마거를 포함해 다섯 인물과 만남을 묘사하는데 토마스 만은 339쪽이 필요했다. 길어야 여섯 시간 정도를 묘사하기 위해. 진짜 이야기꾼. 바로 앞에 토마스 만의 친형 하인리히 만의 <앙리 4세>하고 극명하게 비교된다. 하인리히의 책은 부르봉 왕가를 여는 한 위대한 전사의 일생을 그리는 드라마틱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리도 재미없는지 참 따분했는데 토마스 만은 그의 주특기, 이것저것 마구 끌어와 얘기하고 설명하고 다시 확인하는 복잡한 구도에도 불구하고 쉽게쉽게 읽힌다.
 같은 날 오전에 샤를로테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괴테. 그가 자신의 작업과 지난 시절을 회상하며 로테로부터 도착했다는 쪽지를 받고 3일 후 점심식사에 초대하는 장면을 위해 토마스 만은 다시 100여 쪽이 필요했다. 이 장면에서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가 자주 인용된다. 작품의 일부를 프랑스 작곡가 토마가 <미뇽>이란 오페라로 만들었으니 한 번 듣고 가자.

 

 난 마릴린 혼이 타이틀 롤을 노래하는 음반을 가지고 있으나 유튜브 검색하니 20세기 최고의 메조 소프라노, 이탈리아의 쥴리에타 시미오나토가 노래하는 것이 있다. 참 대단한 메조.

 

 
 이 책은 토마스 만이 쓴 괴테나 샤를로테의 전기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소설. 따라서 로테와 괴테가 만나 서로 나눈 이야기,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밥 먹는 이야기, 이런 거 다 지어낸 거다. 전기는 모레 소개할 유대인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 같은 사람이 전공이다. 참, 츠바이크는 이 책의 뒤표지에 이렇게 평해놓았다.
 “수년 동안 기다려온 가장 완벽한 작품이다. 이 소설을 통해 문학적 전기(傳記)는 최초로 완벽한 예술형식에 도달했다. 여기서 그려진 괴테의 초상은 후대에 유일무이한 본보기가 될 것이다.”
 물론 추천사다운 과장이겠으나 거의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츠바이크는 특히 반파시즘 입장을 끝까지 고수한, 그의 입장에서 보면 반反 반유대인 정책을 반대해 온 만Mann 형제에 각별한 고마움이 없지 않았을 터. 토마스 만은 이 책에서도, 앞으로 100년 후 바이마르를 포함한 독일 안에서 벌어지는 야만적인 정치, 군사적 형태를 알고 있기에 스스로 자기 자체가 독일이라는 약간의 오만도 가지고 있던 그는, 이 책에서 괴테 자신이 독일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앞으로 전개될 독일 민족의 야만성이 어디서 비롯하는지 곳곳에 비의를 숨겨놓기도 했다. 예를 들어보자.
 로테가 수석 웨이터를 제외하고 세 번째 만나는 아델레 쇼펜하우어 양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줄곧 받았던 인상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으면, 특히 우리 독일인들이 무리를 지으면 누군가에게 복종하려는 충동이 발동해서 그들의 주인이나 총애하는 사람들 자신을 망쳐놓아서 우월감을 남용하도록 부추긴다는 거였어요. (후략. 170쪽)
 
 독일 사람들은 앞에서 인민을 이끄는 영웅이 발견되면 그 사람에게 조건 없이 복종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 영웅이라 함은 1816년 바이마르엔 괴테일 수도 있고, 100년 후엔 말만 잘 하는 키 작은 외톨이 육군 상병 아돌프 히틀러일 수도 있다. 이미 1350년 독일 땅 에게르에서 있었던 유대인 학살 사건 당시도 괴테의 입을 통해 설명이 되는 바, 다음과 같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유대인인) “그는 모든 걸 잃고 맨몸이었지만 에게르의 시민이 되었고, 그래서 자부심을 가졌겠지요. 인간이란 존재를 다시 보게 되지 않습니까? 인간이란 그런 존재입니다. 아무리 잔호간 짓을 저질러도 흥분이 가라앉으면 속죄의 대범한 제스처를 즐기면서 대충 넘어가고 말지요. 그걸로 잔혹행위를 보상했다고 여기는 것인데,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감동적인 면도 있지요. 집단 속에 있을 때는 자발적 행동이 어렵고 되는대로 따라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이런 돌발행동은 한 시대의 정신 상태에서 빚어지는 예측불허의 재난이라고나 해야 할 것입니다.”  (490쪽)

 이걸 읽으면서 독자는 괴테를 보면 안 된다. 비록 말을 하는 사람은 괴테지만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어서 괴테의 웅변을 빌려온 사람은 작가 토마스 만이니까. 그의 다른 작품 <파우스트 박사>에서는 노골적으로 전쟁 중 폭격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작가가 등장하여 독일 파시즘과 전쟁을 비판하기도 하는 등(비록 작가는 미국에서 폭격의 위험 없이 소설을 썼지만), 형 하인리히 만, 아들 클라우스 만과 더불어 개인의 안락을 포기하고 반파시즘의 앞에 서 온 것은 기념할 만하다. 독일인들이 영웅을 추앙하며 영웅의 언어 하나하나를 최고의 가치로 생각해 마치 집단 최면인 듯한 상태로 몰입하는 것을 토마스 만은 “비굴한 열광”이라 칭하며 그건 “노예근성”에서 비롯한다고 정의한다. (따옴표는 493쪽) 이런 바람직하지 않은 민족성을 100년 전 문학적 성인聖人이라 칭하는 괴테에게서도 발견해내는 감식안이란 참.
 물론 이 책은 1930년대 독일의 정치, 군사적 망령을 비난하고 환기를 요구하기 위해 쓴 책이라고는 볼 수 없다. 보다 중요한 주제는 괴테를 44년 만에 방문해 친견한 옛 친구 샤를로테, 그녀와 그를 통한 시간의 흐름과 나이 먹음, 기억 속의 그림과 현재의 모습. 사이의 간극. 시간의 윤회랄까 사이클이랄까 (윤회와 사이클은 당연히 다르다), 시각의 변화 등등에 대한 정의. 이런 것이다. <파우스트 박사>의 주제 역시 반파시즘이 아니었던 것처럼.
 만일 당신이 <파우스트 박사>를 재미있게 읽었다면 이 책 읽기는 아주 쉬울 것이다. 토마스 만을 권할 때, 나는 매우 조심스럽다. 이 작가를 읽으면서 ‘재미’를 찾는 경우보다는 ‘노잼’ 또는 ‘핵노잼’이라 선언하는 독자를 훨씬 많이 봤기 때문에. 그리고 얼핏 그들의 의견에도 동의한다.
 “지루함을 담보로 하는 재미.”
 위에 쓴 문장이 말이 된다면 이거야말로 토마스 만을 읽는 곤란함과 만족감을 한 방에 설명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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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11-01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중고서점에 뜬 것을 보고는 사려고 했었는데
그 사이에 누군가 사가서 아쉬워 했던 기억이
나네요.

팔스타프님의 리뷰로 대신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Falstaff 2017-11-01 15:34   좋아요 0 | URL
어....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진짜 책에서 토마스 만이 주장하는 것은 아예 써놓지도 않을 걸요. 스포일러를 좋아하지 않아서요.
좋은 책입니다. 나중에라도 ^^;
 
앙리 4세 1
하인리히 만 지음, 김경연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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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의 앞날개에 있는 작가소개부터 열라 웃긴다. “독일이 낳은 뛰어난 작가이며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토마스 만의 형이다.” 나도 여태 하인리히는 토마스의 친형, 저작이 깨나 유명한 사람이지만 우리나라엔 번역물이 (거의)없는 독일 작가, 정도로 알고 있었다. 올해 5월까지. 그러다가 5월 초에 페터 바이스가 쓴 <저항의 미학>을 읽었고, 책 속에서 하인리히 만이 1920년대 반파시스트 운동을 하던 사회주의자란 걸 알았다. 아, 하인리히 만이 그랬어? 괜한 궁금증. 이런 거 이해하시리라 믿는다. 미국인으로 살다가 다시 분리된 조국의 동쪽에서 삶의 마지막을 보내려 준비하다가 결국 화장火葬한 유골의 형태로 (동)베를린에 묻혔다고 한다. 동생 토마스하고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성향 또는 취향이 맞지 않아 평생 싸웠다가 화해하고 또다시 싸운 다음에 또 화해하고, 그렇게 한 평생을 지냈단다. 동생하고 사이좋게 찍은 사진도 있다. 

 




 왼쪽이 더 늙어 보이지? 형 하인리히. 오른쪽이 당연히 토마스. 늙은 모습 보니까 미국인 거 같다. 평생 형제끼리 지지고 볶고, 싸웠다가 화해하고, 그래 그게 인생이지 뭐. 나나 이 잘난 사람들이나 거기가 거기다. 하여간 <앙리 4세>를 읽음으로 해서 하인리히, 토마스, 클라우스 만을 다 읽은, 아니, 경험한 셈이다.
 근데 하인리히의 경우엔, 인터넷 서점 검색해보면, 축약본인 거 같은 <운라트 선생 또는 어느 폭군의 종말> 말고 딱 한 종류, <앙리 4세>밖에 없는데, 그나마 절판이다. 내가 읽은 건 중고 책이다.

 

* <운라트 선생 또는 어느 폭군의 종말>을 펴낸 지만지(지식을 만드는 지식) 출판사는 참 여러 가지 좋은 책을 펴내는데 도무지 원작 전체를 번역한 것인지, 발췌 번역인지 분명하지 않다. ‘지만지 소설 선집’과 ‘천줄 읽기’라는 시리즈가 있고 ‘천줄 읽기’는 스스로 발췌라는 점을 밝혔지만 ‘지만지 소설 선집’을 선뜻 고르기가 어쩐지 영 캥겨서 아직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았다. 지만지 출판사의 책들을, 특히 ‘소설 선집’을 읽어보신 분 계시면 좀 알려주시면 좋겠다.

 

 어쨌든 <앙리 4세>, 전 3권을 읽었다. 권당 300쪽 가량이지만 판형도 크고 자간, 줄 간격이 좁은 20세기 말 유행했던 편집이라 꼬박 닷새 걸렸다. 물론 술이 떡이 돼 하루는 거의 읽지 못하긴 했지만. 읽어보니 첫 느낌이, 참으로 지적인 사람이 독일 내 파시스트에 의한 지랄발광을, 조선에선 임진왜란이 발발했던 16세기 말의 프랑스 가톨릭과 위그노교도들 간의 머리 터지는 싸움에 빗대 썼다는 건 잘 알겠다. 근데 번역한 김경연 씨가 문제인지, 작가 자체가 문제인지 책을 읽는데 일단 전혀 재미가 없다. 부르봉 왕가를 연 앙리 4세의 유년 시대부터 만 36세가 되기 바로 전에 벌어진 파리 포위 공격까지를 그린 책이라 당연히 성장, 연애, 결혼, 세계사의 한 페이지로 기념할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독살과 암살, 음모 등등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무지하게 많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책 읽는 속도가 높아지지 않는다. 하인리히의 원문이, 뛰어난 독일 저자답게 철학 또는 사유적이고, 은유와 반어를 비롯한 수사법을 많이 사용해, 가뜩이나 알콜의 영향으로 인해 잘 기능하지 않는 뇌를 혹사시키길 바라서, 일반 소설을 재미없게 쓰는 건 그래도 이해하더라도, 참 기가 막히게도, 역사 소설까지도 재미없게 쓰는 놀라운 신공을 갖추고 있는 거 같다. 여기다가 역자 역시 한국말로 문장을 다시 만드는 묘미를, 적어도, 찬란하게는 보여주지 못했던 것 같고. 원문을 읽는 독일 사람과 달리 유라시아 저 건너편 극동의 한 인간이 읽기엔, 저자와 역자 사이에 요구되는 싱코페이션이 기가 막힌 변주를 일으켜 책이 지루해지는 놀라운 성과를 만들어내는 거 아닌지. 써놓고 보니, 음악용어 싱코페이션, 이거 참, 아무데나 갖다 붙여도 이리저리 쫄깃한 맛이 나는 단어다.
 이 독후감은 지금 막 책을 다 읽고 곧바로 쓰고 있는 것인데도 유난히 힘이 든다. 그건 내가 20세기 전반기 독일에서 벌어진 정치적 난장판에 대하여 자세하게 모르는 것이 제일 큰 이유처럼 보인다. 1권의 역자 서문에서 보면, 책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누구는 히틀러, 누구는 뮐러를 비유하고 있다는 등의 말이 나오는데, 정작 책을 읽어보는 아시아인은 왜 이 인간을 히틀러와 또는 뮐러와 비교할 수 있는지 별로 감흥이 오지 않는다. 그저 내 눈엔 프랑스에서 벌어진 위그노 전쟁에서 앙리 4세의 철학적 지평을 넓혀준 보르도의 시장 몽테뉴와의 만남과 그로부터의 배움. 유방에게 장량과 한신이 있었고 이성계 옆엔 정도전이 있었듯 앙리 4세를 옹위하던 플레시스-모르네의 지혜로운 책략 같은 것만 눈에 팍팍 들어왔으니 분명 난 속물인 거 맞다.
 지금 품절도 아니고 절판인 책에 대해 길게 왈가왈부할 건 없고, 하여간 <앙리 4세>를 마침으로 해서 나도 이제 하인리히 만을 읽어본 인류 가운데 한 명이 됐다는 점, 어디 가서 어깨에 힘주고 하인리히 만이 말씀이야, 하고 잘난 척 할 것이 틀림없다는 점, 그러나 별로 재미없게 읽은 책을 구태여 헌책방에 가서 사 읽어보라 충동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선에서 독후감을 끝내려고 하는데, 아, 이 책 읽느라고 정말 고생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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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롱뇽과의 전쟁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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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인생 참. 여태까지 난 도롱뇽의 표준말이 “도룡뇽”인줄 알고 살았다. 카렐 차페크의 <도롱뇽과의 전쟁>을 어떻게 검색 성공했느냐 하면, 일단 알라딘에 접속해서, 로그 인 하고, ‘도룡뇽과의 전쟁’을 검색하면 아무것도 안 뜬다. 대한민국 참, 아직도 멀었어, 아직 번역본이 나오지 않았다니, 한탄을 하다가 하루 이틀 사흘, 한 달 두 달 석 달, 1년 2년 3년. 그러다 우연히 ‘카렐 차페크’를 검색해보니까 이런 벌써, 2010년에 나와 있었던 거다. 제목 보니까 글쎄 ‘도룡뇽’이 아니라 ‘도롱뇽’. 무식하면 이런 경우도 당한다.
 근데, 체코 작가들 여간 빵빵한 것이 아니다. 당연히 제일 위에 카프카를 놓겠고, 다음으로 책가게 편집부장과 영업부장들은 밀란 쿤데라를 치겠는데, 쿤데라는 (전적으로 내가 좀 무식해서 오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주로 불어로 작품을 쓴 사람 아닌가? 그럼 체코 출신의 불어 소설가로 치는 편이 옳지 않은가싶기도 하고 뭐 그렇다. 처녀작 <농담>, 그 외 내가 읽어본 <참을 수 없는....>, <불멸>, <웃음과 망각의 책>과 며칠 후에 읽을 <정체성>까지 몽땅 불문학자가 번역했다는 걸 참작해보면 그렇다는 말씀. 쿤데라를 빼더라도 올해 아주 좋게 읽은 책 가운데 두 권을 쓴 보후밀 흐라발도 체코 출신. 거기에 카렐 차페크까지 포함하면 이햐, 매력적인 소설가들이 많다. 이 책 <도롱뇽...> 읽고 곧바로 <곤충극장>을 보관함에 집어넣었다니까. 체코(또는 보헤미아)가 알고 보면 참 예술적으로 대단한 나라다. 유럽 문명을 고까운 시선으로 보는 나도 체코와 헝가리엔 한 번 가보고 싶다.(터키는 아시아라고 치자 뭐.)
 도롱뇽과의 전쟁? 인간이 도롱뇽하고 전쟁을 한다고? 도롱뇽은 양서류, 물이 없으면 생명을 이어갈 수 없는 종 아닌가? 그렇다. 근데 어떻게 전쟁을 하냐고? 아 글쎄 내가 늘 주장하고 있는 거 잊으셨나? 만일 말벌이 2미터 크기의 평균 IQ 150으로 진화했으면 인간이 여태 남아났을 거 같은가? 어떻게 하다 보니 몸뚱어리에 털 없는 원숭이가 운 좋게 두뇌를 키워 패권을 차지했을 뿐이지 말벌이라고 뇌를 키우지 말라는 법 있어? 같은 이유로 저 오스트레일리아 위 무수한 섬 중에서도 코딱지만 한 섬에서 몇 마리 모여 사는 해양 양서류 도롱뇽이 두뇌를 키워 인간만큼 사고할 수 있다는 게 뭐 이상해? 물론 작가도 처음부터 인간과 전쟁을 벌이는 도롱뇽은 전적으로 모종의, 특정 성향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은유하고 있다고 ‘작가의 말’을 통해 이야기하고 소설을 시작한다. 그거 말고 나처럼 정말 두뇌를 진화시킨 도롱뇽의 한 종이라고 확정해서 소설을 읽어도 충분하게 재미나다. 굳이 이 이야기도 작가의 은유에서 비롯한 것일 거다, 라고 머리 굴리실 분을 굴리시고, 나처럼 책에서 나오는 대로 그냥 받아들여 소설의 서사를 이해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 것이다. 만일 모든 책을 다 은유로 여긴다면, 어느 날 대한민국 강원도 W시 500미터 상공에 나타난 우주선에서 내린 외계인은 어쩔겨? 때론 그냥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주 좋은 독법일 수 있다.
 모든 전쟁과 마찬가지로 도롱뇽과의 전쟁도 인간의 탐욕에서 시작한다. 아주 좁은 섬에 국한해 생존을 이어가는 1.2 미터 크기의 도롱뇽들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아무리 머리가 좋다한들 제대로 된 도구를 만들 수 없다는 거. 기껏해야 죽은 조개의 껍데기나 모래 속의 돌멩이 정도. 그거 가지고는 진주조개가 있다한들 좀 커다란 건 뚜껑을 열지도 못한다. 대륙붕 아래 무제한으로 쌓여있는 철광석도 그걸 제련할 불을 피울 수 없어 무용지물. 양서류의 무지막지한 생식력에도 불구하고 이 IQ 높은 도롱뇽들은 생식에 성공한 수만큼씩 좁은 섬 주위를 여유롭게 유영하는 상어 떼에게 잡혀 먹히고 만다. 이걸 옛사람들은 어복魚腹에 장사葬事 지낸다고 했다. 문제는 조금 힌트를 준 진주조개. 네덜란드 상선의 덩치 큰 체코인 선장 반 토흐. 상선은 상선이지만 주 수입원은 진주를 사고팔아 생기는 이문을 챙기는 거였는데 실론 근처의 황금 진주어장엔 벌써 진주조개가 거덜이 나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궁하면 통하는 법. 섬 사람들이 진주조개를 채취하지 않는 곳이 있었으니 악마 비슷한 검은 물체, 바로 머리 좋은 도롱뇽이 살고 있던 작은 섬 주변이다. 그곳에 진주조개를 따기 위해 잠수를 하면 수천 마리의 도롱뇽들이 잠수부의 주위에 몰려들어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정말로 악마 같아서 감히 진주를 딸 생각을 하지도 못했던 것. 여기서 포기하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1편의 주인공 반 토흐 선장이 아니지. 그는 도롱뇽의 섬에서 며칠을 묵으며 ① 도롱뇽으로 하여금 진주조개를 가져오게 하고, ② 주머니칼로 아주 쉽게 진주조개를 벌려 진주를 꺼내 챙기는데, 암만해도 비싼 진주를 거저 가져오기가 미안해 도롱뇽에게 대가로 주머니칼을 건네줬더니, ③ 도롱뇽들이 이젠 조개는 자기들이 먹고 진주만 골라서 한 주먹 가져오는지라, 오호 이거 봐라, IQ 높은 도롱뇽들한테 칼을 잔뜩 가져다주고 진주를 가마니째 넘겨받았다. ④ 하지만 이 훌륭한 일꾼들이 아주 자주 상어에게 물려 죽어 노동력 손실도 크고 생산성도 높아지지 않아 작살을 선물했더니 섬 주변에 상어란 상어는 씨가 말라버려 자신들의 섬에서 다른 섬으로 이동이 가능해지고 개체수도 2차 함수 곡선을 그렸던 것이다.
 재미나겠지? 인간들의 탐욕은 마치 300년 전 아프리카 노예들에게 그랬듯이 도롱뇽에게 노예 비슷하게 무상 노동, 생체실험 등 갖은 악행을 하기에 이르렀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생전 반항 따위는 해보지도 않고 묵묵히 개체수를 늘려간 도롱뇽들은 어느새 수백억 마리에 육박하게 되는 거다. 여기서 끝나? 이 책이 나온 시점이, 놀라지 마시라, 1936년. 당시 유럽은 2차 세계대전을 위해 악착같이 군비를 확장하고 군대를 질적, 양적으로 키우고, 곳곳에 참호를 파고, 기지를 건설하던 시기. 인간들은 전쟁이 발발하면 도롱뇽들을 군대에 편입시키기 위해 참호와 기지 건설에 투입하더니 급기야 무기까지 공급해주고 만다. 물론 생각 있는 인간들은 도롱뇽에 의한 디스토피아를 예견하고 모든 식량과 철제품과 화약의 공급을 중단하라고 호소하지만 전쟁의 위협 앞에서는 어느 국가나 마찬가지로, 쟤네들이 먼저 하면 우리도 할게, 합창을 한다.
 대강 그림이 그려지시지? 나도 더 이상 이 소설의 줄거리는 얘기하면 안 되겠다. 짧은 인간 역사로 보면 디스토피아 적 인류의 멸망 비슷한 모습을 제시하고, 지구, 즉 가이아의 입장의 역사에서 보면 어쩌면 순환하는 어떤 종의 사이클 한 바퀴를 얘기하는, 재미난 책.
 내년엔 꼭 카를 차페크의 드라마 <곤충 극장>을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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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10-30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곤충극장>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열린책들이 가끔(?) 좋은 작품을 잘도 발굴(?)해서 출판하는 것 같아요. 다른 출판사에 없는 책들 가운데 이렇게 제 마음에 쏙 드는 책을 종종 소개해주니 어느 땐 고맙기도 하달까요. ㅎㅎ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차페크의 <로봇>도 저는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Falstaff 2017-10-30 10:56   좋아요 0 | URL
맞아요, 열린책들이 그런 일을 잘 합니다......만서도 대박도 있고, 가끔 똥 밟을 때도 있고 ^^; 그런데요, 하여간 그런 건 바람직합니다. 대박과 아닌 거 두 경우 다 포함해서요.
 
복어
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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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경란의 소설 목록을 보면 <식빵 굽는 시간>, <국자 이야기>, <혀> 등, 내가 읽어보진 않았지만 먹는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많아 <복어> 역시 치명적인 맛과 독을 지닌 음식 재료에 관한 재미있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하고 기대했다. 또 한 편에는, 책 표지 펠릭스 발로통이 그린 <빨간 의자 위의 여인>에서처럼 한 여인의 권태, 절망, 고독 또는 소외 같은 주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언제나 맛있게 먹는 얘기가 권태나 절망 같은 것보다 훨씬 좋다고 생각하는 인간이다. 근데, 이 책은 주로 복어의 독을 유용하게 사용하는 상황에 대하여 서술했다. 어떻게 효과적으로 자살을 성공시킬 수 있을까, 하는 용도.
 모든 예술 장르가 생겼을 때부터 먹는 것과 연애, 그리고 죽음은 예술가들의 영원한 숙고이자 가장 중요한 주제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조경란도 이 책 <복어>에서 죽음, 그 가운데서 인간만이 선택할 수 있는 죽음의 형태인 자살을 아주 심란하게 써내려가고 있다. 모두 4부로 구성. 한 부는 17개의 장으로 되어 있으니, 만일 제일 마지막 ‘작가의 말’을 4부의 한 장章으로 친다면 모두 17 곱하기 4, 68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이 중에서 홀수는 여자 주인공 ‘그녀’를 관찰하고 있고, 짝수는 남자 주인공 ‘그’에게 초점을 맞췄다. 그러니까 독자는 그녀와 그 사이를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머리를 써야 한다는 뜻.
 소설의 무대는 세계적인 두 도시, 서울과 도쿄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그녀는 조각가, 그는 건축가의 직업을 갖고 있으며, 한 소설의 주인공들답게 실력이 아주 출중해 업계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실력자들이다. 여기까지는 책을 읽기 전에 미리 알아두면 좀 도움이 되는 말. 물론 이야기 안 해줘도 전혀 난감할 일 없지만 그래도 먼저 읽었으니 좀 티를 내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불문과 후배가 있었다. 부모가 일찌감치 세상 하직하시어 이 친구와 동생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보육원에서 자랐다. 보육원 출신은 대학 못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워낙 착실하고 똑똑했던 후배는 어찌어찌해 대학 진학을 했고, 입학금과 등록금은 면제를 받았으며, 생활비 일부도 지원을 받았고 늘 박재삼과 천상병을 좋아했다. 학교 잘 다니다가 점점 동네 코흘리개 아이들하고 친하게 지내더니 덜컥, 퇴행이라던가 하는 정신병 진단을 받아 입원을 하고 얼마 뒤 퇴원을 하더니, 며칠 학교에 나오지 않다가 한강다리 교각 옆에서 떠오른 걸 누군가 발견했다. 선후배, 동료들 가운데 후배의 사인signature, 나 좀 구해줘, 도와달라고! 하는 걸 눈치 채지 못했으며, 동생은 군복무 중이었다. 여태 살면서 주위에 자살한 친구들 몇 명 있지만 이 후배의 죽음이 아직도 안타깝다. 내게도 분명히 자기를 좀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신호를 보냈던 걸, 나중에 알았기 때문에. 그때 우리는 동생을 통해서 알았다. 일찌감치 돌아간 부모들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것을. 자살, 심각한 우울증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지만 그건 유전적 요인이 클 수도 있다고 당시 의학 본과 다니던 친구가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친구는 신경정신과가 아니라 정형외과 전문의가 됐다.
 <복어>의 그녀, 일본인 마에스트로 생선장수 아베 씨가 복어를 두 부분으로 해체하는 것을 눈으로만 배운다. 독이 있는 부분과 없는 부분. 먹으면 행복해지는 부위와 먹으면 골로 가는 부위. 그러나 아베 씨는 그녀에게 결코 칼을 잡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조각가. 칼날을 다루는 일에 관해선 천부적 소질이 있는 편.
 1950년 서울 원남동 집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정여사는 피난지 학교로 전학한다. 피난지 마산고녀에 재학하던 중 집을 통째로 전세 내 살고 있던 집이 크기도 하고 몰려드는 피난민에게 공간을 내주지 않을 수도 없어 문간방에 손주 둘을 데리고 있는 할머니에게 셋방을 내주었다고 한다. 전시에 젊은 부부 없이 손주 둘을 데리고 살아야 하는 늙은이의 삶이 얼마나 팍팍 했겠는가. 어느 날, 문간방 할머니가 시장에서 생선의 알과 내장을 한 소쿠리 얻어와(또는 주워와) 찌개를 끓이는데 음식 냄새가, 한창 발육이 왕성한 시절이었던 정여사의 코에 매우 감탄할 만한 그랑제테로 날아들었다. 정여사 댁에서는 아무리 전시라 하더라도 음식 맛난 거 있으면 두 아이들 불쌍해서라도 조금씩 나눠주고 그랬는데 이 늙은이는 냄새가 그리 좋은 찌개를 끓이면서도 정여사에게 먹어보라는 얘기 한 마디 없이 그걸 아이들하고 맛나게도 먹더라고 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할머니와 두 손주는 이미 싸늘해진 주검으로 발견됐다. 아이들 둘 데리고 살기가 너무 힘들어 늙은 할머니는 알면서도 복어 알과 내장으로 탕을 끓여 마지막 만찬을 즐겼던 거다.
 이 1951년 실화는 언젠가 내가 써먹으려고 꼬불치고 있던 것. 근데 조경란이 <복어>에서 써먹었다. 이런 에피소드는 먼저 쓰는 게 임자다. ‘그녀’의 할아버지가 어부였는데, 먼 바다에까지 나가 직접 잡아온 복어로 맛난 국을 끓여, 할머니의 생일날, 할아버지와 아홉 살 먹은 아버지한텐 미역국을 올리고, 자신은 복엇국을 들이킴으로서, 남편과 어린 아들이 보는 앞에서 입술과 코 사이에 갑자기 주르륵 코피를 쏟으며 모로 넘어지면서 경련을 일으키다가 죽어버렸다. 복엇국을 맛나게, 그러나 장렬하게 들이마시고 생을 마감한 엄마를 두 눈으로 직접 본 그녀의 아버지는 어떻게 됐을까? 그건 내가 가르쳐드릴 수 없다. 직접 읽어보시라. 그럼 할머니의 유전자는 그녀 피 속에서는 안전할까? 죽고자 하는 마음, 그것의 정체는?
 심각한 우울증을 자각하고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그’의 아버지. 도쿄탑을 보며 저기서 뛰어내릴 수 있을까? 묻던 형에게 죽으려면 3층에서 떨어져도 죽는다는 걸 알려준 그. 어느 날 형은 웃으면서 지금 곧장 집에 올 수 있느냐는 전화를 하고는 5층에서 자유낙하를 해버린다. 도저히 가능하지 않는 자세와 위치로 두 팔과 두 다리를 배열하고 머리통에선 피와 뭔지 모를 검붉은 액체를 쏟아내며 누워 있는 형.
 그녀와 그의 공통점은 자살 혹은 우울증의 유전자가 가문 대대로 유전하고 있다는 것.
 그리하여 책 <복어>는 시종일관 우울하고 어둡다. 간혹 그로테스크하다. 계절은 거의 언제나 겨울이고, 봄이라도 꽃샘추위가 기승을 떨며, 벚꽃이 만발한 유일한 날엔 구구거리며 모이를 쪼던 비둘기를 독수리가 낚아채 날개를 찢고 머리통을 부순다.
 이런 소설을 쓴 건 이해한다. 앞에서 말했다. 예술이란 것이 태어났을 때부터 사랑과 죽음은 영원한 주제일 수밖에 없었으니. 이해하고 또 이해한다. 죽음, 그것 중에서도 자살을 선택해 소설을 쓰고자 했던 마음을. 근데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많고 많은 책 중에서 내가 그 소설을 읽었다는 것. 이해는 하는데 나는 읽고 싶지 않은 거, 이것도 정당하다. 내가 읽고 싶지 않았던 소설을 당신에게 권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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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D 2017-10-27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꼭이라고 붙이기는 좀 그렇지만 출판되어야만 하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저만은 그 책을 그저 들어서 알 뿐 읽지는 않았으면 싶은 그런 책이 있죠;;;;하...이 리뷰를 읽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읽고나니 리뷰도 좋고, 책은 또 호기심을 자극하고 그렇군요^^;;
좋은 주말 되시길!

Falstaff 2017-10-27 14:44   좋아요 0 | URL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만 (얘기하신대로) 왠만하면 그냥 이런 책도 있구나, 선에서 ㅎㅎㅎ
 
간결한 배치 민음의 시 129
신해욱 지음 / 민음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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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흠. 독후감을 쓰기가 난감하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께서 지금부터 쓰려고 하는 것이 요즘 흔히 말하는 ‘서평’이라 생각하실까봐 겁난다. ‘서평’이야말로 단어의 과도한 확장이다. 책 한 권 읽고 아마추어가 자신의 느낌을 쓰는 것을 서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자신이 글을 읽고 책을 ‘평가’하는 자격은 평론가한테 맡기자. 그저 우리 평범한 아마추어들은 천진난만하게 책 읽고 자신이 즐긴 내용만 쓰면 된다. 그리고 얼마나 좋으냐, 느낀 대로 쓸 수 있다는 것이. 같은 이유에서 나는 지금부터 신해욱이 쓴 시집 <간결한 배치>를 읽고 고통 받은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독후감, 즉, 다 읽고 내가 느낀 대로 쓰는 거니까. 맞지?
 일단 시집을 사서 읽으면, 언젠가는 표제 작품이 나오겠지, 하면서 읽게 된다. 근데 이 책엔 표제작 <간결한 배치>가 등장하지 않는다. 왜냐고? 책 <간결한 배치>가 무지하게 큰 시 한 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이것이 작가의 처녀시집(작가의 처녀막이 뜯어졌다, 뭐 이런 그로테스크한 얘기 하지 마시라. 저번에 써먹었다. 그리고 신해욱 시인은 아마 남잘 걸? 이라고 썼다가 검색해보니 여자닷!)인데, 그동안 써왔던 시(들)을 시집의 제목처럼 시인 나름대로 간결하게 배치해놨다는 뜻일 수도 있다. (시인의 성gender을 헷갈린 이유는, 양장본일 경우 일단 겉표지를 벗겨내고 읽은 다음에 다 읽고 다시 표지를 입히자마자 책꽂이에 꽂아 놓기 때문이다. 그래서 표지 앞날개에 붙인 시인의 사진을 못 본 거다. 그냥 이름과 시어들을 보고 남자라고 때려 맞췄다가 꽝인 경우.)
 시에 대해 진짜 아는 거 없는 내가 읽기에 중요한 작품 하나 뽑았다.



 

 103번 국도



 시야가 지워졌다.


 나는 가파르게 정지했다.


 비가 없지만
 나는 젖어가고


 돌아보면 까마득한 벼랑.
 그리고 나에게는 등이 없다.


 하룻밤쯤
 이곳에서 묵어야 할 것 같다.  (전문. 14쪽)



 이 시는 1부 격인 “오래된 휴일”의 두 번째 시다. 시인은  (우리나라엔 없는)103번 국도를 따라 달렸거나 뛰었거나 아니면 걷고 있다가 끼익, 멈췄다. 비 오는 날은 아니지만 하여간 여러 가지 이유로 젖어가면서.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까마득한 벼랑. 자기가 벼랑 위에 있는지, 벼랑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별로 친절하지 않아서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없나보다. 근데 시인한테는 등이 없다. 여기서 등이 뭘까? 등light일까, 아니면 등back일까. 둘 중에 어느 등이 없어서 벼랑 앞이거나 벼랑 위에서 묵어야 할까. (지금 쓰고 있는 건 서평이 아니라 독후감!) 앞에 서 있는 벼랑 속으로 시인은 쑥 들어가 하룻밤쯤 묵어야 하기 때문에 지금 등back이 없는 거 아냐? 즉 벼랑으로 은유하고 있는 자신의 틀 혹은 (좋다!)예술, 생각, 똥고집 기타 등등 속으로 박힌다는 선언일 수도 있....을까? 없으면 말고.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 내고 사 읽어본 독자가 읽기에 그렇다면 그런 거다.
 앞에서 시집 자체가 큰 시 한 수일 수도 있다고 얘기했다. 바로 다음 시 <某某> 세 번째 연에서는,


 오 분 뒤에 숨었던 바람이, 다시 나를 들어 올릴 때, 머무르라, 그대는 아름답다, 는 마르고 깔깔한 속삭임. 모르는 이름이 나를 가둔다. 여기는 다시 

 오 분 전이다.


 라고 노래함으로써 앞의 시 <103번 국도>에서 빠져나와 시인을 가두었음을 확정한다. 이렇게 얘기하면 혹시 모던 시치고는 그래도 평이한 수준이겠구나, 라고 생각하면 정말 오산. 일단 알아들을 수 없는 시는 휙휙 지나치고 1부 “오래된 휴일”의 마지막 시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로 접어들면, 드디어 시인이 자신을 가두어 놓은 장소가 나타난다.


 모텔 첼로가 있는 오랜 벌판에 이따금
 낡은 짐승들이 배회하고 있었고
 어두운 객실에서 당신이 죽을 때마다
 인디언 인형은 사라져갔네
 어딘가로 가라앉은 당신의 눈들
 일렁이며 눈 뜨는 당신의 아름다움
 아무도 없는 모텔 첼로의 열 꼬마 인디언과
 당신의 죽음은 열두 번 계속될지니, (후략)


 모텔 첼로라는 곳에 자신을 가두어 놓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 ‘모텔 첼로’는 천안시 서북구 망향로에 있던 진짜 ‘모텔 첼로’, 일찍이 대한민국 모텔 역사상 최초로 세계품질표준 ISO9001을 획득한 바 있는 바로 그 모텔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신해욱 시인이 경춘가도를 지나가다 한 번 간판만 보았거나 아니면 하루 묵어봤는데 방이 진짜로 간결하게 배치되어 아주 인상 깊었거나, 장래 희망이 모텔 주인이라서 정말로 모텔을 짓거나 인수하면 이름을 첼로라 하겠다, 작정한 그런 이름일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2부의 제목이 “모텔 첼로”라는 거. 이리하여 1부까지 읽고 드디어 2부의 제목을 읽는 순간, 혹시 이 시집은 제목 <간결한 배치>의 큼지막한 시 한 수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게 된다. 모텔 첼로의 입구로 들어가는 순간, 즉, 앞에서 벼랑 속으로 들어가 등back이 없어지는 순간을 한 번, 최초의 죽음이라고 치면, 앞으로 열한 번의 죽음이 남아 있는 바, 2부 “모텔 첼로”는 열한 수의 시로 구성되어 있다. 참으로 간결한 배치다.
 물론 지금 이 감상문을 읽는 분들께서 참 가져다 맞추기도 잘 한다, 라고 하면 독후감 전문 아마추어는 그냥 깨갱, 하며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내 말이 아주 조금은 맞을 걸? 이 글 읽으시는 분들 가운데 여태 살면서 모텔 한 번 안 가보신 분 거수. 난 침대 시트 위에 고불거리는 털 몇 올 떨어져 있을까봐 겁나 여간해선 호텔에 가는데, 모텔이나 호텔이나 거기가 거기라서 공통점이 무수한 셀, 세포, 방, 밀실, 폐쇄공간으로 만들어졌다는 거. 간결하게 말해서, 그렇게 배치되었다는 거. 그곳에서 열한 번의 죽음을 더 경험한 시인은 마지막 시 <벽>에서 또 노래한다.


 (전략)
 나는 눈을 뜬다.


 생각 속에서 어떤 손이
 불쑥 나타나
 이유 없이
 오래도록
 내 얼굴을 만진다.


 나는 자꾸 사실 바깥으로
 벗어나고 있다.  (38쪽)


 죽음을 끝마친 시인은 마지막으로 이제 죽을 만큼 다 죽었으니 바깥으로 한 번 벗어나볼까, 하고 모텔에서 나오는데 그곳은 3부 “환한 마을”이다. 이어 계속 “즐거운 번화가”에서 어슬렁 거려보기도 하고, “흑백의 마을”과 “사각 지대”를 거쳐 최종적으로 “그때에도”라는 7부에 도착하면 이제야 각 부部의 제목과 같은 제목의 시 한 수가 등장한다.



 그때에도



 나는 오늘도
 사람들과 함께 있다.

 

 누군가의 머리는 아주 길고
 누군가는 버스를 탄다.

 

 그때에도
 이렇게 햇빛이 비치고 있을 테지.

 

 그때에도 나는
 당연한 것들이 보고 싶겠지.



 1부 “오래된 휴일”에서부터 6부 “사각 지대”까지 쌔빠지게 죽고 살고 다시 죽고 또다시 부활해 맞이한 오늘. 가파르게 정지해서 뒤 돌아보니 까마득한 벼랑이 결국 사람들과 함께 있었던 거다. 누군가는 돈이 없어서 그랬나, 파마도 하지 않은 생머리를 길게 길렀고, 누군가는 택시비가 없어 버스를 타는 그런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보고 싶은 거. 이게 시를 쓰는 일이고 세상사는 일이라고, 시인은 혹시 길고 긴 하나의 시 <간결한 배치>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뭐, 아니면 말아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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