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하양 걷는사람 시인선 101
안현미 지음 / 걷는사람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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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다보니 안현미의 시집을 세 권째 읽는다. 《곰곰》과 《이별의 재구성》에 이어 《미래의 하양》까지.

  드디어 안현미, 아현동에서 탈출했다. 뭐 탈출은 벌써 했겠지. 형제 같은 바퀴벌레 떼가 비키니 옷장 바닥을 점령한 채 그들과 한 방에 살았던 궁상스러운 시절에서. 순대국밥 먹으러 가면 주인 아줌마가 혼자 왔느냐고 물어보지 않아서 고마웠던 외로운 시절에서. 세월이 가면 먹고 사는 건 좀 필 수 있어도 외로운 건 결코 좋아지지 않는 것인데 시인은 그것도 좀 나아졌을까? 《미래의 하양》 속에서 시인은 그동안 30년이 넘는 직장생활을 때려치우고 시 작업에 몰두하기도 작정을 했던 것 같다. 근데 생각했던 것처럼 돌아가면 그건 세상 사는 일이 아니지. 시는 잘 써지지 않고, 실업급여를 받아도 밥상 위의 반찬은 여전하고, 한강 상류 북한강, 북한강 상류 동강, 동강 지류 주천강, 주천강 옆댕이에서 살며 탁구 좀 쳤던 것 같기도 하고,


  가계도


  아버지는 술을 물처럼 마시고

  어머니는 물을 술처럼 마셨다   (전문. P.51)



  이런 가계도의 핵심인 부모 모두 세상 하직한 것 같다. 그리하여 이 시집은 엄헬레나 여사한테 헌정하는데, 혹시 몰라, 시인의 엄마 이름이 엄헬레나인지도. 왜냐고? 이런 시를 보아 그렇다는 거지 뭐.



  엄헬레나



  1 9 4 2 9 1 6 – 2 0 2 4 2 1 1


  부잣집 딸로 태어나 탄광으로 시

  집온… 딸 셋을 낳은…… 실향민

  의 딸 엄…헬레나…과부는 아니었

  지만 과부 같았던… 장성 제1광업

  소 급식사이자 세탁부였던…엄…

  헬레나…… 닥치면 겪는다… 닥

  치면…엄…헬레나…… 헬레나…

  닥치면 겪는다…… 탄광촌… 판

  잣집… 공용 변소… 닥치면 겪는

  다… 엄…헬레나… 0명의 아들과

  0명의 남편 그리고 자신도 모른

  채 엄헬레나로 죽은… 어쩌다 마

  지못해, 의무적으로 전화하면 자

  꾸 어디니이껴 묻던 엄헬레나…

  엄…헬레나… 어디니이껴… 어디

  니이껴… 어디 계시니이껴……   (전문. P.64)



  안현미가 강원도 태백 생이거든. 장성광업소가 강원도 태백시 장성동에 있거든. 뭐 아닐 수도 있다. 생활력 강한 옆집 아줌마이거나 시인(또는 시인의 부모)와 막역한 사이라서 평소 이모라고 불렀던 사이일 수도 있지만 뭐 어쨌거나 엄마와 비슷하지 않았겠나 싶다. 이 시집에서 부모 말고 딱 한 명 더 출연하는 친척으로 고모도 있다. 서울 고척동에서 살아 ‘고척동 고모’라고 부르는데 정말 고모라서 안씨 성을 가지고 있는지, 그냥 ‘고모’라고 부르는 시인의 의지가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척동 고모


  그녀는 고통 속에서 살았다 열여섯부터 예순아홉까지 (여성)노동자 아니면 (여성) 해고 노동자로 살아온 그녀에게 고통은 공기와도 같았다 고통과 함께 밥 먹고 고통과 함께 잠들고 고통과 함께 출근했다 한 명의 남편과 네 명의 자식들마저 그녀를 떠났을 때도 고통만은 그녀의 곁을 지켰다 사람들은 고통이 그녀를 병들게 했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고통을 파먹으며 여태껏 살아남았다고 했다 한번 물어봐요 일생 억척스럽게 살아남느라 고통스러웠는데 고통이라면 지긋지긋하지 않아요? 열여섯부터 예순아홉까지 여성 노동자 아니면 여성 해고 노동자로 살아온 그녀는 말했다 일생 함께 울어 준 것도 웃어 준 것도 고통인데 이제는 피붙이 같다고 했다 언젠가 그날이 오면 (여성)은 두고 가도 고통만은 함께 가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전문. P.58)


  지금 호적 파는 데 맛들였냐고? 아니, 아니. 이 시집에서 유난히 자주 눈에 띄는 안현미 만의 독특한 어법을 이야기하고 싶은데, 마침 시인의 친척, 그러니까 저 위에서 인용한 “가계도”의 일원인 고척동 고모가 눈에 띄어 가져왔다. 시에 관해서 쥐뿔도 아는 게 없는 번인이…, 본인이… 굳이 이 시 <고척동 고모>를 말할 것 같으면, 시 한 자락에 별로 아름답지도 않은 시어 “고통”이 열두 번 출현한다. 여기서 불쑥, 저기서 불쑥. “열여섯부터 예순아홉까지 여성 노동자 아니면 여성 해고 노동자”도 반복해 등장한다. 이 시집에서 이렇게 같은 시어, 시 구절을 반복하는 것들이 세어보지 않아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무지하게 많다. 반복 ‘구절’이 이 시 <고척동 고모>에서는 리듬감 있게, 쉬운 말로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횟수만큼 나와 읽는 맛을 느낄 수도 있지만, 시 ‘단어’ 그러니까 시어 “고통”은 뭐가 그리 좋다고 저렇게 열심히 쓰셨나 그래?

 사람들이 자주 오해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고통이 면역이 된다는 잘못된 지식 또는 진짜 육체의 고통을 겪어보지 못한 시인 작가들의 착각이다. 그래서 미국에 살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주드 세인트 프랜시스’라는 이름의 남자가 면도칼로 자기 팔뚝을 수시로 그어 고통을 감각하는 일종의 ‘고통 중독’ 현상을 겪어 웬만한 고통 정도는 느끼지도 않을 정도이지만, 그의 연인이었던 윌럼 라그나르손은 주드와 비슷한 자해를 했을 뿐인데도 무지하게, 정말 죽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는 말도 지껄이게 된다. 고통은 결코 면역되지 않는다. 생명유지를 위해 오히려 고통을 당할수록 더 고통을 피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면역이 가능했다면 인류학적으로 사람들은 그렇게 다양한 방법의 고문을 창안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고통을 겪으면 겪을수록 민감함은 더욱 배가된다. 진짜 고통을 겪어본 적이 없어서 그딴 글을 무책임하게 썼다는 걸 독자가 몰라 경탄을 하는 지도 모른다. 물론 고척동 고모의 고통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다양하게, 다양한 부위에서 겪었겠지만(겪고 있겠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고? 여태까지 고통 속에 신음하며 살았으니까 그렇게 고통과 나머지 삶도 함께 살다가 가겠다는 거야? 치사하게 “라떼”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도, 한 마디를 덧붙이자면, 라떼, 이런 시는 철저하게 분쇄당했을 거다. 평생 노동자, 해고 노동자로 살았으면서 조금의 운동성도 발견할 수 없는 고모. 빼박 패배적인 관점의, 패배적인 관점일 뿐인 시라고, 나는 주장하는 바이었던 것이었다.

  내가 전에 읽은 안현미의 시집 《곰곰》과 《이별의 재구성》에서 이런 고척동 고모의 기색이 옅보였다고 하면 너무 오버인가? 아현동 사글세 방의 가족같던 바퀴벌레 시절의 지독한 궁상 말이지. 그때도 “나는 지금 이렇게 아파요, 배고파요, 외로워요.”라고 영탄만 했을 뿐, 이의 개선을 위한 운동성은 보여주지 못했었다. 그때는 이십대 시절. 이 시집 《… 하양》이 2024년 출간이니까 시인의 나이 52세. 그이 사이 적어도 2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나.


  날아다니는 꽃


  개보다 더 단순한 진심으로 가장 어두운 밤보다도 더 가장 어두운 얼굴로 밤을 견딥니다 삶을 이해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불가해하듯 밤을 이해한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마음도 마음 아닌 것도 모두 잠들지 못하는 밤 그건 뭐였을까요? 봄에는 직장을 잃고 가을에는 사랑을 잃었습니다 구직도 구애도 구원도 없는 가장 어두운 밤보다도 더 가장 어두운 얼굴로 밤을 건넙니다 개보다 더 단순한 진심으로 죽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여 가끔 눈부셨던 그건 뭐였을까요? 눈물처럼 빛나고 진실처럼 부서진   (전문. P.19)


  여태까지, 20년이 넘는 세월은 시인은 여전히 밤을 견디고 있다. 안현미의 밤은 위안과 쾌락과 치유와 쉼과 평온의 밤이 아니다. 공포와 유령과 범죄와 고독과 빈곤의 밤이다. 그걸 시인은 개보다 더 단순한 진심으로 견딘단다. 아무리 궁상스럽던 세월이었더라도 살면서 찬란하고 눈부셨던 잠깐이 없었을 수 없겠지. 독자는 여기서 눈에 힘을 주어야 하리라. 어차피 안현미가 부호와 암호와 은유로 결판을 보는 시인은 아니니 아무리 시라도 앞뒤 문맥은 짚어 마땅하다.

  개보다 더 단순한 진심으로 죽음을 이해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데, 그래서 가끔 눈부셨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단다. 그러니까 “죽음을 이해하지 못해서 가끔 눈부셨던 것.” 아오. 이건 스핑크스의 리들보다 더 풀기 어렵네 그려. 시는 별로 읽지 않는 독자인 내가 도무지 풀지 못했던 “가끔 눈부셨던 것”이 “눈물처럼 빛나고 진실처럼 부서”졌다네? 여기서 나는 의혹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이건 시적 아름다움을 좇은 의미없는 수사일 뿐이라고.

  하여간 이제 50줄에 든 시인은 주천강변 이곳에서, 이렇게 살고 있는 모양이다. 가끔 탁구도 쳐 가며.


  횡성


  오지 않는 시를 기다리며 가을이 다 갔지만 어떤 날은 박상륭의 열명길을 읽다 잠들기도 했고 어떤 날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물가에 나가 앉아 종일 물소리를 들었다 가끔 아침부터 동쪽에서 바람이 불어 자작나무 잎들이 춤을 추면 읍내에 나가 술을 받아 와 대낮부터 대취했고 고라니 울음소리에 깬 밤이면 지난날 용서 빌지 못한 일들을 생각하며 벌벌 떨었다 오지 않는 엄마 오지 않는 아버지 오지 않는 시를 기다리러 황성 갔다 지난날 빌지 못한 죄들과 오지 않는 것들이 매일 밤 별처럼 돋아나던   (전문.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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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바흐 : 평균율 전집 1, 2권 BWV 846-893 [4CD] - [The Glenn Gould Collection Vol. 4]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작곡, 굴드 (Glenn Gould) 연주 / SONY CLASSICAL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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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율 CD는 가지고 있지만 정작 별로/거의 듣지 않는 레퍼토리임에도, 아 씨, 굴드... 한 20여 년 잘 참았는데 기어이 사고 말았다. 피셔, 니콜라예바, 리히테르, 굴다... 여기에 또 굴드까지. 좋아, 좋아. 눈 침침해져 책 읽기 힘들면 음악이나 듣고 있지 뭐. 세월은 잘 간다, 야야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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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10-29 1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잘했습니다 ㅋㅋㅋㅋ

Falstaff 2024-10-29 13:45   좋아요 0 | URL
ㅋㅎㅎㅎ 고맙습니다!

페넬로페 2024-10-29 15: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눈 침침해서 심란한데
음악 들으며 힐링 하겠습니다.
10월도 거의 다 가네요^^

Falstaff 2024-10-29 17:22   좋아요 1 | URL
옙. 심란할 때는 음악 좋지요. ㅎㅎㅎ 이제 정말로 개같은 가을이 쳐들어 오는 11월입니다. 이름하야.... 만추? ㅋㅋㅋㅋ

그레이스 2024-10-31 08: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렌 굴드
저도 좋아합니다
그런데 바하라 읽는게 맞는 발음이라면서요

Falstaff 2024-10-31 15:43   좋아요 1 | URL
역시 청년 굴드의 미친 지랄 <골트베르크 변주곡> 아니겠습니까. ㅎㅎㅎㅎ
 
마차오 사전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4
한사오궁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 민음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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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민음사에서 “모던 클래식” 시리즈로 냈다가 시리즈를 접는 바람에 세계문학전집 444, 445번으로 갈아탔다. 모던 클래식 시절엔 한소공 작 <마교사전>이었다. 당시 읽어볼까 망설였었다. 이제 세계문학전집으로 다시 나온 걸로 보아 민음사가 이 작품에 나름대로 자신이 있다는 말이 아닐까? 이렇게 믿고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해 읽었다. 진작에 읽을 걸 그랬다. 명작은 아니더라도 재미있다. 표의문자를 사용하는 거의 유일한 나라, 넓은 땅과 다양한 민족, 무시무시한 번식력을 지닌 나라. 이 가운데 저 동정호洞庭湖 남쪽, 즉 후난성湖南省 멱라강 인근 마차오(馬橋)라는 산골 벽촌의 작은 마을 사람들이 사용하는 사투리와 주민들의 삶을 그린 “소설” 즉 허구다. 그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다양한 의미에 천착하지만 픽션인 만큼 어느정도 작가가 왜곡한 것일 수도 있으며, 주민들의 삶 역시 마찬가지. 그렇지만 작가가 풀어내는 구라를 그대로 믿고 따라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독법일 것이다.

  요새 내가 민음사를 영 같지 않게 보는 이유 가운데 하나.

  마차오 마을에 관한 내력을 소개하는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건륭 58년, 마차오푸에 마싼바오라는 자가 한 친척 집 잔치에서 갑자기 정신착란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이 인간 어머니와 신견(神犬) 사이에서 태어난 진명천자(眞命天子)의 환생으로 연화태조 (蓮花太祖)인 자신은 연화국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 (중략) 1959년 음력 정월 18일, 진간총병 (鎭竿總兵) 안투(몽골인), 부장 이싸나(만주인)가 병사 800명을 두 길로 나누어 진압에 나섰다.” (p.29~30)


  건륭 58년이면 조선 정조 시절로 1793년이다. 그때 일어난 반란을 중화인민공화국 시절인 1959년에 마오저뚱 시절에 진압했다고? 그럼 연화국의 존속기간이 1959-1793+1= 167년이란 얘기 아냐? 그럼 하나의 왕조로 봐도 되겠네? 내가 문제 삼는 것은 쪼잔하게 숫자 오타 하나가 아니다. 모던 클래식에서 낸 <마교사전>을 보면 확실히 이 내용을 다시 쓰긴 했지만, 한자어의 우리말 발음을 중국어 발음으로 고쳤을 뿐 내용은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는 거다. 그러니까 말만 중판 또는 개정판이지, 공역한 역자 심규호나 유소영, 그리고 민음사에서 편집 일을 해 먹고 사는 자들은 그냥 날로 먹겠다는 듯, 어느 놈팽이 하나 꼼꼼하게 읽어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중판을 찍으면서! 개 잡아먹은 데 가서 곡하고 재배할 인간들.

  게다가 초반에 읽으면서 내가 지금 중국 후난성 찌그러진 작은 마을에서 쓰는 언어와 사람 사는 인류학적 이야기를 왜 궁금해하지? 라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일야서>를 재미있게 읽어 한사오궁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으며, 만일 중국 독자라면 이 책 역시 흡족할 수 있겠지만 굳이 다른 나라 사람인 내가 읽을 필요가 있을까? 자꾸 이런 잡생각이 들기도 했던 걸 숨기지 않겠다. 다른 독자라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단계만 극복하면 <마차오 사전>도 한사오궁, 중국 현대문학에서 한 획을 긋고 있는 문사의 필봉에 감탄하면서 읽을 수 있다. 표의문자가 한 단어 속에 품고 있는 다양한 의미, 그래서 글자 하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심지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오락가락했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집단이라 문자/언어에 대한 심각성이 다른 어느 나라 인종들보다 막중하리라는 건 분명하다. 거기다 언어로 먹고 사는 작가의 직업적 사색까지 보태졌으니 언어/문자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는 일 역시 마땅하리라 싶다. 다만 요즘 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지 않아 한자어에 멀미를 일으킬 확률이 높다. 괜히 정말로 읽었다가 욕이나 한 태배기 하지 마시고 신중히 생각하시기 권한다.


  촌사람들 사는 이야기야 채만식, 이기영, 이무영, 이문구 등을 보유한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특별한 게 없으니 그냥 넘어가고 문자, 단어가 갖고 있는 색다른 이야기 몇 개만 풀어보자.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제일 앞에서 이야기할 초나라 굴원의 고사. 초나라 궁에서 문서를 담당하는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던 일을 하던 굴원이 머리를 산발하고 맨발로 멱라강변을 유랑하며 다니다가 시대를 탄하며 <어부漁夫>에서 이렇게 읊었다.

  “세상 모든 것이 탁한데 나만 홀로 맑고, 사람들이 모두 취했거늘 나만 홀로 깨어있네.”

  그리고 비가 갠 멱라강 흙탕물 속으로 퐁당 빠져 드런 한 세상, 접었다.

  세상에 이런 오만이라니. 세상 사람들은 굴원屈原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심지어 우리나라 만화가 고우영도 <십팔사략十八史略>에서 굴원의 죽음을 추모했지만 평소에 나는 이이를 조금 한심스럽게, 많이는 오만방자한 인간의 전형으로 보기도 했다. 현대 중국인인 한사오궁은 마차오 사람들의 의견이라는 전제로 기원전 278년에(민음사의 연표는 도무지 믿지 못하겠으니 이걸 워쪄?) 굴원이 혼자 깨 있어 그 대가로 오히려 혼자 죽었으니 이 아니 어리석으냐고 주장한다. 즉 깰 성醒, ‘깨 있음’이 ‘어리석음’과 같은 의미로도 쓰인다는 거다. 중국에서도 마차오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중국인 가운데 ‘깨다’의 의미인 ‘성醒’에 좋지 않은 의미가 들어 있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이 ‘성醒’자와 같이 어울려 우리에게 늘 경각심을 주는 단어 ‘각覺.’ 두 글자를 합해 각성覺醒이라는 단어를 늘 사용하고 있어서 ‘각覺’이 좋은 글자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각覺’은, 당연히 마차오 마을에 국한해서 하는 말이지만, “멍청함을 의미해 아둔하고 어리석고 혼란스러운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 사람들의 철학으로는 “깨어남이란 우둔함이며, 잠을 잔다는 것은 총명함을 의미”하니까. 한사오궁은 중국 현대사의 난관, 대약진운동, 반우파운동, 문화혁명 같은 것을 몸으로 겪으며 고달프고 소란스러운 역사 속에서 생존하려면 마차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깬 상태를 말하는 성醒이나 각覺만큼 어리석은 단어를 또 발견하기도 쉽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저 먼 시절 굴원처럼 스스로 멱라강에 투신할 생각이라면 모르겠지만 말이지.


  다른 하나는 2권 198쪽에 나오는 ‘연상憐相’, 가련한, 슬픈 모습이다. 이걸 마차오 사람들은 ‘아름답다’라는 말로 쓴단다. 마차오에는 아름답다(미려:美麗)라는 말이 없다. 이에 한사오궁은 중국어 표현에서 아름다울 미美 자는 ‘연憐’과 인연이 많다고 주장한다. 가슴이 아플 정도로 아름다운 것, 연민의 정을 느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 이게 ‘연상憐相’이라니. 일본인 가와바타 야스나리도 슬플 비悲를 심미적 감각에 서린 아름다움으로 사용한 적이 많다고. 이 짧은 챕터를 읽으며 반가웠다.

  오래전 맬컴 라우리가 쓴 <화산 아래서>의 독후감에서 “오랜 세월 아리고 가슴 저며왔던 단어 ‘슬픔’의 진정한 의미와 ‘슬픔’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그만 잊어버려왔던 것은 아니었는가?”라고 멋을 한껏 부리며 썼던 적이 있었던 거다. 그러니 내가 이 챕터 ‘연상憐相’이 반가웠지 않았겠느냐는 말이지. 그래, 슬픈 것이 늘 아름다운 건 아니지만, 오히려 대부분의 슬픔은 궁상맞겠지만, 아름다운 건 거의 슬프다는 말이지. 그래서 연憐이건, 비悲건, 애哀건 간에, 한사오궁이건 가와바타건 간에 호모 사피엔스의 정서는 늘 통하는 것이겠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만나면 자주 쓰는 말이 있다. “밥 먹었어?”

  마차오 마을 사람들도 늘 이렇게 인사한다. “밥 먹었어?”

  사람들은 밥을 먹었건 안 먹었건 간에 “예, 먹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상례. 우리나 마차오 사람들이나 다 그렇다. 그런데 만약 마차오 식이 아니라 곧이 곧대로 “밥 먹었니?” 라고 물었는데 “아니요, 안 먹었어요.”라고 대답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나라 같으면 “그래, 그렇구나.”하고 심상하게 지나갈 것 같다. 나는 일단 그렇게 물어봤으니 그걸로 끝난 거니까. 하지만 마차오 사람들은 조금, 아니, 많이 다르다. 어떻게 다른 지는 직접 확인해보시라. 2권 106쪽에 “밥을 먹다, 봄날의 용법”에 나온다. 재미있다. 웃음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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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4-10-29 07: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넘 재밌어요. 이 책은 제목만 보고 무슨 내용인지 전혀 궁금하지도 않았거든요. 요즘 한자를 유심히 보곤 하는데 이 책 참 흥미롭습니다.
굴원이 강에 투신해 죽은 사실도 처음 알았네요.
민음사 유툽에서 책 광고는 참 열심히 하던데 문학전집의 퀄리티에도 좀 더 신경써주면 좋겠네요.
저도 동감하는 부분입니다.

Falstaff 2024-10-29 07:43   좋아요 1 | URL
한자에 관심이 있는 분은 무지 재미있을 듯해요. 저 촌동네 사람들 사는 모습도 잔잔하고요. ㅎㅎㅎ
민음사는 박맹호 사장의 유지를 이어가지 못하는 것처럼 보여 잠 아쉽습니다. 이제 저는 상당히 많이 포기했습니다. 의례 그러려니.... ㅋㅋㅋ

stella.K 2024-10-29 1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던 클래식 표지 디자인도 예쁘던데 안 나오는군요. 민음사도 범우사나 동서문화사 꼴 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그나마 요즘은 표지 디자인도 좀 바꾸고 자구책을 찾는 것 같기도한데 좀 미약하죠?
근데 학교는 이제 한문이란 과목이 없어졌군요. 그건 아닌 거 같기도한데. 근데 저는 왠지 팔님 리뷰 읽는데 점점 읽을 자신없다 쪽으로 빠져드는 것 같습니다. ㅎㅎ

Falstaff 2024-10-29 11:43   좋아요 1 | URL
모던 클래식 시리즈는 책등 글씨를 흰 색으로 써서, 눈 침침해지니까 이제 책꽂이에 꽂힌 책이 뭔지도 모르겠습니다.
민음사가 세계문학 시리즈를 5백번까지 내기로 오래전에 결정을 했다는데, 얼른 시리즈 끝내려고 예전 작품들을 막 올리고 있나... 이런 의심도 들더라고요. 원래 취지에 맞게 세대별로 번역해야 한다는 건 이제 개가 물어갔습니다. ㅋㅋㅋㅋ

유수 2024-10-30 0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새 학교에서는 한문을 안 가르치는군요. 저는 그럼 한문이 들어있던 마지막 교과과정 수료자 쯤 될는지. 아무튼 그래서 접으라고? 아니야.. 욕하면서 읽을까? 오락가락하다가 마지막 문단 보니까 너무 궁금해져서 책 담아둡니다ㅋㅋ 욕은 저한테 할거니까요 ㅋㅋ 읽다 보니 일자무식이어도 호모사피엔스의 정서 믿고 가보라는 말씀 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ㅋㅋㅋ
재밌는 책 이야기 너무 잘 읽고 갑니다.

Falstaff 2024-10-30 16:32   좋아요 1 | URL
우리말에 한자가 하도 많이 있어서 좀 알고 지내자는 의미로 가벼운 한문은 배웠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첫 시기라서 혼돈기가 필요하겠지요. 저도 한글전용에는 찬성합니다. 그런데 좀 천천히 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심정이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ㅎㅎㅎ 늘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트풀
앨리 스미스 지음, 이상아 옮김 / 프시케의숲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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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앨리 스미스는 2011년에 나온 다섯번째 작품인 <데어 벗 포 더>를 읽은 후에 독특한 문장과 구성에 홀딱 반해서 연달아 <호텔 월드>, <우연한 방문객>을 읽고 좋아한 적이 있다. 비록 이후 사계절 시리즈의 첫 작품인 <가을>이 별로 탐탁하지 않았지만, 하여간 이름만 갖고 기꺼이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꼽는 데는 주저하지 않았다. <가을> 이후 조금 머뭇거리는가 싶다가 벌써 3년의 세월이 후딱 지나갔다. 그리고 눈에 보인 신간 <아트풀>. 놀랍게도 <데어 벗 포 더>를 출간한 다음 해인 2012년에 나온 것을 12년만에 번역한 책이다. 2022년 작품인 <이어지는 이야기: Companion Piece>가 2024년에 번역, 출간한 걸 보면 꽤 오래 걸린 셈이다. 왜 그랬을까? 뭘 알겠느냐만, 읽어보고 추리는 할 수 있었다. 소설인 듯 소설 아닌 듯, 그러나 소설인 작품. 즉 대중성 측면, 쉬운 얘기로 하자면, 팔릴 거 같지 않은 책이다. 전문가적 소양을 가진 다른 분들은 모르겠지만 내가 읽어본 감상을 말하자면 그렇다. 책 표지 사진은 영국에서 발간한 원서의 표지 사진과 같다. 근데 작품과 썩 어울려 보이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보는 사람 마음에 따라 다른 것이니 믿으실 필요는 없다.

  이 책은 2012년 초에 앨리 스미스가 옥스포드 대학에서 돈 많은 유대인 출판업자 바이덴펠트를 초빙교수로 모셔오는 것을(옥스포드에서 가장 규모가 큰 장학기금을 공동 설립했으니 이 정도야 성의표시에 불과하긴 하겠지만.) 기념하기 위한 강연회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이때 작가는 네 가지 주제, ①시간On Time, ②형식On Form, ③경계On Edge, ④제안 및 반영On Offer & On Reflection이었으며, 당시 강연을 위해 작성한 자료에 스토리를 담아 소설 작품으로 만든 것이 <아트풀>이다. 그리하여 네 부part로 구성된 소설도 마찬가지로 시간, 형식, 경계, 그리고 제안 및 반영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두 명의 인물이 있다. 죽은 연인을 그리워하는 여자. 그리고 이 여자 앞에, 옆에 심지어 같은 침대 위에 아직도 있는 것 같은 바로 그 죽은 연인. 여기서 잠깐. 작가 앨리 스미스는 커밍 아웃을 한 레즈비언이다. 이 죽은 연인을 남자라고 생각할 이유는 1도 없다. 작가가 레즈비언이니까 죽은 연인도 여자겠거니 생각할 이유 역시 1도 없다. 그냥 연인으로 여기자. 이 연인이 죽기 전에 강연을 했는데 그걸 위한 자료가 우연히 시간, 형식, 경계, 제안 및 반영으로 되어 있을 뿐. 이 강연이 유럽의 비교문학을 다룬 것. 따라서 전체의 반을 넘어서는 분량을 시공 초월한 유럽 각지, 심지어 (라틴 포함)아메리카까지 시인, 소설가의 작품을 인용, 비교하고 있어서, 스미스가 자료로 쓴 작품을 몽땅은 아닐지언정 웬만큼 읽어보지 못한 독자들은, 아마, 독립감 좀 느낄 걸? 아니면 자만심이 좀 상할 수도 있고.

  책 제목 아트풀Artful이 뭐냐 하면, 사전적 의미로 기교적인, 교묘한, 교활한, 잔재주 좋은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건 아니고, 찰스 디킨스가 쓴 <올리버 트위스트>의 조연 가운데 한 명인 잭 도킨스의 별명 ‘아트풀 다저’에서 가지고 왔다. 즉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지 않은 독자는 초장부터 김이 새면서 앞 문단에서 말한 독립감, 그리고 자만심에 스크래치가 갈 수밖에 없다. 아트풀 다저가 누군데?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데? 괜히 묻지 마시고 얼른 이 책을 덮어 버리고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은 다음에 다시 오시라. 그러면 그걸로 끝나냐고? 천만의 말씀. 내 경우엔 외국 사람이 쓴 시는 읽지 않는다. 근데 소설만큼 많은 시인이 등장하고, 시 구절, 그리고 외국시를 읊을 때 빠지지 않는 두운, 각운 같은 걸 무수하게 이야기하건만, 두운 각운을 더듬더듬 감각이라도 할 수 있게 원시도 첨부했으면 도움이 되겠으나, 애써 우리말로 번역한 시에서 우리나라 독자들이 어떻게 우리글로 번역한 시를 다시 뇌 속에서 영어로 바꾸어 두운, 각운을 알아채고, 그것도 모자라 거 참 귀신이 곡을 할 만큼 절묘하구나, 경탄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지. 예를 들어서 영국(미국? 아 몰라, 몰라!)에 윌리스 스티븐스라는 시인이 있는 모양이다. 그가 이런 시를 썼겠다:



  나는 테네시에 병을 두었다.

  둥근 병을 언덕 위에 두었다.

  병은 제멋대로 펼쳐진 황무지가

  언덕을 둘러싸게 했다.


  황무지가 그것을 향해 솟아올라

  주변으로 뻗어나갔다, 더는 야생이 아니었다.

  병은 땅 위에서 둥글었고

  키가 크고 공기가 드나드는 항구였다.


  병은 모든 곳을 지배했다.

  병은 광택이 죽고 닳아 있었다.

  새나 수풀을 선뜻 내어주지 않았다.

  테네시의 다른 무엇과도 같지 않았다.



  이렇게 인용하고 앨리 스미스가 말하기를,

  “시는 그 경계를 넓혀 그 자체의 형식적인 요구사항에서 벗어나 음절적으로나 운율에 대해 우리가 기대하는 관점에서 형식이 수행해야 할 역할을 자체적으로 거부한다. ‘수풀’을 위한 운율은 어디에 있을까? 그런 건 없다. ‘황무지’를 위한 운율도 없다. ‘테네시’와 유일하게 운율이 맞는 것은 ‘테네시’이다. ‘언덕’도 마찬가지이다. 이 시에서 운율은 ‘공기air’와 ‘모든 곳everywhere’을 ‘닳아 있었다hare’와 연결시킨다.”

  어떠셔? 읽을 만하셔? 무엇을 말하려는 지는 알겠다. 운율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시도 있다는 거겠지. 하필 이 시를 셰익스피어하고 견주어서 ‘쥐랄’이지만. 아니, 그건 내가 저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땅의 일개 독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거다. 서쪽 끄트머리 섬나라 지식인은 이것을 타당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니까.


  하여간 소설의 반이 넘는 분량을 이렇게 나처럼 독립감과 자만심에 상처를 입으면서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는 이 상처가 별로 크지 않다. 돈 주고 산 책이 아니라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거든.) 인내심 함양의 시간을 견디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보태는 이야기, 이야기들.

  죽은 연인이 실제로, 아직도 자신의 옆에 있다고, 정말로 눈에 보이는 환시를 심각하게 겪고 있는 화자. 갑자기, 난데없이 삶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연인. 칫. 그러나 생각해보라. 삶이란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태어나기 전의 아무것도 없음과 죽은 이후 아무것도 없음의 무한대라는 거대함에 비하면. 그러나 그건 철학자의 이야기이고 당장 연인을 상실한 여자는 비어있음을 견디지 못해, 상점에서 소소한 물건을 훔치고, 집안에서 중요한 부품을 내다 버리고, 그걸 죽은 연인이 한 행위라고 덤태기를 씌워버린다. 호텔 로비에서 술도 마시지 않았으면서 난리를 죽이기도 하고. 뭐 그렇다는 거다. 스코틀랜드, 더 크게 영국의 대표적인 모더니스트이기도 한 앨리 스미스가 이이 특유의 그럴 듯한 허구를 만들어내는 것까지는 참 좋은데, 암만해도 소양이 부족한 극동의 독자한테 너무 전문적인 비교문학적 자료를 팽개쳐버린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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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4-10-28 2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끝까지 읽으셨네요~~^^
저 같았음 그냥 팽개쳐버렸을 듯해요.
앨리 스미스 ... <가을> 읽다가 팽개쳤는데 다시 돌아가지지가 않아요.
몹시 지루하더라구요!

Falstaff 2024-10-29 05:53   좋아요 1 | URL
저도 <가을>이 별로더라고요. 근데 전작들은 꽤 좋지 않았나요? <데어 벗 포 더>, <우연한 방문객>, <호텔 월드> 다 마음에 들었다가 가을에서 확 얹혀 버렸습니다.
저는 좀 더 스미스를 읽어보겠습니다. ^^
 
꽃피는 노트르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0
장 주네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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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전 이이가 쓴 <도둑 일기>를 읽고, 그게 내가 읽은 주네의 첫번째 작품이었는데, 지금은 그때 책 읽고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이후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조금씩 이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나는 전혀 경험하지 못한 다른 세상의 것들을 작품으로 만들어 그런 텍스트를 처음 접한 (나 같은) 독자들은 이색적인 경험을 한 것처럼 느낄 수 있었겠다, 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꽃 피는 노트르담>은 읽지 않는 것이 좋았을 것을 그랬다. <도둑 일기>와 근접한 거리에 있는 <꽃 피는 노트르담>을 읽으니, 이젠 색다른 바도 없고, 주네의 표현법은 <도둑 일기>에 비해 훨씬 더 노골적이라 사드 후작의 책을 읽는 기분까지 들었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야하거나, 차라리 음란하지도 않고, 읽어주기 드러웠다는 말이다.

  1942년의 프랑스 파리. 말은 비시 괴뢰정부가 통치했다지만 실제로는 독일 나치 군대가 점령하고 있던 시절이다. 이때 장 주네는 절도혐의로 체포되어 파리 근교에 있는 프렌 교도소에 미결수 신분으로 들어가 있었다. 내가 10년 전에 읽었을 때도 책의 제목이 <도둑 일기>더니 이번에도 절도, 도둑질을 해 교도소에 들어가 어떤 판결이 떨어질 지 노심초사하는 장 주네. 레지스탕스 하다가 사형당하는 걸 바랄 지 모르지만 시민들이 전부 다 레지스탕스면 그것도 좀 재미없으니 누군가는 이렇게 악역도 해줘야 사람 사는 꼴이 난다. 장 주네는 이 교도소에서 젊은 사형수를 기리는 시를 쓴 바 있다. 프랑스의 사형은 장 가뱅과 알랑 들롱이 주연을 한 1973년 영화 <암흑가의 두 사람>에서도 단두대 형을 원칙으로 한다. 아무리 전시라도 아무나 사형에 처할 수 있나 어디. 그럼에도 단두대의 인정 없는 칼날에 목이 달아난 인간은, 당연히 살인범이었는데, 장 주네가 시를 써서 넋을 기린 사형수를 이번엔 별명으로 “꽃피는 노트르담”이라고 붙여 그를 애도하는 소설을 쓴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장 주네의 첫번째 소설이기도 하다.

  훗날 이 작품을 장 콕토가 읽더니, 흠, 거 참 괜찮은 젊은 작가로구먼, 칭찬을 해주어 주네의 창작에 본격적인 모터를 달아주었다고 하는데, 콕토, 뭐 유유상종이니까 그렇다고 치자.


  장 주네는 자신이 “꽃피는 노트르담”이라고 별명을 지어줄 살인범을 만들기 위하여 작품의 초장부터 초를 친다. 그리하여 네 명의 진짜 살인범을 작품 첫 장부터 소개하기에 이른다:

  오이겐 바이트만. 독일인으로 프랑스에서 여성 두 명과 남성 여섯 명을 살해하고 금품을 갈취한 죄로 1939년에 공개 처형된 인물이다. 이 공개처형 당시 최고의 드라큘라 가운데 한 명이었던 크리스토퍼 리도 구경을 가 장 주네의 말에 의하면 신문지상에 “자동식자기로 무한 증식된 아름다운 얼굴”이 뎅거덩 떨어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때 리의 나이 열일곱 살이었단다.

  바이트만의 살인 조금 앞서 정부를 살해한 검둥이 “태양 천사”

  조금 후에 애인 에스코데로를 살해하고 천 프랑 가까운 돈을 탈취했다가 스무 살(주네의 오류. 실제로는 스물다섯 살) 생일을 맞아 목이 달아난 군인 모리스 필로르주. 필로르주는 단두대에 목을 디민 상태에서도 형 집행자한테 깐죽거리려다가 입도 떼기 전에 1톤의 칼날이 떨어졌는데, 여기서 주목. 애인의 이름이 “에스코데로” 남자 이름이다. 그러니까 필로르주는 널리 알려진 장 주네와 비슷한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꽃피는 노트르담>을 대표하는 건 절도, 살인 같은 범죄라기보다 남성간 동성애를 다룬 퀴어 문학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주인공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하여간 타이틀롤을 맡은 “꽃피는 노트르담”의 모델이 바로 모리스 필로르주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마지막으로 반역을 위한 반역을 저질렀다가 총살당한 앳된 해군 소위.

  이렇게 네 명의 사형수를 거론하면서 이들의 사형집행 모두가 아름답고 음침한 꽃들이 경이롭게 피어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화자 장 주네는 프렌 교도소 내에서 신문과 잡지에 실린 사형수들의 사진을 오려 20여 장을 모은다. 그리고 빵을 씹어 밀가루의 끈기를 이용해 풀을 만든 다음 벽에 매달린 생활수칙 보드 뒷면에 붙여놓고 시간 날 때마다 그들의 공허한 눈빛을 보면서 흥분한다.

  “이제는 죽은 몸인 저 살인자들은 그럼에도 나에게로 와주었다. 애도의 별들 하나씩 나의 감방으로 떨어져 그때마다 내 가슴 몹시 뛰고, 내 가슴은 두방망이질한다. 두방망이질이 도시의 항복을 알리고자 둥둥거리는 북장단이기나 한 듯 말이다. 이어서 열이 오른다. 감방 위로 독일 비행기 지나다니고 아주 가까이 떨어지는 폭탄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몇 분간 온몸 뒤트는 경련으로 시달리던 그때 그 고열 못잖다.”

  사드 후작하고 정말 비슷하지? 조국 프랑스의 수도 파리가 함락되려고 독일 폭격기에서 폭탄이 떨어지는 것처럼 살인범들의 사진을 보면 흥분을 하고, 더럽고 거칠고 이와 벼룩이 들끓는 모포 밑에서는 경직된 성기가 정액의 분출을 사납게 요구하는 광경. 아오, 이거 참. 어디 읽어주겠느냐는 말이지, 드러워서. 이이가 하녀 주네의 사생아로 태어난 지 7개월만에 버려져 고아원에서 컸다가 열 살 때 처음 도둑질을 해 소년원에 들어간 이후, 앵벌이, 거지, 소매치기, 절도, 마약 등등 어떻게 보면 생존을 위한 작은 범죄를 저지르는 환경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혹시 동성애도 몸을 팔아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 시작했다가 습득한 성적 취향으로 발전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 방면에 대해서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완전히 짐작일 뿐이다.


  사형수들에 대한 열광은 그러나 얼마 가지 않는다. 저 뒤에 1937년 7월 7일 밤에 보지라르가 12번지 아파트 3층에 사는 예순일곱 살의 동성애자 라공 씨의 집에서, 라공의 연장이 말을 듣지 않는 바람에 돈을 벌지 못하게 되자 파란 넥타이로 목을 졸라 살해해버렸다가 1942년에 체포당한 1920년생, 장 주네보다 열 살 아래의 연인이자 본명 아드리앵 바이용이 목이 달아나는 컷에서 한 번 더 나올 뿐.

  이 작품은 장 주네가 감방 안에서 썼다. 당연히 외부에 나갈 수 없는 고립된 장소.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음을 감안하면 문학적 소질을 가진 작가는 감방 안에서 오직 상상력 하나로 소설을 썼을 것이다. 그러니 서사는 연대기적 성격을 갖기가 힘들었을 것인데, 그것을 주네는 자신의 인격을 쪼개는 방식으로 다양화했다. 화자인 장 주네는 감방 안에서 모든 걸 총괄하고, 그의 도플갱어 격인 디빈이라는 인격체를 만들어냈다. 디빈. Divine. 신성한 “여자.” 주네가 남자인데 도플갱어 디빈은 여자? 그렇다. 애인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남자한테 여성역할로 몸을 파는, 그러니까 바텀 역할을 하는 남자. 스스로 자신을 여성, ‘마짜’라고 인식한다. 같은 마짜를 만나면 거의 여성의 대화를 하고.

  “마짜?” 사드가 쓴 <…120일>을 보면 공작, 주교, 법원장, 징세청부인이 저 깊은 산 속 외딴 성으로 환락을 좇아 갈 때 여덟 명의 소녀와 여덟 명의 소년, 그리고 거대한 페니스를 달고 다니는 네 명의 마장(馬藏: 남색용 남자)을 데리고 간다. 이 마장을 사드 전문가이자 이 책을 번역한 성귀수는 ‘마짜’라고 한 것 같다. 그런데 “꽃피는 노트르담” 아드리앵 바이용은 탑과 바텀을 가리지 않는 작자. 역시 주네의 도플갱어 디빈의 애인 가운데 한 명이다. 171센티미터, 71킬로그램, 계란형 얼굴, 금발, 푸른 눈, 가무잡잡한 피부, 건강한 치아, 발기시 24센티미터, 굵기 10센티미터. 별 게 다 나오지? 뒤에 가면 ‘세크 고르기’라는 흑인 애인도 하나 생기는 데 신장 177cm, 88kg, 발기시 28cm, 굵기 14cm. 뭐 그렇다는 거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그렇다는 건 아니고, 굵기가 14면, 이게 어디여? 대가리여, 줄기여? 혹시 작대기여? 14면 직경이 4.6cm 거든. 아무것도 아닌 거 같은데 책상 서랍 속에서 자 꺼내 직경 4.6cm가 얼마나 되는 지 한 번 보시라고, 글쎄.

  더 이야기하려니까 좀 머뭇거려진다. 뭘 더 말씀드릴까? 남자 셋이서 하는 거? 방법? 체위? 아이고, 이쯤에서 접는 게 좋겠는데, 아니 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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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10-25 0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앨리 스미스, <아트풀>
화요일. 한사오궁, <마차오 사전>
목요일. 안현미, 《미래의 하양》
금요일. 앨러스데어 그레이, <가여운 것들>

잠자냥 2024-10-25 07: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도 샀으니까 저는 일단 읽는 걸로….😭

Falstaff 2024-10-25 07:42   좋아요 1 | URL
그런 경우가 한두권입니까. 저도 읽다가 덮은 책만 골라도 한 리어카는 될 듯하네요. ㅋㅋ

stella.K 2024-10-25 1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정말요? 팔님은 손에 드시는 책마다 다 읽으시는 줄 알았어요. 저는 유독 별 4개가 많은 건 그냥 읽고 좋았던 것만 쓰지 안 좋은 건 힘들어서 안 쓰거든요. 물론 몇권 읽지도 않지만... 근데 팔님은 안 그러시잖아요. ㅋ
주네 유명한가 보던데 그렇지 않나 봅니다. 참고하겠습니다.^^

Falstaff 2024-10-26 06:00   좋아요 1 | URL
아, 그럼요. 올해만 해도 다 못읽고 덮은 책이... <먼고 해밀턴>하고 두 권짜리 <번화>, 그리고 또 뭐 있었나... 아마 한 권 정도 더 있을 겁니다. 701호나 702호나 다 비슷하다니까요.
장 주네, 유명합니다. 저하고 안 맞는 쪽으로요. ㅋㅋㅋㅋㅋㅋ

그레이스 2024-10-28 0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뒷부분 보니까 안읽어도 될듯요^^

Falstaff 2024-10-28 19:02   좋아요 1 | URL
ㅎㅎㅎ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니까 뭐라 하기는 그런데, 저는 권하지 못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