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 산 -상 을유세계문학전집 1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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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마의 산>을 만 16세 5개월에서 6개월 사이,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삼중당 문고판으로 읽었다. 지금은 서경대학이 들어선 정릉의 언덕 위 하얀 집, 방학 중 보충수업이 끝나고 오직 열람실만 있던 아르센 루팡 고등학교 도서관에서 선풍기 한 대 없이 땀을 뻘뻘 흘리며, 1970년대의 학교는 전기요금 아낀다고 형광등도 켜주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다, 밤이 내려 배가 고파질 때까지 책을 읽던 시절. 숱한 헤르만 헤세와 <개선문>과 <마의 산>과 <인간조건>과 전혜린과 기타등등, 기타등등의 빛나는 보석더미들, 삼중당 문고본. 세월이 흐르고 흘러 당시에 읽은 책들은 어느새 다시 읽어야할 만큼 기억의 채도가 흐려져 거의 다 새로 읽었지만, 작품의 무게와 분량의 압박 때문에 은퇴 이후 시간이 넘쳐 흐를 때까지 기다려야 했던 것이 <마의 산>이었다. 정년을 앞두고 제일 먼저 주문했던 책. 토마스 만의 대표작.

  16세 5개월에서 6개월 사이의 나. 육십대 중늙은이인 나는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어떻게 이걸 읽었을까, 기어이 읽어냈을까 싶어서.


  작품에 대하여 너무 오래된 기억은 이미지로만 남는다. <마의 산>에 관한 기억은 자잘한 봄꽃이 핀 들판을 청년(들)이 걷고 배경에는 마치 성처럼 선 요양원이 보인다. 문장은 딱 하나. 주인공을 일컬어 토마스 만은 “우리의 한스 카스토르프”라고 칭했던 것. 이미지는 혹시 마르세 파뇰의 작품 <마농의 샘> 표지 또는 삽화, 며칠 전 세상을 뜬 장 자끄 상페의 그림에 영향을 받은 건 아닐까. ‘이미지 기억’이란 언제든 왜곡되기 마련이니.

  이번에 책을 읽으며 “우리의 한스 카스토르프”가 언제 나올까 내내 궁금했다. 작가가 직접 나서서 주인공을 독자와 함께 공유하는 호칭을 나는 그때 처음 읽었고, 2014년 독후감을 쓰기 시작한 이후 “우리의 주인공 누구”라고 자주 이를 흉내 냈기 때문에. “우리의 한스 카스토르프”는 거의 에필로그 가까이에 딱 한 번 나온다. 소년 골드문트는 책을 끝까지 읽은 것이 맞다.

  긴 세월이 지나고 다시 책읽기를 시작하면서 반드시 다시 읽을 작품으로 저 삼중당 시절들을 꼽았다. 헤세의 여러 작품과 <개선문>, <인간조건>, <그리스인 조르바> 등을 읽으며 놀랐던 것은, 그냥 놀란 것이 아니라 정말 깜짝 놀랐던 일은, 책의 내용이 거의 완전하게 낯설다는 것이었다. 새 책을 읽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느낌.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쩌면 이렇게 하나도 기억과 연결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토마스 만은 미완성 유작이자 유일한 희극인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을 포함하더라도 딱딱하고 불친절한 독일인 그 자체다. 어머니가 비록 낭만적인 브라질 계였더라도 토마스는 아버지 쪽을 닮아 평생 내성적이고 엄격한 성격을 버리지 못했고, 이런 경향은 (거의) 모든 작품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알기 쉽게 얘기하자면 재미없는 독일인의 전범. 반면에 친형 하인리히는 라틴의 피가 흐르는 어머니를 닮아 사고와 행동이 물론 상대적이겠지만 자유분방, 유쾌하고 활발해 토마스의 자식들마저 아버지보다 백부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역시 소설가였던 형 하인리히의 대표작은 프랑스를 무대로 하는, 저 분방했던 왕비 마고와 카틀린, 메디치 가문의 후예들이 만든 바르톨로메오 축일 밤의 학살부터 부르봉 왕가의 설립까지 그린 <앙리 4세>를 꼽는다(우리나라 번역본은 절판).

  토마스 만을 읽는 일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에 번역해 나온 토마스 만의 모든 장편소설을 읽었는데, 이 가운데 <마의 산>이 가장 높은 벽이라고 해야 할 거 같다. 그렇다고 세계문학을 읽는 사람이 굳이 이 작품을 피할 수, 아니다, 피할 이유는 없다. 먼저 읽어보고, 읽기 쉽지 않다거나, 독자의 취향이 아니라고 판단하면 일단 책을 덮자.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다시 읽어보면 어떻겠는가. 그래도 마음에 차지 않으면 또 덮은 채 한 번 더 시간을 보내다가 또다시 읽는다면.

  이 책이 나오고 벌써 백 년이 흘렀다. 마법의 산에서 성직자 레오 나프타와 이탈리아인 인문주의자 로도비코 세템브리니가 토론하는 형이상학적 논제나, 조선 공학을 전공한 한스 카스토르프의 과학적 지식은 벌써 까맣게 구닥다리가 됐다. 우주 탄생의 비밀은 이미 벗겨졌고, 생명체의 탄생기원도 밝혀졌으며, 유전자의 발견은 생명의 연속성에 환한 조명을 비치기 시작했다. 아직도 저 은밀한 지하 특정장소에서 세계의 운명을 결정짓기 위해 복면을 쓴 단원들이 모이는 지는 몰라도, 내 주위에는 프리메이슨이라는 단체를 아는 사람조차 거의 없다. 세상은 급하게 변했지만 텍스트는 변하지 않는다. 작가는 오직 한 시절, 자신이 경험하고 그걸 문자로 만드는 시기를 대변한다. 그리하여 <마의 산>은 당대 최고의 문제작이었겠지만 이젠 바로 그 점 때문에 새로운 독자에게는 더 넘기 힘든 벽이 되어버리지 않았을까.

  그러나 조금도 걱정하지 마시라. 길고 긴 분량을 더 길게 느끼게 만드는 “독일적 담론”을 담고 있을지언정 단언하노니, 세계최고의 베스트셀러인 구약성서만큼 읽기 어렵지는 않으니까.


  ‘우리의 한스 카스토르프’가 다섯 살 때, 사랑하는 어머니가 동생의 출산을 앞두고 급성 혈관 폐색증을 일으켜 일순간에 심정지가 발생해 세상을 떠났다. 물려받은 사업을 번창시켰던 아버지 한스 헤르만 카스토르프는 아내가 죽고 심하게 낙심해 급격하게 쇠약해지면서 사업에도 영향을 끼치더니 다음해 봄에 폐렴으로 아내의 뒤를 따랐다. 한스는 어쩔 수 없이 시의원이던 할아버지 한스 로렌츠 카스토르프 씨와 함께 살게 됐는데, 할아버지마저 일년 반이 지나 치열한 투병과 이에 따른 고통을 겪고는 대략 40만 마르크의 유산을 남긴 채 폐렴으로 천국의 안녕을 찾아 떠났다. 이후 한스는 작고한 어머니의 외삼촌인 티나펠 영사를 후견인으로 해, 안전한 채권에서 나오는 이자로 영사의 집에서 생활했으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빈혈과 부계에서 내려온 약한 폐 때문에 활동적이지 못한 소년기를 지내게 된다. 

  토마스 만은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를 다보스 플라츠 근방에 위치한 국제요양원 ‘베르크호프’에 부모, 형제, 친척의 별다른 간섭 없이 긴 세월을 보낸 수 있도록 이렇게 초반에 그를 완전한 외톨이로 만들어 놓았다. 단치히 공과대학, 브라운슈바이크 공과대학과 카를스루에 공과대학을 졸업하는 동안 활발하지 못한 사교생활과 그렇게 뛰어나지 않은 성적으로 남의 눈에 띄지 않은 한스 카스토르프는 비록 툰더 빌름스 사의 견습 엔지니어로 입사했으나 어려서부터 조혈작용에 문제가 있어 조선소에 입사하기 전 몇 주 정도 고산지대에서 요양을 하고 오라는 권유를 받는다. 그리하여 작고한 어머니의 이복언니가 낳은 아들 요하임 침센이 머물고 있는 국제요양원 베르크호프에 3주를 예정으로 머물기로 하고, 그곳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1장을 시작한다.

  베르크호프 요양원의 제너럴 매니저이자 수술의 대가이며 스스로도 완치 결핵환자인 베렌스 박사는 냉소적인 사람의 표본으로 한스 카스토르프의 빈혈을 한 눈에 알아보고 야릇한 표정을 짓는다. 결국 한스는 조혈작용 증진을 위한 3주라는 짧은 시간 대신 결핵 진단을 받고 오랜 시간을 베르크호프에서 머물게 된다. 사촌 요하힘 침센은 군문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있었다가 난데없이 결핵 진단을 받아 함부르크에서 멀리 떨어진 스위스의 다보스까지 와 기약 없는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에 조금씩 절망하는 반면, 한스 카스토르프는 산 위의 요양원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정서에 매혹된 것일까, 독자에 따라서 기묘 하달 수 있는 경험을 하기 시작한다.

  처음 한스가 느끼는 감각의 변화는 시간에 대한 것. 저지 독일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흘러가는 고원에서의 시간. 토마스 만은 요양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점과 마치는 시점에 이 “시간”의 정의에 관해 많은 공을 들인다. 시간이란 것이 원래 상대적이지 않은가. 똑 같은 두 시간 40분이지만, 드라마 작가 김수현은 <아바타>를 보면서 왜 이리 시간이 안 가는지, 지루해 죽을 뻔했다가 결국 졸고 만 반면, 많은 감상자들은 순식간에 후딱 시간이 가더란 소감을 냈던 것을 기억하는지.

  고지에서의 시간 변화에 관한 사색이 주된 내용은 아니다. 때는 바야흐로 1차 세계대전의 검은 구름이 유럽을 덮기 시작한 벨 에포크 시대의 끝 무렵. 토마스 만은 이 시절을 배경으로 깔아 놓고 다양한 논제의 만찬을 차려 독자들 앞에 대령한다. 만찬을 즐기든가, 아니면 허겁지겁 퍼먹다가 체하든가, 애초에 여러가지 메뉴 가운데 먹을 만한 것들만 골라서 접시에 담든가 하는 건 완전히 독자의 선택이다.


  그러나,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아예 선택을 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어느덧 여름은 가고 있다. 이제 곧 서늘한 바람이 불면, 당신도 누구에겐 신들의 궁전인 발할이기도 하고, 누구한테는 돼지로 변하고 마는 키르케의 동굴이기도 하며, 또다른 누구에겐 시간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연금술적 모험을 할 수 있는 한 마법의 산으로 떠나보면 어떻겠는가. 산을 오르는 일. 힘들지만 결코 후회하지 않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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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8-16 09:5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글 너무 좋습니다.
십대때 읽었던 문학들이 낯설게 읽혀지는 것 제게도 경이롭습니다. ‘우리의 주인공‘들 역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던 이미지와는 다르죠^^
<마의 산>을 16세에 읽으셨다니... 도대체 소년 골드문트는 어떤 아이였을까?하고 상상해봅니다.
시간에 대한 감각과, 형이상학적 논제의 만찬 등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글이네요.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도 생각나구요.^^
제가 읽었던 골드문트님의 리뷰들 다 좋았지만, 차분히 읽어가며 마음에 와 닿는 문장들을 많이 마주치는 글이었습니다.
책장에 꽂혀있는 마의 산을 올려다봅니다.

잠자냥 2022-08-16 09:46   좋아요 2 | URL
소년 골드문트는 애늙은이....ㅋㅋㅋㅋㅋㅋ

그레이스 2022-08-16 09:58   좋아요 1 | URL
😅

Falstaff 2022-08-16 10:16   좋아요 4 | URL
좋은 마음으로 읽어주셔서 제가 다 황감합니다.
아무 것도 아닌데..... ^^;;
이 소설은 정말 날 잡아서 마음 먹고 읽기 시작해야지, 다른 책들처럼 쉽게 생각했다가는 다른 건 다 모르겠고, 진도 안 나가서 성질 버리기 쉽겠더라고요.
- 애늙은이 출신 중늙은이 드림. ㅋㅋㅋㅋ

blanca 2022-08-16 09:1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제가 지금 이 <마의 산>을 시작할 것인가, 말 것인가, 시작한다면 어느 출판사로 할 것인가로 번민하던 중 골드문트님의 글은 흑, 부담스럽지만 해야 하나 싶게 만드네요. 아, 누군가는 재미는 정말 없다고 해서 제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싶어요. 그렇지만 어딘가에서 읽은(왜 도무지 기억이), 그 어린 시절 좋아하던 친구 연필 빌려서 그 부스러기 간직한 이야기 정말 너무너무 좋아서 꼭 읽어봐야할 것 같아요. 또 고민입니다.

Falstaff 2022-08-16 10:18   좋아요 4 | URL
만일 읽으신다면 을유로 하셔요.
역자 홍성광이 우리나라 토마스 만 협회 회장을 지냈고, 박사 학위도 <마의 산>으로 딴 인물입니다.
연필을 두 사람한테 빌리는데요, ㅎㅎㅎ 더 이상을 입 꾹! ㅋㅋㅋㅋ

다락방 2022-08-16 09:3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봐야지 생각만 오래인데, 한 이십년 후에 읽어야 할까요? ( ˝)

Falstaff 2022-08-16 10:19   좋아요 3 | URL
아뇨, 아뇨.
생각난 김에 얼른 해치우는 것도 좋습니다. 읽다가 아니면 말면 되지요 뭐!

잠자냥 2022-08-16 09: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쿨럭, 저도 <마의 산> 을유로 갖고 있는데요, 상 권만 2번 오르고 아직 하 권은 오르지 못한 1인..... 올해 다시 도전하면 또 상권만..... 3번 오르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2-08-16 10:21   좋아요 3 | URL
하권으로 가면 본격적으로 유대인 출신 예수회 신부와 이탈리아인 인문주의자이자 프리메이슨 단원의 골 뒤집어지는 토론을 시작합니다.
아마..... 산 꼭대기까지 오르느냐, 아니면 중턱 개울가에서 양말 벗고 발 담그고, 라면 끓여먹고 하산하느냐의 갈림길이 되지 않겠습니까. 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2-08-16 09: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16세에 이 책을 읽으셨다니 대단하세요. 근데 아르센 루팡 도서관은 뭔지요? ㅋ
골드문트님 글을 읽으면 ‘왜 나는 책을 이리도 늦게 읽기 시작했나‘ 참 속상했는데요...

역시나 이 책이 가장 진입 장벽이 높군요. 토마스 만 중단편집 하나 읽어봤지만 이 분은 정말 유머가 없으시더라구요.
다시 읽으시면서 소년 골드문트를 칭찬하셨다는 부분에서 마음이 짠해집니다. 저는 그런 책 한 권도 없어요. ㅠㅜ

Falstaff 2022-08-16 10:28   좋아요 2 | URL
제가 나온 아르센 루팡 고등학교는, 창립자가 1970년대 우리나라 최대의 스탠드 바인 ˝월X컵˝의 사장이(라는 썰이 있)었는데요, 그냥 불량 건축물 하나 인수해서 학교 법인 허가를 받았습니다. 명색이 학교라고 도서관도 반지하에 만들어 놓았는데, 글쎄 책이 한 권도 없었습니다. 그냥 공부하는 열람실만 있었습지요.
그래도 교사들은 실력이 빵빵해 소위 스카이 출신이 득시글거려(교무실 문 열고 돌 던지면 스카이 나온 선생들이 맞았다니까요), 예비고사 수석, 설대 수석, 육사 수석 같은 애들을 무진장 배출했습지요. 현 부산시장, 현 서울시장, 이 인간들과 같은 시절에 같은 건물에서 도시락 까먹었다는 거 아닙니까.
 
서왕모의 강림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노승영 옮김 / 알마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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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4년 헝가리 줄러에서 유대인 가문의 변호사 크러스너호르커이 기요르기와 팔린카스 율리어의 아들로 태어난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는 몇 군데의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헝가리 언어와 문학을 공부했다. 1985년에 <사탄탱고>로 화려하게 데뷔한 크러스너호르커이는 이 책 한 권으로 디스토피아 소설의 최전방에 배치되는 영광을 얻는다. 무엇이 됐든지 간에 신인작가가 한 분야에서 가장 돋보이는 활약을 해 “선두”에 섰다는 평가를 받았다면 실로 대단한 평가이리라. 더구나 그게 데뷔작이라니. <사탄탱고>를 읽어보면 첫 장면부터 우울한 첫 가을비가 내리는 날 저 호흐마이스 벌판에서 종소리가 들리며 시작하는데, 세상에나 이게 얼마나 환장하게 우울해서 좋은지는 정말 읽어봐야 안다. 게다가 이미 죽었다고 소문이 난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나 라는 이름의 두 남자는 무대가 되는 집단 농장에 새로운 희망, 그러나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은 조건을 지닌 열매라는 악마적 속성을 지녔다고 독자들이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는 암울한 희망이 등장하면서부터 단박에 크러스너호르커이의 팬이 되고야 만다. 나처럼. 내 경우엔 그의 두 번째 작품 <저항의 멜랑콜리>를 먼저 읽었다. 이 작품은 한 겨울에 헝가리의 한 도시에 거대한 고래를 전시하겠다고 큰소리 치며 서커스단이 들어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사탄탱고>는 집단농장, <저항의 멜랑콜리>는 도시 전체를 대상으로 한 의식불명 상태를 조망함으로써 K나 측량사에 집중한 카프카를 더욱 확대한 듯한 느낌이 들게 만든다. 이 두 편의 장편소설을 읽으면, 물론 독자의 취향에 따라 다양한 반응을 보이겠지만, 독자 개개인에게 맞음과 맞지 않음, 이렇게 두 극단의 평가를 내리지 않을까 싶다. 이이의 가망 없이 장황한 문장과, 수도 없이 난사하는 쉼표의 폭포, 이 속에 이이 특유의 음울한 디스토피아가 마음에 들었다 하면 몇 년 전의 나처럼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팬이 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하여간 나는 이런 “짧은” 과정을 거쳐 그의 팬을 자청했다.


  세 번째 읽은 크러스너호르커이, 작품집 《라스트 울프》는 앞서 두 작품으로 작가에 대한 기대가 저 일곱 번째 하늘의 꼭대기에 올라 있어서 그랬는지, 작품이 함의하고 있는 늑대와 사냥터 관리인과 사냥꾼 이야기가 깊게 생각해볼 만함에도 불구하고 앞선 두 장편소설만큼 만족시켜주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번에 읽은 《서왕모의 강림》은 2008년에 발표한 그의 여섯 번째 책으로 모두 열일곱 편의 단편소설을 싣고 있는 작품집이다. 이 책은 2013년에 영어로 번역하여 출간했다. 크러스너호르커이는 2015년에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타 1만5천 파운드의 상금을 받는데 이이의 책 가운데 영어로 번역한 두 권, <저항의 멜랑콜리>와 《서왕모의 강림》이 수상작이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서왕모의 강림》이 아무리 부커-인터내셔널 상을 받았다고 해도, 나처럼 이틀 반에 걸쳐 모두 열일곱 편, 660페이지를 연달아, 단칼에 읽어치우는 무식한 포식을 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거다.

  첫 작품이 <가모가와의 사냥꾼>이다. 크러스너호르커이는 헝가리를 자주 비우고 세계 각지에 몇 달, 몇 년씩 체류하며 글을 쓰는 일을 자주 했는데 이 ‘세계각지’에 몽골도 있고 태국도 있고 일본의 교토도 있단다. 여기서 말하는 가모가와는 “무한한 예절의 도시, 올바르게 처신하지 못하는 자들을 심판하는 법정이며 올바른 몸가짐을 유지하는 자의 낙원인 반면, 법도를 지키지 않는 자를 위한 유형지인, 예절, 처신, 몸가짐의 미궁”인 교토 시를 흐르는 가모가와 강이며, ‘사냥꾼’은 “아름다움의 요정이지만 무지막지하게 정확하고 단단한 부리와 의지력을 지난 하얀 새로, 한 마리가 서서 수면 아래에 무언가 나타나길 기다리다가 부리를 내리꽂을 뿐인” 대백로를 말한다. 청계천은 물론이고 우리나라 전국의 개울, 논, 밭, 심지어 더러운 하천에서도 볼 수 있는, 철새에서 텃새로 정착한 새로, 매우 강한 요산을 분비해 이 새들이 군집했다 하면 소나무들도 노랗게 말라 죽이는 독한 조류다. 크러스너호르커이는 교토와 백로를 대비시키면서 가히 에세이의 정점에 자리한 수필을 읽는 느낌이 들 정도로 우아한 백로를 묘사하고 있다. 아주 인상적으로.

  두 번째 작품 <추방당한 왕후>는 또 난데없이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등장하는 페르시아 전쟁 발발자, 페르시아 왕국의 전성기를 꽃피웠으나 동시에 왕국을 쇠퇴하는 국면으로 접어들게 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첫 번째 아내, 바빌로니아 출신 ‘와스디’에 대한 작품이다. 신하들이 운집한 가운데 남편이자 페르시아 대제국의 대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왕비 와스디에게 명령을 하니, 가장 진정한 모습으로, 그러니까 나체의 몸에 왕후의 관만 쓰고 파티에 출석하라는데, 그때까지 알려진 모든 미의 척도를 넘어선 아름다움을 가진 왕후는 대왕의 명령을 거절하고, 대가로 판결과 관례에 따라 보석을 빼앗긴 채 수행원 하나 없이 궁정의 거처를 홀로 떠나 왕후의 뜰을 지나 북문을 향해 홀로, 재의 땅으로 가, 왕후보다 세 배 정도의 몸집을 가진 거구의 망나니에 의하여 목이 부러져 죽임을 당한다는, 내용은 그렇지만 소설이란 특징상 매혹적인 이야기이다.


  매혹적이고 인상적인 것도 좋다. 그러나 내가 자주 이야기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꽃노래도 삼세번”이다. 이후에는 열일곱 편의 단편소설 가운데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인 예술품 복원에 관한 것이 아주 재미있게 나오고, 또 몇 번 뒤엔 이번엔 일본의 절에서 아미타여래좌상의 복원에 관한 것이 이어져 흥미를 자아내지만, 염천 복중에 더위를 피하느라 에어컨 빵빵한 도서관에 앉아 콧물 잴잴 흘리며 하루 종일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중증 객담환자의 가래침 줄기처럼, 도무지 끊어지지 않는 문장을 이틀 반 동안 오직 이 책만, 한 권 《서왕모의 강림》만, 읽어보시라.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지.

  안다, 알아. 각각으로 뜯어 읽어보면 근래에 쉽게 읽을 수 없었던 근사한 단편들이 빼곡한 것은. 하지만 결코 읽기에 편하지 않은 크러스너호르커이 특유의 문체를, 쉼없이, 역자 해설에 의하면 교정 중에 3천 개를 생략해 최종적으로 남은 1만5천 개의 쉼표를, 쉼표가 독자에게 요구하는, 자기가 등장할 때마다 새삼스레 뽀짝, 주위를 환기시켜달라는 은근한 압력을, 무려 1만5천 번 당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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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2-08-12 07: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이거 저도 사뒀는데, 명심하겠습니다. 몰아서 읽지 않기! 근데 단편은 하나씩 띄엄띄엄 읽으면 나중엔 잘 기억도 안 나더라고요…. 그것도 제 팔자죠 네네 ㅋㅋㅋㅋ

Falstaff 2022-08-12 13:52   좋아요 1 | URL
넹. 세상살이 마음대로 되는 게 몇 가지나 있습니까. 다 팔자죠, 팔자. ㅋㅋㅋㅋ

mini74 2022-08-12 07: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꽃노래도 삼세번, 1만 5천번의 압력 ㅎㅎㅎ 고생많으셨습니다 골드문트님 *^^

Falstaff 2022-08-12 13:53   좋아요 1 | URL
사탄 탱고 함 읽어보셔요. 도서관에서 대출해도 좋은데요, 모 아니면 돈데, 마음에 드시면 얼른 새 책 사겠다고 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럼 곧바로 크러스너호르커이 (이름도 드럽게 길어요) 팬이 되는 겁니다. ^^

moonnight 2022-08-12 19: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탄탱고 사놓았는데 엄두를 못 내고 있습니다. 핫핫-_-;;;;;;;
1만5천번의 은근한 압력@_@;;; 그나마 3천개 생략@_@;;;;;;;;;;;;; 더더욱 엄두를 못 내겠@_@;;;;;

Falstaff 2022-08-13 05:47   좋아요 1 | URL
일단 시작을 하세요!
<사탄 탱고>에 맛을 들이면, 하이고, 대책이 없답니다. 정말 괜찮아요!

coolcat329 2022-08-21 13:02   좋아요 1 | URL
저도 멋진 빨간 책 <사탄 탱고> 골드문트님 리뷰읽고 바로 사놨는데 겁나서 못 읽고 있습니다. 책제목, 작가 이름, 책 디자인 모두가 너무 셉니다.🥺

Falstaff 2022-08-21 13:20   좋아요 1 | URL
ㅋㅋㅋ 쿨캣 님은 심지어 매우 몰두해서 읽으실 수 있을 듯합니다!
읽어보시면 그렇게 세지 않아요!
아참, 헝가리 작가 중에 서보 머그더도 있네요. 이이의 <도어>보다 덜 세거나 비슷한 수준입니다. ^^

coolcat329 2022-08-21 13:28   좋아요 1 | URL
앗! <도어>는 어렵지 않았는데 그 정도라니~~올 가을 도전해보겠습니다.
환장할 정도로 좋은 우울이라니~~저도 느껴보고 싶어요!

Falstaff 2022-08-21 16:18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
전 ˝어렵지 않다˝거나 ˝쉽다˝라고 안 했습니다.
˝쎄지 않다˝고 했지요.
그래도 올 가을, 도전해보셔요! 화이팅팅팅...티잉!!!!

바람돌이 2022-08-12 2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뭔가 고문당한 느낌이군요. 골드문트님 고생하셨어요. 맛난거 드시고 기운 내세요. 근데 왠지 책은 재밌을듯.... 하루에 한편씩 읽으면 되나요? ㅎㅎ

Falstaff 2022-08-13 05:48   좋아요 2 | URL
어제 맛난 것 너무 많이 먹어 대낮부터 꽐라.... 이제야 댓글을 쓴다는 거 아닙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혁명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사상선집
알렉시스 드 토크빌 지음, 이용재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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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읽은 역사책. 역사학자이자 철학자이기도 한 알렉시 드 토크빌이 필생의 대표작 <미국의 민주주의>를 쓰고 유명세를 얻은 다음, 벌써 60여 년이 흘러 혁명을 직접 경험하고 증언해줄 사람이 이젠 없어진 프랑스 혁명에 관하여 한 번 더 불세출의 사서를 한 권 쓰게 되니 바로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 혁명>이다.

  토크빌 자신이 프랑스의 유명한 문벌귀족 출신이다. 프랑스 귀족은 대강 두 종류로 따지는 게 보통이다. 앙리 4세 또는 그 이전부터 작위를 세습한 진짜 귀족하고, 주로 부르주아에게 귀족 증명서를 남발하여 그들의 돈과 세력을 이용해 자신의 야망을 채우기로 작정을 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던져준 작위를 얻은 신흥귀족. 토크빌은 틀림없이 혁명 이전부터 이어져 온 진짜 문벌귀족의 일원이었던 것 같다. 이건 그리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니란 뜻도 아니다.
  이 책의 9.5할은 혁명이 아니라 구체제, 즉 앙시앵 레짐에 관한 이야기다. (앞으론 ‘앙시앵 레짐’ 대신 ‘구체제’로 표기하고자 한다. 글자 수가 적어 타이프하기 더 쉬워서.)
  루이 14세 때 정점을 찍고, 정점을 찍은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바로 그 시점부터 내리막길을 걷던 프랑스 전제정치, 절대 왕조가 그의 증손자 루이 15세에 와서는 거의 폭정 수준으로 변한다. 다수의 귀족과 새로이 대두한 부르주아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대신 그들의 특권을 보상할 왕국의 수입원을 개발해야 하는 상황에서 절대왕조가 손쉽게 착상한 것이 인민들을 더욱 착취하는 것이었다. 부르봉 왕조 시대에는 기사를 포함한 귀족들이 자신들이 고용한 용병을 이끌고 스스로의 목숨과 건강을 담보로 국토와 인민들의 안녕을 보장하는 대신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인민들로부터 타이유세를 징수했다. 끔찍한 수준으로 타이유세(Taille稅 : 두산백과에선 이를, 봉건적 사회에서 농노에겐 세금을 걷는 사람 마음대로 하는 자의적 세금이었고, 비농노들에겐 정액定額 징수하는 세금이라 했다. 귀족을 포함한 국가가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치루는 보호대상保護代償으로의 “공조”였다고 설명한다.)를 인상하는 등 하여간 걷어갈 만하면 무조건 약탈하고, 그 외에도 숱한 부역의 의무를 지우게 하기 때문에 인민들은 애초부터 도시로, 도시로,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도시인 파리로 집중할 수밖에 없었단다. 도대체 얼마나 인민들을 혹독하게 착취했느냐 하면, 타이유세를 열 배 올려 징수를 했단다. 여기에 사회 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는 당연히 국가 예산에서 충당하지만 도로, 항만 같은 건 언제나 예외 없이 귀족, 부르주아들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임에도 무상으로 인민들의 노동력을 징발했던 건데, 지금이나 그때나 사람들이 가장 참을 수 없어하는 것이 불평등이다. 다 같이 배고프면 문제가 아니지만, 나만 배고프고 저들은 함포고복하고 있음에도 부자들의 이익을 위하여 내 힘을 보태 도로를 닦고 있다면 이건 진지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토크빌은 위에서 예를 든 한 가지 사례를 비롯해 전제국가 곳곳에 무르익고 있었던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꼭 집어서 이야기하는 대신 크게, 사회적, 경제적, 계급적, 문화적 변곡점의 대두에 관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틀을 소개한다.
  우리가 흔히 ‘프랑스 혁명’이라고 하면 마라, 당통, 로베스피에르로 대표하는 공포정치와 루이 16세, 아름다운 마리 앙트와네트의 단두대에서 절단된 머리통을 떠올리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간혹 재주는 프랑스 인민이 부리고 돈은 코르시카 출신의 키 작은 촌놈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번 사건 정도로 연상을 하는데, 여태까지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결딴내버린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었다는데 더욱 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이제 인민의 힘이 역사의 물결 앞에 등장하여 그간 싹이 트기만 했던 자유, 평등, 박애의 씨앗은 120년 후 러시아 혁명으로 열매를 맺을 것이고, 부르봉 왕가 뿐만 아니라 로마 가톨릭의 권위까지 아예 뿌리째 뽑혀버리는 정치, 경제, 사상의 일대 변혁이었음은 말하면 무엇 하겠는가만, 우리가 만일 이렇게 생각해왔다면 다시 돌이켜 숙고해봄직한 것이 이 책에 나열, 강조되어 있다(로마 가톨릭을 포함한 기독교가 구체제에선 귀족계급에서 멸시 당했던 반면, 혁명 후엔 귀족들을 중심으로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맞는 아이러니도 구경할 수 있다).
  구체제의 모든 것이 정말 그리 완벽하게 부패했고, 지리멸렬했으며, 아니면 적어도 더 이살 돌아볼 가치조차 없는 것일까, 하는 숙제. 구체제도 나름대로 자신들 속에 내재한 문제점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으며 그것들의 해결을 위해 자정하는 과정에 있었는데도, 그것보다 더욱 큰 압력으로 뿜어져 나온 인민의 힘이 폭력적인 혁명으로 나타났다는 것이 책의 요지다. 그러면서도 폭력혁명의 대두가 타당하다는 시각도 견지하는데, 어느 사건도 다 마찬가지겠지만 과거의 문제점 속에 가까운 미래에 벌어질 사건이 이미 발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동서가 다 마찬가지다. 사마천의 <사기 세가>를 보면 진섭이라는 촌놈이 하나 등장하여 세가의 한 편을 장식하고 있다. 그리 엄정한 법가적 통일국가 진秦나라 변방의 한 병졸이 자신이  처벌받을 것이 두려워 한 번 시도해본 최초의 민란을 시작으로 위대한 진나라가 본격적으로 멸망의 길을 걸었던 것도 사실 진나라 안에 이미 멸망의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기 때문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거의 모든 일, 사건, 문제는 문제 속에서 이미 해결의 방법을 내포하고 있는 법이지만 사람들은 문제를 해석하려할 뿐, 해결하려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헤겔의) 말은 거의 언제나 정확하다.
  여러 책을 읽어보면, 철학책(물론 요새 철학책 말고 예전 책들)은 어떻게 하면 쉬운 얘기를 어렵게 쓸까 고민한 결과물인 것처럼 보이는 반면, 역사책은 역사학자가 되려면 작문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것처럼 아주 읽기 편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앙시앵레짐과 프랑스혁명>은 읽기에 매끄럽기는 하지만 역사책을 평소 잘 읽지 않은 사람들에겐 조금 과하게 전문적이란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마치 (박근혜 정권 시절 국사 교과서 편찬 위원장인가 뭔가 하는 감투 때문에 이미지 망쳤지만) 훌륭한 토지사 연구가 김정배의 고려시대 또는 조선시대 토지사 관련 책이 어렵지 않은 문장들일지언정 읽기(읽어내기!) 쉽지 않은 것과 비슷하게 불편할 수도 있겠다는 정도.
  다시 말한다. 이 책은 프랑스 혁명의 진행과정이 아니라 구체제에서 혁명이 터질 수밖에 없었던 당시 환경, 구체제가 당연히 폐기될 악덕으로 이루어진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제 안에 숨어있던 뇌관들을 밝히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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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쥬코 프랑스 희곡선 1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 지음, 유효숙 옮김 / 연극과인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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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작가 베르나르-마리 콜테스에 관해서는 그의 희곡집 <검둥이와 개들의 싸움>에서 소개를 했으니 넘어가기로 하자. 아름다운 일이 별로 없었던 인물의 생애를 굳이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2차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극장을 달구던 장르는 단연 부조리극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외젠 이오네스코와 사무엘 베케트의 <대머리 여가수>, <고도를 기다리며>는 21세기 초반을 맹렬하게 질주하고 있는 요즘에도 무대에 올릴 때마다 매진을 기대하게 만들 정도로 인기가 높다. 한 20여 년 성가를 높이던 부조리극을 지양하는 움직임으로 1970년대에 등장한 것이 진짜 삶의 한 단면에 집중해 보여주려 했던 일상극이었다. 일상극에서는 시민들이 정말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날것’의 언어를 그대로 대사로 만드는 일도 흔했다고 하는데, 현대 프랑스 희곡을 번역으로 읽어보면 아무래도 원어민처럼 상세하게 느끼지 못할 듯하다. 하여간 나는 못 느꼈다.

  이제 80년대 말을 기점으로 등장한 베르나르-마리 콜테스. 우리에게 콜테스, 라고 하면 당연히 민음사 세계문학 124번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를 떠올릴 것이다. 이 책엔 콜테스의 표제 작품과 <숲에 이르기 직전의 밤>, 두 편의 대표작이 실려 있어서 콜테스의 반항기, 긴장과 폭력 등을 감상할 수 있는데, 이번에 읽은 극작가의 마지막 작품 <로베르토 쥬코>는 여기에 한 술 더 떴다. 그렇다고 콜테스를 반항과 폭력, 범죄 같은 하드코어 작품의 생산자로만 여기면 섭섭할 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길게 이어지는 대사가 번역문으로 읽어도 무척 시적이고 심지어 아름답기조차 하기 때문이다. <로베르토 쥬코>의 주인공 로베르토는 희대의 살인마. 길지만 그의 대사를 인용해보자.


  “난 떠날 거야. 지금 바로 떠나야 해. 이 거지 같은 동네는 너무 더워. 난 눈 내리는 아프리카에 가고 싶어. 죽을 거니까 떠나야만 해. 어차피 그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그 누구도. 남자에게는 여자가 필요하고, 여자는 남자를 필요로 하지. 하지만 사랑이란 없어. 난 여자들하고는 동정심 때문에 같이 자지. 지금처럼 불행하지 않게 개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 쓰레기통을 뒤지는 거리의 개 말이야. 아무도 나한테 신경도 안 쓸 거야. 난 옴으로 뒤덮인 누런 개였으면 좋겠어. 그러면 사람들이 나에게 신경도 안 쓰면서 피해갈 테니. 난 영원히 쓰레기통을 뒤지고 싶어. 더 이상 단어들이란 없어. 더 이상 할 말도 없어. 말을 가르치는 걸 중단해 버려야 해. 학교를 없애 버리고 묘지를 늘려야 해. 어차피 일년이나 백 년이나 모두 마찬가지야. 빠르건 늦건 언젠가는 모두들 죽어야 하니까. 그런 게 새들을 노래하게 하지. 그런 게 새들을 지저귀게 해.” (p. 46)


  로베르토 쥬코는 아버지를 살해한 죄로 교도소에 수감되자마자 탈옥에 성공해 곧바로 집으로 달려가 엄마를 목 졸라 죽인다. 이어 길거리에서 지나가던 형사의 등을 칼로 찔러 죽이고 권총을 탈취해, 벤츠 280SE를 타고 다니는 여성의 열네 살 먹은 아들의 머리통을 쏘아 살해한 후 거리에서 만난 경찰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해 다시 교도소에 들어간다. 현대식 교도소에서 또 한 번 탈옥하기 위해 지붕으로 올라간 로베르토 쥬코는 지붕에서 추락하고 만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희곡에는 나오지 않지만 죽었다고 봐야겠다.

  이 이야기는 ‘수코’라고 하는 이탈리아 조현병 환자를 모델로 해 만들었다. 콜테스는 우연히 TV를 통해 수코를 만난다. 조현병 증세로 열네 살에 부모를 살해해 정신병원에서 오래 치료를 받다가 프랑스로 탈출했고, 프랑스의 여러 지방을 전전하며 절도, 성폭행, 연쇄 살인을 저지르다 이탈리아에서 체포된다. 이탈리아의 감옥에서는 탈옥에 실패하자 감방 안에서 자살해버렸다.

  콜테스는 이 흉악범의 이야기를 왜 마지막 작품으로 구상했을까. 당시만 해도 걸렸다 하면 방법 없이 곧바로 죽을 병이었던 HIV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틀림없이 이 작품이 유작이 될 것을 알았다고 하는데, 많고 많은 이야기 가운데 하필이면 연쇄살인범의 이야기를, 앞에서 인용하기도 했지만, 시적이기도 하고 심지어 아름답기조차 한 언어로 만들었을까. 이게 궁금했다. 당연히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현대 범죄사에 이름을 올릴 ‘수코’라는 조현병 사이코패스에 관해서는 해설을 읽기 전까지 전혀 몰랐으니 더욱 이상할 수밖에. 처음부터 전제로 나오는 친부살해는 저 멀리 소포클레스부터 유구하게 내려오는 전통이니 그러려니 할 수 있었지만, 탈옥 후에 곧바로 벌어지는 친모살해부터, 독자는 이 대책 없는 범죄자의 진짜 모습이 궁금해지지 않았겠는가 말이지.


  그런데 책의 첫 페이지에 <파리의 대 마법 파피루스의 한 부분인 미트라 예전>이라고 실려 있다.

  “두 번째 기도를 한 후에 너는 태양의 표면이 펼쳐지는 것을 볼 것이며, 태양은 바람의 근원인 성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네가 동쪽으로 머리를 돌리면 태양의 성기는 동쪽으로 이동할 것이고, 네가 머리를 서쪽으로 돌리면 서쪽으로 따라올 것이다.”

  이 두 문장을 의사이자 철학자인 칼 융이 BBC와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인용을 했다고 한다.


  쥬코가 순찰을 돌고 있던 경찰 두 명에게 자신의 범죄 사실을 고지하고 체포되어 교도소로 왔고, 다시 탈출하기 위해 교도소 지붕 꼭대기에 올랐을 때, 무대에는 오직 지붕 위 쥬코만 등장하고 나머지 재소자들은 목소리로만 쥬코와 대화한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쥬코는 목소리들에게 말한다.


  “태양을 봐. (완벽한 침묵이 교도소의 마당을 감싼다.) 아무것도 안 보인단 말이야?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움직이는 게 안 보인단 말이야?

  태양에서 나오는 것을 쳐다봐. 태양의 성기야. 저기에서 바람이 나오는 거야.

  머리를 움직여 봐. 너희들과 함께 그게 움직이는 걸 볼 수 있을 거야.

  저건 바람의 근원이야.

  동쪽으로 머리를 돌리면 그건 그리로 움직여 갈 거야. 머리를 서쪽으로 돌리면 그쪽으로 따라올 거야.”


  이어서 폭풍이 일어나 비틀거리던 쥬코는 지붕에서 추락하고 막이 내려간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걸까? 역자 유효숙에 의하면 콜테스는 “집단적 무의식 이론의 근거가 된 ‘태양의 성기’ 일화를 <로베르토 쥬코>에 삽입하고 있다.”고 한다. 사람이 동쪽으로 머리를 돌리면 동쪽으로, 서쪽으로 돌리면 서쪽으로 향한다니까, 해부학적으로 보면 남성의 성기에 가깝고 실제로 유효숙도 ‘남근’이라 칭하는데,  이 ‘남근’이 흔들려서 바람이 생긴다는 건 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20세기에 사는 조현병 환자가 우연히 저 오래 전 고대 미트라 교의 예전에 등장하는 태양의 성기를 이야기 했다고 해서 그게 “집단적 무의식 이론”의 근거가 된다고 하니, 이거 정말 놀라운 비약 아닌가.

  오히려 로베르토 쥬코가 살인을 하지 않는 보통의 시간에는 정상인들보다 더 부드럽고, 온화한 품성을 지녔음을 강조해서 역설적으로 현대의 누구나가 흉악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고, 현대인들은 그런 위험 속에서 호흡하며 살고 있다고 말한다면, 굳이 뜨겁기만 하고 강단 없이 흐물흐물거려 별 내용 없을 것이 뻔한 태양의 성기 이야기까지 꺼낼 필요가 없었을 텐데. 그래도 공연만 하면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을 듯한 작품일 듯.

  물론 희곡에 별로 조예가 없는 아마추어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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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노 슐츠 작품집 을유세계문학전집 61
브루노 슐츠 지음, 정보라 옮김 / 을유문화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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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노 슐츠는 생전에 딱 두 권의 작품집을 냈다. 이 두 작품집을 한 권으로 묶어 <저주토끼>의 저자인 정보라가 번역해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 61번으로 출간했다. 그것이 2013년.

  폴란드 문학이 우리에게, 아니면 적어도 내게 이름을 알린 것은 <쿠오바디스>를 쓴 헨릭 시엔키에비치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통해 알게 된 비톨트 곰브로비치, 그리고 2018년 노벨 문학상을 받아 장안의 종잇값을 올린 올가 토카르추크 정도였다. 그러다가 며칠 전에 매력적인 장편소설 비트키예비치의 <탐욕>을 읽는 행운을 누렸고, 이 작품의 해설 속에서 비트키예비치에 못지 않는 난해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작가 브루노 슐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출간한지 9년이나 된 을유세계문학 61번 책을 주저없이 사서 읽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비트키예비치와 곰브로비치, 그리고 슐츠. 도대체 1920년대와 30년대 폴란드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하 역자의 작품 해설을 인용함.) 브루노 슐츠는 1892년 당시 갈리치아 왕국의 드로호비츠에서 유대인 부모 사이의 늦둥이로 태어났다. 유대교를 포기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한 슐츠 가족은 드로호비츠에서 포목점을 운영했는데, 책을 통해 짐작해보면 1층은 포목점이고, 2층은 슐츠 가족이 살며, 3층 이상은 다른 사람들이 입주한 아파트 형태의 집 구조를 가졌던 거 같다. 이 아파트가 슐츠 씨의 소유인지 아닌지는 가늠할 수 없으나, 아닌 것으로 봐야할 것이 포목점 하나에 모든 가족의 생계가 걸려 있었다고 하니 방세를 받아 살림에 보태지는 않았을 터. 1차 세계대전 와중이던 1915년 아버지가 병사하고 11세 위의 형 이지도르마저 1935년에 타계하는 바람에 슐츠 혼자 과부 형수와 조카, 19세 위인 과부 누나와 조카들의 생계도 전적으로 슐츠가 책임을 져야 했다고 하니, 미술 교사로 근근이 먹고 살던 그에겐 어려운 시절이었을 것이다.

  슐츠는 에로틱하고 환상적이고 동화적인 기묘한 분위기의 미술작품집 《우상숭배의 책》을 내 폴란드에서 어느 정도 주목을 받기도 했고, 자신의 모교인 김나지움에서 대학을 정식으로 졸업하지 않아 기간제 교사로 일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위키피디아는 브루노 슐츠를 작가, 미술가, 문학비평가, 교사로 소개한다. 이후 슐츠는 스타니스와프 이그나치 비트키예비치, 데보라 포겔 등과 교류하게 되고, 1937년에는 비톨트 곰브로비치, 레오폴트 스타프 등 주요 인사들과 친교를 맺는다. 더욱 놀라운 건, 인생을 통틀어 딱 두 권의 단편집만 낸 슐츠가 1937년 폴란드 문학 아카데미 훈장을 받았다는 것.

  그러나 영광의 시절은 짧았다. 몇 년 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전쟁터가 된 폴란드의 게토에 머물러야 했던 슐츠는 1942년 11월 19일, 드로호비츠의 게토 거리에서 게슈타포의 총에 뒤통수를 맞아 길거리에 시신이 버려진다. 해설에 의하면 굶주림에 시달리는 가족을 위하여 빵을 구하러 나갔다가 총에 맞았다는 말도 있고, 게슈타포 경찰이 슐츠가 그려준 초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총을 쏘았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어찌 됐던 당시에 유대인 시신을 함부로 수습하는 것도 금지사항이었기 때문에 하루 종일 방치되었다가 다른 유대인 시신들과 함께 한꺼번에 매립된 것으로 추정한단다.


  이 책은 두 권의 단편집 《계피색 가게들》과 《모래시계 요양원》을 실었다.

  폴란드 문학에 과문해서 몰랐는데 브루노 슐츠는 20세기 세계문학사에서 자기 만의 특별한 영역을 가진 작가들, 스타니스와프 비트키예비치, 비톨트 곰브로비치와 더불어 특히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폴란드에서 있었던 아방가르드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고 한다. 전위예술. “기성의 예술관념이나 형식을 부정하고 혁신적 예술을 주장한 예술 운동 또는 그 유파.” 그러니까 애초에 아무 대비 없이 슐츠의 책을 읽겠다고 덤비면 난처한 입장을 당하기 좋다. 이 책을 읽기 위하여 준비운동이 좀 필요할 것 같다. 소설 읽기의 스트레칭. 만일 소설 따위를 읽는데 무슨 준비운동이고 스트레칭이냐, 준비운동과 스트레칭? 아니, 무슨 같은 말을 두 번 하느냐, 라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그래도 많이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수사법, 모든 상징이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출몰하는 일견 기괴한 작품을, 아름답게, 맞아, 맞아, 아름답게, 아무리 아방가르드 소설이지만 간혹 주머니 속의 바늘처럼 불쑥 삐져나온 아름다움을 찾기 위하여는 미리 어느 정도의 독서가 준비되어 있으면 더 좋겠다는 뜻이다. 부탁하니, 이 제안을 잘난 척이라 여기지 말아 주시기를.

  당신은 카프카의 <변신>을 읽었을 것이다. 그러면 카프카는 됐다. 곰브로비치의 <페트리두드케>는?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치고, 소위 아방가르드 적 ‘아름다움’은 어떻게 됐는가. 그걸 찾기 위해서 비트키예비치의 길고 긴 장편을 읽을 수는 없다. 그러니 다른 건 몰라도 전위적 아름다움은 그냥 책을 읽으면서 알아가는 것으로 치자. 어차피 아방가르드의 아름다움이나 그냥 우리 주위의 들꽃처럼 지천에 깔려 있는 아름다움이나 그게 그거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준비가 되어 있으면 누구나 찾을 수 있을 터이니. 그러니 됐고, 여기에 (내가 특히 좋아하지 않는 작가 두 명만) 더 보태면 저 남미 사람, 아쉽게도 특별히 좋아하지 않는 아르헨티나의 맹인 작가 보르헤스와 초현실주의의 대표선수 앙드레 브르통. 이 정도의 예비 독서가 있으면 《브루노 슐츠 작품집》을 그나마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을 듯하다. 여기서 나는 선독서가 있으면 책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고 했지, “쉽게” 읽을 수 있다고 얘기하지 “않았다.” 그만큼 브루노 슐츠는 문자와 단어와 문장과 문단으로 헝클어진 작품을 만들어 당신의 대뇌 역시 마구 헝클어 놓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내가 읽은 슐츠는 특히 카프카 가운데서도 <변신>과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을 것 같았다. 그의 시각으로 보면 세상과 인물과 객체는 관찰자의 시점에 의하여 수시로 다양하게 변하는데, 이때 변하는 정도가 카프카나 브르통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혁신적으로 변용한다.


  역자 정보라는 해설을 통해 “폴란드의 아방가르드 작품을 읽어보면 처음에는 무척 이해하기 힘들지만 대체로 충격적이고 그러면서도 더없이 매혹적인데 어째서 매혹적인지 설명해보라면 뭐라고 딱 집어 말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브루노 슐츠의 작품도 바로 그러하다.”(p.419)라고 했다.

  좋다. 정보라가 인디애나 대학에서 슬라브 문학으로 박사를 받았다 하더라도 평론가가 아닌 작가, 역자라니 이 정도면 더 없이 솔직한 의견으로 접수할 수 있다. 오히려 말도 안 되는 온갖 미사여구를 첨부하는 직업 평론가보다 훨씬 보기 좋다. 물론 이건 정보라가 하는 겸양의 말이다. 이후 해설을 통해 그로테스크한 신화적 상상력와 풍성한 묘사에 관해 이야기를 풀어 나가, 슐츠의 소설이 어떤 의미에서 내가 말하는 ‘아름다움’의 경지에 이르는지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아쉽기는 하다.

  브루노 슐츠의 단편집. 말이 단편집이지 딱 정형화시켜 놓은 한 가족을 일인칭 화자 유제프의 시선으로 관찰해서 연작 장편으로 읽어도 무리가 없을 《계피색 가게들》과 《모래시계 요양원》을 읽으며 왜 내가 이 작품들이 아름답다고 느끼는지 설명해주는 평론가, 문학자 또는 요즘 각광받는 직업인 서평가가 있다면, 서슴지 않고 만 원 주겠다. 나는 브루노 슐츠의 책이야말로, 저번에 비트키예비치의 <탐욕>을 읽고 쓴 독후감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건 논리가 아닌 “직관”으로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말하겠다. 그리고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가 이 책을 재미있게, 재미는 아니더라도 매우 흥미롭게 읽은 건, 한 결론을 향해 스토리를 밀고 나가는 힘이 아니라 특정한 장면이나 순간의 기분 또는 감상을 포착해서 그 상황을 마치 에세이처럼 설명하는 묘사, 그러니까 문장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살면서 어찌 쉬운 책만 읽을 수 있을까. 때론 난마처럼 뇌가 헝클어지는 고난도 겪어야 할 터. 이 책을 권하는 이유는 당신도 책 읽는 고생을 한 번 해보라는 심통이 아니다. 가끔 격렬한 스포츠를 한 후의 특별한 개운함을 경험하는 것도 아주 좋은 일일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점. 함부로 덤볐다가는 한 방에 나가 떨어져 본전 생각이 간절해질 수도 있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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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2-08-05 05: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비트키예비치의 <탐욕>도 그렇고 이 책 <브루노 슐츠 작품집>도 그런데, 차마 별 다섯 개를 주지 않은 건 작품의 60% 정도 이해했을까, 하는 의심 때문입니다. 감상자가 만끽하지 못했으면서 덜렁 이거 최고라서 만점이다, 하기는 좀 께름칙해서 말입죠.

coolcat329 2022-08-05 06: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이 책 가끔 중고로 보였는데 굉장히 전위적인 작품이었군요.
1892년 유대인으로 태어난 폴란드인 ...설마설마했는데 역시나 안타깝게 가셨네요. ㅠㅠ
이 소설집은 골드문트님의 리뷰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며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2-08-05 12:03   좋아요 1 | URL
ㅎㅎㅎ 좋은 선택 하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혹시 도서관에 가실 시간 있으면 한 번 들춰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

alummii 2022-08-05 06: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직관으로 읽어야 하는 책 ㅡ 확땡기는데요! ㅎㅎ 얼마전 저도 장바구니에 담아놓긴 했었는데 리뷰보고나니 더 읽고싶네요 만원은 ㅋㅋ 저도 걸어봅니다

Falstaff 2022-08-05 12:03   좋아요 2 | URL
오, 이런 스타일 좋아하시면 읽으셔야지요.
물론 저는 책임 안 집니다. ㅋㅋㅋㅋ

유부만두 2022-08-05 08: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현실이 드러버서 전 쉬운 책만 읽고 있습니다;;;;; 몇 권만 더 읽을게요

Falstaff 2022-08-05 12:04   좋아요 1 | URL
저도 요즘 좀 복잡해서 오히려 진도 안 나가는 두꺼운 책 위주로 읽는데요.
ㅋㅋㅋㅋ 인생이란.....

독서괭 2022-08-05 12: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단편집 두권만 내고 살해당하다니 안타깝네요 ㅠ 난해한 아름다움이라니.. 대뇌를 마구 헝클어뜨린다니?? 아무래도 저는 독서력을 더 쌓고 와야겠습니다(뒷걸음질) ㅎㅎ

Falstaff 2022-08-05 13:31   좋아요 1 | URL
ㅎㅎㅎ 다음에 읽으셔요. 새털같은 나날들인데 뭐하러 서두르십니까. ^^

stella.K 2022-08-05 12: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문트님의 마지막 문단의 말씀에 동의 하지만 선뜻 읽을 자신은 없네요.
저도 준비운동과 스트레칭을 많이 해야겠어요.
소설 읽기는 그렇게 만만한 작업은 아닌 것 같습니다.
늘 소설 읽기를 수도하듯 읽으시는 문트님 같은 분을 뵈면 그저 존경할 다름입니다.ㅠ

그런데 정보라 작가 정말 똑똑한 사람이군요.
전 요즘 작가는 잘 몰라서리...ㅠ

Falstaff 2022-08-05 13:34   좋아요 4 | URL
근데 소설 만큼 잘 읽히는 것도 없지 않나요? ㅎㅎㅎ
특히 요즘같이 더울 때는 문사철 가운데 소설이 제일 좋잖아요.
저도 소설가 정보라는 모릅니다. 하나도 안 읽어봤어요. 부커 인터내셔널 최종심에 정보라의 <저주토끼>가 올라갔다는데 전 <엽기토끼>인줄 알았었다니까요. -_-;;;

stella.K 2022-08-05 13:37   좋아요 4 | URL
엽기토끼! ㅎㅎㅎㅎ

그레이스 2022-08-07 19: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좋아할것 같아요!^^

Falstaff 2022-08-07 19:44   좋아요 2 | URL
아휴, 그럼 읽으셔야지요!!! ^^

mini74 2022-09-08 09: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격렬한 스포츠같은 책이라는 말씀에 살포시 읽기만 했던 리뷰 ㅎㅎ 축하드립니다
골드문트님 ~ 추석연휴도 즐겁게 보내세요 *^^*

Falstaff 2022-09-08 09:12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미니 님도 살 많이 찌지 마시고 건강하게 한가위 보내셔요!! ^^

그레이스 2022-09-08 09: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골드문트님~~^^

Falstaff 2022-09-08 17:2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그레이스 님. ^^

이하라 2022-09-08 1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추석연휴 되세요.^^

Falstaff 2022-09-08 17:23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이하라 님도 마음껏 드시고 살은 안찌는 한 가위 맞으셔요!!!! ^^

하나의책장 2022-09-12 1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Falstaff 2022-09-12 18:16   좋아요 0 | URL
ㅎㅎㅎ 에그, 쑥스럽습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