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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레타 ㅣ 페이지터너스
이사벨 아옌데 지음, 조영실 옮김 / 빛소굴 / 2023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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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레타>는 2022년, 이사벨 아옌데가 여든 살에 발표한 장편이다. 2022년은 세계보건기구가 공식적으로 선언했듯 세 번째 펜데믹으로 전 인류가 불통의 시기로 진입했을 때이다. 아옌데는 이때로부터 백 년 전인 1920년의 라틴 아메리카를 떠올렸다. 1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이르렀던 1918년에 유럽을 휩쓸었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전장에서 죽어간 인명의 몇 배에 달하는 수천 만 명의 사망자를 발생시켰지만 유럽 열강들은 각국의 피해자 현황을 발표할 수 없었다. 국력 혹은 국격의 노출과 관련된 사안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전쟁 당시 중립을 선언하고 정말로 세계대전에 참가하지 않았던 스페인이 유일하게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발생을 인정하고 자국의 피해 상황을 발표하는 바람에 졸지에 “스페인 독감”이라 불리게 됐던 펜데믹은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기승을 부리다가 2년 후인 1920년에 라틴 아메리카에 상륙했다. 그러니 라틴 아메리카에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의한 펜데민은 백 년 만에 도래한 재앙이었으며, 아옌데는 이것에 착안해 1920년에 태어나 2020년에 생을 마치는 ‘비올레타 델 바예’라는 순혈 스페인/포르투갈 혈통 백인 여성의 한 생애를 소설로 구상하게 됐다.
책의 판매 부수에 최대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는 출판사와 서점은 백 년 터울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펜데믹에 방점을 두어 책 광고에 초점을 맞추지만, 사실 1920년 펜데믹은 주인공이 이제 막 태어날 시기이니 굳이 질병을 연결시키려면 앞으로 펼쳐질 아이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비유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으나, 20세기 초반에 태어난 전세계 모든 인류 가운데 파란만장하지 않았던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을까? 또한 2020년의 펜데믹 때 주인공의 나이는 백 살. 한 세기를 살아 이제 오직 편안한 휴식만 기대하고 있는 잘 늙은 노인하고 면역력이 생기지 않은 유행 질병과 그리 큰 연관은 없을 듯하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사벨 아옌데 역시 두 번의 펜데믹에 걸쳐 생을 살았던 여성을 착안해 작품을 시작했을 뿐이었던 것 같다. 오히려 아예데의 시각에는 수백만에서 수천만의 생명을 앗아간 질병보다 20세기 여성운동에 더욱 관심을 집중했다. 교조적 가톨릭이 국민의 사상을 장악했던 라틴 아메리카에서 여성이 스스로의 삶을 위해 개선, 개선을 넘어 혁신해야 할 관습과 행동, 법률은 넘치고도 넘쳤던 것이었으니. 그리하여 이 책을 읽기 전에 책 광고에서 초점을 맞추었던 펜데믹에 집중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미리 알리고 싶다. 아옌데가 늘 그러하듯이 이 작품 역시 진보적,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읽어야 마땅하다.
(여기까지 쓰고 마누라 님 저녁 드신다기에 아욱국 끓여드리고 겸사겸사 국 안주로 막걸리 한 통 해치웠다. 내가 끓였어도 진짜 맛있다. 장사할 만큼은 안 되지만 이 정도면 B+. 술 기운 퍼지기 전에 얼른 써야겠다. 속도를 올리자!)
하긴, 벌써 독후감 쓴지 십년이다. 그간 2천 권 이상 읽었을 거다. 강산도 변한다는 십년 동안 썼다. 이제 사실 지겹기도 하다. 그냥 훌훌 책이나 읽고 말지 싶다가도 여태 해온 지랄이 있는데 여기서 말긴 좀 아까운 생각이 들어 계속하고 있다. 언젠가는 그만 두어야 할 터. 무슨 광명을 보겠다고 여태 키보드를 두드려대고 있나, 한심할 때도 있다. 뭐라? 당신도 그렇게 생각했다고? 고맙습니다.
“전염병이 발생한 1920년 폭풍우가 몰아치던 금요일에 이 세상에” 온 비올레타 델 바예는, 성인이 된 후, 즉 초경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삶이 연속되는 임신한 상태이거나 막 출산한 산모이거나, 그도 아니면 자연 유산에서 회복하는 시간으로 채워진, 한 때는 이 나라 수도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데뷔당트, 즉 이제 사교계에 정식 데뷔한 상류사회 처녀였지만 이젠 잦은 임신과 출산, 유산으로 체형이 바뀌고 기력마저 소진한 마리아 그라시아 델 바예 여사의 5남 1녀 가운데 막내로 세상에 비집고 나왔다. 이때 맏아들 호세 안토니오는 열일곱 살이었다. 맏오빠는 늙을 때까지 막냇동생 비올레타의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물며 세상에 둘도 없는 우호관계를 이어가다가 동생의 집에서 숨을 거두는데, 하여간 비올레타가 세상에 나올 때 어머니 마리아 여사가 나이를 아는 유일한 아들이 호세 안토니오 뿐이었다. 호세 안토니오는 수천 명이 사망한 최악의 지진이 발생한 해에 출생했으며, 생일은 물론이고 나이도 기억하지 못하는 나머지 네 아들들 역시 이 나라의 큰 환란이 생겼던 해에 태어났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었다. 즉, 어머니는 늘 출산 또는 유산 이후의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보면 된다.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출산할 때 무릎을 꿇고 앉은 상태에서 천장에 고정시켜 놓은 고리에 연결한 줄(또는 천)을 잡고 아이를 낳는 모양이다. 우리의 비올레타가 세상으로 나올 당시에 평생 숫처녀로 살게 될 피아 이모가 아이를 받았는데, 의학과 약초에 관한 지식이 대단했던 피아 이모는 정작 아이가 나올 때 제때 받지 못해 그만 거꾸로 떨어뜨려 바닥에 콩, 머리를 찍어 갓 나온 아이의 이마에 혹이 솟아버렸다. 당연히 아들일 것이라 생각한 아빠가 자신이 직접 조립한 라디오 통신을 통해 유럽과 북미를 휩쓰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소식을 듣고 집에 도착해 첫 딸 비올레타를 보았고, 이마에 솟은 희한한 혹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자 그때까지 처녀였던 필라르 큰이모는 매부한테 원래 그렇게 나오는 아이도 있는 법이라고 조금 있으면 가라 앉는다고, 걱정할 거 하나도 없다고 (암시랑토 않다니께!) 안심시킨다. 아버지 아르세니오 델 바예 선생은 할아버지 때부터 건사해온 집안의 부wealth가, 자신의 대에 이르러 열세 명의 남매 중에 열한 명이나 살아남아 부친의 재산 일부만 유증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속칭 “동물적인 감각”으로 남의 돈을 빌려 투기 비슷한 돈 놓고 돈 먹기 사업이 성공에 성공을 거듭하고, 형제 자매들의 신뢰를 깨면서까지 할아버지의 저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업을 하는 사람은 거대한 재산을 확보하고 있는 반면 가용할 수 있는 현금이 별로 없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저택은 조금씩 쇠퇴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생전 처음 딸이 태어났으니 얼마나 귀여웠겠는가. 아들만 키운 나도 전혀 몰랐다. 근데 손녀가 생기니까 집안에 딸이 있는 것이 얼만큼 축복인지, 이해한다, 이해해.
아버지 아르세니오 델 바예 선생은 라틴 아메리카에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상륙하자마자 라디오 통신을 통해 이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예방책을 미리 충분히 인식하고 있어서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제재소의 신뢰할 수 있는 벌목꾼 두 명을 데리고 와 소총으로 무장시키고 아무도 저택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으며 자신도 영국에서 밀수한 웸블리 리볼버를 한 정 사들여 혹시 모를 무단 침입 보균자를 막으려 한다. 이런 노력은 결실을 맺어 대가족 가운데 펜데믹 피해자는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거봐, 작품하고 펜데믹은 시대상 말고는 관련이 없다니까.
이후 비올레타는 세상 버르장머리 없는 천방지축으로 성장한다. 아들한테는 도무지 볼 수 없는 딸 아이 특유의 다정다감이 아버지를 그만 녹여버렸던 것. 아버지가 얼마나 편애했는지 성격이 버릴 정도로 예뻐해주는 바람에 정말로 비올레타는 눈에 뵈는 게 없을 정도로 안하무인이 되어 버렸고, 이게 급기야 아버지를 향해 몇 번 터져, 화딱지가 난 아버지로 하여금 비올레타를 전담할 영국인 가정교사를 들이기로 결심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가정에 들어온 미스 테일러.
조세핀 테일러. 키가 조금 작고 대신 살집이 좀 있는 밀wheat색 금발의 20대 여성.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미스 테일러는 비올레타의 반항기를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했지만 사회의 바람직한 행동규범들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조세핀 테일러는 영국인이 아니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진다. 차티스트 운동에 가담한 죄와 왕에 대한 반역죄로 기소되어 1846년에 교수형에 처해졌고 처형 후에 온몸이 난도질당한 아일랜드인 할아버지에 자부심을 갖는 여성이었다. 미스 테일러는 숨이 다 할 때까지 비올레타 주위에 머물며 조언과 도움을 멈추지 않는 인물이다. 몇 년 후에 비올레타와 함께 참석한 델 바예 가문의 파티에서 만난 남장 페미니스트 테레사 리바스와 연인관계를 이어가며, 테레사와 함께 부르주아가 된 비올레타의 인식의 각성에 대단한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다.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 백인 부르주아 출신의 1920년생. 우리는 안다. 비올레타가 사춘기를 맞기 전에 특히 금융업에 전력하고 있는 아버지 아르세니오 델 바예 선생한테 닥쳐올 역사적으로 높은 파도를. 아니나 다를까, 드디어 1929년 9월이 오고, 미국의 주식시장이 한 순간에 폭락했으며 비올레타의 나라 역시 국가 파산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삶의 급격한 하락을 맞게 된 시민들은 시위에 참여해 급격하게 정국이 심하게 불안해졌는데, 이 순간에도 맏오빠 호세 안토니오는 다섯 살 많은 비올레타의 가정교사 미스 테일러에게 석류석과 다이아몬드로 만든 반지를 동원한 청혼을 거절당하면서, 이후 30년 동안 반지를 품 안에 지니고 살게 된다.
아버지가 유일하게 자기 사업에 동참하게 했던 맏이 호세 안토니오는 그동안 수없이 자산 관리에 관해 사업주인 아버지에게 빚을 줄이라 고언을 해왔다. 그러나 모험적 투자의 매력에 빠진 아버지 아르세니오는 자신의 주관대로 사업을 밀고 나갔으며, 그 결과로 델 바예 집안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빈털터리가 된 상태. 아르세니오 델 바예 선생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드디어 소설작법 제 7장 3절, 작품에 총이 나오면 언젠가 한 번은 발사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켜, 웸블리 리볼버에서 뛰쳐나온 총알이 자기 관자놀이를 관통시키게 만든다. 이 모습을 처음 본 아이가 바로 비올레타.
그리하여 아버지도 잃고, 집도 절도 잃은 델 바예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두 이모와 외할머니, 어머니, 큰오빠 호세 안토니오와 비올레타는 가정교사 미스 테일러의 동성 연인 테레사 리바트의 시골집으로, 네 오빠는 친척집으로. 저 남반구 남쪽의 한대지방 농촌으로 내려간 델 바예 가족들은 말 그대로 유배, 또는 피난의 시절을 겪을 수밖에. 이후 비올레타가 살아야 하는 남은 삶은 무려 85년 이상이다. 그러니 나는 적어도 작품의 85퍼센트를 숨겨놓았다는 말이다.
전형적인 라틴 아메리카의 부르주아 백인 시선으로 쓴 작품이다. 델 바예 가문은 애초부터 특혜를 안고 살았다.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돈을 버는 다양한 방법을 선천적으로 체득한 진골 가문이다. 비록 한 시절 불운을 만나 아버지 아르세니오 델 바예 선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참담을 겪었으나 다섯 아들 다 다시 사회의 훌륭한 지위와 부를 확보해 상류계급으로 복귀한다. 비올레타의 아들은 조국의 민주화 운동을 하다 공포정치의 희생자가 될 순간 극적인 도움을 받아 노르웨이로 탈출해 그곳에 정착한다. 딸은 미국에서 히피 생활과 중증의 마약중독이라는 지옥을 거치지만 악당이면서 지하의 막강한 권한을 지닌 생물학적 아버지의 도움을 지속적으로 받으며, 딸의 아들, 즉 비올레타의 손자 역시 좋은 교육을 받아 사회의 건전한 일원이 된다. 그리하여 이 책은 비올레타가 낼 모래 환갑을 맞을 손자 카밀로에게 주는 편지라고 해도 큰 까탈이 없다. 비올레타는 새로 사업을 시작한 오빠 호세 안토니오를 도와 남매가 다시 상당한 부를 축적하며, 이것을 이용해 여성의 인권을 확장하기 위한 사업을 모색한다.
당연하지. 부를 이루는 법, 자신의 계급을 유지시키는 방법을 세습적으로 알고 있는 구성원들이니까. 하지만 이것을 작품으로 만드는 좌파 작가라면 이 계급 구성원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 대중들, 일반 시민들에 대한 미안함이랄까 겸연쩍음이랄까, 하여간 어떤 종류가 됐건 간의 유감또는 부채감은 적어도 한 번쯤 표시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리 곤란한 처지를 만나더라도 누군가 한 명은 이 가족을 도울 은인이 있고, 망해버렸을지언정 좋은 교육을 받아 다시 부흥시킬 아이디어를 낼 만한 사업계획을 꾸릴 수 있는 계급과 애당초 한 번 만난 환란을 피할 생각조차 못하고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는 대중이란. 씁쓸하다. 하여간 나는 씁쓸했다. 자신이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환경을 특권이라 생각하지 못하는 부르주아일 수도 있다는 씁쓸함. 내일 독후감을 쓸 그레이엄 그린은 “윗양반과 잡것”의 관계라고 했다. 윗양반과 잡것은 딱 한 방면에 국한하는 것이 아닐 터. 윗양반이 늘 당연하게 행사하는 권한과 습관과 인맥과 이를 다 합쳐 그들이 말하는 “능력”은 애초에 잡것들에게는 접근이 금지된 특권인 것을 그들은 모른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좋다. 그러나 진보를 주장하는 작가라서, 활자를 통해 자기 생각이 드러난다면 이야기는 좀 달라져야 하는 것이……. 이런 의미로 읽으면 이 작품은 부르주아 계급으로 편향, 굴곡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별점으로 이야기하자. 생각 같으면 이런 한계 때문에 별 세 개 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역시 이사벨 아옌데가 이야기를 꾸며 나가는 힘이라니. 차마 네 개 아래로 떨어뜨릴 수 없다. 이야기의 힘이란 게 이렇게 무섭다. 대신 읽을 때는 눈을 똑바로 뜨시라는 말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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