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에는 책 읽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애초에 2백 권 미만을 읽고자 했습니다만, 223권, 6만9천 페이지를 읽었군요. 내년엔 기필코 2백 권 미만을 달성하겠다고 각오해봅니다. 이 가운데 올해 무척 재미있게 읽은 책 열 권과, 최고라고 생각하는 한 권을 골랐습니다. 언제나 마찬가지로 책 읽는 것에 관해서 잘해봤자 딜레탕트 수준인 제 기호에 좋았다, 최고다, 하는 것이니 이 목록을 적극적으로 참고하시면 곤란하다는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올해의 책을 선정하는 일은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는 좋은 작품입니다. 그러나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이라 새삼스레 다른 책과 견주는 것이 옳지 않게 여겼습니다. <갈라테아 2.2>는 작 초반의 높은 진입장벽이 문제였고,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은 책을 읽은 후에 큰 충격이었으나 시간이 가면서 빠르게 열기가 식었습니다. <레베카>, <호모 파버>, <에쿠우스>, <어린 당나귀 곁에서> 그리고 <케이크와 맥주>는 여러 번 목록에 넣었다가 빼고, 다시 넣고 또다시 제외하는 작품들이었습니다.
2021년 Top 10, 소개합니다. 순서는 제가 읽은 날짜 순입니다.
2021년의 Top 10
1. 미셸 투르니에, <황금 구슬>
방주의 주인 노아가 낳은 아들 함의 자손들. 이 가운데 오아시스에 정착해 농사를 짓는 부족이 있다. 결혼식이 있고, 이를 축하하기 위한 연회를 위해 광대패들이 도착한다. 음악이 이어지고 은 장신구로 치장한 흑인 무희 제트 조바이다. 공연의 불꽃이며 혼. 베일을 쓴 얼굴과 발, 그리고 매끈한 검은 피부의 배에 가죽 끈에 매달린 채 빙글빙글 돌아가는 황금 구슬. 이 관능적 묘사. 날이 새고 이미 떠나버린 광대들의 숙영지 모래밭에 떨어진 조바이다의 황금구슬을 주워든 소년 이드리스는 몇 달 전 랜드로버를 타고 와서 자신의 사진을 찍은 사진사와 동행한 프랑스 여인을 찾아 파리로의 여행을 감행하는데, 나중에야 황금 구슬, 그건 대가를 요구하는 자유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투르니에의 사진 행위와 철학을 가미한 기호가 어떻게 문장이 되고 소설로 엮이는지를 궁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일독의 가치가 있을 듯.
2. 빅토리아 토카레바, 《티끌 같은 나》
동토의 왕국, 철의 장막으로 둘러싸인 소비에트 연방 속에서도 언제나 봄의 싹을 틔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미 씨앗에서 발아해 태양을 향해 솟구칠 준비를 한 채 도사리고 있던 싹들은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시절을 거쳐 고르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맞아 힘껏 도약을 한다. 이 속에 류드밀라 페트루셉스카야와 더불어 빅토리아 토카레바도 있었다. 배급경제가 빈사를 헤매면서 자신들이 소비에트를 지배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머물던 프롤레타리아들은 다시 가난과 상점 앞의 긴 줄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소설 역시 물질적 곤란함과 상대적으로 더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여성성을 그려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토카레바. 이 시크하고 쿨한 작가는 가난 속에서 치사한 애인이 도망가도, 킁, 콧방귀 한 번으로 가비얍게 물리쳐버린다. 궁상맞을 상황을 현명하고 시크하게 빠져나가는 힘이 독자에게 진하게 어필, 이이의 다른 작품을 기대하게 만든다.
3. 살만 루시디, <무어의 마지막 한숨>
루시디의 무시무시한 입담이 독자를 압도하는 명편. 지금은 절판이지만, 모 출판사에서 머지않은 미래에 다른 이의 번역으로 인쇄를 할 예정이라는 귀띔을 받았다. 독자 제위께서는 아무쪼록 이 책의 제목을 기억하셨다가 책방에 깔리자마자 구입을 망설이지 마시라. 책이 두 권 6백 쪽 가량 되지만 한 번 잡았다, 하면 여간해 손을 뗄 수 없는 작품이다. 굳이 재미의 수준을 말씀드리자면, 장담하건데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하고 계급장 떼고 맞장을 붙어도 꿀리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 무어는 인도를 처음 발견한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서 뿌린 씨를 받아 ‘다 가마’의 성을 갖고 있는 모계, 무어족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물러날 당시의 술탄 보압딜의 후예가 부계이니 대단한 가문인데, 임신 넉 달 만에 출생을 하고, 인생을 2배속으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의 거한이다. 여기에 루시디 특유의 현대사를 마구 섞어 드런 사랑 이야기를 만들어냈으니 어찌 Top 10 한 자리를 꿰지 않을 수 있을까.
4. 앨리 스미스, <데어 벗 포 더>
문제작이라고 하면, 문장적 문제작일 수도 있고, 소재의 문제작일 수도 있다. 이 책은 아이디어의 문제작이다. 소설책 깨나 읽는다고 생각하는 나는 이런 식으로 작품을 시작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거 같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인간이, 한 집에서 파티를 열었는데, 초청받은 사람이 함께 가지 않겠느냐는 말만 듣고 난생 처음 간 집에서, 밥 먹고, 술 마시고, 슬그머니, 외투와 휴대전화와 기타 등등은 그냥 소파 위에 둔 채로 이층에 있는 (욕실이 딸린)손님방으로 슬그머니 들어가더니 안에서 문을 철커덕, 잠근다. 갑자기 사라진 손님이 손님방에 아직도 있다는 걸 알아챈 부부는 얼마나 겁나고 치가 떨렸을까. 이 문제의 남자 마일스 가스 씨를 방에서 꺼내기 위해 부부는 별의 별 사람에게 연락을 하고, 이게 또 특종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방송사는 생방송을 찍는 등 난리가 벌어지는데, 이런 일이 진짜로 일어날 수 있다고 상상이나 해보셨나? 발칙하고 끔찍하고 참신한 아이디어. 이 책 이후로 난 앨리 스미스의 팬이 되었음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5. 패트릭 화이트, <전차를 모는 기수들>
노벨문학상을 탄 유일한 오스트레일리아 작가의 대표작. 독특한 캐릭터를 가진 네 명의 소외받는 주인공이 백호주의의 땅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생존해나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정신이 조금 모자라고 못생겼으나 사람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능력이 있는 것 같은 대 장원과 저택의 상속 독신녀 헤어 양. 신체 건강하고 선한 마음을 지녔으나 주정뱅이 남편의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가난한 성녀 고드볼드 부인. 짐승 취급을 받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출신으로 입양된 백인 가정에서 도망한 청년 앨프 더보, 그리고 독일 태생 유대인으로 전직 대학교수였지만 가스실 앞에서 생명을 구해 이민을 온 후엔 공장 직공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유식하고 현명한 모르데카이 히멜파르프. 이들이 서로를 의지해가며 공존을 위해 애쓰는 광경이 안타깝다. 약자에 대한 비방, 비웃음, 멸시, 폭력 등을 구경하는 일이 산뜻하지는 않지만 이에 대항하는 약자들의 연합이 또한 흐뭇하다. 강자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폭력 앞에 침묵하는 다수들, 너희들 모두 유죄다.
6. 야 지야시, <밤불의 딸들>
이 책은 에바리스토의 역작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의 출연진 가운데 한 명이 다른 인물에게 읽어보라고 추천하는 장면 때문에 선택했다. 그러니 올해 Top 10에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이 들지 못한 것을 대체하기도 한다고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가나의 옛 아샨티 왕국 맘풍 출신 미국 이민자 야 지야시의 데뷔작. 첫 작품으로 지야시는 미국 문학계의 유망한 샛별로 등장한다. ‘마메’라고 하는 아프리카의 큰 어머니에게 고귀한 두 딸이 있었으니, 하나는 아프리카 노예수출 사업의 황금해안가에 터를 잡고, 다른 하나는 노예로 떨어져 영국을 거쳐 미국땅으로 흘러간다. 이후 수백 년 6대를 지나 서로 같은 혈통에서 시작한 형제임을 모르는 상태에서 만나 황금해안에 들르게 된다. 각기 6대에 이르는 흑인들의 지난 개인사가 흥미진진하다. 고귀한 가문의 큰 어머니이지만 동시에 노예 출신이기도 한 마메. 천국에서 추방되어 노예생활을 했고, 이제 해방을 맞았지만 아직 흑인에 대한 차별로 고통받고 있다는 주장일 수도 있다.
7. 존 버거, <결혼식 가는 길>
짧은 노벨라 분량의 소설. 그러나 문장 하나하나를 그저 지나칠 수 없어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던 작품. 헌옷 장수 지노가 철도원 2급 신호수의 딸 니농을 사랑하게 되고, 그것도 열렬하게 사랑하게 되지만, 니농은 한 시절 우연한 충동으로 불장난 한 것 때문에 그만 HIV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 당시 HIV 감염자는 마치 저 중세시대의 페스트 환자나 방울을 달고 다녀야 했던 나환자처럼 극단의 기피와 혐오의 대상이었던 것. 하지만 지노는 니농을 너무도 사랑하여 HIV임에도 불구하고 결혼하기로 결정, 이탈리아 지노의 고향집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혼인을 위하여 아버지 2급 신호수는 프랑스쪽 알프스 모단에서 이탈리아 포강 하류의 작은 마을 고리노까지 달려가고, 어머니는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에서 장거리 버스를 타고 고리노로 향한다. 인근 주민들은 이들을 향해 거친 욕설을 퍼붓는 가운데 지노가 직접 잡은 20kg짜리 농어와 친척들이 친절하게 요리한 음식을 차리고 잔치가 벌어지는 따뜻하면서도 슬픈 이야기.
8. 앙리 보스코, <이아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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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Top 10에 올린 건 전적으로 내 취향 때문이었다. 바꿔 말하면, 다른 분들은 <이아생트>를 읽기 시작해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더 읽기를 포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매혹적인 것은 몽상이다. 굳이 음악과 비교하자면, 마치 아무 것도 아닌 것, 이미지 말고는 전혀 없는 듯한 드뷔시의 작품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5백만 평에 이르는 저 광막한 평야. 그 위에 단 하나의 호롱불이 빛을 발하고 있는 라 주네스트, 금작화라고 불리는 작은 집. 그러나 암벽 위에 올려져 있어서 밤이 내리면 마치 망망대해 속의 반짝이는 등대처럼 유일한 불빛, 또는 모종의 신호를 올리고 있는 단 하나의 지표. 넓고 넓은 암흑의 평야에 유일하고도 인류의 마지막인 듯싶은 영혼일지도 모르겠다는 상념을 들게 하는 곳. 이 마지막 집, 라 주네스트를 아직도 견디게 하는 것은 한 인간의 고통과 사색, 침잠, 상상, 그리고 몽상. 이 몽상에 동감할 수 있는 독자는 만족할 것이고, 아닌 독자는 책 읽기를 멈출 수밖에 없으리라.
9. 애니 프루, 《브로크백 마운틴》
애니 프루를 “단편의 달인”이라 불러야 마땅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될 단편집. 미국의 북동부 삼림지역에서 살다가 웬만큼 나이가 들어 와이오밍으로 이사를 하고, 자연 풍광에 반해 단편집 <와이오밍> 시리즈를 쓴 프루. 이이의 대표 단편을 모은 책. 황량한 서부지역을 배경으로 서부는 서부인데 서부도 여전히 사람이 사는 곳이란 전제로, 험한 자연을 배경으로 한 무협지 대신 체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썼다. 사람의 이야기. 나의, 당신의, 아니면 전철 저편에 앉아 가볍게 코를 고는 승객의 이야기일 수도 있는 애절하기도 하고, 거칠기도 하고, 날씨를 닮아 모질기도 하고, 때론 눈물샘을 콕 누르는 듯 쓸쓸하기도 한 이야기, 이야기들. 그런 것들을 애니 플루는 가장 얇은 비단실로 촘촘하게 누벼놓았다.
10. 마르그리트 뒤라스, <태평양을 막는 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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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가능하지도 않은 일에 희망을 걸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과, 식민지 원주민의 모든 기대와 노동력을 바쳐 남중국해의 조수를 막는 제방을 건설하려는 어머니. 단 하룻밤 사이에 이민 온 식민지 거주자 가정과, 근처 원주민들의 희망을 싹 쓸어간 태평양은 이제 어머니와 남매에게 절망, 그리고 허무와 탈주의 바람만을 남겨놓는다. 그러다 딸/누이의 결혼을 대가로 어머니는 다시 제방을 건설하는 꿈을 꾸고 오빠 조제프는 지긋지긋한 해변의 소금밭을 떠날 기회를 엿본다. 이들의 절망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 모습을 구체적으로 짚어내는 뒤라스의 눈매와 너무도 공감을 주어 서늘하기까지 한 문장들을 읽어낸다. 모차르트는 하스킬 노파가 어쩔 수 없어서, 그럴 수밖에 없어서 건반을 누를 때 절창이듯이, 절망에 대한 공감 역시 어쩔 수 없이 읽어야 할 때 절절하다.
2021년 최고의 한 권. 자우메 카브레, <나는 고백한다>
이 책은 다 읽고 덮는 순간 올해의 책이 되리라 직감했다. 다른 작품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완벽한 서사로 밑받침을 하고, 마치 돌탑을 쌓아올리듯 탄탄한 구조로 저 수백 년에 이르는 악의 연대기를 한 눈에 조망할 전망대를 마련했다. 그러면서도 평생을 걸고 얻고자 한 유일한 사랑을 위한 로망스까지 어디 한 구석 도려내 비난할 곳을 찾을 수 없다. 인류 역사상 지구가 편평했을 시절, 보편적 야만 속에서 가장 극악한 악에 의하여 희생당한 수사의 주머니에 든 단풍나무 씨앗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양심적인 수사의 시신을 양분으로 성장한 단풍나무로 만든 바이올린 비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시작하자마자 또다시 살인이란 악에 의하여 소유주가 바뀌더니, 20세기, 유대인 노파의 정수리에 총알이 박히면서 또다시 악의 손에 들었다가 전쟁이 끝나자마자 실패한 수사이자 잔혹한 골동품 수집상의 금고 속으로 들게 되니, 새로운 주인은 만년에 게으른 살인자라 불리는 알츠하이머의 손아귀에서 이 글을 쓰는 아드리아 아르데볼 박사의 수재 아버지 펠릭스 아르데볼이었다. 14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을 거쳐 단번에 21세기까지를 망라하는 거대한 악의 연대기. 2021년에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당분간 이 작품을 능가하는,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은 작품이 과연 있을까 궁금하다. 알라딘 고객 평점 가운데 과연 누가 먼저 만점을 주지 않을지도 매우 궁금한 명작.
지난 몇 년 간의 올해의 책
2020년, 헤르만 브로흐, <현혹>
2019년,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저항의 멜랑콜리>
2018년, 김태정,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2017년, 아달베르크 슈티프터, <늦여름>
2016년, 이보 안드리치, <드리나 강의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