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적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김현균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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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년만에 볼라뇨 라이브러리에 한 권을 추가한다. 도서관에서 계속 눈독을 들인 책. 한 권쯤 안 읽은 볼라뇨도 있는 게 좋아, 은근히 이런 생각도 가지고 있어서 그동안 미루고 있다가 읽었다. 처음부터 볼라뇨를 좋아한 건 아니다. 처음 읽는 낯선 방식의 소설 <아메리카의 나치문학>에 경기를 했고, <안트베르펜>은 이거 또 뭐야 싶었는데, 후에 생각해보니 초기에 읽은 이 두 작품을 통해 나도 모르게 로베르토 볼라뇨에게 익숙해졌던 거다. 그리하여 이후 다른 볼라뇨 애호가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작품에 집중하게 됐고, 오늘에 이르렀다. 이제 볼라뇨는 몇 권 남지 않았다. 남은 것도 야금야금 읽어야지.


  화자이자 주인공은 몬테비데오 출신의 우루과이 여자 아욱실리오 라쿠투레. 자칭 멕시코인들의 친구이며 멕시코 시의 어머니이다. 모든 시인을 알고 있고 시인들 역시 모두 자신을 안다고 믿는다. 아욱실리오가 우루과이를 떠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1년가량 살다가 최종적으로 멕시코시티에 와서 정착한 이유는 스페인 시인 레온 페리페와 페드로 가르피아스가 조국을 떠나 멕시코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욱실리오가 멕시코에 도착한 것은 1967년으로 기억한다. 어쩌면 65년 또는 62년일 수도 있다. 독자는 좀 헛갈릴 수 있다. 정착하기 위하여 멕시코에 온 해를 5년씩이나 왔다갔다할 수 있을까 싶어서.

  <부적>은 아욱실리오 라쿠투레가 훗날, 아마도 1980년대의 어느 날 지난 세월을 기억하면서 쓴 글일 것이며, 아욱실리오는 시인, <야만스러운 탐정들>과 탐정들의 흔적이 드러나는 <2666>에서 보듯 초현실주의 시를 쓰는 부류, “내장사실주의”의 일원일 것이라서 시공에 관한 한 상당한 신축성을 가질 수 있다. 예컨대 작품의 뒤편에서 등장하는 스페인의 여성 시인 레메디오스 바로를, 시인하고는 실제로 아이 컨택, 눈과 눈길이 마주친 적도 없지만 이이의 상념 속에서 자신이 레메디오스 바로를 찾아갔으며 무료로 집안일과 부엌일을 해줄 테니 당신은 시 쓰기에만 전념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했으나 거절당한다. 또는 그렇다고 믿는다. 레메디오스 바로가 생을 접은 해가 1963년. 그러니 아욱실리오 라쿠투레가 그 시인과의 인연에 대하여 언급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962년에 멕시코시티에 도착했어야 하기 때문에.

  아욱실리오가 레메디오스를 찾아갔다고? 그렇다. 사실이 아니어도 사실이다. 독자는 그렇게 믿지 않지만 믿는다. 이이가 멕시코시티에 도착해 한 번에 두 명의 스페인 노시인과 교류를 하며, 1962년 또는 63년에 레메디오스 바로에게 했듯이 레온 페리페와 페드로 가르피아스가 시작詩作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집안 일 일습을 다 해주었다(고 주장한다). 1968년에 사망한 레온 페리페는 자신을 ‘예쁜이’ 혹은 ‘나의 소중한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하면서 가끔 돈 몇 푼을 건네려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이는 돈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자신이 집안일을 해주는 것은 “순전히 억누를 수 없는 존경심에서 하는 일이라고요.”라고 대답했다. 페드로 가르피아스는 레온 페리페와 달리 돈이 아니라 집안일을 해주는 대가로 주로 철학책을 선물해주었다. 가르피아스가 세상을 떠난 것이 1967년. 따라서 아욱실리오는 늦어도 1967년에는 멕시코시티에 있어야 했던 것.

  두 명의 노시인 가운데 페드로 가르피아스만 기억해도 좋다.


  화자 ‘나’이자 멕시코 시의 어머니인 아욱실리오 라쿠투레는 가르피아스가 67년에, 페리페가 68년에 사망하자 그들의 집에서 나와 멕시코국립자치대학 인문대학을 빙빙 돌며 역시 자발적으로 일하기 시작한다. 가끔 교수실에서 타이프를 쳐주거나 프랑스어에 관한 한 대학의 전문가보다 더 양호한 편이어서 간혹 보수를 받으며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돈으로 다락의 작은 월세방을 얻거나 시인 또는 그들의 친구집에 얹혀 지내며, 숙박은 물론, 가능하다면 삼시 세끼 내장을 채우는 것도 빌붙어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하루도 좋고, 사흘도 좋고, 일주일이면 더 좋은데, 한달 두달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가, 결국 어떤 경우라도 마지막엔 이젠 좀 나가달라는 집이나 방 주인의 직접적인 말을 들은 후에야 친절하게 그동안 고마웠다고, 은혜는 잊지 않겠다고 인사하고 집이나 방에서 발걸음을 돌리는…. 그러니 시인들의 집에서 무료로 집안일을 해준 것이 아니라 대신 잠자리를 얻고, 다른 건 몰라도 먹는 건 실컷 먹을 수 있었다고 여길 수도 있다.

  이런 상태에서 드디어 9월 18일이 온다.


  1968년 9월 18일. 멕시코국립자치대학. 1968년. 전 유럽과 북미를 휩쓸던 젊은이들의 자유와 반전시위. 이 충격이 멕시코시티에 다달았다. 멕시코에서는 두 가지의 악재가 더 보태졌으니, 제도혁명당에 의한 독재정권과 불과 며칠 앞으로 다가온 멕시코시티 올림픽이 그것이었다. 멕시코국립자치대학 학생들은 독재철폐, 정치범석방, 집회의 자유 보장, 올림픽 철회를 외쳤으며, 이에 대한 친절한 응대로 멕시코 정부는 시위진압경찰과 군대를 학원에 투입해 당연히 사정없이 두드려 패며 교수, 교수의 비서를 비롯한 교직원, 학생들을 체포 구금해버렸다. 이 일은 10월 2일, 올림픽이 열리기 불과 열흘 전에 행해진 유명한 “틀라텔롤코 광장에서의 학살”의 전초전 역할을 하는데, 그건 며칠 후의 일이고, 딱 이 당시 여자화장실에서 아욱실리오 라쿠투레는 스커트를 올리고 (볼라뇨가 쓴 대로 옮기자면) 발목을 족쇄처럼 움켜쥐는 방식으로 팬티가 걸린 채 좌변기에 앉아, 용변을 본 것이 아니라 이이의 취미대로 자기만의 공간에서 페드로 가르피아스의 더없이 섬세한 시를 읽고 있었다. 사실 이 장면은 한 가난한 망명 또는 유랑 인텔리겐치아의 눈물을 앞을 가리는 비참한 장면인데도 독자가 어쩔 수 없이 피식 웃을 수밖에 없는 건 로베르토 볼라뇨 특유의 장난끼 가득한 문장 때문이다. 아욱실리오가 저 꼭대기에 걸린 환기창으로 밖을 내다보니 코피가 흘러 휴지로 코를 막은 교수와, 이제는 자기 친구라고 할 수도 있는 비서들이 군인들의 엄격한 눈길을 받으며 비칠비칠 걸어가고 있었다. 존경하는 고 돈 페드로 가르피아스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장면이었으리라.

  교정에 아직도 틀림없이 군경이 있어서 아욱실리오는 화장실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고, 심지어 언제 젊은 남자 군인이 여자화장실의 출입문을 왈칵 열어젖힐 지 모르는 일이라 개별실의 문조차 열어놓을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후 정말로 한 병사가 화장실에 들이닥쳤고, 이어서 상관인 듯한 인간이 지나가자 “근무중 이상 무” 보고를 하더니 다시 문을 닫고 나가는 거였다. 다시 개별실로 돌아와 있던 아욱실리오는 이때까지 문 아래로 보일지 몰라 여전히 같은 복장인 채로 두 발을 동동 들고 있었으며, 군인이 물러난 이후 화장실에 혼자 남은 이이는 세면대의 거울을 보고, “아욱실리오 라쿠투레여, 우루과이 시인이여, 버텨라!”라고 외쳤다. 물론 밖에서 들리지 않게 속으로만.


  이렇게 해서 아욱실리오 라쿠투레는 1968년 9월 18일부터 9월 30일까지, 그나마 다행히 세면대에 물이 공급되는 바람에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오직 물만 마시면서, 도저히 변기 위에 앉은 상태로는 잠을 잘 수 없어 여름이라도 차디찬 화장실 타일 위에 쪼그려 누워 12일 밤을 보낸 후 구조되었던 거였다. 구조된 이틀 후에 멕시코 현대사에서 가장 잔인한 기록이 될 틀라텔롤코의 학살이 벌어지기는 하지만 아욱실리오 본인은 멕시코국립자치대학 인문대학의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다(고 자신은 생각하며 살게 된다). 이 당시에는 다 있었지만 이후 멕시코시티에서 앞니 네 개를 상실한 아욱실리오는 마음 속 한 구석에 12일 동안의 감금, 구속의 영향이 가장 크게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겼으리라. 이후 이이는 남들과 대화를 할 때, 웃을 때 손으로 자기 입을 가리는 것이 버릇이 되었는데, 사실 이건 세계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제스처이긴 하지만, 시인, 시를 통해 세상에 발언하는 아욱실리오 입장에서는 범인의 경우보다 더 많은 은유적 의미가 담겨 있음은 물론이겠다. 독자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그건 독자 마음인 것도 당연하고.

  이후 <부적>은 멕시코를 포함한 라틴 아메리카 젊은이들의 독재에 대한 저항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비롯한 자유정신에 대하여 나머지 분량을 할애한다. 이 속에 <야만스런 탐정들>에 등장하는 시를 쓰는 젊디젊은 시인도 나오고,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의 전설적인 시인, 작가도 언급하는데, 나는 당연히, 다른 작가가 아니라 로베르토 볼라뇨가 쓴 작품이기 때문에 그가 만든 ‘허구’의 시인, 소설가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데 만원 건다.

  무엇을 일컬어 부적이라고 했을까? 젊은 라틴아메리카 청년들의 용기와 도전, 그것들을 통해 일군 자유와 지양. 아, 이건 미리 이야기하면 안 되는 거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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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01-06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볼라뇨 전집을 오래 전에 사서 쟁여 두었죠. ㅎㅎㅎ
헌데 언제 읽을지...^^;;

Falstaff 2025-01-06 16:38   좋아요 0 | URL
새털 같은 날들인데 뭐가 걱정입니까? 언젠가 읽으시겠지요. ㅎㅎㅎ
 
그로운
티파니 D. 잭슨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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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티파니 Danielle 잭슨은 뉴욕주 몬트로즈에 있는, 주로 백인뿐인 웨스트체스터의 (헨드릭 허드슨) 고등학교에 다녔고 잭앤드질의 회원이었다고 스스로 밝혔다. 졸업 후 하워드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뉴 스쿨 대학에서 미디어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내셔널 지오그래픽, NNC 아메리카 등 다양한 네트워크 및 미디어 회사에서 10년 이상의 커리어를 쌓는다. 2009년에는 단편 공포영화 <필드 트립>의 각본과 감독을 맡기도 했다.

  위키피디아에 소개하는 잭슨의 소설 작품은 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 하이틴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폭력, 그것을 둘러싼 보편적 미국인의 사고방식, 사고방식을 소통하는 채널 또는 시스템에 대한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추가하자면 작가가 청소년 시절부터 관심이 많았던 장르인 공포물이거나. 잭슨의 홈페이지에서, 만일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 있으면 어떤 일을 하겠느냐는 팬의 질문에 이이는 “공포에 휩싸인 것을 창작하거나 가르치는 일”이라 대답할 정도니까 공포 장르에 지극한 관심이 있다고 봐도 좋겠다. 십대 시절부터 지금까지 R.L. 스타인, 35개 언어로 무려 4억 권 이상을 판매하여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이 팔린 공포소설 시리즈 <구스범프>를 쓴 로버트 스타인의 열렬한 팬이며, 가장 좋아하는 작가들 역시 많은 판매부수를 자랑하는 ‘공포의 왕’ 스티븐 킹 같은 인물들이다. 따라서 티파니 잭슨의 작품이 다분히 서스펜스 적인 구도를 갖춘 것 역시 자연스러울 수 있는 일. 다른 작품은 읽어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그로운>은 확실히 그렇다. 흑인 하이틴에 대한 성을 포함한 폭력 범죄, 흑인 여성의 피해에 관한 삐딱한 사적, 공적 시선, 공포스러운 수준인 그루밍과 가스라이팅. 나는 그루밍과 가스라이팅에 관해서 말로만 어떤 것이다, 들었을 뿐이라서 작중 수퍼스타 코리 필즈가 주인공 인챈티드 존스에게 가하는 행위에 아예 질려버렸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소설과 영상을 통해 코리 필즈의 행위와 유사한 것들을 적지 않게 읽고 봤다. 그게 <그로운>의 등장인물들이 가하고 당하는 수준까지 아니었을 뿐, 완력이 있거나 권력이 있거나, 돈이 많은 인간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장악하려는 장면은 살면서 여러 번, 어떻게 생각하면 자주 목격하지 않았을까 싶다. 더 세밀하게 생각해보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역시 그루밍과 가스라이팅을 가하거나 당하지는 않았을까? 인간이라는 종은 자신이 가한 건 잘 기억하지 못하고, 당한 건 기가 막히게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틀림없이 정도의 차이지, 나도, 당신도 그루밍과 가스라이팅을 가한 적도 있고 당한 적도 있을 것이다. 그냥 그렇다는 거다, 그러니 더 조심해서 살자는 뜻으로.


  안챈티드 존스. 애칭 ‘챈티’는 노래도 잘하고 수영실력도 수준급인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며 17세, 반년 후엔 성년인 18세가 될 고등학생이다. 챈티가 다니는 파크우드 고등학교는 카운티에서 엄격한 복장 규정이 없는 유일한 사립학교라서 흑인 학생이라고는 전교에 열 명밖에 없다. 그렇게 까다롭지 않은 학교 규정에 집중을 방해하는 머리 모양을 금지한다는 항목이 있어서 가닥가닥 굵게 땋은 드레드록스 머리를 바리캉으로 밀어버렸다. 흑인으로 살기가 만만치 않다. 흑인 아이라 불량스럽다, 흑인 아이라 머리 모양이 저렇다, 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고 “알아서 긴 거”였다.

  존스 가족은 원래 외할머니와 함께 해변에서 살았다. 챈티는 어려서부터 물, 수영장에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바다처럼 파도가 치거나 강처럼 흐르는 물 속에서 수영하는 것을 좋아해 하루 종일이라도 물 속에 있을 수 있었지만, 외할머니의 영향을 받아 빌리 할리데이, 에타 제임스 같은 클래식한 재즈부터 휘트니 휴스턴, 머라이어 캐리, 어리사 프랭클린, 다이애나 로스 같은 팝스타까지 다 좋아하다가 이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다 보니 자기 역시 다섯 옥타브를 넘는 음역과 풍성한 성량을 가지게 됐다. 당연히 학교에서 알아주는 노래꾼이 되었는데, 거의 유일한 절친 가브리엘라, ‘갭’이 챈티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 엄마에게 거짓말을 해서 엄마가 운전하는 엄마 차를 타고 BET 방송국에서 하는 뮤직 라이브 오디션에 참가해, 1등을 먹었으면 1만 달러를 받을 수 있었는데, 장렬하게 탈락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백스테이지에서 눈물을 찔끔찔끔 짜고 있을 때, 심사위원은 아니지만 오디션 도중에 불쑥 등장해 심사위원 자리에 앉아 있던 수퍼, 수퍼 중의 수퍼스타 코리 필즈가 어느 새 챈티의 뒤에 다가와 목덜미 가까이에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이렇게 속삭이는 거였다.

  “좋은 노래였어.”

  코리가 몇 살이냐고 물었고, 열일곱이라는 챈티의 대답을 들은 아주 잠깐 조금 실망한 듯하더니, 다음 주 토요일의 자기 공연에 챈티와 부모를 VIP석에 초대한다.

  “입구에서 내가 초대했다고 말하면 될 거야, 브라이트 아이즈.”

  브라이트 아이즈? 그가, 무려 코리 필즈가 나를 ‘브라이트 아이즈’라고 부른 거야? 챈티는 흐물흐물 녹아버린다. 일찍이 열세 살에 이미 수퍼스타가 되어 마이클 잭슨의 재림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오른 곡이 열다섯, 15세에 첫번째 그래미 상을 받은 이후 음악상이라는 음악상은 모두, 아니지, 에미상 하나 빼고 메이저 어워드는 몽땅 수집한 미국 대중음악계의 천재가 나를 초대한 거야?


  존스 가족이 재정적으로 여유로워 다양성이 부족한 뉴욕의 부자동네 하트데일로 이사왔고 아이 둘을 엘리트 사립학교에 넣은 것도 모자라 10대 흑인 커뮤니티인 윌앤드윌로우 클럽에 가입한 건 아니었다. 아버지는 전기노조에 가입해 2교대로 일하며 케이블을 수리하는 일을 하고, 이사와 동시에 간호학교를 다녀 자격증을 딴 엄마는 병원에서 간호사 일을 하며, 집세와 아이들 사립학교 등록금, 수영 과외활동 지원비, 윌앤드윌로우 회비와 행사 참가비를 조달하느라 쌔가 빠지고 있는 중이다. 아이들이나 적은가? 맏이 챈티, 둘째 딸 셰이, 밑으로 딸 아들 쌍둥이 펄과 피닉스, 막내딸 테스티니까지 다섯을 키울 생각하면 머리가 찌근거리겠지? 걱정하지 마시라, 다 살게 되어 있다.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지니고 있는 존스씨와 존스 부인도 맏딸 챈티의 손을 잡고 코리 필즈 콘서트에 VIP로 참석해서, 공연을 즐긴 후, VIP라는 것이 공연 후에 백스테이지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의미하며, 절대로 푸르지 않은 그린룸까지 들어가 숱한 스타들과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그린 라이트를 말하는 것인지 처음 알았고, 이를 충분히 즐긴다. 평소 우상으로 알던 조금 나이든 가수들까지 모두 와 있으니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을 터. 몸에 걸친 의상과 액세서리에서 큰 차이가 있지만 티파니 잭슨은 그딴 것에 그리 큰 관심이 없었으며, 팝스타들 역시 삶에 허덕거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부부와 스스럼없이 짧지 않은 동안 유쾌한 대화를 나누는 데 머뭇거리지 않는다. 여기에다가 코리 필즈는 얼마나 부부에게 점잖고, 정중하고, 상냥한지. 그는 부모에게 말한다. 따님 인챈티드 존스 양이 노래에 상당한 재질이 있습니다. 그러나 더 배워야 합니다. 레슨이 필요합니다. 자질이 너무 출중하기 때문에 제가 무료로 레슨을 해주고 제 공연에 세워보려 합니다.

  실제로 엄마 라토야 존스 여사는 챈티와 함께 웨스트사이드에 있는 코리 필즈의 펜트하우스에 설치한 음악 스튜디오를 방문하고, 구경하고, 세 시간 동안의 첫번째 레슨 시간을 갖게 된다. 엄마는 세 시간 동안 레슨을 받을 딸에게 나름 엄격하게 말한다.

  “예의를 지켜. 숙녀처럼 행동하고.”

  그러나 챈티가 보기에 코리한테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애수哀愁”가 있었던 것이니 코리의 친절과 따스함과 상냥함과 애정이 바야흐로 그루밍의 시작이었던 것을 챈티도, 존스 여사도, 독자도 몰랐던 거였다. 코리가 주장하는 스튜디오의 규칙: 이곳에서 일어난 일은 아무도 몰라야 함. 음악을 만드는 게 아니고 우리의 목소리가 공기중에서 사랑을 나누어야 함.

  이렇게 애수 속에 그루밍과 가스라이팅의 강철 발톱이 돋아, 드라마는 미성년자 성착취와 폭력과 약물 강제와 감금과 살인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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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1-03 0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독후감:
월요일. 로베르토 볼라뇨, <부적>
화요일. 그레이스 페일리, 《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
목요일. 최인숙, 《내 삶의 예쁜 종아리》
금요일. 샤오홍, <생사의 장>
 
우주 순양함 무적호 민음사 스타니스와프 렘 소설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최정인.필리프 다네츠키 옮김 / 민음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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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첫 독후감의 대상이 될 작품을 어떤 것으로 할까? 도서관 서가를 기웃거리다 스타니스와프 렘을 선택했다. <솔라리스>를 인상깊게 읽었으며, 광막하고 ‘광활’이라는 단어만 가지고는 택도 없는 무한대의 공간 속으로 탐험을 떠난 인간과 마주치는 의사 불통의 생명체 이야기. 이 놀라운 상상력에 반했던 것이었는데, 그사이 벌써 일년 반이 지났다. 다른 렘도 읽겠다고 서가에 갈 때마다 눈 여겨 보긴 했으나 쉽게 고르지 못했다. 제목이 근사하다. 우주 순양함 무적호. 새해를 여는 첫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단지 이런 이유 때문에 선택한 책이었지만 정작 읽고 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스타니스와프 렘, 혹시 이 작자 자신이 우주에서 온 외계인 아니었을까?


  무적호. 라이라 성좌 우주기지에 주둔한 우주선 중 광자 엔진을 탑재한 최대규모의 2급 순양함이다. 20층 건물 높이의 웅좌를 자랑하는 순양함에는 83명의 승무원이 타고 있는데 모두 중앙 갑판에 자리한 터널형 동면실에 잠들어 있다. 비교적 짧은 항해라서 극저온 동면 대신 체온 10도 이상을 유지하는 인공수면을 적용하고 있다. 비행하는 동안 함정의 운행은 고 지능 로봇인 오토마톤들이 수행하고 있다. 인공적으로 잠이든 지 7개월 만에 동면실에서 승무원들이 눈을 뜨면서 작품을 시작한다.

  <우주 순양함 무적호: 이후 “무적호”라고 씀>는 1964년 작품이다. 그런데 이 첫 장면, 어디서 봤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2009년 작품 <아바타>. 21세기식 백인 기병대와 인디언의 결투를 다룬 서부극이라 볼거리는 많지만 스토리는 너무 구태의연해서 지루했던 영화인데 그럼에도 우리나라 최고 관람수 1천4백만 이상, 전세계 역대 최고 박스 오피스 29억 달러 이상을 기록한 소위 전무후무한 작품. 나는 <무적호> 오프닝을 보면서, 카메론 감독이 <무적호>의 오프닝을 적어도 읽어보았거나 슬쩍 빌려왔을 것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다. 시작부터 기대감을 바짝 끌어올렸다. 이 작품이 우주생명체와의 상봉을 다룬 삼부작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솔라리스>에는 행성 자체가 거대한 생명체였다. 이번엔 과연 어떤 것이 등장할까, 작가가 렘이니만큼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우주 순양함 무적호가 도착한 행성은 ‘레기스3’. 상공에서 내려다보니 행성은 뭉글뭉글한 검붉은 구름으로 뒤덮였다. 바다와 어두컴컴한 분화구들이 흩어져 있는 대륙으로 구성되어 있는 행성. 겉으로 보기엔 대륙은 모래와 암석만 있으며 생명체의 흔적은 전혀 없다. 상공8백 미터에서 하강한 무적호는 드디어 사막행성의 땅을 밟아 레기스3 행성의 일출과 구름, 바람이 있는 세계와 조우한 것이며 이제는 이 세계와 접촉해야 한다는 사실을 돌이킬 수 없었다. 순양함의 목적은 이 행성에 도착해 활동하던, 1년 전에 마지막 신호를 우주기지에 보낸 후에 불가사의할 정도로 갑자기 사라져버린, 무적호와 같은 등급의 콘도르호를 수색하기 위한 것이다. 콘도르 호에는 무적호 호르파흐 선장에 비해 우월하지도 않고 못하지도 않은 거의 동년배의 선장이 있었으며, 항해사를 비롯한 간부들, 과학자들의 수준 역시 무적호와 같은 수준이었음에도 실종되어 버렸으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항해사이자 주인공인 로한이 사병 두 명을 데리고 함정 밖으로 나와 시료를 채취해 분석한다. 토양의 방사선 수치 0.02. 거의 없는 수준이다. 대기는 질소 78%, 아르곤 2%, 이산화탄소 0%, 메탄 4%, 산소 16%로 구성되어 있다. 선장이자 사령관은 보고를 듣고 해양에 산소를 만드는 해조류나 해초류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그리하여 바다에 무인 로봇을 투입해보니 정말로 심해로 갈수록 다양한 수생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었다. 의문점. 왜 바다생물이 육지로 이동을 포기했을까? 해안에서 멀어질수록 생명종이 많고 밀도도 높은 이유는?

  이어서 콘도르호도 발견했다. 함정 주위의 사막 모래 속에는 콘도르호 승무원의 것이 확실한 인간의 유골이 잔뜩 묻혀 있다. 함정 내부에서는 시신들이 극도로 건조한 상태에서 바싹 마른 미라 형태로 버려져 있다. 그러다 아직 생생한 시신 형태를 한 승무원을 발견한다. 터널형 동면실로 들어가 얼어 죽어버린 병사. 과학자들은 시신의 뇌에 자기장을 투입해 마지막으로 본 장면 또는 정보를 얻으려 하지만 ‘파리’ 또는 ‘파리떼’ 같은 것만 인식하고 말았다. 파리를 본 것이 마지막으로 뇌에는 아무런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평소에 SF를 잘 읽지 않는 나는 아직도 몰랐지만 SF 좋아하는 독자는 눈치를 챘을 거 같다. 행성 레기스3의 내륙에는 생명체가 살 수 없는, 학살하는 무엇인가가 존재할 것이라고. 그렇다. 이 정체불명의 것, 지금부터 60년 전인 1964년에 발표한 소설에서 렘은, 나는 여전히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기상천외한 방식의 진화론을 펼친다. 어떻게 하면 이런 상상력을 장착한 천재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이래서 내가 초두에 스타니스와프 렘이 우주에서 잠깐 지구 행성에 왔다 간 외계인일지도 모른다고 한 것.


  작품의 여섯 번째 챕터, “라우다 박사의 가설”에서 라우다 박사가 사령관 호르파흐 선장에게 함정 밖에서 승무원을 백치로 만들어버리는 것들에 관해 자신의 의견을 밝힌다.

  레기스3의 내륙에 살았던 생명체는 화석 분석 결과 5백만년 전에 멸종했다. 그 이전에 라이라 제타 행성계의 여섯 번째 행성에 고도의 문명을 이룬 외계인이 살았다는 건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라이라인이, 행성계의 폭발을 감지해 식민지를 건설하려 했든지 아니면 그저 과학 탐사였는지는 다음으로 하고, 이곳에 정찰선을 보냈으나 원인 불명으로 모두 사망한 사건이 벌어졌다고 가정하자. 라이라인들도 인공지능이 고도로 발달한 오토마톤과 함께 왔다는 건 이미 무적호의 탐사로 밝혀냈다. 이 오토마톤은 자체 수리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몸집이 큰 로봇에 이상이 생기면 정상으로 기능하기 위하여 다양하고 복잡한 부품이 필요해서 오토마톤들은 작은 크기의 다양한 기능을 가진 부품을 다량으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 행성 동물이 오토마톤을 공격했을 수 있고, 이 과정에서 오토마톤과 수리 로봇이 행성 동물을 멸종시킨다. 이후에 덩치가 크고 다양한 무기가 있는 소수의 오토마톤은 이제 작은 쪽으로 더 발달한 정밀 부품들의 어마어마한 무리와 마지막 대결을 벌여 모두 망가지고 만다. 이걸 라우다 박사는 “무생물 진화”라고 칭한다. 아무 생각의 능력이 없는 작은 부품들이 특정 충격에 반응하여 한 순간 거대한 수량이 밀집하여 각기 신호를 전달하는 와중에 일종의 집단적인 뇌, 사고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가동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한테 위협이 될 수 있는 개체,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기계이건 간에 그 개체를 집단으로 공격해, 아무 감정이 없는 기계여서, 완전히 망실할 때까지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더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해, 유기 생명체일 경우 그걸 죽이는 것보다 뇌의 기능을 정지시켜 생명체의 기능을 없애는 것이 더 에너지가 적게 든다는 것을 학습한 이후에, 콘도르호의 수면실에서 발견한 동사 시체에서 보았듯이 뇌를 백지화하기 시작했다는 가설.

  지금 라우다 박사가 하는 이야기를 간략하게 쓰느라 두서가 없을 지 모르지만 직접 읽어보면 호소력이 있다. 인공지능 시대를 살고, 스티브 호킹 박사의 의견에 따르면 인공지능에 의하여 멸망할 운명을 가진 우리 종의 입장에서 이 가설이 틀렸다고 주장할 아무런 이유 또한 없다. 그걸 렘 선생은 희대의 천재 호킹 박사가 스물두 살 때 생각해낸 거다.


  이 의외의 동체, 생명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고, 지금처럼 ‘동체’라고 하기도 뭣하지만 나중엔 결국 ‘그들’이라고 하는 것과 대면한 무적함의 과학자들은 정말 인간답게 그것들과의 최종적인 복수전을 도모한다. 인간이 발명한 가장 강력한 로봇 무기 ‘사이클롭스’까지 투입시켜 검은 구름 모양의 파리떼와 일전을 벌이지만 사이클롭스는 장렬한 싸움 끝에 뇌, 컴퓨터가 이상작동을 해 총구를 거꾸로 돌렸다가, 무작정 사막을 헤매는 신세가 되어 결국 무적호에 의하여 분쇄되기에 이른다.

  이때 주인공 로한이 사색을 시작한다. 은하계 중심설.

  “인간과 비슷하거나 이해 가능한 것만을 추구하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몫이 아닌 일, 즉 인간과 관계없는 사안에 간섭하지 말라”는 주장이다. 레기스3에 존재하는, 그게 생명체이건 비생명체이건 간에 “수백만 년 동안 이미 생존의 균형을 이루어 실재하는 대상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며 “누구한테도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이 행성의 활발하고 적극적인 존재는, 동물이나 사람이라고 불리는 단백질 복합체와 비교해서 월등하지도, 그렇다고 열등하지도 않”아서 인간은 애초에 복수전을 꿈꿀 권리가 없기 때문에 이대로 행성을 떠나는 것이 옳다는 취지. (p.253)

  그러나 함정 밖에, 하필이면 파리라고 이야기한 검은 구름이 밀집해 있는 근처에, 이미 죽었을 것이 거의 확실한 승무원 네 명이 남아 있어서 그것(이미 시신 상태일 것이니까)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그냥 두고 떠나버릴 것인가, 아니면 전멸의 위험을 무릅쓰고 수색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사령관 호르파흐와 항해사이자 주인공인 로한이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대화를 나누고, 대화의 결론을 수행하기에 이른다.

  참 다양한 공상적 아이디어를 포함한 SF의 명작. 2025년, 모두 다양하고 발칙한 아이디어로 혼자만의 독특한 한 때를 만드시기 바란다. 117년만에 가을 폭설이 내린 늦고 늦은, 만추의 가을 새벽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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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1-02 1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엇, 마지막 문단이...? 시재가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서 말이죠. 그냥 조크인건가요? ㅋ
암튼 폴님도 새해 건강하시고 좋은 책 많이 읽으시기 바랍니다.^^

Falstaff 2025-01-02 16:34   좋아요 1 | URL
앗, 마지막 문장이요? ㅎㅎㅎ 작년 11월 말에 2025년 처음 올릴 독후감을 썼다는 얘깁지요. ㅎㅎㅎ
별 님도 늘 건강하시고 걍 연초에 로또 한 장 퍽, 맞으시기 바랍니다!

yamoo 2025-01-02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또 간만에 별5 출현이네요..ㅎㅎ 그것두 SF라뉘!!

폴스타프님!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올해는 작년보다 건강하고 즐거운 한 해 되시길 빕니다~~(분명히 그렇게 재밌게 사실 거 같다는..^^;;)

Falstaff 2025-01-02 20:33   좋아요 0 | URL
재미있는 책입니다. 게다가 생각할 거리도 있어요!
<솔라리스>도 아주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것과 맞먹습니다. 순 재미로만 보면 이 책이 윗길일 수도 있습니다. ㅎㅎㅎ 즐기시면 좋겠네요!
올해 늘 좋은 일만 생기기 바랍니다. ^^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새소설 15
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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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예산에서 출생한 75년 토끼띠. 이 책 나온 2024년에 만 49세. 글을 쓰던 23년엔 세는 나이 마흔아홉. 딸 둘을 둔 엄마라는 것만 밝혔으니, 독자도 더 알려 하지 말자. 명지전문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2006년에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해 등단했다. 책방에서 김이설 검색하면 공저 포함 마흔 권이 올라온다. 나름대로 꾸준히 쓰고 있다. 나이 마흔아홉. 살만큼 산 거 같은 나이. 바로 직전까지 인생의 전성기를 구가했고 이젠 말과 행동을 하고 싶은 대로 하던 버릇을 조금씩 내려 놓아야 할 때. 김이설은 이 시절의 여성 셋을 호출했다. 미경, 정은 그리고 난주. 소위 경장편. 경장편이 뭔가 하면, 장편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좀 남우세스럽고 그렇다고 중편이라 하기엔 좀 아쉬운 분량의 소설을 말한다. 출판사 자음과모음이 회사의 자랑인 고급 기술력으로 널럴하게 편집해 딱 2백쪽을 넘겼다. 김이설은 2023년 여름에 출판사로부터 경장편 한 편을 의뢰받고 쓰기 시작했는데 이게 말이 쉽지 동력을 얻기가 만만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개인 인스타그램을 통해 연재를 할 터이니 미리 읽고 숙제 검사를 해줄 독자를 모집해 이 소설의 초안을 썼다고, 작가 후기에 밝혔다. 재미있는 사람이군. 그렇게 해서 매주 원고지 서른 장을 썼단다.


  김이설은 딱 자기 나이 또래 대학동창을 호출했다. 그래서 당연히 자기의 시절이다. 소위 X세대, 수능 0세대. 수능을 여름에 한 번 보고, 겨울에 또 봐서 둘 중에 좋은 점수를 대입에 적용한 아주 짧은 또는 유일한 학년. 이렇게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94학번이다.

  아주 오래 전, 박완서는 “여자 나이 마흔아홉”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당시엔 20대 초반에 결혼을 하고, 출산과 육아를 시작해서, 마흔아홉 정도 되면 맏딸이 대학을 졸업해 딱 결혼적령기에 다달았다. 엄마는 딸아이 남자친구와 그 가족의 재산, 학력, 가정, 성격, 외모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둘 사이에 접착제를 붙여주든지 매몰차게 정리를 해주었고, 필요에 따라 아이의 손을 잡고 병원에 일차 왕림해 처녀막재생수술도 받게 해야 했다. 어디서 나오더라? <휘청거리는 오후>던가?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에 출연하는 세 명의 주인공 가운데 난주가 딱 이렇다. 대신 아들만 둘이고, 아이들에게 올 인해 (아이들 말고)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입학시켰더니 이젠 자기 아내한테만 입이 무거운 남편을 그대로 닮아서 하루 종일, 일주일 내내, 한 달에 용돈주는 날 딱 하루 빼고, 엄마한테 말 한 마디 안 한다. 박완서 시절처럼 아들 일에 말이라도 보태려면 엄마 조언이나 도움 필요 없으니 제발 그만 놔두라고 타박이나 한다. 남편은 직장과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한테만 온갖 정성을 쏟아 한 달에 두어번 넘어 제주도니 동남아니 골프 치러 다니는데 정말 골프를 치러 가는 건지, 친구들하고만 가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젊은 시절엔 질투도 나고 신경질도 나고 바가지도 박박 긁어보았지만, 이제는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될까봐 알고 싶지 않다. 그래서 물어보지도 않는다.

  이렇게 제법 사는, 그래봤자 인 서울도 아니고 안양이긴 하지만 겉으로만 유한마담으로 지내면서 난주의 우울증은 째각째각 시간이 갈수록 깊어져만 갔다. 결국 병원에 다녀야 했고, 약을 복용해야 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아무 연락도 없이 일주일간 혼자 강릉으로 떠나 숱한 남자와 술을 마셨고, 그 가운데 몇 명과는 섹스를 했어도 마음이 허전한 건 마찬가지였다. 일주일 내내 남편한테, 아들한테 카톡 한 자, 전화 한 통 오지 않았다가, 일주일이 되자 남편이 문자를 보내 “둘째 제대할 때까지만 참아주면 좋겠다.”라고 한다. 왜? 제대하면 어떻게 하게? 두 달 있으면 제대하니 그때 헤어지자는 말인가? 군대 있을 때 이혼이라도 하면 아이가 탈영할까봐? 정작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는 난주. 난주는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가 지금 겪고 있는 것이 갱년기 증상이란 것을 알게 된다. 물론 딱 이렇게 한 마디로 하면 재미없다. 그래서 우리는 굳이 소설책을 읽는 거 아닌가.


  정은은 애초부터 여유로웠던 적이 없었다. 아빠가 희망퇴직해서 받은 위로금과 퇴직금, 은행 융자를 만땅으로 받아 시작한 사업이 쫄딱 망해서 세 남매 가운데 막내는 대학 구경도 하지 못하고 지금은 어느 동네 사는지 알고는 있지만 연락해본 지도 오래다. 신입생 시절에 연애를 했다가 그애의 어머니와 누나가 삼풍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던 중에 백화점이 무너져 죽었다. 심각한 슬픔에 빠진 남자친구. 그 무거운 상실과 슬픔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남자친구의 고개를 받아줄 어깨가 너무 무거울까봐 헤어졌다. 그게 남은 시절 내내 크게 후회가 되고 오래도록 창피한 일인 줄은 몰랐다. 넉넉하지 못한 가정의 남자를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 적은 연봉을 주는 작은 회사에 다니던 남편은 친정아버지처럼 조기 퇴직을 하고 퇴직금과 은행융자를 받아 키드 카페를 열었다. 사업을 시작하고 한 달도 되지 않아 코로나가 닥쳤고, 은행에 이자도 내지 못해 키드 카페를 접었다. 이후 하는 일마다 족족 말아먹기 시작해 이제 거의 모든 거래 은행에 한도에 꽉 차도록 대출을 받은 것도 모자라, 이자와 원금을 갚기 위해 제2 금융권에서 남편이름이 아닌 정은의 이름으로 억대의 대출을 받았는데, 이자 기한이 지나면 정은의 휴대폰으로 독촉전화 또는 독촉메시지가 온다. 이걸 남편한테 전하면, 같은 나이의 남편은 즉각 “미안해요. 내일 중에 처리할 수 있어요. 다음엔 이런 일 생기지 않게 할께요.” 꼭 존대를 붙여 답글을 쓴다.

  친구들한테 가오가 있어서 들어간 계약직 도서관 사서 자리에서는 벌써 잘렸고 지금은 낮엔 학교 급식사로, 밤엔 음식점 주방보조로 일한다는 걸 말하지 못한다. 손과 손가락이 두툼해지고 결 따라 가늘게 갈라진 건 벌써 오래. 원래 없는 사람이 군살은 많은 법이라 허리와 아랫배, 윗배, 가슴, 목, 어디 한 군데 퉁퉁하지 않은 곳이 없다. 그건 좋은데, 민망하게 오줌을 참지 못한다. 극심한 요실금으로 이제 더 이상 병원에 가지 않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렇다고 얼른 가게 되지 않는 진퇴양난. 친구들과 강릉에 오면서도 바지와 팬티, 그리고 잠옷바지는 서너 벌씩 가져온 건 다 이유가 있어서이다. 첫날 밤 잠을 자다가 그만 침대 위에서 요실금이 시작하는 걸 얼른 알아채고 급하게 화장실에 들어가 씻은 다음, 아랫도리를 벗은 채 엉금엉금 기어 나오는 모습은, 다행스럽게 술에 만땅 취한 친구들이 보지 못했다고 오해한다.


  미경에게 강릉은 저 옛시절의 첫사랑 성희 언니의 고향이다. 94년 겨울에 성희언니 집에서 보낸 시간들. 성희 언니. 한 시절 사랑했지만 결국 다시 남편한테 가버린 사람. 그 시절까지 진지하게 의식화 학습에 몰두하던 언니와는 우리나라에서 월드컵이 열린 해에 이별하고, 불과 몇 년 전에 죽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삼십대 초반이었을 테고, 심근경색으로 죽을 때는 오십대 초반이었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나이든 성희 언니라니.

  미경은 도서관 사서 관련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다니다가, 취직을 하자마자 언니가 엄마를 맡겨 버렸고, 혼자서는 도무지 아픈 엄마를 돌보며 직장생활을 할 수 없어서, 이모가 사는 보은군 도서관에 지원해 그리고 이사 가서 산다. 바쁘고 급할 때마다 잔정 없고 깊은 정도 없는 이모에게 잠깐 엄마를 부탁할 수 있으니까. 엄마가 어디 특정한 곳이 불편하거나 이상증세가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아프다. 아프다고 주장한다. 현대과학이 밝힐 수 없는 고통.

  내가 읽기에 미경은 깔끔하다. 입도 무겁다. 남의 일에 참견하려 하지 않고, 그러기 위해 어떤 사정인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은 다 알고 있다. 알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고 표내지 않을 뿐.


  이 세 명의 중년 여성이 강릉으로 길을 떠났다. 스물네 살 시절에 함께 강릉에 간 적이 있어서 이번이 25년 만에, 그저 단톡방에서 습관적으로 시작해본, 우리 그냥 떠나볼까? 난주의 제의에 설마 했던 것이 우연히 뜻이 맞은 거였다. 25년 만에. 25년 전에 강릉에 갔을 때는 난주가 결혼하기 석 달 전이어서 소위 처녀여행, 처녀파티 비슷한 기분을 수도 있었겠지. 그래서 난주가 지나가는 세 명의 남자들한테 3대 3으로 놀자고 제의했고, 여섯 명의 청춘들이 정신이 빠질 정도로 술을 마셨으며, 셋은 평택인가 천안에서 놀러온 남자들과 각자 하룻밤을 보냈는데, 석 달 후에 결혼을 해야 하는 난주가 덜컥, 임신을 해버렸다. 강릉에서 돌아와 한 달이 지나 임신중단 수술을 받은 난주는 모텔방을 대실해 미경을 불렀고, 미경은 전복죽을 싸와 난주에게 먹인 일이 있었다.

  25년이 지난 겨울. 이제 이들에게 젊음이란 지나간 흔적에 불과하다. 스물네 살 때는 마흔아홉이 그렇게 멀리 보이고 생각도 하지 못할 나이였는데, 이제 앞으로 25년 후에 다시 강릉에 온다면 그땐 일흔네 살. 그렇게 멀지 않아 보인다. 앞으로 몇 년이 지나면, 어쩌면 당장 다음 달부터 생리가 멈춘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시절을 맞은 세 명은 그렇게 지난 세월을 돌아보고, 지금 세월을 결국 이야기하며, 에라, 술이나 마시자, 옛 방식으로 시간을 때운다. 그것 말고 함께 시간 때우는 법을 25년 오랜 세월 내내 별로 배우지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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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31 0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2-31 1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리틀 아이즈
사만타 슈웨블린 지음, 엄지영 옮김 / 창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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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만타 슈웨블린. 이름 슈웨블린Schweblin으로 짐작하면 20세기에 독일에서 아르헨티나로 이민 와 정착한 집안인 거 같다. 1978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졸업 후에 소설 쓰기에 전념한다. 2002년에 <소란의 핵심>을 발표해 데뷔했으며 이후 부커상 외국어부문 최종심에 두 번 오르는 등 맹활약을 하면서 국내외의 다양한 문학상을 섭렵해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은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문학 객원교수로 지내고 있다. <리틀 아이즈>가 처음 읽는 슈웨블린인데, 2018년 작품으로 번역 기간을 거쳐 2020년에 두 번째 부커 인터내셔널상의 최종 리스트에 올랐던 작품이다.


  우리나라에는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랐지만 미역국 먹은 후에 번역을 해 2021년 창비에서 나왔다. 창비는 책의 띠지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올 겨울에 어울리는 단 한 권의 SF∙공포소설

  스산하고 고요하게 숨통을 조여오는 서스펜스”


Samanta Schweblin


  출간 전에 창비_인스타를 통해 가제본 본을 독자에게 뿌렸으나, 무료로 작품을 읽은 독자들이 놀랍게도 인터넷 책방 독자리뷰에 만점을 주지 않는 무례를 저질렀다. 나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서 띠지에 어떻게 쓰인 지 모르는 상태에서 읽었건만, 이걸 SF∙공포소설이라고 주장하면 거 참, 게다가 숨통을 조여오는 서스펜스 우짜고 한 건 그저 웃자고 했던 일 같다. 우리 모두 다 함께 웃자고.


  처음엔 나름대로 긴박하고 경박하게 흘렀다. 장소는 미국 인디애나주의 사우스벤드라고 하는 작은 마을. 동네에 요주의 인물로 점 찍힌 맹랑한 고등학생 카티아와 에이미의 그룹에 새롭게 로빈이 들어왔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셋은 피의 맹세를 하고 평생 함께 할 것임을 기념하기 위한 의식으로 서로 자기 가슴을 보여주기로 했다. 그리하여 부모가 직장에 간 틈을 이용해 로빈의 집에 가서, 넓은 거실에 모여 앉았고, 로빈이 조금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쫄기는 싫어서, 셋 모두 훌러덩, 브래지어를 풀렀더니, 덜러덩, 가슴이 아래로 툭 떨어졌는데, 이걸 향해 서 있던 동물 인형의 눈이 깜빡, 하는 순간 카메라에 찍혀버렸다. 카티아가 인형한테 누구 가슴이 제일 예쁘니? 하고 물어보고, 로빈이 위저 보드의 알파벳을 가져오니까 인형이 단어를 조립해 만들어 보이기 시작한다.

  “금발”

  카티아가 당연한 결과라는 듯 자랑스럽게 웃었으나, 저런 저런. 인형은 계속 글자를 만들어 나간다.

  “개 같은 년들.”

  셋은 학교에서 생물 수업을 함께 듣는 좀 모자란 욍궁둥이 수전을 입에 올리며 걔를 왕따시키는 건 물론이고 어떻게 돈까지 갈취할 것인지 따따부따 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자기들이 몹쓸 짓을 하고 있어서 욕을 먹을 만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렇다고 진짜로 욕을 듣는 거하고는 다른 일이니까. 인형이 글자를 조립하는데:

  “너희는 내게도 돈을 줄 것이다. 녹화된 가슴 한 쪽에 400 총 2,400달러”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리고 로빈도 억지로 웃는 시늉을 했다. 에이미가 누구한테 받을 거냐고 물으니까, 인형은 또다시 단어를 쓰기를,

  “돈을 주지 않으면 가슴 영상을 수전에게 이메일로”

  이제 심각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인형은 계속 쓴다.

  “나는 똥싸는 로빈 엄마와 자위하는 로빈 여동생 영상도 가지고 있다. 각 6장씩.”

  여태 인형 또는 애완동물 겸해서 스스로 움직이는 동물 인형을 집안에 갖춰 놓았더니, 세상에나, 이게 특정 앱으로 연결된 사람의 명령에 의하여 움직이는 장치였던 거다.


  ‘켄투키’라고 부르는 이 인형의 외형은 두더지, 토끼, 까마귀, 판다, 용, 부엉이 등이고, 몇 번째 버전인지는 모르겠으나 등장인물 가운데 한 명인 아르헨티나 멘도사 여자 알리나는 멕시코 비스타르모사에서 지낼 당시 신품을 279달러 주고 구입했다. 알리나 같은 사람을 ‘켄투키의 주인’이라고 하자. 반면에 스페인어를 쓰는 라틴아메리카의 아줌마 에밀리아는 고액의 연봉을 받고 홍콩으로 일하러 간 아들이 상당한 돈을 주고 얻은 IP를 통해 독일 중부의 에르푸르트라는 작은 도시에 사는 코걸이를 한 아가씨 에바의 켄투키와 연결을 했다. 스스로 인형이자 관찰자 켄투키가 ‘되는’ 대가였다. 즉, 알리나는 켄투키가 있는 공간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게 하기 위하여 279달러를 주고 인형을 샀으며, 엄마 혼자 두고 홍콩에 돈 벌러 간 에밀리아의 아들은 엄마가 심심하지 않게 다른 사람이 사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도록 돈을 지불한 것. 책의 제목 ‘리틀 아이즈’는 인형의 얼굴에 박힌 조그만 두 눈알을 의미한다.

  별의 별것을 다 보겠지?

  제일 앞에 나오는 불량소녀 예비자 로빈의 집에 있던 켄투키는 보아하니 초기 모델 같은데, 그게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는지 충분히 알지 못한 켄투키 주인이 켄투키가 된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은 채 엄마는 화장실의 문을 열어 놓은 채 용변을 보았으며, 여동생은 켄투키가 옆에 있거나 없거나 그냥 자위를 해버렸고, 불량소녀 셋도 켄투키 앞에서 훌러덩 브래지어를 벗어 던져버렸다. 켄투키가 된 사람은 원격지에서, 지구 반대편일 수도 있는데, 어느 곳인지도 모르는 곳에서 그걸 다 보면서 녹화를 떠 놓았고 그걸 빌미로 이제 로빈에게 2,400달러, 약 3백만원을 갈취하려 하는 거다.

  뒤에 보면 녹화를 뜨기 위한 소프트웨어는 앱이 지원하지 않는다. 개발자가 이런 경우도 예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요가 방법을 창출하는 법. 사람들은 곧바로 태블릿의 장면이나 영상을 휴대폰으로 다시 찍거나 녹화하기 시작했다.

  물론 켄투키가 된 사람들이 다 그런 건 아니다. 에밀리아 같은 경우엔 자기 주인 에바가 잘 생기기는 했지만 좀 지저분하고 면도도 며칠 안 한 거 같고, 털이 숭숭한 거구의 애인 클라우스와 짙은 밤을 보낸 아침 둘 다 홀랑 벗은 채 거실을 돌아다녀도 클라우스의 큼지막한 음경도 모른 척하려 애쓴다. 반면에 에바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클라우스가 에바의 지갑을 뒤져 지폐 몇 장을 꺼내는 걸 본 순간에 돌변, 어떻게 하면 에바에게 클라우스가 돈을 훔쳐간 걸 알려줄 수 있는지 갑작스런 흥분에 휩싸인다. 자기가 보기엔 명백한 절도행위니까. 독일 에르푸르트 경찰서 전화번호도 찾아보고, 에바의 집을 둘러보다가 알게 된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볼까 고민도 하고.

  이런 경우는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 사는 그리고리도 마찬가지여서, 이 청년은 전문적으로 IP가 날아간 켄투키의 IP를 새로운 ‘켄투키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에게 판매를 하고 있는 일종의 중개상인데, 일을 하다가 브라질 북부의 외딴 마을에서 납치, 유괴된 아이를 발견하고는 구출해주기 위해 아이의 엄마, 관계 경찰서에 신고를 하는 등 갖은 애를 쓴다. 그래서 아이가 탈출에는 성공하지만 혹시 켄투키의 이런 기능을 이용해 아이의 부모가 자기도 모르는 돈벌이를 한 건 아닌지 조금은 의심하면서, 아직은 법 테두리를 벗어난 건 아니지만 일종의 범죄일 수도 있는 IP 중개 일을 그만두기로 결심하는 일도 있다. 세상에는 언제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는 거거든.


  다른 거 다 놔두고, 정말로 자기 집 안에 자신과 가족 모두를 관찰할 수 있는 타인의 눈을 두고 싶어하는 사람이 전 세계에 그렇게 많을까? 작 중간 이후에는 켄투키가 전세계적으로 대유행을 하는 걸로 설정이 되어 있는데, 나는 좀 회의적이다. 아직 화상전화가 일상수준에 오르지 않은 일.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을 것이다. 변기에 앉아 유튜브 보며 매화타령을 하고 있다가 마침 힘차게 방귀가 나오기 바로 직전에 전화벨이 울렸고, 습관적으로 통화 버튼을 누른 순간, 같이 도봉산에나 가자고 좋은 마음으로 바깥 사돈이 전화를 준 것이었는데 아뿔싸 하필이면 이때 아까 나오려던 힘찬 방귀가 진동을 해버렸으면 그걸 어째? 아니면 덥디 더운 여름날 윗도리를 벗고 소파에 앉았는데 전화가 오면, 전화 한 통 받자고 허겁지겁 와이셔츠 입고 넥타이 메고 슈트 찾아 입어야 하는 거야? 최종 면접 보고 결과 기다리는 회사에서 온 전화일 수도 있잖아. 그런데 집안에, 켄투키가 된 인간이 접속을 했으면 어떤 시간이든지 자기 사생활을 거의 완전히 노출해야 하는데 말이지. 이게 가능하다는 전제부터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랐건 말았건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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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2-30 0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화타령에 빵 터졌습니다. 그 어찌 나랏님 거시기를...ㅋㅋㅋ
근데 가제본 받은 사람들 조차 좋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니 거 참...

Falstaff 2024-12-30 11:32   좋아요 1 | URL
예전에 어른들이 많이 얘기하지 않았나요, 매화타령? ㅋㅋㅋ
창비는 안 그럴 거 같았는데, 책 팔아먹기 전에 가제본 판을 먼저 뿌리더라고요. 영숙이 <아빠한테 갔었니?> 시절부터 그러기 시작한 거 같은데, 좀 안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뭡니까, 모양 빠지게. 하긴 창비도 옛날 창비지 지금이야 뭐 창피잖아요, 창피. <창작과 개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