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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화 희곡집 - 됴화만발.황구도.미친키스.철안붓다
조광화 지음 / 푸른북스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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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됴화만발>, <황구도>, <미친키스>, <철안붓다> 이렇게 네 작품을 실은 모음집.
첫 작품의 제목을 왜 됴화, 라고 했을까? 복숭아꽃 도화桃花를 20세기 초까지 ‘됴화’라고 쓰고 읽었다. 2578년에 출발해서 2078년에 불시착한 타임머신(시낭) 가마우지 호를 수선해 탑승한 예비역 소령 이언호는 기계가 5백년 마다 에러를 발생시킨다는 걸 모르고 도착한 곳이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4년 전인 1578년 충청도 예산현 대지동면, 당시 말로 “됴한드르”에 비상착륙하기에 이른다. 복거일의 장편소설 <역사 속의 나그네> 장면이다. 작가는 작품 속 16세기 조선의 언어와 문자를 19세기 식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표기에서 가장 눈에 띄는 방법이 바로 구개음화가 아직 안 된 자음과 복모음의 사용이다. 물론 ‘도화’를 ‘됴화’로 쓸 때에는 구개음화는 필요 없지만 말이 그렇다는 얘기다.
그러나 <됴화만발>은 극을 보지 않고 오직 희곡으로만 읽는 평면 작품으로는 도무지 이해불가의 진퇴양난이었다. 라면과 떡볶이를 좋아하는 소녀를 납치해 산골짜기로 끌고 간 악당을 지하에서 난데없이 등장한 케이라는 남자가 신묘한 칼부림으로 제거하더니 어처구니없게 소녀한테 책을 한 권 던져주면서 읽어달라고 한다. 책의 제목이 바로 <됴화만발>. 책은 영생불사의 약을 구하라고 밀명을 내린 황제의 이야기, 3천 명의 동남동녀를 요구하는가 싶더니 난데없이 뇌성벽력이 치고, 번개를 이용해 죽은 사람의 찢어진 몸을 이어 붙여 괴물 인간을 만드는 이야기, 흡혈을 하며 영생을 누리는 귀족 같은 걸 상기시키는 등, 수십 년 간 평면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나로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 불가한 오리무중의 칼싸움, 진짜로 연극을 구경한다면 눈호강이 틀림없을 화려무비한 검술, 무술, 무용을 구경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다가 마지막엔 제목처럼 천장에서 복숭아 꽃이 화르륵 비산하면서 막이 내려갈 듯하지만, 복숭아 꽃을 어디서 구해? 그냥 막이 떨어지고 만다.
근데, 이게 뭐야? 뭘 주장하는 거야? 2003년에 초안을 썼으나 2011년에야 남산예술센터에서 초연을 했고, “사카구치 안고의 단편소설 <벚꽃 만발한 나무 아래에서>가 원작이지만 이를 모티브로 재창작한 대본은 조광화의 창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본인의 색깔과 스타일로 완전히 새롭게” 바꾸었다고 한다. 일본 극단이 사카구치의 작품을 공연했을 때 꽃잎이 극장에 가득 날려 제일 앞자리에서 구경하던 조광화의 무릎에 두껍게 쌓이던 것이 충격이었다는데, 글쎄, 내가 읽어보니까, 드라마의 스토리는 그저 영생불사의 영약을 찾아 나서고, 여기에 드라큘라와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든 괴물 이야기를 섞어 놓은 위에 근사한 칼부림 씬을 올려놓은 것(뿐)이던데. 전 『객석』의 기자이자 <됴화만발>의 드라마터지인 김주연은 “<됴화만발>이 무대 위에 검객 이야기를 펼쳐 놓은 것은 스타일리시한 무대 양식을 보여주기 위한 것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주제를 보다 선명하게 보여주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면 희곡/연극의 주제가 무얼까? 김주연 가라사대 ‘죽음’과 ‘고독’이란다.
연극을 보면서 죽음과 고독을 연상할 수 있겠지. 인정한다. 그러나 골 아프게 이런 무협지를 보면서 굳이 죽음이나 고독 운운할 필요는 없을 거 같다. 그냥 한 시간 좀 넘는 시간 눈알이 뱅뱅 도는 칼싸움 구경이나 한 판 때리고 일어나 극장의 현관을 나오면서, 거 참 시원하게 잘 들 싸우더만, 한 마디로 깨끗하게 마음을 비운 다음 술집 또는 모텔로 발길을 돌리는 것이 혹시 장땡 아닐까?
<황구도>는 개 이야기다. 황구黃狗, 우리말로 ‘똥개’다. 잡종견. 요즘 말로 믹스견. 이 똥개의 이름은 아담. 캐시하고 거칠이는 암수 스피츠 순종들이다. 아담과 캐시의 주인은 장정. 은희, 준희, 재희, 영희 등의 애인이다. 장정은 마당에서 집의 경비를 담당하는 똥개 아담과 서로 신뢰하고 믿으며 사랑하기로 맹세한 바 있다. 캐시는 집안에서 사는 애완용 암컷 스피츠. 집에 놀러 온 은희가 장정의 방에서 옷을 벗으면서, “쟤가 보고 있어서 도무지 기분이 안 나.” 투정을 하고, 잔뜩 독이 오른 장정은 얼른 캐시를 마당으로 내보내는데, 아뿔싸, 캐시가 신의 뜻을 받들어 발정을 시작했던 찰나였다. 게다가 평소 연모하고 있던 아담이 하늘을 향해 코를 킁킁거리더니 캐시한테 사랑을 고백한다. 그리하여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캐시가 슬쩍 엉덩이를 내밀어 만리장성을 쌓으려는 순간, 득달같이 등장한 주인 장정이 갖은 욕을 해대면서 아담을 쫓아버린다. 이 빌어먹을 똥개! 저 육시헐 똥개가 우리 스피츠를!
며칠 후, 다른 애인 준희가 수컷 스피츠 순종 거칠이를 데리고 와 캐시와 선을 보이는데, 아무리 개들이라고 해도 한 번 한 사랑의 맹세를 그리 쉽게 버릴 거 같지 않지? 하지만 오산. 도무지 달아오르는 몸의 갈증을 어찌하지 못하는 캐시는 아담이 보고 있는 앞에서 그만 거칠이를 받아들이고 만다. 이렇게 해서 처음 새끼를 낳은 캐시. 그러나 개 같은 주인은 은희, 준희에 이어 숱한 희 자매를 침대에 끌어들이며 한편으로 캐시의 자식들을 비싼 값을 받고 팔아버린다. 캐시는 쉬지 않고 임신을 하고. 열 받아 집을 나간 아담은 진정한 사랑을 찾아 개의 한 생을 온통 떠돌아다니다 결국 이젠 늙어 꼬부라진 몸으로 역시 늙어 꼬부라진 캐시를 찾아 옛집으로 돌아온다. 뭐 이런 사랑과 맹세의 이야기.
<미친키스>는 한 남매의 남녀관계 이야기. 오빠는 도청과 몰카 전문 사설 탐정. 동생은 사랑에 실패하고 취업에도 실패해 일본인 현지처도 하고, 많은 돈을 받고 교수의 세컨드도 하는 막장 집안. 오빠 장정은 신희라는 아가씨에게 집착하다가 걷어 차인 후 열라 스토킹 중. 신희의 지도교수는 장정의 동생 은정의 고객이면서 신희와도 관계를 맺기 시작하며, 남편 인호의 뒷조사를 장정에게 의뢰한 교수의 아내 영애는 또 장정과 뼈와 살이 타는 시간을 갖는다. 한 마디로 어떻게 이런 커플을 골랐는지 참으로 가관이다. 정말로 드라마를 봤더라면 무대 의상이 별로 필요할 거 같지 않을 정도의 만수산 드렁칡 같은 관계, 관계, 그리고 관계. 섹스와 돈의 난장판.
조광화는 20대 후반에 이 드라마를 썼다는데 지금 다시 공연하기 위해 작품을 들여다보니 이젠 지도교수 인호의 마음으로 자라났다고 말한다. 사랑과 욕정 때문에 결혼을 했지만 이젠 식어버려 다른 여성을 찾는 중년의 남자가. 혹시 자신도 그러고 싶은 거 아냐? 어쨌거나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란다.
<철안붓다>는 1999년 성수대교 북단에서 초연을 했다는데, “성수대교 북단”이란 극장/극단이 있는지 아니면 진짜 성수대교 북단의 야외에서 공연을 했는지는 내가 무식해서 모르겠다. 석존, 부처가 열반하고 3천 년이 지난 25세기 중반이 무대다.
지금 미래 관련해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쏟는 것은 단연 AI. 그러나 조광화는 유전자 변형, 유전자 조작으로 눈을 돌렸다. 하긴 초연이 있던 1999년, 20세기 끝 무렵에 AI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기도 했다. 25세기엔 거의 모든 인간이 유전자 조작에 의해 태어난 생명체이고 진짜 인간끼리 수정을 통해 세상 구경을 한 순종은 거의 없다. 극에 등장하는 순종 인간도 오직 세 명. 닥터와 닥터의 아들 시원, 그리고 희은. 닥터는 시원과 희은을 통해 순종 인간의 번식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불모, 칼리 신장, 나찰 등 동물 키메라들, 야찰, 전사, 여귀 같은 괴물들은 인간을 도륙해 고기를 먹으려 하니 어찌 한 판 싸움이 없을 수 있을까? 키메라 가운데 코끼리 형상을 한 상후라는 키메라 하나만 키메라를 창조한 순종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닥터는 전생수라는 생명체를 창조한다. 전생수. 지난 생이 아니라 전생轉生, 서로 몸을 바꿔 다시 사는 일을 가능하게 해주는 수獸, 큰 자궁을 갖고 있는 짐승이다. 자궁 속에 두 생명체를 넣으면 영혼인지, 뇌파인지 하여간 알 수 없는 뭔가가 서로 바뀌게 되는 것.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부처가 죽은 후 3천 년이 지난 기념인지 하여간 죽은 다음의 세상인지 뭔지 아리송한 세계가 있어서 붓다도 나오고, 힌두교의 최고 (여)신인 비슈누, 죽음의 신인 칼리 같은 형이상학적 인물도 나오고, 순종 인간 시원은 이름 그대로 순종 인간으로 죽음을 맞지만 전신을 한 악당 안회의 몸으로 새로운 인류의 시원이 되기도 하는 등, 이 연극을 굳이 내가 한 마디로 한다면, 만화지, 만화.
만화라고 해서, 내가 나쁜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니다. 조광화가 극에서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이 내가 극에서 보고 싶어 하는 것과 다를 뿐이다. 작가는 무대에서 자신만의 스타일, 즉 조광화 표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그게 하필이면 나하고 코드가 맞지 않아 내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폭력과 섹스와 벗기기가 만발한 작품이 되었을 뿐이지, 진짜 무대는 연일 만석을 기록했을 지도 모른다. 그만큼 독특하게 대중적이란 말도 된다. 다만 나는 당신한테 권할 생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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