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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을 열면 ㅣ 창비시선 418
김현 지음 / 창비 / 2018년 2월
평점 :
김현의 《입술을 열면》을 읽고, 정확하게 이야기해서 4부는 대충 휙휙 넘기며 시집 읽기를 끝마쳤다고 주장하면 나도 입술을 열고 한 마디쯤 해야 하겠지? 근데 그게 난감해서, 지극히 난감해서 지금 곤혹스러워 하는 중이다. 도대체 뭐라 해야 할지, 어떤 감상을 내놓아야 할지 문학평론가 양경언의 해설을 읽고, 역시 문학평론가 송종원이 뒷표지에 쓴 글을 읽고도 감을 잡지 못하겠다. 양경언이 이야기한 “캠프적 작법과 다양한 각주가 차지하는 페이지”라든지, 송종원이 서슴없이 쓴 대로 “김현의 펜은 칼끝 같다.” 같은 것이 도무지 그럴 듯하지 않다는 수준을 떠나 이 양반들의 평도 오리무중이다. 물론 이거야 문학적으로, 특히 시, 이 가운데서도 현대시를 읽는 내 소양이 혹독할 지경으로 보잘것없기 때문이겠지만, 그렇다고 시를 이해하기는커녕 알아듣지도 못하고, 공감하기는 더욱 거시기 했음에도 지금 시대에 가장 각광받는 시인 가운데 한 명인 김현의 이름값만 보고, 좋아, 좋아, 밋치겠어,라고 할 수는 없잖은가. 앞으로 시를 읽지 않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지. 시를 안 읽겠다는 건지, 김현을 안 읽겠다는 건지 아직 모르겠지만서도.
김현은 1980년 철원에서 태어났다. 가장 징그러운 시절 (가운데 한 때)에 태어나 일곱 살 때 소위 민주화가 되고, 열 살 때 장벽이 무너졌으며, 열한 살 시절엔 소비에트가 완전히 무너졌음에도 여전히 “독재타도 유신철폐 / 민족해방과 조국통일 / 구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 노동권을 보장하라 / 혐오와 차별 없는 세상을 외칠 수 있으나 / 우리는 눈을 부릅뜬다 // 지금부터 평등한 밤이다” (<빛은 사실이다> 부분)라고 외치는 시인. 물론 이 시집이 2018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지 1년이 되지 않은 상태라서 많은 작품들이 박근혜 정부 때 쓴 것이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지만, 아무리 박근혜 씨가 대통령이 된 게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게 언제 적 이야기라고 독재타도와 유신철폐, 그리고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을 운운하는지, 질림. 왜, 논문을 쓰시지 않고.
이 시집의 중요한 흐름 하나가 퀴어다. 근데 퀴어보다 먼저 이야기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이 책에는 각주 대신 디졸브(dissolve, 장면전환기법)가 사용되었음을 밝혀둔다.”라고 목차 바로 다음 페이지에 써 놓았던 것.
디졸브가 무슨 뜻인지 알고 본문을 읽는 것이 좋다. 네이버 검색해서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을 보니 이렇게 쓰여있다.
“(영화) 앞의 장면이 사라지고 있는 동안 새 장면이 페이드인(fade-in)되는 것. 두 화면을 얕게 겹친 것으로 두 화면이 깊게 겹치는 오버랩(overlap)과 비슷하다. 짧은 시간의 경과나 가까운 장소의 이동을 나타낼 경우 많이 쓰이며, 영화보다는 가벼운 장면 전환이 요구되는 텔레비전 드라마에 많이 쓰인다. 시나리오에서의 약호는 DIS이다.”
시 읽느라고 별 짓을 다 한다고? 그럼 어떻게 하나. 시인이 자기 시를 디졸브 방식으로 썼다고 주장하면서 독자 역시 디졸브 방식으로 읽어달라고 요구하고 있음에. 그러면 디졸브가 이런 뜻임을 숙지하고, 익숙하게 또는 충분히 알고, 좀 길지만 퀴어를 다룬 시 한 수를 읽어보자.
*애정만세
어제 이강생의 얼굴을 발견했다. 이강생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강생은 그 얼굴을 가지고 아시아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저게 바로 세계인의 얼굴이구나, 동성애자의 얼굴을 한 이강생의 얼굴을 보며 수많은 얼굴을 생각했다.
해진 누나 애정만세 보세요.
쓰고 나는 해진 누나의 얼굴을 떠올린다. 해진 누나는 얼굴을 가지고 있는데, 해진 누나는 해진 누나의 얼굴을 가지고 해진 누나의 얼굴을 기억나게 하지 않는다. 해진 누나는 고개를 든 채로 해진 누나의 얼굴을 숙인다. 해진 누나의 얼굴을 눈앞에 두고 아, 저게 바로 누나의 얼굴이구나, 세계적인 얼굴이 해진 누나를 가지고 있다.
나는 빛과 함께 침대 위에서 세계 속 미스터리를 본다. 빛의 얼굴은 잘생겼다. 눈과 코가 무엇보다 입이 있으므로, 뽀뽀를 한다. 뽀뽀할 때마다 빛의 얼굴은 변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슬픔 쪽으로 닭살이 돋는다. 빛의 얼굴이 보고 싶을 때마다 빛의 목소리를 듣는다. 해진 누나에게 애정만세를 보냈어. 이강생의 얼굴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해진 누나의 얼굴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빛의 얼굴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내 얼굴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얼굴이 무수히 변한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죠, 미스터리하다.
이강생의 얼굴은 묘지를 돌아다닌다. 해진 누나는 우는 얼굴에 귀를 기울였다. 내 얼굴은 눈부시지 않다.
**우리의 얼굴은 망가져갈 거야. 그렇지만 너의 얼굴이 먼저 보고 싶구나.
(DIS)
* 묘지를 산책할 때였다. 벤치에 앉아 얼굴을 떨어뜨린 여자가 얼굴을 줍지 못한 채 울고 있었다. 얼굴이 없으므로 숨죽여 흐느꼈다. 그 앞에 살아 있는 누나가 앉아 있었다. 누나는 떨어진 얼굴에게 물었다.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죠. 누나는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누나에게는 애정이 있다.
** 빛은 사실주의다/빛의 목소리를 듣고/빛은 사실이다/쓴다/ (전문)
이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하나. 먼저 제목 “애정만세”를 읽고, 사전적으로 보자면, 제목이 주는 감상이 사라지기 전에 아래쪽, 예전이라면 ‘각주’라고 불렀을 곳까지 시선을 끌어내려 “묘지를 산책할 때였다.……”를 페이드인 해야 하리라. 이 다음에야 시의 본문을 읽고, 마지막 “그렇지만 너의 얼굴이 먼저 보고 싶구나.”가 발음의 잔향 또는 뇌의 뉴런에서 사라지기 바로 전에 두 번째 디졸브인 “빛은 사실주의다/빛의 목소리를 듣고/빛은 사실이다/쓴다/”를 읽어야 한다. 아니면 * 표시가 된 각주 위치의 디졸브를 먼저 보고 제목을 읽는… 아니다, 이건 가능하지 않겠다. 습관적으로 눈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기 마련이니까.
여기에 독자를 애먹이는 다른 하나는, 디졸브, 즉 다음 페이드인 된 것들, 위의 시를 예로 들자면 “묘지를 산책할 때였다.……”가 그리 호락호락하게 무슨 뜻인지 알아채지 못하겠다는 점. 이리하여 독자는 오늘도 김현의 미궁에 빠져 허덕이게 되고, 급기야, 각주인지 디졸브인지, 지랄인지는 더 이상 읽지 않고 본문만 딸랑 읽다가 4부 중간쯤 되면 대한민국의 현대시 만세, 만세, 만만세를 외침과 동시에 방바닥에 시집을 내팽개치며, 이거 팔면 얼마나 받을까, 궁금해한다.
시인 김현이 차라리 산문을 썼으면 어땠을까? 다분히 독자를 위한 독자의 생각이지 시인을 위해 배려하는 건 아니다. 산문으로 쓴다면 위에 인용한 <애정만세>에서 해진 누나가, 이름이 해진이라서 해진 누나인지, 세상의 산전수전을 다 겪어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닳고 닳아, 다시 말해 해질 대로 해져서 해진 누나인지도 알겠고, <애정만세>의 감독 자이밍량이 동성애자인 건 확실하게 알겠는데 자이밍량의 페르소나인 이강생이도 동성애자인지 적어도 시로 쓴 거 보다는 쉽게 알 수 있을 거 같다. 혹시 김현, 정말로 소설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 아냐? 시집보다는 소설책이 값도 비싼데 많이 팔리니까 말이지.
그런데 <방공호>라는 시를 보면 김현도 이런 독자의 안타까움 또는 이해불가의 답답함을 조금, 아주 조금은 이해하고 있는 것도 같다. 김현의 길고 긴 시를 전문 인용하기엔 ‘조금’ 어려운 일이라서 첫 다섯 연만 옮겨보자.
밤낮
라디오를 들었다
사람이 살아 있는 이야기가 이야기되었다
나는 밤낮으로
우리는 죽었다는 말을 번복했다
사람들은 나를 광인이라 불렀다
삐에르, 누군가는 뜻을 알아듣는 말을 해야 한단다
어머니는 말했다
라디오는
부질없는 인류를 작동시켰다
적어도 삐에르, 광대, 재인, 예인, 시인이라면 누군가, 즉 무식하고 천하고 원래부터 상것인 독자님들은 뜻을 알아 처먹게 말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시인도 그걸 알고는 있을 터인데도, 왜 그토록 무식한 불상놈들한테 여전히 밀교의 모스 부호를 타전하고 있을까.
오랜만에 우리 현대시집 골랐다가, 흠. 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