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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청부업자의 청소가이드 ㅣ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4
하들그리뮈르 헬가손 지음, 백종유 옮김 / 들녘 / 2012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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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나라 사람들이 쓴 (조직)폭력, 살인, 강간 등이 난무하는 범죄소설은 스티그 라르손의 B급 명작 “밀레니엄 시리즈”로 이미 졸업했다. 그럼에도 <살인정부업자의 청소가이드>를 선택한 이유는 출판사 들녘이 낸 “일루저니스트 세계의 작가” 시리즈가 믿음직했기 때문이다.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츠쯔젠, 다니엘 켈만, 에펠리 하우오파, 카를로스 마리아 도밍게스 등 당시엔 널리 알려지지는 않은 작가들의 훌륭하다 까지는 아니지만 매력적인 작품을 소개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서관에 책이 있었다. 주머니가 가벼운 백수 입장에서 내돈내산 해 낭패를 보지 않을 수 있으니 이게 웬 떡, 할 수밖에.
하들그리뮈르 헬가손의 철자는 이렇다. Hallgrimur Helgason. 1959년에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출생한 아이슬란드 사람이다. 그 나라 글자로 쓴 알파벳 표기는 같은 유럽 사람들도 제대로 읽지 못한단다. 흔히 알고 있는 패밀리 네임, Helgason은 가문의 핏줄을 타고 전해지는 이름이 아니라 애칭이란다. 아빠는 헬기 하들그림손 Helgi Hallgrimsson. 아버지의 Hallgrimsson을 물려받아 이름을 하들그리뮈르Jallgrimur로 지었을 것이다. 작품 속에도 이런 아이슬란드의 이름 짓기에 관한 이야기가 조금 나온다.
하들그리뮈르는 1980년대 전반부에 아이슬란드 미술 아카데미와 뮌헨 미술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화가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당연히 당시에 유행하던 미니멀과 개념 미술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 동인과 결별한 후 아이슬란드의 풍경을 그려 미국 보스턴과 뉴욕 등에서 개인전을 열어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살아 있는 화가가 돈을 벌기는 지독하게 어려운 법이라서 헬가손은 밥을 빌어먹기 위해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의 신문사에 정기적으로 뉴욕생활에 관한 기사를 팔아 현금을 얻는다. 기사가 괜찮았는지 아이슬란드 국영라디오에도 뉴욕 맨해튼의 미드타운에서의 생활 기사를 보내 더 쏠쏠한 경비를 얻어 쓸 수 있어, 어라, 그림보다 글을 쓰는 게 돈이 더 되네, 싶어 작업시간을 글 쪽으로 늘이다가 급기야 소설까지 쓰게 된 인물이다. 80년대 후반부터 소설작업을 시작해 1990년에 첫 소설 <헬라>를 출간하고, 파리로 자리를 옮겨 다시 개인전을 하는 와중에 두번째이지만 첫번째 작품과 마찬가지로 알려지지 않을 <멋지게 될 거야>를 출간한다. 1995년에 다시 뉴욕 브루클린에서 살면서 <레이캬비크 101번지>를 썼는데,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도 번역 출간한 첫번째 유명작의 반열에 오른다. 기분이 삼삼해진 하들그뤼미르 헬가손은 1996년부터 아예 고향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로 귀국, 말뚝을 박았다.
레이캬비크로 돌아온 하들그뤼미르는 계속해서 미술회화, 드로잉, 만화 같은 방향으로 시야를 넓히는 동시에 자기 작품이 영화로도 만들어지는 것을 보고 매우 흥미를 느끼기도 한다. 이어 계속적으로 소설을 써서 드디어 대표작 <청부살인업자의 청소가이드>를 완성하고, 이만큼은 아니지만 작은 히트작 <1000° 여인>이 나온다. 이외에도 잦은 미술전시와 연극, 영화까지 온갖 곳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유명인의 자리에 오른 것 같다. 좋은 일이다. 이이의 작업이 나하고는 맞지 않아서 지랄이지만. 나의 원칙 가운데 하나가 “운 좋은 놈을 질투하지 않는다.” 하들그뤼미르 헬가손, 당신의 인생을 즐기기 바란다.
한 시절 유고슬라비아라고 불리던 나라, 지금은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이렇게 다섯 나라로 갈라지고 말았고, 이 분리 독립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던 내전은, 원래 모든 내전이 국가간 전쟁보다 훨씬 잔인한 법이라, 이들의 영토는 거덜이 나고 말았다. 당시 빨간색과 흰색으로 된 체크무늬를 축구 유니폼 상의에 장식했던 크로아티아에서 대대로 사냥을 업으로 하던 보크시치 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전형적인 발칸 반도 남자들인 이 세 부자는 전쟁이 터지자마자 몽땅 지원병으로 최전선에 배치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전쟁중이라도 부대장이 보니까 상당히 위험한 작전이 벌어질 자리에 가문의 남자들을 몽땅 몰아넣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아버지와 형만 보내고 막내는 2선에서 경계근무를 세운다. 발칸의 사냥꾼 족보의 장남이라는 피가 흐르는 형은 귀신 같은 전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세 불리해져 옆의 동료들이 총을 맞아 피식피식 쓰러지는 걸 보더니 한 순간 아드레날린의 과하게 분비되는 바람에 홀로 돌격 앞으로, 각개약진을 해버렸고, 모습을 보고 기겁을 한 세르비아 병사들 몇 명을 총검으로 도륙을 냈으나, 아무리 내전이라도 이미 총검술의 시대는 가버려, 주위에 몰려든 세르비아 병사들이 간단하게 총알을 퍼부어 죽여버렸다. 말이 필요없는 영웅의 죽음이었지만 이 분리독립을 위한 내전에서는 자신의 신체와 목숨을 내 놓은 병사들에게 영웅이라는 호칭을 주어지지 않았다. 같은 날 아버지는 세 불리를 감당하지 못해 후퇴하는 과정에서 독후감엔 차마 밝힐 수 없는 일로 총을 맞아 절명하고 만다. 이에 눈이 돌아버린 막내, 토미슬라브 보크시치는 한 순간에 전쟁귀신이 되어 늙은 ‘여성’을 포함해 수십 명의 세르비아 병사를 죽이는 전과를 올린 후, 이제 아버지와 형이 죽어 없어진 크로아티아에 정이 떨어져 미국으로 이민해 버렸다. 그리하여 폴 오스터가 쓴 <4 3 2 1>의 민스크 출신 중요한 등장인물 이사크 레즈니코프가 뉴욕의 이민국 안에서 이커보드 퍼거슨이 된 내력과 비슷하게, 토미슬라브 보크시치는 ‘톰 보식’이 되었으며, 이후 탈리아 마피아들도 거친 방면에서 명함도 내밀지 못할 발칸 크로아티아 마피아에 합류, 원샷원킬의 대명사이자 전문 청부살인업자로 변신해 잘 먹고 잘 사는, 한 마디로 신세 고쳤다.
청부살인업자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바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평범성을 유지하는 일. 이를 위하여 토미슬라브, 톰 보식은 “자그레브 사모바르”라는 레스토랑에서 웨이터로 일하고 있으며, 인도계 페루 여성 무니타와 정신없이 사랑을 하고 있다. 사랑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열심히 하긴 한다. 물론 알건 모르건 살인청부업자와 연애를 하는 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지만.
톰은 전설의 원샷원킬이다. 66개의 총알을 써서, 66명을 저세상으로 보내 이 방면에도 기네스북이 있다면 당연히 이름을 기록해 마땅하다. 근데 다 좋을 수 있나, 세상일이. 66번째 피의뢰인이 하도 좋은 차를 타고 있어서, 간혹 좋은 차가 보일 경우 대상자만 소거하고 차는 중고차 판매를 전문으로 하는 친구의 형에게 넘겨 가외수입을 올리고는 했는데, 이번엔 정말 좋은 차라, 대상자가 굳이 문 밖에 있을 때 역시 딱 한 방으로 보내버렸고, 시신을 트렁크에 싣고 쓰레기장에 버렸는데, 아뿔사, 죽은 인간이 FBI였다. FBI는 범 미국적으로 열을 받아 당장 악마 같은 스나이퍼를 찾아 죽이려 날뛰기 시작했고, 레스토랑 자그레브 사모바르의 사장이자 톰의 고향 선배인 다칸이 먼저 정보를 입수해 톰에게 스몰렌스크가 고향인 이고르 일리치라는 가명의 여권과 비행기표를 건네줘 자그레브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그리하여 공항에 도착한 톰. 차를 타고 오면서 브루클린의 대형 전광판에 벌써 자기 사진이 올라왔고, 목격자를 찾습니다, 우짜고 저짜고 하는 자막까지 달린 것을 본 톰은 대기소에서 비행기를 기다릴 수 없어 남자화장실 좌변기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바로 옆 칸에 (변장을 위해 머리를 박박 민) 톰과 비슷하게 대머리이며 퉁퉁하게 살진 남자가 들어온 것을 알고, 어떻게 했느냐 하면, 숙달된 조교의 솜씨로 소리 없이 칸막이를 넘어가 역시 소리 없이, 무기도 없이 한 방에 조용히 목을 비틀어버렸다. 그리하여 자기가 입고 온 옷을 싹 벗고, 남자의 옷으로 갈아 있었는데, 아뿔싸, 이 남자는 이름을 “데이비드 프렌들리”라고 하는 성공회 신부였던 거다. 행선지도 자그레브와는 거리가 먼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
이때까지는 몰랐을 걸? 프렌들리 신부로 변장한 철저한 무신론자, 교회에 갈 일은 결혼할 때와 죽어 장례식을 당할 때 말고는 없다고 여겨온 토미슬라브 보크시치가 뉴욕에서 직항으로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에 도착하면 바로 다음날 TV 생방송에 나와 전 레이캬비크 시민들한테, 이 가운데 정말로 종교 TV를 볼 인간이 몇 명이나 될지 모르지만, “데이비드 프렌들리” 신부의 자격으로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이 거하심을 증명하는 연설을 하게 되니 말이지. 거기다가 미국 FBI는 불과 몇 시간만에 미국의 공항에서 발견한 변사체의 정체를 파악할 것이고, 그의 목적지도 알아낼 것이며, 그럼 당연히 수사협조의뢰를 할 예정이리라. 만일 이란이나 북한이 아이슬란드에 수사협조를 의뢰하면 엿이나 먹어라, 하겠지만 거대국가 미국이 한 마디라도 했다 하면 그걸 어떻게 모른 척하겠느냐고? 그리고 하나 더. 뉴욕의 암흑가에 그렇게 분탕칠을 했으니 FBI가 자그레브 사모바르 파를 내비두겠어? 그럼 오랜 세월 동지였지만 천생 의리없는 깡패새끼에 불과한 보스 디칸과 크로아티아에서부터 죽마고우 니코는 또 어떻게 나올지 아무도 모르잖여. 거 참.
근데 작가 하들그뤼미르 헬가손이 크로아티아 출신 토미슬라브 보크시치를 다른 곳도 아닌 자기네 고향 레이캬비크로 초대를 해놓았으니 그럴듯한 연애사건 하나 선물해야 할 것 같지 않아? 말로만 청부살인이 아니라 정말 전문 청부살인업자를 등장시킨 바에 그럴 듯한 액션도 한 두 번 등장해야 하겠고. 그리하여 결론은, 다분히 대표작이 될 만큼 잘 쓴 B급 소설. 시간 죽이는데 더 이상 좋은 게 없을 듯. 역시 이런 작품엔 적절한 폭력과 베드씬이 나와 줘야 한다니까! 본문만 4백쪽, 하루 날 잡으면 그날 다 읽고 동태찌게에 쐬주 한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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