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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파네스 희극전집 1 ㅣ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아리스토파네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0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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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마흔 개의 희극을 생산해 온전한 열한 개 작품을 남긴 아리스토파네스를 사람들은 흔히 “희극의 아버지” 또는 “고전 희극의 왕자”라고 추앙한다.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전집 1》은 그의 열한 작품 가운데 초기 여섯 작품을 싣고 있다. 혹시 이 책을 읽을 다른 분이 있다면, 본문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말씀드리는 바, 기원전 5세기,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에 열광적으로 공연을 했던 희극, 비극 말고 희극 작품을 21세기에, 학문적 관심이 아니라면, 드라마틱한 코미디로 읽기가 그리 쉽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리스토파네스를 통해 발견한 그리스 고전 희극의 특징은, 실제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참전을 했던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전시에는 항상 그렇듯이) 아테네를 대표해 가장 적극적으로 전쟁을 통솔해나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도 명예로운 이름을 올리는 클레온과 극적으로 반목하여 희극에 실명으로 등장시켜 망신을 주고 있는 정치 드라마가 주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스 로마 고전의 선구자이자 권위자인 역자 천병희에 따르면, 아리스토파네스는 당대 가장 치열한 보수파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클레온의 민중선동적 주전론에 극적으로 반대한 건 당연하다고 쳐도, 소크라테스마저 철학자가 아닌 궤변론자로 인식해 당시 민중의 의식을 호도해, 능숙하게 익힌 논리로 사악한 것으로 하여금 올바른 것을 능히 이기게 만드는 법을 주로 가르치는 썩은 지식인 정도로 여겼다고 한다. 소크라테스가 기원전 399년에 사약을 들이켰으니 이 책에 실린 희극을 다 공연할 때까지 자신을 희화화 한 극을 전부 보았을 텐데, 원래 아내가 사나우면 사람이 점잖아지는 법이라서(나를 봐라, 나를 봐!) 그리 크게 열을 내지는 않았지만, 기원전 422년에 암피폴리스 전투 중에 전사해버린 클레온은 주전파답게 아리스토파네스와 격돌을 했던 모양이다. 당시의 보수주의자들은 얻을 것도 없이 이웃한 강국 스파르타와 만날 코피 터지게 싸울 이유를 납득하지 못해서 얼른 평화조약을 맺자고 한 반면 클레온을 수장으로 하는 강경파들에게는 이도 들어가지 않았던 건 물론이다. 오히려 그런 말을 해놓고도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고, 린치를 가하지 않았던 당시의 아테네가 얼마나 문화적인 공기를 향유하고 있었는지는 유신과 5공을 겪은 우리는 아주, 아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터.
책의 첫 작품으로 실린 <구름>의 타겟이 바로 소크라테스다. 여기서 궤변론자이자 개소리 전문가 소크라테스는 돈만 받으면 앞길이 구만리 같은 청년들에게 옳은 것(正)과 그른 것(邪)을 토론자 마음대로 뒤집을 수 있는 기법을 가르쳐주는 일을 업으로 삼는다.
젊은 시절에 시골에서 몸치장도 하지 않고 더운물에 목욕도 하지 않으며 벌떼, 양떼, 그리고 올리브 나무와 열매 같은 것들을 향유하며 행복한 생활을 하던 선량한 스트렙시아데스가, 지금은 비참하게 죽기를 앙망하는 중매쟁이의 소개로, 거만하고 사치스러운 도시 아가씨를 만나 결혼은 했다. 그리하여 둘이 신혼의 침상에 올랐을 때, 신랑의 몸에서는 지게미와 치즈와 양털 냄새가 진동을 한 것과 대조적으로, 샤프란 색의 옷과 프렌치 키스와 낭비와 식도락과 애욕과 욕정 덩어리였던 예쁜 신부의 몸에서는 향수 냄새가 흘렀는데, 이런 극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엔 건장한 아들 페이딥피데스가 태어났다. 이 귀한 아드님이 대가리가 커지자 취미를 붙인 것이 마차 경주. <일리아드>에 보면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마차 전투를 치루는데, 전쟁 중이라도 옛 사람들은 정취를 찾아 잠깐 휴전을 선언하고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레슬링, 권투, 달리기, 그리고 마차 경주를 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가. 바로 이 마차 경주에 우리의 페이딥피데스가 전력 투구를 시작했고, 그때나 지금이나 말 한 마리 건사하는 게 보통 버거운 것이 아니어서, 불쌍한 주인공 스트렙시아데스는 날이면 날마다 고리의 부채만 늘어가고 있던 거였다.
생각하다 못해 아버지가 스스로 이웃하고 사는 소크라테스의 학습 방에 들어가 그로부터 채권자에게 돈을 갚지 않아도 되는 토론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게 마음대로 되나. 이제 늙어서 머리가 돌지 않아 열을 가르쳐주면 아홉을 잊고, 그나마 한 시간만 더 흐르면 그것도 잊어버려 놀라운 교수법을 지닌 소크라테스도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며 퇴학을 시켜버린다. 대신 아들 페이딥피데스를 받아들여 천하에 둘도 없는 말장난을 성공적으로 가르쳐주는데, 이게 과연 아버지 스트렙시아데스 마음대로 되기는 할까?
이걸 읽으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이던가에서 말했던 명언. 희극엔 최고의 악당이, 비극엔 최고의 선량한 사람이 등장한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럼 누가 악당일까? 젊은 것이 생산적인 일은 하나도 하지 않고 말 타고 노는 일로 가산을 탕진한 아들? 아들에게 법을 거꾸로 세우는 말재주를 가르치는 소크라테스? 피해자이자 주인공인 스트렙시아데스는 아닌 게 분명하고. 결론은 소크라테스인데 하, 그것 참.
클레온에게 악역을 맡긴 작품들은 몇 개나 나오지만, 작품 소개는 생략하고 마지막에 실린 <새>를 잠깐 이야기하겠다. 이 작품은 책에 실린 다른 것들과 확연하게 구분을 할 수 있는데, 이 보수주의자 아리스토파네스의 책을 읽으면서 유일하게 현실과 떨어진 상상의 세계로 독자와 관객을 인도하기 때문이다.
<새>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획기적 분기점이 된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에서 가차없이 코피가 터져 치명적 상처를 입은 직후에 쓴 작품이다. 도널드 케이건이 쓴 <펠레폰네소스 전쟁사>에 시라쿠사 전투가 상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지만, 속상하게도 오래 전(2014년)에 읽어 왜 시칠리아까지 기어들어 싸웠는지, 어떻게 아테네가 패전했으며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관해서는 다 잊었다. 하여튼 이제 아네테 시민들에겐 일종의 공황상태가 벌어진 것은 확실하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새>에도 이런 인간이 둘 등장한다. 에우델피데스와 페이세타이로스. 에우델피데스는 ‘낙천가’, ‘희망의 아들’이란 뜻이고 페이세타이로스는 ‘믿음직한 친구’라는 뜻이라고 431페이지 주석에 쓰여 있다. 이 순간, 팍, 머리에 떠오르는 다른 작품 하나. 발터 브라운펠스라는 유대인 작곡가가 만든 같은 이름의 <새>라는 오페라. 브라운펠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두 명의 주인공은 ‘좋은 희망’ (Hoffegut: Good Hope)과 ‘충실한 친구’(Ratefreund: Loyal Friend)가 비슷하다. 흉악한 그리스 신화, 후투티로 변신한 테레우스, 나이팅게일로 변신한 테레우스의 처 프로크네, 제비로 변신한 프로크네의 여동생 필로멜레의 다음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는데, 하여간 시라쿠스 전투에서 크게 패전하는 바람에 현타를 진하게 경험한 두 늙은이 에우델피데스와 페이세타이로스는 진한 현실 도피자가 되어 버린다. 그리하여 이들은 도시 아테네를 떠나 숲 속에서 새들의 나라, 아직도 새들의 왕을 해먹는 왕년의 인간 테레우스가 변한 후투티의 영토로 들어가 초연하게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도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이들은 후투티를 설득해서 제우스가 사는 하늘과 인간이 사는 땅 사이에 성을 건설해 신과 인간을 정복해버리라고 살살 꼬드긴다.
신과 인간의 사이에 존재함으로써, 신들이 먹고사는 미세먼지, 즉 제물로 바친 짐승들의 연기를 중간에서 약탈해 이들을 굴복시키자는 것이다. 그래 곧바로 새들은 허공에 대규모의 성을 건설하게 되고, 힘이 생기겠다는 생각이 드니까 또 자연스럽게 나라를 건설하니, 나라이름을 “구름뻐꾹 나라”로 명명한다.
이를 심각하게 여긴 프로메테우스가 전령 또는 스파이로 구름뻐꾹 나라로 내려와 하는 말이, 얘들아, 제우스한테 덤벼, 덤벼. 자기 딸을 아내로 보낼 때까지 개겨! 프로메테우스의 등장까지 발터 브라운펠스가 작곡한 <새>와 똑같다. 다만 브라운펠스는 새들 가운데 독수리라고 불리는 외로운 현자가 있어서 이렇게 조언해주는 것이 차이가 난다.
“사람들의 우정이라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다. 땅바닥을 기어 다니면서 먼지 구덩이 속에서 숨쉬는 그자들, 질투어린 눈길로 쏘아보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고, 인생을 부정하는 천박한 것들이 우리한테 접근하고 있다는 걸 인식해라. 우리가 창공의 순정한 높이에서 우아한 궤도를 그리며 성스러움과 빛 가까이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잊었는가? 도대체 사람들이 우리한테 뭘 원하겠니?”
브라운펠스는 극장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새>를 직접 관람하고 자신 스스로가 대본을 각색해 자신의 작품 <새>를 만들었다. 멘델스죤, 쇤베르크, 말러 등 유대인과 유대 혼혈 작곡가들의 작품을 완전히 말살하려고 했던 국가사회주의 치하에서 그들의 견해를 완전 무시하고 만든 작품이니, 펠레폰네소스 전쟁의 끝물, 살벌했던 시기의 아테네에서 공연했던 비유적 희극을 자기 것으로 만든 건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을 듯했다. 하여간 아리스토파네스건 브라운펠스건 편안히 쉬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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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갖고 있는 발터 브라운펠스, <새> CD 표지. 그림이 독특하고 예뻐서 가져왔다.
히틀러가 브라운펠스의 50% 유대혈통을 알지 못한 채 국가사회주의 독일의 국가를 작곡해달라고 부탁하자, 브라운펠스는 거칠게 거절했단다. 작곡했으면 더 우스운 꼴이 될 뻔했겠다.
* 브라운펠스의 <새>의 결말은 아리스토파네스와 달리 제우스가 바람을 한 번 훅 불자 새들이 쌓던 허공의 성이 쑥대밭으로 허물어지고, 인간들 역시 새들에게 쫓겨나 다시 속세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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