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월기
나카지마 아쓰시 지음, 김영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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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애하는 서재 친구 잠*냥 님의 서재에 놀러 갔다가 필 받아 믿고 산 책. 나까지마 아쓰시, 라는 이름의 약골 일본인이 쓴 건데, 이 사람이 동경에서 태어났지만 열한 살 때 한문교사인 아빠를 따라 조선으로 넘어와 6년간 용산 소학교, 경성중학교를 다닌 이력이 있다. 그러니까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조선에서 보낸 셈. 소년기는 누구에게나 평생에 걸쳐 아련한 쓰라림, 해진 상처, 누추한 그리움, 이런 류의 후회, 감상, 이런 것들을 다 합쳐 추억을 각인하게 되는데 나까지마도 마찬가지로 평생, 그래봤자 33년에 불과했지만 식민지 조선을 추억이란 이름으로 가지고 있었나보다.

 이 책은 아홉편의 중국 고전 이야기를 각색한 단편과 세 편의 조선을 배경으로 하는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 고전 이야기 가운데 <산월기>가 그의 대표작으로 전후 일본 교과서에 주구장창 실린다는 작품이다. 단편이라 자세한 소개는 좀 힘들지만 수재 정도의 재주가 있으나 성질이 드러워 울뚝불뚝 열받기 잘하는 중국의 서생이 어느날 자기의 성질대로 범으로 변신해서 지나가는 과객들을 잡아먹는 신세가 됐다는 얘긴데 뭐에 관한 교훈이기에 교과서에 실리느냐 하는 건 직접 읽어보시고 판단하기 바란다. 뭐 별로 특별한 것도 없다.

 오히려 내가 재미나게 읽은 건 두번째 단편 <이릉>이었다. 이릉이 누구냐하면, 장벽 저편에서 흉노족과 장렬하게 싸우다 포로가 되어 흉노에게 귀순한 장군. 위대한 시대를 만들었지만 엄혹하기 짝이 없기도 했던 한 무제 앞에서 이릉을 변호했다가 잘 드는 칼로 불알 두쪽을 싹둑 잘라버리는 궁형을 당했던 사마천. 기억나시지? 나까지마는 여기에다 중국의 전설적 충신으로 이름 높은 소무蘇武를 등장시켜 뜻을 굽히고 흉노에게 협력했던 이릉과 비교하는데, 이건 역사적 사실이다.

 

 선우는 투항한 한나라 장수 이릉을 소무에게 보내 회유토록 했다. "당신은 끝내 한나라로 돌아갈 수 없소. 이렇게 황량한 땅에서 고생을 자초한들 당신의 충성어린 일편단심을 그 누가 볼 수 있겠소. 인생이란 아침이슬과 같은 것이오. 어찌하여 이렇게 오래도록 산고생을 자초한다 말이요" 이릉은 여러 날 술자리를 같이하면서 투항을 권유했으나 소무는 끝내 거절했다.
 "아! 참으로 의로운 대장부로다" 이릉은 눈물을 흘리면서 탄식했다. (출처: 경북일보 2016년 2월 21일)


 <산월기> 이야기는 중국의 어떤 옛이야기를 차용했는지 몰랐어도 이릉과 소무에 관한 일화는 알고 있었는바, 알고 있는 이야기를 다시 풀어서 소설적으로 만들어놨으니 당연히 더 재미있었기도 하겠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흔히 이야기되는 자로에 관한 소설 <제자>도 흥미로왔고, 뭐 다 재미있었는데, 왜 하필이면 이왕 있었던 이야기나 역사적 사실을 소설로 만들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이미 일본의 옛 이야기들은 이즈미 교카나 아쿠타가와 같은 이가 <고야산 스님>이나 <라쇼몽> 같이 다 써먹어서 자신도 그렇게 할 수 있는데, 하다가 일본의 설화 대신 중국의 설화나 역사적 사실을 택한 건 아니었을까? 책 속에 나와있는 작가 소개를 보면, 1942년 부터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서른 세살에 죽었다고 하니, 그의 모든 작품은 1942년에 발표한 것이다. 1909년 생이니까. 일본 소설판의 경향을 몰라서 하는 얘긴데, 중국 설화, 역사 이야기는 젊은 나까지마가 그 중에서도 젊은 시절에 썼던 거 아니었을까?

 이에 반해 식민지 조선을 무대로 한 세 작품엔 <산월기>보다 (적어도 내 눈엔) 더 세련된 분위기가 나는데 <순사가 있는 풍경- 1923년의 한 스케치>나 <풀장 옆에서> 같은 건 이 젊은 작가가 더 훌륭한 성과를 위하여 좀 오래 살았다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범 사냥>도 마음에 든 작품이었음은 물론이다.

 굳이 이거 한 번 읽어보시라 추천까지는 못해도 좋은 작품들이 실려있는 단편집이란 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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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4-14 1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하. 이 책이었군요. ㅎㅎ 저도 <제자> 읽고 자로라는 인물에 대해서 더 궁금해지더라고요.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 식민지 조선에서 겪은 일을 배경으로 쓴 단편들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좀 더 살았다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더라고요.

Falstaff 2017-04-14 11:13   좋아요 1 | URL
덕분에 작가 한 명을 알게 됐습니다.
옙. 전 조선 배경의 단편들이 더 좋더라고요. 좀 더 숙성된 거 같은 느낌이랄까, 뭐 숙성이라야 어차피 젊어서 간 사람이니까 어째 좀 이상하긴 합니다만. ㅎㅎㅎ
 
제7의 십자가 1 세계문학의 숲 33
안나 제거스 지음, 김숙희 옮김 / 시공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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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안나 제거스가 썼다는 거 딱 하나만 가지고 고른 책. <통과비자>에서 날마다, 당장 파시스트 나치에 의해 점령당할 거 같은 마르세이유를 떠날 수 있는 유일한 날이 아닐까, 하는 강박관념에 휩싸인 유대인, 공산주의자, 동성애자, 유색인종 등 압박 받을 사람들이 입국비자, 출국비자, 통과비자, 배표, 신분증, (수용소) 출소 증명서 등등 모든 서류의 구속 상태에서 허덕이는 모습을 잘 그려내 나로 하여금 별 망설임 없이 두 권으로 된 <제 7의 십자가>를 구입해 읽게 만들었다.

 이 책, 재미있다. 일곱번 째 십자가란, 수용소 3동 막사 앞에 플라타너스가 죽 서있었다. 근데 전직이 하수도 뚫어주는 직업의 마스터였던 수용소장 파렌베르크가 명령을 내려 줄지어 선 나무를 바라볼 때 가운데 일곱 그루의 수관을 벗겨내고 어깨 높이에 가로로 판자를 대 놓았던 거다. 수관을 벗긴다는 건, 쉬운 얘기로 껍질을 긁어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나무를 말려 죽인다는 뜻이고, 나무의 외피를 반질반질하게 만들어놨다는 얘기도 된다. 거기다가 가로 판자를 대놨으니 얼핏 보면 십자가 비슷하게 됐다는 거.

 일찌감치 나치 당에 가입해 히틀러가 집권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파렌베르크의 주특기가 수용소에 입소한 정치범, 공산주의자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동시에 자기 힘이 다 빠질 때까지 1번 부터 999번 까지 무차별적으로 그리고 무참하게 두드려 패는 거. 입소만 했다하면 첫날부터 죄수들에게 가차없이 고문을 자행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여죄, 공범, 잔당, 조직 등을 알아내는 일 등이었는데, 고문 만큼은 파렌베르크 스스로 하지 않고 대신 자기 절친 수하, 마음 내키는대로 신경질 부리고, 눈이 뒤집혀라 고함을 지르고, 막되먹은 쌍욕을 해대도 묵묵히 듣고 있을 수 있는 심복에게 맡기기는 했다. 이 정도면 가히 지옥 수준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더구나 당시엔 전쟁 터지면 시내 한 가운데 민간인 밀집지역에다가 폭탄 떨어뜨려도 전쟁범죄로 생각하지 않을 시기였으니 수용소에서 한 백명 정도는 고문하다가, 아니 말은 바로 하자, 고문 받다가 죽어버려도 어느 누구 눈껍데기 하나 꿈벅거리지 않았다. 근데 사람이란 족속의 특징은 생각할 줄 안다는 거. 어느날 새벽, 죄수 가운데 깡다구 센 인간 일곱명이 모여 삽자루로 경비병의 뒤통수를 후려친 다음 유유히 (솔직히 말하자면 벌벌 떨리는 몸뚱이를 건사하지도 못하고 두 발이 지상 10 센티미터 위를 날듯) 도망쳐버렸다. 딴 건 다 관두고 이 사건을 수용소장 파렌베르크 입장에서 고찰하자면,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시절부터 쌓아온 투사로서의 명성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수용소장으로 시작해 거대 나치 당에서 서너 계단 도움닫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졸지에 사라져버렸으며, 더 나아가 명성이나 승차는커녕 하찮은 수용소장 자리마저 보전할 수 없을 확률이 거의 98 퍼센트라는 의미였다. 파렌베르크는 100 빼기 98 해서 2 퍼센트의 확률을 붙잡기 위해 탈주범 일곱 명을 일주일 안에 체포하겠다고 선언하고, 잡혀오는 족족 플라타너스를 잘라 만든 십자가에 묶어놓겠다는 의지를 수용소 잡범들에게 과시하는 한편 자신 스스로도 정말로 밤에 잠 한 잠 자지 않고 그들이 체포됐다는 전화를 받기 위해 긴긴 밤을 하얗고 하얗게 새우고 있던 거디었다.

 소설의 제목이 제 7의 십자가. 마지막 십자가란 뜻이다. 그럼 당연히 탈주범 일곱명 가운데 여섯명은 일주일 안에 체포됐거나 사살됐거나 하여간 죽음을 당했다는 의미. 어떻게 죽었고 어떻게 잡혔냐고? 에이, 돈 주고 사서 읽어본 본전생각이 나서 일러드리지 못하겠다. 전부 다 드라마틱한 도주에 이은 극적인 죽음 혹은 체포……는 아니란 것만 알려드린다.

 나머지 한 명. 그 사람 이름이 게오르크.

 책은 게오르크 때문에 곤경을 당하는 그의 아내, 아내의 친정아빠, 친구(들), 직장동료(들), 옛 동지(들), 아무 관계 없는 사람들, 지나가면서 우연히 옷깃이 스친 사람(들), 그러나 무엇보다, 누구보다 게오르크의 무지막지한 난관을 그리고 있다. 그는 어떻게 될까. 화끈하게 가르쳐 드린다.

 책의 8쪽에 요즘 소설치고 굉장히 예외적으로 등장인물이 '주요 인물들'이란 제목으로 나온다. 주요 인물들 가운데 마지막 네번째 인물이 크레스 박사, 크레스 부인. 뭐라 써있냐 하면 "게오르크의 탈출을 돕는 화학자와 그의 아내". 이를 보고 아예 다 가르쳐주네, 라고 불평할 이유 없다. 마지막 두 명을 보면 이렇게 써있으니까.

 술집 여종업원 : 게오르크의 국외 탈출 전날 잠자리 제공

 네덜란드 선원 : 게오르크의 국외 탈출을 돕는 이

 난 깜짝 놀랐다. 술집 여종업원이 누구길래 게오르크가 국외 탈출을 하기 전에 산과 들로 나가 여종업원이 손수 날아다니는 잠자리를 잡아 몸보신을 시켰나 싶어서. 두 권을 다 읽어가기 바로 전에야 날아다니는 잠자리를 제공했다는 게 아니라 한 번 했다는 얘기구나, 난 형광등이구나 하고 반성했다. 등장인물만 보면 스토리는 끝난다.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안나 제거스의 헌사 "이 책을 작고한, 그리고 생존해 있는 독일의 반反 파시스트들에게 바친다"에 어울리게 독일에서 있었던 파시스트의 준동사와 반파시즘 운동에 관해 '문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하는 역작이다. 이 책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에 대한 송가이며 죽음의 위협 앞에서 공고했던 인간에 대한 찬사이다. 청년기를 시작하는 모든 스무살에게 권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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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4-13 1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에 <통과비자> 말씀하신 것 보고 최근에 사두었는데, 그거 다 읽고 나면 이것도 읽어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Falstaff 2017-04-13 12:41   좋아요 0 | URL
감사하긴요. 저도 잠자냥 님 쓰신 거 보고 따라 사서 읽은 책, 낼, 다음 주 월욜 이틀에 걸쳐 독후감 등장하는 걸요. ㅋㅋㅋ
재미는 <통과비자> 보다 이 책이 훨씬 좋습니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0
조르주 베르나노스 지음, 정영란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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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르주 베르나노스가 쓴 <사탄의 태양 아래>를 읽고는 말입니다, 제목을 먼저 좀 보세요, 사탄의 태양 아래, 세기말의 음산한 풍광이 팍 떠오르면서 진짜로 흥미진진한 잔혹, 엽기 르와느를 기대했더란 거거든요. 근데 읽어보니 우와 세상에나, 그렇게도 진지한 종교소설이 있을 수 있는지, 스스스로 고행을 달게 행하는 수도사들, 이 우울하고 근엄하고 진지하고 경건하고 성스런 수사들 보면서 혹시 얘네들 이거 완전 피학성 성애자들 아냐? 이런 생각까지 했다니까요. 자기 몸에다가 얇고 질긴 철사를 꽁꽁 감고 다니는 것도 모자라 시간 날 때마다 채찍으로 자기 등짝, 허벅지, 가슴, 배를 힘껏 갈기는 행위. 이거 정말 기독교의 하느님이 저 구름 위에 있다면 말씀입죠, 정말 그분께서 자기 자식들이 스스로 이런 고행을 받는 걸 보고 좋아할까요? 아직도 진행중인 바르셀로나의 가우디 성당. 세상의 다른 구석에선 (주로 피부색 진한 인종들이) 처절하게 굶어죽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려무비하게 천상을 향해 오늘도 솟구치고 있는 건축물을 기독교란 종교의 하느님이 보면서 즐거워 하겠습니까? 600년에 걸쳐 당대 인류의 모든 화려함으로 장식했던 쾰른 성당의 고딕 첨탑을 보며, 너희들이 나를 위하야 집을 지어 바치니 내가 흡족하더라, 라고 했겠습니까? 가우디나 쾰른 성당의 차디찬 바닥에 납짝 엎드려 이마빡을 댄 수사들의 고독, 그가 엎드린 한 평 또는 두 평을 위해 그는 자기 몸에 몇 차례나 채찍질을 했을까요. 이런 삿되고 잡스럽고 지옥의 유황불에 빠질 만한 생각이 마구 돋아 다시는 조르주 베르나노스를 읽지 않겠다고 각오를 했었는데 어디 세상 살이가 그런가요. 그의 다른 책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를 고르고는 이거 또 지독한 수행과 고행과 신의 유무에 관한 의심 뭐 이딴 거 나오지 않을까, 심히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거, 숨기지 않겠습니다.

 아니나 다르겠습니까. 첫장을 넘기면 제일 먼저 나오는 장면. 사람들이 우연히 만났는데 만일 그들이 공교롭게도 둘 다 천주교 신자라면 서로 제일 먼저 물어보는 것 가운데 하나가 이렇습니다.

 "본당이 어디세요?"

 만일 제가 이런 질문을 받았다면, 본당? 본당? 분당은 알겠는데 본당이라니. 혹시 본관을 얘기하는 거 아냐? 이렇게 짐작해서 분명히 이렇게 대답했을 겁니다.

 "예, 경주 김갑니다."

 가톨릭 신자들한테는 본당이라는 것이 뭐 내 식대로 얘기하자면, 마음의 고향과 비슷한가 봅니다. 누구는 미아리 텍사스가 마음의 고향이라고 하고, 누군 신도림 초등학교가 마음의 고향이라고 하던데 그런 것들 보다는 "쇤네 본당은 공주 중동성당이구먼요." 또는 "전 강원도 영월성당입니다."라고 하는 게 보기도 좋고, 의미도 있고, 듣기도 좋고 뭐든지 다 좋군요. 하필이면 공주의 중동성당이고 영월성당이냐고요? 결혼식 구경하느라고 가 본 곳들입니다. 뛰어봤자 벼룩이지요 뭐, 헤헤헤.

 하여간 책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본당 운운하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당연히 책 제목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를 만들기 위해선 무엇보다 먼저 시골 신부를 만들어야 할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하여 책 앞대가리에 원래부터, 어릴적부터 없이 살다가 머리 하나 좋아 공부 잘해 신부가 된 경건한 젊은 사제가 시골 본당의 담임신부로 부임해오는 걸로 시작하는 것이지요.

 제일 위에서 얘기했다시피 <사탄의 태양 아래>에 하도 데서, 이 책도 그러려니 했던 걸 굳이 숨기지 않겠습니다. 세상 일이란 것이 다 그렇듯 책 읽는 것도 그래서, 베르나노스에 대한 쓸데없는 선입견은 책의 앞부분을 읽을 때까지 여전히 팽만했고 그래서 읽는 행위 자체가 무지하게 지겨웠습니다. 왜냐하면 건성건성 읽었기 때문이지요. 페이지 진도는 나가지 않지, 하는 얘기라고 무지하게 경건하기만 한 기독교 얘긴데 애초에 기독교에 관해선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 그럴 만하기도 했겠습니다. 당연히 셀프 변호이긴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어느 정도 읽어나가니까 말이죠, 금새 문장 하나하나가 이렇게 아름다운 말, 언어로 만들어져 있다는 걸 알아챈 겁니다. 특별하게 수식하지도 않고, 어떻게 보면 유치하겠다 싶은 좋은 뜻의 언어들로 만들어진 문장. 그런 문장들이 모여 이룬 문단과 또 그런 문단들이 계속해가면서 독자로 하여금 인생과 행위와 사고와 인식에 대하여 선의와 중용과 화해 같은 기독교 윤리들 속에 자연스럽게 묻혀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지 뭡니까. 기독교 윤리라고 얘기했지만 사실 기독교 윤리가 우리 생활 속에서 관습적으로 서로 권장하는 사회 윤리가 차이가 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책을 쓰는 사람이 기독교라는 종교의 외피를 덮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읽는 사람도 기독교 윤리라고 생각하는 것이지, 그냥 삶을 아름답게 사는 윤리일 겁니다.

 물론 그런 것들만 있는 건 아닙니다. 기독교 사제가 중심에 있으며 본당 신부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교구민들과의 관계, 사건들ㅡ 이런 건 당연히 기독교 아니면 생길 수 없는 것이고, 그게 책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자연스럽게.

 만일 당신이 기독교, 잠깐. 요샌 기독교, 라고 하면 주로 개신교를 얘기하고, 지금 거론하는 기독교는 천주교라고 해야할 거 같은데, 천주교와 개신교의 구분은 철저하게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 즉 저같은 유물론자들에겐 전혀 구분할 필요도 없고 그걸 의도도 없기 때문에 그냥 기독교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얘기를 다시 이어가지요.

 만일 당신이 기독교 신자라면 이 책을 즐거이 읽을 수 있을 겁니다. 만일 당신이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면, 이 책을 더 즐겁게 읽을 수도 있을 겁니다. 자신이 여태까지 관심 없던 분야에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어떠셔요? 한 번 읽어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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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줌의 먼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7
에벌린 워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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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키득키득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 그러나 웃음과 별개로 이 작품은 코믹소설이기는커녕 타락과 죽음과 절망과 방황과 몰락의 푸가. 잉글랜드 부르주아의 엄격함과 촌냄새, 완고를 넘어 옹고집에 가까운 전통에의 집착. 반면에 도시지향과 적극적인 사교생활에 대한 동경, 분방한 감정표출에 이은 이의 실행, 즉 불륜, 이어지는 가족 및 가정의 파탄 등 소설은 페이지를 넘겨가면서 더욱 비장하게 흐르는 소나타 양식의 교향악. 하지만 군데군데 넘쳐 흐르는 해학과 골계의 카덴챠를 즐기게 만들었으니 참으로 작가 에벌린 워의 솜씨는 알아줘야겠다.

 그의 이름이 재미나다. 토니 라스트. 라스트. 번역서라서 '라스트'의 영어 철자가 어떤지 몰라 아쉽지만 만일 'Last'라면 더욱 재미나겠다. 때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나 세계 만방에 조금씩 인권과 평등의 의식이 차오르기 시작할 때인데, 토니 라스트는 런던 외곽의 (조금 엉터리지만)고딕식 저택을 깔고 앉아 이걸 옛모습 그대로 유지하여 가문의 외형을 지속시키는데 인생의 중요한 의의를 두고 있는 작자다. 하지만 종전후 불경기가 전 지구를 덮쳐버렸고, 자신들의 생산품을 식민지역에 내다 팔아먹음으로 해서 불황의 여파를 최소화시키던 잉글랜드, 프랑스 등 유럽국가들마저 그걸로도 숨을 돌리기 벅차게 되자 이젠 소득세, 재산세, 법인세 등을 인상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거의 불로소득에 가까운 상속세에 대하여는 무지막지한 세율을 때려버렸다. 결과, 대토지와 무지막지한 현금, 유가증권을 보유했던 부르주아와 귀족들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세금 안 내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지만 궁극적으로 상속을 통해 유지해왔던 귀족계급의 몰락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몰락'이라도 그들의 몰락과 당신과 내 집구석의 몰락은 아예 의미를 달리한다. 그럼 우리집처럼 됐을까? 나하고 걔네들하고 이젠 정말 평등할까? 이딴 생각 마시라). 이런 의미에서 주인공의 성씨가 '라스트'인 건 매우 의미가 있지 아니하느냐 하는 의견. 자본주의는 수백년 동안 자본주의를 키워온 태생적 부르주아와 귀족들까지 먹어 치워버린 것이다.

 1930년대 혹은 조금 전 연대의 잉글랜드. 런던 외곽 헤턴에 있는 라스트 씨네 저택. 토니 라스트는 지역에서 소작인으로부터 받는 소작료로 자신 스스로 노동할 필요가 1도 없는 말 그대로 세속 귀족의 장자. 당연히 동생들은 라스트 장원 옆동네에서 장자세속에 대해 조금도 불만없이 스스로 열심히 땅 파먹고 산다. 세상 신경쓰기 싫고 오직 유전 비슷하게 갖추게 된 형질만 지금처럼 유지시키기만 하면 침상에 누워 자연사할 때까지 세상 걱정 아무것도 할 필요없는 신세 편한 인간이지만 인간사 그렇게 좋을 수만 있을까?

 부르주아도 아니고 부르주아 근방에서 떨어지는 떡고물로 연명해가는 런던 최고의 찌질한 남자 존 비버라고 있었다. 이 찌질이의 이름도 매력적이다. 비버. 냇가에 나뭇가지와 이파리들을 잔뜩 모아 댐과 집을 지어 섬처럼 생긴 그 집에서 안락하게 살지만 냇물은 자연적인 통로를 잃어버려 지형을 가끔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하는 포유류. 자연은 어떻게 될지 전혀 가늠하지 않고 오직 나와 내 가족을 위해 연못을 흐름을 바꾸는 짐승. 그걸 자신의 성씨로 가지고 있는 인간이 등장한다. 하지만 진짜 비버처럼 부지런하지도 못한 이 무능력하기 짝이 없고 생기기도 변변찮고, 말주변도 지극하게 없는 인간이 바로 존 비버다. 정상적인 사람은 인간군상에서 적어도 하나는 제대로 알아본다. 존 비버같은 찌질한 것들. 얘기도 안 통하고, 그래서 친구들의 논쟁에 절대 끼어들지도 못하는데, 누구 하나가 친구들 전체를 향해 "낼 한턱 낼 테니 우리집으로 몽땅 와!" 하면 절대로 빠지는 법 없는 지지리(속어 "찌질이"의 어원, 지지리) 궁상.

 이 찌질이가 어느날 토니 라스트의 헤턴 저택을 방문하는 영광을 누린다. 근데 세상일 정말 모르는 거다. 누가 봐도 찌질이를 넘어 상찌질이인 존 비버를 눈여겨 바라보는 고귀한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토니 라스트의 사랑스런 아내 브렌다 라스트.

 여기까지. 여기까지만 얘기해도 위의 것을 읽으신 분은 자연스레 선량한 브렌다 라스트 여사와 찌질한 존 비버가 화끈하게 불륜을 저지르게 될 것이란 건 충분히 감을 잡으실 수 있을 터. 그럼 됐다. 이 정도만 힌트를 얻는 것으로 만족하시고 이 책을 읽어도 좋을 듯하다.

 그리고 절대 놓치지 못하는 건, 존 비버와 브렌다 여사의 분탕질을 알아챈 토니 라스트 선생이 난데없이 아마존 탐험을 결정하고 실행해버리는데, 옥의 티 하나 짚어보면, 아마존 탐험 중에 목마르면 그냥 아마존 강물 떠 마시는 장면이 숱하게 나온다. 에벌린 워 자신이 오지탐험을 즐겨 했는지는 모르지만 했다해도 적어도 아마존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존 강물, 못 마신다. 가 봤냐고? 그건 아니고, <호랑이가 제 세상인 나라>에서 브라질 작가 장마리 블라 드 로블레스가 분명하게 말했다. 식수가 떨어지면 아마존 강물 위에서 선택할 수 있는 건 목말라 갈증으로 죽던지 아니면 강물을 원대로 퍼먹고 끝없이 설사를 갈겨대면서 죽던지라고.

 그리고 아마존 탐험의 의미는 알겠는데(세상 어디를 찾아봐라, 이상향이 있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오지 탐험 분량이 과하게 많다. 근데 이건 내 의견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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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재구성 - 제28회 신동엽창작상 수상작 창비시선 306
안현미 지음 / 창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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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현미 시인의 시도 처음 읽는 거다. 시 안 읽은지 20년 조금 더 됐다. 거의 마지막으로 읽은 시집이 1996년 나희덕의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니 참으로 참담한 일이다. 이제 시를 조금씩 읽기 시작하려니까 요즘 시인들 누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그간 시의 경향이 무척 많이 바뀌기도 했고 하여간 낯설다. 낯선 거, 이거 좋지 아니한가. 더구나 시를 포함한 문학장르에서 낯선 작품들을 새로 대할 때의 신비, 오리무중, 난감, 당황, 기쁨, 반짝!, 오줌마려운 느낌 등등. 근데 아직도 변하지 않은 거 하나. 역시 시는 서정시다, 서정시.

 (* 위에 반짝! 이라고 쓴 건 전적으로 내가 그렇게 생각했던 거다. 근데 지금 책을 뒤집어보니 뒷표지에 김정환의 감상문이 있는데 재수없게 첫마디가 '반짝!' 이렇게 시작한다. 그거 보고 쓴 거 아니다.)

 <이별의 재구성>도 낯선 시들이지만 또한 나처럼 오래 시를 읽지 않은 사람도 즐길 수 있는 참 괜찮은 서정시, 더군다나 시인이 그렇다고 주장하든 아니든 그것과 관계없이, 인류가 시작한 이래 끊이지 않고 노래했던 '사랑시'다. 21세기적 감성이 어떠니 저떠니 하지 않는 누만년 인류의 가슴에 고여있던 진액 같은 습식濕式 사랑.



post-아현동



 오늘은 아현동 산동네에 갔다


 오래전 월세 들어 살던 방,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하던 방, 연탄불을 넣던 방, 이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울먹이던 방, 외롭던 방, 고맙던 방, 아주아주 춥던 방,


 그 시절 내 마음에 전세 들어 살던 첫 애인을 생각하는 밤, 나의 아름다운 남동생의 흐려진 얼굴빛을 걱정하는 밤, 고단한 토끼에게 아무 약효도 없는 안약을 건네던 밤, 가난한 추억과 합체하던 밤,


 아현동 산동네를 내려와 찾아간 'BAR다' 어둡고 낡은 나무계단 끝에서 화장실이 어딘지 모르고 서 있는 머리 긴 외국 남자에게 "너는 왜 여기 서 있니? Why?"라고 물으며 괜스레 친절하고 싶던 밤, 함께 여기를 뜨자고 말하면 주저없이 따라가고 싶던 밤, 국적도 모국어도 잃어버리고 싶던 밤, 나 스스로에게 "너는 왜 여기 서 있니? 왜?"라고 자꾸 되묻던 밤,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개를 기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열정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왜 여기 서 있니? 왜?      (전문)



 (이제부터 잘난 척 타임. 아래의 의견 어디가서 복사하지 마시라. 개망신 당한다.)

시집은 몇개의 시적 영역boundary으로 이루어져 있다. 위 시 <post-아현동>에서 보더라도 세번째 연 끝부분에 나오는 시어 '합체. 작가의 고향이자 말 그대로 (강원도 태백에서의) 가난한 추억이 아현동의 외로움과 실패로 끝난 사랑과 합체해버린다는 것. 네번째 연의 'BAR다' 읽으면 읽는대로 나오는 소리값으로 '바다', 시집의 제목 '이별의 재구성'이 '이 별이 재구성' 할 때 '이별이 재구성'될 수 있을 거라는 것과 비슷하게 함께 여기서 뜨자고, 그래서 어두운 밤의 바다로 가자고 하면 따라갈 수 있을 거 같은 '바다'의 다른 표현인 것 등등. 시인은 시를 몇 개의 무리로 한 줌 씩 한 줌 씩 줌-인 해가며 주제를 확장하고 깊이를 더해가는 독특한 시도를 펼치고 있다.

 물론 한 줌의 시로 시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했다한들 독자가 그걸 이해해줄리도 없는 것이지만 같거나 비슷한 주제를 같거나 비슷한 시어로 한 줌을 만들어 나열하는 시도는 안현미한테 처음으로 발견했다. 그것이 좋다거나 싫다거나 하는 건 전적으로 독자 마음대로. 내 취향엔 거스르지 않았다.

 물론 이 시인에 대한 불만도 있다. 이거 하나만 빼면(안 빼도 마찬가지기는 하지만) 안현미 시인의 시집을 앞으로도 계속 사 읽어볼 용의가 있는데, 무엇인가 하면 먼저 시 하나를 읽어보고 얘기하자.



 외롭고 웃긴


 잿빛 눈물을 훔쳤지, 거긴 외롭고 웃긴, 새장 속, 우린 대부분의 인생을 침대에서 흘려보내, 랄라, 새장 밖으로 헛되고 헛되고 헛되이 아름다운 시간들이 흘러가고, 랄라, 잿빛 눈물을 훔쳤지, 거긴 외롭고 웃긴, 세상 속, 우린 대부분의 인생을 침대에서 흘려보내, 랄라, 붐밤으로부터 봄밤까지, 무의미로부터 무의미까지, 호모 싸피엔스로부터 호모 싸피엔스까지, 눈물로부터 눈물까지, 혁명을 말하는 자도 외롭고 혁명을 말하지 않는 자도 외롭다는 걸 우리는 본능적으로 예감했지만, 거긴 외롭고 웃긴, 랄라, 우린 대부분의 인생을 침대에서 흘려보내, 스프링이 고장난 매트리스처럼, 삐걱 삐걱 삐걱, 외롭고 웃긴, 세상 속에서, 한통속으로, 흘러가는 시간들, 헛되고 헛되고 헛되이 아름다운, 랄라, 우린 대부분의 시간을 새장 속에서 흘려보내네, 앵무새 같은 우린 겨우, 젯빛 눈물만 훔치는 우린, 랄랄라     (전문)

* 혁명을 말하는 자도 외롭고 혁명을 말하지 않는 자도 외롭다 : 최창근 『인생이여, 고마워요』에서



 잿빛 눈물을 훔치는. 여기서 '훔치다'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남의 것을 훔치는 일'일까 아니면 '흘려내리는 눈물을 손수건 따위로 닦는 일'일까. 속단하지 마시라. 안현미의 시어는 중의적인 것이 많기 때문에 둘 다 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지금 얘기하려고 하는 건 그것이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시를 읽을 때 속으로 다음과 같은 불평을 하곤 한다.

 "왜? 아예 논문을 쓰지 그랬어."

 핵심을 팍팍 찌르는 단 몇 개의 시어로 만들어진 그런 시 어디 없나? 좋은 시인 안현미가 힘써 펴낸 시집 <이별의 재구성>을 즐겁게 읽으면서 짧게 던진 불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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