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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돌다리 밑에서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92
레오 페루츠 지음, 신동화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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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열다섯 편과 에필로그로 되어 있는, 연작 장편일 수도 있고 단편집으로도 읽을 수 있는 책. 이 책은 1924년에 쓰기 시작해 1951년에 완성해 53년에 출간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무려 27년에 걸쳐 작품을 완성했다는 이야기인데 1938년에 나치의 오스트리아 합병 후 팔레스타인으로 건너가 유럽인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기간이 있었다고 해도 상당히 오랜 기간이다. 짐작하자면 한 이야기를 27년에 걸쳐 끊어내고, 갈고, 다듬고, 빛을 내는 데 27년이 걸렸다기보다 중심 또는 주인공을 둘러싼 이런 저런 에피소드를 오스트리안 유대인으로 20세기 초중반 험한 시기를 관통하면서 생각날 때마다 단편 분량으로 써 놓은 것을 말년에 다시 정리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면 저절로 연작 장편이 되겠지. 나는 이 작품을 당연히 하나의 장편소설로 여겨 초장부터 메모를 하며 읽고 있다가, 첫 장부터 장편소설 치고 놀라운 속도감과 장면전환에, 이거 이렇게 3백여 페이지를 밀어붙일 수 있을까, 경기를 했거니와, 오히려 단편 연작, 즉 연작 장편이란 걸 알게 되니 차라리 안심이 되던 거였다.
다 읽고 생각하니까, 에필로그를 빼고 열여섯 편 모두 개별적인 스토리를 갖춘 단편소설의 외형을 갖추어 충분하게 즐길 만하다. 하지만 이왕 읽을 거면 애초 작가가 27년에 걸쳐 쓰고 순서를 정한 대로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는 편이 훨씬 좋겠다는 거. 읽어가면서 아하, 그렇군. 앞 장면이 이래서 나온 거구나, 하나하나 알아가는 재미가 썩 좋다는 말씀. 이왕 이 책을 읽으려면 책방의 책광고나 이 책 뒤표지에 써 있는 작품소개 같은 것을 일체 읽지 말고 시작하시라. 즉, 완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상태에서 작가가 물감 묻힌 붓이 지나가는 대로 그려질 그림을 감상하시는 편이 훨씬 재미있을 터이니.
지난번에 레오 페루츠를 검색하다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서 메모를 해두었는데, 이번에 안 써먹으면 기회가 없거나, 있더라도 내가 잊을 거 같아 소개한다. 페루츠하고는 한 세대가 차이가 나는 오스트리아 작가 프리드리히 토르베르크는 페루츠의 작품 스타일을 이렇게 표현했다.
“프란츠 카프카와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은 불륜의 결과.”
페르츠가 카프카보다 한 살, 크리스티보다 여덟 살 많다. 그래도 어떤 의미인 줄은 알겠다.
작품은 1589년 가을의 보헤미아, 프라하 유대인 마을에서 시작한다. 이른바 게토인데, 게토Ghetto. 십자군 전쟁 시절부터 유럽인들에 의한 유대인 학살이 심각해지자 유대인을 보호하기 위하여 주교의 명령으로 유대인 정착촌에 담장을 두르고 자치권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었던 것이 애초에 게토를 만든 목적이었다. 프라하의 유대인 정착촌은 작품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가 죽은 후 벌어질 예정인 30년 전쟁이 되어야 본격적인 게토로 담장을 두를 것이라, 작품 속 열다섯 편의 단편소설에서는 궁중의 고급관리들도 남의 눈에 띄는 것만 애써 무시하면, 돈을 빌리거나 뜯어내거나 갈취할 목적이 아니기만 하면 천한 유대인 마을을 찾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냥 아무 진흙 골목으로 들어가 문만 열면 되는 시대였다.
여기까지 써 놓고 작품의 스토리를 보이기 망설여진다. 위에서 인용했듯이, 페루츠의 스타일이 정말로 카프카와 크리스티가 벌인 작지만 사소하지 않은 불륜의 결과물이라면, 특히 엄마가 애거서 크리스티라면, 결말을 유추할 수 있는 어떤 빌미도 언급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쯤에서 독후감을 뚝 잘라 버리기도 아쉽다. 좋다. 제일 앞에 배열한 작품 <유대인 도시의 페스트>만 소개하기로 하자.
16세기 말. 유럽은 반세기 전에 혜성같이 등장한 가톨릭 이단 사제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주창해 소위 신교가 들불처럼 번졌고, 이에 못지 않은 기세로 동쪽에서 시작한 흑사병, 역병, 페스트가 창궐, 앞으로도 몇 백 년 동안 유라시아 대륙의 인류 수천만 명을 거덜 낼 계획이었으며, 작품을 시작하는 1589년의 프라하에서도 숱하게 많은 사람들을 까맣게 태워 죽이고 있었다.
프라하의 유대인 도시, 라기 보다는 유대인 지역에 광대 두 명이 살았다. 곰의 탈을 쓰고 곰 흉내를 내며 곰 춤을 추는 코펠. 그리고 바보 예켈레. 유럽 문학에 등장하는 광대들은 어리석고, 보잘것없으며, 미운 털이 박힐 만한 짓들만 골라 하는 바람에 주인과 객들한테 얻어 터지기를 물 마시듯이 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이들의 거친 농담과 우스꽝스러운 짓은 거의 언제나 지혜롭고도 날카로운 해학과 역설을 내포하는 바람에, 언제나 내가 이야기하듯, 광대와 점쟁이들이 하는 말과 예언은 틀림없이 들어맞는다. 이 작품 속의 광대 코펠과 예켈례는 그 정도까지 현명한 소위 ‘유로지비’ 수준은 아니고 하여간 이들, 극의 광대나 점쟁이들 수준이 되어야 볼 수 있을 죽은 아이들을 목격하는 것으로 한 부유한 유대인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사이에 얽힌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광대들의 주 수입원이 유대인 결혼식에 가서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도 하고, 우스꽝스러운 짓을 해 하객들을 즐겁게 해주는 일이었는데, 페스트가 창궐하는 통에 유대인들도 양심이 있어 사람이 죽어 나가는 마당이니 애도나 하자 싶어 결혼식을 하지 않는 바람에 굶기를 밥 먹듯이 하는 신세가 됐다. 이들이 머리 굴리기를: 유대인 공동묘지에 그만큼 새 무덤이 생겼을 터이니, 조문객들이 망자의 영혼이 먼 길 가는 데 쓰라고 동전 푼 깨나 비석 위에 올려두었을 터, 그거라도 가져다 밥 사먹자.
그래 유대인 공동묘지에 갔더니 정말 새 무덤이 엄청 많고, 묘비마다 다만 몇 푼이라도 대부분 동전이지만 가끔은 무려 은화도 있어서 이게 무슨 횡재, 싶었건만 이때 하얀 내복을 입은 아이들이 새 무덤 위에서 흰 빛을 내며 춤을 추고 있어서 기겁을 해 거품을 물고 도망을 쳤다. 두 광대는 자신의 목숨이 여태 붙어 있는 것이 자기들 눈으로 본 것을 알리라는 신의 뜻임을 깨닫고 위대한 랍비를 찾아가 본 것을 이실직고한다. 동전 몇 푼 얻은 것도 내놓지는 않았지만 숨기지 않고 얘기한 건 물론이다. 어두운 밤에 지혜의 서른두 개 숨은 길을 지났으며 마법으로 변신하여 인식의 일곱 개 문을 통과한 고매한 랍비는 이 유대인 구역에 죄인이 하나 숨어 매일매일 악행을 저지르고 있어서 대 역병이 도시를 덮쳤고, 이 죄인 때문에 죽은 아이들의 영혼이 무덤 속에서 평화를 찾지 못하는 거라고 설파했다.
위대한 랍비는 광대들을 다시 공동묘지로 가게 해서 그게 누구인지 알아오라고 시켰고, 아이의 유령 하나를 꼬여 물어봤더니, “하느님 외에 그걸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 바로 당신이예요.”라는 대답을 받아왔으니, 단 한 사람이 광대가 아니라 위대한 랍비, 자신을 일컫는 거란 걸 단박에 알아차린 고매한 랍비는 홀로 집을 나와 게토의 밤거리를 걸어 강으로 내려갔고, 물가를 따라 어부들의 오두막을 지나 돌다리에 이르렀다.
돌다리 밑에는 빨간 장미 한 송이가 달린 장미 덩굴이 있었고 옆 땅에는 로즈메리가 자랐는데, 장미 이파리가 로즈메리의 흰 꽃에 닿을 정도로 서로가 서로를 꽉 휘감고 있었다. 고매한 랍비는 몸을 숙여 로즈메리를 뿌리째 뽑아내 간음을 저지른 여자의 머리에서 마법을 풀고 로즈메리를 강에다 던져버렸다. 로즈메리가 흘러가다가 강물 속 깊이 가라앉자 즉각 유대인 거리에서 페스트가 사라졌다.
이날 밤 유대인 거리 드라이브루넨 광장의 집에서 유대인 마이슬의 아내 아름다운 에스터가 숨을 거두었고, 프라하 성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가 비명을 내지르며 벌떡 꿈에서 깨어났다.
다분히 유럽 동화를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런 환상적인 분위기의 작품을 레오 페루츠는 얼마나 실감나게, 동화적으로 썼는지, 읽는 맛이 대단하다. 이어지는 열네 편의 단편소설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보다 더 부유한 유대인 마이슬과 제국의 황제 루돌프 2세 사이를 왕복 교차하면서 흥미진진하게 엮여 나간다. 조금은 복잡한 과정을 거치면서 한 번도 서로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에스타가 어떻게 제국의 사치스럽고 극도로 낭비가 심한 황제하고 연결이 되는지 차근차근 알게 되니, 그걸 알아가는 것이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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