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타야 단편집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타티야나 톨스타야 지음, 이수연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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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비에트 연방에도 “백만장자”가 있었다. 타티야나 톨스타야의 할아버지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가 그랬다. 1917년에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생하자 혁명에 반대하여 조국을 떠난 귀족의 후예 톨스토이 선생은 놀랍게도 6년 후에 러시아로 돌아가 대단한 특권 계층 대접을 받아 세간에서 “백만장자 작가”라고 했던 거다. 물론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백작과 넓은 의미에서 같은 가문이긴 하지만 이젠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인기도 없고 지명도도 없는 과학소설SF 작가한테 레닌과 스탈린이 무슨 이유로 그렇게 대접을 했을까? 하여튼 알렉세이 톨스토이의 손녀딸이 타티야나 톨스타야다. 1951년에 레닌그라드에서 출생해 유복하게 자라 좋은 교육을 받은 톨스타야는 1987년 단편소설 <황금 댓돌 위에 앉아>로 데뷔를 했지만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우리가 아는 많은 러시아 여성 작가들, 빅토리아 토카레바,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류드밀라 페트루셉스카야 같은 이들처럼 망치와 낫의 붉은 기가 내려가는 대신 러시아 삼색기가 모스크바 크렘린에 게양된 1989년 이후였다.

  소비에트 시절에선 여성 작가들이 여성의 독특한 세계를 문자로 만드는데 애로사항이 있었던 거 같다.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하면 뭘 하겠느냐만, 당시 좌파 세계, 진보 세력을 진두지휘했던 소비에트는 엉뚱하게 인민들의 사상마저 통제하려는 가장 골통 우파적이라 할 수 있는 파시즘적 통치를 하는 바람에 여성들이 촉각을 세울 수밖에 없는 이슈들, 예컨대 섹스, “임신, 출산, 육아, 임신중단, 이혼, 경력, 매춘, 강간, 동성애”(역자해설 인용) 같은 것들을 거의 언급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여성 인권이 출발하는 시점에는 당연히 그간 여성들이 피해를 입었던 사회 전반의 병리현상을 다루어 문제제기를 해야 할 터인데 그걸 발언하지 못하게 하니 러시아 문학판은 마초들의 권력형 유희장 비슷하게 변질되었다. 그리하여 앞에서 언급한 작가들도 거의 다 소설가, 극작가라는 문학 종사자라기보다 언론인, 평론가 같은 비문학 글에 집중하고 있다가, 드디어 러시아라는 동토에 봄바람이 불자마자 원고지를 펼치고 여태 자신들이 참아 왔던 문제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진짜 한 번 읽어 보시라, 유럽이나 동아시아 여성작가와는 또 다른 매우 참신, 독특한 소재와 필체와 스토리를 만날 수 있을 터이니. 남자 작가들은? 그들은 소비에트 시절에 자기 원고를 해외에 빼돌려 그곳에서 출간을 하고 유배를 당하든지 (이민이라는 방식을 통해) 조국과 모국어에서 추방당했다.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할 말은 해야 하는 것, 그게 작가의 숙명이란다.


  《톨스타야 단편집》은 “톨스타야의 대표 단편집 《오케르빌 강》에 수록된 단편들 중에서 네 편을 실었다.” 역자 해설 115쪽에 의하면 지만지가 이런 야만스런 짓을 했다, 이거다. 이왕 번역을 하고 책을 출간하려면 한 권을 통째로 해야지 거기에서 달랑 네 편만, 그것도 표제작품도 빼 버리고 책을 내다니, 오랜만에 백수가 큰 맘 먹고 저지른 내돈내산인데 어찌 속이 편할 수 있겠느냐! 짜증 제대로네. 별 두 개 주려다가, 작품이 괜찮아서 참고 참았다.

  이 책에서는 앞 문단에서 이야기한 여성들이 제기하는 사회 병리적 현상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대신 역사상 거의 처음으로 자본주의 속에서 살게 된 러시아와 러시아 시민, 사회를 독특한 시각으로 보는 매력이 있다. 제일 앞에 실린 <밤>은 정신지체가 있는 뇌성마비(인 것처럼 보이는 장애)를 가져 엄마의 보호 없이는 생활할 수 없는 소년의 불행을, <백지>는 외과수술을 통해 “자존심”과 더불어 세상 사는 데 가장 쓸모없는 “양심” 조직을 절개하고, 수술이 끝나자마자 안면 싹 바꾸는 현대인의 모습을, <새와의 만남>은 소년 페차가 본 어른 세계의 비열함과 슬픔을, <매머드 사냥>은 남자 한 명 잘 만나 팔자 고쳐보려는 젊은 여성의 허상을 그리고 있다. 네 편 다 재미있다. 그러나 해설을 빼고 겨우 112쪽. 이제 본격적으로 읽을 만하면 뚝, 책은 끝난다. 원, 참. 그래도 한 2백쪽 가까이 가줘야 아마존 밀림이 살아 남는 거 아니냐고.

  단편들이라 내용 소개를 더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래저래 독후감 빨리 쓸 수 있어서 좋긴 하지만 영 찜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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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3-12-18 0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만지 번역서 중엔 발췌번역이 꽤 있더라고요. 한 번 속은(?) 경험이 있어서 지만지는 책 정보를 잘 살피고 있어요.

Falstaff 2023-12-18 08:35   좋아요 1 | URL
옙. 그나마 다행인 것이 발췌본은 표지에 발췌라고 써 놓았더라고요. 저도 그건 절대 안 읽습니다.

은하수 2023-12-18 0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마음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래서 전 단편집이 영... 맘에 안찰때가 많아요^^

Falstaff 2023-12-18 08:39   좋아요 0 | URL
아효, 중요 작품을 쏙 빼고 번역한 이유가 있을까요?
이거 말고도 패트릭 화이트가 쓴 빼어난 단편집 <불타버린 사람들>도 중요한 작품을 빼고 번역본을 냈답니다. 그때 화이트가 갑자기 노벨문학상을 받는 바람에 범우사에서 속도전을 하느라고 외국서적 해적판으로 번역해 냈기 때문이었는데, 지만지는 그것도 아니고 거 참 아쉽습니다.

stella.K 2023-12-18 1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만지는 <톨스타야 단편집>을 완역하라! 완역하라!

이러면 지만지가 좀 볼까요? 욕 먹을 짓이네요.ㅉ 언쩐지 톨스토이를 연상시킨다 했더니 과연 그렇군요.

Falstaff 2023-12-18 16:50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지만지, 간혹 숨어있는 명작을 출간해서 그렇지, 하는 짓은 욕 먹어 마땅하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습니다. ㅎㅎㅎㅎ
 
레몬 테이블
줄리언 반스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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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한 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작품집. 열 번째 읽는 줄리언 반스의 책이며 작가의 단편소설은 처음 감상하는 기회다. 사실 오늘의 독후감은 딱 한 줄이면 다 끝난다. 이렇게.


  “단편까지 재미나게 잘 쓰면 반칙 아냐?”


  내가 단편소설엔 좀 까다롭다. 근데 이 책에 실린 것들, 물론 전부 다 그랬다는 건 아니고, 대부분 어떻게 내 마음에 그리 딱 맞아 떨어지는지 참. 첫 작품부터 그랬다. <이발의 어제와 오늘>.

  이사간 동네에서 처음 이발소를 간 날. 혼자 가서 어떻게 깎아달라고 해야 하는지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믿지 못하는 엄마가 기어이 남자들만의 세상인 이발소까지 따라와서, “머리 끝은 약간 치고 뒤하고 옆은 짧게요.” 주문을 하고, 이발이 끝나 이발사가 “아주머니, 한 번 살펴보시죠.”라면서 작업이 끝났음을 통지하니 재까닥 “아주 멋지네요.”라고 응수했으나, 정작 이발소 문을 나서자마자 아들을 멍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턱 깎인 불쌍한 양 같네.”라고 투덜거리는 장면. 이렇게 시작한다. 그레고리는 이후부터 이발소를 혼자 다니며 벌써 긴 바지를 입는데도 “유년단원이지?”라고 묻는 덜 떨어진 이발사에게 “아닌데요.” “벌써 소년단원인가?” “아닙니다.” “십자군인가? 십자군은 아주 좋은 조직이야. 한 번 고려해봐.” 이 따위 말을 듣기도 하는 사이에 배꼽 아래 털이 나기 시작했고, 이발 중에는 할례를 하지 않으려면 사라센과 싸워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야 하니 끝까지 오줌을 참아가면서 어느 새 어른이 됐다. 

  이젠 이발이 끝나고 거울을 보며 “젠장, 이 꼴이 뭐야.”라고 직접 불만을 하게 됐지만 날 선 면도칼을 쥐고 있는 이발사 앞에서 결코 불평하지는 않았다. 가르마를 어느 쪽으로 타겠느냐 하는 질문엔 “그저 올 백으로 넘겨주세요.” 해 놓고는 마치 소년시절의 이발사에게 복수를 하듯이 머리를 홱 움직인 다음 이발 가운에서 손을 빼 손가락 빗으로 휙휙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심술도 이젠 그레고리 마음대로다. 어느새 그레고리는 이발사가 동성연애자가 아닌가 의심하기도 하지만 묻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이야기하기를 결혼 생활 27년차로 아이들이 둘인데 하나는 다 커서 독립했고, 딸은 아직 집에 있단다. 음. 내 엉덩이를 탐하지는 않겠군. 그러나 이발사는 오히려 그레고리더러 “손님은 결혼할 타입이 아닌 것 같네요.”라고 물어보는 것이 오히려 그레고리를 동성애자로 의심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레고리도 그동안 제법 인생을 알아, 나이든 이발사한테 한 수 가르치기를 “결혼은 겁쟁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모험이지요.” 오냐, 많이 컸다, 많이 컸어.

  세월은 흘러흘러, 그레고리는 머리 깎으러 가기 전에 메니큐어 세트를 갖고 욕실에 들어가 손톱 가위로 수북한 긴 눈썹을 손질하고, 귓구멍에서 솟아오른 불필요한 털에도 가위질을 하고, 의기소침한 기분으로 코를 밀어 올린 다음 콧구멍을 조사하지만 특별히 긴 콧털은 없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 화장용 수건 끄트머리를 적셔 귀 뒷부분을 문질러 닦고, 연골질의 귓바퀴 홈을 썰매 타듯 누비고, 밀랍 같은 귓구멍을 마지막으로 쑤신 후에야 외출복을 입는다. 이젠 이발사한테 가지 않는다. 대신 뭐라? 헤어 스타일리스트? 오후 세 시에 스타일리스트 켈리와 예약을 해 놓고 찾아간 곳이 바넷 헤어. 의자에 앉으면 일단 뒤로 자빠뜨려 놓고 머리를 감긴다. (난 여태 한 번도 당해보지 못한 풍경이다.) 차가운 손의 살찐 여자가 “너무 뜨거우세요?” “휴가 중이세요?” “컨디셔너 해드릴까요?” 이렇게 묻는 것도 몇 년 경험해보니 전혀 이상하지 않다. 작가가 고전음악에 일가견이 있는 반스라서 헤어숍의 스피커엔 류트와 비올의 연주가 흘러나오고(다울랜드 아니겄어?) 드디어 등장한 예약 스타일리스트 켈리는 틀림없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나이를 먹어도 신경이 쓰이긴 마찬가지인데, 자신의 아랫배와 허벅지 높은 곳, 그러니까 치골 부근, 또는 엉덩이를 그레고리의 어깨와 상박부에 약 오르기 적당한 시간차로 슬쩍 마찰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켈리는 스물일곱 살. 그레고리의 맏딸은 스물다섯. 그리고 딸이 하나 더 있다. 겁쟁이 그레고리가 했던 유일한 모험인 결혼도 벌써 28년을 무난하게 끌어왔다. 그는 벌써 40년 동안이나 머리 손질이 끝난 다음에 한결같이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을 안다. “아주 멋집니다.” “훨씬 깔끔하네요.” 또는 “끝내주네요.” 또는 “고맙습니다.” 오늘도 그레고리는 그렇게 대답할 것이다.

  작가가 누구? 줄리언 반스. 단편이라고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서, 기가 막힌 소스를 조금, 아주 조금 뿌리는데, 그게 뭔가 하면, 야한 스냅. 이게 조금만 길어지면 외설스러워질 수도 있고, 기분좋게 끈적일 수도 있고, 독자의 맥동만 쓸데없이 높일 수도 있건만, 이 셰프, 반스는 독자는 상상도 하지 못한 장소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은 시간에 그러니까 난데없이 찰싹, 가비야운 손바닥으로 독자의 마빡을 토닥이고 지나간다. 정말 순간에 한 방 당한 듯한 느낌. 이 작품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고 작품마다 곳곳에 도사린 귀여운 장난 또는 딴죽. 거참.


  열 하나의 단편소설이 전부 노인들의 사랑, 섹스, 피폐, 추억(이라는 황량함), 실패한 도전, 그리고 죽음 또는 죽음의 기다림 같은 것이다. 이미 주인공들은 시대가 요구하는 소명을 더 이상 실천할 능력도 되지 않고, 시대가 바라지도 않으며, 그럴 것이라고 추측해 나름대로 행동해 봤자 후배들에게 폐만 끼칠 뿐이다. 《레몬 테이블》에는 <레몬 테이블>이란 제목의 단편이 나오지 않는다. 처음 알았는데, 레몬은 서양에서 죽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럼 레몬 테이블은 죽음의 식탁, 죽음의 진열, 더 좋게 이야기하면 죽음에 가까운 노인들의 모음집이란 의미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작품집 《레몬 테이블》은 이런 문장을 읽으며 책을 덮는다.


  “나는 문간에 서서, 레몬을 큰 소리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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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12-15 06: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타티야나 톨스타야, 《톨스타야 단편집》
화요일. 조지 엘리엇, <사일러스 마너>
수요일.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깨어진 항아리>
목요일. 장 콕토, <무서운 아이들>
금요일. 아우구스트 스트랜드베리이, <꿈 연극>

잠자냥 2023-12-15 09:59   좋아요 0 | URL
금요일 전에 <꿈 연극> 읽어둬야겠는데요!

yamoo 2023-12-15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몬 테이블도 재밌었습니다. 이때 나온 반스의 책 중 <메트로폴리탄>이 가장 그저 그랬습니다. 이거 빼놓고 모두 좋았다능!ㅎㅎ

Falstaff 2023-12-15 16:24   좋아요 0 | URL
야무 님도 반스 되게 좋아하셔요, 그죠? ㅎㅎㅎ 반갑습니다.

stella.K 2023-12-15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절판이네요. 도대체 이 책이 언제 나와서 절판이된건지. ㅠ 한권 인쇄소에 부탁할 수도 없고. ㅉ

Falstaff 2023-12-15 16:24   좋아요 0 | URL
저도 알라딘 헌책방에서 샀어요. 파는 곳이 있을 걸요?

잠자냥 2023-12-15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보다는 젊었을 때(?) 읽었는데 지금 읽으면 더 진하게 다가올 것도 같습니다. ㅎㅎ
단편도 참 잘 쓰죠 이 양반...ㅎㅎ

Falstaff 2023-12-15 16:25   좋아요 0 | URL
옙. 좀 묵은 시절에 읽는 편이 더 좋을 거 같습니다.
 
조광화 희곡집 - 됴화만발.황구도.미친키스.철안붓다
조광화 지음 / 푸른북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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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됴화만발>, <황구도>, <미친키스>, <철안붓다> 이렇게 네 작품을 실은 모음집.


  첫 작품의 제목을 왜 됴화, 라고 했을까? 복숭아꽃 도화桃花를 20세기 초까지 ‘됴화’라고 쓰고 읽었다.  2578년에 출발해서 2078년에 불시착한 타임머신(시낭) 가마우지 호를 수선해 탑승한 예비역 소령 이언호는 기계가 5백년 마다 에러를 발생시킨다는 걸 모르고 도착한 곳이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4년 전인 1578년 충청도 예산현 대지동면, 당시 말로 “됴한드르”에 비상착륙하기에 이른다. 복거일의 장편소설 <역사 속의 나그네> 장면이다. 작가는 작품 속 16세기 조선의 언어와 문자를 19세기 식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표기에서 가장 눈에 띄는 방법이 바로 구개음화가 아직 안 된 자음과 복모음의 사용이다. 물론 ‘도화’를 ‘됴화’로 쓸 때에는 구개음화는 필요 없지만 말이 그렇다는 얘기다.

  그러나 <됴화만발>은 극을 보지 않고 오직 희곡으로만 읽는 평면 작품으로는 도무지 이해불가의 진퇴양난이었다. 라면과 떡볶이를 좋아하는 소녀를 납치해 산골짜기로 끌고 간 악당을 지하에서 난데없이 등장한 케이라는 남자가 신묘한 칼부림으로 제거하더니 어처구니없게 소녀한테 책을 한 권 던져주면서 읽어달라고 한다. 책의 제목이 바로 <됴화만발>. 책은 영생불사의 약을 구하라고 밀명을 내린 황제의 이야기, 3천 명의 동남동녀를 요구하는가 싶더니 난데없이 뇌성벽력이 치고, 번개를 이용해 죽은 사람의 찢어진 몸을 이어 붙여 괴물 인간을 만드는 이야기, 흡혈을 하며 영생을 누리는 귀족 같은 걸 상기시키는 등, 수십 년 간 평면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나로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 불가한 오리무중의 칼싸움, 진짜로 연극을 구경한다면 눈호강이 틀림없을 화려무비한 검술, 무술, 무용을 구경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다가 마지막엔 제목처럼 천장에서 복숭아 꽃이 화르륵 비산하면서 막이 내려갈 듯하지만, 복숭아 꽃을 어디서 구해? 그냥 막이 떨어지고 만다.

  근데, 이게 뭐야? 뭘 주장하는 거야? 2003년에 초안을 썼으나 2011년에야 남산예술센터에서 초연을 했고, “사카구치 안고의 단편소설 <벚꽃 만발한 나무 아래에서>가 원작이지만 이를 모티브로 재창작한 대본은 조광화의 창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본인의 색깔과 스타일로 완전히 새롭게” 바꾸었다고 한다. 일본 극단이 사카구치의 작품을 공연했을 때 꽃잎이 극장에 가득 날려 제일 앞자리에서 구경하던 조광화의 무릎에 두껍게 쌓이던 것이 충격이었다는데, 글쎄, 내가 읽어보니까, 드라마의 스토리는 그저 영생불사의 영약을 찾아 나서고, 여기에 드라큘라와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든 괴물 이야기를 섞어 놓은 위에 근사한 칼부림 씬을 올려놓은 것(뿐)이던데. 전 『객석』의 기자이자 <됴화만발>의 드라마터지인 김주연은 “<됴화만발>이 무대 위에 검객 이야기를 펼쳐 놓은 것은 스타일리시한 무대 양식을 보여주기 위한 것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주제를 보다 선명하게 보여주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면 희곡/연극의 주제가 무얼까? 김주연 가라사대 ‘죽음’과 ‘고독’이란다.

  연극을 보면서 죽음과 고독을 연상할 수 있겠지. 인정한다. 그러나 골 아프게 이런 무협지를 보면서 굳이 죽음이나 고독 운운할 필요는 없을 거 같다. 그냥 한 시간 좀 넘는 시간 눈알이 뱅뱅 도는 칼싸움 구경이나 한 판 때리고 일어나 극장의 현관을 나오면서, 거 참 시원하게 잘 들 싸우더만, 한 마디로 깨끗하게 마음을 비운 다음 술집 또는 모텔로 발길을 돌리는 것이 혹시 장땡 아닐까?


  <황구도>는 개 이야기다. 황구黃狗, 우리말로 ‘똥개’다. 잡종견. 요즘 말로 믹스견. 이 똥개의 이름은 아담. 캐시하고 거칠이는 암수 스피츠 순종들이다. 아담과 캐시의 주인은 장정. 은희, 준희, 재희, 영희 등의 애인이다. 장정은 마당에서 집의 경비를 담당하는 똥개 아담과 서로 신뢰하고 믿으며 사랑하기로 맹세한 바 있다. 캐시는 집안에서 사는 애완용 암컷 스피츠. 집에 놀러 온 은희가 장정의 방에서 옷을 벗으면서, “쟤가 보고 있어서 도무지 기분이 안 나.” 투정을 하고, 잔뜩 독이 오른 장정은 얼른 캐시를 마당으로 내보내는데, 아뿔싸, 캐시가 신의 뜻을 받들어 발정을 시작했던 찰나였다. 게다가 평소 연모하고 있던 아담이 하늘을 향해 코를 킁킁거리더니 캐시한테 사랑을 고백한다. 그리하여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캐시가 슬쩍 엉덩이를 내밀어 만리장성을 쌓으려는 순간, 득달같이 등장한 주인 장정이 갖은 욕을 해대면서 아담을 쫓아버린다. 이 빌어먹을 똥개! 저 육시헐 똥개가 우리 스피츠를!

  며칠 후, 다른 애인 준희가 수컷 스피츠 순종 거칠이를 데리고 와 캐시와 선을 보이는데, 아무리 개들이라고 해도 한 번 한 사랑의 맹세를 그리 쉽게 버릴 거 같지 않지? 하지만 오산. 도무지 달아오르는 몸의 갈증을 어찌하지 못하는 캐시는 아담이 보고 있는 앞에서 그만 거칠이를 받아들이고 만다. 이렇게 해서 처음 새끼를 낳은 캐시. 그러나 개 같은 주인은 은희, 준희에 이어 숱한 희 자매를 침대에 끌어들이며 한편으로 캐시의 자식들을 비싼 값을 받고 팔아버린다. 캐시는 쉬지 않고 임신을 하고. 열 받아 집을 나간 아담은 진정한 사랑을 찾아 개의 한 생을 온통 떠돌아다니다 결국 이젠 늙어 꼬부라진 몸으로 역시 늙어 꼬부라진 캐시를 찾아 옛집으로 돌아온다. 뭐 이런 사랑과 맹세의 이야기.


  <미친키스>는 한 남매의 남녀관계 이야기. 오빠는 도청과 몰카 전문 사설 탐정. 동생은 사랑에 실패하고 취업에도 실패해 일본인 현지처도 하고, 많은 돈을 받고 교수의 세컨드도 하는 막장 집안. 오빠 장정은 신희라는 아가씨에게 집착하다가 걷어 차인 후 열라 스토킹 중. 신희의 지도교수는 장정의 동생 은정의 고객이면서 신희와도 관계를 맺기 시작하며, 남편 인호의 뒷조사를 장정에게 의뢰한 교수의 아내 영애는 또 장정과 뼈와 살이 타는 시간을 갖는다. 한 마디로 어떻게 이런 커플을 골랐는지 참으로 가관이다. 정말로 드라마를 봤더라면 무대 의상이 별로 필요할 거 같지 않을 정도의 만수산 드렁칡 같은 관계, 관계, 그리고 관계. 섹스와 돈의 난장판.

  조광화는 20대 후반에 이 드라마를 썼다는데 지금 다시 공연하기 위해 작품을 들여다보니 이젠 지도교수 인호의 마음으로 자라났다고 말한다. 사랑과 욕정 때문에 결혼을 했지만 이젠 식어버려 다른 여성을 찾는 중년의 남자가. 혹시 자신도 그러고 싶은 거 아냐? 어쨌거나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란다.


  <철안붓다>는 1999년 성수대교 북단에서 초연을 했다는데, “성수대교 북단”이란 극장/극단이 있는지 아니면 진짜 성수대교 북단의 야외에서 공연을 했는지는 내가 무식해서 모르겠다. 석존, 부처가 열반하고 3천 년이 지난 25세기 중반이 무대다.

  지금 미래 관련해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쏟는 것은 단연 AI. 그러나 조광화는 유전자 변형, 유전자 조작으로 눈을 돌렸다. 하긴 초연이 있던 1999년, 20세기 끝 무렵에 AI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기도 했다. 25세기엔 거의 모든 인간이 유전자 조작에 의해 태어난 생명체이고 진짜 인간끼리 수정을 통해 세상 구경을 한 순종은 거의 없다. 극에 등장하는 순종 인간도 오직 세 명. 닥터와 닥터의 아들 시원, 그리고 희은. 닥터는 시원과 희은을 통해 순종 인간의 번식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불모, 칼리 신장, 나찰 등 동물 키메라들, 야찰, 전사, 여귀 같은 괴물들은 인간을 도륙해 고기를 먹으려 하니 어찌 한 판 싸움이 없을 수 있을까? 키메라 가운데 코끼리 형상을 한 상후라는 키메라 하나만 키메라를 창조한 순종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닥터는 전생수라는 생명체를 창조한다. 전생수. 지난 생이 아니라 전생轉生, 서로 몸을 바꿔 다시 사는 일을 가능하게 해주는 수獸, 큰 자궁을 갖고 있는 짐승이다. 자궁 속에 두 생명체를 넣으면 영혼인지, 뇌파인지 하여간 알 수 없는 뭔가가 서로 바뀌게 되는 것.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부처가 죽은 후 3천 년이 지난 기념인지 하여간 죽은 다음의 세상인지 뭔지 아리송한 세계가 있어서 붓다도 나오고, 힌두교의 최고 (여)신인 비슈누, 죽음의 신인 칼리 같은 형이상학적 인물도 나오고, 순종 인간 시원은 이름 그대로 순종 인간으로 죽음을 맞지만 전신을 한 악당 안회의 몸으로 새로운 인류의 시원이 되기도 하는 등, 이 연극을 굳이 내가 한 마디로 한다면, 만화지, 만화.

  만화라고 해서, 내가 나쁜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니다. 조광화가 극에서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이 내가 극에서 보고 싶어 하는 것과 다를 뿐이다. 작가는 무대에서 자신만의 스타일, 즉 조광화 표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그게 하필이면 나하고 코드가 맞지 않아 내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폭력과 섹스와 벗기기가 만발한 작품이 되었을 뿐이지, 진짜 무대는 연일 만석을 기록했을 지도 모른다. 그만큼 독특하게 대중적이란 말도 된다. 다만 나는 당신한테 권할 생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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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3-12-14 15: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친키스> 연극 예매했다가 내용이 힘들 것 같아 취소한 기억이 있어요. 조광화 작품은 <젊은 베르테의 슬픔>만 본 것 같은데... <모래시계>도 조광화 였던가... 점점 시대에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

Falstaff 2023-12-14 18:26   좋아요 1 | URL
아휴.... 이 양반은 잘 모르겠어요. 하여간 저하고는 정말 맞지 않는 극작가입니다.
꽤 유명한 양반 같더라고요. 희곡 전문 출판사 지만지드라마에서는 단행본이 많이 나옵니다.
뭔 얘기를 하고 있는 지는 알 거 같은데..... 이하 생략.
 
운명의 꼭두각시
윌리엄 트레버 지음, 김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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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3년, 잉글랜드 도싯 지방 우드컴엔 우드컴 파크라는 대 저택이 있어서 삶의 활기를 만끽하는 반면, 아일랜드 킬네이 주택은 무덤처럼 고요하다며 작품은 시작한다. 두 집안이 무슨 관계인지 보자.

  160여년 전이면 1820년대에 17세 영국인 소녀 애나 우드컴이 아일랜드 남자 윌리엄 퀸턴과 결혼해 아일랜드로 떠났다. 코크 주 로크에서 멀지 않고 페르모이에서도 멀지 않은 킬네이 저택에서 살면서 킬네이 최초의 과수원을 조성하는 등 열심히 살다가 그만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만일 여주인이 살았다면 마흔 살 정도 됐을 무렵에 아일랜드에 세계적으로 이름난 대기근이 들고 만다. 당시 아일랜드 인구 8백만 가운데 2백만 명이 굶어 죽었다고 기록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아일랜드 붉은 머리카락의 백인들이 대규모로 미국으로 가는 배를 탔다. 그때 퀸턴 가는 코크 주에 막대한 토지를 가진 대지주로 이름이 높았으며 여주인이 아낌없이 소작인들을 돌보아 덕망을 곳곳에서 칭송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다가 대기근이 들자 이미 나이 든 퀸턴 씨 눈에 저택 저 너머 언덕에 죽은 아내의 혼령이 마치 저 어진 고다이바 부인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더니 세상의 땅은 농사를 직접 짓는 사람들의 것이니 골고루 나누어 주라고 산 남편에게 당부를 했다. 퀸턴 씨는 죽은 아내의 말을 따라 진짜로 땅의 대부분을 소작인들에게 주어버렸다.

  두 세대가 지난 후에 영국의 한 육군대령이 페르모이에 주둔했다. 이때 대령의 맏딸이 퀸턴가의 남자와 결혼해 아일랜드에 살면서 아들 윌리와 딸 제럴딘과 데르드러를 낳았고, 작은 딸은 영국인 보조 사제와 결혼해 딸 메리앤을 낳았다. 작은 딸이 결혼할 때 우드컴 집안은 결혼선물로 신랑에게 우드컴 마을의 종신교구 사제직을 맡겼다. 퀸턴이란 성姓은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에 뿌리를 둔 성인 퀴엔틴(타란티노?)에서 유래했지만 아무도 이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하도 오래된 일이라서. 이 책은 육군대령이자 우드컴 가문 중에서 낮은 우드컴 가족이라 저택의 정원을 산책하더라도 집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집의 두 자매가 낳은 아이들, 윌리와 메리앤의 이야기이다. 슬픈 사랑의 이야기. 윌리엄 트레버가 늘 그렇듯이.


  이 책을 읽기 위하여 독자는 1910년대 아일랜드 독립 과정을 대강 알아둘 필요가 있다. 1910년에 영국 정치판의 중요한 논쟁 가운데 하나가 아일랜드 자치법안 문제였다. 이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아일랜드에서는 친영(자치)파인 얼스터 연합주의자와 아일랜드 민족주의자(완전독립파) 간에 살벌한 폭력행위가 벌어졌고 깜짝 놀란 조지 5세는 법안 연기를 결정했다. 이러다가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아일랜드 남자들은 승전을 하면 독립을 보장할 것으로 믿고 영국군으로 입대해 목숨을 바쳤다. 하지만 자치 또는 독립이 얼른 일어나지 않아 아일랜드에서는 1916년에 사실상 독립운동을 개막하는 부활절 폭동이 일어났다. 이때 장면을 다룬 문학작품이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쓴 <켈트의 꿈>이다. 폭동 이후에 아일랜드에서는 마이클 콜린스를 주축으로 하는 자치파와 미국 태생의 민족주의자로 완전한 독립을 주장한 에이먼 데벌레라 파로 나뉘어 콜린스는 길을 가다가 총격을 받아 죽기도 한다. 이와 별개로 ‘블랙 앤드 텐즈’라고 불리는 영국의 아일랜드 왕립 경찰대도 스파이를 처단한다는 이유로 한 마을을 잔인하게 초토화시키기도 했다. 코크Cork 주는 독립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분쟁지역 가운데 하나로 ‘불타는 코크’로 불릴 정도였다. 그리하여 윌리 퀸턴의 가족 역시 블랙 앤드 텐즈에 의한 테러/학살의 표적이 된다. 전쟁이 끝난 후 아버지의 제분소에 도일이라는 남자를 복귀시켰는데, 누군가가 마이클 롤린스가 퀸턴 가를 방문했다는 이야기를 전했고, 도일은 나무에 목이 매달린 채 혀가 잘린 시신으로 발견된다. 이어서 퀸턴 씨의 저택이 화염에 휩싸였으며, 집안에 있던 가족들이 흉탄을 맞는다.

  윌리의 이야기에서 처음 나오는 장면은 개인교사인 킬개리프 신부가 윌리에게 라틴어를 가르치는 모습이다. 서른 살이 넘지 않았으나 윌리가 아는 가장 품위 있는 사람인 킬래리프 신부는 지금은 시카고에서 가톨릭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과의 일 때문에 성직을 박탈당했어도 여전히 로만 칼라를 달고 다닌다. 흔히들 성직박탈과 관련해서 그렇게 말하지만 더 총명한 사람들이라면 그건 과장된 이야기일 것이라 일축해버리고 만다. 나중엔 어떤 일 때문이었는지 밝혀지는데 그건 비밀로 해두자. 성직 박탈 신부는 가진 돈이 없어 숙박비 대신 윌리에게 가정교사를 하고 젖소를 돌본다. 결혼 때문에 집을 떠난 하녀 자리를 새로 채운 총명하고 충직한 새 하녀 조세핀은 아름다운 모습과 달리 하녀다운 거친 손을 가지고 있었다. 바람과 달리 조세핀은 집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제분소 직원으로 다리를 절어 전쟁에 나가지 못한 조니 레이시와 결혼하고자 일을 계속할 수 없다고 마님께 아뢴다. 그러나 몇 년 후 조니 레이시는 브라이디 스위니라는 아가씨와 결혼한다. 인생이 그렇지 뭐. 멀지 않은 곳엔 두 고모가 늙은 하녀 필로미나와 함께 산다. 큰 고모는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전장에 나간 남편이 전사하는 바람에 거의 처녀 수준이고, 작은 고모는 말 그대로 처녀다. 제분소의 데렌지 씨는 아일랜드에 별로 없는 신교도라 작은 고모에게 청혼할 수 있어도 스스로를 사회적으로 부족한 사람으로 여겨 엄두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둘이 서로 은근히 좋아하는 건 물론이다. 결코 이루어지지 않지만. 엄마는 저 위에서 우드컴 집안 이야기할 때 페르모이에 주둔한 영국대령의 큰딸이다. 여기까지 소개한 등장인물은, 영국의 아일랜드 왕립 경찰대에 의한 학살에서 죽지 않고 살아난 사람들이다. 킬갤리프 신부는 가슴에 총알을 맞아 죽었는 줄 알았다가 겨우 살아났고, 두 고모는 여행을 떠나자마자 학살 사건이 벌어지는 바람에 목숨을 건졌다.

  죽은 사람은, 아버지 퀸턴 씨. 일곱 살 누이 제럴딘과 여섯 살 데르드러, 요리사 플린 부인, 정원사 오닐 씨, 그의 아들 선하고 신중한 팀 패디, 작은 고모가 키우는 개 여러 마리, 그리고 시커멓게 화장 당한 퀸턴 가문의 저택. 며칠 전에 윌리는 아버지와 마차를 타고 시내에 장보러 나간 적이 있다. 이때 펍에 들러 가벼운 요기를 했고, 아버지는 영국군 러드킨 중사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가 리버풀에 있는 청과물 가게를 물려 받았다고, 제대한 다음에 그곳으로 가서 가게를 운영할, “마음에 드는” (아버지 나이로 볼 때)청년이라 했다. 러드킨 중사는 새로 복귀한 제분소 직원 도일과 함께 전쟁터에서 싸웠던 인물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기억하시지? 이산하의 시집 제목, 《악의 평범성》. 악은 보통의,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날의 쇼크로 알코올 중독에 접어든 어머니는 “러드킨 중사? 학살을 자행한 장본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손님들에게 농산물을 파는 모습이 상상이 되니? 악마가 사람이 된 거야.” 혹시 엄마가 직접 리버풀의 청과물 가게를 들어봤을까? 어머니는 계속 되뇌인다. “어째서 그는 저격당하지 않는 거야?” 어머니는 남편을 잃었으니 그렇다 치는데, 트레버 선생도 러드킨이 학살의 가장 중요한 배후라고 생각한다.


  인도를 영원한 식민지로 두고 싶어하는 영국 정부에 의하여 인도로 파견 나간 대령의 딸은 영국의 또다른 식민지인 아일랜드 코크에서 도무지 폐허가 된 퀸턴 저택을 재건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연상할 수밖에 없는 그 밤의 악몽 때문에 아예 킬네이에 살 수도 없어서 반은 폐허가 된 패트릭 스트리트로 옮겨, 윌리는 머시에 스트리트 시범학교에 다니고, 엄마는 쏟아지는 편지를 열어보지도 않고, 누구의 방문도 거절하면서 어둑한 방안에 앉아 아침부터 위스키를 마시기 시작했다. “어째서 그는 저격당하지도 않는 거야?” 이젠 이런 말도 없이. 윌리의 외조부모는 여느 부모와 마찬가지로 맏딸을 한없이 사랑했지만 아일랜드 맏딸한테 들르겠다는 편지를 맏따님은 깨끗하게 거절한다. 부모가 보낸 편지를 열어보지도 않았으니 당연히 회신도 없다. 걱정이 된 부모는 우드컴 파크 인근에서 종신 교구 사제의 아내로 있는 작은 딸에게 편지를 해, 너라도 언니를 찾아가 위로를 해주라고 요구하고, 자매 우애가 좋은 동생은 기꺼이 자신의 딸 메리앤을 데리고 아일랜드를 방문한다. 윌리는 시범학교에서 스스로 걸어나와 이제 기숙학교에 들어간 상태의 여름방학.

  메리앤. 이 사랑스런 아가씨에 관해서는 책의 맨 앞에 짧게 소개를 해놓았다.

  “우드컴 마을의 종신 교구 사제 부부의 하나뿐인 아이는 퀸턴가의 사촌과 사랑에 빠져 킬네아로 와서 사는 세 번째 영국 여성”이라고. 그러면 책은 윌리 퀸턴과 메리앤 우드컴의 애잔하고, 길고, 쓸쓸하고, 오래도록 고통스러운 사랑 이야기가 될 것임을, 우리 윌리엄 트레버 팬들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단 하나를 말할 뿐이다. 당신의 짐작이 맞다고. 나는 여기서 머뭇거린다. 스포일러를 만들지 않으려면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 그러면 이젠 독후감도 끝내야 한다. 어쩔 수 없다. 하고 싶은 말을 언제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다만 한 마디만 하자.

  빌 영감, 문제는 배추장수 러드킨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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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12-13 06: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포일러 ㅋ 폴스타프님이 이렇게 역사를 정리해주시니 이 책을 이해하기 더 쉬워진거 같습니다~!! 트레버의 장편들은 영국과의 갈등을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것 같습니다.


아일랜드에도 배추가 있나요? ㅋ

Falstaff 2023-12-13 07:01   좋아요 1 | URL
러드킨은 아일랜드가 아니라 잉글랜드 리버풀 축구장 옆에 있는 배추가게 쥔이 됩니다. 장사는 겁나게 잘 됐지만 끝이 안 좋았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ㅋㅋㅋㅋ
트레버 자신이 아일랜드 태생의 잉글랜드인인 거 같습니다만 정확한 건 아닙니다. 눈치로 보아하니 그렇다는 말씀.

페넬로페 2023-12-13 10: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은 배경이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복수의 끝은 허무하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지만 그래도 윌리의 입장에서는 러드킨이 문제가 아니었나 생각했습니다. ㅠㅠ

Falstaff 2023-12-13 16:23   좋아요 1 | URL
윌리야 몇 년 동안이나 엄마한테 귀에 못이 박힐 지경으로 넋두리를 들었으니 그렇다 쳐도, 작가는 그래도 악의 근본을 밝히려 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 아쉬움이었습니다.
 
블랙 박스
아모스 오즈 지음, 곽영미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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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늦여름에 헌책방에서 사서 이제야 읽었다. 그새 민음사 세계문학시리즈에서 히브리어 직역본인 것처럼 보이는 새 번역이 나왔다. 영문학을 전공한 역자 곽영미의 우리말이 좋아서, 중역 읽으며 이런 얘기 처음 해보는데, 1도 불만 없다. 번역하는 데 너무 공을 들여서 이만한 책도 별로 없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사 놓긴 해도 아모스 오즈는 얼른 손이 가지 않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이다. 그런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래서 오즈를 안 읽은 건 아니고, 올 4월부터 10월말까지 나 다니는 도서관에서 무슨 캠페인을 해 도서관 책 위주로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캠페인이 없었다고 해도 워낙 오즈 이 양반하고 합이 맞지 않아 얼른 읽었을 것이라는 보장은 못하겠지만. 여태 여섯 권의 오즈를 읽었으니 이번이 일곱 번째. 딱 한 권 <유다>가 제대로 마음에 꽂혔을 뿐이다. <유다>에서는 숨어있는 주인공 쉐알티엘 아브라바넬을 통해 오즈는 아랍-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공존 및 연합을 주장한다. 아모스 오즈의 이런 반전의식은 이미 1978년에 이스라엘 신문에 기고했고, 덕분에 그는 세상에서 가장 호전적인 나라가 되어버린 이스라엘 국민들로부터 배신자라는 영광스러운 호칭을 얻은 바 있다. 이 책은 1986년에 발표하긴 했지만 시대적 배경이 1976년이다. 작가와 작중 주인공 알렉산드르 A. 기드온 박사는 흔히 6일전쟁이라 불리는 1967년 3차 중동전쟁, 대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의 6일 전쟁에 참전한 바 있다. 오즈는 전쟁을 경험하고 시나이반도에서의 아랍-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 없는 평화와 연합을 주장한 반면, 작중 주인공 알렉산드르는 당시 자기 편이 이집트 시민들에게 가한 참혹한 학살의 장면을 트라우마처럼 간직하고 있다. 수십명의 이집트 시민들이 숨어 있는 지하실을 열고 수류탄 세 발을 까서 던져 넣고 뚜껑을 닫는 일, 폭발음이 세 번 들리면 뚜껑을 열고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을 향해 탄창이 다 빌 때까지 기총소사를 가하면 피와, 장액과 내장과 살점이 붙은 뼈조각과 뇌수가 군복은 물론이고 사격하는 군인들의 얼굴에까지 날아 튀는 장면. 작품에선 열여덟 살 정도의 청년 보아즈 브란드슈테터가 팔레스타인과의 평화를 바라는 인물로 등장한다. 평화주의자, 이스라엘 산 히피의 자격으로.

  반감을 갖지 않고 이 책 <블랙박스>를 읽기 위해서는 작품의 배경이 1976년이었으며, 세상에서 가장 폐쇄적인 종교인 유대교의 나라 이스라엘에서 벌어진 이야기라는 걸 처음부터 끝까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성들도 병역의 의무를 갖는다. 물론 입대했다고 해서 여군이 진짜 전선에 배치되는 일은 많지 않다고 한다. 실전에 투입을 해보니까, 여성 전사가 한 명 죽으면 남자 병사들이 죽을 때보다 남자들이 더 광분을 해서 쓸데없이 무모한 일을 벌이기 때문에. 근데 그건 요즘 이야기고 70년대는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남자하고 같이 병역의무를 다 하지만 70년대 중반까지 여성은 남성의 “소유”였다. 진짜 서류로 너는 내 것, 이라고 써서 인감도장 찍지는 않았지만 관습적으로 여성과 자식들은 모두 남성, 아버지의 완전한 관리를 받아야 하는 “구약의 시대”에 머물고 있었다는 점. 지금은 여성의 병역 덕으로 이스라엘의 여성인권이 세계에서 알아준다고 하지만 그땐 하여튼 그랬다.


  볼로댜 구돈스키 선생은 우크라이나에 살 때부터 큰 부자로 성공한 인물이었다. 그가 이스라엘로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정신이 좀 혼미해졌는지 우크라이나 출신 유대인들을 위한 재단 같은 것을 만들어 거액, 자신의 재산 거의 전부를 쏟아 넣으려 하자, 변호사 만프레트 차크하임이 구돈스키의 아들 알렉산드르 A. 기드온과 뜻을 같이 해 구돈스키를 정신병원/요양원에 집어넣고 전 재산을 유증 받는다. 덩치 큰 호색한이자 백만장자인 구돈스키의 장자 알렉 기드온이 소대장으로 있었을 때 여군 소대원 가운데 일라나가 있어, 유일하게 소대장의 냉정하고, 매몰차고, 으스대고, 비아냥거리기 좋아하고, 이를 다 합해 잘난 척하는 아니꼬운 모습에 반해 노골적으로 알렉을 유혹하여 알렉의 동정을 수거했다. 얼마 있다가 알렉은 일라나를 아버지에게 소개했고, 아버지 구돈스키 씨는 거두절미하고 석달 후에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선언해버렸다. 정작 구돈스키 자신은 새 여자를 만나 유럽으로 여행중이라 아들 결혼식에 참석하지도 않았지만.

  어쨌거나 결혼하면 행복할 줄 알았지? 행복했다. 얼마간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작품 속에서 눈에 띄는 것은 성적 취향의 변화가 가장 큰 불행의 원인이었다. 어디서 들었거나 봤는지, 이들은 남자 둘에 여자 하나가 한 침상에서 섹스를 벌이는 이른바 쓰리 썸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정말로 다른 남자 한 명을 데려오지는 않았지만 침대에서 마치 다른 남자가 한 명 더 있는 것처럼, 처음엔 연기였겠지만 하여간 그렇게 하니까 엑스터시의 질과 양이 비교도 하지 못하게 극렬한지라, 더욱 더, 나중엔 진짜로 세 명이 하는 것처럼 성적 환타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 결혼하기 전 미래의 아내 말고는 여자 경험이 없는 알렉. 반면에 그 방면엔 남부럽지 않은 경험을 지닌 일라나. 알렉은 부부의 침상에서 부부간의 은밀한 환타지를 점점 실제 생활처럼 믿게 됐고, 아내의 부정을 의심하는 단계로 접어들어 하루는 가차없이 폭행을 가했으며,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는 걸 막아선 꼬맹이 아들 보아즈의 머리통마저 몇 번이나 벽에 찧는 우발적 만행을 저질러버렸고, 아마도 그런 짓을 한 자신의 실수를 영원히 지울 수 없다는 것이 더욱 모멸적이어서, 그럴 정도로 오만한 인물이라, 혹시 아내가 자신을 용서해줄 수 있을 망정 자기가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건 너무도 분명하여 곧바로 이혼소송을 진행하기에 이른다.

  소송 당시 친자 판별을 위한 혈액검사를 부부 공히 거부하여, 보아즈가 자신의 친자가 아님을, 그리하여 양육의 의무도 없으며 양육비 지불의 의무는 당연히 없을뿐더러, 배우자의 부정이 이혼의 주요 사유로 치환되어 위자료 한 푼 지불하지 않고 소송을 끝내 버렸다. 일라나와 보아즈는 언니/이모가 있는 키부츠로 들어가 6개월 살다가, 일라나 혼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서점에서 일하다 키 작은 남자 미카엘 (미셸 앙리) 솜모를 만나 재혼해 딸 마들렌 이파트를 출산했다. 전남편의 아들 보아즈는 열세 살이 될 때까지 5년 더 키부츠에서 이모가족과 살다가 아빠를 닮아 엄청난 큰 키를 한 채 예루살렘의 엄마 부부와 합친다. 작품을 시작할 시점에 보아즈의 나이 열다섯 살. 중3 정도의 소년으로 혈관 속에 뜨거운 니트로 글리세린이 흐르고 있으며 신체 사이즈와 완력이 또래는 물론이고 어른들과 견주어도 절대 밀리지 않았다. 벌써 전과기록과 보호관찰 기록을 갖고 있을 정도.

  이 아이가 또 사고를 쳤다. 가난한 미셸은 현직 경찰인 형이 있어서 보아즈의 전과기록이나 보호관찰 기록은 삭제해줄 수 있으나 피해자(부모)와 합의금을 준비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하여간 겉으로 보면 양부와 엄마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궁리, 궁리, 궁리하다가 참담하지만 결코 하고 싶지 않았던 최후, 최후 가운데서도 최후의 방법으로 보아즈의 친부, 일라나의 전 남편 미드웨스트 대학 정치학과 알렉산드르 A. 기드온 교수한테 편지를 보내 도움을 청하면서 작품은 시작한다. 알렉은 변호사에게 전화를 했고, 보아즈가 다니는 학교의 교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아 제적 처리를 훈방으로 해결을 했으며, 합의금 조로 2천 달러의 수표를 보내 일을 종결하려고 한다.

  알렉의 전화를 통한 일 처리, 그리고 수표를 보내는 것으로 모든 일은 끝내야 했다. 그러나 일라나의 두 번째 편지와 이어지는 미셸의 편지부터 독자는 이 부부들이 알렉에게 접근하는 것에 수상한 시선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일은 독자가 짐작한대로 미셸에 의한 사기극으로 진행되는 것 같고, 결국 그것이 사기인지 아닌지는 밝혀지지 않지만 적어도 사기에 준하는 정도의 바람직하지 않으리라는 점은 눈치 챌 수 있다. 그럼에도 부자 알렉은 이들 부부에게 활수하게 돈을 베풀고, 보아즈에 대하여도 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생활할 정도로 지원을 해준다. 역시 부자 아빠를 두는 것이 좋다! 부부는 점점 의기투합해, 나중엔 알렉의 변호사까지 끌어들여 무한정 돈을 뽑아내려 하지만, 기어이 일라나는 이렇게 편지를 쓰고야 만다.

  “그(이혼) 후론 한 마디도 없었어요. 7년 내내. 그런데 지금 왜 당신은 내 새로운 삶의 창가로 유령처럼 돌아왔나요? 당신의 사냥터로 가버려요. 흑백으로 된 우주선을 타고 서리 내리는 추운 별로 가요.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요. 꿈에서라도 돌아오지 마요. 내 몸의 욕정에도. 벽토와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에도. 목판화와 고깔 달린 옷에서도 떠나요. 왜 눈에 갇힌 황야를 건너지 않고 처음의 오두막 문을 두드려 빛과 온기를 청하나요?”

  한 번 끝을 냈으면 그게 진짜 끝이 되는 것이 좋다. <블랙박스> 경우엔 친아들 보아즈는 몰라도.

  재미있게 읽었다. 아모스 오즈 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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