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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 2 1 (1) (양장)
폴 오스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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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권, 본문만 1,541 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소설.
이 책을 읽기 전에 폴 오스터의 젊은 시절을 검색해 보면 더 좋을 듯하다. 오스터는 오스트리아 혈통의 유대 중산층 집안에서 1947년 2월 3일에 태어났다. <4 3 2 1>의 주인공 아치볼드 아이작 퍼거슨은 오스터보다 딱 한 달 뒤인 1947년 3월 3일 러시아 출신 유대 중산층 가정에서 낳고 자란다. 오스터는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학사, 석사를 하고 1970년에 프랑스로 건너가 프랑스 문학을 영어로 번역하는 데 힘을 쏟는다. 작중 퍼거슨은 컬럼비아 대학에 다닐 수도 있고, 돈이 모자라 학비와 기숙사비, 식대를 지원하는 장학금을 받고 스탠퍼드로 갈 수도 있다. 미국에서 1947년생으로 공부 머리가 있고, 그때까지 살아 있으면 대학에 진학해서 저 징글맞은 1960년대의 반전, 반제국주의 대 참전 애국주의의 갈등을 겪어야 했을 터이다. 그렇게 유소년기, 청소년기, 청년기를 거쳐 성년이 되었을 것. 이 책을 읽지 않은 분이 지금까지 쓴 초두를 보면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헷갈리기 십상이리라. 좋다, 다 생략하고 후딱 본문으로 들어가보자.
이야기는 20세기를 시작하는 노베첸토, 1900년 1월 1일에 막이 올라간다. 당시 19세였던 이사크 레즈니코프는 재킷 안감에 1백 루블을 꿰매 넣은 채 자신이 태어난 도시 민스크를 탈출해, 오직 걸어서 함부르크, 바르샤바, 베를린을 거쳐 ‘중국여제’라는 여객선에 승선했다고 하는데 혹시 바르샤바, 베를린, 함부르크 아니었을까 싶지만 길고 긴 장편소설에 이런 거 가지고 시비하지 않겠다. 하여튼 그렇게 해서 뉴욕항에 도착한 것이 1900년 1월 1일. 문학동네에서 <실종자>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아메리카>의 유대인 주인공 카를 로스만은 뉴욕에 들어오며 칼을 든 자유의 여신상을 본 반면, 오스터의 이사크 레즈니코프에게는 한 현명한 유대 노인이 접근해서 러시아식 긴 이름을 갖고 미국에 정착하기 쉽지 않을 터이니 간단한 이름으로 개명을 하라고 충고한다. 그래 뭐라 하면 좋겠느냐고 물으니, 젊은이, 록펠러라고 하면 실패하지 않을 것이네, 근사한 이름을 하나 골라주었지만, 러시아 민스크 촌놈이 록펠러라는 이름이 어디 쉽게 입에 붙어야 말이지. 그래서 이민국 직원이 당신 이름이 뭐요, 라고 물었을 때, 이사크의 머리엔 도무지 록펠러가 떠오르지 않아 당황하면서, 얼른 대답한 것이 러시아, 폴란드 유대인들의 언어인 이디시어로 “Ikh hob fargessen.” 우리 발음으로 “이크 호브 파게센” 즉 “잊었는데요.”라고 했더니 이민국 공무원께서 오, 그래 알았어. 이커보드 퍼거슨 Ichabod Ferguson으로 장부에 적어버렸다. 우리가 아는 퍼거슨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출신으로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축구 명문 구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만 27년 이상 감독을 지낸 83세의 노인뿐일 걸? 미국에서도 크게 환영을 받지는 못하는 유대인 이사크는 이제 마음만 먹으면 시침 뚝 떼고 스코틀랜드 이민자로 행세할 수 있었건만, 문제는 여전히 이디시어 발음을 감추지 못하는 영어였다나.
어깨가 넓은 거구의 잡역부 유대인 이커보드는 26세 생일 직후에, 14세 때 혼자 뉴욕에 도착한 고아 출신 유대 처녀로 까다롭고 변덕스러운 성격의 패니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들만 셋 낳고, 시카고의 가죽제품 공장에서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다가 강도가 쏜 총에 맞아 42세에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만다. 시카고에 정나미가 떨어진 패니는 아들 루이스(14), 에런(12), 스탠리(9)를 데리고 뉴저지 뉴어크로 이사해 센트럴워드의 아파트 꼭대기층 셋방에 정착한다. 그런데 사실일 수도 있고 추측일 수도 있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니, 패니와 이커보드가 미네소타에서 네번째로 딸을 출산한 적이 있다는 거. 잡역부 부부가 한 겨울에 미국에서도 춥기로 이름 높은 미네소타에서 하도 팍팍하게 살아서 차마 넷째까지 키울 엄두가 나지 않아 물에 빠뜨려 죽였다는 확인되지 않은 말도 전해진다. 하여간 이 형제들 가운데 주목할 건 막내 스탠리다.
자라는 동안 형들에게 자주 놀림과 괴롭힘을 당한 스탠리. 왜 그랬을까? 두 형은 하나같이 불량해서 맏이 루는 습관성 도박에 빠져들고, 둘째 아널드는 동네 양아치가 된 반면 스탠리는 주구장천 성실한 학생이었으니 형들 보기에 눈꼴이 좀 시었던 거다. 뉴어크의 센트럴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미식축구 엔드와 4백미터 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던 스탠리는 학교를 졸업한 1932년에 대학에 가고는 싶었지만 사정을 뻔히 아는지라 꿈도 꾸지 않고 작은 라디오 수리점을 열었다. 말 그대로 “작은.” 구두 수선점 만한 크기로. 스탠리는 11세 때 어머니가 휘두른 빗자루에 맞아 오른쪽 눈이 부분 실명이 되었지만, 미국에서도 새옹지마가 있었든지 덕택에 2차 세계대전이 벌어져 징집 신체검사에서 4-F 등급을 받아 합법적인 병역 면제 처분을 받는다. 문제가 있는 두 형의 병역은 책에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폭군 어머니가 장악한 집구석이 지긋지긋해 20대 초반에 얼른 장가들어 탈출한 반면, 막둥이 스탠리는 눈부신 20대 시절에 이름난 바람둥이로 온갖 유대 여성을 사냥하며 인생을 즐겼다. 그러다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21세의 아름다운 유대 처녀 로즈 애들러를 만나자 비혼주의 신념을 한 방에 무너뜨리고 결혼해버린다. 이것이 퍼거슨의 부계 내력.
아치 퍼거슨의 엄마 로즈 애들러 쪽을 보자.
로즈의 아버지 벤저민, 벤지 애들러는 바르샤바 출신, 어머니 에마 브로모위츠는 오데사 출신 유대인이지만 두 명 다 세 살이 되기 전에 미국에 도착에 디트로이트와 뉴욕의 허드슨에서 살았다. 이건 퍼거슨 씨와 달리 영어 사용에 전혀 문제가 없으며 오히려 이디시어 구사에 애를 먹는 미국 유대인이란 말이었다. 벤지는 1911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뉴욕에 와서 1943년 현재 맨해튼에 있는 부동산 회사를 소유한 소수의 주주 가운데 한 명으로 이름이 올라 있으니 나름대로 큰 성공을 거둔 이였다. 젊은 사업가라는 명함을 가지고 총각시절부터 자유분방한 연애를 즐긴 애들러 씨가 1919년 초겨울에 업스테이트 뉴욕의 일요일 야유회에서 에마를 만나 사랑에 빠진 건 사람들이 예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19세기 젊은 여성보다 더 말이 없고, 소극적이며, 그래서 얌전하고 보건부 장관이 인정한 숫처녀 에마가 매사 사방천지에 아드레날린을 발산하며 거들먹거리는 벤지의 청혼을 허락했다는 거 하나만 가지고 뉴욕의 유대인 사회가 발칵 뒤집어졌을 정도였단다. 하여간 이들은 만난 즉시 결혼을 해 1920년에 밀드레드, 22년에 로즈, 이렇게 딸만 둘 낳아 곱고 아름답게, 그리고 똑똑하게 키워냈다.
밀드레드는 공부 머리가 대단해서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박사학위도 취득해 여기저기 대학의 교수를 역임하다가 아주 늦게 결혼을 하고, 결혼을 하기는 하는데, 그냥 살 수도 있고 이혼할 수도 있다. 반면에 로즈는 데이비드 래스킨이라는 남자와 할 거 다 하는 진한 연애 중이었다가, 전쟁이 터져 데이비드가 군의관으로 징집되어 기초 군사훈련을 받던 도중 폭발사고로 산산이 터져 죽어 가슴 속이 텅 빈 틈을 골라 스탠리가 청혼을 한 거였다. 로즈는 복잡하고 소란스러운 뉴욕에서 자신만의 길을 걷기로 결심을 해서 웨스트 27번가의 초상 사진가 늙은 이매뉴얼 슈나이더먼 사진관의 접수원 겸 비서 겸 경리로 들어가 차근차근 사진에 관한 것들을 배운다. 1940년대엔 미국에서도 드물게 스탠리는 로즈의 꿈을 이루기 위해 결혼을 하고 나서도 계속 사진 일을 할 수 있게 동의하지만, 결혼 18개월 동안 로즈가 세 번 임신을 하고 세 번 유산을 한 후에 다시 임신을 하자, 딱 집안, 침대 위에서 움직이지 않고 오직 출산을 위해 몸조리할 것을 권유했으며, 로즈 역시 동의한다. 말이 그렇지 이게 완전히 감옥살이 아냐? 이때 평소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언니 밀드레드가 로즈를 찾아와, 놀면 뭐하니,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게 있으니까 하여간 내 말대로 해, 하면서 당시 괜찮은 미국인이면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이면서 재미있는 작품”을 일러준다. 그러니까 기초 가운데 생 기초적인 서양문학 리스트. 이 목록을 소개하는 것도 의미 있을 터. 과연 몇 작품을 아직 안 읽었나 한 번 체크해보시라.
“밤은 부드러워라, 오만과 편견, 환락의 집, 몰 플랜더스, 허영의 시장, 폭풍의 언덕, 마담 보바리, 파르마의 수도원, 첫사랑, 더블린 사람들, 8월의 빛, 데이비드 코퍼필드, 미들 마치, 워싱턴 스퀘어, 주홍글씨, 메인 스트리트, 제인 에어”
로즈는 임신의 침상 위에서 이 열일곱 편의 장편소설을 다 읽었으며, 이후 스탠리가 도서관에서 빌려다 준 몇 권을 더 읽고 드디어 1943년 3월 2일 오전 10시에 양수가 터져 큰 동서 밀리에게 전화를 해 베스 이즈리얼 병원 산과병동에 들어가 3월 3일 02시 07분에 아치볼드 아이작 퍼거슨을 출산한다.
스탠리의 두 형, 로와 아널드는 로즈가 본 남자 가운데 가장 잘 생긴 두 명이었고, 여기에 시어머니 패니를 가져다 붙이면 완벽하게 “사회 부적응자 삼총사”가 만들어졌다. 작은 라디오 수리점에서 시작해 크게 점포를 키워 가전제품 일습과 나중엔 거의 모든 생활용품을 파는 상점 몇 개로 진화한 사업가 스탠리는 유대인의 가족 관념에 입각해 맏형 루의 도박 빚을 몇 번에 걸쳐 갚아주고, 둘째 형 아널드가 카운터의 현금을 여러 차례 슬쩍 가져가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자기 점포에 자리를 마련해주고 꼬박꼬박 월급도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게 창고에서 큰 불이 나 상품 전부가 홀랑 타버려 큰 위기를 맞는다. 아니, 화재가 나서 위기를? 보험은 어떻게 하고? 어째 이 이야기를 하자마자 형들이 조금 의심스럽지? 맏이가 또다시 도박에 손을 댔다가 홀랑 날려먹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불을 질렀을 수도 있고, 둘째가 동네 건달들과 어울려 마지막으로 크게 한 탕 하고 손 씻겠다는 명분으로 그랬을 수도 있다. 수사 결과 틀림없이 내부자 소행이라고 결론을 내린 경찰과 보험회사. 스탠리는 차마 형들을 감방에 보낼 수 없어서 보험회사와 경찰서에 사건 의뢰를 포기할 수도 있고, 그러거나 말거나 그냥 보험금을 타고 상점을 다시 일으킬 수도 있다. 어차피 그건 선택의 문제니까. 누구의 선택일까? 스탠리의 선택? 혹은 작가인 폴 오스터의 선택?
한 길을 가다가 길에 세 방향으로 분리된다. 어떤 길을 택해 가느냐에 따라 선택한 사람의 인생은 바뀔 수밖에 없다. 만일 열아홉 살의 이사크 레즈니코프가 원래 계획대로 아이작 록펠러가 됐다면 마흔두 살에 야간경비원으로 일하다가 가슴에 총을 맞았을까? 그렇게 금슬 좋은 스탠리와 로즈가 살면서 점점 금이 가 돈만 아는 유대인 스탠리가 안면 몰수하고 이혼해버리면 외아들이자 작품의 주인공 아치 퍼거슨은 어떤 인생을 살게 될까? 아니, 아니. 그것보다 소년 퍼거슨이 중학교 다니면서 여름방학 때 캠프에 참여했다가, 지금 시대라면 일찌감치 알 수 있었던 만성 심혈관 질환이 닥치는 바람에 어린 나이에 삶을 마칠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일을 기점으로 더없이 친한 야구 친구였던 조지프 앤턴은 더 이상 야구를 비롯한 모든 공놀이를 포기하는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 누가 보장할 수 있나. 그래 어차피 인생은 순간순간 선택하는 일이다.
오스터가 처음부터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고, 자신이 작품을 구상하면서 여러가지 경우를 감안해 진행하다가 차마 하나의 줄거리로 밀고가기 힘들어 이 경우, 저 경우를 다 함께 작품으로 만들어보자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두번째 경우가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어서 책을 읽으며 불만이 쌓였다가, 아이그, 폴 오스터의 못 말리는 입담에 푹 빠져 며칠 동안 재미있게 읽었다. 이렇게 긴 작품을 읽고 나서, 그게 만일 재미까지 있다면, 조금은 뿌듯한 느낌이 든다. 이 기분 때문에 점심 때 나가 낮술 한 잔 했어도 그리 크게 잘못된 일은 아닐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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