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백 희곡전집 1 이강백 희곡전집 1
이강백 지음 / 평민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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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년 전주 출생의 극작가. 오랜만에 ‘라떼’ 이야기 좀 하자. 고등학생 시절에 국어 교과서에서 읽을 수 있는 희곡은 유치진이 쓴 김유신 이야기든가, 화랑 이야기든가, 하긴 김유신도 화랑 출신이니 둘 다 일 수도 있고 그랬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문학 장르에서 제일 안 팔리는 종목이 희곡인 것은 똑같아서, 유치진 작품 말고는 한 편도 경험할 수 없었다. 이제는 그때와 달라 대입 수능에서 제일 높은 빈도수로 등장하는 극작가가 오늘 읽은 이강백이라고 한다. 내 경우에 이강백을 처음 읽은 건, 이야, 놀랍기도 하지, 지금부터 딱 4년 전인 2018년 10월로 이화여대 김성희 교수가 편 《한국현대명작희곡선집》에 실린 <봄날>을 읽어보았을 뿐이다. 아쉽게도 내용은 전혀 기억에 남지 않았지만.

  1980년대 초에 평민사가 이강백과 계약을 맺기를, 그가 그때까지 쓴 희곡 전집을 발간하고, 앞으로 나올 모든 작품 역시 평민사가 출판하기로 했다 한다. 이 책의 서문, 머리글에 작가 스스로 말했다. 저번에 한 번 얘기 했다시피, 우리나라에 유독 희곡 장르의 기록이 많이 유실된 이유가, 희곡을 쓰고, 공연을 하면, 연극이 성공을 하건 말건 하여튼 이후에는 그것을 책으로 만들어야 보존이 될 터이지만, 길고 긴 세월 동안 희곡-연극 장르의 예술행위의 가장 큰 고객은 인구 대비 지극히 적은 수를 차지했던 “여대생”이었던 관계로 도무지 독자가 없어서, 출판사도 이윤을 내 먹고는 살아야 한다는 대원칙을 지키기 위해 돈 안 되는 희곡을 찍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와중에 1971년에 등단한 이강백은 1982년, 등단 11년 만에, 서른다섯이라는 별로 많지 않은 나이에 이런 통 큰 계약을 당했으니 모르긴 해도 한 삼박사일 동안 쐬주 깨나 마셨을 거 같다. 이런 횡재를 얻어걸린 이강백은 당연히 이후에도 줄기차게 작품활동을 이어 나가, 숱한 대표작을 양산해 명실공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극작가의 자리를 꿰차고, 직장에서도 같은 건물, 같은 층에서 근무하던 시인 김혜순과 가약을 맺는다. 나도 처음 알았다. 이강백과 김혜순? 슬픔치약과 거울크림?

  네이버를 통해 ‘한국현대문학대사전’에서 이강백을 검색해보면, “등단이래 1970년대의 억압적인 정치∙사회 상황 하에서 제도적인 폭압 체계를 상징적으로 풀어내는 데 성공한 작가로 평가된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대표작으로 꼽은 것(들)은, 그러니까 70년대 작품 가운데 대표작이라는 얘긴데, <셋>, <알>, 그리고 <파수꾼>이다. 전집 1은 이강백의 1971년부터 74년까지 쓴 작품 여섯 편이 들어 있고, ‘폭압 체계를 상징적으로 풀어낸’ 대표작 세 편이 모두 실려 있다. 하지만 이강백 본인은 ‘지은이의 머리글’에서 분명하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정치적인 상황과 연극의 관계에 대해서 나는 생각해 본 일이 없다. 다만 나는, 우화적인 희곡을 쓰는 극작가로서 정치적인 상황이 우화적 희곡의 좋은 소재가 된다는 것을 놓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러한 소재는 관객들의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위의 인용은 몇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번째는, 희곡전집의 초판이 나온 1982년 역시 1970년대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살벌한 깡패에 의하여 독재정치가 저질러지고 있던 형국이라 새롭게 책을 펴내면서 자신이 70년대에 쓴 작품이 진짜로 유신독재를 우화적으로 비틀어버린 거라고 고백했다가는 남영동 분실 욕조의 물 맛을 볼 수도 있다고 겁을 먹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두번째는, 원래 비평가, 평론가라는 직업이 전문적으로 해몽을 하는 것이라 직접 꿈을 꾼 (극작품을 쓴) 사람의 진짜 의도는 정치와 상관없이 그냥 그걸 소재 가운데 하나로 삼아 우화적 실험을 한 것뿐인데 그게 우연히, 또는 당시의 시대상과 어울려 유독 현 정치 환경을 빗대 평론하기를 좋아하는 유명 평론가들이 자기 멋대로 평가를 한 것일 수도 있다. 시어미 죽으면 시어미 죽은 슬픔보다 자기 속에 맺힌 것 때문에 앙가슴을 치며 통곡을 하는 며느리처럼.

  직접 이강백의 작품을 읽어보면, 이 무학, 한 번도 졸업이라는 걸 해보지 못해 가방끈이 짧다 못해 아예 없는 대학교수이자 살아있는 극작가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이의 초기 작품은, 특히 1974년 작품 <파수꾼>은 “한국적 민주주의”를 토착화 하겠다는 유신 치하에서 숱하게, 이 단어를 발음할 때 느낄 수 있는 ‘숱하다’의 어감보다 73배 더한 빈도의 ‘숱하다’로, 눈만 뜨면 신문, 방송, 교장 훈시 등을 통해 “북괴의 적화통일 야욕” 테제를 연상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단 한 명의 파수꾼만이 광야에 홀로 선 파수대에 올라 이리떼의 습격을 관찰해 경보를 울리고, 이때마다 주민들은 민방위 훈련처럼 지하실로, 대피소로 피해야 하는 일상의 연속. 만일 이것을 우화라고만 생각한다면 당연히 페리 인데스 210번의 이솝 우화 <양치기 소년>을 떠올리겠지만, 육영수가 문세광의 저격을 방어하느라 경호실 요원이 쏜 총에 맞아, 불행하게도, 죽기 바로 며칠 전인 『현대문학』 1974년 8월호에 발표했을 당시엔 머리글에서 극작가가 직접 밝힌 우화 운운하고 관계 없이 틀림없는 세대 풍자로 읽힌다. 그러니까 결론은 평론가의 말이 진실과 근접하고, 이강백은 서슬퍼런 전두환 깡패 시절에 솔직한 말을 하기엔 너무 쫄았었다는 거다.


  이강백은 197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다섯>이 당선이 되어 등단한다. 그러나 본인도 그렇고 평론가들도 그렇고 데뷔작인 <다섯>을 언급하는 데는 굉장히 인색하다. 이 극작가는 어려서 지금은 거의 없어진 질병인 소아마비를 앓아 한 쪽 다리에 장애가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무학의 학력을 지녔다. 외골수 청년으로 성장한 이강백은 자신의 말에 따르면 신춘문예에 당선하는 스물네 살 때까지 다락방이나 지하실 방에서 혼자만의 폐쇄적인 생활을 하며 시, 소설, 희곡 같은 것을, 특정한 장르에 목표를 두지 않은 상태로 죽어라 습작에 몰두하고 있었단다. 그리하여 희곡전집 1에 실린 여섯 작품 가운데 네 다섯 작품은 닫힌 세계, “홀로 있었다는 영향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금이야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자신의 환경과 관계없이 추구할 수 있는 조금의 간극이 생겼지만 이이가 이십대를 시작한 60년대 중후반에 무학의 장애인으로 할 수 있는 건 창작이 거의 유일하지 않았을까 싶다. 넘쳐나는 자의식을 원고지에 담다가 극작가로 데뷔를 하고, 언감생심 연출가로부터 자기 작품을 공연하고 싶다는 편지까지 받았으니 기분이 어땠을까?

  <다섯>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작품은 전부 정치적이다. 또는 정치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엄혹한 유신체제에서 이런 극작품을 생산하고 발표하고, 공연까지 할 수 있으려면, 당연히 우화의 탈을 써야 했다. 우화도 우화 나름이지 김지하처럼 <오적> 비슷한 신랄한 풍자는 흉내도 내지 않는 것이 만수무강까지도 아니고 그저 심신안정을 위한 최상의 방법이었으니, 이강백 정도의 우화 또는 우화의 차용도 사실 대단한 깡다구가 아니면 가능하지 않을 일이었다.

  재미있는 작품들이다. 물론 나 역시 데뷔작인 <다섯>을 제외하고 말하는 중이다. <다섯>은 이강백의 전매특허라는 우화, 알고리즘이라기보다 프랑스 희곡에서 자주 써먹은 부조리극을, 억지로 배에 태워 신탐라국으로 데려온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기들의 조국을 떠나 신탐라국으로 밀항하느라 배의 밑창에 숨은 다섯 명의 밀항자들 이야기다. 읽어보시면 좋을 듯한데, 우리나라 희곡 잘 안 읽는 거 안다. 알고도 무턱대고 읽어보라 권할 수도 없는 일. 에잇, 알아서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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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2-10-25 0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강백 평민사 전집 1,2권이 있고 이 중에서 파수꾼만 읽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작품도 읽었는데 그건 전집 몇권에 수록된지 모르지만 좋았습니다. 그리고는 이강백 컹렉션에 들어갔눈데...읽음 건 거의 없지만 작품이 좋은 건 분명히 알겠더이다. 다른 책들 읽느라 언제 읽을지 모르지만 빠른 시일 내에 일독해야겠습니다.
타타르인의 사막 읽고 지금 나는고백한다 읽고 있는데...그 다음에 우선적으로 읽어좌야겠슴돠!

Falstaff 2022-10-25 13:58   좋아요 0 | URL
저도 예상 외로 이강백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데뷔작이 좀 답답했지만 곧바로 흥미가 생기더라고요.
아, 지금 고백 읽으시는군요! 그것도 진짜 진짜 재미나던데요. ㅎㅎㅎㅎ
 
사촌 퐁스 을유세계문학전집 93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정예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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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나서 ‘두번째‘로 불쌍한 인간은 프랑스 문자로 발자크를 읽지 못하는 한국 독자이며, ‘세번째‘가 발자크를 한국말로 번역해야 하는 역자이고, 제일 불쌍한 첫번째는 발자크를 읽지 않고 세상을 하직하는 세상의 숱한 인종들....... 아녀? 아니라고? 그럼 뭐 할 말 읎기는 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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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0-24 2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 저는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첫번째..... ㅠ.ㅠ 어 물론 언젠가는 읽을거에요. 진짜요. ㅠ.ㅠ

Falstaff 2022-10-24 21:43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보시다시피 구랍니다, 구라. ㅋㅋㅋㅋㅋ

페넬로페 2022-10-24 2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일 첫 번째 불쌍한 사람 되지 않도록 빨리 발자크 시작하겠습니다 ㅎㅎ^^

Falstaff 2022-10-25 06:07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이 양반이 하도 오래 전 사람이라 좀 지루한 건 각오를 하셔야 합니다. ^^

coolcat329 2022-10-25 08: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발자크는 삶에 있어서는 참 어리석기도 하고 문제가 많았지만 문학에 있어서 만큼은 발자크만큼 집중력과 에너지를 쏟은 작가도 없는 거 같아요. 발자크에 대한 멋진 말씀입니다~^^

Falstaff 2022-10-25 14:00   좋아요 1 | URL
맞아요, 집중력. 진짜 그건 정말 대단합니다. ^^
발자크는 딱 일정한 정도의 기대수준이 있어서 그런지 에이, 읽지 말자, 해놓고도 보이면 보이는 족족 사서 읽게 되더라고요. 이상한 작갑니다. ㅋㅋㅋㅋ

독서괭 2022-10-27 2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발자크가, 그 정도인가요? 저는 아직 안 읽었는데, 제일 불쌍한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어서 읽어봐야겠네요^^;;;

Falstaff 2022-10-27 21:02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근데 조심하셔요. 19세기 초 양반이라서 세밀 묘사에 나가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 양반의 세밀묘사.... 후대의 작가들이 사용을 하건 말건 간에 반드시 할 수는 있어야 하는, 마치 화가(지망생)들의 데생 수준이라고 생각한답니다.

그레이스 2022-10-28 06: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읽겠습니다 ㅋ

Falstaff 2022-10-28 16:26   좋아요 1 | URL
옙. 좀 구질구질한 구석도 있는게 재미나요. ㅋㅋㅋ

레삭매냐 2022-10-28 13: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샀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봅니다.

꼭 사서 읽어야지 싶습니다.

Falstaff 2022-10-28 16:27   좋아요 1 | URL
윽. 갑자기 덜컥, 겁이 나는데요. 흠.... ㅋㅋㅋ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 고통을 경쟁하는 지구적 기억 전쟁
임지현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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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사학자 임지현은 1959년생으로, 당시 역사학의 한 학파로 당당하게 군림했던 서강대학 사학과에서 학사부터 박사까지의 교육과정을 마쳤다. 이이가 대학 다닐 시절의 서강대 사학과는, 당대 최고의 사학자라고 칭송받던 만주 일제 관동군 출신의 이기백(친일 인물 아님) 교수를 수장으로 하는 서강학파의 전성기였으나, 서강학파라는 존경의 호칭은 임지현이 전공한 서양사학보다는 국사학을 위한 것이었다고 기억한다. 오직 내 기억이니까 정확하지 않다. 서양사학을 포함했을 수도 있다. 지금은 임지현 교수가 이끄는 서강대 사학과는 그가 열렬히 주장하는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 주의 사학이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믿지는 마시라. 이 분야에 나는 아마추어 수준이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라면 민족주의라는 커다란 장르 안에 희생자의식을 배경으로 하는 민족주의라는 뜻일 터이다.

  나라마다 민족주의가 필요한 시기가 있고, 그 시기가 지나가면 더 이상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반도가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분단이 된 후 내전을 거쳐 남과 북 공히 지극한 가난 속에서 지독한 독재를 겪었다. 이럴 때 국민들이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하지 않을까 한다. 소위 개발도상에 있을 때까지는 한 민족이라는 기치 아래 뭉쳐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경제발전을 이루는 것이 가장 큰 가치일 터이니. 이후 일정 수준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와 경제발전, 그리고 군사력을 확보한 다음에도 여전히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일은 국가대항 운동시합이나 곧 다가올 월드컵을 더욱 흥미진진하게 즐기기 위한 수준 이상이 되면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단재 신채호의 사관인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을 존경할지언정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아직도 아와 비아의 투쟁을 주장할 수도 없고, 주장해서도 안 된다는 뜻이다. 이런 말을 하면 서재 친구들의 ‘친구 취소’ 클릭하는 소리 들리고 심지어 돌도 날아올 지 모르지만 고백하노니, 나는 꽤 오래 전부터 애국가를 부르지 않았고, 눈치가 보여 전혀 안 할 수는 없지만 국기에 대한 경례를 될 수 있는 대로 하지 않으며, 국기에 대한 맹세는 죽어도 하지 않고, 개정된 국기에 대한 맹세는 외우지도 못한다. 오해하지 마시라. 여호와의 증인 신자 아니다. 그리고, ‘임을 위한 행진곡’도 같은 맥락에서 부르지 않는다.

  그리하여 친애하는 서재친구 단발머리 님께서 소개한 이 책의 한 페이지를 읽자마자 일초도 망설이지 않고 도서관에 상호대차 신청을 했다. “식민지 조선의 개별 가해자와 제국 일본의 개별 피해자” 그리고 “‘집합적 유죄’와 ‘집합적 무죄’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비판”이 평소에(‘자주’라고 쓰기엔 면목이 없는 빈도로) 흥미롭게 궁리하고 있던 현상이었다. 이 고민은 이과를 졸업해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않은 큰 아이가 대학에 다닐 때, 왜 일본이 조선에 대한 식민지 경영을 사과해야 하느냐, 당시엔 제국주의가 세계사조라서 힘 있는 나라가 약한 나라를 강점하는 건 일종의 유행/대세 아니었느냐, 라는 물음에서 시작해 꼬리에 꼬리를 이어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아이는 그새 애 아범이 됐고, 지금 서른세 살이니까 벌써 10년 전이다.


  책은 일본계 미국인 요코 가와시마 왓킨스의 소설, 원제목은 <대나무 숲에서 저 멀리>인데 <요코 이야기>로 널리 알려진 작품에서 시작한다. 내용은 강점기에 함북 나남에서 살던 열한 살짜리 요코네 가족이 전쟁이 끝나고나서 어머니, 언니와 함께 서울을 거쳐 부산으로 내려가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가는 험로를 그렸다고 한다. 문제는 요코 왓킨스가 자신들이 어떻게 해서 일본땅이 아닌 조선의 함경북도에서 살게 됐는지, 조선과 함북 나남에서 일본인들에 의하여 저질러진 대 조선인 박해가 어떠했는지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일본으로 가며 조선인들에게 당한 구타와 강간 등의 잔인한 범죄에 관해 상세하게 서술해 조선인을 사악한 가해자로, 일본인을 무고한 희생자로 그렸다는 데 있고, 이것이 미국 소년들에게 권장도서로 지정이 되는 바람에 당시 미국인 다수가 조선인-가해자, 일본인-선량한 피해자라는 등식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역사에서 가해자는 악당이고, 피해자는 선량하게 여기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리하여 조선에서 물러가는 일본인들에게 패악질을 한 조선인들은, 일본인이 35년간 지배하며 가한 피해를 고스란히 받았던 것에 비하면 조선에 거주하던 소수의 일본인에게 저지른 작은 악행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의, 피해 경쟁을 벌이는 양식을 보여주었다는 것이 저자 임지현의 시각이다. 그리고 내 생각이기도 하다.

  희생자의식과 트랜스내셔널을 연구하는 임지현의 사고는 <요코 이야기>에서 시작해 단박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피폭으로 이어진다. 즉,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야기시킨 장본인이며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학살을 저지른 가해자라기 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자폭탄의 피해를 입은 피해자 의식으로 2차 세계대전을 공유한다는 말이다. 일본을 방문한 많은 미국 대통령은 방문중 히로시마 평화공원을 들러 헌화하고 예를 표하는 일정을 잡으며, 이때마다 일본은 침략국의 위상이 아니라 피해자, 그것도 이젠 피해자를 넘어 희생자의 위상에 올라, 아우슈비츠 등에서 있었던 홀로코스트와 동일시하는 버릇까지 생겼단다. 리틀보이와 팻맨에 얻어터진 일본은 이로 인해 중국 난징에서 있었던 학살과 조선 독립군에 대한 잔인한 토벌과 간도의 조선 주민 몰살, 위안부 등에 관해 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자기들이 더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은 세계 도처에서 벌어져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점령할 수 있었고, 독일에 의하여 인구의 20퍼센트를 희생당한 폴란드는 자기 국경 내에서 자국민에 의하여 벌어진 유대인 학살을 별 죄의식 없이 여기면서 역사에 선택적으로 기록 또는 은폐할 수 있었다. 헝가리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에서도 마찬가지고. <요코 이야기>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에 관해 발제를 한 저자는 이후 세계 각지에서 보여준 실례를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하는데, 임지현의 글솜씨가 대단해서 정말 흥미롭게 사건의 발발과 전개를 읽을 수 있다. 역시 판검사, 변호사 뿐만 아니라 역사, 경제학자한테도 재미있게 글을 쓰는 건 돋보이는 장점이다. 이렇게 책은 결론을 향해 달려간다.

  희생자의식은 당연히 같은, 아니면 적어도 비슷한 기억을 연대하는 집단 사이에서 생기는 것으로, 이의 해소를 위해서는 각 연대의 “희생의 기억을 탈영토화하여 ‘제로섬 게임’ 적的 경쟁체제에서 벗어날 때, 자기 민족의 희생을 절대화하고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 뒤에 줄 세우는 기억의 재영토화에서 벗어날 때, 그래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희생할 때, 기억의 연대를 막고 있는 장벽이 터지면서” 해소될 수 있다고 결론을 낸다.


  임지현은 이 책에서 피해와 희생을 섞어 사용하고 있다. 물론 책 중에 피해와 희생 victim과 sacrifice으로 정의하여 성경까지 가져와 상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지만 책이 끝날 때까지 나는 이 두 경우를 구별하기 힘들었다. 예를 들어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의 우라카미 천주당 상공에서 원자폭탄이 터져 사제, 부사제, 신도 전부가 한 순간에 화르륵, 불타 사라져버렸는데, 이들은 원폭의 피해자인가, 자발적으로 종전을 위해 희생당하기를 바랐던 순교자인가. 내 시각으로는 그저 피해자이다. 굳이 이들은 희생자로 승격을 당해야 했으며, 그럼으로 해서 일본인과 천주교는 더욱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와 종교를 강화할 수 있었다. 저자는 국가 사이의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말고도 계급간 희생자의식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도 보여주겠다고 책의 앞 부분에서 말했는데, 부도난 공수표였다.

  서해상 떠있는 배에서 실족해 바다에 빠진 공무원이 북한으로 표류하다가 북한 병사의 총을 맞고 죽었다. 이 불행한 사건의 주인공인 공무원은 피해자인가, 희생자인가? 명복을 빌어 마땅한 해당 공무원이 희생자가 되는 순간 누군가가 이득을 보고, 누군가는 (어쩌면) 치명적 손해를 볼 수도 있다. 같은 논리로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다가 배가 침몰해 많은 학생들이 바다에 빠져 죽었다. 학생들은 피해자인가, 희생자인가? 당연히 명복을 빌어야 하는 어린 학생들이 희생자가 되면서 누군가는 정치적 이득을 얻으며 ‘미안하다. 고맙다’ 라고 결코 지워지지 않을 자국을 낼 수 있었다. 이 두 건은 ‘계급간 희생자의식’이라기 보다는 ‘진영간 희생자의식’이라 할 수 있겠지만, 만고의 진리인 유일한 결론은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는 거다. 원폭에 맞아 한 순간에 형체도 없이 사라졌건, 가스를 마시고 죽은 육신마저 태워져 한 줄기 연기로 변해야만 굴뚝을 통해 수용소에서 나올 수 있었건, 물에 빠져 죽었건, 물에 빠진 다음에 총 맞아 죽었건 간에.

  아무리 책이 희생자의식을 제목으로 내세우고 있어도, 이 반대편에 있는 “가해자의식”에 관해서도 한 챕터 정도는 할애할 줄 알았다. 35년간 수탈과 학대와 학살까지 서슴지 않았던 일본인들이 과거의 피해자인 한국인들을 바라보는 시각. 마찬가지로 길고 긴 세월 동안 식민지 경영을 했던 영국인들이 인도인을 대하는 시각. 아메리카 원주민을 보는 미국인, 역시 원주민을 보는 오스트레일리아인의 시각 등. 일본인은 과연 예전에는 조선인이라 불렀던 한국인들을 자신들과 모든 면에서 동등한 인류의 구성원이라고 생각할까? 아닐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35년 이상을 가해할 수 있었던 민족. 자신들보다 못났기 때문에 (사실과 관계없이) 스스로 나라를 합치자고 병합 조약에 서명한 나라의 국민들이라고 여기고 있지 않을까. 나는 그것도 궁금하다. 민족주의의 유령은 끈질기고 또 끈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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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2-10-21 09: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역사학자가 계셨군요.
내가 더 큰 희생자라는 의식을 앞세워 나는 선이고 너는 악이라는 구분을 지음으로써 서로를 더 증오하게 만드는 그런 희생자 민족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거네요.
내가 남에게 한 짓 보다는 내가 남에게 피해입은 것만 주장하는 건 어찌보면 인간의 본능이겠지만 이 책은 그것을 좀 더 이성적으로 들여다보자는 거죠. 저도 읽어보고 싶네요.

Falstaff 2022-10-21 13:31   좋아요 3 | URL
저도 이이가 쓴 책은 처음 읽어보는데요, 영미 사학에서 시작했을 법한 시각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렇더군요. 웬만한 소설책보다 더 재미있습니다.

mini74 2022-10-21 10: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나쁜거냐고 한국아이들 울면서 집에 돌아오고. ㅠㅠ 그래서 미국에 살던 주재원 등 한국인엄마들이 분노하고 시위한다는 기사가 기억이 나요. 학교에 그런 일이 왜 생겼는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요구하기도 하고. 누가 더 많이 아픈가의 경쟁이 아니라 앞뒤 흐름을 알게하고 판단을 각자에게 맡겨야겠죠. 일본판 안네의 일기라는 둥 이 이야기 말이 많았죠. 일본이 열심히 로비하고 퍼트려서 ㅠㅠ 둘 다 진실이지만 여기서도 힘과 경제의 논리가 작용한다는게 속상했던 기억납니다. 골드문트님 마지막 문단 ㅠㅠ

Falstaff 2022-10-21 13:34   좋아요 1 | URL
미니 님은 저 소설책 읽어보셨다고 했지요? ㅎㅎㅎ 재미는 별로일 듯한데 뭐 그건 우리 시각일 수도 있겠지요.
사실 가해자의식 민족주의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다만 성공한 가해자가 일부러 그런 걸 말할 필요가 없을 뿐입니다.

그레이스 2022-10-21 10: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국가는 무엇이고, 역사는 무엇일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자주있습니다

Falstaff 2022-10-21 13:35   좋아요 2 | URL
그래서 저자는 국가와 역사를 합친 ˝국사˝를 신뢰하지 않더라고요. 본문에도 적혀 있었습니다. 객관성 결여라고 침을 (조금) 튑니다.

건수하 2022-10-21 10: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이지만 아쉬운 부분이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궁금했는데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2-10-21 13:36   좋아요 2 | URL
옙. 말씀하신대롭니다.

단발머리 2022-10-21 10:3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침 일찍 이 글을 읽었는데요. 너무 반가워서 1회독 후 일단 ‘좋아요‘ 누르고 이제 돌아왔습니다. 오늘 유난히 사건이 많은 아침이라 아직도 집이 너저분한데 그게 뭐 대수겠습니까. 제게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가 더 중요하고요.

“희생의 기억을 탈영토화하여 ‘제로섬 게임’ 적的 경쟁체제에서 벗어나고, 자기 민족의 희생을 절대화하고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 뒤에 줄 세우는 기억의 재영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저자의 의견에 공감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학자들이 먼저 이런 식의 연구,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다만.... 골드문트님은 책을 다 읽으셨고, 또 이 페이퍼를 읽으신 분들도 이해하실 거라는 맥락 하에서, 저는 꼭 사과를 받아야겠습니다. 저는, 그렇다고요. 저는 독일이 ‘나미비아‘에 대한 사과나 반성 없이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만 주구장창 사과하는데 모순점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사과해야 한다고, 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용서는 희생자의 몫이고, 희생자의 결정일테지만요. 물론 자신의 손으로 천황을 뽑은 게 아니어도 천황과 기타 정치세력 때문에 목숨을 잃은 일본인들에 대해 인간적으로 연민을 느낍니다. 안타깝지요. 하지만 골드문트님 지적대로 그들은 피해자이지 희생자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요. 홀로코스트의 절대적 희생자화(제가 존경하는 시몬 베유도 그렇게 주장했습니다만)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손으로 선택한 지도자를 통해 이뤄졌던 국가적인 악행에 대해서는 정부가 바뀌어도, 집권 세력이 바뀌어도 사과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세월호의 학생들은 희생자라고 생각하는 입장인데요. 세월호 사건이 시작부터 마지막 상황까지 발전과 개발 위주의 경쟁사회가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악행의 총합이라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적어도 대통령이 이명박 정도만이라도 행동했었다면, 그런 비극적인 결과에까지 이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에 대한 합당한 예우, 애도마저 정치적 이득을 얻은 것으로 이해되서는 안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도 국기에 대한 맹세,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은지 아주 오래됐습니다. 초등 1학년이었던 큰아이가 이유를 물어서 간단하게, 정말 간략히 말해주었는데, 그 다음부터 요것들이(두 아이 모두)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겠다고 해서... 아무튼 그렇게 되었네요.

같이 읽는 힘, 같이 읽는 즐거움을 맘껏 누리는 시간이었습니다. 좋은 사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골드문트님!! 저 이제 400쪽 남았는데요. 다 읽고 돌아오겠습니다^^

Falstaff 2022-10-21 13:41   좋아요 5 | URL
아이고, 이렇게 길게 댓글을 주셨네요.
하여간 제 바람은, 나하고 다른 의견을 가졌다고 비난하지 말자는 겁니다! ㅋㅋㅋ
단발머리 님의 글 보면... ㅋㅋㅋ 당연히 세월호 ˝희생자˝라고 하시리라 알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참 따뜻해서 좋습니다. 오히려 제가 단발머리 님 덕택에 흥미있던 분야의 책을 만끽했는 것을요. 고맙습니다.

잠자냥 2022-10-21 11:32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문트님 서재 맞는가? 하고 일단 어리둥절하면서 읽었습니다. ㅋㅋㅋㅋ (문학이 아닌 책이 올라와서요)
아, 저도 국기에 대한 경례인가 뭔가 되도록 삐딱하게 하거나 손을 안 올리고 애쓰던 사람으로서 반갑습니다. (여호와증인교 아님2222)
누구 말처럼 민족이란 그저 상상속의 공동체가 아닌가 싶네요.

Falstaff 2022-10-21 13:43   좋아요 5 | URL
ㅋㅋㅋ 저도 이런 책 가끔 읽습니다.
아, 여호와의 증인 신자 아닙니까? ㅎㅎㅎ 거기 신자들 굉장히 착해요. 누가 저더러 묻더라고요. 왜 여호와의 증인 믿는 사람들은 대개 착해? 그래서 제가 대답해줬습니다.
˝거긴 사이비 나이롱 신자가 거의 없거든.˝ 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2-10-21 16: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리 역사에서 민족주의가 긍정적인 역할을 하던 때가 분명히 있었지요. 그런데 그 민족주의가 시대가 바뀌고 사고의 틀이 바뀌어야 할 때도 그대로 온존하고 있으면 새로운 억압의 기제로 작용하더군요.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학계는 민족주의의 힘이 얼마나 센지 거의 손도 못댑니다. 민족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가는 거의 학계에서 매장되는 분위기죠. 여기에 대해서는 고민도 많고 할말도 많은데 저도 책 읽고 돌아올게요. 사다만 놓고 안읽은 책에 요 책도 한자리 차지하고 있네요. 임지현 선생의 책은 우리안의 파시즘도 20년만에 다시 나왔습니다. 저는 20년 전에 읽었고, 이번에 다시 읽으려고 샀으나 역시 또 쌓여있는...ㅠ.ㅠ

Falstaff 2022-10-21 18:28   좋아요 1 | URL
ㅋㅋㅋ 제가 아주 아주 오래 전에 민족주의자였다는 거 아닙니까. 이걸 단방에 바꾸어주신 분이 모 대학 박물관 학예과장 하시던 윤X영 선생이었는데요, 나중에 선생한테 저 장가들 때 주례를 좀 서달라고 하니까 만날 무덤만 파던 인간이라 주례는 안 서겠다고 하셨던 기억이. ㅋㅋㅋㅋ 작은 체구에 쐬주도 장하게 드셨습니다.
언제나 미래는 있잖아요. 미래=희망.....입니다. 하여간 기다려봐야지요. ㅎㅎㅎ

공쟝쟝 2022-10-25 1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 스스로에 대해서, 그리고 제 주변의 세계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피해의식에 무지 관심이 많아졌어요. 사람과의 진실한 대화와 나 자신과의 대화에 가장 많은 걸림돌이 되는 게 피해의식인 것 같거든요. 많은 심리학책들이 그걸 잘 의식화해서 포기하라고 일러주는데, 머리로는 알겠는 데 포기가 잘 안되어요. 그래서 포기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책들을 읽게되는 것 같아요. 사과받고 싶거든요. 근데 이 사과받고 싶음이 인간 인류 전체로 확장됨 ㅋㅋㅋㅋㅋ 언젠가는 꼭 포기하겠습니다. 개인 차원에서도 일케 어려운데, 민족 차원에서는 … 사실 골드문트님의 글에 아주 많은 부분 동의합니다. 임지현은 아주 용감한 학자군요. 그리고 역시 한나 아렌트는 멋짐이 폭발해 버립니다. 좋은 책을 잘 읽은 글 잘 읽었습니다. 서재에서 이야기 나누는 분들도 멋지시구요 ㅋㅋㅋ 이 책은 가격때문에 고민이 되지만 ㅋㅋㅋ 사서 읽어보고 싶네요 흐흫

Falstaff 2022-10-25 14:05   좋아요 1 | URL
임지현이 저도 용감한 학자네, 라고 시작했는데요, 나중에 글을 전개하면서, 피해의식과 민족주의가 결합해 파시즘, 전체주의가 발생하는 현상이 나오면서부터 음, 자칭 타칭 진보사학자라는 사람이 좀 비겁하군, 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네오 파시즘 얘기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현 정치상황을 꼬집지 않을 수 없는데요, 정치 얘기하고 종교 얘기만큼 술 맛, 밥맛, 사람 맛 떨어지게 하는 종목이 없어서 그랬던 거 같습니다. ㅋㅋㅋㅋ
아무렴요. 피해를 받은 건 사과를 받아야 하고, 피해를 준 것은 사과를 해야 가해/피해한 측 두 진영 다 의식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생각, 주장합니다.

Falstaff 2022-10-25 14: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흠. 어느 분께서 댓글을 쓰셨고, 제가 답글을 달았는데요, 댓글 저장을 클릭하니까, 글이 지워졌습니다. 그냥 두셨어도 되는데 아쉽습니다.

그레이스 2022-10-25 15:10   좋아요 1 | URL
ㅎㅎ
맥락을 모르겠지만 암튼 알것 같기도 하네요

독서괭 2022-10-27 2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골드문트님 글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제가 부족해서 딱히 의견 피력하기는 어렵지만, 저자의문제의식에는 상당히 공감이 가네요.

Falstaff 2022-10-27 21:07   좋아요 1 | URL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내가 피해를 받았으면 사과와 보상을 받아야 하고, 가해를 주었으면 이에 마땅한 사과와 보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신이 받은 피해로 자기가 행한 가해를 퉁치지 말라는 겁니다. ㅎㅎㅎ 너무 일반화 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피해의식으로 뭉친 인간들의 단체화, 이른바 네오 전체주의....까지 슬쩍 건드리기만 한 건데, 나중에 연관된 책이 나올 것으로 봅니다.
 
평범한 인생 열린책들 세계문학 275
카렐 차페크 지음, 송순섭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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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한 인생>은 작년에 출간한 이래 대단한 성가를 누린 바 있다. 간혹 책 읽는 사람들은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작품을 읽은 감상을 과장하기도 한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평소에 카렐 차페크의 팬이라고 자임하는 입장에서 이번에는 출간과 동시에 읽기보다는 한숨 가라앉은 후에 읽기로 결정을 해, 책은 연초에 구입을 했을지언정 책꽂이에 열 달 이상을 묵힌 다음, 이제야 한 장, 한 장 읽어나갔다. <평범한 인생>은 <호르두발>, <별똥별>과 함께 차페크의 철학 삼부작이라고 불리는데 <별똥별>은 아직 못 읽어봤지만 철학 까지는 모르겠고, 그냥 사람 사는 이야기 정도 아니겠는가 싶다. 사람 사는 거, 이게 보통이 아니라서, 언젠가 얘기한 적 있지만, 지구 인구가 70억 명이라면 지구 표면적의 1/3에 해당하는 육지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 모두 한 편의 장편소설을 담고 있다는 뜻이다. 즉 지금 무려 70억 권의 살뜰하고 애틋하고 징글징글한 소설책이 걸어 다닌다는 말씀.

  이 책에서 죽음이 임박해 자서전을 쓰기로 작정을 한 사람은, 홀아비이자 오랜 세월 공무원으로 재직하다가 은퇴한 남자로 위인, 영웅들의 전기작품을 읽다가 평범한 사람의 전기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자서전을 썼다. 주로 철도를 위해 장기 근속을 했고, 젊은 시절엔 국제열차가 지나가긴 하지만 정차하지 않는 작은 역을 매우 아름다운 정원으로 단장한 것을 자랑으로 삼던 독일 역장의 역무원으로 있을 당시 배운 정원 일로 친분을 쌓은 의사에게 죽음의 침상에서 그간 써온 자신의 자서전을 넘겨주고 눈을 감는다. 의사는 그저 친분이 있는 늙은 신사이자 고인이 된 자서전의 주인과도 알고 지내던 신사 포펠 씨에게 자서전 초고 묶음을 보여주어, 철끈으로 묶은 자필 전기가 펼쳐지면서 한 평범한 남자의 평범한 인생이 독자 앞에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 책을 읽어가며 들었던 생각 하나. 이 정도라면 나도, 지극히 평범하기 짝이 없는 지나간 내 인생에 대하여 전기 형식으로 한 번 쓰지 못할 이유가 없다, 라는 것. 내 대뇌에 심어져 있는 가장 먼 기억, 정여사 부임지였던 경기도 모처(아마 지금의 고양시일 것 같다)의 겨울, 두터운 외투를 입고 머리엔 기름을 발라 오른쪽 가르마를 타고 외조부모 댁 대문을 나서던 장면. 아, 그것보다 더 먼 그림도 있다. 외가에서 자라 부모의 얼굴마저 낯이 설어 정말 잘생긴 아버지가 나를 안아들자 그만 울음을 터뜨렸던 유년의 시절. 밤과 낮이 없이 외손자 양말이면 양말, 내복이면 내복을 짜던 외조모의 털실뭉치 같은 것들을 약간의 조미료와 함께 백지에 옮기면 나름대로 그럴듯한 전기가 되지 않을까.

  좋다. 유년 시절이야 왜 못 쓰겠는가. 소년시절로 넘어와 아버지의 커다랗고 튼튼한 돼지저금통을 흔들어 바늘로 동전을 꺼내 만화를 빌어보고, 군것질을 하다가 그게 너무 잦아져서 동전 투입구에 바늘 흔적이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커졌던 일. 조만간 구타로 인한 두 형제의 사망사고가 신문을 장식하리라는 믿음이 얼마나 컸던지 저녁마다 혼백이 날아갈 만큼 술을 자시고 귀가하는 아버지의 커다란 체구가 차라리 아름다웠다. 그러다 어느 일요일 아침, 일찍이 예상했던 바와 같이 정작 들통나 버렸을 때, 마루 한 가운데 돼지 저금통의 배를 갈라 신문지 위에 올려놓고, 그는 아무 말도 없었고, 마루엔 여전히 배가 갈린 돼지가 신문지 위에 놓여 있었는데, 오후가 되자 두 아들과 대중 목욕탕에 갔으며, 돌아오는 길에 중화요리집에 들러 당시엔 졸업식을 해야 한 번 먹는다던 자장면을 탕수육과 함께 배 터지게 먹고 들어온 일. 이것도 좋다.

  문제는 소년기를 넘어서자마자 득달같이 찾아온 염병할 사춘기부터다. 내가 경험하고 저지르고 여태 땅을 치며 후회하는 숱한 치기어린 행위들. 청년기 이후도 마찬가지다. 그런 것들을 온전히 “나의 전기”, “나의 자서전”에 담을 수 있느냐 하는 것. 농밀한 개인적 스토리를 허구라는 화학 조미료의 첨가나 수사법의 분식粉飾 없이 전기 형식으로, 이젠 전 세계적으로 별로 사용하지도 않는 백열전구를 환하게 밝혀 놓고 숱한 사람들의 맨눈에 전시할 수는, 없다. 없고 말고. 내가 비겁해서 그렇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만일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시면, 당신부터 한 번 써봐라. 있었던 그대로. 세상에 ‘아니 에르노’가 왜 딱 한 명인지 생각해보시라. 


  자서전의 주인공 ‘나’는 소목장이(나무로 가구나 문방구를 짜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이)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강하고 단순하고, 어린 ‘나’의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이다. 항상 싸구려 담배와 맥주, 땀 냄새를 풍기고 일요일마다 그동안의 땀과 일이 모여 있는 예금통장을 감상하는 것을 취미로 삼는 이로 돈을 교환가치 말고 근면과 절제를 미덕으로 하는 노동의 결과를 상징/대표하기 위한 장치로 이해한다. 평생 공무원, 그것도 될 수 있으면 고위 공무원에 대한 동경과 복종심을 갖고 있어서 ‘나’가 우수한 성적으로 동네 학교를 마치고 도시의 상급학교를 거쳐 프라하의 대학에 진학한 것을 가문의 영광을 알고 동네방네 자랑을 했지만, ‘나’가 1학년 시절에 시에 미쳐 2학년 등록을 하지 않은 것을 알고 한 걸음에 상경, 경제적 지원 등을 끊어버리고 만다.

  ‘나’는 원래 두번째 아들이지만 얼굴도 모르는 형이 어려서 죽어, 이게 한이 된 엄마가 사랑을 듬뿍, 그것도 너무 듬뿍 주는 바람에 응석쟁이라는 소년 시절의 사회적 평가를 받게 된다. 엄마는 상당히 예민한 성격과 ‘나’에 대한 사랑으로 넘쳐흐르던 분이었지만 소년시절부터는 어머니의 사랑이 외려 ‘나’에게 성가신 부담이 되고 말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동네 동무들로부터 ‘당연하게도’ 따돌림을 받았고,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공부에 몰두했으며, 뛰어난 학업 성적으로 위에서 쓴 것처럼 프라하에서 대학물까지 먹게 된다. 대학을 중퇴하고 철도청에 근무하다 폐결핵에 걸려 저 멀고 먼 산골의 외딴 역에 요양 목적으로 근무하다가, 독일인이 역장으로 있는 역으로 전보하고, 거기서 역장의 딸과 연애를 해 결혼에 성공한다. 성실한 일처리와 장인의 입김으로 좋은 역을 거쳐 젊은 나이에 자그마하지만 깨끗한 역의 역장으로 발령이 나고 이제 살 만해서 아이를 낳으려 했으나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체코를 위해 병력과 무기의 이동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해 반 독일 세력에게 전달하는 등의 애국활동에도 참여하다가 종전을 맞는다. 이후 프라하의 정부청사에 들어가 고위 공직자로 있다가 깨끗한 생활을 하지만 그게 오히려 약점이 되어 부정한 공무원들의 적의를 사 퇴직을 하고 만다. 아내는 죽고 성실한 하녀의 도움을 받아 살다가 지병인 심장 동맥경화로 삶을 마감한다.


  여기까지면 차페크 특유의 감상적인 산문으로 참 잘 읽히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감히, 나도 나의 전기를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건방진 생각을 할 여지가 있다. 그렇지 않은가. 딱 읽어보면 이상한 점이 하나 둘이 아니다.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게 선하고 삶에 적극적일 수 있을지.

  화자 ‘나’는 여기까지 쓰고 심장 발작을 한 번 일으킨다. 침대에 누워 꼼짝하지 말라는 진단을 받고, 정말로 3주 후 다시 원고를 쓰기 시작했을 때, ‘나’ 속의 또다른 ‘나’가 등장해 진술의 하나, 하나에 관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진술에 관한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나’가 숭배하던 아버지는 사실 마음이 약하고 착하지만 엄마한테 크게 잘못한 뭔가가 있고, 엄마 역시 사랑이 넘치기는 한데, 마음이 악惡한 곳이 있었다. ‘나’는 비록 청렴했을지언정 “궁극적으로 인생의 올바르고 유일한 목표란 가능한 한 출세하여 자신의 명예와 지위에 기뻐하는 것”이며 “그것이 온전한 진실”이라 자백하고 만다.(129쪽) 물론 자신의 자백에 곧바로 의문을 품기는 했다. 그래서 작품의 뒷부분으로 가면 이런 자기고백은 ‘나’를 이루고 있는 세 명의 ‘나’들, 즉 ①평범하고 행복한 사람, ②출세를 위해 몸부림치는 억척이, ③ 우울증 환자로 이루어진 ‘나’들 가운데 한 명 또는 각자의 고백일 뿐이기는 하다.

  이 세 가지 유형은 후에 다른 유형이 더 보태지는데, 놀랍게도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 일요일 성당 앞에서 구걸하는 거지다. 이것까지 다 알려드릴 수는 없다. 하여간 이리하여 평론가들은 <평범한 인생>을 차페크의 “철학 삼부작”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는 말씀만 드리겠다.

  인생? 그건 살아 봐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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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2-10-18 09: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ㅎㅎㅎ 나도 언젠가부터 나랑 자주 이야기하는 데 내안의 나들이 싸워요 ㅋㅋㅋㅋ 인생 살아봐야 알죠 ㅋㅋㅋ 얘들 중에 누구랑 친하게 지낼지 ㅋㅋㅋ
ㅡ 치기 왕 걸드문트님의 청년시기 ㅋㅋㅋㅋ를 모르게 되어 다행이네요 ㅋㅋㅋㅋㅋ 아니 에르노 딱 한 명…ㅋㅋㅋㅋ 이것도 너무 맞는 말…. 그래도 걸님의 전기 나오면 제가 친히 읽어드릴게요 ㅋㅋㅋ 무엇보다 유년 많이 써주세요 ㅋㅋ 유년 귀엽다 ㅋㅋㅋ 포트노이 만큼 재미지는 도입부였슴돠 ㅋㅋㅋ

Falstaff 2022-10-18 13:23   좋아요 2 | URL
ㅋㅋㅋ 뭐 골치 아프게 지금 내가 내 안의 누구인지 굳이 알고 살 필요 있겠습니까. 그냥 나오는 대로 가브리엘이건 루시퍼건 간에 ‘승질‘ 나는대로 ‘승질‘ 부리면서 사는 겁죠. 몇 년이나 산다고요. ㅋㅋㅋㅋ

stella.K 2022-10-18 12: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차베크의 책이 제법 많네요.
저는 도롱뇽인가 뭔가하는 책 읽으면서 글빨 장난아니군 했는데
그 이후 이렇게 많은 책이 나왔다니.

자서전 꼭 쓰십시오.
나의 이야기라는 게 자신한테는 엄청 X팔린 것 같아도 읽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만큼
놀라거나 당황하진 않는 것 같더라구요. 그래도 은근 관심이 많죠.
곽재식 작가처럼 1쇄로 한 3백부만 찍으셔서 희귀본으로 만드시면 오히려 대박 효과를
낳을 수도...ㅋㅋ
문트님 유년 시절도 흥미롭지만 사춘기 시절도 기대됩니다.^^

Falstaff 2022-10-18 13:36   좋아요 2 | URL
저도 이 책 포함해서 모두 아홉 권의 차페크를 읽었는데, 아직도 더 남았어요. 와...
ㅋㅋㅋ 제 주제에 무슨 자서전 씩이나 쓰겠습니까. 그냥 서재에 독후감 올리는 것이 종이 아껴서 자연보호 하는 겁니다. ^^

coolcat329 2022-10-20 19: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그 문제의 청소년기가 궁금하던 순간에...아니 에르노가 왜 한 명이겠느냐...에 역시 골드문트님! 웃었습니다. 유년기 이야기는 너무 좋네요...
골드문트님 자서전 쓰시면 바로 구입할거에요~~^^

차페크를 아홉 권이나 읽으셨군요! 차페크 책이 이렇게 많았다니 조금 놀랐습니다. 한 권도 안 읽어서 살짝 속상하네요. 조만간 읽어야 겠습니다.

Falstaff 2022-10-20 20:16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자서전을 저같은 무지랭이가 써서 뭐 한답니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
차페크, 재미나요. 호르두발이 좋았는데 좀 비싸서.... 도서관 이용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전 도롱뇽과의 전쟁도 재미났었습니다. 곤충극장도 매력 있고요. 근데 그건 희곡집입니다. ^^
 
스너프 대산세계문학총서 167
빅토르 펠레빈 지음, 윤서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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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 윤서현에 의하면 작가 빅토르 펠레빈은 “대중 매체에 얼굴 한 번 비추는 일 없이도 정재계 거물들이나 반체제 인사들 혹은 대담 프로그램 진행자들과 함께 러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언급되는 작가”라 하며, 이이에 관한 정보는 “몇 안 되는 인터뷰 내용을 제외하면 이전 근무지의 이력서를 들춰보는 거나 주변 인물들을 취재하는 것”밖에 없다고 하니, 가히 러시아 판 토머스 핀천 급이라 할 만하겠다. 그리하여 펠레빈의 이력서 수준 정도로 빈약한 바이오그래피를 뒤져봤다.

  국립 모스크바 바우만 공과대학 군사학부 교수인 올레크 아나톨리예비치 펠레빈과 식료품점 감독원이었던 지나이다 세묘노브나 예프레모바 사이의 아들로 1962년 11월에 모스크바에서 출생했다. 1979년에 모스크바 제31영어특수중등학교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에너지공대 전기공학과에 입학해 1985년에 졸업, 학부를 6년 다닌 걸로 추리해보면 공부엔 그리 열심이었던 것 같지 않다.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까지 진학했음에도 학위를 얻지 않은 채 1989년에 고리키 문학대학에 통신 교육생으로 등록하고 잡지 통신원으로 1년간 활약하기도 하고 다른 잡지의 편집 및 출판 담당으로 일을 하면서 첫번째 단편소설을 발표한다. 1990년엔 고리키 문학대학 내 출판사 ‘하루’의 편집부에 근무하며 다시 단편소설을 써 ‘위대한 반지상’을 받고 다음해 고리키 문학대학에서 제적당한다. 나라도 대학에 안 다니겠다. 벌써 작품활동을 성공적으로 하기 시작했고 문학상을 수상했는데 소설 쓰는 법을 더 배우며 뭐 하겠는가. 이후 경력은 계속 무슨 작품을 발표했고, 어떤 문학상을 수상했고, 이런 것들만 나온다. 지금 사는 곳이 어디인지, 어떤 여자를 만나 장가는 들었는지, 아이는 낳았는지, 몇 평짜리 아파트에 사는지, 이런 건 하나도 없다. 잘했다. 작가가 글만 잘 쓰면 되지 뭐 한다고 이딴 걸 세상에 널리 알리겠는가.

  펠레빈의 작품은 전에 <P세대>를 읽어봤다. 앱솔루트 보드카에 펩시콜라를 타서 마시는 러시아 청춘들을 P세대라고 했다. 물론 이런 의미 하나 가지고 많고 많은 청춘들을 싸잡아 P세대라고 했겠는가. 때는 바야흐로 러시아의 초대 대통령인 술주정뱅이 보리스 옐친이 극우파 군인들이 모스크바 시내로 몰고 나온 탱크 앞에 서서 극우 쿠데타를 저지하자고 TV 카메라 앞에서 열변을 토하던 시기. 이제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양철로 만든 통에다가 동전 몇 개를 집어넣기만 하면 자동으로 깡통에 든 펩시콜라가 쾅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시기를 만난 혼돈의 초기 자본주의를 경험하는 시대적 배경을 깔고 있어서, 무척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있다. 그래 펠레빈의 이름을 기억해 다른 작품들도 읽어봐야지, 마음먹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어디 세상에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있어? 그만 흐지부지 하다가 작년 가을에 신간 <스너프>가 나온 걸 알고 일단 구입했다가 이번에 읽었다.

  <P세대>는 1999년, <스너프>는 2011년에 출간했다. 두 작품 사이에 12년이 흘렀다. 역자 윤서현은 <스너프>의 해설에서 “동시대 러시아의 사회적 부조리를 인간 존재에 대한 진지한 사유와 함께 신랄한 유머로 그려낸 작품”이라 했다. 여전히 초보 민주국가인 2011년 러시아에서는 하원 의원을 뽑는 총선이 있었고, 총 득표율이 선거 인구대비 146%에 달하는 희대의 코미디가 발생했는데, 이 선거는 12월에 있었으니 <스너프>에서 말하고자 하는 러시아의 부조리와는 거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보다는 지금이야 철권을 휘두르지만 2008년 전세계를 강타했던 세계①금융위기의 여파로 나날이 지지도가 떨어지던 푸틴의 ②정치적 위기와, 언론의 힘이 약해진 틈을 ③인터넷이 파고 들기 시작한 현상을 기존 질서에서 벌어진 부조리 현상으로 봤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즉 정치-금융-언론의 약화 현상.

  이제 뜸을 들일 만큼 들였으니 작품을 이야기해도 되겠다. 사실 이 책은 뒤에 나오는 역자 해설이 워낙 훌륭해서 독후감에서 따로 내용을 요약할 필요를 별로 느끼지 못할 정도이지만, 해설이라는 자체가 이미 책을 다 읽은 독자를 위해 쓰는 것이고, 나는 주로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분들을 위해 독후감을 쓰는 인간이라 역자가 정성들여 쓴 해설과 조금 겹치는 일이 있다해도 그리 어긋난 일은 아닐 터이다. 나 스스로가 이 책을 읽느라 상당한 나날을 소비했다. 그러면서 헝클어졌던 머리 속 작품이 해설을 읽으면서 차분하게 정리가 되는 즐거움을 오랜만에 누렸다는 것을 먼저 이야기해 두겠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을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고대문명’이라고 일컬으니 아무리 적게 흘러도 3천 년쯤 흐른 미래의 지구가 무대이다.

 고대에 양대 강국이 있었다. 아메리차와 츠히나. 서로는 겉으로 친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적대적 관계로 봐야 했는데, 세월이 흘러 두 나라는 내부 분열이 일어나 영토가 갈라진다. 예를 들어 아메리차를 보면, 아프리차에서 유입된 짙은 유색인과 남부 아메리차의 옅은 유색인들이 각기 특정 지역에 대거 몰려 살면서 독립 혹은 분리를 주장하는 식이다. 분리된 국가 가운데 하나가 멕시초를 포함한 아메리차 남쪽 지역의 아츠틀란. 이곳에서 인류가 수 천년 기다려왔던 구세주가 등장하니 바로 “마니투 안티크리스트”인데 민중을 구원하기도 전에 아츠틀란 정부는 이 마니투 안티크리스트를 잡아 살해해버린다. 이후 아츠틀란 정부는 원하는 모든 이에게 국적을 부여하고, 국민의 당연한 의무인 세금을 부여한다. 세금 내기를 싫어하는 건 지금이나 미래나 똑같아서, 현금이 많은 극도의 부자들은 반중력 기동장치를 발명해 지상 몇 백 미터 위에 떠 있는 구체의 커다란 도시를 만들어 조세회피처를 만들고 이를 ‘오프스피어’라고 부른다.

  단순한 조세회피처였던 오프스피어는 세월이 흐르면서 주로 부자들이 향유하던 문명인 영화, 과학, 금융, 정치 등이 옮겨왔고, 급기야 발권은행과 조폐국까지 생기면서 적은 수의 지배층 집단을 이루어 어떠한 혁명의 위협도 받지 않으며 평화로운 신세계를 창조해냈다. 반면에 지상에는 전 같으면 천민이나 노예, 잘 봐줘야 그냥 상것들만 남게 되는데 상부 주민은 이들을 오르크라고 칭하며 멸시한다. 지상에서 발발한 몇 차례의 핵전쟁으로 인해 오르크의 외모는 약간 변형되었지만 오프스피어 주민이나 오르프나 서로 인간인 건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는 법이라 세상에 몇 개 있던 오프스피어는 지도부의 죽음, 반중력 기동장치의 고장이나 오르크에 의한 파괴, 마법 같은 자연의 힘 등으로 소멸해버리고 이제는 단 하나, 우르카이나의 수도 슬라바 위에 떠있는 ‘비잔티움’만 남았다. 비잔티움은 빅비즈, 큰 사업, 빅 비즈니스라는 뜻일 수 있는데, 고대시대의 아메리차와 츠히나처럼 우르카이나의 오르크들과 상호 보완적이지만 속으로는 적대적 관계를 유지한다. 비잔티움의 인간들과 우르카이나의 오르크를 정신적으로 이어주는 매개가 바로 ‘마니투’이다.

  마니투. 이게 이해하기 쉽지 않다. 딱 한 가지 현상이나 사물, 대상, 인격을 마니투라 칭하는 것이 아니라서 마니투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독자가 알아서 지금 이야기하는 마니투가 어떤 마니투라는 걸 구별해내야 한다. 마니투는 저 위에 이야기했던 마니투-안티크리스트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어떤 신이나 신격일 수도 있고, 돈을 세는 단위일 수도 있으며, 인터넷 등의 정보를 처리하는 개인용 컴퓨터나 그 기능을 보여주는 모니터일 수도 있다. 즉, ①금융-②종교(정치)-③정보(언론), 2008년 러시아를 덮친 세계금융위기로 인해 러시아 내에서 벌어진 현상 가운데 대표적 세 가지를 총괄한다. 이 세 가지를 지탱하는 공통은, ‘믿음’을 요구한다는 것. 특히 우르카이나의 오르크들의 믿음을 위하여 비잔티움이 제작하는 것이 스너프다. 스너프는 사실 금지어 비슷하다. 실제로 살인을 하거나 강간, 폭행하는 장면을 촬영해 기록으로 남긴 것을 스너프라고 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오르크들의 신성을 유지시키기 위해 댐젤 인 디스트레스 Damsel in Distress, 곤경에 처한 아가씨를 구출하는, 영화이기도 하고 뉴스이기도 한, 뉴스이기도 하고 영화이기도 한, 영화와 뉴스의 경계가 허물어진 영상을 뜻한다.

  Damsel in Distress의 대표적 사례는 이라크 전쟁 중에 포로로 잡힌 제시카 린이란 백인 일병으로, 무슬림에 의해 포로로 잡혔으니 온갖 고문과 강간으로 고생했을 것이라 여겨 위험을 무릅쓰고 구출해 낸 일이 있었다. 무공훈장을 받고도 몇 년이 흐른 후에 이 사건은 새빨간 거짓말로 드러났다.

  작품의 주인공인 데미얀-란돌프 다밀롤라 카르포프, 줄여서 다밀롤라는 직업이 백퍼센트 재택근무하는 전투기 조종사로 감시와 통제를 목적으로 오르크 문화의 정신적 지평을 완벽하게 투시하여 오르크 문화를 창조하는 일을 한다. 정치적으로는 진보수적인 수구자유인이며 마니투를 향한 사랑의 노예에다가 후기 반기독교적인 세속적 실존주의자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냥 되는대로 사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진보-보수를 합친 진보수적이고, 편의에 의해 수구와 자유를 넘나드는 수구자유인이란 말. 다밀롤라는 오르크들의 마니투 신봉을 유지하기 위하여 스너프의 몇 장면을 만드는 일을 하느라 적당한 댐젤을 찾았으니, 연애중인 흘로야. 그림이라는 남자 오르크와 낚시를 하며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다밀롤라는 흘로야를 댐젤로 만드는 역할을 하는 직업 ‘디스코스몽거’인 베르나르-알리와 의도적으로 흘로야를 곤경에 빠뜨린 다음 구해준다. 이 과정에서 훌륭한 영상을 얻게 된다.

  스너프를 제작하는 건 대개 비잔티움과 우르카이와의 전쟁 직전이다. 주로 정기적으로 발발하는 두 진영 간의 전쟁도 스너프와 마찬가지로 상호 적당한 의존과 긴장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이번에 발생하는 것이 제221차 전쟁이다.

  다밀롤라는 또한 푸포갈이기도 하다. 푸포갈은 소위 ‘수라’라고 이름이 바뀐 리얼돌, 지금부터 몇 천년이 흐른 후의 리얼돌이니까 상당히 세련된 형태일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시라, 법정 성교동의 연령이 46세라서 도무지 어떻게 해소할 수 없는 리비도를 ‘수라’를 통해 해소하는 인간 암/수컷들을 말한다. 동성애자들을 일컫는 말은 ‘보갈’. 다밀롤라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두 가지 가운데 하나인 ‘카야’라는 이름의 수라에게 최고치의 개년성과 영성을 부여했다. 잘 읽으시라. 개년성. 개연성이 아니다. 막말로 해서, 잡년 같은 성격을 개년성이라 칭했다.

  이 정도면 할 말은 다 한 거 같다. 중구난방이기는 하지만 책을 읽는 세 가지 방향을 다 소개했다.

  첫째로 상부와 하부 사람들. 비잔티움 거주자들과 그들이 한껏 비웃어 최고지도자에게도 찢어진 콘돔이라는 뜻의 “터진 듀렉스”나 “터진 콘텍스”라는 이름을 부여한 오르크와의 갈등. 두번째로 스너프의 댐젤이었으나 상부로 올라온 그림과 흘로야, 마지막으로 다밀롤라와 최고치의 개년성과 영성을 동시에 지닌 수라인 카야.

  이제 남은 것은 오직 하나, 당신의 쇼 타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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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2-10-14 05: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척 재미있기는 하지만 진입장벽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리처드 파워스의 <갈라테아 2.2> 만큼은 아니겠지만, 러시아 언어에 취약한 저는 펠레빈의 언어유희와 쏟아지는 조어들, 그리고 이를 번역한 우리말에 갈 길을 찾지 못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책 한 권을 읽느라고 열흘간 ˝즐거운 끔찍함˝의 진퇴양난을 겪었다는 말씀입니다.

이하라 2022-10-14 09: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학에서 다소 거리를 느끼다보니 생소한 작가와 생소한 소설이긴 합니다. 그런데도 3000년 후를 그리고 있다고 하시니까 왠지 흥미가 이는 것 같다가 진입장벽이 높다고 하시는 말씀에 시무룩해지네요.
아직 문학이 어려운 저이다보니 쉬운 소설들 부터 시작해야 겠구나 생각하게 됐습니다.^^;

Falstaff 2022-10-14 13:47   좋아요 1 | URL
아이고, 이하라 님 정도면 중원의 고수시지요. ㅎㅎㅎ 엄살부리기 없기 입니다. ^^

coolcat329 2022-10-14 1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두 번을 읽었는데도 너무 생소한 내용이라 어렵습니다. ㅎ
삼천 년 후 미래라니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 무겁습니다. ㅎㅎ
골드문트님이 열흘이면 저는 30일쯤 걸리겠어요. ㅋ 아니면 중도포기던가요.

Falstaff 2022-10-14 13:49   좋아요 1 | URL
ㅎㅎㅎ 아는 분께서 이 책 읽고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고약한 러시아 식 판타지.˝
아주 어울리는 촌평입니다. 무지하게 재미는 있지만 진짜, 고약합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