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랑
산도르 마라이 지음, 임왕준 옮김 / 솔출판사 / 2003년 6월
평점 :
품절
.
오랜만에 읽는 마라이 산도르. 헝가리 사람이라 주민등록증에 ‘마라이 산도르’라고 쓰여 있다. ‘산도르 마라이’는 이의 유럽식 표기이다. 이 책이 여섯 번째 읽는 마라이의 책이다. 여태 읽었던 작품하고 결이 다르다. 읽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 독후감을 쓰려고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거 같다. 결이 다르다는 건 모험가, 작가, 시인, 소설가를 사칭한 당대의 사기꾼, 쟈코모 지롤라모 카사노바를 주인공으로 했다는 것부터 그랬다. 카사노바는 돈 지오반니와 다르게 적어도 여인을 꼬드길 때만큼은 진정으로 사랑을 했다느니 하는 헛소리들을 하건만, 천만의 말씀이다. 늙고 젊음을 따지지 않고, 부자와 빈민을 구별하지 않고, 기회가 닫기만 하면 공평하게 치마끈을 푼 날 사기꾼으로 강도, 강간, 매춘 알선 등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저지른 악당 범죄자일 뿐이다. 당대 동유럽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잘 교육받은 마라이가 이를 알고도 주인공으로 삼았다.
작품은 자코모가 16개월 동안 베니스 주교의 감옥에 갇혀 있다가 파계한 난봉꾼 수도사 발비와 함께 탈옥에 성공해 볼자노의 세르 여관에 도착하면서 시작한다. 볼자노에 와서야 이곳 성에 프랑스 루이 왕과 추기경의 친척인 파름므 백작이 프란체스카 백작부인과 함께 기거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72세의 파름므 백작. 5년 전 로마 근방에 있는 백작의 또다른 성에서 당시 열다섯 살의 프란체스카는 백작의 아름다운 약혼녀였지만 쟈코모와 은근한 사랑의 군불을 때우고 있기도 했다. 내가 알고 있는 카사노바와는 다르게 마라이의 주장이 맞다고 가정한다면 쟈코모가 일생일대의 진정한 사랑과 자유의 갈림길에서 자유를 선택하기 위해 사랑을 버린 한 페이지가 된다. 물론 순순히 사랑을 저버린 건 아니고 18세기 중엽답게 약혼녀와 쟈코모의 사이를 의심한 67세 파름므 백작과의 결투에서 30년 이상 젊은 육체에도 불구하고 백작의 칼이 심장 바로 위를 찌르고 난 다음이었다. 어둠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새벽, 창문을 통해 윗옷을 벗어버린 두 남자의 결투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려다보던 프란체스카의 속내는 어땠을까? 어떻기는 뭐. 벌써 난봉꾼의 유혹에 관해서는 고향 베니스를 넘어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스페인, 영국, 모스크바까지 떠르르하게 소문이 난 30대 초반의 남자한테 푹 빠져 있었겠지.
쟈코모가 염병할 놈인 것이, 아무리 버르장머리 없는 유럽 백인 남자들이라 하더라도 자기보다 서른 살도 더 먹은 늙은이와의 결투는 정중하게 사양을 해야 하는 법이다. 명색이 이름 앞에 신사紳士라고 타이틀을 달고 싶으면. 그런데도 쟈코모는 웃통을 훌떡 까고 노인한테 칼질을 했다가 얄짤없이 칼에 찔려버렸으니 그것 참, 잘됐다고 할 수도 없고. 그리고 함부로 귀족하고 칼부림하는 게 아니다. 귀족이 왜 귀족의 자리에 올랐는지 알아야 한다. 그들은 원래부터 싸움꾼 집안이다. 끊임없는 전쟁 속에서 귀족의 아들은 무조건 군대에 가야 했으며, 살아남기 위하여 어릴 때부터 악착같이 체력과 승마, 검술을 갈고 닦았다. 늙었다고 해도 언제 전장에 나가야 할 지 모르는 귀족들이 겉으로 보기에 만날 파티에 무도회와 연애질로 도끼 자루가 썩어 나가는 지도 모를 것 같지만 보통의 인간과 칼로 붙었다 하면 그거 하나 해치우는 건 일도 아닐지 모른다.
하여간 유일하게 단도 한 자루만 가지고 볼자노의 세르 여관에 짐을 푼 쟈코모 카사노바. 근데 그곳 성에 거주하는 파름므 백작과 백작부인. 5년 전 연애사건과 결투. 소설에 총이 하나 등장하면 반드시 총구에서 총알 한 발 정도는 발사되어야 한다는 게 소설작법 7장 5절이다. 그러면 희대의 사기꾼이자 협잡, 강도, 살인범 카사노바가 단도 한 자루를 가지고 등장했으면 그걸 누군가의 가슴팍이나 등짝에 꽂아 넣어야 이 작품의 끝장을 보겠구나, 이렇게 기대를 해야 하는 거 아냐? 아무튼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기대도 하고, 그거야 뭐 뻔한 일이지, 장담했었다. 어떻게 될까? 내가 안 알려드리지. 분명한 건 이 삼각관계, 트라이앵글이 한 번 더 울리게 된다는 것. 원래 쟈코모의 계획은 세르 여관에서 베니스에 살고 있는 선량한 양아버지 브라가댕에게 편지를 보내 돈을 보내 달라고 해서, 편지가 가는데 이틀, 오는데 이틀, 여유일 하루, 이렇게 닷새가 되는 날 볼자노를 떠나 뮌헨으로 가려던 거였다. 양아버지 이름을 팔아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망슈한테 돈을 빌어 호화로운 옷과 장식품을 사고, 도시의 유지들하고 노름을 하다 거의 돈이 떨어질 때쯤이었다. 시끌벅적한 마차가 여관 앞에 도착하고, 이젠 통풍과 노환으로 몇 주가 지나면 숟가락 놓을 것 같은 파름므 백작이 쟈코모를 보기 위해 친히 2층 계단을 올라 그의 방문을 열고, 천하의 카사노바에게 일생일대의 거래를 제안한다.
여기서 잠깐. 파름므 백작이 예순일곱 살 때 열다섯 살의 프란체스카와 약혼을 했다고 놀라거나 비난하지 말자. 18세기 일이다. 그때 카사노바도 서른 서너 살이니까 이십 년 정도 차이지만 서로 사랑했다. 같은 시기에 우리나라 영조 임금도 만 65세의 나이로 만 14세의 계비를 맞아들이니 이이가 바로 정순왕후다. (18세기는 모르겠고) 17세기까지도 유럽에서 여성의 적정 혼인 나이가 12세였다. 의심스러우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판 <데카메론> 읽어 보시라. 나도 아마 그거 읽고 알았을 거다.
하여간, 오늘 낼 하는 백작이 원하는 건, 사랑하는 프란체스카의 품에서 프란체스카가 돌보는 침상에 누워 숨을 넘기고 싶다는 거다. 자신은 이제 스무 살이 된 아내를 사랑하건만, 아내는 천하의 바람둥이 잡놈을 사랑하는 형국. 이젠 그 잡놈을 때려 죽이거나 찔러 죽일 힘도 없는 백작은 그에게 생각도 하지 못할 만큼의 거액과, 탈옥범인 것과는 상관없이 유럽 어디든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신원보증 및 여행허가서, 독일, 프랑스, 스페인, 영국, 러시아까지 각 도시마다 당당한 세력자들에게 한 자리를 부탁하는 청원서를 주는 대가로, 오늘 밤에 벌어질 가면무도회에 참석해 프란체스카를 유혹, 하룻밤을 보내고 대신 아내의 마음 속에 있는 쟈코모에 대한 연모의 마음을 완벽하게 청소해달라는 거다. 백작은 이 장면에서 길고 긴, 무려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장광설을 쏟아낸다. 가장 비슷한 문장을 들라면 누구를 거론할 수 있을까? 맞다, 알베르 코엔의 <주군의 여인>에 나오는 쏠랄의 장광설. 어찌 읽으면 쓸개 빠진 사내새끼가 어떻게 이런 부탁을 하고 있을까, 한심할 수도 있는 것까지 비슷하다. 그러나 어쩔꼬. 이미 늙어 저승이 팔짱을 끼려는 순간인데 아직까지도 총질이나 칼질 또는 청부살인 같은 죄업을 쌓기는 좀 그렇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백작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가장 원만한 방법을 선택했을 터. 이렇게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예스런 문장으로 줄줄이 이어가는 장광설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만 하면 된다.
이 책에선 세 번 정도 장광설이 등장한다. 백작의 것은 이 가운데 두 번째. 첫번째는 세르 여관의 복도에서 벌어진다. 두번째, 세번째 장광설도 모두 세르 여관에서의 일이다. 쟈코모가 여관에 든 이후 연극무대처럼 장소가 한 번도 변하지 않는다. 쟈코모가 있는 가운데 등장인물만 수시로 바뀔 뿐. 쟈코모 카사노바가 볼자노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볼자노의 모든 사람들이 난리가 난다. 역시 사기꾼, 범죄자, 매춘 알선자의 이름이 아닌 바람둥이, 유혹자로서의 카사노바. 이미 전 유럽에 바람둥이의 명성을 휘날린 쟈코모가 작은 도시에 떴으니, 여자들은 카사노바가 도대체 어떤 인물이고, 어떻게 생겼고, 얼마나 잘 생겼는지 도무지 오금이 시큰거려 가만히 있지 못하겠는 거다. 여관 주인은 열여섯 살 먹은 하녀 테레자를 쟈코모 전담 하녀로 지정했고, 아직 처녀이기는 하지만 여관업종에 종사한지 꽤 되는지라 인간의 연애사에 벌어지는 현상들에 관해서 이미 통달한 바, 보통의 여자들만큼 그에 관해 관심이 없다. 물론 쟈코모는 테레자를 유혹했고, 실패하는 것 같았으나 놀라운 혀와 목소리로 결국은 성공했지만 자빠뜨리지는 않았는데, 테레자는 이웃 여자들을 위하여 열쇠구멍을 통해 쟈코모 카사노바의 생김생김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리하여 빼곡하게 모여 쟈코모를 완상하던 중 갑자기 문을 벌컥 열어젖힌 쟈코모. 문 저편에 앉아 있다가 뒤로 발랑 나자빠진 여자들의 무리를 보더니 드디어 첫번째 장광설을 쏟아 놓는다. 절대 미남이 아닌, 짐승 중의 짐승, 사내 가운데 사내이자 마초 가운데 마초인 카사노바가.
두번째 장광설은 이야기했고, 세번째 장광설은 당연히 트라이앵글의 마지막 한 축인 프란체스카. 그녀가 세르 여관에 도착해 마지막 장광설을 쏟아낸다. 즉, 결론이다. 그걸 내가 이야기하는 걸 보신 적 있으셔? 이번에도 직접 확인을 하셔야 할 듯. 저 위에서 말한 소설작법 7장 5절을 기억하시고.
이것으로 2023년 삽질은 끝났습니다. 누추한 서재의 보잘것없는 독후감을 읽어주신 서재 친구, 나그네, 검색꾼들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내년에 좋은 일 많이 생기고, 연애도 성공하시고, 특히 건강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