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6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재황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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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츠 카프카가 시도한 첫 장편소설. 열심히 쓰다가 죽음이 임박하자, 엄숙한 문학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싶지 않았던 카프카는 자신이 쓴 모든 원고를 불살라 버리라고 절친이자 편집자인 막스 브로트에게 유언한다.

  질문. 카프카가 진짜로 자기가 쓴 작품이 싹 잊혀지기 바랐을까? 그랬다면 왜 하필이면 출판사 편집인 친구한테 유언을 했을까? 문학에 관심이 없는 형제, 자매, 옆집 아저씨, 배추 장수 기타 등등 5만원짜리 지폐 서너 장만 옆구리 찔러주면 20세기 초반의 가난한 시절엔 난로에다 불이라도 땠을 거 아닌가벼? 뭐 그렇다는 거지 내가 뭘 알고 우기는 건 아니다. 그랬겠지, 그랬겠지.

  미완성 장편소설 세 편 가운데 <성>과 <소송>은 읽었고, 어떻게 <아메리카> 또는 <실종자>엔 손이 가지 않아 다음에 읽지, 다음에 읽지, 차일피일하다가 문학동네 세계문학 시리즈로 나온 김에 읽었다. 이게 우연히 2024년에 처음 올리는 독후감일걸? 하여간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간략하게 요약을 해보자면, <성>과 <소송>은 같은 미완성 작품이라고 해도 중간에 툭 끊어졌다니까 그런가보다 하는 거지 하나의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싶었다. 반면에 <실종자>는 분량과 관계없이, 원고지는 제법 채웠지만, 스토리가 여전히 펼쳐지고 있는 전개의 단계에서 갑자기 막이 내려가는 바람에 거참, 점잖은 체면에 막말 할 수도 없고, 하여간에 내가 여태 읽기를 미룬 것이 이유가 있다, 이렇게 주장해도 별 탈이 없어 보였다.

  장편소설 읽다가 만 거 같은 미완성 작품 읽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후지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다. 작품 자체가 별로인 것들을 출판사가 미쳤다고 발간을 하겠느냐고. 최근에 읽은 미완성 작품이 구 체코슬로바키아 작가 야로슬라프 하셰크가 쓴 <훌륭한 병사 슈베이크>이고, 지금도 아쉬움이 남는 미완성 장편이 토마스 만의 희극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이요, 가장 아쉬운 미완성은 고 최명희의 대하소설 <혼불>이다. 이들 작품이 다 좋다. 슈베르트의 D.759 교향곡이 <미완성>임에도 여전히 절찬리에 연주하는 것도 좋아서 그런 거지 다른 이유는 없는 것과 같다.


  열일곱 살 먹은 독일 청년 카를 로스만은 35세 먹은 하녀 요하나 브루머의 꾐에 넘어가 그만 동정을 갈취당하고 만다. 진짜로 이런 일 있다. 내가 안 본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도 만화가게에서 여주인 김*선씨가 고등학생을 하나 어떻게 한다며? 아휴, 이거 얘기해야 하나? 많고 많은 처 이모부 가운데 좀 예쁘장하게 생긴 막내 처 이모부가 중학생일 때 진짜로 만화가게 아줌마한테 당해서 딱지를 뗐단다. 이런 식으로 (1920년대 나이로 보면) 중년의 요하나에게 동정을 바친 카를 로스만에게 돌아온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요하나의 임신 통보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카를의 아빠 로스만 씨는 이미 낳은 아이 야코프의 양육비 부담과 추문을 피하기 위해 부자의 연을 끊고 함부르크를 거쳐 미국으로 쫓아버려, 이민선의 3등칸을 타고 뉴욕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카프카의 전매특허가 나왔다. 아버지에 의한 추방. 정확하게 말하면 아들 추방. K는 국가로부터, 측량사는 성주한테 추방당해 결코 이들을 만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카를 역시 다시는 아버지를 볼 수 없는 것.

  그건 그럴 수 있지. 전작이 있으니 놀랄 일은 아니다. 정작 내가 놀랐던 장면은, 17세 아기 아빠 카를이 뉴욕 자유의 여신상을 보더니 여신이 횃불이 아닌 칼을 들고 있다고 보는 장면이었다. 어, 이게 뭐야? 설마 카프카가 자유의 여신상을 몰라서 횃불이 아니고 칼을 들고 우뚝 서 있다고 본 건가? 이거 무슨 메타포나 상징이나 하여간 꿍꿍이가 있는 거 아냐? 싶었다. 아, 씨. 프란츠 카프카, 이 양반이 또 작품 시작하자마자 사람 뇌 흔들리게 만들고 말았다. 도무지 연결이 되지 않는 거였다. 자유와 칼. 무력이 없으면 자유를 유지, 보존할 수 없다는 뜻일까? 잠깐 공산주의도 했던 카프카가 그리 생각했으리라고 보는 건 좀 무리일 텐데. 좋다. 나중에, 언젠가 힌트가 나오겠지. 그러나 책을 덮을 때까지 이 문제를 해결할 힌트는 보이지 않았다. 혹은 발견할 수 없었다. 여간해서 잘 읽지 않는 해설을 보니, 카를이 승선한 배가 여신상 아래를 지나가면 여신이 들고 있는 것이 횃불인지 칼인지 모를 것이고, 그게 카를의 눈에 칼의 손잡이처럼 보였다는 거다. 아이고, 거 참. 세상에 머리 좋은 사람들 많다. 그럴 듯하지 않나? 한스 홀바인이 그린 <대사들>을 보면 그림 아래쪽에 극도로 찌그러진 시계가 그려져 있다. 이게 계단참에 걸린 작품이라는데 계단을 올라오면서 그림을 볼 사람을 위해 부러 그렇게 그렸다는 거다. 그림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째 자유의 여신상 아래를 지나가는 배는 생각하지 못했나 그래. 만일 역자 이재황의 생각이 맞다면(맞는 거 같다) 천재는 아니더라도 영재 정도는 될 거 같다.


  이제 뉴욕에 왔으니까, 알렉산드르 바리코의 <노베첸토>에서 보듯이 (반드시 한 명은)누군가가 육지다, 미국이다, 신세계다, 외쳤을 것이고 사람들이 한 편으로 우그르르 모였을 것이고, 드디어 자유의 여신상이 나타났을 것이고 그 아래로 지나갔을 것이니 배 안은 시끌벅적 짐 챙기고, 잃어버린 거 없나 뒤적거리고, 순식간에 남의 물건을 슬쩍 하는 종자들도 있을 것이고, 서로 상륙하더라도 연락은 하고 지나자, 명함교환도 하고 그랬을 터, 젊었다기보다 아직 어린 카를 역시 아빠의 낡은 여행가방을 들고 갑판에 나갔다가 그만 아이고, 객실에 우산을 두고 왔네, 이런 이유로 명함을 받은 프리츠 부터바움 씨한테 가방을 맡긴 채 다시 선복에 있는 3등 객실로 내려가 길을 잃고 만다. 프리츠 부터바움 씨는 이 한 장면에 등장하고 사라진다. 이제 독자는 카를 로스만의 성격을 이해할 차례. 오지랖이 대단한 친구다. 길을 잃고 돌아다니다가 당시엔 석탄을 땐 증기선이니 석탄을 보일러에 넣은 화부火夫의 방을 두드려 그의 방에 들어간다. 이 인간이 좀 불평불만자라서 화실보다는 회계과에서 노닥거리는 시간이 많을 정도라 루마니아인 일등기관사 슈발 씨가 해고해버릴 예정이다. 사실과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화부의 말만 듣고 열받은 카를은 화부와 함께 회계주임에게 갔다가 그곳에서 선장, 회계주임, 상원의원 야코프 씨를 만나 입에 침을 튄다. 카를에게 이름을 묻는 대나무를 들고 있던 야코프 씨. 알고보니 그는 오래 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간 외삼촌 에드바르트 야코프였던 거다. 야코프, 유대인 아닌가? 하여간 뭐. 그리하여 이것으로 화부, 선장, 회계주임, 기관사는 영원히 사라진다.

  야코프 씨의 집 7층에 살게 된 카를. 1층부터 6층까지는 야코프의 사무실인 건물이다. 카를이 말만 하면 거의 다 들어주는 야코프 외삼촌. 말 한 마디에 그랜드 피아노까지 들여왔을 정도. 카를은 새벽 다섯 시 반에 승마학교를 가서 상류사회 필수코스를 익히고, 일곱 시부터는 경영전문대학의 교수한테 영어 교습을 받아 몇 달 만에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한다. 야코프는 유럽에 없는 업종인 일종의 중개운송업을 하는데, 대규모 구매, 저장, 운송, 판매를 하나로 통괄하는 사업으로 미국 각지에 업체를 두는 거대 회사의 회장이다. 30년 전엔 항만 구역의 조그만 점포 하나로 시작을 했지만. 야코프 씨에겐 키 크고 뚱뚱한 친구 두 명이 있었으니 그린 씨와 폴런더 씨. 이들과 만나 내밀한 사업 이야기를 하다가 폴런더 씨가 자기 집에 들러 하루이틀 자고 가라고 권하는 것을 야코프 씨는 반대하고 카를은 그럼에도 좋다고, 꼭 가고 싶다고 해서 하루 밤을 보내기로 하는 일이 벌어진다.

  여기서 또다시 카프카. 유럽에선 아버지에게 추방당해 미국으로 왔으니, 이제 미국에서도 아버지 비슷한 인간에게 한 번 더 추방을 당해야 할 것. 자기 의견이 무시당한 것에 완전히 기분이 잡친 야코프 씨는 그린 씨를 통해 앞으로 자기 앞에 나타나지 말라는 말을 카를에게 전한다. 완전 빈털터리로 내쫓기는 카를. 가장 싼 여인숙의 공동숙소에서 밤을 보낸 카를 앞에 엔지니어를 자칭하는 두 건달이 등장하니 하나는 아일랜드 출신 로빈슨이요, 다른 하나는 프랑스 출신 들라마르슈이다. 이들은 야코프 씨가 장만해준 카를의 옷이 취직하는데 방해가 될 뿐이라고 입을 털어 카를의 옷을 팔아 50센트를 건네준 뒤 직장을 찾아 먼 길을 걸어가면서 그나마 남아 있는 카를의 돈을 뜯기 시작한다. 감을 잡은 카를도 당하고만 있을 바보가 아니라 그들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옥시덴털 호텔의 엘리베이터 보이로 취직한다.

  호텔에서 자신을 위하여 최대의 편의를 보아주는 주방장의 도움으로 좀 편히 있나 싶었으나 사건이 생겨 해고당하고, 기어이 다시 로빈슨과 들라마르슈의 손아귀로 넘어가 들라마르슈의 하인으로 일하면서 이야기는 갑자기 뚝 끊겨버리고, 그만이다.

  그래서 아쉽다는 것이다. 원고지 분량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정리가 된 상태에서 끝나야지 이건 정말 중도무이라 독자가 당황할 수밖에 없는 거다. 한 번 더 읽어보면 독자가 알아서 정리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더 읽어볼 정성도 없어서 말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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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1-01 08: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실종자는 안읽어봤네요
카프카는 두꺼운 책으로 소송, 심판, 성 등은 읽었어요.
이참에 다시 들춰볼까? 하고 생각합니다
카프카 평전 읽으며, 다행이다. 했던 장면을 아! 폴스타프님 이야기를 읽으며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2024년 첫 리뷰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4-01-01 13:31   좋아요 1 | URL
댓글이 늦었습니다. 아이들이 와서 떡국 끓여 한 잔 씩 따라주는 술에 취해서 ㅎㅎㅎ 연초잖아요.
별 거 없는데 늘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새해 건강하세요. ^^

레삭매냐 2024-01-01 1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카프카 형님의 절친 막스 브로트가
없었다면 후대의 독서가들은 카프
카 형님과 결코 만나볼 수 없었을까
요? 고것이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책 자체가...
무언가 미완의 완성을 향해 나가는
우리네 닝겡들의 인생과 비슷하다
는 점에서, 새해의 첫 리뷰로 적절
하지 않았나 추정해 봅니다.

Falstaff 2024-01-01 20:33   좋아요 1 | URL
막스 브로트 아니었어도 출판사에서 이왕 자기들 손에 들어온 원고를 불살랐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도 승 법정이 자기 죽은 다음에 책 더 찍지 말라고 했지만 죽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됐던 적 있잖습니까. ㅎㅎㅎ 자본주의에서는 돈이 신입니다, 신.
 
사랑
산도르 마라이 지음, 임왕준 옮김 / 솔출판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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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읽는 마라이 산도르. 헝가리 사람이라 주민등록증에 ‘마라이 산도르’라고 쓰여 있다. ‘산도르 마라이’는 이의 유럽식 표기이다. 이 책이 여섯 번째 읽는 마라이의 책이다. 여태 읽었던 작품하고 결이 다르다. 읽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 독후감을 쓰려고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거 같다. 결이 다르다는 건 모험가, 작가, 시인, 소설가를 사칭한 당대의 사기꾼, 쟈코모 지롤라모 카사노바를 주인공으로 했다는 것부터 그랬다. 카사노바는 돈 지오반니와 다르게 적어도 여인을 꼬드길 때만큼은 진정으로 사랑을 했다느니 하는 헛소리들을 하건만, 천만의 말씀이다. 늙고 젊음을 따지지 않고, 부자와 빈민을 구별하지 않고, 기회가 닫기만 하면 공평하게 치마끈을 푼 날 사기꾼으로 강도, 강간, 매춘 알선 등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저지른 악당 범죄자일 뿐이다. 당대 동유럽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잘 교육받은 마라이가 이를 알고도 주인공으로 삼았다.

  작품은 자코모가 16개월 동안 베니스 주교의 감옥에 갇혀 있다가 파계한 난봉꾼 수도사 발비와 함께 탈옥에 성공해 볼자노의 세르 여관에 도착하면서 시작한다. 볼자노에 와서야 이곳 성에 프랑스 루이 왕과 추기경의 친척인 파름므 백작이 프란체스카 백작부인과 함께 기거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72세의 파름므 백작. 5년 전 로마 근방에 있는 백작의 또다른 성에서 당시 열다섯 살의 프란체스카는 백작의 아름다운 약혼녀였지만 쟈코모와 은근한 사랑의 군불을 때우고 있기도 했다. 내가 알고 있는 카사노바와는 다르게 마라이의 주장이 맞다고 가정한다면 쟈코모가 일생일대의 진정한 사랑과 자유의 갈림길에서 자유를 선택하기 위해 사랑을 버린 한 페이지가 된다. 물론 순순히 사랑을 저버린 건 아니고 18세기 중엽답게 약혼녀와 쟈코모의 사이를 의심한 67세 파름므 백작과의 결투에서 30년 이상 젊은 육체에도 불구하고 백작의 칼이 심장 바로 위를 찌르고 난 다음이었다. 어둠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새벽, 창문을 통해 윗옷을 벗어버린 두 남자의 결투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려다보던 프란체스카의 속내는 어땠을까? 어떻기는 뭐. 벌써 난봉꾼의 유혹에 관해서는 고향 베니스를 넘어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스페인, 영국, 모스크바까지 떠르르하게 소문이 난 30대 초반의 남자한테 푹 빠져 있었겠지.

  쟈코모가 염병할 놈인 것이, 아무리 버르장머리 없는 유럽 백인 남자들이라 하더라도 자기보다 서른 살도 더 먹은 늙은이와의 결투는 정중하게 사양을 해야 하는 법이다. 명색이 이름 앞에 신사紳士라고 타이틀을 달고 싶으면. 그런데도 쟈코모는 웃통을 훌떡 까고 노인한테 칼질을 했다가 얄짤없이 칼에 찔려버렸으니 그것 참, 잘됐다고 할 수도 없고. 그리고 함부로 귀족하고 칼부림하는 게 아니다. 귀족이 왜 귀족의 자리에 올랐는지 알아야 한다. 그들은 원래부터 싸움꾼 집안이다. 끊임없는 전쟁 속에서 귀족의 아들은 무조건 군대에 가야 했으며, 살아남기 위하여 어릴 때부터 악착같이 체력과 승마, 검술을 갈고 닦았다. 늙었다고 해도 언제 전장에 나가야 할 지 모르는 귀족들이 겉으로 보기에 만날 파티에 무도회와 연애질로 도끼 자루가 썩어 나가는 지도 모를 것 같지만 보통의 인간과 칼로 붙었다 하면 그거 하나 해치우는 건 일도 아닐지 모른다.


  하여간 유일하게 단도 한 자루만 가지고 볼자노의 세르 여관에 짐을 푼 쟈코모 카사노바. 근데 그곳 성에 거주하는 파름므 백작과 백작부인. 5년 전 연애사건과 결투. 소설에 총이 하나 등장하면 반드시 총구에서 총알 한 발 정도는 발사되어야 한다는 게 소설작법 7장 5절이다. 그러면 희대의 사기꾼이자 협잡, 강도, 살인범 카사노바가 단도 한 자루를 가지고 등장했으면 그걸 누군가의 가슴팍이나 등짝에 꽂아 넣어야 이 작품의 끝장을 보겠구나, 이렇게 기대를 해야 하는 거 아냐? 아무튼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기대도 하고, 그거야 뭐 뻔한 일이지, 장담했었다. 어떻게 될까? 내가 안 알려드리지. 분명한 건 이 삼각관계, 트라이앵글이 한 번 더 울리게 된다는 것. 원래 쟈코모의 계획은 세르 여관에서 베니스에 살고 있는 선량한 양아버지 브라가댕에게 편지를 보내 돈을 보내 달라고 해서, 편지가 가는데 이틀, 오는데 이틀, 여유일 하루, 이렇게 닷새가 되는 날 볼자노를 떠나 뮌헨으로 가려던 거였다. 양아버지 이름을 팔아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망슈한테 돈을 빌어 호화로운 옷과 장식품을 사고, 도시의 유지들하고 노름을 하다 거의 돈이 떨어질 때쯤이었다. 시끌벅적한 마차가 여관 앞에 도착하고, 이젠 통풍과 노환으로 몇 주가 지나면 숟가락 놓을 것 같은 파름므 백작이 쟈코모를 보기 위해 친히 2층 계단을 올라 그의 방문을 열고, 천하의 카사노바에게 일생일대의 거래를 제안한다.

  여기서 잠깐. 파름므 백작이 예순일곱 살 때 열다섯 살의 프란체스카와 약혼을 했다고 놀라거나 비난하지 말자. 18세기 일이다. 그때 카사노바도 서른 서너 살이니까 이십 년 정도 차이지만 서로 사랑했다. 같은 시기에 우리나라 영조 임금도 만 65세의 나이로 만 14세의 계비를 맞아들이니 이이가 바로 정순왕후다. (18세기는 모르겠고) 17세기까지도 유럽에서 여성의 적정 혼인 나이가 12세였다. 의심스러우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판 <데카메론> 읽어 보시라. 나도 아마 그거 읽고 알았을 거다.

  하여간, 오늘 낼 하는 백작이 원하는 건, 사랑하는 프란체스카의 품에서 프란체스카가 돌보는 침상에 누워 숨을 넘기고 싶다는 거다. 자신은 이제 스무 살이 된 아내를 사랑하건만, 아내는 천하의 바람둥이 잡놈을 사랑하는 형국. 이젠 그 잡놈을 때려 죽이거나 찔러 죽일 힘도 없는 백작은 그에게 생각도 하지 못할 만큼의 거액과, 탈옥범인 것과는 상관없이 유럽 어디든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신원보증 및 여행허가서, 독일, 프랑스, 스페인, 영국, 러시아까지 각 도시마다 당당한 세력자들에게 한 자리를 부탁하는 청원서를 주는 대가로, 오늘 밤에 벌어질 가면무도회에 참석해 프란체스카를 유혹, 하룻밤을 보내고 대신 아내의 마음 속에 있는 쟈코모에 대한 연모의 마음을 완벽하게 청소해달라는 거다. 백작은 이 장면에서 길고 긴, 무려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장광설을 쏟아낸다. 가장 비슷한 문장을 들라면 누구를 거론할 수 있을까? 맞다, 알베르 코엔의 <주군의 여인>에 나오는 쏠랄의 장광설. 어찌 읽으면 쓸개 빠진 사내새끼가 어떻게 이런 부탁을 하고 있을까, 한심할 수도 있는 것까지 비슷하다. 그러나 어쩔꼬. 이미 늙어 저승이 팔짱을 끼려는 순간인데 아직까지도 총질이나 칼질 또는 청부살인 같은 죄업을 쌓기는 좀 그렇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백작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가장 원만한 방법을 선택했을 터. 이렇게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예스런 문장으로 줄줄이 이어가는 장광설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만 하면 된다.

  이 책에선 세 번 정도 장광설이 등장한다. 백작의 것은 이 가운데 두 번째. 첫번째는 세르 여관의 복도에서 벌어진다. 두번째, 세번째 장광설도 모두 세르 여관에서의 일이다. 쟈코모가 여관에 든 이후 연극무대처럼 장소가 한 번도 변하지 않는다. 쟈코모가 있는 가운데 등장인물만 수시로 바뀔 뿐. 쟈코모 카사노바가 볼자노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볼자노의 모든 사람들이 난리가 난다. 역시 사기꾼, 범죄자, 매춘 알선자의 이름이 아닌 바람둥이, 유혹자로서의 카사노바. 이미 전 유럽에 바람둥이의 명성을 휘날린 쟈코모가 작은 도시에 떴으니, 여자들은 카사노바가 도대체 어떤 인물이고, 어떻게 생겼고, 얼마나 잘 생겼는지 도무지 오금이 시큰거려 가만히 있지 못하겠는 거다. 여관 주인은 열여섯 살 먹은 하녀 테레자를 쟈코모 전담 하녀로 지정했고, 아직 처녀이기는 하지만 여관업종에 종사한지 꽤 되는지라 인간의 연애사에 벌어지는 현상들에 관해서 이미 통달한 바, 보통의 여자들만큼 그에 관해 관심이 없다. 물론 쟈코모는 테레자를 유혹했고, 실패하는 것 같았으나 놀라운 혀와 목소리로 결국은 성공했지만 자빠뜨리지는 않았는데, 테레자는 이웃 여자들을 위하여 열쇠구멍을 통해 쟈코모 카사노바의 생김생김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리하여 빼곡하게 모여 쟈코모를 완상하던 중 갑자기 문을 벌컥 열어젖힌 쟈코모. 문 저편에 앉아 있다가 뒤로 발랑 나자빠진 여자들의 무리를 보더니 드디어 첫번째 장광설을 쏟아 놓는다. 절대 미남이 아닌, 짐승 중의 짐승, 사내 가운데 사내이자 마초 가운데 마초인 카사노바가.

  두번째 장광설은 이야기했고, 세번째 장광설은 당연히 트라이앵글의 마지막 한 축인 프란체스카. 그녀가 세르 여관에 도착해 마지막 장광설을 쏟아낸다. 즉, 결론이다. 그걸 내가 이야기하는 걸 보신 적 있으셔? 이번에도 직접 확인을 하셔야 할 듯. 저 위에서 말한 소설작법 7장 5절을 기억하시고.




이것으로 2023년 삽질은 끝났습니다. 누추한 서재의 보잘것없는 독후감을 읽어주신 서재 친구, 나그네, 검색꾼들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내년에 좋은 일 많이 생기고, 연애도 성공하시고, 특히 건강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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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12-29 05: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월 삽질 일정:
첫째 주
1일. 프란츠 카프카, <실종자>
2일. 테레사 데 라 파라, <마마 블랑카의 회고록>
3일. 나탈리 사로트, <아무것도 아닌 일로>
4일. 쥴퓌 리바넬리, <어부와 아들>
5일. 하인리히 뵐, 《하얀 개》
둘째 주
8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프닌> ***
9일. 발터 하젠클라버, <발터 하젠클라버의 아들>
10일.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
11일. 전예진, 《어느 날 거위가》
12일. 루이스 어드리크, <정육점 주인들의 노래클럽> ***
세째 주
15일. 고영민, 《공손한 손》
16일. 랜퍼드 윌슨, 《탤리 가의 빈집(외)》
17일. 장웨이, 《어신魚神을 찾아서》
18일. 오노레 드 발자크, <사기꾼> ***
19일. 알랭 로브그리예, <진>
네째 주
22일. 허규, 《다시라기/광대가》
23일.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납치일기>
24일. 비톨트 곰브로비치, 《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 / 결혼식 / 오페레타》
25일. 찬쉐, <황니가黃泥街>
26일. 존 스타인벡, <통조림공장 골목> ***
월말
29일. 아다니아 쉬블리, <사소한 일>
30일. 오에 겐자부로,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
31일. 강은교, 《벽 속의 편지》

( *** : 주목할 만한 작품)

stella.K 2023-12-29 09:59   좋아요 1 | URL
아니 팔님은 책을 어떻게 읽으시는 건가요? 솔직히 궁금했습니다. 그래도 실례가 될까봐 차마 여쭙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아예 한 달치를 끊어버리시니 여쭙지 않을 수가 없네요. 책을 어떻게 읽으시는지 그 비법 좀 전수해 주시죠. 저는 책 한 권을 너무 오래 읽어 고민입니다.ㅠ
글구 왜 올해의 책 안하십니까? 기대했는데 실망입니다.
암튼 올 한 해 좋은 책들과 함께하셔서 뿌듯하지 않으셨나 생각합니다. 내년에도 좋은 책들과 함께 희망찬 새해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coolcat329 2023-12-29 12:17   좋아요 1 | URL
정말 넘사벽이세요. 사기꾼 도서관에서 빌려왔는데 안 읽고 그대로 반납하게 생겼습니다.
폴스타프님 덕분에 2023년에도 많이 배웠습니다. 새해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Falstaff 2023-12-29 18:00   좋아요 1 | URL
stella.K 님 / 백수잖아요. ㅎㅎㅎ 할 일이라고는 마누라 좋아하는 김치콩나물국 끓여 대령하고 도서관에 출근해서 오후 세시에 퇴근하는 거 하납니다. 술을 줄이니까 밤에 독후감 쓸 시간이 나더군요. 이후에 책을 더 많이 읽게 되었습니다. 올해의 책은 이제 그만하려 합니다. 작년부터 안 했어요. 내년에도 늘 건강하셔요!

coolcat님 / 사기꾼 재미난데요. 역자 해설을 읽고 눈이 휘둥그레 해졌답니다. 아하, 그렇구나! 확 깨더라고요. 뭔지는 안 알려드림. ㅋㅋㅋ

아침에혹은저녁에☔ 2023-12-29 06: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 해 동안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내년에도 기대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건강하시고요!
올해의 책은 없나요?

Falstaff 2023-12-29 06:48   좋아요 0 | URL
아침저녁 님도 늘 건강하세요.
올해의 책... 안 하기로 했습니다. 작년에도 안 했답니다. ㅎㅎ

반유행열반인 2023-12-29 08: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고 나면 알고 보니 팔백작님 세일즈에 넘어갔더라는… 책이 한 둘이 아니네요 ㅎㅎ내년에도 건강하게 재미난책 많이 읽으시길 빕니다!!!

Falstaff 2023-12-29 16:14   좋아요 1 | URL
아휴, 제 말 믿지 마세요.믿고 싶으시면 절반만.... ㅎㅎㅎ
내년엔 아프지만 마세요!!!

자목련 2023-12-29 1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많은 목록 가운데 제가 읽은 책은 겨우 2권, 제목만 아는 책도 몇 권 없어요.ㅎ

Falstaff 2023-12-29 16:15   좋아요 0 | URL
대신 우리 문학을 좋아하시잖아요! ㅎㅎㅎ
 
배반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0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황가한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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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섬 북쪽에 오밀조밀하게 모인 군도 잔지바르 술탄령에서 1948년에 출생했다. 잔지바르는 1963년에 술탄이 통치하는 군주국으로 독립하였으나 불과 한 달 만에 혁명이 일어나 이슬람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박해했다. 아버지가 예멘에서 이민 온 비즈니스 맨, 아마 인도와 아프리카 무역상의 대리인 아니었나 싶은데, 구르나 집안도 이슬람 문화권이라서 1968년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영국에 도착한 구르나는 기독교 문명과 백인 사회의 백안시와 은근한 차별을 견디며 1982년 서른네 살 이 되는 해에 켄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83년부터는 켄트 대학의 영문학, 탈식민주의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재직하다 2017년에 퇴임하고, 2021년에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아직까지 영국 켄터베리에서 살고 있다. <낙원>이 부커상 최종심까지 올라갔고, <바닷가에서>가 역시 부커상 예심에 올랐지만 결국 부커 재단은 구르나를 외면했다. 글쎄 내 말이 맞다니까. 부커 상이 노벨 상보다 윗길이라니까. 부커 상을 타는 게 노밸 상보다 더 어렵다고.

  2021년에 스웨덴 한림원이 압둘라자크 구르나를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하자 문학동네는 잽싸게 영국의 블룸스베리 출판사와 계약을 해서 우리나라 유명 영어 역자 네 명에게 번역을 맡겨 2022년에 <낙원>, <바닷가에서>, <그후의 삶> 그리고 <배반>을 출간한다. 독자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그리 많이 팔린 것 같지는 않다. 이후에 이 사람 책이 더 나오지 않는 걸 보면. 나도 2022년에 책 좀 읽는 독자들이 상찬을 하시는 걸 보고 한 권 사둔 것이 <배반>이었다. 이제서야 읽었다. 올해 도서관에 무슨 캠페인이 있어서 줄창 도서관 책만 읽다가 캠페인이 끝나서 말입지. 올해에도 구르나를 읽고 좋다는 분이 많지만 아무래도 작년 같지는 않다. 한 숨 돌린 다음에 새롭게 당시의 문제작, 문제작가를 읽는 일도 괜찮다.


  1899년. 영국인 청년 마틴 피어스는 이집트에 체류하면서 아비시니아, 지금의 에티오피아에 관심이 많았다.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의 미남 피어스는 역사학자에 가까운 아마추어였으며 약간은 언어학자 스타일이기도 해서 다른 영국인과 달리 아랍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그는 아덴을 출발해 소말리아로 가고자 해서, 마침 우간다로 떠나는 영국인들과 합세해 출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젠트리 세 명, 연국인 하인, 백인 사냥꾼과 다수의 흑인 길잡이와 짐꾼을 동반한 캐러밴은 피어스의 일정과 관계없이 눈에 보이는 짐승이란 짐승은 몽땅 사냥하고,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먹으면서 행진하는 바람에 이들의 주변엔 피냄새와 고기 타는 냄새, 가죽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뭐든 죽이는 일을 혐오하는 피어스는 케냐 남부까지 와서 그들과 헤어지기로 결심했다. 백인이 아니더라도 타지 사람이 아프리카 황야를 혼자 걸어가는 건 아예 목숨을 내놓고 하는 일이라 젠트리는 소말리족 안내인 세 명을 그에게 붙여주고 함께 여행을 하게 했다. 안내인들과는 따로 약속을 해 모종의 장소에서 만나기로 하고. 그렇지 않아도 아프리카에서 배반과 잔혹의 대명사인 소말리족 안내인들이 피어스를 따라가면 자신들이 받을 보수가 적어질 거라는 걸 알고 자기들끼리 불평을 할 때 조심해야 했는데 그는 그걸 무시한 것이 잘못이었다. 며칠 동안 황야를 걷다가 안내인들은 갑자기 피어스를 덮쳐 권총을 빼앗아 총구를 머리통에 대고 그의 모든 소지품과 주머니에 든 돈을 몽땅 가져가버렸다. 자기들끼리 피어스를 죽여버리자, 내버려 두면 황야를 걷다가 저절로 죽을 거니 우리가 죽일 필요 없다, 이렇게 말다툼을 해가면서.

  며칠 혹은 몇 주가 지나 피어스는 정말로 갈증과 기갈에 의하여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상태가 되어 케냐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몸바이에서 제법 떨어진 소도시의 이슬람 마을 골목에 쓰러져 있었다. 이 소도시의 이슬람 신자들이 사는 동네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사람은 하사날리였다. 주로 곡물이나 버터 같은 식료품을 취급하는 상점 주인으로 키가 작고 포동포동한 체구의 이 남자는 몸에서 도무지 동글동글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천성적으로 걱정이 많은 소심한 스타일인데 2년 전에 사랑하는 아내가 이 소도시에 온 다음부터 가장 일찍 일어나 곧바로 어두운 골목길을 일부러 돌고 돌아 모스크의 첨탑(미너렛) 꼭대기에 올라가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얼른 일어나 기도하라고 외치는 ‘무에진’이었다. 비록 아이도 없고 앞으로도 낳지 못하겠지만 남은 평생 서로 아낌없이 사랑하면서 살 아내 말라카와의 결혼생활이 잘 되게 해주고, 생과부가 된 누이 레하나의 슬픔이 끝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알라는 유일한 하느님이시며 무함마드는 가장 위대한 예언자시니라!” 외치기만 해도 괜찮다고 이맘이 말을 했건만 굳이 모스크 계단의 먼지와 모래도 깔끔하게 쓸었다.

  때는 1899년. 아직 전 세계적으로 유령, 사탄, 악마, 도깨비, 귀신들이 창궐했던 때라 하사날리가 아직 어둠에 휩싸인 골목을 잔뜩 겁에 질려 걸어가고 있다가 저 앞에서 뭔가 검은 것이 잔뜩 웅크리고 있어서 음산한 음기를 발산하고 있는 것처럼 소름이 좍 끼치면서 등골이 삐죽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이크, 악마가 틀림없구나. 사색이 된 하시날리는 무서움에 오금이 얼어붙는 것을 무릅쓰고 그쪽이 모스크로 가는 길이라서 조심조심 접근해보니 글쎄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 거였다. 사람이 이런 참혹한 상태로 떨어졌으니 일단 살리고 보자는 생각에 아직 열지 않은 카페 문 앞에서 주인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점원 두 명을 데려와 반죽음이 된 유랑인을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치료사 마마케 자이투니와 도시에 한 명 밖에 없는 돌팔이 접골사 우두둑 씨를 불러오라고 해서 보여주었다. 마마케 자이투니가 유랑인의 옷을 가위로 잘라내니 피부가 하얀 유럽인이었고, 할례를 받지 않았으며, 아픈 곳은 없지만 지치고 심한 탈수현상이 있는 것으로 진단해 따뜻한 꿀물을 먹이라고 처방했다. 어깨에 심한 멍이 들어 골절 또는 탈구가 아닐까 싶었던 것도 우두둑 씨가 몇 번 만져보니 그냥 어디에 부딪힌 거란다. 그리하여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황야를 횡단해 거의 죽은 상태로 소도시에 도착한 마틴 피어스에게 꿀물을 먹여 다시 소생시킨 사람이 하사날리의 불쌍한 누나 레하나였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는 레하나에게 당연히 부자들한테 청혼이 많이 들어왔었다. 당시가 19세기. 이슬람에서는 처를 네 명까지 둘 수 있다. 이제 부자가 된 이슬람 놈팽이들이 처가 한 명 또는 두 명 있어도 젊고 아름다운 처녀를 얻을 욕심에 레하나에게 청혼을 한 것이고 그땐 또 그게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레하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 만일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 있었다면 어떻게 될 지 몰랐겠지만 이제 법적으로 헤라나의 보호자는 소심한 남동생인 하시날리여서 두 번이나 청혼을 물릴 수 있었다. 하시날리는 누나의 거절에 마음이 많이 상해 앞으로 누나에게 청혼할 남자가 나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경고했고, 정말로 남자들은 레하나를 경원하기 시작했다. 기껏 한 명 나타난 구혼자는 환갑이 넘은 늙은이의 네 번째 자리였다. 당연히 거절했지만. 슬슬 포기 모드에 들어간 레하나에게 하시날리는 인도-아프리카 무역상의 아프리카 대리인으로 인도 구자라트 출신의 독실한 이슬람 신자이며 인도에서 아버지 자카리야 씨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주장하는 아자드를 집에 초대하여 점심을 같이 먹었다. 이때 레하나와 안면을 트고, 연모하는 마음이 생기고, 적절한 타이밍에 청혼을 받아, 이를 수락, 결혼에 이른다. 그렇게 조금 살다가 이제 큰 액수의 교역이 발생해 직접 인도에 가서 수금을 해야 하는 사정이 생긴 아자드. 당연히 여자는 남자 하는 일에 왈가왈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시라 했건만, 아자드는 그 길로 집구석을 내빼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책에서는 “군수郡守”라고 번역을 한 영국인 시장 프레더릭 터너 씨는 영국인이 아프리카인에게 구조되어 아프리카인의 집에 있다는 말을 듣고 아주 위압적인 태도로 그를 사택으로 옮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소도시에 영국인이라고는 이 두 명 밖에 없어서. 시를 좋아하고 랭보부터 예이츠 등등을 암송하는 걸 즐기는 터너 씨는 나중에 영국의 대학에서 영문학 강사를 할 정도의 인텔리이지만 식민지에서는 기꺼이 현지 유색인을 얼마든지 무시하고, 모멸할 수 있었다. 그는 하시날리 집에서 피어스의 물건을 훔친 것으로 판단해 다음 날 그의 집을 찾아가 큰소리 뻥뻥 치면서 내놓으라고 위협서린 말을 쏟아 내기도 했다. 손바닥에 말채찍을 탁탁 두드려가면서. 이 말을 들은 피어스는 훗날 날을 잡아 하시날리 집에 직접 찾아가 자기를 구해준 것에 고마움을 표시했다. 유창한 아랍어로. 외국인이 예상외로 자기 말을 쓰면 기분이 좋아지는 건 인지상정. 하시날리는 그를 점심식사에 초대했으며, 이 초대는 갈수록 빈도가 잦아졌는데, 이 와중에 생과부 레하나와 눈이 맞아 급기야 피어스-레하나 커플은 대도시 몸바사로 사랑의 도피를 해버린다.


  이후 무대는 1950년대부터 63년의 잔지바르 섬. 이 섬의 사랑 이야기가 어떻게 피어스-레하나와 얽히게 되는지 차마 말할 수 없다. 작품을 읽어가면서 이를 풀어내는 것이 독자의 큰 즐거움이 될 것임을 알면서 그걸 가르쳐드릴 수 없다 책은 모두 3부로 되어 있고 위에 쓴 건 1부 요약이다.

  2부와 3부는 1부와 비교해서 재미있다. 1부가 불만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내가 1부를 좀 지겨워하면서 읽었다. 없어도 되는 에피소드가 마치 중요한 일인 것처럼 연속적으로 나와서 그랬을까? 작품은 사랑 이야기다. 간혹 여성주의 적이기도, 탈식민주의 적이기도 하다. 스토리는 여기서 한 발만 더 나가도 스포일러가 분명할 거 같아 말을 아끼게 된다. 이해해주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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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코어 민음사 모던 클래식 59
요나스 하센 케미리 지음, 홍재웅 옮김 / 민음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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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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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요나스 하센 케미리는 1978년 12월 27일에 스톡홀름에서 튀니지 출신 아버지와 스웨덴 어머니에서 태어났다. 2003년에 영어제목 <One Eye Red>로 데뷔한 이래 올해까지 여덟 편의 장편과 일곱 편의 희곡을 발표했다. 이외에도 다수의 에세이와 단편소설도 목록에 있다. 독후감 쓰는 입장에서는 매우 바람직하게, 젊은 세대 답게 바이오그라피 찾기 힘들다.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되어 있는 이이의 작품은 모두 민음사 모던 클래식 시리즈 59번 이 작품하고, 72번 <나는 형제들에게 전화를 거네> 두 권이 있다. 모던 클래식 시리즈에서 드물게 두 권 다 팔고 있다. 아직 품절이나 절판이 아닌 것을 보니 그렇게 인기가 있었던 건 아닌 모양이다. 광고를 덜 했거나.


  프랑스 통치하의 알제리에 모우사라는 이름의 친불파親佛派가 있었는데, 이 양반이 천하의 카사노바였다. 20세기 중반에 여러나라에서 국제적인 생활을 하며 염문도 국제적으로 뿌렸던 건 물론이거니와 호화롭고 비싼 잠옷을 입고 잠을 자는 극히 드문 알제리인이었다고 주장한다. 당시에도 물부족 국가였던 알제리에서 약품을 써서 물을 정화하는 직업으로 현금을 갈퀴로 긁을 수준이었으며, 넘치는 자금으로 사탕공장과 주크박스 가게에 투자도 했다. 모우사 씨는 모나코에서 열린 교향악 콘서트에서 만난 여성을 만나 아들 압바스를 생산하였으나 미국 마이애미비치의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모델 출신 정실 부인과 살았다. 즉 압바스가 모우사 선생의 사생아이자 혼외자라는 것. 이외에도 알제리인 모우사 씨가 워낙 국제적인 사람으로 압바스가 주머니에 아버지의 사진을 넣고 다니는 걸 보면, 가운데 모우사 선생이 있고 왼쪽으론 폴 뉴먼이, 오른쪽엔 엘비스 프레슬리가 서 있는 거였다. 꼬마 압바스는 그렇게 구라를 치고 다녔으며, 함께 튀니지 젠두바 시의 고아원에 입소한 원생들은 압바스의 입에서 나오는 건 숨소리 빼고 전부 거짓말이란 걸 뻔히 알면서도 얼마나 맛있고 진지하고 실감나게 이야기를 하는지 한 번이라도 더 들어볼 생각으로 모른 척, 그런 척, 믿는 척을 해주었다는 거 아닌가.

  나중에 압바스가 자신의 평생 절친한 친구가 되는 고아원생 카디르에게 실토한 바에 의하면 사실은 아버지 옆에서 사진을 찍은 사람이 폴 뉴먼과 엘비스 프레슬리가 아니라 알제리의 프랑스 총독을 지낸 모리스 샬과 폴 들루브리에였단다. 아버지의 실체는 ‘아르키’라 불리는 적국의 협력자인데 튀니지 접경지역의 산마을에 갔다가 하이파 아가씨를 만나 압바스를 임신하게 하고 결혼도 약속했지만 끝내 사기극으로 끝나고 하이파 아가씨마저 가족들에게 버림을 받았다. 그래도 산 사람을 어찌 죽이랴. 어떻게 해서라도 압바스를 낳고 키우던 하이파는 여전히 모우사 씨처럼 프랑스를 찬양했다. 하지만 1962년에 에비앙 협정 이후 알제리의 국내 권력투쟁이 일어나 국민 1만5천 명을 죽이고 민족해방전선이 정권을 장악한다. 워낙 많은 인재를 도륙내는 바람에 실제로 일을 시킬 사람이 없어 친불파 대부분을 그대로 요직에 꽂아 놓았지만 소위 시범 케이스 몇 명은 처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모우사씨가 걸려들어 기어이 해외 망명을 할 수밖에 없었고, 어머니 하이파는 여전히 친 프랑스 발언을 서슴지 않는지라 동네 사람들은 밤마다 하이파 네 집 앞에서 성토대회를 하다가 급기야 불을 싸질러 집도 홀랑 타버리고, 엄마도 목숨을 잃어버렸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아무도 혼자 남은 압바스를 돌보지 않았고 유일하게 가난한 이웃 농부 라시드 씨가 압바스를 데리고 젠두바 시로 가서 고아원에 집어넣었다는 것.

  근데 이건 믿어도 되는 거야? 일단 믿고 계속 읽어보자. 프랑스 폭격기의 폭격을 맞아 동네가 쑥대밭이 되고 엄마도 죽어 민족해방 유공자 자녀 자격이라고 고아원 입소 서류에 쓰어 있지만서도.


  1969년에 군복무를 마친 압바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잘 해서 고아원 원장 셰리파 어머니는 튀니스에서 법률을 공부할 수 있게 지원을 해주었으나 불과 1년 후에 정치적 이유 때문에 주머니가 탈탈 털려 다시 젠두바로 돌아왔다. 이때 그리스의 사진작가 파파나스타소포울로우 크리스토발란티, 라는 길고 긴 이름의 사진 예술가가 젠두바에 등장해 압바스를 모델로 기용한다. 하루는 이름 복잡한 사진 예술가가 압바스의 포즈를 고쳐주느라 손을 바지 지퍼에 대고 조금 끄르려는 동작을 취했고, 압바스는 불결한 행위를 하려는 것으로 오해해 가타부타 않고 두드려 패고 도망쳤는데, 이때 함께 스튜디오에 갔었던 절친 카디르의 손에는 위대한 사진작가 필립 할스만의 사진첩이 들려 있었던 거였다. 압바스는 할스만의 사진집에 집중하더니, 드디어 자신의 삶의 과제를 발견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튀니지 출신의 사진작가가 되는 것. 이를 위하여 압바스와 카디르는 1972년에 튀니지의 타바르카로 이주한다. 카디르도? 그럼. 그의 야망은 자기 손으로 호텔을 하나 지어 경영하는 거였으니까.

  아직 유럽 관광객이 쏟아져 들어오기 전의 해변도시 타바르카에서 압바스는 사진관 보조 일자리로 들어가 중원의 숨은 사진 고수 아크라프 선생에게 인화기술의 기초부터 차근차근 익히기 시작하고 카디르는 호텔에서 접시를 닦으며 빈 시간에 포커 게임을 해 돈을 모으기 시작한다. 당시의 아랍은 유럽인들에게 도발이나 바이러스, 투쟁, 테러를 연상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선하고 피해 입은 민족으로 인식되어 이들은 가끔 밤이면 유럽 관광객들과 어울려 해변파티나 대마초, 디스코 난장판 등 젊은 시절을 만끽할 수 있었다. 압바스도 잘 생겼으나 카디르가 미남이었거든. 가을이 되자 압바스는 드디어 첫 카메라로 금속재질의 소형 코닥 인스터매틱을 구입해 타바르카에 관한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고, 자신을 사진 예술가로 소개하기 시작한다. 머리통엔 중고시장에서 산 검은 베레모를 쓰고 다니면서.

  근데 압바스가 하필이면 타바르카의 댜큐멘터리 사진에 국한하느냐고? 압바스가 이래봬도 어릴 적부터 똑똑해서 대학물도 먹어봤다. 해외를 뜨지 않는 이유는 딱 한 가지. 언어였다. 해당 국가의 언어에 유창하지 않으면 성공하기가 결코 수월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압바스는 식민모국이었던 프랑스 말은 원래 잘 하고, 타바르카에서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러시아어를 독학해 차근차근 대단한 수준에 오른다. 언어야말로 다른 사람들의 영혼이 살고 있는, 또는 휴식하고 있는 곳으로 들어가기 위해 잠긴 문을 여는 마스터키라는 걸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서.

  이렇게 살기를 4년. 드디어 운명 같은 1976년 늦여름이 오고, 뮌헨 올림픽의 검은 9월단을 필두로 테러 단체들은 세상을 공포로 몰아넣었건만 압바스는 타바르카 해변에서 스웨덴 출신의 스튜어디스를 만나 생전 처음으로 진정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페르닐라 베리만. 베리만. 산에서 온 사람이란 뜻. 자기 이름 압바스 케미리 할 때의 케미리도 크루미리에 있는 산에서 온 사람이란 뜻. 암만 생각해도 천생연분이다. 하지만 절친 카디르가 보기엔 매력 없는 화장에다가 있는 듯 없는 듯한 가슴, 눈에 거슬리는 들창코, 연약하고 가늘며 기다랗기만 한 체구와 무려 180츠를 넘어 압바스보다도 많이 큰 키까지, 그것 참 이해가 가지 않는 상대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압바스는 진정으로 사랑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더니 이제부터 비행기 여행, 이주, 사랑, 결혼, 갈등, 어쩌지 못하는 세 명의 혼혈아들, 끝없는 오해,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손쓸 수 없는 비극적인 침묵 같은 진퇴양난이 시작하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죽으나 사나 나의 페르닐라, 꿈에도 소원은 페르닐라, 염불을 하고 다니는 걸 보니. 이때부터 압바스의 생활은 사진현상실과 페르닐라와의 서신연락 말고는 없었으며, 지역신문에 자기 사진을 제공하기 시작해 이름을 알려 고관대작 집안의 결혼식, 고급 미용실의 미용 전후 사진을 찍는 사진사 같은 것으로 쉼없이 고용되면서 경력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스웨덴에서 초청장이 오는 즉시 압바스는 절친 카디르가 포커 게임을 해서 따고 열심히 접시를 닦아 번 돈을 몽땅 빌려 스웨덴으로 날아가더니, 이제야 작가 요나스 하센 케미리가 하고 싶었던 스웨덴 내의 이민자들의 소외나 차별 같은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문제는 스웨덴에서의 이야기를 진행하자마자 작품이 급격하게 지루해진다는 거. 진짜 여기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이후엔 한 얘기 또 하고, 했던 얘기 한 번 더 한다. 당시엔 흥미 만점이었을 지 모르지만 이젠 하도 많이 들어 속도감있게 진행하지 않는 이런 류의 이야기는 저자는 물론이고 역자한테도 미안한 말씀이지만 읽어 내기가 쉽지 않았다. 스칸디나비아 반도 내에서의 네오 나치즘에 관심있는 분들은 읽어 보시면 좋겠다. 북아프리카의 독립에 관심있는 분들은 이 작품 말고도 뒤져보면 쌔고 쌨으니 한 번 더 잘 찾아보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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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 바라보며
줄리안 반즈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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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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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이면 소설, 음악이면 음악, 미술이면 미술, 심지어 음식이면 음식까지 사통팔달 도무지 막히는 데 없이 무제한의 오지랖적 박학다식을 과시하는 키 큰 지식인 줄리언 반스가, 이번엔 몇 달만 있으면 백 세가 되는 잉글랜드 유대인 진 서전트 Jean Serjeant 할머니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식료품 가게 주인의 딸로 1922년에 태어난 진은 순진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 하는 이야기는 주저없이 내용 그대로를 흡수하고, 세상에 많은 질문거리를 가지고 있지만 남들은 어리석은 질문으로 여긴다는 걸 조금씩 알게 되면서 성장하는 소녀였다. 아무리 백 년 전이라도 변변한 학교교육도 받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전통적인 유대교육을 받은 것도 아닌, 당시의 안정된 보통 집의 보통 소녀로 자랐다.

  진의 인생에는 대강 네 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첫 번째가 레슬리 아저씨. 삼촌인지 당숙인지 정도의 친척으로 콧수염을 길렀던 사랑스런 악당이라고 기억한다. 그를 “오징어 먹물 같은 품행”이라고 지칭하는데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 작품에선 진의 앞을 못 보게 하고 그 틈을 타 자신은 내 빼는 품행이라는 뜻? 아직도 모르겠다. 진이 일곱 살 때 크리스마스 선물로 레슬리 아저씨는 히아신스 구근을 신문지에 싸서 선물로 주며 빛이 들어가면 싹이 나지 않을 터이니 절대 들여다보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서 아주 조금 포장을 열고 한쪽 눈으로 구근을 보여주었는데 정말 작게 싹이 나고 있었다. 일곱 살 소녀가 다음 늦봄까지 댓 달 동안 눈에 번히 보이는 신문지 뭉치 속 싹이 돋고 있는 히아신스를 몰래 들여다보지 않을 수 있겠느냐 말이지. 진은 당연히 전지불을 들고 수시로 종이 뭉치를 열어 빛을 비쳐보았지만 싹은 여전히 크리스마스 때 처음 본 딱 그 모습대로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있는 거였다. 봄이 돼도 마찬가지. 그래서 신문지 뭉치를 펼쳐 보았더니 히아신스 구근은 없고, 여태 싹이라고 알고 있던 건 흰색의 플라스틱 골프 티일 뿐이었다.

  그래도 진은 멋있고 귀여운 악당 레슬리와 “녹색의 천국”이라 불렀던 골프장에 가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그가 부리는 마술도 보았으며, 푸는데 앞으로 9십년 이상을 들여야 할 수수께끼도 생긴다. 이런 수수께끼들:

  ① 영국에 사는 유대인들은 왜 골프를 좋아하지 않지?

  ② 무솔리니는 종이가 어느 방향으로 접힐지 어떻게 알았을까?

  ③ 천국이 진짜 굴뚝 위에 있을까?

  ④ 어째서 밍크는 유별나게 생명력이 강할까?

  그리고 훗날 영국공군에 의하여 목록에 보태질 다른 하나의 수수께끼

  ⑤ 찰스 린드버그가 대서양 횡단 비행을 할 때 다섯 개의 샌드위치를 가지고 가서 한 개 반을 먹고 나머지는 아직도 샌드위치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을 거 같은데 그런 박물관이 정말로 있고, 거기에 가면 린드버그가 먹고 남긴 샌드위치를 볼 수 있을까?

  담배를 피우면서 필터 끝까지 하얀 재만 남길 동안 재가 담배에서 떨어지지 않게 피우는 묘기의 비밀은 먼 훗날 레슬리 아저씨의 영면의 침상에서 역시 노년에 접어든 질에게 가르쳐준다. 담배에 바늘 하나를 꽂으면 재가 떨어지지 않는단다. 그럼에도 보는 사람이 더 믿을 수 있도록 적절하게 연기를 해주어야 하지. 2차 세계대전이 날 것 같으니까 미국으로 가 징집당하지 않았으며,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떳떳하지 못한, 그렇다고 사기치는 건 아닌 사업을 하다가 목소리가 큰 여성 주인이 운영하는 하숙집에서 생을 마감하는 독신자. 혼자 몸이면서도 하나밖에 없는 조카 진에게 한 푼도 남겨주지 못한 말만 그럴듯한 허풍선이.


  두 번째 남자는 책을 열자마자, 1941년 6월의 어둡고 조용한 밤에 프랑스 북부 상공에 침투하여 전투비행을 하고 있던 영국공군 조종사 토머스 프로서. 독일 폭격기와의 전투 없이 회항을 하다가 수평선 너머에서 태양이 솟는 광경, 장엄함에 넋을 놓고 있던 청년. 그러다가 바다에 함정 한 척이 운항하는 것을 발견, 급강하해 수색을 해보니 상선이어서 다시 고도를 높아는 동안 또다시 나타난 황금색 태양. 그는 이날 생전 처음 두 번의 일출을 보게 됐고, 이 화려하고 장엄하며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일출을 결코 잊지 못한다. 작품의 제목 <태양을 바라보며>도 이 장면에서 따온 듯.

  전쟁중인 시절, 영국 정부는 서전트 씨 댁에 전보를 통해 “군인숙사제공명령서”를 보낸다. 군인 한 명을 다음 명령이 있을 때까지 재워주고 먹여주라는 명령이다. 이때 집에 들어온 사람이 토미 프로서. 영국공군 제복을 입은 조그맣고 호리호리한 사람. 훗날 다시 비행명령에 의하여 출격했다가 행방불명, 사망한 것으로 짐작된다는 의견을 받게 되는 사람. 그는 비행중 적과 교전하지 않는 상태에서 이상 비행이 관측되어 비행부적격에 이은 비행금지 판정을 받아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토미는 자신이 본 가장 아름다운 것을 진에게 이야기해주었으니 그것이 바로 1941년 6월 새벽에 있었던 일출의 태양.

  전쟁과 비행중 추락에 대한 공포 때문인지 인생을 돌아보게 된 토미는 얼마 후, 진과 세번째 남자 마이클이 데이트를 시작하고, 결혼을 생각하는 단계에 이르자 조언을 해주기를, 한 번 불에 데어봐야 해. 그래야 두 번 데지 않도록 노력하게 되거든. 토미와 진은 비겁과 용기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용감한 것은 늘 달라지는 법이라고. 겁에 질려 있으면서도 겁에 질린 그것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용기라며.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몇 달 전에 읽은 커트 보니것의 단편소설 <신문배달 소년의 명예>가 떠올랐다. 어려서부터 자신을 괴롭히던 악당과 지독하게 무서움을 타는 커다란 덩치의 사나운 개가 달려들며 짖어대는 대도 아들을 대신해 자전거를 타고 하루도 빠짐없이 신문을 배달해주던 아버지는 결코 비겁한 사람이 아니라 용기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내용. 토미 프로서가 이런 의미에서 용기가 있던 조종사였는지는 끝내 모르지만 그는 대서양 한 복판에서 사라지고 만다.

  전시 등화관제 업무를 맡은 경찰관 마이클 커티스. 첫 방문과 두 번째 방문은 등화관제를 핑계로, 세번째는 지나가는 길이라고 둘러대며 진과 연애를 시작한다. 스무 살이 된 진은 나이만 그렇다는 것이지 남녀가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하면 서로가 서로를 만지고 싶게 되는지, 키스를 하고 싶게 되는지, 더 나가서 어떻게 성적 결합을 하게 되는지 도무지 이해가 없는 숙맥이었다. 오죽했으면 옆집에 사는 바레트 부인이 이제 자신은 더 이상 볼 일이 없을 것 같다면서 “젊은 부부를 위한 조언집”이란 책을 주었을 정도다. 이 책에는 부부생활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이 당연히 1930년대 양식에 입각해 가능한 한 가장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가사, 요리, 빨래, 옷 짓는 법은 물론이고 침대에서의 과정과 기교까지. 진은 다른 모든 처녀들과 마찬가지로 특히 성생활에 깊은 관심을 갖고 탐독을 했지만 하는 이야기들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순진 또는 멍청했고, 심지어 웃음만 나고 설렘 같은 건 1도 없었으며, 수치로 설명하고 있는 남성의 생식기의 길이에 경악을 할 뿐이었다. 당연히 마이크도 진과 데이트를 하면서 손을 맞잡는 거 말고는 여간해 진도를 뺄 수 없었다. 몸을 만져보기는커녕 키스 한 번도 제대로 못했지만 결코 성급해하지 않는 마이크. 청혼을 하고 승낙을 받은 후, 마이크는 진의 처녀성에 관해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런던의 여의사 닥터 헤들리에게 보내 여성에게 필요한 검사를 시킨다. 검사는 무슨 검사. 섹스할 때 여성의 몸에 삽입하는 고무 재질의 피임기구를 사용법을 배우게 하려는 거다. 의사는 아직 어떤 물질도 왕래한 적 없는 진의 몸을 질경을 삽입해 조사한 후 페서리의 사용에 적당한 구조라고 단정한다. 이후 삽입 연습과정은 생략.

  마이크는 뭐 그냥 잡놈이다. 아니면 40년대 보통 남자들이 다 그랬든지. 이때도 콘돔은 널리 알려졌음에도 비싸고, 사용할 때마다 아프고, 간혹 출혈도 나는 페서리를 아내한테 사용하라고 하는 건, 지금과 비교해 무지하게 두꺼워 성감을 제대로 느끼기 힘든 콘돔을 사용하기 싫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잘 하기나 하면. 진은 마이크와 지지고 볶으면서 20년의 세월을 산다. 그리고 어처구니없이 20년 만에 임신을 한다. 자기 몸에 네번째 남자 그레고리가 든 순간, 이제 절대로 마이크와 함께 살지 못하겠음을, 자기 힘으로 자신과 자신의 아이가 설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결심하면서 임신 일곱달일 때 서류작업 없이 집을 나온다. 출산을 하고 그레고리를 혼자 키우면서 힘든 세월을 보낸다. 마이크 역시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살다가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하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진에게 유증해, 이제 나이든 진은 자기가 만든 세계 7대 불가사의와 그랜드 캐니언을 찾아다닌다.

  또 세월이 흘러, 백 살을 몇 달 앞둔 시점에, 진은 쉰아홉 살이 된 독신 그레고리와 함께 두 번의 태양을 바라보며 작품은 막을 내린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하지 않은 한 세월도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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