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환상 - 개정판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철 옮김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12년 12월
평점 :
일시품절




  기억 속의 오노레 드 발자크는, 불문과 여학생들이 품에 안고 다니던 <고리오 영감>을 떠올리게 한다. 발자크는 1799년에 태어난 전형적인 19세기 사람으로 청소년 시대에 그의 작품을 즐겁게 읽기는 쉽지 않다. 나도 대학에 들어간 다음에야 <고리오 영감>을 통해 처음 읽어봤다. 갓 청년기에 접어든 젊은이의 흥미를 끌지는 못했다. 중년에 접어들어 다시 읽어보니 세월이 흘러 삶에 녹이 끼어서 그랬겠지만, 고리오 영감의 마음을 실감하게 되면서 발자크가 왜 자신의 작품을 La Comédie humaine, “인간희극” 또는 “인간극”이라고 했는지 이해가 갔다. 이제 여덟 번째 발자크로 <잃어버린 환상>을 골라 읽었다. 작가로서는 의례적으로 7년이란 긴 세월에 걸쳐 집필했는데, 그의 인간극 시리즈가 무려 백 편이 넘는다고 하니 보통 몇 달 만에 한 편의 작품을 써내는 작가의 입장에선 많은 노력을 기울인 역작이라 하겠다. 그의 인간극은 풍속, 철학, 분석 연구, 이렇게 세 가지로 크게 구분한다고 하는데, <잃어버린 환상>은 아직까지 읽어본 그의 작품 가운데 적어도 풍속 연구에 관해서는 가히 대표적이라 할 만하다.

  풍속 연구에 속하는 작품이라고 해서 만만하지는 않다. 서울대출판부에서 나오는 책이 대부분 그러하지만 빽빽한 조판에 본문만 761쪽에 달하는, 발자크 작품으로 드물게 긴 분량이며, 현대 작품에선 거의 시도하지 않는 세밀한 주변환경, 인물의 얼굴과 외모와 복장, 방안의 가구 배치와 모습, 당시 특정 계급이나 직업에서 볼 수 있던 특징 같은 것을 장황할 정도로 묘사하고 있어서 독자를 확 질리게도 만든다. 마음먹고 발자크의 장황한 묘사를 감상할 수만 있으면 이 발자크 표 세밀 묘사의 맛을 음미하고, 음미 수준을 넘어 감탄할 수도 있겠지만, 이게 한 두 번이어야지 장황 묘사가 무수하게 반복되는 바람에 책을 덮고 동네 한 바퀴 산보를 다녀와야 하는 일도 번번히 생긴다. 나도 본문만 겨우 760쪽 분량을 읽느라고 나흘을 가져다 바쳤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괜찮았다. 발자크의 세밀 묘사는 면역도 되지 않아 전에 읽은 책들의 장황함에 이미 빠져보았음에도, <잃어버린 환상> 역시 읽기 시작한 첫날이 가장 힘들었다. 점점 익숙해져 사흘, 나흘째는 거의 부담이 없어지기는 했지만.

  이 책이 재미있었던 것은, 거의 최고 수준의 풍자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3부로 구성된 작품의 1부와 3부는 프랑스 샤랑트 주의 주도인 앙굴렘을, 절반 분량의 2부는 파리를 무대로 한다. 주요 등장인물은 거의 다 귀족, 부르주아, 상공인이나 몰락 귀족 출신의 교육 잘 받은 자제 등이다. 1부에서는 시골의 상류계급. 우리말로 하면 향반들의 허위와 속물성이 독자의 실소를 유발하고, 2부는 프랑스의 중앙, 파리 귀족과 부르주아의 의식을 깊게 침윤해버린 자본주의라는 바이러스의 추악한 날것을, 3부에서도 지방까지 파고든 돈의, 돈 만을 위한 계략과 배신 등을 적나라하게 그린다. 이 속에 당연히 연애 이야기가 들어 있어서 진실한 사랑 가운데 장미의 가시처럼 치명적 배신도 MSG처럼 첨가되어 있고, 허영과 몰락과 배금주의적 예술가들 속에서도 진지하게 자유와 예술을 탐구하는 파당도 존재한다. 이 파당 속에는 나중에 한 권의 단행본으로 등장하는 루이 랑베르도 가담한다. 한 작품에 등장했다가 후속작에 모습을 드러내거나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것이 발자크의 “인간극”에서는 흔한 일이기는 하다.


  이야기는 글자를 읽을 줄도 모르고 쓸 줄도 모르는 앙굴렘의 수습 인쇄공이었던 제롬 니콜라 세샤르 씨로부터 시작한다. 18세기부터 인쇄공으로 일했던 세샤르 씨는 인쇄소 주인 루조 씨가 아이 없이 미망인만 두고 죽는 바람에 사업장을 넘겨받은 세샤르는 직공들에게 엄한 주인으로 변하면서 1793년, 쉰 살에 결혼해 슬하에 아들을 하나 생산한다. 이후 홀아비가 되고, 아들을 앙굴렘 고등학교를 졸업시키고 파리에 유학을 보내 고급 인쇄술을 배우게 하지만,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종종 그렇듯이 아들 다비드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조금도 하지 않아서, 다비드는 파리 굴지의 디도 인쇄소에서 일을 하며 학업을 마친다. 이미 나이가 든 세샤르 씨는 다비드가 졸업을 하자마자 앙굴렘으로 불러들여 아들에게 어마어마하게 덤터기를 씌우고 자신의 사업체를 인수하게 한다. 자신은 앙굴렘에서 40리 거리에 있는 마을 마르사크의 포도원에 정착해 늘 포도주에 취해 있을 요량이다. 그는 정말로 책의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의 숨이 넘어갈 때까지 하나밖에 없는 아들 다비드에게 한 푼의 도움도 주지 않는다. 세상에 그런 아비도 있다.

  그런데 다비드가 인쇄소를 잘 운영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상술에 밝으면 애초에 소설이 되지도 않았겠지. 이때 나타나는 앙굴렘 고등학교 1년 후배가 있으니 앙굴렘에서 약국을 경영하다가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거덜난 집안의 외아들, 놀라운 미모의 청년 뤼시앙 샤르동. 고등학교 다니던 시기에는 다비드가 1년 전에 그랬듯이 아무도 도전하지 못하는 월등한 전교 1등의 왕좌를 즐겼지만 이젠 몰락한 귀족 출신의 어머니는 신분을 숨긴 채 주로 부잣집 신부들을 위한 산파를 하고, 어여쁜 여동생 에브는 고급의류 세탁소 감독으로 일하는 집의 유일한 실업자다. 여기서 독자가 잘 파악을 했으면 좋겠다. 다비드는 뤼시앙을 보자마자 필요도 없는 월 40 프랑의 인쇄감독으로 그를 채용해 극단의 절망에서 구해주는데, 단지 고등학교 1년 후배를 위한 측은지심에 그랬을까, 아니면 나중에 자신의 아내가 되는 에브에게 마음이 있어 그랬을까? 발자크는 다비드의 품성을 매우 선하게 그리고 있어 그의 의도는 측은지심의 발로였겠지만, 그렇게 보려고 하면 다비드의 헌신이 너무 과하다.

  하여간 일을 하다가 하루는 앙굴렘 귀족 사교계에서 가장 큰 별의 위치에 있는 여주인공 바르즈통 부인이 집사를 보내 사교계 회원의 잠업에 관한 논문을 인쇄해오라고 주문하는 바람에 앙굴렘에서 거의 최고 수준으로 머리 좋고, 확실하게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하는 뤼시앙이 바르즈통 부인을 만나는 영광을 맞는다. 이때 뤼시앙이 21세, 예술과 문학을 사랑하는 바르즈통 부인은 36세. 남편 바르즈통 씨는 연수입 2만 리브르 미만이지만 구도시 6대 부자 가운데 한 명으로 일컬어지는 58세의 늙은이로 1부에서는 젊은 30대와 결투에서 승리하고 3부에 들어가면 자연사한다. 왜 바르즈통 씨가 30대의 스타니슬라스 씨와 결투를 하게 되느냐 하면, 1부의 뒷부분에 가서 부인을 향한 사랑에 불타오르던 뤼시앙이 바르즈통 부인의 발 아래 꿇어앉아 부인의 무릎을 부여잡은 채 사랑한다고, 당신 없으면 이 목숨은 한 시라도 숨쉴 이유가 없으니 함께 도망하자고 눈물로 호소하는 장면을, 천하의 협잡꾼 식스트 뒤 샤틀레가 바람을 넣어준 수다쟁이 스타니슬라스 씨가 딱 목격을 해, 단 하루만에 바르즈통 부인과 뤼시앙이 뜨거운 사이라고 앙굴렘 사교계 뿐만 아니라 시민 전체가 다 오해하게 소문을 내버렸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연인은 유부녀와 숫총각 사이로 입술 한 번 마주친 적이 없으나, 일단 이렇게 소문이 난다.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나이든 남편으로 하여금 명예를 위하여 결투를 하게 만들어, 총알이 스타니슬라스의 목을 관통하는 바람에 그는 평생 고개를 45도 정도 비틀고 사는 신세가 된다. 추문에 이은 결투 스캔들로 그 고장에서 살 수 없게 된 바르즈통 부인은 남편을 백작인 친정아버지에게 보내기로 하고 홀로 파리로 향한다. 바로 이 날, 뤼시앙은 부인이 보낸 쪽지를 받는다. 자정에 먼저 조금 떨어진 역점에 가서 자신을 기다려 함께 파리로 가자는 제의. 원래 그런 거다. 딱히 생각은 없었지만 그것으로 인해 문제가 한 번 발생하면 갑자기 파박, 불꽃이 튀는 것. 그게 사랑이다. 그래 뤼시앙은 이미 결혼 날짜를 잡은 다비드와 에브, 그리고 어머니로부터 수중에 있는 모든 돈과 다비드가 발행한 2천프랑짜리 약속어음을 받아 파리로 향한다. 이 2천프랑 때문에 동생 부부는 시작부터 극도의 가난에 시달리게 되는 것 따위는 애초 팔자가 일해서 벌어먹거나 손에 굳은 살 박힐 짓은 하지 않기로 운명지어진 뤼시앙에게는 촌각의 걱정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야밤에 사랑 하나만 싣고 파리로 향하는 낡은 마차의 뒤를 부인의 아름다움에 눈이 먼 식스트 뒤 샤틀레가 쫓으며 1부는 막을 내린다.


  여기까지가 1부 ”두 시인”이다. 2부는 “파리에 온 지방 위인”인데 여기서 말한 위인은 뤼시앙 샤르동을 말한다. 생각을 해보시라. 천생 귀족으로 태어나 평민은 사람 같이 여기지도 않고 살아온 부인께서 산파 일을 하는 엄마를 둔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쳐도, 정식 애인 또는 남편으로 둘 수 있는지. 시골인 앙굴렘에서는 혹시 모르지만 프랑스 말고 세계의 수도인 파리에서 자신마저 촌 귀족 티가 날 정도로 최고 정상의 대 귀족들이 넘쳐나는데 한낱 약제사와 산파의 아들 뤼시앙을 자유롭게 소개나마 할 수 있는지를. 이 사나운 정글의 도시 파리에 자신이 쓴 소설 <샤를 9세의 궁수>와 시집 <데이지 꽃>을 들고 도착해 온갖 영광과 혼돈과 사랑과 파멸을 경험하는 철없는 젊은이 뤼시앙을 보면서, 독자는 쉼없이 한숨을 쉬고 안타까워하고, 옆에 있으면 한 번 귀퉁백이를 쥐어박고 싶게 되리라

  정말 재미있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발자크 표 상세 묘사가 장황하고 잦아서 그렇지 그것만 통과할 수 있으면 19세기 프랑스 소설의 진수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가히 디킨스를 능가하는 최고의 풍자 소설이다. 확실히 19세기는 프랑스 소설의 세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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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2-03-18 05: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워 보이는 작품이군요. 찜해듭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일찍 일어나세요? 역시 늙으면 잠이 앖더던데 :p 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2-03-18 06:07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ㅋ 이젠 시간에 관계없이 졸리면 자고, 깨면 일어나고. 배고프면 먹고.

coolcat329 2022-03-18 08: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저 이 책의 명성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 발자크 팬들이 이 책 가장 좋아하더라구요.
근데 책이 좀 안 예쁘고 오래되서 어디선가 좀 근사하게 나오면 꼭 사야지했는데 역시 골드문트님도 강추군요. 맞아요. 19세기는 프랑스 소설의 시대입니다~♡

Falstaff 2022-03-18 08:46   좋아요 2 | URL
아, 발자크 팬들이 좋아하는 책이군요!
전 <환멸>을 기대하고 있는데 느므느므 비싸서 말입죠. 민희식 선생 번역이라 좋을 거 같습니다만 열 권짜리에 무려 27만원. 으으으.....

다락방 2022-03-18 08:3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오 엄청 재미있을 것 같아요.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ㅋㅋ

이 리뷰 읽으니까 오래전에 본 드라마 <가십걸> 생각이 나네요. 제가 채널 돌리다 우연히 보게된건데요, 고등학교 여자 선생님이 고등학생 남자 제자와 부적절한 관계라고 소문이 나요. 아시다시피 그런데 교사가 학생하고 부적절한 관계가 되면 안되니까 학교에선 그 선생을 해고하고요. 그런데 그 둘은 전혀 그런 사이가 아니었거든요. 저도 이 드라마를 원래 보던 사람이 아니고 처음부터 본것도 아니라서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음모나 모략으로 누명을 씌웠던 것 같아요. 여하튼 교사는 너무 억울한겁니다. 자기는 진짜 아닌데 남고생과 부적절한 관계라 소문나 학교를 관두게 되니.
그러자 이 선생님이 학교에서 짐을 싸가지고 학교를 나오고, 그후에는 이 남고생을 찾아가지요. 어차피 부적절한 관계로 소문난거 진짜 부적절해지자고... 그러면서 남고생 집의 문이 닫히는..

제가 그 때 너무 충격을 받아가지고. 이게 뭐여? 했는데, 오늘 골드문트 님의 리뷰를 읽으니 똭 그 드라마의 그 장면이 생각나네요. 크-

Falstaff 2022-03-18 08:56   좋아요 6 | URL
아, 그런 드라마가 다 있군요.
근데 사실 그런 경우 당하면 정말 억울할 거 같아요. 평소 속으로 연모하고 있었다면 오히려 정말로 불이 붙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ㅋㅋㅋ
그래서 발자크, 이 할배가 죽여주는 것입지요. 같은 내용이라도 에밀 졸라가 썼으면 적어도 다섯 명은 칼부림으로 죽어 자빠졌을 소설입니다. 사실 차마 쓸 수 없어 그냥 넘어갔는데, 저는 결말이 좋았습니다. 정말 인간극 자체입니다.

다락방 2022-03-18 08: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 책 32,000 원에 800 페이지네요?!?!

Falstaff 2022-03-18 09:01   좋아요 2 | URL
게다가 할인율 0%. 빽빽한 글자가 맘에 드는 편집입니다. 진도 무척 안 나가지요. ㅋㅋ

저는 지금 발자크의 <환멸>을 주목하고 있습니다만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로 작정했습지요.

coolcat329 2022-03-18 12: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환멸 10권 27만원이네요!
와 이 책은 도서관에도 없을거 같아요. 있어도 골드문트님이 처음이자 마지막 독자가 아닐까요?

Falstaff 2022-03-18 15:48   좋아요 1 | URL
ㅎㅎㅎ 먼저 있는지 없는지 알아봐야지요. 책꽂이에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 있어서 도서관은 여름이나 되어야 갈 거 같습니다.

그레이스 2022-03-18 13: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발자크 읽을 예정입니다.
빠른 시간 내에...

Falstaff 2022-03-18 15:49   좋아요 2 | URL
재미있는 걸로 고르셔야 할 텐데요. 발자크, 여차하면 골 흔들리는 작품들도 도처에 숨어 있어서요. 그런 거 걸리면 ㅎㅎㅎ 하기는, 인생은 복불복입니다. ^^;;;

수다맨 2022-03-19 11: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노레 드 발자크의 작품 중에서 아무래도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고리오 영감˝일 것입니다.
하지만 발자크의 최고작이자, 대가다움을 보여주는 작품은 역시나 ˝잃어버린 환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외로 이 작품을 모르거나, 알아도 언급하지 않는 분들이 상당하던데 이렇게 독후감까지 쓰시면서 상찬하는 분을 만나면 저절로 반가움이 듭니다.

Falstaff 2022-03-19 21:23   좋아요 1 | URL
저도 이 책을 ˝구경˝하면서 책 값이 비싸구나, 읽기를 계속 미루어왔다가 겨우 읽었습니다. 서울대 출판부의 출간은 고맙지만 독자들의 접근성 측면에선 좀 아쉽습니다.
위에서도 얘기했지만, 책값은 언제나 무지하게 중요하거든요.
그래도 늦게나마 읽은 것이 다행일 정도로 참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별 거 없는 독후감을 좋은 마음으로 읽어주셔서 고마울 뿐입니다. ^^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알라딘 리커버 한정판) 창비시선 446
안희연 지음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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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6년 경기도 성남생. 서울여대 중문과 졸, 명지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석사. 박사 과정 수료. 스물일곱 살 때 창비신인시인상 수상하면서 데뷔. 서른 살이던 2015년에 낸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로 다음 해 신동엽 문학상을 받으면서 서른, 잔치를 시작했다. 슬픔은 혼자 오는 것이 아닌 것처럼 기쁨 역시 혼자 오지 않는 법이라 지금은 30대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내 극작과의 서사창작 전공과정에서 시를 가르치는 교수로 재직 중이다. 가끔 이런 대박도 있다.

  이이가 신동엽 문학상을 수상한 시인이지만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이 처음 읽는 시집이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라고 하는 백 쪽 내외의 아주 얇은 시집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을 포함해 세 권의 시집을 상재했고, 이 시집이 현재까지는 마지막, 세번째 것이다. 요새 시인들의 경향 또는 유행에 맞춰 잘 팔리는 에세이 집을 시집보다 조금 많은 권 수로 시장에 내놓고 있는데, 하여간 나는 시인이 쓴 에세이 집에 취미가 없어서 여태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읽을 일은 없을 거 같다.


  그래도 우리나라 최고의 예술 관련 교육기관인 한예종에서 후학에게 시를 가르치는 30대 시인이니, 이이는 다른 시인들만큼, 아니다, 다른 시인들보다 훨씬 더 자주, 그리고 깊게, 과연 시라는 것이 무엇인가, 고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에서 시인이 탐색하고 있는 몇 가지 주제 가운데 역시 시와 시인의 노래를 사색하는 작품들이 눈에 많이 보인다. 오늘 독후감은 이 주제에 관해 집중해보려 한다.

  시집의 2부, 77쪽에 <시>라는 제목을 단 시가 있다. 이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사실은 흰 접시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데

  흰 접시의 테두리만 만지작거린다


  너는 참 하얗구나

  너는 참 둥글구나

  내게 없는 부분만 크게 보면서


  흰 접시 위에 자꾸만 무언가를 올린다

  완두콩의 연두

  딸기의 붉음

  갓 구운 빵의 완벽과 무구를


  그렇게 흰 접시를 잊는다 도망친다 (후략)



  이 시에서 안희연이 말하고 싶었던 건 사실 1연에서 끝났다고 봐도 좋겠다. 흰 접시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데 테두리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거. 이게 안희연이 생각하는 자신의 시쓰기다.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있어서 맨 처음으로 고백을 하고 싶지만 고백할 마음을 먹는 데만 하루 이틀 사흘이 가고, 뒤돌아 서서 말을 할지 마주보고 말을 할지 고민하는 데만 또 일주일 이주일이 걸렸다는 송창식의 노래 가사하고 비슷? 아, 그건 아닌 거 같다. 접시에 대해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있으나 그게 뭔지 몰라서 완두, 딸기, 갓 구운 빵을 올려보고 별 짓을 하건만 결국 테두리만 한 번 만져보고 이내 접시를 잊고 후딱 도망쳐버린 흔적, 그게 자기가 쓴 시라는 얘기. 그런데 이런 시도, 아무리 자신이 서른 살에 큰 문학상을 받은 시인이라고 해도 쓰고 싶으면 아무 때나 후딱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유독 시가 쓰고 싶은 날이 있다. 그 날을 <영혼 없이>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딘들

  어디에나

  어디서도


  그런 말들을 조약돌처럼 가지고 노는 하루가 있다


  영혼 없이

  시를 쓰고 싶은 날 (후략)



  뮤즈가 깃들지 않으면 시는 쓸 수 없다고, 저 옛날의 사포 같았으면 그렇게 얘기했겠지만 이제 시인은 땅에 두 발을 딛고 텅 빈 하늘에 대고 자기의 노래를 부른다. 시인의 희망은;



  그가 걸어오네

  양손 가득 풍선을 들고


  “저기 풍선 장수가 나타났다!”

  아이들은 앞다투어 몰려들지만

  그가 풍선을 파는 법은 없네


  “이 황금과 맞바꿉시다”

  “원한다면 내 집이라도 내어드리리다”

  그의 풍선은 너무 아름다워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지만

  그는 오직 노래만 한다네

  텅 빈 하늘을 향해


  죽음의 천사여 나는 당신이

  이 땅에서 거두어가지 못한 것을

  쥐고 있다네 (<풍선 장수의 노래> 부분. 후략)



  그런데 이 시보다 더 기능적 의미로 시인에 관한 것이 있으니, 이번에도 장수는 장순데, 생선 장수다. 안희연은 <생선 장수의 노래>에서 시 쓰는 작업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 손을 거쳐간 펄떡임을 기억합니다

  먼바다의 이야기를 싣고

  뜬눈으로 도착한 손님들

  이제 나는 아무 동요 없이 그들의 목을 내려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나를 발골의 귀재라 부릅니다

  움푹 팬 도마나 휘어진 칼을 자랑처럼 내보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피 묻은 장화를 보려 하는 이는 없어요

  내가 더이상 누구의 눈도 들여다보지 않는 것처럼


  한때는 수천의 심장을 따로 모아 기도를 올린 적도 있지요

  다음 생엔 부디 너 자신으로 태어나지 말아라

  내가 주는 것이 안식이라는 믿음

  시간은 무자비하게 나를 단련시켰고


  어쩌면 자비였을 수도 있겠군요

  적어도 영혼이라는 말을 믿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후략)



  내 손을 거쳐간 펄떡임이라고 했으니 생선 장수도 보통 생선 장수가 아니고 펄펄 뛰는 살아있는 것을 그대로 토막내 팔던 노련한 생선 장수다. 지금에 도달하기 위해 서른 댓 살 남짓의 생선장수는 도마가 움푹 파이고 칼이 닳아 휘어질 정도로 난도질을 했다는 은근한 내세움. 그리하여 독자, 즉 생선 사 가는 아저씨, 아줌마들은 자기 칼질이 어떤지만 보지말고 피 묻은 장화도 좀 봐주었으면 하는 희망사항까지 슬쩍 흘려놨다. 자신이 쓰는 시의 대상물을 향해 다음 생엔 자신으로 태어나지 말라고, 즉, 자신을 시화詩化하는 시인을 추호도 원망하지 말라는, 마치 중원의 고수 같이 선언하기도 한다. 자신의 칼질이 어쩌면 자비였을 수도 있으니까. 좋다. 시인이 이만한 기개도 없으면 되겠는가 말이지.

  이것 말고도, “할아버지께서 노래를 찾아오라고 하셨다”로 시작하는 <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 등 여러 편이 있지만 이런 시 한 번 읽어보십사, 하면서 독후감을 마친다.



  나는 평생 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 거야



  죽은

  밟힌


  눈만 그리면 완성될 그림을

  수천장 가지고 있는 사람


  서랍을 열면 황금빛 새가

  죽은 듯이 잠들어 있고


  모두가 새의 황금빛을 이야기할 때

  죽은 듯이라는 말을 생각하느라 하루를 다 쓰는 사람


  내게는 그런 사람이 많다


  창밖이 너무 환해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너머의 너머를 바라보느라 진흙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사람


  씨앗이라고 생각했다면 영원히 캄캄한

  비밀이라고 믿어왔다면 등 뒤에서 나타나 당신을 할퀴는


  소란스러운 기억이 얼굴을 만든다

  파묻힌 발을 쓰다듬으면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도착을 모르는 시계 앞에서

  물거품처럼 사라질

  이야기 이야기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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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퇴를레스의 혼란 창비세계문학 84
로베르트 무질 지음, 정현규 옮김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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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가 전권 번역해 나왔다. 북인더갭과 나남에서. 난 북인더갭/안병률 2권까지 읽음. 마저 읽을까 말까 고민 중. 무질은 작중에 쉽지 않은 철학을 포함시켜 독자를 곤죽으로 만드는데, 무질 읽고 싶으면 <소년 퇴를레스의 혼란>으로 먼저 간을 보는 것도 상책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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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2-03-16 09: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이거 예전에 울력 출판사에서 나온 걸로 읽고도 약간 곤죽이었는데요. ㅋㅋㅋㅋㅋ

Falstaff 2022-03-16 11:12   좋아요 1 | URL
그래도 No 특성남에 비하면 월등하게 편안하더군요. 아유, 그건 정말 각오하고, 컨디션 좋을 때 골라서 읽어도 걍 자빠질 거 같아요. ㅋㅋㅋ

다락방 2022-03-16 10: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특성 없는 남자 1,2권 북인더갭 가지고있는데 ‘작중에 쉽지 않은 철학을 포함시켜 독자를 곤죽으로 만든‘다고 하시니 엄두가 안나네요 ㅋㅋㅋㅋㅋ 전권 몇 권인지 보고와야겠어요.

Falstaff 2022-03-16 11:36   좋아요 2 | URL
ㅋㅋㅋ 이 백자평 괜히 썼나 싶기도 합니다. 다른 분들도 <특성 없는 남자> 도전했다가 코피 나는 거 보고 킬킬 웃을 걸, 하는 심통도 나고 뭐 그렇네요.
저는 여러 곳에서, 여러 번 이렇게 얘기했습지요.
˝북인더갭의 안병률 사장께서 제일 잘 한 일은 무질 전문가이면서도 완간하지 않고 2권까지만 출간한 일이다.˝ ㅋㅋㅋㅋㅋ

북인더갭은 총 3권으로 출간한 반면 나남은 다섯 권이더라고요.
 
클레브 공작부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9
라파예트 부인 지음, 류재화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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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파예트 백작부인은 1634년에 프랑스의 하위 작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죽는 바람에 1650년에 어머니가 재혼을 해서 열여섯의 나이로 궁정에 들어가 왕비의 시종이 되었다, 등등의 바이로그래피는 지금으로부터 너무 오래, 무려 370년 전의 이야기라서 그냥 넘어가겠다. 하여튼 프랑스에서는 대단히 유명한 작가인 것으로 안다. 어느 책이던가, 아니면 누구한테 들었던 바에 의하면, 프랑스 소설을 읽으려면 라파예트 부인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해서, 문학동네 세계문학시리즈 89번이 세상에 나오고 11년이 지난 지금에야 허겁지겁 읽어봤다. 이 정도의 호언장담이면 19세기도 아니고, (발음 조심!) 18세기도 아니고, 17세기 작품을 오늘에 되살리는 이유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오늘은 결론부터 써보자.

  지금 시각으로 보면 그리 특별하지는 않지만, 이런 작품이 모여서 후배 작가들은 영향을 받고, 그리하여 19세기 소설의 시대가 도래했을 적에 프랑스 소설문학의 전성기를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딱 한 마디로 하자면, 심리소설의 조상님이랄까.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심리묘사는 완전히 연애할 때 여자와 남자 당사자들이 품을 수 있는 갈증, 질투(아, 소설에서 질투야말로 얼마나 매혹적인 소재인지!), 오해, 계략, 허튼 짓 등 사람 마음 속 심리의 기승전결을 실감나게 써 놓았다는 의미다. 물론 쇼데를로 드 라클로가 1782년에 서간체 소설 <위험한 관계>를 통해 다시 한 번 연애와 타락에 관한 아슬아슬한 심리의 극단을 보여주었지만, 드 라클로는 여사님보다 120년이나 지난 다음이었다. 모르긴 해도 클레브 백작부인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는 쉽지 않을 터이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후대의 작가들 가운데 적어도 19세기에, 무조건 서사적 재미를 향해 질주했던 알렉상드르 뒤마 같은 이를 뺀 나머지 소설가들, 장황한 필설과 주인공들의 뇌 돌아가는 소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찰찰 흐르는 것 같은 소설을 쓴 작가들 모두 라파예트 부인에게 빚지지 않은 이들은 거의 없을 듯하다는 것.


  장소는 프랑스 궁정과 공작 계급이 거주하는 별장, 저택, 성 등등. 시대는 앙리 2세. 부르봉 왕가를 연 나바르 왕 앙리 4세는 지금 말한 앙리 2세,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남편과 먼 친척이긴 하지만 카틀린 드 메디시스의 아들들과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밤에 죽음 같은 갈등을 한 번 거쳐야 한다. 이때가 에스파냐, 영국, 프랑스, 신성로마제국이 얼키고설킨 시기로 ① 영국에서는 헨리 8세의 맏따님인 메리 1세, 피의 메리, 블러디 메리가 죽어 엘리자베스 공주가 여왕에 등극하고, ② 프랑스에선 앙리2세가 공주 엘리자베트를 에스파냐의 늙은 왕 필리페 2세에게 시집 보내는 걸 축하하는 스포츠 시합을 열어 스스로 기마 창싸움에 출전했다가 창이 부러지면서 튀어나온 나뭇조각이 눈에 박혀 11일 동안 고생만 하다 죽는 바람에 왕세자비이자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가 왕비에 오르면서 왕비의 시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본격적으로 악명을 떨치기 시작, 조만간 새로 등극한 샤를 9세도 젊은 나이에 죽자마자 메리 스튜어트 역시 메디시스 대비한테 스코틀랜드로 쫓겨나 험한 인생을 마감할 예정이며 ③ 에스파냐는 프랑스와의 종전 조건으로 처음엔 왕자 돈 카를로스와 엘리자베트를 정략결혼 시키려고 했다가 신랑을 아버지 필리페 2세로 바꾸자고 아우성을 치는 우여곡절을 거쳐 급기야 앙리 2세가 숨이 넘어가고난 다음에 에스파냐에서 이미 호호 할아버지인 필리페 2세와 첫날밤을 치루게 된 반면, 합스부르크 왕가라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샤를 캥(카를 5세)을 겸하며 에스파냐 최대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던 필리페 2세의 갓끈이 달랑달랑 끊어지기 시작하던 때였다. 햐, ① ② ③이 한꺼번에 일어났다는 게, 거 참, 신기하지? 좀 기다리면 스코틀랜드로 쫓겨난 메리 스튜어트까지 엘리자베스 여왕한테 목이 댕거덩, 잘려 죽는 일까지 벌어지고, 프랑스에선 신교냐 구교냐 하는 문제 때문에 수 만명이 몰살당하는 일도 벌어지는 유럽 중근세 역사의 가장 다이나믹하고 드라마틱한 시기이다. 물론 버지니아 울프 팬이라면 조만간 올랜도 역시 태어날 시기라고 주장할 수도 있고, 뭐 그렇다.


  등장인물을 출연 순서대로 한 번 보자. 정말 빵빵한 집안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야코죽지 말자. 다만 인물들은 정사에 나오는 대로가 아니라 라파예트 여사님께서 자기 마음대로 각색한 것이니 이들의 묘사가 진실이라 오해하지는 말자.


  앙리 2세. 프랑스 왕. 우아하고 친절하고 다정한 품성. 만능 스포츠맨. 아빠의 정부favorita였던 발랑티누아 공작부인의 정부paramour이자 애완견.

  발랑티누아 공작부인. 부왕의 애인이었다가 아들 애인도 겸했음. 식성도 좋다. 역사에 아무 도움 안 되는 인물.

  엘리자베트 드 프랑스 공주. 에스파냐 왕비 예정자. 총기있고 치명적인 아름다움 장착.

  메리 스튜어트. 프랑스 왕세자와 혼인. 외모, 지성으로 완벽.

  나바르 왕. 앙리 4세의 아버지. 기품있고 전쟁에 탁월.

  기즈 공작. 뛰어난 재능. 혁혁한 전공. 깊은 지성과 고상하고 품격있는 영혼? 그래서 저 훗날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밤에서 눈썹을 휘날리며 신교도 학살하라 명령. 몽모랑시와 권력 분할.

  로렌 추기경. 기주 공작의 동생. 야심만만, 총명한 두뇌. 놀라운 언변. 그 나물에 그 밥.

  콩데 공. 나바르 왕의 동생. 1대 콩데 공작. 고귀하고 위대한 정신.

  느베르 공작. 인생이 영광 그 자체. 세 아들이 있는데 둘째가 클레브 공작, 주인공의 남편.

  클레브 공작. 가문의 대표. 너그러우면서도 신중. (다른 말로 우유부단)

  샤르트르 대공. 방돔 가문의 후손. 안색좋은 미남. 늙은 바람둥이. 용감, 대담, 자유의 대명사

  느무르 공. 불어라서 “느무르”로 쓰지 우리 말로 하면 “느물느물”의 “느물” 대공. 남주. 자연의 걸작이라 불릴 만큼의 미남. 지성, 용모, 행동, 기타 등등 한 번 보면 눈길을 거둘 수 없는 남자. 그래서 문제아. 돈 많고, 쌈 잘하고, 잘 생기고, 게다가 공작. 재수없다. 남 주인공.

  몽모랑시 원수. 제롬 K 제롬의 빼어난 소설 <보트 위의 세 남자>에 나오는 주인공 수캐의 이름과 같지만 여기선 왕실업무 대부분을 관장하는 대신.

  생탕드레 대장. 왕의 왼팔. 총신 대우. 몽모랑시와 더불어 발랑티누아한테 잘 보이려 난리.

  당빌 공. 몽모랑시 원수의 둘째 아들. 메리 왕세자비를 향한 가망없는 사랑.

  샤르트르 양. 16세. 갖 사교계 대뷔한 샤르트르 대공의 조카. 클레브 공작과 애정 없는 결혼. 여 주인공. 역사상 가상의 인물


  기타 무지하게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거의 전부가 귀족이다. 저 루브루 왕궁 지붕에 올라가서 조약돌 던지면 귀족이 맞는다. 이들을 먹여살리느라 백성들 등골 빠진다는 이야기는 이때부터 300년 가까이 더 흘러야 말이 나오겠지만 하여간 귀족 나부랑이들은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다른 건 하나도 없고 권력과 돈과 연애를 위해 아드레날린 분비에 여념이 없다. 다른 거? 일체 없다.

  책은 오직 하나, 연애와 연애를 하는 인간들의 대뇌 피질에서 벌어지는 화학작용을 묘사하는데 집중한다. 그래서 샤르트르 양이 클레브와 별로 애정 없이 결혼해 클레브 공작부인이 되고, 자연 최고의 조화라고 일컫는 느무르 공의 대책 없이 “느물느물한” 아니 "느무르느무르한" 대시와 이에 대한 클레브 공작부인의 대처를 그리고 있다. 작품의 스코프는 당시 격변하는 유럽의 역사와 비교하면 정말 사소한 연애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느무르 공과 남편 클레브 공작, 그리고 공작부인의 심리에서 요동을 치는 광경을 묘사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그냥 이게 다다. 사랑 없이 결혼한 유부녀의 외갓남자를 향한 사랑과, 한 독신 바람둥이 남자의 유부녀에 대한 사랑, 혼자만 아내를 열라 사랑하는 남편의 숙명적 트라이앵글.

  자, 이제쯤 책이 주장하는 바를 솔직하게 털어놓아도 좋겠다. 책의 결론은,


  “결혼은 미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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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3-15 06: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럽의 왕가들이 서로 정략결혼한 때문에 사건이 연결된듯요.^^
올랜도! ㅎㅎ
느무르 공!
라파예트 작품 궁금했는데 감사합니다 ^^

Falstaff 2022-03-15 09:07   좋아요 3 | URL
ㅎㅎㅎ 역사적 이야기도 제법 나오기는 하지만 이 책은 전적으로 사랑에 관한 내용이라고 해야겠습니다. 백자평 포함해서 아래 잠자냥 님이 쓰신 대로 아이고, 징글징글하게 사랑 타령 나옵니다. ㅋㅋㅋㅋ

잠자냥 2022-03-15 08: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느무르공 진짜 너무 느묾느물하지 않아요? 으윽… 클레브 공작부인은 또 얼마나 예쁘다는 것인지 ㅋㅋㅋ 전 이 작품 보면서 <겐지 이야기> 생각 많이 나더라고요. 어떤 면에서는 많이 닮았어요. 두 작품 모두 각자 나라의 후대 문학에 큰 영향을 준 거 같은데….. 아이고 저는 그놈의 사랑 징글징글합니다. ㅋㅋㅋㅋ

Falstaff 2022-03-15 09:12   좋아요 3 | URL
초반 지나자마자 느무르 공이 느물공으로 팍 떠오르더라고요. 이후엔 이름도 안 잊히던 걸요. ㅋㅋㅋㅋ
<겐지 이야기>는 그렇게 긴 작품 속에 일본 왕궁의 진짜 별 거 없고 여자들 숨도 못 쉬게 하는 법도에 관해서 상세하게 적혀 있잖아요.
앗, 맞습니다. <겐지 이야기>가 없었더라면 일본 특유의 사소설이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근데요, <클레브 공작부인>이나 <겐지 이야기>나 작품의 출현 시기를 감안하면 대단한 일일 거 같아요!!

다락방 2022-03-15 10: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저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 출근길 버스안에서 이 리뷰 올라온 거 보고 넘나 설레었어요. 진짜 오랜만에 제가 읽은 책이라서요. 크- 저는 이런 책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그간 사랑에 대해 알지 못했던등장인물이 사랑에 대해 알게 되고나서 막 열정에 휩싸이고 사랑이란 무엇인가 깨닫게 되고 그러는거요. 크- 제가 이 책 하도 오래전에 읽어서 뭐라고 써놨나 봤더니 아주 사랑사랑하는 것만 인용을 잔뜩 해뒀더라고요? 사랑에 들끓는 클레브 공작부인 되시는 것입니다! >.<

Falstaff 2022-03-15 11:33   좋아요 1 | URL
ㅎㅎㅎ 근데요, 저는 이런 사랑은 해보고 싶었던 적이 없던 거 같아요. 서로 밀당하고 다른 사람한테 마음 가고. 우.... 별로예요.
걍 담백하게 둘이 사랑하고, 싫증나면, 이제 싫어졌어. 우리 찢어지자, 해서 이별하고, 다른 애인 생겨 또 연애하다가 길가에서 우연히 전 애인 만나면, 오랫만이야, 가끔 생각났어. 잘 지내지? 하면서 악수하고나서 가던 길 가고, 이게 좋잖아요.
ㅋㅋㅋ 이렇게 쓰고보니 꼭 선수같네요. 근데 아닙니다. 연애경력 별로 없어요.

잠자냥 2022-03-15 12: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결혼한 부부가 다들 서로에게 애인 있는 걸 인정하는 분위기에서 놀랐습니다. 물론 그러면서도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쏘쿨~ ㅎㅎㅎ 역시 프랑스인가~

Falstaff 2022-03-15 19:19   좋아요 2 | URL
유럽이 다 비슷하지만 이 가운데서도 제일 난장판이 프랑스 궁전인 건 더 말해봐야 입만 아프지만요. 프랑스 사람들 하여간 못 말립니다.
아 그래서 예술이 그리 창궐, 창궐? 창궐! 하는 거 아닙니까! ㅋ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2-03-15 15: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19세기 위대한 프랑스 소설이 이 소설에 빚을 졌군요! 저는 19세기 전 소설은 너무 옛날이라 읽기 싫었는데 프랑스 문학에서 이 책은 필수라니 급 땡깁니다.
프랑스 소설은 유난히 불륜, 술수, 질투 이런게 많은거 같아요.😅

Falstaff 2022-03-15 19:21   좋아요 4 | URL
넵. 프랑스 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 작품이든지 17세기, 18세기 작품은 읽기가 쉽지 않더군요. 저는 그런 책들을 일종의 의무감 혹은 이후 세대 작품을 읽기 위한 훈련이다, 싶은 마음으로 읽고는 합니다. ^^;;;
 
2019 희곡우체통 낭독회 희곡집 국립극단 희곡우체통 희곡집
김옥미 외 지음 / 걷는사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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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덟 편의 희곡을 실은 580쪽의 두툼한 책. 게다가 대부분 수준작이다. 함께 읽고 있는 서울 연극제 희곡집과 비교해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어 여러가지를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정말로 무대 공연을 염두에 둔 희곡이 아니라 낭독을 위한 작품이라서 극작가들은 마치 영화의 대본을 쓰는 것처럼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할 수도 있었을 텐데, 절대로 선을 넘지 않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장례식장 사장이 사설 구급차 기사에게 오랜 우정과 불운을 미끼로 119 비상 무전을 도청해서 죽어가는 사람만 골라 수송해오게 만드는 첫째 작품 김옥미 작 <발화>부터 독자의 흥미를 조금씩 고조시키는데, 여자의 몸에 관해 손버릇이 좋지 않은 젊은 산부인과 의사와 간호사가 통정하고, 임신한 간호사가 열차 자살해버렸는데 하필 현장에 있던 3류 기자가 시신에서 신분증을 훔쳐 자살자가 도지사의 가출한 딸이라는 작지 않은 스캔들임을 밝혀 특종을 내지만 권력에 의하여 오보로 알려지게 되는 어단비 작 <오보>에 이르면 이제 다음 작품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 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지적 장애가 있는 젊은 여성의 성 문제와 성적 약탈 그리고 장애인 가족이 얼마나 어려운 환경에서 삶을 이어가는 지를 저격한 배시현의 <별을 위하여>도 사회적 논의를 요구하고 있고, 폭설이 내린 한겨울의 덴버를 배경으로 하는 해외 입양아 문제를 다룬 오예슬의 <클로이>도 독자로 하여금 조금은 불편한 생각 거리를 마련한다.

  연극에 출현하는 배우들을 예로 들어서 그렇지만 모든 창작물의 등장인물과 실제 인물들 사이의 간극을 다룬 윤영률의 <조니와 라디오>는 내가 줄곧 관심을 쏟아왔던 책장에 쌓인 책 속의 무수한 인물들, 예를 들어 아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오늘 이 순간까지 고도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내가 잠들어 있을 때, 술에 취해 넋을 놓고 있을 때 책 속에서 나와 나를 내려다보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상상과 연관해서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괴물 아버지에 의한 가정폭력으로 가족이 해체되는 이민규의 <평범한 가족>은 요새 작품집 안에 필수적으로 반드시 한 편 이상 들어야 하는 내용이라 새로운 건 없었으며, 이미 역사에서 사라진 사무기기인 ‘전동 볼 타자기’를 손에 넣기 위해 벌이는 에피소드를 재미있게 그린 기하라의 <삼차원 타자기>는 다분히 교훈적 메시지를 전했다. 마지막 작품 유혜율의 <당신이 밤을 건너올 때>는 여전히 재야에서 가난하게 소외된 자들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주인공 형진을 등장시켜 80년대 민주화 운동 시절 고문당하고 죽어간 동지들과 이제는 변절해 기득권이 되어버린 대부분의 좌파 86세력에게 유감스러운 시선을 던지지만 나는 86 시절 이야기 자체를 듣고 싶지 않아서 흥미를 끌지는 못했다. 그래도 끝까지 읽기는 다 읽었으니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다.


  책에 실린 것들은 전부 2019년 1월부터 11월까지 서울시내 몇 군데 극장에서 낭독극 형태로 공연을 한 작품이다. 이번에는 김옥미, 어단비, 오예슬, 윤영률, 이민규 등의 신인 극작가의 작품들이 실렸다. 유혜율도 문인 등단은 몇 년 전에 했더라도 극작가로의 등단으로 치면 첫 ‘연극’ 공연이 2020년이라고 하니 신인 극작가로 봐야 하겠다.

  국립극단이 진행하고 있는 희곡우체통 행사는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세 권만 출판됐다. 이것으로 희곡우체통 희곡집은 모두 읽은 셈인데, 흥미진진한 행사가 2021년에는 열리지 않은 것인지, 열리기는 했으나 아직 희곡집을 출간하지 않은 것인지 궁금하다. 이 정도 수준의 우리나라 현대 희곡이라면 내가 아무리 백수 시대를 시작하고 있더라도 기꺼이 지갑을 열 용의가 있다.

  좋은 행사를 기획, 진행하고 있는 국립극단의 노고에 갈채를 보내며 곳곳에 숨어 있는 우리나라의 젊은 극작가와 극작가 지망생들의 건필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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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3-15 2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캬~! 저도 골드문트님 대열에 끼어야 할 텐데 이렇게
게을러 리뷰만 읽고 있습니다.
작가들이 그렇게 써 내도 실제로 무대에 올라가는 건 몇 작품 안 될 것 같아요.
제작자들이 검증된 작품만 올리려 하겠죠.
이렇게 낭독회라도 하니 그나마 다행이긴 하겠지만...
공연 보러 잘 안 가지만 낭독회 어떻게 하나 기회되면 함 보러가야겠어요.

근데 백수 되시니까 어떠신가요? 책을 원없이 많이 읽으시니까 좋으신가요?^^

Falstaff 2022-03-14 18:03   좋아요 1 | URL
저도 국립극단에서 하고 있는 낭독공연회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정식 공연이 아니라도 이렇게 무대에 올려주는 것만 가지고 극작가들한테 얼마나 힘이 되겠습니까.

백수되니까요, 오히려 책 읽을 시간이 더 적은 거 같아요. 한 방에 꾸준하게 읽는 대신 짬짬히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요. 암만해도 아침에 책 들고 도서관으로 날라야겠습니다. ㅠㅠ
게다가 초기라서 정리해야 할 것도 남았고요. 주로 소위 4대보험 관련한 것들, 아 정말 귀찮습니다.

조성래 2022-03-18 0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발화> 좋죠!

Falstaff 2022-03-18 06:08   좋아요 0 | URL
넵!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