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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이체르 소나타 (반양장) ㅣ 펭귄클래식 3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기주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평점 :
펭귄클래식코리아의 책 소개에 의하면 톨스토이의 '단편' 네 작품을 모아 책을 냈다고 한다. 요새 우리나라 대표적 출판사들(꼭히 문학동네, 창비, 열린책들, 민음사를 꼽지는 않겠지만)이라면 당당하게 네 권의 장정본을 만들고나서 뭐라고 주장하느냐 하면, 이름도 찬란한 "경장편" 네 작품이라 주장할 것이다. 경장편? 세상에 그런게 어딨어. 양심없이 돈벌이에만 눈이 벌건 출판사에 비하면 펭귄클래식코리아 거 참 괜찮다. 더구나 오역 여부는 모르겠고 적어도 내가 읽은 펭귄 시리즈에선 비문이나 크게 맞춤법 이상한 거 또는 단어를 연속해서 잘못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즉 몇몇 유명 출판사하고 비교해도 기본에 충실하다는 뜻. 디자인이 좀 그래서 그렇지 이 출판사, 괜찮다. 특히 문학동네가 이 책 속의 모든 작품을 찍었다고 가정한다면 네 권의 "경장편" 양장본을 구입해 읽어보기 위해 최소한 4만원은 들 것인데, 난 최상급 중고책을 4,200원 주고 사서, 잘 읽었다.
그건 그거고, 책 이야기를 하자. 오늘도 서두가 길었다.
레프 톨스토이. 우리 나이로 50세 전에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를 써서 이제 문호의 반열에 오른 그는, 자신의 넘쳐나는 성적 욕구를 느끼는 만큼, 그것을 억제하는 신앙의 삶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라고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의 아내 입장에서 말할 거 같으면 이제 16세 연하, 그니깐 34세의 젊은 아내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입장에서 보면, 서방은 젊어서 온갖 난잡한 섹스와 성병까지, 거기다가 도박, 술에 젖어 할 거 실컷 해보고, 이제 나이들어 연장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으니 금욕주의네 수도생활이네 지랄을 하지만 자신은 불꽃같은 인생의 절정기 30대 중반의 여인으로 본격적으로 맛을 알아가고 있는 와중에 그게 무슨 말같지 않은 허무맹랑한 짓인가 말이다. 소피야 입장에선 명색이 그래도 톨스토이 백작님이라, 얼굴과 아랫도리를 동시에 그냥 확 쥐어 뜯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은 길고 긴 인생, 바늘로 자신의 허벅지 콕콕 찌르며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라, 밤이면 밤마다 면벽참선 할 수도 없어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이 영감이 나이를 조금 더 먹으니 뭐라? 저작권을 포기하고 언제든지 자신의 작품을 자유롭게 찍을 수 있게 하겠다고? 남이라도 그럼 섭섭할 텐데 이걸 서방이라고 그래도 몇 십년을 함께 살아준 댓가라는 말이냐고. 당신 같으면 레프 톨스토이 같은 남편을 그냥 내비 두시겄어? 밖으로 폼만 나지 안에선 그야말로 하나 내실 없는 속물 덩어리. 아, 물론 젊은 아내 입장에서 말이다. 그러니 날이면 날마다 바가지 벅벅. 이게 소피야 잘못이야? 톨 백작 잘못이지.
톨스토이 백작의 집구석에 평화가 전혀 깃들지 아니할 즈음해서, 몇 십년 동안 가정의 행복을 경험하지 못한 톨스토이는 근본적으로 결혼제도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의 경우만이 아니라 주위의 모든 결혼한 가정을 면밀히 조사, 탐색해보니 다 거기서 거기. 하고한날 부부간의 쌈박질에 생활고까지 겹치면 한때는 죽고 못살았던 부부간에 서로가 서로에게 어떻게 하면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을지 모색하게 되고, 치명적 언어의 화살촉을 발견하는 즉시 그것이 잘 듣는지 궁금한 걸 참지 못해 즉각 상대를 향해 비상을 듬뿍 묻혀 발사해마지않는 현상을 발견해낸다. 때는 19세기 말. 당시 러시아의 몇몇 귀족 가정에선 부부 간에 서로가 서로에 대한 독립을 인정하여 서로 눈치로는 알고 있지만 직접적 증거를 발견하기를 서로 꺼려하며 부부가 공히 각자의 정부를 한 두명씩 부양하고 있는 것이 유행이었다, 라고 오해할 만한 문학작품을 우리는 읽은 바 있다.
톨스토이 선생은 그리하여 작품 속에 자신이 본 특별하지 않은 부부를 등장시켜 신혼여행 부터 결혼생활이 작살나기 바로 직전까지 전혀 우아하지 않게 펼쳐지는 서로가 서로에 대한 집중사격, 거기다가 오해받을 만한 행위를 보태 비극적 결말을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9번 가장조 작품 47의 1악장, 안단테 소스테누토에 이어진 프레스토를 곁들여 격하게 토해낸다. 이게 책의 두번째 단편 <크로이체르 소나타>.
<크로이체르 소나타> 말고 <가정의 행복>, <악마>, <신부 세르게이> 세 편이 더 실려 있는데 이거 참. 톨스토이는 작품을 통해 독자에게 적어도 하나 이상을 가르쳐야 직성이 풀리는 작가라서 어쩔 수 없이 좀 재미없고 재수없는 장면들이 나온다. 단편들을 쓴 시점이 19세기 말이고, 늙은 톨스토이는 날이 갈수록 점점 종교적 금욕주의에 퐁당 빠져버려, 젊은 시절 방탕했던 자신을 채근하듯 남자 주인공들이 함부로 놀려댄 아랫도리에 체벌을 가하는데 말 그대로 가차없다. 아 씨. 자기는 할 거 다 해놓고 말야. 당시 러시아, 물론 러시아만 그랬겠어, 유럽이 다 마찬가지였겠지. 하여간 거기선 젊은 귀족들은 15세 혹은 16세부터 정기적으로 여자와 성적 접촉을 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한다. 근데 문제는 적절한 피임 방법이 없었던 거. 그들의 건강을 이유로 숱한 일반 백성의 처녀, 유부녀들은 1루블을 받고 무수한 사생아를 만들어냈던 건데, 톨스토이 자신이 젊어서는 이런 행위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다가 50이 넘고 60이 넘고, 하여간 나이들면서 세상의 죄악이 다 거기서 시작한다고 자각을 했단다. 왜? 이제 늙어 그게 마음대로 작동하지 않으니까? 난 그의 개심, 금욕주의가 별로 아름답지 않다고 여기는 족속이다.
그러다가 기어이 80이 넘어 도를 닦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한적한 시골역에서 생을 마감하는 톨스토이. 그의 마지막은 벌써 몇십년 전에 이미 계획하고 있었던 거다. 정말이라니까! 한 번 읽어보시면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