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주 순양함 무적호 ㅣ 민음사 스타니스와프 렘 소설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최정인.필리프 다네츠키 옮김 / 민음사 / 2022년 2월
평점 :
.
2025년 첫 독후감의 대상이 될 작품을 어떤 것으로 할까? 도서관 서가를 기웃거리다 스타니스와프 렘을 선택했다. <솔라리스>를 인상깊게 읽었으며, 광막하고 ‘광활’이라는 단어만 가지고는 택도 없는 무한대의 공간 속으로 탐험을 떠난 인간과 마주치는 의사 불통의 생명체 이야기. 이 놀라운 상상력에 반했던 것이었는데, 그사이 벌써 일년 반이 지났다. 다른 렘도 읽겠다고 서가에 갈 때마다 눈 여겨 보긴 했으나 쉽게 고르지 못했다. 제목이 근사하다. 우주 순양함 무적호. 새해를 여는 첫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단지 이런 이유 때문에 선택한 책이었지만 정작 읽고 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스타니스와프 렘, 혹시 이 작자 자신이 우주에서 온 외계인 아니었을까?
무적호. 라이라 성좌 우주기지에 주둔한 우주선 중 광자 엔진을 탑재한 최대규모의 2급 순양함이다. 20층 건물 높이의 웅좌를 자랑하는 순양함에는 83명의 승무원이 타고 있는데 모두 중앙 갑판에 자리한 터널형 동면실에 잠들어 있다. 비교적 짧은 항해라서 극저온 동면 대신 체온 10도 이상을 유지하는 인공수면을 적용하고 있다. 비행하는 동안 함정의 운행은 고 지능 로봇인 오토마톤들이 수행하고 있다. 인공적으로 잠이든 지 7개월 만에 동면실에서 승무원들이 눈을 뜨면서 작품을 시작한다.
<우주 순양함 무적호: 이후 “무적호”라고 씀>는 1964년 작품이다. 그런데 이 첫 장면, 어디서 봤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2009년 작품 <아바타>. 21세기식 백인 기병대와 인디언의 결투를 다룬 서부극이라 볼거리는 많지만 스토리는 너무 구태의연해서 지루했던 영화인데 그럼에도 우리나라 최고 관람수 1천4백만 이상, 전세계 역대 최고 박스 오피스 29억 달러 이상을 기록한 소위 전무후무한 작품. 나는 <무적호> 오프닝을 보면서, 카메론 감독이 <무적호>의 오프닝을 적어도 읽어보았거나 슬쩍 빌려왔을 것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다. 시작부터 기대감을 바짝 끌어올렸다. 이 작품이 우주생명체와의 상봉을 다룬 삼부작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솔라리스>에는 행성 자체가 거대한 생명체였다. 이번엔 과연 어떤 것이 등장할까, 작가가 렘이니만큼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우주 순양함 무적호가 도착한 행성은 ‘레기스3’. 상공에서 내려다보니 행성은 뭉글뭉글한 검붉은 구름으로 뒤덮였다. 바다와 어두컴컴한 분화구들이 흩어져 있는 대륙으로 구성되어 있는 행성. 겉으로 보기엔 대륙은 모래와 암석만 있으며 생명체의 흔적은 전혀 없다. 상공8백 미터에서 하강한 무적호는 드디어 사막행성의 땅을 밟아 레기스3 행성의 일출과 구름, 바람이 있는 세계와 조우한 것이며 이제는 이 세계와 접촉해야 한다는 사실을 돌이킬 수 없었다. 순양함의 목적은 이 행성에 도착해 활동하던, 1년 전에 마지막 신호를 우주기지에 보낸 후에 불가사의할 정도로 갑자기 사라져버린, 무적호와 같은 등급의 콘도르호를 수색하기 위한 것이다. 콘도르 호에는 무적호 호르파흐 선장에 비해 우월하지도 않고 못하지도 않은 거의 동년배의 선장이 있었으며, 항해사를 비롯한 간부들, 과학자들의 수준 역시 무적호와 같은 수준이었음에도 실종되어 버렸으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항해사이자 주인공인 로한이 사병 두 명을 데리고 함정 밖으로 나와 시료를 채취해 분석한다. 토양의 방사선 수치 0.02. 거의 없는 수준이다. 대기는 질소 78%, 아르곤 2%, 이산화탄소 0%, 메탄 4%, 산소 16%로 구성되어 있다. 선장이자 사령관은 보고를 듣고 해양에 산소를 만드는 해조류나 해초류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그리하여 바다에 무인 로봇을 투입해보니 정말로 심해로 갈수록 다양한 수생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었다. 의문점. 왜 바다생물이 육지로 이동을 포기했을까? 해안에서 멀어질수록 생명종이 많고 밀도도 높은 이유는?
이어서 콘도르호도 발견했다. 함정 주위의 사막 모래 속에는 콘도르호 승무원의 것이 확실한 인간의 유골이 잔뜩 묻혀 있다. 함정 내부에서는 시신들이 극도로 건조한 상태에서 바싹 마른 미라 형태로 버려져 있다. 그러다 아직 생생한 시신 형태를 한 승무원을 발견한다. 터널형 동면실로 들어가 얼어 죽어버린 병사. 과학자들은 시신의 뇌에 자기장을 투입해 마지막으로 본 장면 또는 정보를 얻으려 하지만 ‘파리’ 또는 ‘파리떼’ 같은 것만 인식하고 말았다. 파리를 본 것이 마지막으로 뇌에는 아무런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평소에 SF를 잘 읽지 않는 나는 아직도 몰랐지만 SF 좋아하는 독자는 눈치를 챘을 거 같다. 행성 레기스3의 내륙에는 생명체가 살 수 없는, 학살하는 무엇인가가 존재할 것이라고. 그렇다. 이 정체불명의 것, 지금부터 60년 전인 1964년에 발표한 소설에서 렘은, 나는 여전히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기상천외한 방식의 진화론을 펼친다. 어떻게 하면 이런 상상력을 장착한 천재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이래서 내가 초두에 스타니스와프 렘이 우주에서 잠깐 지구 행성에 왔다 간 외계인일지도 모른다고 한 것.
작품의 여섯 번째 챕터, “라우다 박사의 가설”에서 라우다 박사가 사령관 호르파흐 선장에게 함정 밖에서 승무원을 백치로 만들어버리는 것들에 관해 자신의 의견을 밝힌다.
레기스3의 내륙에 살았던 생명체는 화석 분석 결과 5백만년 전에 멸종했다. 그 이전에 라이라 제타 행성계의 여섯 번째 행성에 고도의 문명을 이룬 외계인이 살았다는 건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라이라인이, 행성계의 폭발을 감지해 식민지를 건설하려 했든지 아니면 그저 과학 탐사였는지는 다음으로 하고, 이곳에 정찰선을 보냈으나 원인 불명으로 모두 사망한 사건이 벌어졌다고 가정하자. 라이라인들도 인공지능이 고도로 발달한 오토마톤과 함께 왔다는 건 이미 무적호의 탐사로 밝혀냈다. 이 오토마톤은 자체 수리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몸집이 큰 로봇에 이상이 생기면 정상으로 기능하기 위하여 다양하고 복잡한 부품이 필요해서 오토마톤들은 작은 크기의 다양한 기능을 가진 부품을 다량으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 행성 동물이 오토마톤을 공격했을 수 있고, 이 과정에서 오토마톤과 수리 로봇이 행성 동물을 멸종시킨다. 이후에 덩치가 크고 다양한 무기가 있는 소수의 오토마톤은 이제 작은 쪽으로 더 발달한 정밀 부품들의 어마어마한 무리와 마지막 대결을 벌여 모두 망가지고 만다. 이걸 라우다 박사는 “무생물 진화”라고 칭한다. 아무 생각의 능력이 없는 작은 부품들이 특정 충격에 반응하여 한 순간 거대한 수량이 밀집하여 각기 신호를 전달하는 와중에 일종의 집단적인 뇌, 사고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가동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한테 위협이 될 수 있는 개체,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기계이건 간에 그 개체를 집단으로 공격해, 아무 감정이 없는 기계여서, 완전히 망실할 때까지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더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해, 유기 생명체일 경우 그걸 죽이는 것보다 뇌의 기능을 정지시켜 생명체의 기능을 없애는 것이 더 에너지가 적게 든다는 것을 학습한 이후에, 콘도르호의 수면실에서 발견한 동사 시체에서 보았듯이 뇌를 백지화하기 시작했다는 가설.
지금 라우다 박사가 하는 이야기를 간략하게 쓰느라 두서가 없을 지 모르지만 직접 읽어보면 호소력이 있다. 인공지능 시대를 살고, 스티브 호킹 박사의 의견에 따르면 인공지능에 의하여 멸망할 운명을 가진 우리 종의 입장에서 이 가설이 틀렸다고 주장할 아무런 이유 또한 없다. 그걸 렘 선생은 희대의 천재 호킹 박사가 스물두 살 때 생각해낸 거다.
이 의외의 동체, 생명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고, 지금처럼 ‘동체’라고 하기도 뭣하지만 나중엔 결국 ‘그들’이라고 하는 것과 대면한 무적함의 과학자들은 정말 인간답게 그것들과의 최종적인 복수전을 도모한다. 인간이 발명한 가장 강력한 로봇 무기 ‘사이클롭스’까지 투입시켜 검은 구름 모양의 파리떼와 일전을 벌이지만 사이클롭스는 장렬한 싸움 끝에 뇌, 컴퓨터가 이상작동을 해 총구를 거꾸로 돌렸다가, 무작정 사막을 헤매는 신세가 되어 결국 무적호에 의하여 분쇄되기에 이른다.
이때 주인공 로한이 사색을 시작한다. 은하계 중심설.
“인간과 비슷하거나 이해 가능한 것만을 추구하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몫이 아닌 일, 즉 인간과 관계없는 사안에 간섭하지 말라”는 주장이다. 레기스3에 존재하는, 그게 생명체이건 비생명체이건 간에 “수백만 년 동안 이미 생존의 균형을 이루어 실재하는 대상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며 “누구한테도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이 행성의 활발하고 적극적인 존재는, 동물이나 사람이라고 불리는 단백질 복합체와 비교해서 월등하지도, 그렇다고 열등하지도 않”아서 인간은 애초에 복수전을 꿈꿀 권리가 없기 때문에 이대로 행성을 떠나는 것이 옳다는 취지. (p.253)
그러나 함정 밖에, 하필이면 파리라고 이야기한 검은 구름이 밀집해 있는 근처에, 이미 죽었을 것이 거의 확실한 승무원 네 명이 남아 있어서 그것(이미 시신 상태일 것이니까)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그냥 두고 떠나버릴 것인가, 아니면 전멸의 위험을 무릅쓰고 수색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사령관 호르파흐와 항해사이자 주인공인 로한이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대화를 나누고, 대화의 결론을 수행하기에 이른다.
참 다양한 공상적 아이디어를 포함한 SF의 명작. 2025년, 모두 다양하고 발칙한 아이디어로 혼자만의 독특한 한 때를 만드시기 바란다. 117년만에 가을 폭설이 내린 늦고 늦은, 만추의 가을 새벽에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