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3 2 1 (1) (양장)
폴 오스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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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권, 본문만 1,541 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소설.

  이 책을 읽기 전에 폴 오스터의 젊은 시절을 검색해 보면 더 좋을 듯하다. 오스터는 오스트리아 혈통의 유대 중산층 집안에서 1947년 2월 3일에 태어났다. <4 3 2 1>의 주인공 아치볼드 아이작 퍼거슨은 오스터보다 딱 한 달 뒤인 1947년 3월 3일 러시아 출신 유대 중산층 가정에서 낳고 자란다. 오스터는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학사, 석사를 하고 1970년에 프랑스로 건너가 프랑스 문학을 영어로 번역하는 데 힘을 쏟는다. 작중 퍼거슨은 컬럼비아 대학에 다닐 수도 있고, 돈이 모자라 학비와 기숙사비, 식대를 지원하는 장학금을 받고 스탠퍼드로 갈 수도 있다. 미국에서 1947년생으로 공부 머리가 있고, 그때까지 살아 있으면 대학에 진학해서 저 징글맞은 1960년대의 반전, 반제국주의 대 참전 애국주의의 갈등을 겪어야 했을 터이다. 그렇게 유소년기, 청소년기, 청년기를 거쳐 성년이 되었을 것. 이 책을 읽지 않은 분이 지금까지 쓴 초두를 보면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헷갈리기 십상이리라. 좋다, 다 생략하고 후딱 본문으로 들어가보자.


  이야기는 20세기를 시작하는 노베첸토, 1900년 1월 1일에 막이 올라간다. 당시 19세였던 이사크 레즈니코프는 재킷 안감에 1백 루블을 꿰매 넣은 채 자신이 태어난 도시 민스크를 탈출해, 오직 걸어서 함부르크, 바르샤바, 베를린을 거쳐 ‘중국여제’라는 여객선에 승선했다고 하는데 혹시 바르샤바, 베를린, 함부르크 아니었을까 싶지만 길고 긴 장편소설에 이런 거 가지고 시비하지 않겠다. 하여튼 그렇게 해서 뉴욕항에 도착한 것이 1900년 1월 1일. 문학동네에서 <실종자>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아메리카>의 유대인 주인공 카를 로스만은 뉴욕에 들어오며 칼을 든 자유의 여신상을 본 반면, 오스터의 이사크 레즈니코프에게는 한 현명한 유대 노인이 접근해서 러시아식 긴 이름을 갖고 미국에 정착하기 쉽지 않을 터이니 간단한 이름으로 개명을 하라고 충고한다. 그래 뭐라 하면 좋겠느냐고 물으니, 젊은이, 록펠러라고 하면 실패하지 않을 것이네, 근사한 이름을 하나 골라주었지만, 러시아 민스크 촌놈이 록펠러라는 이름이 어디 쉽게 입에 붙어야 말이지. 그래서 이민국 직원이 당신 이름이 뭐요, 라고 물었을 때, 이사크의 머리엔 도무지 록펠러가 떠오르지 않아 당황하면서, 얼른 대답한 것이 러시아, 폴란드 유대인들의 언어인 이디시어로 “Ikh hob fargessen.” 우리 발음으로 “이크 호브 파게센” 즉 “잊었는데요.”라고 했더니 이민국 공무원께서 오, 그래 알았어. 이커보드 퍼거슨 Ichabod Ferguson으로 장부에 적어버렸다. 우리가 아는 퍼거슨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출신으로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축구 명문 구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만 27년 이상 감독을 지낸 83세의 노인뿐일 걸? 미국에서도 크게 환영을 받지는 못하는 유대인 이사크는 이제 마음만 먹으면 시침 뚝 떼고 스코틀랜드 이민자로 행세할 수 있었건만, 문제는 여전히 이디시어 발음을 감추지 못하는 영어였다나.

  어깨가 넓은 거구의 잡역부 유대인 이커보드는 26세 생일 직후에, 14세 때 혼자 뉴욕에 도착한 고아 출신 유대 처녀로 까다롭고 변덕스러운 성격의 패니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들만 셋 낳고, 시카고의 가죽제품 공장에서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다가 강도가 쏜 총에 맞아 42세에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만다.  시카고에 정나미가 떨어진 패니는 아들 루이스(14), 에런(12), 스탠리(9)를 데리고 뉴저지 뉴어크로 이사해 센트럴워드의 아파트 꼭대기층 셋방에 정착한다. 그런데 사실일 수도 있고 추측일 수도 있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니, 패니와 이커보드가 미네소타에서 네번째로 딸을 출산한 적이 있다는 거. 잡역부 부부가 한 겨울에 미국에서도 춥기로 이름 높은 미네소타에서 하도 팍팍하게 살아서 차마 넷째까지 키울 엄두가 나지 않아 물에 빠뜨려 죽였다는 확인되지 않은 말도 전해진다. 하여간 이 형제들 가운데 주목할 건 막내 스탠리다.

  자라는 동안 형들에게 자주 놀림과 괴롭힘을 당한 스탠리. 왜 그랬을까? 두 형은 하나같이 불량해서 맏이 루는 습관성 도박에 빠져들고, 둘째 아널드는 동네 양아치가 된 반면 스탠리는 주구장천 성실한 학생이었으니 형들 보기에 눈꼴이 좀 시었던 거다. 뉴어크의 센트럴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미식축구 엔드와 4백미터 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던 스탠리는 학교를 졸업한 1932년에 대학에 가고는 싶었지만 사정을 뻔히 아는지라 꿈도 꾸지 않고 작은 라디오 수리점을 열었다. 말 그대로 “작은.” 구두 수선점 만한 크기로. 스탠리는 11세 때 어머니가 휘두른 빗자루에 맞아 오른쪽 눈이 부분 실명이 되었지만, 미국에서도 새옹지마가 있었든지 덕택에 2차 세계대전이 벌어져 징집 신체검사에서 4-F 등급을 받아 합법적인 병역 면제 처분을 받는다. 문제가 있는 두 형의 병역은 책에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폭군 어머니가 장악한 집구석이 지긋지긋해 20대 초반에 얼른 장가들어 탈출한 반면, 막둥이 스탠리는 눈부신 20대 시절에 이름난 바람둥이로 온갖 유대 여성을 사냥하며 인생을 즐겼다. 그러다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21세의 아름다운 유대 처녀 로즈 애들러를 만나자 비혼주의 신념을 한 방에 무너뜨리고 결혼해버린다. 이것이 퍼거슨의 부계 내력.


  아치 퍼거슨의 엄마 로즈 애들러 쪽을 보자.

  로즈의 아버지 벤저민, 벤지 애들러는 바르샤바 출신, 어머니 에마 브로모위츠는 오데사 출신 유대인이지만 두 명 다 세 살이 되기 전에 미국에 도착에 디트로이트와 뉴욕의 허드슨에서 살았다. 이건 퍼거슨 씨와 달리 영어 사용에 전혀 문제가 없으며 오히려 이디시어 구사에 애를 먹는 미국 유대인이란 말이었다. 벤지는 1911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뉴욕에 와서 1943년 현재 맨해튼에 있는 부동산 회사를 소유한 소수의 주주 가운데 한 명으로 이름이 올라 있으니 나름대로 큰 성공을 거둔 이였다. 젊은 사업가라는 명함을 가지고 총각시절부터 자유분방한 연애를 즐긴 애들러 씨가 1919년 초겨울에 업스테이트 뉴욕의 일요일 야유회에서 에마를 만나 사랑에 빠진 건 사람들이 예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19세기 젊은 여성보다 더 말이 없고, 소극적이며, 그래서 얌전하고 보건부 장관이 인정한 숫처녀 에마가 매사 사방천지에 아드레날린을 발산하며 거들먹거리는 벤지의 청혼을 허락했다는 거 하나만 가지고 뉴욕의 유대인 사회가 발칵 뒤집어졌을 정도였단다. 하여간 이들은 만난 즉시 결혼을 해 1920년에 밀드레드, 22년에 로즈, 이렇게 딸만 둘 낳아 곱고 아름답게, 그리고 똑똑하게 키워냈다.

  밀드레드는 공부 머리가 대단해서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박사학위도 취득해 여기저기 대학의 교수를 역임하다가 아주 늦게 결혼을 하고, 결혼을 하기는 하는데, 그냥 살 수도 있고 이혼할 수도 있다. 반면에 로즈는 데이비드 래스킨이라는 남자와 할 거 다 하는 진한 연애 중이었다가, 전쟁이 터져 데이비드가 군의관으로 징집되어 기초 군사훈련을 받던 도중 폭발사고로 산산이 터져 죽어 가슴 속이 텅 빈 틈을 골라 스탠리가 청혼을 한 거였다. 로즈는 복잡하고 소란스러운 뉴욕에서 자신만의 길을 걷기로 결심을 해서 웨스트 27번가의 초상 사진가 늙은 이매뉴얼 슈나이더먼 사진관의 접수원 겸 비서 겸 경리로 들어가 차근차근 사진에 관한 것들을 배운다. 1940년대엔 미국에서도 드물게 스탠리는 로즈의 꿈을 이루기 위해 결혼을 하고 나서도 계속 사진 일을 할 수 있게 동의하지만, 결혼 18개월 동안 로즈가 세 번 임신을 하고 세 번 유산을 한 후에 다시 임신을 하자, 딱 집안, 침대 위에서 움직이지 않고 오직 출산을 위해 몸조리할 것을 권유했으며, 로즈 역시 동의한다. 말이 그렇지 이게 완전히 감옥살이 아냐? 이때 평소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언니 밀드레드가 로즈를 찾아와, 놀면 뭐하니,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게 있으니까 하여간 내 말대로 해, 하면서 당시 괜찮은 미국인이면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이면서 재미있는 작품”을 일러준다. 그러니까 기초 가운데 생 기초적인 서양문학 리스트. 이 목록을 소개하는 것도 의미 있을 터. 과연 몇 작품을 아직 안 읽었나 한 번 체크해보시라.

  “밤은 부드러워라, 오만과 편견, 환락의 집, 몰 플랜더스, 허영의 시장, 폭풍의 언덕, 마담 보바리, 파르마의 수도원, 첫사랑, 더블린 사람들, 8월의 빛, 데이비드 코퍼필드, 미들 마치, 워싱턴 스퀘어, 주홍글씨, 메인 스트리트, 제인 에어”

  로즈는 임신의 침상 위에서 이 열일곱 편의 장편소설을 다 읽었으며, 이후 스탠리가 도서관에서 빌려다 준 몇 권을 더 읽고 드디어 1943년 3월 2일 오전 10시에 양수가 터져 큰 동서 밀리에게 전화를 해 베스 이즈리얼 병원 산과병동에 들어가 3월 3일 02시 07분에 아치볼드 아이작 퍼거슨을 출산한다.


  스탠리의 두 형, 로와 아널드는 로즈가 본 남자 가운데 가장 잘 생긴 두 명이었고, 여기에 시어머니 패니를 가져다 붙이면 완벽하게 “사회 부적응자 삼총사”가 만들어졌다. 작은 라디오 수리점에서 시작해 크게 점포를 키워 가전제품 일습과 나중엔 거의 모든 생활용품을 파는 상점 몇 개로 진화한 사업가 스탠리는 유대인의 가족 관념에 입각해 맏형 루의 도박 빚을 몇 번에 걸쳐 갚아주고, 둘째 형 아널드가 카운터의 현금을 여러 차례 슬쩍 가져가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자기 점포에 자리를 마련해주고 꼬박꼬박 월급도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게 창고에서 큰 불이 나 상품 전부가 홀랑 타버려 큰 위기를 맞는다. 아니, 화재가 나서 위기를? 보험은 어떻게 하고? 어째 이 이야기를 하자마자 형들이 조금 의심스럽지? 맏이가 또다시 도박에 손을 댔다가 홀랑 날려먹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불을 질렀을 수도 있고, 둘째가 동네 건달들과 어울려 마지막으로 크게 한 탕 하고 손 씻겠다는 명분으로 그랬을 수도 있다. 수사 결과 틀림없이 내부자 소행이라고 결론을 내린 경찰과 보험회사. 스탠리는 차마 형들을 감방에 보낼 수 없어서 보험회사와 경찰서에 사건 의뢰를 포기할 수도 있고, 그러거나 말거나 그냥 보험금을 타고 상점을 다시 일으킬 수도 있다. 어차피 그건 선택의 문제니까. 누구의 선택일까? 스탠리의 선택? 혹은 작가인 폴 오스터의 선택?


  한 길을 가다가 길에 세 방향으로 분리된다. 어떤 길을 택해 가느냐에 따라 선택한 사람의 인생은 바뀔 수밖에 없다. 만일 열아홉 살의 이사크 레즈니코프가 원래 계획대로 아이작 록펠러가 됐다면 마흔두 살에 야간경비원으로 일하다가 가슴에 총을 맞았을까? 그렇게 금슬 좋은 스탠리와 로즈가 살면서 점점 금이 가 돈만 아는 유대인 스탠리가 안면 몰수하고 이혼해버리면 외아들이자 작품의 주인공 아치 퍼거슨은 어떤 인생을 살게 될까? 아니, 아니. 그것보다 소년 퍼거슨이 중학교 다니면서 여름방학 때 캠프에 참여했다가, 지금 시대라면 일찌감치 알 수 있었던 만성 심혈관 질환이 닥치는 바람에 어린 나이에 삶을 마칠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일을 기점으로 더없이 친한 야구 친구였던 조지프 앤턴은 더 이상 야구를 비롯한 모든 공놀이를 포기하는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 누가 보장할 수 있나. 그래 어차피 인생은 순간순간 선택하는 일이다.

  오스터가 처음부터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고, 자신이 작품을 구상하면서 여러가지 경우를 감안해 진행하다가 차마 하나의 줄거리로 밀고가기 힘들어 이 경우, 저 경우를 다 함께 작품으로 만들어보자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두번째 경우가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어서 책을 읽으며 불만이 쌓였다가, 아이그, 폴 오스터의 못 말리는 입담에 푹 빠져 며칠 동안 재미있게 읽었다. 이렇게 긴 작품을 읽고 나서, 그게 만일 재미까지 있다면, 조금은 뿌듯한 느낌이 든다. 이 기분 때문에 점심 때 나가 낮술 한 잔 했어도 그리 크게 잘못된 일은 아닐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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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 2024-03-22 1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낮술에 무척 공감합니다 ^^

Falstaff 2024-03-22 15:43   좋아요 0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망고 2024-03-22 1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꺼운 소설인데 그래도 재미있다니 다행입니다 저도 조만간 이 책 읽고 싶어요

Falstaff 2024-03-22 15:44   좋아요 1 | URL
저는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해서 ‘첫빠따‘로 읽었습니다. ㅎㅎㅎ 직접 사기는 돈도 돈이고, 책장에 빈틈도 없어서.... ^^;;
즐기셨으면 좋겠습니다. 오스터가 재미는 확실하니까요.

그레이스 2024-03-25 1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전 리스트때문에 보고싶네요^^

Falstaff 2024-03-25 20:17   좋아요 1 | URL
그죠? 전 두 편을 안 읽었더라고요. 몰 플랜더스하고 메인 스트리트. 누가 썼는지도 모르겠어요. ㅎㅎㅎ
 
요가
에마뉘엘 카레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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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사람이 내가 아는 에마뉘엘 카레르 맞나?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지 유일하게 읽어본 카레르가 <겨울 아이> 또는 <스키 캠프에서 생긴 일>이었으니.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읽다 말고 이름 검색해보니 이 카레르가 그 카레르다. <겨울 아이>는 1995년 작품이고 <요가>는 2020년이다. 프랑스판 위키피디아에서 에마뉘엘 카레르의 저술을 검색하면 <겨울 아이>는 소설Novel로, 21세기 이후 출간한 작품은 “이야기”story로 분류해 놓았다. 그러니까 카레르는 밀레니엄을 기점으로 밀레니엄 이전 BM 시절에는 누가 읽어도 소설을, AM 시절엔 소설이기는 한데 자신의 이야기와 허구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바람에 똑 소리 나게 소설이라고 주장하기에는 조금 켕기는 작품을 주로 썼다. 출판사 ‘열린책들’의 프랑스 소설 핵심 역자인 임호경은 ‘옮긴이의 말’에서 “조금의 가식과 위선도 없이 자신의 발가벗은 삶과 영혼을 송두리째 털어놓은 것 같다”고 했다. 카레르 자신도 작품 속에 스스로 고백하기를 작가에 관한 것은 전부 사실 그대로, 출연하는 사람들이 실명을 허락했을 경우에도 그 사람 그대로, 허락을 하지 않았거나 물어볼 수 없었던 사람들의 경우에는 당연히 가명을 쓰고 사건이나 행위도 각색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니 이 작품 <요가>는 작가의 주변에서 일어난 실제상황에 대한 르포르타주 적 사실과, 등장인물의 소설적 허구가 뒤섞인 기묘한 잡탕의 미각을 느껴야 할 듯.


  에마뉘엘 카레르는 책을 시작하면서 자신이 지난 4년 동안 겪은 일을 쓰겠다고 깔아놓고 시작한다. 그러니까 ① 애초의 목적은 요가에 대한 기분 좋으면서도 세련된 책을 한 권 쓰려고 했으나(1부 ‘울타리’), ② 지하드 테러리즘(2부 ‘1,825일’)과 난민 위기(4부 ‘소년들’) 같은 별로 기분 좋지도 세련되지도 못한 것들을 대면하고, ③ 너무 심각해 넉 달 동안 생탄 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의 우울증을 겪었으며(3부 ‘내 광기의 이야기’) ④ 35년 동안 함께 작업한 편집자를 잃어버린(5부 ‘나는 계속 죽지 않는다’) 것들이다. 카레르가 책의 제목을 <요가>로 했기 때문에 각기 독립된 다섯 개의 이야기에 조금씩 요가에 관련한 내용을 구겨 넣을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 책을 제목처럼 “요가” 또는 요가와 같은 의미이기도 한 “수행”, “명상”, “참선” 또는 “도 닦기”를 기대했다가는, “욕망과 허영 덩어리이고 충동적이며 모순투성이에다가 지질하기도 한” 작가의 쓸데없이 솔직하기만 한 술주정만 듣다가 책을 덮을 것이다. 정말로 이 책을 읽을 분들은 다섯 개로 구성된 부part가 각기 독립되어 서로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하셔야 한다. 세계적으로 이름이 났지만 역자의 의견에 의하면 노벨문학상은 탈 수 없을 거 같은 글 좋은 에마뉘엘 카레르는 그저 자신이 겪은 4년 동안의 굵직한 일들에 관해 쓸 뿐이다.

  그가 작가라는 자유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학교와 가정, 육아, 돈벌이, 은퇴의 사이클을 운행하는 보통 사람들의 행적과 다른 범위에서, 다를 수밖에 없는 인물과 만나고 다른 사고를 한다. 그래서 특별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것만 해도 특별한데 그 위에다 현란한 문장의 분식을 하니 더욱 특별하게 보이는 건 당연한 일. 독자는 분식한 문장을 위해 주머니에서 현금을 꺼내거나, 카드를 내민다. 작가라는 직업인은 평범한 이웃을 현혹하는 인간을 칭하는 단어이니까. 카레르는 1990년 이전부터 명상과 요가 수행을 했다. 동네마다 하나씩 있는 요가 학원에서 배운 게 아니라 권위있는 요가계의 한 명인 아헹가에게 직접 전수받은 파에크 비리아라는 프랑스 요가의 개척자와 중국인 양진밍 박사에게 정통 명상과 태극권, 요가를 습득해 이미 1990년대 초에 ‘자푸’, 우리말식 일본어인 ‘자부동’을 깔고 제대로 수련을 했다고 주장한다. 처음에 이이는 태극권을 익혔다. 중국인들이 새벽마다 도시 광장에 양팔 간격으로 벌려서 흐느적거리며 몸을 움직이는 건강유지법을 TV에서 보신 적 있을 터. 태극권 가운데 소주천이라는 걸 하다가, 작가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신의 거의 유일한 문제가 거추장스럽고도 폭군적인 자아였는데 이걸 조절하기 위해 이제는 요가만 하고 있었다.

  2015년 정월. 작가 개인으로는 거의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드물게 휴대전화와 책, 모두 집에 그대로 두고 가벼운 짐을 꾸려 리옹 역의 분역인 베르시 역에서 라로슈미젠으로 가는 기차에 오르면서 작품은 시작한다. 오늘부터 열흘 동안 휴대전화와 책이 없는 시간으로, 모든 것에서 절연된 시간을 보낼 예정이다. 라로슈미젠에서 내려 다시 셔틀버스를 타고 ‘모르방’이란 곳에 위치한 비파사나 명상원에 도착한다.


  * 비파사나: 여러가지 현상을 관찰하는 직관 명상법. 산스크리트 비파샤나(Vipasayana)를 음역한 말로 의역하여 관(觀), 능견(能見), 정견(正見), 관찰이라고도 한다. 마음을 한 가지 대상에 집중하여 평화를 얻기보다는 여러 현상들을 관조함으로써 통찰력을 얻는 수행법을 말한다. (두산백과)


  그런데 문제는 내가 이런 방면에는 영 관심이 없는 거다. 명상, 도, 수행, 참선 같은 거. 바닥에 매트 깔고 위에다 자부동, 자푸도 깔고, 무릎 연골이 나가거나 말거나 정좌해 앉아 척추를 꼿꼿하게 펴고 고목나무에 꽃 필 때까지, 병 안에 든 새를 어떻게 꺼낼 것인가, 쌀도 안 나오고 밥도 안 나오고, 쌀이나 밥은커녕 라면국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걸 가지고 마음의 평화를 좇는다는 시간 죽이기. 하여간 하루에 열 시간씩 모든 것에서 절연하여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명상이 끝난 시간에도 참여한 사람들끼리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으면서 지내야 하는 곳. 무료 수련회라고 좋아할 일이 아닌 건, 열흘이 지나 수련이 끝난 후에 자신의 형편에 따라 다른 사람의 액수를 모르는 상태에서 기부금을 걷는데, 거기서 과감하게 천원이나 만원짜리 한 장 달랑 낼 수 있나? 침묵의 의무가 있고 고립된 생활을 해야 하며, 열흘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참가자의 방어능력을 저하시켜 좀비로 만드는 불충분한 음식을 제공하는 곳은 세상에 딱 두 군데 존재하니, 하나가 모르방의 비파사나 수련회이며 다른 하나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라고 할 정도다.

  비파사나 센터에서 제일 먼저 하는 건 서약을 받는 일. 센터 밖으로 나가지 않을 것, 안에서도 울타리가 쳐진 길로만 다닐 것, 여성을 위한/남성을 위한 구역이 나뉜 것을 존중할 것, 침묵을 지킬 것, 비언어적 방식으로도 소통하지 않을 것, 시선을 나누는 것도 가급적 피할 것, 문제 발생시 오직 교사에게만 말할 것, 가장 중요한 서약으로, “끝까지 남아 있을 것.”

  그러나 에마뉘엘 카레르는 사흘을 버티고 출소한다. 수련 3일째 밤. 창문을 두드리는 자원봉사자. 그를 따라가 책임자 격인 사내에게 가니 지난 며칠 동안 우리나라, 프랑스에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해서 불렀다는 거였다. 기억하실 것이다. 프랑스의 좌파 풍자 전문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 이 주간지가 이슬람의 창시자인 무함마드를 그려 게재했고, 잡지에 나온 무함마드가 주로 항문과 성기 노출 같은 예외없이 처절한 비아냥의 대상이 되어 무슬림 지하드로부터 협박을 받았다가, 정말로 2015년 1월 7일에 테러리스트들이 잡지사 사무실에 들이닥쳐 총기를 갈겨대는 바람에 편집장 스테판 샤르보니에르를 비롯해 열두 명이 사망하고 다섯 명이 중상을 입는다. 2015년 당시엔 잡지에 실린 무함마드를 볼 수 있었으나 이젠 보기도 쉽지 않다. 봐도 영양가 없으니 보려고 애써 찾지 마시라.

  이때 테러 사건으로 베르나르-마리가 죽어 그들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센터를 나가면서 1부가 끝나고 비교적 자연스럽게 2부, 지하드 테러리즘의 별로 기분 좋지도 세련되지도 않은 이야기로 넘어간다. 이때가 대강 170여 페이지. 앞에서 다섯 부part가 각기 독립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으나 제목을 <요가>로 한 이상 “요가, 명상에 관한 내용을 구겨 넣었다”고 했다시피, 사실상 요가와 명상은 여기서 끝난 얘기다.


  그러니까 전적으로 작가 자신의 경험담을 딱 그대로 노출시킨 것이다. 그리스 섬에 있는 난민수용소 장면은 쥴퓌 피라넬리의 <어부와 아들>을 비롯해 이미 몇 번 읽어본 것이라 인상깊지도 않았고, 자신이 생탄 병원 정신병동에 입원해야 했을 정도의 심각한 조증과 우울증을 경험한 것도 작가 본인한테는 안 된 이야기지만 한두 번 읽은 게 아니다. 조르주 페렉의 작품을 출판한 회사의 사주이자 편집인이 죽은 것과 관련해서, 페렉의 작품을 낸 출판사라서 계약을 맺은 작가도 에마뉘엘 카레르 혼자가 아닌 건 다들 아실 것(<자살>을 쓴 에두아르 르베). 이런 불평은 사실 중요한 게 아니다. 제일 짜증났던 건 이런 이유 때문에 다섯 이야기가 억지를 쓰지 않으면 서로 완전히 다른 이야기라는 거다. 심통이 나서 필요 없는 말까지 보태자면, 혹시 다섯 작품 쓰기가 귀찮거나 버거워 그냥 한 권으로 만든 거 아냐? 아니지 물론. 내가 기대했던 건 한 편의 장편소설이었지, 다섯 이야기를 묶어 쓴 4년 동안 살아온 “자기 이야기”가 아니었던 거다. 내가 카레르를 스토킹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다 읽은 소감은, 글은 좋아 별점을 주면 네 개 정도가 적당하겠지만, 다시 카레르를 찾는 일은 없을 거 같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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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3-21 1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걸 잘 모르겠어요. 원래 소설이란 게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허구와의 만남 뭐 그런거 아닌가요? 그렇담 이 작품도 그냥 소설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약간 거시기하게 분류하네요. 작가가 누군가 했더니 저도 들어 본 작가긴 하네요. 제목이 참 변심한 애인에게 이별통보 받는 것 같네요. 카레르가 알면 상심이 클 것 같아요. ㅎㅎ

Falstaff 2024-03-21 20:20   좋아요 1 | URL
그럼요. 자신의 경험이 들지 않은 작품은 없겠지요. 경험담도 좋고, ˝자전적 소설˝도 좋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그걸 소설로 다시 형상화 시키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아니 에르노도 이제는 안 읽습니다.) 그냥 지난 몇년 간의 경험, 그것도 독립적인 이야기의 재배치를 읽는 건 피하겠다, 카레르는 이런 방식을 철회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안 읽겠다, 하는 것 뿐입지요. 그냥 취향의 문제입니다. ㅎㅎㅎ

종이 2024-03-21 1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 인사드려요. 쓰신 불만이 이해도 되고 동의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저는 평소 카레르의 책을 좋아하는 편이라 이번 책도 그런대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원체 허구와 자신의 현실을 섞어쓰기하는 작가인데 이번 작품은 특히 그런 부분에서 작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편하게 쓴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제 안녕을 고하시지 말고 이 작가가 가장 인정받은 작품인 ‘왕국‘은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저는 ‘왕국‘으로 이 작가를 발견하고 다른 책을 찾아보았거든요. 그냥 ‘왕국‘을 안 보시고 카레르와 헤어지신다니 안타까움에 지나가다 조금 적었습니다.ㅎ 그리고 관심 소설이 겹쳐서 리뷰는 자주 참고하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Falstaff 2024-03-21 22:12   좋아요 1 | URL
답글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겨울 아이>를 괜찮게 읽었습니다. 기대를 갖고 이 책을 읽었는데, 단순하게 이야기해서 그저 제 취향이더라고요. 당연히 분식을 할 수밖에 없는 건 이해하겠는데 그게 마땅하지 않습니다. 저도 이이의 성과는 납득을 하겠더군요. 앞으로 안 읽겠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기회가 닿으면 말씀하신 왕국을 읽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제가 디킨스를 안 읽겠다고 이야기한 횟수도 한 너덧 번 될 겁니다.
 
들끓는 꿈의 바다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 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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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 반 만에 다시 플래너건을 읽는다. 6년 전에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을 인상깊게 읽어 골랐던 책이 <굴드의 물고기 책>이었는데,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이 “굴드”만 나오면 사족을 못 쓰는 경향이 있고 나도 별로 예외가 아니어서 제목만 보고 덥석 물었다가 별로 재미를 못 봤다. <굴드의…>는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플래너건이 태어난 테즈메이니아 섬을 무대로 뭔가 환경 변화에 관해 경종을 울리는 내용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확인하기 위해 다시 뒤져볼 정성까지는 없다.

  오스트레일리아 소설에 생각 외로 이 테즈메이니아를 무대로 한 작품이 많다. 누가 쓴 어떤 작품인지는 딱 떠오르지 않지만 주로 영국에서 추방당해 도착한 범죄자 가운데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다시 범죄를 또 저질러 테즈메이니아의 가혹한 감옥에 갇혀 있다가 뭐 이렇게 저렇게 출소를 하게 되고 나온 김에 어디서 정착을 하고 이런 스토리 라인이 머리 속에서 뱅뱅 돈다.


  이번에 읽은 <들끓는 꿈의 바다>는 2019년에 실제로 있었던 오스트레일리아의 초대형 산불 시기를 뇌수종으로 생을 마감하는 단계에 처한 프랜시스 여사의 죽음의 침상과 비유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의하여 대초원지역의 많은 부분을 산림으로 만들어버렸고, 새롭게 생긴 숲이 자연이 공급할 수 있는 수분보다 더 많은 양의 습기를 소비하여 극도로 건조한 환경이 되어 버렸다. 그러지 않아도 건조한 오스트레일리아 평야에서는 주기적으로 산불이 발생했지만, 나무를 비롯한 생명체도 자연현상에 의한 자연발화를 오히려 자연의 종이 건강해지는 쪽으로 이용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그리하여 주기적인 산불이 다양성을 확대시키는 측면이 있었지만 이제 극도로 건조해진 환경에서 크게 번져버린 산불에는 속수무책, 많은 생명 종이 멸실을 향해 달음박질을 하기 시작한다. 하다못해 인간종도 해변까지 습격해온 산불을 견디지 못하고 소방대의 경종 신호가 울리면 즉시 바닷물로 들어가야 했을 정도였다고. 시드니와 멜버른의 상공엔 산불의 불씨와 연기와 미세먼지가 하루 종일 햇빛을 가렸다. 이런 현상은 테즈메이니아의 남동쪽에 위치한 주도 호바트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다.

  리처드 플래너건은 인간에 의한 환경오염과 온난화, 이상기후로 인간세가 촉진되는 현상을 안타까워한다. 수많은 어류와 유대류와 조류가 멸종되었거나 멸종 직전까지 와 있는 것을 통탄한다.


  그리고 프랜시스. 애칭 프랜시. 프랜시는 호리와의 사이에서 맏딸 애나, 아래로 아들만 셋, 토미, 로니, 터조를 두었다. 아이들 다 괜찮게 성장했다. 이 가운데 둘째 아들 로니가 어려서부터 가장 재능이 있고 여러 방면으로 재능을 증명하며 부모는 물론이고 누나, 형제, 동네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남자 형제들은 버니에 있는 마리스트 파더스 기숙학교에 다녔는데,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총명하고 재능 있는 로니는 집에 돌아와 차고 대들보에 줄을 걸고 목을 매달았다. 로니의 자살 이전에 장남 토미는 후에 로니의 장례미사를 집전할 학교 신부의 사랑을 견디지 못해 열두 살 생일이 지나자 말을 더듬는 증세를 갖고 집에 돌아왔다. 나중에 토미가 말하기를 문제의 신부가 토미를 사랑하다가 로니가 학교에 입학을 하자 로니한테 사랑의 화살을 돌렸단다. 어쨌거나 이제 조금 다급하거나 긴장을 하면 여지없이 말을 더듬는 토미는 자식들 가운데 유일하게 테즈메이니아 섬에 남아 중증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돌보고, 깊은 병에 든 어머니를 부축해 진료를 받으러 다니고, 입원해서는 병실을 지키게 된다. 사회적으로는 비록 실패한 예술가의 딱지를 달았지만, 역시 성공하지 못한 봉급쟁이였던 내가 읽기에는 안분자족 할 줄 아는, 가장 덜 불행한 삶을 영위하는 인물이다. 건축가로 성공해 해외 학회에서 강의 부탁이 쇄도하는 누나 애나, 기업체의 실력 있는 냉혈 협상가 터조한테는 만만한 동생/형이자, 화풀이 상대이자, 아무 심부름이나 시킬 수 있는 하인 대우를 받을지언정.

  그런데 이 가정의 구성원에게는 뇌과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아버지 호리 씨는 비교적 젊은 시절에 치매가 와서 결국 중증 알츠하이머로 생을 마감한다. 재능이 많은 둘째 아들 로니는 틀림없이 우울증이 깊어져 자살을 했을 터이고, 맏아들 토미는 충격에 의하여 말을 더듬는다. 토미의 아들 데이비는 조현병이 있어 주기적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한다. 막내 터조는 소수의 성공한 사람들이 자주 보이는 급한 성격과 고집으로 결정적인 안하무인이 되어 버렸다. 맏누이 애나는 시드니에 살면서 처음엔 한 달, 이어서 두 주일, 나중엔 거의 매주 비행기를 타고 테즈메이니어의 주도 호바트의 로열 호바트 병원에 엄마를 보러 오지만, 문학작품이니까 가능하겠으나 처음엔 손가락이 없어지고, 무릎 관절이 없어지고, 눈이 하나 없어지고, 귀도 없어지는 메타포 적 변용을 겪는다.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학을 졸업했으면서도 여전히 능력있는 엄마 집에서 나가지 않고 하루 종일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는 20대 후반의 아들 거스. 이 아이가 엄마의 돈을 훔치고, 보석도 훔치고, 비싼 가구도 내다 팔고, 심지어 고가의 맥 랩탑도 내다 팔아 마약을 하면서 점차 엄마와 같은 현상인 몸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거스는 도가 심해서 차츰차츰 사라지더니 결국 마우스를 쥔 채 화면에 뜬 가상의 물체에 총격을 가하는 엄지를 포함해 세 손가락만 남는다. “나한테는 애니의 날과 애니가 없는 날 밖에 없는데, 그 중에 애니의 날만 진짜 같아.” 라는 문자를 날리는 동성 연인 메그도 나중에 손이 없어지는 현상이 벌어진다. 세상에 아무도 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신경쓰지도 않는다. 딱 한 명만 빼고. 노랑배도라지앵무의 멸종을 예방하기 위한 프로젝트 책임자이자 테즈메이니아 대학 동물학과 교수이며 선대 가족 거의 전부가 수용소에서 가스가 되어 하늘로 올라간 유대인 리사 샨. 그러나 그건 애나의 생각일 뿐이었다. 리사 샨은 애나를 “솔직히 좀 이상한 여자였다”고 기억할 뿐이니까.


  남매의 어머니 프랜시가 쓰러졌다. 새벽 두 시에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가 검사를 해보았다. 치매에다가 파킨슨 의심. 날이 밝은 후에 다시 정밀검사를 해보니 다행히 치매도 아니고 파킨슨도 아니었다. 뇌수종. 뇌에 물이 고인 현상이다. 관을 삽입해 물을 빼는 시술을 한 후 정상을 회복해 3년이 흘렀다. 이번엔 서서히 진행하는 낮은 등급의 암이 찾아왔다. 비호자킨 림프종. 비교적 순한 암이라 항암치료를 받았고, 이후에 놀라운 효과를 보였지만 프랜시 자신은 스스로를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가장 건강한 노인 시체”라고 자조했다. 이후 5년이 더 흐르고 어머니는 86세가 됐다. 그동안 애나는 건축가로 명성을 떨치며 국내에서 여러 개의 건축상을, 해외에서도 세계적인 상을 받는 명사가 됐고 아름다운 여성과 새로운 커플을 이루었으며, 브리즈번에서 사는 막내 역시 세계를 누비며 각종 비즈니스 계약을 성공적이고 냉혹하게 체결하는 해결사로 이름을 드높였다.

  이제 어머니 프랜시에게 찾아온 것은 뇌출혈. 입원한 어머니는 조금 호조를 보이다 그만 낙상해 갈비뼈 두개가 부러졌으며, 의사들은 가족과 상담을 요청했다. 이제 괜찮은 줄 알았던 애나와 터조는 갑자기 일정을 취소하고 비행기를 탔고, 이들에게 의사들은 프랜시의 존엄한 죽음을 권했다. 세상에. 그렇게 정정하던 어머니한테 존엄한 죽음이라니. 대안은 없나요? 시술/수술 그리고 노인에게는 권하지 않는 신장투석 등등. 성공하지 못한 화가 토미의 의견은 전혀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한다. 애나와 터조 입장에서는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어서 무조건 치료를 주장하고, 관철시킨다. 온갖 연줄을 동원해서. 그리하여 어머니 프랜시는 길고, 길고, 너무도 긴 고통의 시간을 맞게 되고, 자식들은……. 세상이 그런 것이지. 갈 때는 보내야지. 다 산 것들의 욕심일 뿐.

  어머니 프랜시의 죽음을 향하는 고통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생명체 멸종 상황을 작가 리차드 플래너건은 연관시키려 애쓴다. 이미 멸종해버린 오스트레일리아 유대 늑대, 유대 너구리, 이제 몇 개체 남지 않은 노랑배도라지앵무새 등등.


  다 좋다. 테즈메이니아가 고향인 작가 입장에서 그곳의 동물들이 멸종하고, 멸종해가는 현상을 고발하는 건 어쩌면 의무일 수도 있다. 멸종의 직접적 원인인 인간들의 행위에 대한 고발도, 여전히 환경파괴를 동반하는 개발을 옹호하는 세계의 정치가들을 규탄하는 것도. 그런데 내내 못마땅했던 것은, 유대 늑대와 유대 너구리 같은 종의 멸종이 그렇게 비탄스럽고, 노랑배도라지앵무의 개체수 감소에 조바심을 치는 반면, 테즈메이니아 선주민을 멸종시킨 리처드 플래너건의 동족들에 대한 규탄은 왜 없는가 하는 것 때문이었다. 너희 잉글랜드에서 온 백인종들은 테즈메이니아에서 선주민 완전 멸종의 위업을 이루었잖은가 말이지. 어차피 호모 사피엔스, 십만 년 정도 살았으면 제법 살았어. 다른 종이 나와 대체할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걸? 인간세가 인간도 멸종시키겠다는데 뭐가 그리 중헌 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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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없는 주검 서문문고 104
사르트르 / 서문당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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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사르트르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저작을 많이 읽어본 건 아니지만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식인, 심지어 “사르트르가 20세기 자체”였다는 영광스러운 명성을 누린다는 건 어디서 읽었다. 그러나 인연이 아니어서 그랬는지 도무지 친해지지 않더라는 것. 《무덤 없는 주검》도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더러운 손>과 더불어 작년에 사놓고 그저 장식처럼 책장에만 꽂혀 있었다. 어쩌나, 도무지 손이 안 가는 걸. 이번 설 명절 때 내가 다니는 도서관도 나흘 연속 휴관이라 집에 머물면서 백화수복에 명태전 안주해서 떡만둣국 먹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연휴가 하도 지루해서 엣다 모르겠다, 핑계김에 읽었다. <구토>, <말>, 지난 세기 새파랗게 젊은 시절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 같은 것들이 와닿지 않은 건 이미 지난 일이니 굳이 기억할 필요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번에도 애초에 기대감은 하나 없이 마치 해야 할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첫 장을 열었다는 걸 이야기 해야겠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 《무덤 없는 주검》이 얼마나 재미있던지. 사르트르라고 하면 지구행성의 대표 실존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재작년에 읽은 시몬 드 보부아르의 <레 망다랭>은 내가 읽은 가장 재미있는 실존주의 작품이었다고, 우리나라 작품으로 국한하면 역시 장용학의 <원형의 전설>이 제일 인상깊은 실존주의 소설이었다고 믿고 있는데, 이제 사르트르의 <무덤 없는 주검>이 새롭게 가장 설득력 있는 실존주의 희곡이라 주장할 것 같다. “것 같다”라 하는 이유는 사르트르의 다른 극작품을 더 읽을 것이 틀림없으며, 이 과정에서 다른 실존주의적 극작품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레 망다랭>, <무덤 없는 주검>, 그리고 <원형의 전설>.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인간의 실존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전쟁을 겪은 세대에서 발현했다는 거 아닐까. 삶을 영위하기 위한 행위로의 실존이 가장 우선하는 환경이 전쟁일 터이니. <무덤 없는 주검>에서 사르트르는 전쟁 가운데 가장 극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2차 세계대전 중 레지스탕스와 독일 협력자들의 갈등을 그렸다.

  필리프 페탱을 수반으로 하는 비시 괴뢰정부가 점령한 농촌 지역의 학교 건물. 상부 레지스탕스는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 도시를 점령하라고 명령을 내렸고, 장이 이끄는 저항군은 도시를 습격했으나 어쩌면 당연하게 작전에 실패하여 열다섯 살 소년 프랑수아와 프랑수아의 누나이자 장의 연인인 뤼시, 서른 살 근방의 대원 소르비에와 앙리, 그리스 출신의 오십 대 카노리가 비시 프랑스측 수비대에게 포로로 잡혀 심문을 당하기 직전이다. 그리스인 카노리는 취조실에 이미 한 번 끌려가 지역 저항군 지도자 장의 소재지를 대라며 일차 고문을 당했다. 카노리는 얻어맞고 기구를 이용해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버텼다. 이들은 모두 장의 소재를 알지 못한다. 고통을 견디다 못하면 결국 애먼 사람의 이름을 댈 수밖에 없다. 알지도 못하는 정보를 자백하라고 고통을 받는 일은 이들의 인간성을 말살시킨다. 포로들은 고문을 당하며 비명을 지르는 행위가 자신의 인간성을 휘발시키는 일이라고도 생각한다. 어린 소년 프랑수아는 고통을 받고 싶지도 않고 거의 틀림없이 고백을 하건 말건 내일 밤에 있을 총살을 당하고도 싶지 않다. 소년은 살고 싶은 나날들이 너무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으니까.

  비시 수비대는 먼저 소르비에를 데려가 폭행한다. 소비에르는 당연히 비명을 질렀으며 녹초가 된 상태로 돌아온다. 조금 후 열리는 감방 문. 다들 수갑을 차고 있는 상태인데 하다못해 포승으로 묶이지 않은 장이 감방 안으로 들어온다. 그는 인근 마을에 친구가 있어서 친구의 동네에 거주하는 청년이라고 속이고 소재를 확인하는 대로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 그러니 이제 갇힌 자들은 장의 소재를 알게 됐고, 고통/고문을 견딜 확실한 이유를 갖게 된 거다. 장이 들어온 후에도 앙리가 취조실에 끌려가 수비대원들과 언쟁도 하고 두드려 맞아 뼈가 상해 돌아온다. 이를 고통스럽게 인식하는 지휘자 장.

  당연히 장도 자신의 소재를 감추기 위하여 고문당하고 있는 대원들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이들 포로들은 장과 이런 저런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드디어 장이 말한다.


  “좋아! 좋아! 그대로 계속해. 자네에겐 모든 권리가 있어. 나를 괴롭힐 권리마저 자네에겐 있네. 자넨 앞질러 지불했지. 자네들은 자기 자신을 믿고 있어. 마음의 안도감을 얻기 위해서는 육체의 고통을 받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나? 자네는 알고 있나, 내가 자네들보다 더 불행하다는 것을?”


  나는 이 대사가 사르트르의 믿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장 죽고 사는 문제, 차라리 죽음이 축복 같은 고통을 초래하는 고문을 바로 앞에 둔 포로들에 비해 그들의 지도자였던 장의 양심적 고통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강조하고 있다고 읽었다. 실제로 한 번 고문을 당했던 소르비에는 다시 끌려가 손톱을 뽑아버리겠다고 하니, 이제는 알고 있는 장의 소재를 자백하겠노라 하더니 잠깐 방심하던 수비대의 허를 찔러 창문에서 뛰어내려 두개골이 깨져 즉사하고 만다. 양심의 고통이 죽음의 고통보다 더 불행하다고? 웃기는 이야기다. 우리는 지금도 수시로 이 비슷한 이야기를 듣고 산다. 소위 말하는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는 헛소리.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자기는 책임질 의사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이 부분이 내가 느낀 <무덤 없는 주검>에서 가장 흥미로웠다. 물론 절정은 살고 싶은 마음이 강한 프랑수아 소년이 자신은 고문을 당할 의사도 없고, 그걸 견딜 의지도 없어서 장에 대해 자백하겠다는 의사를 비치고, 이미 끌려가 고문 대신 집단으로 강간을 당해 삶의 의지가 사라진 누나 뤼시의 허락 아래 앙리가 소년의 목을 졸라 살해하는 장면이겠지만, 그럼에도 실존 문제는 이 언쟁 장면이 압권이다.

  뒤늦게 장은 아이디어를 내, 가까운 곳에 있는 세르바즈 동굴 옆에서 총을 맞아 죽은 피에르의 주머니에 자신의 신분증을 넣어 무기를 보관하는 동굴 속으로 끌어 놓을 테니 그곳에 있다고 자백하라 권한다. 진즉에 이런 아이디어를 냈더라면 소르비에도, 프랑수아 소년도 죽지 않았을 테지만 사람이란, 삶이란 그런 것이다. 좋은 생각은 절대로 적시에 떠오르지 않는 것. 그리고 정말로 짧은 시간이 지난 후 장은 풀려난다. 이제 포로들은 적당한 시기를 골라 가짜 장의 시체가 든 세르바즈 동굴의 위치만 자백하면 적어도 곱게 죽을 수 있게 된 것.


  이번엔 비시 프랑스의 수비대원을 보자. 란드뤼를 대장으로 하고 크로셰, 페르렌, 코르비에, 이렇게 구성된 요원들 모두 프랑스인이다. 프랑스인이 프랑스인을 고문하는 것이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지 않았을까? 정답은, 아마 그럴 걸? 느끼지 않았을 걸? 사르트르는 이 가운데 단 한 명, 정식 군인이나 레지스탕스 대원들보다 위계가 확실하지 않은 비시 수비대의 대장인 란드뤼 혼자 만일 이들이 자백을 하면 즉결처분을 하지 않고 독일군에 넘겨 소금광산, 염갱鹽坑으로 보내 강제노역을 하게 만들겠다고 주장한다. 네 명 가운데 한 명이니 25퍼센트? 아닐 걸. 원래 침략자보다 더 악랄하게 현지인을 괴롭히는 것이 현지에서 침략자들에게 부역하는 인간들이다. 이건 동서와 고금에서 무수하게 증명이 된 것. 다만 이들은 레지스탕스 대원들과 달리 전쟁 전 프랑스에 대하여 대단히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가난 때문에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고, 적당한 벌이도 하지 못하고 부랑인처럼 떠돌거나 길거리 왈패 출신들. 이들은 의과대학을 다니다 전쟁을 만나 저항군에 들어간 앙리의 팔목 뼈를 부러뜨려 버린다. 그러나 자신들의 세월도 얼마 남지 않은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결국 자기들의 행위에 걸맞은 보복을 당할 것이라는 것도 분명하게 알고 있지만 아직 실감하지는 못한다.

  이들 네 명의 악당들은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포로 세 명을 한꺼번에 불러 자백해서 생명을 건지라고 권하고, 대장 란드뤼의 맹세를 들은 포로 가운데 가장 연장자인 그리스 사람 카노리가 그르노불가의 42번째 이정표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숲속으로 50미터 쯤 울창한 숲 속에 레지스탕스가 쓸 무기를 보관한 세르바즈 동굴을 알려준다.

  나는 결말 딱 하나만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고, 사르트르는 여기에 하나를 보태고 싶었을 것이다.


  이 책 《무덤 없는 주검》은 표제작과 <존경 할만한 창부> 이렇게 두 편이 실려 있다. <존경 할만한 창부>는 미국 남부에 있는 도시의 인종차별에 관한 드라마이다. 성매매를 하는 리치에는 애초에 죄가 없는 흑인을 변호하기로 마음을 먹지만 결국을 사회 분위기와 습관에 굴복하는 이야기라는 정도만 소개한다.

  이 책은 서문문고 104번으로 1974년에 초판, 1997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역자 최성민 전 이화여대 불문과 교수가 1920년대 중후반에서 30년대 초반에 태어나 오래 전에 작고한 양반이다. 그래서 번역체가 젊은 분들의 경우엔 읽기 어색한 부분이 간혹 눈에 띄겠지만 책값이 정가 5천원, 할인가 4천5백원, 최고의 가성비를 즐길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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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자 거장의 클래식 1
바이셴융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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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별은 과하고. 4별은 아쉽다. 퀴어 소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소, 사랑, 인물 등 새삼스러운 건 없다. 동양적 가족 관계, 특히 부자간 갈등이 절묘한 MSG 역할을 해 시간 내 읽어볼 만함. 제목은 원래대로 <얼孼자>가 좋았을 텐데. 미묘하게 다른 뉘앙스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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