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은 토요일에 시작된다 스트루가츠키 형제 걸작선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보리스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희원 옮김 / 현대문학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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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여간 이 스트루가츠키 형제들의 발상은 별나다. 2016년에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을 읽고 단박에 팬이 되어 이후 <노변의 피크닉>, <신이 되기는 어렵다>, <죽은 등산가의 호텔>에 이어 이제 다섯 번째로 <월요일은 토요일에 시작된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이 형제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외계 생명체의 지구 방문인데, 내가 가장 흥미롭게 읽은 것은 <노변의 피크닉>으로 지구에 왔다 간 외계인들이 그냥 버리고 떠난 것들, 마치 지구 행성으로 소풍을 나왔다가 먹다 버린 김밥 쌌던 알루미늄 포일처럼 그냥 함부로 방치하고 떠난 쓰레기에 접근하는 지구인의 모습이었다. 물론 직접 외계인이 나와 눈사태를 일으켜 산장에 모인 사람들을 고립시킨 채 지구를 떠나는 <죽은 등산가의 호텔>도 근사했지만, 비행기에서 떨어트린 코카콜라 병을 주워 생긴 모습과 용도를 몰라 갖은 상상력을 발휘했던 <부시맨>이 바로 지구인의 모습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 훨씬 흥미로웠다.

  봉급쟁이한테는 끔찍한 말이 될 <월요일은 토요일에 시작된다>는 내가 읽어본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외계 생명체와 관련이 없다. 한 명(단위가 좀 문제다 외계인을 세는 단위를 ‘명’으로 해야 하나 ‘마리’로 해야 하나?)의 외계 생명체도 등장하지 않고, 그들의 영향권에 있지도 않으며, 어떤 형태로도 통신 및 접촉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직 사람들 이야기. 그러나 당연히 우리 같은 장삼이사 보통 사람들은 아니지. 글쓴이들이 당대의 문제아 스트루가츠키 형제들임에야 뭐. 이 책의 부제sub title가 “젊은 과학자를 위한 동화”다. 덧붙이기를, 여기서 말하는 ‘젊은 과학자’는 “호기심이 많고 과학적 활동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을 일컫는다, 즉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은 모든 사람들이 읽어도 무난하다는 뜻이다. “동화”라니까. 여기서 주의할 것은, 많고 많은 동화 가운데 주로 소비에트 연방의 동화를 가져왔다는 거. 아무리 러시아-소련이 유럽 국가이고 서구 특히 불독佛獨과 문화적으로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고 해도 물론 안데르센이나 그림 또는 프랑스 동화가 안 나오는 건 아니지만 압도적인 빈도로 얼어붙은 동토의 전래동화가 많이 나와서 아무래도 그쪽 방면에 취약한 우리가 자연스레 읽기엔 조금, 많이는 아니고 조금, 거추장스럽다. 이제 작품 속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레닌그라드의 젊은 컴퓨터 프로그래머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프리발로프는 때묻지 않은 자연의 풍광을 즐기기 위하여 경차 모닝을 렌트해 북쪽으로 향한다. 목적지는 솔로베츠. 실제 지명이다. 아르한겔스크에 있는 지역으로 스웨덴 영향권하고 맞닿아 있다. 이 작품이 1964년에 출간했으니 소련 시절이다. 이때만 해도 도로망이 좋지 않았는지 사샤(알렉산드르의 애칭)는 자갈 수준을 넘어 거의 바위 수준에 육박하는 돌길을 운전하느라고 녹초가 되어 있었는데, 사냥꾼 차림의 남자 두 명이 히치하이크를 하는 지라, 요즘엔 어림도 없지만 그때까지 만해도 차를 몰고 가다가 걷는 사람을 보면 태워주는 것이 인정이라 고물차에 태웠다. 한 명은 솔로베츠 토박이인 매부리코 로만이고, 다른 하나는 무르만스크 출신의 턱수염 볼로댜. 놀랍게도 이런 시골에서 만난 두 사람이 다 석사학위 소지자다. 당연히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알았다. 사샤는 자기 직업이 프로그래머인 것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것 참, 이 둘이 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지금 프로그래머의 도움이 급하게 필요하다는 거다. 인간의 행복을 위한 연구를 하는 중에 후에 컴퓨터라고 불릴 ‘전자계산기’의 디버그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을 구하며, 조건은, ① 먼저 인간이 된 프로그래머일 것, ② 자원할 것, ③ 기숙사에 사는 데 동의할 것, ④ 월급 120루블을 수락할 것이란다. 근데, 로만과 볼로댜가 사샤를 두고 하는 이야기가 가관이다.

  “저 친구 공간이동 시켜 버릴까?”

  “네가 무슨 소파sofa라도 되는 줄 알아?”

  공간이동? 어디서 들은 이야기지? 그렇다 벽난로에 플루 가루를 뿌리고 펑, 가루가 터질 때 연기 안으로 쑥 들어가면 단박에 런던 킹스크로스 역의 9와 4분의 3 승강장 앞으로 갈 수 있는 거, 기억하시지? 바로 그 공간이동을 이야기하는 중이다. 사샤가 연구소에 입소하겠다 아니다 라는 말도 하지 않았건만 이들은 무턱대고 “니이차보 연구소” 산하 박물관인 “닭다리 오두막”에 사샤의 숙소를 정해버렸다. 그곳으로 순간이동을 시키자, 아니다 하고 있는 거다. 

  모든 독자는 알고 있다. 사샤가 니이차보 연구소에 들어가지 않으면 소설이 안 되는 것을. 그래서 결국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지 알 도리가 없는 할머니 나이나 키예브나가 관리하는 닭다리 오두막에서 첫날 밤을 지내게 된다. 이튿날 할머니에게 도착한 전보를 우연히 보게 된 사샤.

  “전보 #206. 수신자 시민 고리니치 나이나 키예브나. 귀하에 통보합니다. 오늘. 7월 27일 자정에 당해 연례국가비행소집. 첫 회합. 장소는 민둥산. 복장은 정장. 기계교통수단 사용. 자비로 충당. 서명.”

  이쯤 되면 알 만한 독자는 눈치챈다. 자정의 민둥산. 장소는 구 러시아, 현 소비에트 연방. 번쩍 떠오르는 거 읎으셔? 모데스트 무소륵스키 작곡 “민둥산의 하룻밤”. 러시아 지역에서 특정일 자정의 민둥산 하면 악마 축일의 밤을 연상시킨다. 아마 <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서도 나올 거다. 그럼 나이나 키예브나 할머니의 정체는? 뭐긴, 마녀지.

  그러면? 마녀로 추정되는 연령 미상의 노파가 박물관을 관리하면 도대체 연구소를 무엇을 하는 곳인지 궁금해진다.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4차원에도 틀림없이 구멍이 있을 것이어서 그곳을 통해 생물학적 전파를 연결하는 일을 한다. 예컨대 주머니에 5코페이카 동전이 있어 그걸 주고 풍선껌을 사서 씹어 소비를 했지만 다시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까 똑같은 5코페이카 동전이 있는 현상. 어제는 초록 앵무새의 깃털이 있었던 바로 그 자리에 오늘은 앵무새의 시체가 있어서 벽난로에 던져 화장을 시켰고, (하루가 지난 후) 오늘은 똑같은 장소인 저울대에 초록 앵무새가 살아 있다가 점점 시들시들해지고, (하루가 또 지난) 오늘은 저울대에 앉은 앵무새가 조잘조잘 떠들고 있는 현상.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걱정하지 마시라, 책의 마지막 부분에 가면 다 나온다.

  만일 18세기에 몽테스키외 선생이, 심정지로 사망 판정을 받은 사람이 45분 후에 다시 소생했다는 보고를 받으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모르기는 해도 몽테스키외 선생은 반계몽주의로 급격하게 선회했을 것이며 유물론을 포기하고 신비주의로 돌아섰을 것이다. 과학은 가끔가다가 이런 짓도 한다.


  그럼 니이차보 연구소는 어떻게 구성이 될까? 다른 모든 연구소와 마찬가지로 경비, 총무, 회계, 인사 등의 관리부서도 있고 중요한 연구부서로는 마법과학과 마술과학 팀이 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마법과 마술은 무대 위에서 펼치는 순간 눈속임이나 자잘한 손기술이 아니다. 여태까지 밝혀지지 않은 국가적 기밀사안으로, 바야흐로 냉전의 클라이맥스를 향하고 있는 1960년대 상황에서 선제적으로 스푸트니크 호를 쏘아 올려 우주와의 교신을 시작한 소비에트 연방은, 시간적 공간인 4차원의 개발에도 박차를 가해 막강한 적수인 미합중국을 다방면으로 압도하고자 하는 야심을 품고 설립한 연구소다(양심상 밝히는데, 구라다. 내 생각에 그렇다는 말이다).

  이런 연구소에서 벌어지는 일을 기록하자니 당연히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이곳에서 벌어지는 “난리법석”을 소제목으로 해서 첫 번째 이야기 “소파를 둘러싼 난리법석”, 두 번째 이야기 “난리법석 중의 난리법석”, 세 번째 이야기 “온갖 난리법석”으로 구도를 짜 재미난 상상력을 풀어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마법과 마술을 위한 과학적 난리법석에 참여하는 우당당탕 연구원들. 이렇게 재미난 연구를 하는 월 120루블짜리 봉급쟁이들이니까 기꺼이 월요일은 토요일부터 시작해서 일 주일이 월,월,월,화,수,목,금요일이라는 거 아냐?

  하여간 아르카디와 보리스 스트루가츠키 형제들, 참 골 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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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11-23 1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드뎌 별 5개 떴네요~~
바로 이 책 찝합니다. 실로 오랜만에 올라온 별5개!!
믿고 보는 뽈님의 별5개 작품!!ㅎㅎ

Falstaff 2023-11-23 18:28   좋아요 1 | URL
넵. 5별입니다. 전적으로 ˝재미˝ 하나 보고 다섯 개 줬습니다!
ㅎㅎㅎㅎ 뭐니뭐니 해도 역시 소설은 재미가 있어야.....
 
애나 크리스티
유진 오닐 지음, 이형식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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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유진 오닐. 오닐의 책은, 일부러 검색을 해보지는 않지만 눈에 띄기만 하면 내용과 관계없이 얼른 사고 본다. 이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번엔 사두고 너무 오래 묵혔다가 읽는다. 도서관을 이용하니 사 둔 책은 언제라도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지 얼른 읽게 되지 않았다.


  스웨덴 이민자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영화 <스타 탄생>에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함께 출연한 저음의 가수와 우연히 이름이 같다. 하지만 오닐의 크리스는 뱃사람. 일년에 집에 있는 날이 며칠 안 되는 천생 뱃꾼인 줄 알았는데 사실 바다를 증오한다. 아내가 죽을 때도 바다에 있었고, 바다 일을 버리지 못하여 하나 있는 딸 애나를 보살피지 못한다. 그리하여 미국의 사촌에게 보내 바다와 떨어진 곳에서 땅을 밟고 살고, 농사를 짓는 남자를 만나 안정된 삶을 살기를 바랐다. 지금은 뉴욕을 포함한 동부 해안과 오대호를 돌며 석탄 바지선 선장을 하고 있다.

  막이 오르면 뉴욕 부두 근처의 술집 ‘자니 더 프리스트’. 아직 등장하지 않은 크리스한테 술집 주소로 편지가 와 있다. 늘 이곳으로 편지가 오면, 물론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단골 크리스가 뉴욕에 들를 때마다 편지를 전해주고는 했다. 이번엔 여자 글씨의 편지 한 장. 크리스는 오십 줄의 사내. 애나를 친척집에 보낸 것도 십오 년 전. 설마 홀아비가 여태 혼자 살고 있다고 믿지는 않겠지? 바지선은 대개 살림을 살 수 있게 개조한 것이 보통이다. 지금은 나이 들어 퇴물이 된 논다니 마티와 함께 살고 있다. 전작이 있는 크리스가 술집에 들어와 쾌활하게 위스키를 몇 잔 마신 다음 편지를 받는다. 독자들이 예상할 수 있게 딸 애나한테 온 편지다. 곧 뉴욕에 도착한다는. 이어서 동거하고 있는 마티도 등장해 함께 술을 마시다가 잠깐 크리스가 퇴장하는 틈을 타 주인공 애나가 등장한다.

  애나. 친척집에 들어가서 (애나의 말에 의하면) 노예처럼 시키는 일을 죽도록 하다가, 열여섯 살 됐을 때 거구의 힘센 셋째 아들한테 겁탈을 당한 후 도망을 나와 베이비시터로 있었다. 이 보모란 직업이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씨가 아는 애나의 마지막 모습. 보모라고 별 다른 것이 없어서 혹독한 대우를 견디지 못한 애나는 다시 집을 나와 매춘업소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몇 년. 병이 들어 입원해 치료를 받은 후 완행 열차를 타고 아버지한테 의지하려고 뉴욕에 도착한 것.

  마티는 한 눈에 알아본다. 애나의 지금 처지를. 상황 파악을 잘 하고 천성적으로 마음이 아름다운 마티. 세상에 원수질 일은 없는 것이 좋다는 신조의 마티는 조용히 크리스를 불러 이야기한다.

  “잘 들어! 나는 바지선으로 가서 짐을 싸서 날라 버릴 거야. 저 안에 그녀가 있어. 당신 딸 애나 말이야. 방금 와서 당신을 기다려. 잘 돌봐 줘, 알았지? 아팠대. 자, 안녕! (뒷방으로 가서 애나에게) 잘 있어, 아가씨. 나 가야 돼. 또 봐.”

  마티가 세월과 집구석과 부모를 잘못 만나서 그렇지 이만한 천사가 또 어디 있을까? 천사는 이렇게 1막에 잠깐 나오고 사라진다.


  2막부터 드라마는 시작한다.

  열흘 후 매사추세츠 프로빈스타운 항구에 정박 중인 바지선이다. 마티는 정말로 그날로 짐을 싸서 사라졌고 대신 애나가 아버지와 함께 산다. 이 날은 안개가 자욱해 코 앞의 사물도 식별하기 힘든다. 부녀 사이에 말다툼이 생긴다. 아버지는 딸이 농장에서 건실한 남자를 만나 살기를 바라고, 딸은 남자란 남자는 다 겪어본 베테랑이나 된 것처럼 남자라면 넌더리가 나고 특히 아버지한테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친척집 셋째 아들에게 당한 능욕의 기억 때문에 농촌은 아예 머리에 떠올리기도 싫다.

  이때 바다에서 들리는 사람의 목소리. 어제의 폭풍우에 난파당한 선원들이 조각배를 타고 탈출해 노를 저어 온 것. 이 가운데 웃통을 벗어 던진 채 더러운 작업복만 걸친 아일랜드 남자 버크. 어깨가 떡 벌어지고 180센티미터가 넘는 건장한 사나이로 얼굴은 강하고, 거칠고, 대담하고 반항적으로 잘 생긴 사내. 잠을 못 자 핏발 선 짙은 색 눈이 애나를 바라보는데 팔뚝의 핏줄이 푸른 실처럼 울퉁불퉁하다.

  화물선의 화부였으며 생긴 모습대로 다혈질이라 거침없이 싸움을 걸고, 진짜로 싸움을 하고, 싸웠다 하면 무슨 수를 쓰든 상대를 때려눕히는 사내. 버크가 등장하는 순간 관객과 독자는 애나와의 연애가 생길 것임을 짐작한다. 둘은, 특히 남자에 학을 뗀 애나는 버크의 사랑에 코웃음 치며, 아버지 크리스 역시 버크가 육지 남자가 아닌 뱃놈인 것을 심하게 마땅히 생각 못한다.

  3막에 들어서면 갈등이 심해져 버크는 애나에게 청혼을 하려 하고, 아버지 크리스는 주머니 속에 칼을 넣고 담판을 지으려 도사리며, 애나는 자신이 정말로 버크를 사랑하는지 아닌지 확정하지 못한다.


  당연히 나는 결말을 이야기하지 않을 것.

  석탄 바지선에서 벌어지는 치정극 하나가 생각난다. 지아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3부작 가운데 <외투>. <외투>에서는 젊은 아내 죠르제타와 부정을 저지른 청년 루이지를 늙은 남편 미셸이 단매에 때려 죽이지만 <애나 크리스티>에서 딱 벌어지기는 했으나 작은 체구의 크리스 선장이 거구에 단단한 몸을 가진 천하장사 마징가 같은 버크와 좋은 상대가 될 수 있을까?

  그러나 안심하시라. 유진 오닐 치고 '그나마' 순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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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3-11-21 0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뽀빠이와 마징가의 대결인가요. 기운 센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 주제가 흥얼거리면서 책 사러 가요.

역자 이름이 낯익어서 보니 펭귄 프루스트 역자와 동명이인이군요. (그 역자일 리는 없죠 당연히)

유부만두 2023-11-21 08:44   좋아요 1 | URL
겸사겸사 도밍고의 루이지 이중창 보고왔어요. (20살로 우기는 50이던대요) 외투 언급 감사합니다.

Falstaff 2023-11-21 15:40   좋아요 0 | URL
뽀빠이와 마징가가 대결 직전까지 가는군요. 근데 게임이 안 될 겁니다. 마징가는 무쇠 팔, 무쇠 주먹인데 사람의 팔과 주먹이 무슨 수로 버티겠습니까. ㅎㅎㅎㅎ
옙. 프루스트 이형식 선생이 좀 더 선배일 겁니다. 불어 역자 가운데 제가 좋아하는 1인입니다. ^^

와우, 유튜브 보셨어요? 진짜 드라마틱 오페라입니다. 푸치니 다운 엽기 막장 불륜 치정 드라마요. ㅋㅋㅋㅋㅋ
 
타이탄의 세이렌
커트 보니것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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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있는 작가.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으로도 신기하게 독자한테 기발한 웃음을 주는 사람. 이 양반이 소설 말고 물리학이나 기계공학이나 프로그래밍을 공부했으면 전 인류를 아무런 고통 없이 한 방에 보낼 수 있는 기상천외한 폭탄을 만들거나, 극소수 총명하고 건강한 인류를 태운 채 지구와 거의 흡사한 행성을 찾아 우리 은하계 밖을 날고 있거나, 십년 안에 인류의 뇌에 작동해 종의 존속을 포기하게 하는 AI 프로그램을 개발할 지도 모른다. 즉 거의 신과 비슷한 반열일지도. 보니것이 자주 말하듯이 신은 인간의 소망과 사랑과 헌신과 흥망에 전혀 관심이 없다. 당신들도 여태껏 살아온 내력을 비추어 보면 눈에 훤히 보이지 않는가. 신이 당신의 삶을 도와준 적 있어? 그리하여 어차피 인간은 자기가 가진 운칠기삼 또는 운팔기둘로 살 때까지 버티고 보는 게 장땡이다. <타이탄의 세이렌>은 오래전에 <타이탄의 미녀>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었는데 이제 새로 번역을 해 문학동네에서 냈다. 근데 왜 ‘세이렌siren’을 ‘마녀’가 아니라 ‘미녀’라고 했었을까? 좀 귀띔을 드리자면 주인공 윌리엄 나일스 럼포드가 진짜 주인공 맬러카이 콘스턴트한테 토성의 가장 큰 위성인 타이탄으로 가게 될 것이라 예언하자 콘스턴트는 영 탐탐치 않게 생각한다. 럼포드는 그런 콘스턴트에게 타이탄에 가면 볼 수 있는 세 미녀의 사진을 보여주어 콘스탄트의 심장을 벌렁벌렁하게 만든다. 바로 이게 세이런의 노래였거늘, 미녀일지언정 마녀라고 하는 것이 더 그럴 듯한 거 아닌가 싶다. 정말 거기 가면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 세 명이 있느냐고? 있다. 책에 의하면 반드시 그렇다. 지금도 있으니 믿으시라.


  책 뒤편에 실린 작가 연보를 보면 보니것은 서른일곱 살 때인 1959년에 두 번째 책 <타이탄의 세이렌>을 출간한다. 그리고 10년 후 여덟 번째로 <제5 도살장>을 낸다. 기억하시지? <제5 도살장>에서 주인공 빌리 필그림이 드레스덴 대공습 때 트랄파마도어 행성에서 지구에 도착한 외계인에게 납치당해 트랄파마도어에 있는 동물원에서 몇 년간 알몸으로 구경거리로 지내다가 귀환했다는 거(물론 드레스덴 시절 포로수용소 경험을 비유한 거겠지만). 근데 정말로 트랄파마도어 행성이 있었다. <제5 도살장> 십 년 전부터. 이 책에서도 트랄팔마도어 행성이 나온다. <제5 도살장>과는 달리 그 행성의 주민들은 전부 기계로 되어 있다. 그들이 보기엔 지구와 지구인들이 워낙 사소한 것들이라서 몇 십만 년 전부터 아주 사소한 필요에 의하여 지구의 문명을 발달시켜왔고, 문명 특히 과학기술의 발달은 전쟁 무기의 개선과 발명보다 확실하게 빠른 게 없어서 지구 역사에 서술된 전쟁만 만 건이 넘는다며? 그렇다며? 그렇게 해서 드디어 지구인이 트랄파마도어 우주인, 아니, 우주기계가 필요한 부품을 만들어 이를 운반하기 위해 맬러카이 콘스탄트를 타이탄에 보내는 거다. 맬러카이 콘스탄트가 “충실한 배달부”라는 뜻이란다.

  우주, 진정한 무한대의 공간에는, 한 마디로, 없는 게 없다. 이해하기 힘든 개념으로, “우주에는 옳은 방식이 다양하게 존재하는데, 다양한 진실이 서로 부딪히지 않고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인 ‘크로노-신클래스틱 인펀디뷸럼’이란 것이 있단다. 태양을 원점으로 오리온 자리에서 가장 밝은 별인 베텔게우스까지 뻗는 뒤틀린 소용돌이 안개 속에서 맥동을 치다가 지금은 파동 현상으로 존재하는데 하필이면 지구와 화성 사이에 밀집했단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다중 차원과 유사해서 생명체일 경우 여러 시간 차원에 걸쳐 널리 흩어져버리고 만다. 이것 때문에 인류는 모든 창조의 책임자가 누구며, 모든 창조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하여,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진실은 알려고 하지 않은 채, 외계로 우주로, 바깥으로 밀고 나가고자 하는 일이 초장에 꽉 막혀버리고 말았다.

  주인공 윈스턴 나일스 럼포드. 미국의 단 하나뿐인 진정한 계급이다. 대통령의 1/10, 탐험가의 1/4, 동부해안 주지사의 1/3, 전업 조류학자의 절반, 훌륭한 요트 항해사의 3/4, 웅장한 오페라의 적자를 보전해주는 사람의 전원을 배출한 이 계급 출신은 극소수의 정치인을 빼놓고는 절대 돌팔이가 없는 특징이 있다. 이들은 계급에 건강하고 매력적이고 똑똑한 아이들을 공급하기 위하여 가끔 친족 결혼도 불사하는데 럼포드 부부도 8촌 남매 사이다. 럼포드는 5천8백만 달러를 주고 민간인으로는 최초로 개인 우주선을 소유한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하루는 그의 커다란 개 카작과 함께 정말로 우주선에 올라 화성 근처의 크로노-산클래스틱 인펀디뷸럼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크로노’는 시간이라는 뜻. 그곳에서 여러 시간의 차원으로 분산되어버린 럼포드와 카작은 59일에 한 번씩 우리 은하, 태양계, 지구, 미합중국, 로드아일랜드주, 뉴포드에 있는 럼포드 대저택에서 물질화를 통해 육신과 육성을 갖추어 등장한다. 시간과 장소 등을 망라하여 존재하는 “것”이라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고, 미래가 눈에 훤히 보이지만 그것을 타인에게 이야기할 수는 없다. 아쉽게도 물질화 해 모습을 드러내는 시간도 얼마 되지 않고.


  진짜 주인공 맬러카이 콘스탄트는 얼마 전 비어트리스 럼포드 부인의 초청을 받아 요구대로 선글라스에 콧수염으로 변장한 채 럼포드 저택으로 숨어들었다. 이 날이 럼포드의 물질화가 있는 날이라 한 남자와 그의 개가 허공에서 물질화하여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광경을 보기 위해 높은 담장이 시야를 막고 있을지언정 물질화가 이루어진 현장에 가까이 있었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한 군중이 물밀듯이 모여 있었다. 맬러카이 콘스탄트는 럼포드 부인과 비슷한 30대 초반으로 버지니아 주립대를 다니다가 1학년 때 퇴학을 당했으나, 미국 최고의 부자이자 악명 높은 방탕아로 캘리포니아 할리우드에 살고 있다. 헬기를 타고 와서 다시 리무진으로 갈아타고 도착한 그는 균형 잡힌 체형에 날씬한 헤비급 몸매와 어두운 피부색을 지닌 잘 생긴 남자다. 알코올과 마약, 여자와의 관계 후에 오는 우울함을 벗어나기 위해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배달할 품위있고 중요한 메시지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좌우명이 “배달부는 기다린다.”

  당연히 비어트리스 럼포드 여사도 미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큰 키와 곧은 몸. 세세한 이목구비는 의미가 없었다. 머리통 대신 대포알이 있었어도 웅장한 구도에 잘 맞았을 거 같다. 그래도 얼굴이 있긴 있다. 심지어 흥미롭다. 뻐드렁니가 난 인디언 전사처럼 보이는. 그러나 사람은 누구든 그녀가 감탄할 만한 외모의 소유자라고 재빨리 덧붙여야 했다. 그래, 저것도 사람의 생김새로 대단히 괜찮을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야, 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변주, 놀라운 매력을 지닌.


  하여간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는 럼포드는 콘스턴트에게 말한다. 콘스턴트는 토성의 위성인 타이탄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그러나 거기까지 가고 싶지 않은 미국 최고의 부자 콘스탄트.

  상상할 수 없는 최고의 쾌적한 기후가 있습니다. 시큰둥.

  태양과 베텔게우스 사이에 있는 존재 중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인 타이탄의 여자들도. 오, 그래?

  럼포드는 한 방 더 질러버린다.

  당신이 타이탄에 갈 때 럼포드 부인이 동행할 것입니다. 크로노라는 이름의 아들과 함께요.

  그럼 당신의 아들 아닙니까? 

  나는 천사처럼 재생산을 하지 못합니다. 첫번째 물질화 이후엔 아내마저 나를 만나기를 거절하지요. 크로노는 시간이란 뜻이며 콘스턴트와 럼포드 부인 비어트리스 사이의 미래의 아들입니다. 이름은 화성식으로 지었고요.

  이렇게 이야기해도 지구 행성을 뜨고 싶은 마음이 1도 없는 맬러카이 콘스턴트와 비어트리스 럼포드는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긴. 가긴 가겠지. 그러면 비어트리스는 단테의 베아트리체처럼 콘스턴트를 구원해줄 수 있을까? 그건 내가 가르쳐드릴 수 없고,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힌트는 벌써 저 위에서 줬다. 트랄파마도어 행성에서 누군가가, 아니지, 한 기계가 충실한 배달부를 기다리고 있다고. 근데 정말 콘스턴트가 그걸 배달할 수 있을까?

  하여간 커트 보니것의 대단한 스케일의 농담은 입이 쩍 벌어진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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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등 - 허준 중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44
허준 지음, 권성우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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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작가를 읽기로 하고 서가를 둘러보니 허준이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도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시리즈 44번이라면 근현대 문학사에 작가의 이름이 또렷하게 새겨진 인물이었을 텐데, 동의보감을 지은 16~17세기 허준 말고는 아는 바가 도통 없어서, 얼른 빌려 읽은 책. 당연하게 책의 앞날개에 쓰인 허준의 약사에 먼저 눈이 갔다.


  “허준은 19010년 2월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중앙고보 졸업 후 일본 도쿄에서 유학했다. 1934년 호세이 대학 문과를 수료한 뒤 귀국하여 『조선일보』에 <초>, <가을>, <실솔蟋蟀(귀뚜라미)>, <시詩>, <단장> 등 다섯 편의 시를 발표하여 시인으로 데뷔했고, 1936년 비평가 백철의 추천으로 『조광』에 <탁류>를 발표하여 소설가로 등단했다. (중략) 1945년 12월 27일 홍명희, 임화, 박태원, 김기림 등과 함께 ‘경성조소문화협회京城朝蘇文化協會’ 창립식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이 주최하는 ‘전국문학가대회’에 참석하여 조선문학가동맹 소설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해 첫 소설집 『잔등』을 을유문화사에서 발간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인민군을 따라 월남하여 잠시 서울에 머물렀고, 1958년 니콜라이 두보프의 <고독>을 번역했다는 것 외에 이후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군. 공산주의자로 전쟁 전에 월북, 침략군과 함께 서울 진주. 1958년 이후 행적 미상. 이러면 내가 이이의 이름을 모르는 건 당연하다. 도무지 배울 수가 없었을 테니까. 게다가 남긴 중단편이라고 해봤자 열 편 남짓. 그것도 미완성 작품까지 포함해서. 가만. 이 정도인데 다른 출판사도 아니고 우리 문학이라면 둘째 자리를 줘도 깽판을 칠 악마처럼 거만한 문학과지성사가 자기네 전집에 이름을 올렸다? 얼른 4층 열람실에 올라가 읽기 시작, 그날로 다 읽어버렸다. 살 빠지면 의자에 오래 앉아 있어도 엉덩이에 뾰루지 안 난다. 금방 배겨서, 아파서 그렇지. 다섯 편의 중단편소설, 본문만 240쪽가량, 해설, 연표, 자료 합치면 290쪽.


  윽. 놀래라. 허준의 문장은 길다. 긴 문장을 쓰는 작가들이 노상 그렇듯이 현란하게 달린다. 그러다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가끔 독자로 하여금 읽다가 잠깐 멈춰서 지금 읽는 절passage에서 주어와 술어를 찾느라고 헤매게 만들기도 한다. 게다가 30~40년대 단어와 이북 사투리가 섞여 있으면 독자는 가끔 환장換腸, 창자가 뒤섞여지기도 하니 각오를 해야 할 것. 요즘 젊은 분들은 엄두도 못 낼 한자어까지 불쑥 등장하면 말이지. 가끔. 정말로 가끔. 이런 것만 미리 감안을 하든지 각오를 하고 읽으면, 장담하니, 긴 호흡의 문장을 읽을 때의 구구절절함, 애간장이 녹는 공감과 격통 같은 것에 가슴을 절일 수도 있고, 한 풍경이 눈 앞에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리게 삼삼할 수도 있고, 작가는 6이라고 이야기 했음에도 독자는 아득바득 8이나 9 정도로 들을 각오를 하게 만들기도 한다. 긴 문장이라도 세상의 허튼 긴 문장하고 이런 면에서 차별이 진다. 아주 맛나는 문장과 소묘와 방점과 속을 채운 감정들.

  모두 다섯 편의 중단편을 실었다. 이 가운데 나는 데뷔작인 <탁류>를 인상깊게 읽었다. 물론 대표작은 표제로 쓴 <잔등殘燈>이겠지만 <탁류>가 더 내 마음에 와 닿았다는 데 어쩌랴.

  주인공 현철은 천성이 우울하고 젊음의 비통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퇴폐적 낭만 취향의 인물로, 스스로를 무능력하고 인생에 해태懈怠한 사람으로 치부하던 시절에 “만나기도 처음이요, 보기도 처음인 덩실덩실 벌레와 같이 뒹구는 음분한 늙은 창부 무릎 위에 몸과 마음과 돈과 아쉬운 것 없이 다 맡기고, 나를 건져달라고 하던 그것이, 그것이 또 동시에 (내) 결혼을 의미하였던 것”, 즉 한 시절엔 향란이란 이름으로 “총독부 누구누구, 경찰서 누구누구, 변호사 의사 무슨 시장패들 할 것 없이 다 참 쳐주”던 기생이었다가 나이 들어 싸구려 창부로 떨어진 여자를 골라 그날로 사랑을 맺고 결혼을 해버린 터수다 향란의 본명은 그냥 ‘순’이라고만 나온다. 전형적으로 잘못된 결합인데, 신분의 차이를 차별이라고 생각하지 말기를 바라면서 말씀드리자면, 현철은 중산층 이상의 인텔리겐치아, 순이는 세상의 밑바닥 출신이다. 둘이 결혼이라는 것을 “해버린” 후에, 순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있는 집 아드님이 처음엔 그리 혼인이라는 것을 했지만 수치스러운 자신하고는 재산도, 배움도, 가정교육도, 환경도, 생각하는 방식도 완전히 다른 터에, 언젠가는 자기한테 싫증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 게다가 혼인 생활이 언제나 즐거울 수는 없는 법, 심하게 부부싸움을 하기도 할 것인데 함부로 몸을 팔던 자신의 이력이 남편의 입을 통해 한 번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시한폭탄성 조바심을 강박처럼 갖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익힌 밑바닥 생활은 세상의 모든 남자가 전부 자신이 상대로 하던 치들처럼 색을 밝혀 틈만 나면 치마를 들치려 하는 본성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파렴치한으로 보게 만들었고, 이 범위 안에 당연히 남편 현철도 포함되리라 단정한다. 그리하여 부부가 세들어 사는 당시 의식수준으로 보면 가장 하층민인 갖바치 집의 고명딸 채숙이, 이제 소학교에 다니는 어린 아이라도 순이는 채숙이가 여자라는 이유로 심각한 질투를 부린다. 물론 남편이 어린 채숙이하고 손을 잡고 강변에 산보를 가면 기분이 좋지는 않겠지. 그래도 기어이 이사를 가게 할 정도로 강짜를 부리면 그건 문제가 아닐 수 없지 않을까. 그리하여 새로 이사를 간 셋집에는 이번엔 채숙이 다니는 소학교의 여선생이 하숙을 하고 있어서 순이는 새롭게 복장이 터지기 시작하고, 늘 그렇듯이 우연히 순이로 하여금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져서 드라마는 점점 파국으로 치닫게 되고, 뭐 그런 이야기.

  이렇게 작품 이야기를 하는 건 사실 반칙이다. 내용은 그러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이 빠졌다. 등장인물의 감정의 움직임. 미세하게 시작하였으나 결국 격동을 치고 마는 감정의 변화와 갈등을 어떻게 묘사하느냐가 소위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거 아닌가. 오랜만에, 비록 지금 시각으로 보면 낡고 헤졌지만 흥미롭게 읽었다. 어차피 사는 건 고통 속의 몸부림이란 걸 다 알면서도 참지 못하고 결국 폭발해버리고 마는 저 30년대식 아침 드라마. 그게 이렇게도 흥미로울 수 있다니.


  두 번째 작품 <습작실에서>는 도쿄를 무대로 하는 전혀 흥미롭지 않은 조선 유학생 이야기, 세 번째 <잔등>은 허준의 대표작으로 해방이 되고 간도에서 조선으로 귀향하는 한 공산주의자의 여로를 그린 작품, 네 번째 <속습작실에서>도 꽤 재미있었으며, 마지막 <평대저울>은 해방 후 가난한 인텔리겐치아의 생활을 쓴 작품이지만 그리 울림은 없다.

  허준. 작품이 워낙 적어서 이제 더 읽을 건 별로 없겠지만 여태 이이의 작품을 모르고 살았다는 것도 별나게 생각이 들만큼 좋은 작가 아닌가 싶다. 우리 문화계에 분단이란 것이 얼마나 큰 손실을 초래했는지 아쉬운 바가 작지 않다. 남쪽에 살고 전쟁통에 죽지 않았다면 더 좋은 작품활동을 계속 했을까? 아무래도 그랬을 확률이 훨씬 높겠지. 그래도 자기 신념을 따랐으니 언제 죽어 귀신이 됐는지도 모르는 인생마저 후회는 없었으리라. 그리 생각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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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11-17 06: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커트 보니것, <타이탄의 세이렌>
화요일, 유진 오닐, <애나 크리스티>
목요일, 아르카디, 보리스 스트루가츠키 형제, <월요일은 토요일에 시작된다>
금요일, 오라시오 키로가,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꼬마요정 2023-11-17 10:32   좋아요 1 | URL
폴스타프 님은 다 계획이 있군요!!!
분단 때문에 우리가 못 읽거나 알지 못하는 작가가 많겠죠ㅠㅠ 전 가끔 북한 쪽 지명이 나오면 저기가 어디 붙어있더라... 한참 생각하곤 해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Falstaff 2023-11-17 15:35   좋아요 0 | URL
전쟁 이전에 알던 작가는 거의 다 풀린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전후에 활약하는 작가는 뭐 그렇게 알고 싶지 않고요. 북의 체제에서는 문학이란 자체가 정치의 도구일 뿐인데요 뭘.
분단이 되지 않았으면 훨씬 더 많은 사람이 훨씬 다양한 장소와 배경과 기타등등을 향유할 수 있었겠지요. 그건 정말 아쉽습니다.

syo 2023-11-17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평가원 9월 모의고사에 한번 출제된 적 있는 작품이더라구요. 허준이라는 소설가가 있다는 걸 문제풀다 알게되었습죠....

Falstaff 2023-11-17 15:32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까? 그건 그거고 싸이오 님, 오랜만입니다! 아직 심통이 나신 걸 보니 여전하신 모양입니다!

stella.K 2023-11-19 1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헙, 문학과지성사가... 악마 같은 출판사인가요?
저는 출판사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어서 말입죠.

탁류는 책만식만 썼던 게 아니군요. ㅎ

Falstaff 2023-11-20 04:35   좋아요 1 | URL
그럴 리가요.
문학과지성사는.... 당연히 악마 같지 않은데, 다만 악마같이 거만하다는 것입지요.
제 친구 가운데 가톨릭 신부가 하나 있어요. 그 동무한테 제가 자주 쓰는 말로 ˝너는 천사처럼 순결하고, 악마처럼 거만해.˝ 물론 어느 책에서 본 글입니다. 그게 입에 붙어서 자꾸 쓰게 되네요. ㅋㅋㅋㅋ

stella.K 2023-11-20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어느 책에 나온 말일까요? 그 신부님 인기 많으시겠는데요? 함 뵙고 싶네요. ㅋㅋ
 
제3제국의 공포와 참상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이승진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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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인생의 황금시기라고 하지만 사실은 된장인지 청국장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20대에 유서 깊은 뮌헨 대학 의학부에 입학해서 한 학기 만에 때려치우고 연극판에 들어간다. 1922년엔 희곡을 발표해 클라이스트상도 수상하는 등 앞길이 유망했다. 지금 뮌헨은 오케스트라, 오페라, 연극, 하다못해 축구 같은 전방위적 문화의 중심지라 할 수 있지만 당시엔 다른 건 몰라도 문화적으로는 변두리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야심이 꼭대기까지 찬 브레히트는 1924년 베를린으로 옮겨와 본격적인 커리어를 쌓기 시작한다. 하지만 1920년대의 독일. 1차 세계대전 패망으로 막대한 전쟁보상금을 물어주어야 했고,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등 정치, 경제 역시 폭망 상태에 이르러 당연히 정상적으로 운행되는 사회 시스템은 전무했다. 먹을 것이 해결된 다음에 다른 분야로 눈을 돌릴 여유가 생기는 것이니까.

  브레히트를 스타덤에 올려 놓은 것은 우리에겐 숱한 재즈 싱어가 노래한 노트 “Mac the Knife”가 든 <서푼짜리 오페라>일 듯. 이 작품은 현대음악 작곡가이지만 전혀 어렵지 않은 흥미로운 곡으로 일세를 풍미한 쿠르트 바일이 1928년에 정말 오페라로 작곡해 기존 오페라 가수의 발성법과 판이하게 다른, 제3제국의 근엄한 지도자들이 듣기엔 심각하게 저속해서 싸구려 같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으나, 당시의 독일, 베를린이 전 세계에서, 그리고 독일의 전 역사를 통해서 가장 싸구려 신세로 떨어진 것과 묘하게 닮아 있었던 거다. 이렇게 독일의 딱한 정치 경제 실정을 체득하게 된 브레히트가 필요에 의해서 사회현상을 공부하다가 마르크스 주의에 근접하게 된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물론 그렇다고 공산당에 입당할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렇게 하지도 않는다. 근데 독일엔 벌써 1920년부터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 즉 나치가 존재했고, 나치가 전력을 다 해 박멸해야 할 것은 장애인 등의 육체적 약자, 유대인, 그리고 공산주의자였으니, 이들의 눈 속 장작개비 같은 존재 가운데 한 명이 브레히트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1933년. 2월 28일 나치 일당은 독일의 제국의사당에 불을 싸질러 버렸고, 퇴폐 예술가로 낙인이 찍혀 이미 나치의 살생부, 처형자 명단에 이름이 올랐던 브레히트는 즉각, 바로 다음날인 3월 1일 독일을 탈출한다. (책의 해설에 의하면 그렇고, 위키피디아에는 1월에 벌써 망명길에 올랐다고 쓰여 있다. 내가 귀신이 아닌 바에 어느 게 맞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유럽 각지를 배회하던 브레히트는 덴마크에 정착하는 듯했으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독일이 덴마크를 침공하자 스웨덴, 핀란드, 모스크바를 거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해 미국행 화물선으로 로스앤젤레스 해변을 밟는다. 이때가 1941년. 좋았을 거 같지? 당시 미국은 공산주의를 호환, 마마보다 훨씬 무서운 것으로 취급해 브레히트는 줄곧 사찰의 대상이었으며, 일체의 경제적 지원도 받지 못해 먹고 살기 위하여 원고를 쓰고 팔아야 했다. 이 시기에 집필한 대표 희곡 작품이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갈릴레이의 생애> 등. 앞에서 말한 <서푼짜리 오페라>와 <살아있는 자의 슬픔>을 합해 네 작품을 한 권에 묶어 동서문화사에서 판매하고 있으니 한 권 장만해 책장에 꽂아 놓아도 큼지막한 장정이 근사할 터. 그러라는 말씀이 아니라 말이 그렇다는 거.


  유럽의 모처에 숨어 살던 브레히트는 1937년에 이 작품을 쓰기 시작한다. 자신이 베를린에서 보고 체험했던 것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자기는 망명길에 올라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자기보다 나중에 탈출한 사람에게서 들었거나, 유럽 각지에서 송출하는 단파 라디오 방송을 들었거나, 신문, 잡지, 보고문을 읽었거나, 망명 전에 경험하고 들은 것을 토대로 상상한 것을 작품으로 쓰는데, 프롤로그 격인 “독일 열병식”에서 말한 것과 같이 1933년 1월 30일 다수당 당수로 총리 자리에 오른 히틀러가 정권을 탈취한 후 모든 전쟁준비가 끝났다고 선언한 햇수로 5년째, 1937년 현재, 완전한 전체주의 국가, 일인 독재국가, 경찰국가 치하의 독일을 배경으로 한다.

  작품은 각양각층 사람들이 나치 치하에서 겪는 공포와 허위, 배반, 불신, 적응, 밀고, 피해의식 같은 것이 다양하게 스물일곱 장면의 쇼츠로 구성된다. 민족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불평불만자를 고발하려고 동네를 순찰하다가 소리나는 곳에 대고 무작정 총질을 하는 친위대 간부들, 이웃이 친위대에 체포된 것을 보면서도 이웃이 입은 두툼한 재킷에 더 신경이 쓰이는 소시민 부부, 대화를 즐기면서도 사소한 부정적인 의견을 내는 이웃의 어깨에 흰색 분필로 은밀히 십자를 표시하는 돌격대 대원, 진실과 일신상의 안전 사이에서 판결을 고민하는 지방법원 판사, 수용소에서 다친 공산주의자 수형인을 직업병이라고 판정하는 의사, 유대인인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을 채용하지 않는 과학자, 아들 앞에서 약간의 사회비판을 하고 혹시 아들이 돌격대에 신고하지 않을까 두려움에 떠는 부모 등등의 쇼츠. 1970~80년대 파시즘 국가에서는 일상적인 생활인, 또는 생활이었던 것이라 지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고, 이런 것들을 자연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는 과거를 지녔다는 것이 많이 쪽팔렸다. 이 파시스트 개자식들의 공통점. 자신들이 하는 악마 같은 행위가 정의롭고 최선인 줄 안다는 거. 징그럽다, 징그러워. 다중 선동에 의한 다중에 의한 독재. 아무리 경계해도 모자람이 없다.


  원래 브레히트는 <제3제국의 공포와 참상>을 <공포: 나치 치하 독일 민족의 정신적 고양>이라는 제목의 다섯 편으로 구성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도 모두 27편의 쇼츠 가운데 몇 개, 3편 <분필 십자 표시>와 5편 <적법한 판결>, 8편 <유태 여인>, 9편 <밀정>이 상대적으로(쇼츠라고 하기엔) 분량이 많고, 내용을 조금만 더 보태 독립해서 공연해도 손색이 없을 만하다. 나머지 편들은 ‘몽타주 기법’이라고 하는데, 몽타주라는 말도 그럴 듯하나, 조각 그림으로 한 그림을 완성하는 직소퍼즐 식이라 해도 어울린다.

  아직 세상은 좌우 가릴 것 없이 파시즘의 재래를 기다리는 미치광이 신도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자기들의 꿈이 파시즘인 것도 모르는 정치배들. 그리하여 이를 경계하는 의미에서 독재의 폐해를 알리는 작품을 읽어두는 일은 불행하게도 아직까지 미덕일 수 있으니, 이를 어쩔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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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끼 2023-11-16 1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기들의 꿈이 파시즘의 재래인걸 모르는 정치배의 예시가 궁금합니다
한편으론 제 입장에선 이미 파시즘 사회에 살고 있으니까요.. 하나의 예시로는 생존을 볼모로 이주민 차별이 제도적으로 당연하고 그걸 또 공공연하게 언론에서 주장하고 제도화하는 일상이라
돈 가진 사람의 안전만 보장되는게 당연하고. 보상이 불가능한 재생산 돌봄 노동을 하며 경력인정도 안되고 가난한 사람도 많고요.
한편으로는 안전지대도 없이 폭격하는걸 공공연하게 공적발화로 지지하기도 하네요…최근의 팔레스타인 학살도 그렇고요 그걸 바라보는 서방언론이나 한국의 주류 언론이나 잔인하고.. 병원, 학교, 어린아이는 죽이지 말자는 최소한의 무엇도 없는 학살이었잖아요.
자본주의 시스템과 사회가 제도적으로 배제하고 방관하는 죽음들은 파시즘과는 무관한가요?
코로나 시국에 확인했듯, 개개인이 어딜가도 동선이 파악되는 것부터 그렇고요
재판에서 밝혀졌지만 세월호에서 죽은 아이들의 부모도 국정원 감시하에 있었고..

Falstaff 2023-11-16 18:52   좋아요 1 | URL
예. 하신 말씀 공감합니다. 필요 이상의 과학 발전도 네오 파시즘의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전 구식이라 그런지 몰라도 권력 자체가 이미 전체주의 속성을 ‘필연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자신들 스스로 정의롭다고 굳세게 믿는 집단을 저는 더 이상 믿지 않습니다. 백년 전 쯤에 태어났다면 아나키스트가 됐을 지도 모르겠네요. ㅎㅎㅎ

우끼 2023-11-16 20:19   좋아요 1 | URL
헉.. 저도 중앙집권화된 권력은 전체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데 동의합니다
다만 저는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과 논의하는 것을 아직은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마저도 없이 회의주의에 빠지고서야 당장 숨쉬는 것도 힘들어서요
그리고 변화가 실현가능하도록 계속 움직이는 일원으로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