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의 노래 - 2023 부커상 수상작
폴 린치 지음, 허진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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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7년 아일랜드 리머릭 카운티의 해안 및 절벽 구조대원 아버지와 성인 문맹퇴치 교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폴 린치 Paul Lynch는 유럽의 명문학교인 더블린 유니버시티 칼리지에 입학해 영어와 철학을 전공하다가 중도에 때려치우고 만다. 이후 지금은 폐간된 선데이 트리뷴에 들어가 부편집장과 수석영화평론을 하다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모두 다섯 작품을 발표했는데 2023년에 부커상을 받은 <예언자의 노래>가 가장 유명하다.


  폴 린치는 시리아 내전과 내전에 따른 난민문제, 곤경에 처한 난민에 대한 서방세계의 무관심에서 작품의 힌트를 받아 <예언자의 노래>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내가 아직 직장에 다녔다면, 이 책은 아마도 우리나라 시장에 나오자마자, 2024년 11월 23일이나 24일 정도에 다 읽고 독후감까지 썼을 것이다. 대신 나는 11월 18일에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하고 다른 책들과 함께 12월 중순에 받아 읽었다. 그렇다, 날짜가 중요하다. 전 같으면 읽었을 시기인 11월 24일과 진짜로 책을 읽은 오늘 12월 중순 사이에 우리나라에는 20대 대통령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이 책 <예언자의 노래> 속에서 아일랜드 공화국은 극우 정당인 국민동맹당이 권력을 장악하고 비상대권법을 발효해 아일랜드의 헌법을 정지시켜 버린다. 책에서 말한 ‘비상대권법’이 12월 3일 밤에 잠깐 발효되었다가 곧바로 사라진 우리나라의 비상계엄과 같거나 매우 유사한 법령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니 12월 3일 이후에 이 책을 읽은 우리나라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작품의 주인공 아일리시 스택에 감정을 몰입할 수 있었고 비상대권법을 근거로 공안당국이 저지르는 폭력에 더욱 진저리를 쳤을 것이다.

  작품 속에서 아일랜드 공화국이 비상대권법을 발효한 시기는 영국이 브렉시트를 선언한 다음이니까 2020년 이후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아일랜드의 통화는 유로화고, 영국령 북아일랜드는 파운드화를 사용하니 이 의견이 옳을 것이다. 21세기 들어 아일랜드는 기록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다. 외국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세제 개편을 단행하고 세계최고 수준의 지원을 약속해 숱한 다국적기업이 아일랜드에 공장도 짓고, 사무실도 내고, 심지어 위장전입까지 서슴지 않아 2020년대의 아일랜드는 유럽에서도 속으로 알찬, 알부자 나라 가운데 하나로 편입되었다. 2022년 기준 1인당 GDP가 9만7천여 달러로 세계 2위에 올랐다. 이 마당에 아일랜드에서, 집권당이 아무리 우익 보수 골통을 넘어 히틀러의 사생아라고 하더라도 정말 비상대권법을 발효해서, 이에 반대하는 숱한 사람을 체포, 구금, 그리고 유사이래 보지 못한 첨단 고문에 이은 살해, 학살을 자행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할 것이다. 근데 그걸 누가 알아? 2024년에 대한민국에서 비상계엄이 떨어질 줄 누가 알았느냐고? 난 그날 밤 술 취해 자고 있다가 마누라가 흔들어 깨워 계엄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아무리 귀를 쫑긋해도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나지 않기도 하고, 나 혼자 죽으면 억울하지만 전쟁 터져서 함께 죽으면 그나마 덜 억울하다, 잠이나 자자, 계속 잤다는 거 아니냐 말이지. 김정은이 쳐들어오는 거 말고는 비상계엄을 때릴 이유가 없잖여? 안 그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일랜드에서 비상대권법과 연이어 체포구금, 고문과 대량학살을 상정하는 건 조금 무리다. 비상대권법에 반대하는 반군들이 정부군과 비슷한 수준으로 무장해 정부군과 싸울 수 있는 환경이라면 애초에 비상대권이건 비상계엄이건 시도하지도 못하지 않았을까 하는 게 처음부터 의아했다.

  또 하나의 궁금점은, 의회민주제 하의 집권당인 국민동맹당이 왜 비상대권법을 통과시켰을까, 하는 점이었다. 작가는 여기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물론 이걸(비상대권법을 발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건 역사학의 범위겠지만, 독자도 이에 관해 작은 힌트 정도는 알아야 되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 그것도 틀리지 않을 듯하다. 그리하여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집권당에 의한 비상대권법이 처음부터 정당하지 않았다는 인식을 독자에게 주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하는 점. 혹시 알아? 누백년, 누천년간 아일랜드를 식민 지배했던 잉글랜드가 또다시 군사적 도발을 획책하고 있었는지. 대처 수상도 아르헨티나의 작은 섬 포클랜드 때문에 전쟁을 벌였던 적이 있으니까 얼마든지 가능한 시나리오다. 영국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나라다. 신사의 나라? 웃기고 자빠졌네.


  하여간 작품 속에서 정부군은 나쁜 너네편이고 반군은 착한 우리편이다. 착하기는 하지만 내전 기간이니 정부군만큼 거칠다. 어쩔 수 없다.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판에 이 사정, 저 사정 다 봐줄 수는 없는 거니까. 이런 의미에서 비슷하게 거칠다는 뜻이다.

  주인공은 아일리시 스택 여사. 분자세포 생물학 박사로 연구소의 중요부분 임원으로 근무하다가 작품 중간쯤 가면 정부에서 점지한 낙하산에 의하여 해고당한다. 이이한테는 네 아이가 있다. 첫째가 열여섯 살이었다가 열일곱 살이 되는 아들 마크. 둘째가 딸 몰리. 셋째는 열두 살 사내아이 베일리. 막내는 늦둥이 아들로 이제 이가 나기 시작하는 벤. 남편 래리는 아일랜드 교원노조 부위원장이다. 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이제 교원노조 전임으로 옮겨 교사 업무는 하지 않고 노조일에 전념하고 있다. 당연히 진보진영에 속해서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기본권을 무시하는 비상대권법에 반대하여 며칠 후 교원을 비롯한 대중 행진 시위를 계획하고 있다. 그러니까 소위 비상대권법이 발효되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작품은 시작한다.

  소설의 앞부분은 아일랜드 또는 유럽의 한 나라에서 극히 비정상적인 정치적 집단이 괴물 같은 비상법을 선포하고, 이에 따른 후속조치를 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읽힌다. 아직 그렇게 늦은 밤은 아닐 때, 남편 래리는 물론이고 아직 맏이 마크도 데이트를 마치고 집에 들어오지 않은 시간에 현관을 두드리는 두 남자가 등장한다. 가르다 치안국(Garda Siochana: GNSB)의 깡마르고 팔팔한 젊은 형사 버크와 나이들고 뚱뚱한 스탬프. 이들이 남편이 집에 있느냐, 언제 들어오느냐를 묻고, 없다, 언제 들어올지 모른다는 답을 듣고는 명함 한 장을 건네면서 남편이 집에 들어오면 전화 부탁한다는 말을 전한 후 점잖게 돌아간다. 래리가 돌아와 이 말을 전했고, 마크도 돌아와, 모든 가족이 잠이 들었는데, 아무래도 불안한 래리는 조용히 혼자 일어나 옷을 입고 경찰서로 자진 출두해 스탬프 형사를 찾아간다. 이들은 구면. 래리는 더블린대학 축구팀 미드필더였고, 스탬프는 게일스대학 축구팀이었는데 이 해에 게일스가 더블린을 무참하게 깨버렸단다.

  스탬프는 말한다. 스택의 행동은 국가에 불화와 동요를 심는 것으로 이 일을 하는 사람은 국익에 반하는 단체의 요원이거나, 무슨 짓인지도 모르고 행동하는 사람일 터인데, 어느 경우든 결국은 국가의 적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라고. 당시의 양심을 잘 살펴보고 지금이 그런 경우가 아닌지 확인하기를 강력히 권고한다고. 이 정도면 세계 2위의 GDP를 자랑하는 부유한 나라의 형사 비슷하다. 그런데 여기 까지다.

  래리 스택은 집에 돌아왔고, 숱한 노조원의 연속적인 행방불명에도 불구하고 교원노조의 행진 시위를 추진하면서 점점 초췌해지고 황폐되어간다. 사방에서 옥죄고 들어오기 시작하는 눈길과 협박. 그럼에도 래리와 교원노조는 일정에 맞추어 정말로 행진 시위를 강행하고, 아일랜드 경찰과 정부군은 기마대, 그리고 최루탄을 쏘아가며 이들을 폭력진압한다. 이 과정에서 래리는 당국에 체포되고 이후 작품 속에서 종적이 사라진다. 주인공이자 아이들의 엄마인 아일리시 스택은 그래도 남편이 열악하기는 하지만 특정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것이라 마음을 다스리면서 자기가 당장 맡아야 할 큰 의무, 네 아이들을 탈 없이, 무사하게 간수하는 일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게다가 치매가 어느 정도 진행된 것처럼 보이는 친정 아버지도 돌봐야 하고.

  이후 비상대권법 하의 아일랜드는 유럽이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 그것도 1970년대 이전의 라틴 아메리카 독재자들 치하와 비슷한 분위기로 점점 악화된다. 이를 대서양 넘어 스택 가족보다 더 상세하게 관찰하고 있는 이가 있으니 ‘아냐’라는 이름의 아일리시 스택 여사의 동생. 동생은 캐나다에서 치매가 있는 늙은 아버지와 언니 가족을 아일랜드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기꺼이 거금을 쓰기로 결심한다. 즉, 앞에서 말한 시리아 내전 당시의 난민 문제를 거론하기에 이른다. 내전 측면에서는 시리아의 예를 따르고, 비상대권법으로 상징하는 독재는 라틴 아메리카의 예를 따른 작품이라고 봐야 하겠다.

  이 정도면 스토리가 어떻게 진행될 지는 다 짐작하실 수 있을 터. 당신이 생각하는 그대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열여섯 살인 맏아들 마크는 체제에 반대하는 래리 스택의 아들이라는 죄 때문으로 보이는데, 의학이나 법학을 전공하고자 하는 영민한 고등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열일곱 살 먹는 생일 다음날 아일랜드 정부군에 입대하라는 영장이 떨어졌고, 엄마는 이모의 도움으로 북아일랜드로 탈출하라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빠 래리 스택의 아들로 그럴 수 없어서, 콱 반군에 가입해버린다. 그리고 역시 조금 시간이 지나 작품에서 사라지지만 죽은 것 같지는 않다. 당연히 마지막 장면은 가르쳐드릴 수 없다. 하긴 열린 결말이라 어떻게 끝나는 지는 독자가 상상하기 따름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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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1-24 0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독후감:
월요일. F. 스콧 피츠제럴드, 《바질 이야기》
화요일. 다와다 요코, 《헌등사》
목요일. 올가 토카르추크, 《기묘한 이야기들》
금요일. 레오 페루츠, <9시에서 9시 사이>

stella.K 2025-01-24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의 우리나라 상황과 겹치는 부분이 있네요. 무슨 코미디도 아니고 정말이지 요즘처럼 나라꼴 잘 돌아간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때도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디까지 바닥을 봐야하나 싶은데 이 책이 조금이나마 뭔가의 통찰력을 얻게해 줄런지 암튼 관심이가네요.

Falstaff 2025-01-24 16:03   좋아요 0 | URL
아휴, 답글 썼다가 지웠습니다. 저는 정치적으로 합죽이가 되려고 합니다. ㅋㅋㅋ 합!!

stella.K 2025-01-24 16:15   좋아요 0 | URL
ㅎㅎ 아, 왜요? 이럴 때 하시는 거지 또 언제하겠습니까? 아쉬운데요? ㅋㅋㅋ
 
울프홀 1 - 맨부커상,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수상작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1
힐러리 맨틀 지음, 강아름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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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크롬웰, 하면 나는 청교도 혁명 시절에 패권을 쥔 올리버 크롬웰을 연상했다.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을 겸했던 스튜어트 왕가 찰스 1세의 목을 뎅겅 잘라버리고 스스로 최고 권력자인 호국경의 자리에 앉았던 난세의 영웅. <울프홀>의 주인공은 이 올리버 크롬웰의 먼 친척이라고 하는데 말이 먼 친척이지 110년 이상 나이차가 나 올리버의 증조부나 고조부 뻘인 토머스 크롬웰 제1대 에식스 백작이다. 성이 같다고 직계 후손은 아니다. 위키피디아는 올리버가 토마스의 누나 캐서린 크롬웰의 외증손자라고 쓰여 있다. 근데 성이 같다고? 그렇다. 착한 누나 캐서린이 여러모로 좋은 남자인 모건 윌리엄스와 결혼해 리처드를 낳았는데, 리처드가 소년시절일 때 당시 잉글랜드를 휩쓸던 역병에 걸려 남편이 죽는 바람에 조카를 토마스 크롬웰이 거두어 키운다. 리처드는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깨닫는 총명한 소년이었다가 재기가 번득이는 청년으로 성장하며 외삼촌 토머스 크롬웰을 거의 최상급 수준으로 보필한다. 그러던 하루 리처드 윌리엄스가 외삼촌에게 다가와, 이왕 외삼촌이 자식처럼 키워주는데 이름을 윌리엄스에서 크롬웰로 바꾸겠다고 제의했고, 토머스 크롬웰이 이를 수락하여 리처드 크롬웰이라 불리기 시작한다. 애초 가정폭력을 최고의 취미생활로 여기던 대장장이 아버지 월터 크롬웰 선생한테 맞아 죽기 일보직전에 매형 모건 윌리엄스가 뒷돈을 대주어 대륙으로 도망한 토머스 크롬웰과 달리 올리버의 진짜 혈통인 윌리엄스 가문은 귀족 끄트머리 떨거지였다. 어떻게 알았냐고? 책 속에 다 나온다.


  대장장이 아버지 월터에게 심각한 수준으로 폭행을 당한 소년 크롬웰이 매형의 도움으로 대륙에 건너가 한 일은 프랑스 군대에 입대하는 것.

  잠깐. 이 작품은 소설이다. 토마스의 아버지 월터 크롬웰이 귀족이나 젠틀맨이 아니었던 건 맞지만 할아버지가 양모가공업을 하고 윔블던 지역 저택에 살며 규모는 확실하지 않으나 지주였던 걸로 보아 소설처럼 막 나가는 종자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위키피디아는 월터 크롬웰을 “성공한 상인”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16세기의 야만스러운 잉글랜드 사람 답게 죽을 죄만 아니라면 법을 위반하는 것을 꺼려하지는 않았지만. 반면에 소년 토머스는 책에 나오는 대로 어린 싸움꾼이었던 건 확실한 듯하다. 소년 크롬웰은 (책에서처럼 아버지한테 맞아 죽기 직전에 도망한 것이 아니라) 심하게 싸움을 했던지 하여간 처벌을 피하기 위해 영불해협을 건너 플랑드르에 도착, 프랑스군에 입대한다. 처음엔 전투병과에 복무하다가 보급병으로 옮겨 최초로 회계 장부의 세계로 접어들 계기를 잡는다.

  프랑스군에서 제대하고 이탈리아로 넘어간 크롬웰은 16세기에 만발한 르네상스 문화를 직접 몸으로 만끽하면서 인본주의에 대하여 개안하는 한편, 피렌체의 은행가 프레스코발디 가문에서 본격적으로 금융업과 함께 “인류가 생산한 가장 중요한 과학 가운데 하나인 복식부기”를 배운다. 작품 속에서 크롬웰은 이탈리아 시절에 회계 장부, 금융, 그리고 이에 못지않게 평생의 자산이 될 남다른 기억력을 키우는 법을 배웠다고 설명한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있다. 다양한 유럽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계기. 언어는 세월이 가면서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 지금부터 5백년 전의 유럽엔 각양각색의 언어가 있었고, 영국만 해도 웨일즈 사람이 하는 말을 잉글랜드 사람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으며,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스페인의 16세기 카스티아, 발렌시아, 바스크 등등의 언어 등을 대강이라도 이해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을 것이다. 하여간 작중 크롬웰은 지금의 영국, 스페인은 물론이고 이탈리아,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언어를 (내 수준에는) 통달하다시피 했으니 언어능력도 싸움실력 만큼 대단했던 모양이다.

  훗날 헨리8세의 최측근으로 왕의 첫번째 부인 아라곤의 캐서린과 혼인무효 소송을 만들어내고, 앤 불린을 왕비의 자리에 올렸으며, 의회에서 수장령을 승인받아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을 완수할 때까지 잉글랜드의 역사를 토머스 크롬웰의 시각으로 쓴 것이 이 책 <울프홀>이다.


  튜더 왕조의 헨리8세가 아직 클레멘스 교황이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이혼을 승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앤 불린과 결혼식을 올린 1533년의 잉글랜드는,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 중종 말기였는데 조선과 달리 왕과 신하들의 행적을 꼼꼼하게 기록하지 않아 그랬는지 우리의 왕조실록과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빈약한 자료만 있어 그만큼 허구로 채울 공간이 넉넉했을 수도 있다. 이건 내 생각이 아니라 이 작품을 쓴 힐러리 맨틀이 <울프홀>의 다음 작품인 <시체들을 끌어내라> 후기에서 직접 한 말이다. 그만큼 맨틀은 이 작품에서 자신의 상상력을 자유롭게, 물론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겠지만, 펼치고 있고 그런 자유가 눈에 띄기도 한다. 독자는 상관하지 않는다. 재미있고 큰 줄거리가 사실과 합당하기만 하면.

  영국의 역사 가운데 헨리8세의 자유연애만큼 독자의 흥미를 끄는 것도 별로 없다. 이건 우리한테만 그런 것도 아니다. 세상 공통이다. 영국이 제공한 가장 유명한 재미거리 또는 스캔들이 바로 헨리8세의 캐서린과의 결혼무효소송, 동시에 임신 6개월 상태에서 치룬 앤 불린과의 결혼식, 그리고 “천일의 앤”, 맞지? “내 목이 가늘어서 힘들지 않을 거야.” 복면을 쓴 망나니를 보며 날리는 인생 마지막 멘트. 올드 팬들은 아마 거의 다 기억하실 걸?

  자신의 재혼을 위해 종교개혁을 해버리는 헨리8세. 왕 옆에 토머스 크롬웰이 없었다면 이는 애초에 불가능했다. 정신적으로 사람의 영혼을 지배하고, 경제적으로 청빈을 내세우면서도 막대한 소유권을 향유하고, 정치적으로 입법권과 파문권으로 협박하는 가톨릭이 청소년시절부터 르네상스 정신에 입각해 생활했던 크롬웰은 지극히 마땅하지 않았던 거였다. 여기에 이제 부패할 대로 부패한 성직자들의 축재와 성적 문란과 이에 따른 사생아 문제 같은 다양한 부작용 등등. 이제 가톨릭은 개혁을 당하지 않을 수 없는 단계까지 와 있던 상태였다. 넓지 않은 잉글랜드 여기저기에 난립한 수도원과 부속 토지. 아메리카 경영으로 금과 은을 수척의 배로 실어오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날이 가난해지는 잉글랜드 왕실. 크롬웰은 가뿐하게 철가면을 쓰고 대대적으로 수도원을 정리하여 귀속재산을 왕의 금고에 쓸어 담을 수 있었던 것. 지금은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겠으나 16세기 잉글랜드에서는 크롬웰 말고 이런 격한 변혁을 가능하게 할 인물은 없었다.

  3부작 가운데 1부 격인 <울프홀>은 종교개혁을 완수하고, (주로 교황청을 일컫는 바) 국외의 법령이 아니라 오직 잉글랜드의 법령에 따라 재판하며, 잉글랜드의 왕이 잉글랜드 종교의 수장이 된다는 수장령을 반포하면서, 끝까지 이 법에 반대하는 존 피셔와 토머스 모어를 참수하고 작품은 2부로 넘어간다.


  그러면, 제목 “울프홀”은 무엇일까? 성castle 또는 저택의 이름이다. 토마스 크롬웰이 평소 존경했던 토머스 모어의 참수형을 참관하고, 모어의 딸 매그에게 런던교에 전시된 아버지의 머리를 거두어 장사 지낼 수 있게 해주라는 (실제로 대단히 특별한 혜택인) 명령을 내린 후, 왕비 앤과 함께 전국 순시에 나선 헨리8세 무리에 뒤늦게 합류하기 위하여 향한 곳. 존 시모어 경의 저택이다.

  존 시모어 경은 아들-아들-딸-딸을 두었는데, 차례로 에드워드, 토머스, 제인, 리지(엘리자베스). 이 양반은 늙은이가 주책이 없어서 장남 에드워드의 아내와 수년에 걸쳐 불륜을 저지르다 아들한테 현장에서 발각된 이력이 있다. 에드워드는 열을 받아 자신의 두 아들이 진짜 자기 아들인지 아니면 동생인지 알 길이 없어 자기 호적에서 파내 사생아로 만든 다음 아내를 수도원으로 보냈던가, 친정으로 보냈던가 하여간 그랬다. 그럼에도 존 경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아들 근처에 어른거렸다가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몇 년 동안 쉬지 않고 장남 곁에서 참견을 하는 바람에 나중엔 구박을 조금 받기는 해도 아비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었다. 딸 제인은 궁에 들어가 앤 왕비의 시녀를 하고 있다가 휴직원을 내고 울프홀에 내려와 있는 상태. 궁에 있을 당시 크롬웰이 (자기 짝이 아닌) 참한 아가씨로 눈 여겨 보고 있었다가, 아니나 다를까 앤이 천일 만에 목이 날아간 다음에 헨리8세의 세번째 아내가 되어 아들이자 후임 왕인 에드워드6세를 낳고 산후합병증으로 열흘만에 세상을 등질 예정이다.

  그러니까 “울프홀”은 1부 <울프홀>을 위한 제목이라기보다 2부 <시체들을 끌어내라>를 예견하는 제목이라고 볼 수 있을 터. 앤 사후 헨리8세의 후계를 출산하는 제인의 집을 향해 가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가장 큰 곤란함은, 나는 종교에도, 영국 왕의 바람기에도 전혀 흥미가 없는 인종이기 때문이었다. 종교(바티칸)과 국가, 왕과 교황, 사제와 정치인을 둘러싼 진흙 속 개싸움을 보는 기분이랄까. 만일 영국인이었더라면 훨씬 더 흥미진진할 수 있었겠다. 큰 틀은 고등학교 시절 세계사 시간에 배운 것, 틈틈이 읽은 역사책에 나온 것들, 기타 등등 여러 매체를 통해 알게 된 내용만 가지고도 충분하다. 하물며 그것을 둘러싼 음모와 스릴, 공포, 서스펜스 그리고 하다못해 그럴 듯한 베드씬도 없는 책. 영국 왕의 바람기와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에는 관심 없다. 이 책을 다 읽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뭐, 어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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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23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1-23 1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5-01-27 1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셰익스피어의 사극 읽으면서 비슷한 느낌이었어요 ^^

Falstaff 2025-01-27 11:20   좋아요 1 | URL
^^;; 전 셰익스피어 <헨리 8세>를 읽어보지 않아서... 뭐라 드릴 말씀이... ㅋㅋㅋ
 
밤에 돌다리 밑에서 열린책들 세계문학 292
레오 페루츠 지음, 신동화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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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소설 열다섯 편과 에필로그로 되어 있는, 연작 장편일 수도 있고 단편집으로도 읽을 수 있는 책. 이 책은 1924년에 쓰기 시작해 1951년에 완성해 53년에 출간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무려 27년에 걸쳐 작품을 완성했다는 이야기인데 1938년에 나치의 오스트리아 합병 후 팔레스타인으로 건너가 유럽인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기간이 있었다고 해도 상당히 오랜 기간이다. 짐작하자면 한 이야기를 27년에 걸쳐 끊어내고, 갈고, 다듬고, 빛을 내는 데 27년이 걸렸다기보다 중심 또는 주인공을 둘러싼 이런 저런 에피소드를 오스트리안 유대인으로 20세기 초중반 험한 시기를 관통하면서 생각날 때마다 단편 분량으로 써 놓은 것을 말년에 다시 정리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면 저절로 연작 장편이 되겠지. 나는 이 작품을 당연히 하나의 장편소설로 여겨 초장부터 메모를 하며 읽고 있다가, 첫 장부터 장편소설 치고 놀라운 속도감과 장면전환에, 이거 이렇게 3백여 페이지를 밀어붙일 수 있을까, 경기를 했거니와, 오히려 단편 연작, 즉 연작 장편이란 걸 알게 되니 차라리 안심이 되던 거였다.

  다 읽고 생각하니까, 에필로그를 빼고 열여섯 편 모두 개별적인 스토리를 갖춘 단편소설의 외형을 갖추어 충분하게 즐길 만하다. 하지만 이왕 읽을 거면 애초 작가가 27년에 걸쳐 쓰고 순서를 정한 대로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는 편이 훨씬 좋겠다는 거. 읽어가면서 아하, 그렇군. 앞 장면이 이래서 나온 거구나, 하나하나 알아가는 재미가 썩 좋다는 말씀. 이왕 이 책을 읽으려면 책방의 책광고나 이 책 뒤표지에 써 있는 작품소개 같은 것을 일체 읽지 말고 시작하시라. 즉, 완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상태에서 작가가 물감 묻힌 붓이 지나가는 대로 그려질 그림을 감상하시는 편이 훨씬 재미있을 터이니.

  지난번에 레오 페루츠를 검색하다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서 메모를 해두었는데, 이번에 안 써먹으면 기회가 없거나, 있더라도 내가 잊을 거 같아 소개한다. 페루츠하고는 한 세대가 차이가 나는 오스트리아 작가 프리드리히 토르베르크는 페루츠의 작품 스타일을 이렇게 표현했다.

  “프란츠 카프카와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은 불륜의 결과.”

  페르츠가 카프카보다 한 살, 크리스티보다 여덟 살 많다. 그래도 어떤 의미인 줄은 알겠다.


  작품은 1589년 가을의 보헤미아, 프라하 유대인 마을에서 시작한다. 이른바 게토인데, 게토Ghetto. 십자군 전쟁 시절부터 유럽인들에 의한 유대인 학살이 심각해지자 유대인을 보호하기 위하여 주교의 명령으로 유대인 정착촌에 담장을 두르고 자치권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었던 것이 애초에 게토를 만든 목적이었다. 프라하의 유대인 정착촌은 작품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가 죽은 후 벌어질 예정인 30년 전쟁이 되어야 본격적인 게토로 담장을 두를 것이라, 작품 속 열다섯 편의 단편소설에서는 궁중의 고급관리들도 남의 눈에 띄는 것만 애써 무시하면, 돈을 빌리거나 뜯어내거나 갈취할 목적이 아니기만 하면 천한 유대인 마을을 찾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냥 아무 진흙 골목으로 들어가 문만 열면 되는 시대였다.

  여기까지 써 놓고 작품의 스토리를 보이기 망설여진다. 위에서 인용했듯이, 페루츠의 스타일이 정말로 카프카와 크리스티가 벌인 작지만 사소하지 않은 불륜의 결과물이라면, 특히 엄마가 애거서 크리스티라면, 결말을 유추할 수 있는 어떤 빌미도 언급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쯤에서 독후감을 뚝 잘라 버리기도 아쉽다. 좋다. 제일 앞에 배열한 작품 <유대인 도시의 페스트>만 소개하기로 하자.


  16세기 말. 유럽은 반세기 전에 혜성같이 등장한 가톨릭 이단 사제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주창해 소위 신교가 들불처럼 번졌고, 이에 못지 않은 기세로 동쪽에서 시작한 흑사병, 역병, 페스트가 창궐, 앞으로도 몇 백 년 동안 유라시아 대륙의 인류 수천만 명을 거덜 낼 계획이었으며, 작품을 시작하는 1589년의 프라하에서도 숱하게 많은 사람들을 까맣게 태워 죽이고 있었다.

프라하의 유대인 도시, 라기 보다는 유대인 지역에 광대 두 명이 살았다. 곰의 탈을 쓰고 곰 흉내를 내며 곰 춤을 추는 코펠. 그리고 바보 예켈레. 유럽 문학에 등장하는 광대들은 어리석고, 보잘것없으며, 미운 털이 박힐 만한 짓들만 골라 하는 바람에 주인과 객들한테 얻어 터지기를 물 마시듯이 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이들의 거친 농담과 우스꽝스러운 짓은 거의 언제나 지혜롭고도 날카로운 해학과 역설을 내포하는 바람에, 언제나 내가 이야기하듯, 광대와 점쟁이들이 하는 말과 예언은 틀림없이 들어맞는다. 이 작품 속의 광대 코펠과 예켈례는 그 정도까지 현명한 소위 ‘유로지비’ 수준은 아니고 하여간 이들, 극의 광대나 점쟁이들 수준이 되어야 볼 수 있을 죽은 아이들을 목격하는 것으로 한 부유한 유대인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사이에 얽힌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광대들의 주 수입원이 유대인 결혼식에 가서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도 하고, 우스꽝스러운 짓을 해 하객들을 즐겁게 해주는 일이었는데, 페스트가 창궐하는 통에 유대인들도 양심이 있어 사람이 죽어 나가는 마당이니 애도나 하자 싶어 결혼식을 하지 않는 바람에 굶기를 밥 먹듯이 하는 신세가 됐다. 이들이 머리 굴리기를: 유대인 공동묘지에 그만큼 새 무덤이 생겼을 터이니, 조문객들이 망자의 영혼이 먼 길 가는 데 쓰라고 동전 푼 깨나 비석 위에 올려두었을 터, 그거라도 가져다 밥 사먹자.

  그래 유대인 공동묘지에 갔더니 정말 새 무덤이 엄청 많고, 묘비마다 다만 몇 푼이라도 대부분 동전이지만 가끔은 무려 은화도 있어서 이게 무슨 횡재, 싶었건만 이때 하얀 내복을 입은 아이들이 새 무덤 위에서 흰 빛을 내며 춤을 추고 있어서 기겁을 해 거품을 물고 도망을 쳤다. 두 광대는 자신의 목숨이 여태 붙어 있는 것이 자기들 눈으로 본 것을 알리라는 신의 뜻임을 깨닫고 위대한 랍비를 찾아가 본 것을 이실직고한다. 동전 몇 푼 얻은 것도 내놓지는 않았지만 숨기지 않고 얘기한 건 물론이다. 어두운 밤에 지혜의 서른두 개 숨은 길을 지났으며 마법으로 변신하여 인식의 일곱 개 문을 통과한 고매한 랍비는 이 유대인 구역에 죄인이 하나 숨어 매일매일 악행을 저지르고 있어서 대 역병이 도시를 덮쳤고, 이 죄인 때문에 죽은 아이들의 영혼이 무덤 속에서 평화를 찾지 못하는 거라고 설파했다.

  위대한 랍비는 광대들을 다시 공동묘지로 가게 해서 그게 누구인지 알아오라고 시켰고, 아이의 유령 하나를 꼬여 물어봤더니, “하느님 외에 그걸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 바로 당신이예요.”라는 대답을 받아왔으니, 단 한 사람이 광대가 아니라 위대한 랍비, 자신을 일컫는 거란 걸 단박에 알아차린 고매한 랍비는 홀로 집을 나와 게토의 밤거리를 걸어 강으로 내려갔고, 물가를 따라 어부들의 오두막을 지나 돌다리에 이르렀다.

  돌다리 밑에는 빨간 장미 한 송이가 달린 장미 덩굴이 있었고 옆 땅에는 로즈메리가 자랐는데, 장미 이파리가 로즈메리의 흰 꽃에 닿을 정도로 서로가 서로를 꽉 휘감고 있었다. 고매한 랍비는 몸을 숙여 로즈메리를 뿌리째 뽑아내 간음을 저지른 여자의 머리에서 마법을 풀고 로즈메리를 강에다 던져버렸다. 로즈메리가 흘러가다가 강물 속 깊이 가라앉자 즉각 유대인 거리에서 페스트가 사라졌다.

  이날 밤 유대인 거리 드라이브루넨 광장의 집에서 유대인 마이슬의 아내 아름다운 에스터가 숨을 거두었고, 프라하 성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가 비명을 내지르며 벌떡 꿈에서 깨어났다.


  다분히 유럽 동화를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런 환상적인 분위기의 작품을 레오 페루츠는 얼마나 실감나게, 동화적으로 썼는지, 읽는 맛이 대단하다. 이어지는 열네 편의 단편소설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보다 더 부유한 유대인 마이슬과 제국의 황제 루돌프 2세 사이를 왕복 교차하면서 흥미진진하게 엮여 나간다. 조금은 복잡한 과정을 거치면서 한 번도 서로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에스타가 어떻게 제국의 사치스럽고 극도로 낭비가 심한 황제하고 연결이 되는지 차근차근 알게 되니, 그걸 알아가는 것이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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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5-01-21 14: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앗, 지난 주 토요일에 저 이 책 받았습니다. ㅎㅎㅎ 기대됩니다. 책 다 읽고 리뷰 다시 읽으러 올게용!! 폴스타프 님이랑 읽는 책 겹쳐서 좋아요!!!!

Falstaff 2025-01-21 15:17   좋아요 2 | URL
재미있는데요, 크게 기대하지는 마세요. 저도 좋습니다. ㅎㅎㅎ
 
브뤼셀의 한 가족 제안들 29
샹탈 아케르만 저자, 이혜인 역자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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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에 태어난 범띠 여사님 샹탈 아케르만은 소설가가 아니라 평생을 유명한 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 뉴욕시립대학 영화과 교수로 지냈다. 47년간 40편 이상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다. ‘남겼다’라고 쓰는 것은 아케르만이 가지고 있다가 스르르 없어진 필름도 상당 수 있다는 의미다. 보관하는 방법이 필름 원본을 둥근 양철통에 담아 창고에 쌓아두는 것이었던 시절이라 자기 공간이 없는 유명하지 않은 감독한테 이런 일은 그리 드물지 않았으리라. 문학작품으로 분류할 수 있는 두 권의 책을 출판했으며 이 가운데 첫째가 1998년, 48세의 아케르만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쓴 중편소설 <브뤼셀의 한 가족>이다. 몇 년 후 <어머니가 웃는다> 한 권 더 내고, 아케르만의 홈페이지에 가면 시나리오집 두 권을 찾아볼 수 있다.

  워낙 유명한 영화감독이라고 하나, 나는 이이의 영화를 한 편도 본 기억도 없고, 영화에 그리 깊은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샹탈 아케르만’ 대신 ‘아커만’이라는 프랑스 감독이 있는데 이 책을 읽기 바로 직전까지도 아커만이 (이름으로 짐작해) 유대인이고 남성인 줄 알았다. 샹탈 아케르만의 일생은 거의 대부분이 영화감독 커리어로 되어 있어서 작가 아케르만에 관해서는 구할 수 있는 정보조차 없다. 처음으로 영화를 만들고 30년이 지나야 소설을 쓴 아케르만은 감독 생활 내내 감독은 글을 쓸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다.

  유명 영화감독이라 필모그래피야 엄청나겠지만 이 가운데 1975년에 제작한 <잔 딜만, 코메르스가 23번지, 1080 브뤼셀>이라는 작품의 정보가 책 뒤편에 실린 “작가 연보”와 위키피디아가 서로 다르다. 책에서 “당시(1975년) 일간지 『르 몽드』는 이 영화를 ‘영화 역사상 최초의 여성 명작 영화’라 평했다.”라고 쓴 반면, 위키피디아는 영화잡지 “『시각과 음향』은 2022년 ‘가장 위대한 영화’ 비평가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한 최초의 여성”이라 했다. 아케르만은 특이한 페미니즘을 표현한 감독이라 하는데 문장에 신경을 써야할 것 같다. “역사상 최초의 여성 명작 영화”와 “1위를 차지한 최초의 여성”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 아닌가 말이지.


  샹탈 아케르만은 폴란드계 유대인 부모의 맏딸로 태어났다. 나치 치하의 아버지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고, 어머니는 외조부모와 함께 아우슈비츠에 끌려갔으며, 1942년에 외조부모는 수용소의 흰 연기의 형태로 굴뚝을 통해 하늘로 올라갔다. 어머니는 놀랍게도 그곳에서 끝까지 생존했다. 자매들과 함께. 삶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고, 트라우마가 워낙 크면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평소 말도 별로 없고 소극적이던 어머니는 그래도 오래 살다 간다. 아케르만은 평소 어머니와 특히 가까웠으며, 유대인 공동체 일원 답게 자매, 이모 등의 친척, 이웃 유대인들로 이루어진 커뮤니티를 멀리 하지 않은 듯하다.

  <브뤼셀의 한 가족>을 아케르만의 자전적 이야기가 많이 포함된 작품으로 보면, 그렇다고들 하기도 하고, 화자 ‘나’를 아케르만의 어머니로 볼 수 있다. 죽음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 어머니. 그러나 이미 부모와 남편을 떠나보낸 경험이 있는 나이든 여성. 두 번째 수술을 앞에 두고 조금은 심란한 마음을 추슬러야 하는. 큰 딸은 파리의 메닐 몽탕 가의 아파트에서 독신으로, 아이도 없이 혼자 살고, 작은 딸은 남미의 해변도시에서 남편, 두 아들로 이루어진 가족의 엄마로 바쁜 삶을 살고 있다. ‘메닐 몽탕에 결혼도 하지 않고 애도 낳지 않고 사는 딸’이 맏이, 눈치로 보아 샹탈 아케르만이고, 남미의 두 아이의 엄마가 남미가 아닌 미국에 사는 둘째딸 실비안 아케르만 같다.

  오늘 독후감에 허튼 소리가 많은 건, 길지 않은 중편소설 한 편만 달랑 실린 책이기도 하고, 스토리도 거의 없는 작품이라 할 말이 별로 없어서 그렇다. 미리 사실을 고해야 하는데 이제야 밝히는 건 아주 약한 사기수법이기도 하지만 이해해주시라.

  화자 ‘나’는 유대인. 부모가 1942년에 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했고, 자신만 살아남았다. 자매들은 팔레스타인으로 갔거나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갔거나 하여간 멀리 산다. ‘나’는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해야 하는데, 메닐 몽탕에 사는 딸이 기차를 타고 와서 나를 병원까지 데려다 줄 것이다. 그 아이는 남편이 산, 벤츠는 아니고 아우디지만 운전을 잘 하지 못하는 남편이 그래도 사고 한 번 내지 않고 몰고 다니던 남편의 차를, 남편이 죽은 다음에 자기가 파리로 가져갔다. ‘나’나 메닐 몽탕에 사는 딸이나 운전면허는 있지만 운전을 해본 적이 (메닐 몽탕에 사는 딸)거의 없거나 (‘나’)없다. 메닐 몽탕에 사는 딸은 그래서 기사를 고용해 타고 다니다가, 기사가 큰 사고를 내서 차는 파리의 사고차량 보관소에 아직 폐차 처리를 거치지 않은 상태로 놓여 있다고 들었다. 메닐 몽탕에 사는 딸은 책이 끝날 때 즈음해서 기차 1등실을 타고 오는 대신 친구가 파리에서 브뤼셀까지 자기 차에 태워 데려다 주고 자신은 다시 차를 운전해 파리로 돌아갔다.


  ‘나’의 두번째 수술. 두번째 수술이라는 말이 독자에 전해주는 두번째 수술의 위험성. 여차하면 자신의 생명이 끝날 수도 있다는 의미는 ‘나’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만감이 교차하겠지. 그러나 ‘나’는 여기서 죽음을 떠올린다. 역자 이혜인이 해설을 통해 ‘2인칭의 죽음’이라 이야기하는 남편의 죽음. 뇌졸중으로 한 번 쓰러져 입이 돌아간 남편. 이 책 <브뤼셀의 한 가족>을 출판한 해가 1998년. 2년 전에 아케르만은 아버지를 여윈다. 책 속 ‘나’의 남편이. 남편은 몸이 회복되는 것처럼 보이다가 점점 쇠해져 이젠 역시 늙은 ‘나’가 간호하기에 힘이 벅차다고, 메닐 몽탕에 사는 딸이 판단해 남편을 요양병원에 보냈지만, 그곳에 가 볼 때마다 ‘나’의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데려온다. 그걸 알고 메닐 몽탕에 사는 딸이 득달같이 쫓아와, 엄마도 같이 죽고 싶은 거냐고, 야단을 치더니 다시 요양병원으로 데려가는 걸 ‘나’는 막을 수 없었다. 남편을 돌보다 옆구리 뼈에 이상이 생겨서. 요양병원의 건강한 간호사가 마음에 든다. 남편을 번쩍 들어 자세를 바꾸어 준다. 그러나 남편은 다시 입이 돌아가는 것을 시작으로 천천히 죽는다. 메닐 몽탕에서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은 딸이 오고, 남미에서 결혼도 했고 아들도 둘 키우는 딸도 남편과 아들들을 데리고 날아왔고, 멀고 가까운 곳에 사는 친척들도 왔으며, 브뤼셀에 거주하는 유대 커뮤니티 사람들도 빠짐없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빠짐없이 찾아와 조문했다. 팔레스타인 사는 자매 하나 빼고.

  이제 독자는 ‘나’가 1인칭, 즉 ‘나’의 죽음이 ‘나’에게 그리 중요한 것 같지 않다. 오히려 2인칭인 남편의 죽음, 그리고 ‘나’와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연상하는 것. 더 나아가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다중의 죽음, 그게 수용소에서 가스에 질식해 죽은 유대인 연대의 인물들일 수도 있고, 크고 작은 전쟁에서 의미없이 총알받이나 대포밥이 된 청년일 수도 있고, 와중에 떨어진 폭탄이 터져 죽은 여성, 노인, 아동일 수도 있지만 결코 유대인의 무기에 죽은 팔레스타인 거류민일 수는 없는 사람들의 죽음으로 확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다시 ‘나’가 수술을 위해 입원해야 하는 시기. 이번에도 메닐 몽탕에서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낳지 않은 채 혼자 사는 딸과 남미에서 결혼도 하고 아들도 둘을 낳아 키우는 딸이 가족을 다 데리고 ‘나’를 보러, 응원하러, 완쾌를 빌어주려고 왔다.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를 한다. 많은 이야기. 개중엔 진실이 아닌 것도 있고, 진실이긴 하지만 ‘나’가 아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도 있고, 사실이 아닌 것도 있고, 사실이 아니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고, 처음부터 거짓말인 것이 확실하긴 해도 좋은 의미로 하는 거짓말도 있다. 이렇게 2인칭 또는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혹시 죽음, ‘나’의 2인칭과 가까운 사람들이 벌써 경험한 죽음으로 이끌지도 모를 수술 바로 전에 ‘나’를 위안하기 위해 모여 있다.

  이게 다다. 내 취향에 잘 들어맞는다. 별점 다섯을 줄 정도로. 그러나 주의하실 필요가 있으니, 진심으로 말해서 당신한테는 아닐 수 있다. 그럴 위험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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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6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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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칠리아 람페두사의 11대 영주이자 12대 팔마 공작Duke인, 주세페 토마시는 시칠리아 팔레르모에서 1896년에 태어났다. 이 정도면 정말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거다. 좋았겠다. 하지만 귀족도 마냥 다 행복할 수는 없는 거라서, 집안 식구들은 귀족 값을 하느라 소위 예절과 법도를 내세워 부모자식 간에 살뜰한 애정을 표하지 않았다. 냉랭한 가족 사이에서 자란 주세페 토마시는 어린 시절부터 말이 없고, 고독하고, 수줍음이 많고, 조금은 대인기피적 성격을 지녔다. 혼자 뭐 했느냐고? 물론 극소수의 친구는 있었지만 대부분 책을 읽고 사색에 빠진 소년이었단다.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것보다 사물과 같이 있는 편을 좋아했던 소년은 죽기 3년 전인 1954년에 깨어있는 16시간 가운데 열 시간은 혼자 보냈다고 썼을 정도. 이 지독한 외골수 대인기피증 환자가 유일하게 쓴 소설이 <표범>이다.

  1896년생이니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엔 18세. 당시 기준으로 전쟁하기 딱 좋은 나이다. 19세이던 1915년에 드디어 징집당해 포병 사병으로 있다가, 거 별일이다, 영주의 직계 자손이자 현 공작의 외아들이 사병으로 뽑혀 간 게 말이 돼? 하여간 포병 사병이었다가 1917년에 장교 교육을 받은 다음에야 중위 계급장을 달고 카포레토 전투에 투입되었다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포로로 잡힌다. 빈 근교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토마시는 전쟁 막바지에 그곳에서 탈출, 걸어서, 즉 알프스를 두 발로 넘어 돌아왔다고 한다. 좀 궁금하다. 정말로 (물론 해협 또는 나폴리에서는 배를 이용했겠지만) 반도의 장화끝이나 나폴리까지 사람을 꺼리는 성격의 귀공자가 걸어서 갔을까? 아니면 국경만 넘어 엄마한테 전보를 쳐 기차를 탔을까? 뭐 중요한 건 아니다.

  유일한 소설작품 <표범>과 연결할 수 있는 작가의 바이오는, 여름에는 몇 달간 엄마의 소유였던 시골 팔라초에서 지냈다는 것. 팔라초. 영주의 영지 안에 있는 저택을 말하는데, palazzo를 굳이 우리말로 하자면 궁전이나 전당 정도. 대략 규모를 말하자면 팔라초 건물의 길이가 2백 미터 또는 그 이상이라니 궁전이라고 해도 그리 틀리지 않은 규모이다. 작품에서는 살리나의 영주 파브리초 코르베라가 식솔들과 조카 탄크레디를 데리고 여름을 보내려 돈나푸가타 팔라초에 가서 가을까지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 제일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주세페 토마시가 19세기에 태어났으니 이미 귀족의 시대, 즉 지주-소작인으로 대표하는 토지 매개 부르주아의 시대는 종막을 고하고 있어서 앞 문단에서 거론한 소설 속 사실상의 주인공 살리나 영주 역시 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걸 알고, 그것을 수용하며 지낸다. 가문의 재산도 이미 많이 사라졌고, 사라진 재산은 새시대에 맞는 두뇌가 팽팽 돌아가는 신진 사업가의 재산으로 귀속이 되던 시기에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던 보잘것없는 신분의 신흥부자와 혼인을 통한 친척의 연을 맺기도 한다. 주인공 살리나 영주의 모델이 작가의 증조부였다고. 증조부를 거쳐 조부, 부친 그리고 자기 대에 와서는 거의 모든 재산이 사라진 상태였는데도, 여전히 팔레르모의 팔라초는 토마시가 소유하고 있었다니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는 게 사실은 사실인 모양이다.

  몇 가지가 더 있지만 독후감이 너무 길어진다.


  1860년 5월. 첫 장면은 팔레르모에 있는 살리나 가문의 저택이다. 이 당시 시칠리아는 부르봉 왕조 치하에 있었다. 사실 시칠리아 사람들은 자신을 이탈리아 국민이라기보다 시칠리아인이라는 생각이 더 강했다. 그러나 시칠리아는 말 그대로 지리적인 여건 때문에 이 나라한테 터지고 저 나라한테 치이며 자기들 생각으로는 2천년 동안 식민지로 지내왔던 터이다. 이건 작중 살리나 영주 돈 파브리초의 대사를 읽고 새로이 알게 된 내용이다. 그리하여 돈 파브리초한테 더 중요한 것은 시칠리아를 누가 다스리는지가 아니라 어떤 형태의 경제구조인가 하는 점이었다. 시대는 리소르지멘토Resorgimento 즉 가리발디에 의한 이탈리아 통일 운동이 한참일 때였다. 이미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 정치, 경제적으로 밀려오고 있다는 것을 체감한 돈 파브리초는 자신이 속한 계급이 몰락하고 가문의 재산도 사라지고 있는 것을 바라만 볼 뿐 대응책을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이였다.

  키가 매우 크고 힘도 장사이지만 결코 비만하지 않은 돈 파브리초. 어려서부터 배운 귀족의 범절을 지키기 위하여 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대신, 식사를 하며 포크나 숟가락을 가볍게 구부려버리는 습관이 있어 팔레르모의 은식기 세공업자는 돈 좀 만졌다고 한다. 고인이 된 어머니 카롤리나 영주부인은 올리브색 피부와 금발머리를 한 독일인으로 아들에게 자부심과 지성을 물려주었고, 아버지는 기꺼이 경솔함과 호색가의 기질을 넘겨주었다. 근데 시절이 19세기 중엽. 대 귀족 돈 파브리초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아내 마리아 스텔라는 침대 위에서 남편의 품에 안기기 전에 반드시 십자성호를 그어 김을 빼놓는 것으로 시작해, 어느덧 절정에 올라 까무룩 한 고비 넘어갈 찰나가 되면 이렇게 콧소리를 냈다고 한다.

  “예수 마리아!”

  잘 하다가도 저절로 죽겠지? 근데 이게 다가 아니고, 결혼을 해 아이 일곱을 낳았는데, 남편 돈 파브리초는 아직 아내 마리아 스텔라의 배꼽도 한 번 못 봤다는 거다. 돈 파브리초는 한탄한다, 이게 말이 되느냐고. 근데 그걸 왜 독자한테 물어봐? 자기부터 반성을 해야지. 마리아 샤워할 때 등 한 번 밀어줘 봤어? 에휴, 말을 말자.

  반면에 팔레르모에 있는 미모의 비싼 매춘부 마리안니나는 정말로 엑스터시에 도달했는지 그냥 고객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그랬는지 한 고비를 넘어갈 순간 “오, 나의 영주님!” 이렇게 소리쳤다니 이 아니 색다르겠냐고. 기분도 좋고 말이지. 다시 말하는데 19세기 중엽의 대 귀족 입장에서. 키 크고 힘 좋은 남자의 솥뚜껑만한 손이 완력을 쓸 때와 포크와 숟가락을 휘어버릴 때만 유용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여인을 애무할 때는 더 섬세했는데, 이 순간 말고도 천체망원경으로 밤하늘을 탐색하며 렌즈를 조절할 때는 더더욱 세밀했다. 영주는 날 때부터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타고나, 이것을 천문학 연구에 사용했다. 영주의 천문학은 당시 부르봉 왕가의 시칠리아 총독은 물론이고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영토로 하고 1860년 현재 프란체스코 2세가 다스리는 양시칠리아 왕국의 자랑일 정도였다. 평생 화성과 목성 사이의 소행성 두 개를 발견해 각 살리나와 즈벨토라고 명명했는데 딸과 키우는 개 이름이었다나. 그러니까 살면서 손끝에 물 한 방울, 흙 한 번 묻히지 않고 소작인들이 바치는 소작료로만 가지고 하고 싶은 일 빠짐없이 다 하고 온갖 사치를 향유하는 전형적 봉건 농촌 부르주아였다는 말씀.

  이 영주한테 탄크레디라는 이름의 조카가 있다. 활발하고 다른 계급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는 화통한 성격의 잘생긴 청년. 영주는 자기 장남, 극도로 우울해 보이는 수척한 얼굴의 프란체스코 파올로 공작보다 평소 사랑했던 누나의 아들인 탄크레디를 더 좋아했다. 누나는 이웃한 영지의 영주와 결혼했다. 그러나 거대한 재산을 단숨에 말아먹은 매형은 저택 한 채만 달랑 남기고 죽어 탄크레디 혼자만 달랑 남아, 영주가 후견인으로 조카를 말 그대로 부족함 없이 키웠다. 그러나 피는 속이지 못한다고 별로 건전하지 못한 청년들과 어울리며 도박을 즐기고 바람직하지 않은 여자들과 어울리는 것도 영주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조카를 향한 애정이 조금이라도 준 건 아니다.

  어느 날 탄크레디가 외삼촌을 찾아와 말한다. 이제 떠나겠다고. 가리발디의 붉은 셔츠단에 들어가 왕조를 무너뜨리는 데 힘을 쏟기로 맹세했단다. 탄크레디는 왕정주의자. 근데 부르봉 왕조를 무너뜨리겠다고? 그렇다. 대신 샤르데냐 왕국을 위해 싸우겠다는데, 복잡한 이탈리아 통일운동사에서 아마 훗날 통일의 기반 역할을 할 것으로 기억한다. 잘생긴 탄크레디는 사실 알고보면 기회주의자일 수도 있다. 정치적인 면도 그렇고, 연애관계도 마치 영주의 둘째 딸 콘체타와 결혼할 듯하다가 정작 진짜 결혼은 신흥부르주아로 등장하는 옛 시절의 천민이자 난데없이 남작의 후계를 자칭하는 돈 세다라의 아름다운 외동딸 안젤리카와 해서 훗날 장인의 재산을 다 거머쥐어 아빠가 잃어버린 팔코네리 가의 재산을 충당한다.

  그러나 소설은 특정 등장인물의 성쇠나 인생을 보여주는 것에 있지 않고, 작가 자신의 계급인 대 귀족의 몰락 과정을 그 쓸쓸함을 차분하게 소묘한다. 따라서 진정한 주인공은 살리나의 영주 파브리초 코르베라나 탄크레디 팔코네리가 아니라 귀족 계급 자체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망할 계급이 당연히 망하는 장면이다. 마지막 진정한 귀족이 쓴, 그것도 잘 쓴 소설이라 마치 독자 자신도 작가를 따라 스스로 마지막 귀족이 된 듯, 이 계급이 서서히 망가지는 장면을 읽으면서 속으로 허전하기도 하고, 마찬가지 말이지만, 쓸쓸하기도 할 터이나, 독자여, 특히 당신이 진보의 분자라면 현혹되지 마시라. 망가질 계급이 당연히 망가진 일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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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1-17 06: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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