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니엘로의 날개
에리 데 루카 지음, 윤병언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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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키피디아에 1950년에 나폴리에서 태어난 이탈리아의 소설가, 역자, 시인이라고 나와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급진 좌익 조직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조직이 해체된 다음엔 정치 쪽에도 기웃거렸다. 각종 블루컬러 노동을 하면서도 여러 언어에 관심을 두었고, 글도 썼다. 은둔형 외톨이 스타일로 여전히 로마 근교의 시골에 살며 열정적 등산가로 활약하고 있단다. 21세기에 리옹 토리노 간 고속열차 설치에 반대했다가 기소까지 됐으나 무죄 선고를 받기도 했으니 왼쪽인 건 맞을 듯.

  왜 이 책을 읽었느냐 하면, 프랑스에서 공쿠르 상과 쌍벽을 이루는 문학상이 페미나 상인데, 어떤 작품들이 수상을 했을까 궁금하기도 했던 차에, 이 책의 광고가 눈에 들어왔던 거다. 2002년 페미나 상 수상작이라고. 마침 도서관 서가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길래 얼른 빌려 읽었다. 간혹 읽은 기분을 설명하는 데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별 몇 개, 이렇게 얘기하는 게 편할 때가 있으니, <라파니엘로의 날개>로 말하자면 별 셋은 박하고 네 개는 후해서 셋 반이 적당한 수준.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소수점 없이 채점하면 네 개.

  페미나 상 수상작을 저 동아시아 촌놈이 별 셋 반을 준다고? 어때, 내 맘이지. 그런데 독후감 쓰려고 위키피디아 보니까 페미나 상은 페미나 상인데, 페미나-에드랑제 Femina Etranger란다. 이런 것도 있나? 페미나 상 외국어 소설 부문? 무슨 아카데미 시상식 하는 것 같기도 하다. 페미나 상은 불어로 쓴 작품한테만 상 주는 걸로 알고 있어서 불어 잘 하는 이탈리아 사람이 불어로 쓴 책인 줄 알았지 뭐야.


  데 루카가 역자로도 일하고 있다. 언어의 범위가 재미있다. 고대 히브리어, 스와힐리어, 러시아어, 이디시어 등등. 고대 히브리어로 쓴 구약, 오래된 계약을 “비신자”로써 번역했다고 한다. 이디시어까지 관심을 넓혔다면 유대인 아닐까 싶기도 하다. 비 신자라고 했으니 기독교건 유대교건 간에 종교를 믿지 않는 유대인. <라파니엘로의 날개>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돈 라파니엘로도 러시아 혹은 동/북유럽에서 이디시어를 사용하던 유대인으로 팔레스타인까지 가려고 배를 타기 위해 나폴리에 도착했지만 여기서 옴짝달싹 못하는 선한 유대인이다. 나폴리 말도 한 마디 못했다가 조금 배운 정도의. 하기는, 그깟 작가가 어디 사람인 걸 알면 뭐해. 그냥 읽기만 하면 되지.

  어째 요새 읽는 이탈리아 소설에서 유난히 무대를 나폴리로 한 것이 많다. 연초에 읽은 쿠르지오 말라파르테의 <망가진 세계> 마지막 장면(이 책에서도 이 장면 나온다. 반갑더구만.)부터 시작해 도메니코 스타르노네의 책 두 권 등등. 근데 나폴리 사람들 기질을 보면 소설 쓰기에 아주 딱 맞춤일 정도라서 그리 이상하게 보이지도 않는다. <라파니엘로의 날개>는 전형적인 나폴리의 저소득층 사람들의 주거지. 건물이 촘촘하게 붙어 서 있고, 사람들은 옥상 테라스에 올라가 옷을 빨고, 옥상이나 자기 집 테라스에 빨래줄을 걸고 별의 별 빨래를 다 내거는 좁은 골목길. 영화에서도 많이 나오는 장면이 이 소설의 무대이다. 하필이면 언덕 꼭대기에 있어서, 사람들은 이 동네를 ‘신의 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화자 ‘나’는 열세 살 소년. 루이스 어드리크가 쓴 <라운드 하우스>에서 말했듯이 사내새끼 열세 살이란 참 어려운 나이다. 게다가 장소가 나폴리. 이제 대가리 다 컸다고 어른들이 용인을 하는 시기란다. 뭘 용인하느냐고? 한 여자를 책임질 수 있다는 걸. 아, 이제 시작이니까 미리 넘겨짚지는 마시라. 항구에서 하역일을 하는 아버지는 자신이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것을 평생 한이 되어 ‘나’를 초등 5학년까지 보냈다. 의무교육이 초등 3학년까지라서 부모는 내게 가외로 2년을 더 공부시킨 셈이다. 아버지 생각에 이건 좀 더 나은 학력으로 ‘나’를 세상에 내보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나’도 이런 처지를 충분히 이해하여 부모님의 하해와 같은 사랑에 늘 감화 감동하면서 살고 있다. 지금은 에리코 선생이 운영하는 목공소에서 목수 일을 배우고 있다. 목수일까지는 아니고, 이제 겨우 열세 살이니 아직 그냥 대패밥이나 톱밥을 청소하고 공방을 청결하게 유지하는 정도지만.

  그래도 이 동네에서 ‘나’는 좋은 환경에서 자란 소년이다. 독자가 읽기에 그렇다. 자기 입으로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지만. 아버지는 수십 년 동안 까막눈으로 살다가 이제 노동조합 주관으로 저녁 강의를 통해 읽기와 쓰기를 배우는 중이다. 큰 키에 건장하고 힘센 아버지와 역시 큰 키의 어머니는 서로 인애하는 부부다. 아버지는 내게 부메랑을 선물했다. 오세아니아 원주민이 쓰는 무기. 던지면 목표물을 맞추고 다시 내게 돌아온다고 하는 거. 그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정말로 그쪽 지역에서 만들었을까? 나폴리 제일의 목수인 에리코 선생도 이렇게 단단한 나무를 깎을 수 있는 장비도 드물 거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신의 산이 하도 좁은 골목으로 건물 밀집 지역이라서 마음대로 부메랑을 날릴 처지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선생의 공방이 끝나면 집에 와 밥 먹고, 청소하고, 옥상 테라스에 올라가, 밤이 되어 빨래하는 아줌마들이 다 내려가 빈 테라스에서 무거운 부메랑을 던지는 연습만 한다. 왼손으로 그리고 오른손으로. 이렇게 열심히 하다 보니 이제 역삼각형의 어깨가 딱 부러지고 근육도 붙어 완력 또한 만만하지 않게 됐다.

  오래 에리코 선생이 가게 한 쪽에 구두 수선공 돈 라파니엘로를 들여 좁은 공간을 맡겼다. 작은 작업대와 신발더미가 쌓인 공간 역시 ‘나’가 청소해야 한다. 돈 라파니엘로는 유럽의 땅끝 어딘가에서 나폴리로 온 빨간 머리와 녹색 눈을 한 작은 체구의 곱사등이다. 자기가 몇 살인지도 모르는 그가 처음 나폴리에 도착했을 때의 이름은 ‘라바넬로’였단다. 그러나 ‘딸기만한 크기의 순무’라는 별명으로 불리다가 ‘라파니엘로’가 됐다고. ‘나’가 보기에 라파니엘로는 좋은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한테는 신발을 수선해주고도 돈을 받지 않았다. 나폴리의 진짜 저소득층 사람들은 사철 맨발로 다녔는데, 엣다 모르겠다, 끝 장면까지 이야기하자면, 라파니엘로가 신의 산에서 구두수선공으로 있는 동안 모든 나폴리 주민들은 전부 신발을 신고 다니게 됐다. 그러니 천사 아냐? 천사 맞다. ‘나’는 샌들을 신고 다녔다. 한겨울에도 샌들만 신었다. 다른 신발과 다르게 샌들은 내 발보다 커도, 작아도 다른 샌들로 바꾸어 신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나’를 얼핏 본 라파니엘로는 ‘나’의 샌들도 발에 딱 맞게 수선해주어 기분 좋게 신고 다닐 수 있었다.

  나폴리 사람들이란. 아버지는 우리는 이탈리아에 살지만 이탈리아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나폴리 말을 하니까. 이탈리아 말을 해야 이탈리아 사람이니, 이탈리아 말을 하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한다고, 안 그러면 미국에 사는 거하고 마찬가지라고 여러 번 이야기했다. 엄마가 보태기를, 고국이 별건가요, 먹을 걸 주어야 고국이지. 이 말을 들은 아버지, 그러면 아버지의 고국은 먹을 걸 주는 엄마라고. 이런 엄마가 깊은 병에 들고, 아버지는 심하게 충격을 받지만, 엄마의 병은 부부의 문제라서 아들한테는 조금도 영향을 끼치게 만들고 싶어하지 않는다.

  같은 건물에 사는 마리아. ‘나’하고 동갑내기. 생일은 ‘나’보다 조금 빠르다. 저 위에서 눈치 채셨지? ‘나’와 마리아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는데, 열세 살짜리니까 풋사랑이겠지, 지레짐작하지 마실 것. 하지만 이들 앞에 놓인 벽은 당연히 만만하지 않다.


  이제 본론.

  곱사등이 라파니엘로의 곱사등 안에는 뭐가 들었을까? 기형으로 변한 뼈? 그렇겠지. 그러나 책에 등장하는 돈 라파니엘로의 커다란 곱사등에는 언젠가는 펼쳐질 날개가 들어 있다. 그래서 책의 제목이 <Montedidio>가 “라파니엘로의 날개”로 변해버린 것. 날개가 돋는 날, 그는 어디로 날아갈까?

  날개가 달린 인격체를 우리는 천사라고 한다. 그런데, 라파니엘로의 말에 따르면 천사는 이동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유추하면, 이제 곱사등이 터져 날개가 돋힌 라파니엘로는 나폴리 신의 산에 거하는 천사가 된 거 아닐까? 정작 신의 산을 떠야 하는 인물은, 아직 한 번도 비행하지 못한 부메랑을 손에 든 화자 ‘나’이고.

  뭐 그렇다는 거다. 우화 또는 은유로 읽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페미나 상을 즐길 만하지 않은 거 같은데, 내가 유럽사람들 정서에 깡통이니 믿지 마시라.

  편집이 하도 널럴해서 3백 페이지라도 한나절이면 책 읽고 독후감도 푸지게 쓴다. 그래도 시간 남아 맥주 한 캔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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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을 기다리며 더봄 중국문학 전집 2
거페이 지음, 문현선 옮김 / 더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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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페이格非는 필명이다. 본명은 류용劉永. 64년 용띠. 이름도 처음 듣고, 작품도 처음 읽지만 중국에서는 60년생 위화, 63년생 쑤퉁과 함께 중국 아방가르드 작가군의 한 명으로 친다고 한다. <봄바람을 기다리며>가 “관심도서” 목록에 오래 있었던 걸로 보아, 이이 작품이 괜찮다고 언제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거페이는 주도가 난징인 장쑤성 단투 줄신이다. 장쑤성이면 황해에 면한 양쯔강 하류지역. 작품의 배경이 양쯔강을 면한 장쑤성 내륙지역인 듯하다. 그러니 위도가 32도밖에 되지 않지만 북풍한설 몰아치는 한겨울엔 땅에 묻어 보관하는 배추 같은 채소 등속이 꽝꽝 언다고 그러지. 작품은 화자 ‘나’, 자오바이위趙伯渝가 장쑤성의 작은 촌 마을 루리자오儒里趙촌과 이웃한 야오터우자오窯頭趙촌 사람들이 1958년부터 2007년까지 한 세월을 살아낸 이야기이다.

  두 마을 다 조씨 집성촌이지만 루리자오촌에 사는 사람들이 은근히 야오터우자오촌 사람들을 아래로 보는 경향이 있다. 마을의 원로 가운데 한 명인 자오시광의 이야기를 전적으로 믿자면, 루리자오촌 사람들의 조상들은 옛날 제나라가 있던 산둥성 랑야에서 대대로 고관대작을 배출한 명가의 후손으로 진晉나라 회제懷帝 시기에 경치 좋은 강남으로 옮겨 터를 잡았다고 한다. 좋은 말로 해서 경치 좋은 강남으로 온 것이지, 회제는 5호 16국 시대를 맞아 흉노가 건국한 잡스러운 나라의 군대가 쳐들어와 잡혀 죽는 등, 중국 역사에서 가장 정신없던 시절에 난을 피해 조금이라도 북방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피난을 온 거 같다. 하여간 사마염이 첫번째 황제로 등극한 사마씨의 진나라는 신기하게도 사마 성을 가진 인물들은 제 명대로 산 사람이 별로 없었다. 서로 죽이고 죽느라고. 하여간 이때 양쯔강을 건너 강남으로 온 조씨들은 자기네 마을을 배운 동네 조씨 촌, 즉 유리儒里라 했고, 어디서 온 줄도 모르고 오자마자 집 짓기 위해 벽돌을 굽느라고 가마를 세워 가마 사람들, 요두窯頭라 멸칭했다. 그래 “둘 다 자오씨라고 해서 뭉뚱그려 자오자촌, 조가촌趙家村이라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거였다.


  그러나 1949년에 공화국이 섰으니 세상이 바뀌어, 공부를 했다고? 그래서, 어쩌라고? 시대가 되어버렸다. 근데 이 자오시광趙錫光 할배도 문제가 많은 인간이기는 하다. 원래 이 양반이 중문이 몇 개인 저택에 살면서 농지가 백여 마지기, 그러니까 2만평을 가뿐히 넘었고, 방앗간 두 개, 기름집 하나를 가진 부르주아 지주였다. 이 할배 특기가 눈알 돌리기라서, 이제 땅이 많고, 집도 크고, 가게까지 몇 개 가진 사람들은 인간 축에도 끼지 못할 것임을 딱 알아본 거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부동산을 “유일한 친구”이자 칠현금 연주에 관한 한 전 중국의 일인자인 자오멍수에게 팔았다. 그래서 어떻게 됐느냐고? 자오멍수는 1955년 한여름에 처음으로 공개 비판을 당하고 집에 돌아와 초우蕉雨산방에서 음독자살했다. 그래도 자오시광 이 할배가 마을에서 가장 학식이 높아 자기 아들 창성, 손자 퉁빈한테 글을 가르쳤는데, ‘나’도 퉁빈의 어깨 너머로 글을 배우는 걸 모른 척해줬다. 다행히 자오시광의 바람직하지 않은 인간성을 자기 대에서 마감을 해 아들은 보통사람, 손자는 정이 깊고 의리 또한 두터운 남자로 성장해 ‘나’와 평생 절친관계를 이어간다.

  ‘나’의 아버지 자오윈셴趙雲仙은 돌림자인 선仙 자 때문에 간혹 ‘신선’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대개 ‘자오바보’ ‘큰 바보’ 또는 ‘자오 큰 바보’로 불렀다. 왜 큰 바보냐면, ‘나’가 ‘작은 바보’니까. 그러나, 이제야 말하지만, 아버지는 점술가다. 세상에 바보 점술가 보셨어? 내가 예수를 믿지 않는데 하물며 점술가의 사술을 믿겠는가? 그래도 정상적인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좋은 의미이거나 나쁜 의미로) 현혹해 밥술이라도 먹으려면 여간 눈치가 재고 상황판단이 빨라야 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니 바보일 수 없는 법. 젊어서 아버지는 상하이 홍커우虹口에서 남방물품 잡화점에 견습생으로 일했던 적이 있다. 일 잘하고 있다가 상하이 최고의 점술가 다이톈쿠이의 눈에 들어 수하로 들어간다. 원래 사리판단이 빠르고 뭐든지 얼른 익히는 사람이라 다이톈쿠이의 점술을 퐁퐁 묻힌 스펀지가 돼지 기름기 빨아들이듯 해치웠다. 그런데 아뿔싸, 그냥 내버려 두지, 아버지 인생이 꼬이려고 그만 부농 아버지가 난징에 내려와 상점 점원 그만두고 집에 가서 장가를 들라고 명령을 해버린 거다. 이때만 해도 아버지 하는 말은 하느님 말씀이라 어기지 못하고 낙향을 하니, 그래도 똑똑하고, 못 배워서 교양은 없지만, 예쁘기는 겁나게 예쁜 젊은 아가씨가 집에 와 있는지라 엣다 모르겠다, 그 길로 장가들고 아이부터 만들었으니 그게 ‘나’ 자오바이위다.

  큰 도시 난징에서 남방물품 상점 점원이면 프롤레타리아라고 주장해도 하나도 이상한 거 없잖아? 근데 깡촌 루리자오에서 손바닥 만한 자기 농지를 소유했다고 부농이라 해서 공화국 생긴 다음에 있는 거 없는 거 다 빼앗기고, 하루 아침에 천한 출신성분이 되어 버렸으니, 동네 사람들이 바보 가운데 상 바보라고 놀리기 시작해서 그대로 혓바닥이 굳어버린 거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버지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연신 벙글거리며 도무지 열을 내지 않아 어린 ‘나’가 보기에 정말 바보 같기도 하고 그랬다. 소설은 섣달 29일에 시작한다. 옆 마을, 그래도 걸어가려면 한 나절이 걸리는 작은 어촌 마을 반탕에서 의뢰가 와서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길을 떠났다. 동네에 아름다운 아주머니가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데리고 산다. 이런 지 얼마 안 됐다. 올 한 해 동안 시아버지(나이 먹었으니 그냥 죽은 것이지만), 남편(북쪽으로 쌀 수송하다가 바람이 불어 배와 함께 난파), 큰아들(사연을 결코 알려주지 않음), 남자만 셋이 차례대로 죽어버리고 내 또래 작은 아들도 도무지 매가리가 없이 시들시들하다. 그리하여 혹시 하는 마음에 아버지를 부른 것. 아버지를 청하기 전에 반당사에 사는 중이 말해주기를 딸 춘친春琴에 문제가 있어 액이 쏟아지니 자기와 함께 절로 들어가 심부름을 하며 지내라고 한 적이 있단다. 춘친이 큰 액이었는지 반당사에 갑자기 불이 나고, 이 말을 꺼내 중도 함께 타 죽었다나? 묵묵히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두려움과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에 혐오와 원망의 기운을 담아 바라보는 춘친을 지그시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아주머니와 속닥속닥. 다음날 아침 반탕을 떠나면서 아버지는 작은 소리로 내게 말해주었다. 춘친이 곧 우리 마을로 시집올 거라고.


  춘친이? 누구한테? 혹시 홀아비인 아버지한테 시집을 와 내 엄마가 되는 거 아냐? 겨우 다섯 살 많은 엄마. 아, 그러면 문젠데. 걱정하지 마라, ‘나’여.  루리자오촌에 못 생기고 나이 많이 먹은 총각이 하나 살았다. 빈농이었다가 아버지가 오래 가는 병에 들어 그나마 싹 거덜을 내고 숟가락을 놓더니, 시름시름 어머니도 뒤따라 갔다. 동네사람들이 의견을 모아 강 건너 외삼촌한테 보냈더니 며칠도 안 돼 바지도 입히지 않고 다시 강 건너 동네로 보내 버렸다. 자기 식구들 먹고 살기도 팍팍해서 안 되겠다나? 마을 사람들이 이 아이를 어떻게 하나, 다시 뜻을 모았더니 또 길이 생겼다. 동네 사당을 늙은이 하나가 지키고 있으니 그리로 보내 심부름을 하며 함께 살면 좋겠다고. 그렇게 했다. 그랬더니 이제 동네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먹을 것도 남으면 보내주고, 입을 것도 보내주어, 숱한 아이들이 겨울에 입어보지도 못하는 솜바지를 이 아이한테 주기를 망설이지 않아, 아이는 오히려 기골 장대하고 튼튼하고 힘 센 천하장사로 성장해, 2부의 주인공이 될 자오더정.

  세상이 휙 뒤집어져, 현의 간부가 루리자오촌에 와서 촌의 대표를 뽑으라 성화했고, 촌에선 석 달이 지나도 뜻을 모으지 못했다. 급기야 현의 장이 직접 방문해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딱 결판을 봤다. 당신들이 원하지 않는 누구가 촌대표를 하고 싶은데 나서기 면이 없으니 직접 가마를 가져와 태워 대표로 앉히기를 기다리는 거 맞지? 아이고, 진짜 점술가는 여기 있었다. 그랬더니 속에 그런 마음 또는 욕심이 대창 속 지방 들이찬 듯했던 자오시광 영감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아니, 아니, 나는 그런 적 없소, 시뻘개진 목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현의 장은 그러면 가장 성분이 좋은 사람을 고르겠다, 제일 가난한 자가 누구냐? 해서 더 이상 얘기할 거 없이 자오더정이 한 순간에 촌 대표로 올라선 것.

  이때 한 여자가 발딱 일어서서, 일자무식한 자가 어찌 대표가 될 수 있겠소? 여태 가장 천했던 자가 남의 위에 오르게 되면 어떻게 공정한 일을 할 수 있겠소? 격에 너무 맞지 않으면 사람들이 진정으로 따르지 않으니 이게 문제가 아니오? 따박따박 따지고 들어 현의 장이 보기에 마음에 들었다. 그리하여 자오더정은 촌의 대표로, 발언한 여자는 현의 사무관으로 발탁해 데리고 가서 몇 달 교육을 시킨 다음 정식 촌 대표 자리에 올랐다. 이때 자오바보, 점쟁이 자오윈센이 장가까지 들게 해주었으니 이 고마움이란. 자오더정은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나’가 성인으로 자랄 때까지, 그리고 자신이 죽을 때까지 아버지의 은혜를 잊지 않는 의리의 사나이였다.


  재미있다. 위화, 쑤퉁, 그리고 옌롄커 같은 작가들과 비슷한 주제인데 그들보다 톤이 훨씬 부드럽다. 가난과 폭력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인간 짐승의 모습을 발현하기도 하고, 인간 보살을 체현하기도 하지만 앞의 세 사람들보다 적나라하지 않다. 다만 한 가지. 조씨 들의 집성촌 이야기라서 수다한 ‘자오’ 이름이 나와 많이 헷갈릴 수 있다. 다른 성씨의 중요 인물도 하필이면 ‘가오’ 씨라서, 이틀동안 내리, 자오, 가오. 가오, 자오 속에서 헤맬 수도 있다. 그런 건 다 팔자소관이니 각오하시고 읽어보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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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8-30 04:4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별점 다섯 개는 조금 과하고, 넷은 많이 아쉽다.

다음 주 삽질:
월요일. 에리 데 루카, <라파니엘로의 날개>
화요일. 바실리 그로스만, <삶과 운명>
수요일. 베르톨트 브레히트, <마하고니 시의 번영과 몰락>
목요일. 더글러스 스튜어트, <먼고 해밀턴>
금요일. 하인리히 만, <충복>

stella.K 2024-08-30 10: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이책 시리즈 괜찮은 거 같습니다. 읽을 책이 하도 많아 과연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도전의식 생기네요. 표지도 맘에들고.
자오ㅡ각오. 라임이 진짜 각오하게 만듭니다. ㅎㅎ

Falstaff 2024-08-31 06:13   좋아요 1 | URL
시리즈 정말 괜찮아 보이는 데요? ㅎㅎㅎ
이 책은 정말 자오가 많아도 느므 많이 나와서 처음엔 무지 헷갈리더라고요.
기회 닿으면 즐겁게 읽으시기 바랍니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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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드루 포터의 단편집. 열 편을 실었다. 1972년 펜실베이니아 랭커스터에서 출생한 작가는 2007년에 작품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으로 플래너리 오코너 단편소설 상을 수상한 이래 2023년까지 단 세 권의 책만 출간한 과작의 작가이다. 이이의 바이오그래피는 위키피디아에 뜨는 거나 책의 앞날개에 쓰여 있는 거나 거의 다 비슷하다.

  매우 섬세한 문장으로 만든 열 개의 이야기. 이 책은 어제 읽었다. 대략 서른 시간이 지나 독후감을 쓰려고 하는데, 읽을 때는 남성 작가가 참 감각적으로 사람과 가족의 심리를 절묘하게 묘사하는구나, 감탄하기도 했다가, 막상 독후감을 쓰려니까, 불과 서른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생각나는 게 별로 없다. 거 참 신기하지? 그럼에도 특별하지는 않다. 읽을 때 이럴 수 있겠다고 짐작을 한 바 있으니까. 그렇다고 이렇게 간단하게 독후감을 끝낼 것이라고는 가늠하지 못했다. 우짜냐,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데. 오해하지 마시라. 지금 내 혈관의 혈중 알코올 농도는 거의 zero 수준이다. 술 마셔서 그런 거 아니다. 내 휴대전화에 깔린 책 읽기 앱 “북적북적”에 책 읽고 별 넷 반으로 채점했다. 당신이 문장연습 하고 있으면 후회하지 않을 듯. 아쭈, 이렇게 얘기하니까 뭐 알고 지껄이는 거 같네. 속지 마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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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8-29 1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거 참 신기하지요? ㅎㅎ 남은 좋다는데 저는 좋다는 느낌조차 못 받고 넘 지루해서 중고샵에 팔아버렸던 기억이납니다. 아일랜드나 영국쪽인 줄 알았더니 미국사람이었군요. 언제 다시 인연이 있을까 싶네요.

Falstaff 2024-08-29 16:49   좋아요 1 | URL
저는 좋다는 느낌까지는 받았는데요, 작품이 서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인지 거의 생각이 나지 않더라고요. ㅎㅎㅎ 사실 지금은 이 책 읽고 근 40일이 지나서 더, 더 생각이 나지 않는 상태랍니다.

hnine 2024-08-29 14: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런 적 많아요. 다 읽었는데 뭘 읽었나 싶은 책들이요. 너무 긴 장편을 읽었을때도 그렇고 줄거리가 분명치 않은 책을 읽었을 때도 그렇고요. 할 수 없이 처음부터 다시 읽는데 처음 시작 부분을 다시 읽다보면 전체 윤곽이 되살려지면서 기억이 나면, 그때 독후감을 쓰기 시작해요.
이 책 역시 저도 분명 읽었는데, 지금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제목이 시험문제 제목이었던가 그랬다는 것만 떠오르네요.
큰 주제가 아니라 섬세한 점을 소재로 잡아 이야기를 구성하는 작가로 알고 있어요.

Falstaff 2024-08-29 16:54   좋아요 0 | URL
오, 그러면 적지 않은 책들을 두 번 읽으시고 감상을 적으신다는 말씀이잖아요. 대단하시네요. 워낙 꼼꼼하고 정성스럽게 쓰시는 분이라 매번 ㅎㅎㅎ 눈에 힘 줘서 읽고 있습니다. 역시 그러시네요. 저는 날이 갈수록 이제 독후감 쓰기가 쉽지 않아 요즘엔 끙끙대고 있답니다.
 
라운드 하우스
루이스 어드리크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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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스 어드리크를 처음 읽은 것이 2023년 7월. 오늘이 2024년 7월 19일. 일년 만에 어드리크 세 권 읽었다. 어찌 작년에야 이이를 알게 됐는지. 재미도 있고, 무엇보다 골격이 탄탄해서 좋다. 한 번 더 밝히자면 루이스 어드리크의 부계는 독일계, 모계의 반은 북아메리카 선주민 치페와 부족, 나머지 반은 프랑스계 혼혈. 그러니까 4분의 1이 아메리카 선주민이지만 노스다코타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자라면서 스스로 선주민의 정체성을 지니고 살았다. 그래서 <밤의 경비원>, <정육점 주인들의 노래 클럽>, 그리고 <라운드 하우스> 세 권 모두 치페와 부족이 주인공이거나 매우 중요한 등장인물로 나온다.

  루이스 어드리크를 통해서 내가 거의 새롭게 알게 된 걸 말하자면, 남아 있는, 학살을 피해 아직까지 살아남은 아메리카 선주민들이 보호구역으로 밀려나면서 미합중국 정부와 맺은 조약을, 그들은 정부와 한 커뮤니티 간의 협약이 아니라, 정부와 정부, 즉 아메리카 합중국과 선주민, 국가 대 국가가 맺은 합법적 조약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러니 합중국은 선주민을 자기들이 “통치”할 수 있는 국민으로 여기지 말라고 주장할 수 있고, 더 나아가 그리 주장해야 옳은 일이다. 이제 선주민들이 주장할 수 있는 권리란 보호구역 안에서의 (독립까지는 거창하고) 자치권이자 일종의 까방권으로, 그동안 합중국 헌법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다음으로 하고, 지난 세기에 위대한 족장과 대통령이 함께 서명한 계약을 충실하게 지키라고 말한다. 즉, 현대 미국의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는 그나마 변방으로 쫓긴 선주민들의 보호구역 안에서도 자신들의 이익, 돈을 위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권리를 유린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내용의 작품이 <밤의 경비원>이었다면, <라운드 하우스>는 만일 선주민에 대한 범죄가 저질러졌을 경우 범죄를 행한 장소에 따라 기소할 수도 있고, 기소도 하지 못한 채 바로 그 범인이 백주 대낮의 거리를 활보할 수 있다. 단, 범죄를 저지른 자가 선주민이 아닐 경우에 그렇다. 즉 선주민이 아닌 백인이나 유색인종, 하여간 합중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부족의 보호구역과 주state의 토지와 개인 소유지의 경계가 애매한 곳에서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이 범죄를 연방법, 주법, 부족법 가운데 어떤 법률로 기소해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아, 선주민 법원은 자신들의 법으로 피의자를 기소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책에서는 강간치상이 해당하는데, 이런 강력범죄의 경우에도 그런 것 같다. 우리나라 양식良識으로는 생각도 못할 일이 아메리카 선주민 보호구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출판사가 제공하는 책 정보에 의하면 <라운드 하우스>는 2009년에 퓰리처 상을 탈 뻔했던, 그러나 결국엔 미역국을 먹고 말았던 작품 <비둘기 재앙>의 후속편 격이란다. <비둘기 재앙>에서 부족판사 안톤 바질 쿠츠와 부족민 등록 전문가, 쉬운 얘기로 호적계장 제럴딘 밀크가 다 늦은 나이에 결혼해서 아들 조를 생산하는데, 이 조가 <라운드 하우스>의 화자이자 열세 살 먹은 주인공이다. 사내 나이 열셋. 캬. 어려운 나이다. 책상에 앉아 책을 읽다 아빠가 샌드위치 했다고 먹으라고 해서 일어나다가 바지 앞섶을 책상 귀퉁이에 부딪기만 해도, 괜히 헐렁한 트렁크 팬티를 입었다가 표면에 스치기만 해도, 진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마치 한석규가 이동통신 011 광고를 했던 것처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뚝불뚝 치솟는 리비도의 난장판. 뭐가 치솟냐고? 에이, 왜 그러셔. 다 아시면서. 하여튼 그러니까 <라운드 하우스>가 <비둘기 재앙>의 후속편인 건 맞지? 그래서 팍 정했다. 도서관에 책이 있기만 하면 다음 번 어드리크는 <비둘기 재앙>이 될 것임을.


  그럼 “라운드 하우스”가 무엇인가를 설명해야 할 터. 독후감을 올리는 짧은 공간에 자세하게 설명할 도리가 없다. 간략하게 해보자. 아메리카에서 가장 흔했던 포유류 가운데 하나가 버팔로였다. 백인들이 도착하고 서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자 곧바로 선주민과 갈등을 시작했고, 선주민들을 몰아내기 위해 생각해낸 것 가운데 하나가 그들의 주 식량원인 버팔로의 씨를 말리는 거였다. (이하 죽 써내려갔다가 아무래도 너무 길어져 다 지워버렸다.) 당시의 희생과 생명의 연속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은 건축물에 라운드 하우스라는 이름을 짓고, 주로 치료주술을 행하던 신성한 행사장으로 기능하게 된다.

  이곳에서 사건이 터진다. 위에서 말한 강간치상. 그리고 틀림없이 그렇게 되었겠지만 어떤 단서도 발견할 수 없는 살인과 시신 유기.

  화자 ‘나’의 가족, 쿠츠 집안의 남자들은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읽는 독자들 입장에서 보자면 잘난 척 오지게 한다고 여길 수도 있는 바, 예를 들면, 얌전히 술을 마시고, 이따금 여송연을 피우고, 점잖게 차를 몰고, 더 똑똑한 여성과 결혼하는 패기를 드러내며, 책임감 있고, 고지식하고, 심지어 무모하게 영웅적인 면모가 있다. 그러면서도 평범한 기쁨을 소중하게 여기는 가족이라고 주장하니 좀 재수가 없긴 하다. 독자의 의무로 이 주장을 믿기로 해서 평화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는 가족들. 그러나 이들 앞에 아름다운 외모의 어머니가 차를 몰고 나타났을 때, 얻어맞아 전체적으로 퉁퉁 붓고 일그러진 얼굴이었으며 터진 입술에서는 계속 피가 흘렀는데, 출혈은 입술보다 치마에 묻은 것이 더 심했다. 곧바로 신고를 했다. 도착한 경찰은 주 경찰관, 후프 댄스 타운의 지역 경찰관, 그리고 보호구역 내 부족 경찰관 빈스 매드웨신, 이렇게 세 명. 조는 조금 후에 알게 되지만, 어머니가 성폭행을 당한 곳이 라운드 하우스 근방인데, 그곳이 매우 복잡한 소유관계로 얽힌 곳이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그곳이 선주민 보호구역이 아니라면 피의자가 누구인지 알더라도 당장 기소하거나 구속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범행을 당한 장소를 규명하는 것은 폭행 및 강간치상을 당한 어머니 쪽이 밝혀야 한다. 당장은 그걸 밝히는 것보다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가서 응급 수술을 받는 일이었다.

  한 종족, 부족, 가족 구성원 가운데 남성이 밖에 나가서 얻어 터지고 오는 것에 비하면, 여성이 폭행을 당하고 올 때 구성원의 분노 게이지는 한 백 배 정도 더 치솟는다고 한다. 오빠 장가드는 거에 비하면 누나 시집갈 때 훨씬 더 서운한 이치하고 비슷하단다. 아들 결혼식 때 눈물 짜는 엄마 못봤다. 딸 결혼식 때는 여럿 봤다. 그래서 이 가족의 남자 구성원 아빠 안톤 바질 쿠츠와 아들 안톤 바질 쿠츠 주니어, 스스로 ‘조’라고 이름을 짓고 그렇게 불리기 바라는 아들은 반드시 범인을 찾아내 보복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직업이 부족 판사. 아무리 가족 구성원이 폭행을 당했다고 해도 양심과 법을 이탈하는 방식으로 범인을 찾아내거나 보복할 수는 없는 형편. 아들은? 아버지에 비해 자유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수술을 받고 며칠만에 퇴원해 집에 돌아온 엄마는 극도의 공포 속에서 고치 속의 번데기처럼 침상을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 엄마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시내 저쪽에서 주유소를 하고 있는 화이티 삼촌의 아름다운 아내, ‘나’ 조의 숙모이자 세파에 찌든 금발의 전직 스트립 댄서 소냐가 키우고 있는 사나운 개 네 마리 가운데 나이들고 사나운 암컷 불테리어, 도베르만, 셰퍼드 잡종인 펄을 데리고 온다.

  이 사건 말고 화자 ‘나’ 조의 성장기도 작품 속 한 부분을 담당한다. 열세 살 소년 앞에 풍만하고 섬세하고 단호하게 둥근 젖가슴을 지닌 대단히 매력적이며 뇌쇄적이고 사람을 애태우는 백인 숙모 소냐를 향한 동경도 재미있거니와, 조의 친구들 잭 피스, 앵거스 캐시포, 그리고 절친 ‘캐피’라고 부르는 버질 라푸르네의 귀여운 일탈도 작품의 감초로 등장한다. 물론 단지 감초 역할만 하면 내가 독후감에 소개도 안 하겠지만. 이 가운데 여름방학을 맞아 선주민 보호구역에 가톨릭 선교 겸 지원활동을 온 백인 여학생이 캐피한테 홀딱 반해버린 일도 백미다. 한 살이 많아 열네 살인 캐피는 선교활동의 마지막 날을 기념하는 파티 도중에 드디어 백인 여학생을 눕히는 데 성공했고, 한 번 가지고 만족할 수 없어 성당의 지하 교리 교육장 카펫 위에서 일을 몇 번 더 치룬다. 그러나 여학생은 떠나가고, 둘의 사랑을 더욱 순결하게 간직하고자 하는 캐피는 중동 파병과 부상 경험이 있는 젊고 강건한 신부에게 고해하기로 결정을 해 진짜 그렇게 한다. 그건 좋은데, 하필이면 밝히지 않아도 괜찮을 거 같은 밀회 장소, 성당 지하의 교리 교육장을 실토하는 바람에 크게 열을 받은 젊은 신부가 알통이 불긋불긋한 팔뚝을 드러낸 채 캐피를 패 죽이려 고해실에서 뛰쳐나온다. 신부보다 한 발 더 빨리 도망나온 캐피, 이렇게 둘이 만들어내는 백주의 도주극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이건 읽어보셔야 알 듯.


  그래서 범인은 어떻게 되느냐고? 맞다. 당신 생각처럼 된다. 스토리가 이어지면서 선주민 가족과 이 가족을 둘러싼 사람들, 심지어 부족 경찰까지 범인이 누구인지 알게 되지만, 자신이 폭행당한 장소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는, 그곳을 거짓으로 증언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리하여 가족은 피의자이며 범인이 거의 확실한 백인 남자를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하는데, 결말은 당신 생각대로 흘러가기는 해도 단지 그렇다는 것뿐이다.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자 한다면 책을 읽어보셔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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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4-08-27 0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둘기 재앙>을 먼저 읽고 읽으면 더 좋을 거 같아요. 아메리카 선주민들이 처한 현실을 주제로 하지만 팔팔한 소년들, 육체파 백인 숙모 이야기가 웃길 거 같아요. ㅎㅎ

Falstaff 2024-08-27 18:34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저도 비둘기 먼저 읽었으면 더 좋았겠다, 생각했습니다.
소년들의 리비도 이야기는 사실 많이 소개가 되어 별 거 없지만, 그래도 읽을 때마다 재미있습니다. ㅋㅋㅋㅋㅋ

그레이스 2024-08-27 1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둘기재앙을 먼저 읽는것으로!

Falstaff 2024-08-27 19:24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저도 미리 알았으면 그렇게 했을 거 같습니다. 즐독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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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리가 사랑한 카페


  20년 전인 2004년, 최내경은 파리의 유명 카페와 고흐가 마지막 몇 달을 보낸 오베르 쉬르 우아즈 여행기 <파리 예술 카페 기행>을 내고, 2009년에 몽마르트르를 중심으로 카페와 음식점, 그리고 공연장 이야기 <몽마르트르를 걷다>를 낸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올해 두 책을 보완한 성격이 짙은 <파리가 사랑한 카페>를 다시 냈다. 

  카페Cafe라는 말의 어원이 무엇인지 모르는 나는, 그저 유럽에 커피가 들어왔고, 부르주아 귀족들이 마시기 시작했으며, 젊은이들조차 이에 중독 비슷한 매력을 느껴 바흐조차도 자신의 칸타타 BWV211에서 젊은 아가씨 리센으로 하여금 “아 커피 맛이 정말 기가 막혀! 수천번의 키스보다 더 달콤하고, 좋은 와인보다 더 부드러워. 나는 커피, 커피를 마셔야 해. 나를 즐겁게 해주려면 다른 거 말고 커피나 한 잔 따라 주세요.” 라고 노래하게 만든다. 이 칸타타를 작곡한 바흐가 돌잡이 상에서 자식 많이 낳겠다고 쌀 그릇을 손에 잡으며 겨우 처음 직립보행을 했던 1686년에, 이탈리아 사람 프란체스코가 파리 최초의, 세계 최초가 아니라 파리 최초의 카페 “프로코프”를 열었다. 이로써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에서는 떠돌이 유목민과 대상들이 모래 사막에 주저앉아 쏟아지는 별빛을 어깨에 진 채 걸쭉하게 타 마시던 커피가, 17세기 유럽으로 건너와, 거울로 벽을 장식하고 별빛 대신 커다란 샹들리에에서 고래 기름을 만든 촛불이 불타오르는 호화찬란한 실내공간에, 줄지어 들어선 대리석 테이블 위에 놀려지게 되었다.

  그곳을 드나들던 프랑스의 위대한 극작가들, 몰리에르는 일찍 죽어 구경하지 못했지만, 라신, 라퐁텐은 물론이거니와 당대의 계몽주의자였던 장 자크 루소, 몽테스키외, 드니 디드로 같은 양반들도 신민들을 계몽시키고 여유시간이 나면 프로코프 카페에 들르고는 했다 한다. 루소는 장 자크, 디드로는 드니, 근데 몽테스키외의 정식 이름은 도대체 뭐야? 나는 한 번 정도 들어본 것 같다. 그의 작품 <어느 페르시아인의 편지> 앞날개에 나온다. “샤를 루이 드 세콩다 몽테스키외.” 왜 엉뚱한 이야기에 열심이냐고? 내가 경애하는 독일 작가 율리 체가 쓴 <잠수 한계 시간>에서 나오는 건데, 주인공의 대학원 졸업 인터뷰에서 교수가 질문하기를 몽테스키외의 정확한 철자가 어떻게 되느냐는 거였다. 그래서 그이의 이름에 관심이 많았다. 살다 보면 그럴 수 있는 거니까 왈가왈부하지 말자. 참고로 Montesquieu. 잘난 척하고 싶어 썼다.


  아주 오래 전에 최내경의 <파리 예술카페 기행>을 당시 내가 밥 빌어먹던 회사의 사보에 소개한 적이 있다. 거기서 이렇게 이야기한 것이 기억난다.


  “책을 무작위로 들추어보니 한 문장에 거론된 인물만 해도, 베를렌, 프루스트, 지드, 생텍쥐베리, 발레리, 프레베르, 퐁즈, 크노, 헤밍웨이, 카뮈, 말로, 조르주 퐁피두, 지스카르 데스탱, 프랑수아 미테랑, 자크 시라크, 장 폴 벨몽도, 샤를 트레네, 잭 니콜슨, 미셀 모르간, 모두 합해서 열 네 명인데, 이런 문장은 카페 하나하나를 소개할 때마다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지라 그녀가 거명하는 사람들만 나열한다해도 원고지 스무 장은 너끈하게 채울 듯하는군요.

게다가 거명된 인물의 무게감이 그걸 읽는 사람을 압도합니다. 세상에나, 베르렌과 프루스트, 그리고 말로가 한 자리에 있다니. 그리고 사람들의 이름을 자세하게 보면 유럽의 다른 나라와 아메리카까지,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제외하고는 빠짐없이 대륙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니, 프랑스 파리의 예술카페라는 용광로 속에서 자기들의 문화를 다 녹인 다음, 그 결과물을 세계 곳곳에 전파한 그곳 카페의 힘, 그리고 카페가 전세계 백인 문화에 끼친 영향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그때 눈 여겨 본 카페가 물랭루즈에서 쇼를 하던 쉬잔 발라동의 손자녀들이 운영하는 카페 메종 로즈였다. 이 메종 로즈가 <몽마르트르를 걷다>에 이어 <파리가 사랑한 카페>에서도 등장한다. 위의 인용문에 이름을 올린 거물들과 비교하면 정말로 하찮은 계급, <목로주점>의 주인공인 제르베즈 아줌마 정도도 되지 않을 인물이 전직 대통령, 작가, 시인, 명배우들과 함께 거론되는 것이 새삼스럽기 마찬가지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유럽 문명과 문화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 오랜 전통과 깊이에 공감하는 분들이 유럽을, 프랑스를, 그리고 파리를 방문한다면 이 책을 가방 속에 넣고 틈틈이 꺼내 보며 파리를 위대한 도시가 되게 만드는데 한 몫을 한 유명 카페와 음식점을 찾아 식도락을 즐겨보는 것도 대단한 유혹일 터이다.




2. 파리 예술카페 기행


최내경이 또 프랑스에 다녀왔습니다. 혼자 간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이번엔 프랑스의 수도이자 세계 예술의 심장인 파리를 중심으로 다녀왔는데, 프랑스가 자랑하는 또 하나의 소프트, 파리를 중심으로 지난 역사상 숱한 예술가, 정치인, 배우, 가수 등을 불러 모아 서로 토론하고 사랑하고 이별하고 술 마시던 자리, 그들로 하여금 그냥 선술집이나 밥집이 아닌 프랑스 문화, 더 나아가 세계 문화의 특별한 코드를 만들어낸 카페에 들러 파리 구석구석을 걸어다니느라 피곤한 다리를 쉬고 허기진 위장을 달랜 기록을 책으로 만들었군요.

프랑스 문화, 가운데 그냥 대충 하나를 찍어 샹송을 이야기해볼까요?

샹소니에 중에서 무슨 특별한 기준이 아니라 그냥 퍼뜩 떠오르는 인물을 한 두 명만 얘기하자면 이브 몽탕, 그리고 조르쥬 무스타키. 이브 몽탕은 이태리 태생으로 프랑스로 건너가 노래를 하고 영화를 찍고 정치도 하고... 죠르주 무스타키 역시 그리스 태생으로 조국 보다는 프랑스에서 자신의 노래 세계를 활짝 핀 가수지요. 프랑스 문화에는 이렇듯 국경이 없습니다. 어느 문화권의 것이던 간에 자존심 센 자기의 문화라는 커다란 용광로 속에 녹여 기어이 프랑스 문화로 만들어내는 그 기이하고 블랙홀 같은 흡인력. 이방의 문화를 소재로 오히려 자신의 것을 더욱 살찌우는 프랑스의 오만스럽고 거염있는, 그러나 부럽기 짝이 없는 것들 가운데 파리 시내의 카페라는 장치가 있나봅니다.


최내경의 책 <파리 예술카페 기행>에서 그녀가 파리의 예술카페에 들러 추억하는 인물들의 면면은 가히 대단합니다.

책을 무작위로 들추어보니 한 문장에 거론된 인물만 해도, 베를렌, 프루스트, 지드, 생텍쥐베리, 발레리, 프레베르, 퐁즈, 크노, 헤밍웨이, 카뮈, 말로, 조르주 퐁피두, 지스카르 데스탱, 프랑수아 미테랑, 자크 시라크, 장 폴 벨몽도, 샤를 트레네, 잭 니콜슨, 미셀 모르간, 모두 합해서 열 네 명인데, 이런 문장은 카페 하나하나를 소개할 때마다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지라 그녀가 거명하는 사람들만 나열한다해도 원고지 스무 장은 너끈하게 채울 듯하는군요.

게다가 거명된 인물의 무게감이 그걸 읽는 사람을 압도합니다. 세상에나, 베르렌과 프루스트, 그리고 말로가 한 자리에 있다니. 그리고 사람들의 이름을 자세하게 보면 유럽의 다른 나라와 아메리카 까지,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제외하고는 빠짐없이 대륙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니, 프랑스 파리의 예술카페라는 용광로 속에서 자기들의 문화를 다 녹인 다음, 그 결과물을 세계 곳곳에 전파한 그곳 카페의 힘, 그리고 카페가 전세계 백인 문화에 끼친 영향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그 가운데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이렇게도 뻑적지근한 인물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던 무수한 예술카페가 아니라, 평생 사랑하고 좌절하고 배신당하고 빼앗기면서 19살에 낳은 아들 위트릴로과 함께, 아들의 친구와 사랑에 빠져 불행한 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쉬잔 발라동, 서커스 단의 곡마사 출신인, 당시 시각과 상대했던 인사들의 이름값에 비교한다면 비루하고 남루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는 발라동의 집을 개조한 카페 “메종 로즈”였습니다.

물론 몽마르트를 이야기하면서 쉬잔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지만, 무수한 쉬잔들을 생산해냈던 나폴레옹 3세의 퇴폐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한 그 시절, 몽마르트의 후미진 뒷골목에서 로트렉과 모딜리아니가 일본의 기모노를 입고 압생트를 마시며 쉬잔 발라동과 함께 아편에 몰두해야 했던 세기말의 로망을 최내경은 그들보다 조금 후세에 세기의 지성으로 찬사를 받았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와 같은 무게, 아니면 적어도 상당히 비슷한 무게로 다루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최내경의 파리 기행, 그것도 자칫하면 식도락 기행이라고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예술카페로 향한 걸음. 작가는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거위 간 요리와 타르타르 소스를 첨가한 스테이크, 크루아상, 위스키나 코냑을 넘어서는, 파리의 수많은 카페에서 작가는 미각과 더불어 무엇을 보고 듣고 만지고 느꼈을 겁니다. 그 “무엇”이 비행기 삯만 해도 수백만원이 넘는 파리로 날아가 대뇌에 깊이 각인하고 싶었던 것이었을 겁니다.

그녀는 예전 저작인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에서와는 달리 그 “무엇”에 관하여 확실한 단어로 설명합니다.


“지금도 그들은 카페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기도 하고, 토론을 하기도 헤어짐을 아쉬워하기도 한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 모두는 이 카페들을 꼭 한 번 둘러보길 바란다. 계획만 세운다면 누구든 가능하리라고 본다. 그러면 여러분 모두는 이전보다 시 공간이 훨씬 넓어진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잊지 못할 추억으로 떠올릴 그런 순간을 가지는 멋진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기분은 무척 행복할 것이다. 이 책으로 여러분 모두가 예술가와 문인들과 함께 한 멋진 여행이 되었길 바란다.”


최내경은 행복을 위해서 독자들에게 파리의 예술카페들을 소개했군요. 추억을, 그것도 세계적인 예술가와 문인들과 함께한 멋진 여행의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독자들에게 작가는 파리의 예술카페로의 여행을 권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지금 당장이 아니어도 좋고, 10년 이내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언젠가는 파리에, 그 카페에 들어 딱딱한 빵 한 조각에 커피 한 잔이라도 해보고 말리라, 하는 희망뿐이어도 작가는 우리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 가지고도 스스로 행복해할 것입니다.




3.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


어느새 가을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당신은 외롭지 않습니까. 당신 가슴 속 깊숙한 고독의 빈자리로 문득 황황한 바람이 불어오지는 않습니까. 어려운 시절, 거친 생활을 살아내느라 무수한 사람들 사이에 부대끼고 함부로 관계들을 만들어가면서도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는 사막을 바라보지는 않나요. 부모와 배우자, 그리고 정겨운 살붙이들이 아주 가끔은 전혀 낯선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하겠군요.

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가을에.

가끔은 길을 떠나고 싶습니다. 지구라는 별자리에 오직 당신만이 혼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때, 당신은 헤진 배낭을 메고 그저 길을 나서고싶어질 것입니다. 당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곳에서 지친 발걸음을 쉬고싶겠지요. 당신은 신발끈을 풀고 고단한 발바닥을 두드립니다. 그러다가 무거운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려봅니다. 저런, 그러고보니 외로운 당신을 품고있는 공기 속에서 위대했으나 고독했던 영혼들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군요.

당신은 행복합니다. 위대한 예술품을 만들어낸 고독한 영혼들이 당신과 함께하니까요.

그러나 정말로 자리를 박차고 길을 나설 수 있으면 대단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거나 부모를 잘 만난 사람이겠지요. 보통의 당신은 길 떠날 생각조차 못할 확률이 많습니다. 시간이 없고, 돈이 없는.... 하지만 언젠가 길을 떠나리라, 마치 비밀스런 에로스의 약속인 양 마음 한 쪽엔 그런 갈증을 이 가을에도 당신은 품고 있겠지요. 그 희망, 사실은 조금은 덧없는 그런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뒤 돌아보지 않고 베낭을 멜 희망이 있는 당신은 지금 불행하고, 그럴 희망을 갖지 않은 당신은 언제나 불행합니다.


그날을 기다리나요? 그렇다면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일탈의 그날을 위해 이 책을 소개합니다.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

프랑스.... 혹은 불란서를 소리내 발음해보십시오. 그것은 이미 당신에게 어떤 동경으로서의 보통명사입니다. 유럽의 중심, 세계 2위의 농산물 수출국이라는 지리부도적인 지식보다도 당신의 가슴 속에서 프랑스는 로제 마르탱 뒤 가르, 앙드레 말로 같은 작가, <암흑가의 두 사람>에서의 쟝 가뱅과 알랭 들롱의 우수 깊은 눈동자, 장-폴 고띠에, 크리스티앙 디오르 등의 패션 디자이너... 이런 소프트가 먼저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아니죠, 당신을 포함한 많은 우리 보통의 사람들은 의당 그러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몽마르트 언덕의 노천 카페에 몰려앉아있는 혁명가 레닌과 바쿠닌 같은 망명 이방인의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겠군요.

그런데 프랑스의 무수한 소프트 중에 프랑스를 프랑스답게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소프트는 무엇일까요. 루브르 박물관의 눈썹 없는 여인 <모나리자>를 위시한 미술품을 제일 윗자리에 놓지 않으면 많이 서운하리라 생각합니다.

책《고흐의 집을 아시나요?》는 그러나 고흐의 작품에 대한 설명서나 입문서가 아닙니다.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에서 고흐를 발견할 수 있는 페이지는 얼마 되지 않는군요. 그의 그림도 여섯 컷의 사진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 책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앞에서 얘기했듯, 어느날 갑자기 단행할 당신의 일탈, 그 여행길에 당신의 헤진 베낭 속에 담아갈 안내서입니다. 당신은 이 책과 함께 지난 세기와 지지난 세기에 가장 고독했고 우울했던 영혼들의 흔적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즉, 고흐의 작품을 보러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고흐가 자신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던 그 무서운 고독과 절망의 시절을 온전히 담아낸 다락방으로 당신의 발길을 옮길 수 있게하는 책이지요. 낡은 침대가 놓인 그 좁은 다락방에서 밤새도록 신음을 하던 고흐를 당신은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비뚤배뚤하게 원색으로 불안하게 그려놓은 오베르 교회, 위대한 그 그림을 볼 수 있게 안내하는 것이 아니고, 어느 천재에 의하여 불멸의 명화로 그려진 교회 건물을 당신은 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시간의 마모는 직접 고흐의 집을 찾아나선 나그네의 발길에 쓸쓸한 회한 만을 선사하기 십상입니다만, 고독했던 천재의 숨결마저 어느 한 구석에서 발견하기 기대난망이겠지만 굳이 그 집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신의 외로운 영혼을 위해서일 것입니다.

작가 최내경은 고흐가 최후를 보냈던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셋집을 비롯해서 베르디 오페라 <돈 카를로> 1막의 무대가 되는 퐁텐블로 숲 가의 밀레의 집과 아틀리에, 거장 다 빈치가 만년을 보낸 클로 뤼세, 프랑스 회화의 다른 큰 축을 이룬 남프랑스 지방, 그리고 파리를 대단원으로 해서 간결하게, 그렇습니다, 우리가 섣부른 기행문에서 흔히 읽을 수 있는 허접한 감상을 첨가하지 않고 담담히 그려내고 있습니다.


최내경의 글은 이렇듯 조금은 건조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아까운 지면을 빌어 소개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백에 대한 매력이지요. 작가는 고흐의 집으로 가는 길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면 어느어느 것이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 다음의 지면은 당신의 순서입니다. 최내경의 책을 헌 베낭에 넣고 남프랑스에서 다시 파리로 향하는 밤 열차를 탄 당신은 열차 객실에서 이방의 문자로 인쇄된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를 꺼내 그 빈 여백에 당신의 감상을 적어놓을 수 있습니다. 최내경은 남부에까지 가서 왜 엑상 프로방스의 세잔의 집엔 들러보지 않았을까...를 빈 자리에 쓸 수도 있고, 끝없이 펼쳐지는 남 프랑스의 들녘을 밤기차에서는 볼 수 없었다고 써놓아도 좋을 것입니다. 그건 당신의 몫이니까요.


당신 속의 외로운 영혼을 위하여, 어느날 문득 저질러질 일탈을 위하여 기쁘게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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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8-26 10:2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캬~ 정말 잘 쓰시네요. 그 내공이 그냥 생긴게 아니겠군요. 사보에 글을 쓰실 정도면! 그 사보 어떤 사본지 궁금하네요. 지금도 받고 계신가요? 암튼 이거 이달의 당선작될 것 같습니다. ㅎ

Falstaff 2024-08-26 14:41   좋아요 4 | URL
아이그, 쑥쓰럽게 왜 이러십니까. 알라딘 서재에 글 좋은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 거기에 제가 낄 수는 읎습지요. ㅎㅎㅎ 근데도 어깨는 으쓱으쓱 거리는 걸요. ㅋㅋㅋ
21세기 유동성 위기 국면을 지나면서 거의 대부분 회사의 종이 사보는 멸종됐을 겁니다. 인트라넷으로 소식지 비슷하게 명맥을 이어가는 게 대부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페넬로페 2024-08-26 15:1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의 말씀에 백퍼 찬성입니다.
폴스타프님
이런 여행기나 에세이의 리뷰도 너무 고급스러워요.
어깨 더 으쓱으쓱 하시길요.

Falstaff 2024-08-26 15:38   좋아요 3 | URL
윽. 이런 과찬의 말씀을.... 아, 진짠 줄 알잖아요. ㅋㅋㅋㅋ
좋습니다. 으쓱으쓱! ^^;;

다락방 2024-08-27 10: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 ㅑ ~ 너무 좋습니다, 폴스타프 님.
저는 [파리는 날마다 축제]를 읽고 그렇게나 화이트와인에 굴이 먹고 싶었더랬어요. ㅋㅋㅋㅋ 그래서 먹었는데 ㅋㅋㅋㅋㅋ 전 굴은 별로였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4-08-27 18:36   좋아요 1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화이트와인에 굴... 워낙 유명한 조합이지만 저도 굴의 니글니글한 입 안 감촉에는 오히려 20도 이상 독한 소주가 대빵이더라고요.
화이트와인에 오징어젓을 나쁘지 않게 드셔서 을매나 안심을 했는지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