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운드 하우스
루이스 어드리크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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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스 어드리크를 처음 읽은 것이 2023년 7월. 오늘이 2024년 7월 19일. 일년 만에 어드리크 세 권 읽었다. 어찌 작년에야 이이를 알게 됐는지. 재미도 있고, 무엇보다 골격이 탄탄해서 좋다. 한 번 더 밝히자면 루이스 어드리크의 부계는 독일계, 모계의 반은 북아메리카 선주민 치페와 부족, 나머지 반은 프랑스계 혼혈. 그러니까 4분의 1이 아메리카 선주민이지만 노스다코타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자라면서 스스로 선주민의 정체성을 지니고 살았다. 그래서 <밤의 경비원>, <정육점 주인들의 노래 클럽>, 그리고 <라운드 하우스> 세 권 모두 치페와 부족이 주인공이거나 매우 중요한 등장인물로 나온다.

  루이스 어드리크를 통해서 내가 거의 새롭게 알게 된 걸 말하자면, 남아 있는, 학살을 피해 아직까지 살아남은 아메리카 선주민들이 보호구역으로 밀려나면서 미합중국 정부와 맺은 조약을, 그들은 정부와 한 커뮤니티 간의 협약이 아니라, 정부와 정부, 즉 아메리카 합중국과 선주민, 국가 대 국가가 맺은 합법적 조약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러니 합중국은 선주민을 자기들이 “통치”할 수 있는 국민으로 여기지 말라고 주장할 수 있고, 더 나아가 그리 주장해야 옳은 일이다. 이제 선주민들이 주장할 수 있는 권리란 보호구역 안에서의 (독립까지는 거창하고) 자치권이자 일종의 까방권으로, 그동안 합중국 헌법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다음으로 하고, 지난 세기에 위대한 족장과 대통령이 함께 서명한 계약을 충실하게 지키라고 말한다. 즉, 현대 미국의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는 그나마 변방으로 쫓긴 선주민들의 보호구역 안에서도 자신들의 이익, 돈을 위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권리를 유린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내용의 작품이 <밤의 경비원>이었다면, <라운드 하우스>는 만일 선주민에 대한 범죄가 저질러졌을 경우 범죄를 행한 장소에 따라 기소할 수도 있고, 기소도 하지 못한 채 바로 그 범인이 백주 대낮의 거리를 활보할 수 있다. 단, 범죄를 저지른 자가 선주민이 아닐 경우에 그렇다. 즉 선주민이 아닌 백인이나 유색인종, 하여간 합중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부족의 보호구역과 주state의 토지와 개인 소유지의 경계가 애매한 곳에서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이 범죄를 연방법, 주법, 부족법 가운데 어떤 법률로 기소해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아, 선주민 법원은 자신들의 법으로 피의자를 기소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책에서는 강간치상이 해당하는데, 이런 강력범죄의 경우에도 그런 것 같다. 우리나라 양식良識으로는 생각도 못할 일이 아메리카 선주민 보호구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출판사가 제공하는 책 정보에 의하면 <라운드 하우스>는 2009년에 퓰리처 상을 탈 뻔했던, 그러나 결국엔 미역국을 먹고 말았던 작품 <비둘기 재앙>의 후속편 격이란다. <비둘기 재앙>에서 부족판사 안톤 바질 쿠츠와 부족민 등록 전문가, 쉬운 얘기로 호적계장 제럴딘 밀크가 다 늦은 나이에 결혼해서 아들 조를 생산하는데, 이 조가 <라운드 하우스>의 화자이자 열세 살 먹은 주인공이다. 사내 나이 열셋. 캬. 어려운 나이다. 책상에 앉아 책을 읽다 아빠가 샌드위치 했다고 먹으라고 해서 일어나다가 바지 앞섶을 책상 귀퉁이에 부딪기만 해도, 괜히 헐렁한 트렁크 팬티를 입었다가 표면에 스치기만 해도, 진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마치 한석규가 이동통신 011 광고를 했던 것처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뚝불뚝 치솟는 리비도의 난장판. 뭐가 치솟냐고? 에이, 왜 그러셔. 다 아시면서. 하여튼 그러니까 <라운드 하우스>가 <비둘기 재앙>의 후속편인 건 맞지? 그래서 팍 정했다. 도서관에 책이 있기만 하면 다음 번 어드리크는 <비둘기 재앙>이 될 것임을.


  그럼 “라운드 하우스”가 무엇인가를 설명해야 할 터. 독후감을 올리는 짧은 공간에 자세하게 설명할 도리가 없다. 간략하게 해보자. 아메리카에서 가장 흔했던 포유류 가운데 하나가 버팔로였다. 백인들이 도착하고 서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자 곧바로 선주민과 갈등을 시작했고, 선주민들을 몰아내기 위해 생각해낸 것 가운데 하나가 그들의 주 식량원인 버팔로의 씨를 말리는 거였다. (이하 죽 써내려갔다가 아무래도 너무 길어져 다 지워버렸다.) 당시의 희생과 생명의 연속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은 건축물에 라운드 하우스라는 이름을 짓고, 주로 치료주술을 행하던 신성한 행사장으로 기능하게 된다.

  이곳에서 사건이 터진다. 위에서 말한 강간치상. 그리고 틀림없이 그렇게 되었겠지만 어떤 단서도 발견할 수 없는 살인과 시신 유기.

  화자 ‘나’의 가족, 쿠츠 집안의 남자들은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읽는 독자들 입장에서 보자면 잘난 척 오지게 한다고 여길 수도 있는 바, 예를 들면, 얌전히 술을 마시고, 이따금 여송연을 피우고, 점잖게 차를 몰고, 더 똑똑한 여성과 결혼하는 패기를 드러내며, 책임감 있고, 고지식하고, 심지어 무모하게 영웅적인 면모가 있다. 그러면서도 평범한 기쁨을 소중하게 여기는 가족이라고 주장하니 좀 재수가 없긴 하다. 독자의 의무로 이 주장을 믿기로 해서 평화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는 가족들. 그러나 이들 앞에 아름다운 외모의 어머니가 차를 몰고 나타났을 때, 얻어맞아 전체적으로 퉁퉁 붓고 일그러진 얼굴이었으며 터진 입술에서는 계속 피가 흘렀는데, 출혈은 입술보다 치마에 묻은 것이 더 심했다. 곧바로 신고를 했다. 도착한 경찰은 주 경찰관, 후프 댄스 타운의 지역 경찰관, 그리고 보호구역 내 부족 경찰관 빈스 매드웨신, 이렇게 세 명. 조는 조금 후에 알게 되지만, 어머니가 성폭행을 당한 곳이 라운드 하우스 근방인데, 그곳이 매우 복잡한 소유관계로 얽힌 곳이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그곳이 선주민 보호구역이 아니라면 피의자가 누구인지 알더라도 당장 기소하거나 구속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범행을 당한 장소를 규명하는 것은 폭행 및 강간치상을 당한 어머니 쪽이 밝혀야 한다. 당장은 그걸 밝히는 것보다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가서 응급 수술을 받는 일이었다.

  한 종족, 부족, 가족 구성원 가운데 남성이 밖에 나가서 얻어 터지고 오는 것에 비하면, 여성이 폭행을 당하고 올 때 구성원의 분노 게이지는 한 백 배 정도 더 치솟는다고 한다. 오빠 장가드는 거에 비하면 누나 시집갈 때 훨씬 더 서운한 이치하고 비슷하단다. 아들 결혼식 때 눈물 짜는 엄마 못봤다. 딸 결혼식 때는 여럿 봤다. 그래서 이 가족의 남자 구성원 아빠 안톤 바질 쿠츠와 아들 안톤 바질 쿠츠 주니어, 스스로 ‘조’라고 이름을 짓고 그렇게 불리기 바라는 아들은 반드시 범인을 찾아내 보복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직업이 부족 판사. 아무리 가족 구성원이 폭행을 당했다고 해도 양심과 법을 이탈하는 방식으로 범인을 찾아내거나 보복할 수는 없는 형편. 아들은? 아버지에 비해 자유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수술을 받고 며칠만에 퇴원해 집에 돌아온 엄마는 극도의 공포 속에서 고치 속의 번데기처럼 침상을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 엄마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시내 저쪽에서 주유소를 하고 있는 화이티 삼촌의 아름다운 아내, ‘나’ 조의 숙모이자 세파에 찌든 금발의 전직 스트립 댄서 소냐가 키우고 있는 사나운 개 네 마리 가운데 나이들고 사나운 암컷 불테리어, 도베르만, 셰퍼드 잡종인 펄을 데리고 온다.

  이 사건 말고 화자 ‘나’ 조의 성장기도 작품 속 한 부분을 담당한다. 열세 살 소년 앞에 풍만하고 섬세하고 단호하게 둥근 젖가슴을 지닌 대단히 매력적이며 뇌쇄적이고 사람을 애태우는 백인 숙모 소냐를 향한 동경도 재미있거니와, 조의 친구들 잭 피스, 앵거스 캐시포, 그리고 절친 ‘캐피’라고 부르는 버질 라푸르네의 귀여운 일탈도 작품의 감초로 등장한다. 물론 단지 감초 역할만 하면 내가 독후감에 소개도 안 하겠지만. 이 가운데 여름방학을 맞아 선주민 보호구역에 가톨릭 선교 겸 지원활동을 온 백인 여학생이 캐피한테 홀딱 반해버린 일도 백미다. 한 살이 많아 열네 살인 캐피는 선교활동의 마지막 날을 기념하는 파티 도중에 드디어 백인 여학생을 눕히는 데 성공했고, 한 번 가지고 만족할 수 없어 성당의 지하 교리 교육장 카펫 위에서 일을 몇 번 더 치룬다. 그러나 여학생은 떠나가고, 둘의 사랑을 더욱 순결하게 간직하고자 하는 캐피는 중동 파병과 부상 경험이 있는 젊고 강건한 신부에게 고해하기로 결정을 해 진짜 그렇게 한다. 그건 좋은데, 하필이면 밝히지 않아도 괜찮을 거 같은 밀회 장소, 성당 지하의 교리 교육장을 실토하는 바람에 크게 열을 받은 젊은 신부가 알통이 불긋불긋한 팔뚝을 드러낸 채 캐피를 패 죽이려 고해실에서 뛰쳐나온다. 신부보다 한 발 더 빨리 도망나온 캐피, 이렇게 둘이 만들어내는 백주의 도주극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이건 읽어보셔야 알 듯.


  그래서 범인은 어떻게 되느냐고? 맞다. 당신 생각처럼 된다. 스토리가 이어지면서 선주민 가족과 이 가족을 둘러싼 사람들, 심지어 부족 경찰까지 범인이 누구인지 알게 되지만, 자신이 폭행당한 장소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는, 그곳을 거짓으로 증언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리하여 가족은 피의자이며 범인이 거의 확실한 백인 남자를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하는데, 결말은 당신 생각대로 흘러가기는 해도 단지 그렇다는 것뿐이다.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자 한다면 책을 읽어보셔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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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4-08-27 0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둘기 재앙>을 먼저 읽고 읽으면 더 좋을 거 같아요. 아메리카 선주민들이 처한 현실을 주제로 하지만 팔팔한 소년들, 육체파 백인 숙모 이야기가 웃길 거 같아요. ㅎㅎ

Falstaff 2024-08-27 18:34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저도 비둘기 먼저 읽었으면 더 좋았겠다, 생각했습니다.
소년들의 리비도 이야기는 사실 많이 소개가 되어 별 거 없지만, 그래도 읽을 때마다 재미있습니다. ㅋㅋㅋㅋㅋ

그레이스 2024-08-27 1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둘기재앙을 먼저 읽는것으로!

Falstaff 2024-08-27 19:24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저도 미리 알았으면 그렇게 했을 거 같습니다. 즐독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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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리가 사랑한 카페


  20년 전인 2004년, 최내경은 파리의 유명 카페와 고흐가 마지막 몇 달을 보낸 오베르 쉬르 우아즈 여행기 <파리 예술 카페 기행>을 내고, 2009년에 몽마르트르를 중심으로 카페와 음식점, 그리고 공연장 이야기 <몽마르트르를 걷다>를 낸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올해 두 책을 보완한 성격이 짙은 <파리가 사랑한 카페>를 다시 냈다. 

  카페Cafe라는 말의 어원이 무엇인지 모르는 나는, 그저 유럽에 커피가 들어왔고, 부르주아 귀족들이 마시기 시작했으며, 젊은이들조차 이에 중독 비슷한 매력을 느껴 바흐조차도 자신의 칸타타 BWV211에서 젊은 아가씨 리센으로 하여금 “아 커피 맛이 정말 기가 막혀! 수천번의 키스보다 더 달콤하고, 좋은 와인보다 더 부드러워. 나는 커피, 커피를 마셔야 해. 나를 즐겁게 해주려면 다른 거 말고 커피나 한 잔 따라 주세요.” 라고 노래하게 만든다. 이 칸타타를 작곡한 바흐가 돌잡이 상에서 자식 많이 낳겠다고 쌀 그릇을 손에 잡으며 겨우 처음 직립보행을 했던 1686년에, 이탈리아 사람 프란체스코가 파리 최초의, 세계 최초가 아니라 파리 최초의 카페 “프로코프”를 열었다. 이로써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에서는 떠돌이 유목민과 대상들이 모래 사막에 주저앉아 쏟아지는 별빛을 어깨에 진 채 걸쭉하게 타 마시던 커피가, 17세기 유럽으로 건너와, 거울로 벽을 장식하고 별빛 대신 커다란 샹들리에에서 고래 기름을 만든 촛불이 불타오르는 호화찬란한 실내공간에, 줄지어 들어선 대리석 테이블 위에 놀려지게 되었다.

  그곳을 드나들던 프랑스의 위대한 극작가들, 몰리에르는 일찍 죽어 구경하지 못했지만, 라신, 라퐁텐은 물론이거니와 당대의 계몽주의자였던 장 자크 루소, 몽테스키외, 드니 디드로 같은 양반들도 신민들을 계몽시키고 여유시간이 나면 프로코프 카페에 들르고는 했다 한다. 루소는 장 자크, 디드로는 드니, 근데 몽테스키외의 정식 이름은 도대체 뭐야? 나는 한 번 정도 들어본 것 같다. 그의 작품 <어느 페르시아인의 편지> 앞날개에 나온다. “샤를 루이 드 세콩다 몽테스키외.” 왜 엉뚱한 이야기에 열심이냐고? 내가 경애하는 독일 작가 율리 체가 쓴 <잠수 한계 시간>에서 나오는 건데, 주인공의 대학원 졸업 인터뷰에서 교수가 질문하기를 몽테스키외의 정확한 철자가 어떻게 되느냐는 거였다. 그래서 그이의 이름에 관심이 많았다. 살다 보면 그럴 수 있는 거니까 왈가왈부하지 말자. 참고로 Montesquieu. 잘난 척하고 싶어 썼다.


  아주 오래 전에 최내경의 <파리 예술카페 기행>을 당시 내가 밥 빌어먹던 회사의 사보에 소개한 적이 있다. 거기서 이렇게 이야기한 것이 기억난다.


  “책을 무작위로 들추어보니 한 문장에 거론된 인물만 해도, 베를렌, 프루스트, 지드, 생텍쥐베리, 발레리, 프레베르, 퐁즈, 크노, 헤밍웨이, 카뮈, 말로, 조르주 퐁피두, 지스카르 데스탱, 프랑수아 미테랑, 자크 시라크, 장 폴 벨몽도, 샤를 트레네, 잭 니콜슨, 미셀 모르간, 모두 합해서 열 네 명인데, 이런 문장은 카페 하나하나를 소개할 때마다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지라 그녀가 거명하는 사람들만 나열한다해도 원고지 스무 장은 너끈하게 채울 듯하는군요.

게다가 거명된 인물의 무게감이 그걸 읽는 사람을 압도합니다. 세상에나, 베르렌과 프루스트, 그리고 말로가 한 자리에 있다니. 그리고 사람들의 이름을 자세하게 보면 유럽의 다른 나라와 아메리카까지,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제외하고는 빠짐없이 대륙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니, 프랑스 파리의 예술카페라는 용광로 속에서 자기들의 문화를 다 녹인 다음, 그 결과물을 세계 곳곳에 전파한 그곳 카페의 힘, 그리고 카페가 전세계 백인 문화에 끼친 영향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그때 눈 여겨 본 카페가 물랭루즈에서 쇼를 하던 쉬잔 발라동의 손자녀들이 운영하는 카페 메종 로즈였다. 이 메종 로즈가 <몽마르트르를 걷다>에 이어 <파리가 사랑한 카페>에서도 등장한다. 위의 인용문에 이름을 올린 거물들과 비교하면 정말로 하찮은 계급, <목로주점>의 주인공인 제르베즈 아줌마 정도도 되지 않을 인물이 전직 대통령, 작가, 시인, 명배우들과 함께 거론되는 것이 새삼스럽기 마찬가지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유럽 문명과 문화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 오랜 전통과 깊이에 공감하는 분들이 유럽을, 프랑스를, 그리고 파리를 방문한다면 이 책을 가방 속에 넣고 틈틈이 꺼내 보며 파리를 위대한 도시가 되게 만드는데 한 몫을 한 유명 카페와 음식점을 찾아 식도락을 즐겨보는 것도 대단한 유혹일 터이다.




2. 파리 예술카페 기행


최내경이 또 프랑스에 다녀왔습니다. 혼자 간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이번엔 프랑스의 수도이자 세계 예술의 심장인 파리를 중심으로 다녀왔는데, 프랑스가 자랑하는 또 하나의 소프트, 파리를 중심으로 지난 역사상 숱한 예술가, 정치인, 배우, 가수 등을 불러 모아 서로 토론하고 사랑하고 이별하고 술 마시던 자리, 그들로 하여금 그냥 선술집이나 밥집이 아닌 프랑스 문화, 더 나아가 세계 문화의 특별한 코드를 만들어낸 카페에 들러 파리 구석구석을 걸어다니느라 피곤한 다리를 쉬고 허기진 위장을 달랜 기록을 책으로 만들었군요.

프랑스 문화, 가운데 그냥 대충 하나를 찍어 샹송을 이야기해볼까요?

샹소니에 중에서 무슨 특별한 기준이 아니라 그냥 퍼뜩 떠오르는 인물을 한 두 명만 얘기하자면 이브 몽탕, 그리고 조르쥬 무스타키. 이브 몽탕은 이태리 태생으로 프랑스로 건너가 노래를 하고 영화를 찍고 정치도 하고... 죠르주 무스타키 역시 그리스 태생으로 조국 보다는 프랑스에서 자신의 노래 세계를 활짝 핀 가수지요. 프랑스 문화에는 이렇듯 국경이 없습니다. 어느 문화권의 것이던 간에 자존심 센 자기의 문화라는 커다란 용광로 속에 녹여 기어이 프랑스 문화로 만들어내는 그 기이하고 블랙홀 같은 흡인력. 이방의 문화를 소재로 오히려 자신의 것을 더욱 살찌우는 프랑스의 오만스럽고 거염있는, 그러나 부럽기 짝이 없는 것들 가운데 파리 시내의 카페라는 장치가 있나봅니다.


최내경의 책 <파리 예술카페 기행>에서 그녀가 파리의 예술카페에 들러 추억하는 인물들의 면면은 가히 대단합니다.

책을 무작위로 들추어보니 한 문장에 거론된 인물만 해도, 베를렌, 프루스트, 지드, 생텍쥐베리, 발레리, 프레베르, 퐁즈, 크노, 헤밍웨이, 카뮈, 말로, 조르주 퐁피두, 지스카르 데스탱, 프랑수아 미테랑, 자크 시라크, 장 폴 벨몽도, 샤를 트레네, 잭 니콜슨, 미셀 모르간, 모두 합해서 열 네 명인데, 이런 문장은 카페 하나하나를 소개할 때마다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지라 그녀가 거명하는 사람들만 나열한다해도 원고지 스무 장은 너끈하게 채울 듯하는군요.

게다가 거명된 인물의 무게감이 그걸 읽는 사람을 압도합니다. 세상에나, 베르렌과 프루스트, 그리고 말로가 한 자리에 있다니. 그리고 사람들의 이름을 자세하게 보면 유럽의 다른 나라와 아메리카 까지,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제외하고는 빠짐없이 대륙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니, 프랑스 파리의 예술카페라는 용광로 속에서 자기들의 문화를 다 녹인 다음, 그 결과물을 세계 곳곳에 전파한 그곳 카페의 힘, 그리고 카페가 전세계 백인 문화에 끼친 영향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그 가운데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이렇게도 뻑적지근한 인물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던 무수한 예술카페가 아니라, 평생 사랑하고 좌절하고 배신당하고 빼앗기면서 19살에 낳은 아들 위트릴로과 함께, 아들의 친구와 사랑에 빠져 불행한 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쉬잔 발라동, 서커스 단의 곡마사 출신인, 당시 시각과 상대했던 인사들의 이름값에 비교한다면 비루하고 남루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는 발라동의 집을 개조한 카페 “메종 로즈”였습니다.

물론 몽마르트를 이야기하면서 쉬잔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지만, 무수한 쉬잔들을 생산해냈던 나폴레옹 3세의 퇴폐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한 그 시절, 몽마르트의 후미진 뒷골목에서 로트렉과 모딜리아니가 일본의 기모노를 입고 압생트를 마시며 쉬잔 발라동과 함께 아편에 몰두해야 했던 세기말의 로망을 최내경은 그들보다 조금 후세에 세기의 지성으로 찬사를 받았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와 같은 무게, 아니면 적어도 상당히 비슷한 무게로 다루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최내경의 파리 기행, 그것도 자칫하면 식도락 기행이라고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예술카페로 향한 걸음. 작가는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거위 간 요리와 타르타르 소스를 첨가한 스테이크, 크루아상, 위스키나 코냑을 넘어서는, 파리의 수많은 카페에서 작가는 미각과 더불어 무엇을 보고 듣고 만지고 느꼈을 겁니다. 그 “무엇”이 비행기 삯만 해도 수백만원이 넘는 파리로 날아가 대뇌에 깊이 각인하고 싶었던 것이었을 겁니다.

그녀는 예전 저작인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에서와는 달리 그 “무엇”에 관하여 확실한 단어로 설명합니다.


“지금도 그들은 카페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기도 하고, 토론을 하기도 헤어짐을 아쉬워하기도 한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 모두는 이 카페들을 꼭 한 번 둘러보길 바란다. 계획만 세운다면 누구든 가능하리라고 본다. 그러면 여러분 모두는 이전보다 시 공간이 훨씬 넓어진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잊지 못할 추억으로 떠올릴 그런 순간을 가지는 멋진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기분은 무척 행복할 것이다. 이 책으로 여러분 모두가 예술가와 문인들과 함께 한 멋진 여행이 되었길 바란다.”


최내경은 행복을 위해서 독자들에게 파리의 예술카페들을 소개했군요. 추억을, 그것도 세계적인 예술가와 문인들과 함께한 멋진 여행의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독자들에게 작가는 파리의 예술카페로의 여행을 권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지금 당장이 아니어도 좋고, 10년 이내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언젠가는 파리에, 그 카페에 들어 딱딱한 빵 한 조각에 커피 한 잔이라도 해보고 말리라, 하는 희망뿐이어도 작가는 우리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 가지고도 스스로 행복해할 것입니다.




3.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


어느새 가을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당신은 외롭지 않습니까. 당신 가슴 속 깊숙한 고독의 빈자리로 문득 황황한 바람이 불어오지는 않습니까. 어려운 시절, 거친 생활을 살아내느라 무수한 사람들 사이에 부대끼고 함부로 관계들을 만들어가면서도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는 사막을 바라보지는 않나요. 부모와 배우자, 그리고 정겨운 살붙이들이 아주 가끔은 전혀 낯선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하겠군요.

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가을에.

가끔은 길을 떠나고 싶습니다. 지구라는 별자리에 오직 당신만이 혼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때, 당신은 헤진 배낭을 메고 그저 길을 나서고싶어질 것입니다. 당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곳에서 지친 발걸음을 쉬고싶겠지요. 당신은 신발끈을 풀고 고단한 발바닥을 두드립니다. 그러다가 무거운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려봅니다. 저런, 그러고보니 외로운 당신을 품고있는 공기 속에서 위대했으나 고독했던 영혼들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군요.

당신은 행복합니다. 위대한 예술품을 만들어낸 고독한 영혼들이 당신과 함께하니까요.

그러나 정말로 자리를 박차고 길을 나설 수 있으면 대단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거나 부모를 잘 만난 사람이겠지요. 보통의 당신은 길 떠날 생각조차 못할 확률이 많습니다. 시간이 없고, 돈이 없는.... 하지만 언젠가 길을 떠나리라, 마치 비밀스런 에로스의 약속인 양 마음 한 쪽엔 그런 갈증을 이 가을에도 당신은 품고 있겠지요. 그 희망, 사실은 조금은 덧없는 그런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뒤 돌아보지 않고 베낭을 멜 희망이 있는 당신은 지금 불행하고, 그럴 희망을 갖지 않은 당신은 언제나 불행합니다.


그날을 기다리나요? 그렇다면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일탈의 그날을 위해 이 책을 소개합니다.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

프랑스.... 혹은 불란서를 소리내 발음해보십시오. 그것은 이미 당신에게 어떤 동경으로서의 보통명사입니다. 유럽의 중심, 세계 2위의 농산물 수출국이라는 지리부도적인 지식보다도 당신의 가슴 속에서 프랑스는 로제 마르탱 뒤 가르, 앙드레 말로 같은 작가, <암흑가의 두 사람>에서의 쟝 가뱅과 알랭 들롱의 우수 깊은 눈동자, 장-폴 고띠에, 크리스티앙 디오르 등의 패션 디자이너... 이런 소프트가 먼저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아니죠, 당신을 포함한 많은 우리 보통의 사람들은 의당 그러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몽마르트 언덕의 노천 카페에 몰려앉아있는 혁명가 레닌과 바쿠닌 같은 망명 이방인의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겠군요.

그런데 프랑스의 무수한 소프트 중에 프랑스를 프랑스답게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소프트는 무엇일까요. 루브르 박물관의 눈썹 없는 여인 <모나리자>를 위시한 미술품을 제일 윗자리에 놓지 않으면 많이 서운하리라 생각합니다.

책《고흐의 집을 아시나요?》는 그러나 고흐의 작품에 대한 설명서나 입문서가 아닙니다.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에서 고흐를 발견할 수 있는 페이지는 얼마 되지 않는군요. 그의 그림도 여섯 컷의 사진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 책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앞에서 얘기했듯, 어느날 갑자기 단행할 당신의 일탈, 그 여행길에 당신의 헤진 베낭 속에 담아갈 안내서입니다. 당신은 이 책과 함께 지난 세기와 지지난 세기에 가장 고독했고 우울했던 영혼들의 흔적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즉, 고흐의 작품을 보러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고흐가 자신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던 그 무서운 고독과 절망의 시절을 온전히 담아낸 다락방으로 당신의 발길을 옮길 수 있게하는 책이지요. 낡은 침대가 놓인 그 좁은 다락방에서 밤새도록 신음을 하던 고흐를 당신은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비뚤배뚤하게 원색으로 불안하게 그려놓은 오베르 교회, 위대한 그 그림을 볼 수 있게 안내하는 것이 아니고, 어느 천재에 의하여 불멸의 명화로 그려진 교회 건물을 당신은 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시간의 마모는 직접 고흐의 집을 찾아나선 나그네의 발길에 쓸쓸한 회한 만을 선사하기 십상입니다만, 고독했던 천재의 숨결마저 어느 한 구석에서 발견하기 기대난망이겠지만 굳이 그 집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신의 외로운 영혼을 위해서일 것입니다.

작가 최내경은 고흐가 최후를 보냈던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셋집을 비롯해서 베르디 오페라 <돈 카를로> 1막의 무대가 되는 퐁텐블로 숲 가의 밀레의 집과 아틀리에, 거장 다 빈치가 만년을 보낸 클로 뤼세, 프랑스 회화의 다른 큰 축을 이룬 남프랑스 지방, 그리고 파리를 대단원으로 해서 간결하게, 그렇습니다, 우리가 섣부른 기행문에서 흔히 읽을 수 있는 허접한 감상을 첨가하지 않고 담담히 그려내고 있습니다.


최내경의 글은 이렇듯 조금은 건조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아까운 지면을 빌어 소개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백에 대한 매력이지요. 작가는 고흐의 집으로 가는 길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면 어느어느 것이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 다음의 지면은 당신의 순서입니다. 최내경의 책을 헌 베낭에 넣고 남프랑스에서 다시 파리로 향하는 밤 열차를 탄 당신은 열차 객실에서 이방의 문자로 인쇄된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를 꺼내 그 빈 여백에 당신의 감상을 적어놓을 수 있습니다. 최내경은 남부에까지 가서 왜 엑상 프로방스의 세잔의 집엔 들러보지 않았을까...를 빈 자리에 쓸 수도 있고, 끝없이 펼쳐지는 남 프랑스의 들녘을 밤기차에서는 볼 수 없었다고 써놓아도 좋을 것입니다. 그건 당신의 몫이니까요.


당신 속의 외로운 영혼을 위하여, 어느날 문득 저질러질 일탈을 위하여 기쁘게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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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8-26 10:2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캬~ 정말 잘 쓰시네요. 그 내공이 그냥 생긴게 아니겠군요. 사보에 글을 쓰실 정도면! 그 사보 어떤 사본지 궁금하네요. 지금도 받고 계신가요? 암튼 이거 이달의 당선작될 것 같습니다. ㅎ

Falstaff 2024-08-26 14:41   좋아요 4 | URL
아이그, 쑥쓰럽게 왜 이러십니까. 알라딘 서재에 글 좋은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 거기에 제가 낄 수는 읎습지요. ㅎㅎㅎ 근데도 어깨는 으쓱으쓱 거리는 걸요. ㅋㅋㅋ
21세기 유동성 위기 국면을 지나면서 거의 대부분 회사의 종이 사보는 멸종됐을 겁니다. 인트라넷으로 소식지 비슷하게 명맥을 이어가는 게 대부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페넬로페 2024-08-26 15:1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의 말씀에 백퍼 찬성입니다.
폴스타프님
이런 여행기나 에세이의 리뷰도 너무 고급스러워요.
어깨 더 으쓱으쓱 하시길요.

Falstaff 2024-08-26 15:38   좋아요 3 | URL
윽. 이런 과찬의 말씀을.... 아, 진짠 줄 알잖아요. ㅋㅋㅋㅋ
좋습니다. 으쓱으쓱! ^^;;

다락방 2024-08-27 10: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 ㅑ ~ 너무 좋습니다, 폴스타프 님.
저는 [파리는 날마다 축제]를 읽고 그렇게나 화이트와인에 굴이 먹고 싶었더랬어요. ㅋㅋㅋㅋ 그래서 먹었는데 ㅋㅋㅋㅋㅋ 전 굴은 별로였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4-08-27 18:36   좋아요 1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화이트와인에 굴... 워낙 유명한 조합이지만 저도 굴의 니글니글한 입 안 감촉에는 오히려 20도 이상 독한 소주가 대빵이더라고요.
화이트와인에 오징어젓을 나쁘지 않게 드셔서 을매나 안심을 했는지 ㅋㅋㅋㅋㅋ
 
더러운 손 서문문고 108
사르트르 지음, 최성민 옮김 / 서문당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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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소설, 희곡 장르로는 마지막 사르트르가 될 것 같다. 간략하게 말해 이제 더 이상 사르트르를 읽을 것 같지 않다는 건데,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인 사르트르가 마땅하지 않아서는 아니고, 시, 소설, 희곡 장르 가운데 우리말로 번역 출판한 책 중에서 읽어보고 싶은 책이 더는 없다는 것뿐이다. 위키피디아는 사르트르를 프랑스의 “철학자, 극작가,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정치활동가, 전기작가, 문학평론가”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업적은 실존주의 철학을 공고히 한 철학 분야이며 다음이 극작과 소설이다. 나는 그의 소설에 만족해본 적이 없어 성인이 된 후 한 번도 사르트르를 좋아하지 않았다가 극작 <무덤 없는 주검>과 <존경할 만한 창부>를 읽은 후에, 이래서 사르트르, 사르트르 하는구나, 무릎을 쳤다. 이제 세 번째 극작품으로 <더러운 손>을 만족스럽게 읽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더 이상 나를 유혹하는 작품의 제목을 발견할 수 없다.

  <더러운 손>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조금 곤혹스럽다. 행간에는 확실하게 실존적 문제가 자리를 잡고 있는데, 그렇기는 한데, 이걸 실존주의적 해석으로 일관할 수도 없을 듯하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사르트르는 확실하게 좌파 공산주의자다. 오랜 세월 반공을 국시로 하는 국가에서 낳고 자라고 교육받은 우리나라 사람한테 공산주의자라고 하면 반감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동안 죽어도 반대하라고 교육받은 공산주의는 진정한 공산주의이기보다는 공산주의를 위한 하나 또는 하나로 결집된 소수의 당파를 의미하는 건 아닐까? 레닌-스탈린-마오-김으로 이어지는 교조적, 전체적, 독재적 볼셰비즘이나 볼셰비즘 비슷한 기형 잡탕 말이지. 이들이 주장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한 못된 두목Duce이 등장해 어떤 지구인보다 훨씬 더 부르주아적 생활을 유지하면서 전 국민을 프롤레타리아로 만들어 그들에게 야만적 독재권력을 행사한다는 의미 이상이 안 된다. 일찍이 이를 간파하고 길길이 침을 튀며 반대한 작가들도 많지 않은가 말이지. 대표적인 인물이 <동물농장>을 쓴 조지 오웰과 <레 망다랭>의 작가 시몬 보부아르. 그리고 “트로츠키 만세!” 농담 한 마디 했다가 젊은 세월 골로 간 루트비크 이야기 <농담>으로 데뷔한 쿤데라 아저씨도 절통하게 비웃어주었지 않은가 말이지.

  이리하여 <더러운 손>도 가상의 국가 일리리아에서 공산주의 당파끼리 서로 죽고 죽인 권력투쟁을 비판했다고 봐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실제로 이 희곡을 발표하고, 연극으로 만들어 무대에 올리자 반공 진영에서 열렬히 환호한 반면, 공산주의 진영에서 맹렬하게 공격을 했다 한다. 웃기는 표현이지만 “사상의 자유가 있는 반공 국가”였던 프랑스에서 1951년에 이를 영화로 만들어 상영에 들어가니까 명맥만 유지하던 프랑스 공산당은 오랜만에 의기투합, 영화를 상영하는 애먼 극장한테 폭파해버리겠다고 위협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후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1976년까지 영화를 상영하지도 않았고 연극 공연도 없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건 아니다. 어디 가서 써먹지 마시라.


  가상의 국가 (‘닐리리야’의 두음법칙 아님. 혼동 방지) 일리리아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 중이다. 처음에는 눈치를 보니 독일이 압도적으로 이길 것 같아 당시에 국가를 통치하던 섭정은 망설이지 않고 독일편을 들어 소련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니 일리리아는 두 나라 가운데 하나다. 헝가리 아니면 알바니아. 근데 섭정攝政이 나오는 걸 보니까 헝가리에 더 가깝다. 이 나라를 대표하는 정치 권력으로 세 집단이 있었다. 섭정을 따르는 폴 공의 친 파시스트 무리, 국민의 60퍼센트 정도가 지지하는 부르주아와 민족주의자의 지도자 카르스키, 그리고 공산주의를 대표하는 에드레르. 만일 국민의 지지를 수치로 할 수 있다면, 폴 공와 카르스키 연합이 80 이상, 공산당이 20 정도의 세력이다. 다만 문제는 전쟁이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독일이 점점 후퇴하고, 빈 곳을 소비에트 연맹이 점령하고 있다는 거. 이제 일리리아의 영토에 소련군이 진입해 들어오는 건 그야말로 시간 문제라는 거였다. 이 난국을 맞아 폴 공과 카르스키 당 대표는 과감하게 일리리아 공산당의 대표 에드레르를 방문하기에 이른다. 세 정치 당파가 연합하여 위원회를 만들어 난국을 타개해 나가자는 뻔한 이유를 대서. 그들은 공산당의 몫으로 위원회 총 12표 가운데 2표를 제시하고, 비록 소수당이긴 하지만 같은 공산국가인 소련이 일리리아로 진입해 들어오기 직전이라 에드레르는 콧방귀를 뀌며 대답한다. 위원회를 총 6표로 하고 이 가운데 3표를 공산당이 가져가야 하겠다고. 그런데 이 순간, 건물 벽에 폭음이 울리며 뭔가가 폭발한다. 이들을 암살하기 위한, 이들이라기보다 차라리 공산당 대표 에드레르 한 명을 제거하기 위해 던진 폭탄이었다. 같은 공산주의자가 던진.

  폭탄을 던진 사람은 공산주의자 올가 로람이었다. 불행하게도 에드레르는 손 끝 하나 다친 곳 없이 멀쩡하다. 이때 에드레르, 폴 공, 카르스키와 한 방에 있던 에드레르의 비서가 작품의 주인공 위고 바린. 공산당원이기는 하지만 저명한 사업가 아버지를 둔 부르주아 출신이며 인텔리겐치아다. 당시에 공산당 운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가명을 사용했는데, 위고는 하필이면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라는 이름으로 입당을 했다. 그러나 점점 많은 동료 당원들이 위고의 출신을 알게 되고, 머리는 있지만 실제 행동의 경험과 강단이 없다는 것에 위축되고는 하던 위고는 자기들의 하부 코뮌의 우두머리 루이에게, 혁명을 위해 에드레르를 자기 손으로 처단하겠다고 약속해 그의 비서로 들어간 거였다. 그래서? 죽였다. 아내 제시카의 속옷에 숨겨 몰래 지니고 들어간 권총이 에드레르의 머리통을 관통해 사망에 이르렀다. 이후 위고는 5년형을 받았고, 겨우 2년이 지난 다음에 사면이 되어 출감한 날, 곧바로 올가의 집으로 찾아온다. 그러나 이제 옛 하부 코뮌의 동지들에 의해 처단 대상이 된 위고를 죽이기 위해, 전에 자신이 암살한 에드레르의 경호원들이 에드레르를 죽이라고 지시한 루이의 명령을 받아 이제는 위고를 처단하려 올가의 집 문을 거칠게 두드린다.

  웬일로 미리 다 알려주느냐고? 흠. 이게 첫 장면이니까 그렇지. 극을 시작하기 전에 결말을 다 알려주고 내용을 확인해 나가는 플래시 백 형태의 작품이라서.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면 틀림없이 공산당 내 당파간 죽고 죽이는 더러운 권력투쟁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초점을 주인공 위고에게 맞추면 조금 달라진다. 부르주아 공산당원으로 출신성분에 관한 핸디캡을 지닌 인물. 다른 당원들은 철도 폭파나 요인 암살, 무기공장 사보타주 같은 화려한 전적이 있는 반면에 당의 사무실 직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 그것을 뛰어 넘기 위하여 보스 루이에게 에드레르 암살을 지원하는 위고.

  아내와 함께 위험지역 깊숙이 진입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암살 행위를 실천에 옮길 용기가 부족한 천생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 이를 옆에서 바라보기만 할 뿐인 아내 제시카가 오히려 실행을 요구하며 위험천만한 행동을 하려 한다. 그저 결심만 하고, 공상 속에서만 열심히 에드레르의 머리통에 총을 쏴댈 뿐인 남편을 보는 제시카는 한심하기가 짝이 없다. 권총을 꺼내는 것만 가지고도 위험을 느끼는 위고한테, 제시카는 권총을 위고의 남근으로 변형시키고, 발사하지 못하는 권총이 위고의 발기부전 증상이 두드러진 생식기로 전이한다. 즉 위고의 가장 기본적인 실존이 위태해지는 순간이다.

  사르트르는 당대 최고의 개인주의자였다. 이 작품 속에서 위고의 행위가 과연 공산당 내 정치적 결단이었는지, 아니면 스스로의 개인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사르트르는 내색하지 않는다. 읽는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다양하겠지만 나는 위고 개인의 실존에 관한 측면이 더 두드러지지 않았는가, 하는 의견에 한 표. 그러나 당신이 생각하는 것, 그게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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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8-23 04: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최내경, 《파리가 사랑한 카페》
화요일. 루이스 어드리크, <라운드 하우스>
목요일. 앤드루 포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금요일. 거페이, <봄바람을 기다리며>
 
히든 픽처스
제이슨 르쿨락 지음, 유소영 옮김 / 문학수첩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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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10월에 출간할 계획으로 쓰고 있는 작품을 포함해 세 편을 발표한/발표할 뉴저지 출생 작가.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 국문과, 우리 입장에선 영문과를 졸업하고 편집자 생활을 좀 하다가 가명으로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구글 검색해도 르쿨락에 관한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다. 필라델피아에서 오래 살았고, 지금도 가족과 많은 애완동물을 키우며 살고 있다고 한다.

  <히든 픽처스>는 매력적인 B급 소설이다. 아마존 식 분류법에 따르면 “미스터리 스릴러.” 오늘이 7월 16일. 이른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매스컴은 오늘 밤부터 내일 아침까지 폭우를 예보하고 있다. 요즘 날씨에 읽기 딱 좋은 소설. 모르기는 해도 독일의 그림 형제가 지은 이야기에 힌트를 받지 않았나 싶다. 아동용 동화로 각색해 널리 퍼진 버전 말고, 원래 그림(들)이 쓴 이야기. 예를 들어 신발이 발에 맞지 않으면 신발을 신기 위해서 발가락을 잘라버리는 거 같이. 그래서 <히든 픽처스>에 다섯 살 난 천진한 아이가 주인공(의 한 명)으로 등장하지만 제이슨 르쿨락이 자기 홈페이지에 딱 박아 놓았다. 이 책은 “성인용”이라고. 전혀 에로틱하지 않은 성인용. 약물 중독이 조금 나오고, 과하다고 볼 수는 없는 폭력/피폭력 장면에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르쿨락의 “성인용” 선언은 조금 과한 듯. 아니면 판매부수를 높이기 위한 꼼수이든가. 아동만 아니면 추천도서까지는 아니지만 굳이 읽지 말라고 금줄을 달 수준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저 그렇지도 않다. 매력적인 B급 소설이다. 그래 B급이다, 어쩔래! A나 B, 계급장 떼고 맞짱 한 번 떠 볼래? 웃통 벗어제칠 정도로. 한여름 밤을 위한 킬링 타임용으로 이만한 소설 찾기 쉽지 않다. 마지막 몸부림을 치는 늦여름이라도 읽기에 늦지는 않을 터.


  화자 ‘나’ 맬러리 퀸의 불행은 단순한 천골 피로골절에서 시작했다. 필라델피아 남부, 운동경기장 바로 위의 조금 못 사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 대개 그렇듯이 범죄율도 낮지 않은 셩크 스트리트에서 자란 맬러리는 센트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운동선수 특기생으로 전액 장학금을 받아 펜실베이니아 주립대에 진학할 예정인 육상선수였다. 그러나 마지막 졸업 학기 때 천골 피로골절, 즉 꼬리뼈에 미세하게 실금이 가서 몇 주 동안 달릴 수 없었고, 동생 베스는 자기 친구 첸구앙과 함께 한심한 놀이공원에 놀러가기로 엄마한테 허락을 받았다. 하필 토요일이었던 그날 엄마가 직장인 병원에서 특근을 해야 해, 엄마는 맬러리에게 베스와 첸구앙을 차로 실어다 주라고 똑 부러지게 “명령”을 하는 바람에 맬러리는 시합에 나간 팀원들을 응원하지도 못하게 되어 주둥이가 댓발 나온 상태로 동생을 태우고 고속도로에 올랐다. 토요일 아침이니 고속도로는 한가했고, 시합 때문에 마음이 바빴던 맬러리는 당연히 과속을 했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시합 결과를 알고 싶은 마음에 팀원한테 온 문자에 답신을 하기 위해 시선을 휴대전화로 돌렸고, 시선과 함께 일시적으로 주의력도 전화기에 집중되는 순간, 앞선 SUV 차량에 묶여 있던 산악자전거가 풀려나 도로에 떨어졌으며, 이를 피하기 위해 고속도로를 달리던 차들이 급하게 핸들을 틀었다. 맬러리가 운전하던 차도 이것들 가운데 한 대였다. 병원에서 의식을 찾았을 때 맬러리는 왼쪽 다리가 부러졌고, 갈비뼈 세 대에 금이 갔다. 

  바버라 킹솔버의 작품 <내 이름은 코퍼헤드>에서 보듯이 미국 의료체계는 부유하지 못한 자들에게 참혹하다. 2주 후 퇴원하는 맬러리한테 의사는 옥시코돈, 마약성 진통제의 상품명인 옥시콘틴을 처방하면서 “통증이 있을 때만 사용하라”는 단서를 달았다. 맬러리는 킹솔버의 코퍼헤드와 마찬가지로 생전 처음 경험하는 극심한 고통 때문에 빠른 속도로 옥시코돈에 중독되어갔다. 맬러리는 옥시코돈을 처방받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돈을 구했으며, 이 중에는, 입학하지 못한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의료센터에서 진행한 심리연구 프로젝트의 인간 마루타 자원도 포함되었다. 이 장면으로 작품은 시작한다. 19세의 맬러리는 연구소에서 대기하는 도중에 옥시콘틴 한 알을 입에 넣고 빨아먹다가 삼분의 일 남았을 때 손바닥에 뱉어 엄지로 으깬 다음에 분말 옥시콘틴을 코로 흡입하면서 자신을 진정시킨다. 어떻게 첫 실험이 끝나고 흰 가운을 입은 박사가 일주일 후에 두번째 실험을 제시해 시간당 50달러를 요구했지만, 쓰던 아이폰을 옥시콘틴 80mg 다섯 알에 팔아 연락을 받을 수 없을 거란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이런 상태의 맬러리. 그러나 다행스럽게 이후 곧바로 자기 발로 재활 시설에 걸어 들어갔고, 18개월의 프로그램을 수행했으며 이젠 스물한 살 먹은 여성으로 더 이상 알코올이나 마약에 손을 대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재활 12단계를 밟아 지금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 인생을 바치기로 결심을 할 찰나였다.

  이때 맬러리 앞에 오랫동안 단거리 육상 코치를 했으며 88 서울올림픽 때 선수단 코치를 했던 러셀이란 인물이 등장한다. 메스암페타민에 취해 운전하다가 옆집 이웃을 과실치사한 죄로 5년 형 수감 중 목사 안수를 받은 68세의 재활 도우미. 이 양반은 작품이 끝날 때까지 자신의 사생활보다 재활중인 피 도우미를 보살피는 데 전력과 전심을 다하는 선한 인물이다. 실제 생활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인물. 스스로 약물 중독에 빠진 전력이 있어서 그렇게 변모했을 것이다. 이 러셀의 도움으로 재활의 막바지에 이른 맬러리는 부르주아들의 집단 거주지인 뉴저지 스프링브룩에서도 가장 큰 저택 가운데 하나인 맥스웰 씨의 집에서 거주하며 매우 훌륭한 보수로 9월까지 육아 돌보미, 베이비시터로 일할 기회를 잡는다. 9월 이후에도 맥스웰 가족이 만족한다면 아들 테디를 위한 전담 고용인으로 일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버지니아 재향군인병원에서 심리치료 및 상담사로 근무하고 있는 캐롤라인과 필라델피아 중심가의 최고급 고층 빌딩에서 IT 관련 사업을 하는 테드 맥스웰 부부. 이들이 러셀 씨와 아는 사이라서, 해군 퇴역병이나 아프간 참전 군 같은 완전히 망가진 사람들을 전문으로 다루는 캐롤라인 씨의 이해심 깊은 선의로 재활치료를 거의 마친 약물중독 출신 가운데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지원자를 찾았던 터다. 이들 가족은 바르셀로나에서 최근에 귀국해 웅장하고 고전적인 빅토리아 풍의 3층 저택을 구입했는데, 이는 캐롤라인이 친정 부모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아서 가능했다. 저택 뒤에 곧바로 깊은 숲이 펼쳐져 밤이 되면 토끼 같은 설치류부터 크고 작은 사슴까지 마당을 어슬렁거리는 천혜의 자연환경. 셩크 스트리트 출신인 맬러니는 이 집과 캐롤라인, 그리고 다섯 살 난 아들 테디가 너무 좋다. 그러나 당신 같으면 남들보다 훨씬 후한 임금을 주는 입주 베이비시터로 아무리 재활의 막바지에 이르렀다지만 약물 중독의 경험이 있는 사람한테 흔쾌히 맡길 수 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시라. 아빠 테드도 그랬다. 그들은 말한다. 당신을 선택하는 건 너무 위험한 도박인 거 같다고. 그러자 맬러리는 러셀이 건네준 비장의 방어 무기를 꺼낼 수밖에. 마약 복용 여부를 시험하는 다섯 개 들이 키트를 내민다. 아마존에서 하나에 1달러 하는 검사기. 원하는 날짜에 무작위 검사를 받겠다고. 테드는 말한다. 당신은 좋은 사람 같아요. 진심으로 행운을 빕니다. 하지만 난 매주 컵에 소변을 볼 필요가 없는 육아도우미를 고르고 싶어요. 이해하시겠지요?

  걱정 마시라. 이 집에 들어가야 소설이 진행되니까. 천사 같은 캐롤라인, 테디의 엄마가 나이든 남편 테드를 설득해 맬러니는 이 집의 육아도우미로 들어가고, 창고로 쓰던 별채를 깨끗하게 치운 독채를 거실로 삼았으며, 천사같이 귀엽고 착하고, 그림도 잘 그리는 다섯 살 난 테디와 좋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입주 전에는 지독하게 잘난 척하는 댄디 밥맛인 줄 알았던 아빠 테드도, 막상 입주를 하고 함께 생활해야 하는 환경을 만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세상에 그렇게 인간적이고 부드럽고, 신사적일 수가. 그러나 딱 하나 마음에 꺼림칙한 것이 있었으니 테디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유령. 이게 ‘나’ 맬러니에게 골치거리를 안겨주는 유일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테디의 상상 속의 단짝인 유령, ‘애냐’였다. 테디에게 맬러니의 지시를 따르지 말라고 옆에서 부추기는 짜증스러운 습관의 유령. 애냐는 테디의 침대 밑에서 살며 예를 들어 지저분한 옷가지는 빨래 바구니에 넣어야 한다거나, 붉은 고기가 든 햄버거 보다는 두부와 흰 밥을 먹어야 한다는 자잘한 규칙을 안 지켜도 된다고 속살거리고 있었다. 맬러니는 당연히 의심한다. 어리지만 어려서 어린아이다운 사악함으로, 유령 애냐를 핑계 삼아 자기 뜻대로 하려는 거라고. 자기 생각을 엄마 캐롤라인에게 말했더니, 엄마도 맬러니의 생각에 동의하면서, 끈기있게 기다리면 문제는 저절로 사라지지 않겠느냐고, 정신의학 전문의다운 소견을 개진한다.

  그런데, 왼손잡이 테디는 어느새 오른손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다섯 살 난 아이의 단순한 그림에서 점점 전문화가 같은 드로잉으로 진화하더니, 그림 속에 무언가 메시지를 전하려 시도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어떻게 되었을까? 21세기에 웬 유령 타령?


  B급 소설도 이 정도면 예술이다. 이렇게 재미있을까? B급 소설의 특징은 읽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내용을 모두 잊는 경우가 많다는 거였는데, 이 책 <히든 픽처스>는 안 그럴 거 같다. 그림 안에 뭔가가 숨겨 있거든. 원래 숨겨있던 걸 발견하면 기억이 오래 가는 법이거든. 여름의 막바지. 당신도 좋은 피서를 경험하실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웬만하면 가족들 잠든 밤에 읽으시라. 오소소 소름 돋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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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8-22 0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점은 네 개 반. 다섯 개는 좀 과하다.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진리를 따라가자.

coolcat329 2024-08-22 05: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샀어요. 매력적인 B급 소설이라니 기대가 됩니다.

근데 글을 오전 4시에 쓰셨네요. 일찍 주무시나봐요.

Falstaff 2024-08-22 07:08   좋아요 1 | URL
여름 가기 전에 얼른 읽으셔요! ㅎㅎㅎ 납량물입니다.
어제 오랜만에 꽐라가 되어 좀 일찍 잤습니다. ^^ 더운 데 무슨 짓인지...ㅠㅠ

stella.K 2024-08-22 1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님은 한 달 전에 리뷰를 쓰시나봐요. 가끔 그런 리뷰가 있더라구요. 대단하세요. 저는 한 편의 리뷰를 한 달 가까이 붙들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ᆢㅋㅋ
역시 여름은 납량물이죠. 소설이든 드라마든. 저는 야한 사진관이란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는데 원래 본방은 지난 봄에 했나 그랬던 것 같습니다. 으시시한 호러물인데 괜찮은 것 같더군요.
이 책 지난 5월에 나왔네요. 좀 된 소설인 줄 알았는데. 기억하겠슴다.^^

Falstaff 2024-08-22 16:38   좋아요 1 | URL
7월엔 세 권짜리 <삶과 운명>이 있고, 8월 초엔 두꺼운 하인리히 만 <충복>을 읽을 예정이어서 미리미리 속도를 좀 냈었습지요. ㅎㅎㅎ

다락방 2024-08-22 1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후훗 이 책 진작 사놓은 저를 칭찬합니다. 너무 기대되네요. 지금 읽는 책들 다 읽으면 바로 시작해야겠어요. 슝-

잠자냥 2024-08-22 10:25   좋아요 0 | URL
나도!!!😤

다락방 2024-08-22 10:27   좋아요 0 | URL
지금 읽는 책이 여러권에 두껍기도 한게 함정.. 🙄

Falstaff 2024-08-22 16:39   좋아요 1 | URL
죽여주는 킬링 타임. 더위 가기 전에 읽으시면 좋을 텐데요.

잠자냥 2024-08-22 16:58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요즘 날씨보니까 9월에도 30도 넘을 거 같아서 그때 읽어도 되겠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
 
내 식탁 위의 개
클로디 윈징게르 지음, 김미정 옮김 / 민음사 / 2023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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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에 페미나 상을 받았다고 해서 관심 솟아 읽어봤다. 작가 이름이 “클로디 윈징게르Claudie Hunzinger”라니 혹시 시댁이 몽골이나 훈족 같은 오랑캐 출신인가 잠깐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랬더니 흥미로운 인생을 산 사람이다. 70대에 이르러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동프랑스 산악지역에서 잠깐 교사 생활을 하다가 남편 프란시스를 만나 알자스 산골로 들어가 양을 치며 60년을 살았다. 딸, 아들 하나씩 두었으며, 아들 로빈은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2022년에 페미나 상을 먹은 <내 식탁 위의 개>를 읽어보면 1940년생인 작가가 여든이 넘어 쓴 작품으로, 노년의 작가가 쓴 작품이 대개 그렇듯이 실제로 자신이 살고 있는 생활을 자잘하게 묘사하고 있다. 책 속의 노부부는 저 벌판의 숨어있는 빙퇴석 지역에 홀로 서 있는 낡은 집에 사는데, 12미터 길이의 통으로 된 복층 구조의 단층집이다. 쉽게 말하자면 다락방이 있는 단층집 정도. 남편 그리그(‘구두쇠’라는 의미)는 이 다락방에 구축한 자기만의 터전에서 산다. 활자 중독 같다. 책이 워낙 많아 빽빽하게 쌓아놓는 바람에 창문까지 모두 가려버렸고, 청소도 거의 하지 않아 살금살금 걸어도 종이먼지가 풀풀 휘날릴 지경이다. 가히 책을 보관하는 저장고라 할 만하다. 아내인 화자 소피는 숲 속의 집 “부아바니”의 주거지역 가운데 초원이 바라다 보이는 창문을 가진 가장 좋은 곳에 생태계를 이루었다. 소피는 2년 전에 <동물들>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발표하여 나름대로 생태작가로 이름을 높였지만, 프랑스에서는 영미문학에 비해 이 분야는 변두리, 변방문학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화자 ‘나’는 변방의 소설가이다. 여든을 훌쩍 넘긴 지금도 그리그는 거의 잠시도 쉬지 않고 하여간 뭔가를 읽고 있다. 하다못해 신문이라도. 그렇게 많은 책이 쌓여 있건만 늘 택배로 새로운 책을 받아보는 일상. 근데 내가 정말 궁금한 건, 60년이 넘게 양을 치고 살았다며, 그리그는 한 번도 취직을 해본 적도 없고 열라 노동해본 적도 없다며, 근데 다 늙어서까지 어떻게 그런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그리그나 소피의 부모가 꽤 부유했던 건 아닐까? 혹시 모르지, 젊은 시절에 연달아 로또에 꽈광, 두어번 얻어 터졌는지도. 별걸 가지고 다 시비라고? 부러워서 그런다, 부러워서.


  식탁 위의 개. 읽기 전에 잠깐 헛갈렸다. 식탁 위에 개가 올라올 수 있는 방법? 버르장머리 없는 개가 훌쩍 식탁 위에 뛰어오른 경우. 개엄마, 개아빠들이 울룰루 배고파쪄 어쩌고 저쩌고 식탁 위에 올려놓고 미디엄 레어 안심 스테이크 잘라 먹이는 경우. 그리고 개가 그릇에 담겨 식탁에 차려진 경우 말고 또 있을까? 그러면/아니라면 이 책의 제목은 어떤 경우일까? 당신은 헛갈리지 않아? 책을 읽어보면 끝날 때까지 문제의 개 “예스”라고 이름지은 양치기 종의 개는 한 번도 식탁 위에 올라가거나 올려지지 않는다. 하여간 그렇다. 그렇다는 말이다.

  작가 클로디 윈징게르는 2019년에 생태소설 <위대한 사슴들>을 출간한 적 있는데, 이것을 이 작품의 화자 ‘나’ 소피가 2년 전에 생태소설 <짐승들>이란 소설을 발표해, 리옹에서 열리는 생태문학에 관한 토론회에 남성 작가 두 명과 더불어 초청을 받는 것으로 변주했다. 이미 여든 살이 넘은 소피-그리그 부부는 자신들의 집에 “부아바니” 추방당한 숲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어주고, 그곳을 벗어나는 일이 그렇게 즐겁지 않다. 하다못해 식료품을 사기 위해서도 SUV 차량을 타고 한 시간을 운전해야 하는 터라 한 번에 겨울을 날 만큼의 통조림을 싣고 오는 정도이다. 하여간.

  리옹으로 출발하기 전날. 아직 밤이 오지 않은 저녁. 온갖 서글픈 세상사에서 추방당한 것 같은 초원의 끄트머리에 있는 낡은 집. 농사를 짓는 광활한 초원과 방목장, 그리고 근사한 숲으로 싸인 공터에 거대한 빙퇴석 지대가 있으며, 이 지대 아래의 또다른 초원에 들어선 집, 오랫동안 방치된 높이가 낮고 자그마한 목골 연와조 건물과 건물에 딸린 채소밭. 그리고 노부부. 그림이다, 그림. 죄 많은 세상에서 내쫓긴 자칭 추방자는 이 잊힌 집과 초원 63아르, 약 2천평의 대지를 구입해 살기 시작한 것이 3년 전. 원래 남편 그리그는 책을 읽는 일 말고 다른 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소피도 이제는 손에 기형이 와서 그렇게 즐긴 정원 가꾸기도 포기한 지 오래다. 그래도 집 주변엔 여러가지 꽃들이 자잘하게 피기를 그치지 않았다. 한 편엔 씨앗이 맺힌 디기탈리스가 있었는데, 디기탈리스가 모여 있는 무더기 아래 뭔가 눈에 띄었다. 틀림없는 도망자. 꼬질꼬질한 회색 털뭉치. 굶주려 기진맥진해 소피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커다란 밤색 눈동자의 개.

  소피는 등지고 있던 현관을 비켜 옆으로 서는 것으로 개에게 집으로 들어올 것을 권유했다. “철저히 고독한 그 모습이 너무 우아”해서. 노부부는 양치기 개 종種이 분명한 이 도망자에게 물과 먹을 것을 주고 관찰했다. 몸에 진드기가 적지 않게 붙어 있었으며, 누군가의 발길에 여러 번 거세게 걷어차인 것이 분명하게 털 아래 뱃가죽은 시커멓게 멍들었다. 게다가 암컷인 이 개의 생식기는 처참하게 찢겨 진물과 피가 엉겨 있었다. 작가는 이 모습을 이렇게 말한다.

  “동물을 학대하고 성폭행하는 건 처벌받아야 할 중범죄야.”

  이 말을 들은 ‘까마득한 원시 시대에서 온 듯한 그리그’는 대답한다.

  “늘 일어나는 일이잖아.”

  이 대사가 17페이지. 책을 더 읽어? 말어? 작가 클로디 윈징게르는 어떤 한 “남성”이 명백하게 수간을 저질렀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수간이 있었건 없었건, 이 단어를 듣는 것 하나만 가지고 나는 소화기 적 반발로 위산이 역류하려는 것을 감각한다. 지금 독후감을 쓰는 아침에도 같은 증상이 생기려 한다.

  소피가 사랑해 마지않는 ‘예스’라는 이름의 개가 왜 걷어차여 배에 심하게 멍이 들었을까? 사람은 생각보다 잔인하다. 즐겁기 위하여 다른 목숨을 괴롭히고, 학대하고, 죽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포유류. 크고 작은 이유가 있었든, 아니면 재미를 위해서 틀림없이 어느 인간이 예스의 배를 몇 차례 걷어찼고, 생식기가 찢어지는 참혹한 상처를 냈다. 수십년, 어쩌면 한 세기 전, 이미 돌아간 내 할머니가 어린 시절에 잠자리를 잡아 배 아래부분을 잘라버리고 그곳에 풀줄기를 꽂아 다시 하늘로 날리며 시집 보내는 거라고 했듯이. 소피와 그리그, 그리고 클로디 윈징게르는 개의 생식기에 심한 상처가 난 것을 보고, 어떤 증거로 성폭행이라 확정했으며, 그 행위를 인간에 대한 소아성폭행과 연관지었을까?

  음식을 먹고 치료를 받은 개 예스는 그러나 떠났다. 소피가 리옹에서 별로 의미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생태문학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자 다시 돌아왔고, 소피가 목욕을 시키고 꼼꼼하게 진드기를 잡아준 후에 함께 살기 시작했다. 소피, 그리그, 예스. 이렇게 세 생명체가 가로 세로 각 2미터짜리 대형 침대에 함께 누워.


  과한 동물주의 책은 읽기 불편하다. 226~228쪽의 내용을 소개한다. 예스는 양치기 개. 당연히 보통 이상의 체구를 가지고 있으며, 무리에서 떨어진 양을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몰기 위해 양의 뒤꿈치를 가볍게 물려고 하는 습성을 “인위적으로, 인간에 의하여” 물려받았다.

  어느 날, 예스가 좋아서 그러는 것처럼 지나가던 등산객 커플을 따라가더니, 엄청나게 짖으면서 그 사람의 발꿈치를 물 기세로 달려들었다. 고삐 풀린 중대형 개가 어떤 모습인지 짐작하시리라. 소피가 아무리 불러도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예스는 그들을 향하여 튀어 나갔다. 등산용 스틱을 들고 선글라스와 챙 달린 모자를 쓴 혼비백산한 등산객들을 쫓아. 너무 멀리 가버려서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늙은 소피가 할 수 있는 한 제일 빠른 걸음으로 도착했을 때, 여자는 도요타 야리스에 올라타 있었고, 굳이 “그 여자의 애인”이라고 지칭하는 남자는 차 밖에서 한 손으로 열려 있는 트렁크 뚜껑을 잡고 있었는데, 트렁크 안에서 공포에 떠는 예스를 윽박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소피는 남자에게 겁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노인네가 나를 개보다 더 갈기갈기 찢어 놓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납게. 그랬더니 남자는 “악의에 차서” ‘나’ 소피를 비난했다. 개를 키우려면 통제를 잘 하라고. 이 미친 개를 브리가드 베르트 단속반으로 보내야 한다고. 그래서 고소장을 쓰는 데 필요할 거 같아 소피는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었단다.

  젊고 바쁜 커플이 오랜만에 어렵게 시간을 내 등산하려고 먼 길을 왔더니 난데없이 큼지막한 개가 마구 짖으면서 고삐 풀린 것처럼 발꿈치를 물려고 막 달려오면, 그곳이 난생 처음 가본 장소인데다가 사방 십리에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어떤 마음이 드는 게 정상이었을까? 경악과 공포 아니었을까? 여자가 공포에 휩싸이는 걸 본 남자는 갑자기 아드레날린을 분비하기 시작했고, 지팡이를 휘둘러 미친 개, 예스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지만, 암만 생각해봐도 이런 개새끼는 단속반에 보내 살처리 하는 것이 만인의 행복을 위하는 길이어서 차 트렁크에 싣고 가려 했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피해 남녀의 입장이다. 소피, 그리그, 못된 늙은이인 작가 클로디 윈징게르는 이들, “사람” 혹은 피해자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등산 스틱을 들고 선글라스를 낀 커플이 반쯤 미친 상태이다. 읽는 사람도 설핏설핏 따라가다보면 작가의 의도에 설득당하기 마련이다. 그게 글의 힘이니까. 주차장에서 이런 꼴을 당한 젊은 등산객을 만났으면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정상적인 인간 아냐? 아니면, 적어도, 차라리, 요즘 유행하듯이:

  “놀라셨어요? 괜찮아요. 우리 개는 안 무는데 괜히 지랄하셨네요.” 하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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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4-08-20 1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도서관에서 늘 눈에 띄어 알고는 있었는데 이런 내용이었군요.
내용으로 보건대 개를 사람과 동등하게 생각하고 식탁에서 같이 식사한다는 뜻 같습니다.
저도 등산객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네요. 미안하다는 말도 안하고 저렇게 동물학대했다고 적반하장으로 나오다니. 동물을 대변하는 건 좋으나 저 상황은 좀 나쁘네요.

Falstaff 2024-08-20 18:22   좋아요 0 | URL
식탁의 개, 그런 의미일 수 있겠습니다. 좋네요. ^^
동물주의... 제 생각만 얘기했습니다. 그냥 의견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요 뭐. 흐흐

다섯 2024-08-20 1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독서의 즐거움을 풍성하게 해 주리라 생각합니다.

Falstaff 2024-08-20 18:22   좋아요 0 | URL
좋게 생각해주셔서 고맙습니다.