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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 식료품점
제임스 맥브라이드 지음, 박지민 옮김 / 미래지향 / 2024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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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맥브라이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목사 앤드류 D. 맥브라이드 씨와 유대계 폴란드 이민자인 레이철 데버러 쉴스키 여사와의 사이의 유복자로 뉴욕에서 태어난 1957년 닭띠 작가이자 색소폰 연주자 겸 작곡가이다. 앤드류 맥브라이드 목사는 1956년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제임스 맥브라이드를 만들기만 하고 제임스가 엄마 레이철의 배 속에 착상한지 백일만인 1957년 4월 초에 천국의 하느님 우편에 앉아보기 위해 세상을 떴다. 제임스는 훗날 루스Ruth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할 엄마 레이철의 나이 35세 때 루스의 첫 결혼에서 낳은 막내이자 맥브라이드 목사의 막내였으며, 루스가 낳은 열두 남매 가운데 여덟 번째 아이였다. 좀 복잡하지? 하여간 독자가 주목할 것은 제임스 맥브라이드가 자신이 ①유대인의 핏줄을 이은 ②흑인이라는 정체성을 확고하게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유대인 정체성은 훗날 기독교로 개종한 엄마 루스보다 오히려 더 뚜렷하고, 아프리카계 유색인인 것은 누가 봐도 명백하니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다. 연주자/작곡가로서는 모르겠지만 <하늘과 땅 식료품점>을 읽어보니 작가로서 이 두 가지 정체성을 아주 효과적으로 써먹고 있는 것 같다. 아, 지금 비아냥이나 비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얼핏 한 개인의 약점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을 내보임으로서 오히려 자신의 강점으로 바꾼 일이다. 비난 대신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다.
<하늘과 땅…>이 내가 읽은 유일한 맥브라이드라서 이이의 다른 책은 어떤 경향인지 궁금해 위키피디아를 열어보니 주로 흑인 노예, 노예상태에서 해방된 흑인, 그리고 당연히 주변의 백인, 즉 많이 듣고, 읽고, 본 흑인 장르에 속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2023년 작품인 <하늘과 땅…>에 흑인들과 거의 비등한 분량으로 유대인 이민자를 등장시키고 있다. 흑인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해방 노예들의 후손들이고, 유대 이민자들은 독일계 유대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가 점점 동유럽, 불가리아, 루마니아, 폴란드, 리투아니아에서 온 유대인 식구들이다. 이들이 서로 이웃해 산다. 같은 백인일지라도 결코 유대인한테는 곁을 주지 않았던, 메이플라워호의 후예들이라고 오랜 세월 착각하고 산, 잉글랜드 출신의 오리지널(로 착각하고 사는) 와스프들에게 따돌림을 받은 유대 백인. 천대받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유대인들의 피부색은 허여멀건지라 그들에게 언감생심 친밀하게 접근하는 것조차 엄격하게 금지당했고 그런 피학, 천대를 당연하게 여겨온 아프리카계 유색인들이 모여 사는 펜실베이니아주 포츠타운의 치킨힐이라는 동네를 무대로 한다. 그러니까 한 커뮤니티에 유색인 처형을 감행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작가가 악착같이 조금도 선하게 묘사하고 싶어하지 않는 와스프 종족들에게 소외당하고 사는 유색인들은,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딱 한 명의 흑인 악당을 제외하고, 세상에 이런 선한 집단이 없으며,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등장인물들 모두 정의롭고 애정 넘치는 천사들이다. 반면에 치킨힐 밖의 포츠타운을 좌지우지하는 백인들은 예외없이 심판의 날에 푸르죽죽한 말을 타고 서양낫을 휘두를 듯한 파렴치한 악당뿐이다. 유대인을 제외한 백인 가운데 그나마 착한 심성을 가진 이는 가난한 이탈리아에서 이민 온 늙은 엄마와 젊고, 크고, 힘센 이탈리아 무산자 청년 말고는 없다. 잘 나가는 살 껍데기 허연 부자가 천국에 가는 건 이 책에서도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힘들다. (아이쿠, 이렇게 썼다가 까칠한 아저씨한테 걸리면 또 한 마디 들을 터인데 우짜나....)
사실 위에서 이 책에 대한 소감은 다 이야기한 거나 다름없다. 우리 착한 약자 연대, 너네 나쁜 백인 부자들 간의 갈등. 작품을 쓴 사람은 아프리카계 유대혈통의 미국인. 그것도 전형적인 미국인. 결론은 뭐라고?
“악인은 지옥으로.”
대개 독후감을 시작할 무렵에 내가 책을 선택하게 된 동기를 먼저 쓴다. 오늘 그러지 않은 건, 도무지 왜 내가 이 책을 골랐는지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아니다, 아니다. 잠깐 미쳤던 것이 틀림없다. 혹시 워낙 광고를 많이 한 작품이어서 그게 뇌 속에 들어박혀 있었는데, 도서관 신간 코너에 올라와 있는 것이 눈에 확 띄어 얘기한 대로 잠깐 헤까닥, 미치게 된 것인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이리 혹평한다고 이 책을 경원할 필요는 없다. 단지 내 취향에 지독하게 맞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당신과는 궁합이 딱 맞을 지 누가 아나? 책방 독자 서평에 모두 합해 55개의 별점이 올라왔는데 이 가운데 무려 92.5%가 별 다섯, 만점을 때렸으니, 아마도 내 눈이 삔 것이 틀림없을 듯하다.
작품의 시작은 1972년 6월, 펜실베이니아 포츠타운의 치킨힐이다. 예전엔 낙농 목장 바로 옆이었던 헤이즈 거리에서 공사를 하다가 오래된 우물 바닥을 파니까 글쎄, 사람의 해골이 나온 거다. 공사 인부들이 즉각 작업을 멈추었다. 경찰이 도착해 우물을 훑어보니 사람의 뼈와 벨트 버클, 펜던트, 오래된 실뭉치가 더 나왔다. 펜던트 뒷면에 뭐라고 글씨가 써 있어 마침 우물 옆에서 이 모양을 내려다보던 유대 노인에게 물어보니까, 이건 펜던트라고 하지 않고, 유대인들의 문설주 겸 문패 겸해서 쓰는 걸로 메주자라고 하는 것이며, 메주자 뒤에 쓰인 히브리어 글씨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댄서의 집”이라는 뜻이라고 말해준다. 그랬더니 백인 경찰이 유대 노인한테 말하기를, 어디 다른 곳으로 가지 말라고, 당신은 용의자 가운데 한 명이 될 것이란다. 이 말을 들은 노인이 누구냐 하면, 본명인지 아닌지 근 반백년 동안 ‘말라기’라고 불린 왕년의 최고 댄서였다. 그는 조금은 녹슬었지만 그래도 나이를 감안해 예의를 갖추어 말하자면 녹슬지 않은 경쾌한 스텝으로 그 길로 치킨힐에서 내빼고는 다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인 1972년 6월 22일, 47년 전에 하여간 열두 살 이전이었던(멕브라이드의 연도, 날짜 개념이 좀 헛갈리지만 그냥 넘어가자) 건실하고 늙은 유색인 가장이자 3남2녀의 아버지 네이트 러브2세라는 이름의, 자상한 남편이며, 숱한 손주들의 할아버지이지만 오늘 독후감에서는 소개를 생략할 주인공급 조연이면서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작지 않은 농장의 농장주인 “소년 도도”가 불운했던 초년 팔자 이후에 행복한 여생을 마치고 겨드랑이에 날개를 단 채 날아올랐다.
47년 전인 1925년의 포츠타운에는 유대인 극장이 있었고, 극장은 타운에서 유일한 루마니아 유대 이민자인 젊은 모셰 러들로우가 운영하고 있었는데 자신만만하게, 라기보다는 야심차게 흑인, 유대인, 가난한 백인, 그러니까 착한 우리편을 몽땅 아우르는 댄스파티를 기획하여 당시 천대받았지만 천재성 하나는 알아주었던 미키 캇츠와 웹의 12인조 밴드 공연을 준비했다. 문제는 광고와 자금. 이게 제대로 되지 않아 폴짝 뛸 만큼 애를 써도 여전히 막막하기만 한 젊은 모셰는 역시 유일한 불가리아 유대 이민자이자 치킨힐 초대 시나고그의 랍비이자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하늘과 땅 식료품점’의 사장인 야코프 플로르의 가게 지하에서 우거지 죽상을 하고 눈물을 짜고 있었는데,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한 쪽 다리가 짧아 약간 다리를 저는 어여쁜 열일곱 살 먹은 딸 초나가 모셰를 격하게 응원하고 기를 살려주어, 엣다 모르겠다, 잘 나가는 사촌한테 돈을 더 빌어 댄스파티를 성황리에 마치는 건 물론이고 큰 돈을 한 방에 벌었다. 이때 춤에는 관심없고 오직 결혼할 신부를 구하기 위하여 극장에 들른 정통 유대인이 바로 47년 후에 치킨홀에서 홀연히 사라질 말라기 청년이었던 거다. 이들은 이 때 인연을 맺고, 친구도 먹고,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오랜 세월 우정을 돈독하게 쌓아간다.
그리고 모셰는 어여쁜 초나에게 과감하게 청혼하고, 뜻밖에 초나가 잽싸게 승낙하고, 플로르 씨 부부 역시 흔쾌히 축복을 내려 이후에 아이는 생기지 않았지만 죽음이 둘을 갈라놓을 때까지 깨가 쏟아지는 한쌍으로 지냈다. 뭐 그리 오랜 세월은 아니겠지만.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없지? 없다.
포츠타운에는 흑인 처형 같은 극단적 주장은 하지 않지만 엄연히 KKK단이 존재하고, 이들은 적어도 1년에 한 번 타운에서 행진을 한다. 유령 같은 흰 두건을 쓴 채. 이 가운데 배가 불룩하게 나오고 다리가 불편한 것이 한 눈에도 확연해 타운 주민들 누구나 그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내과의사 닥 로버츠 박사가 있었다. 이이가 스스로 메이플라워호의 후손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타운의 기름종이, 유지 가운데 한 명이다. 초나와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고 한 학년 위였다. 우연히 옆 사물함을 쓰다가 한눈에 초나한테 반해 데이트를 신청하지만 초나는 유대인이 아닌 기독교도와의 이성교제에는 관심도 없고, 어려서부터 옆집에 사는 흑인 친구 버니스와의 우정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 배 나온 (아마도) 40대 중년 유부남이 되었어도 초나에 대한 연정은 바뀌지 않았는데, 이게 연정인지 욕정인지는 본인 스스로도 아리송했던 거 같다.
모셰의 극장과 초나가 운영하는 식료품점 일을 도와주는 흑인 네이트와 애디 부부는 애디의 조카 도도를 키우고 있었다. 똑똑한 도도는 오븐이 터지는 사고를 당해 귀가 들리지 않았지만 사람의 입술을 읽을 줄 알고 총명했으나, 청각장애로 인해 당국으로부터 지체장애 판정을 받아 악명높은 펜허스트 정신병원으로 가야 할 처지로 떨어진다. 초나가 이를 알고 도도를 자신이 데리고 있겠다고 했다가, 경찰도 아닌 내과 의사 로버츠 박사가 먼저 도도의 상태를 감정한다는 핑계로 식료품점에 들러 초나와 말다툼을 벌였고, 이미 한 번 (뇌졸중인 것 같은데) 입원 병력이 있는 초나가 경련을 일으키자 와스프 부자 박사는 이때가 기회다 싶어 초나의 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이를 지하실에서 숨어 보고 있던 도도가 갑자기 나타나서 박사와 몸싸움을 벌이다가, 결국 경찰에 잡히고 만다. 그리하여 콜슨 화이트헤드가 쓴 <니클의 소년들> 보다도 훨씬 열악하기가 한정없는 펜허스트로 끌려가고, 동시에 치킨홀에서는 유대인과 흑인, 그리고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자가 힘을 합해 소년의 탈출과 정의실현을 위한 우연을 만들기 위해 작가 제임스 맥브라이드의 타자 속도가 마하를 추월하게 된다. 결론은 위에서 다 이야기했다.
“악인은 지옥으로.”
또는
“결국 정의가 이긴다.”
둘 다 구라일 확률이 높은 엉터리 격언이지만 당장 읽어치우거나 극장에서 구경하기는 편하다. 마침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로 만들려고 한다니까 개봉하면 편한 마음으로 관람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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