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식 백반 맛있게 먹는법 김숙종 희곡집 1
김숙종 지음 / 연극과인간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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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숙종. 스스로 자기 소개를 한다.

 

  “충남 부여 거기서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2005년 신춘문예 <싱싱 냉장고>로 등단했습니다. 서른 전까지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작가의 길을 꿈인 듯 걷고 있습니다. 행복합니다. 죽은 순간까지 이야기꾼으로 살아가는 것이 소망이자 꿈입니다.”

 

  이것만 가지고 작가를 아는 것이 좀 부족한 듯해서, 여기저기 알아봤더니, 여자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제약회사에 다니다가, 고졸 5년차 급여가 대졸 신입, 1년차 급여와 같은 걸 알고, 일을 잘 해서 그랬는지, 사장이 직접 아무데라도 좋으니 대학 졸업장 한 장 가져오라고 해 들어간 곳이 숭의여대 문예창작과였단다. 근데 또 알아보니까, 김숙종이 고졸 5년차, 대졸 신입에 관한 불평등을 자주 입에 올리는 모양이다. 회사 입장에서 대학에서 배운 기간 동안을 경력 처리해준 거 아닌가? 걔네들은 자기 돈 써가며 공부할 때, 얘네들은 돈 벌며 경력 쌓았으니, 이 정도면 그냥 퉁 칠 수 있는 수준 같은데. 즉, 비교적 평등하거나 고졸에 더 이로운 수준 아닐까 싶다. 아, 나는 논쟁을 싫어하는 성격이라 이런 주제로는 더 말을 잇고 싶지 않으니 얼른 본론으로 돌아가면, 정작 이이가 다니던 회사 사장은 일을 잘 해 아까워 대학을 가라고 했겠지만, 실제로 공부를 해보니까 자기한테 글 쓰는 재주가 좀 있는 것 같아서 직장을 때려치우고 본격적으로 희곡을 쓰기 시작한다. 어떠셔? 사장한테 좀 미안했을 거 같다. 그지?
  그런데, 희곡을 써서 신춘문예에 내기만 하면, 하여튼 최종심사, 이른바 short list까지 늘 올라가는데, 이게 김숙종에겐 희망고문이었나보다. 아예 예심에서 떨어지면 자기 재주 가지고는 어림도 없으니 다시는 도전하지 않고 다니던 제약회사에서 열심히 약이나 만들겠지만, 이건 될 것도 같고, 당선 작품이 자기 것보다 좀 못한 것도 같고, 이렇게 깨끗하게 네 번이나 미역국을 먹었단다. 그러다가 2005년에 <싱싱냉장고>가 당선, 기어이 극작가 목록의 말석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이 작품 역시 ≪가정식 백반 맛있게 먹는 법≫의 마지막 작품으로 실려 있다.

 

  김숙종의 작품을 여섯 편 읽어보고 내린 결론은, 그로테스크하다는 것. 데뷔작인 <싱싱 냉장고>부터 절찬리에 공연했던 <콜라 소녀>, <가정식 백반 맛있게 먹는 법>은 물론이다. 제일 앞에 실린 <템프 파일>은 당연하고 두번째 실린 <배웅>과 <애플 혹은 사과> 모두 다 그렇다. 과거 또는 현재의 ‘나’가 또다른 과거 또는 현재의 ‘나’를 만나는 <애플 혹은 사과>를 제외하면, 물론 연출에 따라서 이것도 그럴 수 있겠지만, 모두 “실제로 무대 공연이 가능한 희곡”이란 것도 현대 극작품으로는 예외적인 현상이라고 한다. <애플 혹은 사과>를 무대에 올리기 어려우리라 생각하는 건 숱한 발화성 물질을 모아 놓았을 쓰레기장에서 물건을 태우고 밟아서 끄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막과 무대장치 등 역시 발화성 물질 투성이인 실 공연 무대에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이이의 작품을 소개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 작품들이 어떤 이유로 그로테스크하다,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밝힐 것이 있으니, “식스 센스에서 브루스 윌리스가 글쎄 유령이었다는 거야!”를 말해야 한다는 것. 물론 첫 작품 <템프 파일>을 읽은 후면 <배웅>이나 <콜라 소녀>가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대강 짐작이 가겠지만 전혀 모르는 채로 읽는 것이 당연히, 훨씬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이 가운데 표제작 <가정식 백반 맛있게 먹는 법>으로 말하자면, 책의 제목으로 사용했을 만큼 대표작이고, 말 그대로 연일 만석과 셀 수 없는 앵콜공연을 기록할 정도로 성공작이라 따로 소개를 해야 마땅하다. 2008년 2인극 페스티벌 희곡 공모 당선작이기도 하다. 김숙종이 부여에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시골마을 출신이라, 어릴 때부터 소위 농촌봉사를 온 대학생들을 많이 보았다고 한다. 주로 남학생들은 노동을 하고, 여학생들은 동네 아이들 학습지도와 (지긋지긋한 여성들의 세월이여!) 식사당번을 주로 했을 터이다. 아이들이 보기엔 구름같이 키가 크고 허여멀겋게 생기기도 잘 생긴 도시에서 온 언니 오빠들이 사실 알고 보면 어림없을 만큼 덜 성숙한 청년들이었음을 알 턱이 없어서, 이들이 함부로 표현한 ‘순수한’ 애정과 관심이 언제까지 지속될 줄 알았을 것이다. 김숙종 자신이 집으로 돌아간 이 도시 출신 언니 오빠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이 없어서, 다시 편지를 보내도 여전히 답장을 받지 못하는 일종의 배신, 비록 그들이 현장에서 보여준 애정과 관심이 진심이었다는 건 나이가 든 지금도 믿고 있지만, 현장에서 철수한 이후에도 아이들의 마음 속에 여지를 두고 떠난 건 잘못된 일이었다고 주장한다. 맞다. 잘못된 거다. (나도 경험 있다. 반성한다. 그래도 난 답장은 해줬다. 깔끔하게 정리했다고 믿기는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아예 가지 않은 것만 못했다.)
  여기에 한 가지 보태자면 앞에서 이야기한 네 번 신춘문예 최종심사까지 올라가 미역국 먹은 일. 김숙종은 회사 사장이 ‘아무’ 대학이라도 좋으니 졸업장을 따오라고 했을 때, 왜 문예창작과를 선택했을까. 나는 아무런 근거 없이, 십 수년 전, 부여에서도 한참 들어가는 시골 동네 살 때, 도시에서 농촌봉사활동을 온 흰 피부의 도시 언니 오빠들 가운데 특히 정이 많이 들었던 누군가가 혹시 이이에게 글짓기를 지도했고, 넌 글짓기에 소질이 있으니 앞으로 작가가 되면 성공하겠다고 다분히 립 서비스를 펼쳐, 어린 마음에 꿈을 만들어주었던 것은 아닐까 추리해본다. 하여튼 작가는 대학을 졸업했고, 졸업하기도 전부터 극작을 시작했으며 무려 네 번 최종 심사까지 올라갔다가 바나나 껍질을 밟는다. 그러니 참 미치고 환장할 노릇. 어떻게 보면 최악의 상태다. 그러니, 인간이여, 섣불리 누군가에게 꿈을 심어주지 말라. 아니, 신중하고 또 신중하라.
  이런 심리상태에서 희곡 <가정식 백반 맛있게 먹는 법>이 시작한다. 단 두 명만 출연하는 2인극이다. 먼저 김종태. 어려서 ‘사이나’ 즉 시안화칼륨, 또는 청산가리를 이용해 꿩을 잡아먹던 아버지와의 추억이 있는 서른여덟 살, 독신의 만화가. 만날 방안에 틀어박혀 만화만 그리기 때문에 운동부족으로 통통하고 햇빛을 보지 못해 창백한 피부색을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 같은 교회에 다니던 형이 스케치북을 사 주며 그림에 소질이 있으니 만화가나 화가가 되면 성공하겠다는 믿음을 주어 그게 평생의 소명인 것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으나 세상일 가운데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어서 여전히 거의 완전한 무명의 만화가로 겨우 밥만 먹고 산다.
  양상호. 백과사전 외판원. 아내와 딸을 먹여 살리느라 하루 종일 돌아다녀 얼굴이 새까맣게 탔다. 지금은 한 가족이라 가족끼리 동침을 삼가는 율법에 따라 가까이하지 않는 아내를 꼬드기기 위하여 한 시절 교회에 다녔고, 아내에게 잘 보이기 위해 모든 선하게 보이는 행위를 친절한 언어로 수행하는데 게으름이 없었다. 그리하여 아내를 맞이하게 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당시 꾀죄죄한 몰골을 한 동네 꼬마가 그림을 곧잘 그리는 것을 알고, 꼬마에게 스케치북까지 선물하며 스케치북에 꽉 차게 만화를 그리면 자신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헛된 믿음을 준 것을 당연히 기억하지는 못한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 만화만 잘 그리는 코찔찔이 소년이 서른여덟 살의 장년이 된 어느 여름날, 남의 집 현관문이 저절로 열리게 만드는 재주가 남다른 양상호가 화장실이 급하니 선처를 부탁한다는 애절한 호소를 해 김종태의 집에 들어오고, 능수능란한 영업력을 자랑하는 고수답게 52권에 달하는 백과사전을 195만원에 사고 팔겠다는 계약서에 서명하게 만든다. 김종태. 시간이 흐르면서 양상호가 저 먼 기억 속에 만화가의 꿈을 심어준 채 다시 찾아오겠다는 허튼 약속을 날리고 사라져버린 교회 형인 것을 알아낸다. 만화가의 꿈은 그저 꿈이었음을, 허튼 희망을 주는 건 못할 짓이었다고 벌써 자각하고 있던 김종태는 이제 양상호를 벌주기로 결심을 하는데, 어떤 벌인지 내가 일러드리지 않을 건 벌써 짐작을 하고 계시리라.

 

  재미있다. 내가 희곡을 읽은 내력이 보잘것없어 삼가고 있지만 속으로는 정말 탁월한 우리의 현대 희곡이라고 말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쉽고 익숙하다. 희곡집 구입을 머뭇거리시는 분을 위한 추천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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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2-01-04 09:4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오호, 이런 작가가 있었군요. 작가 이력이 참 재미납니다. 정말 농활 간 대학생 청년이 꿈에 부채질을 했을까요? ㅋㅋㅋ 저도 농활 가서 그런 적 있는 거 아닌가 돌아봤는데 전 애들하고 놀기는 했어도 꿈 부풀리는 이야기는 안 했던 거 같습니다. ㅋㅋ 아 근데 답장은 안 했네요; 잘못했네 잘못했어...

암튼 이 작가 책 읽어보겠습니다.

Falstaff 2022-01-04 09:54   좋아요 5 | URL
ㅎㅎㅎ 잠자냥 님도 농활 경험이 있군요.
전 걍 땅만 파다 온 거 같은 기억입니다. 특히 아이들하고 접촉을 피했는데, 그래도 편지가 와서 답장 한 번 해준 적 있습니다.

이 책은 별 다섯 주긴 했지만 명작이라거나 그런 수준은 아니고요, 뭤보다, 제목처럼 쉽고 재미있습니다. 현대 프랑스 희곡 읽다가 이 책 읽으니까 을매나 개운한지 말입죠. ㅋㅋㅋㅋ

coolcat329 2022-01-04 11: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재밌겠어요. 무엇보다 쉽다니~~♡

처음에 골드문트님 요리책 보신 줄 알고 놀랐어요. ㅋ

Falstaff 2022-01-04 11:56   좋아요 2 | URL
ㅋㅋㅋ 요리책.
딱 그 작품이 대표작인데요, 막판 정말 역발상적 결말이 재미납니다! ^^

stella.K 2022-01-04 16: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쿨캣님과 같은 생각을 했어요.
골드문트님은 소설 전문인데 웬 요리책...?
이젠 거기까지 지경을 넓히시려나 보다 했습니다.ㅋㅋ
근데 정말 재밌을 것 같아요.
작가 이름이 약간 독특하네요.
하지만 꿈조차 없으면 삭막해서 어찌 살겠습니까? OTL~

Falstaff 2022-01-04 16:48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 그렇습니까, 요리책?
제가 간단한 먹거리는 좀 만들지요. 저한테 배워서 큰 아이도 음식 만들어 지 딸한테 먹이는 거 찍어 보내고 그렇습니다. ㅋㅋㅋ
주말에 한 끼는 거의 빼지 않고 제가 만들어 마눌한테 상납합니다. 이젠 귀여움도 좀 받아야 할 때거든요. 읃어 터지기 전에 미리미리. ㅋㅋㅋㅋ

꿈은 꿈일 때 좋지, 그걸 특히 해도 해도 안 되는 걸 (사실 아주 조금의 차이로 말이지요) 기어이 하려면 얼마나 애를 써야 하겠습니까. 에휴... 전 생각만 해도 불쌍하고 그런 걸요.

stella.K 2022-01-04 19:01   좋아요 3 | URL
ㅎㅎㅎ 노후보장 확실히 하시는군요.
잘하셨습니다.
울엄니는 일찌기 청상이 되셨는데
교회에 비슷한 연배의 권사님들 얘기들으면
이 나이에 영감 시집살이한다고 푸념이 이만저만 아니더군요.
아마 울아부지도 살아계셨으면 엄마깨나 들볶았을 것 같은데
그런 거 보면 엄마 늦복 같다는 생각도 들고...
앗, 제가 골드문트님 앞에서 별소리를 다합니다.
용서해주시와요. >.<;;ㅋ

mini74 2022-01-04 18: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저희 엄마 일기장에 아버지는 망할 놈 ㅠㅠ 저희 아버지는 직장다니는 선비? 타입이셨거든요. 딱 직장만 , 모자라는 생활비도 다섯아이 학비며 공부며 집안 공사조차도 엄마몫. 그럼에도 엄마는 아버지 마니 그리워하십니다 ㅎㅎ 울 남편이 그렇게 물도 못 맞추면서 커피 타준다는데는 이런 이유도 있겠군요. 별 다섯개 , 설렙니다 ㅎㅎ

Falstaff 2022-01-04 19:23   좋아요 2 | URL
ㅎㅎㅎ 인생입지요.
이 책 어렵지도 않고 별 다섯을 향유할 명작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만, 무엇보다, 쉽고, 재밌습니다.

그레이스 2022-01-04 19: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닉네임 바꾸셔서 그냥 지나갈뻔 ㅎㅎ
남의 집 대문을 열게하는 외판원 ^^
전 여기서 알라딘 장바구니를 열게하는 골드문트님을 봤습니다 ㅎㅎ

Falstaff 2022-01-04 19:24   좋아요 3 | URL
아하, 낚시꾼을 보신 거네요? ㅋㅋㅋ 고맙습니다!!!!
 
라스트 울프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구소영 옮김 / 알마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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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스트 울프≫를 읽으면서, 이번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접경을 이루는 두에로 강변에 아홉 마리 남은 늑대에 관한 서사보다도, 문장이 끝나지 않고 쉼 없는 쉼표를 나열시킬 때 독자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관해 생각이 많았다. 작품의 앞 부분 조금을 인용해보자.

 

  “그저 웃음이 났다, 거리낌 없이 튀어나온 웃음이었지만, 그러다 한편으로는 허무함과 다른 한편으로 멸시감 사이에 어떤 차이라도 있는가, 또한 그 모든 게 대체 무슨 상관인가 하는 데 온통 정신이 팔리고 말았다, 왜냐면 이게 늘 제 곁에 따라붙어, 돌이킬 수 없이 세상만사 모든 것에 늘 상관이 있고, 세상만사, 모든 곳에 있는 모든 것에서 번져나가니까, 게다가, 실로……”

 

  이게 첫 문장이자 마지막 문장이다. 중편 <라스트 울프>는 단 하나의 문장으로 되어 있다. 보이는 것처럼 “그저 웃음이 났다,”의 구두점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다. 역자 구소영은 헝가리 어가 쉼표만 찍어 놓으면 얼마든지 길게 늘여 쓸 수 있는 특징이 있다, 라는 취지로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정작 딱 한 문장으로 된 작품을 정말로 보고, 읽게 되니, 혹시 크러스너호르커이가 의도적으로 문장을 마침표가 아닌 쉼표로 구분짓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말, 문장의 경우 주어, 목적어, 동사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많다. 주어는 가끔 생략되기도 한다. 바로 쓴 문장처럼 “~다.”로 대부분의 문장이 끝난다. 그래 인용한 부분에 첫 절 “그저 웃음이 났다,”가 쉼표로 끝나는 바람에, 나만 그런지 모르지만 독자로 하여금 “~다”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절을 끊지 말고, 쉼표의 취지에 맞게 아주 잠깐만 숨을 고른 다음 곧바로 이어서 읽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생각이 강박인지는 모르겠다. 강박이 아니라는 전제로 말하자면, 크러스너호르커이는 자신의 중편 <라스트 울프>를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으라고 주문한 것일 수 있다. 이 작품보다 더 짧은 <헤르먼>의 경우에는 마침표가 찍힌 문장으로 나누어져 있으니, 크러스너호르커이가 애초에 상상을 초월하게 긴 문장을 선호하는 작가라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그랬을까.
  전직이 교수인지, 하여튼 한 시절 교수라고 불리기도 했던 남자가 베를린의 꾀죄죄한 주점 슈파쉬바인의 바에 앉아 제일 싸구려 맥주 슈턴부르크 한 잔을 두세 시간, 혹은 서너 시간에 걸쳐 핥아 먹듯 하는 게 습관이었는데, 이이에게 어떤 것을 주문하겠느냐고 묻지도 않고 무조건 슈턴부르크 한 조끼를 무례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테이블에 텅, 내려놓는 헝가리 출신 바텐더를 상대로, 한 때 자기를 초대한 마드리드의 단체 덕택에 스페인의 엑스트레마두라에 간 이야기를 한다. 두에로 강변에 모두 아홉 마리로 구성된 늑대 집단이 있었는데 이 늑대들이 좀 얌전하게 있었더라면 북아메리카에선 늑대 복원 사업을 시작하던 1980년대에 오히려 보호를 받았을지도 모르건만, 비록 늙고 약한 것들에 해당하긴 했지만 어쨌든 가축을 잡아먹는 바람에, 그리고 늑대라는 유럽인들의 음습한 악마주의의 영향으로 괜히 과장된 두려움 때문이겠으나, 한 마리, 한 마리 씩 잡아 죽이기 시작했다. 그래 독일의 싸구려 맥주 슈턴부르크 한 잔을 앞에 놓고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헝가리 출신 바텐더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어쨌든 처음부터 끝까지 들은 헝가리인 바텐더처럼, 독자도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끝까지 다 읽으라는 작가의 취지로, 끊임없이 쉼표를 나열해 단 하나의 문장으로 작품을 쓴 것이라고 이해했다.
  못 믿겠으면 읽어보시라. 마치 내가 헝가리인 바텐더인 듯, 처음엔 도대체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그리 중요해보이지도 않고, 그래서 뭐가 문제인데? 라고 어깃장을 놓고 싶기도 하고, 거기다가 도무지 끊어지지 않는 문장이 낯설기도 하고, 하필이면 읽은 날이 휴일 낮술에 절어 피곤이 가중된 월요일 오전이라면, 호시탐탐, 어떻게 책을 그만 읽을 수 있는 이유를 만들까, 궁리를 했다가, 이제 본격적으로 늑대 이야기가 나오면, 여태 했던 딴짓을 멈추고 솔깃해 교수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헝가리 출신 바텐더처럼, 어느새 크러스너호르커이의 문자에 눈을 고정시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작가는 독자가 <라스트 울프>를 단숨에 읽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함께 실린 <헤르먼>은 같은 사건을 “사냥터 관리인”과 “기교의 죽음”이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 사냥터 관리인은 곧바로 헤르먼이란 사람을 지칭한다. 두 작품을 시간적 차이를 두고 읽으면 모르겠지만 <라스트 울프>를 읽고 바로 <헤르먼>까지 읽으면, 사실 늑대와 헤르먼이 달리 발음하는 하나의 대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특히 벌판과 삼림지대가 같이 있고, 이에 걸맞는 음산하고 비정하고 잔인한 동화가 널리 구전되는 동, 북유럽의 경우에, 늑대와 헤르먼은 이들 주민에게 막연한 공포를 제공하는 개체들이다.
  물론 늑대와 달리 사냥터지기이자 능숙한 덫 사냥꾼인 헤르먼은 나중에, 살짝 맛이 갔다고 봐야 할 수준이 되어, 주민들이 제시한대로 과하게 번식한 포식동물을 사냥하다가, 결국엔 진짜 광포하고 무모하고 최상위의 포식자인 사람을 대상으로 덫 사냥을 시도하고 성공하는 캐릭터로 변모해, 두에로 강변의 늑대보다 훨씬 위험한 야수가 되긴 한다. 그래 어떤 의미에서 헤르먼이야말로 유럽의 마지막 늑대라고 불릴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이 책에 표제작하고 함께 실릴 수 있었지 않을까 싶었다.
  <헤르먼>의 첫번째 판인 “사냥터 관리인”은 맞던 틀리던 하여튼 읽어내긴 했는데, 아직도 풀리지 않는 건 두번째 판 “기교의 죽음”의 부제를 “미시마 유키오와 상반하여”라고 했을까, 하는 점이다. 정작 본인은 별다른 이상이 없음에도 신체검사에서 탈락해 입대하지 못해 전쟁에도 나가지 못했던 인물이 자위대 앞에서 미국과 굴욕적인 군사협정을 맺고자 하는 현 정부에 대항하여 쿠데타를 일으키자고 극우 보수적 연설을 한 후에 할복 자살을 해치운 미시마 유키오를 이야기한 건 아닐 터. 짐작하건데 그의 정치적 행보와 전혀 다른 극단의 심미적 문장과 미학을 염두에 두고 부제를 지었을 것이라 보지만, 사실 내가 미시마 유키오를 별로 읽어보지 못해서 감이 안 오기도 할 터이다.

 

  짧은 작품들이다. 가볍게 접근했다가 코 깨지기 쉽겠다. 그렇다고 못 읽을 만큼 어렵지도 않다. 처음부터 신중하게 읽기로 마음먹으면 충분히 즐길 만하다. 여러 독자의 감상평을 듣고 싶은 책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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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1-03 09:2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앗 닉네임을 바꾸셨군요. 골드문트도 좋네요. 이번에는 헤세의 그 골드문트 맞는거죠. 혹시 제가 모르는 또다른 골드문트가 있는건 아니겠죠. ㅎㅎ

쉼표만으로 이루어진 문장이라니..... 유럽 사람들 소설에서 가끔 이런 식으로 쓰는 방법에서 뭔가 다른 방법을 시도하던데 당혹스럽더라구요. 주제 사라마구같은 경우 처음부터 끝까지 문단이 하나도 나뉘지 않고 따옴표 하나도 없는 소설을 쓰잖아요. 읽다가 좀 질리던데요. 도대체 어디서 끊어서 쉬어야 할까?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 그러고 보면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들이 좀 숨막히는데 이런 서술방법도 소설의 분위기를 더 잘 전달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겠구나라고 생각하긴 했어요. 이 작가 역시 골드문트님 말씀대로 마침표 찍지말고 한번에 몰아쳐서 읽으라고 하는 의미일수도 있겠구나싶네요. ㅎㅎ

Falstaff 2022-01-03 09:37   좋아요 4 | URL
넵. 헤세의 골드문트, 맞습니다. 십대 시절의 로망이었습지요. 당시에 친구들에게 골드문트라고 부르라고 했더니 그게 누군지 아는 놈이 하나도 없어서 말입죠.
옛 이야기를 한 번 했더니, 알라딘에선 모르시는 분이 없더라고요.
게다가 골드문트가 폴스타프처럼 늙는 것도 재미나지 않습니까. 그래 서슴없이 폴스타프의 젊은 시절 로망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 ㅋㅋㅋㅋ

저도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쓴 <소멸>이 인상적이었습니다. 5백쪽의 장편소설인데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고, 각 부가 단 하나의 문단으로 되어 있더군요. 읽은지 오래라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고 글자 빽빽했던 것만... ^^;;;
<라스트 울프>는 읽으면서 위에 쓴 기분이 팍팍 들더라고요. 그럼에도 완전 아마추어의 의견입니다. 그저 이런 의견도 있구나, 정도로만 참고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잠자냥 2022-01-03 09:3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은 여러 사람의 독자평을 읽어보고 싶은 작품이더라고요, 이웃 중 한분이 이 작품에 관한 이런저런 정보를 알려주셨는데(골드문트 님도 아시는 분) 그 글을 읽고 다시 읽으면 이해에 좀 더 도움이 될 것 같고 그렇습니다. 미시마 유키오 부분은 저도 골 님이 이해하신 것처럼 미학적 관점에서 접근한 것이라고 생각했답니다.

Falstaff 2022-01-03 09:47   좋아요 2 | URL
옙. 이런 책은 여러 독자가 읽고 자신의 감상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다양한 감상이 뒤따를 거 같아요.
근데 저는 <헤르먼>을 읽으면서 왜 올가 토카르추크의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주인공 두셰이코 선생을 떠올렸는지 모르겠습니다. ㅋㅋㅋ

잠자냥 2022-01-03 12:58   좋아요 2 | URL
맞아요. 저도 두셰이코 여사 떠올랐어요. 둘이 만나면 아주 그냥 장난아니겠다 싶더라능 ㅋㅋㅋㅋㅋ

자목련 2022-01-03 09:3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 님, 반갑습니다!
올해에도 소개해주시는 좋은 책들 기대할게요.

Falstaff 2022-01-03 09:48   좋아요 2 | URL
옙, 자목련 님. 고맙습니다.
자목련 님도 좋은 시, 우리 소설 소개해주세요!

수이 2022-01-03 09: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이 어디 가신 거지? 원래 골드문트님이셨나? 하고 잠깐 당황했습니다. 🙄

잠자냥 2022-01-03 09:47   좋아요 4 | URL
2022년에 회춘했다능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2-01-03 09:49   좋아요 3 | URL
ㅋㅋㅋ 잠자냥 님 말씀대로 회춘한 거 맞.... 회춘인가, 주책인가, 이것이 문제군요!

수이 2022-01-03 10:06   좋아요 2 | URL
저는 그럼 열여섯짤로 회춘! ㅋㅋㅋㅋㅋ골트문트님 새해 건강한 모습으로 자주 뵙도록 해요. 잠자냥님 글 올리셨나 가봐야지~

Falstaff 2022-01-03 12:00   좋아요 1 | URL
열여섯, 고 1 시절, 딱 <지와 사랑>을 읽은 시기고, 자장면 집 골방에서 생전 처음 제 돈 주고 쐬주 한 병 시켜 먹었을 때입니다. ㅋㅋㅋㅋㅋ

얄라알라 2022-01-03 11: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에 담긴 작가의 의도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으라˝!!

Falstaff 2022-01-03 12:00   좋아요 1 | URL
옛. 이 작품은 그렇게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일 거 같아요!

coolcat329 2022-01-03 11: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저도 반갑습니다!
사진도 골드문트로 바꾸셔야 완성같은데요~~^^

이 책 일단 찜해두겠습니다.

Falstaff 2022-01-03 12:01   좋아요 4 | URL
흠.. 사진은 곤란합니다.
저도 나름대로 인터넷 뒤져보지 않았겠습니까. 그랬더니 주로 영화에서 방랑하는 젊은이 몰골, 눈이 퀭하니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 대부분이더라고요. ㅋㅋㅋ

잠자냥 2022-01-03 12:59   좋아요 3 | URL
아니면 닉네임을 골드뭉툭으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cott 2022-01-03 18:35   좋아요 0 | URL
저도 🖐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scott 2022-01-03 11: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프로필 사진도 골드문트를 원합니다! 🖐^^ㅎㅎ

Falstaff 2022-01-03 12:02   좋아요 3 | URL
으떻게 늙은 골드문트다, 생각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ㅋㅋㅋㅋ

mini74 2022-01-03 19: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단 하나의 문장으로 된 소설이라니 신기하네요 ~~ 근데 ㅠㅠ 제가 생각한 골드문트는 이렇지 않아요. 곱게 늙길 바랐는데. 배가 나오다니 ㅎㅎㅎ 골드문트님덕에 새로운 작가들을 많이 알게됩니다 ~

Falstaff 2022-01-03 19:57   좋아요 1 | URL
음하하하.... 지금 제 모습이 폴스타프하고 거의 비슷합니다.
골드문트 시절을 보신 분이 몇 분 계신데, ㅋㅋㅋㅋ
아마 그럴 듯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

2022-01-05 1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05 19: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년에는 책 읽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애초에 2백 권 미만을 읽고자 했습니다만, 223권, 6만9천 페이지를 읽었군요. 내년엔 기필코 2백 권 미만을 달성하겠다고 각오해봅니다. 이 가운데 올해 무척 재미있게 읽은 책 열 권과, 최고라고 생각하는 한 권을 골랐습니다. 언제나 마찬가지로 책 읽는 것에 관해서 잘해봤자 딜레탕트 수준인 제 기호에 좋았다, 최고다, 하는 것이니 이 목록을 적극적으로 참고하시면 곤란하다는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올해의 책을 선정하는 일은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는 좋은 작품입니다. 그러나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이라 새삼스레 다른 책과 견주는 것이 옳지 않게 여겼습니다. <갈라테아 2.2>는 작 초반의 높은 진입장벽이 문제였고,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은 책을 읽은 후에 큰 충격이었으나 시간이 가면서 빠르게 열기가 식었습니다. <레베카>, <호모 파버>, <에쿠우스>, <어린 당나귀 곁에서> 그리고 <케이크와 맥주>는 여러 번 목록에 넣었다가 빼고, 다시 넣고 또다시 제외하는 작품들이었습니다.
  2021년 Top 10, 소개합니다. 순서는 제가 읽은 날짜 순입니다.

 

 


  2021년의 Top 10

 


1. 미셸 투르니에, <황금 구슬>

  방주의 주인 노아가 낳은 아들 함의 자손들. 이 가운데 오아시스에 정착해 농사를 짓는 부족이 있다. 결혼식이 있고, 이를 축하하기 위한 연회를 위해 광대패들이 도착한다. 음악이 이어지고 은 장신구로 치장한 흑인 무희 제트 조바이다. 공연의 불꽃이며 혼. 베일을 쓴 얼굴과 발, 그리고 매끈한 검은 피부의 배에 가죽 끈에 매달린 채 빙글빙글 돌아가는 황금 구슬. 이 관능적 묘사. 날이 새고 이미 떠나버린 광대들의 숙영지 모래밭에 떨어진 조바이다의 황금구슬을 주워든 소년 이드리스는 몇 달 전 랜드로버를 타고 와서 자신의 사진을 찍은 사진사와 동행한 프랑스 여인을 찾아 파리로의 여행을 감행하는데, 나중에야 황금 구슬, 그건 대가를 요구하는 자유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투르니에의 사진 행위와 철학을 가미한 기호가 어떻게 문장이 되고 소설로 엮이는지를 궁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일독의 가치가 있을 듯.

 


2. 빅토리아 토카레바, 《티끌 같은 나》

  동토의 왕국, 철의 장막으로 둘러싸인 소비에트 연방 속에서도 언제나 봄의 싹을 틔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미 씨앗에서 발아해 태양을 향해 솟구칠 준비를 한 채 도사리고 있던 싹들은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시절을 거쳐 고르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맞아 힘껏 도약을 한다. 이 속에 류드밀라 페트루셉스카야와 더불어 빅토리아 토카레바도 있었다. 배급경제가 빈사를 헤매면서 자신들이 소비에트를 지배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머물던 프롤레타리아들은 다시 가난과 상점 앞의 긴 줄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소설 역시 물질적 곤란함과 상대적으로 더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여성성을 그려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토카레바. 이 시크하고 쿨한 작가는 가난 속에서 치사한 애인이 도망가도, 킁, 콧방귀 한 번으로 가비얍게 물리쳐버린다. 궁상맞을 상황을 현명하고 시크하게 빠져나가는 힘이 독자에게 진하게 어필, 이이의 다른 작품을 기대하게 만든다.

 


3. 살만 루시디, <무어의 마지막 한숨>
 

   루시디의 무시무시한 입담이 독자를 압도하는 명편. 지금은 절판이지만, 모 출판사에서 머지않은 미래에 다른 이의 번역으로 인쇄를 할 예정이라는 귀띔을 받았다. 독자 제위께서는 아무쪼록 이 책의 제목을 기억하셨다가 책방에 깔리자마자 구입을 망설이지 마시라. 책이 두 권 6백 쪽 가량 되지만 한 번 잡았다, 하면 여간해 손을 뗄 수 없는 작품이다. 굳이 재미의 수준을 말씀드리자면, 장담하건데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하고 계급장 떼고 맞장을 붙어도 꿀리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 무어는 인도를 처음 발견한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서 뿌린 씨를 받아 ‘다 가마’의 성을 갖고 있는 모계, 무어족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물러날 당시의 술탄 보압딜의 후예가 부계이니 대단한 가문인데, 임신 넉 달 만에 출생을 하고, 인생을 2배속으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의 거한이다. 여기에 루시디 특유의 현대사를 마구 섞어 드런 사랑 이야기를 만들어냈으니 어찌 Top 10 한 자리를 꿰지 않을 수 있을까.

 


4. 앨리 스미스, <데어 벗 포 더>
 

   문제작이라고 하면, 문장적 문제작일 수도 있고, 소재의 문제작일 수도 있다. 이 책은 아이디어의 문제작이다. 소설책 깨나 읽는다고 생각하는 나는 이런 식으로 작품을 시작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거 같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인간이, 한 집에서 파티를 열었는데, 초청받은 사람이 함께 가지 않겠느냐는 말만 듣고 난생 처음 간 집에서, 밥 먹고, 술 마시고, 슬그머니, 외투와 휴대전화와 기타 등등은 그냥 소파 위에 둔 채로 이층에 있는 (욕실이 딸린)손님방으로 슬그머니 들어가더니 안에서 문을 철커덕, 잠근다. 갑자기 사라진 손님이 손님방에 아직도 있다는 걸 알아챈 부부는 얼마나 겁나고 치가 떨렸을까. 이 문제의 남자 마일스 가스 씨를 방에서 꺼내기 위해 부부는 별의 별 사람에게 연락을 하고, 이게 또 특종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방송사는 생방송을 찍는 등 난리가 벌어지는데, 이런 일이 진짜로 일어날 수 있다고 상상이나 해보셨나? 발칙하고 끔찍하고 참신한 아이디어. 이 책 이후로 난 앨리 스미스의 팬이 되었음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5. 패트릭 화이트, <전차를 모는 기수들>
 

  노벨문학상을 탄 유일한 오스트레일리아 작가의 대표작. 독특한 캐릭터를 가진 네 명의 소외받는 주인공이 백호주의의 땅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생존해나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정신이 조금 모자라고 못생겼으나 사람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능력이 있는 것 같은 대 장원과 저택의 상속 독신녀 헤어 양. 신체 건강하고 선한 마음을 지녔으나 주정뱅이 남편의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가난한 성녀 고드볼드 부인. 짐승 취급을 받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출신으로 입양된 백인 가정에서 도망한 청년 앨프 더보, 그리고 독일 태생 유대인으로 전직 대학교수였지만 가스실 앞에서 생명을 구해 이민을 온 후엔 공장 직공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유식하고 현명한 모르데카이 히멜파르프. 이들이 서로를 의지해가며 공존을 위해 애쓰는 광경이 안타깝다. 약자에 대한 비방, 비웃음, 멸시, 폭력 등을 구경하는 일이 산뜻하지는 않지만 이에 대항하는 약자들의 연합이 또한 흐뭇하다. 강자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폭력 앞에 침묵하는 다수들, 너희들 모두 유죄다.

 

 


6. 야 지야시, <밤불의 딸들>

  이 책은 에바리스토의 역작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의 출연진 가운데 한 명이 다른 인물에게 읽어보라고 추천하는 장면 때문에 선택했다. 그러니 올해 Top 10에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이 들지 못한 것을 대체하기도 한다고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가나의 옛 아샨티 왕국 맘풍 출신 미국 이민자 야 지야시의 데뷔작. 첫 작품으로 지야시는 미국 문학계의 유망한 샛별로 등장한다. ‘마메’라고 하는 아프리카의 큰 어머니에게 고귀한 두 딸이 있었으니, 하나는 아프리카 노예수출 사업의 황금해안가에 터를 잡고, 다른 하나는 노예로 떨어져 영국을 거쳐 미국땅으로 흘러간다. 이후 수백 년 6대를 지나 서로 같은 혈통에서 시작한 형제임을 모르는 상태에서 만나 황금해안에 들르게 된다. 각기 6대에 이르는 흑인들의 지난 개인사가 흥미진진하다. 고귀한 가문의 큰 어머니이지만 동시에 노예 출신이기도 한 마메. 천국에서 추방되어 노예생활을 했고, 이제 해방을 맞았지만 아직 흑인에 대한 차별로 고통받고 있다는 주장일 수도 있다.

 


7. 존 버거, <결혼식 가는 길>
 

   짧은 노벨라 분량의 소설. 그러나 문장 하나하나를 그저 지나칠 수 없어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던 작품. 헌옷 장수 지노가 철도원 2급 신호수의 딸 니농을 사랑하게 되고, 그것도 열렬하게 사랑하게 되지만, 니농은 한 시절 우연한 충동으로 불장난 한 것 때문에 그만 HIV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 당시 HIV 감염자는 마치 저 중세시대의 페스트 환자나 방울을 달고 다녀야 했던 나환자처럼 극단의 기피와 혐오의 대상이었던 것. 하지만 지노는 니농을 너무도 사랑하여 HIV임에도 불구하고 결혼하기로 결정, 이탈리아 지노의 고향집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혼인을 위하여 아버지 2급 신호수는 프랑스쪽 알프스 모단에서 이탈리아 포강 하류의 작은 마을 고리노까지 달려가고, 어머니는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에서 장거리 버스를 타고 고리노로 향한다. 인근 주민들은 이들을 향해 거친 욕설을 퍼붓는 가운데 지노가 직접 잡은 20kg짜리 농어와 친척들이 친절하게 요리한 음식을 차리고 잔치가 벌어지는 따뜻하면서도 슬픈 이야기.

 


8. 앙리 보스코, <이아생트>

   이 작품을 Top 10에 올린 건 전적으로 내 취향 때문이었다. 바꿔 말하면, 다른 분들은 <이아생트>를 읽기 시작해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더 읽기를 포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매혹적인 것은 몽상이다. 굳이 음악과 비교하자면, 마치 아무 것도 아닌 것, 이미지 말고는 전혀 없는 듯한 드뷔시의 작품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5백만 평에 이르는 저 광막한 평야. 그 위에 단 하나의 호롱불이 빛을 발하고 있는 라 주네스트, 금작화라고 불리는 작은 집. 그러나 암벽 위에 올려져 있어서 밤이 내리면 마치 망망대해 속의 반짝이는 등대처럼 유일한 불빛, 또는 모종의 신호를 올리고 있는 단 하나의 지표. 넓고 넓은 암흑의 평야에 유일하고도 인류의 마지막인 듯싶은 영혼일지도 모르겠다는 상념을 들게 하는 곳. 이 마지막 집, 라 주네스트를 아직도 견디게 하는 것은 한 인간의 고통과 사색, 침잠, 상상, 그리고 몽상. 이 몽상에 동감할 수 있는 독자는 만족할 것이고, 아닌 독자는 책 읽기를 멈출 수밖에 없으리라.

 


9. 애니 프루, 《브로크백 마운틴》
 

  애니 프루를 “단편의 달인”이라 불러야 마땅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될 단편집. 미국의 북동부 삼림지역에서 살다가 웬만큼 나이가 들어 와이오밍으로 이사를 하고, 자연 풍광에 반해 단편집 <와이오밍> 시리즈를 쓴 프루. 이이의 대표 단편을 모은 책. 황량한 서부지역을 배경으로 서부는 서부인데 서부도 여전히 사람이 사는 곳이란 전제로, 험한 자연을 배경으로 한 무협지 대신 체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썼다. 사람의 이야기. 나의, 당신의, 아니면 전철 저편에 앉아 가볍게 코를 고는 승객의 이야기일 수도 있는 애절하기도 하고, 거칠기도 하고, 날씨를 닮아 모질기도 하고, 때론 눈물샘을 콕 누르는 듯 쓸쓸하기도 한 이야기, 이야기들. 그런 것들을 애니 플루는 가장 얇은 비단실로 촘촘하게 누벼놓았다.

 

 


10. 마르그리트 뒤라스, <태평양을 막는 제방>

   애초에 가능하지도 않은 일에 희망을 걸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과, 식민지 원주민의 모든 기대와 노동력을 바쳐 남중국해의 조수를 막는 제방을 건설하려는 어머니. 단 하룻밤 사이에 이민 온 식민지 거주자 가정과, 근처 원주민들의 희망을 싹 쓸어간 태평양은 이제 어머니와 남매에게 절망, 그리고 허무와 탈주의 바람만을 남겨놓는다. 그러다 딸/누이의 결혼을 대가로 어머니는 다시 제방을 건설하는 꿈을 꾸고 오빠 조제프는 지긋지긋한 해변의 소금밭을 떠날 기회를 엿본다. 이들의 절망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 모습을 구체적으로 짚어내는 뒤라스의 눈매와 너무도 공감을 주어 서늘하기까지 한 문장들을 읽어낸다. 모차르트는 하스킬 노파가 어쩔 수 없어서, 그럴 수밖에 없어서 건반을 누를 때 절창이듯이, 절망에 대한 공감 역시 어쩔 수 없이 읽어야 할 때 절절하다.

 

 

 

2021년 최고의 한 권. 자우메 카브레, <나는 고백한다>

  이 책은 다 읽고 덮는 순간 올해의 책이 되리라 직감했다. 다른 작품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완벽한 서사로 밑받침을 하고, 마치 돌탑을 쌓아올리듯 탄탄한 구조로 저 수백 년에 이르는 악의 연대기를 한 눈에 조망할 전망대를 마련했다. 그러면서도 평생을 걸고 얻고자 한 유일한 사랑을 위한 로망스까지 어디 한 구석 도려내 비난할 곳을 찾을 수 없다. 인류 역사상 지구가 편평했을 시절, 보편적 야만 속에서 가장 극악한 악에 의하여 희생당한 수사의 주머니에 든 단풍나무 씨앗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양심적인 수사의 시신을 양분으로 성장한 단풍나무로 만든 바이올린 비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시작하자마자 또다시 살인이란 악에 의하여 소유주가 바뀌더니, 20세기, 유대인 노파의 정수리에 총알이 박히면서 또다시 악의 손에 들었다가 전쟁이 끝나자마자 실패한 수사이자 잔혹한 골동품 수집상의 금고 속으로 들게 되니, 새로운 주인은 만년에 게으른 살인자라 불리는 알츠하이머의 손아귀에서 이 글을 쓰는 아드리아 아르데볼 박사의 수재 아버지 펠릭스 아르데볼이었다. 14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을 거쳐 단번에 21세기까지를 망라하는 거대한 악의 연대기. 2021년에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당분간 이 작품을 능가하는,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은 작품이 과연 있을까 궁금하다. 알라딘 고객 평점 가운데 과연 누가 먼저 만점을 주지 않을지도 매우 궁금한 명작.

 

 

 


지난 몇 년 간의 올해의 책

 

2020년, 헤르만 브로흐, <현혹>


2019년,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저항의 멜랑콜리>

 


2018년, 김태정,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2017년, 아달베르크 슈티프터, <늦여름>

 

 


2016년, 이보 안드리치, <드리나 강의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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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2-01-03 14:42   좋아요 2 | URL
그동안 나이든 골드문트였다니까요. ㅋㅋㅋ

그레이스 2022-01-03 14:45   좋아요 2 | URL
어디 댓글에 남기셨던 기억이 있는듯도 하고...^^
암튼 개명을 축하드립니다.
ㅎㅎ
아님 이름을 찾으신건가요?
ㅋㅋ

Falstaff 2022-01-03 16:34   좋아요 2 | URL
ㅎㅎㅎ 골드문트는 청소년 시절의 로망이고요
폴스타프는 골드문트의 나이 든 버전이라니까요! ^^

행복한책읽기 2022-01-04 09: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헉. 223권 6만 9천 페이지. 이런걸 세나요?? ㅋ 헉. 글고 닉넴은 언제 바꾸셨대요?? 프로필사진과 책과 글제목 냄새가 분명 폴스타프님인데, 골드문트??? 새해 어리둥절절절. 이유를 밝혀라 밝혀라!!! ㅋㅋㅋ <나는 고백한다>!!! 요거 하나 겹침요. 대체 일하고 술마시면서 책은 운제 읽으세요?? 님도 새파랑님처럼 안 주무심??
암튼, 새해 소망 꼭 이뤄주시기 바랍니다. 12월31일에 확인 들어가겠음요. 어기면 벌칙 야쥐~~^^

Falstaff 2022-01-04 09:58   좋아요 2 | URL
ㅋㅋㅋ 평생 엑셀로 먹고 산 인간입니다. 이 정도 데이터는 기본입지요. ^^;;

프레이야 2022-01-08 14: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드리나강의 다리. 보여서 반갑습니다 ㅎㅎ 2016년의 책으로 꼽으셨네요. 그 전 해에 읽었어요. 골드문트 님 뽑아주신 책 목록을 이제 보다니요.

Falstaff 2022-01-08 15:18   좋아요 3 | URL
그죠, 그죠! <드리나 강의 다리>! 진짜 재미나게 읽었는데 좋아하시는 분, 심지어 읽어다는 분도 별로 만나지 못했어요. 아쉽게도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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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여, 안녕! 오에 겐자부로 장편 3부작 3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서은혜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명백하게 오에 겐자부로의 페르소나인 주인공 조코 고기토는 전작 <우울한 얼굴의 아이> 마지막에 1960년대 학생운동을 재연하는 ‘늙은 일본 모임’ 회원들의 주책맞은 행사에서, 시위진압대 역할을 한 시코쿠 현지 젊은이들에게 납작 들려 큰 나무에 머리통을 강타당한다. 독자와 작가는 이 장면에서 사건은 미시마 신사의 신관 마키히코가 고기토에 테러 수준에 달하는 폭행을 하도록 사주했거나, 적어도 행사에 참여하는 지역 젊은이들에게 노벨 문학상 수상자 조코 고기토를 사망에 가까운 수준으로 만들어버릴 만큼의 테스토스테론과 아드레날린을 분비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고기토는 이 사건의 결과로 스스로 비교의 대상이 된 돈 키호테가 그러했듯이, 다시 모험을 할 수 없어 고향에서 은둔하다가 숨을 거두는 일만 남게 된다. 작가니까 진짜 죽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글을 생산하는 일, 문학적 모험은 그만 둘 수밖에 없게 됐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고기토는 행사 과정에 머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뇌출혈이 발생, 긴급 후송된 후 머리를 열고 고인 피를 뺀 다음, 아들 아카리가 태어나자마자 그러했듯, 플라스틱으로 만든 동그란 인공 뼈를 두개골에 삽입한다. 60대 후반에 접어든 고기토는 정말로 저 건너에 건너가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던 벗과 친지들을 만나고 온 듯한 기분이 들었고, 고기토의 딸 마키, 애칭 마아도 아버지의 상태가, 몸은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마음도 이쪽으로 왔는지 어떤지가 걱정일 정도라고 털어놓을 정도였다. 이제 고기토의 많지 않는, 많지 않았던 친구들 가운데 본 마음을 보여줄 인물들은 다 저 건너로 가버렸다고 여길 정도였는데, 샌디에이고에 거주하면서 캘리포니아의 몇 개 대학에 교수를 하고 있던 츠바키 시게루가 떠올라, 마키가 이메일로 접촉하게 된다. 마침 시게루 역시 미국 생활을 접고 일본에 정착하려 마음을 먹은 순간이라서 시게루는 기꺼이 시코쿠에 있는 고기토의 땅과 집을 사서, 자투리 땅에 있는 구옥에서 몸을 돌볼 고기토와 이웃해 살기로 한다.
  츠바키 시게루, 이자는 고기토의 말에 의하면 자신의 작품에 한 번도 모델로 등장시키지 않았지만 고기토보다 두 살이 많고, 어린 시절부터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같은 동네에 살았다. 고기토가 ‘상하이 아주머니’라고 부르는 시게루의 어머니는 결혼을 하고 남편이 사업을 하는 상하이로 건너가게 됐는데, 이방에서 아이를 낳아 기를 생각을 하니 감당이 되지 않아 이미 결혼해서 살고 있는 고기토의 어머니와 동행을 한다. 그러니 상당히 친한 친구였을 터. 상하이 아주머니가 그곳에서 시게루를 낳고 돌을 넘기자 고기토의 아버지가 베이징을 거쳐 상하이로 가서 아내를 데리고 온다. 이게 고기토가 알고 있는 것이고, 시게루는 좀 다르다. 확실한 건 상하이 아주머니, 시게루의 어머니가 일본으로 돌아가기 싫어서 중국 청년과 사랑의 도주를 감행했다는 것뿐. 상하이 아주머니는 애초 불임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어, 함께 상하이로 건너간 고기토의 어머니가 자신의 아버지와 관계하여 시게루를 낳았으며, 이 사실을 알고 고기토의 아버지가 상하이까지 직접 가서 아내를 데리고 오게 된 거란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끝까지 밝히지 않았으나 힌트는 남긴다. 그러나 독후감에서는 어떤 힌트인지도 알려드리지 않겠다.
  어쨌든 상하이 아주머니와 고기토의 어머니는 시게루와 고기토를, 서로를 위하여 기꺼이 자기가 죽을 수 있는 사이로 키우기로 약속을 한다. 그러나 시게루가 1943년에 중학교 진학을 위해 시코쿠 숲으로 와서 보니, 고기토는 새카맣게 탄 얼굴을 한 일본의 전형적인 산골아이여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하여 동네 아이들이 다 보는 앞에서 “네 엄마는 우리 어머니의 친구가 아니야. 상하이까지 데려간 하녀라고. (중략) 나를 형으로 부르면 가만히 두지 않겠어.” 라고 모욕을 해버린다. 당연히 극심하게 분노한 고기토가 덤벼들어 엎치락뒤치락 싸움이 벌어진다. 어린 나이에 두 살 터울이면 당최 당해내지 못할 것이겠지만, 고기토는 당시 시골 어린 아이들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방법인, 돌로 시게루의 머리통을 내리쳐 두피를 찢어놓고 말았다. 이후 동네의 모든 아이들은 시게루의 지배 하에 들어갔고, 고기토는 완전히 외톨이로 전락해 이후 식물도감 한 권을 갖고 산에 올라 나무 이름을 다 아는 소년으로 성장한다. 이런 사이라서 둘은 평생 살며 숱하게 만남과 절교를 거듭했는데, 이제 다 늙어 서로를 위해 자신이 죽을 관계를 기억했는지 기꺼이 남은 생을 고기토 곁에서 지내겠다고 미국 교수 자리를 때려치우고 귀국한 것.

 

  그러나 시게루는 혼자 오지 않았다. 30대 중반 러시안 아메리칸인 블라디미르, 30대 차이니즈 아메리칸 여성 싱싱(淸淸). 이들은 오에, 작중 조코 선생과 상극관계인 미시마한테 깊숙이 경도된 테러리스트들이다. 홍콩에 본부가 있는 듯한 세상의 여러 집단 가운데 하나의 구성원들이, 세계적 건축가이며 Unbuild, 반 건설, 즉 파괴에 특히 권위가 있는 시게루의 제자가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들은 일본을 대표하는 고층 건물의 핵심 위치를 빌려 그곳에 폭탄을 설치하고, 미리 건물의 파괴를 알려 모든 사람을 대피시킨 후 테러를 감행해, 핵을 보유하고 있는 거대국가, 거대 폭력에 대항하는 소집단 폭력을 행사하려 한다.
  나는 여기서 무척 헷갈렸다. 고기토가 평생을 걸쳐 희구한 것은 평화, 비폭력이었으며 당연히 좌우를 따지자면 좌익에 좀 더 가깝다. <만엔 원년의 풋볼> 등에서 보듯이 우익 집단이 무리를 이루어, 조금의 저항도 하지 않고 패배를 받아들이는 굴욕을 갚기 위한, 우익테러가 실패로 돌아가는 모습에 익숙했는데 이 작품에선 난데없이 대표적인 일본의 국수 우익인 미시마를 숭배하는 집단의 테러에 소극적이나마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 나는 여태 미시마가 할복에 성공한 줄 알았다. 배를 찌르긴 했는데 긋지를 못해 옆에 서 있던 할복 도우미, 가이사쿠가 친절하게 목을 베어 데구르르 잘린 머리가 굴러갔다고 한다. 잘린 머리를 똑바로 세워 찍은 사진을 일본의 몇몇 신문이 헤드라인으로 실었고, 이를 본 고기토의 작곡가 아들 아카리는, 미시마는 요만합니다, 라며 손을 30센티미터 정도 올리는 장면이 이 책에 나온다.


  시절은 911 테러가 있고 몇 년 후. 아무리 조코 고기토(라고 읽는 오에)가 핵무기 철폐를 주장했지만, 핵보유국에 의한 미래의 거대 폭력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테러를 지지한다고 의심받을 수도 있는 (물론 지극히 소극적이지만) 행위를 하는 내용의 작품을 썼다는 것이 매우 의아하다. 이 작품을 이끌고 있는 가장 중요한 서사가 바로 이 작은 테러이다. 밤 늦도록 책을 읽는 바람에 내가 작가의 진짜 의도를 오독하고 말았기를, 지금, 바라고 있다.

 

  진짜 아이는 고블린이 데려가고 대신 요람에 올려놓은 가짜 아이인 체인질링. 고기토 안의 또다른 인격으로 몇 년 후에 숲으로 들어가 동자가 된 고기이. 나를 대신해서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시게루. 시게루와 함께 시코쿠 숲의 집으로 들어온 블라디미르와 싱싱. 사건이 본격적으로 커지면서 고기토를 감시하기 위해 배치한 다케시와 다케. <우울한 얼굴의 아이>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비교되는 고기토와 돈키호테. 그리고 베케트 희곡 <고도를 찾아서>의 블리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이 커플들을 고기토는 ‘상보적인 2인’이라고 호칭한다. 그러니까 <체인지링>, <우울한 얼굴의 아이>, <책이여, 안녕> 3부작을 대표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개념이 상보적 2인이다. 이 작품에서는 더군다나, 만일 평소에 어떤 일이든 조금 과장해 그것이 진실인 듯이 말하는 습관이 있는 시게루의 말이 정말 진실이라면, 시게루와 고기토는 씨 다른 형제다. 그래서 어머니끼리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시게루의 어머니는 시게루가 어려서 야반도주를 했으니 정확한 기억이 아닐 수도 있고, 살면서 저절로 그렇게 되는 사이였을 수도 있을 듯. 그러나, 꽃노래도 삼세번이라고 이 상보적 2인을 1~3부, 1천5백 쪽 동안 비슷하게 읽고 있으려면 약간의 현기증과 어지럼증, 그리고 경미한 구토의 느낌을 숨기기 힘들다.
  한 번에 같은 배경으로 하는 장편소설을 세 권 읽기는 무리다. 더구나 이미 <만엔 원년의 풋볼>과 <익사> 등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무한 반복하고, 죽은 다음 다시 환생하는 일이 계속하여 어린 나가 늙은 나를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 사람 속의 또다른 인격의 존재 등을 연속하는 건 사실 (나름 단련되었다고 생각하는)독자를 피곤하게 한다. 만일 이 삼부작을 읽고자 한다면 한 작품을 읽고 일정 기간 터울을 둬 앞에 읽은 내용의 기억이 조금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을 수도 있겠다.
  여기에 불문학을 전공하고, 영어도 능숙하게 쓰며, 평생 무수히 많은 책을 읽은 오에 겐자부로 답게 온갖 서양 작품에 천착하고 상세 내역까지 인용도 하고 해석해 작품과 연계시키는 건 처음엔 참신했다가, 점점 식상해지다가 나중엔 지긋지긋해질 정도였다. <책이여, 안녕!>에선 예이츠의 시 여러 편과 도스토옙스키의 <악령> 등을 집중해서 해석하는 장면으로 독자로 하여금 넌더머리가 나게 한다. 잘난 척도 정도가 있지, 이 정도면 탈아입구를 주장했던 일본인 특유의 열등감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오에 겐자부로는 이 삼부작으로 자신의 소설 창작을 마무리할 예정이었겠지만 이후에도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를 쓴다. 왜? 물론 쓰지 않는 작가는 있을 수 없겠지만, 작가의 숙명일 수도 있으나, <책이여, 안녕!>에서 솔직하게 고백을 했듯이, 지출은 줄지 않고 수입을 기존 작품의 인세로 충당할 수 없을 터이니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계속 작품활동을 할 수밖에. 오에 또는 고기토에겐 노부부의 남은 생애만 버틸 수 있는 재력 말고도 작곡가이기는 하지만 지적 장애가 있는 (오에의 아들) 하카리, 또는 (고기토의 아들) 아카리의 남은 삶도 버틸 수 있는 복지까지 마련해주고 싶었을 것이니.
  오에 겐자부로 특유의 사소설. 여태까지의 오에 겐자부로는 작품마다 비슷하지만 독특한 분위기와 특유의 역사인식으로 독자에게 색다른 일본식 사소설의 맛을 선물했었다. 그러나 이번에 읽은 삼부작은 <만엔 원년의 풋볼>의 잔영이 너무도 많이 남아 있어 굳이 삼부작을 써야 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오에 필생의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대담하게 뱀의 발, 몸통보다 훨씬 더 큰 뱀의 발을 그린 걸, 안 봤으면 속이나 편한데, 보고 불편해져버린 느낌. 이게 삼부작을 읽은 솔직한 독후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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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12-30 09: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작가의 말년과 3부작의 마무리가 안타깝네요.
나이가 들면 지킬게 많아지고 자연스럽게 모험을 줄이게 되면서, 글도 틀을 벗어나지 못하나봐요.
쓰지 않으면 살수 없는 작가의 숙명도 어쩔수 없고... 잊혀지고 싶지 않은, 잊혀지지 않는 방법이겠죠

Falstaff 2021-12-30 09:14   좋아요 3 | URL
제가 좋아하는 작가인데, 좋게 읽히지 않아서, 거 참, 그것도 난처하더군요.
어쩌겠습니까. 다 사람 사는 일인 것을요.

잠자냥 2021-12-30 11:0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 한 번에 같은 배경으로 하는 장편소설을 세 권 읽기는 무리인데 그걸 하셨군요.
근데 페이퍼에서 그 지긋지긋함이 정말 절로 느껴져요.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12-30 11:57   좋아요 4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아우, 정말 일주일 내내 고생 많았습니다.
지금 읽어보니 독후감도 만만치 않게 지루하네요. ㅋㅋㅋㅋ
 
우울한 얼굴의 아이 오에 겐자부로 장편 3부작 2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서은혜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우울한 얼굴의 아이>는 겐자부로 삼부작 가운데 두번째 순서로, 물론 이 책만 읽어도 독립적으로 읽히기는 할 듯하다. 그러나 스토리는 <체인지링>에서 그대로 연결되어 있어 좀 더 이해하고 싶은 독자들은 아무래도 <체인지링>부터 시작하는 편이 좋겠다. 문제는 크게 다르지 않은 스토리를 연속으로 읽느라고 진이 빠진다는 것이지만.
  주인공 고기토의 성이 바뀌었다. <체인지링>에선 나가에 고기토였는데, 이 책에선 오에의 다른 책들과 같이 작가의 페르소나, 조코 고키토다. 오에가 자신을 대신하는 ‘큰 상’ 받은 작가의 이름을 왜 고기토라고 했느냐 하면,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서 처음으로 쓴 명제,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라틴어 표기 “Cogito, ergo sum”의 첫 단어 ‘Cogito’를 가져왔다. 오에 겐자부로답다. 이렇게 이름을 지은 사람이 고기토의 아버지 조코 씨였다. 오에의 책에서 아버지 조코 씨의 죽음을 다룬 것이 <익사>. 일제가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하여 아메리카 군인들이 신성한 섬 땅을 밟게 된 사실은 인정하되 어찌 한 번의 저항도 없이 순순히 내주겠는가, 하여 테러를 준비하는 젊은 장교 모임에 우연히 가담한다. 그러나 도중에 큰 홍수가 생겨 배를 타고 나섰다가 강물에 빠져 죽는다.
  아버지는 시코쿠에서 뜻을 같이 하는 젊은이들을 규합하여 ‘연성도장’이라는 건물을 짓고 그곳에서 훈련을 하는 등 당시의 젊은이들 마음 속에 일본 특유의 민족의식을 주입했다. 당시의 젊은이들은 더 세월이 흘러 1부 <체인지링>에서 미군 통역 장교 한 명을 통해 한국전쟁에서 쓰던 고장난 소총과 정상적인 피스톨 한 정을 구하는 등의 활약을 하지만 두고두고 우리의 주인공 조코 고키토를 쫓아다니며 작은 테러를 가해 고통을 안기기도 한다. 두세명이 고기토를 꼼짝 못하게 좌우에서 압박하고, 신발과 양말을 벗긴 후, 눈높이에서 ‘탄환’이라 부르는 웬만큼 무게가 있는 금속을 왼쪽 엄지발가락의 뿌리 부분으로 떨어뜨리는 것. 가뜩이나 통풍 기가 조금 있는 고기토에게 극도의 고통을 주는 행위였다. 스톡홀름 궁정 만찬을 앞두고도 거기까지 따라온 이들에게 당한 적도 있다고. 독자여, 이건 소설이다. 믿건 말건 자유, 나는 허구라고 생각한다.
  고기토의 아내 치카시는 1부 <체인지링>이 끝난 것과 동시에 자살해 죽은 오빠 고로의 어린 애인이었지만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우라와 조만간 태어날 우라의 아이(고기토 가족과 아무 상관없는 아이)를 돌보기 위해 고기토가 밤낮 세빠지게 글 써서 번 돈을 써서 베를린으로 날아갔다. 치카시는 우라가 아이를 낳고, 독일인 애인이 생기고, 육아 방편을 다 마무리한 후에,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만 등장하고, 빈 자리는 로즈라는 이름의 조코 고기토 논문으로 박사를 준비중인 미국인 30대 여성이 맡는다. 당연히 아내도 아니고, 잠자리 파트너도 아니다. 원래 <돈키호테> 연구자였다가 고기토를 심화 학습하기 위하여 장학금을 받아 일본으로 날아와, 마침 기회가 되어 1년 정도 계획으로 함께 지내게 됐을 뿐. 그래서 책에서는 쉴 새 없이 조코 고기토를 17세기 초반의 위대한 몽상가 돈키호테와 비교하는 망언을 멈추지 않는다.

 

  두번째 이야기가 시작하자마자 고기토의 어머니가 운명한다. 아흔살이 훨씬 넘은 나이이니 호상이라고 해도 좋겠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너무도 맑은 정신을 가졌던 현명한 노인이다. 오에, 이 노회한 작가가 어머니가 그냥 숨을 거두게 할 턱이 없다. 현명한 어머니는 두 가지 중요한 언질을 주는 역할을 한다.
  첫째는, 소설은 거짓이라는 것에 대하여 소설 속 거짓에, “윤리의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면 나같이 나이먹은 사람이 아침 저녁으로 생각하고 있는 문제”일 뿐이라 하면서, 동시에 “고기토가 거짓말 소설을 산 하나가 될 만큼이나 쓰고나서 이제는 나이를 먹어 종이 한 장 만큼이라도 진짜 이야기를 쓴다면, 그건 사실이라고 믿어주면 좋겠다.”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이 당부 역시 오에의 거짓 주장이다. 이 책에 쓴 건 전부 사실이라고 독자더러 믿으라는 건데 하여튼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문학상을 받은 지상 최고 거짓말쟁이의 글을 믿으라고 하니 말이지. 하여튼 책을 진지하게 읽어달라는 작가의 부탁 정도로 접수하고 말자.
  다른 하나는 이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인 동자童子를 언젠가는 고기토가 제대로 연구하기 위하여 귀향을 할 것으로 믿었다는 것. 어머니의 이런 선견지명으로 오에는 고기토가 도쿄, 아들 아카리를 위한 모든 시설과 소프트웨어가 있는 도쿄를 떠나 고향 시코쿠의 두메산골인 마키 면(町), 주조시키로 돌아와 새로 집을 옮겨 살 제대로 된 이유를 만들었다. 때마침 미국에서 온 로즈와 함께. 이제 고기토는 고향에서 여전히 터전을 일구고 사는 여동생 아사 부부, 먼 친척으로 조카뻘인 청년 아요의 도움을 받아 마키 면에서 텃세 깨나 부리는 B급 전범의 위폐를 모신 미시마 신사의 신관 마키히코와 후쇼쿠 절의 주지 마츠오, 다베 콘체를 호텔의 다베 부부 등과 협력 또는 갈등을 빚는다.
  그럼 동자는 무엇일까. 한자를 그냥 풀면, 어린 아이라는 뜻인데, 고기토의 주장을 보자. 다섯 살 무렵의 고기토는 ‘또 한 사람’의 자신, ‘고기이’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일년 후 고기이 혼자 숲으로 들어가 동자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동자가 되면 시간과 공간을 자유로이 오가 수 있다. 고기이 역시 어느 날, 하오리 입은 팔을 양쪽으로 벌리더니 커다란 새처럼 바람을 타고 날아 사라져버렸다고. “시간과 공간을 자유로이 오갈 수 있다.” 이건 작품을 관통하면서 굉장히 중요한 함의를 가진 말이다.
  이야기는 만엔 원년인 1860년으로 넘어간다. 오에의 전작 <만엔 원년의 풋볼>에 소개했듯이, 메이지 이전 시대 첫번째 민중반란이 메이스케라는 젊은이의 지도하에 일어났는데, 당연히 실패로 끝났다. 관군에 체포되어 죽임을 당할 시간이 도래하자 메이스케의 어머니가 나타나 그를 위로한다. “괜찮아, 괜찮아. 죽임을 당한대도. 내가 바로 다시 낳아줄 테니!” 즉 어머니를 통해 메이스케는 환생을 할 수 있다는 말. 이들은 메이스케가 옥사하고 6,7년이 흘러 환생한 메이스케가 농민 반란의 지도자를 도와 신정부가 보낸 관리와 투쟁하게 했고, 더 시간이 흘러 베츠시 구리광산의 스미토모 광업소에서 광부 폭동을 일으켰다고 믿는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패전 후의 청년장교들에 의한 반란까지? 그건 모르겠다. 즉 동자는 환생할 수 있다는 믿음인데, 그것도 절차가 있다.
  이 지역 시코쿠에서 태어나 죽는 사람들은 제각각 ‘자기 나무’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 죽으면 혼이 육체를 떠나 골짜기에 있는 항아리 모양의 공간을 나선형으로 올라가 ‘자기 나무’ 뿌리에 머문다. 시간이 흐르면 다시 나선형을 그리며 항아리 모양의 공간을 내려와 새로 태어나는 아이의 육체로 들어가 환생하는 사이클을 지닌다. 오해하지 마시라. 깊은 ‘골짜기’의 항아리 형태 공간이 자기 나무 뿌리보다 아래쪽에 있어서 나선형을 그리며 올라가 뿌리에 머물 수 있는 것이니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풀린다. 고기토의 아내이자 전편 <체인지링>에서 자살한 고로의 동생인 치카시는 고로의 애인이었던 우라의 아이를 고로의 환생으로 생각해 아이를 돌보기 위해 베를린으로 날아갔던 거다.

 

  이 책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전작 <체인지링>과 연관이 되어 있고, 오에 겐자부로답게 이미 아주 상세하게 설명을 해 놓아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무.한.반.복. 하고 있다는 거. 늙으면 말이 많아진다. 걱정이 많아지는 것과 비례하는 거 같다. 그래서 지루해지는 걸 어쩔 수 없는데,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온갖 철학적, 비교문학적 사색과 대화를 첨부하기까지 한다. 나는 다 읽고 왜, 하필이면 공부하는 미국인 여성을 주조시키까지 데려왔는지 참 의아했다. 재미는 있지만 오에가 자신의 페르소나인 고기토를 돈키호테와 비교하는 것도 자뻑이고, 돈키호테니까 당연히 허황한 대결로 인한 부상도 빼놓을 수 없는데, 부상을 당하는 과정도 별로 설득력이 없다고 읽었다. 아직까지 고기토에 대한 폭력이 이어지고 있는 것도, 세계에서 제일 ‘큰 상’을 받은 고기토가, 그토록 거만하고, 무게잡고, 할 말 아끼지 않고, 체면 차리는 고기토가 당국에 신고 한 번 하지 않으면서 누군지 알 것도 같은 집단에 의하여 계속적인 (작은)테러, 린치를 당하고 그걸 참고만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이것들이 전부 다 은유라고 하면 안 될 일도 없다. 그러면, 저 위에서 고기토의 어머니가 진실 한 장을 쓰더라도 믿어 달라고 한 얘기는 진짜일까 구라일까.
 하여튼 마지막 편, <책이여, 안녕>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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