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둥이와 개들의 싸움 20세기 프랑스 희곡선 17
베르나르마리 콜테스 지음, 이선형 옮김 / 연극과인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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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작 나는 인상깊게 읽지 못했지만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로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극작가인 베르나르-마리 콜테스가 쓴 희곡. 1948년 와인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모젤 주에 있는 도시 메츠에서, 인도차이나와 알제리 전쟁 등에 참전했던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알제리 전쟁의 영향을 받았다고 이선형이 쓴 역자 후기에 적혀 있다. “알제리 전쟁은 그의 삶 속에 강하게 작용한다.” 어떻게 작용을 했을까? 프랑스 군인이 무려 1만2천 명 전사했다고? 이 가운데 외인부대를 뺀 순수 프랑스 인은 몇 명이나 되는지 모르지만, 알제리 전쟁에서 프랑스가 잡아 죽인 알제리 사람의 수가 백만이 넘고 70만이 넘는 사람을 투옥해 갖은 고문을 자행한 건 물론 어린 콜테스는 몰랐겠지.
 하여튼 소년기를 벗어나기도 전에 콜테스는 거의 모든 작가가 그렇듯이 몰리에르, 랭보, 데카르트, 디드로, 셰익스피어, 러시아 작가들을 비롯한 문학작품과 당시에 가장 유명했던 영화인 <벤허>, <십계>, <스파르타쿠스>, <로빈 후드>를 거쳐 프리츠 랑, 오손 웰스, 알프레드 히치콕, 엘리아 카잔, 페데리코 펠리니,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등 명장의 작품들에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목록을 보고 짐작하건데 콜테스는 아예 처음부터 연극, 영화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고, 다행스럽게도 그 방면으로 살 길을 찾은 것처럼 보인다. 아, 세상은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말씀이지. 스물여섯 살이 된 1974년에 공산당에 입당을 하고, 75년엔 우울증 증세로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가, 1976년 기어이 마약 중독까지 경험하고 만다. 이때부터 동성애 성향이 있었는지 자신의 마약 경험을 동성애 잡지 『마스크』에 기고를 한다.
 서른 살이던 1978년에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여행을 하더니 다음 해엔 세계적으로 가장 정세가 불안했던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 과테말라, 니카라과 등을 여행하면서 스페인 말도 통하지 않는 과테말라의 벽지에 틀어박혀 희곡 한 편을 쓰니 그것이 바로 <검둥이와 개들의 싸움>이다. 이 작품은 1983년 프랑스 오드센 주 낭테르의 아망디 극장에서 세계 초연을 한다. 1980년대 초중반에 HIV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으로 보이는 콜테스는 당시만 해도 걸리기만 하면 곧 죽어야 하는 역병이라서 겨우 열세 편의 작품만 남기고 마흔한 살, 1989년에 짧은 삶을 접고 말았다. 나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4번으로 출간한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를 통해 표제작과 <숲에 이르기 직전의 밤>만 읽어보았는데, 앞서 얘기했듯이 깊은 인상은 받지 못했다. 그러다 이번에 출판사 연극과인간의 ‘20세기 프랑스 희곡선 17’로 낸 <검둥이와 개들의 싸움>을 읽고 콜테스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지금, 작품활동의 사실상 마지막 해였던 1988년 작인 <로베르토 쥬코>를 집어들었고, <서쪽 부두>가 절판인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역자 이선형은 해설에서 콜테스의 특징으로 ① 성향이 반문명적이며 무정부주의적이며 제의적이며 원시적이고, ②연극이 시적이고 주술적인 언어로 축조되어 있다는 점이라고 썼다. 성향에 대한 의견은 동의하지만 시적이고 주술적인 언어로 축조되었다는 건, 원어가 아니라 번역문으로 읽는 독자가 어떻게 맛을 알겠는가. 그렇다. <목화밭…>에서 내가 감각하지 못하고 그냥 넘어간 것도 지금 생각해보니 반문명, 무정부, 제의적, 원시적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해서 였을 수 있겠구나 싶다.
 네 명의 등장인물이 두 개의 사건으로 극을 만들어간다.
 장소는 가상의 아프리카. 프랑스 건설업체가 다리를 완공하지 못한 상태의 현장이다. 젊디젊은 현장 노동자 한 명이, 당연히 흑인인데, 시간을 채우지 않고 현장을 이탈하려 해서, 엔지니어인 칼이 안 된다고 제지했다. 그랬더니 어린 검둥이가 침을 찍 뱉았고, 그게 칼의 신발 앞 십 센티미터 앞에 탁 떨어졌다. 입술을 조금만 더 들고 침을 뱉았으면 신발 콧잔등에 맞았을 것이고, 턱을 약간만 들었더라면 바지에 묻었을 터이며, 척추를 삐긋 휜 상태였다면 여지없이 칼의 얼굴을 향했을 것이다. 이후 사실 여부는 다음으로 하고, 칼이 주장하는 바를 완전히 믿는다면, 엄청난 비가 내렸고 자기가 배 위에 올려놓고 잠을 자는 개 뚜밥이 검둥이를 쫓아갔는데, 때마침 번개가 치더니 뚜밥이 픽 쓰러졌고, 이어서 검둥이도 픽 쓰러지더라는 것이다. (서보 머그더의 <도어>에서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나무를 때린 번개가 이들을 태워버렸다는 얘기. 그리고 바로 이 순간에 커다란 트럭이 속력을 전혀 줄이지 않고 돌진하고 있다가 때마침 그 자리에서 도로 쪽으로 쓰러진 검둥이를 깔아버렸다며, 어린 흑인 원주민의 죽음은 별개로, 검둥이들이 자기 개 뚜밥을 잡아먹었을 거라 불평을 늘어놓는다.
 좋다. 일단 독자의 의무로 초장에 소개되는 칼의 주장을 믿기로 하자. 그러나 문제가 있으니, 죽은 지 하루 안에 매장을 해야 영혼이 구원받는다는 이슬람을 믿는 북아프리카 사람들의 풍습(친기즈 아이트마토프, <백년보다 긴 하루> 참조) 또는 콜테스의 전매특허인 반문명적, 원시적 주술에서 비롯한 것인지는 몰라도 어린 흑인의 시신을 찾으러 정체가 모호한 흑인 알부리가 나타나 시신을 돌려달라고 공사장의 현장소장인 ‘오른’에게 요구한다. 아프리카 토착어인 우어로프 어를 쓰지만 프랑스어와 영어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알부리는 말 그대로 정체가 모호하다. 어떻게 보면 ‘개들’, 복수형이니까 진짜 개 뚜밥을 포함한 개 선호지역의 인간들, 쉬운 얘기로 희곡에 등장하는 모든 백인들과 대척점에 선 토종 원주민일 수도 있고, 그들의 토속신앙적 토템의 의인화일 수도 있다. 알부리는 시신을 되찾지 못하면 밤마다 주검의 어머니가 현장을 배회하며 울부짖는 소리를 멈출 수 없을 것이라 경고하고, 사건 또는 사고라고 주장하는 이미 벌어진 일을 무마할 책임이 있는 현장소장 오른은 사고의 대가로 150달러를 제시하며 중재자 알부리에겐 2백 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한다. 즉, 나무 그림자에 숨어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이 신비한 중재자에게 중계료 명목으로 50달러를 주겠다는 것.
 사건, 또는 사고를 원만하게 처리할 수 없게 만드는 건, 시신이 어디 있는지는 알았는데 이젠 찾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칼이 처음엔 쓰레기장 꼭대기에 갖다 버렸고, 마음에 들지 않아 연못에 빠뜨렸다. 거기는 너무 얕아 가라앉지 않아서 다시 건져 하수도에 빠뜨리고 말았다. 근데 하수도도, 이게 지하에서 흐르는 물이라, 시신을 찾으러 가보니 시체는 벌써 밀려드는 분뇨에 밀려 어디로 떠내려갔는지 보이지 않고 쇠똥만 잔뜩 묻힌 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

 

 다른 사건은 환갑을 맞은 현장소장 오른이 휴가 동안 파리에 가서 젊은 아가씨 레온을 아내로 삼기로 했고, 색시를 피부색 흰 여자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아프리카 공사 현장에까지 데려온 것. 현장엔 피가 펄펄 끓는 청년 엔지니어 칼이 굵은 작대기를 짚고 서 있었으며, 어떻게 해서인지는 모르지만 레온이 두려워하면서도 스스로 그들 부족의 일원이 되고 싶어하는 현지인 알부리를 만나게 된다. 독자는 ‘젊은 여성’ 레온이 등장할 때부터 ‘젊은’ 칼과의 사이에 불똥 튀기는 연애사건이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지만 그건 정확하게 김칫국이고, 오히려 알부리의 부족원이 되고 싶어 하는 레온의 행위에 경악을 하게 된다. 물론 어떤 행위인지는 안 알려드린다.
 여기에 하나 더. 이건 작품을 다 읽고나서 해설을 봐야 알 수 있었던 것으로, 레온과 알부리의 대화 장면이었다. 읽는 중에 약간의 의심이 들긴 했다. 레온이 알부리에게 독일어로 말을 하는 반면, 알부리는 레온이 사용하는 독일어를 다 해독할 수 있으면서도 자신은 레온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아프리카 토속어인 우어로프 어를 쓴다는 점. 레온은 프랑스에서 낳고, 자라고 여태까지 파리에서 살다 이제 막 아프리카에 도착한 여성. 이이가 독어를 쓴다는 것까지만 놀랐었다. 근데 해설을 읽어보니 레온은 차츰 알부리의 우어로프 어를 이해하는데, 이는 레온의 전생이 알부리와 관련이 있으며, 알부리는 괴테의 시 <마왕>에서 주인공 격인 악마의 이미지라고 한다.

 

오랜만에 재미있는 희곡을 읽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다. 이런 작품은 책 뒤에 실린 해설까지 통독을 해야 제 맛을 알게 된다. 물론 작품해석이 항상 옳은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전문가가 제대로 짚어준다면 그게 표준적 독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잘 읽었다. 잘 읽은 김에 오늘은 맛난 음식에 쐬주 한 병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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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12-28 10: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읽으셨구나! 전 이거 앞 부분 읽다가 쉽게 읽을 작품이 아닌 거 같아서 일단 내려놨어요. ㅎㅎㅎ 쐬주를 부르는 작품이군요?! 저도 곧 다시 도전하겠습니다요~

Falstaff 2021-12-28 10:45   좋아요 2 | URL
옙. 근데 저도 이거, 정말 쉽지 않았어요.
먼저 한 번, 무슨 얘기 하는지도 모르면서 읽고, 그래도 도무지 모르겠어서, 역자 해석 보고, 다시 한 번 읽으니 그때서야 재미있더라고요. ㅋㅋㅋㅋ

참, 인생이라니. 이 정성 가지고 공부를 했더라면....씨.....
 
켈리 갱의 진짜 이야기
피터 케리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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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작 <오스카와 루신다>로 1988년에 처음 부커상을 받은 피터 케리에게 부커상을 두 번 받은 네 명의 작가 가운데 한 명이 되게 해준 작품. <오스카와 루신다>와 마찬가지로 19세기 오스트레일리아의 빅토리아 주를 배경으로 한, 개척시대 호주 소설이다. 케리의 작품은 딱 두 개 읽었지만 굵직한 상을 받게 해준 대표작으로 미루어, 이이가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코맥 매카시 같은 책을 쓰지 않았을까 싶다. 내 기준으로 얘기하자면 그래도 매카시보다 표현이 훨씬 부드러워 읽으면서 사납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예를 들어 총상을 입은 상처를 불에 달군 쇠로 불소독 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매카시는 십육세 소년 존 그래디 콜 스스로 권총의 총열을 발갛게 데워 총알이 뚫고 지나간 상처에 쑤셔박는 장면을 연출한 반면, 케리는 열일곱 살 먹은 댄 켈리가 총상을 입어 곪은 부위에 I 자형 낙인을 달궈 불소독을 할 때, 이왕이면 형 네드가 해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한다.

 

  책을 다 읽고 ‘네드 켈리 Ned Kelly’를 검색해보니 정말로 실존했던 오스트레일리아 인물이다. 바이오그래피를 읽어보니 피터 케리가 쓴 소설 내용과 일치한다. 1854년, 아일랜드 남부의 농촌 소도시 티퍼레리에서 죄를 짓고 저 멀리, 지금은 테즈메이니아 섬이라고 불리는 오스트레일리아 벤 디멘스 랜드의 감옥으로 이송되었다가 출소해 빅토리아 주에 와서 살던 빨강머리에 주근깨투성이 남자 존 ‘레드’ 켈리의 여덟 자식들 가운데 세번째 자식이자 첫번째 아들로 태어난다. 테즈메이니아 출신 리처드 플래너건의 책들 속에 야생을 잘 보존하고 있는 섬의 풍광이 잘 나타나 있기도 한데, 야생이란 것이 보기에 좋은 것이지 속에서 살라고 하면, 그것도 그토록 울창한 밀림 속에, 오직 그 섬에서만 사는 고립종 야생동물이 숱한 곳의 감옥 안에서 사는 건, 지옥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네드의 아버지는 어떠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시는 경찰들과 엮이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리라. 그게 마음 먹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문제긴 하지만.
  네드가 아직 열살도 되지 않은 유년시절에 아버지를 관찰하고 있던 오닐 경사를 통해 어떻게 아버지 존 ‘레드’ 켈리가 밴 디멘스 랜드를 거쳐 빅토리아 주에 와 정착을 했는지 알게 된다. 티퍼레리의 한 농장주가 잉글랜드 법으로 적법하게 소작인을 해고해버린 일이 생긴다. 이에 티퍼레리의 농부들은 회합을 갖고 해고의 적법성을 떠나 이의 부당성에 관하여 토론을 했고, 지주에 대한 징계를 결의를 하고 이를 실행했는데, 좀 과했다. 농부들은 지주의 집에 쳐들어가 눈에 뭐가 씌었는지 집을 홀랑 불태우고 지주의 가족들을 여자, 아이들까지 보이는 족족 학살해버린 것. 이때 가담했던 농부 가운데 한 명이 젊디젊은 존 켈리였다. 이로써 1788년부터 80년간 기록된 무려 16만2천 명의 이송 죄수의 명단에 존의 이름도 쓰이게 된 것이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위대한 유산>을 보면 이송 죄수가 다시 영국 땅을 밟으면 죄수를 사형에 처했다고 하지 아마? 토마스 하디의 <캐스터브리지의 시장>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던가, 아니던가.
  책을 읽다가 보면, 불운한 네드 켈리의 인생이 아버지 존과 은근히 비슷하게 닮았다. 아버지 존은 아일랜드 농촌에서 잉글랜드에서 파견한 식민지 관리와, 잉글랜드가 함부로 만들어 반포한 법령과, 기존의 불문율을 싹 무시하고 새 법령을 지극히 일방적으로 적용하려는 (잉글랜드 이민자인지 아일랜드 토박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지주에게, 다른 소작인들과 마찬가지로 핍박을 받고 있다가, 동료 소작인이 소위 ‘합법적인’ 그러나 불문율에 의하면 ‘가혹하게’ 또는 ‘있을 수 없는 방법으로’ 소작을 떼는 것을 보고, 일종의 농민 봉기를 일으킨 거였다. 물론 지주를 징계하는 방법이 과하긴 했다. 지주 살해야 19세기 문법으로 크게 이상하진 않지만 여성과 아이까지 죽인 건 스스로의 목숨으로 갚아야 할 만한 범죄였으리라. 아들 네드는 소년 시절부터 중범죄 중에서도 중범죄자들이 수용되는 벤 디멘스 랜드 출신의 존 켈리를 애초 잠재적인 범죄자로 낙인 찍어 수시로 밀착감시를 해오던 공권력, 경찰들과 순회법원 판사의 폭력과 거짓 고발, 법원에서의 위증 등에 저항하다 자연스레 범죄조직 켈리 갱단의 두목이 되어, 경찰을 살해하고 은행을 터는 중범죄자가 되었다. 억울한 희생자들이란 이야기인데, 맞는 말이다. 세상에 이런 스타일의 범죄자 거의 대부분은 동시대에 존재하던 악법, 악습, 권력자의 악행에 저항하다 본의가 왜곡된 것이었다.

  작가 피터 케리가 네드 켈리와, 네드가 이끄는 세 명, 친동생 댄 켈리, 상습 아편 복용자 조 번, 댄의 친구이자 네드 숭배자 스티브 하트를 뭉쳐 “켈리 갱”이라 일컫는, 명약관화한 산적무리를 일방적으로 그들의 편에 서서 서술하려 마음먹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가 선택한 것은, 어쨌든 위키피디아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네드의 아내 메리가 있(다고 치)고 메리는, 켈리 갱들에게 자신과 함께 미국으로 밀항하자는 제의가 거절당하자, 네드가 은행을 턴 돈을 챙겨 태평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그곳에서 네드의 딸을 낳았다고 전제를 했다. 책의 막바지에 자기한테도 핏줄, 19세기였으니 아들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딸이라도 충분히 만족해서, 이전까지는 자신(들)의 억울한 사정을 오스트레일리아의 양심적인 국회의원에게 호소하기 위하여 사건의 전말을 전하는 편지를 쓰던 것을, 이제 자신이 생각나는 모든 인생, 유년시절부터 마지막 제릴데리의 호텔에서 철갑을 뒤집어쓰고 수십명의 경찰병력과 총격전을 벌이기 바로 직전까지의 삶을 수백장의 종이에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이 책의 9할 이상이 네드가 딸에게 쓴 편지 또는 자서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네드가 초등학교도 채 마치지 않아 그가 쓴 문장이 매끄러울 수 없을 터이니, 이것도 작가가 적당하게 개입해서 문법이나 구두점 같은 것을 조정하여 약간 미숙한 문장으로 읽히게 만들었다. 여기에 어려서부터 극빈한 환경에서 자라, 열살이나 됐을까 했을 때 닥친 가뭄으로 너무 배가 고파 이웃 머리 씨네 암송아지를 잡는 바람에 아버지를 대신, 또다시 감옥으로 보낸 걸로 시작해 온갖 험한 꼴을 당한 인간의 전형으로, 욕설을 입에 달고 살지만, 그래도 딸에게 남기는 글이라 욕설을 그대로 쓰지 않고 일부 생략하는 체면을 보이기도 한다.
  이래서 책의 내용은 자연스럽게 네드 켈리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일관할 수 있게 된다. 어디까지나 네드가 범죄를 저지른 것은 경찰과 법원, 특히 경찰들의 집요하고 가혹한 처리와 거짓말, 심지어 경찰에 의하여 벌어지는 범죄행위와 배신에서 시작한 것이며, 스스로는 일찍 세상을 뜬 아버지 대신 집안의 맏아들로 건실하게 농부일을 하고자 했다고 주장한다. 주장의 일부는 맞을 것이다. 뒤로 가면, 물론 ‘뒤로 가면 갈수록’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나중에는 켈리의 갱들이 마치 잉글랜드 로빈후드나 우리나라 임꺽정 패들처럼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고 그들 편에 서서 관가, 그러니까 부당한 경찰력에 저항한 의적 비슷한 광경도 나오지만, 천만의 말씀. 범죄집단이 가난한 백성을 위해 자신이 부자들에게 (네드 켈리의 경우엔 국립은행에서) 빼앗은 양곡이나 돈을 거저 먹으라고 구빈활동을 하는 일은 홍명희의 책에서나 나오는 거다. 갱은 어떻게 해서든지 갱이고, 화적패당도 결국 화저패당일 뿐이다. 네드 켈리와 켈리 갱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오히려 내 생각엔, 오스트레일리아가 침략을 당하거나 원주민만큼 심한 수탈의 역사를 갖지도 않았고, 나라 자체의 역사가 짧아서 그렇지, 만일 구세계 정도로 오랜 경험을 축적했더라면, 네드 켈리의 행위는 저 미하엘 콜하스 같은 불행한 운명의 민란 지도자 정도로 미화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마 가장 최선의 미화 왜곡은 우리나라의 <장사의 꿈> 같지 않았을까 싶다. 어릴 때부터 장사로 태어났지만 이를 알아낸 권력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는 영웅 같은 거.

 

 

  오늘은 작품의 스토리는 거의 소개하지 않았다. 네드 켈리 Ned Kelly가 실존인물이고, 구글 검색하면 위키피디아에 켈리의 일생이 그대로 나와 있을 뿐더러 사진, 교수형 장면, 심지어 데스 마스크까지 다 볼 수 있어서 완전히 읽은 느낌으로만 독후감을 썼다. 이런 날도 있어야지.
  <켈리 갱의 진짜 이야기>를 읽으면서 알 수 있던 건, 나는 개척시대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 피터 케리에게 첫번째 부커상을 안긴 <오스카와 루신다>도 별로 흥미롭지 않았다. 두 작품 다 권위있는 상을 받았으니 그저 내 소양이 부족함을 탓해야 할 뿐임은, 다행스럽게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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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12-27 1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폴스타프님의 페이퍼는 제가 (감히) 댓글 남기기 어렵게 정질 정보들을 많이 담고 있다는 걸 알지만, 오늘은 총상 소독 장면을 세세히 비교하시는 데서 압도됩니다^^

테즈메이니아 사람들은 모두 사망했다고 온라인 자료로 읽었는데, 리처드 플래너건이 그 지역 출신이라 하셔서 제가 온라인 클릭질로 얻은 정보가 갑자기 의심스러워지네요^^

Falstaff 2021-12-27 11:20   좋아요 1 | URL
아휴, 뭐 그 정도 가지고 이러십니까. ㅋㅋㅋㅋㅋ 얼굴 붉어지게시리...

혹시 테즈메이니아 원주민들이 모두 죽었다는 거 아닐까요? 거기 사람들 살고 있어요. 하다못해 관광 안내원 또는 입도 금지라면 사람들 접근 못하게 지키고 있는 관리인들이 있을 거 같은데요. 원주민을 몰살했다면, 20세기 중반까지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인간들이라 동의할 수 있겠습니다.

얄라알라 2021-12-27 1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지금 제가 제 댓글 다시 읽어보니 ˝정질 정보˝는 뭘까요? ㅋㅋㅋㅋㅋ‘정밀‘을 ‘정질‘로 쓰니 ‘저질‘로 잘못 읽으면 큰일 나겠습니다 ....ㅇㅎㅎㅎㅎ 네, 원주민이 모두 사망했다, 마지막 원주민은 인류학자들이 연구대상 삼았다는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의 거주인을 말하는 건 가보네요

Falstaff 2021-12-27 14:31   좋아요 2 | URL
오스트레일리아 이민자들이 원주민은 ˝애버리지니˝라 부르면서 아예 불가촉 원시인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20세기 들어서, 이들을 미개인에서 건져내는 프로젝트를 만듭니다. 1900년 부터 1970년까지 무려 70년 동안 애버리지니 원주민의 아이들을 강제로 빼앗아 백인 가정에 입양해 도덕과 종교 등을 배우게 하는데 말이 그렇지 급여 없는 하인으로 써먹습니다.
테즈메이니아는 죄수 가운데서도 가장 죄질이 안 좋은 죄수들만 골라서 보낸 곳이라 그곳 원주민들이 제일 가혹한 고통을 당했을 것 같네요.

ㅎㅎㅎ 제가 잘 알아서가 아닙니다. 지금 마침 패트릭 화이트가 쓴 <전차를 모는 기수들>이란 책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이 책의 무대가 1950년대 오스트레일리아라서 적절하게 아는 척을 할 수 있었습니다. ㅋㅋㅋㅋ 인생이란!

얄라알라 2021-12-27 15: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밀을 수정. 초정밀이라 하겠습니다!!고맙습니다
 
체인지링 오에 겐자부로 장편 3부작 1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서은혜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일본을 방문한 외국 대통령에게 영어 좀 하는 일본 국회의원이 다음 선거가 잘 되기 바란다고 덕담을 했다. 그걸 들은 외국 대통령은 일본 국회의원의 말이 자기가 여태 들었던 최고의 덕담이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일본 국회의원이 자기한테 분명하게 “다음 번 발기에 성공하기 바란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영어 election을 혀 짧은 일본인이 erection으로 발음해서 생긴 범 세계적 농담이다.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를 잠깐 보자. 한도우 경금속의 경리부 과장, (한)반도 출신 기노시다 히데요는 알루미늄Aluminium을 자연스럽게 ‘알루미늄’으로 발음하지만, 부장 다나카 슈지를 비롯한 내지 출신들은 이를 ‘아루미니우무’라고 고통스럽게 발음하는 장면이 나온다. 일렉션을 일렉션이라 하지 못하고 겨우 ‘이렉션’이라 하는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체인지링>은 changeling, 우리 같으면 ‘체인질링’이라고 했을 것을 역자 서은혜가 일본어 가타카나를 소리나는 대로 우리말 제목으로 했다. 그래서 미리 사소한 지적질을 하고 넘어가자면, 서은혜는 우리말로 번역하기 애매한 일본식 한자어를 그냥 그대로, 우리도 흔하게 쓰는 단어인 것처럼 옮긴 경우가 왕왕 있다. 글쎄, 내 생각으론, 이해하기 힘든 일본식 한자어를 알아듣기 편한 우리말로 바꾸는 것 같은 번역상의 불편함을 극복 또는 무릅쓰는 것도 역자가 반드시 해야 할 일 아닐까 싶다. 출판사 잘 못 만나서 계속 쇄를 찍지 못하고 절판된 것도 열불이 날 터인데 이런 타박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지만.

‘체인질링’이란 것부터 알아야 쉽게 이해가 될 터. 나무위키에는 “요정이 인간의 아이를 납치하고 대신 놓고 간 아이” 라고 나와있다. 여기서 말하는 요정이란 우리가 아는 nymph나 fairy가 아니라 고블린에 가깝다. 고블린이 두고 간 아이가 원래 인간의 아이처럼 예쁘기를 기대할 수 없어서, 체인질링은 대개 장애가 있거나 사납거나, 하루 종일 울고 짜고, 징징대는 경향이 많다고 한다. 원래부터 극우 애국주의자들이 유독 많은 일본에서 행동하는 지식인의 면모를 보이는 노벨 문학상의 작가 오에 겐자부로는 열일곱 무렵부터 친하게 지낸 절친이자 손위 처남이기도 한 이타미 주조가 자살해버린 일을 계기로 이 작품을 쓴다. 이미 만년에 들어선 오에는 평생의 소설작업을 마무리하면서 최후의 작품으로 삼부작을 구상한다. 첫째가 <체인지링>이고 두번째가 <우울한 얼굴의 아이>, 마지막으로 <책이여, 안녕>. <체인지링>은 말한대로 이타미 주조, 작가의 처남을 위한 조종일 터. 나머지 두 작품은 아직 읽어보지 않았다. 두 권의 독후감을 포스팅 하는 것으로 2021년을 마무리했으면 좋겠다.


 오에 겐자부로의 책은 상당한 부분 작가 자신을 포함한 가계와 긴밀한 관계를 지닌다. <개인적인 체험>, <익사>, <만엔 원년의 풋볼>,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이들이 내가 읽은 오에의 장편소설이다. 물론 각각이 대단히 진지하고 독립된 주장을 펼치고 있지만 작품들이 서로 촘촘한 얼개를 지니고 있어서, 물론 아니어도 좋겠으나 출간 순으로 읽는 것이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훨씬 도움이 될 것 같다. <체인지링>에서 애초 내가 예상했던 것은 <개인적인 체험>에서 이야기 한, 뇌헤르니아 상태로 태어나 평생 지적 장애를 앓아야 하지만 작곡가의 삶을 살고 있는 아들 오에 히카리에게 헌정하는 작품일 줄 알았다. 그러나 <체인지링>에서 뻗은 거미줄은 오히려 <만엔 원년의 풋볼>과 더 긴밀하여 폭력이 어떻게 한 인간을 말살할 수 있는지에 집중한다.

 오에 겐자부로 본인이 틀림없는, 그러나 소설이라서 확정할 수는 없는 주인공 나가에 고기토는 서재 간이침대에 헤드폰을 낀 채 청소년시절부터 친구이자 처남이기도 한 하나와 고로, 이타미 주조라는 이름으로 활약한 스타 영화감독이 보낸 카세트 테이프를 듣고 있다.

 “…… 그렇게 된 셈이지. 나는 건너편으로 옮겨가네.” 하더니 쿵, 하고 커다란 소리가 난다. 이어서 “하지만 자네와 교신을 끊은 건 아냐.”라는 말이 들려오고, 생전 서재엔 발걸음을 하지 않는 아내 치카시가 다가와 말한다. “고로가 자살했어요.”

  고기토는 유력 일간지 거물급 기자에게 10년 이상 받아온 개인에 대한 공격으로 심신이 지쳐 있었다. 사실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일본 사회에서 좀 유난스럽다고 알려진, 잘 나가는 사람에 대한 태클이, 세계적으로 큰 상을 받은 고기토에 집중이 되고 있었던 것. 일본인에 대한 편견 가운데 하나가, 특출하거나 돋보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다. 고기토는 이것을 일종의 폭력으로 받아들여 나름대로 적절한 대응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문제점은 자신에게 스트레스로 작용해 우울증으로 성가셔 했다. 이때 처남 고로가 카세트 테이프 50개와 플레이어가 든 두랄루민 트렁크를 선물한 적이 있고, 이것을 들고 고기토가 시내버스 안에서 작동을 시켰다가 작지 않은 소리로 포르노 녹화방송이 터진 적이 있었다. 우울증의 곤경에 상응하는 저열한 ‘인간다움’으로 대항하라는 취지에서 한 선물이었다고. 수년 후 테이프를 폐기했을 때 고로가 다시 30개 정도의 테이프를 보내와, 서로 “물장군”이라 부르는 큰 녹음기에서 재생을 시켜 듣고 있었던 것. 물장군에서 들린 쿵, 하는 커다란 소리가 고로가 건물에서 떨어져 났던 건 아니었을까. (아니다. 3부작의 두번째 작품 <우울한 얼굴의 아이>에 나오는데, 사람의 몸무게와 같은 중량의 트렁크를 밧줄에 묶어 대들보에 매고 떨어뜨리는 실험을 하는 소리였다. 목 매달아 자살하는 예비실험으로.) “나는 건너편으로 넘어가네.”는 죽겠다는 뜻이고, 그렇다고 “자네와 교신을 끊은 건 아니야.”라니 사후에도 서로 의사소통을 하겠다는 거였다. 쿵, 소리가 고로의 죽음이 낸 것이라면 테이프는 특정인의 편집을 거쳐 만들었을 테니 말이 되지는 않는다.

 의사소통? 어떻게? 그리하여 고기토, 아니, 오에 겐자부로는 물장군이란 특별한 장치를 설명하는데 한 챕터를 다 사용한다. 고기토가 테이프를 통해 고로가 남긴 녹음의 한 구절 또는 한 단락, 하여튼 일정 부분을 듣고 재생을 멈춘 다음, 고로가 한 말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아무도 없는 방에서, 서재 밖에 예민한 아내 치카시와 더 예민한 작곡가 아카리가 있는 걸 무시하고, 주절주절 늘어놓는 식이다. 이것도 물론 의사소통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위 문단에서 쿵, 하는 소리와 마찬가지로 독자는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그냥 믿어주는 편이 바람직하다. 이 물장군 의사소통을 통해서 고기토는 효과적으로 패전 후, 자신의 하이틴 시절, 고향 시코쿠 산골에서 있었던 ‘그것’으로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 그렇다. ‘그것’이 무엇일까. 이 책에서 제목으로 쓴 체인질링을 거론한 사람은 주인공이자 작가 오에 겐자부로 본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고기토가 아니라 아내 치카시다. 치카시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외모에 다양한 방면으로 만발하는 재능을 선보인 오빠 고로가 청소년 시절의 한 순간에 망가져버린 것을 보았다. 바로 그날, 고로는 지금은 남편이 된 고기토와 함께 밤이 거의 다 새는 시간에 들어와 찬물로 온몸을 씻은 걸 기억한다. 틀림없이 그날을 기점으로 날이 선 인간으로 변한, 마치 진짜 고로는 누가 훔쳐가고 빈 자리에 가짜 고로, 얼음조각으로 만든 가짜 고로를 가져다 놓은 것 같은 느낌을.

 고로는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야쿠자의 칼을 맞은 적도 있다. 부상당한 몸을 하고도 방송국 카메라를 향해 승리의 V자를 날리며 여유작작하게 미소 짓던 고로가 왜 죽음을 결정했을까. 물론 노년기 우울증이 돋았겠지만 혹시 한 개인에게 가해진 폭력의 후유증은 아니었을까? 과거 한 시절 고로와 고기토가 서로 오랫동안 교통하지 않고 지내게 만들었던 ‘그것’과 비슷하게. 오에 겐자부로는 이렇게 진중한 은유를 써가며 폭력에 반대하고 있었던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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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12-24 08: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제 부스터 맞아 오늘 휴가입니다. 아, 이 한가함이라니. 느므 편하군요.

바람돌이 2021-12-24 09:13   좋아요 1 | URL
부러움요. 부스터 맞으면 휴가라니....ㅠ.ㅠ 이쪽은 부스터 맞아도 출근..

stella.K 2021-12-24 12:14   좋아요 2 | URL
오늘은 약주 안하실 거죠?
해피한 크리스마스되시길~!^^

Falstaff 2021-12-24 12:30   좋아요 2 | URL
어제 부스터 맞았는데, 1차, 2차에 없었던 부작용이 좀 있는 거 같네요.
팔 근육통, 주사 맞은 반대편 뒷목 근육통과 경미한 두통.
오늘까지 술 마시지 말래요. 산타 오시면 마주 앉아 고스톱이나 한 판 두드려야겠습니다. ^^
스텔라 님도 온 가족과 함께 즐거운 성탄 보내세요!!!

바람돌이 2021-12-24 09: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에 겐자부로 꼭 읽어야지 하면서 지금 계속 미루고 있는 작가. 저는 내년에 꼭 만나렵니다. ^^
주말이자 크리스마스, Falstaff님 메리메리 하세요. ^^

Falstaff 2021-12-24 09:21   좋아요 1 | URL
ㅋㅋㅋ 부러워 마세요.
부스터 맞고는 아직 하나 남은 ˝하기 휴가˝ 쓴 겁니다.
2차 까지는 백신 휴가 썼고요, 부스터 휴가는 지금 노조하고 협상 중입니다. 나중에라도 쓸 수 있으니 일단 하나 남은 하기휴가부터 없앴습죠. ㅋㅋㅋ
오에는 제가 좋아하는 극히 드문 일본 작가 가운데 한 명입니다. 평화주의자고 실천운동가이기도 하고, 양심적 지식인이기도 하고 글도 잘 쓰고 다 좋은데, 솔직히 이 양반 책 읽어보면 인간적으로는 재수 없는 사람 같기도 합니다. ㅋㅋㅋㅋ
오에 읽으시려면 <만엔 원년의 풋불>은 꼭 읽으셔요!!
바람돌이 님도 즐거운 성탄과 연말 보내세요.. ^^

그레이스 2021-12-24 09: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 장면 생각나네요^^
복거일은 그런 필력으로 왜 그런 글을 쓰는걸까 생각했던 기억도...! 제가 너무 어려서 그런 생각을 했겠지요?
제 옆엔 <일상생활의 모험>과 <개인적인 체험>이 있네요. ㅎ

Falstaff 2021-12-24 10:35   좋아요 3 | URL
<비명을 찾아서>가 데뷔작이잖아요. 초기 복거일은 정말 매력 만점이었습니다. <비명..>도 최인훈의 <태풍>, 가상 역사라는 장르를 더 재미나게 만들어서,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래서 1980년대까지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이고, 조선인들은 역사왜곡으로 일본을 모국으로 알고 산다, 근데 이상하게 섬 사람들은 반도 사람을 좀 우습게 알고, 경금속 같은 공해산업은 전부 반도에 있다.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파란 달 아래>는 통일된 조선이 달 기지에서 지구를 바라보며 옛 남북조 시대를 회상하는 장면도 재미났고요.
특히 <시간 속의 나그네> 3권까지 정말 죽여주는 SF, 과거로의 시간여행이었는데, 일흔 살이 넘어서 완결판을 내 세 권을 더 내는 바람에 망쳐버렸습니다.
ㅋㅋㅋㅋ 복거일이 잘 나가다가 극우, 꼴보수로 선회해서 x랄이지, 그의 초기 작품들은 괜찮은 걸로.... 그저 사람은 잘 늙어야 해요.

그레이스 2021-12-24 13:13   좋아요 2 | URL
^^
이미 비명을 찾아서에 자조적이고 패배적인 역사의식을 전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얄라알라 2021-12-24 10: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아....l과 r!!!!!이런 외교 결례가 가능하군요 역대급입니다.

Falstaff 2021-12-24 10:36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농담입니다. ^^

coolcat329 2021-12-24 10: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올해 독서는 오에 겐자부로 삼부작으로 마무리하시는군요. 한권도 안 읽어봤지만 책은 두 권 가지고 있습니다.
폴스타프님 메리 크리스마스되세요~

Falstaff 2021-12-24 10:41   좋아요 3 | URL
옙. 독후감은 오에 겐자부로가 마지막이고요, 31일에는 언제나처럼 페이퍼가 올라올 겁니다.
쿨캣님도 즐거운 성탄 보내세요!

새파랑 2021-12-24 11: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체인지링이 체인질링이었군요 ㅋ
어느 외국대통령이었는지 검색해봐야 겠어요~!
몇일 안남은 올해이지만 삼부작으로 즐겁게 마무리 하시기 바랍니다~!!

Falstaff 2021-12-24 12:30   좋아요 3 | URL
ㅎㅎㅎㅎ 세계적인 ˝농담˝이라니까요!

청아 2021-12-24 15: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심오한 느낌이 들어요! 말씀하신것처럼 일본인들은 튀는걸 싫어한다고 책에서도 읽었는데 그런것 때문에 정부의 무능이나 부패에 대해서도 우리와 다르게 국민들이 크게 대응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있더라구요.
폴스타프님 휴가 잘 보내시고 유쾌한 성탄절 보내세요🎅🎄🌟

Falstaff 2021-12-24 18:00   좋아요 1 | URL
아휴, 심오하긴요. ㅎㅎㅎ
일본인들이 좀 그렇다고 하지요? 그게 천 년을 이어온 무인시대의 결과라고 합니다. 힘 센 놈들 눈밖에 나면 걍 죽여버려서, 자신이 뛰어나도 그걸 과시하는 걸 천 년 동안 참다보니 어느새 국민성이 된 걸로요. 자기보다 낮은 계급에겐 가차없고, 조금이라도 높은 계급에겐 간이라도 빼줄 것 같이 그저 굽실굽실 하는 게 다 이유가 있다더군요.
 
인간부결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한국희곡선집
고동율 지음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나라 연극 역시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 공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희곡을 읽을 기회가 별로 없던 것은, 그걸 기록으로 남기는데 조금 게을렀기 때문이라고 본다. 2021년에 희곡을 집중해서 읽은 건 내가 연극이나 드라마, 영화 대본에 각별한 관심이 있기 때문이라기보다, 엄연한 문학 장르이고 아마도 가장 오랜 문학의 형식 가운데 하나가 희곡이었음에도 그동안 지극히 적은 작품만 읽었다는 걸, 지난 몇 년간 중국의 현대 희곡 시리즈를 읽을 기회를 통해 깨달아서였다.
  정작 우리나라의 희곡에 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인식을 했다. 이때부터 우리 희곡을 찾아 읽으려는 마음이 생겨, 먼저 개관general overview을 위해 한양여대 김성희 교수가 엮은 <한국현대명작희곡선집>과 한국극예술학회가 두 권으로 펴낸 <한국현대대표희곡선집>으로 1910년대부터 60년대까지의 대표 희곡을 감상했다. 이어 최근의 희곡을 알아볼 요량으로 이유진 등의 작품을 수록한 <2020 희곡우체국 낭독회 희곡집>을, 이어서 이만희 이은준 김민정의 희곡집을 연이어 읽었다. 먼저 놀란 것은, 우리나라의 ‘대표’ 희곡들을 모은 선집이라서 그랬는지, 고급의 품질이라고 할 작품들이 상당수 있었으며, 그걸 여태 모르고 지났다는 것. 물론 오래 전에 최인훈과 천승세 등의 작품은 읽어본 바 있으나, 무려 한 세대에 달하는 세월동안 희곡을 읽지 않은 것이 작지 않은 손실이었음을 알게 된 일 하나만으로도 소득이었다.
  내년에도 우리 희곡 읽기는 계속할 예정이다. 우선 국립극단이 2018년부터 발간하고 있는 <희곡우체국> 시리즈와, 서울연극협회가 2011년부터 매년 내고 있는 <서울연극제 희곡집> 시리즈의 통독을 계획하고 있다. 사이사이에 희곡작가들의 작품집도 읽으려 생각하고 있지만, 고백하건데, 희곡 작가들을 별로 알지 못해 누구를 읽어야할지, 어떤 작품이 좋은지도 모르겠다. 아무쪼록 관심 있는 분들의 조언을 바란다.

 

  “지식을만드는지식” 출판사의 시리즈 가운데 ‘지만지한국희곡선집’이라고 있다. 이 시리즈에 191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백여 편에 달하는 우리나라 희곡을 다양하게 담고 있는데, 문제는 이 집구석에서 만드는 책들이 오지게 비싸다는 점. 값은 이렇게 비싸게 받아먹으면서도 딱 한 편의 작품만 수록하고 있다는 거. 이것저것 다 합하면, “진짜” 비싸다. 그래서 내가 읽은 책 <인간부결>은 개정판이 아니라 구판이며(개정판은 정가 12,800원에 판매가 12,800원, 구판은 정가 10,800원에 판매가 10,260원), 구판은 절판이라 당연히 헌책을 샀고, 헌책값 5천원 줬는데, 새 책보다 더 새 거다. 그래서 앞으로도 지만지한국희곡선집 시리즈는, 이런 건 번호 붙여 강조해야 한다, ①구판 헌책 또는 ②도서관을 이용하리라고 굳게 마음먹었다. 아니꼬우면 책값을 좀 내리든지.
  근데 지만지 출판사가 망하면 안 된다는 게 책 좀 읽는 사람들의 고민일 듯. 이들이 아니면 누가 있어서 내 인생 책, 장용학의 <원형의 전설>을 초판 그대로 출판을 해줄 것인가. 말 그대로 <원형의 전설> 초판본 출판은 출판사 입장에서 독자가 없을 것을 확실하게 알면서도, 세상 사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그놈의 “문화적 사명감” 없이는 만들 수 없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래 지만지가 고맙기는 고마운데, 책값이 보통 비싸야지. 책도 겁나 못 만들면서 책값만 오지게 비싸게 받아쳐먹는 한O문화사에 비하면 틀림없이 하느님이거나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긴 하건만, 조금만, 책값을 조금만 내렸으면 좋겠다.

 

  극작가 고동율의 원래 이름은 양한석이다. 1929년 강원도 고성군 동리 밤나무골에서 태어났다. 훗날 극작가가 되어 작품을 발표할 때, 고성군에서 “고”, 동리에서 “동”, 밤나무골에서 “밤나무: 률栗”을 따 필명으로 삼은 인물이다. 1945년에 고성의 금강중학교 졸업. 17세. 그럼 5년 후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는 22세. 고동율이 참전을 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정확하게 4년 후인 1954년에는 강릉의 관동대학 상학과, 요즘말로 경영학과를 졸업한다. 하여튼 집안에 장정을 입대시키지 않을 만한 배경이 있든지, 입대는 하되 후방에 배치되어 대학과정까지 마칠 수 있을 금은보화가 있었든지, 일찌감치 참전해서 부상을 입어 개전 초기에 제대를 했든지 하여간 몇 가지 경우 중 하나다. 전화해서 확인해보려 했더니만 벌써 50년 전에 생을 마감했다.
  상과를 졸업한 고동율은 다수의 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한다. 속초중학교 국어교사, 주문진중학교 미술교사, 춘천중학교 미술교사. 상학과 출신이. 당시가 전쟁 후 극도의 혼란기여서 가능했다. 한 십 년 교사를 하며 틈틈이 작품을 써서 19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응모, 영광의 은메달, 가작 입선한다. 근데 당선이 아니라 상금의 절반을 받는 가작. 가작도 등단이다. 하지만 뭔가 좀 꿀리는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라, 일 년 후에 다시 같은 신문 신춘문예에 <동의 서>를 응모, 기어이 당선을 따낸다. 이 해에 극단 「광장」에 동인으로 참여하면 왕성하게 연극활동을 하다가 1972년 44세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그러니까 연극인으로 활동한 시기가 1966년부터 1972년까지. 완전한 박의 시대였다.

 

  연극 <인간부결>은 고동율이 신춘문예에 당선한 1966년에 초연된 작품이다. 1966년 역시 혼돈의 시기였다. 1년 전에 한일협정이 있었고, 여전히 반대 데모가 치열한 가운데 정권은 국가보위법을 이용해 한국독립당 내란음모사건이라는 허무맹랑한 정치공작을 감행했으며, 베트남에서는 꽃 같은 우리 청년들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등본 한 장 떼려 해도 소위 급행료를 말단 9급 공무원에게 디밀지 않으면 한 세월을 기다려도 나올까 말까 했던 시기다. 산업 전반에 뇌물을 동반하지 않는 사업이 없었으며, 뇌물이 너무 활성화되어 모든 단계를 거칠 때 마치 윤활유, 그리스처럼 기능하기도 했다. 이건 우리나라가 후져서가 아니다. 전 세계 모든 나라의 역사가 다 마찬가지였다. 일제강점기를 거친 내 부모 세대는 이걸 엽전의식이라 비하하면서도 열라 뇌물 바치고, 받는 행위에 골몰했다. 사회 전반에 부정행위가 저질러지고, 모든 기능이 부패했던 시기. 이런 현상은 보통 시민들의 사고방식까지 부패시키는 악순환을 동반한다.
  국내에서 가장 좋은 대학인 신라대학에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이제 60번째 생일을 맞아 파티를 준비하고 있는 한빈 교수. 아내 김여사와 놈팡이 장남 철, 사법시험에 네 번 미역국 먹은 차남 운, 미국으로 의사공부 하러 떠난 딸 혜원이 있다. 객식구로는 마흔세 살 먹었으면서도 장가도 못간 처남 사달이 함께 살고 있다. 장남 철과 처남 사달이 극 중에서 사달을 일으키는 장본인들이고, 이들의 행위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인간이 김여사다. 김여사는 전쟁 중에도 무사했던 집을 겉으로 보면 여전히 한옥이지만 내부는 완전한 서양식으로 꾸미고 싶은, 가히 집착적인 열망이 있다. 대학 시험에 한 번 떨어지고 곧바로 대학진학을 포기한 철과, 어린 숫처녀 아가씨와 장가들고 싶으니 연락 바란다는 신문광고를 내는 사달은, 60 평생 양심에 따라 옳은 길만 걸었던 아버지, 매부 한빈 교수를 이용해 과감하게 사기를 치려 작당한다.
  신라대학에 뒤로 입학시켜주겠다면서 일정액의 대가를 요구하는 것. 어떠셔? 평생 명예를 먹고 산 한빈 교수가 그래, 알았다, 하고 이 높은 양반들의 자제들을 신라대학 뒷문으로 들어오게 해주겠는가, 아니겠는가.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딸 혜원이도 참. 얘는 원래 무용에 뜻이 있고 재주가 있는데, 어머니 김여사가 무용을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미국 가서 의사가 되어 돌아오면 대기업, 삼양무역의 강사장이 아들과 혼인을 시키면서 15층 건물을 지어 건물 통째로 병원을 만들어주겠다는데, 무용은 무슨 무용, 의사 공부를 하라고 닦달을 했다. 그래 정말로 의과대학에 다니기는 했지만 적성에 맞지도 않고 어렵기만 한 의사 공부를 하느라 헤까닥, 미쳐서 귀국했다.
  분위기가 좀 어두운 것 같으시지? 스토리는 그렇다. 하지만 시종 웃음을 자아내려고 애쓰면서 일견 사회극으로 만들려 노력했다. 박의 시대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엄숙하게 내놓고 사회의 문제점을 제기했다면, 고동율 역시 중앙정보부나 경찰 또는 검찰의 두뇌를 통해 만든 가상의 국가전복 반란죄에 걸려 치도곤을 당했을지 모른다. 박의 시대를 건너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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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12-23 09: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박의 시대가 뭐지 너무 너무 궁금해하면서 보는데 마지막에 의문이 풀리는군요. 에잇 저리가 박!!!
저는 희곡은 호흡을 따라가기가 힘들어서 잘 안읽히더데 Falstaff 님 희곡읽기 계획을 보니 역시 Falstaff님이라는 생각이 막막 드네요. 문화적 사명감으로 책을 만드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렇게 문화적 사명감으로 책을 읽는 사람도 있어 그나마 출판계가 숨이라도 쉬는거겠죠.
내년에도 계속될 Falstaff님의 희곡 읽기를 응원합니다. ^^

Falstaff 2021-12-23 09:29   좋아요 1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우리말로 된 희곡 읽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문장이 거의 비슷한 꼬리로 끝이 나는 것도 큰 원인인 거 같습니다. 일단 재미가 적잖아요.
그래도 처음 한 순간만 견디면 나중엔, 서양 희곡도 마찬가지지만, 대사만 읽어도 누가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까 쉽게 쉽게 넘어갈 수 있더라고요.
바람돌이 님의 응원을 받으니 어깨가 으쓱으쓱합니다. ㅋㅋㅋㅋ

dollC 2021-12-23 2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만지 책값 보면 정말 정떨어지는데 또 얘네 없으면 어쩌나 싶어서 내적 갈등 장난 아니에요. 망할 놈들아 망하지 마 -이런 심정이랄까요ㅋ

Falstaff 2021-12-24 08:31   좋아요 1 | URL
ㅎㅎㅎ 재미난 표현입니다.
말할 놈아, 망하지 마!
정말 제 심정에 딱 맞는 말씀이네요. ^^
 
어느 작가의 오후 열린책들 세계문학 122
페터 한트케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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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한트케.
  한트케는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로 읽기 시작해 이어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과 <소망 없는 불행>을 3일 간격으로 읽는다. 그리고 결심한다. 앞으로 한트케는 읽지 않겠다고. 그렇게 3년의 시간이 흐른다. 그렇게 한트케한테 질려버린 기억이 가물가물해지자 이번에는 희곡 <관객모독>을 고르는데, 젊은 시절 이 연극을 관람했던 기억이 되살아나 좋은 인상을 받는다. 다시 2년 반의 날이 흐른 올해 가을, 범우사 문고판으로 나온 <왼손잡이 여인>을 읽고, 홀딱 반해버린다. 그래서 올해가 가기 전에 한트케를 더 읽으리라 기약을 하고 구입한 책이 <어느 작가의 오후>와 <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두 권이다. 일단 <어느 작가의 오후>를 20분 전에 다 읽었다.
  미치는 줄 알았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근데, 느므느므 재미없다. 벌써부터 <어두운 밤……>은 어떻게 읽나, 한숨이 폭폭 나온다.

 

  단편소설이다. (짧다. 정말 다행이다.)
  매력적인 문장으로 시작한다.

 

  “작가에게는 자신이 과거에 썼고, 앞으로 쓸 수 있다고 느낀 문장 모두가 하나의 사건이 되었다. 말로 표현되지 않고 (대신) 글로 쓰이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언어가 그로 하여금 깊이 숨을 쉬게 했고, 그를 세계와 새롭게 맺어 주었다.”

 

  이것으로 한트케는, 작가 주위의 일을 언어가 아닌 문자로 만들었을 때, 또는 만듦으로 해서 그를 세계와 맺어주게 하는 일에 관한 이야기를 할 것이라 선언한다. I hereby declare …….
  작가. 벌써 솔찮게 이름이 난 작가답게 규칙적으로 작업을 한다. 아침에 일어나 오전 내내 (IBM?)전동타자기로 글을 쓰고, 오후가 되면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도시로 산책을 나가거나 자전거를 타고 교외를 거닌다. 이 작품의 시간적 공간은 12월 초, 초겨울이다. 그런데도 작가는 샤워를 하고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 외출을 하려고 하니, 해 떨어질 때쯤 집에 돌아오면 ① 틀림없이 감기에 걸렸거나, ② 쌍화탕 한 병 마시고 소주 한 잔에 고춧가루 풀어 마셔서 끄떡없거나, 둘 가운데 하나일 거다. 근데 아무리 봐도 전형적 약골로 보이는 한트케 사진을 감안하면 ①번일 확률이 높을 듯.
  이 책을 읽기 위해 감안해야 할 것이 있다. 페터 한트케의 바이오그래피.
  한트케는 오스트리아 중에서도 산골 가운데 산골지방에서 독일군 장교가 오스트리아 촌 아가씨한테 함부로 뿌린 씨의 열매로 태어난다. 완고한 집구석에선 아가씨한테 사생아를 출산할 수는 없으니 결혼을 하라고 득달을 하는데, 독일 장교새끼가 유부남이었던 것. 그리하여 역시 독일군 한트케 하사관과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결혼을 했고, 결코 남편을 좋아하지 않았던 미세스 한트케는 평생 남편과 불화를 겪게 된다. 당연히 섹스 기피증세가 점점 심해졌으며, 남편과의 불화로 인한 신경쇠약은 결국 이러저러한 처방전을 이용해 머그컵으로 한 컵 이상 분량의 수면제를 확보해 한 방에 삼켜버리는 방식으로 자살에 성공한다. 내가 어떻게 이런 걸 알겠나. <소망 없는 불행>에 나온다.


  (* 참고. 현대의학으로도 수면제 많이 복용해서 죽는 방법이 있다. 친절한 폴스타프가 알려드리겠다. 많이,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모아야 한다. 모아놓은 수면제를 먹는다. 숟가락으로 푹푹 떠먹어야 한다. 그래서 너무 많이 먹어 배가 터져 죽는 것. 그게 수면제를 이용해 자살하는 가장 성공률 높은 방법이다. 두 번째가 수면제 먹다가 몇 알이 기도로 들어가 기도폐색으로 죽는 방법인데, 대개 수면제는 크기가 작게 나와서 별로 가능성은 없다. 마지막으로 수면제 과다복용의 후유증으로 극심한 변비에 걸려 노랑병이 들어 죽는 건데 이건 너무 고통스럽고 시간도 오래 걸려서 추천하지 못하겠다.)


  애정 없이 결혼하는 사람이 미세스 한트케 한 명이 아니다. 물론 평균을 내보면 이런 부류의 사람에게 신경쇠약 증세가 나타날 확률이 월등하게 높겠지만, 하여튼 신경쇠약으로 쓰여 있고, 우울증으로 읽는 증세는 유전자 정보로 페터 한트케에게도 이어져, 페터 한트케는 나보다, 당신보다 타인관계에서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독후감의 초입에서 내가 읽어봤다고 말한 다섯 편의 작품 전부, 기본적으로 의사불통, 갑작스러운 단절을 배경으로 깔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미리 짐작하고 책을 읽어야 한다.
  마흔다섯 살이 된 페터 한트케 자신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은 주인공 ‘작가’는 이런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어서, 이제부터 집 밖에 나가 여러 가지 사물과 여러 명의 사람을 만나서, 공원을 산책하고, 거리를 걷고, 밥을 사먹고, 신문도 사고 다시 집에 돌아와야 하건만, 작가가 이것/이들을 대하는 방식은 입자가 거친 모래알과 비슷하다. 심지어 자연을 대하는 것도 그렇다. 12월 초임에도 이이의 상상, 공상, 사색, 망상 또는 환각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예전에 본 경험이 있는 것으로 순간적으로 오인하기도 하고, 시간/계절적 변별도 완전히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대인기피증은 어쩔 수 없는 수준이다. 산책 중에 만나거나 보거나, 지나치는 사람들이 지금 자신이 쓰고 있는 작품의 등장인물인 것으로 오인하기도 하고, 그리하여 이들의 난데없는 등장에 화들짝, 놀라기도 한다.
  책의 앞부분에서는 이런 현상들을 그나마 제대로 따라갈 집중력이 있었지만, 하도 왔다갔다, 좌충우돌에다가 문화차이까지 합쳐져 어떤 것을 서술하고 있는지 따라가기가 버거울 때도 있었다. 다행스럽게 서양인들이, 마치 어제 독후감 쓴 투르니에의 <메테오르>에서처럼, 종교이야기를 첨가하지 않아서 망정이지, 그것까지 보탰더라면, 겨우 백 쪽을 넘기는 중단편 소설이었더라도 끝까지 읽어내지 못했을 거 같다.
  그건 그렇고, 모레 <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을 읽어야 하는데, 이거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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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12-22 0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는 지난 주에 읽다가, 읽다가, 135쪽까지 읽다가 때려치웠습니다. 독후감은 일 주일 늦어지만 이 책을 <어둔 밤...>보다 먼저 읽었습니다.

잠자냥 2021-12-22 08: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요즘 왜 고통스럽게도 한트케를 다시 읽으시나 했더니, 왼손잡이 여인 때문이었군요. 저도 한트케는 더 읽지 않으려했는데 관객모독, 왼손잡이 여인까지만 더 읽어보겠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두 작품을 안 읽었네요.

Falstaff 2021-12-22 08:36   좋아요 2 | URL
아우.... 한트케!
이제 이름도 듣고 싶지 않아요. 흑흑흑.....

그레이스 2021-12-22 08: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저는 좋았던 책인데...

Falstaff 2021-12-22 08:37   좋아요 2 | URL
선호하는 작품이 서로 다른 세상이 진정한 천국입니다! ㅋㅋㅋㅋ

새파랑 2021-12-22 09: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왼손잡이 여인>을 빼고는 다 힘든가 보군요. 예전에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를 읽고 좀 힘들었었는데 다 비슷하군요 😅 그래도 왼손잡이 여인은 꼭 읽어야 겠습니다~!!

Falstaff 2021-12-22 09:09   좋아요 3 | URL
ㅎㅎㅎ 근데 우리나라에도 한트케 매니아들 많습니다.
제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아마 평생 발견하지 못할 매력이 있나 봅니다.

coolcat329 2021-12-22 09: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요즘 폴스타프님 고통을 유발하는 작품들 많이 읽으시는거 같아요 ㅎㅎ 저는 어떤 맛인지 상상이 안가지만 그래도 뭔가가 있으니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겠죠? 적막한 집 다시 도전하시는건가요? 😅

Falstaff 2021-12-22 11:05   좋아요 2 | URL
ㅎㅎ 지금은 좀 덜 합니다. 근데 연짱 같은 작가가 쓴 장편소설 세 편을 읽으려니, 그것도 직조공 같이 촘촘한 구조의 대가가 쓴 작품을요, 아주 골치 아프긴 합니다.
적막한 집은 걍 적막하게 냅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

페넬로페 2021-12-22 10: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터 한트케‘ 가 아닌 그를 읽는 폴스타프의 연대기~~
재밌게 잘 읽었어요^^
저는 소망 없는 불행만 읽었는데 자신의 삶을 물기없이 객관적으로 그렸지만 그들이 다들 불행했다는 것을 알겠더라고요.
그의 책은 <왼손잡이 여인>이 제일 좋다를 기억하겠습니다~~

Falstaff 2021-12-22 11:06   좋아요 1 | URL
ㅎㅎㅎ 왼손잡이도 제 생각일 뿐일지 몰라요.
오늘은 특히 더 별 내용 없는 독후감이었는데 재미나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독서괭 2021-12-22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고생하셨네요, 폴님. 저 폴님 리뷰 보고 <왼손잡이 여인> 사놨는데, 이게 유독 재밌는 작품인가봐요. 불행했던 어머니의 삶이 그에게도 영향을 많이 미쳤겠군요.
그나저나 수면제 과다복용의 후유증이 변비였군요....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Falstaff 2021-12-22 11:58   좋아요 0 | URL
한트케 왼손잡이 사신 건 잘 하신 겁니다.
만약 읽고 아니, 이렇게 쉬운 얘기를 이토록 어렵게 할 수도 있단 말인가, 후회하시는 일이 있더라도, 범우사 문고판이 제일 싸잖아요. 아주 경제적인 선택입니다!!
제가 한 달에 일곱 정씩 처방 받아 수면제를 사고 있어서 좀 압니다. ㅋㅋㅋ
근데 의사는 왜 일곱 알, 소수prime number 7을 처방했을까요? 며칠에 한 번씩 복용하라는 말인지 영 아리송...해서 말입쥬.

바람돌이 2021-12-22 14: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투르니에에 이어 한트케까지..... ㅎㅎ
아 진짜 훌륭하면서 재미까지 있는 작가님들이 다 어디에 숨었단 말입니까? ㅠ.ㅠ

Falstaff 2021-12-22 15:25   좋아요 0 | URL
ㅋㅋㅋ 알라디너들이 언제나 눈 벌개서 찾고 있는 중이잖아요.
한 명 발견하면 그냥 소문 내고, 자진해서 영업해주니까 금방 또 등장할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