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정원 - 제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종로구 부암동으로 짐작할 수 있는 인왕산 언덕배기 산동네. 충청북도 괴산군 노루배미에서 고등학교 1학년 까지 마치고 상경해 외국계 무역회사에 다니는 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중학교 졸업 학력으로 십 년 동안 남편과 시어머니로부터 무식하다느니 배운데 없다거니 하는 타박만 좋이 얻어자시며 이 책의 주인공 '나'를 여덟살 먹을 때까지 키워주신, 목포 출신의 요리 명장이지만 정식 직업은 오르다가 가겟방 앞에서 한 번은 쉬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언덕배기 달동네 오두막집의 솥뚜껑 운전사, 엄마. 끔찍하게 깔끔을 떠는 엄마가 눈 오는 날 키보다 큰 싸리 빗자루로 쓱쓱 눈을 치우다가, 아이고 저걸 저걸, 이를 악물고 끙끙 앓는 소리로 시어머니에게 "어머니 애가 나오려나봐요. 너무 급해 차리고 병원에 못 갈 거 같아요. 동네 산파 좀 알아봐주실래요?" 한 마디 하고 그길로 1977년, 한국적 민주주의가 든든히 토대를 잡고있던 20세기 중반의 민족중흥 시대에, 흔한 산과 병원도 아니고, 손톱 밑에 때가 새까만 아줌마가 지물거리는 눈으로 엄마의 가랑이 사이를 째려보는 종로구 부암동의 찌그러진 조산원에서 드디어 터울 많이 나는 내 동생 영주가 태어나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이제 육십이 넘어 목소리마저 메조 소프라노로 바뀐 할머니는 영주가 드디어 엄마의 태 속에서부터 탈출하기로 결심을 하기 바로 전까지, 영어로 말하자면 솔리테어solitaire, 우리말로 하자면 재수떼기를 하고 있다가 마지막 장을 뒤집기 바로 전에 급하게 옷보따리를 하나 만들어 나와 함께 판자처럼 생긴 지저분하고 좁은 조산원으로 뛰어왔는데, 연속극에서 본 거 처럼 아이를 낳고 있는 중인 엄마가 아이고 죽겠네, 으악, 으악, 소리소리 지르지 않고 그냥 음, 음 하는 신음만 들려오는 중에 우리의 칠성님께 간곡한 기도를 시작한다. "아이구, 칠성님. 이 늙은이가 둘째 손자 하나만 안아보게 해주십시오. 비나이다 비나이다. 그저 토란 같은 불알 달린 손자놈만 낳아라. 비나이다 비나이다." 그러다 내가 가슴에 안고 있는 보온병을 내려다보더니 내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이 새끼야, 마호병은뭐 하러 들고 왔어?" 하는 거였다. TV 보니까 사람이 아이를 낳으려면 제일 먼저 사람들한테 물 끓이라고 소리치는 걸 보고 분명히 뜨거운 물이 필요할 거 같아서 부엌 연탄불 위에 끓고 있던 솥단지에서, 그 비상사태에도 불구하고,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담아 온 건데, 비록 일상이 돼버려 아무렇지도 않지만, 뒤통수만 한 방 얻어터지고 만 거였다.

 잠시 후 조산원 아줌마의 '그렇지!'하는 말과 캑캑캑 하는 아이 울음 소리가 들리고 할머니와 난 득달같이 달려가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비린내가 가득한 방 공기가 확 들이 닥치고, 난 비린 냄새에 비위가 확 상해 토할 거 같아 고개를 돌렸으며, 바람들어온다는 조산원 아줌마의 지청구와 함께 다시 문이 쾅 닫혔다. "딸이에요, 딸." 그 말을 듣자마자 할머니는 땅을 쿵쿵 구르며 아이고 내 팔자야, 통곡에 통곡을 거듭했으며 집에 가자마자 머리에 질끈 끈 하나 동여매고 아침에 하다 만 재수떼기 화투의 뒷장을 기어이 넘겼는데, 딱 떨어지는 재수가 흑싸리 껍데기.

 "사흑싸리 껍데기! 육시랄허게 복도 없는 지집년이 나왔구나!"

 어느새 두달이 흘러 6년 터울이 나는 내 동생의 이름을 지어야 하는 때가 왔다. 할머니가 달력 찢은 종이에 뭐라 한 글자를 써 아버지한테 던져 주면서 하시는 말씀이, "옛다. 저년 부를 이름은 있어야지." 나는 안고있던 아이를 엄마한테 얼른 넘겨주고 종이쪽지를 주워 들여다 봤고 그 위엔 뭔가 꼬불꼬불한 글씨가 적혀 있었으나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한복자. 좋쟈? 저년 낳던 날 사흑싸리 껍데기가 떨어졌으니 저년 복이 오죽하겠냐. 그러니까 이름자에 복복 자를 넣어서 기를 올려줘야 우리 집안도 좋고 저년도 좋은겨."

 사실 바로 위에 이 책의 내용은 다 설명이 됐다. 정말이다. 일단 현재 시점까지 보면, 할머니가 가족 구성원 중에서 아버지를 뺀 나머지 인간들은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것이고, 할머니가 적어준 달력 찢은 쪽지에 쓴 아이의 이름을 읽지 못하는 나는 아홉살이 되도록, 3학년에 이르도록 글자를 해독하지 못하는 중증 난독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자세히는 밝히지 않겠으나, 거의 모든 작품에서 비극에 관한 예언은 언제나 들어맞는다는 진리를 다시 새겨볼 필요가 있다,는 걸 천명해둔다.


 난 이 책이 2013년에 나와서 불과 4년 전 작품인줄 알았다. 근데 다 읽고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다기에 검색을 해보니 우헤, 2002년 작품이다. 그러니까 중판. 심윤경. 서울대 분자생물학과와 동 대학원 같은 전공으로 졸업하고 직장생활 하다, 아 이거 아냐, 때려치고 소설 쓰는 아줌마. 햐, 근데 어찌 분자생물학적 접근은 전혀 찾지 못했을까? 이이의 다른 작품을 찾아보니 동화책이 여럿 있다. 전혀 놀라지 않았음. <나의 아름다운 정원> 역시 다분히 동화적인 시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른들이 읽는 동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꿈꾸고, 꿈마저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종이 위의 꼬물꼬물한 직선과 곡선에 불과했던 것이 문자로 바뀌고, 동생의 잘못을 아무도 모르게하기 위해 대신 기꺼이 엄마한테 두드려 맞고, 할머니와 아버지와 엄마 사이에 벌어지는 가정학대와 멸시와 조롱과 폭력과 기타등등을 가슴 속에 푹 절여두기만 하고, 그래서 난독증은 날로 심해져 가고, 글씨도 못 읽는 놈이란 딱지를 달고 다니며, 그러나 동생과 동네 삼촌과 담임 선생님과 몇몇 친구들과 쌓아가는 우정, 사랑, 믿음, 동감 비슷한 커다란 우산.

 날로 진지하고 심각하고 중대하게 확장되어 가는 엄마에 대한 할머니의 증오와 학대와 막말은 나, 한동구를 더욱 압박하고 숨도 못쉬게 하지만 나는 주변에서 나에게 많은 아름다운 영향을 끼치고, 끼졌던 사람들을 통해 할머니, 할머니가 바라는 진정한 것은 무엇일까를 탐색하는 결실을 맺는 과정. 그게 나의 아름다운 정원,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으로 짐작되는 그곳에서 벗어나는 일이며 이제 소년기의 나를 괴롭혀왔던 무수한 질곡을 극복하는 일, 그래서 소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가슴 따뜻한 성장소설로 규정짓게 만드는 일이다.

 잘 쓴 성장소설이 제일 지랄맞은 것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곳곳에서 눈물을 짜게 만드는 거. 에잇! 하지만 당신도 예외는 아닐 것이니 진짜 조심해서 읽으시라.

 근데 나, 한동구의 아름다운 정원은 무엇일까? 종로구 부암동으로 짐작되는 인왕산 허리자락 부근을 통칭하는 걸까? 유독 달동네 한켠에 커다랗게 자리잡은 3층 저택의 아름다운 친 자연적 정원일까, 아니면 조심스레 몰래 3층집의 정원에 들어가 가슴이 붉은 곤줄박이(책 속에선 "곤줄백이")에게 빵조각을 건낼 때면 커다란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던 사모님의 그윽한 눈동자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한동구의 소년시절을 겪게 했던 내 귀엽고 똑똑했고 작은 누이동생 한영주와, 크기가 산 만한 고시준비생 동네 삼촌과 천사보다 몇 백배 착하고 아름다운 3학년 시절의 담임 박은영 선생님들이 나를 위해 만들어준 모든 미덕을 다 합친 따뜻함, 다 합쳐 소년시절이 아름다운 정원이었을까.

 결론은, 당신 의견이 옳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크랜포드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44
엘리자베스 개스켈 지음, 심은경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엘리자베스 크래그헌 개스켈. 이이의 작품 <남과 북>을 읽고 난 그냥 홀딱 빠져버렸다. 권위를 보전하기 위해 철권을 휘두르면서도 엄중한 도덕률을 강요한 우중충했던 빅토리아 시대. 핍박받고 착취당하던 시민들이 생존권을 위해 목숨을 걸고 파업을 벌이던 당시, 부르주아의 각성을 완곡하게 요구하던 <남과 북>의 마거릿 헤일. 나는 빅토리아 시대의 최고 작가의 반열에 엘리자베스 크래그헌 개스켈을, 찰스 디킨스와 함께 올려놓았다.

 <남과 북>에 마거릿 헤일이 있었다면 그것보다 2년 앞서 쓴 중편소설 <크랜포드>에선 매리 스미스가 있더라. 크랜포드란 시골 동네 이름으로 전에 주인공 매기 스미스가 살았던 동네. 매기는 사업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대처에 나가 살지만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먼 친척이면서 소설의 척추를 이루는 젠킨스 일가의 집에 수시로 머물며 크랜포드 동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무척이나 따뜻한 시선의 일인칭 화법으로 적고 있다. 작품은 읽기 편하게 모두 16개의 옵니버스 식 단편斷片, 혹은 단편短篇으로 이루어져 있다. 더군다나 작가의 솜씨인지 역자의 솜씨인지 아니면 두 사람 다의 공헌인지는 모르지만 쉬운 문장으로 술술 읽히는 미덕까지 겸비했다. 그리하여 마음 먹으면 휴일 아침에 집어들어 아침 거르고, 점심 거르고 드디어 끝까지 다 읽은 다음, 딸아 배고픈데 자장면 시켜먹자, 할 정도는 된다. 그러나 댁의 따님은 분명히 이렇게 대답할 걸? "아버님, 오늘은 휴일이라서 짜장면 주문하면 두 시간 있다 옵니다. 걍 라면이나 손수 끓여 드시옵소서."

 무슨 말이냐 하면, 한 번 손에 잡았다하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배고픈 줄도 모른다는 말씀. 왜? 재미있으니까. 재미도 그냥 재미가 아니다. 소설책 그리 많이 읽어봐도 제일 재미난 건, 어떻게 그리 TV 연속극하고 비슷한지, 적당한 신파가 가미된 해피엔드 소설이다. 이 책이 바로 그렇다. 게다가 열 여섯편 거의 모두 눈물선을 적당하게 자극하고 있음에야 뭔 말이 필요할까. 아 썅, 270쪽에 불과한 이 책을 읽으면서 난 세번이나 눈물을 짰지 뭐야, 쪽팔리게.

 <남과 북>이 그렇듯이 이 소설에서도 지독한 악당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고집이 느므느므 완고하고 뼈 속까지 귀족의식, 염병할 선민의식을 말하는데, 그런 재수없는 사고방식 속에서 스스로 질식사해가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러나 어떻게보면 좀 억지인 듯도 하달 수 있으나, 결국 고집을 굽히게 될 것임을 시사하면서 마지막에 이르니 악당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고 해도 무방할 터.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 타임 킬링용으로 누구에게나 권할 수 있는 선택. 심지어 청소년 권장도서에 이거 들어가도 아주 좋을 듯.

 그래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바, 개스켈의 <남과 북>은 한 번 읽어보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빈슨 크루소 펭귄클래식 36
다니엘 디포 지음, 남명성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년시절에 축역본으로 읽었던 옛날 이야기, 다시 읽어보는 프로젝트(햐, 외래어 사용할 때의 이 기묘한 울림. 이래서 외래어 쓰는 거다) 일환으로 과감하게 중고책 사서 읽었다. 책 나온 시점이 1719년. 글쎄, 300년 전으로 돌아가 이 책을 읽는다면 정말 기막힌 독서를 경험할 수 있겠지만 이제는 뭐 그냥.

 책 표지, 기둥에 붙어있는 현판을 보시면 이렇게 써있다.

 "I came on these shores on the 8th day of June, in the year 1659"

 이 장면이 두가지 측면에서 구라다. 첫째, 크루소가 무인도에 떨어진 날짜는 6월 8일이 아니라 1659년 9월 30일, 둘째로 이 푯말을 설치해둔 장소가 그림과 같은 저택이 아니고 해변가다. 이건 작가와 삽화가 혹은 표지 제작자 간의 일이니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나중에 크루소가 프라이데이와 함께 섬을 떠나면서 날짜를 계산할 때 1년 며칠의 차이가 나는 건 어쩔겨? 300년간 세계명작으로 알려져 있던 작품이며 후배 작가들이 숱하게 인용한 위대한 유산에서도 이런 에러가 발생한다. 이건, 그냥 웃고 넘어가도 될 듯. 누가 혹시 알아? 300년 전엔 작가들이 재미있으라고 소설 속에 고의로 트랩을 설치해놓았을지. 그냥 그렇게 넘어가자.

 내용? 다들 아시잖여?

 정말?

 난 아니던데?

 이거, 흠. 디포가 자기 방에 단풍나무로 만든 책상에 앉아 오직 머리 속에서 기어나오는 상상력에 의해 쓴 책. 어려서 축약본 읽었을 땐 전혀 몰랐다. 만일 무인도에서 정말 크루소처럼 살 수 있었다면, 크루소는 분명 반신반인 또는 삼배체 염색체 인간이었을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형제란 얘기. 물론 크루소 문명의 이기, 특히 총과 화약, 총알을 비롯한 문명의 잔재와 과학적 사고방식이란 최고의 도구를 갖고 무인도에 떨어졌으나 무려 삼십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혼자 살면서도 모국어인 영어를 비롯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라틴어의 약간을 몽땅 다 기억하고 있는 것은 물론, 점차 섬에서 그야말로 신의 지위에 앉게 된다.

 근데 이건 그냥 로빈슨 크루소의 행적에 관한 거고, 내가 이 책을 지독하게 재미없게 읽었던 이유는, 놀라셨지, 재미없다고 그것도 지독하게 재미없다고 얘기하는 거. 근데 그게 사실인 것이 책의 거의 절반 이상이 기독교의 신에 대한 고마움, 은혜가 넘실넘실 흐르는 증거 대기에 할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잘 쓰는 말이, 꽃노래도 삼세번. 하이고, 차라리 광신적 개신교 교회에 들러 바로 옆자리에서 아저씨 아줌마들이 넋 놓고 하는 방언을 듣지 말야. 초간이 1719년이었던 걸 충분히 감안을 했어야 하는데 준비 없이 재미있겠거니 그냥 책을 읽기 시작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이딴 거 읽느라 이틀 반이나 썼다. 물론 만날 쇠주 마시느라 밤엔 책을 읽지 않기는 했다.

 기독교인이 아니면 그리 크게 재미있을 거 같지 않지만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선택은 전적으로 당신 마음대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 셀레스티나 을유세계문학전집 31
페르난도 데 로하스 지음, 안영옥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거 예전부터 읽어볼까 망설였던 건데, 책 표지 그림이 하도 엽기라 도무지 손이 가지 않았었다. 16, 17세기 스페인 마녀, 책에 나온대로 말하자면 턱수염까지 거무스름하게 돋았으니 <맥베스>에서 '장차 나린 왕위에 오르실 거예욥', 마녀하고 거의 비슷하게 생겼다. 그리하여 보자마자 화형식 장면이 떠오르는 바람에 차일피일.

 유럽 각국의 진짜 오래된 고전들, 예컨데 프랑스에 <가르강튀아 / 팡타그뤼엘>, 영국의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 이탈리아의 <데카메론> 등은 작품 자체를 극동 아시아 사람이 감상을 해서 감명깊다, 이딴 말을 하기는 쉽지 않지만 유럽 문학을 읽으면서 숱하게 인용하는지라 후대의 작품들을 위한 기초체력을 기르는 셈치고 읽어두면 아주 좋다. 같은 의미로 <라 셀레스티나>도 언젠가 얽어야 할 목록에 포함시켰었는데 이제야 끝냈다(물론 로렌스 스턴의 작품은 지금 읽어도 시공간을 초월하여 충분히 멋있다).

 칼리스토, 라고 하는 22세던가 24세던가 하는 스페인 귀족 청년이 사냥길에 나섰다가 멜리베아라는 처녀를 보고 한눈에 홀딱 반해 겪는 우여곡절. 칼리스토도 부자에다가 귀족계급이긴 하지만 멜리베아는 칼리스토보다도 훨씬 더 부유하며 훨씬 더 높은 계급의 귀족 집안에 하나밖에 없는 따님이어서 도무지 언감생심, 이었다가 혼자서 끙끙 상사병 앓다가 죽느니 그나마 '짹' 소리라도 내보고 죽느라고 동네에서 가장 머리가 좋고 온갖 곡절을 다 겪으며 모진 세월을 살아온 가난한 늙은 여인 셀레스티나에게 중매를 부탁하며 드디어 사건은 벌어지는 거디다.

 원 작품이 15세기에 나온 거다. 당시 일반 백성, 그중에서도 여자 혼자 살면서 이웃을 비롯한 다른 인간들한테 만만하게 보이면 행여 잘, 평화롭게 먹고 살 수 있을 거 같은가? 시대는 페스트와 콜레라, 겨울엔 티푸스까지 온갖 죽을 전염병이 창궐하고, 전염병보단 인명을 덜 살상했지만 못지않게 백성들을 간난과 고통 속에 빠뜨린 쉼없는 전쟁의 와중이었음에야. 하긴 전염병과 전쟁이 없던 20세기 후반의 대한민국에서도 여자 혼자 살려면 별 거지같은 새끼들이 다 꼬여 어떻게 해서든지 가진 거 홀딱 다 뺐어먹고 튈 생각으로 눈알이 벌겋게 물든 인종들 숱하게 꼬이던 것도 숱하게 보긴 했다. 역사이래 홀어멈, 홀처녀 살기 끔찍하기가 그래도 좀 덜 하기까지 예수 죽은 후 2,000년이 필요했던 거다.

 내 보기에도 이 책의 진짜 주인공 셀레스티나라는 노파, 이웃들에게 간교하고, 독사같고, 저주를 퍼붓고, 밤마다 악마와 교접하고, 고양이 뿔과 암소의 고환을 끓여 사랑의 묘약을 만드는 마녀라고 지목을 당하지만, 사실은 당초(唐椒: 호고추. '호'는 중국을 대표하는 외국산을 얘기하는 것으로, 외국에서 건너온 존나 매운 고추. 울나라에서 청양고추를 먹기 전에 신도가 제일 셌던 고추를 일컫는다)보다 매운 시절을 홀어멈으로 악착같이 살아내느라 이웃들과 좀 불편한 관계를 맺어 어쩔 수 없는 평가를 받고 있던 거 같은데, 뭐 어떤 상황인지 이해 가시지? 근데 작가 페르난도 데 로하스, 얘도 당시에 글자를 자유자재로 읽고 쓴다는 거 하나만 가지고도 짐작할 수 있다시피 먹고 살 만한 인간이어서 그랬는지 하여간 무지무지한 악당으로 묘사해놨다. 이해해주자. 책은 15세기 내용을 16세기에 쓴 거니까. 그리하여 책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백성들, 칼리스토의 하인들까지 몽땅 포함해 일반 백성들은 교활하고, 언제나 상전 몰래 상전의 재물을 훔쳐낼 생각에만 골몰하는 추잡한 인간으로 묘사한다.

 아, 얘기가 또 경상남도 삼천포 시로 빠졌다.

 하여간에 얼굴에 깊은 상처가 있는 늙은 셀레스티나가 칼리스토와 멜리베아 사이를 시계불알처럼 왔다리갔다리 하면서 칼리스토에 대한 막강한 저항 또는 분개해 있던 멜리베아의 마음을 녹여 사랑에 불을 붙이는 거까진 내가 얘기할 수 있어도, 이렇게 멋지게 사랑을 이어준 셀레스티나가 왜, 어찌하여 죽음에 이르는지, 칼리스토와 멜리베아가 노파의 죽음과 하인들의 불행한 운명에 조금도(물론 '조금'이야 신경 썼겠지만) 개의치 아니하고 사랑에 몰두하는지,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됐는지는, 이 독후감을 읽으시는 분들이 아무리 궁금해도 가르쳐드릴 수 없다. 왜냐하면 진짜로 이 책을 읽어보실 1/100 명을 위하여.

 다만 한 가지. 나도 16세기에 나온 스페인 최고最古의 문학작품이 그렇게 끝을 맺을지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다는 거. 뻔한 결말이겠지, 쉽게 생각했다면 나처럼 한 방 얻어맞는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17-07-06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궁금하네요. 제가 그 1/100 명이 되어 보겠습니다. ㅋㅋㅋ

Falstaff 2017-07-06 10:44   좋아요 0 | URL
아후....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습니닷!
이렇게 오래된 책의 경우엔 이 말을 뺄 수가 없어요. ㅠㅠ
오랜 옛 이야기 책인것을 감안해 독특한 결말이지 지금 시각으론 그렇지 않을 수 있음을 미리 말씀드려야 후환이 없지않나 싶네요. 긁적긁적
 
무한의 책
김희선 지음 / 현대문학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희선, 또 사고쳤다.

 전작 <라면의 황제>를 통해 엽기발랄한 아이디어를 전혀 숨기지 않고 대한민국 강원도 W시에 홀연히 등장한 우주선과 외계인을 선보이더니, 이젠 여기서 두어 계단 업그레이드 해 또다시 세계 전 지역에서 수없이 많은 우주선이 쏟아져내려와, 왜 그거 있잖아, 어떻게 보면 중절모 같고, 어떻게 보면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같이 생긴 오소독스한 모습의 우주선, 바로 그 모습의 무수하게 많은 우주선들이 전작과 같이 하늘에 동동 떠 있다가 거기서, 개봉박두, 숱한 외계인이 하늘에서 강림을 하시는데, 바로 2015년 12월 21일, 그날로부터 한 달 전 대한민국의 모처에서 칭기즈 아이트마토프의 <백년보다 긴 하루>를 읽고 내가 쓴 독후감에서 이렇게 의문을 제시했는데 "왜 외계생명체까지 전부 척추동물이어야 하는 것이지? 무척추동물로 하면 더 획기적이지 않을까? IQ 150의 두뇌를 보유한, 2미터 크기로 진화한 말벌을 생각해봐", 비록 말벌까지는 아니었지만 김희선은 전작에서의 로스웰 사건과 거의 비슷한 외계인의 모습 대신 거대 파충류, 즉 공룡의 외모를 한 외계인을 등장시켰으며,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세계적으로 숱한 개체들이 널려있는 공룡 모습의 외계인들은 서로 텔레파시를 통해 의견교환을 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수많은 공룡들이 사실은 한 개체의 수없이 많은 분산, 즉 외계인이라기보다 하늘에서 강림한 신, 그렇다, 모든 종교에서 말해왔던 바로 그 신, 한문으로 쓰면 神, 영어로 God, 독일어로 Gott, 프랑스어로 Dieu, 이태리어로 Dio 라고 주장해마지 않는다. 사실은 하나지만 눈에 보이는 건 세계 방방곡곡에 산재해 있어 분산된 각 개체의 신이 세상을 모눈종이처럼 쪼개서 한 모눈을 관리하고 있다는 취지, 그러나 그게 면적 단위인지 인구밀도 단위인지는 밝히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독자가 생각하기로 암만해도 인구밀도 기준으로 봐야 마땅하지 않겠느냐 하는 건데, 왜 그러냐하면, 책의 주인공 스티브, 미국에 있다고 김희선이 주장해마지 않는 트루데라는 도시에 살고 있는 스티브의 아파트 혹은 연립주택 아니면 다세대주택 창문을 은근슬쩍 넘어보는 티라노 닮은 신(의 분산된 개체)의 갯수가 두 마리, 아참 신한테 '마리'라고 쓰면 불경하겠구나, 그럼 두 분, 아무리 그래도 티라노 닮은 도마뱀 종류 파충류 강綱의 생명종에게 또 '분'이라 쓰기도 거시기해서 참 곤란하지만 하여간 신이 둘 등장하기 때문이다. 신이 둘 등장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보기에 둘이지 사실은 하나인 둘을 김희선은 각기 보리스와 아르까지로 칭하기로 결정해 나로하여금 완전 뒤집어지게 만들었다. 참 재미난 소설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을 함께 쓴 스트루가쯔키 형제 아닌가 말이지. 뭐 그건 그거고, 이제 외계인을 신의 자리까지 격상시켜놓은 김희선. 혹시 작가 자신이 외계인 아냐?

 위에서 얘기한 주인공 스티브. 얘가 2016년 현재 살고 있는 곳이 미국의 트루데. 트루데라는 지명을 작가는 이탈로 칼비노의 책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초원을 유목민처럼 유동하며 세상은 끝도 없는 트루데란 보이지 않는 도시로 이루어져 있다는 의미로 사용한 걸 차용해왔다. 그러니 트루데란 미국의 도시도 그게 정말로 있는 건지 아닌지, 심각한 정신적 외상에 의하여 탄생시킨 거대한 지리적 서사에 불과한 것인지 끝내 일러주지 않는다. 책을 읽어보면 '트루데'란 미국의 도시, 돼지와 닭의 도살업으로 시민 전체가 먹고 산다고 해도 별로 과장이 아닌 삶으로서 피의 도시, 이게 거 참, 정말 미국 도시 맞아? 읽다보면 서울시 동대문구 마장동 도살장 부근이나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 도살장 인근인 것 같은 기시감이 팍팍 든다. 지금은 모르겠고 20세기의 마장동이나 십정동에 가면 선입견인지 아니면 사실인지 하여간 피비린내 비슷한 자극이 후각 가득 차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당시 25도 짜리 진로소주 병을 비우고나면, "아줌마 두꺼비 알 밴 걸로 바꿔주세요" 하면서 "등골 한 접시 추가고요, 간하고 천엽은 서비스로 좀 더 주세요"하는 왁자한 소리의 주문이 언제나 귀에 익었다. 그땐 일년 내내 날고기 실컷 먹고 따뜻한 봄날이 오면 배 속에 뭔가가 있거나 없거나, 칼국수 마디 같이 생긴 뭔가가 바지를 타고 떨어지거나 아니거나 구충제 한 웅큼을 꿀꺽 삼키면 그걸로 끝이었다. 스티브의 아버지가 1980년대에 미국 트루데로 이민가서 곧바로 얻은 직업이 살아 있는 돼지의 경동맥을 따는 일이었고, 똑같은 시절의 마장동이나 십정동에선 돼지를 도살하기 위해 끄트머리가 뾰족한 도살용 도끼로 돼지의 정수리를 단 한 방에 쪼개버렸다. 기억하시나? 당시 재래시장 가면 돼지 대가리 삶은 것들을 죽 늘어놨었는데 하나같이 정수리에 구멍이 뽕, 나있던 거. 난 책을 읽으면서 미국 도시 트루데에 관한 일화에 상당히 관심을 쏟았는 바, 삶을 위한 피의 도시와 스티브가 경험한 불행한 개인사가 서로 긴밀하게 얽혀있기 때문이고, 이 소설이 독자에게 중의적 해석의 기회를 주기 위해선 작가는 트루데와 도시 속의 삶에 더 치밀한 묘사를 해야 하지 않았나 싶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지 않고 이 독후감을 읽는 분은 지금 내가 뭔 얘기를 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이렇게만 말하자. 작가는, 그가 매체에 인터뷰한 내용을 빌리자면, 독자에게 다양한 해석, 다시 말해 결론에 관해 독자에게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는 열린 서사구조"를 주고 싶었다는 취지로 이야기했는데 그렇게 만들기 위해선 독자로 하여금 끝까지 미궁에 빠져있게 만들어야 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서다. 내가 읽기로는 책의 후반부에 가서 오히려 그동안 헤맸던 미궁에서 빠져나오는 걸 감지할 수 있었다(작가가 만일 이 독후감을 읽는다면 미궁에 빠져 있던 독자가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던 것일까,를 숙고해봄직 하지 않겠나). 소설가는 거짓말장이다. 그건 당연한 거고,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란 새롭고 어려운 지평을 선사하기 위해선 또 대단한 사기꾼이 되어야 한다. 끝까지 독자를 속일 수 있기 위해선 어떤 방법이 있을까. 앞으로 김희선이 심사숙고 해봐야 할 동네 아닌가싶다.

 비록 말은 이렇게 했음에도, <무한의 책>은 올해와 내년 상반기에 있을 대한민국의 문학상을 기대해도 좋을 수작이다. 정말 상을 받을지 아닌지는 자신하지 못하겠다. 그건 우리나라의 문학상을 보면 말은 번지르르 잘 하지만 이 책처럼 파격, 혹은 변종 또는 엽기발랄한 작품은 그냥 칭찬만 할 뿐, 진짜 상을 주는 경우를 내 보질 못해서다. 등장과 더불어 문학인생의 전성기를 맞은 거처럼 보이는 김희선. 아직은 그의 전성기가 아님을, 아직은 더 보여줄 것이 많이 있다는 걸 증명해주기 바란다.

 





* 여기서 끝내려고 했으나 도무지 입이 근질거려서.

 왜 미국의 트루데, 그곳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이 대한민국의 어느 도시, 특정하지 않는 일반 도시를 보는 것 같을까. <무한의 책>은 오직 대한민국 국내 판매용으로 쓴 것인가? 책을 외국어로 번역한다면 트루데를 읽으면서 이해할 수 있는 아메리카, 유럽 사람들이 몇이나 있겠는지.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대한민국의 모든 소설가는 작업을 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