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도서관 개가실을 거닐다가 눈에 띄는 이름 하나, 리처드 브라우티건. 음. 이 양반이 미국의 이름난 문제적 작가 가운데 한 명 아니었나? 싶어서 얼른 집어 들었다. 그랬더니 표지 뒷면에 있는 사진부터 예사롭지 않다. 서부 개척시대의 양아치 같기도 하고, 20세기 히피 같기도 하다. 책 속에서는 자칭 마지막 비트 세대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모르긴 몰라도, 잭 케루악이 1961년에 쓴 소설 <빅 서>에서 샌프란시스코에 갔을 당시 케루악이 비트 집합! 외치자마자 이게 웬 술 건이냐 싶어 마리화나 챙겨 모였던 젊은 떨거지들 가운데 한 명이었을 수 있겠다.

  이이의 이름만 들어봤지 어떤 작품을 쓰고, 어떤 평가를 받고 이런 거 전혀 몰라 위키피디아 한 번 뒤졌다. 그랬더니, 아이고, 거 참, 웬 팔자가 이리도 독하누. 특히 초년 팔자가 기막히다. 1935년 1월 말이니까 빠른 35년생이면서도 갑술 개띠, 버나드 브라우티건 2세와 매리 루 케호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그냥 그렇다는 거다. 이들이 결혼을 한 사이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임신 4주 혹은 5주만에 헤어져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평생 친아빠의 얼굴을 딱 두 번 봤다고 하고, 아빠는 아들이 진짜 자기 아들인지, 리처드가 죽은 다음에야 알았다고 한다. 부모 중에 누가 더 방종한가 따지는 일이 여포와 장비 가운데 누가 더 쌈을 잘 하느냐, 하는 수준이었나 보다. 엄마 매리 루는 적지 않은 남자와 동거하고, 헤어지고, 결혼하고, 딸 낳고, 다시 헤어지고 뭐 이런 생활을 유지했으며,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아홉 살 먹은 리처드를 네 살 먹은 이복동생 바바라와 함께 몬태나의 한 모텔 방에 방치한 채 놀러다녔다고도 한다. 다시 결혼한 남자는 알코올 중독자에다가 술만 마셨다 하면 마누라 두드려 패기를 강아지 옆구리 걷어차는 시집살이 하는 며느리 같았다니 그것도 다 업이다, 업. 그래도 학교는 보내주었는지 사우스 유진 고등학교에 들어가 품행은 모르겠고, 빼어난 성적으로 졸업했단다. 당연히 이 시절부터 글쓰기에 여러가지로 두각을 나타냈고.

  하지만 그걸로 끝. 1955년이 오고, 스무살이 되고, 그래도 하염없이 배가 고파 궁지에 몰린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교도소에 들어가 배나 곯지 말아야겠다, 작심을 하고 경찰서 유리창에 돌을 던져 붙잡혔다. 참 나. 세상에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라도 있니? 난동죄에 걸려 당시 없는 살림에 적지 않은 금액인 25달러의 벌금을 맞고, 열흘만인 크리스마스 이브에 루돌프 사슴 대신 앰뷸런스를 타고 오레곤 주립 병원 신경정신과에 강제 입원 당한다. 얼핏 생각하면 워낙 싱거워서 그렇지 암만해도 병원 밥이 교도소 밥보다 나을 거 같지? 낫겠지. 근데 문제는 편집증과 우울증 진단을 받고 켄 키지의 소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나 봤던 전기충격 요법을 무려 열두 번이나 당했다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보 안 되고 무사히 나온 거 하나 만으로도 참 다행이랄 수밖에. 이후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잠깐 일본과 몬태나에서 보낸 시간 말고는 평생 샌프란시스코에서 살았다.

  대개 초년 팔자가 드러운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인격형성에 문제가 생길 소지가 크다.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60년대까지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생활을 묘사한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에서는 한 마디도 없고, 책 속에 든 작가소개에서 입도 벙긋하지 않지만 어려서부터 보고 배운 바에 힘입어 브라우티건 본인도 대책없는 알코올 중독증과 우울증에 빠져든다. 그리하여? 나처럼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귀여워지는 사람이 흔한 줄 아시나? 우울한 데다가 술까지 마시니 세상은 전부 다 때려 부수어야 할 것으로만 만들어졌다고 여겨 대책없는 폭력 가장이 되었는데, 다행히 폭력의 대상에 딸 이안테 엘리자베스는 포함되지 않았던 것 같다.


  브라우티건 하면, <미국의 송어낚시>와 <워터멜론 슈거에서>가 제일 유명하다. 나도 제목은 알 정도이니 뭐. 이럴 경우, 아직 저자의 작품을 읽어보지 않은 독자는 일단 대표작을 먼저 읽는 것이 여러가지로 좋다. 나도 당연히 그랬어야 하는데, <워터멜론…>은 책이 없었고, <미국의…>는 아주 오래 묵은 책이라 손이 가지 않아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를 골랐다가 후회했다. 지금 세어보니 무려 64편의 단편, 초단편, 메모(라는 장르의 문학작품)이 실려 있다. 본문이 11쪽에서 시작해 229쪽에 끝나니까 net로 229-11+1=219쪽이다. 229/64=3.6. 한 작품이 평균 3.6쪽인데 앞뒤로 잘라먹는 거 생각하면 대강 아시겠지? 후루룩, 배고픈 복날 콩국수 삼키듯 눈 깜박할 순간 다 읽어 치운다.

  들어보니까 특히 (미국 작가를 유독 좋아하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 작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무라카미 시절에는 이게 그렇게 특징적이었나……봅니다. 대강 1940년대부터 20년간 캘리포니아, 때때로 네바다, 오리건, 워싱턴 주의 삽화들이 빼곡한 짧디짧은 기억의 조각들. 그러나 기억이라고 하는 건, 그게 사실이라 믿는 독자들은 바보 중에서도 큰 바보일 정도로 개인의 뇌 속에서 벌어지는 화학작용에 의하여 왜곡, 필터, 채집된 것이라, 그렇기 때문에 문학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이겠지만, 하여튼 그저 개인의 것이라고 하면 안 될까? 하긴 브라우티건의 초년 팔자를 있는 그대로 썼다면 재수없는 독자들은 다시한번 “리틀 라이프”를 읽어야 했는 지는 모르지만.

  무려 예순네 편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당연히 64편 가운데 재미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고, 공감하는 것, 그렇지 못한 것, 별 게 다 있어서 만일 다양한 이야기라는 측면만 본다면 세상에 이런 비빔밥이 없을 터. 하여튼 꼭 이 말은 하고 독후감을 끝내야 하겠다. 아무리 다양하고 재미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도,

  “이젠 너무 촌스러워.”


.


댓글(19)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24-09-20 0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옌렌커, <작렬지>
화요일. 저메이카 킨케이드, <미스터 포터>
수요일. 토니 모리슨, <가장 파란 눈>
목요일. 아르투어 슈니츨러, 《슈니츨러 작품선》
금요일. 아리스토파네스,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전집 2》

망고 2024-09-20 09: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나처럼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귀여워지는 사람이 흔한 줄 아시나?˝
아 그러시구나🤔 좋은 정보 알고 갑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건수하 2024-09-20 09:21   좋아요 3 | URL
망고님 (간발의 차로) 찌찌뽕!

망고 2024-09-20 09:23   좋아요 2 | URL
저 문장이 확대되어서 눈에 들어왔어요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4-09-20 10:25   좋아요 2 | URL
전부터 많이 들은 말이라 놀랍지도 않은 1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4-09-20 12:34   좋아요 1 | URL
술도 기분 좋을 때 마셔야 하거든요. ㅋㅋㅋ

건수하 2024-09-20 09: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름을 어디서 들어봤다 했더니 <미국의 송어낚시> 작가였군요.

술 마시면 귀여워지시는 폴스타프님 후기 감사해요 :)

Falstaff 2024-09-20 12:35   좋아요 1 | URL
어제 너무 귀여워졌다가 오늘 도서관 조퇴했습니다. ㅎㅎㅎ

2024-09-20 0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9-20 1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24-09-20 1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요. 하루키도 좋아질 때가 따로 있는거지 영원히 좋은 건 아닌 거 같더라구요. 그나마 에세이는 읽을만하던데 이 사람 영향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근데 술 마실수록 귀여운 거 팔님만의 생각이신 거죠? ㅎㅎ 하긴 옛날에 제의 아버님도 평소 땐 과묵하신 편인데 그나마 술 드시니까 재밌어지시긴 하더군요. 그 이상 꽐라되면 그땐 좀...ㅋㅋ

Falstaff 2024-09-20 12:39   좋아요 1 | URL
저 술 마시면 귀여워지는 거, 마누라 의견입니다. 아니면 벌써 이혼당했을 거라 하더군요. ㅜㅜ
아빠 닮아서 그래요. 제 아부진 장하게 술 자시면 스탠딩 코미디언이 되셨더랬습니다. ㅋㅋㅋㅋ

stella.K 2024-09-20 12:58   좋아요 1 | URL
ㅎㅎ 그렇다면 인정해드려야죠. 팔님 술 드시고 귀여워지심 저도 뵙고 싶은데 아쉽네요. 😂

잠자냥 2024-09-20 1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전 이 사람 책 집어 들고 끝까지 읽은 적이 없어요! 늘 미완독...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4-09-20 12:39   좋아요 1 | URL
저도 이제 이 양반하고 끝입니다. ㅎㅎㅎㅎ

레삭매냐 2024-09-20 12: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춘수 씨의 책들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좀 끼깔났을 지는
몰라도 세월이 지나면 그저 그
런 책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Falstaff 2024-09-20 12:42   좋아요 0 | URL
춘수 씨.... 라 하셔서 우리나라 시인 김춘수를 떠올렸다가... 3초 후에 무라카미의 이름이 춘수인 게 생각나더라고요.

coolcat329 2024-09-20 18: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역시 귀여우실 줄 알았습니다. ㅋㅋㅋ ㅋㅋㅋㅋㅋ

Falstaff 2024-09-20 20:10   좋아요 1 | URL
ㅎㅎㅎ 이제는 게다가 에스트로젠 분비가 많아져서 더 그렇답니다. ㅋㅋㅋㅋ
 
스마일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이틀 전에 읽은 김중혁의 단편집. 다섯 작품을 실었다. 읽을 때는 재미있었다. 읽자마자 스마트폰 책읽기 앱 ‘북적북적’에 평점으로 별 네 개 줬다. 흥미롭고 작가 자신의 세계가 뚜렷한 것 같지만 이젠 길이 나서 스르륵 써버릴 수 있는 단계에 이른 고수. 그런 고수들이 하찮은 듯 쓱 던진 메시지. 그래서 그랬는지 책을 다 읽고 아마 어디서 본/읽은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도 같다. 클리셰? 아, 몰라, 몰라. 지금 “들었던 것도 같다” 고 하는 건 책을 읽고 겨우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는 의미다. 어제 그제 오랜만에 연달아 이틀동안 술이 과했다. 그래서 그럴 수도 있다. 내가 직접 끓인 펄펄 끓는 얼가리배추 육개장을 펄펄 끓는 8월 염천에 땀을 뻘뻘 흘리며 퍼먹느라 쐬주를 좀 많이 퍼부었다. 흘린 땀 보충하느라. 이름하여 이열치열.

  김중혁이 누구인지 몰랐다. 지금 독후감 쓰느라 검색해봤더니 아이고, 그 유명한 71년생 김천 삼인방 가운데 한 명이다. 몰라봐서 이만합니다, 김선생. 2000년에 데뷔하여 장편소설 아홉 권, 소설집 다섯 권, 산문집 열한 권, 다 합해 스물다섯 권을 출판했다. 일년에 한 권이 넘는다. 전형적인 직업작가라고 할 수 있겠다.

  이걸로 독후감 끝. 요약해 말씀드리자면, 읽을 때는 재미있었지만 이틀만에 기억에서 싹 사라진 단편소설 다섯 작품을 모은 소설집. 김천 삼인방 가운데 한 명인 걸 몰라봐서 미안함.


 * 책 읽고 딱 30일 지나 업로드하는 지금은 김중혁의 책 《스마일》에 실린 작품들의 제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네. 하여간 김중혁 선생, 여러가지로 미안하게 됐습지비.


.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넬로페 2024-09-19 07: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김중혁 작가가 김천 삼인방 가운데 한 사람이고, 이동진 평론가와 오랫동안 영화에 관한 방송을 많이 하고
tv의 책에 관련된 방송에 패널로 많이 나왔거든요.
유희열의 인터뷰 방송 패널로도 나왔고요.
그래서인지 이름도 얼굴도 너무나 잘 아는데, 정작 그의 소설은 안 읽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소설은 왠지 재미 없을거라는 편견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책도 엄청 많이 출간했네요!

Falstaff 2024-09-20 06:47   좋아요 1 | URL
ㅎㅎㅎ 근데 저는 이 세 사람이 쓴 책을 여태 한 권도 읽지 않았답니다.
제가 TV도 잘 안 보고 그래서 아직도 낯이 서네요. ^^;;;

stella.K 2024-09-19 09: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휘발성이 있긴하죠. 그가 막 알려지기 시작했을 때 지하 일층 지상 일층인가 하는 작품 읽었는데 나름 재밌게 읽었던 것 같긴한데 정말 기억이 안 나더군요. 운이 좋아서 그의 사인본으로 받았는데 사인을 이렇게도 할 수도 있구나 인상적이었죠. 재치있는 사람같긴한데 김천 삼인방이 뭐 대단한가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저 묶음을 좋아해서. ㅎㅎ

Falstaff 2024-09-20 06:49   좋아요 1 | URL
앗, 그렇습니까? 하도 이야기가 높아서 대단한 사람들인 줄 알았거든요. 이거 진짭니다. 근데 삼인방.... 이 누구누구인지 모른다는 거... 흑흑....

독서괭 2024-09-19 1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동진이랑 한 팟캐스트 때문에 알게 됐고 예전에 소설 한권 읽었는데 기억이 안 납니다…^^;; 딱히 더 읽고 싶지는 않은.. 팟캐에서는 재미있고 호감가고 그랬습니다.

Falstaff 2024-09-20 06:50   좋아요 0 | URL
팟 캐스트를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팟캐스트가 뭔지도 몰라서 뭐라 드릴 말씀이... ^^;;;

바람돌이 2024-09-19 2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연수작가가 김천역앞 빵집 아들이었는데 김중혁작가는 명절마다 친구 집에서 단팥빵 포장 알바 하던 친구사이라죠. ㅎㅎ 저는 김중혁 작가는 팟빵의 방송으로 더 익숙한데 이분 소설보다는 저는 에세이가 더 좋더라구요. ^^

Falstaff 2024-09-20 06:52   좋아요 1 | URL
앗, 그렇군요. 김연수와 김중혁.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누굴까.... 지금 검색해보니까 시 쓰는 문태준이군요! 맞아요, 문태준 시집 읽고 독후감 썼을 때 김천 삼인방 이야기 들었습니다. ㅋㅋㅋ
 
사티리콘 - 노먼 린지 일러스트판
페트로니우스 지음, 강미경 옮김, 노먼 린지 그림 / 공존 / 200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이 책은 도서관 개가실에서 발견하고 즉시 관심도서에 올리긴 했지만 어떻게 시간만 무지르기를 한 해, 두 해. 그러다가 일찍이 마음먹은 바가 있어서 세계적인 문학평론가 에리히 아우어바흐가 쓴 불멸의 명저, 라고 일컫는 <미메시스>를 드디어 읽기 시작했는데, 1부 “오디세우스의 흉터”에 이어 2부 “포르투나타”를 무지 재미나게 읽었던 바, 이 ‘포르투나타’라는 여성이 바로 <사티리콘>, 페트로니우스가 쓴 세계 최초의 장편소설 가운데 2장 “트리말키오의 연회”에 등장하는 부자 트리말키오의 아내였던 거다. <미메시스>가 정말 읽기에 즐거웠던 바, 이 순간, 그 동안 관심도서 목록에 올리기만 해놓고 정작 읽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 물론 나 혼자의 생각이었지만, 쪽팔린 바 작지 아니하여, 그날로 개가실에 달려가 대출, 읽게 된 내력이다.

  이 책을 쓴 페트로니우스로 말할 것 같으면, 서기 27년에 태어나 66년에 스스로 팔 정맥을 끊어 생을 접은 네로 시대의 가장 뛰어난 문화비평가 정도 된다. 헨릭 시엔키에비치가 쓴 <쿠오 바디스>에서 남자 주인공 비니키우스의 외삼촌으로 등장하는데, 시엔키에비치의 묘사를 신뢰한다면, 대단히 직설적이며 죽음과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설파한 강단있는 인물이었다. 실제로 자칭 예술가인 네로조차 자기가 부른 노래, 지은 시, 연주한 기타라가 얼마나 예술적인지 알기 위해 페트로니우스의 감상 여부에 촉각을 세웠다고 한다. 그래봐야 그 시대의 페트로니우스 나이가 겨우 서른 여덟, 아홉이었다. 62년에 집정관을 했다니 이때 겨우 35세. 이후 원로원 의원을 겸직하며 황제 네로의 측근으로 이름을 날렸다. 사람이 지위가 높아지면 몸을 사려야 하는 법이거늘, 페트로니우스는 천성이 겸손이나 절제하고는 거리가 먼 자유분방한 성격이라 친위대장 티겔리누스에 의하여 반역죄로 기소되어 65년에 체포당했다. <쿠오 바디스>에서는 자기가 연 연회 도중 농담 따먹기를 해가면서 의사에게 자기 팔뚝의 정맥을 절단하라고 지시하여 할 말 다 해가며 즐겁게 죽는 모습이 나온다. <쿠오 바디스>를 읽을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이가 세계 최초의 장편소설을 썼다고 했고, 우연히 페트로니우스라는 이름을 도서관 개가실에서 발견했으며, 그 책의 제목이 <사티리콘>이었으니, 여태 안 읽지도 않고 머뭇거리기만 한 건 잘못한 거 맞지?


  근데 <사티리콘>을 읽으며 제일 먼저 든 생각이, 김우창, 유종호가 영어판 <사티리콘>에서 번역한 “포르투나타”의 부분이 이 책에서는 그리 도드라지게 재미있게 읽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책을 번역한 강미경도 확실하지는 않지만 라틴어가 아닌 영어를 번역할 것일 터인데.

  2장에서 <사티리콘>의 주인공 엔콜피우스가 어린 동성 연인 기톤과 함께 로마에서 가장 부유한 트리말키오가 개최하는 연회에 무단으로 슬쩍 들어가서 만찬을 즐긴다. 연회가 무르익자 트리말키오 가문의 사실상의 주인인 아내 포르투나타가 나타나 호기심이 동한 엔콜피우스는 옆에 앉은 남자에게 저 여자가 누구인지 묻는다. 이에 답을 하기를:


  (김우창, 유종호 번역)

  트리말키오의 마누라지요. 이름은 포르투나타라구. 돈을 말로 재는 처지라오. 그런데 얼마 전,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마누라가 어떤 여자였는지 아시오? 이렇게 말씀드린다고 뭐라고 생각하지 마시오만, 그 여자 손에서 빵도 받아먹기가 역겨웠을 거요. 어쨌든 지금은 하늘 꼭대기에 올라서 트리말키오의 둘도 없는 어화둥둥 내사랑이 됐단 말이오. 그뿐이오, 그 여자가 대낮에 캄캄한 밤이오, 하면, 트리말키오도 캄캄하지, 하고 받게끔 됐다 그거요. (p.72 <미메시스> 민음사 2023)


  (강미경 번역)

  트리말키오의 안사람입니다. 이름은 포르투나타인데 자루를 기준으로 돈을 세지요. 그건 그렇고 전에는 뭘 했는지 아십니까? 이런 말 하기는 좀 뭣하지만 남한테 빵 한 조각 나눠줄 여유도 없는 가난뱅이였지요.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지금은 천국에서 살고 있으니, 트리말키오에게는 자기 마누라가 전부지요. 사실 환한 대낮에 어둡다고 해도 마누라 말이라면 트리말키오는 곧이 믿을 겁니다. (이 책 p.99 2008)


  뭐 그렇다는 거다. 어느 것이 낫고 못하다는 걸 주장하기 위해 비교하는 건 절대, 절대, 절대 아니다. 하여간 나는 김우창/유종호 번역이 더 익숙하고 재미있었는데, 문장을 읽으며 리듬감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할까? 그리하여 <미메시스>를 읽으면서 고전 시대, 고전 중의 고전 시대에도 이런 저잣거리 언어로 소설, 문학을 시도하는 작가가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 같은 것을 더 잘 얻을 수 있었을 거 같다.

  전 시대의 작품에서 스토리를 끌어가는 것은 영웅과 신들이었다. 영웅과 신이 아닌 ‘그냥 등장인물’이 하는 일은 작품에 나왔다가 지나가기, 칼 들고 돌격했다가 그냥 죽기, 키르케의 마법에 걸려 돼지로 변신하기, 항해 중에 풍랑을 만나 빠져 죽기 같은 것만 맡았다. 근데 페트로니우스가 쓴 인류 최초의 소설에서는 놀랍게도 주인공 엔콜피우스의 직업이 노예와 흡사한 떠돌이 검투사이며 부업으로 도둑질, 사기, 살인에다가 미소년 기톤과 동성애로 얽혀 있다. 틈만 나면 돈 한 푼 안 들이고 진수성찬을 먹을 수 있는 연회에 몰래 스며들어가기를 원하고, 귀천, 빈부를 따지지 않고 어여쁜 여인이 눈에 띄면 같이 자고 싶어한다. 그러니까 그냥 잡놈이다. 주인공 잡놈과 어울리는 무리들도 다 마찬가지다. 비슷한 직업과 비슷한 부업과 비슷한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는 건달이다. 나이든 시인도 하나 있다. 에우몰푸스라고. 에우몰푸스 역시 남색을 밝히며 전력을 다해 사기를 치기 위해 좋은 머리를 팽팽 돌린다.

  엔콜피우스는 기톤, 에우몰푸스와 함께 크로톤이라는 곳에 가서 마지막으로 크게 한 탕 사기를 치기로 작심한다. 작업 중에 젊고 잘생긴 엔콜피우스를 눈여겨 본 절세 미녀가 있으니 이름도 우연히 키르케. 키르케는 하녀 크리시스에게 그를 데려오라 했고, 드디어 사랑의 정원에서 일을 벌이기 시작하니, 이러하다.

  “키르케는 백조 솜털보다 더 부드러운 팔로 나를 휘감아 안고는 풀밭으로 끌고 갔다. 우리는 풀밭에 누워 수없이 키스를 나누며 격렬한 쾌락을 향해 더듬더듬 나아갔다. (키르케가 말했다.) 왜 그래요? 내 입이 당신을 불쾌하게라도 하나요?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내 입에서 무슨 냄새라도 나나요? (중략) 나는 너무 당황스러워 얼굴을 붉혔다. 온몸이 늘어지면서 사내다움까지 완전히 잃고 말았던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젊고 건장한 엔콜피우스한테 갑자기 발기부전이 덮친 거였다. 좋아, 좋아. 한 번 그럴 수 있지. 증상을 알았으니 고치긴 고쳐야 한다. 이를 돕기 위하여 키르케와 크리시스가 도움을 요청한 이상한 노파들이 모여 처방을 하는데, 알려드리겠다. 이 방면에 문제가 있는 분은 한 번 해보시라고:


  “그녀는 포도주 잔을 가져와 그 위로 내 손을 끌어당겨 손가락마다 파와 마늘로 문질러 깨끗이 씻긴 다음 개암나무 열매를 포도주 잔에 던지며 주문을 중얼거린다. (중략) 그런 가운데 독한 포도주가 한 순배 돌았다. (중략) 오이노테아는 가죽으로 만든 남근에다 향유와 후춧가루와 으깬 쐐기풀 씨앗을 뿌려 내 항문에 조금씩 집어넣기 시작했다. 가학적인 노파는 내 가랑이에도 그것들을 뿌렸다. 그녀는 고추냉이 즙과 쑥을 섞어 거기다 내 물건을 담근 후 쐐기풀 줄기를 가져와 배꼽 아래 부분을 여기저기 후려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라도 제대로 작동만 하면 된다고? 아서라, 아서. 그냥 병원 가서 비아그라 처방전 받는 게 훨씬 편하다. 다만, 불쌍한 남자들아, 약을 먹어서라도 꼭 그걸 해야겠다면 말이다.

  재미는 있지만 많은 부분이 유실된 작품이다. 완성도가 떨어져 읽어보시라고 권하기가 망설여진다. 도서관에 책이 있으면 훑어보시는 것이 좋을 듯하다. 부록까지 5백쪽이 좀 넘는 분량이기는 하나 화가, 조각가, 판화가, 삽화가, 모형 제작자, 작가로 이름을 낸 노먼 린지가 그린 삽화가 많이 들었 있으며, 편집도 널널해서 후딱 읽힌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몸이 사라졌다 알마 인코그니타
기욤 로랑 지음, 김도연 옮김 / 알마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기욤 로랑은 1961년 11월에 북 프랑스 앤 지방의 생캉탱에서 출생한 시나리오 작가, 배우, 소설가이다. 2003년에 프랑스 영화감독, 배우, 시나리오 작가인 상드린 보네르와 결혼해 딸 아델을 낳고 2015년에 이혼했다. 이게 로랑에 관해 알려진 사생활의 전부이다. 장 주네와 협력해 영화도 찍고, 2002년에 첫 소설 <세월의 창>, 2006년에 <내 몸이 사라졌다>를 출간했다. 다수의 시나리오를 썼고, <내 몸이 사라졌다>는 영어 제목 <Happy Hand>로 성인용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 대박은 아니더라도 칸 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 그랑프리 등 몇 개의 상을 받았다.

  원래 직업이 영화 관련이다. 상상력도 애초 문학으로 시작한 사람들과 방향을 달리한다. “내 몸이 사라졌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죽어 땅에 묻혔다? 그럼 사라지지는 않았다. 땅 속에 있기는 하니까. 화장을 하면 사라진 걸까? 매장의 경우보다 확실하게 많이 사라졌지만 뼛가루와 임플란트나 혹시 관절에 박혀 있을 지도 모르는 볼트 너트는 남을 거 아닌가? 그러면 어떤 경우에 내 몸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 그걸 탐구해보자.


  주인공 이름은 나우펠이다. 모로코의 수도 라바트에서 태어났다. 라바트 대학에서 고전 프랑스 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교수 부모는, 나우펠이 열두 살이 될 때까지 프랑스어라는 바이러스에 감염시키려 최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머리가 나쁘지 않은 나우펠을 이런 환경에서 키우다보니, 열한 살 때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정국이 불안해지자 이민을 결정한 부모를 따라 졸래졸래 따라간 프랑스의, 새롭게 전학한 프랑스 학교 아이들 수준에서 라블레나 볼테르, 거기까지 아니라면 적어도 위스망스 수준이라, 이 아이가 단박에 학급에서, 차원을 넓혀 학교 전체에서 따돌림을 받게 되었다는 것도 이해할 수밖에 없는 거 아냐? 그래도 모로코에서는 부모가 다 대학 교수를 하고 있었으니 적어도 중산층 이상의 삶을 살고 있었을 터인데, 이민 온 지 2년 만에 나우펠의 부모가 사이좋게 드라이브를 즐기던 중 큰 자동차 사고의 한 가운데 끼어 금슬도 좋지 둘이 한꺼번에 별로 고통도 없이, 갔다. 졸지에 고아가 된 나우펠. 다행스럽게 어진 이웃이 있어서, 원래부터 나우펠더러 가지고 놀라고 1차 세계대전 중에 사용하던 전시 측량 키트를 선물했던 적이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학년을 마칠 때까지 함께 살면서 돌봐주기로 했었다. 그런데 아뿔싸, 나우펠의 성장이 부모가 갑자기 죽고 나서부터 갑자기 멈춰버렸다. 이후로 많은 사람이, 매번 그랬던 건 아니고 자주 나우펠더러 나프나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어른의 성숙함이 열두 살의 몸에 갇힌 난쟁이 나프나프.

  그러나 출신이 모로코. 고아가 된 친척 아이를 나 몰라라 남의 집에 맡기는 것을 수치로 아는 나라. 나우펠 앞에 가문에서 유일한 무신론자 사미르 외삼촌이 등장해 조카를 포르트드뱅센 근처 자기 집으로 데려간다. 옆집에 살던 선한 사마리아 아줌마는 어쨌냐고? 그걸로 무대에서 사라졌다. 단역의 설움이 다 그런 거지 뭐. 외삼촌의 집에 갔더니 사촌이 둘 있다. 사촌 형 압데라우프. 동네에선 그냥 라우프라고 부르는 골목의 왕초다. 특히 살아있는 생명체에 불을 붙여 불에 타 죽는 모습만 보면 흥분해 어쩔 줄 모른다. 모르긴 해도 그때마다 사정을 했을 거 같다. 이런 라우프를 우리 조상들이 이렇게 이야기했다. “될 성 부른 놈은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아니나 다를까, 라우프는 점점 자라 동네를 넘어 일대에서 가장 큰 조직의 가장 잔인하고 악랄한 두목이 된다. 그러니 열두 살의 몸을 지닌 헛똑똑이 나우펠이 마음에 들었겠어, 안 들었겠어?

  사촌동생 세에라자드는 또 이게, 나우펠이 보기에, 자기의 주관적 관점을 버리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평가를 해봐도, 세젤예 자체다. 아마 그래서 그랬을 터. 세에라자드가 나타날 때마다 말을 더듬더니 매사에 자신감마저 잃어가기 시작했다. 집안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는지에 관심이 없던 술고래 사미르 삼촌은 자기 마음이 내킬 때만 택시 운전을 해서 돈을 벌었는데, 술을 잔뜩 마시고 택시 영업을 하다가 크게 사고를 내는 바람에 교도소에 3개월 동안 들어갔다 나왔다. 출소 후에는 정신을 차렸는지 약물치료센터에 입소해 알코올 중독에서 정말로 벗어났고, 이후 은밀히 활동하는 시아파 회교 지도자 아야툴라가 됐다. 이후 외삼촌은 수염을 기른 극단주의자이자 극빈자 생활보호대상 수급자, 이맘의 수습생이 되어 이슬람 문화센터에 다니기 시작하더니, 자식들과 조카를 코란의 교훈에 따라 교육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애를 쓰기 시작했다. 뭐 그랬다는 얘기다. 벌써 처녀 딱지를 떼버린 지 오래인 세에라자드는 더 이상 불의에 휩쓸리지 않게 만들기 위해 집콕 대상자로 점찍었으며 만일 외출을 할 경우엔 나우펠에게 샤프롱의 책임을 지우게 했다. 그래도 불안했는지 서둘러 목타르라는 이름의 합법적 납치자, 신랑으로 선정해 그에게 보내버렸다.


  사촌의 패거리가 이웃의 토고 출신 열네 살 먹은 소녀를 윤간하려고 하는 걸 보고 나우펠이 곧장 경찰에 전화를 해 봉변을 피한 적이 있다. 가만히 있으면 패거리가 아니지. 그들은 나우펠을 붙잡고 물을 끓이더니 그걸 머리 꼭대기에서 쏟았다. 전신 2도 화상을 입어 3주 동안 입원했다가 나오니까 삼촌 사미르는 그를 그리스인 목수 필리파르가 주인으로 있는 7층 꼭대기의 작은 방으로 보내 버렸다. 며칠 살다가 월급에서 집세를 바로 공제하기로 하고 목수의 도제로 들어갔다. 어차피 집은 나우펠에게 우울한 장소일 뿐이고, 알고 보니 집주인 필리파르 씨가 사람이 괜찮아 목수일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얼마 시간이 지난 후, 이웃 소녀 아미나타가 강간을 당한 후에 불에 탄 시신으로 발견되는 일이 벌어진다. 나우펠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사람은 이 사건이 누구에 의하여 저질러진 것인지 다 안다. 다만 가해질 폭력이 무서워 입을 떼지 못할 뿐이다. 사건 며칠 후, 경찰이 나우펠을 찾아왔다. 저번에 윤간당하려는 토고 소녀를 구해준 적이 있으니 당연히 참고인 조사차 온 거겠지. 왜소한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윤리의식을 가진 나우펠은 예전에 했던 행동을 그대로 반복한다. 결과는? 3개월 후에 법원으로부터 운명의 소환장이 도착하고, 증인으로 출석했으며, 경멸하는 표정으로 피고인 석에 앉은 사촌의 눈길을 받으며 오히려 반발심이 생겨 착실하게 빼놓지 않고,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 결과는 압데라우프한테 12년 징역형을 선고한다. 다시 말해, 12년 동안 보복의 위험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게 알았다. 법정에서 용감하게 증언을 해준 나우펠에게 희생자 아미나타의 엄마는 상아로 된 행운의 손을 선물하고 토고로 돌아갔다. 그리고 상아로 만든 작은 행운의 손은 누군가가 훔쳐갔다.

  몇 달 후, 여전히 목수일을 배우고 있는 나우펠. 이젠 도제가 나우펠 하나였다. 하루는 나우펠 또래 혹은 한 두 살 많아 보이는 청소년이 와서 하루만 일을 시켜달라고 필리파르 사장한테 사정을 했다. 그래서 다른 일은 시키지 못하고, 예전에 사촌 라우프가 아주 가끔씩 나와 하던 청소일을 시켰다. 나우펠이 보기에 수상했다. 하필이면 왜 이 목공방에 와서 일을 하려고 할까? 혹시 라우프 일에 대해 보복을 하려는 건 아닐까? 며칠 전 비슷한 일을 겪기도 했다. 당하지는 않았지만. 신경이 날카로워진 나우프. 그래도 작업은 작업이니까 일을 계속하긴 하지만 속도도 나지 않고 작업하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다. 그러다 회전날에 나무를 자르는 일을 해야 할 시점이 왔고, 나우펠은 평소 같으면 단번에 능숙하게 처리했을 터인데 더욱 조심스럽게 멈칫, 멈칫거렸으며, 한 순간, 청소를 하던 아이가 나우펠을 슬쩍 민 것 같았는데, 순간, 그의 오른손이 회전하고 있는 날 아래로 쑥 들어갔고, 동시에 일각의 늦음도 없이 나우펠의 몸에서 다량의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와 아픈 것도 모르고, 멍하니 필리파르 사장을 바라보다가 한 마디 했다. “제 손이 잘라진 것 같은데요.”

  청소하던 소년은 자신이 구급차를 불러오겠다고 달려 나가 시간을 쓸데없이 소모했으며, 전화를 하고도 교통체증 때문에 구급차가 늦게 오는 바람에 잘린 손의 첨단 부분이 점점 괴사하기 시작해 나우펠은 남은 일생을 오른손을 잃은 상태로 살아야 할 운명을 만나게 된다. 나우펠의 경우에 그렇다는 말씀.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오른손 입장에서 생각해보시라. 이런 경우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

  “어, 내 몸이 사라졌다!”

  내 몸을 잃어버린 오른손이 내 몸을 찾아 파리 구석구석을 뒤지는 이야기. 걱정하지 마시라. 이 책의 영어 제목이 <Happy Hand>이니.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eesum 2024-09-18 2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어볼까요? 정해주세요…

Falstaff 2024-09-19 06:23   좋아요 1 | URL
윽. 추천하기는 좀 주저하게 되네요. 도서관에서 빌려읽으시면 좋겠어요. ^^;;
 
옆 발자국 문학과지성 시인선 507
조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3년 전, 나는 조은의 시집 《따뜻한 흙》을 읽고 “주된 관심사는 탄생과 삶과 죽음의 사이클”이라고 쓰면서 시인의 “삶의 정체는 어떤 이유로 이렇게 우울과 죽음의 색조화장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증을 넘어 이제 의례 그러려니 할 정도가 됐다.”라고 했다. 가난과 비통과 각혈과 죽음과 괴멸. 이 모든 것들, 이제쯤 뒤돌아보니, 시인이 말했듯이, “정신적 경제적 남루함이 발목을 잡는 시간”이었을 듯하다. 아직도 물살이 만만치 않은 강에다 시인은 하나의 디딤돌을 놓듯이 새 시집 《옆 발자국》을 낸다고 했다. 그렇다. 그러고보니 전에 읽은 시집과 새 시집 사이에 15년이란 세월이 누워있다. 여전히 죽음과 이별과 어둠 속에 있어도 조은은 삶 속으로 간다. ‘가기.’ 그것의 흔적을 발자국이라 부른다. 시집의 제목에 들어 있듯, 이번에 발자국을 노래하는 시가 무척 많다. 첫번째 실은 시도 <발자국>이다.


  영혼을 외면했던

  오늘 내 발자국이

  불에 달군 쇠덩이처럼

  위험해 보인다   (p.7, 전문)


  오랜만이기는 하지만 이제 시인의 집에 소꿉친구가 와서 하룻밤을 자고 가기도 한다. 전편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사회생활이다. 물론 아무리 소꿉친구라 해도 살면서 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람은 비슷하다. 외롭고 외로운 것은



  느끼든, 못 느끼든



  오랜만에 만난 소꿉친구가

  하룻밤 자고 갔다

  어디에 속하든 지능이 가장 높았던

  나의 열등감을 여러 번 자극했던

  친구는 내게 시집 한 권을 선물했다.


  내가 받아 든 시집은

  한 성직자의 베스트셀러

  그동안 쓴 수많은 시 때문에

  그분은 내게

  언제나 밋밋했다


  부르르 떨다 내리는 주먹

  불길한 월식과 일식

  비틀비틀 가는 발자국

  붉은 손자국이 있는 뺨


  그런 것들에 눈길이 가는 나는

  삶을 예찬하는 그분의

  시에 늘 시들했다


  외롭고 외롭다

  그걸 느끼는 내 삶도

  다르게 느끼는 친구의 삶도   (p.12 ~13. 전문)



  아하, 그렇군. 적어도 조은과 내가 같이 느끼는 건 하나 있군. 천주교 수녀가 쓴 시집을 귓등으로라도 쳐다보지 않는다는 거. 다른 성직자도 마찬가지다. 나는 목사, 사제, 중들이 쓴 시는 안 읽는다. 요즘 중이나 신부가 유튜브 같은 데 나와서 인생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꼴이 하여간 내 눈엔 우습다. 지들이 가정을 이루어 봤어? 발갛게 밤을 태워 보기라도 했어? 아이쿠, 삼천포. 하여간 어디를 가더라도 제일 지능이 높았던 시인한테 열등감을 자극하던 동무라니, 시인은 머리만 좋고 나머지는 부족했나보다. 슬픈 일이다. 머리라도 안 좋았으면 열등감이나마 덜 받았을 것을. 쉰을 한참 넘긴 시인이 이제 돌아보니, 201호나 202호나, 수녀가 쓴 시를 좋아하는 여자나, 그걸 시들하게 읽는 여자나, 사는 건 다 외롭단다.

  외롭지만 외롭지 않은 곳이 한 군데 있다. 201호에서 지하로 내려가면 세상만사 다 끝나는 곳. 노인요양병원. 시인의 어머니도 그곳에서 한 생을 마친 것 같다. <어떤 만남, 어떤 이별>에서 외롭지만 외롭지 않은 장면을 읽을 수 있다.


  내 어머니 빈소에도 /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왔다 / 들고 온 꽃바구니를 / 바닥에 놓기도 전에 구슬프게 울었다 / 양복 차림의 남자도 어깨를 들썩였다 // 그가 너무도 슬퍼 보여서 / 상가를 잘못 찾은 거라고 / 빨리 그들을 돌려보내야 한다고 / 우리는 눈길을 주고 받았다 // 죽은 자의 고독을 잘 알았던 / 그들은 어머니의 병원 친구였다 / 늘 푸르렀던 어머니의 잎 잎을 / 자식들이 하나하나 따냈다는 것을 / 그들은 알고 있는 듯했다  (p.16~17. 부분)


  자식들이 어머니의 잎 잎을 다 따낸 것을 그이들이 어떻게 알았을까? 당연하지. 그이들의 잎 잎도 그이들 자식들이 모두 따버렸거든. 그래서 시인도 앞에서 얘기했지 않는가. “외롭고 외롭다 / 그걸 느끼는 내 삶도 / 다르게 느끼는 친구의 삶도”라고.

  조은의 시가 마음에 들기 시작한다. 전에 “조은”이라면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길 건너 있는 “조은 약국”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이제 시인 조은의 이름도 기억하고 싶다. 시도 많이 쉬워졌다. 저번 시집을 읽고 하여튼 로또만큼이나 나한테 맞지 않는 시인이다 싶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 나는 과한 분비, 죽음, 우울, 슬픔, 술주정 같은 거 싫거든. 그런 걸 노래해도 기어이 삶 또는 사는/살아야 하는 이유가 엿보이는 시가 좋거든.

  그 사이에 시인의 아버지도 죽었다.



  어머니의 장례가 끝난 뒤

  아버지가 말했다

  내가 먼저 죽어야 했는데

  너희들한테 미안하구나


  3년 뒤에도 말했다

  아내가 죽은 뒤 3년을 산 남자는

  오래 산다는데

  큰일 났구나


  어머니가 평생 하찮게 여겼던 것만을

  독차지했던 아버지는

  부축 한 번 받지 않고

  무덤까지 갔다    (<눈물> p. 18~19 부분)



  위 시의 앞부분을 보면, 아버지와 나누어 가져야 할 사랑을 어머니가 독점했다고 나온다. 즉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자사자 사랑했다는 것. 그래서 아버지는 어머니가 평생 하찮게 생각하는 것들만 가졌다는데, 그게 무엇인지, 어떤 종류의 것인지 알려줄 만큼 시인은 친절하지 않았다. 어쩌면 독자는 몰라도 좋은 것인지도. 그러니 우리 독자여, 아쉬워도 아니꼬워하지 말자.

  다시 발자국으로 와서, 모르긴 몰라도 종로구 철거중인 산동네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사 나간 반면, 이사 들어온 가구는 없는 동네에 날이 가면 갈수록 종족을 번성시키고 있는 건 당연히 버려진 개들과 고양이. 개는 버림을 받으면 곧바로 적자생존, 작은 개체들은 큰 개체들에게 잡아먹혀버려 중대형 수준으로 체구가 커진다. 사람한테도 상당히 위협적이다. 혹시 외딴 길을 가다 유랑견을 만나면 조심하시라. 절대로 조심해야 한다. 반면 고양이는 그렇지 않다. 자기들끼리 경쟁하고 구역싸움해도 사람한테 여간해 피해를 주지 않는다. 번식기에 야밤이나 새벽을 가리지 않고 애기 울음소리가 듣기 싫을 뿐. 조은은 고양이를 좋아할지언정 고양이 엄마 황인숙처럼 사료와 물을 주지는 않는 것 같다. 지금 한 이야기와 가장 비슷한 시가 이것.



  발자국 옆 발자국



  눈 내린 골목

  고양이 발자국들


  꽃잎 같은 발자국은

  차 밑으로 빈집 대문 아래로 공터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선명한 발자국을 따라가자

  누가 막 놓고 간 물그릇에서

  털장갑 같은 김이 오른다

  작은 플라스틱 그릇엔

  하트 별 보름달 모양의 사료


  거기서 작은 발자국은

  맞은편에서 온 사람의 발자국과 만난다

  둘은 나란히 간다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아다니던

  저 사람을 여러 번 본 적 있다


  지난 혹한의 날씨에

  굶주린 어미가 새끼를 입에 물고

  목숨을 걸고

  그의 집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p. 26~27. 전문)



  시집의 제목 <옆 발자국>은 이 시의 제목에서 왔다. 옆 발자국이 사람의 것이냐, 진짜 발자국이 사람의 것이냐? 4연에서 작은 고양이 발자국은 사람의 발자국과 만나서 나란히 간다. 자국이 나란하다고 걸음까지 나란한 건 아니다. 눈 내리고 추운 겨울 밤. 하여간 고양이와 사람은 같은 방향, 조금은 더 따뜻한 사람의 집 쪽으로 갔다. 내린 눈을 발로 찍어 만든 발자국. 이런 것도 있다.



  겨울 아침



  발등을 덮는 눈 아래

  얼어붙은 작은 발자국들

  수북한 눈 위에

  막 찍힌 발자국들


  인간도 짐승도 싫어하는 자의

  얼음 같은 눈빛도

  녹일

  발자국, 발자국 들


  잔돈을 세어

  수도 요금 전기 요금 가스 요금이 빠져나가는

  은행 잔고를 채우러 가는 아침

  혼자 눈길을 걸어간

  고양이의 길을 본다


  나도 늘 혼자이다

  누군가는 그것이 나의

  약점이라고 말한다


  약점은 때로 장점이어서

  슬픔이나 막막함을

  다른 이가

  같이 겪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기도 한다


  발목까지 빠지는 눈길을 되돌아가

  허기졌을 배가 눈 위로 끌린

  새끼고양이의 길을 발로 다져준다   (p.36~37 전문)



  그림 딱 그려진다. 시인이 고양이를 참 좋아한다. 나도 고양이를 좋아해 이 시에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흔적을 내 시인 조은이 발목을 잡는 남루함의 구덩이를 건너온 것을 직접 읽을 수 있어 공감했다. “늘 깨어 있으며 눈에 광채를 띄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 말고, 조금 뒤에서 시간에 닳아 이제 부드러워진 곳을 쓰다듬는 일도 시인에게 마땅하지 않을까?

  어쨌든, 나도 시인의 아버지처럼 죽고 싶다. <얼룩>에서 나오는 것처럼.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24-09-16 04: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시집 가지고 있어요.
조은 시인의 산문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Falstaff 2024-09-16 09:10   좋아요 0 | URL
산문도 썼군요. 수필이겠지요. ㅎㅎㅎ 시만 쓰면 살기가 팍팍할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