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 명의 삶 \ Q. E. D. ㅣ 큐큐클래식 4
거트루드 스타인 지음, 이성옥 옮김 / 큐큐 / 2021년 6월
평점 :
.
미국의 시인, 소설가, 극작가, 미술품 수집가 거트루드 스타인은 1874년에 지금은 피츠버그에 속한 펜실베이니아주 앨러게니에서 부르주아 유대인의 다섯 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저택 부지가 10에이커에 달할 정도로 부잣집 막내딸의 성장과정이야 굳이 찾아 소개할 필요는 없을 거 같다. 작품 속에 계속 독일 이민자가 등장하는 걸 보니, 이 집안도 독일계 유대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트루드가 네 살이 되었을 때 가족은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 정착했고(불과 4년 동안이지만), 자녀들은 유대학교와 히브리 교회 시나고그에 다녔단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출간한 작품 속 주요 등장인물의 유대인 정체성은 전혀 또는 거의 보이지 않고 독일인 정체성만 도드라진다.
부모가 세상을 뜨자 거트루드의 큰오빠는 동생을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의 외가 친척과 함께 살면서 대학에 다니게 돌보아준다. 하버드 대학 부속 래드클리프 칼리지에서 심리학을 배우기도 하고, 스물세 살 때엔 매사추세츠주 해양생물학 연구소에서 발생학을 공부하기도 하다가, 래드클리프에서 지도했던 윌리엄 제임스는 스타인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을 추천, 입학하며 이 책을 쓰게 만든 초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여성을 만나게 된다.
메이블 헤인즈와 메리 북스테이버. 이들은 동성간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이들 사이에 거트루드 스타인이 들어가면서 졸지에 삼각관계를 만들어버린 거였다. 게이들의 삼각관계는 몇몇 소설을 읽어 어떤 식으로 발전하고 연애하고 헤어지는 지 제법 과정을 알고 있다고 생각해왔던 반면, 레즈비언의 삼각관계는 어떻게 발생, 진전, 결말을 맺는지 알지 못했는데, 그래서 더 재미있을 것 같기도 했지만, 아이고, 골치만 아팠다. 성을 매개로 하는 사랑에 관해서는 전혀 가능성이 없고, 가능성을 만들지도 않을 나는 젊은이들의 특권인 습식 사랑을 적극적으로 권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사랑으로 인해 좀 덜 아파했으면, 덜 아팠으면 좋겠다.
《세 명의 삶》은 볼티모어의 브리지포트 시장 부근에서 머틸다 아가씨의 시중을 들며 사는 착한 하녀 애나, 피부색이 좀 덜 검은 멜란차, 볼티모어 살 때 역시 스타인의 하녀로 일하던 레나 레벤더의 이름을 따온 독일 아가씨 레나의 사는 모습을 중∙단편 소설로 써서, 돈 많은 집안의 막내 따님이니, 서슴없이 자비출판한 책이다. 책이 시장에 나왔을 때가 1909년. 이 가운데 <멜란차>가 중편으로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지만, 시대도 세대도 차이가 심해서 읽다가, 읽다가 멀미가 심하게 나는 바람에 중간에 때려 치웠다. 덜 검은 유색인 여성 멜란차와 남자 흑인 제프 켐벨의 관계, 이것이 스타인 자신과 메리 북스테이버의 관계를 여-남으로 바꾼 것이라고 해설에 쓰여있다.
<Q.E.M>은 라틴어의 앞 글자 세 개를 모은 것으로 수학 정리의 증명이 끝났을 때 “증명 끝!”의 의미로 답안지 제일 마지막에 QEM! 이라고 관습적으로 쓰는 거다. 비록 학교 다닐 때 한 번도 Q.E.M.이라고 쓴 답안지를 제출해본 적은 없지만. 중편소설 <Q.E.M>은 《세 명의 삶》을 출간하기 6년 전인 1903년에 쓴 단편소설 세 편을 실은 소책자였지만, 거트루드 스타인의 정식 출판작품 목록에는 누락된 것으로 보아 스타인이 그저 습작으로 생각했거나, 다른 작품, 예컨데 《세 명의 삶》 가운데 <멜란차>로 다시 썼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있을까? 하여튼 그렇다. <Q.E.M>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아델. 아델이 거트루드 스타인 자신의 모습이고, 2부 헬렌이 성적으로 동정이었던 거트루드 스타인에게 육체의 습식 쾌락을 처음으로 알게 해준 메리 북스테이버를 대신한 인물이며 (크게 기대하지 마시라, 1903년이라서 입술을 맞부딪는 키스와 포옹이 전부다,) 3부 메이블은 갑자기 스타인이 나타나 자기 연인 메리 북스테이버로 하여금 바람피우게 만들어 열을 잔뜩 받은 질투의 여신 메이블 헤인즈의 현현이다. 작가가 등장인물 아델로 등장하니 당연히 아무런 잘못도 없고, 생각 건전하며, 몸도 튼튼한데다가 돈도 무척 많아 세잔, 마티스, 피카소의 작품들도 척척 사들였을 정도였다. 그러니 당연히 작중 인물 헬렌도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자기 품으로 달려올 줄 알았지. 하여간 작품 속에서 아델은 질투에 눈이 먼 메이블이 헬렌을 심하게 가스라이팅하는 것으로 만들어놨다.
헬렌은 무지하게 엄한 법관 아버지를 두어 용돈도 많이 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오페라를 즐기고 메이블과 몇 달 동안 유럽여행을 가고 하는 걸 보고 아델은 메이블이 오페라 관람비는 껌이고, 유럽 여행에 드는 거액의 돈으로 헬렌의 코를 뀄다고 여기는데, 하여간 20세기 초 부르주아 딸들이 이런 허영과 사치와 사랑을 겪으면서 고통스럽다고, 젊음의 아픔을 지나고 있다고 앙탈부리는 걸 읽어주어야겠는지 나는 모르겠다. 그것도 애매모호한 추상명사 만을 사용해 끝없이 말다툼을 벌이는 걸 말이지.
등장인물(들)도 자신들이 거의 1만 명 가운데 하나일 정도로 경제적인 혜택을 받는 특별한 계급인 줄 인식하고 있다. 메이블과 헬렌이 함께, 아마도 메이블이 여행경비 일체를 헬렌에게 꾸어 주었다는 불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유럽으로 여행을 간 것이 아델은 아니꼽다. 그런데 이렇게 말한다.
“쳇. 당장 빵과 버터가 없어서 굶어야 하는 사람에게 고상한 영향력 따위가 대체 무슨 소용일까?”
당장 빵과 버터가 없어 쫄쫄 굶는 사람들이 있는 줄은 알고 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이어지느냐 하면,
“헬렌이 부모님과 어정쩡하게나마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헬렌에게 필요한 건 빵이 아니라 버터일지도 몰라. 메이블은 빵과 버터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이고. 앞으로도 기꺼이 제공하겠지만, 나는 아무것도 줄 수가 없어. 아, 이런. 버터도 못 발라주는 관계라니. 나처럼 비겁한 사람이 또 있을까. 그래도 이따금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짜릿한 순간들이 있었잖아.” (p.363)
법원장의 딸도 빵과 버터를 얻어야 한다. 그런데 부모가 빵과 버터 주기를 거절한다면? 1899년, 스물다섯 살의 스타인은 “여성을 위한 대학교육의 가치”를 주제로 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평균적인 중산층 여성은 남성 친척, 남편, 아버지 또는 형제의 지원을 받습니다. 경제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과도한 경제적 의존은 여성으로 하여금 과다하게 섹스를 하게 만듭니다. 남성의 비정상적인 성욕에 적응하는 것, 먼저 인간이고 다음에 여성이어야 하는 존재가, 언제나 여성인 존재로 변하는 것입니다.” (위키피디아)
혹시 헬렌도 자신한테 필요한 “빵과 버터”를 얻기 위해 메이블과 헬렌에게 과도한 섹스를 바쳤던 거였나? 헬렌에겐 한 수저의 버터도 얻어내지 못했지만.
아이고, 하여간 읽기는 했는데, 앞에서 말했듯, 온통 추상명사만 나열된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들의 말장난이 하도 속을 뒤집어놔서 책 읽은 다음에 애먼 쐬주나 한 병 깠다. (아이 씨, 오늘 왜 이래. 내가 써놓고 무슨 이야기인지 나도 모르겠네.)
이후 파리에 정착한 거트루드 스타인은 자신의 집에 “스타인 살롱”을 만들어 당대의 화가, 작가들의 아지트로 꾸몄으니 단골로 와서 공짜 술과 음료를 즐겼던 잡것들의 명단을 들면, 피카소, 헤밍웨이, 게츠비, 아니, 핏제럴드, 싱클레어 루이스, 파운드, 게빈 윌리엄스, 손튼 와일더, 셔우드 앤더슨, 시릴 로스, 기욤 아폴리네르 등등 이름만 나열해도 1박2일은 걸릴 거 같아서 그만 쓴다.
근데 널리 이름이 난 정통 유대인인 거트루드 스타인이 2차세계대전 당시에 파리에서… 나치의 손에.... 안 죽었다. 그게 무척 신기해서 좀 알아봤더니, 프랑스 비시 괴뢰 정부에서 막강한 힘을 자랑하던 베르나르 파이가 “평생 가장 중요한 친구”라, 스타인을 끝까지 보호해 명줄을 이은 건 물론이고, 생활도 여태까지 살던 대로 그냥 살 수 있게 해주었단다. 그러니 어떻게 했겠어? 비시 정권에 봉사할 수밖에. 그리하여 페탱 원수의 길고 긴 연설문을 영어로 번역하는 등의 사역을 했을뿐더러 직접 서문을 쓰기도 한다.
“페탱의 정책이 너무나 훌륭하고 지극히 단순하며 굉장히 자연스럽고 비범하다.”
이 영어 연설문은 당연히 미국에서 출판을 거절당했다. 하긴, 일찍이 1934년에는 뉴욕 타임스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히틀러가 노벨 평화상을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도 했으니 무슨 말은 못했을까.
이렇게 우리의 거트루드 스타인은 한 평생 아쉬운 거 1도 없이 평생을 떵떵거리며 살다가 1946년 벨기에 여행을 다녀온 후에 위암이 도져 72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숟가락 놨다. 뭐 그것도 한 삶이긴 하다. 그런데 뭔가 좀 아쉽다. 어째 애도가 안 되네 그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