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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존스 거리
돈 드릴로 지음, 전승희 옮김 / 창비 / 2013년 10월
평점 :
20세기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하여간 20세기 후반의 가장 대표적인 작가 네 명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돈 드릴로의 세번째 작품. 이 네 명의 작가를 최근에 하도 여러 번 거명해서 이젠 조금 지긋지긋한 느낌도 난다. 토머스 핀첨, 돈 드릴로, 필립 로스, 그리고 코맥 매카시. 하여튼 난 이 네 명 가운데 토머스 핀천이 제일 좋다는 것만. 좋잖아? 잠깐이라도 다른 생각했다 하면 여지없이 미노타우로스의 미궁으로 빠지는 바람에 끝없이 집중을 요구해 다 읽을 때쯤 해서는 심신이 너덜너덜해지게 만드니 말이지. 이런 면에서 핀천 만큼 대책 없이 심통을 부리지는 않지만 돈 드릴로도 묵직한 한 방이 있다.
드릴로의 작품은 주로 1980년대 이후에 쓴 것들로, 전미 도서상을 받으며 비평적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는 1985년 작 <화이트 노이즈>, 대중적 성공까지 거머쥔 88년의 <리브라>, 1992년 펜포크너 상을 받은 <마오 II>를 먼저 읽고, 이어서 2016년 <제로 K>, 2020년 작 <침묵>까지 가게 된다. 책 뒤에 실린 역자해설에 이이가 “1971년부터 78년까지 여섯 편의 장편소설을 출간하고 ‘컬트’ 작가로 위치를 확고히 했다”고 하는데 데뷔 초기엔 어떤 책을 썼을까, 궁금해했다가 1973년에 출간한 이 책 <그레이트존스 거리>를 읽어보고 드디어 원풀이 했다. 70년대 작품으로 치면 이이를 포스트 모더니즘 작가라고 칭했던 것이 이해가 된다.
나는 영미 대중음악에 관해 잘 알지 못한다. 록 밴드 가운데 제일 좋아하는 팀 역시 내 또래 세대라면 거의 당연히 열광했던 빅 브라더 앤 더 홀딩 컴퍼니와 리드 싱어 재니스 조플린이다. 당연히 조플린 전집도 가지고 있고, 조플린을 모델로 했다고 생각하는 베티 미들러 주연의 DVD <더 로즈>도 있었는데 술김에 친구 줘버리고는 지금 열라 후회하는 중이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 재니스 조플린은 스물일곱 살인 1970년에 그만 코카인 과다 섭취로 갑작스럽게 죽고 마는데, 같은 해에, 같은 나이인 지미 헨드릭스 역시 약물 과다 섭취로 앞서거니뒤서거니 해서 갈 길 갔다. 헨드릭스는 42년 11월, 조플린은 43년 1월생이니 미국식으로 같은 나이 맞다. 1973년에 출간한 <그레이트존스 거리>가 이 죽음(들)을 모델로 하지는 않았지만 작품을 쓰는데 적어도 계기가 된 사건이 됐다는 건 그럴 듯해 보인다.
작품의 주인공 버키 웬덜릭이 화자 ‘나’로 등장하는데, 자신이 겪었던 한 기억, 그의 말에 의하면 이 책은 “잿빛 공간을 가로지르는 기나긴 여행에 대하여, 공과국의 꿈에 에로틱한 테러를 나누어 주는 한 남자의 주변환경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버키 웬덜릭은 한 시절 로큰롤의 영웅이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이제 그에게 남은 진정성 있는 죽음을 위해서라면 그의 의지, 즉 ‘자신의 손으로 죽고, 가능하면 이국의 도시에서 죽어야만 죽음이 성공적인 모범사례가 될 수 있다고 여긴다’는 걸 깨닫는다. 말이 한 세대의 영웅이자 우상이지, 영웅 또는 우상 본인은 이게 얼마나 큰 스트레스일까. 부담감을 이기지 못한 벅, 버키는 휴스턴 공연을 하다가 슬그머니 그룹에서 빠져나와 그대로 비행기에 몸을 싣고 그에게는 오염된 성지이자 고향인 뉴욕으로 가버리고 만다.
버키가 정착한 곳이 그레이트존스 거리에 있는 삼층짜리 아파트의 2층, 창틀이 휘어 찬 겨울 황소바람이 틈새로 숭숭 들어와 옷가지로 막아야 하고, 전원을 꼽지 않은 냉장고엔 비닐 레코드와 카세트테이프가 빼곡하게 차 있으며, 난방조차 지극히 낮은 열효율을 자랑하는 다 찌그러진 건물이었다. 1층엔 정신이 조금 이상한 여자 미클 화이트가 날 때부터 두개골이 거의 없어 뭉글뭉글한 머리통을 가지고 있는 지적 장애아를 키우고 있는데 아이는 이름이 없다. 낳고 4개월 이상 살지 못할 줄 알아서 이름 지어줄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아이 아빠는 순회 서커스단에 팔아 돈이나 만들거나 의과대학에 무상 제공해 연구 대상으로 사용하게 하자고 했지만 세상의 거의 모든 엄마처럼 애초에 이도 들어가지 않을 얘기였다. 그리하여 여태 데리고 살며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인데, 음, 여기까지 하자.
3층엔 에디 페니그, 본명인 에드워드 B. 페니그로 작품을 발표한다는 작가가 살고 있다. 시인이기도 하나 주로 소설을 쓴다. 미스터리, 공상과학, 낮 방송의 연속극 대본, 단막극, 그리고 포르노까지. 하지만 독자들 누구도 똥과 자신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자조 어린 목소리로 말한다. 지금 페니그의 고민은 새로운 장르인 아동 포르노 문학을 쓰고 있는데 조금도 진도가 나가지 않는 거란다. 아직까지 문학 전체를 통틀어서 다룬 적이 없는 유일한 분야로 자신의 작품에는 성인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 아이들에 대한 포르노가 아니라 아이들을 위한 포르노를 쓰려 한다는 것. 이게 팔릴까? 하는 질문에 페니그는 한 마디로 잘라버린다. “시장성? 셀로판지에 새똥을 싸서 팔아도 사는 사람은 있는 거야.” 그러나 그의 노력은 당연히 실패로 끝나버리고 만다.
이 아파트의 2층은 버키의 집이 아니다. 텍사스에 있는 작은 은행의 은행장, 공공시설회사 이사, 자동차대리점 동업자인 사업가의 외동딸 오펄의 집으로, 오펄은 가족들로부터 도망해 로큰롤에서 안식처를 구하다가, 멕시코에서 버키를 만났다. 꿈은 코카인을 상용하는 하드록 밴드의 리드싱어가 되는 것이었지만 현실에서는 스튜디오 파티에서 탬버린을 치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둘은 짧지 않은 동안 한쌍으로 지내면서 둘 사이에 진정한 연결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리하여 서로 더 열심히 가고, 더 많이 가지고, 무엇보다 더 먼저 죽으려 했으나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오펄이 “시간이 흐르지 않는 나라로 여행을 떠나”버렸다.
버키가 아파트로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소속사 트렌스페러노이아의 운영자이자 버키의 매니저인 글롭키가 피난처를 찾아낸다. 버키가 번 ‘막대한’ 돈을 투자하는 과정에 절대로 크지 않은 부동산을 매입했고, 이 아파트 역시 그런 과정에 지금은 회사 소유로 되어 있어서 금방 찾아낸 것도 모자라 마스터 키로 문을 열고 빈 방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 이후 글롭키는 일종의 비서를 통해 얼마 안 되는 현금을 버키에게 주기도 하지만, 버키 입장에서 생각하면 당연히 당장 현금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거금은 절대 손에 쥐어지지 않는다. 큰 단위로 투자를 진행하고 있어서 계약을 파기하지 않으면 현금화가 안 되는데, 파기했다 하면 어마어마한 손실을 감당해야 한단다. 대강 감 잡히시지? 버키는 책이 끝날 때까지 많은 현금을 쥐기는커녕 흘깃 쳐다보지도 못한다.
그리고 등장하는 이상한 소녀 스키피. 어떤 사람이 전해주라는 포장물을 안고 있었다. 꾸러미를 보관해달라고 부탁을 하며 때가 되면 누가 와서 가져갈 거라는 말을 한다. 버키, 속도 좋지. 그키피에게 하는 대답이, 너네들이 꾸러미를 가지러 왔는데, 내가 의식이 없거나 죽었거나, 여기에 없으면 그냥 문을 박차고 들어와 가져가면 돼. 그리고는 신경 꺼버린다. 며칠 후, 드디어 모로코 사막에서 따뜻한 날씨를 즐기고 뉴욕으로 돌아온 오펄. 그녀의 옛 희망은? 맞다. 코카인 상용하는 하드록 밴드. 오펄은 꾸러미를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맞춘다. 그건 롱아일랜드에 있는 미국 정부의 극비 연구실에서 유출된 것으로 지상최고의 마약이 될 원료 샘플이란다. 가격을 책정하지도 못할 수준이라고. 아니나 달라, 이 샘플을 얻기 위해 주로 영국에서 유럽의 판권을 좌우하는 거물도 뜨고, 연예기획사 트랜스페러노이아와 깊은 관련이 있는 해피밸리 농장공동체에서도 지하세계의 천재과학자 페퍼 박사의 시험을 거쳐야 한다는 단서는 붙지만 무지막지한 관심을 표명하는데, 대강 아시지? 미국 영화, 소설에서 마약이 등장하면 몇 명이 죽어나가야 한다는 거.
이 와중에 뭐 조연 출연자는 다음으로 하고, 어쨌든 지상최고의 마약을 일정기간 보관하고 있었던 버키 웬덜릭도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건 당연하다. 게다가 버키가 공연, 방송, 기타 등등을 통해 벌어들인 막대한 현금을 보유하고 있는 집단까지 개입을 하고 있으니 말이지.
미국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고독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레이트존스 거리, 기도할 때처럼 피로의 순간, 버키는 스스로 절반은 성스러운 사람이 된 것 같고, 알 수 없는 시련이 다가올 것에 대비해 에너지를 축적하는데 몰두하고 있었으나, 그 결과는 알려드리지 않겠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과 사건들이 저 앞에서 말한 “잿빛 공간을 가로지르는 기나긴 여행”이었으며 자신만의 공화국, 즉 사생활의 꿈에 대한 테러였다는 것을 차츰차츰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