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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너프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167
빅토르 펠레빈 지음, 윤서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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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윤서현에 의하면 작가 빅토르 펠레빈은 “대중 매체에 얼굴 한 번 비추는 일 없이도 정재계 거물들이나 반체제 인사들 혹은 대담 프로그램 진행자들과 함께 러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언급되는 작가”라 하며, 이이에 관한 정보는 “몇 안 되는 인터뷰 내용을 제외하면 이전 근무지의 이력서를 들춰보는 거나 주변 인물들을 취재하는 것”밖에 없다고 하니, 가히 러시아 판 토머스 핀천 급이라 할 만하겠다. 그리하여 펠레빈의 이력서 수준 정도로 빈약한 바이오그래피를 뒤져봤다.
국립 모스크바 바우만 공과대학 군사학부 교수인 올레크 아나톨리예비치 펠레빈과 식료품점 감독원이었던 지나이다 세묘노브나 예프레모바 사이의 아들로 1962년 11월에 모스크바에서 출생했다. 1979년에 모스크바 제31영어특수중등학교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에너지공대 전기공학과에 입학해 1985년에 졸업, 학부를 6년 다닌 걸로 추리해보면 공부엔 그리 열심이었던 것 같지 않다.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까지 진학했음에도 학위를 얻지 않은 채 1989년에 고리키 문학대학에 통신 교육생으로 등록하고 잡지 통신원으로 1년간 활약하기도 하고 다른 잡지의 편집 및 출판 담당으로 일을 하면서 첫번째 단편소설을 발표한다. 1990년엔 고리키 문학대학 내 출판사 ‘하루’의 편집부에 근무하며 다시 단편소설을 써 ‘위대한 반지상’을 받고 다음해 고리키 문학대학에서 제적당한다. 나라도 대학에 안 다니겠다. 벌써 작품활동을 성공적으로 하기 시작했고 문학상을 수상했는데 소설 쓰는 법을 더 배우며 뭐 하겠는가. 이후 경력은 계속 무슨 작품을 발표했고, 어떤 문학상을 수상했고, 이런 것들만 나온다. 지금 사는 곳이 어디인지, 어떤 여자를 만나 장가는 들었는지, 아이는 낳았는지, 몇 평짜리 아파트에 사는지, 이런 건 하나도 없다. 잘했다. 작가가 글만 잘 쓰면 되지 뭐 한다고 이딴 걸 세상에 널리 알리겠는가.
펠레빈의 작품은 전에 <P세대>를 읽어봤다. 앱솔루트 보드카에 펩시콜라를 타서 마시는 러시아 청춘들을 P세대라고 했다. 물론 이런 의미 하나 가지고 많고 많은 청춘들을 싸잡아 P세대라고 했겠는가. 때는 바야흐로 러시아의 초대 대통령인 술주정뱅이 보리스 옐친이 극우파 군인들이 모스크바 시내로 몰고 나온 탱크 앞에 서서 극우 쿠데타를 저지하자고 TV 카메라 앞에서 열변을 토하던 시기. 이제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양철로 만든 통에다가 동전 몇 개를 집어넣기만 하면 자동으로 깡통에 든 펩시콜라가 쾅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시기를 만난 혼돈의 초기 자본주의를 경험하는 시대적 배경을 깔고 있어서, 무척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있다. 그래 펠레빈의 이름을 기억해 다른 작품들도 읽어봐야지, 마음먹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어디 세상에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있어? 그만 흐지부지 하다가 작년 가을에 신간 <스너프>가 나온 걸 알고 일단 구입했다가 이번에 읽었다.
<P세대>는 1999년, <스너프>는 2011년에 출간했다. 두 작품 사이에 12년이 흘렀다. 역자 윤서현은 <스너프>의 해설에서 “동시대 러시아의 사회적 부조리를 인간 존재에 대한 진지한 사유와 함께 신랄한 유머로 그려낸 작품”이라 했다. 여전히 초보 민주국가인 2011년 러시아에서는 하원 의원을 뽑는 총선이 있었고, 총 득표율이 선거 인구대비 146%에 달하는 희대의 코미디가 발생했는데, 이 선거는 12월에 있었으니 <스너프>에서 말하고자 하는 러시아의 부조리와는 거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보다는 지금이야 철권을 휘두르지만 2008년 전세계를 강타했던 세계①금융위기의 여파로 나날이 지지도가 떨어지던 푸틴의 ②정치적 위기와, 언론의 힘이 약해진 틈을 ③인터넷이 파고 들기 시작한 현상을 기존 질서에서 벌어진 부조리 현상으로 봤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즉 정치-금융-언론의 약화 현상.
이제 뜸을 들일 만큼 들였으니 작품을 이야기해도 되겠다. 사실 이 책은 뒤에 나오는 역자 해설이 워낙 훌륭해서 독후감에서 따로 내용을 요약할 필요를 별로 느끼지 못할 정도이지만, 해설이라는 자체가 이미 책을 다 읽은 독자를 위해 쓰는 것이고, 나는 주로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분들을 위해 독후감을 쓰는 인간이라 역자가 정성들여 쓴 해설과 조금 겹치는 일이 있다해도 그리 어긋난 일은 아닐 터이다. 나 스스로가 이 책을 읽느라 상당한 나날을 소비했다. 그러면서 헝클어졌던 머리 속 작품이 해설을 읽으면서 차분하게 정리가 되는 즐거움을 오랜만에 누렸다는 것을 먼저 이야기해 두겠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을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고대문명’이라고 일컬으니 아무리 적게 흘러도 3천 년쯤 흐른 미래의 지구가 무대이다.
고대에 양대 강국이 있었다. 아메리차와 츠히나. 서로는 겉으로 친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적대적 관계로 봐야 했는데, 세월이 흘러 두 나라는 내부 분열이 일어나 영토가 갈라진다. 예를 들어 아메리차를 보면, 아프리차에서 유입된 짙은 유색인과 남부 아메리차의 옅은 유색인들이 각기 특정 지역에 대거 몰려 살면서 독립 혹은 분리를 주장하는 식이다. 분리된 국가 가운데 하나가 멕시초를 포함한 아메리차 남쪽 지역의 아츠틀란. 이곳에서 인류가 수 천년 기다려왔던 구세주가 등장하니 바로 “마니투 안티크리스트”인데 민중을 구원하기도 전에 아츠틀란 정부는 이 마니투 안티크리스트를 잡아 살해해버린다. 이후 아츠틀란 정부는 원하는 모든 이에게 국적을 부여하고, 국민의 당연한 의무인 세금을 부여한다. 세금 내기를 싫어하는 건 지금이나 미래나 똑같아서, 현금이 많은 극도의 부자들은 반중력 기동장치를 발명해 지상 몇 백 미터 위에 떠 있는 구체의 커다란 도시를 만들어 조세회피처를 만들고 이를 ‘오프스피어’라고 부른다.
단순한 조세회피처였던 오프스피어는 세월이 흐르면서 주로 부자들이 향유하던 문명인 영화, 과학, 금융, 정치 등이 옮겨왔고, 급기야 발권은행과 조폐국까지 생기면서 적은 수의 지배층 집단을 이루어 어떠한 혁명의 위협도 받지 않으며 평화로운 신세계를 창조해냈다. 반면에 지상에는 전 같으면 천민이나 노예, 잘 봐줘야 그냥 상것들만 남게 되는데 상부 주민은 이들을 오르크라고 칭하며 멸시한다. 지상에서 발발한 몇 차례의 핵전쟁으로 인해 오르크의 외모는 약간 변형되었지만 오프스피어 주민이나 오르프나 서로 인간인 건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는 법이라 세상에 몇 개 있던 오프스피어는 지도부의 죽음, 반중력 기동장치의 고장이나 오르크에 의한 파괴, 마법 같은 자연의 힘 등으로 소멸해버리고 이제는 단 하나, 우르카이나의 수도 슬라바 위에 떠있는 ‘비잔티움’만 남았다. 비잔티움은 빅비즈, 큰 사업, 빅 비즈니스라는 뜻일 수 있는데, 고대시대의 아메리차와 츠히나처럼 우르카이나의 오르크들과 상호 보완적이지만 속으로는 적대적 관계를 유지한다. 비잔티움의 인간들과 우르카이나의 오르크를 정신적으로 이어주는 매개가 바로 ‘마니투’이다.
마니투. 이게 이해하기 쉽지 않다. 딱 한 가지 현상이나 사물, 대상, 인격을 마니투라 칭하는 것이 아니라서 마니투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독자가 알아서 지금 이야기하는 마니투가 어떤 마니투라는 걸 구별해내야 한다. 마니투는 저 위에 이야기했던 마니투-안티크리스트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어떤 신이나 신격일 수도 있고, 돈을 세는 단위일 수도 있으며, 인터넷 등의 정보를 처리하는 개인용 컴퓨터나 그 기능을 보여주는 모니터일 수도 있다. 즉, ①금융-②종교(정치)-③정보(언론), 2008년 러시아를 덮친 세계금융위기로 인해 러시아 내에서 벌어진 현상 가운데 대표적 세 가지를 총괄한다. 이 세 가지를 지탱하는 공통은, ‘믿음’을 요구한다는 것. 특히 우르카이나의 오르크들의 믿음을 위하여 비잔티움이 제작하는 것이 스너프다. 스너프는 사실 금지어 비슷하다. 실제로 살인을 하거나 강간, 폭행하는 장면을 촬영해 기록으로 남긴 것을 스너프라고 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오르크들의 신성을 유지시키기 위해 댐젤 인 디스트레스 Damsel in Distress, 곤경에 처한 아가씨를 구출하는, 영화이기도 하고 뉴스이기도 한, 뉴스이기도 하고 영화이기도 한, 영화와 뉴스의 경계가 허물어진 영상을 뜻한다.
Damsel in Distress의 대표적 사례는 이라크 전쟁 중에 포로로 잡힌 제시카 린이란 백인 일병으로, 무슬림에 의해 포로로 잡혔으니 온갖 고문과 강간으로 고생했을 것이라 여겨 위험을 무릅쓰고 구출해 낸 일이 있었다. 무공훈장을 받고도 몇 년이 흐른 후에 이 사건은 새빨간 거짓말로 드러났다.
작품의 주인공인 데미얀-란돌프 다밀롤라 카르포프, 줄여서 다밀롤라는 직업이 백퍼센트 재택근무하는 전투기 조종사로 감시와 통제를 목적으로 오르크 문화의 정신적 지평을 완벽하게 투시하여 오르크 문화를 창조하는 일을 한다. 정치적으로는 진보수적인 수구자유인이며 마니투를 향한 사랑의 노예에다가 후기 반기독교적인 세속적 실존주의자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냥 되는대로 사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진보-보수를 합친 진보수적이고, 편의에 의해 수구와 자유를 넘나드는 수구자유인이란 말. 다밀롤라는 오르크들의 마니투 신봉을 유지하기 위하여 스너프의 몇 장면을 만드는 일을 하느라 적당한 댐젤을 찾았으니, 연애중인 흘로야. 그림이라는 남자 오르크와 낚시를 하며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다밀롤라는 흘로야를 댐젤로 만드는 역할을 하는 직업 ‘디스코스몽거’인 베르나르-알리와 의도적으로 흘로야를 곤경에 빠뜨린 다음 구해준다. 이 과정에서 훌륭한 영상을 얻게 된다.
스너프를 제작하는 건 대개 비잔티움과 우르카이와의 전쟁 직전이다. 주로 정기적으로 발발하는 두 진영 간의 전쟁도 스너프와 마찬가지로 상호 적당한 의존과 긴장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이번에 발생하는 것이 제221차 전쟁이다.
다밀롤라는 또한 푸포갈이기도 하다. 푸포갈은 소위 ‘수라’라고 이름이 바뀐 리얼돌, 지금부터 몇 천년이 흐른 후의 리얼돌이니까 상당히 세련된 형태일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시라, 법정 성교동의 연령이 46세라서 도무지 어떻게 해소할 수 없는 리비도를 ‘수라’를 통해 해소하는 인간 암/수컷들을 말한다. 동성애자들을 일컫는 말은 ‘보갈’. 다밀롤라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두 가지 가운데 하나인 ‘카야’라는 이름의 수라에게 최고치의 개년성과 영성을 부여했다. 잘 읽으시라. 개년성. 개연성이 아니다. 막말로 해서, 잡년 같은 성격을 개년성이라 칭했다.
이 정도면 할 말은 다 한 거 같다. 중구난방이기는 하지만 책을 읽는 세 가지 방향을 다 소개했다.
첫째로 상부와 하부 사람들. 비잔티움 거주자들과 그들이 한껏 비웃어 최고지도자에게도 찢어진 콘돔이라는 뜻의 “터진 듀렉스”나 “터진 콘텍스”라는 이름을 부여한 오르크와의 갈등. 두번째로 스너프의 댐젤이었으나 상부로 올라온 그림과 흘로야, 마지막으로 다밀롤라와 최고치의 개년성과 영성을 동시에 지닌 수라인 카야.
이제 남은 것은 오직 하나, 당신의 쇼 타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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