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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조림공장 골목
존 스타인벡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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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도 아니고 미국의 가장 유명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소설가 존 스타인벡이 이런 코미디도 썼다는 게 장해서 별점을 다섯 개 준다. 스타인벡, 하면 당연히 <분노의 포도>와 <에덴의 동쪽>이 제일 먼저 떠오르고 이어서 <의심스러운 싸움>과 《붉은 망아지/불만의 겨울》을 꼽는다. 하여간 나는 그랬다. <생쥐와 인간>은 합본이 한 권 있고, 이미 절판된 책이 있어서 읽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통조림공장 골목>은 스타인벡이 이런 작품을 썼는지도 몰랐던 참에 정말 우연히 개가실 책꽂이에서 발견했다. 열람실 제일 구석자리에서 잔뜩 어깨를 숙이며 키득키득 얼마나 들썩였는지. 집에 들어가다 로또 한 장 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잊어버리고 그냥 왔다. 내일이라도 한 장 사야겠다. 1등 당첨되면 천만원어치 책 사겠다. 아, 취소. 더는 책 쌓아 둘 곳이 없다. 그리고 맞다! 이 책 바로 옆에 이미 절판된 <생쥐와 인간>도 눈에 보였다. 그것도 내버려둘 수가 없지.
존 스타인벡을 새삼스럽게 소개할 필요는 없다. 한 시절을 풍미한 작가이며 우리나라 독자들에겐 좀 덜 유명하지만 미국인들이 국민 작가로 추앙하는 인물. 소비에트 연방, 우크라이나, 조지아를 방문해 세계에서 가장 보수적인 자본주의 국가인 미합중국의 초대 FBI 국장 에드거 후버로 하여금 24시간 감시 처분을 내리게 했던 작가. 메카시 선풍에도 눈썹 한 올 까딱하지 않은 건 이미 세계적 명성을 휘날리고 있었기 때문이었겠지. 부잣집 아들에 공부도 잘해 스탠퍼드 대학에 들어가, 스포츠도 오지게 잘한 엄친아 출신의 존 스타인벡은 굳이 공부를 열심히 할 이유조차 없어서 대학 6년인가 8년 동안 자기가 듣고 싶은 과목만 수강하다가 졸업장이고 뭐고 필요 없어, 하면서 그냥 자퇴해버렸다며? 이이가 젊은 시절에 동부에 가서 공부하고, 막노동도 하고, 도로공사 같은 막일 전문도 하다가 지쳐 결국 낳고 자란 캘리포니아주 샐리너스에 돌아와 본격적으로 글을 썼는데, 이 작품 <통조림공장 골목>은 고향 샐리너스 카운티와 접한 몬터레이의 캐너리 로, 즉 말 그대로 통조림공장 골목을 무대로 한다. 정말 몬터레이에 캐너리 로, 통조림공장 골목이란 곳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자기 고향 바로 옆동네를 무대로 삼아 그런지 스타인벡의 문체가 전에 읽었던 무거운 작품들과 달리 날아다닌다. 피융피융.
캘리포니아 주 몬터레이의 캐너리 로Cannery Row는 시(詩)이고, 악취이고, 삐걱거리는 소음이고, 독특한 빛이고, 색조이고, 습관이고, 노스탤지어이고, 꿈이다. 주민들은 창녀, 뚜쟁이, 도박꾼, 개자식들인데 이 말은 곧 ‘모두’라는 뜻이다. 이들은 성자와 천사와 순교자와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말과 같다.
위 문단의 말이 궤변이라고? 아니다. 존 스타인벡은 진실을 서술한 거였다. 이 책은 초두에 자신이 적은 위 문장(들)이 왜 ‘참’인 명제인지를 증명하는 일이다. 그걸 구태여 미리 알 필요는 없다. 책을 읽으면 저절로 동의할 수밖에 없을 터이니. 그리하여 스타인벡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그 시와 악취와 삐걱거리는 소음과 독특한 빛과 색조, 습관, 꿈을 산채로 포착할 수 있을까?” 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는 포착하는 데 성공했고, 나는 서슴지 않고 갈채했다.
작품 속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장면은 중국인 리청의 식료품점. <에덴의 동쪽>을 읽어보면 스타인벡이 중국인한테 호의적이란 걸 짐작할 수 있다. <통조림공장 골목>에서 출연하는 리청도 매우 현명한 사람이다. 좁은 가게를 운영하면서도 가게에 들여놓은 구색 면으로 말하자면 기적을 만든 사람이다. 한 마디로 없는 게 몇 가지 없으니 바로, 고양이 뿔, 암소부랄, 모기 눈알. 이것 말고 하여간 인간이 행복해지는데 필요하거나 아쉬운 모든 품목을 구비했다. 게다가 캐너리 로의 모든 사람들은 리청에게 빚을 지고 있으니, 외상거래를 말하는 거였다. 이상도 하지. 그는 도통 외상을 거절할 줄 몰랐다. 현재 고객이 지고 있는 외상값 총계가 얼마인지 독촉하듯 확인해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정한 선을 넘은 외상 고객에게는 단 한 푼도 초과해 외상 물품을 건네지 않았다. 리청에게 가장 큰 외상을 지고 있던 사람은 건조 물고기 가루(魚粉) 창고 소유주 호러스 애브빌이란 남자였다.
아내 둘과 자식이 여섯 있는 호러스가 리청네 가게에 들어와 “내가 빚진 게 많은 거 같소.”라고 말했다. 자신도 외상이 한도까지 찼다는 걸 알고, 우리 아이한테 스피어민트 껌 한 통도 더 이상은 주지 않을 거 아니오, 라고 묻고, 그렇다, 더 이상은 안 된다고 리청이 대답하니, 자신의 어분 창고와 외상값 전부를 퉁 치자고 제안한다. 리청은 고개를 젖히고 속으로 열심히 주판을 튀겨보더니 통조림공장이 확장을 하는 시점에 부동산 가격에 큰 변동이 있을 거라 여겨 거래에 합의했으며, 기념으로 속칭 올드 테니스 슈즈라고 불리는 위스키 올드 테네시 사분의 일 파인트 짜리를 선물한다. 미터법으로 237cc. 호러스는 올드 테니스 슈즈를 들고 마지막으로 이젠 리청의 소유가 된 어분 창고에 들어가 권총을 꺼내 자신의 머리통을 날려버리고, 이후 호러스의 아이들은 언제든지 스피어민트 껌을 씹을 수 있게 된다.
이제야 등장하는 매력 만점의 쉰 넘은 늙은 부랑자이자 악당이자 절도범 혹은 절도 교사자인 맥이 등장한다. 맥, 하면 떠오르는 거? 나는 <서푼짜리 오페라>의 맥더나이프Mac the Knife. 이 친구도 건달이자 칼잡이. 비슷하잖여? 맥은 가족도 없고 돈도 없다. 동네에서 마실 것과 만족 외에 아무런 야심도 없는 몇 명 가운데 가장 연장자이자 지도자이며 조언자인 한편 어느 정도는 착취자이기도 하다. 이런 남자의 대부분은 자멸하는 길을 걷는 반면, 맥과 친구들은 어렵지 않게 조용히 만족에 다가서서 살며시 흡수해버리는 재주를 가졌다. 친구라고 하면 아주 힘센 청년 헤이즐, 바 ‘이다’의 임시 바텐더 에디, 생물학 연구소에다 개구리와 고양이, 기타 온갖 생물을 조달해주는 휴이와 존스를 일컫는데 이들은 리청 가게 옆 공터에 있는 커다랗고 녹슨 파이프 안에서 살고 있었다.
이 맥이 호러스의 어분 창고가 리청에게 넘어갔다는 얘기를 듣고, 아무리 생각해도 리청한테 창고가 필요하지 않을 거 같아 그한테 들러서 어분 창고에 자신이 들어가 살면 안 되겠느냐고 물어본다. 다시 고개를 젖히고 깊은 생각에 빠지는 현명한 리청.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가서 살라고 하면 맥과 일당들은 심통이 나서 유리창을 깨거나 불을 확 싸질러 버리지도 않을 것이며, 가게에 와서 물건을 슬쩍 훔쳐가지도 않을 것이며, 가끔 가게를 방문하는 취객이나 깡패 비슷한 것들과의 문제도 쉽게 해결해줄 것이다. 그럼에도 그냥 쉽게 들어가 살라고는 할 수 없다. 리청은 얼마로 정하든지 어차피 받지 못할 임대료로 주 5달러를 제안하고 이제 사업상 든든한 파트너가 생기게 되니, 이것이야말로 사업상 실수를 리청의 선함, 선의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전환시킨 예로 들어도 손색이 없는 거래였다. 맥과 일당이 어분 창고에 들어가 살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꽤 근사한 ‘사람 사는 곳’으로 변모했고, 이때부터 어분 창고 대신 “팰리스 플롭하우스 앤드 그릴”로 불리게 되니 이 아니 근사한 일일까.
여기에 또 중요한 등장인물 한 명 더. 닥. 닥터의 닥이다. 웨스턴 생물학연구소의 소유자이자 운영자. 작은 몸집이지만 강단있고 아주 힘이 세고, 화가 치솟으면 몹시 사납지만 평소엔 세상에 이이보다 너그럽고 활수하고 남의 사정 잘 봐주는 사람이 없어서 캐너리 로의 모든 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턱수염을 길렀으며 (이게 기가 막힌 비유라고 읽었는 바) 반은 그리스도이고 반은 사티로스 같은 외모로 얼굴이 진실을 말해준다는 표본이랄 수 있다. 늘 맥주를 입에 달고 다니며 연구소에서 살면서 그레고리안 성가와 찰리 파커를 좋아한다. 사실 이이 때문에 작품에서 많은 사건들이 벌어지는데, 어쩌면 한결같이 불한당인 맥과 연결이 되는지, 그것도 팔자라면 팔자다. 우리의 맥이 어느 날 닥한테 주둥이를 얻어 터져서 위 앞니가 하나 부러지는 화를 당했건만 맥의 닥을 향한 존경은 멈추지 않는다.
여기에 한 명만 더. 도라. 훌륭하고 큼지막한 여자. 리청 가게 오른쪽 공터의 왼쪽 경계에 엄숙하고 당당한 도라 플러드, 매음굴 주인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악덕업체의 사장이 아니라, 나이와 병 때문에 무력한 아가씨도 내치지 않는 후덕한 포주다. 후에 ‘베어 플래그 식당’이라는 옥호를 달지만 어엿한 매음굴이라, 법에 어긋나게 살 수밖에 없으나 다른 누구보다 법을 두 배로 지키며 살아야 하는 숙명을 지녔다. 기부금도 마찬가지여서 사람들이 1달러를 기부하는 행사에 50달러를 기부해도 그리 좋은 인상을 얻지 못하는 빌어먹을 운명의 여성. 하지만 현명하게 늙은 호걸이다.
이렇게 천하의 부랑자 맥도, 매음굴의 호걸 사장 도라도, 식료품점 주인 리청도, 그곳에 종사하는 모든 종업원과 거리의 사람들, 주민들, 심지어 경찰, 소방관, 택시운전사 기타 등등도 캐너리 로에서는 누구나 이렇게 말한다.
“정말이지 닥에게 뭔가 좋은 일을 좀 해줘야 하는데.”
바로 이 “좋은 일”을 해주느라 통조림공장 골목의 사람들은 유쾌한 난장판, 포복절도의 비빔밥을 제대로 한 번 볶아낸다. 당신이 성적이 떨어진 학생이거나 실연당한 연인이거나, 마누라한테 얻어 터져 눈두덩이 부었거나, 붓기는 내려갔지만 아직도 시퍼렇다면 이 책을 읽으시라. 혹시 알아, 기분이 조금은 풀어질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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