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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렬지
옌롄커 지음, 문현선 옮김 / 자음과모음 / 2020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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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렌커는 서문에서 이 <작렬지>를 “자신의 무덤에 놓는 꽃”이라 생각하고 읽어주기 바란다고 했다. 이 말을 읽을 당시는 옌 특유의 허풍 또는 과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읽어갈수록, 어, 이것봐라, 어쩌면 서문이 작가의 엄살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여간 내가 읽어본 옌의 작품의 지리적 무대를 보자. 북송의 수도 변량(지금의 開封카이펑)에서 서쪽으로 350킬로미터를 달리면 나오는 곳이 고도 낙양(지금의 洛陽뤄양).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또 70킬로미터 거리에 쑹이嵩伊현이 있다. 이곳에서 또 50여 킬로미터 떨어진 산맥이 있는데 이 산맥이 옌렌커 소설의 태가 묻힌 바러우 산맥이다. 그러면 낙양에서 곧바로 바러우 산맥으로 가면 될 것을 왜 굳이 쑹이현까지 들먹였느냐고 따질 수도 있다. 설명하겠다.
쑹이현의 최고봉을 푸뉴산伏牛山이라 했는 바, 이 산이 더운 복伏날의 소牛처럼 느긋하게 누워있지 못하고 화산이 폭발해버렸다. 하도 심하게 터져 저 서쪽의 폼페이가 되기 전에 주민들이 살 길을 찾아 화들짝 피난을 나서 일부가 그 길로 바러우 산맥을 바라 출발, 인근에 터를 잡았다. 당시엔 화산폭발 같은 말을 쓰지 않고, 땅이 갈라지고 터졌다고 했으며, 바러우 산맥에 터를 잡은 쑹이현 사람들이 자기들 동네 이름을 땅이 갈라지고 터져서, 즉 작렬하는 마을이란 뜻으로 작렬촌炸裂村이라 한 거다.
작렬촌 인구는 원나라 시대에 백명. 바러우 산맥을 등진 넓은 평지가 있어 소규모 장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중국 역사는 왕조별로 쓰는 게 보통이니 나도 전범을 따라 말하자면, 명 대에 와서 인구가 5백 명으로 급증했다. 주로 공씨와 주씨, 공자의 후계들인 쿵씨와 주자의 후계인 주씨가 가오를 먹었는데, 이 때부터 1일, 11일, 21일 장이 섰다. 청 왕조 때는 이자성의 난으로 하필이면 이 동네에서 쌈박질을 해 촌이 큰 고통을 당했으며 군벌의 강탈도 모자라 오랜 가뭄까지 겹쳐 그야말로 환란의 시대를 맞이했다. 이 장면이 <연월일>에 잘 나온다. 이때 주민들은 산시, 간쑤, 신장 등 서쪽으로 피난을 가 마을은 돌이키기 힘들게 황폐화되었다.
중화민국 시절에 떠난 사람들이 돌아와 수백 명의 인구를 이루었다. 바러우 산맥 인근의 중심 시장이 섰고 탄광을 발견하는 바람에 철도도 놓여 유통이 편리해지면서 자연촌락의 면목이 사라지고 집촌화 현상이 발생했다.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곧바로 토지개혁이 일어났다. 당시 주씨 지주의 처첩 셋을 소작인 세 명에게 주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진짜 코미디도 벌어지는 법이다, 처첩을 받은 세 명의 소작인 가운데 한 명인 쿵씨가 주인공이자 현재 자례(炸裂)시의 시장 쿵밍량의 할아버지다. 그러나 공화국은 다시 토지를 국유화해 농민에게 분배했던 토지를 다시 집단에 귀속시키고 이어서 대약진운동이니 뭐니 범국가적 쇼를 벌인다. <레닌의 키스>니 <사서> 같은 그의 대표작들이 이 시기를 무대로 했다. 이 후속타가 문화혁명. 와중에 자례시는 3대 가문 쿵씨, 주씨, 청씨가 세를 이루었다. 지금 시장 쿵밍량의 아버지인 쿵둥더가 허리를 구부린 채 일을 하고 있는데 하늘을 나는 새가 등짝에 똥을 갈기고 날아간다. 하필이면 이 새똥이 중국 지도처럼 번졌지만 그깟 것이 뭐, 신경도 쓰지 않고 쿵둥더는 일만 하다가 그게 굳어져 등짝에 전국 지도를 그리고 다니는 일이 벌여졌다. 이에 세력을 나누던 주씨 가문의 주칭팡이 쿵둥더를 의식분자로 고발해버려, 쿵둥더는 사형선고를 받고 수용소로 끌려가 12년만에 뼈만 남은 모습으로 돌아오니, 이제 남은 건 복수가 복수를 낳고, 그게 새로운 복수를 낳는 일?
하늘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해 자례촌으로 돌아온 쿵둥더는 아내에게 예언한다.
“우리 집에서 황제가 나올 거야. 하지만 네 아이 가운데 누가 될 지 모르겠어.”
밤이 되자 쿵둥더는 네 아들 밍광, 밍량, 밍야오, 밍후이에게 집을 나가 사방으로 걸어 눈에 띄는 것을 주워 오라, 그게 너희들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라고 시켰다. 시키는 대로 했더니 밍광은 분필조각, 밍량은 인장석(印章石: 도장 만드는 데 쓰는 돌), 밍야오는 군인 견장, 밍후이는 고양이. 이 정도면 누가 황제가 될 지 아시겠지? 당연히 둘째 밍량이다. 주인공이니 더욱 당연하지.
근데 같은 날 같은 시간. 주씨 집안에서도 외딸 주잉도 같은 시간에 대문을 나선다. 제일 먼저 만나는 남자가 남편이 된다는 계시를 받았단다. 누구를 만나는지 눈치 채셨지? 원수의 아들인 밍량. 스토리가 이렇게 되면 주씨의 외동딸 주잉도 주인공일 수밖에. 둘은 하여간 훗날 결혼을 하기는 한다. 아들도 하나 낳는다. 물론 서로 만족하고 행복하고 깨를 볶는 부부는 아니지만.
세월이 더 흐르니까, 이제 중국 정부는 각 지방에 “만위안호萬元戶” 연 만 위안 이상의 소득을 올리는 가정을 많이 만들라는 공문을 시달한다. 인민들의 생활을 향상시키겠다는 의미다. 바야흐로 시대의 온갖 부작용이 어쩔 수 없이 드러나게 되는 천민자본주의의 극성시대를 맞이하는 시기가 온 것. 세상의 거의 모든 나라가 그랬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고. 딱 이 시절에 장남 밍광은 초등교사로 임용되고, 셋째 밍야오는 군에 입대했으며, 막내 밍후이는 고등학교에 다녔다.
만위안호 운동에 참여하느라 촌의 모든 사람들은 돈을 버느라 정신이 없는데, 쿵씨 집안의 둘째 쿵밍량은 촌민들의 극심한 노동을 보면서 콧방귀만 킁킁 뿜어댄다. 그러다가 하루는 촌-진-향-현-성 단위에서 향장 위안다진이 자례촌에 시찰을 오는데, 밍량은 바로 여기서 자기 예금통장을 한 손에 들고 훌훌 날린다. 그곳에 눈이 부시게 찍힌 숫자 10,000. 자례촌에서 누구보다 먼저 일만 위안의 예금통장을 갖게 된 청년.
진실을 알려드릴까? 동네 뒤편에 바러우 산맥이니 언덕배기. 그곳에 탄광을 향하고, 탄광에서 나오는 기차가 지나간다. 당시 기술로는 아무리 힘이 좋은 기차라도 언덕배기를 오르려면 힘이 들어 헉헉 대다가 그것도 모자라 사람이 뛰는 것만 못한 속도로 기어올라가는 취약지역이 있다. 밍량은 포대 자루를 들고 이곳을 지키고 있다가 기차가 오면 냅다 올라타 코크스와 석탄을 몇 포대씩 훔쳐냈던 거다. 그걸 장마당에 내다 팔아 세금 없는 수입을 올렸던 터. <레닌의 키스>에서는 바러우 농민들이 서커스를 하고, <딩씨 마을의 꿈>에선 에이즈에 걸리든 말든 피를 팔아 부자가 된다.
향장 앞에서 만 위안이 든 예금통장을 날리는 쿵밍량. 그는 향장 앞에서 만일 자신이 촌장을 하게 해주면 올해 안에 126호 가운데 63호를 만위안호로 만들겠다고, 실패하면 자기의 모든 재산을 촌민에게 나누어 주고 다시는 자례촌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만인 앞에서 큰소리 떵떵 치는 밍량을 어떻게 믿지 않을 수 있겠나? 그리하여 향장은 그 자리에서 당장 주칭팡의 촌장 지위를 박탈하고 쿵밍량을 새 촌장으로 선포한다. 새 촌장이 된 밍량이 제일 먼저 한 일?
주머니에서 현금 다발을 꺼내 모든 촌민에게 선언한다. 자기 아버지 쿵둥더에게 사형선고를 받게 하고, 12년 동안 강제노역을 하게 만든 전 촌장 주칭팡에게 걸쭉한 가래침을 뱉으면 10위안을 주고, 두 번 뱉으면 20위안, 열 번이면 백 위안을 주겠다고. 시골 의리상 지원자가 나서지 않자 돈은 자꾸 올라간다. 이러면 꼭 한 명 정도는 나서는 법. 그자가 주칭팡의 얼굴에 크억, 가래침을 뱉으니 정말로 현금을 척 내주는 밍량. 이후에 모든 촌민들이 나서서 크억, 크억, 가래침을 돋아 주칭팡의 얼굴에다 뱉아버렸고, 얼마나 뱉었는지, 그게 한 번 엉기면 끊기는 것도 아니라서, 주칭팡은 가래가 모인 미끈한 덩어리에 기도가 막혀 그 자리에서 질식사해버리고 말았다. 정말로 원수가 원수 갚은 것. 이제 남은 건 복수가 복수를 낳는 일.
이 꼴을 보던 주칭팡의 외동딸 주잉은 아버지의 장례가 끝나고 집을 떠난다. 밍량에게 이 말을 남기고.
“쿵밍량. 네가 내 앞에 무릎 꿇고 애원하도록 만들 수 없다면 바러우 산맥의 자례로 돌아오지 않을 거다.”
그렇게 된다. 주잉도 주인공인데 빈 말 할 수 없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촌장에 오른 쿵밍량이 진장, 현장, 성장을 넘어서 시장, 그것도 넘어서 직할시장까지 되는 이야기. 자례촌, 작렬촌이 자례직할시로 도약하는 이야기, 이름하여 자례지, 작렬지炸裂誌.
여태 옌렌커의 이런저런 작품 속 스토리가 많이 들어 있다. 가히 “옌의 무덤에 놓을 꽃”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스토리도 그렇고 표현 방식도 그렇다. 얼핏 읽으면 초현실주의적 표현이 만발하다. 주인공 쿵밍량의 기분에 따라 꽃이 피고, 바람도 불고, 눈 내리고, 익은 곡식이 말라 죽으며, 장면의 분위기에 맞추어 오색가지 깃발이 등장하고 한겨울에 따뜻한 바람과 햇빛이 들기도 한다. 옌렌커가 다른 작가들과 더불어 중국의 아방가르드로 불리는 게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옌은 자신의 소설 쓰는 방식도 일종의 풍자로 읽기를 바라는 것 같다. 한 시절, 즉 대약진운동 시기에 단지 2백평의 농지에서 어떻게 1만, 2만 근의 밀을 생산할 수 있었는지, 오직 중국에서만 가능했던 창세기적 신비를 그렇게 야유한 것으로. 이래저래 옌렌커가 또 한 편의 금서를 쓴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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