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섬
쥴퓌 리바넬리 지음, 오진혁 옮김 / 호밀밭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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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세레나데>를 쓴 쥴퓌 리바넬리? 헛참, 그거…

  책을 열면 O.Z. Livaneli가 쓴 “한국 독자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나온다. 한국에서 출판한다니 기쁘다는 얘기다.  문제는 다음 장에 실린 소설가 장강명의 “추천사”.


  “낙원과도 같았던 작은 공동체에 탐욕스러운 외부인이 들어오고, 마을은 점점 망가져 마침내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된다…. 2008년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독재 정부를 비판하기 위해 쓴 작품이라고 하지만 2022년 한국 독자들에게도 울림이 크다.”


  출판사 호밀밭의 편집부장과 장강명은 몰랐을 걸? 이 추천사로 인하여 <마지막 섬>은 첫 두 페이지, 딱 두 페이지만 읽고도 앞으로 무슨 이야기를 전개할 지 눈에 훤히 보이고 말게 될 것임을. 다른 독자는 모르겠고, 나는 정말로 소설 초반부터 작가가 작품을 어떤 방식으로 전개하든 읽는 행위 자체가 너무도 지루해 어쩔 줄 몰랐다. 지루한 책을 읽을 때는 유독 허리와 무릎이 조근조근 쑤셔, 읽다가 벌떡 일어나 도서관 열람실 창밖을 내다보는 일도 잦았다. 이게 뭐야, 마치 1980년대 의식화 교재, 의식화 교재이기는 한데 그것도 성인용도 아니고 고등학생용도 아닌, 초등생이나 중학생을 위한 생 기초 교재 수준에 그친다. 그런 거 있잖아. “아름답고 평화로운 다람쥐 나라에 너구리가 신발을 팔러 왔어요. 너구리는 늘 맨발로 사는 다람쥐한테 무료로 신발을 나누어 주었어요. 다람쥐들은 몇 년 동안 신발을 신고 다녀서 발의 굳은 살이 다 풀려 이제는 맨발로 다니지 못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되자마자 너구리는 갑자기 신발을 돈 주고 팔기 시작했어요. 그동안 신발 값을 받지 않아 많이 밑졌다고 하면서 아주 비싼 값으로 신발을 팔았답니다. 다람쥐들은 신발을 사기 위해 다 가난해졌고, 돈이 떨어지자 할 수 없이 자기 땅을 팔기 시작했어요. 다람쥐들의 땅도 다 팔 수밖에 없게 되자 너구리는 다람쥐들을 다람쥐 마을에서 쫓아내 버렸답니다.” 대충 어떤 식인지 기억날 거다.

  아, 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끝까지 다 읽었다. 그래도 리바넬리인데 혹시 알아? 마지막에 신묘한 뒤집기 결말이 놓여 있을 지? 결국 혹시 했다가 역시로 끝났지만.


  작품은 이런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절대 비밀’로 지켜왔던 그 지상 낙원에서 평온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외딴 섬. 사계절 내내 온화하고 밤이면 자스민 향기에 뒤덮이는 숲 속에 자리한 낡고 오래된 집과 함께 세월에 맡겨진, 자급자족이 가능한 독립된 세상. 쥴퓌 리바넬리의 이 섬에 관한 묘사를 조금 더 읽어보자


  “섬의 평화로운 자연환경은 마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생명의 비밀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아침이면 해수면에 드리우는 우윳빛 안개와 저녁 무렵에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미풍을, 그리고 갈매기 울음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바람의 속삭임과 라벤더 향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매일 동이 떠오를 무렵 눈을 비비고 일어나면, 해무에 휘감겨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쌍둥이 섬이 눈 앞에 펼쳐지는 건? 바닷물 속으로 잠수했다 나오며 먹이를 찾는 갈매기들은? 집마다 피어있는 보라색 부겐빌레아꽃은? 그리고, 한밤의 린덴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말 한 마디로 하자면 율도국이요, 결국 목이 잘려 죽은 토마스 모어 경의 말에 의하면 유토피아 자체인 섬, 마지막 남은 지상 낙원으로, 마지막 섬이다. 오래전에 대단한 자산가가 섬 전체를 매입해 자산가 수준으로 봐서 매우 소박한 별장을 짓고 살다가, 혼자 살기 적적했는지 지인 몇을 불러 자기 집 근처에 크지 않은 별장을 짓고 함께 살게 배려했다. 이렇게 해서 딱 40개의 별장, 절대로 40호를 넘지 않는 작은 촌을 이루어 그들끼리 아침부터 저녁까지 반바지 차림에 매우 간소한 웃옷만 입은 채 수영을 하든지, 그늘에 매인 해먹에 누워 잠을 자든지, 낚시를 하든지, 하여간 무슨 수를 써서 매일의 권태만 벗어나면 그걸로 만족하다가, 드디어 해가 넘어가면 뜻 맞는 사람들이 서로 모여 얇고 긴 화이트와인 잔을 기울이며 살던, 율도국이요 유토피아였던 섬. 며칠에 한 번 육지에서 연락선이 도착하지만 접안 시설이 큰 배를 맞이할 수 없어 작은 보트를 타고 짐을 가져와 판매를 하는 구멍가게가 하나 더 있을 뿐. 그런데 잘 보시라. 처음부터 섬에는 문제가 있었으니, 건물, 즉 39개의 별장은 자산가(의 아들) 말고 초대에 응한 이들이 지어 그들 소유이지만, 섬, 즉 토지는 전부 죽은 자산가에게 상속을 받은 아들, 작품 속 40호 가운데 1호 별장 주인 이름으로 등기가 되어 있다.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이건 언제나 작지 않은 문제가 될 것임을 독자는 애초부터 짐작하고 있을 수밖에.

  그리고 나의 끈질긴 고질인 계급의식. 이 율도국 거주민 40가구는 도대체 무얼 해서 먹고 살지? 해가 뉘엿뉘엿 지면 아무렇게 막 우려낸 포도주가 아니라 육지에서 수송해온 질 좋고 비싼 화이트와인을 홀짝일 수 있으려면 그만한 수입이 있어야 할 터. 나중에 알려지지만 섬에서 유일한 소득원은 주민들 스스로 저 높은 나무에 기어 올라가 따서 껍질을 벗겨 내다 팔아 돈과 바꾸는 잣 수확밖에 없다. 그것도 사실 모두 1호 소유이기는 하지만 마음씨 좋고, 마음이 좋은 만큼 돈도 많은 1호가 눈 감아 주어 여태 팔아먹은 것인데, 잣이 아무리 겁나 많이 달린다고 해도 오직 그거 하나 따서 팔아 날마다 화이트와인 음용이 가능하다는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고? 그리하여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기를, 원래 출신이 대단한 자산가 1호가 초청한 1호의 지인이었으니 1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부르주아 또는 부르주아에 가까운 인간들이었고, 노동을 하지 않아도 자신이 육지에 가지고 있는 재산이 자가증식하여 꼬박꼬박 통장에 새로운 돈이 입금되는 인간일 것이라는 짐작. 이거 틀렸어? 율도국, 또는 유토피아에도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라니까. 이런 인간들이 목숨을 걸고 저 높은 나무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가 잣을 따온다고? 왜? 차라리 염병을 하지.


  그래도 치사하게 이렇게 미리 딴지 걸지 말고 읽기 시작하자. 이렇게 우아하고 아름답고 평화로운 섬마을에 찾아온 인간은, 이미자 노래가사처럼 총각 선생님이 아니라 장기집권한 후 어쩔 수 없이 사임한 대통령이었다. 소설 속 계속 ‘전 대통령’이라 불릴 전직 군인 장군 출신의 이 무지막지한 깡패는 피노체트나 전두환 같은 기질을 너무나도 확실하게 보유하고 있었다. 이이가 섬에 들어오게 된 것은, 24호 별장의 변호사가 숲속에서 조깅 도중 심장발작으로 죽는 바람에 공실이 된 24호 건물이 매물로 나온 것을 전 대통령의 수하가 보고하여, “전 대통령의 조용한 은퇴생활을 하기 위해” 육지에서 멀고, 거리가 멀면 관심도 멀어지는 법, 오래 계속된 철권통치 후에 국민에게 외면당해 혁명의회가 겉으로는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자발적으로, 속으로는 거의 강제로 사임시켜, 될 수 있으면 국민의 입방정에 오르지 않기 위하여 선택한 곳이었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의 아버지는 36호 입주자였다. 아버지가 죽은 후에 잠시 빈 상태로 있었는데 ‘나’가 이혼 후에 식당에서 서빙 일을 하던 유부녀 라라와 야반도주를 해 떠나왔을 때의 ‘나’는 수많은 상처와 실망 그리고 큰 아픔을 경험한 후였다고 주장한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자, 주인공이니까. ‘나’와 라라는 7호에 사는 소설가와 친하게 지냈는데, 7호가 전 대통령이 섬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경악과 함께 크게 걱정을 하며,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 안에 섬 전체가 황폐화될 것이며, 불행이 온 섬을 뒤덮을 것이라고 신음한다.

  그리고? 당연히 7호 소설가의 예언대로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전 대통령의 불 같은 성격과 폭압적인 의사결정과 결정의 집행. 어디까지나 주민투표를 통한 민주적인 절차를 거친 민주적 행위인 것은 틀림없지만, 전 대통령의 기만과 현혹과 유혹적인 선동으로 인해 섬은 급격하게 지옥으로 변해간다. 리바넬리가 그린 지옥도.

  리바넬리 씨, 미안하다. 나는 지옥처럼 지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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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는 알고 있다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지음, 엄지영 옮김 / 비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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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에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출생한 클라우디아 피녜이로는 시나리오 작가이자 소설가로 아르헨티나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단다. 그러나 이이의 필모그래피가 2013년 이후로 기록되지 않는 것을 보면 이후 소설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다. 인기있는 시나리오 작가라면 박스오피스를 위하여 범죄와 스릴, 서스펜스의 유혹을 완전히 떨치기는 힘들 지 않을까 싶다. 이이의 소설 역시 주로 범죄와 미스터리물이 많다고 하는데 오늘 독후감을 쓰는 <엘레나는 알고 있다>도 엘레나의 딸 리타의 사망 사건을 다루고 있다.


  소설은 아직 중증으로 가지는 않았지만 심각한 수준의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70대로 짐작할 수 있는) 노인 엘레나가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행 아침 열 시 기차를 타기 전까지 1부, 기차를 타고 수도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20년 전에 한 번 만나 은혜를 베푼 이사벨의 집에 도착하는 것까지가 2부, 이사벨의 집에서 두 여인이 대화를 나누며 작품 전체의 그림이 완결되는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독후감 쓰기가 난처하다. 앞 문단에서 밝혔듯이, 이 작품 역시 한 명의 죽음, 딸 리타가 성당의 종탑 가로대에 종을 칠 때 쓰는 밧줄을 걸고 목을 맨 상태에서 자기가 딛고 선 의자를 발로 차 자살을 해버린 이후의 일을 그렸다. 리타의 엄마이기도 한 엘레나는 자기 딸이 자살할 이유가 없으며, 무엇보다 천둥, 번개를 두려워해 비 오는 날엔 성당 근처에는 얼씬거리지도 않는 것이 큰 버릇이어서 그날 굳이 성당을 찾아 목을 맬 이유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엘레나의 상태를 설명해야겠다. 엘레나는 파킨슨병 환자다. 파킨슨병이기는 한데 손과 발을 경련하지 않는다. 처음엔 이것이 좋은 징조인 줄 알았건만, 경련을 하지 않는 파킨슨병은 병의 진행속도가 경련하는 파킨슨병의 케이스보다 훨씬 더 빠르다고 한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더 붙어 보통의 파킨슨병 환자의 증상에 술에 취한 사람처럼 걷는 실조증, 혈압이 불안정한 자율신경장애, 기억장애, 환시, 심각한 요실금 등을 동반하는 파킨슨플러스에 걸려버린 상태다. 이미 약을 먹지 않으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수도, 걸을 수도, 화장실에서 소변을 본 후에 내의를 치킬 수도 없는 단계까지 왔다. 하지만 엘레나는 아무리 불편해도 여전히 살고 싶으며, 그것도 사람답게 대우를 받으며 살고 싶어서 요양병원에 입원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죽는 날까지 자기 집에서 근 50년간 살았던 것처럼, 결혼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딸 리타와 함께, 말이 함께지 내용상 리타의 보살핌을 받으며, 간혹 딸한테 구박도 받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런데 리타가 다른 곳도 아니고 성당에서, 비가 우르릉쾅쾅 내리는 날에 성당까지 가서 목을 매달았다니 이걸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어릴 때부터 리타는 천둥과 번개를 두려워했다. 얼마나 무서워했는지는 굳이 묘사하지 않겠다. 그런데 이미 죽은 남편, 리타가 다니던 가톨릭학교에서 교사는 아니고 직원으로 일하던 리타의 아버지가, 성당 종탑 꼭대기에는 피뢰침이 있어서 동네의 거의 모든 번개가 종탑에 떨어지고, 빗물은 굉장히 우량한 전도체라 강한 전기가 성당 마당의 젖은 땅을 타고 흘러 생명체를 죽일 수 있다고 말한 이후로, 리타는 비가 오는 날엔 결코 성당 근처에 얼씬거리지 않았던 거였다. 그런데도 비가 억수로 오는 날을 골라 성당 종탑에서 목을 맸다니 엘레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던 터였다. 하지만 걸음조차 제대로 걷지 못하고, 허리도 기역(ㄱ)자처럼 휜 데다가 목의 근육마저 경직되어 머리도 들지 못해 땅만 바라보고 다녀 늘 침을 흘리는 늙은 환자의 말에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리타의 자살 사건을 수사한 형사도, 성당의 주임신부도, 리타가 다니던 가톨릭학교 교장도.

  시신 확인을 위해 시체 안치실에 가서 리타를 보니, 리타의 목 주변에 밧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고 살갗은 자주색으로 변한 데다 올이 풀어진 황마 밧줄에 긁혀 있었다.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불거져 있었으며 혀도 빼물고 얼굴도 퉁퉁 부어 오른데다가 몸에는 똥냄새가 심했다. 검시관 말에 의하면 운이 없었다고. 그나마 운이 따라주면 목뼈가 부러져 곧장 숨이 끊어지는데 리타는 목뼈가 버티는 바람에 질식으로 천천히(고통스럽게) 죽었을 거라 한다. 목을 매고 질식으로 죽는 사람들은 보통 발작을 일으키다가 똥을 누는 바람에 시신에서 냄새가 심하다면서. 리타의 주검을 보며 엘레나는 리타가 결코 자살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누군가 리타를 비가 오는 밤에 성당 종탑까지 유인해 목을 걸어 자살로 위장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엘레나가 그렇게 확실하게 믿고 있지만 심각한 파킨슨병 때문에 운신을 할 수 없어 20년 전에 리타와 엘레나에게 큰 신세를 진 이사벨을 찾아가 그이에게 빚을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기로 결심한 거였다.


  20년 전인 1981년, 그때는 엘레나도 파킨슨병 이전이라 신체 건강한 시절이었는데, 리타가 출근하는 길에 평소 경멸해 마지않는 산파의 집 근처에서 땅바닥에 앉아 구토를 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이사벨을 발견했다. 이사벨은 눈물을 뚝뚝 흘려가며 구토를 하고 또 구토를 하는 것이 한눈에 봐도 심한 입덧이었다. 시간에 맞춰 학업 시작 종을 쳐야 하는 리타는 그런 이사벨을 두고 직장인 가톨릭학교로 바삐 갈 수 없었다. 이사벨이 입구에 막 도착한 산파의 집에서는 아이를 낳기 위해서 보다는 아이를 지우기 위해 찾는 여자들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리타는 이사벨에게 다가가 몸을 닦아주고, 위로해주다가 어떻게 이사벨의 손에 든 메모를 보았는데, 산파의 이름 ‘올가’와 집 주소를 적은 것이었다. 단번에 임신중단을 위해 산파의 집에 온 것을 알아차린 리타는 이사벨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안 돼요. 절대 하지 말아요. 후회하게 될 테니까. 그건 대죄예요. 당신의 아이를 생각해봐요. 지금 당신의 몸 속에는 생명이 꿈틀대고 있어요. 어린 생명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으면 당신도 생각이 바뀔 거예요. 당신도 그 아이를 원하게 될 거라고요. 절대로 아이를 죽이지 말아요. 안 그러면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보내게 될 거예요. 수술을 한 이들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해요. 낙태 당한 아기들이 여자들 머릿속에서 계속 운다고요.

  리타는 이때 이사벨의 약지에 낀 반지를 발견한다. 결혼한 유부녀였던 거고, 남편과 상의하지 않고 낙태를 위해 수도에서 기차를 타고 이곳까지 온 거였다. 리타는 이사벨을 거의 반강제로 자기 집으로 데려왔고, 엘레나와 함께 이사벨을 다시 추슬러 부에노스아이레스 이사벨 부부의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런 적이 있었다. 이후 엘레나는 딸 훌리에타를 낳아 이제 벌써 열아홉 살이 되었다. 엘레나도 알고 있었다. 매년 크리스마스 때면 부부와 훌리에타, 이렇게 셋이 웃으며 찍은 사진을 동봉한 연하장을 보내왔으니. 결국 엘레나 모녀가 훌리에타라고 하는 큰 축복을 이 부부에게 베푼 것이니, 리타의 억울한 죽음을 엘레나 대신 해결해달라고 하는 것이 어찌 빚을 갚는 일이 아닐 수 있을까?

  그리하여 이날, 21세기 초입의 어느 날, 엘레나는 힘겹게 일어나 허리와 목을 펼 수 없기 때문에 극도로 어려운 일인 처방약 레보도파를 물과 함께 삼키고, 그나마 말을 잘 듣는 오른발을 바닥에서 몇 센티미터 들어 올려 허공에 내디디면서 왼발을 어느 정도 지났다 싶으면 거기에 발을 내려 놓는다. 그리고 이번엔 왼발을 바닥에서 몇 센티미터 들어 올리면서… 짧은 장편소설 한 권의 시간적 배경이 될 하루를 시작한다.

  이 작품이 우리나라 정보라의 <저주토끼>와 함께 2022년 부커-인터내셔널 상의 최종 심사까지 올라 <저주토끼>와 나란히 미역국을 먹었다. 며칠 전에 읽은 예니 에르펜베크도 <카이로스>도,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가 불가리아어로 쓴 <타임 셸터>도 부커-인터내셔널 상을 받았는데, 부커-인터내셔널 상은 영어로 번역한 외국소설, 즉 비영어소설의 영어 번역 책에 주는 상이다. 이런 경우에, 예를 들어 클라우디아 피녜이로의 <엘레나는 알고 있다>를 스페인-한국어 번역으로 읽어야 할까, 스페인-영국-한국어 번역으로 읽어야 할까? 큰 문제는 아니지만 궁금하다. 부커-인터내셔널 상을 받은 한강의 <채식주의자> 영역본은 원본과 달라도 너무 달라 차라리 다른 작품일 정도라고 한 소설가(든가 평론가)가 기고한 글을 읽은 이후에 좀 헛갈린다.

  아울러, 이 책은 상당한 수준의 페미니즘 소설이다. 범죄, 추리 소설이라기 보다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하는 것이 훨씬 어울릴 정도이다. 위에 쓴 전반적 스토리는 피녜이로 특유의 범죄-추리 기법 상 결론을 말할 수 없어 이 책이 왜 페미니즘 소설인지 말할 수 없었을 뿐이다. 다만 책 좀 읽는 독자는 1부와 2부를 읽는 동안 결말을 정확하게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결말 부근까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는 것이 좀 아쉽다. 그래도 대단한 반전이 도사리고 있는 결말일 터이니 이 책을 선택하는데 주저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스토리를 더 소개하는 건 좋지 않다. 즐기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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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2-24 1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헛, 채식주의자가 번역본이 다르다고요? 그럼 번역자가 거의 뼈대만 남겨놓고 창작을 했다는 소린가요? 그 번역본 저도 읽고 싶은데 외쿡어는 거의 까막눈이니 AI한테 맡기면 친절하게 번역해 줄까요? ㅋ 암튼 궁금하네요.^^

Falstaff 2025-02-24 16:31   좋아요 1 | URL
헛!
그거 말고요, 당시 신문에서 어느 작가/평론가가 자기 사진 걸고 말하기를 번역을 통한 채식이 (자기가 읽어보니까) 한강의 채식과 완전히 다른 작품이라는 취지로 이야기했다는 말입지요. 제가 뭐라고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른 언어로 번역한 문학작품에 관해 말할 주제가 되겠습니까. 당연히 본문에 쓴 쇤네의 말 출처를 대라, 라고 하시면 워낙 오래 전이라 가물가물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근데 원본/번역본에 관해서 항상 있었던 일 아닙니까? 뭐 다 그렇다는 겁지요. ㅋㅋㅋ
 
서배스천 나이트의 진짜 인생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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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태 나보코프는 많이 읽은 줄 알았다. 근데 세어보니까 얼마 안 된다. <롤리타>, <재능>, <사형장의로의 초대>, <절망>, <창백한 불꽃>, <프닌>. 이렇게 장편소설 여섯 작품밖에 읽어보지 않았다. 근데도 무척, 꽤 읽은 듯한 기분이다. 아마 읽으면서 골치 깨나 썩이지 않은 책이 한 권도 없어서, 읽다가 갑자기 오리무중의 벌판을 더듬으며 가는 느낌이 들어, 읽다가, 읽다가 다시 저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은 경험이 많아, 나부코프, 하면 아예 지긋지긋했던 기억이 먼저 떠올라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근데 문제는, 이렇게 골치를 썩이면서도 읽을 때마다 색다른 재미를 발견한, 내게는 특별한 작가다. 아, 오해하지 마시라. 나는 골치 썩이면 썩일수록 엑스터시를 느끼는 피학적 취향은 없다. 나보코프를 고생고생하며 읽고,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읽고나서, 거참 특별한 경험이었네, 이 비슷한 각성, 각성? 맞아, 각성 비슷한 희한한 경험을 갖게 한 듯하다. 참 별난 작가다.

  <서배스천 나이트의 진짜 인생>은, 이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영어로 쓴 첫번째 작품인데, 책을 읽는 내내 이 책 읽기 이전에 어디서 좀 본 듯한 기분이 자꾸 들어서, 나보코프를 읽을 때 거의 예외 없이 탁, 꽂히는 특유의 색이랄까, 맛이랄까, 아니면 멋이랄까, 하는 기분이 좀 덜 든다. 그건 작품의 구성이 화자 V가 자신의 죽은 이복형 서배스천 나이트의 전기를 쓰기 위하여 생전에 관계했던 사람들과 사랑했던 여자 등을 추적하는 구성이라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 좀 흔한 플롯, 맞지?


  서배스천 나이트와 그의 동생 V에 관해 이야기를 해보자.

  젊은 근위병이었던 서배스천과 V의 공동 아버지는 1890년대 초에 이탈리아 로마 근교의 여우사냥 행사에서 아름다운 버지니아 나이트 양을 만나 순식간에 사랑의 화염을 불살랐다. 버지니아는 재산 깨나 있는 영국 신사 에드워드 나이트 씨의 딸로 근위병 장교이긴 하지만 그것 말고는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는 사위를 마땅하지 않게 여겼다. 장서간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결혼을 했고, 1899년 12월 31일 러시아의 옛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맏아들 서배스천을 낳았다. 아버지는 1904년부터 05년까지 있었던 러일전쟁 이후에 군인으로 두각을 나타내 작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으나 이 때는 버지니아와 갈라선 이후였다. 첫 아내 버지니아 나이트는 좀 이상하고 경박한 여자여서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즉각 남편과 아들 서배스천을 버리고 떠나버렸다. 이때 네 살배기 첫 아이는 파리의 한 호텔에서 유모의 형편없는 보살핌을 받고 있었는 데도.

  그럼 계산을 해보자. 서배스천이 1899년 말일, 그러니까 지난 세기의 마지막 날 출생한 러시아인. 아버지는 1904년에 첫 아내에게 버림을 받은 다음해인 1905년 이후에 군인으로 성공을 해서, 1905년에 재혼을 하고 1906년에 둘째 아들 V가 태어난다. 맏아들과 이복동생 사이에 뭔가 있다. 한 세기가 바뀐 일이다. 서배스천은 생모 버지니아에게 침대차와 유럽횡단 급행열차에 대한 거의 낭만적일 정도의 기이한 열정을 물려 받았는데, 오랜 세월 유럽 국가가 되기를 갈망했던 반쯤 유럽국가이며 2등 유럽국가인 러시아인에서 간혹 볼 수 있는 탈 러시아를 실행한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조건은 역시 돈이다. 서배스천의 외할아버지 에드워드 나이트 씨에게 버지니아가 무남독녀의 외동딸이라 그가 죽을 때 모든 재산을 전부 외동딸 버지니아에게 상속했고, 버지니아마저 일찍 죽어 그게 또 몽땅 서배스천에게 넘어왔던 거다. 세상에 이런 일이.

  서배스천은, 마치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처럼, 부르주아 러시아 가정의 영적인 우아함과 기품에 유럽문화의 가장 훌륭한 유산이 결합되어 지적으로 세련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게다가 문학적으로 매우 특출해 16세에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모든 시는 나중에 거의 폐기했지만, 각 시의 밑에 서명은 잉크로 그린 조그만 검은 색 체스 말 나이트Knight를 그렸다. 1912년 말에 아버지가 결투하다가 가슴에 총상을 입어 이후 회복하다 감기에 걸리는 바람에 1913년에 숨을 거두었는데, 훌륭한 군인이자 유머러스하고 활기찬 모험가 기질의 아버지의 성향까지, 모든 좋은 것들을 물려받은 서배스천은 나이가 차자마자 계모와 이복동생 V를 떠나 어머니의 나라 잉글랜드로 가 케임브리지를 졸업하고 시인, 소설가로 조금씩 이름을 내기 시작한다.

  근데 그가 떠날 수밖에 없었던 건, 1912년에 팔친이라는 경박한 남자가 아버지를 만난 자리에서 첫번째 아내 버지니아에 대한 소문, 나쁜 이야기는 아니지만 하여간 헛소문인 것이 틀림없는 이야기를 쓸데없이 퍼뜨리고 다녔다. 이 소문이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자 아버지는 참지 못하고 팔친을 찾아가 발언을 취소하고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한다. 피가 솟는 근위병 장교는 시절이 1912년 말, 이미 러시아에서 결투라는 단어가 사라졌건만, 자기 대리인을 보내 권총으로 결투하기로 정했다가, 그렇게 추운 날 아침, 눈 쌓인 숲 초입에서 가슴에 총알이 박혀 얼굴을 눈 속에 파묻은 채 쓰러져 버렸다. 자기 엄마 때문에 아버지가 죽은 것이 틀림없으니 아무리 자기한테 잘 하고 친절하기 그지없는 계모라도 낯짝이 있지 다 커서 성인이 된 다음에도 같이 살 수 있겠느냐는 것이지. 그래, 잘 떠났다.


  그러나, 십대 시절까지 러시아에서 러시아 말을 쓰던 서배스천이 영국으로 가서, 영어를 쓰는 시인, 소설가를 하자니 이게 쉽겠느냐고. 아무리 엄마가 영국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서배스천의 영어 속에 든 러시아 억양과 자모음 발음의 흔적을 지울 수는 없었을 터. 이렇게 지우려 해도 여간해 지워지지 않는 러시아인의 흔적을 버리지 못한 채 서배스천은 작가 생활을 유지하고, 책을 몇 권 내고, 당연히 젊었으니 풋사랑도 하고, 연애도 하고, 진짜 사랑을 했다고 믿었으나 상대방은 심각한 사랑이 아니었다는, 이거 미리 이야기하면 안 좋은데 이왕 썼으니 지우지도 못하겠고, 하여간 그래서 좀 묘한 사랑도 하다가, 젊은 나이에 죽었다.

  서배스천의 생모 버지니아 나이트는 1904년에 남편과 아들을 내팽개치고 집을 나가면서 저절로 혼인관계를 청산하고, 1908년에 다시 나타나 자기 동서, 그러니까 서배스천의 계모이자 V의 생모에게 서배스천을 만나게 해달라고 무뚝뚝한 편지를 보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호텔 객실에서 아들과 서먹서먹한 상봉을 하고 돌아가더니, 다음해인 1909년 여름에 남프랑스 로크브륀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심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희귀 유전질환인 레만병으로 죽어, 시신을 런던으로 옮겨 장례식을 하고 매장했다. 그러니 세바스찬 역시 많지 않은 나이에 정확한 병명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심장병으로 거의 급사 수준으로 세상을 뜨는데, 이게 거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거라 더 이상은 말하지 못하겠다.

  하여간 나보코프는 자신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서배스천 나이트가 자기와 거의 비슷한 처지, 즉 러시아에서 낳고 십대까지 보낸 작가가 러시아어가 아닌 영어로 작품을 써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대하여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보코프가 태어난 해이며, 작중 서배스천이 출생한 1899년이라는 해도 한 세기를 마감하여 마지막 19세기 인간으로, 결국 평생을 20세기에 살면서도 19세기 사람일 수밖에 없는, 1899년, 아니면 1890년대 사람이 아니라면 수긍은 하되 그리 진심으로 이해되지 않는 상태도 강조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즉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세대차이를 전제로 살아야 하는 팔자라면 말이 되나? 하여간 그런 생각도 들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읽기에, 초반에는 V. 나보코프답게 배 다른 형제와, 전처에 대한 헛소문 때문에 결투를 벌인 (다른 병과도 아니고) 근위병 장교 아버지의 가슴에 박힌 총알이라든지, 하여튼 참 나보코프다운 입심에 감탄을 하며 읽다가, 본격적으로 V가 서배스천의 과거를 탐색하기 시작하니까, 갑자기 피시식, 또는 푸시식, 열기가 식어가면서, 나보코프의 문장들도 급속하게 사변적으로 변해버린다. (물론 많이, 많이 다르지만) 마치 마르셀을 읽는 것 같은 기분, 마르셀은 소음을 없애기 위해 코르크로 벽을 둘러친 방에 누워 세상 만물과 만인과 한 명의 탄압받는 유대인 장교에 관해 사색을 했지만, 서배스천의 행적을 찾는 V는 오직 한 인간, 사실 많은 부분이 나보코프 자신이겠지만, 서배스천에 관한 사색과 추측과 명상적 추적을 벌이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 잡는다. 마르셀이 그러했듯이. 그나마 분량이 적어 다행이지 아주 골로 갈 뻔했다. 본문이 겨우 240쪽까지. 다른 책보다 시간을 두 배는 더 썼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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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2-21 0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독후감:
월요일.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엘레나는 알고 있다>
화요일. 쥴퓌 리바넬리, <마지막 섬>
목요일. 마이클 온다치, <기억의 빛>
금요일. 니콜 클라우스, <위대한 집>

은하수 2025-02-21 16: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보코프 많이 읽으신거 맞네요~~
전 롤리타 한 권 집에 있는데...
안읽혀요...
정말 재미 있는거 맞나요???^^







Falstaff 2025-02-21 16:23   좋아요 1 | URL
나보코프는 평생 어떻게 하면 독자의 수명을 줄일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작가 같습니다. 심할 때는 막 멀미, 근육떨림 현상을 넘어 위경련, 뇌경색의 위험이 있겠다 싶거든요. 재미있는 경우는 거의 없고, 어디가서, 나 이래 봬도 나보코프 읽은 인간이야, 비슷하게 잘난 척하기는 무척 좋습니다. ㅎㅎㅎ
 
목련정전
최은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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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년 강원도 인제 출생. 내 처 할아버지가 인제에서 면장을 해 자셨는데 어디인고 하면, 지금은 소양강 댐에 수몰된 남면이라 소위 잃어버린 고향이다. 그래도 처갓집 사람들은 인제출신이라 하면 쌍수를 들고 반가워하며 한바탕 주민등록과 가족관계 증명에 관해 침을 튀어야 나머지 정상적인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하여간, 어쨌든 반갑다는 말이다. 나는 인제 버스터미널 뒷골목 막국수 집 돼지 수육과 막국수가 내가 먹어본 모든 수육, 막국수 가운데 최고로 친다. 아직 하는지, 벌써 접었는지는 모르겠다. 하긴 그게 언제야, 20년은 확실하게 넘은 이야기이니. 춘천에서는 장미촌 옆에 있던 전통의 실비 막국수와 요즘엔 뻘건 양념 안 올린 부안 막국수집이 괜찮았고. 웃긴다. 인제 출생, 터미널 막국수집, 막국수 하면 춘천. 이게 뭐라고? 의식의 흐름? 그래. 그까짓 것 아무거나 흐르기만 하면 되는 거다.

  1978년생이니 외환위기로 나라 전반에 마른 수건까지 쥐어짜던 시절에 정말 우울한 20대를 지낸다. 와중에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사건 등 재난까지 골고루 목격하고, 심지어 노무현의 대미 자유무역협상과 이에 따른 후속조치인 이명박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느라 촛불까지 켠 시대를 고스란히 보내는 와중에 2008년이 와서 서른살이 되었고 단편소설 <울고 간다>가 현대문학 신인상에 덜컥 당선을 하여 등단을 한 최은미. 최은미에게 서른살은 작가로서의 복이 터지는 기점이었나 보다. 2014년에 (큰 돈은 아니지만)대산창작기금 받고, 2014년과 15년에 젊은작가상, 2017년에 또 젊은작가상, 2018년에 대산문학상, 2021년에 현대문학상, 같은 2021년에 한국일보문학상까지 수집했다. 햐. 이거. 준다는 거 안 받을 수도 없고, 그러다보니 다른 작가는 평생 하나 받을까 말까 하는 이들이 쌔고 쌨는데 혼자만 줄창, 거의 해마다 굵직한 상을 받으니 좀 미안한 감도 들고 그러면서 또 글을 쓰겠지.

  이 책 《목련정전目連正傳》은 2011년부터 2014년까지 4년간 각 문예지에 발표한 것을 2015년에 모아 문학과지성사에서 찍은 결실이다. 모두 아홉 편의 단편소설을 실었다.


  이제 눈이 그리 좋지 않아 <지위 게임>의 책등spine을 <자위 게임>으로 읽어 인간의 정치와 도덕적 신념 체계 구축이 자위행위와 어떻게 연결이 될 수 있을까 잠깐이지만 정말로 고민해본 적이 있을 정도라서 《목련정전》이라 한글로 제목 쓰고 바로 아래 작은 글씨로 한자어 目連正傳를 붙인 걸 까무룩 보지 못해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는 “목련 꽃 그늘 아래”와 관련된 아주 서정적이고 감상적인 작품의 모음집이라고 여겼다. 그래도 되게 흔한 이름이기는 하지만 최은미라는 작가를 기억하고 있어서 선뜻 골랐는데, 아오, 최은미보다 약간 아래 젊은 작가들과의 사이에 굵고 검은 선으로 줄을 긋고 “여기는 내 땅” 하면서 확실하게 자기 영역을 만든 작가였다. 그래서 반가웠다. 비록 내 스타일하고는 맞지 않아서 앞으로 자주 찾아 읽지는 않을 것 같지만, 다 고만고만하고 비슷비슷해서, 언젠가 한 번 말했듯, 한 엄마의 뱃속에서 나온 씨 다른 형제 자매 같은 등단 동기/동문들하고 차별되는 개성을 가진 작가인 것이 좋았다. 내 취향이 아닌 것이 아쉬웠다.

  굳이 스타일을 표현하자면, <피로 물든 방>, <매직 토이숍> 그리고 <써커스의 밤>을 쓴 앤젤러 카터 족族으로 나눌 수 있겠으나, 카터와는 동서양과 활동 세기century가 다른 만큼 가까운 친족으로 보기는 힘들다. 같은 DNA를 상당한 부분 공유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낫겠다.

  한 때는 나도 앤절라 카터 그룹에 가입한 것을 자축하고는 했건만, 카터의 책을 읽고나서 벌써 4년 가까이 됐고, 그동안 새로운 작품 번역이 별로 이루어지지 않아 연속성이 끊어져 그랬는지 이제는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공포스럽고 조금은 엽기 그로테스크 정도만 생각날 뿐 스토리는 싹 증발되어 버렸다. 물론 나는 그걸 방지하기 위해 지금처럼 독후감을 쓰는데, 앤절라 카터를 읽지 않고도 책 읽는 걸 포함해 일상생활에 별로 불편함이 없이 지내니 그걸로 됐지, 구태야 다시 카터 독후감을 꺼내 확인할 필요까지 느끼지는 않는다.


  최은미는, 흠, 엽기다. 진짜 엽기. 마치 우화 속의 괴물이나 유령 또는 산 사람들의 악의가 한데 뭉쳐 만들어 생명을 얻은 집단 친절. 악의가 뭉쳐 친절을 만들었다고? 그렇다. 훗날 더 큰 복수를 위하여. 유럽 고딕 소설의 경우엔 이런 비정상을 위하여 중요 등장인물의 외모에 특이점, 예를 들어 키가 무척 큰 여자 아이, 난폭하다고 이름이 난 기사 같은 인간들을 무대에 올리는 경향이 있는데, 물론 최은미도 간혹 그렇기는 하지만 굳이 특징으로 보이는 수준은 아니고 그들이 주인공도 아닐 경우도 많다.

  두 번째 실린 <라라네>의 주인공 라라는 키 110센티미터에 몸무게 17킬로그램, 분홍 파자마 차림에 맨발이며 금발머리 마른 인형을 안고 있다. 집이 아니라 바깥에서. 즉 도망간 거다. 라라의 머리카락 길이는 50센티미터 정도여서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늘어져 있지만, 아뿔싸, 옆통수 쪽을 엄마가 가위로 난도질을 해놓아 쥐가 파먹은 것처럼 보인다. 라라는 유치원에 다니니까 만 다섯살 (그러니까 이 소설책이 나올 때는 여섯 살이라고 부르던) 정도 되겠다. 집에 엄마, 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엄마가 함께 살던 전남편은 술만 마시면 강아지로 돌변해 처자식과 가재도구를 두드려 망가뜨리는 데 선수여서 깨끗하게 이혼해버리고, 이후 너무너무 자유스러워진 엄마는 이후 마흔살이 될 때까지 총 네 명의 남자와 약 320번의 섹스를 즐기며 살았는데, 다섯번째 남자와의 섹스에서 결정적으로 피임에 실패해 라라를 낳고, 일년에 두 번씩 다섯번째 남자의 조상을 위하여 조기와 산적을 굽고 전을 부치는 신세로 바뀌면서 몸도 퍼지기 시작했다. 엄마 이름은 전나경. 전남편 사이의 딸이자 사실 이 집안을 안에서 꾸리는 유리는 휴대전화에 엄마는 이름이나 ‘엄마’라는 명칭 대신 “전나”라고 써 놓았다. 전나 재수없어서. 집안 일도 나 몰라라 하고 대낮에 해가 뜨도록 “전나 쳐 자서.”

  씨 다른 동생 라라를 아침 먹이고, 이 닦이고, 세수 씻기고, 머리 빗긴 다음에 손잡고 유치원 셔틀에 태워 보내고, 오후에 시간 맞춰 셔틀 오기 전에 기다렸다가 집에 데리고 와, 손 씻기고, 밥 먹이고, 노는 거 보고, 같이 놀기도 했다가, 저녁 먹이고, 재우면 그게 언니 보다는 엄마-언니에 가깝지 않겠어? 고등학교 다니다가 고등학교부터 이게 도무지 인간 사는 집단 같지 않아 때려 치운 데다가, 라라하고 나이 차이가 무척 나니까, 유치원 학부모, 요새 학부모가 어딨어 다 학모지, 학모. 학모들이 엄마야? 아이고 그럼 몇 살에 임신해서 몇 살에 난 거야? 넘 그렇다. 뭐 이런 수다를 떠는 것도 다 알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만큼 애늙은이가 된 지도 오래다. 그런 거 다 반응하면 제 명대로 못 산다는 것쯤 벌써 통달한 유리. 근데 언젠간 유리는 깨지지 않나?

  이런 라라는 한 편으로 도시빈민이기도 하고, 엄마한테 정이 떨어져 집 짓는 일로 될 수 있으면 먼 지방으로 오래 걸리는 작업판만 쫓아다니는 라라의 아버지는 기본적으로 좋은 사람이지만, 늘 라라 곁에 있는 게 아니라서 그리 도움이 되지 않고, 엄마는 제쳐놓고 생각해야 마땅한 마당에 그나마 믿을 건 언니 하나인데 아무리 언니라도 한 다리 건너 언니면 아이가 바라는 엄마급 애정을 줄 수는 없는 법. 그래서 라라는 늘 애정에 굶주려 있기도 하다.

  근데 라라의 유치원에 머릿니가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다. 라라도 유치원에서 머릿니를 옮아와 만날 유리와 유리 친구 도미가 라라의 머릿니 구제를 위해 갖은 애를 쓰지만 어디 그게 쉽나. 게다가 어린시절부터 주로 인형을 갖고 놀기 좋아한 라라가 그 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가 머리카락이 길고 긴 라푼젤이었던 만큼 자신의 긴 머리를 자르지 않겠다고 빽빽 울었던 것이다.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태, 라라는 당연히 유치원에서 왕따를 당했고, 그래도 인형 비슷한 캐릭터에 정을 주며 꿋꿋할 수 있었는데, 인형만 가지고는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았는지, 언제부터인가 책상 모서리나 의자 가로대 같은 것으로 자기 다리 사이를 마찰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가끔 조금씩 이후 점점 자주, 그러다가 지금은 아이들이 다 보는 데서도 자주.

  머릿니가 기승을 부리는데도 모른 척하던 엄마는 라라가 유아 자위에 몰두한다는 유치원 선생의 전화를 받고 머리 꼭대기까지 열이 올라, 너 벌써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할래? 결국 일찌감치 남자 만나서 아무렇게나 아이 낳고 나처럼 살게 되는 거야! 집에 딱 하나 있는 재봉가위를 찾아 날 선 가위날을 라라 얼굴에 대고는, 전나 무섭게, 유리더러 라라의 몸을 누르고 있으라 해놓고 썩둑썩둑 라라의 오른쪽 옆통수 머리카락을 잘라버렸다. 어찌어찌 엄마의 전나 겁나는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던 라라는 맨발로 꼭대기층 빌라에서 뛰어내려 그길로 사라져버리고, 라라를 쫓아 내려간 씨 다른 언니 유리는 동네에 보이는 사람한테 마다 외친다:

  키 110센티미어, 몸무게 17킬로그램. 분홍 파자마에 맨발이예요. 이름은 라라고요, 못 보셨어요?”


  이 <라라네>가 그래도 좀 순한 맛이다.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한 명으로 죽어 지옥에 떨어진 엄마를 기어이 천국으로 올려보낸 목련目連을 비유한 현대물 <목련정전>은 불교적 의식을 오늘에 되살려 현대인의 집요한 복수 집념을 우화적으로 쓴 표제작이다.

  목련, 목련木蓮꽃 할 때의 목련이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을유문화사에서 세계문학전집 138, 139번으로 낸 <목련구모권선희문目連救母勸善戱文>을 참고하시는 것이 좋겠다. 2025년에 출간한 따끈따끈한 책이다. 재미는 없다니까 알아서들 하시고.

  최은미는 나하고 맞지 않아서 비록 나는 높은 별점을 주지 못하겠지만, 이이와 합이 맞는 독자들은 기꺼이 최은미 클럽을 개설할 정도로 자기만의 영토를 지니고 있다. 앞으로 나는 최은미의 땅을 기웃거리는 수준이겠지만, 진심으로 바라노니, 앞으로도 번창하시라. 번창하기 바란다.




다만, 아쉽게도 내 취향과 워낙 거리가 있어서 별점을 셋밖에 주지 못했다. 내가 불민한 탓이니 작가나 팬을 비롯한 주위 분들의 양해를 바라마지 않는다. (흠. 내가 점점 소심해지고 있군. 그래도 얻어 터지는 거보다는 낫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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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5-02-20 0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 보려다 눈으로 만든 사람 먼저 봤는데 그것도 독한데 전 오별 줬을거예요 ㅋㅋㅋ

Falstaff 2025-02-20 15:48   좋아요 1 | URL
앗, 오별! ㅋㅋㅋ 기회가 닿으면 얼른 읽어보겠습니다!

stella.K 2025-02-20 1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눈이 안 좋아지니 진짜 잘못 보는 글들이 늘어나더라고요. 예전에 그렇게 눈이 좋았는데.ㅠ
제목이 좋아서 저도 오래 전부터 기억하고 있었는데 목련이 그 목련이 아니었군요. 저도 엽기는 제 취향이 아니라서 볼 확률은 거의 없을 것 같네요. 누가 버린 책이 마침 발밑에 떨어지면 모를까. 큭

Falstaff 2025-02-20 15:47   좋아요 1 | URL
정여사가 전에 ˝눈이 지물지물해서 책을 못 읽겠다˝라고 얘길 하시고 그랬는데, 지금 당시 책을 들춰보면 아이고 세상에 당시엔 활자가 그렇게 작았더라고요. 종이가 귀한 시절이었으니까요. ㅎㅎㅎ
쇤네는 참 다행스럽게 눈과 책 사이의 거리만 잘 보입니다. 안경 쓰는 것보다 더 잘 보여요. 근데 5미터 앞의 사람 얼굴도 누군지 헛갈립니다. 이거 팔자, 맞지요? ㅋㅋㅋ

망고 2025-02-20 1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실비막국수 부안막국수ㅋㅋㅋㅋㅋ다 맛집이죠 이 리뷰에서 이 맛집들을 볼 줄이야ㅋㅋㅋㅋ

Falstaff 2025-02-20 15:09   좋아요 1 | URL
쇤네 어린 시절에 춘천에 MT를 자주 갔거든요. 80년대 초에 춘고, 춘여고 출신 후배들이 입학해서 걔네들이 가르쳐 줘 실비집에 처음 갔었습니다. 쐬주에 감자전, 총떡이 을매나 맛있었는지... 그땐 주방이 아니라 홀 바로 옆에서 기계로 직접 국수를 뽑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제 처남이 춘고 출신 대학 1년 후배(서른 초반에 서울 살림 접고 춘천 가서 아직도 잘 살고 있습니다), 아내가 춘여고 졸업생이라서 ㅋㅋㅋ 저는 춘천하고 강원도 별로 안 좋아합니다. ㅋㅋㅋㅋㅋㅋ (농담인 거 아시죠?)

은하수 2025-02-20 15: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은미 작품 중에 이 책이 이젠 오히려 좀 어색해요.
다음 작품들이 더 좋더라구요. ‘마주‘, ‘눈으로 만든 사람‘ 등이요.
이 작품은 솔직히 호불호가 많이 갈릴 거 같아요^^

Falstaff 2025-02-20 15:49   좋아요 1 | URL
단행본으로는 처음 읽은 최은미라서 뭐라 드릴 말씀이 없는 게 아쉽습니다. ^^
작품을 보면 탄탄한 팬 층을 확보할 수 있는 내공이 있는 작가 같던데요.
 
체 게바라의 빙산
아리엘 도르프만 지음, 김의석 옮김 / 창비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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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엘 도르프만을 처음 안 건 지난 세기를 몇 년 남기지 않았던 시절, 칠레 출신 소설가의 책이 번역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때는 우리나라 새싹들의 교육수준 향상을 위해 될 수 있는 한 많은 교육세를 내기 위해 (책 읽을 시간이 어디 있어?)날이면 날마다 너도 진로, 나도 진로, 야야야야야야야야 차차차! 취생몽사, 두꺼비 사냥하느라 이사벨 아옌데도 그저 이름만 알던 시기였는데, 내 청춘시절과 마찬가지로 ‘정치군인의 군홧발’로 일컫는 군사독재를 경험한 동병상련 입장에서 도르프만의 단편집 《우리집에 불났어》가 나오자마자 사서 읽은 게 그것이었다. 이후 <블레이크 씨의 특별한 심리치료법>을 거쳐 은퇴한 이후 동네 도서관에서 희곡집 《죽음과 소녀》, 그리고 <체 게바라의 빙산>까지 읽게 되었다. <체 게바라의 빙산>은 관심도서 목록에 넣어두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웃기게도 책장이 떨어져 나가기 바로 직전일 정도로 낡았기 때문이었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아리엘 도르프만의 책을 읽으면서, 동시에 (책 좀 읽는 사람들 입장에서) 늦게나마 이사벨 아옌데를 겪어가며, 처음엔 전혀 생각을 못했다가 조금씩 덜 유쾌한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라틴 아메리카의 거의 모든 나라와 마찬가지로 고질적인 부정부패와 경제적 부의 편중에 시달린 칠레도 오랜 독재시절을 겪고 있었다. 그러다 거의 기적적인 1970년이 도래하여 사회민주주의를 주창하는 살바토레 아옌데가 “비밀자유투표를 통한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이 놀라운 정치적 발전을 매우 불편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존재했다. 군부? 군부 이전 칠레 정도는 한 방에 보내 버릴 수 있는 범 세계적 권력을 쥔 미합중국이었다. 그들은 (라틴)아메리카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당시 소위 “도미노 이론”이라 해서 한 곳이 공산화 되면 그 영향력으로 인해 이웃나라 역시 공산화되는 건 시간 문제로 보는 견해가 많았다. 나도 중학교 시절에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배웠다. 그리하여 미국은 의도적으로 보일 만큼 국제 동copper 가격 하락에 영향을 미쳐 칠레 경제의 가장 큰 축을 이루는, 세계에서 가장 순도가 높고 경제성이 좋은 칠레 북부 (태평양전쟁을 벌여 볼리비아한테 빼앗은)사막의 동copper 광산의 사업성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린다. 혹은 그렇다고 의심이 들 만한 조치를 취한다. 아무리 피노체트가 막 돼먹은 깡패새끼라고 하더라도 배 부르고 등 따신 인민들 앞에서 무턱대고 쿠데타를 일으킬 수 없는 법. 이렇게 칠레 경제가 무너지고, 직접적으로 인민들의 삶이 곤고해지는 것을 신호로 공포스러운 쿠데타를 일으켜 아옌데 대통령을 대통령궁에서 사살해버리고 1974년 12월 드디어 스스로 대통령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면 이후에 칠레 사람들의 가정형편이 좋아졌느냐고? 정치적으로는 불행했을지언정 적어도 먹고 사는 문제에 관해서는 그렇다. 또는 그렇다고 한다. 당연히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흐뭇하게 지켜보던, 세계에서 가장 완고한 보수주의 나라 미국 정부가 아옌데의 실각 이후, 북한과 대치하던 남한의 박정희 정권시절에 했던 것처럼, 칠레의 경제발전을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었다고 하는데 내가 주워들은 출처는 밝힐 수 없다. 기억이 나지 않아서.

  칠레와 우리나라가 달랐던 건 뭐냐하면, 칠레는 워낙 길고 긴 국경선을 가지고 있어서 피노체트가 재수없고 살벌한 공포정치를 펼치자마자 지식층과 부르주아들이 약속이나 한 듯 보따리를 싸서 칠레를 뜨기 시작했는데 그 수가 백만에 육박했단다. 우리나라는 바다와 휴전선이 가로막혀 극히 일부만 이민 또는 망명의 길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과 다르다(극성맞은 정여사 치마바람에 묻어 나 소년시절에도 하마터면 미국으로 이민 갈 뻔했다). 그런데 비행편을 이용하지 못하고 안데스 산맥을 넘어 주로 아르헨티나로 떠나는 관문에는 유럽인의 후예가 아닌 저 선사시대 얼어붙은 베링해를 걸어서 건너 북아메리카에 도착하고, 이후에도 계속 걷고 걸어 칠레 남부 파타고니아까지 진출한 아시아계 원주민 마을이, 원주민 마을만 있어서, 다수의 망명에 잔뜩 신경질이 난 피노체트 정권은 꿩 대신 닭이라고 국경 근방의 원주민 마을에서 아무 고민 없이 대규모 학살을 저지르기도 했다. 도르프만의 드라마 <과부들>에 나오듯이.


  세상의 많은 망명객들은 새로운 기회를 찾아 주로 미국에 머문다. 칠레의 망명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조국에서 떠나도록 등을 떠민 피노체트를 지지한 나라의 품에 머물러서 그냥 사는 게 아니라 조국 칠레의 현 권력자 피노체트를 비난하고, 그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반정부 세력을 위한 모금을 하는 등 나름대로 반 독재 활동에 참가한다. 피노체트가 자유민주 선거를 통해 실각하고 다시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이제 피노체트 시절을 청산하기 위한 대규모 숙청을 요구한다.

  나는 이게 좀 그랬다. 자기들은 조국 칠레를 떠나 뉴욕, LA, 멕시코시티, 부에노스아이레스, 리우데자네이루, 파리, 런던, 마드리드, 바르셀로나에서 사업을 벌여 차곡차곡 여전히 부를 쌓으며, 이 가운데 적은 금액의 달러를 찔끔 모금해 조국에 보냈던 것을, 칠레에 남아 자기 목숨과 고문에 따른 고통을 감수하며 죽기 살기로 반독재 운동을 했던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투쟁과 견주는 행위 아닐까 싶다. 입으로만 열나 칠레의 민주화와 독재권력의 잔인함을 폭로하고자 했지, 그거 말고 뭘 했는데. 그러나 마음씨 넓은 사람들이 이해하자. 그들도 도운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두려움에 휩싸여 해외각지로 몸을 피한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들은 목숨과 고문을 걸어야 했던 조국에 남은 자들에게 적어도 스스로 창피함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권력은 여전히 총구에서 나오던 시절이었다.

  칠레의 이사벨 아옌데와 아리엘 도르프만. 이이들도 피노체트가 집권하자마자 미국으로 떠나 그가 실각한 이후에 다시 돌아왔거나 여전히 사는 건 미국에서 살면서 칠레를 무대로 한 작품을 쏟아낸다. 아옌데와 도르프만 선생? 여지없는 에스파냐의 딸과 아들이다. 말로는 위에서 말했듯 빙하기에 얼어붙은 베링해를 건너 남아메리카의 남쪽 끝까지 멀고 먼 여행 끝에 자리잡은 원주민의 세월을 노래하지만 스스로 에스파냐 후예의 자격으로 아메리카의 발견이라는 “아메리카의 탄생 5백년”을 입에 올리는 백인 부르주아이자 약탈자의 후예들.

  반면에 다음 주 금요일에 독후감을 올릴 니콜 크라우스가 쓴 <위대한 집> (문학동네 2020 출간) 또는 <그레이트 하우스> (민음사 2011년 출간)에서 오직 과거시제로 등장하는 유대계 칠레 시인 다니엘 바르스키는 뉴욕에서 활동하다가 조국에서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칠레의 민주화를 위하여 기꺼이 귀국을 선택해 이후 행방불명된다. 작중 등장인물들이 고문 끝에 학살을 당한 수천명 가운데 하나가 되었을 것이라 여겼는데, 작품 후반에 접어들면 고문을 당하기는 했지만 목숨은 겨우 붙어있는 처지였을 거라고 추측한다. 크라우스는 칠레하고 관련이 없는 작가이다. 칠레하고 관련이 없어서, 그래서 작중 등장인물이 뉴욕에 잘 있다가 자진해 귀국해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체포당하는 비극을 맞는 반면, 실제로 칠레 부르주아 출신인 아옌데와 도르프만의 주인공들은 서둘러 조국에서 탈출하고 죽자사자 글만 써서 칠레의 정치군인들을 향해 공갈포를 터뜨린 것일까? 뭐 그렇다는 거다. 사람 사는데 뭔 일인들 벌어지지 않겠나.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대개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강남좌파라고 하거니와....


  여기에 우리나라 메이저 출판사 창비는 한술 더 뜬다. 원래 제목을 영어로 하면 “The Nanny and the Iceberg” 즉 “유모와 빙산”인데 2004년 초판 출간 당시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적으로 선풍을 일으키던 체 게바라의 이름을 따 <체 게바라의 빙산>이라고 제목을 정했다. 체 게바라고 알려진 에르네스토 게바라Ernesto Guevara는 아르헨티나에서 출생한 낭만적 혁명가로 쿠바혁명, 알제리 독립투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활약한 이후, 볼리비아로 건너가 내전에 관계하던 중 체포되어 1967년 10월 9일에 처형당한 쿠바인이다.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인물로 체 게바라의 죽음은 당대 전 라틴 아메리카 청년들의 추모와 시위로 이어지기도 했다.

  칠레도 마찬가지였다. 1967년 10월 10일, 체 게바라가 처형을 당한 다음날, 칠레 산티아고에서도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있었고, 군중 속에는 가출 청소년을 전문으로 찾아주는 사립 탐정이면서 심리분석가로 활약하기 시작한 끄리스또발 매켄지와 그의 은사 가야르도 교수의 딸 밀라그로스도 있었는데, 매켄지는 한 눈에 밀라그로스를 발견해 위험할 수도 있는 산띠아고 시내에서 가장 안전할 수 있는 호텔로 즉각 데려가서, 했다. 당시 끄리스또발의 나이 25세. 라틴아메리카의 젊은이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희귀한 생물체였으니 25세가 되도록 동정의 몸을 지니고 있었다. 반면에 18세를 갓 넘은 밀라그로스는 지극히 정상인이라 당연히 처녀는 아니었고. 하여간 이 두 청춘이 한 명은 난생 처음으로, 다른 한 명은 별로 경험이 많지 않은 상태로, 경험이 있는 다 큰 사람이 보기엔 무모하게도 콘돔도 착용하지 않은 채로 조금은 서툴게 일을 치루었고, 이들의 표현에 의하면 “콩을 깠”는데, 단 한 번 깐 콩으로 불과 며칠 후 밀라그로스의 자궁벽엔 ‘나’ 가브리엘 매켄지의 수정란이 착상을 했으며, 아직 착상도 하지 않은 밀라그로스의 상태를 찢어진 눈에 까무잡잡한 피부색을 지닌 원주민 마뿌체 족 출신 유모는 한눈에 알아봤던 거였다.

  세월이 흘러 15세가 된 ‘나’ 가브리엘 메켄지는 당시에 첫 망명장소인 멕시코시티에서 살았는데, 썸을 타는 여자아이 재니스의 부모가 하루 집을 비운 사이 놀러가 재니스의 엄마가 새로 산 근사한 중고 소파 위에서 서로 홀라당 옷을 벗고 생전 처음 그걸 해보려 했다가, 아뿔싸, 다른 건 다 준비완료 상태이지만 딱 하나, 콘돔을 사오지 않아 결국 가브리엘 신체의 극히 일부분이기는 하지만 그게 재니스의 몸에 침투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진다. 여전히 하늘을 향해 벌떡 서 있는 물건을 그냥 달고 집에 온 아들을 바다보는 엄마 밀라그로스한테는 자신의 유모가 보여주던 관심법의 능력이 없어 드디어 아들이 딱지를 뗀 것으로 인식하고, 그동안 크면 알려주겠다던 가브리엘의 탄생 과정을 말해주기에 이른다.

  “1967년 10월 9일에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에서 처형당하지 않았더라면 10월 10일에 산티아고 시위가 없었을 것이고, 시위가 없었으면 네 아버지 끄리스또발을 만나지 않았을 것이니, 너 또한 만들 일이 아예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체 게바라가 죽었기 때문에 네가 사는 거다. 간단하게 말해서 네가 숨쉬는 것도 그 사람 덕분이란다.” 더 쉽게 말하자면 체 게바라가 아들 가브리엘을 위하여 죽었으니 가브리엘 한테는 체 게바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초등학교 동창쯤 된다는 말씀. 이제 창비가 왜 제목을 <체 게바라의 빙산>이라 했는 지 이해하시겠지?

  이 정도로 독후감은 끝내자. 어차피 절판이라 읽고 싶으면 헌책을 사든지 도서관에 가야 한다. 끝내기 전에 딱 하나만 더. 주인공의 아빠 이름이 끄리스또발. 창비식 발음을 수정하면 크리스토발. 영어식 이름으로 크리스토프. 누구의 이름이라고? 맞다. 희대의 바람둥이 돈 후안과 함께 에스파냐 세비야에 잠들고 있는 신대륙의 발견자 크리스토프 콜롬버스. 끄리스또발이 총각 딱지를 떼고 25년이 더 흘러 50세가 되는 해는 크리스토프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해 “아메리카의 탄생 5백년”이 되는 해다. 아리엘 도르프만은 라틴아메리카 인이기 이전에 그냥 에스파냐의 후예라니까.

  이크. 오랜만에 집에 온 작은 아이가 얼른 노트북 덮고 돼지갈비 먹으러 가자고 한다. 아무렴. 문학보다는 돼지갈비에 낮술 한 잔이 훨씬 좋지. 오냐, 간다 가. 독후감 얼른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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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2-18 0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말이라면 ‘비(非)-’를 안 붙인다. 우리말이 아니라서 ‘非-’를 붙인다. 우리말이 아닌 쓰레기 ‘非-’는 먼저 옆나라 일본 우두머리가 ‘비국민’이라는 말을 지어서 퍼뜨리는 곳에서 싹텄다. 일본 우두머리가 일으키는 싸움짓을 따르지 않으면 “넌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야!” 하고 윽박지르면서 두들겨패고 사슬에 가두었고 죽였다. 일본 옆나라 우리나라 사람들도 숱하게 ‘비국민’ 손가락질을 받으며 죽어야 했고, 일본에서도 숱한 사람들이 ‘비국민’ 손가락질에 따돌림을 받으며 죽었다.

제대로 읽는 사람이라면, ‘모든 일본놈’이 우리나라를 사슬터(식민지)로 삼지 않은 줄 안다. 제대로 안 읽는 사람이라면, ‘그저 일본놈’이라고 뭉뚱그린다. 그런데 우리나라 모든 사람이 ‘얼뜬 일본 우두머리’하고 맞섰는가? 아니다. 일본총독부가 남긴 밑동(기초자료)을 보더라도 이 나라 ⅓쯤은 오롯이 ‘일본바라기(친일부역)’를 했다고 여긴다. ⅓쯤은 슬쩍 발을 담갔고, ⅓쯤은 일본에 맞서거나 시골에 숨었다.

한겨레라 하더라도 일본 우두머리보다 모질고 사납게 한겨레 등골을 파먹은 무리가 버젓이 수두룩하다. ‘일본놈’이라지만 일본에서도 ⅓쯤은 앞장서서 일본 우두머리를 나무라고 맞서다가 이슬 한 방울로 스러졌다.

우리는 어느 때부터인가 ‘백인 부르주아 약탈자’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데, 터럭만큼도 옳을 수 없다. ‘흰살갗(백인)’도 ⅓쯤이 힘꾼(권력자)이라면, ⅓쯤은 살짝 발을 담그고, ⅓쯤은 맞서거나 종(노예)으로 뒹굴었다. 나고자라기로는 하늬(유럽)이되, ⅓쯤은 시골과 들숲바다에서 맨손으로 논밭을 일구고 살림을 지었기에, 이들 살빛은 ‘까무잡잡’했다. 일본을 거쳐서 우리나라에서도 꽤 사랑받은 《초원의 집》이라고 하는 ‘로라 잉걸스 와일더’라는 ‘흰살갗 집안 시골 할머니’가 쓴 글이 있는데, ‘로라 잉걸스 와일더’ 님뿐만 아니라, 이녁 언니동생도, 이녁 엄마아빠도 그저 ‘까무잡잡한 살결인 흰사람(백인종)’이었다. 하루 내내 들에서 해를 쬐면서 일했으니, 적잖은 ‘흰사람’이라 하지만 ‘까무잡잡 살갗’인 사람이 많다.

겉모습(인종)만으로 사람을 가를 적에는 언제나 잘못 보면서 ‘안 옳은 말’을 ‘정치적 올바름’으로 외치게 마련이다. 모든 한겨레(한국사람)가 참하거나 착하거나 옳지 않다. 모든 일본놈이 끔찍하거나 멍청하거나 꾀바르지 않다. ‘겉모습으로 뭉뚱그리는 굴레’가 아니라, 낱낱으로 ‘사람’을 보고, ‘사람이라는 마음과 숨빛’을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흰살갗이라서 모두 사납빼기(약탈자)이지 않듯, 돈꾼(부르즈아)이라서 모두 사납빼기이지 않았다. 가난뱅이(프롤레타리아)라서 모두 착하고 참했을까? 터럭만큼도 아니다. 가난뱅이여도 사납빼기인 사람이 수두룩하다. 가난뱅이여도 돈꾼보다 넉넉하면서 아름답게 살림을 지은 사람이 수두룩하다.

겉모습이 아닌, 껍데기가 아닌, 허울이 아닌, 허깨비나 허수아비가 아닌, 이제는 그저 “일하는 나”와 “일하는 너”와 “일하는 우리”를 마주보고 이야기할 때라고 본다. “살림하는 나”와 “사랑하는 너”가 만나서 “푸른별을 푸르게 일구는 새길”을 이야기할 때라고 본다.

Falstaff 2025-02-18 08:18   좋아요 0 | URL
옳은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