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대산세계문학총서 189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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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반 투르게네프는 러시아 중부 오룔 지방의 귀족 지주 집안 출신이다. 그리고 부르주아다. 얼핏 귀족에다 지주라면 무조건 부르주아일 것이라 생각할 지 모르지만 러시아에서는 천만의 말씀이다. 하도 땅이 큰 나라라서 지주도 지주 나름이고, 땅도 땅 나름이다. 투르게네프 집안도 재산의 대부분이 아빠 집안에서 내려 받은 게 아니라 엄마가 당당한 여지주로 넓고 넓은 소작지를 적절하게 분배해 그나마 성실하고 양심적인 관리인들을 배치해 부를 유지하고 있었던 거다. 투르게네프도 작품 속에 러시아에서 지주 해먹기의 어려움을 여러 번 호소한 적이 있다.

  투르게네프는 귀족 부르주아의 자제답게 모스크바대학,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을 거쳐 베를린 대학에 유학한 후 서사시를 발표하는 등 문학활동을 하다가 내무성 공무원으로 들어가 2년 만에 때려치웠다. 전업작가 한다는 핑계로. 1852년에 당국에 심각하지는 않은 이유로 체포되어 61년까지 약 10년 간 고향에 연금당해 이 시절에 쓴 짧은 소설을 모은 것이 《어느 사냥꾼의 수기》다. 투르게네프 가운데 제일 낫다. 무식한 내가 읽기에 그렇다는 말씀.

  연금생활, 얼핏 읽으면 나라에서 연금받아 생활하는 거 같은데, 이럴 때 한자어를 썼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軟禁 강도가 가벼운 감금생활이 끝나자마자 우리의 이반 투르게네프는 유감없이 젊은 시절을 보냈던 서유럽으로 튀어 나머지 생애 거의 대부분을 보내며, 작품활동도 활발하게 한다. 물론 파리, 베를린, 이 책의 주요 무대로 나오는 바덴바덴 같은 곳에서 아빠가 오룔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하고, 물론 연애도 하고, 유명인사도 사귀면서. 그러나 투르게네프의 머리 속엔 언제나 Green green grass of home, 자기가 무슨 톰 존스나 되는 듯이 고향의 푸른 잔디가 삼삼했으니 당연히 러시아의 자연 풍광과 기억이 많이 등장한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일제 강점기를 경험한 노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질을 이야기할 때 제일 지긋지긋했던 것이 소위 엽전론이었다. 해방 후 지식이나 자본적 기초가 완벽하게 없던 시절, 하는 사업은 당연히 완벽하지 못할 수밖에 없었고, 그걸 일제가 충분한 지식과 자본으로 ‘훌륭하게’ 완성했던 기억에만 싸여, “하여튼 엽전이 하는 건 어쩔 수 없어.”나 “저러니 엽전, 엽전 하는 거야.” 같이 비아냥거리던 거, 나는 목격했다. 이 비슷한 걸 1990년대에도 써먹은 적이 있다. 기억하시려나? 당시 자민련 총재하던 김종필(편히 쉬시라)의 “충청도 핫바지론.” 투르게네프도 조국 러시아 역시 서둘러 서유럽의 과학, 사상, 철학, 체제, 양식, 건축, 생활 등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어 얼마나 속을 태우는지.

  이 책의 제목은 팜파탈이라고 할 수 있는 이리나 파블로브나 라트미로바와 그리고리 미하일로비치 리트비노프 사이의 연애에 중점을 두지 않고 러시아 사람 모두, 러시아 전부를 잠시 올랐다가 흩어지고 마는 “연기”라고 한 것에 주목했다. 투르게네프는 한 남자를 두 번이나 골로 가게 만드는 일종의 악녀 이리나 이야기에 맞먹거나 더 중요한 무게로 러시아의 서구화를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모든 것이 급히 어딘가로 서둘러 가고 있지만, 모든 것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풍향이 바뀌면 모든 것은 반대쪽으로 몰려간다. 그리고 거기에서 똑같이 지칠 줄 모르는, 요란하고 불필요한 유희가 다시 시작된다. 최근 몇 년 동안 자기 눈앞에서 시끄럽고 떠들썩하게 일어났던 많은 일이 떠올랐다…… ‘연기다.’ 그는 속삭였다.” (p.259)


  사랑 이야기만큼 다양하게 독자를 매료시키는 것이 또 있을까? 이중에서도 또 불륜만큼 궁긍증을 유발시키는 것도 없을 듯. 투르게네프는 바로 이 불륜을 바늘 끝으로 톡 찌르고 있다.

  주인공 리트비노프 입장에서 이 불행한 사랑은 1862년 8월 10일, 독일의 유명 휴양 온천도시 바덴바덴에서 시작한다. 바덴바덴에 와서 온천과 도박을 즐길 수 있는 특출난 예술 애호가 X백작을 비롯한 소수의 러시아 명문 귀족 과 최신 유행을 좇는 부르주아, 장군들을 일컫는 “우리 사회의 정화精華”가 모인 ‘교제의 집’ 도박장이 첫 무대이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사회의 정화 다음 계급으로 밤바예프, 호인이지만 실속 없는 로스티슬라프, 구바료프, 보르실로프 등 그저 그런 지주 수준의 계급이 있어서 주머니 사정이 좀 괜찮은 리트비노프도 이 ‘약간 처지는’ 그룹에 속한다.

  그리고리 미하일로비치 리트비노프는 상인 집안 출신의 성실한 퇴역관리의 아들이다. 기숙여학교를 나온 어머니는 선량하고 열광적이지만 성질도 있다는데, 남편보다 스무 살이나 적어 만족시키지 못한 리비도의 영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성질 있는 어머니는 아버지를 재교육시키기 시작했고, 그 결과 미하일은 관리생활을 때려 치우고 큰 영지를 거느리는 지주로 변신했다. 이 과정에서 원래 강하고 견디기 힘든 성격이 어느새 온순하게 바뀌었는데 암만해도 원래 이 영지가 어머니 소유였으며, 생존하기 위해 어머니 자신이 강골의 여지주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월이 흘러 아들이 모스크바 대학에 입학하자 이제 자신이 할 일은 다 마쳤다는 듯이 어머니는 폐결핵으로 세상을 접고 말았다. 리트비노프는 이 일을 계기로 대학을 중퇴하고 영지로 내려와 시골 생활을 하고 있었다.

  10년 전인 1850년대초. 한 시절 눈부신 광휘를 날리던 대 귀족 오시닌 공작 가문이 급격하게 몰락해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류리크의 후예로 순수한 러시아 혈통을 자랑했으나 이상하게 폭삭 무너져 벽지로 추방당했다가 훗날 복권 됐지만 공작 직위의 복권을 말하는 것이지 날린 재물까지 회복시켜준 것은 아니었다. 이때 리트비노프의 아버지가 이들에게 작은 도움을 주었으며, 마침 모스크바에서 학교를 다니던 아들 역시 수시로 공작 댁을 방문했는데 척하면 척이듯, 맏딸 이리나한테 한 눈에 반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천상의 외모를 지닌 아름다운 이리나. 하지만 하느님은 몽땅 다 주는 양반이 아니어서 이리나 파블로브나는 변덕스럽고 야심만만했으며 무모하고 오만해 자기 속을 주지 않는 아이였다. 오시닌 공작이 보기에도 이리나의 빼어난 외모가 자기 집안을 곤경에서 구해줄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으니 당연히 거의 무제한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을 터. 이 아가씨의 눈에 한갓 시골 영지의 지주 아들이 눈에 차겠느냐고? 이리나는 두 달 동안 리트비노프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으로 괴롭히다가 마치 뇌우가 몰려오듯 사랑을 느꼈던 것 같다. 그게 만일 사랑이라면 말이지만.

  이미 스무 살을 넘긴 리트비노프는 당장 청혼을 한다. 반면에 이리나는 둘 다 너무 젊으니 남의 눈치도 볼 겸, 아직 청혼을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해 속 없는 애인은 요청을 받아들인다. 공작 내외가 보기에 사위짜리가 돈은 좀 있는 집안 같아도 아무래도 가문이 좀 껄쩍지근하다. 지주가 뭐야, 지주가. 적어도 백작, 남작은 되어야지. 이때 황제가 오랜만에 모스크바를 방문하면서 귀족을 대상으로 대 무도회를 개최한다고 초청장을 보내왔다. 공작은 없는 살림에 이리나에게 좋은 무도복을 맞춰 입히고 대 무도회에 ‘귀족의 의무로’ 참여하는데 어라, 이리나는 리트비노프에게 무도회에 가지 말 것을 부탁한다. 말이 부탁이지 강요 비슷하다. 그래서 그렇게 했고, 이리나는 자기 스스로 미리 짐작했듯이 대 무도회의 가장 빛나는 별로 반짝였으며, 한 순간에 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의 모든 왕가, 귀족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어, 사흘만에 리트비노프를 퇴짜놓고 페테르부르크행 트로이카에 오른다.


  그러나 1862년의 바덴바덴에서 리트비노프가 기다리고 있던 여인은 타티아나 페트로브나 셰스토바. 6촌 여동생이자 약혼녀다. 수다장이 고모 카피톨리나 마르코브나와 함께 드레스덴에서 살고 있으며 3일 전에 도착한 바덴바덴에서 리트비노프와 좋은 시간을 보내려 트렁크를 꾸리고 있는 중이다. 착하고 수줍으며 리트비노프의 러시아 영지에서 겨우 2백 베르스타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영지를 가지고 있는 지주 집안의 외동딸이다. 겨우 2백 베르스타? 땅이 크면 그깟 220km 정도면 이웃이다, 이웃. 마차 타고 열라 가도 도중에 강도떼만 안 만나면 3일밖에 안 걸리니까.

  8월 10일 앞서 이야기한 비슷한 계급의 남자들과 즐겁지만 유쾌하지 않은 잡담을 늘어 놓고 있던 리트비노프는 검은 베일이 달린 챙 넓은 모자를 쓴 키가 크고 날씬한 부인이 계단을 오르다가 흘낏 그를 발견한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19세기에는 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앞에서 실컷 설레발을 쳐놓았으니 이 날씬한 부인이 누구인지 다들 눈치 채셨지? 맞다, 그 여자.

  이리나가 가는 곳에는 그림자처럼 한 남자를 볼 수 있으니 퇴직 7등 문관에 불과한 신분의 포투긴. 이 양반이 중요한 조연인 것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러시아의 서구화, 러시아 엽전론 등을 거의 모두 포투긴의 입을 통해 발언하기 때문이다. 러시아를 열렬히 사랑하면서 열렬히 증오하는 서구주의자. 정부청사에서 20년간 근무했다가 이리나한테 꼴딱 반해 스스로 망가져버린 남자. 대강 감이 잡히시지?

  그러거나 말거나 그리고리 미하일로비치 리트비노프가 친구들과 헤어져 호텔 방에 들어오니 방의 창가에는 헬리오트로프 꽃다발이 짙은 향기를 뿜으며 놓여 있었다. 누가 보냈는지 궁금한 리트비노프가 사환을 불러 물어보니, 키 크고 좋은 옷에 베일을 쓴 부인이 보냈다고 한다. 아이쿠, 이제 사건이 본격적으로 벌어진 것. 딱 감이 잡히는 건, 이제 착하고 어여쁜 타티아나하고는 다 살았네,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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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4-11-14 1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헬리오트로프 꽃다발인 이유가 있군요^^

Falstaff 2024-11-14 16:01   좋아요 0 | URL
앗, 읽고 계시는군요! ㅎㅎㅎ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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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76세의 줄리언 반스가 쓴 소설. 원 제목은 <엘리자베스 핀치 Elizabeth Finch>. EF라는 사람 이름의 문화사, 문명사 교수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핀치 교수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그이의 이름을 줄여 줄곧 ‘EF’라고 약칭한다. 20대 말부터 40대 초의 늙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와 문명’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하는 것으로 보아 일반 대학은 아닌 것 같고 대학원인 것도 같고, 대학과정을 갈음하는 사회적 교육기관일 수도 있는 것 같은데 크게 중요하지 않다. EF가 주장하기를 교육의 최고 형태는 ‘협력’이란다. 그러니 수업은 교수가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교수와 학생, 학생과 학생 사이의 원활한 협력으로 이루어지되, 이러한 협력의 과정이 엄격한 즐거움이 되길 희망한다고 했다.

  화자 ‘나’의 이름은 닐. 닐은 첫 수업에 들어와 EF의 교과 소개를 듣고 어쩌면 자기 평생 이번 한 번만큼은 제대로 찾아왔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하다. 그냥 한 방에 필이 팍 꽂혔다는 뜻이다.

  30대의 닐은 애초 글을 쓰거나 학문을 계속하고 싶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배우 수업을 받았다. 처음이란 것이 18세가 되고 처음이란 건지,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했다는 건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하여간 배우를 하기 위해 수업을 받았고, 자기 주민등록등본의 배우자 란에 오를 최초의 여자, 조애나를 그곳에서 만났다. 배우수업을 마치고 TV의 작은 배역과 내레이션도 했지만 도무지 생활비도 빠지지 않아 유람선 위에서 2인조 공연도 하고, 그것도 없을 때는 레스토랑의 웨이터도 했는데, 웨이터에서 안내원으로 승진하는 바람에 배우의 꿈은 영영 접어 버렸다. 이후 시골로 내려가 버섯농사도 짓고, 수경재배로 토마토도 심었을 때 딸 해나가 태어났다. 닐보다 조금 더 재능이 있던 조애나는 배우를 포기하지 못하고 런던에 머물기로 하면서 자연스럽게 가족은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이혼하는 바람에 정신이 사나워진 닐도 런던으로 올라와 대학원(이라고 치자고 앞에서 합의했으니) 수업을 받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근데 딸 해나는 누가 키웠을까? 조애나가 양육비도 받지 않고 키우기로 했나? 모르겠다. 안 나온다. 이후 혼외자가 하나 더 생기고, 두 번째이자 마지막 결혼생활 중에 아이 하나가 더 생기고 또 이혼하는데, 세 아이를 떳떳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양육비 지급은 착실하게 한 듯하다.


  엘리자베스 핀치 교수를 결코 공적인 인물로 볼 수도 없고 EF 스스로도 전혀 그렇게 주장하지 않는다. 대학교수이면서도. ‘협력’을 최고의 교육방법이라고 주장하는 EF는 그러나 철저하게 독립 연구자이며, 최고수준의 지식을 갖추고도 자신의 개인적인 관심을, 개인적인 관심만 좇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니 세상에 이름이 나지 않을 수밖에. 부촌인 웨스트 런던에서 살며 1890년대부터 1910년대까지 여성 무정부주의자들을 연구한 <폭발하는 여자>와 민족주의, 종교, 가정, 가족을 다룬 <우리에게 필요한 신화들>, 이렇게 두 권의 책을 출간했으나 지금은 다 절판이다. EF는 기존 상식과 다른 사고 체계를 가지고 산다. 예를 들어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인물을 형용사 세 개로 줄여 깔끔하게 정리되는 게 보이면 그런 묘사/문장/이야기는 늘 불신해야 합니다.”

  형용사 세 개로 정리하여 설명할 수 있는 인간은 세상에 한 명도 없다는 뜻이다. 아주 독특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데, 내 관점으로 보자면, EF의 주장은 십분 알아듣겠고, 8할 이상 동의하며 지지할 용의도 있지만 늘 함께 하면 상당히 피곤할 거 같다. 어떤 기분이 들게 하는 사람인지 이해할 수 있을 듯. 닐의 패거리는 닐과, 네덜란드인 안나, 선동가 제프, 감정적으로 불안한 린다, 더 많은 것을 찾는 도시계획자 스티비, 이렇게 대강 다섯 명이다. 수업이 끝나면 학생 술집에 모여 각기 다른 주장을 펴고 말다툼을 하지만 적어도 네 가지에 관해서는 의견을 일치한다.

  ① 어느 당이든 정권을 잡은 정부는 쓸모없다. ② 신은 거의 확실히 존재하지 않는다. ③ 삶은 산 자를 위한 것이다. ④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봉투에 담긴 술집 안주는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

  이 네 가지 의견 가운데 교수 EF에 관한 호오는 들어있지 않다. 따라서 EF의 강의와 주장을 지지하는 닐과 안나가 있고, 반발하는 제프도 있으며, 아예 관심이 없는 축도 있으니 린다와 스티비.

  EF의 어법을 여기서 소개하지 않는 것은, 짧은 글에서 수수께끼 같기도 하고 잠언 같기도 하고, 명상록 같기도 한 말들을 인용하기엔 나의 사고범위가 좁기 때문이다. 이런 것 정도는 말할 수 있겠다. 이른바 모차르트 딜레마.

  “삶은 아름답지만 슬픈가, 아니면 슬프지만 아름다운가?”

  나는 이게 잘못된 가정이라고 생각하는 인종이다. 아름다움의 집합이 있고, 슬픔의 집합이 있는데, 어떻게 하다 보면 이 두 집합이 서로 교차하는 부분, 즉 교집합이 생기는 일이 잦아서 이런 딜레마가 생긴 거 같다. “대개 아름다운 건 슬프다.” 부사 ‘대개’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틀린 말이다. 같은 의미로 “가끔 슬픈 건 아름답다.” 상처를 입었거나, 심근경색이 왔거나, 닭튀김집 하다가 월세도 못 내서 쫓겨났는데 이게 뭐가 아름다운가 말이지. 그래서 앞 전제의 역도 부사 ‘가끔’이 빠지면 뒤통수 한 대 얻어 터질 수 있으니 조심해 말해야 한다. ‘가끔’ 보다는 ‘아주 가끔’이 더 좋다.

  닐, 어쩌면 작가 줄리언 반스의 도플갱어일 수도 있는 닐은 여기서 19세기 프랑스의 위대한 사학자, 철학자인 에르네스트 르낭의 말을 떠올린다. “나라state로 존재하려면 자기 역사를 잘못 알아야 한다.” 비단 나라라는 거대 집단 뿐만 아니라 개인도 항상, 매일, 작은 행동과 생각, 큰 행동과 생각에서 우리 자신을 속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종과 문화의 우월성에 관한 신화, 자비로운 군주, 오류가 없는 교황, 정직한 정부에 대한 믿음을 갖고 사는 건전한 국가, 국민, 개인이 되기 위하여, 역사를 알기는 알아야 하는데, 잘못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세계 각지에 거대한 식민지를 경영하는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문화와 문명과 의식수준, 교양, 측은지심 같은 것이, 짙은 피부에 휩싸이고 옷을 입지도 않고 전기와 내연기관과 화약무기를 모르고 살며 가끔 같은 호모 사피엔스 종의 고기를 먹기도 하는 인류보다 월등하게 우월하다고 오해하는 것이 편하다는 의미도 된다. 그러기 위하여 유럽인들은 쥐뿔도 모를 필요가 있다.


  기독교인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2부, 엘리자베스 핀치 교수가 암으로 사망한 후, EF의 모든 문서와 책의 관리를 위임받은 닐이 배교자 황제인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에 초점을 맞춘다. <로마제국쇠망사> 2권에서 가장 흥미로운 황제가 바로 이 율리아누스인데, 공부도 많이 해서 철학하는 황제로 이름을 높였고, 적어도 95포인트는 주어야 마땅할 전투력과 거의 100에 가까운 지휘력을 지닌 군사 지휘관이었다.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조카다. 기독교를 공인했지만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죽음의 침상에서 억지로 세례를 받고 숨이 넘어간 콘스탄티누스 1세. 깔끔하게 후계를 정하지 못해 맏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는 자색 망토를 휘날리지 못했고, 둘째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가 차지했다. 당시 황제는 군부에서 자기 군단장이 황제다, 라고 선언하고 창을 거꾸로 쥔 채 지금 황제를 칭하는 자하고 내란을 벌여 이기기만 하면 황제가 될 수 있었다. 그래 처음에는 마음이 없던 율리아누스도 부하들이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콘스탄티우스와 한 판 맞짱을 뜨러 진군하다가, 콘스탄티우스가 병에 걸려 죽고 만다.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콘스탄티우스가 후계로 율리아누스를 지목하는 바람에 피바람이 불지 않고 평화롭게 황위가 이어졌다.

  율리아누스가 보기에 문화도, 문명도 없이 오직 유일신 하나만 믿어 조지는 기독교가 로마에 들어와 공인을 받자 지독하게 그리스 로마의 신들을 박멸하는 거였다.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이 숱한 신전을 파괴하는 거였으니 말 다했다. 물론 당시 기독교겠지만 그들에겐 문화와 문명이 필요 없었다. 오직 믿기만 하면 다 알아서 해주겠거니 싶어서. 율리아누스는 기독교도들을 탄압하지 않았다. 그냥 내버려두었다. 다만 중용하지 않았을 뿐. 반면에 기독교도들은 자기들한테 명예롭기 그지없는 순교의 기회를 주지 않는 부드러운 탄압을 하는 황제가 더욱 미웠다고 반스는 주장한다. 그리하여 소설을 쓴다.

  황제 자리에 오르고 겨우 3년이 지나 율리아누스는 어리석게도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참전한다. 로마사 전부를 대상으로 해도 용맹 황제로 한 손에 꼽을 만하게 용감하다. 그리하여 사막에서 싸우다 페르시아 잡병이 우연히 찌른 장창이 오른팔뚝을 스치며 황제의 간을 관통해버린다. 기독교는 이때 황제를 찌른 병사들이 두 명의 기독교도라고, 세월이 가면 갈수록, 가필해 버렸다. 율리아누스가 아무리 훌륭한 황제라도 하다못해 순교의 명예를 주기를 거부한 반기독교도, 이것보다 더한 변절자, 배교자이기 때문에. 이교도는 용서할 수 있어도 배교자, 변절자는 눈 뜨고 못 보는 게 사막종교의 특성이니까.

  학문의 발전과 교양 교육이라는 면에서 비참하고 원시적인 상태였던 유대-기독교는 종교를 가진 문명이 아니라 자신을 뒷받침할 문명이 거의 없는 억압적 종교이며, 이것이 “로마에서” 기독교가 잘 팔릴 수 있는 독특한 장점 중 하나인 것이 분명하다. 문명은 나중에 생겨도 상관없고 없어도 그만이다. 그들에겐 종교가 문명이었기 때문에. 이 종교는 독자적이었으며, 유일했으며, 따라서 절대적이었고, 불가피하게 독점적인데다가 타협 불가능한 종교였다. 헬레니즘은 한 방에 가버렸다. 로마 역시 로마를 위해 “역사를 잘못 알고 있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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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11-12 09: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디오북으로 1부를 들었는데, EF라는 인물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내용이 쉽지 않을 것 같아요^^

Falstaff 2024-11-12 21:02   좋아요 1 | URL
노년의 작가들이 쓴 작품이 종종 그렇듯이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좀 세게 드러냈습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확 읽어버리세요. ^^

은하수 2024-11-12 1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2부 읽고 있는데..
EF라는 인물은 참 규정하기 힘든 인물이라 읽으면서 머릿 속 어딘가에 붕 떠있는 느낌이예요.
쉽게 잡히지 않네요. 진도도 잘 안나가구요. 팔님 리뷰 읽으니
다시 분발해야겠다 싶네요.
기운이 납니다~~^^

Falstaff 2024-11-12 21:07   좋아요 1 | URL
이런 작품은 반스가 평소 쓰지 않았는데 그래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참 독특한 시각이었습니다. 국가, 정체, 집단, 그리고 개인을 유지하기 위하여 역사를 오해할 필요가 있다... 현상을 제대로 비꼬고 있습니다. 하여튼 반스는 놀라운 작가입니다. ㅎㅎㅎ
 
밤 풍경 을유세계문학전집 135
E.T.A. 호프만 지음, 권혁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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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의 낭만주의 문학은 괴테와 실러에 이르러 극점에 올랐다. 극점? 가장 꼭대기. 그러면 이제 남은 일은 꼭대기에서 내려오는 일. 이렇게 독일의 후기 낭만주의를 시작하고, 이를 이끄는 그룹으로 한 세대 아래 작가들이 등장하니, E.T.A. 호프만,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테오도어 폰타네, 고트프리트 켈러,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같은 이들이었다. 물론 더 다양한 작가들이 있으나 내가 읽어본 사람들만 뽑으면 그렇다는 거다. 이들이 만든 백화제방. 각기 다른 방면으로 자신의 문학을 펼쳐 난만한 화전을 만들었지만, 앞에서 거론한 괴테와 실러, 워낙 막강한 봉우리에 가려 그리 눈에 확 들어오지는 못했다. 적어도 극동 아시아 변방의 독자에게는. 문학적으로 지향하는 바도 서로 달라 호프만은 엽기 환상, 슈티프터는 자연으로의 회귀, 폰타네는 남녀상열지사, 켈러는 스위스 사람이니까 그냥 건너 뛰고, 클라이스트는 정치변혁 같은 주제를 선호했다.

  이들 가운데 오늘의 주인공 E.T.A. 호프만, 에른스트 테오도어 아마데우스 호프만은 괴테가 스물일곱 살 때인 1776년에 태어나 괴테가 죽기 10년 전인 1822년 6.25날 죽었다. 그러니 평생 추밀고문관 괴테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다. 하긴 그 시절로 보면 괴테가 너무 오래 살기도 했지만. 구체적인 바이오는 생략하고, 하여간 다양한 예술 방면으로 놀라운 재능을 과시한 호프만은 당시에 소설가, 극작가, 법학자, 피아니스트, 작곡가, 그리고 음악 평론가로 활약했다. 우리나라에서 출간한 호프만의 단행본 가운데 표제작으로 가장 많이 쓰인 단편소설 <모래 사나이>는 19세기의 독일태생 프랑스 작곡가 자크 오펜바흐에 의하여 오페라 <호프만 이야기>의 1막으로 다시 만들어져 우리나라의 가장 유명한 소프라노 조수미도 작중 여자인형 올랭피아의 아리아를 자주 노래한다. 이렇게 호프만은 후대의 시인, 소설가, 음악가한테 크고 많은 영향을 주었으니 비록 이 책의 앞날개에 쓰인 대로 “에드거 앨런 포, 도스토옙스키, 보들레르, 발자크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더라도, 내 생각을 말하자면 이후 유럽 각지에서 쓰이는 고딕 문학, 고딕 소설의 기초를 만드는 작가 가운데 중요한 한 명이었을 것이다. 설마 <모래 사나이>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나타니엘이 사랑에 빠지고 만 인형 올림피아를 리얼돌하고 연관시키지는 않으시겠지? 암, 그래야지.

  그런데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큰 그림을 보자. 호프만, 슈티프터, 폰타네, 켈러, 클라이스트. 괴테와 실러는 18세기 사람이라 그렇다고 치자. 그러면 독일 후기 낭만주의의 꽃을 피운 이 사람들이 19세기 초에 만들어내는 독일 문학. 앞 세대까지 독일의 문학은 다른 지역과 비교해 꿀리지 않는 위상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게 큰 작가 한 명, 괴테의 힘에 전적으로 기댔다고 쳐도. 하지만 후기 낭만주의 문학부터 본격적으로 “재미없는 독일 소설/문학의 시대”가 열린다. 재미가 있고 없고는 당연하게 다른 특정 작품군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것일 수밖에 없다. 하필이면 조금 차이가 있지만 19세기 들어 영국 문단에서는 디킨스와 셰커리를 필두로 (매리) 셸리와 브론테 자매 등이, 파리에서는 위고와 발자크, 그리고 뒤마가 위대한 프랑스 문학의 세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내가 거론한 저 다섯 명의 독일 후기 낭만주의자 말고도 같은 시대에 활약한 독일어 작가들은, 하필이면 칼라스와 테발디가 밀라노 극장을 장악한 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한 다른 소프라노들처럼 불운의 별을 타고났다고 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그게 다 팔자고 운명이니 괜히 핑계대지 말라고, 몇 년 있다가 저승 가서 만나면 얘기해줘야겠다. 그래도 책임은 당신들이 지라는 것도 빼먹지 말고. 아참, 난 유물론자이지? 흠. 만날 수 없겠는 걸.


  《밤 풍경》은 1817년에 두 권으로 출간했는데, 을유문화사가 회사의 이름에 걸맞게 두 권, 여덟 편을 묶어 단행본으로 내놓았다. 46세에 매독이 악화되어 죽은 호프만은 참 다양한 작품을 내놓았다. 소설 작품은 물론이고 성악곡, 기악곡, 무대음악도 다수 작곡해 발표했는데 이 가운데 오페라 <운디네>가 유명하다. 당시에 그랬다는 거다. 지금 <운디네>하면 구스타프 로르칭이 작곡한 것이 아주, 아주 가끔 무대에 올려질 뿐이다. 20세기 이후 호프만은 거의 전적으로 소설가로 기억하는 듯하고 그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그의 소설작품은 참으로 다양한 양식으로 다시 만들어졌으며, 예를 들어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과 레오 들리브의 발레 <코펠리아>, 앞서 예를 든 오펜바흐의 <호프만 이야기> 같은 것을 필두로 로베르트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까지, 후대 예술인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는 건 분명하고, 이에 대한 찬사는 받아야 마땅하다. 물론 지금 읽어보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기는 하지만. 이 책 《밤 풍경》도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 건 마찬가지다. 대부분 비슷한 플롯으로 되어 있고, 유령이나 혼령, 기타 불길한 운명 같은 이야기를 빼면, 책이 존재하지도 않을 것처럼. 모두 여덟 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있어 개별적인 작품 소개를 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가장 분량이 많은 <이그나츠 데너>만 말해보겠다. 다른 작품도 다 대동소이, 뭐 그런가보다, 하셔도 좋다.


  저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 알로이스 폰 바흐 백작이 살았는데, 백작이 시종 사냥꾼으로 안드레스라는 충실한 하인을 두었다. 바흐 백작이 공무가 있어 나폴리에 출장 갈 일이 있어 안드레스를 데리고 간 것이 크게 다행이라, 노상강도를 만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충직한 시종 사냥꾼이 죽음을 무릅쓰고 강도들을 격퇴하여 기적적으로 상전을 구해냈으니 이 아니 대견했겠느냐는 말이지. 이때 나폴리 여관에 머무를 당시 그림처럼 아름다운 불쌍한 고아 아가씨가 있었으니 이름을 ‘조르지나’라 했다. 마당과 부엌에서 가장 허드렛일을 하고 있다가, 백작의 신임을 받는 안드레스와 한 눈에 파박, 불꽃을 피워, 불꽃을 피운 김에 사랑이 깊어져서, 이를 눈치챈 백작이 이들을 배려해 함께 귀국하는 걸 허락했고, 독일 땅을 밟기도 전에 둘은 혼인의 서약을 하기에 이르렀으며, 영지에 도착한 후에 백작은 자기 목숨을 구해준 것을 보답하는 의미에서 시종이 아니라 영지 사냥터 총관리인으로 임명해 나이든 하인 한 명과 더불어 부부는 숲 속 오두막에서 깨소금 같은 신혼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그러나, 틀림없이 백작은 선의로 이들을 숲 속 단독주택으로 보냈거늘, 정작 깊은 숲에 들어와보니, 풍요로운 삶은커녕 실제 살아보니 힘겹고 고생스러우며 궁핍한 생활을 피할 수 없었다. 역대 다른 숲 관리인처럼 대강 알아서 벌목해 밀반출하고, 짐승 잡아 내다 팔아 돈을 장만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상전이 주는 삯만 가지고 살려니 그게 어림도 없었던 거다. 백작은 백작대로 기껏 잘 살게 해줬더니 지랄한다고 여겼을 게 분명하고. 이 와중에 젊고 건강한 부부답게 아이가 생겼고, 몇 달 후에 잘 생긴 아들이 나왔지만 조르지나는 그때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해 이젠 거의 죽은 목숨이라고 봐도 많이 틀리지 않은 상태. 늙은 하인이 자기 수중에 있는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시내에 나가 몸을 보신, 보양할 수 있는 음식을 사오겠다고 하며 장에 간 사이에 안드레스의 집에 키가 크고 마른 체격 그리고 깊숙이 모자를 눌러쓴 나그네가 도착한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이 나그네의 이름이 작품의 제목 ‘이그나츠 데너’다. 자신을 상인이라 소개한 나그네는 병상의 조르지나를 보더니 자기가 약재를 중개한 경험이 있어서 몇 가지 물약을 가지고 다니며, 이 가운데 묘약도 있다면서 조르지나를 위하여 하인이 가져온 식품과 약초를 이용해 직접 수프를 끓여 먹이기도 하고, 밤새 조르지나의 침상을 지키며 시간 맞춰 묘약을 한 방울 씩 환자의 입에 흘려 넣어준다. 당연히 조르지나는 다음날 아침부터 당장 크게 회복을 해, 감격한 안드레스는 나그네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한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고귀한 행위에 대해 내가 생명과 피로 보답할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책 좀 읽지 않아도 이런 약속은 나중에 크게 후회할 일이 된다는 것을 웬만하면 다들 아는 법. 이에 나그네는 한술 더 떠서 부인을 위해 무조건 받아야 한다며 금화 몇 닢을 건넨다. 안드레스 내면의 목소리는 절대 금화를 받지 말라고 하지만 환자인 조르지나는 그걸 받지 않으면 자신이 숨이 넘어갈 거 같으니 받을 것을 권한다. 이렇게 나그네는 안드레스와 가족에게 세 가지 조건으로 숲 속 빈한한 관리인이 풍족하게 살게 해주는데:

  첫번째. 1년에 두 번 숲을 통과할 수 있게 해줄 것.

  두번째. 가을에 다시 올 때까지 작은 보석 상자를 맡아줄 것. 상자 속 귀걸이, 목걸이, 팔찌 등은 숲 생활이 심심할 것이 분명한 조르지나가 수시로 착용해봐도 좋음.

  세번째. 오늘 숲 바깥으로 동행해 히르슈펠트로 가는 도로까지만 안내해 줄 것.

  나그네는 만일 자신이 3년 동안 돌아오지 않으면 상자와 상자 속 보석을, 안드레스는 분명히 받지 않을 터이니, 안드레스의 아들에게 선물하겠다고 한다. 이것도 당연히 조건이 있다. 아들이 견진성사 받을 때 이름에 ‘이그나티우스’를 추가해달란다.

  어때? 좀 으시시 하지? 이야기는 당신 생각 비슷하게 흘러간다. 읽으면 읽을수록 고딕의 굴레에 갇히는 느낌. 그러나 여지없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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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2024-11-11 1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낭만적입니다. 다만 유물론자라서 아쉬웠고요(?) 바이오라는 말을 찾아볼 수 있어 좋아고요. 줄거리를 잘 따라갔는데, 스포때문에 생략한 점이 아쉬웠습니다. 리뷰 감사드립니다.

Falstaff 2024-11-11 14:52   좋아요 0 | URL
요즘에 유물론자가 저 한 명인가요. ㅎㅎㅎ 건물 옥상에서 돌 던지면 유물론자 이마가 깨집니다. 즐겁게 읽으신 거 같아서 고맙습니다.

그레이스 2024-11-13 2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괴테를 낭만주의 범주에 넣으셨네요?^^
그는 낭만주의이기를 거부한 걸로 아는데,,, 이상하게 낭만주의로 읽혀요.
실러 역시 괴테를 따라 바이마르 고전주의 모임의 일원인걸로!
근데 읽다보면 낭만주의적이죠?!

Falstaff 2024-11-14 04:07   좋아요 1 | URL
괴테 욕심이지요. 자신은 르네상스 족속이라는 주장일 텐데, 가히 추밀고문관스럽지 않습니까? ㅎㅎ
 
가벼운 점심
장은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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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은진, 1976년 12월에 김희진과 함께 일란성 쌍둥이로 광주광역시에서 출생, 전남대 지리학과를 졸업한 후 2002년에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해 등단했으나 지방신문이라는 것에 조금 캥기는 게 있어서 그랬는지 2004년에 중앙일보에서 신춘문예 대신 시행하는 중앙신인문학상을 받아 드디어 중앙문단의 말석에 자기 방석을 깔았다. 쌍둥이 동생 김희진도 2007년에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혀>를 응모해 당선한 작가. 친 자매이긴 하지만 장씨와 김씨, 성씨가 달라 둘 중 하나를 남의 집 양녀로 보냈나, 하고 의심할 수 있지만 그러지 마시라. 원래 김은진인데 필명으로 장은진을 쓰는 거다. 이이가 그동안 이효석문학상, 문학동네문학상 등을 받은 중견 작가. 장은진은… 어디선가 이이가 <벤야민타 하인학교>에 관한 글 한 꼭지만 읽어봤을 뿐이다. 1985~2013년 사이의 내 책장은 황량하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작가는 거의 모른다. 내가 봐도 놀랍다. 자본주의의 힘. 한 가족을 먹여 살… 아니다, 다들 그렇게 살았다. 그리하여 2019년에서 20년 사이에 쓴 중단편 소설 여섯 편을 모아 2024년에 찍은 《가벼운 점심》으로 장은진의 작품을 처음 읽는다.

  43세의 작가라면, 가히 최고 전성기 시절이라 볼 수 있다. 이이의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어 이 책도 전성기적 작품집인지, 더 훌륭한 작품이 많은 지 알지 못한다.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작품은 여유로웠으며, 연륜도 얹히기 시작하는 것 같았으며, 주위를 둘러보는 여유도 이미 찾은 것처럼 읽었다.

  나는 번역소설을 주로 읽는다. 피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외국 소설을 번역하는 경우는 이미 좋은 작품이라고 검증이 된 주요 문학상 수상작이거나 숏-리스트에 올랐던 작품일 때, 아니면 적어도 출판사가 보기에 문학적으로 가치가 있으며 앞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작가를 선별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길어봐야 15년도 되지 않을 텐데, 비 온 다음 대밭에 솟아나는 죽순처럼 매일같이 책방 진열대에 흩뿌려지는 우리 젊은 작가들의 ‘검증되지 않은’ 책까지 읽기는 쉽지 않아서. 그래 우리나라 책을 읽을 경우 저절로 조금 세월을 입은 늙수그레한 작가가 쓴 작품에 눈이 가는데, 아쉽게도 이 양반들은 어느새 전성기를 넘은 지 오래, 작품도 그들의 사추리에 매달린 것처럼 시들시들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장은진의 작품집 《가벼운 점심》을 우연히 골랐다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내게 유일하게 가르쳐준 지혜는, 작품을 고를 때 발표하고 30년이 넘은 책을 먼저 고르라는 거였다. <노르웨이 숲>인가 어딘가에서 읽었다. 그 정도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출간하는 책이라면 당연히 괜찮을 수밖에 없는 양서일 거라고. 한데 올해 나온 책을 이 정도로 재미있게 읽었다면 이것도 행운이라 할 만하겠다. 더구나 이름도 몰랐던 작가잖아.


  여섯 편 가운데 네 편 정도가 좋았으니, 이 정도면 대박이다. 이 가운데 표제 작품 <가벼운 점심>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아버지는 환경공학 또는 도시공학 같은 걸 전공하는 교수였으며, 어머니도 중국의 문학과 역사를 전문으로 하는 교수였다. 할아버지가 공부를 하다 성공하지 못한 분이어서 자식을 통해 대리만족을 얻으려 했기 때문에, 아버지도 자기보다 키도 크고 나이도 많은 어머니와 저절로 친해졌고, 할아버지의 흔쾌한 허락을 받아 두 공부하는 사람은 그냥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연애하고, 양가의 축복 속에 결혼하고, 주인공 ‘나’와 동생을 낳은 후, 동생이 스무살이 되어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살았다.

  당구대 위에서 당구공을 툭 밀어 굴러가는 것 같이 생활도 그렇게 흘러갔다. ‘나’ 가 태어날 때, 아버지는 ‘나’에 대한 본능적 사랑이 뿜어져 나오는 것은 확실하게 알았지만, 자기가 아내를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것 역시 천둥을 맞는 것처럼 알아버리고 말았다. 사실은 아버지만 그러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 사랑하지도 않는 배우자와 어떻게 어떻게 관계를 계속 이어가며 사는 커플이 얼마나 많은 줄 아버지는 몰랐던 거 같다. 아버지는 예민한 성격이었고, 하루는 새벽 세시에 서재방 베란다에 걸터앉아 봄밤의 꽃들을 보고 있는 아버지를 발견한 적이 있었다. 집은 아파트 16층이었다. 이후 ‘나’는 수시로 아버지의 서재방에 노크 같은 기척도 없이 불쑥 들어가 서가에서 몇 권의 책을 뽑아오기 시작했지만 정작 읽어본 책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세월이 갔다.

  동생이 스무 살이 넘었을 때, 아버지는 떠났다. 집에 있는 모든 것을 그대로 놔두고 말 그대로 ‘몸’만 빠져나갔다. 어머니한테 길고 긴 편지만 놔두고. 어머니는 편지를 읽은 후 발기발기 찢어 화르륵 불을 질러버려 편지에 쓴 내용은 아들들이 모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가 총 책임자로 되어 있는 국제 세미나 “환경과 미술”에 참가한 결혼 1년차 영국계 미국인 여성과 서로 사랑에 빠진 거였다. 그 여성을 발견하고 여태 한 번도 알지 못한 진정한 사랑(이라고 여긴 감정)을 이기지 못해, 아버지는 다른 여성의 남편, 두 아들의 아버지, 대학 교수, 형제 가운데 맏이, 한 완고한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모든 지위와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거였다.

  그리고 10년이 흘러 할아버지가 돌아갔다. 아니, 돌아가지도 못하고, 죽음의 병상에서 맏아들을 부르고 불렀다. 이렇게 10년만에 잠깐 귀국해 할아버지의 운명을 지키고, 장례식을 지내면서, “미국여자와 바람 나 처자식 버리고 떠난 남자”라는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영정 앞에서 울고, 울고, 또 울기만 했던 아버지. 전처와는 서로 얼굴을 피하기만 했던 아버지는 장례식이 끝나자 삼우제도 지내지 않고 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작품은 이제 “귀국길”을 위해 인천공항으로 가는 아버지를 배웅하고,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좀 괜찮은 점심을 대접하고 싶은 아들이었건만, 실수할 확률이 거의 없는 가벼운 점심으로 감자튀김을 곁들인 햄버거를 먹자고 아버지가 권하는 바람에, 시끄러운 햄버거 가게에서 나눈 이야기로 되어 있다.

  봄을 좋아했던 아버지. 봄이 좋아서 봄을 싫어했던 아버지. 예민하고 기름기 많은 식사도 못하고, 늘 불면에 시달렸던 아버지. 그는 이제 말도 잘 하고, 두툼한 페티가 든 햄버거로 씩씩하게 잘 씹어 먹고, 살도 적당히 오른 적당한 몸피의 중장년 또는 중늙은이가 됐다. 한결 여유로운 모습이다. 다만 아쉬운 건 10년 전엔 펜을 쥐거나 키보드를 두드리기만 했던 곱고 가는 손이 거칠고 두껍게 바뀌었다는 점. 작은 아버지 말에 의하면 미국에서 사업을, 성공적으로, 하고 있단다. 그러나 아버지 말에 의하면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건 자기가 하고 있는 세탁소 문을 오래 닫아둘 수가 없어서란다. 교수 출신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세탁소. 아버지의 여자, 영국계 미국인 역시 아버지와 함께 살기 위하여 큰 희생을 감수했다. 그 여성도 교수, 중산층 자리를 말끔하게 포기하고 나이든 ‘나’의 아버지와의 사랑을 선택한 것.

  ‘나’는 생각한다. 10년 전. 서울의 고층 아파트에서 ‘나’의 가족과 함께, 계속 생활했다면 아버지는 여태 살아올 수 있었을까? 아버지가 결코 어머니를 참지 못할 만큼 싫어했던 건 아니다. 사랑하지 않는 배우자였고, 삶이었고, 자신의 인생이었을 뿐. ‘나’는 서재 베란다에서 앞으로 엉덩이를 밀어버리는 아버지를 그리 멀지 않은 시간 안에 볼 수도 있었음을 생각한다. 죽는 것보다 낫지. 아무것도 없는 적수공권으로 오직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무것도 없는 여성과 자신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이국땅에서 직접 손을 써 돈을 버는 일이 자신을 그렇게도 만족스럽게 만든다는 진실도 알아가며, 역시 사람 사는 일이라 서로 사랑하는 만큼, 다투기도 하고, 가끔은 소리도 지르지만, 더 자주 서로의 몸을 만지며 사는, 그런 것이 행복이란 걸 평생 배우며 사는 아버지와 그 여자분.

  ‘나’는 ‘나’의 결혼식에 아버지를 초대하고, 아버지는 거절한다. 우리식 사고, 바람나서 식구들 다 버리고 도망간 아버지라는 눈길을 견딜 이유가 없어서. 그런 아버지에게 내가 보여드리는 건, 넓은 빗살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조그만 완두콩. 약혼녀 윤주의 배 속, 완벽한 고독 속에서 동동 떠 있는 작은 생명체, 아버지의 손주가 될 씨앗이었다.

  이렇게 세월은, 삶은, 사람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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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11-08 05: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E.T.A. 호프만, 《밤 풍경》
화요일. 줄리언 반스,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
목요일. 이반 투르게네프, <연기>
금요일. 거페이, <복사꽃 그대 얼굴>

stella.K 2024-11-08 1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나이가 드는지 예전 같으면 젊은 작가들 작품 별로 생각이 없었는데 요즘엔 좀 가끔은 읽어줘야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들도 열심히 썼을텐데 검증된 작품만 읽으려한다면 소는 누가 키우겠습니까? ㅋ 그들의 작품도 30년후엔 어떤 대접을 받을지 모르고 그런 생각 때문에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는 작품도 있잖아요. 요즘 작가들 글 잘 쓰는 사람 많더군요.
팔님 15년 남으셨다니 예전 같으면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냐고 펄쩍 뛰었을지 모르겠는데 지금은 너무 이해가 갑니다. ㅋㅋ 그래도 앞으로 10년안에 뭔가 획기적인 의학의 발달로 책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좀 늘어나지 않을까요? 그러니 딱 못 받지는 마십시오.^^

Falstaff 2024-11-08 15:11   좋아요 1 | URL
ㅎㅎㅎ 이젠 가벼운 점심을 든 작중 아버지처럼 오직 제 행복과 편안을 위해 살 겁니다. 30년 후의 작가들은 좀 더 젊은 독자들이 책임졌으면 좋겠습니다. ㅎㅎㅎ
제가 미래 시대를 걱정하는 가장 큰 이슈 가운데 하나가 이러다가 인간이 2백살까지 살면 우짜나.. 싶은 거랍니다. ^^

케이 2024-11-08 1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옷. 이반 투르게네프 책 평이 너무 궁금합니다. 지금 읽고 있는 중이라 다 읽고 나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줄리언 반스 새 책도 조금 궁금... 항상 감사히 읽고 있어요. 건강하세요!

Falstaff 2024-11-13 20:28   좋아요 2 | URL
오늘 마누라 진갑, 만 61세 되는 날이라 좋은곳 (쉽게 말해 맛은 별로 없지만 겁나 비싼 음식점)에 가서 점심 먹고 혼자 쐬주 두 병 깠더니 대낮부터 천국이네요.
투르게네프와 반스... ㅎㅎㅎ 두 작품 다 읽자마자 별 넷으로 채점했군요.

케이 2024-11-08 16: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까는 댓글만 읽고 퇴근길에 독후감 읽었습니다. 소설 속 아버지...철이 없네요. 사랑 그 까짓 게 뭐라고. 전 평론가들이 칭찬해 마지 않던 ‘ 아이 엠 러브‘ 속 엄마한테도 똑같은 이유로 분노했는데요. (부잣집 사모님인데 아들 친구랑 바람나서 가출함 . 아들은 충격받아 사고로 죽음) 영원한 사랑, 죽을 때까지 충만한 사랑 그런 게 어딨다고.
사랑보다 소중한 건 결혼해서 이런 저런 어려움 기쁨 슬픔을 공유한 시간 그리고 책임감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말씀하신대로 같이 살아야하니 사는 부부도 얼마나 많은데요. 그냥 그렇게 살아도 충분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다음 주 독후감 또 기대합니다!

Falstaff 2024-11-08 19:16   좋아요 1 | URL
그래도 막내 아이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떠났거든요. 자기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의무는 다 한 셈이라고, 작중 화자, 맏이가 말하더군요.
ㅎㅎㅎ 오래 전에 제 팀원으로 있었던 여직원이 사진 동호회에 다녔는데 이런 말을 하더군요. 세상에 제일 우스운 것이 (남녀를 떠나) 쉰 고개 가까워서 이제야 진정한 사랑을 찾았다느니 하는 거라고. ㅎㅎㅎㅎ 뭐 다 사람 나름이지요.
 
메마른 삶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3
그라실리아누 하무스 지음, 임소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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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휴머니스트의 세계문학 시리즈를 눈 여겨 보면 거의 모든 작가가 1961년 이전에 죽었다. 즉 지적재산권과 관계없이 번역서를 낼 수 있는 작품만 골랐다는 건데, 거 참 신기하지, 그래도 좋은 작품이 시리즈 곳곳에 숨어 있다. 얼핏 생각하면 아직도 소개하지 않은 오래 묵은 작가들은 시장성을 확보하지 못할 작품을 주로 생산했기 때문이라 작품 역시 별볼일 없을 거라 여길 수 있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다만 경탄을 거듭할 만한 걸작이나 적어도 명작의 반열에 오를 작품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런 것들 이야말로 아직 알려지지 않았을 확률이 별로 없을 터이니까.

  1892년생 그라실리아누 하무스 데 올리베이라 Graciliano Ramos de Oliveira는 브라질 알라고아스주 케브랑굴루에서 태어났는데, 이때만 해도 부모는 이 아기가 16남매의 맏이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우리나라에서도 10남매 이상 출산한 여성에 관한 이야기는, 지금은 몰라도 젊은 시절까지 종종 들어 익숙했어도, 아오, 열여섯은 좀 과한 거 아닌가 싶어 이 많은 아이가 과연 한 여성이 낳은 동복의 남매인가 찾아보기까지 했다. 그런 것까지 찾지는 못했다. 만일 그렇다면 하무스의 어머니 마리아 아멜리아의 생애는 임신, 출산, 그리고 수유라는 사이클만 계속 돌았을 것이고, 어쩌면 수유 과정은 생략할 수 있게 유모를 쓸 수 있는 중산계급이었을 것이다. 브라질 북동부에서 낳고 어린 시절을 보낸 하무스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열일곱 살 때부터 가명으로 잡지에 기사를 싣기도 하고 소네트 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20대 초반에 잠깐 리우데자네이루에 살기도 했지만 스물세 살 때 아버지가 사는 팔메이라 도스 인디오스로 가서 말뚝을 박았다. 스물셋에 결혼한 하무스는 부모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생식력을 이어받아 출산 후유증으로 삶을 접는 첫 아내와의 짧은 결혼생활 동안 네 명의 자녀를, 두번째 결혼에서도 네 명의 자녀를 낳는 동안, 팔메이라 도스 인디오스의 시장을 지냈고, 아쉽게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2년만에 사임을 하긴 했어도 어쨌든 그랬다는 건데, 시장직을 사임한 후에도 그곳에 머물기가 좀 남세스러웠던지 서른여덟 살인 1930년에 마세이오로 주민등록을 옮겨 6년 세월을 보낸다.

  마세이오에서 소설책 두 권을 출간하는 한편, 정치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아 1935년엔 공산주의 봉기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하나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을 듯. 하여간 이 시점이 이 양반의 문학적 전성기로 대표작을 발표하니 그것들 가운데 하나가 <메마른 삶>이다. 이후 공산당에 입당하고, 유럽과 소련(과 그 부속 국가들), 같은 언어를 쓰는 포르투갈 같은 곳을 유람하는 등 잘 먹고 잘 살다가 1953년, 예순한 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으니, 당시로 봐선 호상이다, 호상.


  이이의 정치적 위치는 애초부터 공산주의나 공산주의 비슷하게 지극한 왼쪽이었다. 그리하여 이이의 작품 속 주인공 역시 주로 자기가 거의 평생을 보냈던 브라질 북동부 황야지대의 헐벗고 굶주린 문맹의 하층계급 남성이라 한다. <메마른 삶> 역시 마찬가지다. 위키피디아를 보면, 그의 주인공들은 복잡하고 미묘한 비관주의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권력욕, 여성혐오, 불륜 같은 주제를 단골로 채택하고 있단다. 얼핏 당대 식민지 조선의 카프 진영 사람들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정말로 읽어보면 카프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리얼리즘이다. 볼셰비키 전통에 따른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라기보다 오히려 훗날 라틴 아메리카 문학을 찬란하게 비추어줄 환상문학적 요소가 가미된, 이렇게 말해도 될 지 모르겠지만, “토착적 공산주의” 또는 말로만 좌익문학 아닐까 싶은데, 또다시 비겁하게 한 마디 보태 말하자면, 어디까지나 아마추어의 일천한 감상으로 말해서, 이건 덜 익은 리얼리즘 때문이 아니겠는가 싶다.

  <메마른 삶>은 파비아누와 비토리아 어멈 부부, 이들의 두 아들과 (고래라는 뜻을 가진)’발레이아’라는 이름의 강아지, 그리고 앵무새로 이루어진 한 가족을 그리고 있다. 브라질 북동부의 건조한 내륙지역 세르탕에 최악의 가뭄이 들어 이른바 한발 피난을 가고 있다. 비토리아 어멈은 작은 아이를 들쳐 업고, 머리엔 양철 트렁크를 인 채, 어려서부터 소몰이꾼을 하느라 늘 말을 타고 있어서 오다리로 굳어진 작은 체구의 남편 파비아누를 따라가고 있다. 파비아누 역시 몹시 어두운 표정으로 잡낭을 어깨에 사선으로 둘러멘 채 허리춤엔 끈으로 물통과 (부싯돌로 불을 붙여 격발시키는) 수발총을 매달고 있다. 황야에서 수발총 없이 산다는 건 생각하기도 어려운 법. 하늘엔 죽었거나 죽어가는 짐승의 눈알을 쪼는 독수리떼가 큰 원을 그리며 떠 있고, 물 한 모금도 차마 벌컥벌컥 마실 수 없는 지극한 갈증과, 결코 이에 못지 않는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어제 밤엔 비토리아 어멈이 힘들게 머리에 이고 온 새장 속 앵무새의 목을 비틀고 말았다. 애완 앵무새를 잡아먹었다고? 그렇다. 사흘 굶어 남의 담장 안 넘으면 보살이라잖은가. 그럼 강아지 발레이아는? 안 알려드린다.

  애완동물을 잡아먹는 상황. 이 정도로 브라질 북동부를 휩쓴 한발에 거의 절망할 무렵, 벌판 저 너머로 마치 그리스도의 손길 같은 검은 먹구름, 이른바 은총이랄 수도 있는 비구름이 몰려올 때, 파비아누 가족은 텅 빈 농장에 무단으로 들어가 남의 집에서 그나마 이슬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제 갑자기 누리는 쏟아지는 폭우에 바싹 말라붙은 강바닥은 둔덕을 넘치게 흘렀으며 사방에 바싹 마른 풀과 덤불과 관목이 한 순간에 오색 꽃들과 함께 활짝 피어난 건 물론이고, 생각지도 못한 온갖 양서류, 파충류들의 짝을 찾는 울음이 가족들의 귀청을 메울 지경이었다. 파비아누는 결심한다. 조금 있으면 틀림없이 도착할 농장의 주인한테, 이곳에서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조를 것을.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정말로 농장주가 왔으며, 몇 번의 의례적인 거절 끝에 파비아누를 농장의 소몰이꾼으로 채용해, 이 집 가장은 전처럼 하늘 같은 말을 타고, 가죽 장화와 안장과 가죽 바지를 걸친 근사한, 당연히 작은 아들의 눈에만 근사한 잘 나가는 가우초의 모습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사람 욕심에는 끝이 없는 법. 비토리아 어멈은 가죽 시트가 깔리 침대를 원한다. 지금 부부가 자는 나무 침대는 한 가운데 볼록, 옹이가 박여있어 부부는 한 가운데 옹이를 깔고 눕지 않기 위해 서로 정 반대의 구석에서 몸을 굽힌 채 자고 있으며, 각기 차지하는 면적으로는 결코 셋째 아이를 만들기 위한 작업도 구상할 수 없다. 가죽 침대는 세탕가 지역에서 거의 유일하게 틈이 날 때마다 책을 읽던 제분소 주인 토마스 씨가 쓰던 것을 본 적이 있다. 부자면서도 이상하게 예의도 발라서 마을 사람들 모두 토마스 씨에게는 기꺼운 마음으로 복종을 했던 것처럼 파비아누 역시 평소 사람을 멀리하고 오직 동물하고만 잘 지냈음에도 토마스 씨의 말엔 고분고분하게 따랐었다. 당연히 파비아누를 비롯한 동네사람들은 토마스 씨의 겸손이 정말로 인격에서 우러나온 겸손인지, 아니면 주민들을 부리기 위한 배운 자들의 고도로 단련된 수법인지는 결코 알 수 없었지만. 하여간 토마스 씨 역시 이제 막 끝난 한발 때문에 제분소도 할 일이 없어 길거리에 나 앉는 수준의 몰락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비토리아 어멈의 머리 속에 남은 건 토마스 씨의 가죽 시트 침대. 어멈이 가진 로망 중의 로망.

  정식 가우초가 된 파비아누. 하지만 그는 여전히 흑백 혼혈인 물라토와 흑인 사이에서 태어난 ‘카브라’ 가운데 한 명. 검게 그을린 붉은 피부와 파란 눈, 붉은 수염과 머리카락을 가졌으며 남의 땅에 살며 가축을 돌보고 울타리를 수선하는 일꾼이자 짐승 가운데 한 마리일 뿐이다. 이제 주머니에 돈이 생기자 읍내에 나가 이나시우 씨가 경영하는 선술집에 가서 원래 독해야하지만 물을 탄 게 틀림없는 카샤사 한 잔에 취하고, 작은 체구에 보잘것없는 완력을 지닌 노란 군복을 입은 군인의 권유로 도박을 하다 몽땅 털린 다음, 이 군인의 군화 뒤꿈치가 자기 샌들을 밟아버리는 수모를 겪는 것도 모자라 마체테 칼날로 가슴과 등을 두드려 맞은 채 유치장에서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죽여버리겠어, 복수를 하고야 말 거야. 각오를 했음에도 정작 아무 목격자도 없을 벌판에서 노란 군복 군인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보자 차마 그렇게 하지도 못한 파비아누. 결국 ‘카브라’이자 한 마리의 짐승에 불과한 파비아누와 가족들은, 브라질 북동부 세탕가에 다시 한번 극한의 한발이 닥치자, 이해할 수 없는 농장주의 셈법에 따른 빚을 떨쳐버리기 위하여, 또다시 비토리아 어멈은 머리에 양철 트렁크를 이고, 어깨에 사선으로 잡낭과 물통과 수발총을 매단 남편을 따라 밤길 황야로 나선다. 지난번과 다른 건 더 이상 아이를 들쳐 메지 않아도 좋을 만큼 컸다는 것하고, 이제 오직 사람 네 명만 길을 나섰다는 것.

  이렇게 세월은 가고, 한발은 다시 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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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11-07 0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런 내용을 보면 분노의 포도가 생각날까요?

˝세월은 가고, 한발은 오고˝
분명 뒤에 남은 이야기가 있을텐데,,,^^

역경은 또 올 것이란 느낌을 받았거든요!

Falstaff 2024-11-07 17:28   좋아요 1 | URL
넵. 포도를 연상할 수 있겠습니다.
(아휴... 댓글 쓰기가 정말 쉽지 않습니다 ㅎㅎ)
스타인벡이 딱 꼽은 오클라호마 피난민은 백인(백인! 과거의 소지주!!)인데 반해 이 책에서 파비아누 일가는 흑백 가운데 검은 피부에 가까운 혼혈에, 일자무식, 완벽하게 무산자 계급이거든요. 아무래도 좀 차이가 있더랍니다. 아이쿠, 이걸 어떻게 말로 해야 할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그레이스 2024-11-07 17:59   좋아요 1 | URL
ㅎㅎ

다섯 2024-11-07 1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세상에 가난하지만 순수한 마음을 가진 수많은 파비아누와 비토리아 어멈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부족하지만 소유를 나누고, 기도하고 위로하며 희망을 이야기해야 하리라 생각해 봅니다.
잘 읽고 갑니다.

Falstaff 2024-11-07 17:29   좋아요 0 | URL
옙. 고맙습니다.

hnine 2024-11-07 11: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었습니다만, 저렇게 상세한 작가 정보는 어떻게 다 조사하시는지요. 이 작품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요. 작품 못지 않게 작가 연구를 깊게 하시는 것 같아요.

Falstaff 2024-11-07 17:31   좋아요 1 | URL
ㅎㅎㅎ 뭐 작가에 대해 파는 건 아니고요, 간혹 작가의 삶이 얼마나 작품 속에 틈입해 있는지 그걸 포착하는 것도 재미 있더군요. 저는 주로 위키피디아를 인용합니다만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자료는 아무래도 책 뒤에 붙은 연표고요. 이 연표라는 게 재미있습니다. 그림이 그려지거든요. ㅎㅎㅎ

yamoo 2024-11-07 15: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출판사 휴머니스트의 세계문학 시리즈가 지적재산권과 관계없이 번역서를 낼 수 있는 작품만 골랐다는 거에...좀 얍실하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왜 이런 시리즈를 구태여...--::

그나저나 뽈님의 세계문학 독서 행보는 정말 어마무시하네요!! 읽는 속도도 속도이려니와, 독후감 생산도 어마무시하네요!! 뽈님 덕분에 희한한 작품들을 구경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ㅎㅎ
저는 항상 뽈님의 별5 문학을 예의주시하고 있거든요~~~ 요건 4대라 패쑤~~^^

Falstaff 2024-11-07 17:32   좋아요 0 | URL
아이고... 고맙습니다. 야무 님 말씀이라 당연히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으쓱으쓱.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