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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난일기 - 서구와 인디언 문명의 충격적 만남 ㅣ 서양문학의 향기 4
카베사 데 바카 지음, 송상기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4년 4월
평점 :
이름이 재미나다. 카베사 데 바카. 설마 내가 스페인 말을 아는 건 아니고, 책 뒤편 역자 해설에 써 있기를 '카베사 데 바카'를 우리 말로 하면 '암소 대가리'란다. 그게 성姓이다. 문득 생각나는 서양신화. 일찌기 크레타의 미노스 왕의 왕비로 미노스와의 사이에 아리아드네, 데우칼리온 등을 낳은 정숙했던 왕비 파시파에. 엉뚱하게 남편 미노스가 포세이돈한테 괘씸죄에 걸리는 바람에 황소한테 홀랑 반해 가짜 암소 탈을 쓰고 그 속에 들어가 황소와 교접해 황소대가리를 한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낳았으니 여기서 바로 암소 탈의 대가리를 일컫는 거랑 어째 좀 비슷한데, 알겠습니다. 억지로 얘기 만들지 않고 (오늘 낮술 한 병 하려 휴가 냈거든요)주방에 가서 냉수 한 사발 마시고 정신 차리겠습니다.
이거, 이를테면 지리학적 보고다. 작가 알바르 누녜스 카베사 데 바카가 16세기 초반, 조선에선 중종반정에 성공해서 바야흐로 신권정치가 판을 치기 시작해 백성들에 대한 무한수탈이 시작되고 정부에선 그깟 백성은 전혀 관심없이 정쟁에만 온 정력을 기울이기 시작하던 무렵, 스페인의 탐험가들은 그리 크지도 않은 배에 귀족과 군인과 수도사와 상인과 공증인과 학자와 말horse을 태우고 화승총과 대포로 무장한 채 본격적인 아메리카 수탈에 나서기 시작했다. 물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찾아서가 아니라 금과 보석이 넘쳐나는 엘도라도를 찾기 위해.
1527년 6월 17일, 스페인의 판필로 데 나르바에스 제독 역시 스페인 왕의 명령을 받들어 당시의 지명으로 플로리다, 지금의 플로리다부터 태평양에 이르는 미국 남부와 멕시코 전역을 "정복하고 통치하기 위하여" "배 다섯 척과 6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이끌고 나갔다." (5쪽)
쉽게 얘기해서 본격적인 대항해와 식민지 개척 시대가 열리는 과정이다. 대서양엔 프랑스 해적, 영국해적, 이탈리아 해적, 그리스 해적, 선장 잭 스패로우가 이끄는 이름도 떠르르한 캐러비안의 해적 등이 드글거렸고, 해적들은 쨉도 아니게 만들 위대한 자연의 심통, 겨울 폭풍까지 아 대항해의 곤고함도 그리 가비얍지만은 아니했던 거디다. 이렇게 곤고한 항해로 수탈 당하고, 거덜이 나고, 숱하게 죽어나간 채 아메리카에 도착했으니 어느 정도는 눈깔에 뵈는 것도 없긴 했을 건데, 하이고, 기독교인을 자청한 이들이 아메리카에 발을 딛고 막강한 화력을 앞세워 원주민들에게 강요했던 건 예수를 믿으라는 거하고, 금과 보석을 찾는데 무료로 노동력을 제공하라는 강요,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금과 보석에 대한 무자비한 수탈과 이에 수반한 학살, 거기다가 자비롭게도 드런 세상 조금이라도 빨리 하직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유럽형 전염병을 선물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원주민들은 이 책에서도 나오듯이 산으로 산으로 또 산으로 그들의 삶의 터를 옮기고 산 꼭대기에서 위대한 건축물 피라미드와 마추픽추를 건설했던 거 아니냐.
이 책은 그런데 스페인의 만행보다도, 그 가운데 책의 제목과 같이 아메리카 원시림 속에서 조난 당한 사람들의 일기를 쓰고 있다. 위에서 말한 600여 명의 정복자 또는 정복하려고 했던 이들 가운데 겨우 세 명이 살아남는데 그중의 하나가 이 책을 쓴 알바르 누녜스 카베사 데 바카다. 그를 비롯한 생존자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노예로 생활하다가 병들어 죽어가는 원주민 이마빡에다 기독교식 성호를 그어주게 되고, 성호를 긋자마자 병자의 병이 금새 낫는 관계로 졸지에 주술사로 고속 승진도 하고, 입을 것이 없어 홀라당 벗고 다니기도 하고, 죽은 백인 동료들의 고기를 육포로 만들어 주린 배를 채워가며 꾸역꾸역 6년이던가 7년이던가를 아메리카 원시림 속에서 버텨낸다. 그러다가 어떻게 하염없이 가다보니까 어? 태평양 연안까지 걸었고 거기엔 정말 전형적이고 규범적인 스페인 식민주의자, 즉 살인마 기독교도들가 득시글해서 그들에게 구조되어 다시 겨울 폭풍과 해적들의 위협을 뚫고 스페인으로 귀향하는 거까지.
읽을 만하시겠지? 근데, 물론 읽을 만하고 재밌기도 한데 전적으로 내 취향으론, 알고는 안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